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누드-35화 (35/47)

35. 사냥

“오랜만이다, 미현아. ……서울에 들어왔는데도 만나기가 쉽지 않네.”

토요일 저녁,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있던 미현은 가사 도우미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서는 사내를 보자마자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초인종이 울리기에 택배라도 온 줄 알았는데, 난데없이 이원이 손을 들어 보이며 빙긋 웃고 있다. 그것도 단정한 정장 차림에 머리까지 말끔하게 정돈한 상태로.

“이원 오빠? 여, 여기는 어떻게……?”

미현은 당황한 기색을 얼른 감추며 웃어 보였지만, 타이밍을 잃은 웃음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오늘은 우연을 한국에서 쫓아낸 지 딱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우연이 실종된 날, 이원의 자택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고 들었다. 미현은 그 소식을 듣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제 슬슬 마이애미로 사람을 보내 확인해 볼 참이었다.

다만, 박 이사를 통해 보고받은 바로는, 이원은 우연을 찾는 것을 바로 포기한 듯하다고 했다. 실종 신고도, 수색 작업도 전혀 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나흘 만에 여기에 찾아온 걸 보면 우연을 포기했다는 말이 맞는 듯했다.

물론 바람직한 방향이긴 했지만, 사나흘 만에 자신에게 돌아왔다는 건 약간 이상했다. 실종된 그 애를 회사 로비에서 발견했을 때는, 그 사람 많은 데서 정신 줄을 놓아 버렸다더니, 섹스 몇 번 하고 정복욕이 충족되니 바로 정신을 차린 걸까? 그냥 며칠 만에 싫증이 난 걸까?

충분히 개연성 있는 가정이었다. 미현의 주변에는 돈과 권력이 넘치는 사내들이 널렸고, 그런 놈일수록 마음에 둔 여자를 기어이 정복하려는 집념이 강했다. 하지만 집념에 반비례하여 섹스가 끝나면 단숨에 흥미를 잃어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미현은 그 개같은 속성을 힘 있는 사내들의 고약한 유전자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여기까지 웬일이야, 오빠? 무슨 일 있어?”

“약혼자를 무슨 일이 있어야만 만나니? 만나러 갔는데 길은 어긋나고, 서울에 왔는데 통화도 어렵고, 계속 바쁘다고만 해서 집까지 찾아온 거지.”

하지만, 바람직한 것과는 별개로, 그와 대면하기엔 시기상조였다. 나흘이란, 아무리 이원이라도 감정을 추스르고 정돈하기엔 다소 버거운 시간이다. 재협상에는 비난과 자존심 긁기, 후려치기와 달래기가 고루 포함될 것인데, 이원이 그것에 휘말려 무너지면 협상 자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늘 침착하던 사내가 이성을 잃고 허물어지는 모습을 보면 통쾌하고 재미있을 것도 같지만, 그랬다간 귀찮아지는 것은 결국 자신이었다.

미현이 한동안 침묵하자 이원이 부드럽게 웃으며 묻는다.

“혹시 내가 여기 온 게 곤란하니?”

“곤란할 리가. 나도 오빠를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하지만 우리 집에서, 그것도 이렇게 늦은 시간에 보자고는 안 했는데.”

미현은 말을 하다 말고 잠시 머뭇거렸다. 불청객이라고 면박을 주기엔, 자신 역시 이원의 집에 멋대로 드나들며 행패를 부렸던 전적이 있다.

“……그래. 시간이 좀 늦긴 했구나. 그럼 나 쫓겨나는 거니?”

“물론 내가 그렇게 매너가 없진 않아, 오빠. 앉아.”

“아니, 미현이 쟤는 말하는 게 왜 저리 까칠해? 한 서방이 못 올 데 왔니?”

손님을 맞이하려고 뒤늦게 방에서 나온 어머니가 태연하게 한 서방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다. 아직 어머니는 두 사람 사이의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다. 미현은 입을 비죽대며 내뱉었다.

“……오빠가 약혼녀 집에 와 준 게 처음이라 황공해서 그러지.”

