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누드-34화 (34/47)
  • 34. 도주

    빵빵.

    편의점에서 앉아 라면을 먹고 있으니, 뒷문 쪽으로 택시가 다가와 짧게 클랙슨을 울린다. 우연은 라면 국물을 들이켜는 척하며 조금 더 꾸물거렸다. 이제 가면 아저씨 집에 영영 올 일이 없다 생각하니 몸이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하지만 1분도 되지 않아 검은 선글라스를 쓴 기사가 창을 열고 우연에게 손짓을 한다.

    라면을 내려놓고 뒷문으로 빠져나가 택시 조수석에 올라탔다. 미현은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머리를 이상한 자주색으로 물들인 채.

    “짐이 이게 다야?”

    미현이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우연의 짐은 누런 에코백 하나뿐으로, 반나절 후에 출국할 사람의 짐치고는 지나치게 단출했다.

    “미친……. 너 출국할 생각으로 나온 거 맞아? 너 지금 미국 가는 거야. 요 앞에 슈퍼 가는 게 아니고.”

    “가져갈 게 없어요. ……엄마가 집 팔아서 내 물건들이 어디 있는지도 몰라요. 아저씨에게 받은 건 다 돌려드리고 왔고요.”

    미현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혀를 찼다.

    저 아이는 세상에 제대로 발을 딛고 사는 것 같지 않았다. 학대하는 부모에게서 간신히 도망쳤나 싶었는데 결국 도로 제자리. 엄마는 집까지 홀랑 팔아서 이제 머물 곳조차 없이 쫓기는 상황이었다. 미현은 지갑에서 5만 원권 대여섯 장을 꺼내 내밀며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여권부터 찾고, 공항 가면 배낭 하나 사서 필요한 거 몇 가지 집어넣어. 남으면 엄마 몰래 환전해서 비상금으로 챙겨 두고. 네 엄마 하는 꼬라지 보니 나가서도 너 버리고 또 튈 수도 있겠더라.”

    “……고맙습니다.”

    우연은 슬며시 눈동자를 굴리며 미현의 눈치를 살폈다. 묻지 말아야지, 물어보면 안 돼, 하며 열심히 찍어 누르던 노력이 무색하게, 입속에서 뱅뱅 돌던 말이 톡 튀어 나가고 만다.

    “언니는 이제…… 아저씨랑 결혼하나요?”

    “씨발, 몰라서 물어? 그러려고 이 지랄을 하는 거잖아.”

    미현은 곧 한국을 뜰 우연 앞에서 가면을 벗어 치우기로 작정한 듯했다. 미현은 생각보다 입이 험했고, 우연은 그것이 무척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저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자는 어떤 표정이든 어떤 말이든 정말 자연스러웠다. 매력이라면 굉장한 매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미현이 한쪽 입술 끝만 비틀어 올리며 웃었다.

    “왜? 오빠가 영원히 결혼도 안 하고 너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뒤질 것 같아? 아, 네에. 너를 찾느라고 정신 나간 꼴을 보고 싶으시겠죠. 아주 지랄 똥을 싸세요.”

    쏘아대는 미현의 말투는 짜증을 넘어 노기(怒氣)가 가득해서 우연은 한마디도 대거리하지 못했다.

    “안됐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내가 장담해.”

    “…….”

    “오빠는 상황 판단이 좋고 손절 빠른 CEO로 업계에 소문이 자자해. 아니다, 하고 결론 내리면 아무리 열심히 추진하던 일이라도 바로 잘라 버리고 잊을 수 있는 사람이란 뜻이지. 사람 잘 보기로 소문난 한 회장님이 왜 아들을 기어이 신학교에서 끌어냈는데. 그러니 너도 그쯤 하고 꿈 깨시지.”

    ……아니야.

    우연은 눈을 멀거니 뜬 채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저씨는 잘라 버리지 못할 것이고, 잊지도 못할 것이다. 아저씨는 오래전 달팽이와 거북이도, 눈앞에서 죽은 불쌍한 아기도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다. 나에 대해서도 그럴 것이다. 내가 아저씨를 자르지도 잊지도 못할 것처럼, 아저씨도 그럴 것이고, 내가 정신이 나간 것처럼 아저씨도 그럴 것이다. 저 여자는 아저씨에 대해 완전히 잘못 알고 있다. 그렇게 오래 알고 지냈다면서.

