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누드-33화 (33/47)
  • 33. 굿 뉴스, 배드 뉴스

    ― 전무님, 전무님! 최홍연입니다! 여보세요!

    이원은 이불에 푹 감긴 채, 전화기를 더듬어 잡고 한참 신음을 삼켰다. 아무리 눈을 뜨려 해도 눈꺼풀을 접착제로 붙여 놓은 것 같았다. 전화만 받고 대답이 없자 자신을 찾는 목소리는 점점 높아진다.

    ― 전무님! 전무님? 이거 한이원 전무님 휴대 전화 아닙니까! 여보세요!

    아아, 머리가 깨질 것 같다. 흐으으……. 결국 신음이 새 나가자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확 튀어 오른다.

    ― 전무님? 혹시 어디 안 좋으십니까? 정 박사 보낼까요? 전무님! 전무님!

    “아, 아닙니다. 아직 시차 적응 때문에…… 으윽.”

    이원은 대답하다 말고 다시 신음을 삼켰다. 시차 핑계를 대기엔 홍연도 자신의 뒤를 계속 따라다니며 그 무리한 일정을 똑같이 소화하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이 지시한 일 때문에 정시 출근까지 했다. 그래 놓고 자신은 밤새, 아침까지 섹스를 해서 몸져누웠다고는 때려죽어도 말할 수 없었다.

    시킨 일이 급한 것도 아닌데 왜 지금 이럴까. 물론 박 이사를 만나 보고, 법무법인 서너 군데와 컨택을 하고, 40명이 넘는 홀딩스 주주와 이사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해서 며칠 내로 개별 약속을 잡아 놓으라고 하긴 했다. 아, 그래서 복수하려는 건가. 죽을 것 같다. 깜박, 다시 정신을 놓으며 이불 속으로 고꾸라지는 이원의 귀로 전화기에서 작은 소리가 쟁쟁거리다 툭 끊어진다.

    ― 큰일이 터졌습니다! 바로 서초동으로 가 뵙겠습니…….

    ……큰일이라니, 또 뭐가.

    이원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힘겹게 눈을 떴다. 지근지근 울리는 머리를 흔드니 신음이 저절로 나왔다.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이원은 주변을 둘러보고 천천히 눈썹을 찡그렸다.

    ……음? 여긴 어디지? 몇 시지?

    창으로 들어오는 빛은 어스름하고 눅눅했다. 뭔가 좀 이상하다. 분명 자신의 침실인데 침실 같지 않다.

    그래. 최 실장 전화를 조금 전에 받았는데, 아닌가? 전화받은 직후에 또 잠이 들었나? 최 실장이 한참 떠들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는다. 뭔가 큰일이 있다 했던가? 혹시 그 전화가 꿈이었나? 아니 지금이 꿈인가. 현실인지 꿈인지, 밤인지 낮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너무 깊이 자다가 일어나서인지 눈앞이 몽롱하고 주변이 온통 환상에 잠겨 있는 것 같다.

    ……아아, 이런.

    이원은 지금 자신이 가벼운 비현실감에 빠진 것을 깨닫고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그동안 스트레스가 심하긴 했었나 보다.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 상태가 지나가려면 한참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우연아……? 우연아!”

    잠시 옆을 더듬던 이원은 옆에 아무도 없는 것을 알고 크게 소스라쳤다. 갑자기 현실로 확 끌어 내려진 기분이었다. 이불을 걷어치우고 일어나려는 순간, 새로운 기억이 머릿속으로 사그락, 흘러들어 온다.

    ‘아저씨, 나 편의점에 잠깐 좀 갔다 올게요.’

    맞다. 잠결에 모기 날갯소리처럼 가벼운 소리가 들렸었다. 방문 앞에서, 가벼운 티셔츠 차림의 우연이 에코백을 어깨에 메고 손을 흔들고 있다.

    ‘으음……. 어디?’

    ‘편의점에 간다고요, 조 앞에.’

    우연이 고개를 반쯤 돌린 채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든다. 응, 그래, 얼른 다녀오렴. 무슨 일로 가느냐고, 나하고 같이 가면 안 되느냐고 묻지 못한 것은, 잠에 취해서였다. 눈꺼풀이 자꾸 내려가서인지 우연이 손을 흔드는 시간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후우우.

    잠시 옆에 없는 건데도 가슴에 구멍이 난 것처럼 허전했다. 피곤은 좀 풀린 것 같은데 기분도 이상하고, 방이 썰렁하게 느껴진다. 이원은 한숨을 쉬며 일어나 가운을 걸쳤다.

    자, 청혼을 거절당했으니, 이제 어떻게 할까.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물론 결혼 안 하겠다던 말은 몇 번 들었다. 아이를 낳지 않겠다던 말도 분명히 기억난다.

    ……그래도 내 청혼은 당연히 받아 줄 거라고 생각했다. 우연이 역시 나를 열렬히 사랑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속물 같지만 내가 청혼을 하면, 기꺼이, 고마워하면서, 울면서 받아 줄 거라고 믿었다.

    기다려야 할까. 나를 온전히 믿고 의지할 수 있을 때까지 꾸준히 설득해야 할까.

