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누드-23화 (23/47)

23. 안아 주세요

“강 관장님. ……7층 복도 CCTV, 잠시만 좀 꺼 주세요.”

탁탁탁탁탁탁. 아저씨는 빠르게 걸었다. 우연은 손등으로 눈물을 문지르며 정신없이 따라갔다. 아저씨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고, 아저씨의 보폭은 너무 커서 키가 작은 우연은 뛰다시피 하며 따라가야 했다.

아저씨의 사무실은 7층 안쪽의 회의실 옆에, 여전히 명패 하나 없이 숨어 있었다. 아저씨를 알아본 몇몇 직원이 놀란 얼굴로 급하게 고개를 숙였지만, 아저씨는 인사도 제대로 받지 않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관장 강석주’라는 명패가 붙은 맞은편 방에서 홍연 아저씨가 반 대머리 아저씨와 나오다가 화들짝 놀란다.

“저, 전무님? 어……. 우, 우연이가 왔습니까? 어떻게 연락도 없이.”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부르기 전에는 들어오지 마세요.”

쾅, 요란한 소리에 이어 쩔꺽, 문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우연은 할딱할딱하며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아저씨는 손잡이를 잡은 채 여전히 등을 돌리고 있다. 화가 난 걸까. 우연은 여전히 누군가가 화가 난 것 같으면 몸이 돌처럼 굳고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흐, 흑, 윽, 흐으. 숨을 가쁘게 쉬는 중에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우연아.”

이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우연을 불렀다. 대답은 들리지 않는다. 하아, 하악, 밭은 숨소리, 가는 흐느낌만 귓속으로 흘러 들어온다. 무서워하고 있구나. 흐느낌 한 자락마다 고막을 바늘로 찔리는 것 같았지만, 이원은 가슴을 꽉 누른 채 통증을 참았다.

아저씨, 사랑해요. 아저씨, 사랑해.

듣지 말았어야 할 말, 보지 말았어야 할 모습, 그리고 이제 내 감정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쏟아 내려 발작한다. 하지만 이원은 필사적으로 숨을 가다듬었다.

절대 안 된다. 지금껏 어떻게 참아 왔는데.

그는 문에 이마를 댄 채 조용히 말했다.

“우연아, 아저씨는 곧 결혼할 거야.”

“사랑, 사랑하, 하지 않는 사람하고 무슨 결혼을 해요!”

아이와 어른을 가르는 것은 나이가 아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짐을 받아들이고 감당하는 자만 어른으로 인정을 받는다. 우연은 그것을 이해하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영원히 어른이 되지 못하는 피터팬처럼.

그리고 현실은 원더랜드가 아니다.

“말했잖아. 이 바닥은 원래 다 그렇다고. 그래도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도 많아.”

“아니에요. 그랬다간 아저씨는 절대 행복하지 못할 거예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알아요!”

우연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단언했다.

“그 언니도 다른 사람을 좋아했었던 거 아니에요? 검색하면 모리스 첸이라는 남자하고 팔짱 끼고 찍은 사진이…….”

이원은 다시 이마를 문에 박았다. 쿵, 속이 빈 울림 소리가 아팠다.

……넌 나를 얼마나 비참하게 만들어야 속이 시원하겠니.

네가 그리 몰아가지 않아도 내 결혼은 이미 충분히 굴욕적이고 넘치도록 비참해.

“우연아. 그 사람은 미현이 공연 관계자야. 산타바바라 극장의 프로듀서라고. 비즈니스 미팅 사진을 가지고 이상한 루머를 만들어 내면 곤란해.”

우연이 아차 싶은 얼굴로 흠칫 입을 다문다. 잠시 후, 그녀가 몹시 미안해하는 얼굴로 고개를 숙인다.

“죄송해요. 그냥, 너무 이해가 안 가서…….”

“……굳이 그런 것까지 이해할 필요는 없어.”

대답에 스며든 냉기를 눈치챘는지, 우연의 목소리가 조금 더 작아졌다.