“저거 말본새 좀 봐. 약혼자를 2년이나 팽개쳐 놓고 뉴욕에 박혀 있던 주제에. 내가 한 서방이었으면 머리채 잡아끌고 와서 진작 식 올렸어. 그리고 너 왜 한 서방 전화도 안 받아?”

“이사님, 괜찮습니다. 지금이라도 봤으니 됐죠.”

“되기는 뭐가 돼. 결혼 앞둔 애가 머리 꼴은 이게 또 뭐고. 어휴, 볼 때마다 식겁해서.”

결혼이 깨질까 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우 이사는, 딸을 뒤늦게 쥐 잡듯 잡아 대기 시작했다. 그사이 최홍연 실장이 따라 들어오며 두 사람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했는데, 우 이사는 시선도 돌리지 않고 퍼부어 대기 바빴다. 우 이사 역시 딸과 마찬가지로 고용인들의 인사를 제대로 받아 주는 일이 거의 없었다.

“별일은 없었니? 입국한 지 꽤 됐는데 그동안 많이 바빴나 봐.”

“뭐, 오빠도 알다시피 나야 늘 바쁘지. 게다가 결혼 준비까지 겹치니 정신이 없네.”

두 사람의 대화는 온기도 냉기도 없이 밍밍하게 겉돌았다. 이상한 기색을 눈치챈 우 이사는 안절부절못하며 쩔쩔맸다. 도우미가 곱게 장식된 과일과 쿠키를 내오자 결국 미현이 들어가라 눈치를 주었고, 우 이사는 내키지 않는 듯 자리에서 일어난다.

“날짜도 얼마 안 남았는데 의논할 일이 많겠지. 난 들어갈 테니 둘이 편히 얘기해.”

방문이 닫힌 것을 확인한 이원은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은 채 낮은 목소리로 묻는다.

“미현아.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응?”

“네가 우연 어머니 이혼 소송을 도와준 이유가 뭐니?”

씨발. 갑작스러운 공격에 저절로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설마 그년이 나가기 직전에 입을 털었나? 입 털면 내가 일 엎어 버리고 아빠에게 주소 연락처 알려 준다고 분명히 말해 두었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도와줬다고 누가 그래?”

“최 실장이 박원주 이사님을 뵙고 왔어. 세경홀딩스와 법무법인 영보와의 접점은 박 이사님뿐이라서. 네가 끼어 있을 줄은 몰랐지만.”

제기랄. 앞이 노래지기 시작했다. 차 변하고 박 이사하고 친구란 걸 알고 있었구나.

박 이사는 대체 왜 그렇게 미주알고주알 다 털어 버린 거지? 내가 그렇게 입단속을 했는데? 씨발, 벌써 노망이 처들었나. 하여튼 늙은것들은 믿으면 안 된다니까.

미현은 빠르게 머리를 돌려서 가장 납득 가능한 변명을 생각해 낸 후,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고 한숨을 쉬었다.

“……박 이사가 전에 그러더라고. 오빠가 특별히 후원하는 미술 영재 학생이 있는데, 그 아버지가 오빠를 폭행했다가 수감됐다는 거야.”

“아하.”

“그래서 이 기회에 학생 어머니 이혼 소송까지 함께 진행해서 학생도 아버지의 폭력에서 벗어나게 도와주는 게 어떻겠냐고 오빠한테 건의하겠다 하더라고.”

이원은 가타부타 없이 잠자코 듣기만 한다. 진땀이 흘러내린다. 오빠가 박 이사한테 어느 선까지 실토를 받았는지 알 수 없으니 최대한 애매하게 뭉뚱그려야 했다.

“그래서?”

“웃기지도 않아. 오빠가 그 애한테 달에 몇백씩이나 후원하면 그걸로 끝이지, 왜 그 엄마 이혼 소송까지 해 줘야 해? 사람들이 대체 어떻게 생각하겠어? 이 일이 언론에 흘러 나가면 소문이 어떻게 날지 생각 안 해 봤어?”

