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누드-22화 (22/47)
  • 22.

    확 발로 걷어찰까, 말까.

    홍연은 성일호텔 로열 스위트룸 앞에서 잠깐 유혹에 시달리다가, 긴 한숨과 함께 얌전하게 벨을 눌렀다. 손에는 옷이 담긴 종이 가방과 아침 식사가 담긴 커다란 찬합이 들려 있다.

    사는 게 뭔지.

    높으신 분들의 민낯과 갑질을 자주 접하는 동기들이 ‘그 연놈들 대가리엔 대체 뭐가 들었는지 도오무지 모르겠다.’ 하며 한탄할 때, 홍연은 그래도 ‘난 전무님의 대가리(?)에 뭐가 들었는지 대충 알고 있다.’ 하고 자부해 왔다.

    이원은 가끔 복장을 터뜨릴 때는 있을망정, 상식을 넘어서는 짓거리는 하지 않는다. 물론 경영자로서의 한이원은 상대에게 꽤 무자비한 적수로 분류되지만, 개인으로서의 한이원은 점잖고 예측 가능한 사람이었다.

    ……라고 생각했다.

    오만이었다. 작금의 요상한 상황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아마 이원 자신도 예측하지 못했으리라.

    “오셨습니까. 고생 많으십니다.”

    짤까닥, 문이 열리며 실내복 차림의 이원이 가볍게 인사를 한다.

    현재 이원은 성일호텔에서 2주째 생활하는 중이었고, 홍연은 아침저녁으로 송 여사가 챙겨 준 도시락과 짐을 들고 퀵 배송을 뛰고 있었다. 물론, 집에 머무르고 있는 묘령의 화가 손님 때문이다.

    서초동 본가에서 여름 내내 머무르고 있는 그 손님은 ‘아저씨’를 미친 듯이 좋아하고 있었다. 아저씨가 있을 때와 없을 때의 태도는 하늘과 땅 차이라 했다. 낮에는 방이나 서재에 처박혀서 연체동물처럼 흐느적흐느적 늘어져 있다가, 아저씨가 집에 들어서기만 하면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싱싱하게 팔딱대고 뛰어다닌단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현관에서 ‘아저씨이이, 에헤헤헤.’ 하고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웃는 모습만 봐도 바로 알 수 있었다.

    본가에서 그걸 눈치채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당사자인 이원도 안다. 그런데도 그 아이를 내보내지 않고 여름 내내 곁에 두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분위기는 점점 이상해졌다. 두 번째 그림이 나왔을 때, 그리고 미현이 한밤중에 쳐들어와서 집을 발칵 뒤집어 놓고 갔을 때, 이원과 우연 사이의 이상한 기류는 극에 달했다.

    홍연은 우연에게 경호원을 붙여 안전한 숙소로 보내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연민이나 책임감도 한계가 있는 법이고, 상황은 시한폭탄처럼 위태로웠다. 다행히 이원은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잘 아는,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원은 우연을 내보내는 대신 자신이 나와 호텔에 들어앉아 버렸다. 이쯤 되니 홍연은 그의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어휴, 생각을 말자, 말아.

    홍연은 한숨을 꼴깍 삼키고 합에 담긴 음식을 식탁에 늘어놓은 후, 조심스럽게 방문을 두드렸다.

    “식사 준비됐습니다, 전무님.”

    보온병에 든 국, 합에 담아 온 갈비찜, 갖가지 나물과 구이, 물김치까지 백자 반상기에 옮겨 놓으니, 완벽한 가정식 구첩반상이다. 송 여사는 좋은 재료만 써서 재료의 질감을 잘 살린 담백한 음식을 만드는데, 장식과 꾸밈에 어찌나 품을 많이 들이는지, 반찬 한 첩 한 첩이 예술처럼 느껴졌다.

    처음에는 한입에 없어질 것에 왜 이 지경까지 정성을 들여야 할까, 이해도 안 가고 고깝기도 했지만, 송 여사의 귀띔이 있었던 후부터는 그 모든 호사가 딱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송 여사의 말에 의하면, 이원은 어릴 때 예민한 미각으로 풍부한 맛의 향연을 즐길 줄 알던 소년이라 했다. 다만 사제가 되기 위해 맛있고 비싼 음식을 비롯한 삶의 쾌락, 도락이라 여겨지는 모든 것을 멀리하려 노력했다고 한다.

    하지만 미각을 거의 잃은 후, 그에게 끼니란 하루 세 번 뭔가를 씹어 삼켜야 하는 의무가 되고 말았다. 그는 배고프다고 더 먹거나 맛없다고 덜 먹는 일 없이, 차려진 양만큼만 억지로 먹고 일어나곤 했다.

    그래서 송 여사는 하루에 필요한 영양분을 정확히 계산해서 그것에 맞추어 상을 차렸고, 찬의 모양이나 식감이라도 즐길 수 있도록 애를 쓰기 시작했다.

    이원은 그녀가 차려 주는 것이라면 군말 없이 모두 먹었다. 그가 음식에 흥미를 잃을수록 그녀의 음식은 더욱 세심하고 예술처럼 아름다워졌다.

    어느 날, 그 아름다운 식탁을 한참 내려다보던 이원이 조용히 말했다.

    ‘송 여사님, 부탁이 있어요.’

    ‘예. 무슨 일인가요, 전무님?’

    ‘……아프지 마세요. 건강하게 오래오래 제 곁에 계셔 주세요.’

    송 여사는 뒤를 돌아서 소리 없이 흐느꼈고, 이원은 고개를 숙인 채 그 아름다운 반찬들을 조용히 먹었다. 하나씩 하나씩, 하나도 남김없이 먹었다.

    그 이야기를 들어서일까, 홍연은 이원이 집밥을 호텔로 운반해 먹는 일이 그다지 고깝게 여겨지지 않았다. 다만 귀찮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달칵, 문이 열리면서 이원이 나와 식탁에 앉는다.

    “번번이 실장님만 고생시키는군요.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맛있게 드십시오.”

    홍연이 뒤로 물러나 있는 동안 이원은 자리에 반듯하게 앉아 식사를 했다. 집에서와 마찬가지로, 재킷만 벗은 정장 차림이었다. 그는 잠옷 차림으로 식탁에 앉는 법이 없었고, 식사할 때도 절도 있는 자세를 잃지 않아 홍연은 늘 신기했고 가끔은 두려웠다. 다만, 천천히 먹는 습관 덕분에 식사 속도가 느린 데다, 식사 중 대화도 거의 하지 않아 홍연의 기다림은 상당히 지루했다.

    홍연은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전무님, 차라리 이 방을 우연이에게 주고 경호원을 곁에 두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달그락. 잠시 젓가락질이 멎었다.

    “글쎄요. 관리나 보호 차원에선 호텔보다 집이 낫겠죠. 상담 치료도 하고 약도 제때 먹이고 제대로 된 밥도 먹여야 하고. 나와 있으면 라면이나 인스턴트로 세끼를 때우겠죠.”

    “조리사를 파견하시면…….”

    “송 여사님이나 고용인들하고도 친해졌으니 그곳이 편할 겁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불편하게 지내시게요.”

    “상황 봐 가면서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죠. 그곳에 겨우 적응했는데, 혼자 두면 얼마나 힘들겠습니다.”

    상황 봐 가면서 뭘? 개학이 코앞이고, 기숙사도 오픈했는데, 그는 다시 학교로 가라는 말조차 하지 않는다. 이젠 학교가 안전하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다.

    “우연이는 어떻던가요? 얼굴 좀 보셨습니까? 몸은 좀 괜찮아진 것 같습니까?”

