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누드-26화 (26/47)
  • 26. 마리오네트

    “정 관장에게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접근 금지 기간이 끝났다고 합니다.”

    급하게 들어온 홍연이 뭔가를 보고하려다 이원 곁에 서 있는 웨딩 플래너를 보고 멈칫했다. 이원은 그녀가 하나하나 짚어 주는 예복 사진을 무심하게 내려다보며 물었다.

    “벌써 그렇게 됐군요. 최대 연장 기간도 이번에 끝난 거죠?”

    “예. 문제가 생길 경우 다시 신청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홍연의 보고가 그답지 않게 사무적이고 간결하다. 물론 정 관장에게 올라오는 정기 보고 자체가 사무적이고 간결하긴 하다.

    공평무사한 성격의 정 관장은, 우연을 다른 후원 예술가들과 동일하게 대우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것을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다만 이원이 부탁한 우연의 안전과 심리 치료는 신경 쓰고 있었고,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근황을 체크해 보고도 하고 있었다.

    홍연은 말을 잇지도 않고, 나가지도 않은 채 주변에서 얼쩡거렸다. 이유가 짐작이 간다. 미현이 보낸 웨딩 플래너가 옆에 있기 때문이었다.

    이원은 아래 놓인 카탈로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빨리 결정을 해서 플래너를 내보내고 싶은데, 예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나같이 지독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이제 모든 선택이 지긋지긋하고 극도로 피곤했다. 누가 다 정해서 강제적으로 떠밀어 주면 좋겠다.

    브로드웨이에서 강행군을 이어 가는 미현과, 일반 분양과 신공항 수주 문제로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이원을 연결하고 있는 것은 우습게도 웨딩 플래너 전수현 실장이었다. 지나치게 친절하고 지나치게 기억력이 좋은 웨딩 플래너는 오작교의 까막까치라도 된 양, ‘너무 바빠 통화도 제대로 못 하고 있다’는 신랑 신부의 근황을 서로에게 미주알고주알 전하곤 했다.

    물론 그녀는 미현이 고른 사람이었고, 전적으로 신부 편이었다. 그러니 지금 자신이 이상하게 반응하면 그 내용은 미현에게 고스란히 흘러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원은 최대한 태연하게 카탈로그를 밀어 보내며 말했다.

    “종류가 너무 많아 고르기 피곤합니다. 미현이하고 의논해서 세 개만 추려서 다시 가져오세요.”

    전 실장이 실망한 표정을 감추며 밖으로 나가자, 홍연이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말을 뱉어 내기 시작했다.

    “경호 문제에 대해, 추후 방침을 정해 알려 주셨으면 한다고 했습니다. 출소까지 3개월 정도 남긴 했지만…….”

    “아, 예. 예산을 배정하려면 미리 결정해 두어야겠죠.”

    “예. 경호팀을 개인적으로 파견하려면 학교 측의 협조도 얻어야 하니까요.”

    “경호팀 문제는 학교 측과 먼저 의논한 후에 허용되는 선 안에서 진행하도록 하세요. 그쪽은 별일 없죠?”

    이원은 최대한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며칠째 또 연락 두절이랍니다.”

    “왜 또 연락 두절입니까?”

    이원의 날 선 반응에 홍연은 한숨을 쉬었다.

    “우연이는 모르는 번호는 대부분 받지 않잖습니까. 정 관장 전화도 내킬 때만 받습니다. 정 관장이 사실 애 많이 먹었습니다. 혜진 양에게 연락해서 거취 확인하는 것도 한두 번이죠. 기껏 확인하면 수업 빼먹고 점심때까지 자고 있다고 하고……. 그림 그릴 땐 사오일 동안 잠 한숨 안 자더니, 요새는 18시간씩 자면서 허리가 아프다고 투덜댄답니다.”

    이원은 신경을 곤두세운 채 보고를 듣고 있다가 푸스스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약 먹으면 원래 잠이 많이 늘어나긴 합니다. 손 원장에게 약 용량 조절을 좀 부탁해야겠네요. 그런 일로 허리가 아프면 곤란하니까요. 어렵게 입학해 놓고 졸업할 생각은 있는 건지 원.”

    이원은 힘껏 기지개를 켜며 웃었다.

    “아아, 결혼 두 번 할 짓이 못 된다더니, 정말 피곤하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전무님. 저 같은 결정 장애는 시작도 하기 전에 녹다운이 돼 버릴 겁니다. 저는 평생 연애만 할 운명인가 봅니다. 그나마 사주에 여자 복은 있다고 해서 어찌나 감사한지.”

    ‘비혼족 상팔자’라는 신념이 확고한 비서실장은 상사의 결혼 준비를 눈앞에서 지켜보며 비혼 의지를 더욱 불태우고 있는 듯했다. 같은 비혼족이라도 우연과 홍연의 그것은 무게 자체가 달랐다. 그의 신념은 깃털처럼 가볍고 유쾌하며 발랄했다. 그를 보고 있으면 정말 비혼족으로 사는 것이 나름 ‘상팔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홍연 씨, 난 결정 장애도 아닌데 녹다운 일보 직전입니다. 요새 막 헛것도 보여요.”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원은 의자에 푹 파묻혀 고개를 뒤로 축 늘어뜨린 채 웃었다.