“아아, 그래서?”

미현은 맞은편에 앉아 무심히 되묻는 사내를 쏘아보았다. 의례적인 미소를 띤 채 업무 보고를 받는 듯한 태도에서는 일말의 온기도 느낄 수 없었다. 이원은 자신을 열렬히 사랑한 것은 아니지만 매우 예의 바르고 정중한 약혼자였고, 이런 태도를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미현은 일단 부글부글하는 속을 누르며 대답했다.

“그래서 그 건은 회사 차원이 아니라 다른 변호사 통해서 조용히 처리해 달라고, 개인적으로 부탁한 것뿐이야.”

“……그걸 왜 굳이 네가?”

“왜냐니. 나라고 좋아서 그랬겠어? 우리 결혼이 더러운 소문에 진창이 되는 꼴을 안 보려고 이러는 거 아니야!”

미현은 날카롭게 받아쳤다. 납득 가능한 설명, 납득 가능한 분노, 하지만 이원은 잠자코 듣기만 할 뿐 여전히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미현은 저 무표정한 얼굴이 순간 섬뜩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오빠 지금 나한테 뭐 하는 짓이야? 취조하는 거야, 이거?”

“……취조라니,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라고 했잖니.”

“오빠가 나한테 이따위로 따질 때야? 당장 무릎 꿇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내가 왜 오빠 연락도 안 받고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왜 안 받았는데?”

이원은 너무나도 담담하게 되물었다. 미현은 드디어 폭발했다.

“누군 눈도 귀도 없는 줄 알아? 오빠가 그 애를 집에 끌어들여서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를 줄 아냐고! 왜? 접때처럼 후원하는 학생이고, 치료차 집으로 불렀고,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주절대 보지 그래!”

미현은 탕, 소리가 나도록 탁자를 후려치며 고함을 질렀다.

“사실 이 결혼은 나보다 오빠가 훨씬 절실한 거 아니야? 그럼 대놓고 나한테 이러는 건 경우가 아니지. 지금도 우리 도움으로 간신히 자리 지키고 있는 거잖아.”

“경우?”

하, 차가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미현은 놀라서 잠시 말을 잃었다. 이원은 이상하리만큼 냉정하고 침착했고, 그래서 미현은 새파랗게 날 선 회담장에 끌려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미현이 너야말로 나한테 경우를 따질 때는 아닌 것 같은데? 사실혼을 몇 년씩 유지하면서 감쪽같이 속이고 나와 결혼하려는 건 경우에 맞는 짓인가?”

“사실혼? 이건 또 무슨 생트집이야!”

“모리스 첸하고 3년 넘게 동거 중이고, 주변에선 다 공인된 사이라는데 그게 사실혼이 아니고 뭘까?”

차갑게 탁 지르고 들어오는 말에 미현의 눈썹이 확 솟구쳤다.

이거 뭐야? 왜 지금 와서 이래? 지금껏 빤히 알고도 가만히 있다가 왜?

……그걸 건드리면 안 되는 거, 오빠가 더 잘 알 텐데? 그 애도 떠나고 없는데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미현은 이원이 모리스에 대해 침묵했던 것을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라고 생각했다. 진실을 짐작하면서도 확인하지 않고 자존심을 유지하는 것과, 진실을 굳이굳이 확인한 후 비굴함을 감수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미현은 이원이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킬 만큼의 지혜는 있다고 생각했었다.

입꼬리가 비딱하게 기어 올라갔다.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도 사양하지 않는다. 오빠의 자존심을 아주 바닥에 자근자근 밟은 후 다시 시작하면 된다.

하지만 짜증스럽고 귀찮아서 속이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나마 약혼 후 모리스를 어르고 달래고 협박해서 인근 스튜디오로 내보낸 것이 신의 한 수였다.

“사실혼 따위의 헛소리 떠벌린 놈이 대체 누구야? 피해 보상 청구서를 수십만 달러 받아 봐야 정신을 차리겠네. 그 아파트에선 나 혼자 살고 있어. 어디서 확인도 안 하고 생사람을 잡아?”

