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재의 수요일(Feria quarta Cinerum)
우연은 정신을 차린 후 한참 눈을 깜박거렸다. 자신이 왜 여기 와 있는지, 어떤 상태인지 기억을 되살리는 데 약간 시간이 필요했다.
아 맞다. 우리 섹스했지.
……맞다. 창피해서 어쩔 줄 모르는 아저씨를 붙잡고 별짓 다 했었다.
우연은 눈을 깜박이다가 히죽히죽 웃었다.
나 정말 미쳤던 것 같아. 제정신 아니었어, 정말.
그래. 내가 아마 경조증이라서 그랬을 거야. 살짝 맛이 가서 그랬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아까 저질렀던 짓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사람이 한 짓이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것도, 둘 다 처음이었는데.
아저씨가 사정을 마친 직후, 자신은 욕조에서 기절한 것처럼 잠에 떨어진 것 같다. 아저씨가 어떻게 수습했는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몸에 실오라기 한 올 걸쳐져 있지 않은 꼴을 보면 아저씨도 욕실에서 나와 그대로 뻗은 듯했다. 그나마 누가 볼세라 커튼을 꼭꼭 쳐 놓을 정신까지는 있었던 모양이다.
벌써 저녁때가 됐는지 사방은 어둑어둑했고, 노란 침실 등만 주변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으음.”
옆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들린다. 크고 따뜻한 손이 뒤에서 허리를 꼭 끌어안아 바짝 몸을 붙인다. 아저씨였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아저씨도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잠을 자고 있었다.
불면증이라면서 잘도 주무시네.
우연은 그의 눈앞에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 보았다. 잠결에도 기척을 느꼈는지, 그가 우연의 몸을 더듬더듬하더니 한 손으로 가슴을 덥석 쥐고 주무르기 시작한다. 하아아아. 가볍게 웃는 듯한, 긴 한숨 소리가 들린다.
“이 변태 같은 아저씨가.”
투덜대던 우연은 문득 말을 멈추고 눈을 깜박거렸다.
아저씨, 변태 맞는 것 같다. 세상 점잖아 보였는데, 알고 보니 변태도 이런 상변태가 없다.
……이렇게 기쁠 수가.
우연은 히죽 웃으며 가만히 몸을 돌렸다. 하지만 몸을 움직이자마자 헉 소리가 튀어나왔다. 허리가 녹아내릴 것 같고 온몸이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것 같았다. 허벅지 안쪽은 빡빡하게 당기고, 안쪽 점막은 쓰리다 못해 죽을 지경이었다. 특히 클리토리스 부분은 공기만 닿아도 절로 비명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개운하고 나른하며 노곤하고 편안한, 뭔가 좀 이상한 느낌이었다.
아저씨는 자면서도 한참 가슴을 만지더니 아예 얼굴을 가슴 사이에 푹 파묻는다. 그러더니 더듬더듬 다른 쪽 젖꼭지를 찾아 물고는 흡족하게 웃는다. 하아. 아, 음. 열에 달뜬 소리가 났다.
바보 변태 아저씨. ……내가 뭐가 그렇게 좋다고.
우연은 저도 모르게 웃다가, 갑자기 저도 모르게 크게 소스라쳤다. 아저씨가 가슴을 더듬는 손이 순간적으로 거대한 바퀴벌레처럼 느껴졌다.
……헉!
우연은 크게 몸서리를 치며 반사적으로 손을 뿌리쳤다. 아저씨의 손이 맥없이 뒤로 튕겨 나간다. 동시에 안 좋은 기억이 똥물처럼 튀어 올랐다.
제기랄.
몸은 끔찍하고 혐오스럽던 촉감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빠가 만질 때,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던 바로 그 촉감이었다. 지금 저를 만지고 있는 게 아빠가 아니라는 걸 너무나 잘 아는데, 그래도 문득문득 그 재수 없는 감촉이 살아나면 몸이 저절로 소스라치고 구역질이 났다.
우연은 가만히 몸을 떼고 물러앉아 가슴을 감싸 안았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다. 만약 아저씨가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이런 일을 당했으면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을까.
아저씨의 애정 어린 손길을 마음껏 좋아하지도 못하고, 구정물 같은 기억을 떠올리는 자신이 자꾸 미웠다. 가슴과 허리에 그 징그럽고 소름 끼치는 감촉이 여전히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있는 것만 같았다.
빌어먹을. 그쯤 괴롭혔으면, 이제 제발 내 인생에서 꺼져 주란 말이야.
자신의 몸이 저주스러웠다. 속속들이 미웠다. 몸속을 한이원의 세포들이 모조리 점령했으면 싶었다. 질도 자궁도 혈관도 내장도 근육도, 뇌 속도, 유전자까지 아저씨의 정액으로 채워서 모조리 갈아엎었으면 좋겠다.
아저씨가 옅은 신음을 내며 몸을 꿈틀거린다. 소름 끼치던 느낌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아저씨, 미안해요. 잊어버리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안 돼.
우연은 가늘게 한숨을 쉬며 아저씨의 무의식적인 움직임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저씨의 움직임을 초당 100개의 프레임으로 나누어 세세히 기억하고 싶었다.
천천히, 천천히 눈꺼풀이 꿈틀대더니, 긴 속눈썹이 가만히 위로 올라갔다. 황홀하게 아름다운 갈색 눈동자가 나타난다.
“……음?”
어리둥절한 것처럼 몇 차례 깜박이던 눈이 천천히 가늘어진다. 입가에는 한껏 웃음이 담긴다. 잠시 후 억센 팔이 우연의 몸을 확 끌어당겨 안는다.
“……꿈인 줄 알았어.”
아저씨가 목쉰 소리로 중얼거렸다. 우연은 키득키득 웃으며 아저씨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아저씨의 얼굴로 불그레하게 핏기가 몰려든다. 늘 단정하던 머리카락이 여기저기 뻗쳐 있는 것을 보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아저씨가 부스스한 눈을 비비고 기지개를 켠다. 아저씨도 눈을 비비고 기지개를 켠다는 것이 너무나 신기했다.
“몇 시니? 배 안 고파?”
“배고파요. 몇 시지? 어? 저녁 5시밖에 안 됐는데…… 엄청 배고파요.”
하긴, 그런 과격한 운동(?)을 했으면 뱃가죽이 달라붙도록 고픈 게 당연하겠지. 아저씨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멋쩍게 웃는다.
“나도 배고프다. 그나저나 오랫동안 푹 잔 것 같은데 겨우 5시야?”
순간 아저씨의 휴대 전화에서 요란한 알람 소리와 함께 딱딱한 멘트가 퍼졌다.
― 5시 정각, 입니다, 오늘은, 새벽, 미사가, 있습니다.
우연은 얼빠진 얼굴로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아저씨는 알람을 끄고 사방을 둘러보더니 풀썩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 하하하, 아저씨는 어깨까지 들썩대며 한참 웃었다.
“우연아, 지금 저녁이 아니라 새벽이야.”
“네? 그렇게 오랫동안 잤다고요?”
“응. 정말이야. 나도 이렇게 정신없이 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믿을 수가 없었다. 우연은 그동안 불안해서 잠을 거의 이루지 못했다. 언제 아빠가 찾아올지 모른다, 하는 마음에 늘 숨이 막혔었다. 이렇게 꿈도 꾸지 않고 달게 잔 게 며칠 만인지 모르겠다.
