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누드-41화 (41/47)

41.

이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작은 침대, 빛이 들어오는 작은 창문이 보이고, 뒤이어 옆에서 이불을 돌돌 말고 자는 우연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멍하니 앉아 있던 이원은 한 박자 늦게 풀썩 웃었다. 어제 장례식을 마치고 우연과 함께 밤을 보냈던 것이 한 조각씩 떠올랐다. 기억은 빛이 바랜 것처럼 허여스름했고, 조각조각 흩어져서 파편화되어 있었다.

왜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반성도 부질없고, 그럴 생각이 없었다는 변명도 의미 없었다. 우연이라는 아이에 관한 한, 자신의 의지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끙, 하는 신음이 흘러나오며 손이 저절로 허리로 향했다. 체력이 안 좋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우연과 밤을 보내면 다음 날 아침에 허리와 허벅지가 녹아내리는 것 같다.

두세 번 정도로 적당히 끝을 냈어야 말이지. 이원은 머리를 헤집으며 숨죽여 웃었다.

어제 몇 시에 잠들었는지 모르겠다. 몇 번이나 사정을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첫 번째의 과격하고 파괴적인 정사가 지나간 후엔, 모든 것이 느릿하게 이어졌다. 애무도, 쾌감도, 아니 사정에 이르는 모든 과정이 느리고 은은하고 부드럽고 길었다. 오후 내내, 그리고 밤새 그렇게 간질간질한 흥분과 오르가슴 상태를 유지했던 것 같다.

고개가 절로 수그러들며 손이 얼굴로 올라간다. 감미롭고 황홀했다. 이런 밤이 이번 생에서 다시 올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원은 색색대며 단잠에 빠진 우연을 내려다보다가, 손을 내밀어 이마와 뺨을 덮은 머리카락을 가만히 걷어 올렸다. 희고, 붉고, 새까맣다. 뺨을 가만가만 어루만졌다. 깨지 않는다. 달게 잔다. 색색, 색색, 가벼운 숨소리조차 달았다. 으응, 신음 소리도 달았다. 이원의 손을 더듬어서 꼭 움켜쥐는 이 촉감마저도 달다.

눈이 시다. 목이 욱신거린다.

예전에 우연과 주고받았던 대화가, 겁도 없이 서원했던 말들이 토막토막 떠오른다.

‘그날, 너를 깊이 위로하고 따뜻하게 안아 줄 수 있는 사람이 네 곁에 있기를 기도하마.’

‘부모님이든 누구든, 이 세상 어떤 것이든, 너를 괴롭히지 못하기를.’

‘더 이상 네가 아픈 일이 없기를. 차, 차라리…… 내가, 대신 아프기를…….’

‘프란치스코 너 이놈, 서원 기도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순간 짓궂은 목소리가 꼬리를 물고 펑, 튀어 오른다. 이원의 어머니와 약속 한번 잘못했다가, 이원의 유아 세례와 견진 성사 때 대부 노릇까지 해 주어야 했던, 류경서 아우구스티노 노(老)신부님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였다.

‘서원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지 네놈이 어떻게 알아? 잘하면 뒤통수 작렬하는 수가 있어.’

‘그분께서는 기억력이 대단하신 데다 유머 감각과 연출력도 뛰어나시거든.’

대부님 말씀이 맞다. 그런 기도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니었다.

네 고통을 대신 감당해 줄 수 있다고 믿었다니, 오만해도 너무 오만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달라지지 않는다. 우연에게 첩첩이 쌓인 고통 중에서도, 아버지를 죽게 했다는 가책만큼은 네가 아닌 내가 감당하는 게 맞다. 이미 온몸과 마음이 상처로 뒤덮인 너보다는 내가 끌어안는 게 백번 옳다.

이원은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어깨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조용히 거실로 나온 이원은 주방을 둘러보았다.

“후우…….”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음식 찌꺼기가 말라붙은 레토르트 용기가 싱크대에 쌓여 있고, 냉장고에선 도우미가 만들어 놓고 간 반찬이 얌전하게 쉬어 가고 있었다. 밥솥의 밥은 노랗게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거실 역시 엉망이었다. 대체 빨래를 하기는 한 건지, 여기저기 널린 옷가지와 양말, 수건에선 냄새가 났고 바닥에는 먼지가 뽀얬다.

대체…… 넌 혼자 살 수는 있을까?

바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 저 아이의 생활 능력을 따지고 판단하는 자신이 더 한심했다. 지금 우연이 숨 쉬고 살아 있어 준 것만도 고마운 일이었다.

