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누드-32화 (32/47)
  • 32. 청혼

    이원이 눈을 뜬 것은 해가 뜨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느껴진 감각은 통각이었다. 온몸이 아팠다. 전신에 포진한 수백 수천의 근육들이 비명을 질러 대는 것 같았다. 심지어 안구 속까지 극심하게 쓰리고 따가웠다.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뉴욕으로 가는 날 아침부터 실신 일보 직전이었고, 일정을 당기기 위해 강행군을 한 후, 오밤중에 기어들어 와선 동트기 직전까지 미친 짓을 했다. 몸과 정신이 버텨 준 게 믿어지지 않는다.

    옆에서 가늘고 달콤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계속 잘 거예요?”

    꿈인가……?

    “아저씨, 계속 잘 거예요? 응? 응?”

    입이 저절로 벌어진다. 아아, 하하. 꿈일 리가. 난 이 목소리를 바로 옆에서 들으려고 그 무리한 일들을 강행했는걸.

    “아저씨, 고만 일어나 봐요. 나 좀 봐 봐요, 한 번만.”

    “아저씨이, 나 한 번만 봐요, 응?”

    우연이 몸을 흔들며 자꾸 잠을 깨운다. 으으, 으음. 이원은 눈이 떠지질 않아 이불 속으로 자꾸 고개를 처박았다. 내가 불면증 환자가 맞나. 왜 이리 미친 듯이 졸리지. 사람이 행복하면 무슨 호르몬인가 나온다고, 그게 졸음도 유발한다고 누가 그랬지. 아저씨, 아저씨이. 우연은 자꾸 자신을 불렀고, 이원은 해일처럼 밀려드는 잠과 싸워 가며 응, 그래, 응, 애써 대답했다. 눈을 감은 채 더듬더듬해서 안아 주고, 입을 맞춰 줘도, 우연은 자꾸 이원을 깨웠다.

    “우연아, 나 며칠간 못 잤어. 조금만 더 잘게.”

    “잠은 나중에 자도 되잖아요. 나 좀 봐요, 얼굴 좀 보여 줘요, 응?”

    이원은 달팽이처럼 몸뚱이를 말고 끙끙 앓았다. 시차 때문에 계속 잠을 설치고 어제도 세 시간밖에 못 잤으면 나중에 자면 안 되잖니. 아, 저놈의 햇빛 좀 어떻게 해 줬으면. 눈이 아프다.

    등을 가만가만 어루만지는 손길이 느껴진다. 손가락 끝에 무엇이 걸릴 때마다 이물감과 함께 따끔거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맞아. 깜박 잊고 있었다.

    등에는 우연이 남겨 놓은 상처 자국이 있었다.

    ‘아니, 전무님! 이게, 이게 뭡니까! 와이셔츠에 웬 핏자국이……!’

    호텔에 가서 슈트를 벗었을 때 홍연이 깜짝 놀라는 것을 보고서야 이원은 등에 상처가 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냥 긁혀서 조금 따끔거리는 거로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거울로 확인하니 회초리로 맞은 것처럼 길고 날카로운 딱지가 여러 줄 덕지덕지 앉아 있었다. 덧나려는지 붉게 성이 난 부분도 보였다.

    보이지 않는 상처는 통증을 주장할 권리도 없었던 걸까. 상처를 보자마자 뒤늦게 등이 자글자글 따가워졌다.

    ‘대체 어디서 이런 상처를 입으신 겁니까? 아픈 것도 모르셨다고요? 이게 웬, 잠깐만 기다리십쇼. 약부터 바르고, 아니 어떻게 이 지경이 되도록 모르실 수가…….’

    길길이 뛰며 소독 연고를 찾아온 홍연은,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을 딱 다물고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됐으니까 약이나 좀 발라 주세요. 등이라 보이지도 않고, 손도 닿지 않네요.’

    이원은 덤덤하게 등을 내밀고 있는 자신이 낯설었다. 수치심이 무디어진 걸까. 내 속의 뭔가가 변한 걸까. 알 수 없었다.

    아픈 것이 싫지 않았다. 우연의 몸보다는 자신의 몸에 상처가 생기는 것이 훨씬 나았다. 적어도 자신은 피부가 벗겨지도록 놔두지 않고 멈출 수 있었고, 우연은 저보다 나의 상처를 훨씬 아파했다. 이원은 자신의 몸이 우연을 치료하는 도구가 된 것이 기꺼웠다.

    “아저씨, 상처가 남았는데, 안 아파요?”

    “매일매일 약 발랐어. 금방 낫겠지.”

    이원은 졸린 상태로 우연의 팔을 끌어당겨 손에 입을 맞추고 팔을 확인했다.

    다행이다. 우연이 그간 긁지 않으려 노력했는지, 팔의 상태는 떠날 때보다 상태가 훨씬 양호했다.

    저 팔만 제대로 회복된다면 내 팔이나 등가죽이 벗겨져도 상관없었다. 우연이 주는 것이라면 통증마저도 달다는 것을 몸은 이제 알고 있었다.

    그랬다. 그 지독한 수치심과 통증마저도 황홀하게 달았다. 어젯밤의 쾌감을 떠올린 몸이 우연과 살이 맞닿자 기뻐하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그치만 이렇게 피딱지가 많이 앉았는데요?”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목소리로 우연이 중얼거렸다.