    “못 봤습니다. 새벽 4시까지 말똥대고 부닥파닥 올빼미 짓을 하다가 오후 늦게까지 문 걸어 잠그고 잔다네요. 밤마다 경호원 언니나 도우미들하고 라면, 치킨, 콜라 파티를 벌이느라 송 여사님이 환장 파티랍니다.”

    “……생각보다 잘 지내고 있나 보네요. 그 아이답습니다.”

    이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심드렁하게 웃는다.

    질문은 늘 그 정도 선에서 끝났다. 송 여사에게 별도로 소식을 묻는 것도 아니고, 직접 연락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손 원장에게 치료 경과 정도만 보고받는 모양이었다.

    홍연은 그의 표정을 살살 살피며 슬쩍 찔러 보았다.

    “신인 화가 공모전 마감이 며칠 안 남았는데, 올해는 경쟁률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네요.”

    우연의 그림 두 점은 미현이 난동을 부리고 간 이튿날, 바로 공모전에 제출했다. 이원은 여전히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제 강석주 관장한테 물어보니 벌써 600명 넘게 출품했다네요. 작년하고 비슷할 모양입니다.”

    역시, 아닌 척하면서 여전히 관심을 끊지는 못하고 있다.

    “대단하네요. 혹시 전무님, 강 관장에게 우연이 작품 이야기 좀 하셨습니까?”

    “아뇨. 그랬다간 낙하산 줄타기라고 꼬투리나 잡히겠죠.”

    “메세나재단 출신 화가가 공모전에 당선된 게 한두 번도 아닌데요 뭘. 게다가 블라인드 심사이니 그렇게 큰 문제가…….”

    “피곤하니 우연이 이야기는 그만하시죠.”

    이원은 말을 탁 끊었다. 홍연은 그답지 않은 날 선 반응에 조금 어리둥절했다. 이원은 다시 식사를 시작했지만, 찬을 깨작이는 품이, 입맛은 영 가신 모양이었다. 결국, 그가 한숨을 쉬며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우 상무 때문에 요 며칠 신경이 좀 날카로워져 있었네요.”

    홍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쉬었다. 핑계 같긴 하지만, 저 말도 사실은 사실이었다.

    일주일 전쯤, 우일혁 상무가 도박 자금으로 호텔 공금을 유용한 것에 대한 증거 자료가 드디어 이원의 손에 들어왔다. 이원이 계속 예의 주시하며 조사를 해 오긴 했지만, 상황은 그의 생각보다 심각했다.

    자료에는 우 상무가 원정 도박과 함께 마약과 성매매에도 손을 댔다는 정황 증거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원은 지난주 내내 그것이 언론에 흘러 들어가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막아야 했다. 아무리 이쪽 바닥에서 도박이나 마약, 여자 문제가 흔하다 해도,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 대규모 세무 조사는 피할 수 없다. 호텔이 걸려 들어가면 당연히 지주사인 세경홀딩스로도 불똥이 튄다. 그랬다간 판을 크게 벌여 놓은 세경건설은 그야말로 끝장이다.

    지금 동남아 해상 공항 입찰 문제로 정신이 하나도 없는 데다, Y시 재개발 상황도 난장으로 흘러가는 중이었다. 대출 규제가 갑작스레 심해져서 대규모 미분양 이야기가 공공연히 떠돌고, 조합원들 사이의 갈등도 격화되어 서로 만나기만 하면 천하의 사기꾼이니 돈 처날리는 훼방꾼이니 하며 사뭇 패싸움 분위기였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그룹 전체가 동반 침몰 할 판이었다.

    “전무님께서 너무 스트레스받으시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개뿔.

    “전무님. 손 원장님 말로는, 사이코패스 성향이 있는 CEO들은 이런 일로 스트레스를 거의 안 받는다고 하잖습니까? 전무님 보면 세상 불공평한 것 같습니다.”

    이원이 피시시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적어도 저는 세상 불공평하다고 말할 자격이 없어요. 다른 사람한테 그런 얘길 했다간 돌 맞을 겁니다. 아주 많이 맞겠죠.”

    하지만 홍연은 이원처럼 부족한 것 없이 태어나서, 세상 부럽지 않을 것 같은 환경에서, 이렇게나 즐거움 없이 살아가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의무이고 짐이고 죄였다. 세상에서 쾌락이라 분류된 것 중 현재 그가 누릴 수 있는 것도 거의 없었다. 특히 우연이라는 아이는 지금 그에게 너무나도 큰 짐이며 스트레스였다.

    어떻게 보면 그의 마음도, 우연의 마음만큼이나 고장이 나 있는 것 같다.

    띠르르르. 띠르르르.

    전화를 건 사람은 송인희 여사였다. 잉잉앵앵, 송 여사답지 않게 빠른 목소리가 쏟아져 나온다.

    ― 우연 아가씨가 집을 나가셨습니다. 갑자기 짐을 다 챙겨서 나오시면서, 학교에 돌아가신다고…….

    달그락, 손에서 수저가 떨어졌다. 이원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 떠났습니까?”

    ― 지금 막 떠나셨어요. 큰 짐들은 택배로 부치고 가방하고 옷 몇 가지만 들고 가시기에 일단 민정 씨한테 기숙사까지 모셔다드리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전무님? 다시 모셔 올까요?

    눈앞이 빙그르르 도는 것 같다. 혼자서는 대문 밖으로 나가지도 못할 만큼 무서워하던 아이가 어떻게 갑자기?

    우연의 아버지는 지난번에 경찰에 잡혀가긴 했지만, 약식 재판 후 방면된 상태였다. ‘접근 금지 지정 거리 밖에서만 있었고, 딸에게 사과하고 싶어서 급히 따라갔던 것뿐이다.’ 하는 호소가 먹혔다고 했다.

    물론 우연은 아버지가 경찰에 잡혀간 것까지만 알고 방면된 것은 알지 못했다. 가뜩이나 불안해하고 있는데 기름을 부을 수는 없어서 사람들에게 입단속을 단단히 시켰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학교 밖에서 돌아다닐 때 조심하라고 경고해 줄 수도 없었다. 이원은 급하게 지시했다.

    “최 실장님, 학교 인근에 경호 요원을 안 보이게 배치하세요. 학교에는 제가 연락하겠습니다.”

    “전무님. 우연이에게 먼저 연락을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참 후, 이원은 고개를 젓더니 무겁게 덧붙였다.

    “아닙니다. 이건 제가 아니라 재단에서 알아서 할 일이죠. 정재경 관장님에게, 우연이 안전을 위해서 학교 측에 협조 좀 구해 달라고 해 주시고…….”

    “예? ……아, 예. 알겠습니다.”

    이원은 잠시 망설이다가 짧은 당부를 덧붙였다.

    “약하고 밥 잘 챙겨 먹고, 무리해서 작업하지 말고, 저한테 약속한 그림들은 이제 안 그려 줘도 된다고 전해 주십시오. 이미 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결국 그는, 자신이 끝까지 쥐고 있던 마지막 끈마저 잘라 버렸다.

    * * *

    “이, 이건 뭡니까!”

    이원미술관의 강석주 관장은 신인 공모전 예심 통과작들이 주르르 전시된 홀로 들어서자마자 바로 고함을 질렀다. 그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은 것은 벽의 한가운데 어마어마한 위압감을 내뿜으며 걸려 있는 초상화들이었다.

    “대단하죠? 예심 심사 위원 전원이 만장일치로 선정한 작품입니다.”

    “전체 분위기는 쉬르리얼리즘인데 압도적인 극사실주의 테크닉이 합쳐지니 그 파워가 엄청나지 않습니까.”

    심사 위원들은 감탄 어린 표정을 숨기지도 않고 앞다투어 말했다. 하지만 강 관장의 귀에는 한마디도 들어오지 않았다. 등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런, 미친! 저거, 한이원 전무 아냐?

    대체 저 사람이 왜 저기에 박혀 있는 거야!