아저씨는 이불 속에서 한참 뭉그적대더니 끙, 소리를 내며 옆에 놓인 가운을 걸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으, 짧게 신음하다 황급히 삼키는 걸 보니 아저씨도 꽤 아픈 모양이었다. 우연은 이불에서 고개만 쏙 내민 채 물었다.
“아저씨, 어디 가세요?”
“응, 새벽 미사에 좀 다녀올게. 너는 여기서 더 자. 나 올 때까지 어디 나가지 말고.”
조금 부루퉁해졌다. 지금은 아저씨가 옆에 있어 주면 좋겠다.
“성당에는 일요일에만 가는 거 아니에요?”
“그건 아니야. 주중에도 미사가 있고, 새벽 미사도 매일 있어. 나는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만 정해 놓고 가지만.”
“오늘 하루는 안 가셔도 되지 않아요? 하느님도 하루 정도는 양보하실 줄도 알아야죠. 그렇게 욕심이 사나우셔서야…….”
“진우연!”
아저씨의 목소리가 엄해진다. 아저씨는 그쪽 이야기만 나오면 열 배는 예민하고 엄격해졌다. 우연은 눈치를 보며 얼른 말을 돌렸다.
“……라기보다, 이렇게 피곤하고 아픈데 갔다가 몸살 나면, 하느님도 얼마나 마음 아프시겠어요? 만약 하느님이 아저씨를 정말 사랑하신다면 말이에요.”
아저씨는 김빠지는 소리로 웃더니 허리를 숙이고 입을 쪽 맞춰 주었다.
“나를 도발하는 건 얼마든지 괜찮은데, 그분은 함부로 도발하시면 안 됩니다, 아가씨.”
우연이 입술을 비쭉대며 고개를 돌리자, 이원은 어깨를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달랬다.
“오늘은 재의 수요일이라 꼭 가야 해. 사순초를 봉헌하기로 했거든. 금방 다녀올게.”
우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성당에 한 번도 가 본 적 없던 우연은 아저씨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잘 안 되었다.
“재의 수요일이 뭔가요?”
“사순절이 시작되는 날을 재의 수요일이라고 해.”
“사순절은 또 뭔가요?”
“사순(四旬)은 네 번의 열흘이라는 뜻이야. 부활절에서부터 주일을 제외하고 40일 전까지의 기간을 말해. 그 기간에는 비아 돌로로사를 생각하면서 다들 경건하고 엄숙하게 지내.”
“비아 돌로로사는 뭔가요?”
아저씨의 입가에 가만히 웃음이 걸린다.
“십자가의 길이라고 하는데,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고난당하셨던 그 과정을 말해. 원뜻은 슬픔의 길, 고난의 길, 뭐 그런 뜻이야.”
아하. 우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담고 있는 무게에 비해 입에서 굴러다니는 어감은 투명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어떻게 지내는 게 경건하고 엄숙한 거예요? 웃지도 말고 슬프고 힘든 일만 골라서 하나요?”
“그건 아니지만 신나게 들떠서 즐기는 건 자제하지. 날을 정해서 단식도 하고, 고기도 안 먹고, 금욕도 하고, 음란하거나 나쁜 생각도 하면 안 되고.”
아저씨는 말을 해 놓고는 조금 멋쩍게 웃었다. 아아, 하, 하하하. 우연도 함께 웃고 말았다. 어제 그 미친 짓을 해 놓고 금욕이라니, 음란한 생각을 하지 말라니, 아니 이게 무슨 소립니까?
“야한 생각이 나는 걸 무슨 재주로 막아요?”
“그래도 안 나게 열심히 노력해야지.”
“노력한다고 생각이 마음대로 되나요? 전 아저씨 생각 안 해 보려고 그동안 별짓을 다 했는데 죽어도 안 되던데요. 꿈에서도 생각나는 걸 무슨 재주로 막나요?”
“……그래. 그건 그렇지.”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아저씨도 자신과 비슷한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그럼 아저씨, 앞으로 40일 동안 저랑 아무것도 안 하실 거예요?”
“음, 그건…….”
난감한 듯 미간이 안으로 모여들었다. 두 명의 한이원이 머리와 다리 사이에서 맹렬히 싸우고 있는 듯했다. 우연은 아저씨가 정말 40일간 아무 짓도 안 하겠다는 말이 나오기 전에 얼른 다른 것을 물었다.
“아, 그건 됐고요, 사순초는 뭐예요?”
“사순절에 제단 위에 켜 두는 초야. 간절한 지향을 담아서 하느님께 봉헌하는 거지.”
아저씨는 협탁에 놓인 작은 상자에 든 것을 꺼내 보였다. 아무런 무늬도 없는 붉은 양초인데 우연의 팔뚝만큼이나 굵었다.
“아저씨는 무슨 소원을 빌 거예요?”
아저씨는 눈을 내리깔고 입을 다물었다. 아까보다 더 곤혹스러운 얼굴이었다. 예전에는 아저씨가 표정을 잘 감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너무 환하게 읽혔다. 우연은 재촉하는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소원을 들어주실 거라 믿어요?”
“……그분이 나를 불쌍히 여기신다면.”
아저씨는 희미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그의 눈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깊고 풍성하며 비밀이 많은 눈, 수많은 감정을 품고 있는 어두운 갈색은 늘 신비로웠다. 우연은 아저씨가 저 초에 어떤 마음을 담았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아저씨, 나도 가서 초 켜고 소원 빌어도 돼요?”
아저씨의 눈이 살짝 가늘어진다.
“빌 소원이 있니?”
“네, 하나 있어요.”
아저씨는 눈을 한 번, 두 번, 깜박이더니 빙그레 웃는다.
“물론이지. 네가 초를 직접 올리는 건 아직 안 되지만, 내가 함께 지향을 담아 봉헌하마. 같이 가서 기도하자. 그분께서도 기뻐하시겠구나.”
글쎄. 내 기도를 들으면 딱히 기뻐하실 것 같지는 않은데.
하지만 아저씨는 뭐가 그리 좋은지 손까지 비비며 활짝 웃고 있다. 뭐 아저씨가 저렇게 좋아하시면 좋은 거지. 우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불을 확 걷고 발딱 일어났다. 허리와 다리 사이가 쨍, 하고 아팠다.
우연의 알몸을 본 아저씨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옷 줄게, 어, 음. 가운이라도 좀 입자.”
“어제 다 보셨잖아요. 아저씨 가운 입었다간 방을 줄줄 쓸고 돌아다닐 거예요.”
우연은 어정어정 욕실로 걸어가다가 아저씨 앞을 지나가며 힐끔 곁눈질을 했다. 아저씨는 고개를 슬쩍 돌린 채 점잖게 외면을 해 주고 있었다. 아주 웃겼다. 어제 핥고 빨고 별별 짓 다 해 놓고. 우연은 아저씨 바로 옆을 지나면서 가운 앞자락을 확 들췄다.
“왜, 왜 이래!”
속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은 것은 두 사람이 똑같은데, 아저씨는 몹시 당황스러워했다. 우연은 아저씨의 다리 사이에서 길게 매달려 있는 그것을 앞으로 쭉 잡아당겼다가 탁 튕기듯 놓아 주었다.
“흐읍, 진우연! 너!”
아저씨가 기겁하며 그곳을 감싸고 쭈그려 앉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는 자면서 나 실컷 만졌잖아!” 우연은 깔깔대며 욕실 안으로 쏙 도망쳤다.