“저기, 그냥, 각자 아버지가 키운 회사 갖고 두 집이 갈라서면 안 되는 거예요?”

흐, 흐흐. 실소가 흘러나온다. 네 세상은 어찌 그리 간결하고 네 마음은 어찌 그리 단호할까.

아니, 아니지. 잠시 생각하던 이원은 눈을 감고 쓰게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의 유언만 아니었으면, 그룹 분할도 불가능하진 않았을 것이다. 아니, 분리까진 아니라도, 미현과 충분히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딜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자신과 아버지의 지분, 그리고 미현의 지분을 합치면 외삼촌을 누르고 그녀에게 호텔 경영권을 넘겨줄 수 있었을 테니까.

다만 여기서 그녀가 합리적인 거래와 약속이 아닌 ‘결혼’이라는 안전하고도 고리타분한 패를 들이댄 게 패착이었다. 물론 두 집안의 연합을 공고히 하기에, 그리고 내가 사제 서품을 받고 내 지분이 교단으로 증여되는 최악의 사태를 막기에 결혼 이상의 방법이 없는 건 맞다.

하지만 그 방법에 큰 문제가 있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녀에게는 사실혼 상태의 남자가 있었고,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나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 버렸다는 점이다.

물론 그 마음을 인정하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다. 지금은 그 마음을 인정하는 게 아니라 결혼의 당위성을 말해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우연아. 규모 있는 회사들의 이합집산은 말처럼 쉽지 않아. 법적인 문제, 세금 문제도 만만치 않고. 그나마 결혼이 가장 수월하고 안전한 방법이라 다들 그렇게 하는 거야.”

우연이 그를 응시하며 조용히 묻는다.

“그래서 아저씨는 조금이라도 행복했어요?”

“…….”

“아저씨, 사랑해요.”

쿵, 갑자기 명치를 걷어챈 것 같다. 입술을 단단히 물었다. 우연은 버석버석 말라 가는 눈가를 문지른 후, 담담한 얼굴로 이원을 올려다보았다.

“아저씨, 저랑 사귀어요. 결혼 같은 거 하지 말고, 그냥 이대로, 우리 두 사람이, 사랑할 수 있을 때까지, 마음껏 사랑해요. 그러면 안 되나요?”

머리가 핑그르르 돈다. 조용하지만 너무 강렬한 유혹이었다. 의지에 반하는 어떤 말이 순간적으로 튀어 나갈 뻔했다.

너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고 감정을 부인할 타이밍은 진작 놓쳤다. 아니, 타이밍이 문제가 아니라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거짓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원은 필사적으로 다른 핑계를 생각했다.

“그건 안 돼. 대체 무슨 추문에 휩쓸릴 줄 알고.”

“사랑하는 사람끼리 사랑한다는데 무슨 추문에 휩쓸려요?”

너는 아직 모른다. 유언이라는 족쇄가 없어도, 네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다. 나이 어린 여류 화가가 돈 많은 남성 사업가나 권력자를 만나고 다닌다? 결혼도 안 하고? 그게 다른 사람들 눈에 어떻게 비치겠는가.

우연에게는 전도유망한 신인 화가라는 호칭 대신, 돈과 권력에 팔린 창부라는 낙인이 찍힐지도 모르고, 더러운 관계를 등에 업고 명성을 얻었다는 추문을 평생 달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미국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한 명인 조지아 오키프가, 스티글리츠의 누드모델이자 정부였다는 꼬리표를 평생 끌어안고 살아야 했듯이. 그 추문은 결혼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고, 그것이 오키프의 예술 세계에 얼마나 치명적인 악영향을 주었는지 이원은 잘 알고 있었다.

“넌 너무 어려. 겨우 스무 살이야. 나 같은 사람과 엮이면 안 돼.”

“무슨 말씀이세요? 전 아저씨랑 똑같은 어른이에요! 담배도 술도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성인이라고요!”

말도 안 되는 핑계라고 생각해서인지, 우연의 목소리가 격렬해진다.

