「3.19. 진우연」
점점 오리무중이 되어 간다. 저 숫자는 뭘까? 그림을 그린 날짜는 3월이 아니었다. <해피 버스데이>가 제목이니 생일을 적은 건가? 아닌데. 우연의 생일은 3월 19일이 아니라 6월 9일이다.
이원은 눈썹을 찡그리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잡으려 애를 썼다. 순간 홍연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전무님. 그림 위에 펄을 뿌려 놓은 것 같지 않습니까? 이쪽 부분이 좀 하얗고 밝은 느낌이 납니다.”
역시 전직 큐레이터의 눈이 날카롭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게 뿌려 놓은 이유까지는 알 수 없었다. 풍경화에 반짝임 효과를 주고 싶었던 걸까? 가까이 다가가 그림을 자세히 본 이원은 그 무수히 반짝이는 흰 점들이 반짝이 가루를 뿌린 것이 아니라 펄이 들어간 흰색 물감으로 먼지만큼이나 작은 점을 일일이 찍어서 그린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건.”
한번 인식하니, 화면 일부를 채우고 있는 하얀 가루의 흐름이 한눈에 들어온다. 가루는 위에서, 정확히 말하면 우연의 손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듯했다. 하얀 가루는 바람을 타고 나무와 꽃과 풀 사이를 휘저으며 허공을 유영하는 중이다.
순간, 이원의 머릿속으로 한 문장이 번개처럼 내리꽂힌다.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창세기 3장 19절. 재의 수요일, 이런, 맙소사. 이원은 드디어 그림의 정체를 깨닫게 되었다.
그곳은 우연의 아버지를 수목장한 양평의 장례 공원이었다. 그림 속의 우연은 지금 아버지의 분골을 나무에, 허공에 휘휘 흩뿌리는 중이었다. 가루는 허공에서 춤추듯 흩어지고, 풀과 꽃과 나무, 산과 구름, 태양, 그림자까지 모두 기뻐서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목구멍에서 쥐어짜는 듯한, 축축하게 젖은 목소리가 겹쳐진다.
‘아빠 장례식 날 ……관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싶으면 어떡하죠?’
‘그러고 싶어?’
‘그럴 것 같아요…….’
이원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림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제 이 독특한 광채로 인해 명징해진다.
눈부시게 반짝이는 아버지의 뼛가루를 투과해 그려진 봄의 풍경은 생명력이 폭발하는 환희 그 자체였다. 그 눈부심으로 인해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해피 버스데이, 그녀는 자신이 새로 삶을 얻은 그 순간을 이런 형태로 자축하고 있던 거였다.
……나는 너에게 뭐라고 해야 할까.
‘아버지가 어떤 짓을 했든, 자식은 아버지의 죽음을 기뻐해서는 안 된다.’라는,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도리와 명제마저도 우연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쩌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녀와 아버지의 삶은 제로섬의 형태였기 때문에.
아버지가 죽지 않았으면 우연이 죽었을 것이다. 한국에 존재하는 수많은 우연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아버지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니, 죽을 때까지 자유로워지지 못한다. 우연을 아버지에게서 떼어 내기 위해 가정 폭력 피해자들의 삶에 대해 알아본 결과는 그랬다.
법과 공권력은 그들을 보호하지 못했다. 가장이자 친부인 가해자에게 법은 너무나도 우호적이어서 정상 참작도 많고 금고형이 떨어지는 경우는 극히 적었으며 형기마저 극단적으로 짧았다.
무엇보다 출소 후, 피해자에 대한 보호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신고한 피해자들을 죽으라고 방치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숨어 살아도 개인 정보는 너무 쉽게 털렸다. 그들은 평생 숨 막히는 공포에 시달리며 도망 다녀야 했다. 사회에서 완전히 단절된 상태로 숨어 살지 않는 한 그 공포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었다. 극단적인 경제적 궁핍을 감수해야 하는 것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였다. 피해자들의 악에 받친 반항은 오히려 정상 참작이 쉽게 되지 않았다.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진우연이 공포에서 벗어나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조건은 가해자의 죽음뿐이었지만, 모두가 그것을 알고 있고 간절히 바라고 있지만, 누구도 그것을 입 밖으로 내서 말하지 못했다. 그것을 입 밖에 내서 말하는 순간, 세상 사람들은 그들에게 일제히 돌을 던질 것이기 때문에.