    ……다행이야.

    순간, 갑자기 튀어나온 마음의 소리에 우연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래, 다행이야. 저 여자는 그런 거 끝까지 몰랐으면 좋겠어. 어차피 아저씨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잖아. 아저씨를 가장 깊이 사랑하고, 가장 깊이 이해하고, 가장 밑바닥까지 받아들인 건 세상에 나 하나면 충분해. 그렇잖아?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이따위 생각이나 하는 자신이 가증하다 못해 목을 졸라 죽여 버리고 싶었다.

    우연은 건건하게 눈만 깜박였다. 아저씨와 헤어지면 슬퍼서 정신없이 눈물만 나올 줄 알았는데 눈물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다. 흘러나오는 것은 오로지 이따위 악귀 같은 목소리와 질투, 증오, 자괴감뿐이었다. 우연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썩을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아저씨가 누구하고든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시기를 빌어야 한다. 나 같은 것한테 휘둘리지 말고, 그냥 미워하고 원망하고, 아니 그럴 것도 없이 얼른 잊어버리고, 잘 맞는 사람이랑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강아지도 기르고, 고양이도 기르고, 마당에 꽃과 나무도 기르면서, 그렇게 행복하게 사시기를 빌어야 한다.

    ……그게 아니면 행복하다고 세뇌라도 하면서.

    아저씨는 그런 거 잘하니까. 제발, 그렇게라도.

    “오빠 모르게 나왔지? 이틀이나 먼저 들어올 줄은 몰랐지.”

    미현의 목소리가 탁 끼어든다. 우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아저씨는 자신이 사라진 이유를 오랫동안 모를 것이고, 어쩌면 영원히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오빠가 답지 않게 전화를 꽤 했었더라고? 너 때문에 새로운 협상을 해 보려는 거겠지만, 네가 떠난 걸 알게 되면 생각이 달라지겠지.”

    “네.”

    “난 오빠 마음이 어느 정도 정리된 후에 만나 볼 생각이야. 머저리처럼 맞불 놓을 생각은 없으니까. 보름 정도면 충분해. 결혼 준비는 그때부터 다시 진행해도 늦지는 않을 거고.”

    “……네.”

    “네가 도망친 걸 알면 놀라긴 하겠지. 물론 내가 한 짓이라고 실토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놀라는 얼굴은 좀 보고 싶네.”

    놀라는 정도가 아니겠지. 그 후폭풍을 여려 터진 아저씨가 어떻게 감당할까. 눈 안쪽이 욱신 쑤시는데, 그 속을 읽기라도 한 듯 픽, 코웃음 소리가 들렸다.

    “네 코가 석 잔데 누굴 걱정해? 네 코나 자알 닦도록 하세요.”

    강남에서 공항까지 가는 길은 길고 답답했다. 교통 체증에 걸린 차는 두 사람의 사정도 모른 채 하염없이 기었다. 지루한 얼굴로 휴대 전화를 들여다보던 미현이 툭 말을 던진다.

    “이 머리카락 어때? 여왕 마고 콘셉트로 염색한 건데, 예쁘니?”

    우연이 얼빠진 얼굴로 고개를 들자 미현이 긴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매만졌다. 자줏빛이 도는 붉은 폭포가 미현의 손길에 따라 크게 출렁대다가 촤르르 흘러내린다. 우연은 자라목을 하면서도 하고 싶은 말은 기어이 하고야 말았다.

    “……안 예뻐요.”

    하, 기가 막힌다는 듯 미현이 웃었다.

    “왜? 왜 안 예뻐?”

    안 예쁜 데 무슨 이유가 있을까? 안 예쁘다. 그냥 정말 안 예쁘다. 머리에 돼지 피를 쏟아 놓은 것 같다. 하지만 그 말을 그대로 해 줄 수는 없었다.

    “크림슨은 잘못 쓰면 천박하거든요.”

    미현의 얼굴이 갑자기 싸늘해졌다. 하지만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 붉은 입술을 이죽대면서 물었다.

    “천박이라? 그럼 잘난 네 눈깔엔 무슨 색깔이 고상해 보일 것 같아?”

    세피아요, 하고 튀어 나가려는 것을 우연은 황급히 잡아채고 얼른 다른 색을 갖다 댔다.

    “피코크 그린……. 공작 꼬리 색이요.”

