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누드-21화 (21/47)
  • 21. 태풍의 눈

    ― 누구야! 대체 누구냐고!

    쨍, 소리와 함께 우연은 잠에서 깼다. 꽈르릉, 무지막지한 천둥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우연은 새까만 천장을 올려다보며 몇 번 눈을 깜박였다. 여전히 방은 온통 깜깜한 어둠에 묻혀 있었다.

    꿈인가?

    어둠 속에서 귀를 잠시 기울였지만, 창을 깨 버릴 듯 두들겨 대는 빗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창밖으로는 비가 폭우를 넘어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었고, 번개가 번쩍번쩍할 때마다 가구들이 순간적으로 윤곽을 드러냈다가 사라진다.

    이상하다. 분명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창밖이 확 밝아진다. 얼른 이불 속으로 고개를 파묻었다. 이내 꽈르릉 쾅, 콰작, 어마어마한 소리가 귀청을 울린다. 그 사이사이 날카로운 소리가 다시 들어와 박힌다.

    ― 정말 안 나오시겠다 이거야? 이걸 확 칼로 그어 놔야 튀어나오겠다는 거야? 엉?

    우연은 이불을 걷고 시계를 확인했다. AM 1:45. 경비가 삼엄한 이 저택에 누군가 멋대로 들어와서 소리를 지르기에 적당한 시간은 아니다. 등으로 천천히 한기가 흘러내린다.

    방문을 조금 열자 대낮처럼 환한 불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송 할머니의 떨리는 목소리,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리고 다시 쨍, 하는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송 여사, 똑바로 대답 안 해? 내가 뭘 묻는지 몰라서 이래?”

    소리는 위층에서 들리고 있었다. 송 할머니의 비는 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대체 누구지? 집이 이렇게 시끄러운데 아저씨는 왜 가만히 계시는 거지?

    우연은 멍하니 2층 계단을 올라갔다. 유리 파편 같은 목소리가 다시 터졌다.

    “난 ……에 대해 설명을 들을 권리가 있어. 잘 아실 텐데요?”

    우연은 아저씨의 침실 한가운데 서 있는 키 큰 여자를 멍청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 여자다!

    유미현은 검은 민소매 원피스에 화려한 패턴의 숄을 두르고 있었다. 머리와 어깨는 비에 조금 젖어 있었지만 추레하지 않고 청초해 보였다.

    경호원인 민정 언니는 미현이 번쩍 들어 올린 한쪽 손을 꽉 잡고 있었다. 손에는 뭔가 작은 것이 쥐여 있었고, 민정 언니의 양쪽 뺨은 새빨갛게 부어 있었다. 머리카락도 수세미처럼 들떠 있는 걸 보면 몸싸움이라도 한 것 같다. 아니, 미현의 옷차림이 지나치게 깔끔한 걸 보면 몸싸움이 아니라 민정 언니가 일방적으로 당한 것 같다.

    송 할머니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 우연 아가씨?”

    “우연 아가씨?”

    날카로운 시선이 우연에게 투창처럼 들어와 박혔다. 무시무시한 침묵이 이어졌다.

    “아가씨 좋아하시네.”

    미현은 민정의 손을 뿌리치고 손에 든 것을 집어 던졌다. 작은 커터 칼이었다. 붉은 입술에서 냉소가 튀어나온다.

    “증거가 제 발로 기어 올라오네. 그러잖아도 실물이 궁금했는데.”

    “……증거요?”

    “이거 그린 게 너니?”

    미현은 말을 탁 잘라 내며 묻는다.

    그제야 우연은 침실 벽에 놓인 두 개의 그림을 발견했다. 보름 전에 건네준 자화상과 아저씨의 초상화였다. 눈앞이 새하얘졌다. 공모전에 출품한 줄 알았던 그림이 왜 아직도 아저씨의 침실에 남아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우연은 멍청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 합성 프린트 콜라주인가? 고작 이따위 걸로 최 실장은 왜 그렇게 호들갑을 떤 거야?”

    “합성 아니에요. 기억해서 그린 거예요.”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어디서 사기를 쳐.”

    맑고 차가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한쪽 입술 끝만 비틀며 웃는 모습은 공포스러웠다. 우연은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쥐어짰다. 적어도 저 여자 앞에서만큼은 쭈그러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럼 믿지 마세요. 저거 합성 사진 베낀 거예요.”

    “하, 참. 쥐똥만 한 게 사람 우습게 만드네.”

    미현은 기가 막힌 듯이 웃었다. 그 당당한 웃음에 우연은 더럭 겁이 났다. 아니, 아빠를 만났을 때처럼 숨도 못 쉬고 바닥에서 뒹굴게 될까 봐 더 겁이 났다. 그런 상황은 늘 갑작스럽게 들이닥쳤고, 혼자 힘으로는 전신을 짓누르는 공포를 막을 수 없었다.