사회는 가해자 대신 피해자들에게 돌을 던지는 데 너무 익숙했고, ‘강자의 권리’로 인한 피해보다 ‘약자의 도리’에서 어긋나는 일에 더 무자비한 잣대를 들이댔다. 사회의 잣대는 부조리하기 짝이 없었다. 알베르 카뮈도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어머니의 장례식에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고.
이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작은 연인은 생각보다 용감하고 단단했다. 그 모든 것을 알고도, 위선을 부려 슬퍼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나는 이길 수 없다, 최대한 도망칠 것이다, 라고 울부짖던 아이였지만, 결국 새로 얻은 삶을 기꺼이 기뻐하고 감사하며 누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것이 우연이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인 모습이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딛고 일어나 새로운 삶을 맞아들인 방식이었다. 그래서 우연은 이원이 다시 찾아갔을 때, 그렇게 놀랍게 달라진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었던 모양이다.
이 그림의 의미는, 나와 너 말고는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도.
그리고 누군가 알아차린다 해도, 결코 너를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너를 비난할 자격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박, 사박사박, 누군가 뒤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강 관장이 관람객들을 이끌고 옆방으로 가 버리는 통에, 우연의 그림 앞은 잠시 한적해졌다. 이원은 여전히 그림을 보고 있고, 우연은 그의 옆에 와서 얌전히 선다.
말없이 그림을 보던 우연이 고개를 기울여 이원의 팔에 툭 기댄다.
“에이 심심해. 테이프 자를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올 줄 알았으면 난 안 와도 됐을 텐데.”
“왜? 여기 안 오고 어디 가게? 소개팅 나가서 맛있는 거 얻어먹으려고?”
이원은 입을 비죽이며 말했다. 아까 우연이 도발하고 콕콕 찔러 댔던 게 꽁하니 남아 있었다. 우연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요. 아주 손해가 막심했다니까요. 그러니까 아저씨가 대신 맛있는 것 사 주시고 소개팅도 한 건 해 주셔야 해요.”
이원은 미간을 조금 구기며 말을 되받았다.
“음……, 소개팅이라. 괜찮은 사람이 하나 있긴 한데.”
“어떤 사람이요? 일단 제가 외모를 좀 보는데.”
“일단, 얼굴은 괜찮……. 나쁘진 않아. 키도 크고. 187 정도 돼. 몸도 나름 건강하고 몸매도 비율이 나쁘지 않아. 학벌도 나쁘지 않고.”
우연의 입이 살짝 벌어지는 게 보인다. 하지만 잠시 후 시큰둥한 얼굴로 다시 묻는다.
“음……, 또요?”
“비혼주의자고 아이 생각도 없대.”
우연의 코끝이 씰룩씰룩한다. 하지만 별다른 내색도 없이 통, 되받는다.
“그건 괜찮네요. 또요?”
“집도 있고, 차도 있고, 우리나라 50대 기업에 다녀. 연봉도 많고. 올해 서른여섯이야.”
“우와, 서른여섯이면 완전히 중년이잖아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40대까지는 중년 아니라고 대한민국 헌법에 정해져 있어.”
이원은 펑, 하고 튀어 나가려는 목소리를 간신히 누르고 차분하게 말했다.
“그리고 네 그림을 아주 좋아하는 컬렉터야. 그림 팔러 가면 분명 잘 사 줄 거야. 바가지 좀 씌워도 어지간하면 다 사 줄걸?”
