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누드-25화 (25/47)
  • 25. 시간을 잃은 사람들

    이원은 시간을 잃었다. 서른둘의 겨울에서부터 서른넷의 봄까지, 뭉텅이로 잘려 어느 괴물의 입으로 들어간 것 같다. 아마도 쓰고 시고 딱딱했을 그 시간을 먹어 치운 괴물은, 결국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하고 게워 놓았다. 반쯤 소화돼서 흐물흐물해진 시간의 흔적은, 원형을 잘 알아볼 수 없었다. 다만 역겨웠다.

    그래서 이원은 그 시간 동안 있었던 일을 잘 떠올릴 수 없었다. 모든 것이 흐릿하고, 더럽고, 혼탁했다. 다만, 괴로웠다.

    매일 정해진 일이 넘치게 있다는 것에 늘 감사했다. 그는 매일 아침 약을 먹으며 하루를 시작했고, 약을 먹으며 잠자리에 들었다. 정신이 빠질 정도로 바쁘거나, 위장이 요동칠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거나, 비굴해지거나 오만해질 일이 많아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잊어버릴 정도로 몰아붙여지는 것에 이원은 매일 감사했다.

    “그러니까, 조합원님. 현재 가지고 계신 이곳 땅이, 도로하고 접한 이쪽 대지 포함해서 1,000제곱미터, 302평 정도 되지 않습니까?”

    Y시 재개발 사업은 빠르게 진척되는 중이었다. 시에서는 용적률을 300%까지 최대로 올려 주겠다는 허가가 나왔고, 설계 변경안도 총회에서 통과가 됐다. 이제는 관리 처분 인가를 받기 위해 정신없이 몰아치고 있었다. 시간이 돈인 싸움이었다.

    “구매하신 지는 얼마나 되셨고요? 음, 그리고 구입할 때의 가격은요?”

    조합 사무실에서는 조합원 분양과 청산을 위한 법무, 세무 상담이 한창이었다. 긴 회의용 책상 서너 줄에 세경건설에서 보낸 법무사와 세무사들이 좌르르 달라붙어서 개별 면담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23평형을 분양받으려면 여기서 얼마쯤 더 내야 하나요. 아파트 안 받고 청산하면 돈은 얼마 나오나요. 이 답(畓)은 감정 평가액이 얼마나 되나요. 대출은, 이주비는, 제 상황에서 중도금 융자는 얼마까지 가능할까요. 내용은 각양각색이었지만 결국은 온종일 돈 계산이었다.

    “뭐라고? 우리 건물 감평액이 왜 그것밖에 안 돼? 싹 리모델링한 지 3년밖에 안 됐단 말이야!”

    “이게 뭔 개소리야! 준주거지에 500평인데 왜 이것밖에 안 나와!”

    “씨발, 비싼 땅 사 놨더니 재개발로 묶어서 아무 짓도 못 하게 해 놓고, 10년 동안 이자를 얼마나 쏟아부었는데! 그거 다 물어 줄 거야! 엉!”

    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서 고함이 꽝꽝 터진다.

    이 지역은, 조합원 수는 적었지만 대지 지분이 큰 토박이 지주들이 많았다. 그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감정 평가액은 생각보다 적고 현금 청산 시 세금은 엄청나게 많았다. 현금 청산을 하려다가 세금만 몇억씩 내게 된 이들은 펄펄 뛰며 화를 냈다. 그렇다고 분양을 받자니 30평 안팎의 ‘코딱지만 한’ 아파트들뿐이고, 손에 떨어지는 것은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푼돈뿐이다. 그들과 싸우고 달래고 설득하고 욕을 먹으며, 세무사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전쟁을 치르는 중이었다.

    “아버님, 감평액은 시세를 충분히 고려해서 조정이 됩니다만, 문제는 세금입니다. 아버님께서 청산하신다면, 현재 기준 양도 소득세만 50% 가까이 이르는데…….”

    이원은 앞에 놓인 계산기를 빠르게 두드렸다. 그는 CPA 자격증도 있고, 분양이나 청산 관련 법 조항에 대해서도 세세하게 알고 있어서, 조합원들 눈에는 ‘매우 보통의 세무사’ 같았다. 그의 정체를 알고 있는, 조합장을 위시한 몇몇 사람들만 쉴 새 없이 그를 곁눈질했지만, 당사자는 저 식겁한 시선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 인간이, 정말 제정신인가.

    홍연은 이원의 등 뒤에 서서 이 기막힌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었다. 첫날보다는 많이 태연해졌지만, 그래도 시공사 대표이사라는 인간이 조합원을 대상으로 세무 상담 따위나 하는 상황은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정말 미치지 않고서야……. 속으로 중얼대던 홍연은 생각을 멈추고 한숨을 쉬었다.

    미치지 않으려고…… 저러는 거겠지.