이원은 그릇과 음식을 대충 정리한 후, 옷가지와 빨랫감을 정리해 세탁기에 넣어 작동시키고, 청소기 대신 걸레를 들었다.

이원메세나재단에서 ‘넓은 아틀리에’라고 자랑하는 작업용 거실이었지만 사실 썩 넓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일고여덟 평 정도밖에 되지 않아, 걸레질은 금방 끝났다. 흰색에 가깝던 걸레가 고동색으로 변한 것을 보며, 이원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정리할 것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거실 한구석에 흉하게 널브러진 채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이젤, 말라붙은 페이퍼 팔레트와 물감 상자, 물통이 보였다.

“이건…… 뭐지?”

이원은 이젤 옆에서 뒹구는 작은 수채 패드를 들고 고개를 갸웃했다. B4 사이즈 정도는 되려나 싶은 작은 사이즈였다. 그러고 보니 도우미가 이상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좀 이해는 안 되는 게…….’

머뭇머뭇 말을 돌리려던 도우미는 결국 속의 말을 토해 내고 말았다.

‘무슨 그림인 줄 전혀 알아보지 못하겠어요. 사람을 그린 건지, 물건을 그린 건지, 색칠 공부를 하는 건지.’

저절로 실소가 터졌다. 우연은 이미 최고 수준의 하이퍼리얼리즘 화가였다. 극도로 정밀한 테크닉,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독특한 감성, 거기에 인간의 내면을 깊이 파헤치는 통찰력까지, 그녀의 작품들은 당장 뉴욕 시장에 내놔도 찬사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뭐? 색칠 공부?

하지만 그녀의 이어지는 말에서는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그냥, 정신병자가 제멋대로 깔겨 놓은 것 같아요…….’

이원은 그림을 펼친 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제기랄.

도우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이원은 이 작은 화면에 그려진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 형태도 보이지 않는다. 몇 개의 뭉그러진 사각형으로 나뉜 화면에는 기이하게 휘고 찌그러진 선과 색깔들만 있었다. 검은색, 흰색, 혹은 옅은 붉은색, 회색, 색깔은 두서없었다.

뒷장의 그림도 차례차례 넘겨 보았다. 열 장짜리 수채 패드를 한 장씩 떼어 가며 그림을 그리고 한 권으로 모아 둔 것 같았다.

……이게 대체 뭐야.

눈썹이 점점 이상하게 찌푸려진다. 뒤의 그림들도 다 비슷했다. 가장자리가 일그러진 사각형의 틀이 있고, 틀 안에는 물결처럼 일그러진 색들이 빼곡했다. 특히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화려하고 이질적인 형광색도 여기저기서 일렁거렸다.

스케치북을 내려놓고 이젤 옆을 더 찾아보았다. 혹시 환각이라도 본 걸까. 증세가 많이 안 좋은가. 지금 당장이라도 입원을 시켜야 할까. 대체 이것들은 뭘 그린 걸까.

이원은 마루를 샅샅이 뒤져 동일한 크기의 스케치북 아홉 권을 더 찾아냈다. 그곳에 있는 그림들도 마찬가지였다. 앞장과 연결된 뒷장 사이에는 어느 정도 색의 연결성이 있는 것 같은데, 첫 장과 마지막 장의 그림은 전혀 다른 색으로 채워져 있었다. 하나같이 귀퉁이가 일그러진 사각형에 갇힌 기이한 그림이었지만 모양과 색깔은 조금씩 다 달랐다. 점점 소름이 돋는다.

대체 넌 뭘 그린 거니, 우연아?

“이, 이건……?”

어떤 그림의 맨 아랫단에 낯익은 글자가 보인다. 우연의 서명이었다. 서명은 찌그러지지도 뒤틀리지도 않았고, 쉽게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큼직하고 또렷했다. 이원은 황급히 그 그림의 앞뒤를 뒤적여 보았다. 다른 글자가 있을까? 이 그림에 대한 무슨 힌트라도?

……있다!

다른 스케치북에서 글자를 찾아낸 이원은 다시 아연해졌다.

……비아 돌로로사.

고통의 길, 슬픔의 길, 비아 돌로로사.

입으로 천천히 뇌어 보던 이원은 다시 눈을 크게 떴다. 이 글자의 모습은 익숙하다. 자신의 등에 그려 놓았던 그림에 있던 서명과 꼭 빼닮았다. 그러고 보니 서명이 적힌 그림과 비아 돌로로사가 적힌 그림 사이에는 색이 연결된 듯한 느낌이 든다.

