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누드-24화 (24/47)
  • 24. 적절한 인사말

    “어? 어라? 가만있어 봐. 이게 뭐야, 이게?”

    컴퓨터 앞에서 달그락달그락 맹렬히 검색을 하던 형식은, 움직임을 멈추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검색 중에 걸린 문장 하나가 눈앞에서 깜박대고 있었다.

    「……전시회를 방문한 관람객들은 <사랑>(진우연, 19)과 <붉은 수국과 분홍색 딸기 무스케이크>, <뫼르소>를 인상적인 작품으로 꼽았다…….」

    진우연.

    형식이 인터넷을 샅샅이 뒤지며 찾고 있는 딸의 이름은 생뚱맞게도 ‘주말에 가 볼 만한 전시회’라는 기사 속에서 빼꼼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마우스를 움켜잡고 기사의 내용을 찬찬히 확인했다.

    신인 화가, 만 19세, 이원미술관 신인 화가 공모전, 이원미술관 전시 중.

    이를 지그시 물었다. 동명이인일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틀림없다. 그는 옆에 놓인 소주병을 입에 대고 꿀꺽꿀꺽 들이켰다.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다. 형식은 화면 앞으로 다시 고개를 바짝 들이밀었다.

    형식은 오래전부터 딸아이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어려서 경기를 한 후부터 머리가 살짝 이상해진 듯했다. 밤마다 오줌을 싸고, 묻는 말에 대답도 못 했다. 다른 집처럼 귀여운 애교로 아빠를 살살 녹이는 딸이란 꿈나라 이야기였다.

    학교 졸업하면 체육관에서 일이라도 가르치며 데리고 있으려 했더니, 시골구석에 박혀 있는 이름도 모를 예대에 합격했단다. 돈을 못 준다 했더니 마감일에 500만 원이란 거금을 구해서 바로 등록을 하고 왔다. 형식은 분노로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뭐? 처음 만난 아저씨? 지랄 염병. 채팅 앱에서 만났겠지.”

    씨발,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어디서 이상한 짓부터 배워서!

    전에도 비슷한 짓거릴 한 적이 있었다. 하필 자신도 회원 가입이 된 곳이라 경찰서에 신고했다가 결국 취하하고 말았는데, 그때 그 빌어먹을 뿌리를 확실히 뽑아 놓았어야 했다.

    하지만 일은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딸은 도망쳤고, 500만 원을 줬다는 놈은 무혐의로 풀려났다. 담당 형사와 서장이 절절매며 사과했다는 환장할 소식만 들렸다. 위치 추적 앱으로 쉼터를 찾아냈더니 이번엔 복지사란 년이 나서서 만날 수 없다고 못을 박는다.

    대한민국은 진심으로 미친 나라다. 가정 교육을 엄하게 했다는 이유로 애를 빼앗겨야 한다니. 왜 애들 말만 믿고 이래! 애들이 얼마나 거짓말을 잘하는데.

    “일단 우연이부터 찾아오고, 그 개새끼를 잡아서 완전히 죽여 놔야 해.”

    일단 콩밥부터 먹이고, 자식새끼, 마누라, 회사에도 죄다 알리고 인터넷에도 퍼뜨려 아예 매장을 시켜야지. 아니 그 전에, 그 새끼 낯짝하고 좆대가리부터 시멘트 바닥에 갈아 버려야지. 그 정도는 격분한 아버지의 우발적 폭행으로 충분히 정상 참작이 될 것이다. 더욱이 초범이면 집행 유예 이상은 절대 안 나올 것이다. 주변에서 얻어들은 정보로는 분명 그랬다.

    잡히기만 해라, 잡히기만.

    그는 방학 내내 우연의 거취를 파악하려 안간힘을 썼다. 전화번호도 바뀌었고, 명의까지 돌렸는지 꼬리털 하나 찾아낼 수 없었다. 형식은 딸의 이름을 매일 검색해 보고, 개학 후에는 가끔 학교로 내려가 주변을 얼쩡거렸다. 어차피 24시간 기숙사에만 처박혀 있을 수는 없겠지. 접근 금지 거리만 잘 지키면 경찰이든 검찰이든 찍소리도 할 수 없을 테니까.

    그리고 그의 놀랄 만한 인내와 끈기는 결국 열매를 맺었다.

    「진우연, 만 19세, 이원미술관, 전시 일정, 작가와의 만남」

    검색에 걸려든 낱말들이 눈앞에서 반짝였다.

    * * *

    미술관으로 찾아간 형식은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정말 이년은 정신이 나갔다. 아무리 발랑 까지고 뒷구멍으로 호박씨를 까고 다녀도, 어떻게 홀딱 벗은 제 몸을 그려서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을까. 그것도 여자애가, 이렇게 얼룩덜룩 멍든 꼴로, 미친 게 아니고서야.

    옆에 있는 두 개의 인물화는 그나마 누드는 아니었다. 모델은 조각상처럼 잘생긴 남자였는데, 반질반질 지나치게 잘생겨서 실존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연예인 아닐까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이름까지는 알 수는 없었다.

    눈썹을 천천히 우그렸다. 세 개의 그림이 기묘하게 엮여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볼수록 찜찜했다.

    불쾌감과는 별개로, 딸은 그림 솜씨가 제법이었다. 얼핏 보면 사진이라 해도 믿을 만큼 잘 그렸다. 그래서 형식은 딸의 그림이 팔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사진이 있는데 왜 구태여 사진 같은 그림을 사겠는가. 그는 미술 쪽으로는 아는 바가 없었고, 하이퍼리얼리즘 사조에 대해서는 더더욱 아는 바가 없었다.

    형식은 체육관을 직원에게 맡겨 둔 채 매일 미술관으로 출근했다. 미술관 입구나 로비, 딸의 그림 근처에서 얼쩡거리며 우연이 왔는지 살폈다. 제 그림을 걸어 두었으니, 적어도 한두 번은 와서 둘러보지 않을까 싶었고, 운 좋게도 이곳은 접근 금지 구역이 아니었다.