두 사람이 1층으로 내려갔을 때, 송 할머니와 경비원이 나와 인사를 한다.
“오면 바로 식사할 수 있게 2층 거실에 식사 준비 부탁합니다.”
아저씨는 조금 어색해하며 말했다. 하지만 송 할머니는 예전과 똑같은 표정으로 우리를 배웅했다. 어제 그 요란한 소리를 못 들었을 리가 없는데, 전혀 모르는 것처럼 행동했다.
“공기가 맑구나.”
대문을 열고 나서는 아저씨의 목소리가 맑았다. 그리고 아저씨의 말대로 황사가 누그러져서 오랜만에 하늘도 맑았다. 그래서 조금 쌀쌀하게 느껴졌다.
성당은 집에서 10분 정도 거리라 했다. 우연이 뒤에서 졸랑졸랑 따라가자, 아저씨가 뒤를 돌아 한 손을 내민다. 우연도 손을 내밀자 아저씨는 그것을 귀중한 보석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스레 감싸 안고 자신의 주머니에 넣는다.
우연은 아저씨가 약혼녀인 미현 언니를 에스코트할 때를 생각했다. 아저씨는 무도회에 레이디를 모시고 가는 시종처럼 정중했고 매우 예의 바르고 다정해 보였다. 하지만 이렇게 손을 꼭 쥐거나, 주머니에 손을 넣어 주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저씨는 이제 남의 눈을 신경 쓰지 않고, 마음대로 손을 잡고 걷는다. 자신의 마음을, 아니, 진우연이라는 이 고약한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알고 있었다. 다시 만나면 이 꼴이 되어 버릴 거라 생각했다.
아저씨에게 약혼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묻지는 않았다. 파혼하면 정말 회사가 반으로 쪼개지는 거냐, 확인하지도 못했다. 아저씨가 그 언니와 결혼하면 절대 행복하지 못할 거라는 확신과 별개로, 그 문제는 자신이 감히 물어볼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아저씨와 함께 걷는 천국 같은 시간을, 엉뚱한 말로 망쳐 놓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아저씨와 우연은 성당까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걸었다. 아저씨는 손을 끝까지 풀지 않았고, 주머니 속은 아주 따뜻했다.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줄래? 고해소에 잠시 들어갔다 올게.”
아저씨는 작은 창고처럼 생긴 방 앞에서 우연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앞에 사람이 두어 명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고해소에서 뭘 하는데요?”
“그동안 지은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고 나오는 거야.”
“아저씨는 무슨 고백을 하실 건데요? 어제 우리가 잔 거요?”
아저씨는 난처한 얼굴로 쉿, 하고 손가락을 입에 댔다. 하지만 안 물어볼 수가 없었다. 우연은 목소리를 낮춰 조그맣게 물었다.
“왜요? 어제는 사순절도 아니고 재의 수요일도 아니었잖아요.”
“음, 그게…….”
순간 우연은 기억해 냈다. 여기서는 결혼하지 않고 섹스를 하는 게 죄라고 한다고. 아니 그러면 결혼은 안 했는데 성욕이 폭발하는 10대에서 30대들은 무슨 재주로 살아?
뭔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아저씨를 범죄자로 만든 것 같은데, 여전히 뭘 잘못했는지 이해가 안 돼서 더 억울했다.
우연은 아저씨를 올려다보며 속삭이듯 물었다.
“아저씨는 그럼 저 방에 들어가서 신부님한테 어제 한 일 다 말할 거예요? 저는 어제 밖에 서 있는 애랑 섹스했습니다, 결혼도 안 했는데 같이 잤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할 거예요?”
“…….”
아저씨의 눈이 반쯤 가늘어지며 얼굴에 옅은 그늘이 덮였다. 우연은 눈을 내리깔고 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다시는 같은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 약속할 거예요?”
“우연아.”
아저씨의 목소리는 엄하지 않았다. 다만 잠시 괴로운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 네 마음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다음에 할 수도 있었는데.”
아저씨한테 화가 난 것은 아니었고, 아저씨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아저씨는 사과를 했다. 사과를 원했던 건 정말 아니었는데. 하지만 우연은 자신이 바라는 것이 무언지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가자.”
아저씨는 고해를 하는 대신, 우연의 손을 잡고 나와 본당에 들어섰다. 다행이다 싶으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웠다. 아저씨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신을 이루고 있는 것들을 너무 많이 허물어뜨리고 있었다. 우연이 원했던 것도 아닌데, 자꾸 그렇게 되어 가고 있었다.
아저씨는 입구에 있는 작은 물그릇에서 물을 찍어서 성호를 긋더니 앞을 향해 잠시 고개를 숙였다. 우연은 저도 모르게 같이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고개를 든 아저씨는, 고개를 폭 숙인 채 언제 고개를 드나 열심히 힐끔대고 있는 우연을 보더니, 입을 꽉 다물고는 머리를 헤집듯 쓰다듬었다. 너무 예뻐 미치겠는데 표현을 못 해서 죽을 듯한 표정이었다.
몇몇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아저씨와 눈인사를 주고받는다. 다들 우연이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지만, 아저씨는 빙그레 웃으며 묵례만 할 뿐이었다.
우연은 아저씨가 자신을 이 성당에 데려오고 손을 잡고 다니고 옆에 앉히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뒤늦게, 천천히 이해하기 시작했다. 괜히 따라왔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따라와서 다행이다,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우연의 옆을 지나가는 아주머니, 아저씨, 할머니들 손에는 아저씨처럼 긴 초가 들려 있었다. 그들은 길게 줄지어 앞에 나가 단 앞에 초를 세우고 불을 켰다. 저 사람들은 어떤 소원을 빌까, 나랑 비슷한 소원을 비는 사람도 있을까, 우연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아저씨도 초를 들고 나가면서 우연을 돌아본다.
“……너는 어떤 걸 위해 기도하고 싶으니? 내가 같이 지향을 담아 봉헌할게.”
우연은 앞에 보이는 휘장과 엄숙한 제단, 십자가를 보며 잠시 망설였다.
하느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주실까? 믿지도 않는데? 좋은 내용도 아닌데?
아저씨는 여전히 다정하고 부드러운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아저씨는 기도를 바치면 정말 하느님이 귀 기울여서 들어주신다고 믿고 있다. 우연은 그 믿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믿음이야말로 한이원을 한이원이게 하는 가장 중요한 토대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래. 아저씨가 믿는 대상이라면, 나도 한 번쯤은 무작정 믿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우연은 감히 한 번도 입 밖에 내 본 적 없는 간절한 소원을, 난생처음으로 말해 보았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아빠를 데려가 주세요.”
아저씨의 눈이 크게 벌어진다. 초를 쥐고 있는 손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런 기도는…….”
우연은 아저씨가 완전히 거절하기 전에 얼른 말을 가로막고 덧붙였다.
“아저씨, 나는 살고 싶어요. 죽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우리 아빠를…….”
말이 잠시 목에 걸렸지만, 우연은 하고 싶은 말을 기어이 토하고 말았다.
“기왕이면 내가 아팠던 것만큼 고통스럽게.”
이런 기도를 하면 지옥에 가게 될까. 그럼 죽어서도 다시 아빠를 만나야 하는 걸까. 그건 그것대로 끔찍했다.
하지만 우연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저승의 일 따위는 어차피 아무도 모른다.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이승에서 살아남는 게 중요했다.