    가장 먼저 눈에 띈 그림의 제목은 <붉은 수국과 분홍색 딸기 무스케이크>였다.

    하지만 그곳에 케이크는 없었다. 분홍빛으로 한껏 물이 오른 농염한 꽃들과, 혀를 내밀어 손가락과 입술을 핥고 있는 찰나의 순간, 달콤하게 색기를 흘리고 있는 아름다운 사내만 있었다. 아니, 아름답다는 말조차 염치없을 정도로, 인간으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농밀하고 초현실적인 분위기가 가득했다.

    화가의 묘사는 무섭도록 정밀해서, 화면 안의 사내는 한이원의 외형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림 속의 그는 너무나도 낯설었다. 강 관장이 아는 한이원이라는 인물과 전혀 매치가 되지 않았다.

    강 관장은 진땀을 흘리며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맙소사. 이건 또 뭐야.

    전신이 상처로 얼룩덜룩한 소녀의 나신상은 시각적으로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이건 제목이 왜 이래? <사랑>? 이렇게 개산발에 피멍투성이인 그림이? 정신이 나갈 지경이다. 옆에서 심사 위원들이 계속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시선을 확 잡아끄는 힘을 갖고 있고, 내용을 다층적으로 해석하게 만드는 풍부한 함의도 갖추고 있어요. 꽤 철학적으로 느껴지지 않습니까?”

    “대체 지금까지 어디에 숨어 있었을까요.”

    “그나저나 이 남자 모델, 굉장히 느낌 좋지 않습니까? 연예인 같지 않습니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미술관에서 올해 위촉한 심사 위원 중 세경그룹의 젊은 총수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그러니 저렇게 태연하게 떠들 수 있는 거겠지.

    대체 저 화가는 어떻게 작업을 한 거지? 전무님이 이런 사진이 돌아다니게 놔뒀을 리가 없는데?

    가만. 한 전무가 이 사실을 알면 그냥 둘 리가 없을 텐데?

    초상권 저촉 등 법적인 분쟁이 생기면, 당선이 취소될 수 있다. 강 관장은 급히 사무실로 돌아가 응모작 정보를 확인했다.

    “뭐야, 20세?”

    다시 한번 입이 벌어졌다. 머릿속이 쑥대밭이 되는 것 같다.

    강 관장은 바로 전화기를 들었다. 다행히 그에게는 그쪽으로 쓸 만한 정보원이 있었다.

    “최 실장? 자네 혹시 진우연이라는 화가 아나? 이번 신인 공모전에 출품한…….”

    ― 어? 관장님이 그 이름을 어떻게 아십니까? 블라인드 심사 아니었습니까? 심사 중에 그렇게 막 정보 훔쳐보셔도 됩니까? 권력 남용 아닙니까?

    여지없이 깐죽깐죽 딴죽을 거는 목소리가 쟁그러웠다.

    “최 실장! 난 심사 위원 아니야! 심사 위원은 전원 외부 인사 위촉이고, 내 의견은 1그램도 반영되지 않으니까, 제발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 음, 심사에 손톱만큼도 관여하지 않으시고, 심사 위원에게 눈곱만큼도 푸시를 안 하신다면, 그리고 비밀 엄수를 약속해 주신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게, 지금껏 지켜 온 제 깨끗한 이름도 소중하고, 제 모가지도 소중하기 때문에…….

    자신의 혈압을 20쯤 올려놓고 그룹 총수의 비서실로 튀어 버린 전 부하 직원이 태평하게 딜을 건다. 이놈이 밑에 있을 때 진짜 어지간히도 속을 썩였는데, 이런 놈을 월급까지 줘 가며 몇 년씩 끼고 있는 한 전무도 참 무던하다 싶다.

    비밀 보장 약속을 얻어 낸 최 실장은 꽤 놀랄 만한 이야기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 진우연 학생은 이원메세나재단에서 후원받는 화가 중 한 명입니다. 전무님께서 올해 초에 발굴한 학생인데, 스케치북을 열어 보자마자 바로 후원을 결정하셨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죠. 가끔 그림 모델도 해 주실 정도로 그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계십니다.

    “뭐? 그럼 저 그림들이 한 전무님이 직접 모델을 해 주신 거란 말이야?”

    ― 그런 셈이죠. 출품을 권한 것도 전무님이시고요. 초상권 문제가 생길까 봐 연락하신 거라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어휴, 어쩐지. 그쯤 되니 저런 그림이 나왔겠지.”

    강 관장은 머리를 북북 긁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곧이어 수화기 너머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덧붙는다.

    ― 이참에 미리 말씀드려야겠군요. 우연 학생은 가정 폭력 문제로 경호원이 붙어 있고, 부모는 접근 금지 상태입니다. 혹시 당선되면 개인 정보나 이미지가 인터넷에 함부로 돌지 않도록 보안에 신경 좀 써 주세요.

    “그런가? 알았어. 알려 줘서 고맙네. 일간 저녁 사지.”

    ― 고기 사 주십쇼, 관장님. 요새 제가 단백질이 모자라서…….

    홍연이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동안, 강 관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일단 한 전무가 모델도 해 주고 출품도 권한 거라니 다행이긴 한데, 뭔가 좀 이상하긴 했다.

    한 전무는 외부에 자신을 드러내거나 앞에 나서는 것을 싫어했다. 그의 사근사근하고 부드러운 처세가 그것을 감추고 있을 뿐, 재계에서는 이미 은둔형 경영자로 첫손가락에 꼽히고 있다고 했다. 기업 공개를 안 한 비상장사여서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인터넷 CEO 프로필에 사진조차 공개가 안 되어 있는 상태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그려진 작품을 응모하도록 놔둘 수 있을까?

    “최 실장, 전무님한테 그림 어떻게 하실 건지, 혹시 사실 의향이 있는지 여쭤봐 줘. 그 정도 그림이면 컬렉터들이 돌다가 첫날 세 점 다 낙점해 버릴 수도 있어. 전무님은 자기 얼굴 알려지는 거 안 좋아하시잖아.”

    시끄럽게 떠들던 최 실장이 잠시 말을 멈추더니 이내 푸스스 웃는다.

    ― 관장님, 그림 세 점이 아니고 두 점입니다. 살 떨리게 왜 이러십니까.

    “무슨 말이야. 진우연 화가가 출품한 초상화 세 점.”

    ― 아뇨. 틀림없이 두 점입니다. 보내기 전에 제가 분명히 확인했어요. 전무님 초상화 <붉은 수국과 분홍색 딸기 무스케이크>하고 <사랑>이라는 자화상이요.

    강 관장은 눈썹을 찡그리며 화면을 확인하고, 끌끌 혀를 찼다.

    “아냐. 진우연 씨는 분명 세 점을 제출했어. 두 번에 나눠서. 분명 추가 접수 기록이…….”

    ― 여보세요.

    갑자기 목소리가 바뀌어서 강 관장은 당황했다. 강석주 관장님, 한이원입니다, 하는 목소리에 더 당황했다. 한 전무는 그럼 최 실장의 저 주접을, 아니 우리 대화를 내내 옆에서 듣고 있었다는 말인가?

    ― 우연이가 그림을 추가로 접수했다는 말입니까?

    “네, 전무님. <붉은 수국과 분홍색 딸기 무스케이크>하고 <사랑>은 공모전 시작하고 얼마 안 돼서, 그리고 세 번째 작품은 공모전 마감일에 들어왔습니다. 음, 일반 택배로 접수했다고……. 이런 미친…….”

    강 관장은 저도 모르게 험한 말이 나오려던 걸 얼른 삼켰다. 공모전용 100호짜리 회화를 일반 택배로 접수하는 인간이 다 있구나. 수화기 너머에서는 나직한 신음만 짧게 들리고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 마지막 작품도 인물화입니까?