    형식은 우연의 그림 앞에 몰려 있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관람객 좋아하시네. 저것들은 점잖은 척하면서 딸아이의 알몸을 샅샅이 구경하는 것뿐이다. 아주 망신살이 뻗친다. 포르노 배우도 아니면서 이 무슨 미친 짓이지. 휘발유를 가져와 그림 앞에 쏟아 놓고 불을 싸질러 버리고 싶다.

    “어, 가, 가만. 저 사람…….”

    토요일 오후, 기둥 뒤의 구석진 의자에 앉아 있던 형식은 관람객 한 명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며칠 전, 미술관 문 닫을 때쯤에 봤던 사람이 또 왔다. 실내에서 큼직한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서 기억이 났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뒷모습이 어딘가 낯이 익다. 모델처럼 키가 크고 자신만큼이나 어깨 근육이 잘 잡힌 사내. 어디서 봤더라? 그가 잠시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순간 형식은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맙소사, 저 사람은…….”

    미끈한 콧날과 반듯한 턱선, 붉고 단정한 입매가 그림 속 남자와 똑같았다.

    “가만, 저 그림 모델인가? 정말 연예인……인가? 그림이 있다는 거 알고 온 건가?”

    아니다. 연예인 같지는 않다. 보수적인 느낌의 슈트로 몸을 휘감고 허리를 곧게 편 모습에선 자연스럽게 몸에 밴 품위가 느껴지고, 기질이 섬세한 예인이나 인기로 먹고사는 종류의 사람에게선 쉽게 보이지 않는 단호함과 묵직한 힘이 두드러진다. 그래서 젊어 보이는 외관에도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부하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항상 따라다니는 걸 보면, 아마도 한자리하는 공무원이거나, 규모가 좀 되는 사업체를 운영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혹시 저 사람이 자기 사진을 우연이에게 개인적으로 준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멋대로 자기 얼굴을 그려서 팔도록 놔둘 리가 없잖아?

    형식은 눈을 부릅뜨고 그 사내의 뒷모습을 관찰하다 갑자기 입을 벌렸다.

    “아! ……혹시 저 사람이?”

    맙소사. 드디어 기억이 떠오른다. 그래, 어디서 본 거 같더라니. 경찰서에서 스치듯 보았던, 등을 돌리고 앉아 조사를 받던 그 뒷모습하고 체형이 똑 닮았다. 순간 <사랑>이라는 딸의 자화상 제목이 화살처럼 들어와 박혔다.

    “……씨발.”

    짐작은 점점 확신으로 굳어졌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무작정 행동을 취할 수는 없었다. 형식은 계속 그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그 사내는 사람들이 오가는 홀 한가운데서 돌처럼 굳은 채 딸의 그림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 어?”

    형식은 저도 모르게 엉거주춤 일어났다. 낯익은 체구의 작은 여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머리를 단발로 깎은 딸아이가 천천히 걸어 키 큰 사내 옆에 나란히 선다.

    형식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주먹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씨발, 내가 뭐랬어, 역시 아는 사이였잖아.

    딸아이는 한참 동안 키 큰 사내의 곁에 서 있었다. 사람이 많이 오가는 중에 두 사람이 서 있는 공간은 외따로 뚝 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딸아이가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다. 작은 머리가 툭, 사내의 팔에 닿는다. 사내의 몸이 전율하듯 짧게 떨렸지만, 딸을 내려다보지는 않는다. 별다른 인사조차 없다.

    딸아이가 손을 내민다. 사내는 꼼짝하지 않는데, 아이는 기어이 사내의 손을 꼭 움켜잡는다. 딸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왜 저러지? 혹시 울고 있나? 형식은 주먹을 피가 나도록 움켜쥐었다.

    이제는 확신할 수 있다. 저 자식이다. 500만 원에 딸아이를 꾀어 가출하게 한 개자식이 저 그림의 모델이었다.

    “……따라와라.”

    처음 들어 본 사내의 목소리는 낮고 어두웠다. 사내는 몸을 돌려 전시실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고, 딸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가릴 생각도 없이 사내의 뒤를 따라 종종 뛰었다. 황급히 따라간 형식은 두 사람이 긴 로비를 지나 복도 끝에 숨어 있는 직원용 엘리베이터로 들어가는 것을 발견했다.

    형식은 옆의 계단으로 정신없이 뛰어 올라갔다. 분노로 눈앞이 온통 희었다. 엘리베이터는 꼭대기 층인 7층에 멈춰 있었다. 하지만 7층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체 어느 방에 처박힌 거야?”

    7층은 전시실이 없었고 큰 회의실과 사무실, 통제실 같은 곳만 있었다. 그는 사무실 문을 하나하나 열어 보기 시작했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사무실 대부분은 불이 꺼진 채 문이 잠겨 있었다.

    “아. 저긴가?”

    한참 헤맨 끝에, 복도 가장 안쪽에 있는 문 하나를 발견했다. 그곳의 창을 가리고 있는 버티컬 사이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기 직원인가? 좋아, 넌 지금 나한테 현행범으로 걸린 거야. 형식은 이를 악물었다.

    “씨발, 넌 오늘 죽었어.”

    형식이 이를 갈며 방을 향해 다가가는 순간, 두 사람이 달려와 팔을 낚아챘다. 그중 한 사람은 키 큰 사내 근처에서 얼쩡대며 따라다니던 말라깽이 안경잡이였다.

    “당신 뭡니까? 누군데 여기까지 와서 이러십니까?”

    “여긴 직원 외 출입 금지 구역입니다!”

    “놔, 이거 놔! 지금 내 딸이 이 방으로 끌려 들어갔어!”

    순간 안경잡이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당신이 진우연 학생 아버지라고? 이봐요! 당신, 지금 딸한테 접근 금지 상태 아냐?”

    “얼레? 당신이 우리 애는 또 어떻게 알아?”

    안경잡이 놈의 얼굴이 허옇게 변했다. 형식은 마음이 급해서 더 따지는 대신 두 사람의 팔을 힘껏 뿌리치며 으르렁거렸다.

    “꼬우면 경찰 불러! 여긴 접근 금지 장소 아니잖아. 이거 안 놔? 죽여 버린다!”