“목숨이 위험할 때 ‘나 좀 살려 주세요.’ 하는 기도는 드릴 수 있잖아요. 그런데 아빠가 살아 있으면, 저는 살지 못해요. 그러니까 그건 저를 살려 달라는 기도인 거예요. 하느님도 당연히 이해하실 거예요. 그렇죠?”
아저씨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눈을 크게 뜬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목이 졸아붙어 목소리가 아예 바닥에 달라붙는 것 같다. 아저씨는 초를 내려놓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런 기도는 해 줄 수 없어.”
“왜요?”
“그런 건 하느님이 원하시는 기도가 아니야.”
“…….”
이원은 놀라지도 않고 충격을 받지도 않았다. 그런 말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연의 부모는, 특히 아버지는 그녀의 인생에 걸린 모든 문제의 알파와 오메가였다. 우연은 아빠가 인생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다. 그건 우연도 알고 이원도 알았다. 하지만 그 부탁을 들어줄 수는 없었다.
“우연아, 그건 하느님이 원하시는 기도가 아니야.”
이원은 우연의 손을 잡고 조용히 되풀이했다. 이런 말밖에 해 줄 수 없는 자신이 환멸스러웠다. 안전하게 지켜 주겠다는 약속이 어이없이 무너진 마당에, ‘나 좀 살려 달라’는 절박한 기도조차 안 된다고 말해야 할까.
우연의 맑은 눈동자가 이원을 똑바로 응시한다.
“그걸 아저씨가 어떻게 알아요? 하느님이 그런 기도를 좋아하실 수도 있잖아요.”
“…….”
“아저씨가 하느님이라 해 보세요. 예쁘고 깔끔하게 정원을 가꿔 놨다 해 보세요. 근데 그 정원에 더러운 바퀴벌레나 해충들이 슬슬 기어 다닌다면 기분이 어떻겠어요? 그것들이 자꾸 새끼를 쳐서 새까맣게 바글바글한다면요?”
“…….”
“그럴 때, 저 더러운 벌레들도 사랑하며 키우자는 사람하고, 모조리 박멸시키자는 사람하고,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들겠어요?”
이원은 눈을 내리깐 채 조용히 이야기를 들었다. 그 논리가 극단으로 빠져나갔을 때, 600만 유대인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우연은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친아버지에게 평생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살아야 할 가련한 아이와 신학 논쟁을 할 마음도 없었다. 우연은 진지한 얼굴로 계속 물었다.
“아, 이것도 한번 여쭤봐 주세요. 우리 엄마 아빠를 만들어 낸 사악한 유전자가 멸종될 기회는 수백만 년이나 있었는데, 왜 하느님은 그냥 내버려 두셨는지. 진짜 이해가 안 돼요.”
“진우연이 세상에 태어나야 했으니까.”
이원은 툭, 대답했다. 생각도 고민도 없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우연의 눈썹이 바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이원은 말없이 그 떨림을 지켜보았다.
“……그래 봐야 헛수고하신 거예요. 나는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고, 그냥 이렇게 살다 죽을 거니까요.”
“…….”
“엄마 아빠 유전자는 이제 나를 끝으로 영원히 지구상에 존재하지 못하게 될 거예요. 나는 그렇게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데 큰 공을 세울 거예요.”
우연은 지상의 악을 멸절하기 위해 불의 검을 빼 든 미카엘 대천사처럼 웃었다.
아저씨는 앞의 제단에 초를 꽂고 불을 붙인 후 잠시 기도를 하고 돌아왔다. 우연은 곁에 앉으며 덤덤하게 웃는 아저씨를 보며, 그가 정말 자신의 부탁을 들어준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거면 충분했다. 아저씨가 그렇게 기도를 해 준 이상, 하느님이 자신을 살려 주든, 아빠를 살리고 자신을 죽게 내버려 두든,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사의 모든 과정은 엄숙하고 무서우며 낯설었다. 아저씨는 우연에게 성호 긋는 순서도 알려 주고 순서가 바뀔 때마다 소곤소곤 안내했지만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앞에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건지, 일어나는 건지, 앉는 건지, 눈을 감는 건지, 뜨는 건지, 하여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우연은 아저씨를 곁눈질하며 그가 하는 대로 열심히 따라 했다. 우연이 그를 따라 가슴에 손을 곱게 모으고, 기도문을 따라 해 보려고 더듬더듬하고, 성호를 맞게 그으려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진땀 빼는 것을 보며, 아저씨는 근엄한 얼굴로 눈가와 입술만 꿈틀거렸다.
말씀 전례 시간이나 신부님 강론 시간에는 아저씨의 얼굴만 보았다. 얼굴만 봐도 은혜롭기 그지없었다. 아저씨의 모습은 이곳에 너무나 잘 어울렸다. 여러 장소에서 보았던 아저씨의 모습 중 여기서 본 모습이 가장 성스럽고 아름다웠다. 어젯밤에 보여 주었던 아저씨의 모습과 극심한 괴리감이 느껴졌지만, 왜인지 꽤 비슷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지루하면 밖에서 슬쩍 집어 온 주보나 재의 수요일에 대한 작은 안내문을 들여다보았다. 주보에는 한 주간의 일정이나 소모임 공지 같은 내용이 있었고, 안내문에는 아까 아저씨에게 들었던 내용들이 깨알 같은 글자로 적혀 있었다. 물론 대부분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저씨에게 들은 몇 가지 낱말은 눈에 쏙쏙 들어왔다.
「사순절, 예수 그리스도가 돌아가시기 전의, 주일을 제외한 40일.
Via Dolorosa.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고통받으시고 돌아가시기까지 이어지는 수난의 여정.」
자잘한 글자들은 뾰족한 가시 장식물에 몇 겹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고통을 상징하는 그림은 의외로 멋스러웠다. 예수님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연은 궁금해졌다.
……당신은 3일 후에 다시 살아나고 싶으셨나요? 죽음에 이르는 길고 고통스러운 여정을 다 기억한다면,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을 텐데?
우연은 어려운 신학적인 내용은 전혀 몰랐다. 다만, 묻고 싶은 것은 있었다.
비아 돌로로사. 슬픔의 길, 고통의 길, 아픔의 길.
나의 비아 돌로로사는 언제 끝나나요?
……과연 끝나기는 하나요? 혹시 죽어야만 끝이 나는 건가요?
우연은 아저씨를 따라 눈을 감고 손을 모은 후 귀를 쫑긋 세웠다. 허공에서 혹시 무슨 대답이라도 들리는지.
아저씨는 어릴 때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했다. 자신도 이렇게 간절하게 물어보면 뭐라도 대답을 해 주시지 않을까. 하지만 허공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미사가 끝나 갈 때쯤, 사람들이 앞으로 길게 줄지어 서기 시작했다. 가운데 서 있는 긴 가운을 입고 있는 신부님이 작은 그릇을 들고 와서 사람들의 이마에 무언가를 그려 주기 시작했다. 돌아 나오는 사람들의 이마에는 시커먼 십자가가 그려져 있었다. 시커먼 그을음이나 검댕처럼 보이는 그 얼룩은 기묘하고 이상했다.
아저씨가 신부님 앞에 서서 이마에 시커먼 표시를 받는 게 보였다. 신부님이 중얼거리는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돌아오는 아저씨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상했다. 반듯하고 새하얀 이마에 새겨진 시커먼 자국은 죄수들의 낙인처럼 보였다.
“이건…… 뭔가요?”
“재야. 종려 가지를 태운 재를 발라 주는 거야. 고난의 상징이지.”