어떤 생각이 번개처럼 머리를 치고 지나간다.

이원은 급히 이전의 스케치북을 뒤적였다. 맞다. 요란한 형광색의 그림. 이 색감을 기억한다. 반짝이는 펄이 잔뜩 들어간 화려한 그림.

오, 이런 맙소사.

알 것 같다. 이게 무엇을 그렸는지 이제 알겠다.

손이 덜덜 떨렸다. 이건 구체적인 형태가 없는 비구상화가 아니다.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그린 그림도 아니고 환각으로 그린 그림도 아니다.

……게다가 이건, 단 한 장의 그림이 틀림없다.

같은 스케치북에서 나온 그림은 가로로 긴 한 줄이었다. 죽 늘어놓고 보니 색의 연결성이 뚜렷이 느껴진다. 이원은 다른 스케치북에서 나온 그림들도 길게 연결해 보았다. 비아 돌로로사와 서명이 있는 조각은 전체 그림 중 아랫단에 위치할 것이다.

가로로 맞추기는 쉬웠다. 그냥 앞에서부터 순서대로 늘어놓으면 한 줄로 연결된 그림이 나왔다. 아래위를 맞추는 것은 약간 까다로웠지만, 가장 아래에서부터 비슷하게 연결되는 색을 찾아 나갔다.

거대한 그림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낸다. 가로 26센티, 세로 36센티의 그림이 열 장씩 아래위로 연결되니 그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이마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이원은 짜증스럽게 문질렀다. 이 대작에 더러운 얼룩을 만들 수는 없었다. 그림이 완성되어 감에 따라 점점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목이 졸린다.

……맙소사.

마지막 한 줄의 아귀가 맞아 들어간다. 이원은 가장 오른쪽 윗부분의 조각을 맞춰 넣은 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거실의 끝까지 뒤로 물러선 이원의 눈앞으로 거대하고 아름다운 그림이 확 펼쳐진다.

……하느님. 어떻게 이런…….

두 손이 입으로 천천히 올라간다. 일그러진 사각과 출렁대는 이상한 색으로 가득한 100개의 그림은 하나의 거대한 초상화로 완성이 되었다.

그림의 주인공은 이원 자신이었다.

자신은 지금 사각 무늬를 가진 유리문 너머에서 등을 돌린 채 앉아 있다. 깊은 고뇌에 잠겨, 오열을 필사적으로 감추며 두 팔로 등을 감싸고 있다.

그리고 그 등에는 우연이 그렸던 보디 페인팅, 첫 번째 ‘비아 돌로로사’가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이원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놀람과 충격을 넘어선 이 감정은 차라리 공포에 가까웠다.

……너는, 인간이 아닌 거지, 우연아?

딱 백 장의 조각으로 이루어진 그림. 열 장이 한 권인 스케치북에서 단 한 장도 버린 것 없이 고스란히 사용된 그림. 전체 스케치도 없고 거대한 밑그림도 없고, 보고 그릴 사진조차 없이, 오직 머릿속에 저장된 이미지만으로, 앞에서 차례차례 순서대로 이어서 그려 낸 단 한 번에 그려 낸 그림이었다.

백 장의 그림을, 단 한 장의 실패도 없이, 컴퓨터로 분할 출력 하듯이 이루어진 작업.

너는, 천재다.

……역사상 너 같은 재능을 가진 화가는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이원은 이 압도적이고 거대한 초상화 앞에서 도저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이 앞에서 감히 무슨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을까. 생각 자체가 멈춘 것 같았다.

제목은 말할 나위 없이 맞춤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고통의 길을 걷고 있는 연약하고 상처 입은 소녀의 손을 잡아 주고, 대신 상처를 입고, 대신 아파하는 누군가의 모습을, 우연은 이렇게 그린 것이다.

자신을 바둑판 유리를 투과한 형태로 파편화해서 그린 이유도 알 것 같다.

이원에 대한 사람들의 평은 늘 극도로 엇갈렸다. 반듯하다, 따스하다, 신뢰할 만하다, 거룩하다, 합리적이다, 상호 상생, 잔혹하다, 앞뒤가 다르다, 비열하다, 가증한 위선자, 제로섬, 파멸.

사람들은 그런 말들을 참 쉽게도 내뱉었다. 그들은 늘 멋대로 기대치를 높인 후, 조금이라도 예상에 어긋나면 멋대로 실망하며 ‘당신답지 않다.’라는 말로 비난하곤 했다.