    “맞습니다, 그것도 전무님 초상화입니다.”

    ― 제목이 뭔지 알 수 있을까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림의 제목은 난해했고, 화폭을 지배하는 인물은 강렬하며 무거웠다. 하지만 한이원이라는 실제 인물을 생각하면, 그 낯선 제목과 그림은 그 이상 잘 어울릴 수 없었다. 그림 제목은, 강 관장은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

    “……<뫼르소>입니다.”

    * * *

    우연이 이원미술관에서 당선 통지를 받은 것은 중간고사 직전, 가을 햇볕이 유달리 따갑던 날이었다.

    기쁘지도 않고 놀라지도 않았다. 그냥 무덤덤했다. 아저씨의 집에서 나온 후,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아저씨가 집을 나간 후, 세상의 모든 것은 회색으로 변했고, 그렇게 포근하던 저택은 거대한 무덤처럼 변했다.

    그날 새벽, 수단을 불태우는 아저씨를 보며, 그림을 받지 않겠다는 전언을 들으며, 우연은 한계까지 몰린 그가 자신에게 확실한 선을 그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집에 더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아저씨의 의지와 달리, 아저씨의 눈은, 목소리는, 모든 몸짓은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후회할 것이다.’

    ‘나는, 이 새벽의 선택을 평생 후회할 것이다.’

    ‘먼 훗날 나는, 내 진심을 이토록 잔혹하게 억누르고, 나 스스로를 이렇게 폭행했던 것을 피눈물 나게 후회할 것이다.’

    아무 인과도 이유도 없는 느낌이고, 확신이었다. 순간 우연은 가슴을 짓이기는 듯한 안타까움과 함께, 그 모습을 당사자에게 제대로 보여 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혔다.

    아저씨는 자신의 모습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무의식이 질러 대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똑똑히 들어야 한다. 그 생각 하나뿐이었다.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무식하게 일을 벌이지 않았다. 낮에는 문을 잠그고 그림을 그렸고, 밤에는 라면을 먹으며 광란의 파티를 벌였다. 잠은 거의 오지 않았다. 피곤하지도 않았다. 신경이 바짝 곤두서고 오감이 극도로 예민해졌다. 몇 번 겪은 일이라 놀랍지도 않았다.

    세 번째 그림은 열흘 만에 완성되었다. 우연은 택배 기사를 불러 공모전에 추가 접수를 한 후 이틀 내내 잠만 잤다.

    할 일을 모두 마친 우연은 송 할머니와 민정 언니에게 인사만 하고 바로 집을 나왔다. 아저씨가 없는 집은, 학교 기숙사나 여의도 광장 한복판, 혹은 마포 대교 한가운데와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빠를 만나면?

    우연은 주머니에 넣어 둔 작은 커터 칼을 만지작거렸다. 조금 안심이 되었다. 물론 아빠를 만났을 때 칼로 협박하거나 공격할 생각은 없었다. 힘이 모자라 역공을 당할 게 뻔했다.

    하지만 붙잡히는 순간, 자신의 경동맥에 칼을 박는 정도는 할 수 있을 듯했다. 아저씨의 서재에서 본 책 중, ‘귀 뒤에 있는 경동맥은 칼로 가볍게 찔러도 죽을 수 있다.’라는 말을 하던 여자 주인공이 있었다. 우연은 그 말을 신경 써서 기억해 두었다. 책의 제목은 기억나지 않았다.

    미술관에선 계속 연락이 왔다. 전화를 받지 않으니 문자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오픈 전야제에 당선 작가들의 축하 행사가 있으니 참석해라, 전시회 기간 동안 작가와의 인터뷰 일정이 있으니 참석 가능한 날을 알려 달라, 당선 작가 합동 촬영이 있으니 참석해 달라.

    우연은 과제와 시험 준비로 바빠 참석하지 못한다는 답장만 보냈다. 어차피 그림은 손을 떠났고, 자신이 할 일은 없었다. 전시회 개회식 때도 기숙사 침대에서 멀뚱멀뚱 누워 있었다.

    학교 교수님이나 친구들에게도 수상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미술관에서도 학교에는 별도로 알리지 않은 듯했다. 다행이었다. 소문이 났다간 교수님과 친구들이 그림을 보러 떼 지어 서울로 올라갈 것이고, 얼룩덜룩 피멍으로 물든 자신의 알몸을 보게 될 테니까.

    생각해 보면 우습다. 신인전에 응모한다는 것 자체가 내 그림을 많은 사람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는 뜻인데, 그 간단한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때는 광기에 사로잡힌 것처럼, 빨리 그림을 완성해서 아저씨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축하한다, 우연아. 네가 정말 자랑스럽다.]

    아저씨에게서 짧은 메시지가 들어왔다. 그게 전부였다. 아저씨 방식의 단호한 거리 두기.

    미칠 듯이 눈물이 나올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아서 이상했다. 우연이 기숙사로 오자마자 아저씨가 자택으로 돌아왔다는 말을 들었을 땐, 그 역시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은 기숙사에 처박혀 밤이고 낮이고 잠만 잤다. 점점 좀비가 되어 가는 기분이었다. 최소 학점으로 신청한 덕에, 수업은 일주일에 고작 3일이었는데, 그나마 느낌이 좋지 않으면 기숙사 문밖으로 발길도 내딛지 않았다. 과 친구들은 가끔 우연과 강의실까지 동행해 주었고, 혜진이는 맛있는 것을 챙겨 주거나, 아무 말 없이 씩 웃으며 안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우연은 이상할 정도로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규칙적인 일상은 나른하고 평화롭게 흘러갔다. 다만 모든 게 무거웠다. 입술 끝을 끌어 올리는 것이 무겁고, 그 사이로 흘러나오는 웃음도 무거웠다. 젖은 솜이불을 휘감은 것처럼 몸이 무겁고, 심장도 무거운 소리를 내면서 뛰었다. 목구멍 속에서 무거운 덩어리가 욱하고 치받을 때면 캑캑대며 기침을 했다.

    차라리 눈물이라도 나오면 좋을 텐데. 그러면 내가 슬퍼하고 있구나, 하고 안심이라도 될 텐데 그 흔하던 눈물은 이제 전혀 나오지 않았다.

    옛날엔 슬프지 않아도 눈물이 많이 나왔는데. 그 많던 눈물은 다 어디로 갔을까?

    어렸을 때만 해도 하루하루가 눈물 파티였다. 맞아도 눈물이 나오고, 맞을 거라고 상상만 해도 눈물이 나왔다. 아파도 나오고, 무서워도 나오고, 억울해도 나오고, 창피해도 나왔다. 슬픔의 정체란 어쩌면 아픔과 두려움과 억울함과 창피함 따위가 뭉쳐진 덩어리인지도 모른다. 하긴, 따지고 보면 눈물의 정체는 땀이나 콧물이나 오줌과 별반 다를 것 없지 않은가.

    그래서 우연은 현재의 마음에 뭐라고 이름을 붙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람이 죽으면 시체가 되듯이, 마음이 죽어도 뭐가 되기는 되는 것 같은데, 왜 사람들은 그것에 마땅한 낱말을 만들어 두지 않았을까.

    “역시, 그림을 그리지 않는 게 좋았을까……. 아저씨한테 보내지 않는 게 나았을까.”

    그러면 아저씨하고 어설프게나마 인연을 이어 갈 수 있었을 텐데. 토요일마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아저씨를 만나 저녁을 먹고, 그동안 모아 둔 시시하고 웃긴 이야기를 쏟아 놓을 수 있었을 텐데. 유행에 한참 뒤처진 아저씨는 내가 알려 주는 신종 유행어를 마냥 신기해하면서 한참 웃어 주었을 텐데.