    “한동안 눈만 감으면 그 아이가 허공에 떠다니더니, 오늘 아침엔 회사 복도에서 보이…….”

    이원의 웃음소리가 갑자기 다급해졌다. 그가 손을 들어서 눈을 가리는 것이 보였다. 웨딩 플래너를 내보낸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는 여전히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홍연 씨, 나…… 결혼하면…….”

    “예, 전무님.”

    “이쪽 보고는 이제 그만하세요.”

    “……예.”

    “학교 졸업할 때까지 학비와 생활비 정도는 대 주도록 하고, 갈 곳 없으면 과천 아트빌리지에 5년 입주하게 하고요. 2년 전에 신인 공모전에 당선됐으니까요. 그럼 경호 문제도 해결되겠죠.”

    “예, 전무님.”

    “여기까지. 나한테는 더 이상 보고할 거 없어요…….”

    순간 다급한 전화가 울렸다. 정 관장이었다.

    ― 전무님. 우연 학생이 휴학 신청서를 놓고 나갔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원은 벌떡 일어나 전화기에 대고 고함을 질렀다. 정 관장이 당황해 하며 말을 이었다.

    ― 사감 말로는 책상에 퇴실 신청서, 휴학 신청서가 같이 있었다고 하네요. CCTV를 체크하니 오늘 새벽에 나간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정 관장답지 않게 목소리가 다급하고 떨렸다.

    “휴학이요? 이유가 뭐라고 합니까! 왜 갑자기!”

    ― 그건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알아본 후에 조치하겠습니다.

    정 관장의 전화가 끊어진 후, 이원은 가슴을 힘껏 눌렀다. 재단에 아무 말도 없이 휴학이라니. 대체 이번엔 또 무슨 일이야. 어딜 간 거야. 너는 왜 나를 편하게 해 주지 않니. 대체 왜 이렇게 끝까지! 속이 부글대고 끓어올랐다.

    새로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홍연은 흠칫하며 이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전무님, 김혜진 학생입니다. 뭐라고 물어볼까요?”

    “이리 주세요. 여보세요, 혜진 학생?”

    이원은 벌떡 일어나 낚아채듯 받았다.

    ― 아저씨? 아저씨? 그, 그때 우연이 데려갔던 그 아저씨 맞죠? 저 태워 주셨던? 이거 우연이가 비상 연락처로 등록해 둔 번호인데…….

    혜진은 이원의 목소리를 금방 알아들었다. 아저씨! 아저씨! 연거푸 불러 대는 혜진의 목소리는 겁에 질려 있었다.

    ― 우연이가 어젯밤에 학교에서 아빠를 만났대요.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여보세요! 우연이 아버지는 분명 6월까지…….”

    ― 삼일절 특사로 어제 출소했대요…….

    이원의 손에서 전화기가 툭 떨어졌다.

    * * *

    “엄마, 어디 있냐.”

    우연은 얼빠진 얼굴로 멀거니 아빠를 바라보았다. 감옥에 처박혀 있을 아빠가 기숙사 문 앞에 서 있는 장면은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한 그림이었다. 대체 왜 아빠가 여기 있지? 지금이 6월인가? 이건 꿈인가? 혹시 환각인가? 정신병이라도 좋으니 환각이면 좋겠다. 아빠의 말투가 퉁명스러워진다.

    “뭘 그리 놀라. 삼일절 특사로 나왔다.”

    경범죄, 초범, 우발적, 정상 참작, 깊은 반성. 우연은 한마디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머리가 멍할 뿐이었다. 아빠가 반성이라고? 우발이 아니라 시발이겠지. 기숙사 앞은 분명 접근 금지 구역인데 어떻게? 또 잡혀가도 좋다는 건가?

    아, 씨! 접근 금지 기간이 지났나?

    ……아저씨, 나 어떡해요.

    생각은 딱 거기까지였다. 아빠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몸도 정신도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빠가 까딱까딱 손짓한다.

    “이리 나와라. ……말로 할 때 조용히 와라.”

    아빠한테 최면이라도 걸린 걸까. 기숙사 안으로 뛰어 들어가 큰 소리로 도움을 청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몸은 마리오네트처럼 아빠의 말을 따랐다. 아빠가 교문을 향해 천천히 걸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빠가 그렇게 고생하다 나왔는데, 얼마나 힘드셨느냐 말 한마디 안 해?”

    “아빠, 아, 저, 마, 많이, 히, 힘드셔…….”

    아빠는 몹시 못마땅한 듯 혀를 찼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됐다. 너도 힘들었을 테니 우리 잊어버리고 다시 시작하자. 너도 스물둘이면 이제 다 컸으니 알 거 다 알 테고, 아빠를 이해할 나이도 됐잖냐.”

    시작하기는 뭘 다시 시작해. 이해는 무슨 개같은 소리야. 다만 아빠의 반응을 보아하니 자신이 ‘엄벌’을 탄원했던 걸 아직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엄마 지금 어디 있냐.”

    “이, 이혼, 이혼했, 다, 면서요…….”

    “씨발, 대답하라면 대답이나 하지!”