    “안 아파……. 음, 조금 아파. 정말 조금.”

    “…….”

    “보기 불편해? 옷 입을까?”

    우연이 고개를 살랑살랑 젓는다. 한참 동안 그러더니 이내 배시시 웃으며 몸을 착 붙인다.

    “……이대로 벗고 계세요. 아저씨의 진정한 멋은 이렇게 벗겨 놔야 알 수 있어요.”

    “응……. 뭐?”

    머리가 띵, 울린다. 우연의 말은 늘 이렇게 거침없이 자신을 후려갈긴다.

    “벌거벗은 게 뭐가 멋있어? 보기 흉하지.”

    “아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이런 멋진 몸을 갖고서 흉하다고 하면 그건 범죄예요. 사형감이에요, 사형! 왜 그리스인들이 사람들을 홀딱 벗겨 놓고 조각을 했겠어요!”

    우연이 빽 소리를 지르더니 이원의 하반신을 가리고 있는 이불을 훌떡 들치고는, 아침이랍시고 반쯤 발기한 성기를 손가락 두 개로 반짝 들어 올렸다.

    “이거 보세요. 엄청 크고, 엄청 굵고, 엄청 길고, 엄청 짙고, 엄청 세죠. 얼마나 아름다워요?”

    “진우연!”

    이원은 황급히 우연의 손을 잡아떼고 아래를 가리다가 잠시 후 슬며시 손을 뗐다. 난처하다. 어차피 볼 거 다 봤는데 싶다가도, 환한 아침에 대놓고 보여 줄 만한 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뒤늦게, 속옷이라도 좀 입고 잘 걸 그랬나 하는 후회도 들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입지 않고 우연과 함께 같은 이불 속에서 자는 것은 또 말도 못 하게 좋았다. 우연과 맨살이 맞닿을 때마다 자신의 모든 피부 세포가 열렬히 환호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말랑말랑하고 보드라운 맨살을 만지며 자는 것이 너무 황홀했고, 그러자니 자신도 아무것도 걸치지 않는 게 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망하고 어색했지만, 우연이 자신의 몸을 매만져 주는 감촉과, 맨살에 시트와 이불이 휘감기는 포근한 감촉이 너무나 좋기도 했다.

    그래도 환한 대낮에, 이렇게 흉하게 늘어진 성기를 내놓고 찬사를 받고 있으니 머리가 뒤죽박죽 엉킨다. 조금 으쓱한 기분도 들고 말도 못 하게 창피하기도 했다. 이게 뭘까. 이래도 될까. 나는 과연 어디까지 망가지게 되려나.

    걱정과 달리 우연의 목소리는 종달새처럼 종알종알 계속 흘러나왔다.

    “하느님은 역시 몰빵을 하신 거예요. 외모도 섹시하고, 힘도 좋은데, 거기 사이즈도 조따 크고…….”

    “……진우연.”

    이원은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았다. 조따는 또 뭐야. 이런 말을 듣고서도 약 먹은 병아리처럼 졸고 있을 순 없었다. 엄한 목소리에 우연의 어깨가 푹 쪼그라들었다.

    “에이, 그, 조, 조따라는 게 뭐 그렇게 나쁜 말은 아니에요. 존나, 조또, 조따, 애들이 가끔 쓰는 말인데, 그게 정말 좆도 크다는 게 아니고, 아, 아니 그게 엄청 큰 건 맞는데, 아, 어…… 그게 아니고…….”

    이원이 기가 막혀 입만 벌리고 있자 우연이 엉덩이로 곰실곰실 뒤로 돌아가더니 답삭 목을 끌어안는다.

    “에헤헤. 아저씨이.”

    “하, 참. 하, 하하.”

    기가 막힌 정도를 지나니 웃음밖에 안 나왔다.

    “아저씨. 그래도 이 상처는 뭔가로 좀 가렸으면 좋겠죠? 남들이 보면 얼마나 이상하겠어요. 잘못하면 아저씨를 변태로 생각할지도 몰라요. 곰돌이 푸 반창고 있는데 그거라도 붙이고 계실래요?”

    이원은 우연의 팔에 뺨을 비비며 열적게 웃었다. 지금 자신의 상태라면 이미 충분히 변태였다. 홍연도 이미 변태로 생각하고 있는 눈치였다. 웃음의 진동이 우연에게로 퍼져 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곰돌이 푸 반창고가 더 변태 같을 것 같아. 전공 좀 살려 봐. 신사임당처럼 그 위에 그림을 그려서 덮어 볼래?”

    “네? 신사임당이 보디 페인팅을 했어요?”

    이원은 다시 웃었다. 등에 붙어서 속닥대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이렇게 눈물 나게 좋을 수가 없었다. 아무 짓도 안 하고 종일 붙어서 이렇게 수다나 떨면 좋겠다.

    “어떤 가난한 새댁이 잔치에 갔는데 치마에 얼룩이 튀었대. 지워지지 않는 얼룩인데 하필 그 치마가 빌린 거라지 뭐야.”

    “네.”