“나이가 대체 무슨 상관이에요? 열두 살 차이 나면 경찰 아저씨가 잡아가나요? 주둥이로 똥만 싸는 히드라들이 떠드는 게 무슨 상관이에요? 양귀비는 서른네 살이나 더 먹은 황제하고 세기의 로맨스를 찍었잖아요.”

입안이 바작바작 마른다. 단호하게 거절하고 안 된다고 설득해야 한다는 이성과 달리, 마음은 우연과 이어질 일들을 자꾸 상상했다.

예측 가능하고 안정적인 청사진이 그려지는 미현과의 결혼과 달리, 우연과의 관계에서는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는다. 불확실한 미래만 있었고, 포기해야 할 것들만 보였다.

그 불확실성과 혼돈은 우연이의 운명에서 뗄 수 없는 속성이다. 저 놀라운 재능에 필연적으로 짝지어진 힘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연은 그것을 모른다. 아프기만 한 과거,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미래 따위는 읽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현재에만 오롯이 집중한다. 그것이 그녀의 가장 큰 힘이자, 불확실성의 근원이었다.

“아저씨가 좋아요. 너무 좋아서 죽어 버릴 것 같아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온통 아저씨뿐이란 말이에요. 흐으, 씨, 난 이번 생은 다 틀렸어.”

침묵으로 거부하는 남자의 등에 대고 고백을 되풀이하는 비참함을, 우연은 끝끝내 견뎌 냈다. 겁 많고 유약한 아이가 보여 준 용기는 경이롭고 눈부셨고, 이원은 그만큼 비참해졌다.

천천히 뒤를 돌았다. 할 말을 다 쏟아 낸 우연은 이제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자신만 바라보고 있었다.

“……왜 대답을 안 하세요……. 아저씨 비겁해요…….”

맞다. 나는 비겁해.

미현이와의 결혼을 택한 이유는 비겁해서였다. 귀찮아서였다. 감수할 것들이 두려웠고, 포기할 것들이 아까웠고, 싸워야 할 것들이 귀찮고 피곤했다.

하지만 비겁하다고 해서 버티기 쉬운 건 또 아니었다.

우연이 천천히 고개를 든다. 붉어진 눈가, 꼭 다물린 작은 입술. 뺨을 타고 내려오는 가는 눈물 자국. 견딜 수 없다. 그녀가 고개를 들 때, 흠뻑 젖은 눈을 반짝이며 그래도 자신을 똑바로 올려다볼 때, 이원은 자신이 도저히 버티지 못할 것을 직감했다.

……제발 울지 마.

손에 쥐고 있던 선글라스가 카펫 위로 툭 떨어진다.

이원은 우연이 울 때마다 늘 미칠 것 같았다. 마포 대교에서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랬다. 내색한 적은 없었지만, 새까만 동자가 맑은 물에 흥건히 잠긴 모습만 보면 심장이 생으로 찢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저 젖은 눈을 혀로 핥고, 입술에 깊이 입을 맞추고, 끌어안고 달래 주고 싶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 눈물 어린 얼굴을 계속 보고 싶다는 욕망에도 시달렸다. 그는 이 이율배반적인 마음을 인식할 때마다 괴로웠고, 이 더러운 마음을 들키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했다.

이곳에 오는 게 아니었다. 네 그림을 보는 게 아니었다.

널 내 영역에 들이는 게 아니었다. 널 내 마음에 들이는 게 아니었다.

네 재능에 욕심을 내는 게 아니었다. 생명의 다리에 가는 게 아니었다. 눈물을 닦아 주는 게 아니었다. 그 작은 연습장을 펼쳐 보는 게 아니었다.

네 목숨을 구해 주는 게 아니…….