    ……아니면 내가 포기하고 저 아이의 방식을 받아들여야 할까.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도 불안정하고 유리처럼 균열하고 있는 아이라면, 당연히 안정감 있는 지지 기반이 필요하다. 결혼이라는 제도적 울타리든, 경제적 지원이든, 정서적 지지든, 그 모든 것에서.

    “웃기는 소리.”

    이원은 머리를 무릎 사이에 파묻고 길게 신음했다. 안정감 있는 지지 기반을 간절히 원하는 건 사실 우연이 아니었다.

    “그냥, 내가 결혼하고 싶은 거잖아. 우연이를 옆에 두고, 내 사람으로 만들어서 안심하고 싶은 거잖아.”

    청빈과 절제를 삶의 모토로 삼아 살아왔다. 그분의 사랑 외에는 욕심나는 것이 없었다. 세상에 속한 것들은 모두 족쇄와 짐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나이 서른을 훌쩍 넘겨서야 자신의 내면에도 탐욕이 존재했음을 알았다. 그동안 억눌렀던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탐욕은 무시무시하게 타올랐다. 옆에 두고 평생, 내 마음껏, 욕심껏 사랑하고 싶었다. 원할 때 힘껏 안아 주고, 무서워할 때 단단히 잡아 주고, 내 품 안에서 나만 의지하며 안심하고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것을 위해서는 이제 못할 짓이 없었다. 아무리 추잡하고 비열하며 두려운 일이라도, 너를 위해서는 얼마든지.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

    탐욕이 강렬했던 만큼, 거절당했을 때의 후폭풍도 무시무시했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그때 이원을 휩쓸었던 첫 번째 감정은 놀람이 아니라 분노였다.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넌 나한테 엄청난 도움을 받았고, 나는 너를 위해서 이렇게 많은 희생을 했어. 그런데 어떻게 나한테. 어떻게 ……감히.’

    뒤에 덧붙은 감히, 라는 말에 이원은 문득 소스라쳤다.

    “이런 맙소사.”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감싸 안았다. 혹시 우연이도 그 ‘감히’를 느꼈던 건 아닐까.

    우연의 불안과 상처를 인정하는 대신,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결혼하자 강요한 것은 결국…….

    그의 못나고 포악한 아비가 한 짓과 본질적으로 똑같은 짓 아니었을까.

    한참 동안 머리를 박고 있던 이원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일단, ……기다려 보자.”

    지금 닦달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적어도 우연이 나를 사랑하는 것은 확실했고, 현재 내 옆에 머무르고 있다.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러니 기다려 보자. 어차피 내가 해야 할 일들이 있지 않은가. 그 아이를 편안하고 당당하게 내 울타리로 들이기 위해서는, 해 두어야 할 일이 태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러니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차근차근 해 놓으며 기다리면 된다. 옆에서 얼굴을 보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한결같이 사랑하다 보면, 그녀의 마음이 바뀔 날도 오지 않겠는가.

    어렸을 때부터 발군의 인내심을 자랑하던 이원이었다. 내색하지 않고 긴 시간 참으며 기다리는 것은, 이원이―좋아하지는 않지만― 가장 잘하는 일 중 하나였다.

    ……왜 이렇게 안 오지? 아래층에서 혼자 밥이라도 먹고 있나?

    이원이 몸을 일으키자 온몸의 관절과 근육에서 요란하게 앓는 소리를 낸다. 팔다리가 물을 잔뜩 먹은 솜처럼 축축 늘어지고, 손이 닿는 곳마다 말라붙은 체액이 버스럭대는 소리가 났다. 구깃구깃한 시트와 축축한 이불은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이원은 비틀대며 욕실로 가서 가운의 끈을 풀다가 흠칫 소스라쳤다.

    이런. 깜박 잊고 있었다.

    정말 정신이 빠졌구나. 어떻게 등에 그림 그려 놓은 것을 잊어버릴 수 있지?

    이원은 가운을 벗고 거울에 몸을 비춰 보았다. 드레스 룸에는 전신 거울이 양면으로 배치되어 있어서 등에 그려진 그림을 보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아!”

    등으로 소름이 쫙 치밀며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진다.

    그의 등은 화려하고 강렬한 색과 눈부신 반짝임으로 꽉 차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우연이 있었다.

    우연은 이원의 등에 뺨을 대고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깊게 감은 눈, 자잘하게 흩어져 있는 머리카락, 옷 한 자락 걸치지 않은 그녀의 등이 새하얗게 드러나 있었다. 이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이원의 등에 있던 상처는 숨겨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상처를 깊이 파헤쳐 놓은 것처럼 덧그려져 있었다. 보기만 해도 눈이 찡그려진다. 가상의 통증마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 상처는 우연의 하얀 등과 어깨, 팔에도 겹쳐져 있어, 두 사람이 같은 상처를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원은 눈을 깜박이며 그림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우연의 그림은 기본적으로 하이퍼리얼리즘 회화이지만, 초현실적인 분위기도 늘 공존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최근 하이퍼리얼리즘의 흐름 중 하나이기는 했다. 하지만 우연은 거기에 인간의 내면까지 날카롭게 짚어 내는 것으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등에 그려진 것은, 그녀의 기존 작품과 많이 달랐다. 일단 초현실적인 분위기가 그림 전체를 압도했다. 펄이 한껏 들어간 보디 페인팅 물감 고유의 특징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형광빛을 띤 원색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딸기 무스케이크 때의 화사한 형광 분홍뿐 아니라, 노랑, 연두, 자주색, 초록, 보라색, 진주 가루를 뿌려 놓은 듯한 흰색까지. 그 신비로운 색들은 그의 등에서 폭풍처럼 뒤엉겼다. 샤갈처럼 환상적이면서 사진처럼 정치하게 묘사된 그림은 그로테스크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연은, 그의 등을 끌어안은 채…… 울고 있었다. 이원은 이 장면이 너무 난해해서 자신이 여전히 비현실감에 빠진 것처럼 느껴졌다.