“글쎄. 내가 며칠 전에 직접 들은 이야기하고는 좀 다른데.”

이원이 희미하게 웃으며 전화기를 꺼내 음성 파일을 재생했다. 잡음이 꽤 섞여 있었지만, 그곳에서 들리는 것은 분명 모리스 첸의 목소리였다.

― 꽃하고 선물? 매거릿은 볼일 보러 며칠 한국 다녀온다고 했는데? 내가 받아 둘게.

― 직접 전달 요청? 내가 틀림없이 전해 줄 테니 이리 내라고. 아 그냥 같이 사는 남친이 수령했다고 하면 되지 뭘 이리 빡빡하게 굴어. 내가 서명하면 될 거 아냐.

― 동거인 맞다니까? 택배 하나 대신 받는데 사실혼 증명까지 해야 해? 쉣, 새로 이사 온 거 아니고, 일하는 사람도 아니야! 내가 이 집에서 산 것만 3년이 넘어! 이게 무슨 개같은 소리야!

― 너 기사 주제에 왜 이렇게 말이 많아? 너 택배 기사 맞아? 스토커 아니야?

― 내 여자한테 자꾸 집적대면 죽여 버린다. 꺼져 이 개자식아!

미현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모리스에게 가끔 아파트에 들러서 우편물 관리만 해 달라고 했다. 빈집처럼 보이지 않게. 그런데 아예 집에 퍼질러 있었나?

같이 사는 남친? 동거인? 사실혼 증명? 내 여자?

이 미친 마초 새끼, 개같은 말버릇 기껏 잡아서 고쳐 놨나 했더니. 이런 일이 생길까 봐 그렇게 입조심을 시켰는데.

이원은 재생을 중지시키고 미현을 돌아보았다. 그의 깊은 갈색 눈동자에는 미현이 기대했던 어떤 감정도 존재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모리스가 저렇게 말한 상황이라면,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 봐야 부질없는 일이었다. 미현은 눈썹을 찌푸리고 팔짱을 끼었다.

“어쩌라고? 지금 오빠가 원하는 게 이 판을 엎고 세경을 포기하겠다는 거야?”

물론 이건 가장 좋지 않은 방향이었다. 판이 뒤집히면 이원은 아버지의 지분과 경영권을 모두 잃지만, 미현 자신도 호텔 경영권을 얻지 못한다. 미현은 이원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판이 무너지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꽤 무리수까지 두어 우연을 외국으로 보내지 않았던가.

“미현아. 약혼 전에 복잡한 관계를 정리해 달라던 내 부탁이 부당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 그럼에도 네가 여전히 모리스라는 사람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건, 나와의 결혼 의사가 없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어. 그렇지?”

“그 원인 제공이 어느 쪽이었는데? 성욕이 지나치게 없는 것도 엄연히 혼인 파기 사유야. 세상에 어떤 여자가 고자 수도승하고 결혼하고 싶겠어? 대놓고 몇 번이나 유혹해도 반응이 없는데, 그게 불능 아니면 뭐야?”

참한 약혼녀의 가면을 벗어던졌지만, 이원은 놀란 기색도 없이 짧게 웃을 뿐이었다.

“나는 성욕에 미쳐 있다는 걱정은 자주 했지만, 부족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 그냥, 너하고 섹스를 하기 싫었을 뿐이야. 오해했구나.”

이원의 말투는 지나치게 담백해서 내용과 괴리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관건은 섹스 여부가 아니라 유언장이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여부겠지. 네가 유언장 내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세경의 상속분 (주)세경홀딩스의 보통주 785,500주, 25%의 지분에 대하여 상속인 한이원은 우성희 이사의 딸 유미현과의 혼인 신고를 필하기 전까지 상속 지분을 행사할 수 없음.」

유언장 내용을 한 자 한 자 읊어 내리던 이원은 미현 쪽으로 살짝 몸을 굽히더니, 조곤조곤 속삭이듯 말했다.