    아빠의 목소리가 확 높아졌다. 우연은 저도 모르게 몸을 오그리고 뒷걸음질했다. 아빠에게 맞지 않은 지 벌써 몇 년이 지났는데, 몸에 새겨진 반응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냥 모른다고 할걸. 아무 말도 하지 말걸.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면서 대답이 갈팡질팡하는 것도 변하지 않았다. 다행히, 아빠는 손을 올리지는 않았다.

    “그 죽일 년이 아파트를 팔아서 튀었어. 자기 엄마가 해 준 거라 나한테 한 푼도 안 줘도 된다 이거지! 씨발, 내가 20년 넘게 먹여 살렸는데, 그게 말이 돼?”

    헉, 입이 크게 벌어졌다. 이혼했다는 말만 들었지, 재산 분할이 어떻게 됐는지는 전혀 몰랐다. 하긴, 도망치는 마당에 찢어 죽이고 싶은 전남편을 위해서 집을 남겨 둘 이유는 없었겠지. 감탄스럽기도 했다. 물론 외국에 나가서 정착할 돈도 필요할 테지만, 이건 ‘너 엿 한번 먹어 봐라.’ 하는 마음이 더 컸을 것이다. 적어도 엄마는 자신보다는 용감했다. 우연은 더듬대며 물었다.

    “그, 그럼 아빠 지금 갈 데 없어요?”

    “썅. 내가 잘 데 하나 없을까 봐? ……근데 너도 몰랐냐?”

    “네. 기숙사에만 있어서……. 지금 알았어요.”

    “내 그년 그럴 줄 알았다. 엄마란 게 애를 버리고 집까지 털고 날라? 마귀 같은 년.”

    “…….”

    “네 엄마란 년이 원래 그랬지. 그래도 정이 뭔지, 불쌍해서 같이 살아 줬더니 뒤통수를 쳐? 내가 기필코 잡아서 아주 포를 떠서 불에 구워 버려…….”

    이를 꽉 물고 중얼대는 아빠의 눈은 지글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고함을 질러 대는 것보다 훨씬 무서웠다.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엄마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혼을 하고, 외국으로 도망친 건 신의 한 수였다. 우연은 아빠가 엄마를 찾으려고 주변 사람과 외가 친척들을 들들 볶을까 봐 두려워졌다.

    “아빠, 엄마 찾는 건 포기해요. 엄마 외국 나간댔어요.”

    “외국? 어디?”

    “몰라요. 몇 번이나 물어봤는데 안 가르쳐 줬어.”

    “또? 너 언제 데리러 온대?”

    “그런 말은 안 했어요.”

    “또?”

    “다 컸으니까 앞가림 잘하고 살라고…….”

    엄마가 절대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아빠에게 어떻게 줘야 할까. 연락조차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어떻게 믿게 할까. 엄마가 아빠의 손이 닿는 세상에서 완전히 잠적해 버렸다는 걸 알면 아빠는 포기할 수 있을까. 아빠는 웃기는 년, 하며 이를 부드득 갈아붙이더니 툭 묻는다.

    “너 전화번호 바뀌었지? 바뀐 번호 대라.”

    식은땀이 흘렀다. 번호 대면 안 되는데, 절대 안 되는데, 아빠와 연결 고리가 생기면 끝장인데.

    하지만 반항할 수 없었다. 지하 고문실로 끌려가 형틀에 묶인 사람처럼 몸이 달달 떨렸다. 아는 것뿐 아니라 모르는 것까지 모조리 실토해야 할 것 같았다.

    “버, 번호는…….”

    우연은 숫자를 하나씩 불러 주며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죽고 싶었다. 이렇게 의지가 약하고 겁 많은 자신이 너무 한심한데,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전화번호를 읊고 있었다. 다른 번호를 댈 수도 없었다. 이 자리에서 바로 확인할 게 뻔하니까.

    “전화 패턴 풀어서 내놔 봐.”

    아빠는 우연의 전화기를 받아 번호가 맞는지 확인했다. 번호가 맞자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아빠는 최근 통화 내역을 모조리 훑어보고, 엄마와 연락한 마지막 날짜까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우연은 아빠가 전화기를 샅샅이 뒤지고 하나하나 눌러 보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지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용돈 카드 있지? 아빠 다오. 그 쌍년이 아주 싹싹 긁어 튀어서. 일단 어디든 자리부터 잡아 둬야지.”

    우연은 여전히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주머니를 뒤져 카드를 내주었다. 용돈을 딱히 절약해서 쓴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100만 원이 넘는 돈이 들어 있었다. 비밀번호까지 알아낸 아빠는 우연의 지갑 안에 든 현금까지 싹싹 빼내 태연하게 자신의 지갑에 넣었다.

    어느새 교문이 코앞이었다. 아빠는 우연을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교문을 나서면 그다음에 일어날 일은 도무지 상상할 수 없다. 그때는 정말 아빠가 가자는 대로, 하자는 대로 질질 끌려가야 할 것이다. 목이 졸리는 것 같다.

    싫어, 가기 싫어. 누구든 나 좀 살려 주세요.

    제발 나 좀 살려 주세요. 하느님이든, 부처님이든, 지나가는 귀신이라도 좋으니 제발.

    교문을 붙잡고 소리를 지르면 달려올 사람이 있을까. 내 목소리가 들릴까. 깜깜한 밤, 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는 시골 학교 앞, 과연 누가 달려와 줄까?

    아저씨, 나 어떡해. 나 어떡해요. 살려 주세요.