    “그래서 사임당이 그 치마를 벗어 가져오라고 해서 그 얼룩 위에 멋진 포도 그림을 그려 주었대. 그래서 새댁은 그 그림을 비싼 돈에 팔고 새 치마를 사서 무사히 돌려주었다는 거야.”

    “불로 소득이네요, 그 새댁. 그 위인전의 교훈은 불로 소득 조장인가요?”

    “……맙소사. 그런 말은 대체 어디서 배우는 거야?”

    “왜 이러세요. 제가 모 기업 CEO 덕질만 벌써 2년이 넘는다고요, 2년!”

    이원은 한참을 웃었다. 우연이 등 뒤에서 더욱 바짝 매달려 몸을 비빈다.

    “아저씨.”

    “응.”

    “저한테 뽀뽀 한번 해 보세요. 맘에 들면, 신사임당 노릇도 한번 생각해 볼게요.”

    이원은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 각도 그대로 고개를 옆으로 틀어 입을 맞췄다. 입맞춤은 목이 뻐근할 때까지 이어졌다. 우연은 숨을 할딱대다가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항복했다.

    “하, 합격! 합격! 그려 드릴게요.”

    “고맙네. 그럴 줄 알고 내가 집에 물감도 종류별로 딱 준비해 놨잖아? 페이스 페인팅 물감도 있을걸?”

    “헹, 누가 모를 줄 알아요? 그거 홍연 아저씨가 사 오신 거잖아요. 무스케이크 그릴 때, 반짝이 형광 물감 대용으로!”

    우연이 어깨를 꼭 깨물며 종알거렸다. 아직 할딱거리는 숨소리가 남은 목소리가, 어깨에 박히는 이빨의 감촉이 전신의 성감대로 퍼져 나간다. 이원은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넌 왜 그런 것까지 일일이 기억하고 있니? 어쨌든 내 카드로 긁은 거였어. 그건 비용 처리도 안 했단 말이야.”

    이원의 우물대는 말에 우연은 재미있는지 한참 웃었다.

    “아저씨, 사랑해요.”

    이 맥락 없는 고백에도 가슴이 크게 뛰었다. 이원은 고맙다, 라거나 나도, 라며 무심하게 동조하는 대신, 목을 끌어안고 있는 손을 꼭 감쌌다. 눈앞에 보이는 팔에는 여전히 상처가 빼곡하고, 놀라운 그림을 그렸던 손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냘프고 희었다.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이원은 고개를 숙여 그 가는 손목과 손등에 입을 맞췄다. 입안에서 끝없이 굴러다니던 말이, 그녀의 하얀 피부에 말없이 스며들었다.

    우연아, 우리 결혼하자.

    소리 없는 제안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젯밤에 보낸, 동일한 제안에 대한 대답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부터 폭발적으로 쏟아진 오열에 파묻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 * *

    “아주 작은 캔버스네요.”

    팔레트를 든 우연이 등 뒤에서 웃었다. 이원은 우연이 그림을 편한 각도로 그리도록 허리를 살짝 앞으로 구부리며 물었다.

    “내 등 정도면 작진 않은데. 4절 크기는 되지 않을까? 무슨 그림을 그릴 건데?”

    “글쎄요. 사임당처럼 포도 따윌 그려 놨다간 아저씨를 홀랑 따먹어 버리고 싶을 텐데요.”

    “……음. 기꺼이 먹혀 줄게.”

    아침 10시는 우연이 작업을 시작하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었고, 침대는 그림을 그리기엔 꽤 어색한 공간이었으며, 아저씨의 등은 그림을 그리기엔 지나치게 이상한 화폭이었다. 하지만 우연은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이건, 아저씨에게 주는 다섯 번째 그림이 되는 거겠지.

    가늘게 한숨이 흘러나온다. 빚을 남겨 두지 않는다는 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어차피 도망치는 마당이지만, 찜찜한 기분으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우연은 가는 붓으로 몇 번 선을 그어 구도를 가늠한 후, 큰 붓을 들어 면을 채우기 시작했다. 아저씨의 등은 우연이 작업한 100호 사이즈 캔버스에 비하면 턱없이 작았지만, 작업은 훨씬 까다로웠다. 그림판이 자꾸 움직였던 것이다. 최대한 움직이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같았지만, 아저씨가 숨을 쉬거나 말을 할 때마다 등이 조금씩 움직였다.

    “움직이지 좀 마세요.”

    “아. 미안.”

    하지만 아저씨가 아무리 조심해도, 몸의 어떤 곳에 붓이 닿으면 어깨가 꿈틀거리거나 허리가 튕기듯 비틀거리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바늘에 찔리기라도 한 것 같은 반응이었다.

    “음, 미안해, 나도 모르게……. 아, 미안해.”

    “사과 고만하세요. 이건 뭐 동전만 넣으면 사과가 나오는 자판기도 아니고.”

    투덜대던 우연은 잠시 후 입을 다물었다. 아저씨의 귀와 목덜미로 불그레하게 핏기가 올라왔고, 등에는 잔 근육이 솟아 있었다. 아닌 척하지만 긴장하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움찔, 다시 등이 움직인다.

    “……!”