“아저씨. 어떤 남잔지 몰라도 호구 중의 상호구가 되겠다는 말을 그렇게 자랑스럽게 할 건 없잖아요.”
“호의와 호구는 다른 거야. 하늘하고 땅만큼이나 다르지.”
“그런데 이상하네요. 그렇게 좋은 조건의 사나이가 왜 여전히 혼자인지 모르겠네요? 어디에 무슨 결함이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럴 리가 있어? 성격도 젠틀하고 매너 좋아. 다정하고 로맨틱하고 스윗하지.”
이제 우연은 인정사정없이 코웃음을 친다.
“그거 말고요. 제일 결정적이고 중요한 정보가 안 나왔잖아요.”
“결정적인 거? 어떤 거?”
“야간 능력이 제일 중요한 거 아닌가요? 밤일은 어떻대요?”
우연의 공격에 이원은 단번에 수세에 몰렸다.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고 사방을 둘러본 그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도 목소리를 한껏 낮춰 대답했다.
“그, 그게, 개인마다 기준은 다…… 다르겠지만, 못하지는 않는 것 같아.”
뭐가 어째?
우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아저씨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는 모르는 척, 못 본 척, 그림만 들여다보고 있다. 저거 가소로운 겸양일까? 아니면 정말 자기가 어떤 수준인지 몰라서 저러는 걸까? 물론 어느 쪽이든 도저히 그냥 넘길 수는 없는 발언이었다.
“못하지는 않는 정도면 곤란한데요? 확실치는 않지만 제가 기분에 따라 좀 심하게 밝힐 수도 있는데. 그때는 애인이 엄청 분발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죠.”
“어, 음…… 노력하면 하루에 일고여덟 번 정도까지는 가능할 것 같아.”
푸핫, 우연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아저씨가 천천히 몸을 돌린다. 눈가가 불그레하긴 했지만, 여전히 조각처럼 아름답고 수려한 얼굴이 반역광으로 드러났다. 그는 웃고 있었다. 자신이 그린 초상화 속의 얼굴과 똑같은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일고여덟 번이면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그럼 오늘 소개팅 한번 해 볼까요?”
우연은 말을 하며 손을 내밀었다. 이원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손을 잡았다. 화가와 모델, 혹은 화가와 미술관의 주인이 나란히 서서 손을 잡고 있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지 알고 있었지만, 이 순간은 이 그림 앞에서 함께 손을 잡아야만 할 것 같았다, 운명적으로 정해진 것처럼.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나란히 서서 눈앞의 을 바라보았다.
기시감이 느껴진다. 많은 사람이 좌우로 흐르듯 지나가고, 두 사람만의 시간은 따로, 느릿하게 혹은 빠르게 흘렀다. 두 사람만 존재하는 시공에서, 우연이 말했다.
“아저씨.”
“응.”
“나, 그래도 잘 살았죠?”
이원은 잠시 숨을 멈췄다. 가슴이 막혀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우연은 조용히, 맑게 웃으며 소리 없이 다시 묻는다.
……나, 잘 살았죠?
물론, 고통을 꿋꿋이 이겨 내서 자랑스럽게 타인의 귀감이 되지는 못했어요. 도망치고, 외면하고, 납작 엎드리고, 비굴하게 숨어 울면서 버티기만 했어요. 그래도 아저씨, 그것뿐이라도, 여기까지 버티고 살아온 그 하나만으로도, 그냥 잘했다, 괜찮다, 한마디만 해 주세요.
맞잡은 손에 힘이 꽉 들어간다. 힘을 주는 것이 자신인지, 우연인지 구별조차 되지 않는다. 이원은 천천히 입을 떼었다.
“그럼. 잘 살았고말고. 이렇게 잘 살아 줘서 고마워.”
“정말, 잘 살았죠, 나…….”