    우연은 쓰게 웃었다.

    그런데,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어?

    우연은 제 손으로 그 꿈 같은 상황을 끝장냈다. 끝장내는 것이 좋아서, 혹은 견딜 만해서 끝장낸 것은 아니다. 아저씨처럼 스스로를 속이는 일에 전혀 소질이 없었을 뿐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의도적으로 키운 게 아닌 것처럼, 그 마음을 누설한 것도 의도적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 마음이 밖으로 튀어 나가는 것을 누를 힘이 없었을 뿐이다. 구토가 치밀 때, 아무리 입을 틀어막아도 결국 입 밖으로 튀어 나가는 토사물처럼.

    적어도 아저씨라면 나처럼 함부로 속을 터뜨리는 일 따윈 없을 것이다. 아저씨의 의지는 사랑이라는 감정보다 훨씬 힘이 셌다. 그는 스스로를 설득하고 세뇌하는 일에 너무나 능숙했다.

    다만 꼭 물어보고 싶었던 것은…….

    우연은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중얼거렸다.

    “……그때 왜 내 이름을 불렀어요?”

    아랫배가 확 달아올랐다. 그날 밤 보았던 아저씨의 뒷모습, 그 음습한 신음만 떠올리면 온몸에 전기가 오르는 것 같고, 이내 몸의 깊은 곳이 근지러워졌다. 꿈틀대는 아저씨의 몸, 흐느끼는 듯, 고통스러운 듯한 신음. 아, 제기랄. 다시 소름이 오싹 끼친다.

    “아저씨…… 이럴 거면서, 그때…… 그날 밤에, 왜, 내 이름을 불렀어요?”

    다리를 꼭 오므리고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떨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그 생각만 났다.

    아저씨와 섹스를 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우연이 생각하는 섹스는 더럽고, 부끄럽고, 구역질 나는 짓거리였다. 하지만 아저씨와 하는 섹스라면, 백배 더 더럽고 창피해도 꼭 해 보고 싶었다.

    아저씨의 완전한 나신을 보고 싶다. 그 점잖고 금욕적인 아저씨가 나를 보고 흥분해 주면 좋겠다. 맨살을 바짝 맞대고, 어루만지고, 비비고, 힘껏 안아 주었으면 좋겠다. 아저씨가 손에 쥐었던 그 이상한 것으로 내 숨겨진 속살을 힘껏, 짓뭉개지도록, 미친 듯이 쑤셔 주면 좋겠다.

    나를 안은 아저씨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입을 크게 벌리며 신음하고, 몸을 덜덜 떨며 무너지는 모습이 보고 싶다. 아저씨와 연결된 그 부분이 아예 딱 달라붙어서 아저씨와 영원히 한 몸이 되어 버리면 좋겠다.

    생각은 왜 이렇게 극단적으로만 흐를까. 엄마 말대로 정말 뇌가 망가진 걸까.

    이 망상들은, 성욕이 폭발한다는 조증 증세일까,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연히 느끼게 되는 욕구일까. 남자들은 몇 초에 한 번씩 야한 생각을 하는 게 당연하다는데, 나는 왜 큰 죄를 짓는 것 같을까.

    “아저씨를 만나지 않는 게 좋았을까?”

    그럼 난 마포 대교에서 죽었을 텐데?

    “아저씨를 사랑하지 않는 게 좋았을까?”

    아마 그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떻게 아저씨를 사랑하지 않고 견딜 수 있었을까.

    이제 우연은 아저씨를 사랑하게 된 이유조차 잊었다. 착해서? 멋있어서? 나를 구해 줘서? 도와줘서?

    아니, 그 어떤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냥 아저씨를 사랑해야 하는 저주에 걸린 것 같다. 이 기억을 가진 채 마포 대교 위로 돌아간다고 해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백 번을 돌아간다 해도, 나는 결국 아저씨를 사랑하고 말았을 것이다.

    운명처럼.

    ……더러운 운명처럼.

    베개를 끌어안고 히히, 웃었다. 우연은 운명적인 사랑이라는 말을 세상에서 제일 경멸했고, 그래서 더러운 운명처럼 사랑에 빠지게 된 자신도 마음껏 경멸하기로 마음먹었다.

    다만, 이제는 아저씨를 볼 수 없을 뿐이다.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이렇게나 보고 싶은데, 남은 평생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살아야 한다는 게, 우연은 너무너무 이상했다.

    ‘우리에게 허락된 인연이 다한 후에도, 너를 위해 항상 기도하마. 너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너에게 큰 힘이 되어 줄 거라고 믿어.’

    아저씨는 이 약속을 지킬 것이다. 내가 아는 이원 아저씨라면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후회는 없다.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그냥 아플 뿐이다. 그래서 우연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 오래오래 웃었다.

    * * *

    우연의 데뷔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꽤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번 신인전 공모를 통해 데뷔한 화가는 총 열 명이었고, 대부분 유명한 미대 출신이었으며, 화실을 오래 운영해 온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관람객의 시선을 제일 강력하게 사로잡은 그림은, 가장 나이 어린 참가자가 출품한 초상화 세 점이었다. 관람객들은 포승줄에 묶인 듯 그림 앞을 떠나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무심하게 지나가던 관람객들도 잠시 후 되돌아와 거북한 얼굴로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세상에 이게 대학교 신입생이 그린 거라고?”

    “그렇다네? 블라인드 심사라서 심사 위원들도 당선 결정되고서야 알았다는데? 세상에 재능은 진짜 타고나나 봐.”

    “묘사 미쳤네. 처음 봤을 땐 포토 콜라주인 줄 알았는데.”

    “묘사는 빼박 사진인데, 분위기는 판타지야. 볼수록 느낌 묘하네.”

    일행이 있는 관람객은 목소리를 낮추고 오랫동안 수군거렸다.

    “이 여자아이는 왜 이렇게 멍이 잔뜩 들어 있는 거야?”

    “글쎄. 제목이 <사랑>인데? 이거 혹시 데이트 폭력 그린 건가?”

    “설마. 아직 중고등학생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데?”

    “그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가정 폭력이란 뜻인가? 그런데 얼굴은 왜 이렇게 해맑게 웃고 있어?”

    모든 생각을 압도하는 충격적인 화면,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위화감, 거북함, 불편함. 사람들은 그림의 잔상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양쪽에 포진한 두 개의 그림 역시 동일 작가의 작품이었다. 100호 사이즈, 사람의 키만큼이나 커다란 두 점의 초상화에는 <붉은 수국과 분홍색 딸기 무스케이크>, <뫼르소>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비정상적으로 강렬한 오라를 뿜으며 완전히 다른 얼굴을 보여 주고 있는 모델은 동일한 사람이었으며, 그는 두 개의 화면에서 끔찍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전야제와 오픈 행사에, 열 명의 당선자 중 진우연 화가만 유일하게 불참했다. 강석주 관장은 이 초유의 사태에,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과제와 시험 때문에 가지 못한다는 말에는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대체 이 학생은 자신의 첫 전시회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것도 이원미술관 신인 공모전으로 데뷔를 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나?

    한이원 이사장 역시 참석하지 않았다. 공모전 오픈 행사에 재단 이사장이 불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테이프 커팅은 메세나재단에 이를 북북 갈고 있는 우성희 이사가 대신 했다.

    짙은 선글라스에 마스크까지 쓴 키 큰 사내가 조용히 미술관에 들어선 것은 저녁 8시 30분, 미술관이 폐관하기 직전이었다.

    “이건 대체…….”