아저씨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거 발라 주면서 신부님이 뭐라고 하시는 건가요?”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감을 생각하라. 창세기 3장 19절에 이런 말씀이 나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덕담치고는 너무 살벌하고 무서웠다. 이마에 검댕을 묻힌 채 엄숙하게 서서 기도하는 아저씨의 모습은, 몹시 낯설면서도 이곳과 너무 잘 어울려서 무서웠다.
우연은 그 표식을 말끄러미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이마의 시꺼먼 표시는 언제 지워요?”
“안 지워. 저절로 씻길 때까지 손대지 않아.”
표식은 생뚱하고 이상했지만, 아저씨는 집으로 오는 내내 그것을 지우지도 않고 건드리지도 않았다. 지나가던 사람이 힐끔대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집에 오니 송 할머니와 도우미들이 나와 아저씨를 맞았다. 사람들은 아저씨 이마의 얼룩에 익숙한 듯, 덤덤한 반응이었다.
2층에 올라가니 탁자에 우렁각시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시간 맞춰 막 차려 놓았는지 밥그릇과 국그릇에는 김이 따끈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아침 먹을까? 배 많이 고프지?”
우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저씨를 올려다보다 눈썹을 찡그렸다.
……그런데 이상하다.
여기 와 있으니 이마에 새겨진 시커먼 자국이 거슬렸다. 아까 성당에선 잘 어울린다 생각했는데, 여기서는 생뚱하고 이질적인 느낌에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우연은 어제 그의 강렬한 욕망과 민낯을 보았다. 그가 우연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를 깨뜨리고 자신의 밑창까지 까발려 보여 주었던 이 장소에서, 저 금욕적이고 엄숙한 표식은 너무나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다. 이렇게나 이질적이고 안 어울리는 저 조합이, 아랫배에 불을 지핀다. 아래쪽으로 슬금슬금 근지러운 감각이 고이기 시작했다.
우연은 이 이상한 반응에 대해 이해하기를 포기하고, 솔직하게 말했다.
“아저씨가 많이 고파요.”
아저씨는 어제처럼 망설이지 않았다. 한쪽 팔로 우연의 허리를 끌어안고 단숨에 입을 맞춘다. 다른 한 손으로는 셔츠를 밀어 올리고 브래지어 속으로 손을 넣어 가슴을 움켜잡는다. 온몸으로 열이 쫙 뻗쳐올랐다.
아저씨가 빠르게 슈트를 벗고 넥타이와 커프스, 셔츠와 바지까지 벗어 던진다. 그리고 입술을 댄 채 우연을 번쩍 안아 올린다. 침실까지 가는 동안, 두 사람의 몸을 감싸고 있던 것들은 작은 천 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모조리 바닥에 널브러졌다.
아저씨는 등과 팔뚝에 손톱자국을 휘감은 채 섹스를 시작했다. 먼지로 돌아갈 한이원의 몸과 먼지로 돌아갈 진우연의 몸은, 어제 기절할 정도로 즐겼던 것을 말끔하게 잊었다. 두 개의 먼지 덩어리는 새로운 해가 뜨자 새로운 욕정을 만들어 냈다.
우연은 몸을 한껏 벌리고 그의 살을 집어삼켰다. 이제는 아프지 않다. 깊은 속살은 이제 그의 성기를 달고 맛있게 느낀다. 먹이를 줄수록 배고파하는 괴물이 다리 사이에서 아가리를 한껏 벌리고 있는 것 같다. 문득문득, 그런 자신이 징그럽고 더럽다는 생각이 치밀기도 한다. 하지만 펄펄 끓는 열기에 그런 불순물은 순식간에 녹아 버리고, 결국엔 그를 향해 순수하게 정련된 욕구만 남는다.
아저씨의 다리 사이에도 만족을 모르는 괴물이 똬리를 틀고 있다. 그 괴물은 우연의 다리 사이에 자신을 박아 대는 일에만 집중했다. 쿵, 쿵, 콱, 콱, 쩍. 아름드리나무가 몸을 관통하듯 깊이깊이 박힌다. 징, 징, 징. 숨죽이고 있던 클리토리스가 민감해지며 조금씩 부푸는 것이 느껴진다. 그곳에서 시작된 자극과 진동이 이내 전신을 채찍질한다. 아, 아흑, 아앗, 아아악! 우연은 몸을 비틀며 비명을 질렀다.
“아, 아저씨, 더, 더 해, 아악, 아아앗, 흑, 더, 더, 깊이, 더!”
그 모든 과정은 두 사람에게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쾌락을 가져다주었다. 우연은 목이 찢어질 정도로 울부짖으며 매달렸고, 아저씨는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린 채 큰 소리로 신음했다.
그를 받아들이는 것은 끝까지 버거웠다. 바위처럼 단단하고 팔뚝처럼 굵은 살덩어리가 밑을 찢어 버릴 정도로 헤집어 대는 것은 여전히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흥분과 자책이 뒤죽박죽 엉긴 얼굴로, 극심한 쾌락에 속절없이 침몰하는 아저씨를 보는 것은 오르가슴 이상으로 좋았다.
우연의 몸은 이제 희열만을 선택해서 감각한다. 고압 전류에 감전된 것 같은 고통은 쾌감으로 완벽하게 전이됐다. 이 감각이 정상이 아니란 건 알지만 굳이 원래대로 되돌릴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아저씨의 거대한 페니스가 그곳을 너덜너덜 찢어 버린다고 해도 우연의 몸은 그것마저 기절할 듯한 쾌감으로 느낄 것 같았다.
우연은 다리를 한껏 벌린 후, 아저씨의 허리를 꽉 감아 끌어당겼다. 흐윽! 그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터졌다. 긴장한 듯, 초조한 듯, 입에서 뜨거운 날숨이 쏟아졌다.
“……왜?”
아저씨의 갈라지고 잠긴 목소리가 사랑스러웠다. 아래를 찢어질 듯 채운 아저씨가 허리를 추슬러 몸을 더 깊이 밀어 넣는다.
우연은 아저씨에게 힘껏 팔을 뻗어 목에 매달렸다. 다리가 허공에 들리고 몸이 그의 위로 번쩍 올라앉는 순간, 아저씨가 거칠게 고개를 흔든다. 하, 아아, 아저씨, 아아아! 아저씨의 몸이 가장 깊은 곳까지 푹 들어와 박힌다. 굵고 거대한 투창에 그곳을 깊게 꿰인 것 같다. 아니, 목까지 관통하는 것 같다. 쩍, 쩍, 쩍, 소리가 온몸을 후려친다.
아저씨는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허리를 격렬하게 꿈틀거렸다. 우연은 그의 목에 매달린 상태로 엉덩이를 아래로 힘껏 내리찍었다. 극심한 쾌락에 잡아먹힌 그는 입을 벌리고 큰 소리로 비명을 터뜨렸다.
“흐으, 하아악.”
그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비명 같은 신음을 터뜨렸다. 입술을 힘껏 깨물어도 신음은 계속 터졌다. 이 순간은 아저씨가 나를 절대 배려하지 못하는, 자신만의 쾌락을 위한 시간이고, 그 모습은 말할 수 없이 황홀했다.