    “이따위 그림을 그린 이유가 뭐지?”

    차가운 시선에선 그림에 대한 감탄이나 놀라움 따윈 없었다. 오직 독이 바짝 오른 경멸과 적의뿐이었다.

    “신인 화가 공모전에 낼 거예요.”

    “공모전 좋아하시네. 이 같잖은 제목으로? 그 말을 믿으라고?”

    차가운 비웃음이 튀어나왔다.

    “왜, 대놓고 유혹이라도 하지 그랬어. 그림에서 벗기는 것 보다 실제로 벗고 덤비는 게 더 나았을 텐데?”

    우연은 입을 다물었다. 제목을 쓰지 말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어쩐지. 어렵게 휴가 빼서 들어왔는데 이 핑계 저 핑계, 만나지도 않고 집에 발도 못 디디게 하더라니. 그래 며칠 조사 좀 시켰더니 바로 재미있는 사진을 보내왔더라고.”

    여자가 냉소하며 손에 든 것들을 우연에게 집어 던졌다.

    “……이건?”

    아저씨와 민정 언니, 혹은 송 할머니와 함께 저녁 산책을 하는 사진이었다.

    아저씨는 그동안 우연이 대문 밖으로 나와 돌아다닐 수 있도록 꾸준히 격려해 주었다. 무서워할 것 없다, 엄마 아빠는 네가 여기 와 있는 거 꿈에도 몰라. 여긴 경호원도 있고 나도 있어. 그래도 우연이 무서워하는 기색을 보이면 아저씨는 손을 꽉 잡고 진정을 시킨 후 천천히 함께 걸어 주곤 했다. 뒤에서 따라오는 민정 언니와 송 할머니도 우연을 응원해 주었다.

    우연은 그 시간이 너무 행복해서 점점 두려움을 잊었다. 아저씨와 함께 있으면 어디든지 안심하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행복해서 무슨 일이 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도 무시했다.

    ……그런 예감은, 무시하면 안 되는 거였다.

    하지만 분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은 욕먹어도 싼 짓을 했지만, 아저씨는 이렇게 부당한 비난을 들을 이유가 없다. 우연은 고개를 들고 말했다.

    “이게 왜요? 저 치료 도와주시느라고 다 같이 산책 나와 주신 건데요.”

    아무 짓도 안 했다. 아저씨는 지나치게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서, 두 사람만 함께 있는 상황조차 만들지 않았다. 아저씨와 우연이 함께 있는 자리에는 늘 민정 언니, 송 할머니나 다른 도우미 아주머니가 동석했다.

    “왜 오빠가 네 치료를 도와줘야 하는데? 왜 꼭 이 집에 숨어 있어야 하는데? 여긴 너 같은 게 함부로 빌붙을 수 있는 곳이 아니야. 그런 눈치도 없어?”

    우연은 필사적으로 숨을 다스렸다. 내가 이 집에 와 있을 자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도 아저씨 집에서 이렇게 지랄할 자격은 없잖아. 화가 나니 오히려 두려움이 천천히 뒤로 물러난다.

    “나, 난 이 집의 손님……이에요. 아저씨가 직접 초대한 손님이요. 눈치를 줘도 아저씨가 주고, 쪼, 쫓아내도 아저씨가 해요. 아저씨도 없는 집에서 왜 이러세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무섭다고 아빠 앞에서처럼 비굴하게 비는 모습은, 저 여자에게 절대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할머니, 아저씨 지금 어디 계세요?”

    “오빠는 왜 찾아? 이제야 겁이 나니? 지금 네 편 들어 줄 사람이 없어서?”

    여자는 냉랭하게 웃었다.

    “급한 일이라고 잠시 밖으로 불러냈어. 오빠 없을 때 직접 와서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아서.”

    “그럼 당신이야말로 허락도 없이 남의 집에 들어온 거잖아요! 도둑고양이예요?”

    쫘악!

    갑자기 몸이 붕 떠서 바닥에 팽개쳐졌다. 에그머니, 아가씨! 송 할머니의 비명이 들렸다. 그림을 몸으로 막고 있던 민정 언니가 기겁하며 달려왔지만, 미현이 우연의 머리채를 잡고 뺨을 몇 번이나 후려갈기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우연은 바닥에 나동그라진 채 얼떨떨한 얼굴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아픈 것도 잘 느껴지지 않았다. 여자가 활짝 웃으며 묻는다.

    “내가 너하고 똑같아? 넌 약혼녀라는 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니?”

    “…….”

    “그리고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사이야. 오빠는 주말마다 우리 집에 놀러 와서 나와 시간을 보냈었어. 어디서 감히 도둑고양이라는 말을 입에 담아?”