    붓이 등의 어떤 부분에 닿을 때, 아저씨는 긴장했다. 날개뼈 근처 오목한 곳이나 척추 주변, 그리고 옆구리와 사타구니로 이어지는 뼈의 오목한 골짜기, 겨드랑이에서 가슴으로 이어지는 양쪽 길에 붓이 닿으면 저도 모르게 허리를 비틀었다.

    지금 어떤 상태인지도 짐작이 되었지만, 모른 척했다. 아저씨의 몸이 생각보다 많이 예민한 것이 의외로웠지만, 지금은 그것을 놀릴 시간조차 없었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고, 우연은 다섯 번째 그림을 그려야 했다.

    펄이 든 페이스 페인팅 물감은, 아저씨의 피부에 얹히자마자 샤갈의 그림처럼 환상적인 색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꿈처럼 몽롱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지독하게 선정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놀랍게도, 아저씨의 몸에는 그런 이중적인 색감이 잘 어울렸다.

    우연은 그림을 그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저씨.”

    “응.”

    “고마워요.”

    “……고맙긴.”

    “사랑해요.”

    “……그래.”

    아저씨, 사랑해요, 정말 사랑해요. 반복되는 고백에, 차분차분 대답하는 아저씨의 목소리가 점점 잠기는 것 같다. 우연은 아저씨가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이 상황이 참 좋았다. 아저씨는 등을 맡기고 창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우연아. 사랑해.”

    “…….”

    “우리 결혼하자.”

    어젯밤부터 되풀이되는 청혼, 이 대답을 회피할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우연은 어제처럼 격렬하게 오열하지도 않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붓질을 멈추지 않고 계속했고, 아저씨는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쥔 채 차분하게 대답을 기다렸다.

    아저씨는 사랑한다는 말 외에는 다른 어떤 부연 설명도 달지 않았다. 네가 힘들었던 시간을 잊게 해 주고 싶다, 원하는 건 뭐든지 해 주겠다, 따위의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아저씨는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우연의 앞에 그런 미끼를 드리우고 휘두를 생각은 없는 듯했다. 그는 두 사람이 미끼나 합리적인 이유 따위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연은 빙그레 웃었다. 불그레하게 밑칠을 해 둔 그림 위로 물방울이 툭 떨어진다.

    더는 대답을 피할 수가 없겠구나.

    약혼녀와 길이 어긋난 아저씨는, 뉴욕에서 그녀를 기다려 새로운 합의를 시도하는 대신 바로 귀국했다. 세경을 버리고 우연을 택하기로 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도착한 날 밤부터, 반지도 꽃다발도 없이 다급하게 청혼을 했겠지. 마음이 바뀌기 전에. 결심이 흔들리기 전에.

    하지만 우연은 이제 그의 청혼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유언장의 내용을 몰랐다면 모를까, 아저씨가 잃어야 하는 것들을 알고서는 도저히 저 청혼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래, 이건 마음 아파해선 안 된다. 마음 아파할 일도 아니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난 애초부터 결혼할 생각 따윈 전혀, 털끝만큼도 없었으니까.

    우연은 있는 힘껏 웃음을 지은 후,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저씨, 난 결혼은 절대 하고 싶지 않아요.”

    아저씨의 몸이 딱딱하게 굳은 것이 느껴진다. 청혼이 거절당할 거라곤 예상치 못한 듯했다.

    그랬겠지. 내가 아저씨를 열렬히, 아니 미친 듯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테니까.

    그럼 아저씨는, 내가 그동안 반복해 온 비혼 선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던 걸까? 그저 철없는 여자아이의 치기 어린 장담이었다고 생각했던 걸까? 붓질이 한참 이어질 동안, 아저씨는 여전히 돌처럼 굳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우연은 담담한 목소리로 되풀이했다.

    “난 결혼은 절대 하지 않을 거예요. 사랑을 고인 물처럼 썩게 하고 싶진 않아요.”

    “우연아, 그건 썩는 게 아니라 성숙하고 편안한 사랑으로 바뀌는 거야.”

    “애정은커녕 관심조차 없고, 보기만 해도 진저리 나는 상태를 요새는 성숙하고 편안한 사랑이라고 하나요?”

    아저씨가 가늘게 한숨을 쉬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연아. 네 부모님의 모습이 일반적인 건 아니야. 그렇지 않은 집도 많아. 죽을 때까지 연인처럼 사랑하고 노력하면서…….”

    “그런 집은 많지 않아요. 내가 관찰한 세상에선, 절대 많지 않았어요.”

    우연은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아저씨와의 마지막 시간이 될지도 모르는 이 순간을, 우연은 이따위 대화로 흘려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우연을 선택하기로 했고, 따라서 우연의 솔직한 대답과 마음을 들을 권리가 있다. 그가 힘겹게 설득을 시작했다.

    “우연아.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할 거 없어. 결혼은 이 힘든 세상에서, 그래도 나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네 편이 되어 주고, 너만 사랑하겠다는 약속이고, 그 약속을 법으로 보장해 주는 울타리야.”

    “요즘처럼 이혼이 쉬운 시대에 그런 약속이나 울타리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우연아.”

    “만에 하나, 제가 경조증 때문에 이렇게 아저씨를 미친 듯이 사랑하게 된 거면 어떡하실 건데요?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현타가 와서 이 감정이 확 식어 버리면요?”

    넓은 어깨가 들들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여전히 침착했다.