“그런데 미현아, 안타깝게도, 내가 며칠 전에 ‘결혼 대상자가 사실혼 상태였다면 그 유언은 무효가 될 수 있다’는 법리 해석을 받았어. 국내에서 손꼽히는 법무법인 세 군데서.”

미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서로 다 알고서도 필요하니까 약혼했던 거잖아! 2년 넘게 우리 지분으로 꿀 빨다가 왜 지금 와서 딴소리야?”

“무슨 말이지? 난 전혀 몰랐어. 내가 네 뒷조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알았겠니? 나는 며칠 전 뉴욕의 네 아파트에 갔다가, 정말 ‘우연히’ 네가 ‘몇 년간’ ‘사실혼 상태’였다는 걸 확인하게 된 건데?”

이원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한 자, 한 자 반복해 오금을 박는다. 미현은 기가 막힌 걸 넘어 소름이 끼쳤다. 저 오빠도 저렇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할 수도 있구나.

띠르르르, 띠르르르, 띠르르.

순간 밖에서 초인종이 울린다. 일하는 사람이 현관문을 열자마자 분노에 찬 고함 소리가 쩌렁쩌렁 천장을 울렸다.

“한 전무! 한이원 이 개새끼 여기 와 있어? 어디 있어! 내가 아주 죽여 버린다!”

* * *

“어떡해, 나 어떡해. 우연아, 우연아, 우리 이제 어떡하면 좋으니!”

엄마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종일 흐느꼈다. 우연은 이를 악물고 귀를 틀어막았다. 엄마의 전화기로 아무리 검색을 해 봐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출국 금지 풀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출국 금지 사유. 인터넷 정보란에 뜬 몇 줄만으로도, 엄마가 아빠에게 고소를 당해서 출국 금지 상태가 되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범죄의 수사를 위하여 그 출국이 부적당하다고 인정되는 자, 형사 재판에 계속(係屬) 중인 자, 징역형 또는 금고형의 집행이 종료되지 아니한 자, 법무부령이 정하는 금액 이상의 벌금 또는 추징금을 납부하지 아니한 자, 법무부령이 정하는 금액 이상의 국세ㆍ관세 또는 지방세를 납부하지 아니한 자…….」

우연은 읽고 읽고 또 읽었다. 범죄의 수사, 재판, 3개월, 혹은 6개월, 계속 연장. 기다린다고 풀린다는 보장도 없었다. 출국 금지 조치는 문제를 해결한 후 풀어 달라고 신청을 해야만 풀리는 거였다.

“우연아, 그거, 그거 다시 읽어 봐. 특별히 출국 금지 풀어 주는 케이스 있다고 했잖니.”

“출국 금지로 인하여 생업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인정되는 경우, 출국 금지로 인하여 회복하기 어려운 중대한 손해를 입을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 그 밖에 인도적인 사유 등으로 출국 금지를 해제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

우연은 더듬대고 읽으면서 암담하게 한숨을 쉬었다. 사정을 참작해서 특별히 풀어 주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꽤 드문 모양이었다.

바짝 집중해서 듣던 엄마가 몸을 일으켰다. 제대로 씻지도 못한 얼굴과 머리에는 개기름이 좔좔 흘렀고, 입가에는 허옇게 버짐이 피었다. 하지만 눈동자는 놀랄 만큼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 그거야. 출국 금지 때문에 우리는 회복하기 어려운 중대 손해를 입었어. 지금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있는데 나가지도 못하고 있잖아.”

눈동자가 우연이 있는 쪽으로 빙그르르 돌아가면서 흰자위가 크게 번들거린다.

“목숨을 구해 주는 것보다 인도주의적인 사유가 어디 있어? 우연아, 그거 한번 알아봐서 신청해 봐. 응? 우연아!”

“아 씨, 내가 그걸 어떻게 해! 누가 아파트 팔아서 튀래? 아빠가 얌전히 당하고 있을 줄 알았어? 돈 돌려주고 출국 금지 풀어 달라고 하면 되잖아!”