아니다. 네 목숨을 건져 주는 것은 옳았다. 그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나는 너를 구해야만 했다. 그게 그 순간, 그 자리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결국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너의 목숨을 건지고, 너의 작은 연습장을 펼치고, 너의 재능에 욕심을 내고, 너를 걱정하고, 네 고통에 함께 아파하고, 너를 내 곁에 두고, 너를 내 마음에 들이고, 너를 은밀하게 욕망하고, 너를 이렇게 지독하게 사랑하게 되는 것까지, 그 모든 것 중 내가 피할 수 있었던 건 단 한 가지도 없었다.

……사랑해, 우연아.

이원은 고개를 숙이고 고백을 삼켰다. 과거도 미래도 없이 오직 현재만 존재할 때, 인간의 감정은 가장 강력하고 난폭해진다. 가슴에 고인 고백이 마그마처럼 들끓기 시작했다.

사랑해, 우연아. 사랑해.

나는 너를 원해.

하지만 이원은 폭발하려는 화산을 기어이 틀어막을 수 있었다. 그의 강철 같은 이성은 여전히 감정보다 모질었다.

우연이 아래로 떨구어진 이원의 손을 꼭 잡고 천천히 뺨에 갖다 댄다. 손바닥이 젖어 들어간다. 고개를 수그린 우연이 손바닥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가만히 누른다. 솜털에 감싸인 새처럼 작고, 여리고, 가벼운 아이가, 손바닥에 입술을 댄 채 하염없이 운다. 손바닥으로 흥건하게 물이 괴어 손가락 사이로 느릿하게 흘러내렸다.

이원은 다른 손을 들어 가녀린 어깨에 조심스럽게 얹었다. 손가락은 목을 천천히 타고 올라와 우연의 젖은 뺨을 감쌌다. 숨이 막혀 견딜 수 없다. 함빡 젖은, 밤하늘처럼 새까만 눈동자를 견딜 수가 없다. 젖은 뺨을 문지르고,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눈물을 곱게 닦아 낸다. 하지만 아무리 닦아 내도 눈물은 끊어지지 않는다. 숨이 가빠진다. 이것은 패배가 예정된 절망적인 전장이었다.

피잉.

머릿속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귀가 터질 듯 와글대던 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이원은 허리를 깊이 숙였다. 입술 끝에 매끄러운 살결이 와 닿는다. 미친 듯이 와글대던 목소리가 뚝 끊어진다. 이제 뇌 속은 진공의 우주처럼 고요해졌고,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열기만 뚜렷하게 남았다.

우연의 동그랗고 매끈한 이마에 얹힌 입술이 천천히 눈꺼풀 위로 내려간다. 꼭 감긴 눈꺼풀이, 짠물에 잠긴 긴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는 것이 입술을 통해 선명하게 느껴진다.

머리가 희게 물든다. 눈물은 짜고, 피부는 부드럽고, 입술은 젤리처럼 말랑말랑하고 달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지독하게 달았다. 이원은 우연의 허리를 힘껏 끌어안았다. 자신의 하반신과 맞닿은 허리는 부러질 듯 가늘었지만, 자신의 품에 빈틈없이 폭 맞춰질 만큼 유연하게 휘어들어 왔다. 그 아찔한 감각에, 숨이 저절로 거칠어졌다.

“아저씨, 아저씨, 흐, 읍.”

우연의 목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신음을 넘어 흐느낌에 가까운 소리가 두 사람의 입속에서 맹렬히 소용돌이쳤다. 이원은 목이 말랐다. 눈앞의 작은 몸뚱이를 이 자리에서 그대로 먹어 치우고 싶다. 당장 멈춰야 한다는 건 아는데, 약에 취한 것처럼 멈춰지지 않는다. 가느다랗게 할딱대는 날숨이 뺨에 닿을 때마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하반신으로 열이 훅훅 치솟았다.

이원은 한 손으로는 우연의 몸을 품 안으로 단단히 붙이고, 한 손으로는 머리를 힘껏 끌어당겼다. 혀가 우연의 입속으로 깊이, 더 깊이 파고들었다. 감전된 것처럼 혀끝을 찌릿찌릿 튕겨 대던 자극이 이내 가슴과 허리를 휘감고 하반신으로 내달렸다. 우연은 저항하기는커녕 기다렸다는 듯 두 팔을 올려 이원의 목을 끌어안았다. 눈앞에서 불꽃이 꽃밭처럼 퍼져 나갔다.