아저씨의 입술이 달싹거린다. 우연은 그의 입술 앞으로 가슴을 바짝 들이댔다. 아저씨는 입을 크게 벌리더니 한쪽 젖꼭지를 입에 한껏 물고 고개를 흔들어 가며 미친 듯이 빨아 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손으로는 다른 가슴과 엉덩이를 미친 듯 주물러 댄다. 이 사람은 내가 아는 엄숙하고 이성적인 한이원과 전혀 다른, 재수 없고 음탕한 짐승이었고, 우연은 그래서 이 모습이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가슴이 짜릿하고 따끔거렸다. 쾌락은 어제보다 훨씬 이르게 찾아왔다. 가는 전기 같은 느낌이 젖꼭지와 클리토리스를 관통해서 오가는 것처럼 찌릿찌릿하더니 아저씨의 손이 닿는 곳에서 쭉쭉 전류가 뻗쳤다. 이제 그 느낌은 아주 미세할 때부터, 선명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우연은 아저씨가 자신의 가슴을 더 잘 물어뜯을 수 있게 목을 꽉 끌어안았다. 아래와 위에서 동시에 튀어 오른 쾌감이 불길처럼 번진다. 몸이 저절로 자지러지며 뒤로 넘어간다. 아저씨의 헐떡대는 소리와 신음이 온몸을 통해 울린다.
아저씨의 몸에 엉망진창 새겨진 손톱자국이 거슬리면서도 마음에 들었다. 하느님의 아름다운 작품을 이따위로 망가뜨린 나에게 천벌이 내렸으면 좋겠다. 아빠와 다른 지옥에 떨어지기만 한다면 아무래도 좋다. 나의 천국은, 아저씨와 함께하는 이생에서의 시간만으로 지나치게 충분했다.
손톱을 세워 그의 등을 긁었다. 아윽, 그가 입에 유두를 한껏 문 채 숨 막히는 소리를 낸다. 긁었다. 점점 빠르게, 발작처럼 긁어 댔다. 그는 우연의 광기 어린 움직임에 기꺼이 휩쓸렸다. 그는 가슴을 빨아 대며 성기를 더 깊이, 깊이 박아 넣었고, 우연의 몸이 그의 성기를 짜부라뜨릴 듯 조이고 끌어당길 때마다 짐승처럼 몸부림치며 신음했다.
두 사람은 쾌락에 겨운 만큼 고통스러워했고, 고통스러운 만큼 쾌감에 절절 녹아내렸다. 땀에 흠뻑 젖은 아저씨의 얼굴은 쾌감과 고통이 뒤섞여 아름다우면서도 그로테스크했다. 끝의 끝까지 치달아서 그 아득하고 이상한 표정으로, 턱을 덜덜 떨며 사정하는 모습 역시 우연에게 극심한 쾌감을 선사했다. 천상의 하모니를 자랑하는 합창단의 노랫소리라도 지금 아저씨가 짐승처럼 길게 내지르는 소리보다 짜릿하진 못할 것이다.
마지막 절정이 다가온다. 우연은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비명을 지르듯 신음했다. 질 안쪽의 근육이 멋대로 꿈틀꿈틀 맥동한다. 엉덩이와 허벅지의 근육으로도 쥐가 날 것처럼 힘이 뻗친다. 아저씨의 눈이 커지며 입이 벌어진다. 아아, 흐, 흐으. 그가 눈을 꽉 감고 허리를 부들부들 떤다.
우연은 이 순간 그가 대체 어떤 감각을 느끼고 있을지 미치게 궁금했다. 콩알만 한 클리토리스를 자극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나갈 것 같은데, 그것의 수백 배는 될 것 같은 페니스를, 지금처럼 내 속살로 뜨겁게 감싸 안고, 주무르고, 조이고, 물결치듯 끌어당기고, 깊이깊이 삼켜 넣으면, 대체 아저씨는 지금 어떤 상태인 걸까. 그 거대한 자극을 어떻게 버텨 내는 걸까.
내 속에 아저씨 자신을 쏟아 낼 때는 또 어떤 느낌인 걸까.
흐읍.
더는 버티지 못하는 듯, 아저씨가 가슴에서 입을 떼고는 고개를 뒤로 꺾는다.
그는 우연의 오르가슴이 가져다주는 극렬한 자극을 견디지 못하고 번번이 굴복했다. 멍하니 벌어진 입, 아름다운 갈색 눈동자가 반쯤 뒤로 넘어간 상태로 아저씨가 몸을 뒤틀며 떨기 시작했다. 그의 팔이 우연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고, 몸이 크게 푸들푸들 떨렸다. 우연 역시 저도 모르게 경련하듯 크게 몸을 떨었다.
“……흐앗.”
두 몸이 맞붙은 빡빡한 틈으로 미끄러운 점액이 울컥울컥 비집고 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사정은 길고 풍성하며 부드러운 떨림을 갖고 있었다. 그의 정액은 허벅지와 아랫배, 엉덩이까지 뒤덮은 것으로도 모자라, 우연의 질 안에서 끝도 없이 넘쳐흘렀다.
하지만 우연은 허전했다. 뭔가 부족하다, 모자란다, 더, 더 받고 싶다는 생각만 강렬하게 들었다.
아저씨가 내 속에 더 많은 것을 넘치도록 채워 넣으면 좋겠다. 아저씨의 정액이 내 속에 얼마만큼 모여야 내장과 혈관과 뇌 속까지 채워 넣을 양이 될까. 수백 번? 수천 번이면 될까? 우연은 목이 말랐다. 이원은 우연의 작은 가슴에 머리를 묻은 채 오랫동안 헐떡거렸고, 우연은 그의 머리를 꼭 끌어안았다. 목이 마른 만큼 힘껏, 아주 힘껏.
“……우연아, 사……랑해.”
아저씨의 뺨과 맞닿은 가슴으로 고백이 스며들었다. 우연아, 사……랑해, 하으, 하아, 사, 사랑해, 사랑…… 사랑해. 그가 격하게 숨을 헐떡이며 되풀이한다.
고백이 닿은 곳에서 미끈대는 물기가 흐드러진다. 그 정체가 땀인지, 체액인지, 혹은 다른 무엇인지, 우연은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아 그냥 눈을 감았다.
아저씨는 고백한 후에 다시 젖꼭지를 찾아 입에 물고 빨았다. 헐떡대며 힘껏 빨아 댄다. 짐승 같고, 변태 같고, 여전히 서투르기 짝이 없는 아저씨는 이제 점잖고 금욕적이며 이성적이고 침착한 인간이라는 껍질을 완전히 벗어던진 것 같았다. 그의 움직임에선 어제와 같은 망설임이나 거침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우연은 기뻤다.
아저씨가 우연의 몸에 묻어 둔 자신의 몸을 빼지 않아, 우연은 그의 성기를 품은 채 다리를 벌리고 그의 허벅지 위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벌어진 다리 사이, 도도록하게 양쪽으로 펼쳐진 음순 사이에서 뾰족하게 발딱 일어난 그곳을, 아저씨가 손가락으로 더듬어 찾아내더니 이내 세게 비벼 댄다.
아악, 아아아! 우연은 비명을 지르며 그의 어깨와 목을 물었다. 물고 핥고 자근자근 씹었다. 더, 더 해요, 더 세게 해! 아저씨는 그때마다 은밀한 곳을 물리고 애무당하고 씹히는 것처럼 이상한 목소리로 신음했다. 헐떡이는 그의 날숨이 고스란히 가슴에 파묻힌다. 아저씨의 땀 혹은 눈물은 빠르게 흘러내렸고, 정액은 느릿하게 빠져나갔다. 그 속도의 차이가 우연은 싫지 않았다.