    “왜? 왜 하필 피코크 그린이야?”

    안 예쁜 데 이유가 없는데, 예쁜 데는 또 무슨 이유가 있을까?

    우연은 한숨을 쉬었다. 세상에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것보다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훨씬 많다. 내가 김현주 진형식을 부모로 만난 것도, 학대를 당하게 된 것도, 그림을 잘 그리게 된 것도, 아저씨와 사랑에 빠지게 된 것도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데, 저 색깔이 천박하고 이 색깔이 고상해 보이는 이유 따위를 어떻게 설명하겠느냐고.

    “사람 머리카락에는 블루 계열이 없잖아요. 그래서 머리카락에 푸른색이 들어가면 신비해 보이죠. 그중에 피코크 그린이 제일 깊이 있고 신비로운 것 같아요. 차분하면서도 화려하고 정적인 것 같으면서도 동적이고, 금욕적인 것 같으면서도 야하죠.”

    우연은 되는 대로 이유를 갖다 붙이다가, 그 색의 특징 역시 아저씨에게로 모여드는 것을 알아차리고 입을 다물었다. 지금 머릿속에 든 생각은 모조리 한이원 한 가지로만 귀결되는 것 같다.

    “손톱만 한 게 제법 웃기는 말도 할 줄 아네? 오빠한테도 이런 식으로 살살 긁으면서 환심을 샀던 거야?”

    미현은 고개를 까딱, 기울이더니 픽 코웃음을 쳤다.

    “어떤 화가 새끼도 내 공연을 보러 와선 너랑 똑같은 말을 하더니만. 하이퍼리얼리즘계의 거장 어쩌고저쩌고하지만, 실은 늙은 변태 새끼가. 요새 성 추문으로 존나 고생하고 있는 꼴을 보니 얼마나 속이 시원하던지.”

    누군지 알 것 같다. 그리고 미현이 그 화가를 빗대서 자신을 까대는 것도 바로 눈치챘다. 우연은 얼굴을 구기며 억지로 물었다.

    “……그래서 뭐라 하셨어요?”

    “그 머리통에 물이라도 끼얹어 주려고 했는데, 옆에 있던 모리스가 내 손을 잡더니 대신 받아치더라고. 당신 눈깔엔 이 색이 천박해 보여도, 여왕 마고의 머리에 얹히면 임페라토르 카이사르의 몸을 휘감은 토가처럼 위엄 있고 존귀한 색으로 바뀐다고.”

    “…….”

    “그때부터 이 색은 내 트레이드 컬러야. 누가 뭐라고 떠들어도 아무 의미 없어.”

    모리스, 라는 이름을 말할 때, 미현의 웃음이 아련해졌다. 진우연에게 ‘한이원’이라는 이름처럼, 유미현에게 ‘모리스 첸’도 그런 이름인 모양이다. 우연은 부글부글 토할 것 같은 속을 누르며 물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싫어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방법을 쓸 수 있어요?”

    여자는 선글라스를 벗었다. 표정이 썩 좋지는 않았다. 우연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앉았다. 또 따귀를 맞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여자는 피시시 웃으며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내가 오빠 싫어한다고 누가 그래?”

    “……네?”

    “난 오빠가 싫었던 적 없었어. 한 번도. 솔직히 말하면 나한테 과분한 사람이었어. 내 평생 저런 남자는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 미칠 정도로 탐이 났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데도요?”

    “그래. 오빠는 남자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정말 탐이 났어.”

    “어…….”

    “모리스는 나와 동류야. 그는 나쁜 남자고, 나는 나쁜 여자야. 밑바닥까지 드러낼 수 있는 사이도 나쁘지 않아.”

    사실은 궁합이 엄청 잘 맞는다는 게 제일 크긴 했지만. 미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오빠에 대해선 좋은 감정뿐이야. 오빠는 우리 속에 있으면서 전혀 우리 같지 않았고, 천상에 존재하는 생물 같았어. 어렸을 때부터 오빠를 보면 행복했고, 옆에 있고 싶었고, 부러웠고, 탐이 났지. 뭐 이것도 어쩌면 사랑인지도 모르지만.”

    우연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총알처럼 튀어 나가려는 말을 붙잡아 두기 위해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어야 했다.

    아니다. 저건 사랑이 아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면 망가지든 말든 주머니에 쑤셔 넣고 마는 더럽고 이기적인 탐욕일 뿐이다.