    순간 머리가 핑그르르 돌면서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는다. 골프채를 쥔 아빠 앞에 선 기분이었다. 여자의 붉은 입술 사이로 새하얀 이가 무섭게 반짝거렸다.

    “최홍연 그 새끼가 나한테 감히 구라를 치더라? 메세나재단 후원 예술가 124명 중 한 명일 뿐이라고.”

    “마, 맞아요. 재단에서 후, 후원하는 거……. 저 학교 졸업할 때까지…….”

    픽, 차가운 냉소가 튀어나왔다.

    “오빠가 얼마나 사람 가려서 집에 들이는데. 후원 예술가 중 여기 초대받았던 사람은 한 명도 없었어.”

    심장이 쿵, 하고 울린다. 이런 순간에조차 가슴이 떨리다니, 미친 게 틀림없다.

    “하, 한…… 명도요?”

    “단 한 명도.”

    미현은 싸늘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콰당. 콰르릉. 불빛이 번쩍, 2층 전체를 후려치더니 다시 벼락 떨어지는 소리가 울린다.

    순간 아래층에서 콰당,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송 여사! 혹시 미현이 여기 왔습니까?”

    쿵쿵쿵쿵, 계단을 급하게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아저씨다. 허억, 후우, 후, 후우. 평소와 달리 헐떡이는 소리가 고스란히 섞인 아저씨의 목소리. 전무님, 잠시만요, 잠시 수건이라도, 전무님! 경비원 아저씨의 다급한 목소리도 따라온다.

    우연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입을 틀어막았다. 아저씨가 이 집에 와 있다는 것만으로도 갑자기 공기가 확 변하면서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무슨 일입니까.”

    2층에 올라온 아저씨가 사방을 둘러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우산도 쓰지 않은 채 넓은 정원을 가로질러 뛰어온 듯, 아저씨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어 있었다. 얼굴로 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는데, 수건을 받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

    아저씨는 자신의 침실에 불청객 약혼녀와 송 할머니, 도우미와 경호원들이 한꺼번에 모여 웅성대는 걸 보면서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하지만 방구석에 나동그라진 우연에게 시선이 닿자 얼굴을 크게 일그러뜨렸다.

    아저씨는 소리를 지르지도 않고, 다가와 부축해 주지도 않았다. 다만 방 안을 한 바퀴 빙 둘러본 후 짧게 물어볼 뿐이었다.

    “맞았니?”

    “네.”

    커다랗게 벌어진 눈에서 금방이라도 불이 쏟아질 것 같다.

    “……괜찮니?”

    “아뇨. 아파요.”

    괜찮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괜찮지 않았다. 아저씨는 괜한 걸 물었다는 듯 눈을 감고 한숨을 쉬었다.

    “정말 미안하다. 대신 사과하마. 송 여사, 우연이 데리고 내려가서 약 좀 바르고 진정시켜서 재워 주세요.”

    우연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내려가고 싶지 않아. 왜요. 무슨 말을 할 건데요? 나에 대해서, 나 없는 데서 대체 두 분이, 무슨 말을!

    하지만 아저씨의 시커멓게 가라앉은 눈을 본 우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왜 때렸지?”

    이원이 송 여사에게서 수건을 받아 든 것은, 우연이 계단을 완전히 내려가서 아래층 방문이 닫히는 소리까지 들은 후였다. 이마 위로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물이 줄줄 흘러내리는데, 느껴지지도 않는 모양이다.

    송 여사는 속으로 혀를 찼다. 평소의 이원 같으면 우산을 가지고 올 때까지 차에서 기다렸을 텐데, 이번엔 그럴 경황조차 없었던 듯했다. 급한 일이라고 해서 성일호텔까지 나갔던 이원은 그녀의 급한 문자를 받고 황급히 돌아온 참이었다.

    “지금 그걸 추궁할 때는 아니지, 오빠?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을 텐데?”

    미현은 눈을 치뜨고 이원을 노려보았다. 자신이 무리수를 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이원은 허락 없이 자신의 울타리를 침범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하지만 이원이 다른 여자를 대놓고 집에 데려다 놓았다는 것은 그냥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혹시 모리스와의 관계에 대한 보복인가? 언짢다고 대놓고 시위하는 건가?

    미현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건 용납할 수 없었다.