아저씨의 이마에 새겨진 검은 얼룩도 어느새 흔적만 희미하게 남았다. 눈물 때문일까, 땀 때문일까. 이 역시 나쁘지 않았다.
한참 동안 널브러져 있던 두 사람은 맹렬한 허기를 느끼고 엉금엉금 기다시피 거실로 나갔다. 탁자에 차려진 음식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우연이 먼저 손으로 갈비 덩어리를 집었고, 아저씨 역시 급하게 성호를 그은 후 그릇에 달라붙었다.
송 할머니의 요리는 늘 맛이 좋았다. 식어도 맛이 좋았다. 두 사람은 말도 하지 않고 갈빗대를 두 손으로 쥐고 푸짐한 살집을 씹었다.
문득 아저씨가 고개를 든다. 크게 벌어진 눈에서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움직인다. 기름기가 묻은 붉은 입술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엉망으로 뒤엉킨 머리카락, 상처와 애무 자국과 온갖 체액이 덕지덕지 엉긴 기괴한 모습으로, 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맛있니?”
“네, 송 할머니 요리는 정말 맛있어요. 아저씨도 맛있죠?”
아저씨는 대답하는 대신 다시 고기를 한입 먹고, 옆에 놓인 물김치 그릇을 들어 마셨다. 한 모금, 한 모금, 다시 한 모금. 짜지도 않은지 내리 마시더니, 아저씨가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맛있네.”
아저씨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리더니 고개를 숙였다. 아저씨는 그 상태로 반쯤 정신이 나간 것처럼 웃기 시작했다. 우연은 이유를 묻는 대신 한참 기다렸다. 잠시 후 아저씨는 웃음을 멈추고 눈앞에 차려진 음식을 손으로 집어 하염없이 입에 넣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신기한 음식을 먹어 보는 아이처럼, 아저씨는 그렇게 먹었다.
“너하고 먹으니까…… 정말 맛있구나.”
우연은 손을 뻗어 그의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짠물을 한참 동안 닦아 주었다.
재의 수요일, 엄숙하고 경건한 금욕과 단식의 절기, 그 첫날 아침이었다.
* * *
전무님, 저렇게 그냥 놔둬도 괜찮을까.
결혼식을 코앞에 두고, 정말 이래도 괜찮을까.
식사는 다 하셨을까. 그릇을 지금이라도 가지러 올라가야 하지 않을까.
부르지도 않았는데 올라가면 노여워하시진 않을까.
송 여사는 아래층에서 안절부절못했다. 어제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최 실장이 귀띔은 해 주었고, 그동안 이원이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똑똑히 봐 왔던 송 여사는, 이원의 행동이 아무리 이상해도 최대한 이해하려 노력할 참이었다.
한편으로는 터질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최근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느 날 갑자기 와장창 무너질 것 같다는 예감이 자주 들었었다. 차라리 올 것이 와 버린 지금이 속은 후련했다.
우연이라는 저 아가씨는 일반적이지 않았다. 지나치게 독특했다. 재벌가의 여자들에게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현모양처형 내조나 현명한 파트너십은 털끝만큼도 가져다줄 수 없을 거라는 느낌이 왔다. 미현 아가씨가 이원에게 좋은 배우자감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었지만, 저 여자는 배우자감은 고사하고 잠시 사귈 만한 연인으로도 당치 않았다. 속에 시한폭탄이 백 개쯤 숨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송 여사는 왜인지 우연에게 자꾸 마음이 갔다. 그녀는 이원을 어려서부터 키웠고, 그 아름답고 섬세한 마음을 가진 아이가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우연과 고작 두어 달 함께 지낸 송 여사가 보기에도, 두 사람은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무언가로 단단히 연결돼 있었다. 한 전무는 그것을 알았고, 1년 반 전에 그것을 끊어 냈다. 그를 ‘한이원’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들을 그 아이가 하염없이 파괴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송 여사가 보기에 그를 ‘한이원’으로 존재하는 것들은 하나같이 그의 등에 얹힌 짐이었고, 발에 매달린 족쇄였다.
이원은 그 짐과 족쇄들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리고 그 노력은 예상대로 부질없었다. 끊어진 것은 저 아이와 엮인 끈이 아니라, 그를 한이원으로 존재하게 했던 족쇄였던 모양이다.
송 여사는 가늘게 한숨을 쉬며 2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식사를 차려 놓고 세 시간을 기다렸는데도 이원이 내려오지 않는다. 출근 시간은 벌써 지났다. 식사를 마쳤으면 그릇이라도 정리하면서 오늘 일정이 어찌 되는지 물어볼 참이었다.
하지만 송 여사는 2층 중문을 조심스럽게 여는 순간, 눈앞에 펼쳐진 모습에 쟁반을 놓칠 뻔했다.
거실 바닥에는 두 사람이 벗어 던진 슈트와 셔츠, 넥타이, 속옷들이 줄줄 흩어져 있었고, 두 사람은 가운만 대충 걸친 채 바닥에 앉아 다 식어 빠진 아침을 먹고 있었다. 송 여사는, 아이와 머리를 맞댄 채 손으로 고기를 집어 먹고 있는 저 사람이, 자신이 아는 한이원이라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이원의 이마에는 이미 재의 흔적만 남아 있었고, 목과 팔다리에는 가는 손톱자국과 불그스름한 키스 마크가 뚜렷했다. 당황스러웠다. 두 사람이 무슨 일을 했을지 몰라서가 아니라 그것을 숨기려는 기색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알기로, 이원은 지금까지 동정이었고, 적어도 재의 수요일에 이런 짓을 할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더욱이 남에게 이런 모습을 함부로 보일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송 여사는 조용히 문을 닫고 물러났다. 이원은 그녀를 보고도 눈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그곳은 가장 원초적인 본능과 가장 강력한 단 하나의 감정만 존재하는 세계였다.
* * *
“아저씨 회사 안 가요?”
식사를 마친 아저씨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우연은 슬슬 걱정이 되었다. 물론 아저씨가 회사에 안 가고 종일 옆에 있어 주면 좋지만 그래도 우연에겐 일말의 양심이란 게 있었다.
아저씨는 우연을 힐끗 보더니 비장하게 말했다.
“오늘은 안 가. 여기서 너하고 잠이나 자게.”
그러더니 침대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쓴다. 우연은 입을 딱 벌렸다. 아니 이 아저씨도 땡땡이란 걸 칠 수 있단 말인가?
“정말 안 가도 돼요?”
“안 가. 내가 대표이사야. 누가 나한테 시말서를 쓰라고 하겠어?”
이불 속에서 거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세상에. 안 어울려도 이렇게 안 어울릴 수가. 갑질은 돈 많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우연은 이불 위를 손으로 꾹꾹 찌르며 말했다.
“이거 한이원 아저씨 맞아요? 뭔가 이상해요.”
“음. 나도 내가 아닌 거 같아. ……뭔가 이상해.”
아저씨가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더니 입을 매만졌다. 다시 생각에 잠기는 모습은 여전히 어딘가 놀란 듯도 하고, 혼란스러운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맛있는 것을 배부르게 먹은 후 나타난 만족스러운 미소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뭐가 이상한데요?”
“몸의 감각이, 음, 오감이…… 완전히 새로 태어난 것 같아.”
“우와, 그 정도예요?”