    형식은 다시 팔을 붙드는 마른 사내에게 바로 주먹을 휘둘렀다. 별로 힘을 준 것 같지도 않은데 그 말라깽이는 안경이 날아가고 코피가 터졌다. 그가 나동그라지자 옆에 있던 반 대머리 사내는 급히 뒤로 물러나 전화기를 든다. 얼른 전화기를 잡아채서 발로 밟아 버렸다. 대머리 놈은 황급히 뒤로 빠져 복도 끝으로 꽁무니가 빠지게 달려 나간다.

    겁날 건 없다. 지금 여기 들어간 새끼는 이제 끝이다. 이렇게 어린애랑 놀아나던 이야기가 직장이나 마누라에게 들어가면 꼴이 어떻게 될까. 부하 직원의 코피나 전화기는 알아서 무마시켜야 할 것이고, 내 앞에서 대갈통을 갈아 가며 빌어야 할 것이며, 집 안을 탈탈 털어 합의금도 내놓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연이 이년을 당장 끌고 나와서 차근차근 얘기해 봐야 한다. 딸아이는 예전부터 겁이 너무 많고 소심해서 아빠의 애정과 교육 방식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잘 알아듣게 차근차근 이야기하면 된다. 차근차근.

    쾅, 쾅, 쿵쾅쾅!

    형식은 잠긴 방문을 그대로 발로 걷어찼다. 네댓 번의 격한 발길질을 버틴 후, 문이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누구신지요.”

    전시장에서 보았던 키 큰 사내가 차분한 목소리로 묻는다. 선글라스를 벗은 그는 그림보다 차고 무거운 느낌이었고, 딸의 앞을 막아서는 태도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침착했다. 딸아이는 그의 뒤에서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발발 떨고 있었다.

    책상 위의 명패를 본 형식은 아연해졌다. 뭔가 잘못된 것 같다.

    “한이원…… 재단 이사장? 저거 당신이야? 당신이 여기 이사장이야?”

    “먼저 물어본 건 이쪽입니다. 당신이 누군지, 그리고 왜 이런 행패를 부리고 있는지부터 먼저 말씀해 주셔야겠습니다.”

    점잖은 말투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목소리엔 푸르게 날이 서 있었다. 사내들끼리의 힘겨루기에 익숙한 놈이라는 감이 왔다. 다행히, 형식은 저 점잖은 척하는 개새끼의 큰 약점을 쥐고 있었다.

    “이 씨발 새끼가, 말이면 다야! 내 딸한테 개같은 짓을 다 해 놓고 뭐? 왜 이러냐고?”

    “우연 학생 아버지라면…… 진형식 씨 되십니까?”

    “내 이름은 또 어떻게 알고 자빠졌지. 진우연 너 이리 안 와?”

    하지만 우연은 말을 듣기는커녕 그 사내의 등 뒤에서 몸을 잔뜩 웅크린다. 화가 나서 머리가 폭발할 것 같았지만, 형식은 최대한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달랬다.

    “우연아. 엄마는 지금 너 때문에 죽기 일보 직전이야. 네 얼굴 한 번만 보고 죽겠다고 매일 헛소리야. 이대로 죽으면 그건 네가 죽인 거나 마찬가지야. 어떻게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라는 게 이렇게 매정할 수가 있어, 응?”

    읍소는 통하지 않았다. 우연은 새파란 얼굴로 달달 떨면서도 꼼짝하지 않는다. 형식은 앞을 막아선 사내를 밀치고 딸을 끌어내려다 몸이 뒤로 확 밀렸다. 그는 생각보다 힘이 셌고, 형식은 심한 굴욕감을 느꼈다. 바로 사내의 멱살을 잡았다.

    “이 더러운 새끼, 너 500만 원 그놈 맞지? 그때 경찰에 돈 처발라서 입 막았냐? 어린애한테 돈 몇 푼 쥐여 주고 좆질할 때는 좋았지? 씨발, 그게 언제까지 통할 것 같아?”

    “아빠! 아니야! 하지 마!”

    “꼴에 여기 이사장이야? 잘됐어, 아주 잘됐어. 내가 네 마누라, 애새끼, 신문사에 빵빵 터뜨려 줄 테니까. 요새 잘나가는 새끼들, 여자 문제로 개나 소나 줄줄이 빵에 처박히고 매장당하는 거 몰라?”

    그는 놀라지도 않고 대답도 하지 않는다. 그저 형식의 손목을 비틀어 멱살 잡힌 것을 풀더니, 손목을 꽉 잡은 채 우연을 돌아보며 조용히 말할 뿐이었다.

    “진우연. 아버지하고 얘기할 게 있으니 좀 나가 있자. 복도에 홍연 아저씨 계시니까 잠시 다른 데 가 있어. 염려 말고.”

    자신의 말을 깨끗하게 무시하는 차분한 목소리. 어찌나 열이 뻗치는지 저절로 주먹이 올라갔다. 동네에서 쇳덩이라고 소문난 주먹이 붕,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갈랐다.

    뻑.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키 큰 사내의 턱이 옆으로 비스듬히 꺾이며 몸이 휘청거렸다. 하지만 그에게 붙잡힌 다른 손목은 쇠 집게에 물린 듯 꿈쩍도 하지 않는다. 허둥지둥 도망치던 딸이 새된 목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아악, 아저씨! 아저씨 괜찮아요? 아빠! 아빠, 왜 이래! 아저씨, 아저씨!”

    “씨발 더러운 새끼야, 손 놔! 한 대 더 맞기 전에 손 놓으라고! 당장 뱃가죽으로 회를 쳐 버릴라……. 진우연! 어딜 나가! 당장 이리 와! 아빠한테 와…….”

    형식은 욕설을 퍼부으며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두 번째 주먹이 그의 턱에 꽂히기 전에 팔이 훅 꺾이더니 갑자기 몸이 붕 떠올랐다.

    “어? 어?”