“으읍, 아, 아저, 흡.”

무슨 말을 하려는지, 우연이 입술을 맞댄 상태로 혀를 꿈틀거린다. 이원은 그것을 듣는 대신 혀를 내밀어 우연의 입속을 미친 듯이 씹고 핥고 들쑤셨다. 조르르 이어지는 앞니, 송곳니, 어금니의 굴곡이, 이원이 휘감고 문지를 때마다 대답이라도 하듯 꿈틀거리는 매끄럽고 촉촉한 혀가, 굴곡진 혀 밑이, 딱딱하고 매끄러운 입천장의 작은 요철들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입천장을 긁고 혀를 비벼 대자 찌릿찌릿한 감각이 전신에서 벼락 치듯 피어오른다. 할딱대는 날숨이 자신의 폐 속으로 그대로 빨려 들어온다. 자위를 할 때는 느낄 수 없었던, 감전과도 같은 전신의 자극이 낯설었다.

팔에 안긴 가는 몸뚱이가 바들바들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이 작은 몸을 샅샅이 핥아 맛보고, 깨물어 깊은 자국을 내고, 두 팔로 힘껏 짓눌러 아스러뜨리고, 그대로 삼키고 싶다. 이원은 이 악귀 같은 욕구가 무섭도록 낯설어, 자신이 아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느낌이었다. 아니, 사람조차 아닌 것 같다.

순간 우연이 발꿈치를 힘껏 들어 올리더니 이원의 목을 바짝 끌어안았다. 귓가로 스며드는 날숨이 오싹했다.

“아저씨, 사랑해요.”

사랑해. 우연아, ……사랑해.

이원은 입 밖으로 미친 듯 튀어 나가려는 말을 필사적으로 삼켰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지만, 그 말까지 입 밖으로 내놓아서는 안 된다는 이성 한 가닥이 목구멍에서 위험한 말들을 잡아챘다. 걸린 말이 치받을 때마다, 입에서는 짙은 신음이 비어져 나왔다.

이원의 입술이 턱을 타고 목으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턱에, 목덜미에 순식간에 붉은 자국이 새겨진다. 봉숭아 꽃잎이 짓뭉개진 듯한 자국이 희고 가는 목덜미에 하나, 둘, 셋, 빗장뼈까지 흘러 내려간다. 우연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아저씨, ……아저, 하아, 하악.”

우연은 드디어 그의 입맞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당황하고 서툴러서 몸도 제대로 반응하지 않았지만, 아저씨와 함께 혀를 얽고 비비면서 그의 입속으로 기를 쓰며 밀고 들어갔다.

아저씨가 놀란 듯 잠시 몸을 떤다. 아저씨의 입맞춤은 생각보다 능숙하지 않았다. 몹시 다급하며 거칠고 아팠다. 반면 아저씨의 몸이 맞닿은 곳마다 뻗쳐 오는 간지러운 감각은 무서웠다. 목에서는 기침과 신음과 오열이 섞여서 튀어나왔다. 아저씨는 그것마저 남김없이 핥고, 맛보고, 집어삼켰다.

아저씨의 몸이 경련하듯 꿈틀대는 것이 느껴진다. 길고 고통스러운 날숨이 뺨에 닿는다. 입맞춤이 깊어질수록 아랫배와 다리 사이 깊은 곳이 점점 가려워졌다.

후읍.

우연은 아랫배를 한껏 휘어 그의 몸에 바짝 붙였다. 조금의 빈틈도 없이 아저씨와 꽉 맞물려 서 있고 싶었다. 빗속에서 아저씨의 허리를 감싸 안고 몸을 바짝 붙이던 그 언니처럼, 그보다 더 다정하고 친밀하게, 아니 아예 몸이 뭉개져서 아저씨에게 껍질처럼 달라붙고 싶었다.

어……?