    여기까지 생각이 닿으면 당혹감은 안타까움으로 변하곤 했다.

    이원은 틈만 나면 현장을 굴러다녔다. 바빠서 좋았다. 힘든 것은 더 좋았다. 아침에 비몽사몽 일어나서 급하게 옷을 챙겨 입고 출근하고, 아무 생각도 없이 종일 숫자 계산을 하거나 현장을 돌아다니다가 퇴근해서는 졸면서 저녁을 먹은 후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수면제를 먹고 목욕을 하고 잠에 빠졌다. 그래도 잠이 오지 않으면 ‘레위기’나 ‘신명기’, ‘논어’를 소리 내서 읽었고, 그래도 잠이 오지 않으면 자위라도 했다. 적어도 몸은 정직해서, 죽을 만큼 피곤하면 어쨌든 잠은 잘 수 있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원은 그에게 닥친 후폭풍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난생처음 겪어 보았던 감정의 잔해를 어떻게 수습하는지 전혀 몰랐다. 남은 것은 ‘백번이라도 옳은 일’이라는 당위뿐이었지만, 당위에는 진통 효과가 전혀 없었다.

    가끔 우연과 먹었던 무스케이크를 구워 달라고 하기도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한 조각 입에 넣었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포크를 내려놓는 일이 반복되었다. 밤에 식당에 내려가 라면을 끓인 적도 있었다. 달그락대는 소리에 밖으로 나왔던 송 여사가, 놀란 내색도 없이 못 본 척 조용히 들어가는 것을 보며, 이원은 다시 웃었다.

    그때 느꼈던 생생한 맛의 향연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그것은 성냥팔이 소녀의 손안에서 잠시 피어오른 성냥불 같은 것이었다. 우연이 자신의 갑옷을 깨뜨리고 난데없이 들이닥쳤던 순간, 그의 생명력, 혹은 오감이 불꽃처럼 확 살아났던 것에 불과했다. 그것을 알고도, 이원은 고행처럼 그 짓을 오래 되풀이했다.

    우연을 위해서 기도해 주겠다는 약속을 이원은 후회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그 아이를 생각해야 했다.

    잠을 자기 전, 기도실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 제목을 떠올리는 순간, 우연에 대한 기억들은 거대한 정원의 백만 송이 꽃처럼 한꺼번에 피어올랐다.

    ……너에 대한 기억이 이렇게나 많았던가.

    기억으로 만들어진 꽃잎은 하나하나가 칼날이었고, 꽃술은 하나하나가 바늘이었다. 이원은 꽃밭에서 벗어나기 위해, 꽃들을 헤치며 오랫동안 걸었다. 꽃밭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었고 사방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이원은 피투성이가 된 다리를 절룩이며 하염없이 걸었다. 많이 아프고, 오래 아팠다.

    * * *

    “전무님, 드디어 어제 날짜로 이주 작업이 마무리됐습니다!”

    주택사업부의 정성일 부장이 일어나 떨리는 목소리로 선언했다. 회의장 여기저기서 커다란 박수가 터졌다.

    “우와! 축하합니다. 드디어!”

    “그야말로 엄청난 속도군요! 대단하십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의장석에 앉아 있던 이원도 오랜만에 기분 좋게 웃으며 함께 손뼉을 쳤다. 정 부장은 한껏 자랑스러운 얼굴로 덧붙였다.

    “이번 주에 기공식 하고 바로 철거, 토목 들어갑니다. 일반 분양관 공사도 같이 진행합니다.”

    다들 한숨 돌린 듯한 얼굴이었다. 그럴 만했다. 조합원 분양과 현금 청산, 관리 처분 총회, 인가, 이주로 이어지는 과정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지뢰밭 위를 걷는 것과 같았다.

    이 과정은 재개발 사업에서 가장 난코스에 속했다. 조합원들과의 피 말리는 협상, 협박, 자금 끌어대기, 공무원들과의 마찰,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예상외 변수들로 끝까지 안심할 수 없었다. 물론 준공까지 4년이 넘는 대장정과 PF(공사비 조달), 악성 미분양 위협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일단 큰 고비는 넘긴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봄이 코앞이었다. 이원은 문득 마포 대교 이후 두 번의 겨울이 뒤로 빠져나간 것을 알았다. 시간이 흘러갔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은, 사업이 한 단계씩 앞으로 나가는 순간뿐이었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서른두 살의 겨울, 그 춥던 마포 대교 위에 박제되어 있었다.

    가끔 정 관장이나 손 원장, 혹은 최 실장에게 우연의 근황을 보고받았다. 우연은 간신히 좀비 생활에서 벗어나 그럭저럭 학교생활을 시작한 듯했다. 아르바이트는 하지 않고, 무성의하게 상담 치료를 하고, 약을 받아 갔다. 약을 잘 먹는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이제 우연의 곁에는 저녁때마다 직접 약을 먹이고, 혀 밑을 검사하고, 토하지 못하도록 라면을 끓여 먹이는 사람이 없었다.