    겉으로는 대등한 결혼, 윈윈 계약처럼 보이지만 이원은 자세를 바짝 낮추어야 할 처지였다. 얻는 것은 이원이 더 크고, 자신이 협조하지 않을 경우 잃는 것도 이원이 훨씬 크기 때문이었다. 아니, 거의 모든 것을 잃는다고 볼 수도 있다. 지금 이원이 아버지의 지분과 그룹 경영권을 뺏기면, 후일 무슨 짓을 하더라도 되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미현은 이원에게 암묵적으로 약속한 대로, 모리스를 집에서 내보내고 바로 옆의 스튜디오를 얻게 했다. 그리고 그와의 밀회가 외부로 드러나지 않도록 철저하게 막았다. 그 바람둥이 마초를 살살 달래 가며 합의도 했다. 합의할 수 없으면 헤어질 수밖에 없다는 오만한 통보에, 아쉬운 모리스가 결국 백기를 들었다.

    내가 그 정도까지 물러났는데, 오빠가 대놓고 다른 여자를 집으로 불러들이면 안 되지 않아?

    요령껏 숨기면 서로 적당히 넘길 일이었다. 자신처럼 근처 오피스텔에 여자를 데려다 놓고 즐기려면 한 명이든 열 명이든 묵인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하는 짓은 대놓고 자신에게 엿 먹어 보라는 소리다.

    오빠랑 나랑 처한 입장이 다르다는 걸, 기어이 두 귀로 들어야만 직성이 풀릴까?

    ……오빠 그렇게 멍청한 사람 아니잖아.

    미현은 분노를 숨기지 않고 이원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이원은 표정을 싹 거둬들인 채 조용히 물었다.

    “나한테 무슨 일인지 먼저 물어볼 생각은 들지 않았어?”

    “묻는다고 순순히 대답해 줄 거였으면 애초에 여자를 몰래 집에 들이지도 않았겠지? 아니면 적어도 나한테 허락을 받았을 거고.”

    “일단, 몰래 집에 들인 건 아니니 네가 잘못 알았고.”

    이원은 차갑게 말을 끊었다.

    “무엇보다, 내가 내 집에 내 손님을 들이는데 왜 네 허락을 받아야 할까?”

    아하? 미현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지금 약혼녀 앞에서 할 말이야? 그럼 결혼하고서도 이 여자 저 여자 집으로 막 불러들이면서 내 집에 내 손님 들이는데 왜 허락을 받냐고 그러겠다?”

    “그것까진 모르겠지만 우리가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는 건 잘 알지. 그리고 내 집 손님이나 직원에게 함부로 손을 대는 건 형사 고소감이라는 것도 알고.”

    이원은 아무 감정도 없는 목소리로 탁탁 받아쳤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미현은 눈을 반쯤 뜨고 생각에 잠겼다.

    이원의 반응이 생각과 다르다. 평소처럼 조용히 사과하고 다정하게 달래 주거나, 저 여자를 건드린 일에 대해 감정적으로 분노를 드러내거나, 하다못해 모리스를 포기하지 않는 자신에 대한 간접적인 비난 정도는 튀어나올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원은 모리스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것처럼 무반응이다. 그랬다간 자신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가리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원의 반응은 자신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한 데 대한 정당한 거부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미현은 이원이 ‘이건 아니다.’라는 판단이 들면 인정사정없이 판을 엎기도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결혼 전부터 기선을 제압해 두는 것은 필요하지만, 결혼이 깨지는 것까지는 미현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랬다간 가장 큰 손해를 보는 것은 이원이었지만, 미현 역시 성일호텔 경영권을 영영 잃게 된다. 자존심 때문에 치킨 게임을 할 생각은 없었다.

    미현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 바쁜 와중에 휴가 내서 간신히 들어온 약혼녀한테 하는 소리가 고작 이따위라니. 오빤 내가 보고 싶기는 해? 결혼할 생각은 있는 거야?”

    이원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송 여사와 경비원, 도우미들이 와글와글 모여 있는 한가운데로 무심한 목소리가 툭툭 튀어나왔다.

    “물론이지, 그래서 몇 달 전에 뉴욕에도 찾아갔었잖아.”

    뭐? 이게 무슨 소리야? 미현은 이원을 뉴욕에서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언제? 아무 연락도 없이?”

    “도착해서 전화는 했지. 안 받은 건 너고.”

    제기랄. 모리스가 옆에 있으면 늦잠 핑계로 오빠 전화를 씹을 때가 몇 번 있었는데 그때였나?

    “무슨…… 일로?”

    “섹스가 하고 싶어서.”

    이원은 여전히 지루하고 건조한 얼굴로 대답했다. 모인 사람들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원은 낮은 목소리로 심드렁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아침에 아파트로 찾아가서 벨을 눌렀는데…….”

    순간 미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신은 이원의 코빼기도 본 적이 없다. 혹시 모리스를 만났었나? 설마 그 이야길 고용인들 앞에서 터뜨리려고?

    ……그럼 이 결혼을 여기서 엎겠다는 건가?

    씨발, 이게 어떻게 엮은 거래인데. 그 정도 일로 엎을 일은 아니잖아.