    형식은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 상태로 허공에서 몸이 빙글 돌더니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헉!”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비척대며 황급히 일어나려는 순간 등이 구둣발에 밟혔다. 숨이 턱 막힌다. 낮고 써늘해진 목소리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남한테 함부로 주먹질하면 어떻게 되는지 학교에서 안 배우셨습니까, 우연 아버님?”

    그야말로 움쭉달싹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순식간에 제압당한 적은 처음이라 형식은 한참 동안 얼떨떨한 상태로 엎어져 있었다. 사내는 코피를 흘리던 직원이 우연을 밖으로 데리고 나간 것을 확인한 후 형식의 팔 하나를 등 뒤로 바투 꺾어 올렸다.

    “으악! 아악! 아아아! 사, 살려 줘!”

    “조용히 하세요. 딸이 듣습니다.”

    사내는 포켓치프를 꺼내 그의 목구멍으로 깊이 밀어 넣는다. 흐헉, 컥. 숨이 막혀 미친 듯이 발버둥을 치는데도 바위가 등을 눌러 대는 것 같아 꼼짝할 수 없었다. 컥컥대는 형식의 귓속으로 사나운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딸한테도 평소에 이런 식으로 주먹질을 하셨나 봅니다.”

    “쓰버 드르은 스끼, 적번흐증…… 훈증즐, 느, 누어어, 으으!(씨발, 이 더러운 새끼가 어디서 적반하장 훈장질이야, 놔! 놔! 으악!)”

    다시 팔이 비틀렸다. 관절이 튀어 나가기 직전에서야 딱 멈춘다. 히이이잇! 비명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을 만큼 아팠다. 이 허우대 좋은 새끼는 호신술 하나는 제대로 배운 게 틀림없었다.

    “쓰브, 애허그 무슨 드르은 즈으읏…….(씨발, 애하고 무슨 더러운 짓…….)”

    “제가 한 짓이라곤 아이가 한강 다리에서 자살하려던 걸 설득해서 살려 내고, 대학 학비와 생활비를 전액 후원해 주고, 당신이 망가뜨린 몸과 마음을 치료해 준 일밖에 없습니다. 이젠 공모전 당선을 축하해 줬다는 이유로 주먹질까지 당했으니 그 일도 추가해야겠군요.”

    그는 형식이 컥컥대는 것을 멈추고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린 후에야 입속에 틀어박힌 것을 빼 주며 말했다.

    “자, 제가 우연이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설명했으니, 이제 제가 왜 더러운 새끼란 말을 듣고 주먹질까지 당해야 하는지 설명 좀 해 주실까요?”

    “……이 더러운 새끼, 말은 또 청산유수네. 이런 뻔드르르한 말로 내 딸을 꾀었냐? 씨발, 채팅 앱에서 만난 거 모를 줄…… 으악, 아, 아악, 놔, 놓으라고!”

    짧은 코웃음이 머리 위에서 흩어졌다. 사내는 화를 내지도 않고 흥분하지도 않았다. 등에서 천천히 소름이 올라온다.

    “유감인데 완전히 잘못 짚으셨습니다. 저는 우연이를 그날 처음 만났고, 경찰서에서도 그걸 확인해 주셨습니다. 쉼터 복지사님 부탁으로 제가 운영하는 재단에서 우연이를 후원하기로 했던 게 전부입니다. 당신이 상상하던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고맙다는 인사는 못 하실망정 이 무슨 무례한 추측이신지.”

    씨발, 이런 새빨간 거짓말을. 형식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아까 우연이를 잡아서 이 새끼 앞에서 실토를 받아 냈어야 했는데. 딸은 겁이 워낙 많아 눈을 한번 부릅뜨기만 하면 제가 저질렀던 짓들을 줄줄이 실토하곤 했다.

    더 안 좋은 건, 이놈을 쌍방 폭행으로 몰아가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 자식은 자신의 공격을 기술로 방향만 바꾸어 제압했을 뿐, 지금까지 주먹 한번 지르지 않았다. 공격을 당하는 과정 중 일어난 순수 방어 행동, 정당방위의 까다로운 조건에 부합할 것 같다. 일이 좆같이 돌아간다. 형식의 목소리가 한풀 꺾였다.

    “저 빌어먹을 그림들만 봐도 네놈 새끼가 우리 딸애랑 얼마나 붙어먹었는지 훤히 보여. 내 눈이 옹이구멍인지 알아?”

    다시 짧은 비소(鼻笑)가 흩어졌다.

    “당신은 아버지에게 맞아서 시퍼렇게 멍든 아이의 몸을 보고 그런 짓을 할 생각이 듭니까? 머릿속이 얼마나 시궁창 같으면 그런 추잡한 상상부터 하게 됩니까?”

    “…….”

    “그나저나 우연 아버님. 이쯤 들으셨으면 형사, 민사 줄줄이 덮어쓰기 전에 얼른 무릎 꿇고 사과부터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명예훼손죄, 폭행상해죄, 기물손괴죄……. 제가 검사가 아니라 어떤 혐의가 더 쏟아질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뒤로 꺾여 올라간 팔의 각도가 점점 더 벌어진다. 입에서 거품이 부그르르 몰려나왔다.

    “이사장님!”

    “전무님, 전무님? 괜찮으십니까?”

    경비원들이 뒤늦게 요란한 발소리를 내며 쏟아져 들어왔다. 사내는 그제야 손을 떼고 몸을 일으켰고, 형식이 비척대며 일어나자마자 네 명의 경비원이 양쪽으로 달라붙었다. 이제는 반항할 수 없었다. 형식은 어지간한 싸움에서는 한 번도 밀려 본 적 없었지만 잘 훈련된 경호 직원 네 명과 싸우기엔 턱도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눈앞에서 딸을 놓치는 게 벌써 몇 번째인지, 화가 나서 머리가 터질 것 같다.

    “괜찮으십니까, 전무님.”

    조금 전 문 앞에서 만난 동그란 안경잡이가 쩔쩔매며 묻는다.

    “괜찮지 않습니다. 많이 아프네요. ……제기랄, 최 실장님도 다치셨습니까? 얼마나 많이 다치셨습니까?”

    목소리가 얼음처럼 차가워진다.