    <뫼르소>라는 제목의 초상화 앞. 누군가의 입에서 탄식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원의 입에서인지, 홍연의 입에서인지, 혹은 그림 앞에 둥그렇게 진을 치고 있는 다른 관람객의 입에서 나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림 속에서 이원은 긴 수단을 입고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었다. 어스름한 어둠 속, 한쪽에선 불빛이 발갛게 스며들고 있다. 인공광이 아닌 불규칙한 물결을 가진 날것 그대로의 불빛에 의해, 손목에 감긴 나무 묵주와 앞으로 수그린 넓은 어깨, 그리고 꿇어앉은 다리의 윤곽이 희미하게 드러나 있다.

    그는 하얗고 자그마한 누군가의 손을 두 손으로 움켜쥔 채, 기도를 마치고 막 고개를 든 참이었다. 어둠에 대비되어 그런지 그의 얼굴빛은 무섭도록 창백해 보였고, 풍성한 갈색의 눈동자만 기이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원이 수단을 입고 있는 모습이 의외롭지는 않았다. 강 관장이나 홍연은, 이원이 최후의 순간까지 사제의 길과 경영자의 길 사이에서 갈등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평소 이원에게서 풍기는 금욕적이고 절제된 분위기를 감안한다면 사제복은 그에게 매우 잘 어울리리라 생각했고, 그렇다면 이 그림에서는 엄숙하고 성스러운 분위기가 풍겨야 마땅했다.

    하지만 이 그림 역시 기대를 완전히 뒤집었다.

    사제복을 입고 있는 사내의 얼굴은 터질 듯 맹렬한 정욕에 물들어 있었다. 지금 이원을 내려다보고 있는 어떤 사람에 대한, 감출 수 없는 욕정이 눈에서 들끓는다. 팽팽하게 긴장한 입가에서, 창백하게 핏기가 가신 얼굴에서, 단단하게 돋아 오른 목의 울대뼈와 손등 위로 솟구친 푸릇한 핏줄에서 정념이 줄줄 넘쳐흐르고 있었다.

    배경을 온통 뒤덮고 있는 것은, 지금 보니 그의 눈동자와 동일한 색이다. 어둡게 일렁이는 다채로운 갈색, 다크 브라운, 세피아, 번트 시에나, 로 엄버, 번트 엄버, 반 다이크 브라운, 음습하게 숨어 있는 카민 레드, 크림슨, 그리고 장중함을 야유하는 듯한 오렌지 빛과 골드 오커 한 자락. 배경색은 그의 욕망하는 시선을 화면 가득 확장한 것에 다름 아니다. 시선은 너른 캔버스를 가득 채운 채, 보는 사람의 목을 졸라 댄다.

    이 깊고 무거운 색깔의 조합을, 어떻게 이런 방식으로 쓸 수 있을까, 그 아이는.

    난로일까, 모닥불일까. 불꽃은 보이지 않지만, 붉은빛과 열기의 존재는 이제 사내의 몸을 통해 서슬 푸르게 존재감을 드러낸다. 가장 금욕적인 외피에 감싸여, 그의 욕망은 도리어 형형해진다. 어두운 황금빛, 붉은빛의 반사광은 강렬한 욕구에 절어 있는 그의 표정과, 입가의 잔 근육들과, 번들대는 눈동자의 열기를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맹렬한 정념과 욕망이 화산처럼 솟구쳐 흐른다.

    짙은 갈색의 홍채에 희미한 형체가 어른거린다. 강렬한 욕망의 대상은 저 눈동자에 어스름하게 맺혀 있다. 흰옷을 입고 있는, 희고 작은 손을 가지고 있는, 아마도 체구가 가냘픈.

    ……아마도 이 그림을 그린.

    이런 맙소사.

    강 관장은 그 이글대는 눈동자에 비친 대상이 <사랑>의 주인공이라 본능적으로 확신했다. 이원이 직접 후원하고 있다는 저 작은 소녀.

    등을 돌리고 있는 이원의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뒤에 서 있는 홍연의 낯빛이 무섭게 창백해진 것을 보면 자신의 짐작이 틀림없는 듯했다. 딱딱하게 굳은 채 서 있던 이원에게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관장님, 우연 학생이 오픈 행사에 다녀갔습니까?”

    “아닙니다. 과제와 시험 준비 때문에 불참하겠다고…….”

    “시험…… 좋아하시네.”

    그답지 않게 거친 말이 잇새로 흘러나온다. 주먹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보인다.

    “……강 관장님.”

    “예, 전무님.”

    “이 그림들, 자료로 나갔습니까?”

    “아닙니다. 원래는 우연 학생의 작품으로 프로그램 표지를 잡자고 기안이 올라왔지만, 현재 정보 보호가 필요한 상태라 해서 모두 제외…….”

    “그럼 됐습니다. 지금 그림 내리세요. 여기 세 점 모두 내리세요.”

    “전무님!”

    홍연과 강 관장은 동시에 기겁했다. 이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아무리 신인 화가의 작품이라 해도 공모전 당선작들이고, 정식으로 전시 중인 작품들이다.

    “곤란합니다, 전무님. 아시잖습니까. 화가가 직접 요청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전무님, 조금만 진정하십시오. 대체 왜 갑자기…….”

    “최 실장! 지금 이걸 계속 걸어 두란 말입니까, 그럼?”

    “우연이는 자기 그림이 걸린 것도 아직 못 봤습니다. 그래도 한 번은 보게 하고, 아니 적어도 허락이라도 받아야…….”

    “자, 잠깐, 다른 관람객도 계시니, 여기서는.”

    목소리가 커지려는 것을, 강 관장이 황급히 제지했다. 그림을 보던 몇몇 사람들이 잠시 뒤를 힐끗거리다 다시 고개를 돌린다.

    이원은 고개를 숙이고 침묵했다. 후우우, 날숨소리가 길었다.

    “그렇죠. 전시 중인 그림을 화가의 허락도 없이 뗄 수는 없겠죠.”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하게 덧붙였다.

    “……우연이에게 연락하세요, 초상화 세 점이 모두 팔렸고, 구매자가 그림을 즉시 내려 달라고 요청한다고.”

    * * *

    이원은 매일 저녁 미술관에 들렀다.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전시실에 들어와서 우연의 그림을 보고 조용히 돌아갔다. 강 관장은 그가 올 때마다 신경이 곤두섰지만 오지 못하게 막을 수는 없었다.

    토요일 오후, 그날도 어김없이 전시실에 도착한 이원은 관람객들 뒤로 천천히 걸었다. 그는 다른 그림은 거의 보지 않았다. 우연의 그림만 보았고, 우연의 그림을 관람하는 사람들만 관람했다. 그가 우연의 그림 앞에 서 있는 시간은 점점 길어졌고, 어떤 때는 돌이 되어 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우연은 여전히 전시장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그놈의 시험이 언제 끝나느냐, 명색이 데뷔 전시회인데 자기 작품을 한 번도 보러 오지 않는 게 말이 되느냐, 하는 읍소에도 까딱하지 않더니 ‘학교로 직접 내려가겠다.’ 하는 협박성 문자까지 들어가자 드디어 전화를 받았다.

    ― 아시겠지만요, 저는 제 그림을 제일 많이 본 사람인데요. 질리도록 본 그림을 또 보러 서울까지 올라가야 하나요?

    예상대로, 예의도 생각도 쥐뿔 없는 대답만 통통 튀어나왔다. 자신의 데뷔 전시회에 올 생각이 쥐똥만큼도 없는 것 같았다.

    그뿐만 아니었다. ‘전시회 기간 동안 화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설명해 주는 행사가 있는데 그것도 안 올 거냐.’, ‘그림이 팔렸다, 구매자가 그림 내려 달라고 하는데 그래도 한번 보고 결정해야 하지 않느냐.’ 하는 말엔 대답이 또 걸작이다.

    ― 설명이요? 제가 뭘 그렸는지 알아보기 어려운가요? 제가 그린 게 개코원숭이가 아니고 사람이라고 설명을 해야만 하나요?