    미현은 급하게 이원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침에 집에 없었으면 합숙 연습 중이었나 본데? 조금 기다렸다가 연락 닿으면 보고 가지 그랬어.”

    이원은 미현을 가만히 보다가 입 끝을 살짝 끌어 올려 웃었다. 미현이 급하게 한 걸음 물러난 것을 안다는 듯이.

    “그래. 많이 바쁜가 보다 했어. 나도 스케줄이 너무 밀려서 바로 한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이런 제기랄.

    미현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끝까지 애매한 대답만 내놓는다. 모리스와 만났는지, 빈집에서 벨만 누르다 돌아갔는지, 정말 오기는 했는지. 정황을 알지 못하니 대응도 제대로 할 수 없다. 긴장감이 팽팽하게 감돌았다. 하지만 지금 이원을 더 긁었다간 이 결혼이 파국으로 이어지리라는 것은 확실했다.

    아까 저 아이를 때린 것이 이 침착한 사람의 역린을 건드린 걸까?

    미현은 눈썹을 찡그리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민정 씨하고 그 애한테 사과할게. 내가 오해했다고. 치료비도 내 줄게.”

    “너에게 미리 말해 둘 걸 괜한 오해를 하게 했구나. 나도 미안하다. 저 아이에게 신변 보호가 필요한데 마땅한 장소가 없어서 급하게 데려왔어. 방학 끝나면 바로 기숙사로 돌아갈 거니 너무 신경 쓰진 말고.”

    이원도 한 걸음 물러선다. 미현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런데 왜 완성작을 출품 안 하고 침실에 두고 있어?”

    “내 얼굴이 인쇄돼서 뿌려지는 게 부담스러워서 출품을 보류할까 생각 중이었거든.”

    완전히 솔직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두 사람 사이에 별다른 일이 없었다는 건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정말 몹쓸 짓을 했다면, 오빠 성격상 절대 이렇게 뻔뻔하게 잡아떼지는 못할 테니까.

    미현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수긍이 되는 건 아니었지만, 물러날 때가 되었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 결혼이 예상보다 만만치는 않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미현의 기세가 누그러들자 이원도 한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회사 일이 바쁘다고 모처럼 휴가 나온 너에게 너무 무심했어. 미안하다. 지금부터라도 남은 휴가는 너하고 같이 보낼게.”

    미현은 떨떠름한 표정을 싹 지우고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터지기 일보 직전, 간신히 휴전이 성립되었다.

    이원은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며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현이하고 얘기 좀 한 다음에 집에 데려다주고 오겠습니다. 다들 내려가서 주무세요.”

    이원은 한 손으로 미현의 어깨를 감싸 안고 침실 문을 닫았다. 문을 닫기 직전, 그의 시선은 아주 잠시, 1층으로 향하는 계단 쪽에 머물렀다.

    * * *

    아저씨의 침실의 불은 한참 동안 꺼지지 않았다. 우연은 2층 창밖으로 비치는 불빛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지 상상했다. 무슨 짓을 하고 있을지 상상했다. 밀가루는 체에 치면 칠수록 고와지고, 상상은 거듭할수록 나쁜 쪽으로 쌓여 간다.

    두 사람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아직도 싸우고 있을까. 화해를 했을까. 화해했으면 혹시 키스를 하고 있을까. 아니, 섹스라도 하는 걸까.

    미칠 것 같았다. 상상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 상상이 된다. 머리를 벽에 콱콱 박았다. 벽에 귀를 대고 위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빗소리가 너무 커서, 아저씨의 침실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드드드드끼끼끼끼…….

    몇 시쯤 되었을까. 차고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벌떡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현관의 불빛으로, 원피스를 입은 여자의 실루엣이 나타난다. 그 뒤를 아저씨가 천천히 따른다. 아저씨의 실루엣은, 어깨든 허리든 머리든 다리든 일부만 보아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아저씨가 큰 우산을 받쳐 들고 여자의 머리에 씌워 준다. 아저씨의 한 손이 여자의 허리를 감싸 우산 안으로 끌어당기는 것이 보인다.

    눈을 질끈 감았다. 저 여자로 태어날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백 번이라도 영혼을 팔 것 같다. 지렁이나 바퀴벌레로 백만 번의 생애를 살아야 한대도 좋을 것 같다.

    우연은 깜깜한 어둠 속을 천천히 더듬어 2층으로 올라갔다. 침실 문이 살짝 열려 있다. 벽에 기대어 있던 두 개의 그림이 사라졌고, 항상 단정하게 접혀 있던 침대의 이불은 소용돌이처럼 뒤엉켜 있었다. 어둑어둑한 침실은 습하고 무거운 공기로 가득했고, 그 가운데 낯선 향수 냄새가 배어 있었다.

    죽고 싶어.

    기분은 항상 이렇게 갑작스럽게 곤두박질했다.