    “박원주 이사님 바로 호출하시고, 정 박사님께도 연락하세요. 치과 쪽도요. 전치 기간이 꽤 나올 것 같습니다. 최 실장님도 같이 진료받으세요. 아, 그리고 진형식 씨.”

    사내는 옷매무시를 바로잡고 허리를 곧게 편 후 몸을 돌렸다.

    “아무래도 금고 이상 실형을 피하실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사내의 언사는 여전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중했고, 형식은 대놓고 비웃었다. 미친 새끼, 딸을 끌고 간 놈에게 주먹질 한번 했다고 벌금형도 아니고 금고? 네가 미국 대통령쯤 되냐?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비웃으며 질질 끌려 나가는 그의 등 뒤로 짤막한 인사가 덧붙었다.

    “합의는 없으니 별도로 연락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 * *

    이원은 의자에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눈앞을 자욱하게 감싸고 있던 안개와 열기가 확 걷힌 기분이었다.

    ‘어린애한테 돈 몇 푼 쥐여 주고 좆질할 때는 좋았지?’

    ‘요새 잘나가는 새끼들, 여자 문제로 개나 소나 줄줄이 빵에 처박히고 매장당하는 거 몰라?’

    ‘저 빌어먹을 그림들만 봐도 네놈 새끼가 우리 딸애랑 얼마나 붙어먹었는지 훤히 보여. 내 눈이 옹이구멍인지 알아?’

    그의 비난은 정당하다. 이원은 그동안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밀어내고 있었지만, 속에서는 우연을 한껏 탐욕하고 있었다. 조금 전만 해도 한 걸음만 더 나갔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었다.

    그의 협박은 충분히 위협적이다. 이 관계가 언론에 흘러 나가면 틀림없이 이상한 형태로 왜곡될 것이고, 미현과의 거래는 크게 흔들릴 것이다.

    그리고 미현과 결혼을 하건 말건, 나와 우연은 여론의 집중포화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신이 내린 재능을 이제 막 세상에 드러내기 시작한 아이는 재능을 제대로 꽃피우기도 전에 온갖 루머와 추문으로 얼룩진 채 몰락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만약…….

    ‘사랑, 사랑하, 하지 않는 사람하고 무슨 결혼을 해요!’

    ‘아저씨, 사랑해요.’

    ‘……아저씨하고 섹스하고 싶어요.’

    이원은 뱃속에서 서리서리 똬리를 트는 목소리를 잠시 방치했다. 불가능한 일에 대한 가정법은 예나 지금이나 꿀처럼 달았다.

    저 말대로, 다른 문제들 따위는 모조리 덮어놓고, 회사고 나발이고 다 내버리고, 이 강렬한 욕구대로…… 우연이와 관계를 발전시키면?

    이원은 머리를 헤집으며 숨죽여 웃었다. 그랬다간 우연이는 정부라는 낙인이 찍힐 테고, 나는 우연이와 고등학생 때부터 더러운 짓을 해 왔다는, 저자가 만들어 낸 헛소문이 장하게 퍼질 것이다.

    헛소문을 만들어 내는 건 한두 명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헛소문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수천 명을 동원해도 역부족이다. 익명의 대중은 무죄 추정이 아닌 유죄 추정의 원칙을 신봉했고, 성과 관련된 루머는 파급력이 크고 오래 회자되므로 무마시키기가 가장 어렵다. 연예인이나 유명 인사의 추문이란 마음껏 씹어도 되는 공공재와 같으며, 익명의 마녀재판과 언론의 왜곡된 부추김에는 자정작용이 존재하지 않는다.

    저 비열한 자는 그것을 충분히 이용할 것이다. 그 건수로 평생 우연을 협박하며 단물을 빼먹겠지. 우연은 나를 어떻게든 보호하고 싶을 테니 협박에 굴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나는 우연을 위해 저자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게 다시 원점으로, 마포 대교 이전으로 돌아가는 거겠지.

    이원은 의자에 깊게 몸을 파묻은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사실 고민할 필요조차 없는 문제다. 이 문제에 대한 결론은 진작 나왔다. 나는 미현이와 결혼해야 하고, 내 손에 유일하게 남은 세경그룹을 확실하게 지켜야 한다.

    세경그룹은 아버지의 또 다른 자식이며 당신의 인생 자체이기도 했다. 거대한 회사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와 다름없다. 수만 명의 직원, 그에 딸린 가족들, 그들의 삶과 다시 연결된 다른 이들의 삶, 내가 최종적으로 선택하고 책임지기로 한 것은 무수한 삶으로 짜인 거대한 그물이었다.

    이원은 고개를 푹 수그리고 웃었다.

    그래. 내가 잠시 미쳤었다.

    그는 오랫동안 훈련해 온 대로 강렬한 열망을 누를 수는 있었으나, 인내는 여전히 끔찍하게 고통스러웠다.

    더 끔찍한 것은 이 고통스러운 인내가 결코 행복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끈적끈적한 신음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 나갔다.

    * * *

    우연은 와들와들 떨면서 회의실 벽에 귀를 바짝 갖다 붙였다. 아빠와 아저씨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모기 날갯소리처럼 들린다. 하지만 아무리 신경을 곤두세워도 내용은 잘 들리지 않는다.

    아저씨가 아빠를 순식간에 제압한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아빠는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힘이 센 사람이었다. 주먹에 잘못 맞으면 문자 그대로 죽을 수 있었다. 그런 아빠를, 세상 물렁하다고 생각했던 아저씨가 단번에 제압했다. 우연은 그렇게 비굴하게 엎어진 아빠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많이 놀랐지? 이것 좀 먹고 놀란 것부터 가라앉히자.”

    얼마나 기다렸을까. 아저씨가 들어와 우연의 앞에 무언가를 내려놓는다. 뜨거운 핫초콜릿 한 컵과 도넛 한 상자였다.

    ……뭐지?

    우연은 달달 떨면서 핫초콜릿을 받았다. 오래전 민트코코 카페에서 그랬던 것처럼 두 손으로 컵을 감싸 쥐자 손이 따뜻해지면서 마술처럼 떨림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때처럼 다시 눈시울이 아팠다. 핫초콜릿 색깔만 보면 눈물이 나오게 조건 반사가 걸린 것 같다.