    왜 우니, 우연아?

    ……대체, 왜, 왜 우는 거니, 왜 이렇게 슬프게, 왜?

    하지만 시선이 옆구리에 가서 닿았을 때, 이원은 퍼뜩 환상에서 빠져나왔다.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글자가 조그맣게 새겨져 있었다.

    진우연. NO.5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이게 다섯 번째 그림이라고?”

    그럴 리가 없다. 우연은 계약한 그림 중 세 점밖에 주지 않았다. 굳이 이 그림을 계약 작품이라 우긴다면, 이건 NO.4가 되어야 했다.

    이상하다. 차라리 작품 수를 헷갈린 거면 좋을 텐데. 하지만 우연이 제작한 작품의 규모들을 생각하면 절대 헷갈릴 수 없을 것이다.

    ……불길하다.

    이원은 No.5라는 글자를 노려보다가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 아래로 자그마하게 숨어 있던 다른 글자들이 새로 눈에 띈다.

    Via Dolorosa

    설마, 제목인가?

    이원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눈을 깜박거렸다. 비아 돌로로사, 비아 돌로로사. 입속에서 되풀이되면 될수록 머릿속은 오리무중이 되어 간다.

    ……이게 그림 제목이라고? 이게 왜? 대체 왜?

    며칠 전 새벽, 재의 수요일 미사를 다녀왔을 때, 이 말의 의미를 설명해 주었던 기억이 난다. 고난의 길, 아픔의 길이라는 뜻이라 했었던가. 안내문에도 적혀 있었다. Via Dolorosa, 십자가의 길을 따라서, 라는 제목이었다. 사순절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에서 수난 금요일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이 가시 장식에 둘러싸여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기억과 이 그림과의 인과 관계는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까발려진 상처, 상처의 공유, 너의 눈물, 그리고 이 그림은 대체 왜 비아 돌로로사일까. 생각할수록 머릿속이 쑥대밭이 되어 간다.

    후우…….

    이원은 일단 그림을 촬영한 후, 가운을 조심조심 걸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씻고 싶었지만, 물에 닿아서 지워질까 두려웠다. 정액과 애액과 땀이 말라붙은 몸이 더러워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그림이 없는 부분만 수건에 물을 적셔서 대충 씻어 내는 것으로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 아인 내가 평생 목욕도 안 하고 살기를 바란 걸까.

    이원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

    “송 여사님, 우연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점심은 먹었나요?”

    “아가씨는 요 앞 편의점에 다녀오신다고 했습니다. 시장하신지 컵라면이라도 드시고 오겠다면서요. 전무님한테 허락받았다고 좀 전에 나갔는데 아직 안 들어오시네요.”

    “집에 컵라면을 몇 상자 사다 두어야겠군요.”

    “제가 함께 갈까 했는데 혼자 가시겠다고 하셔서, 관리실 김 씨한테 CCTV로 잘 지켜보라고 했어요. 혹시 위험할지 몰라서요.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고르시는 것까지 확인했다고 하네요.”

    역시나 세심한 송 여사다운 대처였다. 이원이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대체 좋은 집밥을 두고 왜…….”

    하지만 이원은 어물어물 말을 삼키고 말았다. ‘몸도 안 좋은데 왜 자꾸 불량 식품만 먹느냐.’ 하고 잔소리를 해야 마땅한데, ‘갈 거면 나 일어난 다음에 나도 데려가지.’ 하는 생각만 드는 걸 보면 자신도 참 문제는 문제였다.

    이원은 김빠지는 소리로 웃으며 거실의 카우치에 앉았다. 이런 홑가운 한 장만 입고 1층 홀까지 내려온 건 난생처음이라 몹시 어색했지만, 생각보다 편하기도 했다. 집이잖아. 왜 지금까지 그렇게 불편하게 살았을까. 송 여사도 조금 낯설어하는 눈치였지만, 어색한 기색을 보이며 불편하게 하지는 않았다.

    띠르르 띠르르르.

    벨이 울린 것은 잠시 후였다. 아가씨가 오셨나 보네요, 하며 얼른 뛰어나가는 송 여사의 뒤를 따라, 이원도 현관 쪽으로 향했다.

    “전무님, 좀 쉬셨습니까?”

    “아……, 오셨습니까.”

    기대와 달리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자신만큼이나 찌든 기색이 역력한 최 실장이었다.