우연의 목소리가 총소리처럼 그림 밖으로 탕, 튕겨 나오는 것 같다.

웃기시네, 아저씨다운 게 뭔데요?

그게 다 아저씨잖아요! 전부 다 아저씨잖아요!

이원은 홀린 듯 그림을 살펴보았다. 우연의 목소리가 점점 또렷이 들리는 것 같다.

이 그림 조각들은 모두 아저씨예요. 아저씨처럼 보이지 않지만, 모두 아저씨의 모습을 담고 있어요.

거북이를 살린 것도 아저씨고, 달팽이 떼를 몰살시킨 것도 아저씨예요. 동물을 사랑하는 것도 아저씨고, 다시는 동물을 기르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도 아저씨예요.

모든 소유를 내려놓고 사제로 헌신하려 했던 것도 아저씨고, 업계를 흔들 만큼 탐욕스럽게 사세를 확장한 기업가도 아저씨예요. 정우건설을 파멸로 이끈 것도 아저씨고, 아기의 고통을 나에게 옮겨 달라고 울부짖던 것도 아저씨예요.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결혼을 꿈꾸었던 것도 아저씨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불행한 결혼을 결정한 것도 아저씨예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도 아저씨고, 충동적이고 감성적인 것도 아저씨예요.

나에게 손을 내밀어 생명을 준 것도 아저씨고, 그 뒤에서 내 그림의 가치를 계산하던 것도 아저씨예요. 나를 사랑한 것도 아저씨고, 나를 밀어낸 것도 아저씨예요. 빙하처럼 금욕적이고 정결한 것도 아저씨고, 음란한 욕정이 화산처럼 끓어오르는 것도 아저씨예요.

……그 모든 것이, 내가 사랑하는 한이원이에요.

이원은 그 그림을 사진으로 찍은 후, 메모를 남겨 놓고 문을 나섰다. 머리가 얼얼하고 심장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아니, 그녀의 목소리가 목을 조르는 것 같아, 도저히 그 자리에서 더 버티고 있을 수 없었다.

그림을 가지고 나올 수도 없었다. 우연이 자신에게 줄 마지막 계약 작품이란 건 알았지만, 감히 손을 댈 수 없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림을 원래 순서대로 정리해서 그 자리에 고스란히 돌려놓는 일뿐이었다.

하느님께서 한낱 인간에게 저 정도까지 재능을 허락하신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저건 인간이 감당할 만한 범위를 넘어선 작품이었다. 하물며 저렇게 연약한 육신과 불안정한 정신을 가진 아이에게.

아니, 이런 말은 다 의미 없다. 이제는 신이 내린 엄청난 재능을 질투하거나 부러워하는 마음조차 들지 않는다. 정신이 짓눌릴 정도의 압도적인 위압감만 느껴질 뿐이다. 한때 이 재능을 등에 업고 이름을 남기고자 했던 자신이 벌레처럼 느껴질 따름이었다.

너는, 애초에 내 손에 잡힐 수 없는 존재였다.

……나는 너를 감히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이원은 운전석에 앉아 핸들에 이마를 기댔다.

* * *

김포 방화 사건의 담당 검사실에서 연락이 온 것은 열흘 후였다. 고소한 사람은 이미 망자가 된 진형식이었다. 이원은 두말없이 출두해 조사에 응했다.

“가끔, 피의자 조사에서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사건 당일 정황을 몇 시간에 걸쳐 시시콜콜 확인하던 검사는, 갑자기 서류철을 덮더니 엉뚱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한이원 씨, 인간에게 양심이라는 게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으십니까?”

“존재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저도 한때는 그랬는데, 이 일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그 믿음을 버렸습니다.”

젊은 검사는 등을 뒤로 기대며 조금 웃었다.

“이곳에 오는 사람 중에, 자기가 잘못했다고 진심으로 뉘우치는 사람을 못 봤습니다. 겁을 잔뜩 먹은 학생부터 극악무도한 사이코패스까지, 한결같이 ‘억울하다’고 우겨 댑니다.”

“양심보다는 자기 보호 본능이 더 강력하니 그렇겠지요. 그래도 잘못을 반성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있잖습니까?”

“그건 형량 딜을 하려고 변호사가 시켰을 때뿐이죠.”

검사의 냉소에 이원은 거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법무팀장인 박 이사는 예상 질문을 한 뭉치나 뽑아 주고, 준비 좀 하고 가시라고 야단야단을 했었다.