    “……그래도 내가 약속을 지킬게. 나만이라도 지킬게. 그럼 되지 않을까?”

    붓이 허공에서 멎었다. 갑자기 눈물이 분수처럼 치솟아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제발 이러지 좀 마세요. 왜 아저씨가 이런 애걸을 해요.

    ……아저씨는 지금 저한테 그딴 얘기 함부로 하시면 안 된단 말이에요. 제가 그 말을 믿고, 뻔뻔하고 몹쓸 선택을 정말로 해 버리면 어쩌려고요.

    아저씨는 자신의 말을 지킬 것이다. 일단 결혼을 하면, 자신의 손으로는 그 울타리를 절대 허물지 않을 것이다. 죽을 때까지 그 울타리를 지키며 그 안에서 머무를 것이다. 한이원이라는 인간이 생각하는 결혼이란 태산처럼 무겁고 흔들리지 않는 것이었다.

    우연의 소리 없는 흐느낌을 느낀 아저씨가 몸을 돌린다. 그의 얼굴은 피로와 괴로움으로 얼룩져 있었다. 우연은 흐느낌을 누르며 더듬더듬 물었다.

    “아저씨, 혼자 있는 게 당연한 두 사람이 서로의 곁을 지킨다는 건,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는 뜻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렇죠?”

    “……그래.”

    “그런데 결혼 후에는 달라지죠. 서로 곁을 지키는 게 당연한 의무가 되잖아요. 결혼이 유지된다는 건, 여전히 서로 사랑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저 ‘이혼할 만큼 증오하거나 불신하지는 않는다’는 뜻으로 바뀌는 거죠. 아니면 엄마처럼 이혼을 꿈도 꾸지 못할 상황이거나. 그렇죠?”

    “…….”

    몇십 년 해로한 노부부들조차 사정은 다르지 않다. 텔레비전에서 보면 노인들에게 가끔 해괴한 질문을 하는 진행자들이 있다. 할머니, 할머니, 다시 태어나도 영감님하고 결혼하실 거예요? 마른 대추처럼 쪼글쪼글해진 그네들은 함빡 웃으며 대답한다. 단호하게, 유쾌하게,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미쳤어? 싫어, 혼자 살 거여. 다른 놈 만나야지 왜 저 웬수를? 캭 죽고 말지. 농담을 가장한 그네들의 대답 뒤에는 늘 서슬 푸른 진심이 도사리고 있었다.

    “결혼을 하면, 더 이상 곁을 지키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겠죠. 사랑을 얻으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겠죠. 당연히 존재하는 공기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하여, 사랑은 결국 부패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이 아름답고 숭고한 감정은 살아 있을 때 향긋하고 달콤한 냄새를 피우지만, 죽어서 썩어 가기 시작하면, 그 악취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사랑이 썩어 증오로 변질된 집에서 살아 보지 않은 사람은 그 끔찍함을 감히 짐작할 수 없다.

    아저씨는 우연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한 목소리로 새로이 고백했다.

    “……언젠가 썩어야만 하는 감정이라면, 같이 썩어 가는 대상이 너였으면 좋겠어.”

    우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떻게 사람이 이럴 수가 있을까.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 아저씨 역시 나만큼이나 어딘가가 고장 나 있는 건 아닐까.

    “우연아. 나도 열렬한 감정은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해. 광적인 열기는 어느 정도 수그러들겠지. 하지만 노력하면 편안하고 따뜻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잘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어.”

    “…….”

    “난 너와의 관계에 이상이 생겼을 때,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구나, 잘 가.’라고 산뜻하게 말 못 해.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많이 노력할 거고, 이러지 말고 잘해 보자고, 기회를 달라고 애걸하고 질척댈 거야. 그걸 위해서 결혼이라는 울타리 정도는 쳐 두고 싶어. 그것도 안 돼?”

    “……마음이 떠나면 울타리가 무슨 의미인데요?”

    “왜 벌써 마음이 뜨는 때를 생각해! 힘들고 무서울 때마다 포기하고 도망칠 생각부터 하지 말고, 같이 노력해 보면 되잖아. 나를 믿고, 너도 자신을 한번 믿어 보면 안 되겠어?”

    이제야 뭔가를 예감한 걸까. 아저씨의 목소리가 격하게 흔들렸다.

    “내가 너한테 뭘 해 주면 좋겠어? 힘들면 힘들다고 하고, 아프면 아프다고 해. 백 번이든 천 번이든 말해. 도와줄게. 네가 싸워서 이겨 낼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 줄게.”

    “아저씨…… 그만해요.”

    “내가 전에도 말했잖아! 돈이 필요하면 폭포처럼 쏟아붓고, 위험하면 철통같이 지켜 주고, 마음이 불안정하면 평생 약을 써서라도 안정시켜 주겠다고! 무슨 짓이라도 할 테니, 너는 말만 해. 뭐든지, 말만!”

    “그만해요, 그만…….”

    우연은 고개를 위로 쳐든 채 눈을 깜박거렸다. 그는 우연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입을 다물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그 강건하고 넓은 어깨가 크게 출렁거렸다.