    아저씨는 정말 저 여자를 견딜 수 있을까? 모리스라는 남자의 존재를 견딜 수 있을까? 이렇게 비참한 결혼 생활을 견딜 수 있을까?

    ……우연은 자신의 남은 시간보다 아저씨의 남은 시간이 더 두려워졌다.

    * * *

    “실종 신고는 하지 않습니다. 전화도 하실 필요 없습니다.”

    문 너머에서 이원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그래도, 전무님……. 홍연이 욕실 문 앞에 서서 손을 쥐어뜯자 좀 더 단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 마세요. 우연이는 성인입니다. 자기 의지로 저를 끊어 낸 거고, 자기 발로 우리 집에서 떠난 겁니다.”

    “어제 혹시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전무님?”

    홍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참 동안 물이 철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답이 끝내 나오지 않으려는가 하는 찰나, 풀썩 웃는 소리와 함께 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청혼했다가 거절당했습니다.”

    입이 떡 벌어졌다. 아니, 왜요! 이유가 뭡니까! 툭 튀어나오려는 말을 홍연은 뒤늦게 삼켰다. 청혼을 거절당한 것도 비참한데 그 자존심 상할 이유를 본인의 입으로 되풀이하게 할 순 없었다.

    이원이 청혼했다는 뜻은 미현과의 결혼 거래를 엎기로 작정했다는 뜻이었다. 그가 대형 법무법인들과 주주들을 일일이 만나기로 했던 게 그런 이유였나? 그런 결심을 했다는 것도 놀랍지만, 우연의 거절은 더 기가 막혔다.

    아니,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우연은 이원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원은 그녀의 목숨을 구해 주었고, 재능을 알아보고 적극적으로 후원했으며,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고, 열렬하게 사랑하며 아껴 주었다. 생명의 은인이나 후원자라는 말 따위로는 그의 도움을 도저히 다 표현할 수 없다.

    ……게다가 우연은 저 결백한 사내의 첫 여자이기도 했다.

    그걸 알면서도 거절을 했다고? 그리고 바로 도망을 쳤다? 그것도 그가 가장 치욕스럽게 여길 그림만 한 장 달랑 남겨 두고?

    이건, 정말 아니지!

    홍연은 우연에 대해 분노와 배신감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제삼자인 자신도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데, 지금 이원이 어떤 마음일지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물이 철벅대는 소리가 한참 거칠어지더니 낮게 잠긴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미안하지만 홍연 씨, 이런 부탁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뭐든 말씀하십시오, 전무님.”

    “……등 좀 밀어 주시겠습니까.”

    너무 어이없는 부탁에 홍연은 어리둥절해졌다. 홍연이 얼빠진 채로 대답도 못 하고 있자 다시 조용한 부탁이 이어졌다.

    “제가 하고 싶은데, 보이지도 않고 손이 닿지도 않네요.”

    홍연은 겉옷을 벗고 셔츠 소매를 걷은 후 조심스럽게 욕실 안으로 들어섰다. 욕조 커튼을 걷자 이원이 욕조의 편백목 덮개 위에 팔을 괴고 엎드려 있는 것이 보였다. 홍연은 잠시 눈을 깜박거렸다.

    ……등에 그려진 그림을 지워 달라는 거였구나.

    이원의 등을 끌어안고 있는 나신의 우연은 초현실주의 회화처럼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색감을 갖고 있었다. 손톱자국에 덧그려진 상처는 칼로 파헤친 것처럼 지극히 현실적인 묘사여서 더 섬뜩하고 아프게 느껴졌다. 이런 그림을 지워야 한다니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이원을 더 이상 만류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림의 가장자리는 이미 울퉁불퉁하게 지워진 상태였다. 아마 손이 닿는 곳은 최대한 지워 낸 모양이었다. 얼마나 힘껏 문질러 댔는지 그림이 지워진 부분은 온통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홍연은 거품 수건에 바디 워시를 묻혀 조심스럽게 등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이원은 편백목 덮개 위에 엎드린 채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미안합니다. 이런 부탁, 안 된다는 건 아는데…… 마땅히 부탁할 사람이 없네요. 송 여사님께 부탁할 수도 없고.”

    “괜찮습니다, 전무님. 시간 외 수당만 제대로 주시면 얼마든지요.”