하지만 이원은 깨끗이 거절하고 혼자 출두했다. 애초에 숨길 일도 없고, 숨길 생각도 없고, 피할 생각도 없으니 검사와 머리싸움을 할 이유조차 없었다.

“그런데 한이원 씨 같은 분을 보면 기분이 좀 그래요. ……내 결론이 흔들린단 말이죠.”

검사는 팔짱을 풀고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신영원이라는 이름표가 넥타이 위에서 달랑거린다. 이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쩐지 이름이 좀 낯익긴 한데, 영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일단 피해자 보호를 위해 취재 금지와 보도 제한을 요청했다는 건 알려 드리겠습니다. 지금 진술 내용이 외부로 나갈 일은 없을 겁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원이 고개를 숙이며 사의를 표하자, 신 검사가 어깨를 으쓱하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뭐, 한이원 씨 좋으라고 한 일은 아닙니다. 사건이 사건이다 보니 기자들이 벌 떼처럼 달려들 기미를 보이기에, 피해자 보호 차원에서 미리 약 좀 친 것뿐입니다.”

이원의 눈이 살짝 커지자 그가 입술 끝을 비틀며 줄줄 읊어 대기 시작한다.

“‘치정 살인인가, 일가족 동반 자살인가?’, ‘불륜, 이혼, 배신으로 점철된 김포 방화 사건의 전말’, ‘가정 폭력, 이혼, 스토킹의 비극적 결말’, ‘친부 엄벌을 탄원한 딸, 알고 보니 조현병?’ 이것들이 포털 메인에 올라가려고 대기 중이던 기사 제목이었습니다. 이따위 개소리들이 기사로 나가게 내버려 둘 순 없지 않습니까.”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검사님. 이 건은 치정도 불륜도 아니고, 딸도 조현병이 아닙니다. 피해자에겐 그런 가짜 뉴스가 훨씬 큰 폭력입니다.”

“제가 막았는데도 그 정도인데, 진형식 씨의 진술이 원문 그대로 퍼졌으면 어땠을 것 같습니까? 딸은 둘째 치고 한이원 씨 입장이 아주 골 때리게 돌아갔을걸요?”

하긴. 이원은 쓰게 웃으며 잠자코 수긍했다.

‘아내가 바람이 나서, 나를 무고해 감옥에 넣었단 말입니다! 남편 가둬 놓고 이혼 소송을 하더니 내 아파트를 팔아서 외국으로 튀었다고! 눈 안 돌아가게 생겼습니까!’

‘딸년은 에미를 닮아서 살짝 부족하고 정신병도 있어. 엄마에게 세뇌돼서 아빠에게 엄벌을 탄원하더니, 나중에 제 잘못을 알고 도망을 친 거요.’

‘검사님, 놀라운 뉴스를 하나 알려 드릴까요? 세경그룹 있잖소? 거기 대표가 말이요, 진짜 인간 말종이에요. 그 새끼가 채팅 앱으로 내 딸을 만나서 돈으로 꾀더니 나중엔 집에 가둬 두고 별 더러운 짓을 다 했어요! 고등학생 때부터! 금수만도 못한 새끼가!’

‘이번 화재도 그 새끼하고 마누라하고 딸년 셋이 합작해서 저지른 짓이야. 정신 나간 딸년이 나한테 기름을 붓고, 그 말종 새끼가 와서 나한테 주먹질을 하고, 마누라한테 라이터를 던진 겁니다. 마누라는 그걸 받아서는,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나한테 불을 질렀던 거요.’

‘난 피해자야! 몸이 이 지경이 된 것도 억장이 무너지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가해자 살인자 소리까지 들어야 해? 난 억울해! 억울하다고!’

진형식은 자신의 결백과 억울함을 진심으로 호소했다. 그러니, 이런 호소를 매일 들어야 하는 검사들이 ‘인간의 양심’에 냉소적으로 변하는 건 당연한 듯했다.

“저 헛소리가 기자들에게 털렸다고 생각해 보세요.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까?”

이원은 지끈대는 머리를 누르고 간신히 대답했다.

“……검사님도 그게 진실이 아니라는 건 아시지 않습니까.”

“그들에게 진실이 뭐가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재미없는 진실보다 자극적인 거짓말이 훨씬 신뢰도가 높은데요. 요새는 돈 많고 인기 있는 사람들을 찍은 다음에 여론 조성해서 우르르 몰려가서 까고 패서 매장시키는 게 굉장한 유행입니다. 다들 대리 만족이 엄청난 모양입니다.”