    “얼른 먹어. 그래야 조금이라도 진정이 되지.”

    아저씨가 도넛 상자를 밀어 주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채근했다. 하지만 우연은 먹을 수 없었다. 하얀 초콜릿이 듬뿍 입혀진 도넛을 한입 물긴 했는데, 입안으로 단맛이 확 퍼지는 순간 갑자기 울음이 터졌다. 우연은 도넛을 물고 한참 끅끅거렸다.

    아저씨가 손수건을 꺼내 우연의 앞으로 가만히 내민다. 우연은 네 귀가 반듯하게 접힌 새하얀 손수건을 내려다보며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아까는 눈물을 직접 닦아 주셨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는구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머리 위로 사박사박 떨어졌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아저씨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 날 피해 다닌 것? 나와 입 맞춘 것? 날 두들겨 패서 밀어 버리지 않은 것? 욕구를 들킨 것? 아니면, 내 눈앞에서 아빠를 바닥에 엎어 버린 것? 대체 그중에서 아저씨가 잘못한 게 뭘까?

    하지만 지금 그것을 물어볼 순 없었다. 더 급하게 확인할 게 있었다.

    “아, 아저씨, 정말 아빠 고……소하실 거예요? 감옥에 넣으실 거예요? 합의 안 해 주실 거예요?”

    “왜? 합의해 주면 좋겠어?”

    “네. 꼭이요. 합의를 안 해 주면 아빠는 분명 해코지를 할 거예요. 정말 목숨 걸고 쫓아다닐 거예요.”

    우연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애걸했다.

    “아빠는 집요하고 무서운 사람이에요. 한번 찍은 사람한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복을 해요. 그래야 사람들이 함부로 못 한다면서요. 그래서 엄마도 저도 도망 못 가고 같이 살았던 거예요.”

    아저씨의 눈썹이 크게 꿈틀했다. 그는 한참 동안 우연을 내려다보더니 느릿하게 말했다.

    “그래서…… 도망 못 가고 계속 같이 살았다고?”

    “네.”

    “……너는 그래도 어른이 되자마자 바로 도망쳤잖아.”

    “그때야 어차피 죽을 생각이었으니까요.”

    우연은 아차 싶어 말을 멈췄다. 자신의 대답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의 허세’로 비쳤을까 봐 걱정스러웠다.

    “어차피 저, 저야 아빠 딸로 태어났으니 도망치다 죽어도 밑져야 본전이에요. 하지만…… 아저씨는 밑져야 본전도 아니고, 진형식 씨 딸로 태어난 것도 아니잖아요.”

    아저씨는 반박 한마디 없이 조용히 듣기만 한다. 아저씨는 기본적으로 남의 말을 잘 들어 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말하기 싫은 것을 이야기해야 할 때는, 다른 어른들처럼 말을 끊고 무슨 잔소리나 훈계라도 늘어놓았으면 싶었다.

    “그리고 저는 나중에 개명 신청도 하고, 아빠가 못 알아보게 성형 수술도 하고, 아빠가 모르는 깡시골에 꼭꼭 숨어 살 생각이지만, 아저씨는 세경그룹 대표님이잖아요. 저처럼 그럴 수 없잖아요. 그래선 안 되잖아요.”

    “평생 그렇게 쫓기면서 숨어 살 생각이라고? 그러면서 나한테 합의해 달라고?”

    아저씨는 평이하고 담백한 목소리로 물었다. 비난하거나 화를 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우연의 어깨는 점점 쭈그러들었다. 분하고 비참해서 땅을 파고 들어가고 싶었다. 나는 왜 우성희 이사의 딸로 태어나지 못하고 진형식 저 개새끼의 딸로 태어났을까.

    “아저씨, 우리 아빠하고는 최대한 안 얽히는 게 편해요. 아빠 같은 사람한테는 돈도 빽도 안 통해요. 조금이라도 분하고 억울하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보복을 해요.”

    “…….”

    “똥은 더러워서 피하지만 미친 개새끼는 무서워서 피하는 거예요. 친척들이 뭐라 하는지 아세요? 사람 하나 콘크리트에 파묻어서 인천 앞바다에 던질 깡 없으면, 형식이 새끼는 건드리면 안 된다고 했어요. 아빠는 그 말을 듣고 되게 자랑스러워했다고요.”

    하, 아저씨가 드디어 웃었다. 입술을 이상하게 일그러뜨리고 하, 하, 흐흐, 짧게 웃는데, 전혀 웃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까지 어떻게 감옥에 한 번도 안 갔을까?”

    “무슨 짓을 해서라도 쌍방 폭행으로 몰아가서 취하를 시키거든요. 취하 안 하면 마누라, 애새끼, 손자새끼들까지 가만 안 둔다고 협박도 하고요. 같이 죽을 작정으로 덤비면 재벌이든 장관이든 다 꼬리 사리게 돼 있다면서요.”

    “염려 마라. 난 내 몸 정도는 지킬 줄 알고, 경호원도 따라다니니까. 다행히 아직은 아내도 아이도 없고.”

    “아저씨.”

    “성형 수술 따위 할 거 없어. 개명해서 숨어 살 필요도 없고. 넌 그렇게 살아선 안 돼.”

    “…….”

    “죄를 지을 때마다 계속 잡아서 넣으면 돼. 열 번이든, 백 번이든, 천 번이든. 그때마다 형은 점점 길어질 거고, 그 습관을 버리지 못하면 네 아빠는 평생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 네 남은 시간을 위해서라도 지금 반드시 실형을 받게 해야 해.”

    우연은 멍하니 그의 갈색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안 돼요, 아저씨. 제발, 제발 그러지 마세요. 나 때문에 괜히 아저씨까지 위험을 끌어안고 살 필요는 없잖아요. 입을 떼려는 순간, 아저씨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우연아. 내가 회사에서 하는 일은 이보다 훨씬 번거롭고 위험한 일들이야. 원한도 없이 목숨 걸고 싸우고, 사방 천지가 사이코패스들이지. 싸우지 않으면 피할 수 없고, 죽이지 않으면 등 뒤에서 칼을 박아.”