우연은 그의 곁으로 꼬물꼬물 파고들며 속으로 웃었다. 난생처음 해 본 섹스가 어지간히도 좋았나 보다. 하긴, 우연도 자신의 몸이 아저씨의 애무에 그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할지 몰랐다. 점잖고 금욕적으로 보이던 아저씨의 몸도 그렇게 자극에 약할지 몰랐다. 오감이 새로 태어났다는 표현은 좀 과장인 듯도 하지만, 이해는 갔다.
이불에 묻혀 있으니 다시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미친 듯이 섹스를 하고 죽은 듯이 자고, 또 정신이 빠지게 섹스를 하고 배 터지게 밥을 먹고 나니 다시 졸린 건 당연했다.
하지만 잠을 자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우연은, 졸음에 겨워 죽으려 하면서도 자신을 꼭 끌어안고 가슴과 다리 사이를 계속 만지작대는 이 변태 같은 아저씨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 봤자 그냥 살덩어리인데 뭐가 이렇게 좋을까.
우연은 자신의 몸이 몹시 싫었는데, 이 몸을 이렇게 좋아하고 사랑하는 아저씨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말 좋을까. 정말 이렇게나 좋을까. 두 개의 젖꼭지와 클리토리스는 아저씨가 하도 빨고 핥고 깨물어 대서 뻘겋게 퉁퉁 붓고 따끔따끔한 상태였다. 우연이 아프다고 하니까 빨아 대는 건 조금 참는 모양인데, 그래도 손이 닿으면 아프고 찌릿찌릿해 죽을 것 같았다.
아 진짜, 아프든 찌릿하든 한 가지만 하라고, 한 가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에서 손을 떼게 하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우연은 아저씨의 아랫배를 향해 더듬더듬 손을 휘저었다. 북슬거리는 뭔가가 손에 감기더니 목표 지점이 바로 손끝에 닿았다. 거기 매달린 것이 워낙에 크다 보니 손을 한 번만 휘둘러도 척, 손에 감겨들었다. 우연은 목표물을 손에 넣자마자 힘껏 움켜잡았다.
“우연아! 하윽!”
아니나 다를까, 아저씨가 기겁하며 손을 뗀다. 아저씨는 자신과 달리, 그곳을 자극하는 일에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하게 반응했고, 조금도 반항하지 못했다. 우연이 움켜잡고 흔들어 대는 부분은 그 작은 머리뿐인데, 아저씨는 거인의 손에 온몸이 짜부라지기라도 하듯 몸을 뒤틀며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아, 흐으으…… 흣.”
한참 후, 아저씨는 항복한 장수가 무릎을 꿇고 굴복하듯, 온몸을 떨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우연의 손에 뿌연 점액이 차올랐다. 아저씨는 벌어진 다리를 거두어들이지도 못하고 벌벌 떨며 헐떡였다. 우연은 혀를 쏙 내밀며 의기양양하게 비웃어 주었다.
내가 이겼죠? 고작 이럴 거면서 까불지 마시란 말이에요.
우연이 손을 닦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자 아저씨가 열적게 웃으며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뭉그적대며 옆으로 다가온다. 이제는 그런 모습을 보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어요!’ 하는 무언의 잔소리에 그는 아까처럼 가슴에 달라붙는 대신 우연의 이마에 입을 맞춘 후 몸을 바짝 맞대고 다리를 휘감는 것으로 양보한다. 조금도 떨어지기를 원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그 동작 하나에서 투명하게 나타났다.
우연은 똑같이 이마에 입을 맞춰 주었다.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젖은 소리가 났다. 우연의 입맞춤이 끝나자, 검은 얼룩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 재 가루는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 아저씨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할 수 없이 행복한 표정으로 나른하게 눈을 감았다.
그래, 아저씨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이렇게 사랑할 거라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하고는 이렇게 행복해할 거라 생각했다. 아저씨는 잘 몰랐던 것 같지만 우연은 알고 있었다.
대체 이럴 거였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야멸차게 잘라 낼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물론 야멸차게 잘라 내지 못했다는 건 안다. 모르는 척하면서도 신경은 온통 서림예대 쪽으로 곤두세우고 있었을 것이다. 후견인이 바뀐 다음에도 필요한 것은 항상 바로바로 지원되었으니까.
……엄마의 이혼까지 도와준 건 너무 나간 것 같긴 했지만.
“아저씨 궁금한 게 있어요.”
“응?”
“제가 어떻게 지내는지 계속 보고받고 계셨어요?”
“어, 그래. ……네가 매일 땡땡이치고 낮잠만 잔대서 졸업 어떻게 시키나 걱정했어. 메세나재단에 낙제생을 위한 장학금 지급 선례가 생기면 안 되잖아.”
아저씨가 가물가물한 목소리로 솔직하게 실토했다. 그럴 줄 알았다. 우연은 킬킬 웃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저 학교는 당분간 못 다닐 것 같아요. 이럴 줄 알았으면 그런 걱정 안 하셔도 됐을 텐데.”
이원은 기운 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휴학이 아니라 자퇴를 한다고 해도 말릴 수 없을 것이다. 서림예대에 가려고 했던 가장 큰 이유도 아빠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는데, 이젠 학교가 가장 위험한 장소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의욕에 넘쳐서 재미있게 학교생활을 했었는데, 안타까웠다.
“……우리 엄마 도와주신 것도 고맙습니다. 엄마도 많이 고마워하고 있을 거예요.”
“응? 무슨 소리야?”
이원은 졸린 눈을 비비며 되물었다. 우연은 고개를 갸웃하며 조그만 목소리로 물었다.
“아저씨가 엄마 이혼 소송 도와주시고, 외국으로 도망치는 루트 주선해 주신 거 아니에요?”
“내가? 나는 모르는 일인데. 왜 그런 생각을……?”
우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저씨가 이걸 모른다고? 그럼 대체 누가?
“하지만, 엄마한테 세경에서 도와줬냐고 하니까 어떻게 알았어? 하다가 바로 아니야, 나 혼자 했어, 했거든요. 눈치를 봐선 틀림없다고 생각했는데.”
“흠. 혹시 정 관장이 별도로 도움을 줬나? 엄마가 이혼해서 나가는 게 ……네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건가?”
아저씨가 길게 하품을 하더니 가물가물하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한번 확인은 해 보마. 엄마가 아니라고 했으니 정말 아닐 수도 있는 거고. 엄마가 도망쳐서 네가 좋다면 그것도 다행인 거고.”
우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저씨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엄마에 대한 감정이 결코 좋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아빠의 폭력의 피해자였고, 아빠의 뒤통수를 멋지게 후려갈기고 도망쳤으니 축하는 해 주고 싶었다. 앞으로는 엄마를 만날 일이 없다는 것도 큰 선물이었다.
이제 아빠만 없다면.
부질없는 생각을 하던 우연은 고개를 젓고 애써 웃어 보였다.
아니다. 지금 이따위 생각으로 아저씨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을 망칠 수는 없었다.
이 순간을 즐겨야 했다. 내일이 세상의 종말인 것처럼 오늘을 누려야 했다. 오늘 행복했다고 해서 내일도 이렇게 행복하리라는 보장이 없으니까.
아저씨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불면증이 심하다던 아저씨는 우연의 옆에서 지나치게 쉽게 잠에 빠졌다. 그는 혼몽한 와중에도 팔을 한껏 벌려 우연을 꼭 끌어안았다.
그는 사흘 동안 회사에 출근하지 않았다.
뉴욕에 머무르던 미현이 인천 공항에 도착한 것은 4일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