“…….”

“어차피 책임지는 사람은 없어요. 나중에 진실이 밝혀져도 ‘아님 말고.’ 발 빼면 그만이죠. 피해자가 억울하다고 자살해도 사과문 하나, 석 줄짜리 정정 기사조차 안 내고 덮는 게 그쪽 바닥 아닙니까.”

이원은 씁쓸하게 웃었다. 눈앞의 검사 역시 언론과 익명 대중의 생리를 소름 돋도록 혐오하고 있었다. 이게 과연 기꺼워해야 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반가웠고, 문제의 소지를 미리 차단해 준 것은 고마웠다.

“그것도 그렇고, 한이원 씨의 자필 진술서도 신경이 쓰였습니다. 이렇게 자기 방어 본능이 없는 진술서는 또 처음이라서.”

“있는 사실 그대로 쓴 것뿐입니다.”

“담당 변호사한테 자문 안 구했죠? 봤으면 이런 진술서를 내버려 뒀을 리가 없거든요.”

신 검사는 코로 웃으며 툭툭 말을 잇는다.

“그래도 기자들의 막장 드라마를 막은 제 성의를 봐서라도 ‘그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다.’ 하고 변명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거 아닙니까? 세경의 그 유명한 법무팀장님은 어쩌고 이렇게 덜렁덜렁 혼자 오신 겁니까?”

박원주 이사는 이제 전관예우를 바랄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법조계에서 위세가 등등하니 남아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이원의 신임을 회복하기 위해서 ‘살과 뼈를 갈아 넣으며’ 고군분투하는 중이었다.

“그러잖아도 혼자 가겠다고 했더니 어찌나 잔소리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태평하시네요. 제가 진형식 씨 진술을 토대로 당신을 기소하면 어쩌려고.”

“죄를 지은 부분이 있으면 받고, 금고 이상이 떨어지면 전문 경영인을 두고 물러날 생각입니다.”

“아, 진짜…….”

신 검사는 짜증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지은 죄가 뭔데요? 기소거리가 있으면 나한테 좀 알려 줘 봐요.”

이원은 어이없는 얼굴로 웃었다.

“검사님. 그걸 저에게 물으시면 어떡합니까? 기소거리가 없으면 저는 대체 왜 부르신 겁니까?”

“그래도 꽤 시끄러운 사건이었는데 마무리는 확실하게 해야 할 거 아닙니까. 기자들한테 제대로 된 보도 자료라도 돌려야 입막음이 되죠.”

이원은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검사가 이렇게 나오면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저희가 복원한 녹음 자료 45분을 아무리 돌려서 들어 봐도, 가해자는 진형식, 그리고 방화 당사자는 김현주예요. 그리고 당신과 진우연 씨의 진술은 그 녹음 자료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일치합니다.”

이원은 움직임을 멈췄다. 뭔가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다.

“……우연……이가 참고인 진술을 했습니까?”

그는 잠시 팔짱을 끼고 대답을 미루더니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며칠 전에 저한테 갑자기 찾아와서 다섯 시간 동안 자세하게 진술을 하고 갔습니다. 덕분에 현장에서 있었던 일을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고요.”

눈이 저절로 커졌다. 얼마 전까지 말도 못 하고, 반응도 제대로 보이지 않던 아이가 다섯 시간 진술이라고? 이게 대체 무슨 말이지?

“진형식 씨가 당신에게 얼마나 비열하게 무고를 했는지 바로 나오더군요. 망자에게 이런 말 하긴 미안하지만, 내가 그런 사람들 때문에 인류애를 뭉텅뭉텅 잃어요, 진짜.”

신 검사의 긴 한숨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진우연 씨가 재미있는 말을 하더군요.”

“무슨 말입니까?”

“그날 당신은, 아버지와 자신 중에서 한 명밖에 살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라고.”

한 명밖에 살릴 수 없었다? 고개를 갸웃하던 이원은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아하.

‘두 명 중 한 명밖에 살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말은, 화재 현장에서 생명을 건지는 것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직접 불을 붙인 어머니는 단단히 결박된 상황이라 구출 자체가 어려웠고, 삶을 이미 포기한 상황이기도 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어쩌면 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살아나면, 대신 우연이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인즉, 우연은 목숨이 붙어 있지만 남은 생을 살아 있는 시체로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 아버지와 딸의 삶은 이미 제로섬으로 고착하여, 같은 세상에서 더 이상 공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진우연 씨에게 행해진 가정 폭력에 관해서도 전부 조사했습니다.”