    숨이 점점 가빠 오기 시작했다. 우연은 이 전조 증세를 알고 있었다.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나가면 뭔가가 심장을 쾅, 내리치고, 그다음엔.

    “어이, 학생! 지금 어딜 나가? 기숙사 학생은 지금 밖에 못 나가는 거 몰라?”

    교문을 막 나가려는 순간 경비 모자를 쓴 아저씨가 손을 저으면서 따라온다. 아아. 세상이 한 바퀴 빙그르르 돌면서 안도감이 확 몰아쳤다. 우연은 저도 모르게 철문을 꽉 잡았다. 아빠가 눈썹을 찡그리며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내가 얘 아빠요. 딸이랑 나가서 이야기 좀 하려고 하는데 그것도 안 됩니까?”

    “아, 아버님이시군요. 실례했습니다.”

    수위 아저씨가 한 걸음 물러서나 했더니 다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래도 기숙사 학생이 밤에 학교를 벗어나는 건 금지되어 있습니다.”

    의외로 수위 아저씨는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조금만 양해해 주십쇼. 몇 년 전에 기숙사 학생 한 명이 친아버지한테 납치당할 뻔한 적이 있다 해서 학교에선 최대한 조심하는 중입니다. 아무래도 학생들 안전이 가장 중요하니까요.”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다. 내 얘기다. 아빠가 크게 화를 낼 것 같다. 하지만 아빠는 ‘그런 고약한 일이 있나.’ 하며 전혀 다른 사람처럼 혀를 찼다.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니 할 수 없지. 그럼 넌 들어가서 쉬어.”

    아빠는 놀랍게도 선선히 우연을 놓아주었다. 지금 수위와 싸워 봐야 문제만 커질 거고, 우연이 엄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아빠는 어디에 계실 건데요?”

    “일단 서울 가야지. 네 외갓집이랑 엄마 친구들 족쳐……. 쭉 만나 봐야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다행이다. 얼굴 한번 못 본 먼 친척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아빠는 침을 탁 뱉으며 중얼거렸다.

    “늬 엄마 담엔 그 새끼 차례야. 내가 얌전히 당하고 있을 줄 아나 본데.”

    현기증이 훅 몰아닥쳤다. 안 돼. 아저씨는 절대 안 돼! 입술이 들썩거렸지만, 공포에 얼어붙은 혀는 한마디 반항도 하지 못했다.

    “그 새끼가 사람 잘못 봤어. 돈 많다고 옛날처럼 갑질 만질 다 해도 되는 줄 알지.”

    아니다. 사람 잘못 본 건 아빠다. 아저씨는 갑질 따위 하지 않는다. 아빠의 백 분의 일, 천 분의 일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연은 반박하는 대신 어깨를 조금 더 옴츠렸다. 아빠는 수위 아저씨에게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흥, 요새는 소문 한번 잘못 돌면 의원이든 장관이든 모조리 매장이야. 돈 많은 놈이 이기는 줄 알지? 요샌 안 그래. 더 독한 놈이 이기는 거야. 인터넷이 있어서 사람 하나 씹창 내기 쉬워.”

    “…….”

    “내가 아주 우습게 보였나 본데, 그 새끼 죽었어.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그 새끼는 조지고 죽어. 알아들어?”

    우연은 저 말이 허풍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엄마나 주변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했던 게 바로 저 집요한 복수심이었다. 아빠는 조금이라도 분한 일을 겪으면 철저하게 원한을 갚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있는 것 같았다.

    왜 아빠는 저렇게 악한 쪽으로만 뻗어 나가는 유전자를 타고난 걸까.

    “그러니까 너도 헛소리 찍찍 하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아빠가 시키는 대로 해. 전화 씹지 말고 꼭 받고.”

    아빠 역시 애틋한 인사 따위는 없었다. 우연은 멀어지는 아빠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시키는 대로 하라고? 뭘 시킬 건데? 아저씨가 고등학생하고 성매매를 했다고 가짜 증언이라도 시키려고?

    아빠가 무슨 짓을 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우연은 아빠의 협박을 거절할 자신이 없었다.

    엄마는 탈출했고, 나는 남았다. 이제 머릿속에는 딱 한 가지 생각밖에 남지 않았다.

    도망쳐야 해.

    아빠 모르는 곳으로, 도망쳐야 해, 당장 도망쳐야 해! 평생 메뚜기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사는 한이 있어도.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하지?

    “학생. 얼른 기숙사 들어가.”

    수위 아저씨가 우연의 팔을 끌어당기며 급하게 덧붙였다.

    “이태 전에 아빠한테 끌려갈 뻔했던 그 학생 맞지요? 어두울 때는 기숙사 밖에는 되도록 나오지 말아요. 다닐 때 꼭 친구들이랑 몰려다니고.”

    “아…….”

    “그때 그쪽 재단에서 기숙사하고 교문에 보안 장치 싹 설치해 주면서, 경비실에도 어찌나 신신당부했는지 몰라. 그런데 대체 어디로 들어왔는지 모르겠네. 아마 어디서 담 넘어 들어온 것 같은데.”