    아저씨가 살짝 멋쩍은 표정으로 웃으며 덧붙인다.

    “난 이런 일을 너무 오랫동안 해 와서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 그리고 나는, 음, 네 생각보다는…… 그래, 좀 잘 싸우는 편이야.”

    우연은 눈물이 괸 눈을 느리게 깜박거렸다. 입가만 억지로 끌어 올려 웃고 있는 아저씨는 평소와 많이 달라 보인다. 우연은 주변 사람들이 아저씨를 왜 그렇게 조심스러워하는지, 이렇게 조용하고 겸손한 아저씨가 왜 무자비한 경영자라는 말을 듣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아저씨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우연아, 아까 내가 실수했어.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미안해. 정말 잘못했다.”

    “뭐가 실수예요? 키스한 거? 그게 어때서요? 키스는 저도 했고, 섹스도 제가 하자고 한 거잖아요! 좋아하면 할 수 있잖아요! 나도 아저씨를 좋아하고, 아저씨도 나를 좋아하……!”

    “그만! 우연아. 그만 말하자. 나는 미현이하고 결혼할 거야.”

    “아, 아저씨도 그 언니도 서로 사랑하지 않잖아요! 안고 싶지 않다면서요. 그런데 아까 아저씨는, 그러니까, 키스할 때, 분명 아래, 아래에…….”

    우연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떨었다. 아저씨는 분명 나를 원했다. 아까 아랫배에 닿았던 게 뭔지는 나도 잘 안다. 아저씨는 자위할 때 약혼녀 언니가 아닌 나를 상상하며, 내 이름을 불렀었다.

    아저씨의 얼굴로 다시 핏기가 올라오는 것이 보인다. 아저씨는 그 나이를 먹고도 여전히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쉽게 하지 못했다.

    “우연아. 남자들은 자극을 받으면…… 욕구는 얼마든지 생겨.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고 처음 보는 사람하고도, 자극만 받으면 얼마든지…… 관계를 가질 수 있어. 나도 그래.”

    “아니에요, 아저씨는 그럴 사람이 아니잖아요.”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아는데?”

    탁 끊어 내는 차가운 목소리에 우연은 입이 얼어붙었다.

    무슨 말이에요. 나는, 아저씨에 대해, 알아요. 잘 안단 말이에요.

    하지만 자신만만한 말은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못하고 혀끝에서 걸린다. 아저씨의 목소리가 단단하게 굳어 간다.

    “우연아. 난 세경그룹을 포기하지 못해. ……지켜야 할 게 좀 많아. 원하는 대로 감정을 앞세울 처지는 아니야.”

    아저씨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눈을 감더니, 꺼져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이쯤 하자. 나는…… 더 이상 비참해지고 싶지 않아. 부탁할게.”

    ……아, 씨 어떡해.

    내가 아저씨에게 최악의 선물을 했구나.

    우연은 드디어 깨달았다. 그가 자신의 마음을 직시할 수 있도록 까발리는 데 성공했고, 그가 가장 원하는 것을 인정하게 하는 데도 성공했지만, 아저씨는 속이 다 헤쳐지고도 결론을 바꾸지 못했다.

    이제 자신을 속이지도 못하게 된 아저씨는, 아내를 사랑한다고 최면을 걸거나, 언젠가 정 붙이고 사랑하게 되리라는 설득조차 하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아내를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순간마다, 정말 사랑했던 것, 하지만 포기해야 했던 것을 떠올리며 고통을 느껴야 할 것이다.

    진실이 항상 행복을 가져다주는 건 아니라는 걸 우연은 너무 늦게 알았다.

    나 때문에, 앞만 보고 돌진해 버린 나 때문에.

    나 혼자 좋아하고 나 혼자 죽도록 앓다가 끝냈어야 했는데…….

    미안해요, 아저씨. 정말 미안해요.

    우연은 고개를 숙이고 그가 건네준 핫초콜릿을 마셨다. 눈물을 감추려니 그 방법밖에 없었다.

    아저씨는 그동안 내가 우는 꼬락서니를 너무 많이 봐 왔다. 이젠 아저씨도 내 눈물이 지긋지긋할 것이다. 엄마 아빠처럼. 뜨거운 기운이 사라진 핫초콜릿은 끔찍하게 달아서 이제는 썼고, 어쩌면 조금 짠 것도 같았다.

    “후원 내용은 크게 달라지진 않을 거야. 무슨 일 있으면 정재경 관장님께 연락하고.”

    “아저씨, 야, 약속이, 그, 그림 제가 그려 드릴 게 남아 있는데요…….”

    “안 줘도 된다고 했잖니. 지금까지 받은 그림 세 점만으로도 충분해.”

    “……하지만, 전 분명 다섯 개를 그려 드리기로…….”

    “얼른 다른 모델을 구하는 게 좋겠구나.”

    아저씨는 담담한 얼굴로, 하지만 가차 없이 끊어 낸다. 더는 놀랍지 않다. 저것 역시 아저씨의 얼굴이다. 맡은 것을 책임지고, 뒤에 있는 것들을 지키고, 이성과 의지로 감정을 지배하는 어른의 얼굴이다.

    아저씨는 어른다운 어른이 되기 위해 너무 오랫동안 자신을 억눌렀다. 차라리 아저씨가 화를 내거나 흔들리거나 하다못해 우는 모습이라도 보였으면 조금은 안심이 되었을 텐데.

    하지만 그런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우연은 알고 있었다. 아저씨에겐 나처럼 철없이 울 수 있는 시간 따위는 오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인연이 금방 끝날 줄은 몰랐구나. 미안하다.”

    ‘나하고의 인연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지만…….’

    불현듯 목소리가 겹쳐진다. 아저씨는 이런 순간이 올 것을 예상했던 모양이다. 이미 몇 달 전, 아저씨는 자신의 마음을 선명하게 인식했고, 그 결말까지 정해 놓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너를 위해 기도하마. 생각날 때마다.”