    ― 어? 그림 팔렸어요? 정말요? 세 개 다요? 와! 얼마에 팔렸어요? 아차, 내 거 아니지. 관장님, 그 그림은 이원 아저씨 드린 거예요. 제가 아저씨한테 빚을 진 게 있는데 그림으로 까기로 약속했거든요. 그중 3/5을 깐 거죠.

    ― 그러니까 이원 아저씨하고 사신 분하고 알아서 하시면 돼요. 그림 내리는 거요? 산 사람이 바로 떼서 들고 가는 거 아니었어요? 전 모르겠어요, 그런 거.

    ……이런 맙소사.

    강 관장은 말문이 막힌 채 헛웃음만 지었다. 건방지고 되바라진 것을 떠나, 이 미친 재능을 가진 화가 아가씨는 전시회나 그림 판매에 대한 상식 자체가 전혀 없었다.

    이튿날, 더 큰 문제가 터졌다. 우연의 ‘무지한 관대함’과 상관없이 그림을 내릴 수 없게 되었다. 보도 자료도 나가지 않았는데 일간지에 추천 기사가 올라간 것이다.

    첫날 전시회를 관람한 일간지 문화부 기자가 우연의 작품에 강렬한 인상을 받아 큐레이터의 소개를 토대로 ‘추천할 만한 전시회’ 코너에 기사를 올렸고, 우연의 작품 제목을 언급했다.

    인터넷 기사는 다음 날 바로 내리도록 조치했지만, 몇몇 방문객의 SNS를 통해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한적하던 신인전은 주말에 북새를 이루게 되었다. 그나마 촬영을 허락하진 않아 사진이 퍼지지는 않았지만, 우연의 그림을 바로 떼어 낼 수도 없게 되었다.

    강 관장이 이원 앞에 와서 난감한 얼굴을 했다.

    “일이 이리 되었으니, 어찌할까요.”

    “……어쩔 수 없네요. 이번 주말까지만 전시하고 그 작품은 내리도록 하세요. 구매자의 강력한 요청이라 하고.”

    “예, 알겠습니다. 신경 쓰이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관장님께 면목이 없습니다.”

    이원은 강 관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목소리는 깊이 잠겨 있었다. 강 관장이 물러나자, 옆에서 관람객의 반응을 살피던 홍연이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전무님, 당분간 여긴 안 오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지금 그림의 모델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대답은 한참 지체되었다.

    “압니다. 올 생각 없습니다.”

    “그럼 왜…….”

    “……그런데 안 되네요.”

    목소리의 끝이 푸석푸석 갈라진다. 홍연은 입술을 들썩이다 잠자코 말을 삼켰고, 이원은 그를 돌아보지 않은 채 허공에 대고 말을 이었다.

    “홍연 씨.”

    “예, 전무님.”

    “하고 싶은 말 있죠.”

    “예.”

    “왜 안 하십니까, 홍연 씨답지 않게.”

    이원은 고개를 숙이고 웃기 시작했다. 홍연은 잠시 망설이다 주춤대며 입을 뗐다.

    “이건…… 옳지 않습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전무님.”

    “뭐가요?”

    이원의 웃음소리가 커진다. 홍연은 대답하지 않았고, 이원은 어깨를 들썩이며 계속 웃었다.

    “뭐가요. 난 아무 짓도 안 했어요, 홍연 씨.”

    물론 안 했겠지. 홍연은 속으로 쓰게 웃었다. 내가 아는 한이원은 내가 생각하는 그따위 짓은 절대 저지르지 못할 사람이다. 그건 내가 제일 잘 안다. 하지만 세 개의 그림 사이로 오가는 감정의 흐름은 너무나도 적나라하다. 부인하려고 애써 보았자 코웃음만 나올 만큼.

    세 점의 초상화는 독립적이지 않다. 그림들 사이로 지독한 열기가 뭉텅이로 오가고 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하겠지만, 두 사람을 아는 사람이라면 못 알아볼 수가 없다. 세 개의 그림 사이를 맹렬하게 오가는 감정과 이글대는 욕망을 느끼지 못할 리 없다.

    우연이는 그럴 수 있다. 자신의 감정에 오만할 정도로 충실하고 즉물적인 그 아이는, ‘신이 내린 재능’과 ‘상식의 경계선’을 맞바꾼 채 태어난 그 아이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그래선 안 되지 않는가. 그렇게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사람이, 결혼을 앞두고 있으면서.

    낮고 탁한 목소리가 홍연의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요, 홍연 씨. 여기 오면 안 되는 건 잘 알아요. 내가 왜, 대체 왜.”

    “…….”

    “지금이라도 미현이를 오라고 해서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다못해 혼인 신고라도.”

    “그렇게 하십시오. 지금 경영권 안정시키는 게 가장 급하지 않습니까.”

    “아아. 그렇죠.”

    “전무님. 상황 아시잖습니까. 세무 조사 위험에, 조합에선 패 갈려서 서로 소송 걸겠다고 난리고, 은행에선 주담대 반토막 치고, 이러다 미분양 폭탄 나면 정말 끝장인데, 대표이사님마저 이렇게 흔들리시면 안 되잖습니까.”

    “……그게 안 돼요.”

    이원은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그래. 우연이가 말했던 게 이제 이해가 간다. ‘머리채를 잡혀 끌려다니는 것 같다’고 했던가. 그때는 부모의 폭행에 대한 기억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이 암담하고 반항할 수 없는 감정, 이성과 의지를 모조리 짓밟는 폭군과도 같은 그 감정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그 느낌을 안다. 난 지금 너에게 머리채를 잡히고 온몸이 묶여 질질 끌려가는 것 같다. 네 그림조차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너는 대체 나를 어디까지 본 거니. 이런 식으로 내 마음을 부인하지도 설득하지도 못하게 까발려 버리면, 나에게 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거니.

    ……내가 나 자신을 속일 수 있도록 여지는 주었어야 할 것 아니니.

    “우 상무가 유능하고 정직했으면, 안심하고 회사를 포기했을지도 몰라요.”

    “전무님!”

    “나도 미친 생각인 건 알아요. 세경은 아버지가 자식처럼 일군 회사고 많은 사람의 생계가 걸린 곳이에요. 우 상무에게 저렇게 문제가 많은 걸 알면서도 손 떼겠다는 건 극도로 무책임한 짓이죠. 잘 알아요.”

    솔직히 말하면, 나도 미현이랑 똑같은 짓을 해 버리면 어때, 그런 생각도 해 봤어요. 한두 번 한 게 아니에요. 결혼해서 지분을 상속받고, 뒤로는 서로 좋아하는 애인을 두고, 피차 트집 잡을 일도 없으니 얼마나 간단해. 이 바닥에서 안 그러는 사람이 대체 몇이나 된다고.

    이 말까지는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 이원은 그냥 웃었다.

    이런 사악한 생각을 했던 게 정말 나인가. 내가 이런 생각까지 했다는 걸 그 애가 알면 얼마나 기가 막힐까. 헐떡헐떡 웃을 때마다 가슴과 어깨가 들썩거렸다. 이원은 고개를 숙인 채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걱정 마세요. 아무 일도 없었고,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무슨 일이 있을 리가 없다. 나는 이 염원이 삿된 것이라는 판단이 든 순간부터, 그것을 잘라 내기 위해 할 수 있는 짓은 다 하고 있다. 적어도 나는 이 더러운 열망이 이성의 울타리를 뚫고 그녀에게 도달하도록 허용한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그리고 예전과 달리, 이제는 세경그룹을 남에게 뺏길 생각이 없다. 그곳에서 떨어지는 동전 한 닢까지 악착하게 움켜쥘 것이다. 남은 것은 이것뿐이기에, 이것을 위해 지불한 대가가 너무 고통스러웠기에, 이제 나는 한껏 탐욕스러워진다.