    이원은 순간적으로 실망감을 확 드러냈다가 얼른 표정을 지웠다. 아무리 실망했어도 닷새간 잠도 거의 자지 못하고 강행군을 한 후, 하루도 쉬지 못하고 정시 출근 해서 태산 같은 업무를 처리하고 온 수행 비서에게 보여 줄 얼굴은 아니었다.

    아니 세상에,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홍연은 홍연대로 입을 떡 벌린 채 돌처럼 굳어 버렸다.

    늘 점잖고 품위 있던 상사께서는 지금 부스스한 머리에 가운만 한 장 걸쳐 입고 현관에 서 있었다. 홍연이 이원의 수행 비서로 일한 게 5년이 훨씬 넘어가는데, 저렇게 자다 막 일어난 모습으로, 그것도 홑가운 차림으로 1층에 내려와 있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하반신의 실루엣으로 보건대, 속옷 한 장 걸치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목과 빗장뼈 근처의 자국들 역시 뉴욕에서 돌아온 후 새로 생긴 것이었다. 그것은 붉고 흐릿하게 뭉개져 있거나 길고 날카롭게 그물처럼 얽혀 있었다. 맙소사.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부분이 저 모양이니 숨겨진 곳은 어떤 꼴일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침실에서조차 점잖게 무게를 잡을 것 같던 상사께서는, 실제론 잠자리 취향이 상당히 파격적인 듯했다. 이원이 뒤늦게 가운을 바짝 여미고 머리를 손으로 정돈했지만, 홍연의 입은 한참 동안 다물어질 줄 몰랐다.

    “들어오십시오. ……박 이사님은 뵙고 오신 거죠?”

    “네 전무님. 주주님들도 지금 개별적으로 연락 돌리고 미팅 시간을 잡는 중입니다.”

    “박 이사님은 뭐라 합니까? 정말 김현주 씨 이혼 소송에 개입하신 게 맞습니까?”

    이원은 우연 어머니의 이혼 소송과 박 이사가 연결되어 있는지 알아 오게 했다. 소송할 때 세경의 도움을 받은 듯한 분위기였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뜬금없는 일이었다.

    “진우연 씨와 어머니의 사정을 듣고, 차 변호사님께 연결해 주셨다네요. 지금 아니면 안전하게 이혼하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고…….”

    이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아는 박 이사는 유능하고 현명했지만 쓸데없는 짓은 절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차 변은 이혼 전문도 아닌데?

    “박 이사님이 그렇게 인류애가 넘치는 사람은 아니었잖습니까?”

    “전무님께 점수 따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전무님께서 우연이 신경 많이 쓰시던 거 알고 있었으니까요.”

    이원은 팔짱을 끼고 눈썹을 찌푸렸다. 긁어 부스럼이었다. 우연의 어머니는 이혼을 한다 해서 편해지거나 안전해질 상황은 아니었고, 그동안 자신은 우연에게 거리를 두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유가 있나 생각하면 그건 또 아니다. 아무 인과 관계가 잡히지 않는다. 골똘히 생각하고 있노라니 홍연의 격앙된 목소리가 끼어든다.

    “그보다 전무님, 중요한 뉴스가 두 가지 있습니다. 아까 전화드렸었죠.”

    아까 통화가 꿈인지 생시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는데 꿈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원은 무거운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누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번에는 또 무슨 지뢰가 터진 걸까. 의외의 변수와 문젯거리들이 하도 많이 터져서 듣기도 전부터 머리가 아팠지만, 아랫사람에게 그것을 내색해서 좋을 것은 없었다.

    “무슨 일입니까?”

    딱딱하게 굳어 있던 홍연의 표정이 조금 이상하게 변한다. 입가가 실룩실룩하면서 눈매가 풀리더니 비죽이 웃음이 흘러나온다. 드디어 그가 손에 둘둘 말아 쥐고 있던 신문을 의기양양하게 쫙 펼쳐 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짜잔! 일단 이 기사부터 보십쇼, 전무님! 제가 이 기쁜 소식을 전해 드리려고 여의도에서 빛의 속도로 날아온 것 아니겠습니까?”

    “……뭡니까, 이건?”

    2단 정도의 그리 크지 않은 기사에 빨간 사인펜이 둘려 있고 별과 꽃이 주변에 요란하게 그려져 있었다.

    「Y시, S사 반도체 클러스터 입주 확정」

    이원은 얼빠진 얼굴로 기사를 들여다보았다.

    “Y시……? 이천시가 아니고 Y시 쪽으로 유치가 확정된 겁니까?”

    “틀림없습니다. 보십쇼. 확! 정! 입니다!”

    지금 세경에서 재개발을 진행하는 구역은 Y시의 구도심 지역으로, 전철과 버스 터미널이 있는 교통 요지였는데, 바로 인근에 120조 원 규모의 반도체 대단지가 들어선다는 것이다.

    그동안 S사 반도체 공단의 유치는 여러 지자체에서 오랫동안 열을 올리고 있던 대형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이천으로 낙점이라는 게 거의 확정된 분위기라 아예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 소식은 너무 난데없었다. 홍연의 목소리가 껑충 튀어 오른다.

    “전무님, 저희는 대박이 난 겁니다! 대박이요!”