    ‘너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너에게 큰 힘이 되어 줄 거라고 믿어.’

    “뭐라고 기도해 주실 건가요?”

    “…….”

    아저씨는 그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한참 후에야 낯선 얼굴로 더듬더듬 대답했다.

    “부모님이든 누구든, 이 세상 어떤 것이든, 너를 괴롭히지 못하기를. 더 이상 네가 아픈 일이 없기를. 차, 차라리…….”

    ‘저 아이에게 주어진 고통은 제게 주세요. 너무 힘든 짐입니다. 제가 안고 갈 수 있도록 해 주세요.’

    “……내가, 대신 아프기를…….”

    아저씨는 아마 약속을 지킬 것이다. 앞으로도 긴 세월 동안, 나의 고통을 가져가겠다는 기도를 겁 없이 드릴 것이다.

    그리고 아저씨는 모르는 것 같지만, 그 기도는 이미 발현되었고, 오랫동안 아저씨를 잠식할 것이다.

    “네 재능이 눈부시게 꽃피어서 세상의 모든 사람이,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너를 기억하게 되기를. 세경그룹이나 한이원 따위의 하찮은 이름보다 훨씬 오래 살아남는 눈부신 이름이 되기를.”

    대답을 이어 가는 아저씨는 어딘가 아파 보였다. 아저씨는 말을 멈추고 마른침을 삼켰다. 한 번, 두 번, 세 번을 삼키고서야 아저씨는 입속에 들러붙은 말을 간신히 밀어낼 수 있었다.

    “너를 진심으로 아끼고 걱정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오래오래 행복하기를.”

    ‘너를 아끼고 걱정하고…… 사랑했던 시간이 기쁘고 행복했어.’

    말의 엇갈림을 우연은 따지지 않았다. 이제 그럴 시간이 남아 있지 않았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린다. 우연은 마지막으로 마음에 남아 있던 것을 물었다.

    “아저씨, 그때 생명의 다리에서 왜 저를 구해 주셨어요?”

    우연은 그 순간이 그녀에게 주어진 빌어먹을 운명이었다고 생각한다. 아저씨는 어땠을까. 아저씨도 그 순간을 운명이라고 생각할까.

    “……연습장을 보고, 투자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어. 잘 키우면 하이퍼리얼리즘의 대가가 나올 거라 생각했지.”

    “지금은 투자 가치가 없어요?”

    “리스크가 너무 크면 투자 안 해.”

    아저씨는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대답한다. 물이 스며든 갈색 홍채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우연은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아저씨는 우연을 속이는 일에는 서툴렀지만, 스스로를 속이는 일에는 여전히 능숙했다.

    밖에서 노크 소리와 함께 홍연 아저씨의 초조한 목소리가 들린다.

    “전무님, 박원주 이사님 오셨습니다.”

    “가자.”

    아저씨는 이제 망설임 없이 몸을 일으킨다. 몸을 문 쪽으로 살짝 돌리고 우연을 향해 고개를 조금 기웃, 하는 간단한 동작만으로, 그는 시작도 하지 못한 어떤 감정의 종말을 말하고 있었다. 그의 간결하고 우아한 움직임, 담백하고 부드러운 표정은 이런 순간까지 지독하게 아름다웠다.

    컵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끝났다.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연은 그를 향해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다가선 후 깊이 고개를 숙였다. 아저씨, 고마워요, 아저씨 미안해요, 아저씨 행복하세요. 어떤 인사말이 적절한지 우연은 끝내 고를 수 없었다.

    “아저씨, 사랑해요.”

    “잘 지내렴.”

    아저씨는 못 들은 것처럼 빙그레 웃었다.

    * * *

    토요일 늦은 오후, 교대역 인근은 교통 체증이 극심했다. 기나긴 차량의 행렬은 지렁이처럼 느릿하게 움직였다. 홍연은 운전대를 잡은 채 초조하게 백미러를 힐끗거렸다.

    평소처럼 조용히 뒷좌석에 앉아 있던 이원이 한마디 한다.

    “최 실장님. 음악이나 토크쇼나 뭐라도 좀 틀어 보시죠. 너무 조용하네요.”

    홍연은 어리둥절했다. 차 안이 무덤처럼 조용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건 순전히 이원 때문이었다. 이원은 음악이든 토크쇼든 차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더욱이 형식을 고소하기 위해 변호사와 의사들을 만나고 경찰서까지 다녀오는 길이라 더욱 신경이 곤두선 상태일 것이다.

    홍연은 눈치를 보며 조용한 고전 음악 방송을 틀었다. 아무 반응이 없어 가요가 나오는 방송도 틀어 보았다. 그래도 좋다는 말이 없어 아나운서와 게스트가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방송도 틀어 보았다. 온갖 시청자 사연이 왁왁대며 흘러나온다. 평소의 이원이라면 질색할 방송이다. 그래도 여전히 가타부타 말이 없다.

    설핏, 가는 한숨 소리가 들렸다. 다시 백미러를 살펴본 홍연은 황급히 전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뒤에 앉은 사내는 손등으로 눈을 지그시 누르고 있었다. 포켓치프도 손수건도 어디로 갔는지, 와이셔츠 소매를 약간 끌어당겨, 그것으로 두 눈을 지그시 누른 채 앉아 있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흐느낌 한 자락 없이, 아니 움직임조차 없이 그렇게 앉아 있다.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아나운서의 목소리 사이사이, 꿀꺽, 꿀꺽 힘겹게 침 넘기는 소리만 희미하게 들린다. 와이셔츠 소매 아래, 절반쯤 드러난 뺨으로 긴 물줄기가 흘러 내려가는 것이 보인다. 하지만 그는 끝내 입 밖으로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홍연은 라디오 볼륨을 조금 더 높였다. 게스트의 깔깔대는 소리가 커진다. 빵빵대는 오토바이의 경적 소리가 창밖에서 잘게 흩어진다. 햇볕 좋은 가을의 주말 오후, 거리에는 연인들이 흥청거린다. 교통 체증이 길어질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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