    아아, 그제야 긴장이 확 풀리면서 다리가 휘청한다. 맞다, 기숙사 통금도 아니고, 밤에 학교 밖을 나가지 말라는 교칙 따위가 있을 리 없잖아. 천만다행이다. 수위 아저씨가 거짓말까지 해 가며 막아 주지 않았으면 나는 지금 아빠에게 질질 끌려가고 있을 것이다. 하, 하하, 히히히. 미친년처럼 웃음만 흘러나온다.

    안도감 대신 거대한 좌절감이 몰려왔다. 최고의 보안 장치와 야간 경비까지 있는데 아빠를 막을 수 없었다니.

    내 인생은 이제 지옥에 처박힐 일만 남은 건가.

    천국과 지옥은 이렇게나 가까이 있었다. 아빠가 없는 세상이 천국이고, 아빠가 있는 세상이 지옥이었다. 아빠가 눈앞에 없을 때는 머나먼 외국이 무서워 보였지만, 아빠가 눈앞에 나타나자, 아마존 밀림과 사하라 사막이 낙원처럼 느껴졌다.

    집을 나온 지 2년, 그동안 누렸던 자유는 앞으로 다가올 속박을 더욱 불행하게 느끼도록 만들었다.

    잠시 누리다가 뺏기는 자유는, 선물이 아니라 재앙인지도 몰랐다.

    * * *

    며칠 후 세경홀딩스를 다시 찾은 전수현 실장은, 로비 의자에 앉아 짜증스럽게 한숨을 쉬었다.

    “대체 결혼할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시간 잡는 게 아주 전쟁이네, 전쟁.”

    혹시나 해서 30분 일찍 도착했더니 자리에 안 계신단다. 평소처럼 여기 앉아 기다리시라거나, 차라도 한잔 드시겠느냐 권하지도 않는다. 실없이 유쾌한 비서실장도 바짝 날이 서 있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메세나재단 관계자 중 한 명이 뭔가 사고를 치고 잠적한 듯했다. 사람들을 총동원해서 수색 작업 중이라는 말이 술렁술렁 오가고 있었다. 궁금하긴 했지만 아무리 오지랖이 넓어도 그것까지 물어볼 수는 없었다. 자신은 일개 웨딩 플래너일 뿐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연락은 오지 않는다. 대표이사님이 웨딩 촬영을 할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식으로 굴러가다간 결혼 당일에 스튜디오, 야외 촬영, 본식 촬영까지 한꺼번에 해치우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르겠다.

    이쪽 업계에 몸담은 지 어언 7년. 처음에 세경그룹의 젊은 총수와 뉴욕에서 승승장구하는 재벌 3세 뮤지컬 배우의 결혼을 맡았을 때 얼마나 기대감에 들떴는지 모른다. 어릴 적 소꿉동무였다가, 남자가 사제가 되겠다는 말에 포기했다가, 결국 돌고 돌아 결혼에 이르게 되었다는 러브 스토리는 얼마나 낭만적이고 달콤했던가.

    물론 그 낭만을 그대로 믿기엔 수현이 아는 것이 너무 많았다. 일단 수현 본인부터 결혼 석 달 만에 파경을 맞은 ‘돌싱’이었다. 다행히(?) 혼인 신고를 안 한 상태여서 누가 물을 때면 ‘바쁘게 일만 하다 혼기를 놓친 미혼’으로 처신할 뿐이었다. 웨딩 플래너가 돌싱이나 비혼이면 그것처럼 곤란한 일은 없으니까.

    게다가 부족한 지분으로 위태롭게 대표이사에 오른 예비 신랑과 그 부족한 지분을 끌어온 야심만만한 예비 신부라는 조합에선, 사실 낭만의 니은 자도 찾기 어려웠다. 그저 ‘이 바닥에 매우 잘 어울리는 거래혼’으로 보였다.

    하지만 수현은 이 결혼을 최대한 낭만적이고 아름답게 꾸미기로 작정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것들은 어차피 외형뿐이다. 화장발 뒤의 맨얼굴, 천사 같은 아기가 차고 있는 똥 기저귀, 꽃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탐욕스럽고 지저분한 뿌리. 세상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은 모두 그런 것들과 짝지어져 있다. 특히 결혼이야말로 그렇다.

    “그렇긴 해도 이번 신랑 신부는 정말 극과 극이긴 해.”

    이번 예비 신랑과 신부는, 지금까지 만나 본 커플 중 꽤 특이한 케이스에 속했다. 신랑은 조용하고 튀는 것을 싫어해서 결혼식도 그러기를 바랐고, 신부는 한 번뿐인 결혼식이 최대한 화려하고 인상 깊기를 바랐다.

    신부는 ‘보여 주는 쇼’로서의 결혼 예식에 관심이 많고 요구 사항도 많은 반면, 신랑은 결혼식에 관심도 흥미도 없었다. 테일러 숍에 갈 시간조차 내기 어렵다며 카탈로그만 보고 예복을 고르겠다는 말에 수현은 신랑 들볶기를 포기했다. 그는 연미복이 아니라 수영복을 입으라 해도 알았다고 할 것이고, 비행기에서 낙하산 지고 떨어지며 결혼하자 해도 그러자고 할 것이고, 식을 생략하고 혼인 신고만 하자고 해도 기꺼이 고개를 끄덕일 듯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싸우지 않았다. 그렇게 대척점에 서 있는데도 전혀 다투지 않는 건 오히려 좋은 일이 아니었다. 신부는 사소한 의견이라도 완벽하게 관철되지 않으면 아랫사람들에게 무섭게 화를 냈고, 신랑은 이견 조율 대신 ‘그럼 미현이가 알아서 고르라고 하세요.’ 하고 신경을 꺼 버렸다. 죽어나는 것은 중간에 끼어 있는 수현이었다.