“그럼 네 아빠를 만나야 하잖아! 누구 죽일 일 있니? 그것 좀 빨리 알아봐! 좀!”

“나한테 뭘 어떡하라고! 난 그딴 거 몰라! 엄마가 하면 되잖아!”

“나이 스물두 살이나 처먹도록 왜 그걸 몰라!”

“엄마야말로 나이 마흔 넘게 처먹도록 뭐 했어!”

우연은 목에 핏대를 세워 고함을 질렀다.

엄마는 다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휴대 전화의 검색창을 띄운다. 검색 속도가 몹시 느린지 전화기를 주먹으로 팍팍 치며 안절부절못하더니 한참 만에야 번쩍 고개를 든다.

“우연아. 공탁이란 게 있대. 갚아야 할 돈을 직접 못 주면 공탁을 걸어서 돈을 나라에 맡기는 경우도 있대. 그러면 직접 얼굴 보고 갚지 않아도, 갚은 거로 쳐주기도 하나 봐.”

“그런데 우연아, 공탁을 어떻게 걸지? 이걸 누구한테 물어보지?”

“뭐가 이렇게 복잡해. 왜 이렇게 복잡해.”

머리를 쥐어뜯으며 중얼대는 엄마는 반쯤 미쳐 버린 것 같았다.

“엄마, 그럼 아까 그 유미현이라는 사람한테 전화하면 안 돼? 일이 이렇게 됐다고, 이거 공탁하고 출국 금지 푸는 거 도와줄 수 있느냐고.”

“안 돼! 미쳤니?”

엄마는 찢어지는 소리로 맞받았다.

“절대 전화하지 말랬잖아! 그랬다간 아빠한테 우리 숨어 있는 곳 알려 줄 거라고 했잖아!”

“그럼 평생 여기 숨어 있을 거야?”

“그래, 그, 그러면 그 변호사님, 차영보 변호사님한테 전화해 보면……. 그래. 변호사니까 공탁 같은 거 하는 방법은 잘 알고 있을 거야.”

엄마는 더듬더듬하며 번호를 눌렀다. 하지만 아무리 애타게 눌러도 전화를 받지는 않는다. 지금은 업무 시간이 끝났사오니, 내일 아침, 9시 이후에 다시 걸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업무 시간이 끝났사오니……. 엄마는 똑같은 멘트가 열 번쯤 되풀이될 때까지 멍청한 얼굴로 계속 전화기를 잡고만 있었다.

우연은 방구석에 쭈그리고 앉았다. 본채와 떨어진 창고를 개조해 민박용 방으로 꾸민 이 별채는, 사방 더럽고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라 기름보일러가 돌아가고 있었는데 기름값이 비싸다고 난방 온도는 16도로 고정돼 있었고, 창틈과 문틈으로는 찬 바람이 훅훅 들어왔다. 그동안 청소를 제대로 하지 않아, 구석구석이 음식 쓰레기에 먼지 덩어리였고, 방 한가운데로 이름도 알 수 없는 벌레들이 겁도 없이 기어 다녔다.

엄마는 그때마다 자지러지게 소리를 지르며 우연을 불렀다. 우연은 벌레를 잡아 주는 대신 무릎 사이에 머리를 처박고 귀를 막았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있는 본채에는 가는귀먹은 주인 할머니만 살았는데, 엄마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시끄럽다고 화를 내지 않았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뭔가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기엔 너무나 많은 일이 폭풍처럼 휩쓸고 지나갔다. 그중에서 우연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뭔가를 선택할 여지조차 없었고, 도망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러한 파국이 놀랍지도 않았다. 우연은 자신의 인생에서 존재했던 장밋빛 계획들은 항상 베이컨의 회화처럼 처참하게 일그러지곤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저씨 말대로 도망치지 않고 두려움과 싸워 보는 게 나았을까?

아저씨를 믿고 뻔뻔하게 그곳에서 버티며 온갖 가책과 자괴감과 위협과 걱정과 싸워 보는 게 나았을까?