    이원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 다시 기사를 보았다. 아무리 봐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Y시, S사 반도체 클러스터 입주 확정」

    입주 확정, 확정, 확정.

    “저희가 미국에 도착한 날 기사가 났는데, 다음 날 아침부터 양재역 모델 하우스 완전 터져 나가는 중이라고 합니다. 당연하죠! 인구가 최소한 십만 이상이 몰릴 텐데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근처에 없잖습니까. 공단 완공 시기하고 저희 아파트 준공 시기도 비슷하단 말입니다. 투기 지역도 아니니 하이에나처럼 이리저리 몰려다니던 투자자들이 몽땅 쏟아져 들어오는 모양입니다.”

    “아아…….”

    “분양률 10%나 되겠느냐, 미분양 물건 회사에서 몽땅 끌어안고 자폭할 거냐 이죽대던 나래 신탁 김 차장 새끼, 고 돼지코 콧잔등에 똥 덩어리라도 던져 주고 싶네요. 우와 속 시원해! 아니 전무님. 얼른 일어나서 춤이라도 추셔야지 뭘 하십니까, 예?”

    이원은 입술을 꾹 누른 채 손으로 가만히 입술을 쓸어내렸다. 자꾸 입가가 꿈틀거렸다. 아, 하, 하, 아하하하. 속에서 커다랗게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참으려니 어깨만 자꾸 들썩거렸다.

    대규모 미분양 위협, 조합 내부의 격렬한 싸움, 사업 대행 신탁사와의 밀고 당기기, 자존심을 다 팽개친 비굴한 PF, 그 와중에 이어지던 우 상무의 비리와 파행, 경영권을 둘러싼 소리 없는 전쟁. 한 걸음 디딜 때마다 펑펑 지뢰가 터지고 갈팡질팡 엉망진창이었다.

    맞다. 그때 계약을 밀어붙인 것은 완전히 감 하나만 믿고 저지른 도박이었다. 시공비도 통 크게 밀어 넣었고, 일반 분양 물량의 절반이라는 조건도 미친놈 소리를 듣기에 딱 맞았다. 사업 포기까지 몰린 조합에서 수용했으니 망정이지.

    그리고 결국 그것이 잭팟으로 터졌다.

    그때 그런 승부수를 던졌다는 것이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다. 이원은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직감은 뛰어나지만, 승부사 기질은 없는 경영자. 평소의 자신이라면 절대 그런 무모한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단의 동인이 무엇이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순간 머리가 징, 울리며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맞다. 그날, 결정을 내리는 그 순간에도 우연이 옆에 있었다. 회의실 창문에 동그랗고 작은 머리가 오락가락하는 게 보였었고, 그 순간 나는 홀린 듯 결단을 내렸다.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떤 확신도 없이, 순전히 감으로, 속에서 치솟는 맹목적인 목소리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랬다. 그날 우연이는 내 속에 걸려 있던 무언가의 빗장을 풀었었다. 그날, 그 짧은 순간, 내 안의 승부사가 튀어나왔다. 하, 하하, 하하하. 이상하게 자꾸 웃음이 나온다.

    그 아이는 불확실로 가득한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냉큼 뛰어 도망치더니, 다시 돌아와 내 옆에 와 앉았다. 그 화약이 때가 되어 거대하게 터져 오르는 것을 함께 구경이라도 하자는 듯이. 그 안에 있던 것이, 사실은 폭탄이 아니라 형형색색의 축하용 폭죽이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이원은 들뛰는 가슴을 가만히 진정시키며 물었다.

    “그럼, 또 다른 소식은요?”

    “아, 인도네시아 해상 신공항 입찰 건 말입니다. 중국 K사하고 일본 P건설 쪽에서 저희보다 낮은 입찰가를 써내지 않았습니까?”

    “그렇죠. 중국 K사하고는 입찰 금액이 7억 달러 가까이 차이가 나지 않았습니까?”

    시공비 100억 달러, 한화 12조 원에 가까운 초대형 공사지만 입찰 금액 차이가 8천억 원이 넘으니, 도저히 어떻게 손써 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데, 30분 전에 담당자에게 비공식으로 연락이 왔습니다. 저희 세경건설이 최우선 협상 대상으로 선정됐다고 합니다. 전무님.”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귓속이 윙, 울리는 것 같다. 잘못 들었나? 그럴 리가 없는데? 하지만 홍연의 얼굴은 더 이상 기쁠 수 없다는 듯 활짝 웃고 있었다.

    “저희가 인도네시아 해상 공항 최우선 협상 대상으로 선정됐다고요, 전무님! 지금 세경건설은 완전히 광란의 파티 분위기입니다. 이런 날 전무님은 왜 아직도 출근을 안 하셨냐고 난리가 났단 말입니다.”