    그림은 더 이상 그리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민폐가 되기는 싫었는지 팀별 과제만 하는데 그림 그리는 일은 절대 맡지 않는다고 했다. 신청 학점도 12학점, 11학점, 그 모양이다. 그리고 다시 화려한 밤참과 파티와 게임 폐인 상태를 반복하는 듯했다.

    ……그래도 너는 어찌어찌 살아지는 모양이다.

    맞다, 살다 보면 살아지고, 살아만 있으면 살아진다고 그랬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나 역시 그냥 이렇게 살아질 거라고 믿었다. 세상이 온통 회색으로 보여도, 가끔 이유도 없이 숨이 막혀도, 사랑하는 줄도 몰랐던 그 아이가 숨 막히게 보고 싶어도…… 어쨌든 이리 멀쩡하게 살아질 거라고.

    좌중에서 터진 웃음소리에 이원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보고를 마친 정성일 부장이 자랑스레 V 자를 펼쳐 보이더니 재무금융부의 김우종 차장과 건축사업부의 신윤호 상무를 향해 손가락으로 작은 하트를 날려 보내며 씩 웃고 있다. ‘이제 돈줄 대는 일과 노가다 시작이니 뒷일을 부탁하오, 나는 먼저 가오.’ 하는 뜻이었다. 장난기가 많은 정 부장은 회의 석상에서도 곧잘 개구쟁이 같은 짓을 하곤 했다. 하트를 받은 두 사람이 끙, 신음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이 보인다. 이원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정 부장님, 정말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이번 건 맡고부터 1년마다 10년 치씩 늙으셨죠.”

    “말도 마십시오, 전무님. 이게 전 회장님 때부터 10년 넘게 끌탕이던 사업 아닙니까. 제 머리 하얘진 거 보십시오, 얼굴 하나로 먹고살았는데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염색약 사시는 데 보태게 주택사업부에 상여금 두둑이 보내겠습니다. 다음 차례는 김 차장님과 신 상무님이신데, 두 분은 별 타격이 없으실 것 같아 다행입니다.”

    이원의 말에 좌중에서 킬킬대는 웃음이 터졌다. 반백의 신 상무는 평생 염색 한번 안 하고 터프하게 살아왔다는 자칭 ‘상사나이’였고, 김 차장은 반 대머리였는데 대머리가 ‘정력’의 증거라는 소문을 철석같이 믿고 은근히 자랑스러워하는 용자였다.

    “그러면, 이제부터 일반 분양 전시관…… 엇.”

    이원은 말을 끊고 급하게 자리에 앉아 고개를 수그렸다. 책상 위로 갑자기 물방울이 투투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회의장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제기랄.

    이원은 한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이를 갈았다. 옆에 앉아 있던 홍연이 급하게 일어나 다가온다. 정 부장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가 어색하게 너털웃음을 웃었다.

    “전무님께서, 어, 조, 좀 피곤하신 것 같습니다.”

    “…….”

    “우리 10분만 쉬었다 하지요. 허허허.”

    홍연은 얼른 회의실 문을 닫고 이원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흐, 읍, 으윽, 그는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눈물을 거둬 내느라 허둥지둥하고 있었다. 제기랄. 하필 왜 지금 이래! 약을 먹어도 왜. 한참 기다려도 눈물이 멈추지 않자 그는 결국 책상에 이마를 대고 엎드렸다. 얼굴을 감싼 팔 사이로 눌린 소리가 흘러나왔다.

    “최 실장님, 나가 계세요.”

    “전무님. 괜찮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그냥, 소리 내서 우셔도 괜찮습니다.”

    “홍연 씨, 나가 있으세요, 좀!”

    홍연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맸다. 말이 그렇지 어떻게 이런 사람을 떨렁 놔두고 그냥 나가냐. 게다가 주의 깊게 살펴보고 신경 써서 보살피라는 손 원장의 당부도 있었다.

    하지만 남아서 뭔가 위로 비슷한 걸 해 드리기엔, 당사자가 너무나 창피해하고 있었다. 아마 지금까지 보여 준 모습만으로도 죽고 싶을 것이다. 홍연은 별수 없이 문을 닫고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래, 전무님 무슨 일이야?”

    “어디 안 좋으신가? 왜 그래?”

    문밖에서 닥지닥지 모여 있던 사람들이 홍연에게 달려들어 묻는다. 홍연은 진땀을 빼며 최대한 그럴듯한 이유를 주절주절 끌어댔다.

    “감정이 격해져서 그러신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전 회장님 때부터 이 건으로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투입한 사업비 회수도 안 되고, 일은 계속 엎어지고, 조합원들은 회사까지 찾아와서 깽판 치고. 말씀은 안 하셔도 속이 말이 아니셨죠. 그런데 무슨 뚝심인지, 기어이 여기까지 끌고 오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건 그렇지, 한 회장님이 일만 잔뜩 저질러 놓고 먼저 가시고, 전무님 혼자 악전고투하면서 예까지 왔으니, 북받칠 만하지.”