하지만 아저씨 옆에 남기로 결정을 했다면, 아저씨는 분명 파혼을 했을 것이다.

자, 진우연 대답해 봐. 그래도 네가 아저씨 옆에 빌붙어 있는 게 옳아? 아버지 재산도 상속 못 받고, 대표이사 자리에서도 잘리고, 언제 어디서 튀어나와서 무슨 해코지를 할지 모르는 아빠의 위협에 늘 신경을 곤두세워야 할 텐데?

그래. 아저씨 곁을 떠난 건 맞는 결정이다.

다만 미치게 보고 싶을 뿐이다.

아저씨, ……보고 싶어요.

우연은 무릎을 모으고 두 손으로 감싼 후 고개를 푹 숙였다. 아저씨에 대한 마음은 늘 뜬금없이 자신을 공격했고 상황과 상관없이 고집을 피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저씨의 집을 나온 후부터 눈물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저씨가 생각날 때마다 눈물이 나오는 대신, 대형 포클레인 바퀴가 가슴을 짓뭉개고 지나가는 것처럼 아프기만 했다. 눈물샘은 어쩌면 눈이 아니라 가슴에 박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우연은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눈을 힘껏 깜박대며, 머릿속으로 고이는 한마디를 천천히 뇌었다.

아저씨, 사랑해요.

……대체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아저씨, 사랑해요.

그냥, 그게 전부였다. 아저씨, 사랑해. 내가 참, 나도 이 마음이 어디서 왔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데, 진짜 사랑해요. 대상마저 잃어버린 이 감정은, 우연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남은 것이었다.

“아악! 왜, 왜 전화를 안 받아, 밤 9시밖에 안 됐는데! 왜!”

옆에서 엄마가 전화기를 집어 던지며 얼굴을 감싸고 흐느낀다. 우연은 엄마의 좌절에 반응하는 대신 몸을 바짝 꼬부렸다. 뇌는 엄마의 고함 소리를 인식했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어쩌면 뇌와 몸을 연결하는 통신망이 모조리 끊어져 나갔는지도 모르겠다.

우연은 전화기를 붙잡은 채 눈을 감고 고민했다.

만약에, 만약에…….

지금 아저씨에게 전화가 오면 받아야 할까?

그것은 너무나 절실하고 강렬하며 반복적인 유혹이었다. 우연은 이번에도 유혹을 이기려 기를 쓰고 버티다 결국 눈을 가늘게 뜨고 전화기를 다시 켰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부질없이 반복하는 짓이었다.

……역시.

생각했던 대로였다. 아저씨에게서 온 전화는 한 통도 없었다. 아저씨는 우연이 집을 나온 후 단 한 번도 전화를 하지 않았다. 홍연 아저씨나 정 관장님을 통해서도, 심지어 문자나 메신저 메시지조차 없었다.

아저씨가 자신을 찾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다는 것을 알았다. 진작 알고 있었다. 다만, 아저씨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감히, 차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만약에, 아주 만약에, 지금이라도 아저씨에게 전화가 오면…….

받아야 하지 않을까? 그때처럼 나를 애타게 찾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아냐. 이제는 무섭게 화를 낼지도 몰라.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

아냐. 혹시, 그래도…… 울면서 도와 달라고 하면 다시 오라고 하실지도 몰라.

우연은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거머리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아저씨의 목소리를 간절히 듣고 싶지만, 그랬다간 두려움에 눈이 멀어 버린 또 다른 진우연이 뻔뻔하게 동정을 구걸할지도 몰랐다. 우연은 이제 자신의 이성이나 자존심, 양심 따위를 전혀 믿을 수 없었다. 갈팡질팡 고개를 젓다가 두 손을 엉성하게 모았다.

아저씨가 믿는 하느님, 정말 계신다면, 저한테 대답 좀 해 주세요.

혹시 아저씨가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저한테 전화를 한다면, 그 전화 받아도 되나요?