    아저씨의 불안을 이해한다. 그는 이 사랑이 영원할 수 있다고 믿으니까 이것이 사라질까 봐 불안해하는 것이다. 차라리 사랑이 시간에 따라 닳아 사라지고 썩는 것임을 이해했다면 서글플망정 이리도 불안하지는 않았을 텐데.

    생각해 보면 아빠도 늘 그렇게 불안해했다. 자신보다 훨씬 잘나고 가진 게 많았던 엄마의 목에 족쇄를 걸어 옆에 앉혀 놓고, 그것도 모자라 하루에도 열 번씩 그렇게 날개의 관절을 꺾어 댔다.

    “아저씨, 꼭 싸워서 이겨 내야만 해요? 힘들면 그냥 숨고 도망치면 안 돼요? 아저씨도 무서우면 맞서지 말고 도망치라고 하셨잖아요. 그건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거라고 하셨잖아요.”

    “우연아. 그건, 그러니까…….”

    “도망치는 것도 벅차 죽겠는데, 당당하게 맞서야 하고, 힘껏 싸워야 하고, 이겨 내기까지 해야 해요? 왜 저는 승산도 없는 싸움판에 매번 이렇게 질질 끌려다녀야 해요?”

    아저씨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아마도 이런 대답은 예상하지 못했던 듯했다. 깊고 신비로운 고동색, 그 아름다운 눈동자는 이제 고통과 혼돈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어떻게 평생 도망만 치며 살겠어. 포기하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 나를 믿고 조금이라도 싸워 줘. 제발 조금만이라도 버텨 줘.”

    “…….”

    “나머지는 내가 할게. 내가 목숨 걸고 다 해결할게. 영원한 고통은 없어, 우연아. 모든 폭풍은 반드시 끝나게 돼 있어.”

    우연은 웃었다. 아저씨가 해결한다고. 목숨 걸고 다 해결한다고. 늘 신중하게 말을 고르던 아저씨의 허황한 장담이 낯설었다.

    그래요, 아저씨. 나도 믿고 싶어요. 아저씨가 가진 걸 모조리 날려 버리는 꼴을 모른 척하고, 엄마가 죽거나 말거나 눈을 딱 감아 버리고, 아빠의 표적이 되어서 평생을 이 집에 숨어 살아간다 해도, 이 청혼을 받아들이면 우린 영원히 행복할 거다, 그렇게 해맑게 믿고 싶어요.

    그런데 아저씨…….

    “……죽어도 안 믿어지는데, 나한테 어떡하라고 그래요…….”

    아저씨는 대답하는 대신 우연을 다시 힘껏 끌어안았다.

    “그럼, 나중에, 시간이 흘러서, 안심이 되면, 편안해지면, 나에게 기대도 되겠다, 믿을 수 있게 되면, 그때는? ……나는, 기다릴 수 있어 우연아.”

    “……나는 그럼 ‘언젠가는 결혼해야 한다’는 새로운 빚에 쫓기며 살아야 하나요? 평생?”

    우연은 이렇게 반문해야 하는 자신이 끔찍하게 혐오스럽고 진저리가 났다. 하지만 아저씨가 자신을 자꾸 갉아 가며 희생하겠다는 말을 더는 들어 줄 수가 없었다. 아저씨는,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행복했을 것이다.

    아저씨의 목소리가 드디어 눈물에 잠기기 시작한다.

    “제발…… 이러지 마라. 왜 그렇게만 생각하니.”

    “나도 아저씨를 사랑하고, 아저씨도 나를 사랑하는데, 왜 꼭 아저씨가 원하는 대로 결혼해야 하나요?”

    “…….”

    “아저씨가 내 목숨을 구해 줬으니까?”

    “…….”

    “아저씨가 돈이 많아서? 나보다 나이가 많아서? 힘이 세서? 내가 아저씨한테 빚이 많아서?”

    “사랑해서. 사랑하니까. 다른 이유는 없어. 네 옆에…… 평생 있고 싶어. 그것뿐이야…….”

    아저씨는 대답을 잇는 대신 고개를 천천히 천장으로 들어 올린다. 그는 울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청혼이 이렇게 산산이 팽개쳐지는 순간을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을 그는, 이제 무기력하게 숨죽여 흐느끼고 있었다.

    우연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못 버티겠다. 아저씨가 우는 걸 보니, 몸이 통째로 믹서기에 갈리는 것 같다. 나오지 말아야 할 말이 튀어나오려 한다. 미현이 던져 주고 간 거대한 유혹, 공평한 방법이고 서로에게 가장 유익하다고 말하던 그 방법. 아저씨에게도 우연에게도 너무나 달콤하고 강렬한 유혹.

    “아저씨……, 결혼하지 않고 그냥 연애만 하면 안 돼요? 사랑이 살아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사랑만 하면 안 돼요……?”

    결국, 한 끄트머리가 튀어나왔다. 머리가 터질 것처럼 왕왕거린다.

    아저씨가 짠물에 잠긴 눈으로 우연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그는 우연의 입속에서 꼬리가 잘린 말이 남아 있는 것을 짐작했다. 그는 그 말을 조용히 기다렸다.

    ……난 어떡해.

    우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말을 내 입으로 하는 게 맞을까. 이런 말을 하면 아저씨는 반가워할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를 경멸하게 될까. 이런 제안을 기다렸을까. 나는 이제부터 세컨드니 첩이니 더러운 년이니 하는 말을 평생 듣고 살아야 할까.