    “그냥,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어요……. 아주, 잠깐.”

    이원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 * *

    토요일, 우연은 혼자 서울에 올라왔다. 교문 밖을 나서기가 너무 겁이 나서 기숙사 앞까지 택시를 불러서 시내로 들어간 후, 사람이 가장 많은 정류장에서 버스를 탔다. 자신을 따라오는 차나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우연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교대역에 내려서 이원미술관까지 걸어가는 길, 늦가을의 따가운 햇볕이 좋았다. 매표소와 로비에 사람이 많아서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 역시 나쁘지 않았다. 우연은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쏟아지는 가을 햇살을 받으며 와글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림 세 점이 모두 팔렸고, 구매자가 그림을 바로 내려 달라고 했단다. 그림 주인은 이원 아저씨니까 아저씨에게 말하라고 했더니 기다렸다는 듯, 이번 주말까지만 전시하고 그림을 내리겠단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그림이 제대로 전시된 것을 한 번쯤은 보고 싶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그림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아저씨를 보고 싶었다. 그림 속의 아저씨라도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아저씨에 대해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는지도 들어 보고 싶었다.

    아저씨는 이 그림을 보셨을까?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우연은 아저씨의 첫 반응이 항상 궁금했었다. 하지만 제대로 본 적이 없어서 아쉬웠다. <붉은 수국과 분홍색 딸기 무스케이크> 때는, 실신해서 차에 실려 있었고, <사랑>이 완성되었을 때는 아저씨의 떨리는 턱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뫼르소>는 아저씨가 보았는지 안 보았는지, 확인조차 할 수 없었다.

    무거운 머리를 흔들며 걸음을 옮기던 우연은 전시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게 뭐야?

    전시실 한가운데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 있었다.

    낮은 곳에 고인 빗물처럼 모인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벌린 채 그림을 바라본다. 웅웅웅웅, 낮고 무거운 술렁임이 그들 속에서 넘실거린다.

    내 그림! 내 그림이다!

    시선이 얼기설기 얽힌 그곳에는 우연의 키를 훌쩍 넘긴 100호짜리 대형 초상화 세 점이 압도적인 오라를 뿜으며 걸려 있었다. 뭉쳐 있는 사람들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소곤소곤하거나 멀거니 생각에 잠겼다. 휘유, 나직한 감탄사를 떨구고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그림을 구경하는 무리 뒤에서 몹시 낯익은 실루엣이 보인다. 크고 짙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 채 조용히 서 있는 남자.

    ……아저씨?

    지금 여기서 뭐 하시는 거지……?

    아저씨는 석상처럼 서서 그림을 보고 있었다. 마포 대교에 서 있을 때처럼,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아무 움직임도 없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모습으로.

    천천히 곁으로 걸어갔다. 그는 우연이 바로 옆으로 다가갈 때까지 시선도 돌리지 않고 그림만 보았다. 무수히 지나가는 사람들의 물결 속에서 아저씨는 홀로 다른 세계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느낌을 기억하고 있다. 나 혼자 다른 세계에 덜렁 떨어진 듯 기이한 느낌. 아저씨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고 했다. 지금 우연은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과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아저씨와 자신만 덩그러니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우연은 그 옆에 나란히 서서 같은 시선으로 그림을 보았다. 세 개의 그림 앞에 서자 복잡하던 마음이 깨끗하게 정리된다. 이제 가슴에 남는 것은 단 하나의 명료한 목소리였다.

    아저씨, 나는 아저씨를 사랑해.

    아저씨, 나는 아저씨를 원해.

    ……아저씨도 나를 원하잖아요. 그렇죠?

    고개를 살짝 옆으로 숙였다. 머리가 아저씨의 팔을 툭 건드리자 아저씨의 몸이 꿈틀, 소스라친다.

    “아.”

    아저씨의 나직한 목소리가 몸을 징, 관통한다. 당황한 걸까. 내가 오리라고 예상하지 못하셨을까. 그렇게 단호하게 거절해 놓고, 왜 여기 와서 이렇게 서 계시는 걸까.

    아저씨의 팔이 딱딱하게 굳는 것이 느껴진다. 그 상태 그대로, 시간이 멈춰 버린 것 같다. 주변을 지나던 사람들은, 마포 대교에서 옆을 지나가던 자동차의 물결처럼 무서운 속도로 지나갔다. 세 개의 그림 앞에서, 시간은 그렇게 두 개의 속도로 흘렀다.

    “데뷔 축하한다. 세 번째 그림도…… 멋지구나.”

    아저씨가 시선을 피하며 간신히 입술을 떼었다. 목소리가 쩍쩍 갈라져서 다른 사람 목소리 같았다.

    우연은 조심스럽게 아저씨의 손을 건드렸다. 그는 거절하지 못했다. 그의 큰 손을 살그머니 쥐자 몸이 경련하듯 꿈틀거린다. 손을 빼려는 듯, 팔에 힘을 주어 움직인다. 하지만 우연의 손을 완전히 뿌리치지는 못했다. 들들 떨리는 그의 손은 이미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우연은 그의 손을 잡은 채, 자신의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가장 끝에 있는 그림에 가서 멎었다. 어머니와 애인에게조차 머나먼 타인으로 존재했던 사람. 태양 빛이 강렬하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이고, 엄마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섹스를 했다는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은 뫼르소라는 사내는, 이제 그림 속에서, 햇빛 대신 지글대는 불빛을 받으며, 아빠가 죽는 날 섹스를 하고 싶어 하는 누군가를 한껏 탐욕하고 있었다.

    난 이제 그 뫼르소라는 미지의 남자를 이해한다. 모든 일에 합당한 이유가 존재하는 건 아니다. 모든 감정에도 합당한 이유가 존재하는 건 아니다. 이 감정은 합당한 이유를 뿌리치고 생겨났고, 이 사랑은 아무런 인과도 논리도 없이 벼락처럼 마음 밭에 떨어졌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뫼르소가 산다. 나의 마음에도, 아저씨의 마음에도. 한때 사제가 되어 모든 사람에게서 완벽한 타인이 되려 했던 아저씨, 나를 야멸차게 물리치며 나에게도 완벽한 타인이 되려 했던 아저씨.

    그는 이제 강렬한 햇빛 아래 선 이방인과도 같이, 인과도 논리도 없는 힘에 휩쓸렸다. 아저씨가 지금 내 손을 뿌리치지 못하는 것은, 입술만 깨문 채 이렇게 덜덜 떨며 서 있는 것은, 아마도 인과를 거역하게 하는, 그 강렬한 햇빛 때문일 것이다.

    나를 그렇게 밀어내더니, 여기엔 왜 오셨나요? 제 그림에서 뭘 보고 계시나요? 아니, 뭘 보고 싶으신가요? 아저씨가 정말 원하시는 게 뭔가요?

    하지만 우연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따위 것을 묻기에는, 복도의 창문을 통해 내리꽂히는 가을 햇살이 너무 아름다웠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 햇빛이 살인을 유발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치명적인 사랑도 유발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이제는 우리 두 사람이 사랑해야 할 이유가 되었다. 사랑해야 할 이유로만 꽉 채워진 둘만의 시공에서, 나의 뫼르소가 아저씨의 뫼르소에게 말한다.

    “아저씨, 사랑해요.”

    세 개의 초상화가 한꺼번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저씨는 웃지 않는다. 움직이지도 않는다. 내려다보지도 않는다.

    “아저씨, 사랑해요. 아저씨, 사랑해.”

    함빡 웃으며 중얼대는 우연의 발치에서, 아무 이유도 인과도 없는 눈물만 둔탁한 소리를 내며 깨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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