만약에, 정말 만약에, 아저씨가 돌아오라고 한다면, 돌아가도 되나요?

그리고, ……그냥 사랑해도 되나요?

아저씨가 벌써 이렇게 보고 싶은데, 이제 난 어떡해요?

……아저씨에게 전화 한 번만, 딱 한 번만 오게 해 주시면 안 돼요?

늘 그렇듯,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우연은 신의 존재 증명이 전화벨 소리라도 되는 듯, 끈덕지게 전화기를 들여다보았다.

“……어!”

순간 전화기에 깜박, 불이 들어오더니 손이 부르르 떨렸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경쾌한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우연은 눈을 크게 떴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발신자 번호 제한 표시가 뜬다.

……저, 정말, 아저씨가?

우연은 저도 모르게 황급히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 댔다.

“여, 여보세요?”

― …….

수화기 너머에서는 고요한 침묵이 이어졌다. 잠시 후, 전화가 갑자기 툭, 끊어진다. 우연은 멍하니 수화기를 들여다보았다.

“……아저씨?”

눈이 욱신 쑤신다. 받을지 말지 결정도 안 했는데, 저도 모르게 받고 말았다. 결심이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질 줄은 몰랐다.

아저씨.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한마디라도 하시지 왜 끊으세요?

무슨 말을 하고 싶으셨던 건가요?

기운이 빠져 어깨가 축 늘어진다. 순간, 다시 전화기가 울렸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 …….

“아저씨! 아저씨?”

딸깍.

우연은 전화기를 움켜잡은 채 망연자실했다. 아저씨도 당황한 걸까. 내가 이렇게 애타게 부를 줄은 몰랐을까.

새하얀 통화 종료 화면만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눈 속이 미칠 듯이 쑤셨는데, 눈물길은 바짝 말라서 눈꺼풀을 깜박일 때마다 안구의 껍질이 벗겨질 것만 같았다.

부우우, 우웅.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집 옆의 좁은 길로 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제야 천천히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끼이이. 끽.

워낙 허술히 지어진 건물이라, 차 멈추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처럼 시끄러웠다.

……잠깐. 차 멈추는 소리……?

고개를 갸웃했다. 이 집은 상당히 외진 데다, 포장도로도 없이 흙길로 들어와야 하는 막다른 집이었다. 더구나 멀쩡한 본채도 아니고, 창고처럼 허름한 별채 건물인데…….

굳이 이 앞에서 차를 멈췄다고?

갑자기 등 뒤로 소름이 쫙 솟았다. 혹시, 지금 바로 끊어졌던 전화가!

“우욱!”

공포로 위가 크게 요동치더니 이내 내장이 뒤틀리며 구역질이 치솟았다. 아으, 윽, 우연이 배를 끌어안고 몸을 확 구부리는 순간, 차 문이 달칵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엄마!”

황급히 뒤를 돌아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의 눈과 입이 커다랗게 벌어져 있었다. 이불에 묻혀 있던 몸이 들들 흔들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느낌은 단 한 가지를 말하고 있었다.

“어, 엄마……. 엄마!”

“우연아, 저, 저, 저기……. 혹시…….”

순간 밖에서 매우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아이고 기사님 감사합니다. 귀찮게 부탁을 드렸네요.”

“이 집이 맞나요?”

“예, 맞는 것 같습니다.”

“우, 우연아!”

엄마는 새하얗게 질려 이불을 황급히 뒤집어썼다. 맙소사, 맙소사! 아빠가 어떻게 여길.

우연은 벌떡 일어나 허술한 문고리를 걸고 두 손으로 꽉 잡았다. 손이 우들우들 떨리기 시작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대체 여길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야!’

‘누가 알려 준 거야? 우리가 여기 있는 거 아무도 모르잖아.’

엄마가 눈을 희번덕대며 중얼거린다.

이를 악물었다. 이제 중요한 건, 아빠가 여길 어떻게 알았느냐가 아니다. 문제는 지금 아빠가 이 집 앞에 서 있다는 거고…….

똑똑똑, 똑똑.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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