    “그나저나 한 전무 아직 물렁하네. 이 바닥에서 이 정도 일로.”

    “아, 사적으로야 유하시지만 일에선 또 인정사정없으시잖습니까.”

    대답을 주워섬기면서도 홍연의 등으로는 진땀이 조르르 흘렀다. 오늘은 이렇게 넘어간다 해도, 앞으로 사람이 많을 때 또 이러면 그때는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 그러잖아도 회의 시간에 이 증세가 나타날까 봐 계속 불안해하고 있었는데.

    순간 홍연의 전화기가 짧게 울렸다. 문자를 확인한 홍연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모인 사람 앞에 꾸벅 고개를 수그렸다.

    “죄송합니다. 중요한 보고는 얼추 끝났으니,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신다고 합니다.”

    이원에게 이상한 증세가 나타난 건, 지난여름부터였다.

    “조금 있으면 우연이 생일인데 혹시 선물이라도 보내시겠습니까?”

    홍연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눈썹을 잔뜩 우그리고 결재 서류를 노려보고 있던 이원의 표정에 일순 생기가 돌았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습니까? 이거 참.”

    “…….”

    “음, 뭘 좋아할까요. 장신구는 잘 안 하는 것 같고, 꽃은 안 좋아하는 것 같고, 옷은 직접 골라야 할 테고, 좋아한다고 컵라면이나 콜라를 보내 줄 순 없고. 큰 인형은 좁은 기숙사에서 처치 곤란일 텐데.”

    갑작스레 줄줄 쏟아져 나오는 말에 홍연은 황급히 대답했다.

    “어떤 선물이 받고 싶은지 정 관장 통해서 물어보셔도 되잖습니까.”

    “예전에 그렇게 물어봤다가 누드모델 해 달라는 소리를 들었죠. 또 그랬다간 정 관장은 무슨 날벼락…….”

    빙그레 웃으며 이야기를 늘어놓던 그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머리를 망치로 맞기라도 한 얼굴이었다. 그는 고개를 흔들더니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돌렸다.

    “선물은…… 정 관장이 알아서 보내겠지요. 제가 보낼 이유가 없……. 어?”

    갑자기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든 홍연은 어리둥절했다. 그가 눈을 크게 뜬 채 한 손으로 뺨에 생긴 물줄기를 거둬 내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그는 고개를 돌리고 미친 듯이 쏟아지는 눈물을 어떻게든 수습하려고 허둥거렸다. 그는 당황한 것을 넘어 거의 패닉에 빠진 것 같았다.

    “최 실장, 이, 이거, 왜 이러는 겁니까? 홍연 씨, 제, 제기랄. 이거…… 수, 수건 좀.”

    자신도 모르는 이유를 남이 알 리가 없었다.

    그때를 시작으로, 그는 가끔 난데없이 눈물을 보였다. 아무 이유도도 없었다. 가만히 앉아서 신문 기사를 읽다가, 홍연과 사무적인 대화를 하다가, 전화를 받다가, 혹은 컴퓨터에서 뭔가를 출력하다가 갑자기 한 손으로 눈을 덮거나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증세가 나타난 후, 이원은 다시 약을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증세가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후, 홍연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회의장으로 들어갔다. 그는 여전히 책상에 이마를 댄 채 엎드려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물론 괜찮지 않은 건 안다. 아는데, 뭐라고 물어봐야 할지 난감했다. 나올 대답도 뻔했다.

    “괜찮습니다.”

    숨죽인 흐느낌 사이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무님. 홍연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좀 더 강한 어조의 대답이 달라붙는다.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나는 충분히 괜찮다. 이원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나는 충분히 바쁘고, 일도 충분히 잘해 내고 있다. 해상 공항 입찰 건은 아직 미뤄지고 있지만, Y시 재개발 건은 바로 착공에 들어갈 것이고, 일반 분양도 시작될 것이다. 고맙게도 시에서 용적률을 최대한 올려 주어 분양 세대수가 많이 늘었고, 10년 이상 누적된 매몰 비용 보상 차원에서 일반 분양 물량의 절반을 받기로 했다. 이 정도로 파격적인 조건은 드물다. 담보 대출 규제로 인한 대규모 미분양 걱정은 있지만 어떻게든 될 것이다. 이번에도 어떻게든 버티면.

    아 그래. 미현과 결혼할 날도 잡혔다. 5월 15일,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결혼식을 올린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니, 나는 괜찮아야 한다.

    ‘결혼하시면 축가도 하고, 행사 노가다에 보디가드 다 뛰고요…….’