    하, 하하. 하하하. 이원은 엎드린 채 조금 웃었다.

    “시간 외 수당은 얼마를 원하시는데요?”

    “전무님께서 아시다시피 제 몸값이 좀 비싸졌잖습니까?”

    “그러니까, 얼마요?”

    홍연은 천천히 손을 문질렀다. 바디 워시를 잔뜩 머금은 거품 수건에서 뽀얀 크림이 구름처럼 솟아올랐다. 손에 힘을 주어 문지를 때마다 찬란한 색의 덩어리가 일그러지며 벗겨져 나갔다. 아깝다고 여기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저절로 탄식이 나왔다. 홍연은 한숨을 쉬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재의 수요일> 그림은 놔두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렇게만 해 주시면 평생 때밀이로 헌신 봉사 할 각오도 되어 있습니다.”

    웃음소리가 멎는다. 홍연은 욕실을 가득 채운 수증기에 그만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폐기하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나는 이 그림 촬영한 사진도 바로 지웠는데.”

    “죄송합니다, 아직…….”

    “등 미는 비용이 싸진 않군요.”

    “예.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 몸값이 싸지는 않습니다. 대 세경홀딩스 대표이사님의 비서실장으로서 연봉 6542만 5천 원에 빛나는…….”

    하, 하하하, 하하하하. 이원은 다시 웃기 시작했다. 홍연은 연봉 협상을 할 때마다 몹시 비굴하고 끈덕지게 달라붙어서 단돈 만 원, 5천 원이라도 더 붙이고야 말았다. 하지만 꼬리에 5천 원이 달라붙은 연봉 이야기만 들으면 이원은 난처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웃음이 잦아들 때쯤 이원이 차분하게 말했다.

    “눈에 띄지 않게 하세요. 제 눈에도, 누구의 눈에도.”

    “……예.”

    “그림 네 점, 스케치북, 습작 모아 둔 것, 전부 다.”

    “예. 전무님.”

    세경건설의 한이원 전무는 업계에서 합리적인 결정과 빠른 손절로 정평이 나 있었다. 손해가 예상되어 발을 뺀 사업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뚝심이나 미련, 개인적인 집착 따위로 자금을 퍼붓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부드럽고 다정해 보이는 성격과 달리 경영 스타일은 차고 냉정했다.

    우연이라는 아이와도 결국 이렇게 끝나는 건가요?

    등을 맡기고 엎드려 있는 한 전무의 어깨가 아주 잠시 들썩인다.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바짝 긴장한 홍연은 수건을 쥔 팔에 빳빳하게 힘을 주었다. 다행히, 경련 같은 들썩임은 단 한 번뿐이었다.

    그림이 깨끗하게 지워진 그의 넓은 등에는, 대여섯 줄의 긴 상처만 선명하게 남았다.

    * * *

    “너, 왜 전화 안 받아. 왜!”

    2년 만에 처음으로 만난 엄마의 첫인사는 악에 받친 외마디였다.

    엄마는 김포 근처의 작은 민박집, 그것도 집주인이 창고를 개조해서 만든, 함석지붕 단칸방에 숨어 있었다. 그녀는 피골이 상접하고 피부가 꺼칠하게 뒤집힌 우연의 몰골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 눈을 새하얗게 홉뜨고 화를 냈다.

    “내가, 내가 얼마나 전화를 해 댔는데! 너 때문에 내가 아직 못 나가고 있잖아. 진작 나갔어야 했는데! 얼마나 피가 말라붙었는지 알아?”

    “왜 이래? 전화하지 말고 앞가림이나 잘하랄 때는 언제고? 좋아, 그럼 난 안 가. 엄마도 여기서 평생 살아.”

    우연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마음껏 협박했다. 미현이 보고 있었지만 하나도 창피하지 않았다.

    “아니야 우연아. 미안해. 내가 힘들어서 그랬어. 너 기다리다가 아빠한테 들킬까 봐 너무 무서워서. 내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잖니…….”

    바로 처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빠에게 맞기 직전에 애걸할 때의 목소리와 똑같아서 소름이 쫙 끼쳤다.

    “그래그래. 지금이라도 와 줬으니 괜찮아. 엄마가 용서해 줄게. 엄만 괜찮아.”

    “누가 누굴 용서해! 대체 누가 할 소릴 해!”

    속이 콱 막혔다. 엄마를 만난 지 1분밖에 되지 않았는데, 바로 살심이 치밀었다.