순간 우연은 아랫배에 어떤 이물감을 느꼈다. 뜨끈하고 물컹한, 뭔가 이질적이고 낯선 덩어리.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맙소사, 이건!

자신의 몸에 맞닿은 아저씨의 하반신은 어느새 크게 부풀어 올랐다. 꽉 감은 눈, 헐떡이는 숨소리, 한때 가장 점잖고 금욕적이라 여겼던 아저씨의 욕구가 이제 무시무시하게 와닿는다. 소름이 오싹 끼친다. 우연이 그것을 감지한 것을 알아차린 순간, 아저씨의 얼굴로 시뻘겋게 핏기가 몰렸다.

“우연, 아, 잠깐, 잠깐만!”

아저씨가 급히 입술을 떼며, 어깨를 밀어 낸다. 입술 사이로 밭은 날숨이 튀어나온다. 아저씨는 뒤로 급히 물러서서 벽을 향해 몸을 돌린다. 그 짧은 순간, 우연은 그의 바지 지퍼 부분이 눈에 띌 정도로 부풀어 오른 것을 보았다.

후우, 후우, 후우우.

아저씨가 벽에 이마를 댄 채 호흡을 다스린다. 우연은 발기한 하반신이 수그러드는 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지 알지 못했다. 격하게 꿈틀대는 어깨, 꽉 감은 눈, 헐떡이는 숨소리. 아저씨의 욕구는 거대하고 싱싱했으며, 주인에게 쉽게 복종하지도 않는 듯했다.

우연은 솜털이 곤두선 두 팔을 꽉 움켜쥐었다. 몸이 바들바들 떨린다.

난 지금 무서운 걸까?

……웃기시네.

그 반대였다. 기뻤다. 흥분되고 기뻐서 소름이 끼친다.

안에서 낯선 열기가 끓어오른다. 아저씨의 저 감춰진 욕망을 보고 싶다. 미칠 것처럼 궁금하다. 그때 어둠 속에서 얼핏 보았던 아저씨의 비밀스러운 부분을 밝은 빛으로 똑똑히 보고 싶다. 내 손으로 샅샅이 만져 보고, 입 맞추고, 내 몸으로 받아들일 때, 아저씨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똑똑히 보고 싶다. 아저씨의 무섭고 흉측했던 그 부분을 내 몸으로 가두고, 짓누르고, 내 몸속으로 완전히 흡수해 버리면 좋겠다.

아저씨가 내 몸을 만져 주면 좋겠다. 내 알몸을 두 눈으로 빤히 보고, 만지고, 입 맞추고, 탐내고, 한껏 사랑해 주면 좋겠다. 내가 부끄러워하는 곳들을 모조리 보여 주고, 만지게 하고, 게걸스럽게 핥고 빨게 하고 싶다. 아저씨가 나 때문에 저 아름다운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리고, 입을 크게 벌리며 신음하고, 몸을 덜덜 떨며 무너져 내리면 좋겠다. 내 몸에서 영원히 헤어 나오지 못하고 쾌감에 절어서 아주 정신이 나갔으면 좋겠다.

이상해. 난 왜 이런 추잡하고 더러운 생각을 하는 걸까. 이해가 안 된다. 열에 들떠서 뇌가 녹아 버린 걸까. 하지만 아저씨를 안고 싶다는 낯선 욕구는 목마를 때 물을 마시고 싶다는 욕구만큼이나 또렷했다.

그리고 아저씨와 나 사이에 남은 시간은 오늘로 끝이다. 이 순간의 기회를 놓치면 앞으로 평생 얼굴 볼 기회가 없을 것이다. 우연은 망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아저씨, 안아 주세요.”

아저씨의 숨소리가 멎는다.

“너…….”

아저씨가 고개를 돌려 우연을 노려본다. 붉게 물든 목덜미, 꽉 악물린 입술, 지글지글 타오르는 눈동자, 억센 숨소리. 그러나 잠시 이성을 놓쳤던 그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수습하려 하고 있다. 당혹감과 자괴감으로 범벅이 된 얼굴, 반쯤 등을 돌리고 있는 그의 몸은 단호한 거부를 말하고 있었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니?”