우연의 질문은 눈물과 웃음에 함께 흡수되어 버렸다. 이원은 대답 대신 우연의 어깨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이원은 가끔 궁금했었다. 사랑이란 정말로 종족 보존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감정일까. 하느님께서 완벽한 타인인 두 사람을 끌리게 하는 도구로, 성욕 외에도 굳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심어 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제는 알 것 같다. 사람에게는, 아무 조건도 계산도 없이 ‘그래, 잘 살아 줘서 고마워.’ 하고 대답해 줄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기 때문에.
누구든 인생을 살면서 그런 대답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기가 있다. 오래전 누군가가 노래했던 것처럼, 깊고 어두운 죽음의 골짜기를 통과해야 할 때. 그곳에 홀로 서서, “나 잘 살고 있죠? 나는 이렇게 구질구질하고 형편없고 벌레 같지만, 이렇게라도 버티고 살아가는 게 잘하는 거죠?”라고 허공을 향해 물어보고 싶을 때.
그 순간을 위해 사랑은 존재한다. “그래, 잘 살고 있어. 이렇게 살아 줘서 고마워. 이렇게라도 버텨 줘서 고마워.” 하고, 기꺼이, 단호하게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상처를 극복하고 이겨 내지 못하더라도,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함께 끌어안고 살아갈 누군가도 필요하기 때문에. 알려진 것과 달리 세월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며, 영원히 치유되지 못하는 깊은 상처도 존재하기 때문에.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사랑의 정체성이며, 존재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래. 잘 살았어. 이렇게 살아서, 내 옆에 있어 줘서 고마워.”
이원은 빙그레 웃으며 천천히 되풀이했다.
이원이 우연과 함께 본 세 번째 그림은 였다.
그 그림에서는 새파란 잔디가 깔린 넓은 정원이 보였다. 이원은 그곳이 어디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집의 마당, 아마도 여름인 것 같다. 새파란 잔디 위, 끈 달린 작업복 차림의 할아버지가 밀짚모자를 쓰고 웃통을 벗은 채 누워 있다. 깊은 주름이 팬 입가엔 기분 좋은 미소가 가득하다. 옆에는 전지가위와 작은 부삽, 그리고 호미 따위가 굴러다닌다.
할아버지 옆으로 긴 그림자 두 개가 늘어져 있다. 아마도 그 할아버지의 사진을 찍는 듯, 팔을 올린 원피스 차림의 여자의 실루엣, 그리고 몸집이 크고 꼬리가 풍성한 개로 보이는 듯한 동물의 그림자였다.
이원은 그것이 자신의 먼 훗날 모습임을 알았다.
두 번째 생일 축하 장면은, 첫 번째 생일 축하 장면만큼이나 밝고 눈부셨다.
에필로그. 뮤즈(Muse)
출근 준비를 하며, 나는 깊이 잠든 네 얼굴을 보며 시간을 잊는다.
천진하게 깊은 잠에 빠진 너는, 지난 주말의 과격하고 파격적인 정사에 대해 이렇게 말간 얼굴로 시치미를 뗀다.
떠나기 전, 나는 너를 깨우지 않는다. 월요일에 일부러 오후 수업만 잡은 너는, 아마 점심때까지 곤하게 자고서야 일어날 것이고, 그때까지 아무도 너를 깨우지 않을 것이다.
네가 달게 자는 모습에, 나는 늘 숨이 가쁘다. 다른 이들처럼 아름다운 옷을 갖춰 입고 다정히 웃으며 손을 흔들어 배웅하는 것보다, 이렇게 무방비한 표정으로 나를 배웅하는 것이 나는 더욱 기껍다.
나는 이제 사랑이라는 감정의 기반이 불안정함을 안다. 사랑은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한 개인만의 의지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안다. 사랑은 두 자아가 깨어진 곳에서만 탄생할 수 있는 감정이므로, 본질적으로 안정성과 영속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오로지 현재형만 남게 된다.
그리하여 나는, 너를 사랑하는 순간순간이 눈부시게 소중하며, 그리하여 매 순간 타성 없는 순수한 행복을 느낀다.