    이럴 줄 알았다, 이럴 줄. 외국에 나가서 어찌어찌 정착한다 해도, 그곳은 그곳대로 지옥일 것이다. 달라진 것은 없다. ‘아빠가 죽든지, 내가 죽든지.’ 하는 상황이 ‘엄마가 죽든지, 내가 죽든지.’ 하는 상황으로 바뀐 것뿐이다.

    다만, 엄마 정도면 싸워 볼 만하다. 엄마가 아빠에게 얻어맞는 것을 오랫동안 지켜보았으면 동병상련이 생겨야 마땅할 텐데, 엉뚱하게도 ‘엄마 정도라면 나도 해볼 만해.’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엄마 역시 우연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빠가 없는 곳에 가서도 우리는 힘센 사람은 때리고, 약한 사람은 맞게 될 것이다. 그것은 아빠가 정해 준, 우리 가족이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규칙 같았다.

    우연은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악귀 같았다. 엄마나 아빠와 마찬가지로 자신도 어딘가가 심각하게 망가져 있었다. 아저씨는 사람의 선의를 믿었고, 사랑으로 상처를 치료할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이젠 그런 선량한 믿음마저도 허무맹랑한 낙관주의처럼 느껴졌다.

    이리저리 헤매며 짐을 부친 후 몇 가지 장을 보았다. 당장 갈아입을 옷도 없는데 가방에 챙겨 온 것이 연필, 지우개, 연습장 따위라는 게 지금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일단 배낭을 사고, 양말과 속옷, 티셔츠 몇 가지를 채워 넣었다. 초콜릿, 과자, 젤리와 껌도 샀다. 혹시 모르니까 작은 생리대를 하나 사고, 휴대용 티슈도 사고, 노란 오리가 그려진 예쁜 물병도 하나 샀다. 그래도 어딜 가든 물은 마실 테고, 컵이 없을 수도 있으니까. 가방에 이것저것 들어가자 조금은 행복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다음엔 뭘 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우연은 책을 샀다. ‘좋은 생각’이라는 책이었다. 남의 좋은 생각이라도 훔쳐 와야만 이 시간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상황이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가슴이 답답하고 숨 쉬기 힘들 뿐이었다. 차라리 펑펑 울기라도 하면 속이 후련해질 것 같은데, 몸은 눈물 흘리는 것마저 거부했다.

    “여기 비행기 표. 머무를 주소하고 연락처는 잘 갖고 있죠?”

    짐을 부친 것을 확인한 미현은 엄마에게 티켓 두 장을 내밀며 확인했다. 짜증스러운 표정이 극에 달해 있었다. 따뜻한 연기를 잘하던 사람의 민낯은 생각보다 훨씬 살벌했다.

    표를 두 손으로 받은 엄마는 덜덜 떨며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미현은 대답도 하지 않고 우연을 향해 몸을 돌렸다. 붉고 화려한 머리카락이 등 뒤에서 찰랑거렸다.

    “잘 가. 가서 잘 살고, 다시는 오지 마. 내가 도와줄 일은 끝났어.”

    우연은 한참 망설이다 머뭇머뭇 말했다.

    “저, ……미안해요.”

    미현의 움직임이 멈췄다. “미안해요.” 우연이 작은 목소리로 되풀이하자, 가늘고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튀어나왔다.

    “뭐가 미안한데? 쫓겨나는 건 너야.”

    멈칫했다. 맞다. 분명 저 사람한테 못할 짓을 한 것 같은데, 생각해 보면 쫓겨나는 건 자신이고, 아저씨의 곁자리를 차지하는 건 저 사람이다. 그렇다고 화를 낼 만큼 당당한 처지도 아니었다. 갈팡질팡하는 우연의 마음을 짐작한 듯 미현이 코웃음을 치며 내뱉었다.

    “너한테 그따위 소리 듣고 싶지 않아. 이제 너하고 나 사이엔 미안할 것도 없고, 고마울 것도 없고, 미울 것도 좋을 것도 없어. 아무것도 없어.”

    우연은 미현의 감정이 증류수처럼 느껴졌다. 저 여자에게 남은 감정은 격렬한 증오나 악의, 경멸이 아니었다. 자신은 그럴 만한 존재조차 되지 못했다. 저 여자는 그저 귀찮은 날벌레를 탁 쳐서 잡거나 쫓아 보냈을 때처럼 홀가분할 뿐이었다.