    지금 이 창문에서 휙 떨어지면 죽을 수 있을까. 이럴 때조차 눈물이 치솟는 눈깔이 증오스럽다. 대체 나는 왜 눈물이나 생각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을까.

    우연은 비틀대며 아저씨의 기도실로 들어섰다. 바닥에 주저앉아마자 저절로 목멘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느님, 저는 다시 태어난다면 저 유미현이라는 여자로 태어나고 싶어요…….”

    하느님은 뭐든지 다 하실 수 있는 분이라면서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아저씨와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여자로 태어나고 싶어요. 아저씨가 주말마다 놀러 오는 그런 집에 태어나고 싶어요. 아저씨와 키스를 할 수 있고, 허리를 감싸 안을 수 있고, 저 침대에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단 말이에요.

    그런데 하느님, 저는 왜 하필 진우연 같은 불량품으로 태어나야 했어요?

    하느님, 인생을 다시 리셋할 기회를 한 번만 더 주세요. 그때는 아저씨를 만나기 전에…….

    ……생명의 다리에서 바로 번지 점프를 할게요…….

    우연은 탁자 위에 놓인 나무 묵주를 끌어안고, 벽에 머리를 박은 채 하염없이 울었다.

    * * *

    이원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나는 아까 미현이에게 그래서는 안 되었다.

    머리를 감싸 안은 채 길게 신음했다. 아까 자신이 했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한이원이 이끄는 세경그룹은 미현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녀는 확실한 아군이었고, 강력한 동지였다. 미현의 제안에 탐욕이나 야망이 깔려 있다고 해서, 그녀가 적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Y시 재개발 사업과 동남아 해상 공항 수주 작업에 세경건설의 사활을 걸고 올인하기로 한 이상, 안정적인 지분 확보는 필수였다. 그러니 망하려고 작정한 게 아니라면, 절대 미현을 적으로 돌려선 안 되는 상황이었다.

    물론 미현을 배우자로 신뢰하지는 않는다. 모리스와 관계를 정리하지 않는다 해도 더 이상 고통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배신감도 들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자신에게 유리할지를 계산할 뿐이었다. 이런 자신이 경멸스러워도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는 우연을 보는 순간, 머릿속에서 퓨즈가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우연을 감싸 안고 미현을 후려치려는 마음을 누르기 위해 이원은 혼신의 힘을 다해야 했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놀랐을까. 나도 없을 때, 누가 막아 줄 틈도 없이 봉변을 당했는데, 그 겁 많은 아이가, 얼마나.

    미현의 집에 도착하니 새벽 3시 반이 넘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미현에게 짧게 입을 맞췄다. 훅, 미현이 그의 머리를 끌어당기면서 입맞춤이 깊어졌다. 우산 밖에서는 여전히 폭포처럼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이원은 눈을 지그시 감고 그 시간을 버텼다. 자신이 더러운 남창처럼 느껴졌다.

    “내일 전화해, 오빠.”

    기분이 풀렸는지, 미현의 얼굴에는 화사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켰다. 극도로 피곤한데, 잠은 오지 않는다. 머리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고,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선다.

    미현의 눈에 거슬리지 않게 드레스 룸에 넣어 둔 그림들을 다시 꺼내 벽에 세웠다. 침대에 앉은 채 그림들을 멍하니 바라보니, 다시 기가 막혔다.

    이제 저 그림들만 보면, 아랫배에서 욕구가 지글지글 끓어올랐다. 우연이 이원에게 추출한 색(色)이든, 스스로의 몸에 치덕치덕 바른 색이든, 한결같이 선정적이고 도발적이다.

    이원은 자신과 우연의 내면에 깃든 저 색의 존재를 도저히 부인할 수 없다. 저 야하고 비현실적인 색깔들은 이제 대놓고 그를 충동한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자신이 더럽게 느껴졌지만, 욕정을 누를 수는 없었다.

    역겹다.

    그는 머리를 움켜잡고 허리를 숙였다.

    * * *

    ……여기가 어디지?

    퍼뜩 정신을 차린 우연은 잠시 두리번거렸다. 부드러운 어두움. 고요히 가라앉은 공기. 낯선 곳이지만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어스름한 빛으로 작은 나무 탁자와 성서, 방석, 벽에 걸린 나무 십자가들이 뒤늦게 하나씩 눈에 들어온다.

    아, 맞다. 기도실에서 한참 울다가 잠이 들었다. 우연은 버석대는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으음.”

    귀가 쫑긋 곤두선다. 그러고 보니 노랗게 빛이 들어오는 환기창 틈으로 아저씨의 잠꼬대가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귀여워서 우연은 저도 모르게 조금 웃었다. 잠꼬대 소리는 나른한 듯, 달콤한 듯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아저씨 들어오셨구나.