    예비 신랑은 신부와 있을 때는 들뜨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정중하게 에스코트하고, 그녀와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 연기는 지나가는 사람의 눈에도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 특히 스킨십은 심하게 어색하고 서툴렀다.

    신부는 신부대로, 그런 신랑의 연기를 보면서 행복해하는 척했다. 그녀의 연기는 너무 자연스럽고 능숙해서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그녀는 신랑 앞에서는 절대로 목소리를 높이는 법이 없었다. 그의 앞에서는 늘 햇빛처럼 눈부셨고, 햇볕처럼 따스했다.

    수현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외형만이라면 두 사람의 결혼은 충분히 아름답고 풍요로웠다. 결혼 이후 길고 지루하게 이어질 척박한 삶이야, 자신이 상관할 바 아니었다.

    “휴……. 나도 모르겠다.”

    수현은 한숨을 쉬며 카탈로그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남성 예복은 디자인 변동 폭이 드레스만큼 자유롭지 않아 눈썰미와 패션 감각이 더 좋아야 했다.

    예비 신랑은 결혼에 무심해 보였지만, 옷차림이나 사용하는 물건들을 보면 취향 자체는 신부보다 더 고급스러운 듯했다. 다만 그걸 드러내는 걸 즐기지는 않았다. 가장 까다로운 유형의 클라이언트였다.

    한참 뒤적이던 수현은 카탈로그를 탁 덮은 후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너 뭐야? 왜 남이 보는 거 훔쳐보고 있어?”

    순간, 두 칸 옆에 앉아 힐끔대던 자그마한 여자가 어깨를 크게 움츠렸다. 먹고 있던 빵이 주먹 안으로 확 쭈그러져 들어갔다. 수현은 눈썹을 찌푸렸다.

    뭐야. ……정신이 좀 이상한 사람인가?

    여자는 얼굴이 하얗고 나이가 꽤 어려 보였다. 얼룩진 점퍼 사이로 흰 셔츠 자락이 주르르 삐져나와 있었는데, 그나마 남성용 와이셔츠 같았고, 소매와 목둘레에는 때가 꼬질꼬질했다.

    피부가 희어서 잘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입술 근처엔 허옇게 거스러미가 일어나 있다. 머리는 멋대로 뻗친 데다 냄새도 났다. 손등과 팔에는 심하게 긁힌 듯한 피딱지가 여러 줄 앉아 있었다.

    휴. 수현은 눈썹을 찡그리며 옆으로 물러앉았다. 괜히 말을 걸었나? 저렇게 맛이 간 사람과는 손톱만큼도 엮이지 않는 게 안전하다.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르니까.

    그나저나 저런 여자가 어떻게 이런 데까지 기어 들어와서 빵을 처먹고 난리지?

    대한민국 경찰들은 정신이 이상한 사람들이 왜 이렇게 멋대로 돌아다니게 방치하는지 모르겠다. 더구나 이렇게 큰 회사 로비에, 사람들도 많이 다니는 곳에.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를 줄 알고.

    수현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 무슨 일로 온 거예요?”

    “만날…… 사람이 있어요. ……꼭 해야 할 말이 있어서요.”

    “여기 근무하는 사람?”

    “네.”

    “전화해 보지 그래요?”

    “제 전화기 꺼 놨어요. 절대 켜면 안 돼요.”

    “왜?”

    “전화기를 켜면, 위치를 추적당하고 말 거예요. 끌려가고 말 거예요. 죽을 때까지 맞고 나서 꼼짝없이 시키는 대로 하게 될 거예요.”

    이건 뭔 피해망상이람. 정신병자 맞네. 수현은 짜증스럽게 전화기를 들었다. 하지만 신고 번호를 누르려는 순간, 여자가 헛소리처럼 중얼대는 말에 몸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이원 아저씨도 전화하지 말라고 하셨고요…….”

    “……뭐? 누구요? 어떤 아저씨?”

    “이원 아저씨요. ……한이원.”

    카탈로그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수현은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여기 대표이사님? 아는 사람이에요?”

    놀랍게도 여자가 고개를 번쩍 들더니 눈을 빛낸다. 네. 고개를 맹렬히 끄덕이는 꼬락서니를 보니 기가 막혔다. 저절로 빈정대는 말이 튀어나왔다.

    “왜? 여기까지 왔으면 사무실에 직접 가서 얘기하지 그래요. 아, 사무실이 어딘지는 아나?”

    “그러잖아도 25층에 올라갔었어요. 2508호. 그런데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서…….”

    어? 수현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대표이사실이 그 방인 건 어떻게 알았지?

    대표이사는 은둔형 경영자라는 소문이 무색하지 않게, 개인 정보 통제가 심한 편이었다. 대표이사실 역시 용무가 없는 사람은 들어갈 수 없다. 안내 게시판에도 대표이사실의 위치는 적혀 있지 않고, 직원이나 경비도 알려 주지 않는다. 그 말인즉, 한 전무가 용무가 있어서 직접 부른 경우가 아니면 외부 사람이 그 방의 위치를 알기는 쉽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방의 호수까지 정확히 안다?