    나를 쫓아내고 아저씨의 옆을 차지한 일에 대해서도 왜인지 크게 기쁘거나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필요한 프로젝트를 제대로 마무리한 안도감 외에는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잠시 상상해 보았다. 아주아주 먼 훗날에, 2년 전의 마포 대교 위에서처럼, ‘우연히’, 혹은, 내가 극도로 혐오하는 ‘운명처럼’ 아저씨를 다시 만난다면 어떻게 될까?

    잠시 서서 생각하던 우연은 고개를 숙이고 힘없이 웃었다.

    그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운명의 운명의 운명이 등을 떠밀어 우리를 다시 만나게 한다 해도, 그때는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아저씨는 소원대로 단란한 가정에 갇혀 있을 것이고, 그 울타리를 절대 넘지 않을 것이다. 아저씨는 자신이 지켜야 할 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고, 그 선을 지킬 굳은 의지가 있는 사람이었다.

    우연은 불현듯,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세 사람은 모두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지기 위해 애를 쓰고 힘든 선택을 하는데, 왜 정작 행복해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걸까? 세 사람 중 적어도 한 명은 기뻐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단 한 명이라도?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다. 나는 행복해지는 방향을 아는데 막힌 길을 뚫을 힘이 없고, 저 여자는 막힌 길을 뚫을 힘은 있는데 행복해지는 방향을 모르고, 아저씨는 행복해지는 방향도 알고 힘도 있는데 그 길을 택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뒤로 도망치고, 저 여자는 엉뚱한 방향으로 힘껏 달리며, 아저씨는 그 자리에서 땅을 파고 무덤을 만들어 누워 버린다.

    세상은, 공평하다. 고작 이런 곳에서.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요.”

    쨍, 하는 목소리에 생각이 툭 끊어진다. 미현이 엄마에게 몸을 돌리더니 기관총을 쏘아 대듯 경고를 시작했다.

    “당신 이혼 소송 도와준 건 박 이사가 개인적으로 도와준 일로 되어 있어요. 메세나재단에서 후원하는 학생의 친모인 당신 사정을 듣고, 하도 딱해서 가까운 차 변호사님에게 부탁한 거라고. 한국에서 도망치는 건 남편이 너무 무서워서 모녀가 자발적으로 한 일이고. 어차피 그건 사실이니까. 안 그래요?”

    강제로 보내면서도 그걸 자발적으로 보이게 하고 싶은 모양이다. 여기까지 와서 그게 뭐가 중요할까. 난 이제 아저씨 옆에 있을 수 없고, 엄마와 나는 아빠 손에 잡히면 죽는다는 사실만 덩그러니 남았는데.

    미현은 우연을 향해 몸을 돌리고 차갑게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나는 두 사람을 몰라. 연락처도 모조리 삭제할 거고, 너희가 나간 것과 아무 상관도 없어. 말 안 새 나가게 하려고 아랫사람도 안 시키고, 내가 직접 데리고 돌아다닌 거니까, 앞으로는 절대 나한테 연락하지 마. 질척대지도 말고.”

    “네…….”

    “만에 하나 내 이름이 오빠 귀에 들어가게 하면, 난 너희한테 들어간 돈을 모조리 회수하고, 너희 주소하고 연락처를 아빠한테 알려 줄 거야. 그러니 알아서들 해.”

    “아니에요! 그럴 일은 없어요. 절대 없어요! 약속할게요.”

    엄마가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그것은 우연과 엄마에게 가장 강력한 위협이었다. 조건 반사와도 같은 반응에 미현은 화사하게 웃었다.

    “행여라도 한국에 들어올 생각은 마시고 딸 단속 단단히 하세요. 와 봤자 지옥이에요. 나중에 마이애미로 사람 보내서 확인할 때까지, 절대 연락하지 마세요.”

    따그락, 따각, 따그락, 반짝이며 물결치는 붉은 머리가 점점 인파에 묻혀 보이지 않게 된다. 우연은 멍하니 비행기 표를 내려다보았다. 로스앤젤레스 경유 항공기의 출발 시간은 밤 9시 20분이었다.

    “……왜 이렇게 안 나와?”