    어부지리를 넘어 잭팟이라 할 만한 행운이었다. 최근 1년간, 중국 K사에 악재가 겹치기는 했다. 몇 해 전에 건설한 미국의 해양 박물관의 수조 파열과 인도네시아 대형 호텔의 부실시공이 외신으로 오르내렸다. 외벽 균열, 외장재 탈락 사고, 단열 시공 부실로 인한 대대적인 리노베이션 결정이 내려진 게 두 달 전이었다. 그 일로 인해 결국 최저가를 써낸 K사가 협상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일본의 P건설은 우선 협상자로 지정되기 직전에 급하게 포기 의사를 밝혔다. 회사 대표이사의 부정·비리 사건이 터져 주가가 폭락하더니, 요 며칠 사이에 계열사 매각 소문까지 슬금슬금 퍼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 번째 입찰가를 적어 낸 저희가 우선 협상 대상으로 선정됐다고 30분 전에 비공식적으로 연락이 온 겁니다. 그쪽에서 오늘 안에 정식으로 우선 협상 의뢰서를 보낼 거라 합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이원은 여전히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 듯한 기분이었다. 어떻게 이런 소식이 한꺼번에 올 수가 있을까.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그동안 머릿속을 친친 얽고 있던 매듭들이 단칼에 잘려 나가는 것 같다. 눈앞이 시원하게 열린다. 길이 이렇게 열릴 수도 있구나. 너무 벅차서 숨이 밭았다.

    “어머나 축하해요, 전무님. 아이고 다행이에요, 전무님!”

    차를 내오던 송 여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축하의 말을 건넨다. 그동안 이원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봐 왔기에 송 여사는 감격한 목소리를 숨기지 않았다. 이원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심장이 너무 격하게 뛰어 도저히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송 여사님, 지금 편의점에 가서 우연이 좀 불러오세요. 라면 좀 그만 먹으라 하고. 저녁때 다 같이 축하 파티라도 하죠.”

    “예, 그럴게요.”

    “홍연 씨도 같이 식사라도 하고 가세요.”

    이원은 다시 자리에 앉아서 탁자에 손을 내려놓았다.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왜 이러지? 너무 좋아서? 흥분돼서 이러는 걸까?

    하지만 이내 수그러들 거라 생각한 떨림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커진다. 송 여사는 쉽게 오지 않는다. 이원은 극도의 긴장, 터질 것 같은 흥분을 필사적으로 견뎠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하다.

    이원은 이제 눈에 띌 정도로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현재 자신의 마음이 빅뱅이 일어나기 직전, 카오스의 초고온 초고압 고밀도 상태처럼 느껴졌다.

    “저…… 전무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하지만 떨림은 도저히 잦아들지 않는다. 이제 손이 떨리는 것도 모자라 어깨와 다리까지 들들 떨린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장이 심하게 두근거려서 견딜 수가 없다.

    천천히 홀을 돌던 이원은 우연이 쓰던 손님방의 문이 조금 열려 있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원은 이 방에 아무도 들어가지 말라고 말해 두었고, 청소도 관리도 직접 했고, 문도 항상 닫아 두고 다녔다. 문이 열려 있다는 건 누가 안에 들어갔었다는 뜻이었다.

    “민정 씨, 혹시 저 방에 누가 들어갔었습니까? 아무도 드나들지 말라고 했는데?”

    “아, 전무님. 아가씨께서 조금 전에 그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가셨습니다.”

    “우연이가요? 제가 없는 사이에 이 방을 사용하고 있었습니까?”

    우연과 비교적 친하게 지냈던 민정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무님께서 안 계시는 동안 계속 이곳에서 지내셨습니다. 식사할 때 말고는 밖에 나오지도 않고 잠도 여기서 주무셨어요.”

    닷새 동안 내내 여기서 지냈다고?

    여기서……, 이 텅 빈 방에서 종일 뭘 했는데?

    등으로 천천히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것 같다. 차갑고, 끈적하고 이상한 무엇인가. 휘청휘청하며 방으로 다가갔다. 뒤에서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린다.

    “전무님, 왜 그러십니까. 정말 몸 괜찮으십니까? 정 박사님을 지금이라도 부를까요?”

    이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지금의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다. 그는 두근대는 가슴을 누르며 방문을 활짝 열었다.

    “……음?”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다. 이원이 늘 정리해 두는 형태 그대로의 깔끔한 모습이었다.

    여기서 대체 뭘 했을까? 텔레비전도 컴퓨터도 없는 방인데? 무서워서 전화기는 꺼 두는 아이니 휴대 전화를 갖고 놀았을 리도 없고.

    이원은 옷장을 열어 보고, 서랍도 하나씩 빼 보았다. 딱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탁자를 쭉 보던 이원은 스탠드 아래에 조그마하게 접힌 종이를 발견했다.

    「계약 완료.

    500만 원 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평생 감사함을 잊지 않고 살겠습니다.」

    이원은 작은 종이쪽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 인사말은 뭔가 이상하다. 계약 완료라고?

    아니다. 우연은 아직 그림을 세 개밖에 그려 주지 않았다. 물론 안 그려 줘도 된다고 했지만, 그것을 ‘계약 완료’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것 말고도, 우연과 자신을 연결하고 있던 굵은 줄이 칼로 썽둥 잘린 듯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머릿속에서 갖가지 생각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이걸 왜 말로 하지 않고 종이에 적었을까? 내가 자고 있으면 깰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해 주면 되지 않니? 평생 고마움을 잊지 않는다? 넌 왜 헤어지는 사람처럼 이상하게 인사를 하는 거니?