나는 조용히 침실 문을 닫고 나와, 1층으로 내려가기 전 서재에 잠시 들른다.
그곳에는 네가 그렸던 나의 그림, 혹은 너의 그림들이 있다.
<붉은 수국과 분홍색 딸기 무스케이크>
<사랑>
<뫼르소>
<재의 수요일>
<비아 돌로로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
나는 매일 치러야 하는 의식처럼 그림을 천천히 둘러본다. 나의 그림 안에는 늘 네가 있어, 나는 그림에 있는 네게 매일 새로이 인사를 한다. 나의 그림 속에 숨은 너는, 화사하게, 비장하게, 요부처럼, 천진한 아이처럼, 혹은 거룩하고 초탈한 얼굴로 내게 인사한다.
아저씨, 사랑해.
아저씨,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아저씨, 사랑해요.
이제 그림들 사이에 서 있으면, 너의 고백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것 같다. 나는 맑고 시원한 샘에 깊이 몸을 담그는 것처럼 너의 고백에 깊이 잠기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나는 너를 삶에 받아들인 만큼 불안정해졌고, 불안정해진 만큼 나의 삶은 더 생생하고 다채로워졌다.
나의 오감은 이제 축제처럼 풍성하고 드라마틱하다. 입에 들어오는 음식은 예전보다 더 맵고, 더 짜고, 더 시고, 더 쓰며, 훨씬 고소하고 한껏 달콤하다. 귀에 들어오는 소리는 예전보다 훨씬 날카롭거나 간지럽고, 손끝, 혀, 입술에 닿는 감각은 갓난아기처럼 예민하고 섬세해져서, 세상을 처음 배우는 것처럼 모든 것이 싱싱하고 자극적으로 느껴진다. 태양빛은 더욱 뜨겁고 강렬하며, 몸에 감기는 바닷물은 시원하고, 맨발에 밟히는 풀은 시원하고 싱그럽다.
이제 나는 예전보다 크게 웃고, 추하게 울며, 드러나게 분노하고, 심하게 아파한다. 예전과 달리 게으름과 나태함에 잠식되기도 하며, 네가 주는 쾌락에 미친 듯이 탐닉하여 일상의 의무를 잊기도 한다.
너와 함께할 때, 나의 삶은 축제가 되고, 신비가 되며, 기적이 된다.
나는, 이제야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 * *
“좋은 아침입니다, 전무님. 차가 준비되었습니다.”
홍연이 들어와 갈 시간이 되었음을 알린다. 그는 내가 하루를 시작하는 의식처럼 그곳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잠시 기다린다. 나는 나의 온갖 치부가 드러난 그림을 그에게 숨길 이유를 딱히 알지 못해, 그것을 커튼으로 가리는 대신 그대로 둔다.
“실장님. 우연이 오늘 상담 스케줄이 있습니다. 일정 확인 부탁합니다.”
“예. 그러잖아도 방금 김민정 씨에게 드롭 오프와 픽업 스케줄 알려 두었습니다.”
그가 빙긋 웃으며 대답한다.
우연의 상담 치료는 당뇨 환자들이 음식을 조절하거나 고혈압 환자들이 운동으로 몸을 관리하는 것처럼 일상의 일부였다. 예전에 비하면 심리 상태가 꽤 안정적이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손 원장은, 아버지가 죽은 후 우연이 몹시 안정적인 상태로 접어들었고, 양극성 장애라고 진단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물론 호르몬의 영향대로 가끔 울증이 두드러질 때도 있고, 경조증 증세를 보일 때도 있기는 했다. 손 원장은 그때마다 울증이 극단적인 무기력증이 되지 않도록, 혹은 경조증이 조증으로 치닫지 않도록 적절한 치료를 통해 그녀의 감정이 극단으로 흐르지 않도록 세심하게 조정한다.
속을 잘 헤아리는 비서실장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위로의 말을 덧붙인다.