    출국 심사대를 먼저 통과해 안에서 기다리던 우연은 고개를 비쭉 내밀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뒤따라 나와야 할 엄마가 나오지 않는다. 뒤로 돌아가 다시 살펴보니 엄마는 여전히 심사대 앞에 서 있다.

    “……?”

    엄마의 얼굴은 우유라도 엎질러진 것처럼 완전히 하얀색이다. 손에서 가방이 떨어진다. 심사관 앞에서 여권을 든 채 더듬더듬 무슨 말을 하는데, 정신은 이미 뇌 밖으로 나간 것 같다. 우연과 눈이 마주친 엄마가 황급히 손짓을 해서 우연을 불러들인다. 등 뒤가 근지러웠다.

    우연이 다시 밖으로 나오자 엄마가 얼빠진 얼굴로 중얼거린다.

    “추, 출국, 금지래…….”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내, 내가 지금 출국 금지 상태래! 내가!”

    아악! 나 어떡해! 어떡하냐고! 아아악! 엄마의 입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터졌다.

    * * *

    “그 아파트는 원래 내 거야! 우리 엄마 아빠가 나한테 사 준 내 아파트였다고! 그 거지새끼는 아파트 사는 데 십 원 한 장 못 보탰단 말이야!”

    생각해 보면, 엄마의 출국 금지 상태는 당연히 예견했어야 했다. 아파트는 외가에서 사 준 것이지만, 중간에 아빠가 공동 명의로 바꿨다. 아빠가 가장이고, 아빠 혼자 돈을 벌어서 이 집과 생활을 유지하니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협박에 엄마가 굴복했었다.

    엄마는 항상 그것을 억울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이혼 수속이 종료되기 전에 아빠의 인감과 신분증을 이용해 아파트를 팔았고, 그 돈을 남김없이 챙겼다. 외국에서 필요한 돈도 돈이지만 간도 크게 그런 짓을 저지른 데는 그런 억울함이 깔려 있었다. 물론, 아빠가 나오기 전에 외국으로 탈출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없었으면 그런 짓을 저지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빠 입장에선 이혼한 아내에게 자신의 집을 도둑맞은 것이다.

    아빠의 엄벌을 탄원한 외동딸. 자신을 배신하고 이혼한 후 집까지 팔아 도망친 아내.

    그가 얼마나 극렬히 분노하고 있을지는 상상도 되지 않았다. 엄마는 아예 패닉 상태였다. 출국장 밖으로 밀려 나온 엄마는 우연을 붙잡고 울부짖었다.

    “어떡해야 해? 어떡해? 이거 어떡해 우연아!”

    우연은 엄마가 끌어당기는 대로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사고는 자기가 쳐 놓고 나한테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난 어떡하지? 나는 상관없으니 혼자라도 나가야 하나? 영어 한마디 못 하는데? 마이애미가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데? 도착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중간 기착지에서 어떻게 갈아타는지도 모르는데? 숙소의 주소도 연락처도 모르는데?

    주소를 알면 또 어쩔 건데? 혼자 갈 수 있을 것 같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 생전 처음 가 보는 곳에, 말 한마디 하지 못하면서?

    그럼, 이대로 못 나가면 난 어떻게 되는 걸까?

    ……아빠한테 붙잡혀서 며칠 죽도록 맞고 예전처럼 셋이 함께 살게 될까?

    ……아니면 늘 두려움에 쫓기면서 혼비백산 도망치며 살게 될까?

    어느 쪽이든 지옥보다 끔찍하면서도 실현 가능성이 매우 높은 미래였다.

    순간 마음 한구석에서 갑자기 치솟은 목소리에 우연은 크게 소스라쳤다.

    ‘좋아! 난 좋아! 안 나가도 돼! 한국에 있어도 돼! 아저씨를 다시 만날 수도 있어!’

    ‘난 안 나간 게 아니고, 못 나간 거야! 난 도저히 손을 쓸 수 없었어!’

    흐, 흐히히히. 미친 듯이 웃음이 터졌다. 엄마가 공항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끼는 동안, 우연은 고개를 수그린 채 입을 틀어막고 웃어 댔다. 이런 개같은 상황에서 기쁨에 휩싸인 자신이 칼날 위에서 눈을 뒤집고 껑충껑충 춤을 추는 무당처럼 느껴졌다.

    두 사람이 창고 같은 민박집으로 돌아온 것은, 그날 밤 자정이 다 되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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