    내가 내려올 때까지만 해도 대판 싸울 분위기였는데 다정하게 바래다주고 온 걸 보니 그래도 화해는 했나 보다.

    ……아까 방에서 길게 시간을 보내시던데, 혹시 섹스하면서 화해를 하신 건 아닐까.

    아니, 화해를 하기 위해서 섹스를 하신 건 아닐까.

    그런 추잡한 생각만 하는 자신이 미웠다. 하지만 그 생각이 너무 강렬해서 도저히 눌러 넣을 수가 없었다.

    “후우. 으으…… 으음.”

    잠시 후, 아저씨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 들어온다. 다시 들으니 잠꼬대가 아니라 앓는 소리 같다. 우연은 눈썹을 찌푸렸다.

    어디가 아프신가? 어제 밤새 못 주무셔서 피곤하신가? 비 맞고 오셨다가 몸살이라도 나셨나?

    우연은 작은 탁자 위로 올라가 환기창을 들여다보았다. 손가락으로 블라인드 한 칸을 들어 올리자 낯익은 침실의 모습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아 저런.

    하얀 가운을 느슨하게 걸치고 있는 아저씨는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고개가 툭, 툭 느릿하게 오르내린다.

    항상 단정하고 빈틈없을 것 같던 아저씨가 저렇게 졸기도 하는구나. 불면증 때문에 그냥 버티다 출근하려고 그러시는 건가? 몇 시간이라도 주무시면 좋을 텐데. 아저씨한테 반성문 쓰라고 야단칠 사람이 누가 있다고.

    안 주무시면 지금 가서 노크라도 해 볼까? 아저씨도 나한테 할 얘기가 있을 텐데.

    잠시 후 우연은 고개를 기웃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보면 볼수록 조는 모습 같지 않다. 고개와 어깨의 느릿한 움직임이 뭔가 이상하다. 등을 돌린 채 앉아 있는 모습도 어딘가 모르게 편하지 않고 뻣뻣하다. 두 다리 사이로 늘어뜨린 두 팔도 좀 어색하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게 자꾸자꾸 눈에 들어왔다. 어깨나 등이 편하게 늘어진 것이 아니고 경직되어 있다. 가운도 한쪽 어깨가 헐렁하게 풀어진 채 흐트러져 있다.

    더욱 신경이 쓰이는 것은, 자신의 그림이었다. 드레스 룸에 놓여 있던 자신의 자화상과 딸기 무스케이크 그림이 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와 있다. 약혼녀 언니의 비위를 거스를까 봐 치워 놓았다가 다시 내놓은 모양이었다.

    “으음…….”

    아저씨가 자세를 옆으로 비틀더니 고개를 수그린다. 옆얼굴이 슬쩍 드러난다. 눈을 꾹 감고 허리를 둥글게 굽히고 있는 아저씨는, 이를 지그시 악문 채 몹시 낯선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 왜 저러시지? 어디 아프신가?

    우연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왜인지 등에서 소름이 돋고 몸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후우, 후.

    토막 난 한숨과 함께 아저씨의 등과 어깨가 좀 더 빠르게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다리 사이에 놓인 두 손도 자세히 보니 미세하게 꿈틀대고 있었다.

    후으, 후으. 후.

    조용하던 호흡 소리가 우연에게 들릴 정도로 세지기 시작했다.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아저씨의 낯선 소리가 악물린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손의 움직임이 눈에 띌 정도로 커지며 아저씨의 고개가 뒤로 젖혀진다. 불빛에 드러난 아저씨의 얼굴이 너무 고통스러워 보여 우연은 깜짝 놀랐다.

    아, 아저씨, 지금 뭐 하는 거…….

    손의 움직임에 따라 아저씨의 몸도 소스라치듯 벌떡거린다. 이제는 다리 사이로 모은 두 손으로 무언가를 움켜잡고 다급하게 문지르는 것이 확실히 보인다.

    아저씨는 길쭉하고 붉은빛이 감도는 무언가를 손으로 쥐고 있었다. 위로 팽팽하게 치솟아 있는 그것은, 한 뼘이 훌쩍 넘는 길이에 우연의 팔목 정도 되는 굵기의 어떤 덩어리였는데 기름이라도 발라진 듯 번질번질 빛나고 있었다.

    저, 저게 뭐지?

    아저씨가 왼손으로 침대 시트를 더듬더듬 움켜잡는 순간, 가운이 뒤로 흘러내렸고, 아저씨의 손에 쥐어져 있던 것이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우연은 벼락을 맞은 것처럼 몸이 굳어 버렸다.

    성인 남자의 생식기, 그것도 제대로 발기한 상태의 그것을 실제로 본 적이 없었던 우연은 그대로 비명을 터뜨릴 뻔했다.