신 검사가 팔짱을 끼며 툭 던진다. 그 역시 우연의 진술에 깔린 이중적인 의미를 알아들은 듯했다.

“당신은 진우연 씨를 살리는 걸 택한 것뿐이고.”

“하지만 제가 그때 의도적으로 신고를 늦게 했던 건 사실입니다. 전화기도…….”

검사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픽 웃었다.

“블랙박스 보니까 딱 200미터 운전했다가 돌아와서는, 주인을 깨워서 신고해 달라고 하셨던데요. 그러니 그런 얘기는 고해실에 가셔서 신부님에게나 하세요. 아, 물론 당신이라면 벌써 하셨겠지만, 보속 내용까지는 제가 알 바 아니고.”

이원은 고개를 숙이고 쓰게 웃었다.

200미터라. 그 정도밖에 안 되었던가?

당시 이원은 시간 감각과 거리 감각이 전혀 없었다. 그 짧은 시간이 10분, 20분, 한 시간, 아니 영원처럼 길게 느껴질 만큼 끔찍하게 고통스러웠다.

“……그래도 우연이만큼 적극적으로 구조하려 했던 건 아닙니다.”

“진우연 씨 한 명만 구조하는 데도 그렇게 큰 화상을 입었는데, 진형식 씨까지 구조요? 그랬다간 두 사람이 나란히 장례식을 치렀을 텐데?”

“…….”

“자기 목숨까지 끊어 가며 남을 구조하지 않은 게 죄는 아니죠. 소방대원도 붕괴 위험이 있는 현장에선 빠져나오는 게 원칙인데 하물며 당신은 한 사람을 이미 구한 상태였잖습니까. 심한 화상까지 당해 가면서요.”

“……별로 심하지는 않습니다.”

“거참, 등껍질이 몽땅 벗겨진 게 심하지 않은 겁니까? 제가 인천까지 내려가서 당신 진료 기록도 전부 찾아보고 왔으니까, 딴소리 좀 하지 마세요.”

그가 짜증스러운 어조로 툭툭 덧붙였다.

이원은 젊은 검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캐고 변명하는 주체가 뒤바뀐 이 상황이 너무 어색했다. 검사도 이 상황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입술을 비죽이고 안경까지 고쳐 쓰더니 칼칼한 목소리로 묻는다.

“아, 그런데 한이원 씨 꿈이 정원사라면서요?”

“예? 그게 무슨…….”

“마당을 정글로 만들고 강아지 101마리를 키우는 게 꿈이라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눈썹이 저절로 꿈틀거렸다. 표정 관리가 되지 않는다. 그 아이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까지 했을까?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다 떠들고 가느라 다섯 시간이나 걸린 거였나?

“전무님은 금고형 이상이 떨어지면 전문 경영인에게 뒤를 넘기고 발 빼는 꿈을 야무지게 꾸신 모양인데.”

“…….”

“협조해 드리지 못해 유감입니다. 국민의 귀한 세금으로 당신 같은 사람한테까지 공짜 밥을 먹일 생각은 없어서요.”

불기소 처분, 혐의 없음, 사건 종료. 실감 나지 않는 낱말들이 눈앞으로 툭툭 떨어진다. 하지만 이원은 이런 결과보다 우연이가 직접 찾아와서 증언을 하고, 자신과의 이야기를 시시콜콜 늘어놓고 갔다는 게 더욱 실감이 나지 않았다.

“기억나실지 모르겠지만…….”

할 말이 남은 듯, 볼펜을 돌리며 잠시 머뭇대던 신 검사는 한참 후 입을 열었다.

“몇 년 전, 정우건설 대표 일가 동반 자살 때, 저는 담당 천용걸 검사님 밑에서 일을 배우던 신입 중 한 명이었습니다.”

아아. 그래서였나. 이원은 속으로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이름이 조금 낯익은 듯도 했다.

“그 덕에 전 당신이 아기 침대 옆에 매달려서 우는 모습을 거의 매일 CCTV로 봐야 했죠. 처음엔 연극이라 생각해서 엄청 짜증이 났는데, 시간이 갈수록 뭔가 아닌 것 같더군요.”

“…….”

“그때 손연정 원장에게 요청했던 진료 기록이 입수됐죠. 열람하면서, 당신의 눈물을 연극이라 생각했던 게 미안해졌습니다. 아, 이런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기도 하는구나, 싶었어요.”