    ……웃긴다. 넌 지금까지 더 심한 말을 들으면서 살아왔잖아. 지킬 명예 따위나 있어?

    우연은 자신을 마음껏 비웃었다. 자신의 처지에 생각이 닿는 순간, 드디어 입속에 남은 말꼬리마저 빠져나간다.

    “아저씨도 약혼녀 언니하고 똑같이 하면 안 돼요?”

    “뭐?”

    잠시 후 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순식간에 분노에 휩싸였다. 그는 우연이 그런 제안을 하리라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게 틀림없었다.

    “진우연!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너, 내가 미현이와 결혼하고 너와도 관계를 유지하라는 거야? 결혼이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가 격노한 목소리로 고함을 쳤다. 우연은 멍청한 얼굴로 더듬었다.

    “아, 아저씨만 손해 볼 필요 없잖아요. 억울하지 않아요?”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네가 평생 어떤 말을 들으면서 살아야 할지 몰라? 네가 어떻게,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몸이 확 끌어당겨졌다. 헉, 우연은 다급하게 숨을 쉬었다. 우연의 몸이 그의 두 팔 사이에서 짜부라질 듯 강하게 짓눌렸다. 그가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결혼은, 그분의 이름으로 맺어지는 신성한 약속이야. 나는 너 말고 다른 사람과 결혼할 생각이 없어. 너도 절대로 그렇게 살아선 안 돼. 그러니 다시는,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라. 그런 생각조차 하지 마라. 두 번 다시.”

    늘 차분하고 침착하던 목소리가 우들우들 떨리고 있었다.

    그래. 이럴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는 이원 아저씨라면, 내가 좋아하고 사랑했던 이원 아저씨라면.

    “그리고 우연아, 나는, ……네가 원하는 사랑 방식도 ……받아들이기 힘들어. 나는 그렇게 불안정한 관계를 견딜 수 없을 거야.”

    아저씨의 목소리는 이제 형편없이 갈라지다 부서진다.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도, 그런 불안정한 관계는 옳지 않아. 그러니…….”

    “아저씨, 나는 결혼도 아이도 정말 원하지 않아요. 말했잖아요…….”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정말 어떡하면 좋을까. 나로 인해 너무나 많은 것을 잃어버려야 할 이 아저씨를, 나는 대체 어떡하면 좋을까. 아저씨는 필사적으로 말을 잇는다.

    “네가 예전에 말했잖아. ……나를 닮은 아이를…… 길러 보고 싶다고 했잖아…….”

    게다가 아저씨는 이제 비굴하고 비겁해지기까지 한다. 그답지 않은 비굴함과 비겁함에 목이 메었다. 아저씨는 나 때문에 늘 어딘가 붕괴하며 스스로를 잃어 간다.

    “아주 잠깐, 아저씨를 꼭 닮은 아기라면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맞아요.”

    우연은 그의 팔에서 빠져나와 그의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고통에 잠식된 그의 얼굴은 여전히 끔찍하게 아름다웠다.

    그래. 사랑스러울 것이다. 아저씨를 닮은 아기라면, 아저씨처럼 깊고 아름다운 갈색 눈동자를 가지고, 아저씨처럼 사랑스럽게 웃고, 아저씨처럼 자라날 보석 같은 아기라면, 내 목숨을 걸고 사랑하며 키울 것 같다.

    “……그런데 막 낳았는데, 아저씨 아니고 저를 닮았으면 어떡하죠?”

    “…….”

    “나는 진우연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나도 맘에 들지 않아요. 거울만 보면 망치로 두들겨 부수고 싶을 정도로요. 그런데 그 꼬라지를 빼닮았으면 어떡하죠? 난 무서워요.”

    “…….”

    “엄마나 아빠를 닮았으면 또 어쩌죠? 사랑은 고사하고, 아빠 닮은 구석이 눈에 띌 때마다 죽이고 싶어질 텐데요? 엄마가 그랬어요. 내 머리카락 한 올까지 증오스럽다고.”

    “단정하지 마, 우연아. 안 그럴 수도 있어.”

    “운이 좋으면 안 그럴 수도 있죠. 기적처럼 엄마 아빠 닮은 애를 사랑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운이 없으면요? 낳고서 아, 망했다, 하는 걸 깨달으면요? 리셋, 그리고 죽이고 다시 시작하나요?”

    아저씨의 얼굴이 심하게 꿈틀거렸다. 하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고함을 치지도 않고, 설득을 하지도 않았다.

    “……아저씨가 절 위해서 해 주실 건 없어요. 아니, 하나 있긴 있네요.”

    우연은 입술에 힘을 주어 힘껏 웃었다. 아저씨는 웃지 않았다.

    “이 그림이 완성될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계시다가…….”

    “…….”

    “다 그려지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나를 한 번만 더 안아 주시는 거예요.”