    글자가 춤을 추는 것 같다. 속에서 뭔가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데, 시커멓고 무서운 것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터져 나올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알 수 없다.

    우연아, 네가 잘못 알았어. 계약은 끝나지 않았어. 일단 내 등의 그림은 사이즈가 20호가 안 되니 계약작이 아니고, 이걸 합친다고 해도, 그림은 네 개밖에 안 돼.

    말해 봐. 넌 왜 이런 인사말을 썼지? 왜 계약이 다 끝났다고 했지?

    ……넌 대체 왜 이렇게 오지 않는 거야?

    이원은 초조하게 방을 돌다가 옷장 문을 다시 열어 보았다. 옷장에는 예전에 우연이 입었던 옷 몇 벌 있었는데, 모두 얌전하게 제자리에 걸려 있었다.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자신의 낡은 와이셔츠도 걸려 있다. 속옷과 양말이 들어 있는 서랍에도 딱히 궐이 난 것이 없었다. 덜커덩, 쾅, 쾅. 서랍을 하나씩 열어 보는 손길이 점점 거칠어진다. 콰당, 책상 서랍을 열자, 물감과 붓, 종이 팔레트 등이 난잡하게 얽혀 있는 모습이 보였다.

    “……뭐지, 이건?”

    덜덜 떨면서 서랍을 완전히 빼 보았다. 달라졌다. 자신이 정리해 둔 것과 달리, 서랍 안의 물건은 엉망으로 뒤엉켜 있었다. 대용량 아크릴 물감 중 몇 가지 색깔이 바닥에 굴러 나와 있었고, 주둥이 끝까지 바짝 눌리고 비틀려 짜인 물감들도 많았다.

    이원은 그것들을 하나하나 집어 들었다. 블랙. 블랙, 세피아, 반 다이크 브라운, 로 엄버, 번트 시에나, 블랙. 사용감이 있는 물감들은 대부분 칙칙한 갈색이나 어두운 빛깔이었다. 이게 의미하는 건 뭘까. 손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뒤늦게 책상 위의 메모를 읽은 홍연이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전무님. 우연이가 그동안 작품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렇다기엔 완성된 그림이 없지 않습니까?”

    이원은 방을 둘러보았다. 방 안에는 그림이 없었다. 2층에도 그림이 없었다. 순간 침대 머리 쪽으로 길게 내려진 암막 커튼에 시선이 닿았다.

    ……제기랄.

    이원은 침대 곁으로 성큼성큼 가서 암막 커튼을 옆으로 확 젖혔다. 뒤에서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저, 전무님!”

    이원은 꼼짝도 하지 않고 눈앞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거대한 캔버스를 노려보았다.

    100호 캔버스를 꽉 채우고 있는 것은 온통 검은색이었다. 아니, 완전히 새까맣다기보다 회색과 갈색이 살짝 섞인, 재의 색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부드럽고 풍성한 검은색이었다.

    그 수렁처럼 깊고 어두운 잿빛 속에서, 자신의 얼굴이 희게 떠올라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이마에 재로 그려진 십자가를 박고 있는 이원의 얼굴은 온통 땀에 젖어 있다. 동공이 뒤로 반이나 넘어간 눈, 의식 없이 벌어진 입,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헐떡이는 날숨이 그대로 느껴진다. 젖은 머리카락, 흔들리는 몸, 매끈하게 윤을 낸 대리석처럼 차고 단단한 백색의 피부, 그곳에 무수히 맺힌 땀방울, 온통 찡그려진 미간과 입가, 팽팽하게 긴장한 어깨, 완전히 넋을 놓은 그 얼굴은 나른하고 방만하면서도 단 하나의 지점을 향해 극도로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무슨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지금 이게 무슨 장면인지는 모를 수 없었다. 이런 맙소사. 홍연이 저도 모르게 중얼대는 소리가 들린다.

    “제기랄…….”

    이원은 한 걸음, 두 걸음 뒷걸음질했다. 두 손이 입으로 올라갔다. 숨이 막힌다. 도저히 보고 있을 수 없다. 차마, 도저히.

    엄혹한 사순절, 기나긴 금욕 기간의 첫날인 재의 수요일. 자신은 한껏 쾌락에 빠져 있었다. 정사를 치를 때의 표정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추했다.

    파정의 극렬한 쾌감에 휘말렸는지, 그림 속 사내의 얼굴은 괴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육체의 자극에 완전히 굴복해 혼이 나간 듯한 모습, 생각이 완전히 휘발될 만큼 극도의 쾌감을 누리고 있는 그 찰나. 땀에 젖어 번질대는 뺨과 벌어진 입술, 눈꺼풀에 반쯤 파묻힌 채 동공이 풀어진 눈. 몸의 격렬한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듯했다.

    얼굴 껍질이 벗겨지는 듯한 수치심과 함께 격렬한 분노가 치밀었다.

    ……진우연!

    네가, 네가 어떻게 나를,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그림은 남에게 보이는 것을 전제로 한다. 현재가 아니라도, 언젠가는 대중에게 보일 때 생명과 가치를 갖게 되는 게 그림이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그렸다는 건 대체 무슨 뜻인가. 넌 내 이런 모습을 남에게 보여 주고 싶었던 거냐. 나를 이 지경까지 모욕하고 창피를 주기로 작정한 거냐.