인간의 양심이 실존하지 않는다고 믿던 사내는 여러 가지 감정이 뒤얽힌 눈으로 이원을 응시했다.

이원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오래전의 치부가 다시 들추어진 기분에 얼굴이 홧홧해졌지만, 한편으로는 저 퉁명스러운 말투 뒤에 숨어 있는 호의도 또렷하게 느껴졌다.

“그 후로도 당신을 오랫동안 지켜보았습니다. 업계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지만, 그 일로 오랫동안 치료를 받으며 괴로워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그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가끔 기도했습니다. ……뭐, 사반세기째 냉담 중인 신도이긴 하지만.”

의외의 말에 이원은 고개를 들었다. 25년째 냉담이라는 말이 제 생각에도 좀 심하다 싶었는지, 신 검사가 멋쩍은 얼굴로 말을 돌린다.

“정원사가 되고 싶다는 꿈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경영자로서의 성과가 너무 좋은 편이라 앞으로도 꿈을 이루기는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는 위로하는 건지 비아냥대는 건지 모를 소릴 하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청한다. 굉장히 뜬금없는 사람이다, 생각하면서 따라 일어나 손을 맞잡았다.

“가도 됩니까?”

“무혐의에, 불기소에, 사건 다 끝났고, 진술서 서명도 하셨으니 볼일도 없는데, 안 가고 여기서 뭐 하시게요? 제가 밥이라도 사 드려야 합니까?”

말버릇도 어지간히 까칠하다. 하, 하하하. 이원은 대놓고 웃었다. 아참, 신 검사는 잠시 눈썹을 찌푸리더니 생각난 듯 덧붙였다.

“증거 자료로 제출하신 휴대 전화의 복원 데이터는 메일로 보내 드렸으니, 한번 확인해 보시죠. 전화기는 다 부서져서 못 쓸 것 같지만, 연락처나 사진, 업무 자료 같은 건 필요하실 것 같아서요.”

이원은 푸스스 웃으며 전화기를 열었다. 어지간한 자료들은 그때그때 백업을 해 두지만 까칠한 것 같으면서도 은근 잘 챙겨 주는 젊은 검사가 고맙기도 했다.

“바쁘실 텐데 배려해 주셔서 감사하…….”

하지만, 도착한 파일을 열어 보던 이원은 순간 말을 잇지 못하고 돌처럼 굳어 버렸다.

복원된 사진 중, 있어서는 안 될 사진이 하나 들어 있었다. 우연의 집에서 얼마 전에 찍어 온 비아 돌로로사, 보디 페인팅이 된 자신의 뒷모습을 그린 거대한 그림이었다.

이 사진이 어떻게 예전 전화기에 들어 있지? 불가능한 일이잖아. 전화기는 이 그림이 나오기 전에 부서졌는데?

크게 몸을 떨며 눈을 깜박이던 이원은, 잠시 후 그것이 며칠 전에 봤던 우연의 그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각도도 다르고, 묘사도 달랐다. 우연의 그림은 사각 물결 유리를 투과한 형태였고 이것은 매끈한 형태였다.

……아, 이런.

이원은 이 사진이, 예전에 자신이 욕실에서 찍었다가 삭제한 것임을 뒤늦게 알았다. 이상한 기색을 눈치챈 신 검사가 묻는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아, 아닙니다. 제가 삭제했던 사진이 있어서.”

“그야, 당연하죠. 삭제 데이터까지 모두 복원해서 샅샅이 조사했으니까요. 야한 사진이나 야동 하나 없던데, 뭘 그렇게 식겁하십니까.”

검사의 싱거운 웃음소리에 크게 펄떡이던 심장이 천천히 진정된다.

이원은 우연이 그린 거대한 그림 사진과 복원된 보디 페인팅 사진을 나란히 놓았다. 그것들은, 같은 시간에 같은 대상을, 다른 각도에서 다른 필터로 찍은 두 장의 사진처럼 보였다.

이원은 홀린 듯 같은 이름을 가진 두 개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왜인지 이 작은 우연이 기적처럼 느껴진다.

Via Dolorosa, 각자 힘겹게 걸어가던 두 개의 길이 드디어 한곳에서 만난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혹은 운명처럼.

천천히 1층으로 내려와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아침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6월 초여름의 햇볕이 쨍, 하니 얼굴로 쏟아진다.

이원은 불현듯 생각했다.

너를 만나러 가기에 딱 좋은 날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