우연은 이를 악물었다.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아저씨는 벌써 후회하고 있다. 하지 말았어야 할 짓을 했다고. 하지만 아저씨는 모른다. 그건 하지 말았어야 할 짓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짓이었다. 아저씨와 하나가 되고 싶다는 염원이 목을 죄어들어 온다. 우연은 마음을 숨기지 않기로 마음을 결심했다.

“네, 알아요, 아저씨. 섹스해요. 아저씨하고 섹스하고 싶어요.”

이원은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귓속이 윙, 울린다. 커다랗게 벌어진 동그란 눈, 말갛게 반짝이는 새까만 눈동자, 발그레한 뺨, 열기가 일렁이는 숨소리. 희게 드러난 가는 목, 그곳에 자신이 찍어 놓은 붉고 선명한 입술 자국. 짐승과도 같은 욕구가 민낯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린다. 너의 숨겨진 곳을 보고 싶다. 너의 가장 은밀한 곳을 샅샅이 헤쳐 이 붉고 탐욕스러운 자국으로 빼곡히 덮어 놓고 싶다.

아저씨, 섹스해요.

나는 거절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얼굴 껍질을 칼로 벗겨 내는 것 같다. 나도 그래. 나도 너를 원해. 너보다 훨씬 더. 호흡이 점점 밭아진다.

아저씨하고 섹스하고 싶어요. 아저씨도 원하잖아요, 안 그래요?

가늘고 하얀 손이 다가오더니 어깨를 타고 올라와 다시 목을 얽고 매달린다. 우연의 요구는 오만하리만치 순수하고 즉물적이었으며, 그만큼 무모하고 타협이 없었다. 부끄러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벽을 등지고 선 이원은, 더 이상 물러나지 못했다. 가슴에 달라붙어 뺨을 비비는 이 약해 빠진 몸뚱이를 모질게 후려쳐 떼어 내지도 못했다. 짠물에 함빡 잠겨 반들거리는 저 새까만 눈동자만 보면 정신이 무너지는 것 같다. 이원은 작은 몸을 끌어안은 채 헐떡이며 이를 갈았다.

제기랄.

그는 다시 우연을 힘껏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거대한 폭풍이 자신과 우연을 함께 감아올린다. 머릿속은 이미 해일이 휩쓸고 간 바닷가처럼 쑥대밭이다. 지분, 유미현, 경영권, 메세나, 세경그룹, 홀딩스, 지주사 지배권, 유산, 부담부 상속, 약혼, 결혼. 산산이 깨어진 낱말들이 온 하늘을 가득 채웠고, 사금파리를 잔뜩 머금은 폭풍은 무자비하게 몸을 두들겼다.

쾅! 쾅쾅!

요란한 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들었다. 매달려 있던 작은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원은 황급히 우연의 몸을 떼어 내고 뒤를 돌아보았다. 쾅쾅! 쾅쾅쾅! 문짝이 부서질 듯이 요란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강 관장! 최 실장! 들어오지 마세요!”

이원은 고함을 지르며 우연의 옷매무새를 추스르고, 급히 손수건을 꺼내 목의 붉은 자국을 감싸 주었다. 우연은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와들와들 떨기 시작했다.

“우……연아? 왜……?”

이원은 우연의 급작스러운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이러지? 뭐가 무서운 걸까? 이곳은 내 방이고, 내 허락 없이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곳인데?

쾅쾅, 쾅쾅쾅.

아니다, 이해할 수 있다. 저 소리는 불길하다.

“들어오지 마시라 했습니다!”

이원이 문으로 다가서는 순간 와지끈, 문짝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씨발, 이거 뭐야? 너 이 새끼 지금 뭐 하는 짓이야?”

그의 앞에는, 키 작고 어깨가 딱 바라진 사내가 시뻘게진 얼굴로 시근대며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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