    침이 바작바작 말랐다. 관리인을 불러 내쫓게 하려는 생각은 천리만리 날아가 버렸다. 수현은 혀로 입술을 핥으며 속삭였다.

    “나도 한 전무님 알아요. 조금 이따 뵈러 올라갈 건데, 무슨 말인지 내가 전해 줄까?”

    새까만 눈에 반짝 빛이 든다. 거스러미가 잔뜩 인 입술이 바르르 떨리는 것이 보인다.

    “아, 아줌마는 아저씨하고 어떻게 아는 사이예요? 직원이에요?”

    아줌마라는 말에 화를 낼 경황도 없었다. 수현은 최대한 친절한 얼굴로, 바닥에 떨어진 남성 예복 카탈로그를 펼쳐 보였다.

    “직원은 아니고 웨딩 플래너.”

    의도하고 던진 미끼는 아니지만, 찔러 보려는 마음도 없던 건 아니었다. 여자의 눈이 고양이 눈처럼 동그래지더니, 시선이 바로 남성 예복 카탈로그에 가 닿는다. 허옇고 거칠거칠한 입술이 덜그럭거렸다.

    “아, 아저씨 결혼해요? 아 맞다. 올해 결혼하신다고 했지. 결혼 날짜 나왔어요?”

    “5월 15일. 아, 참, 이건 비밀이에요. 당일까지 기사 나가면 절대 안 된댔으니까.”

    “신부는 유미현 언니 맞아요?”

    여자는 입술을 파들파들 떨면서 물었다.

    이거 봐라? 누가 네 언니야?

    수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우연을 노려보았다. 물론 회사의 중역들은 신부가 누군지 알고 있겠지만 이런 여자가 꿰고 있을 만큼 널리 알려진 가십은 아니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하는 말에 여자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옛날에 약혼한 거 들었어요.”

    눈이 몽롱해진다. 몽롱하게 젖은 눈이 천천히 찌그러진다. 울 것 같던 여자는 이내 웃기 시작했다. 껄떡껄떡, 숨넘어가는 듯 웃다가 시선을 내려 카탈로그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지저분한 손이 책장을 휙휙 넘긴다.

    “이거 멋지다. 이것도 멋지다. 정말 잘 어울릴 거 같아요.”

    여자는 손등으로 눈을 박박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수현은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대표이사님하고 어떻게 아는 사이예요?”

    대답은 나오지 않는다. 대신 눈을 문지르는 행동이 점점 과격해진다. 씨, 이잇, 씨, 흐, 흐으. 여자는 이제 문지르기를 멈추고 눈물이 묻은 손등을 미친 듯이 긁어 대며 욕을 중얼거렸다. 정신이 이상한 건 확실했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두고 갈 수도 없었다.

    “아가씨 이름이 어떻게 돼요? 전해 드릴 말씀 있으면 지금 나한테 얘기해 봐요. 비밀은 지켜 줄게. 그러면 되겠어요?”

    여자는 긁던 것을 멈추고 가만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한참 머뭇거리던 여자는 입술을 이로 잡아 뜯으며 이름을 대더니 몸을 달달 떨며 대답하기 시작했다.

    “조, 조심하라고 해 주세요. 진형식이란 사람이 나와서 이를 갈고 있다고…….”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수현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저 말이 허튼소리로 들리지 않는다. 여자는 무엇이 그리 분한지, 말을 하다 말고 입술을 짓씹었다. 핏발이 선 눈에서 지저분한 눈물이 지르르 흘러내렸다.

    “아저씨한테, 나, 좀…….”

    입술이 달싹거렸지만, 말은 이어지지 않는다. 황급히 입술을 깨물며 다시 손등과 팔을 박박 긁어 댄다. 그래서 수현은 저 여자가 하려던 말이 미안하다는 말인지, 살려 달라는 말인지 영 확신할 수 없었다.

    수현은 조용히 화장실로 들어가서 전화기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최 실장님. 전수현입니다. 지금 올라가는 길이에요.”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최 실장은 한 전무님이 중요한 회의 중이시라, 전수현 실장님께서 추천하는 예복 서너 가지만 카탈로그에 표시해서 놓고 가면 그중에서 골라 내일까지 알려 드리겠다, 어쩌고 한다.

    이럴 거라 예상했다. 한 전무는 이번 결혼을 아주 무성의하게 하기로 작정한 듯했다. 문제는, 전무님이 이렇게 나오면 오늘 밤 예비 신부에게 달달 볶이는 건 자신이다. 예비 신부는 한 전무에게 절대로 싫은 소리를 ‘직접’ 하지 않았다.

    “네. 결정하신 거 알려 주시면, 바로 테일러 숍 직원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걸 입으셔도 태가 훌륭하실 거예요.”

    수현은 입술 끝을 한쪽만 비틀어 웃으며 덧붙였다.

    “아, 맞다. 그리고 아까 오면서 보니까 어떤 이상한 사람이 로비를 배회하면서 전무님을 찾고 있더라고요. 단발에 키가 작은 여자였는데…….”