    이원은 급작스럽게 끓어오르는 분노를 도저히 주체할 수 없었다.

    난 너한테 대체 어떤 의미지? 너에게 한이원이라는 인간은 이렇게 함부로 까발려져도 되는 사람이었어?

    더욱이 그를 견딜 수 없게 하는 것은, 자신의 이마에 박혀 있는 재로 그려진 얼룩이었다. 하필 그날, 이마에 이 표식을 받고 정사를 치르는 장면을 그렸다는 것이 대체 무슨 뜻이겠는가.

    ……넌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부분까지 기어이 이렇게 깔아뭉개야 직성이 풀리겠어?

    손이 와들와들 떨렸다. 당장이라도 저 캔버스를 박살 내고 칼로 그림을 찢어 버리려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뒤로 단단하게 틀이 짜인 캔버스는 주먹으로 후려쳐도 크게 흔들릴 뿐 부서시지 않았다.

    “홍연 씨.”

    “예, 전무님.”

    대답하는 홍연의 목소리도 우들우들 떨리고 있었다.

    “칼 가져와요.”

    “……네?”

    “커터 칼 가져와요! 가위든 뭐든, 당장!”

    홍연은 크게 숨을 들이쉬더니 다급하게 말했다.

    “저, 전무님. 한 번만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우연이가 안 좋은 의도로 그린 건 아닐 겁니다. 물어보시면 되잖습니까. 찢기 전에, 제발, 제발 다시 한번만 생각해 주십시오.”

    “다시 생각하긴 뭘 생각합니까? 이런 그림을 남겨 두라고? 당신 같으면 남겨 두겠어? 그 애 오기 전에 칼 가져와요!”

    사람에게는 건드려도 괜찮은 게 있고, 절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게 있다. 건드리지 말아야 할 부분 중에서도, 부끄러워 감추는 부분이 있고, 너무 성스럽고 거룩해서 손을 대면 안 되는 부분이 있다.

    우연은 남의 마음속에 숨겨진 비밀의 방을 본능처럼 찾아내서 그것을 그림으로 까발리는 능력이 있다. 그리고 이원은 한때, 우연이 자신의 껍질을 부수고 내면으로 침범해 들어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기꺼이 받아들이고 끌어안기로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아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이원에게는 아무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절대적인 성역이 있었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녀는 그곳마저 부수며 들어오고 있었다. 성역을 이따위로 모욕할 수는 없었다. 나를 어디까지 허용할 건지 시험하는 거라면, 용납할 수 없다. 이건 아니다. 여기는 아니다.

    “제발,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전무님! 저, 저 그림은 파손해선…….”

    이원은 홍연을 확 밀치고 문을 거칠게 열었다. 당장 칼이든 가위든 가져와 저 그림을 북북 긁어내야겠다는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 다만, 우연의 방에는 칼이 없었다. 칼이나 가위 같은 위험한 문구류는 물론 팔레트 나이프조차 없었다. 자해 위험 때문이었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네가 감히 어떻게 나한테.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저것은 나의 가장 바닥까지 처박힌 치부의 장면이다. 가장 부끄러울 때의 장면을 드러낸 것으로도 모자라 내가 가장 거룩하게 지키던 것을 스스로 모욕했음도 만천하에 까발렸다. 극도의 쾌감에 들떠 넋을 잃은 표정은, 금욕과 고난을 상징하는 재의 표식과 결합하여 말할 수 없이 참담해졌다.

    네 재능에 내 이름을 얹고자 했던 탐욕의 대가를 이런 식으로 치르라는 거냐?

    어제 내 청혼을 말도 안 되는 궤변으로 모욕한 이유가 이거야?

    난 너에게 이따위로밖에 취급당하지 못하는 사람인가?

    ……난 너한테 대체 어떤 사람이지?

    속에서 극렬한 감정이 끓어올랐다. 분노가 수치심을 휘발시키자 맨 밑바닥에 고여 있던 배신감이 날것 그대로 얼굴을 드러냈다.

    “제발, 제발, 전무님!”

    뒤에서 따라온 홍연이 그의 소맷단을 황급히 붙잡는다. 이원이 손을 확 뿌리치자, 가운의 한쪽 소매가 빠지면서 헐렁하게 휘감고 있던 가운이 반쯤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다.

    “……아. 이건…….”

    등의 그림을 발견한 홍연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선다.

    이원은 거칠게 가운을 추스르고 홀로 나섰다. 이제 인생에서 이 이상 수치스러운 일은 없을 듯했다.

    하지만 2층으로 바로 올라갈 수는 없었다. 현관에는 얼굴이 우유처럼 희게 변한 송 여사가 작은 몸을 와들와들 떨면서 서 있었던 것이다.

    “저, 전무님……. 아, 아가씨가…… 아가씨가…….”

    머릿속으로 이명이 일기 시작했다. 무슨 말인지 듣지도 않았는데 이미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무슨 말이 나올지 알 것 같다.

    송 여사가 덜덜 떨며 예상했던 말을 내놓는다.

    “편의점 뒷문에서 대기하던 택시를 타고 도망치셨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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