“생각보다 예후가 좋아서 다행입니다. 마음이 점점 안정을 찾고 있으니, 앞으로는 훨씬 좋아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의 말이 고마워서 잠시 웃었다.
사실 나는 그녀가 외과 수술처럼 드라마틱하게 병이 완치되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몸의 흉터가 평생 가듯, 마음의 흉터도 평생 갈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진작 받아들였다.
그녀는 힘들 때 힘들다고, 아플 때 아프다고 울 수 있게 되기까지 20년이 넘는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힘들다, 아프다고 마음껏 울 수 있는 것도 축복이며 좋은 일이라는 것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게다가, 그녀의 자유분방하게 뻗어 가는 사고와 어떤 틀에도 구속되지 않으려는 기질, 그 기질에서 파생되는 창조적 영감은, 타고난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것은 한 시대를 뒤로 밀어내고, 다음 시대를 이끌어 낸 예술가들이 지니고 있던 공통적인 특징이었다. 나는 그녀의 기질이 잘 보존되고, 그녀의 삶의 족적을 따라 활짝 만개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홍연 씨, 많은 천재형 예술가들이 과잉 감각이나 불안정한 마음의 소유자였다는 걸 보면, 그게 재능에 따라오는 마이너스 옵션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물론 기꺼이 감수한다 할 사람도 많겠지만…….”
“글쎄요. 저라면 포기할 것 같습니다, 전무님. 마이너스 옵션이 너무 강력하잖습니까? 마음이라는 게, 적절한 치료를 받는다고 뚝딱뚝딱 수리돼서 강철 멘탈 만렙이 되는 것도 아니고 평생 고생해야 하는 건데요.”
이원은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림들을 훑어보며 고개를 갸웃한다.
“대신 그 재능을 알아보고 지지해 주는 사람들이 또 생기지 않습니까. 저도 한때 진우연이라는 화가의 메디치로 이름을 남기고 싶어 했고요.”
“메디치요? 음, 글쎄요.”
한때 ‘패트런의 조건은 돈’이라고 단언하던 홍연이 영 동의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아니 그래도 나 정도면 충분히 좋은 후원자 소리 들을 만하지 않나? 내심 동의를 기대하던 이원은 홍연의 표정에 조금 빈정이 상했다. 홍연은 짓궂은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제 생각에, 전무님은 메디치보다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실 것 같습니다.”
“……?”
“미술사에는 수많은 천재 화가들에게 물질적으로 도움을 주며 후원했던 패트런도 많지만, 불안정한 정신을 흔들리지 않게 받쳐 주고, 예술혼을 자극하며, 깊은 영감의 원천으로 존재했던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인류는 그들에게 꽤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셈이죠. 그래서 후대 사람들은 그들에게 ‘패트런’이나 ‘메디치’라는 호칭보다 훨씬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이름을 붙여 주었죠.”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이름이라. 그게 뭡니까?”
“모우사(Μοῦσα) ……뮤즈, 라고 합니다.”
확, 얼굴로 열이 치받는 것이 느껴진다. 이원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지만, 그의 목소리는 끈덕지게 따라온다.
“전무님은 유명한 화가 진우연의 이름에 기생하는 패트런 메디치가 아닌, 21세기의 위대한 예술가 진우연의 매혹적인 모델이자 뮤즈로 길게 이름이 남을 것입니다.”
비서실장은 유쾌하면서도 진지한 목소리로 결론을 내렸다.
“그 이해할 수 없는 사랑도 같이요.”
* * *
‘그림은 대상의 재현’이라는 패러다임이 깨진 곳에서 현대 미술의 지평이 열렸고,
‘그림의 역할은 대상의 재현이 아니다.’라는 패러다임이 깨진 곳에서 하이퍼리얼리즘이 나타났다.
나를 나답게 만드는 에고와, 너를 너답게 만들던 에고가 깨진 곳에서 견고한 사랑이 나타났고,
그 사랑의 종말을 전제함으로, 우리의 사랑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
사랑은, 존재의 새로운 지평이었다.
―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