    하지만 그런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낭랑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원은 멍하니 엎드린 채, 자신의 뇌 속을 파고드는 사랑스러운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목소리는 순식간에 죽죽 가지를 치며 사방에서 불꽃처럼 팡팡 터진다.

    ‘부케, 부토니에 자동차 꽃 장식 그런 것도 필요하면 다 해 드리고요. ……결혼기념일에 꽃다발하고 케이크도 보내 드리고요…….’

    너는 아무 소식도 받지 못할 것이다. 이제 와서 너를 자극하는 것은 현명한 일도, 옳은 일도 아니니까.

    ‘생일, 세례일, 새해 첫날, 밸런타인데이, 블랙 데이, 빼빼로 데이, 크리스마스, 송년 퐈리, 신년 퐈리 그런 거 전부 준비해서 축하해 드리고요…….’

    ‘초상화 기차게 뽑아서 팬아트로 조공하고요. 외부 활동 하실 일 있으면 적금 깨서 밥차 조공도 하고요. 베이킹 배워서 케이크, 쿠키, 초콜릿 조공 바치고요.’

    ‘인터넷에 안티 생기면 좌표 찍고 떼로 달려가서 다 밟아 버리고요. 아저씨 골치 아프게 하는 사람 있으면 그 집 앞에 몰려가서 피켓 들고 시위하고 대문에 썩은 계란이랑 토마토랑 던지고요…….’

    신이 나서 주워섬기는 너의 목소리에는 눈부신 생명력이 넘쳐흘렀다.

    네가 발의 족쇄를 풀고 하늘로 날아오를 때, 나는 마음껏 축복해 주고 싶었다. 아, 그래. 그때도 선물을 들고 가겠다고 했었던가.

    ‘선물, 제가 원하는 거 말해도 돼요?’

    ‘누드모델…… 한…… 번만 해 주세요, 아저씨.’

    “흐으…….”

    이 빌어먹을 눈물이 왜 멈추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이원은 치를 떨었다.

    내 결정은 옳고 합리적이다. 파멸을 피했으니 감사해야 맞고, 기뻐해야 맞다. 백번을 생각해도 이렇게 슬퍼할 일은 절대 아니다.

    그러니까, 나는 괜찮다. 괜찮아야 마땅하다.

    그래서 이원은 입을 틀어막고 오래오래 엎드려 있었다.

    * * *

    우연은 자신이 양극성 장애나 우울증 따위가 아니라 치매에 걸린 게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많이 슬프고, 많이 아프고, 눈물에 젖어서 아무 짓도 못 할 줄 알았는데, 하루하루는 너무나도 멀쩡하게 돌아갔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은 일주일 전 같았다.

    시간이 흘러가는 감각도 없이 모든 것을 너무 쉽게 잊었다. 친구들과 같이 어울려 다니며 수다를 떨고 컵라면을 먹고 유튜브를 보았는데 그게 어제 일인지 한 달 전의 일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수업 따위는 기분이 내키면 들어가고 안 내키면 빼먹고 놀았다.

    아저씨와 함께 지내던 시간에 대해선, 아예 기억의 셔터를 내려 버린 듯했다. 전생의 일이었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대신 싱싱한 감정이나 날카로운 감각이라는 셔터도 같이 내려진 것 같았다. 뭘 해도 심드렁했다. 기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고, 심지어 배도 거의 고프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 의욕도 없어졌다. 그렇게 미친 듯이 몰입할 수 있었던 게 거짓말 같았다. 연필선 하나 긋기도 싫고, 구도를 잡거나 구상을 하기도 싫었다. 너무너무 싫었다. 동그라미 하나라도 억지로 그려야 한다면 차라리 손목을 잘라 내고 싶을 정도였다. 어떻게 일주일 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고 그 큰 그림들을 그릴 수 있었는지, 진짜 미쳤나 싶을 지경이었다.

    아빠는 주변에서 얼쩡대지 않았다. 당연히 얼쩡댈 수 없을 것이다. 지금 ‘빵’에 처박혀 있으니까!

    그날 미술관에서 현행범으로 잡혀간 아빠는 얼마 후 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은 지지부진 질질 끌다가 이듬해 봄에야 1년 3개월 실형이 떨어졌다.

    “이런 건 보통 훈방이나 사회봉사, 끽해야 벌금형, 아주 세게 나와야 집행 유예야!”

    “세상천지에 따귀 한 대 때렸다고 초범에 금고형 때리는 등신 판사는 없어.”

    “난 피해자 아빠라고! 당연히 정상 참작이 되지!”

    주변의 말만 믿고 자신만만하게 큰소리치던 아빠는 큰 충격을 받았다. 재판정에서 큰 소리를 치며 난동을 부렸다고도 들었다.