    그림이 완성된 후, 이원은 거울 앞으로 가서 그림을 보는 대신 우연을 안았다. 길지는 않지만 과격한 정사가 이루어졌다. 몸을 박아 넣는 동작이 유난히 거칠고 무자비하게 느껴졌지만, 우연의 반응도 만만치 않았다. 이원의 등과 목, 가슴과 귀두 부근에는 새로운 상처가 생겼고, 우연의 양쪽 젖꼭지 주변과 허벅지, 사타구니는 시뻘건 자국으로 흉하게 뒤덮였다. 두 사람 모두, 몸에 남은 실낱같은 에너지를 모조리 쥐어짜 섹스에 쏟아부었다.

    하반신을 갈퀴로 긁는 것 같은 끔찍한 쾌감이 전신을 후려갈겼다. 입에서 터지는 거센 신음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아, 아윽, 하아아! 두 사람의 신음이 엉기기 시작하면서 눈앞이 점점 하얗게 물든다. 자신의 허리를 감고 격렬하게 움직이는 우연도 서서히 절정을 맞는 중이었다.

    우연의 손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움켜잡는다. 통증은 느껴지지 않는다. 아아, 아저씨, 아아악, 아악! 우연은 고개를 뒤로 한껏 꺾고, 가는 몸을 꽃처럼 물들이며 날카롭게 비명을 지른다. 그 높은 비명 소리가 송곳처럼 등줄기를 긁으며 성감을 자극했다. 우리의 신음 소리가 아래층에 혹시 들릴지, 어떻게 들릴지는 죽어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페니스를 감싼 질벽에서 애액이 넘치도록 쏟아지는 것이 느껴진다. 쩔걱, 쩔걱, 쩍, 쩍, 이제 성기 주변뿐 아니라 아랫배, 허벅지까지 반투명한 점액으로 온통 질척질척했다. 절정을 향해 달아오르는 우연의 속살이 잘게 떨리고 꿈틀대기 시작했다. 안쪽의 굴곡진 근육이 물결치듯 요동하고 그곳에 물린 이원의 음경을 안으로 맹렬히 끌어당긴다. 말랑말랑하고 따끈한 젤리가 수십 개의 작은 손으로 변해 한껏 예민해진 귀두와 돌처럼 굳은 기둥을 미친 듯이 긁고 비벼 대는 것 같았다.

    사정은 다급했다. 그는 거칠게 헐떡대며 우연의 다리를 두 손으로 활짝 밀어 놓았다. 성글고 담백한 음모의 숲과 도도록한 대음순, 그 안에서 만개한 양귀비처럼 펼쳐진 소음순과 바짝 솟아오른 붉은 클리토리스가 드러났다.

    이원은 이 숨겨진 속살들을 볼 때마다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저 작은 속살은, 손가락으로 힘껏 움켜잡아 흔들고, 입에 넣어 빨아 대고, 자근자근 깨물고, 뜯어 먹어 버리고 싶다는 광적인 욕구를 불러일으키곤 했다. 애액에 질척하게 적셔진 요도와, 한껏 발기한 클리토리스를 문질러 대자 숨넘어가는 듯한 비명이 치솟았다.

    “아파 아저씨, 아파아! 더 해요! 더 해! 아파! 더 세게 해!”

    우연은 결코 그만하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이런 반응을 볼 때마다 머릿속 어딘가의 퓨즈가 나가 버리는 것 같다.

    시선을 조금 더 아래로 내리자, 자신의 거대한 성기를 팽팽하게 집어삼킨 입술이 적나라하게 보인다. 한껏 발기해 핏줄까지 두드러진 자신의 페니스와 거친 음모는 반투명한 체액에 흠뻑 젖어 더없이 음란하고 더러워 보였다. 우연이 드디어 절정에 도달했는지, 격렬하게 몸부림치며 비명을 질러 대기 시작했다.

    “아악, 아저씨! 아아앗! 아아아!”

    이원은 이를 악물고 성기를 힘껏 박아 넣은 후 엉덩이와 아랫배에 힘을 바짝 주었다. 허리를 잘게 쳐 대는 동안, 요도에서는 정액이 발작처럼 튕겨 나왔다. 비행기에서 낙하산도 없이 추락하는 듯, 모든 것이 아득하고 소름 끼치게 짜릿했다.

    마지막 사정은 마른걸레를 비틀어 짜는 듯 길고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몸의 감각은 그것을 고통으로 감지하지 못했다. 그저 황홀했다. 끔찍한 쾌감이었다. 그는 입을 벌리고 신음하며 몸을 묻어 둔 채 허리를 떨었다. 잔뜩 예민해진 페니스가, 아니 하반신 전부가 쾌감으로 녹아내렸다. 온몸의 근육과 감각이 미쳐 날뛰다가 단숨에 허물어진다.

    아아아……, 하아.

    격렬한 정사를 마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무저갱 같은 허탈함과 강렬한 수면욕이었다. 옆에서 할딱대는 숨소리에 섞인 가는 신음은 열에 들뜬 흐느낌과 비슷하게 들렸다.

    이원은 우연과 왜 싸웠는지, 자신이 무엇 때문에 절망했는지 어느새 잊었다. 그는 우연을 꽉 끌어안고 그녀의 살 속에 자신의 몸을 묻어 둔 채 의식을 놓았다. 그곳은 지나치게 따뜻하고 숨 막히게 포근했다. 영원히 그곳에 파묻혀 잠을 자고 싶을 정도로.

    행복과 절망의 양극단에 다다른 듯한, 죽음과도 같은 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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