    전화기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수현은 예의 바르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요새 세상이 하도 흉흉하다 보니, 이런 사람이 건물 안에서 막 돌아다니면 무섭거든요. 제가 나가는 길에 신고해 드려도 괜찮겠죠?”

    ― 수현 씨, 전 실장님? 잠깐만요. 그 사람 인상착의 좀 알 수 있을까요?

    갑자기 최 실장의 목소리가 다급해진다. 뭔가 탁 걸려들었다는 느낌이 왔다. 인상착의를 애매하게 뭉뚱그려 대답하던 수현은 회심의 한 방을 날렸다.

    “이름이, 진우연이라고 했던 거 같아요.”

    화장실에 숨은 채 로비를 주시하던 수현은 눈을 크게 떴다.

    제복 차림의 경비원들이 무슨 급한 연락이라도 받은 듯, 로비 쪽으로 뛰어와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잠시 후 띵, 소리와 함께 고층 전용 엘리베이터가 열리더니, 그곳에서 내린 사람들이 로비 쪽으로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발걸음 소리가 귀청을 울릴 정도로 요란했다. 가장 앞장을 선 사람은 ‘중요한 회의’에 참석하느라 결혼식 준비까지 팽개치고 있던 한이원 전무였다.

    “전무님, 저, 전무님, 저희가 찾아서 데리고 올라가겠, 전무님!”

    뒤에서 애타게 소리치며 따라가는 것은 동그란 안경잡이 최 실장과 비서실의 다른 직원들이었다. 한 전무가 마주 오는 경비원을 향해 고함을 지른다.

    “우연이는 어디 있습니까!”

    이제 그는 좌우를 보지도 않고, 경비원이 가리킨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나가지 못하게 막아요. 출입문, 턴 게이트 다 막으세요! 그의 날 선 고함이 로비를 향해 뻗어 나간다. 평소의 그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우연아!”

    구석 자리 의자에서 쪼그라든 빵을 꼬약꼬약 먹고 있던 여자가 얼굴을 든다.

    “아저씨……?”

    입이 멍하니 벌어지더니, 꼭꼭 뭉쳐진 빵 덩어리가 바닥에 떨어진다. 한 전무의 입에서 격한 고함이 터졌다.

    “진우연! 지금까지 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우연이라는 여자가 비척대며 일어난다. 한 전무의 시선이 얇은 점퍼에 커다란 와이셔츠, 양말도 없이 그대로 드러난 맨다리에 가 닿는다.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다. 여자가 얼빠진 얼굴로 더듬거린다.

    “아, 아저씨, 나 찾았어요……?”

    “당연하지. 내, 내가 너 없어졌다는 말 듣고 기분이 어땠을 거 같아!”

    “나, 나를 왜…… 찾았어요? 왜……?”

    여자는 덜덜 떨면서 손등으로 눈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아저씨, 미안해, 미안해요. 눈가가 새빨개지도록 박박 문지르는 걸 한 전무가 잡자, 이번엔 다른 손으로 팔을 미친 듯이 긁어 대기 시작했다. 한 전무가 나머지 한 손도 잡아채자 그녀는 두 팔을 잡힌 채 발을 구르며 울부짖었다.

    “미안해요, 아저씨. 아빠가, 아빠가 나왔대요. 중간에 나왔어, 어떡해, 아저씨 가, 가만 안 둔다고, 아저씨 미안해. 어떡해요, 아저씨.”

    사람들이 이상하게 힐끔대며 다가오려는 것을, 관리인들이 달려와 황급히 막는다. 한 전무는 이를 갈 듯이 으르렁거렸다.

    “그까짓 거 괜찮아. 얼마든지 오라고 해. 얼마든지 다시 처박아 준다고. 2년, 3년, 5년, 10년, 50년, 얼마든지!”

    “안 괜찮아요. 아저씨는 몰라.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사람이, 꼭지가 돌면 정말 무슨 짓을 하는지, 아저씨같이 착한 사람은 절대 몰라요.”

    “우연아!”

    여자가 숨을 헐떡대다가 몸을 크게 휘청거렸다. 한 전무는 축 늘어지는 몸을 황급히 부축했다. 그녀는 한 전무의 발에 밟혀 납작해진 빵을 보며 울기 시작했다.

    “아저씨, 배고파요, 나 좀 살려 주세요, 나 좀 숨겨 주세요.”

    어린아이로 퇴행한 듯, 여자는 한 전무에게 매달렸다. 한 전무는 그런 여자를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게 끌고 갈 생각도 못 하고, 흐느적대는 몸을 부축한 채 그대로 서 있었다. 늘 차분하고 침착하던 사람의 등이, 어깨가 우들우들 떨리고 있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나도 이기적이고 못돼 먹은 부탁인 거 알아요. 나도 이 주둥이를 찢어 버리고 싶어. 미안해요. 앞으로 다시는 안 올게요, 다시는 이런 부탁 안 할게, 그러니까 이번만 제발…….”

    깡마른 몸이 경련이라도 하는 것처럼 부들거렸다.

    “아저씨, 무서워. 나는 무서워요…….”

    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한 전무는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고, 작은 몸뚱이는 그의 품에서 으스러질 것처럼 짓눌렸다.

    “그만해, 그만…….”

    한 전무는 그녀를 안은 채 헐떡대며 우느라, 간절한 부탁에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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