    예상외로 형량이 세진 이유는 아저씨와 홍연 아저씨에 대한 폭행 말고도, 그동안 엄마와 우연에게 저질렀던 짓들도 다 같이 묶여 들어갔기 때문이라 했다. 쉼터에서 찍힌 영상과 녹취록도 모조리 증거로 제출되었고, 정신과 상담과 진료 기록, 진단서도 올라갔다. 딸에 대한 습관적인 성추행, 접근 금지 명령을 위반했던 일, 딸을 후원하던 재단의 이사장을 이유 없이 전치 8주에 이르도록 폭행한 것이 ‘빵에 처박히는 데’ 큰 역할을 한 모양이었다.

    우연은 이 로또 같은 행운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일로 금고형이 나온다는 게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드물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아저씨가 뒤에서 법적으로 가능한 수단은 다 동원했을 거라 짐작했지만, 확인할 수는 없었다. 회의실에서 나온 이후, 우연은 아저씨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고, 목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아빠가 잡혀간 후, 엄마는 아빠를 풀어 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탄원서를 넣지 않으면 아빠가 출소한 다음에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했을 게 뻔했다. 하지만 우연은 와들와들 떨면서도 아빠를 꼭 처벌해 달라는 탄원서를 썼다. 아저씨의 노력을 헛되이 하고 싶지 않았다.

    경찰서에서 만난 엄마는 그 말을 듣자마자 멱살을 움켜잡고 고함을 질렀다.

    ‘미쳤니? 너 미쳤어? 당장 풀어 달라고 탄원서 써! 너 정말 죽고 싶어?’

    ‘엄마. 그딴 탄원서 써도 어차피 똑같아! 감방에서 나오면 다시 엄마도 패고 나도 패고 죽도록 팰 거야!’

    우연은 악을 쓰며 고함을 질렀다. 이 상황에서도 석방 탄원서를 쓰라는 엄마가 이해는 됐지만, 또 한편으로는 극심하게 미웠다.

    탄원서를 아무리 감동적으로 써도 아빠는 반성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나와 엄마, 아저씨에게 이를 득득 갈며 해코지를 하려고 할 것이다. 자신이 전과자가 된 이유를 어떻게든 만들어야 할 테니까. 남을 원망할 이유를 만들어 내는 건, 아빠가 가진 천부적인 재능이었다.

    그러면 차라리 아저씨의 말대로 하는 게 낫다. 아빠가 때리면 감옥에 처넣고, 나와서 또 때리면 또 처넣고, 또 처넣고, 또 처넣고. 반복될수록 감옥에 처박혀 있는 기간은 점점 길어질 것이고, 처박혀 있는 동안은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혹은 내 흔적을 지우고 잠적할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은 아저씨가 간신히 만들어 준 인생의 짧은 방학이었다. 죽음의 사막을 횡단하던 나는 아저씨의 도움으로 난생처음 오아시스를 만나 그늘에서 잠시 쉬는 중이다.

    물론 작은 오아시스나 짧은 방학 따위로는 인생이 헬이라는 사실 자체가 변하지는 않는다.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조건이 있었다. 딱 한 가지, 아주 중요하고 결정적인 조건.

    그것은, 아빠의 죽음이다.

    히, 히히. 우연은 얼빠진 얼굴로 한참 웃었다. 물론 하느님은 이런 못된 기도는 들어주지 않으실 것이다. 아빠는 오래 살 것이다. 내가 죽은 다음에도 100년 정도 더 살지도 모른다. 히, 히, 히히히. 아빠가 없는 세상을 상상하면 마약에 취한 것처럼 행복해졌다가, 이성을 찾으면 바로 진창으로 동댕이쳐졌다. 원래부터 진창에 구르던 것보다 높은 곳에서 진창으로 떨어지는 것이 훨씬 아팠다.

    우연은 아저씨가 선물해 준 안식기를 그렇게 몽롱하니 흘려보냈다. 정 관장님은 딱 선을 지켜서 할 일만 했다. 근황을 체크하고, 건강 여부를 확인하고, 돈을 보내 주었다. 해 달라는 게 있으면 두 번 묻지도 않고 해 주었다. 심지어 이유조차 묻지 않았다.

    애석하게도 우연은 하고 싶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뇌 속이 하얀 모래로 두껍게 뒤덮인 듯한 기분이었다.

    ― 우연아, 엄마야.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심장이 크게 조여들었다. 낯선 번호로 걸려 온 전화는 받는 게 아니었는데. 아빠가 감옥에 있다고 방심한 게 실수였다. 반사적으로 끊으려 하자 엄마가 급하게 울부짖었다.

    ― 우연아, 끊지 마! 할 말이 있어! 1분만!

    잠시 망설였다. 바뀐 번호를 어떻게 알아냈는지 모르겠다. 지금 접근 금지 기간 아닌가? 아, 제기랄. 입술을 깨물었다. 정 관장님이 연장하는 걸 놓쳤나? 아니면 그딴 거 무시하고 그냥 전화한 건가? 우연이 혼란스러워하는 동안, 엄마는 전화기를 붙잡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귓가에서 오리가 꺽꺽대는 것 같았다. 우연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울고 있는 여자는 자신이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았다.

    “왜 울어, 엄마?”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었다. 엄마는 대답 대신 엉뚱한 말을 했다.

    ― 우연아, 엄마 이혼 소송 중이야. 네 아빠가 감옥에 있어도 이혼 소송은 된대. 이런 좋은 기회가 어디 있니.

    “어? 어…….”

    놀라웠다. 엄마에게 그런 용기가 남아 있는 줄은 몰랐다. 혹시 누가 옆에서 도와주고 있는 걸까? 기뻐해야 할까? 힘내라고 해야 할까? 괜찮으냐고 해야 할까? 엄마가 이혼이라니, 머리가 허옇게 물드는 것 같다. 우연은 더듬더듬 물었다.

    “호, 혹시…… 세경에서 소송 도와줬어? 변호사…… 같은 거?”

    ― 어? 어떻게 알……. 아니야, 나 혼자 했어! 도와주긴 누가 도와줘!

    엄마의 목소리가 확 높아졌다. 우연은 눈썹을 찌푸렸다. 엄마의 반응을 보니 틀림없는 것 같다. 설마 아저씨가 이런 것까지 뒤에서 몰래 도와주셨을까? 나를 생각해서?

    우연이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자, 엄마가 급하게 말을 돌린다.

    ― 이혼 판결 나면, 바로 한국 뜰 거야. 외국에 가서, 네 아빠 모르는 데서 숨어 살 거야.

    “어디?”

    ― ……어디든.

    잠시 망설이던 엄마는 결국 행선지를 숨겼다. 충분히 이해했다. 아빠에게 내용이 흘러 들어갈까 봐, 혹은 자식이라는 무거운 꼬리가 달릴까 봐. 나중에 자리 잡히면 연락을 하겠다거나 하는 입에 발린 말도 없었다.

    ― 너도 이제 다 컸으니 앞가림 똑똑히 하고 살아. 예전엔 스무 살만 돼도, 부모 봉양하고 돈 벌고 애들 줄줄이 키우며 살았어.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몸은 어떤지, 밥은 잘 먹는지, 엄마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두어 달 후, 엄마는 한 번 더 전화했다. 드디어 이혼 소송이 끝났다는 소식을 전하며, 엄마는 우는 대신 짧게 웃었다. 네가 다 커서 양육권을 가지고 싸울 일이 없어 다행이라고 했다.

    희한했다. 엄마는 정말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구나. 엄마는 정말 아빠한테 벗어날 수 있었구나. 생각해 보면 엄마하고 아빠는 원래 남이었다.

    하지만 우연과 아빠는 남이 아니었다. 이건 하느님도 부처님도 해결할 수 없는 저주였다.

    나도 외국에서 숨어 살면 괜찮을까? 뭐 해서 먹고 살지? 엄마는 그래도 어릴 때 미국 유학을 했지만 나는 영어 한마디 못 하는데?

    우연은 한국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미국 시골이나, 아마존 정글이나, 아프리카 한복판 이름도 모를 나라나, 그린란드 같은 곳에서 살아가는 자신을 상상해 보았다. 말도 안 통하고 돈도 한 푼 없이 그런 곳에 숨어 살면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한국에서 살 때보다 덜 위험할 것 같진 않았다.

    우연은 ‘조금만 기다려, 엄마가 자리 잡으면 너 데리러 올게.’라는 말이 나오기를 잠시 기다려 보았다. 혹시라도 그러면 고민이라도 해 볼 것 같았다. 물론 엄마는 끝까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아저씨에게 부탁하면 어떨까. 아저씨, 저 외국에 숨어 살게 해 주세요. 아마존, 아프리카, 그린란드 같은, 아빠는 절대 찾아오지 못할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숨어 살게 해 주세요, 하면.

    간절히 부탁하면, 아저씨는 끝까지 외면하지는 못할 것이다, 적어도 엄마에게 빌붙는 것보다 훨씬 안전하고 편안할 것이다……, 하는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우연은 자신의 뻔뻔한 주둥이를 찢어 버리고 싶었다.

    “잘 가, 엄마. 외국에선 아빠 같은 이상한 사람 만나지 말고 혼자 편히 살아.”

    우연은 덤덤하게 인사했다. 엄마와의 마지막 대화치고는 지나치게 건조했지만, 우연은 더 이상 감동적인 말을 떠올릴 수 없었다. 엄마의 격앙된 목소리가 터졌다.

    ― 외국에 남자 만나러 가는 줄 아니? 누가 남자한테 환장한 줄 알아?

    “…….”

    ― 그리고, 내가 누굴 만나서 어떻게 살든, 네가 무슨 상관인데? 너 때문에 이혼 안 하고 버텼다가 인생 작살났는데 엄마 고마워, 엄마 미안해, 그런 소리는 안 하고 어디서 그따위 개소리야. 네가 엄마 인생 손해 배상이라도 해 줄 거야?

    김현주 여사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우연은 그동안 마음에 소중히 간직했던 고백을 엄마에게 할 수 있었다.

    “무슨 소리야. 나도 엄마 딸로 태어나서 인생 개작살났잖아. 둘이선 재미라도 봤지, 나는 무슨 재미 봤는데? 나야말로 엄마한테 손해 배상 처받고 싶은데 어디 내 앞에서 이빨을 까.”

    엄마는 울기 시작했고, 우연은 참지 않고 웃었다.

    아빠의 출소일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었다. 하루하루는 너무 긴데, 1년 3개월은 우습게도 짧았다.

    아빠가 나오면 졸업이고 나발이고 어디로든 도망쳐서 숨어 살아야지. 어차피 접근 금지 기간이 끝나면, 서림예대는 가장 위험한 장소가 될 수밖에 없었다. 졸업은 글렀으니 돈이나 벌자. 어떻게든 되겠지, 또 잡히기야 하겠어, 죽기야 하겠어, 끽해 봐야 죽겠지. 미래가 없는 것처럼 사는 것도 그럭저럭 할 만했다.

    우연은 내일을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그날그날을 최대한 즐겼다. 옥상, 주차장 같은 곳에 멍하니 앉아 천금 같은 시간을 마음껏 낭비했다. 돈 한 푼 없는 사람들이 왜 빚까지 내 가며 흥청망청 퍼마시고 노는지 알 것 같았다.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그러는 것이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친구들은 과제에 미쳐 가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학교 근처에 아예 공동 작업실을 하나 마련해 놓고, 밤이고 낮이고 폐인처럼 처박혀서 과제에 몰두했다. 우연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사람에게 학점 관리나 취업용 포트폴리오 관리를 하라는 건 개소리였다.

    방학 동안은 장학관에서 죽은 듯 지냈다. 장학관은 아저씨의 집과 아주 가까웠지만, 아저씨는 단 한 번도 그곳에 들르지 않았다. 전화번호는 알지만, 전화를 할 수는 없었다. 우연은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면 하얀 천장을 향해 ‘아저씨.’ 하고 속삭이듯 불러 보았다.

    ‘왜, 무슨 일이니?’

    낮고 부드러운 대답이 들리는 것 같았다. 얼굴도 목소리도 여전히 생생하다. 우연은 그동안 모아 두었던 재미있는 이야기도 늘어놓고, 뒷담화를 까 대기도 했다. 하, 아하하하. 귓속에서 감도는 아저씨의 웃음소리가 달콤하다. 생각해 보면 아저씨의 저 웃음소리가 좋아서 속도 없이 많이 떠들어 대긴 했다.

    “아저씨, 저는 이제부터 1년 3개월, 그러니까 457일 동안 완벽한 자유예요. 고맙습니다.”

    “아저씨, 지금 세경건설에서 아파트 짓는 거, 기사에 나왔어요. 공사비만 1조 5천억이 훨씬 넘는다면서요?”

    “아저씨, 그 많은 돈을 벌면 다 어디에 쓸 거예요?”

    우연은 아저씨라면 어떻게 대답할까, 혼자 열심히 상상했다. 만약 내가 환쟁이 말고 천재 이과생으로 태어났다면 ‘한이원 아저씨’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을 텐데. 아저씨의 성격과 말버릇과 아이큐를 반영해서, 가장 아저씨다운 대답이 나오는 프로그램으로. 그러면 컴퓨터 앞에서 종일 수다를 떨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쉽게도 우연은 천재 이과생이 아니라 그저 그런 환쟁이여서, 대답 없는 허공에 대고 혼자 오래오래 떠들어야 했다.

    “아저씨, 아빠가 나올 때까지 300일 남았어요.”

    “아저씨, 아빠가 나올 때까지 200일 남았어요.”

    “아저씨, 아빠가 나올 때까지 150일 남았어요.”

    갓 고3이 된 수험생들처럼, 우연도 달력을 보며 날짜를 하루하루 세기 시작했다. D―데이에 대한 공포는 수험생들보다 훨씬 컸지만, 어차피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젯밤에 비가 와서인지, 춘삼월이라는 말이 우습게 영하의 한파가 몰아쳤다. 그래도 우연은 반가웠다. 하늘을 뒤덮고 있던 뿌연 먼지가 깨끗하게 걷혔다. 기숙사 창을 열자 새파란 하늘이 눈앞으로 들이닥친다. 코끝이 쨍, 하고 매웠다. 우연은 서슬 푸르게 날이 선 하늘을 쳐다보며 여느 때와 같이 또박또박 말했다.

    “아저씨, 이제 드디어 100일 남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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