    저게 뭐지? 저게! 저게 뭐야아아!

    아저씨가 쥐고 있는 것이 뭔지, 머리로는 알겠는데, 아저씨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대충 알겠는데, 도저히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저 부분만 따서 합성한 그로테스크 엽기 영상 같다. 구역질이 치미는데, 몸이 얼어붙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저씨의 그것은 다비드상이나 누드 화보집에서 본 것과 완전히 다른 종류였다. 아빠가 사용하던 채팅 앱에서 오가던 영상에서 보았던 것들과도 전혀 달랐다.

    완전히 발기된 아저씨의 그것은 너무나도 크고, 굵고 흉측했다. 징그럽고 오싹한 것을 넘어 무시무시했다. 그것이 뿌리박혀 있는, 구름처럼 뭉쳐 있는 시커먼 수풀조차 무섭게 낯설었다.

    아저씨의 턱은 항상 말끔하게 면도가 되어 있었고, 겉으로 드러난 팔다리도 항상 대나무처럼 매끄러웠다. 우연은 저 사람이 자신이 알던 이원 아저씨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순수하고 완벽한 몸에 흉측한 괴물의 몸뚱이가 달라붙어 있는 것 같았다.

    조금 전 아저씨와 언니가 했을 이상한 짓에 대해 상상했던 이미지가 우습기 짝이 없었다. 실제 아저씨의 몸은 상상했던 것과 너무 달랐다. 머리가 징징 울린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허덕이던 아저씨가 밭게 숨을 끊으며 몸을 뒤튼다. 핫, 핫, 하아. 아아. 이제 어깨와 등, 허리, 크게 벌려진 허벅지까지 탁탁 튕기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달콤한 듯, 나른한 듯, 탁하고 고통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아, 흐, 우……연아…….”

    비명이 튀어나올 뻔했다.

    나, 나를 본 거야?

    아니다, 본 게 아니다. 혼잣말이다. 아저씨는 여전히 눈을 꽉 감은 채 온몸을 떨고 있었다. 자신의 이름은 한 번, 그리고 끄트머리 토막이 한 번 더 흘러나왔다.

    우연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숙였다. 뭉개진 신음이 밭은 숨소리와 함께 끝없이 흘러 들어왔다. 우연은 입을 막은 채 기도실 밖으로 살금살금 빠져나왔다.

    더 보아서는 안 된다. 더 들어서도 안 된다. 그건 아저씨에 대한 모욕이다. 아저씨를 생각해서라도…….

    ……아니, 나를 생각해서라도 보면 안 된다.

    우연은 휘청대며 간신히 방으로 들어왔다. 비라도 흠뻑 맞은 듯, 온몸에 땀이 흥건했다. 몸이 덜덜 떨려 주체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눈을 힘껏 감아도 아저씨의 그 뒷모습이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강렬한 욕구에만 사로잡혀 있는, 난생처음 보는 아저씨의 모습. 우연아, 아, 우연아, 그 야릇한 신음을 생각하는 순간 온몸에 아랫배와 허벅지가 확 오그라들었다.

    소름 끼쳐! 소름 끼친다고!

    왜? 뭐가 소름이 끼쳐? 남자들은 다 하는 짓인데. 아저씨도 남자인데.

    무서워? 끔찍해? 더러워?

    ……좋아?

    저 욕구를 받아들일 대상으로, 아까 그 약혼녀 언니가 아닌 나를 떠올린 게 좋아?

    ……좋아.

    그냥, 눈물이 났다.

    이원은 다급하게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아, 아, 아아. 손이 빨라질 때마다 발작처럼 허리가 튕겨 올라갔다. 포경 시술을 하지 않아서인지, 그의 성감은 지독하게 예민해서 완전히 발기했을 때에는 그 점막 주변으로 숨결이 스치는 것만으로도 허리가 비틀리고 신음이 터졌다. 매끄러운 오일에 적셔진 손가락 끝으로 요도 주위를 문지르자, 강한 전류라도 흐른 듯 엉덩이와 허벅지가 푸들푸들 떨렸다. 아랫배와 허벅지 안쪽에서부터 익숙한 쾌감이 서서히 몰려들기 시작한다.

    “하, 핫, 우……, 하윽.”

    입에서 맴돌던 이름이 연거푸 튀어 나가는 것을 이를 물고 막았다. 아랫배와 허벅지에서부터 손안으로 익숙한 쾌감이 서서히 몰려들기 시작한다.

    우연의 얼굴이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눈물에 얼룩지고 붉게 멍든 얼굴을 보는 순간 그대로 미쳐 버리는 것 같았다. 그림을 볼 때마다 나신으로 쓰러진 아이를 안아 올릴 때, 발작하는 아이를 끌어안을 때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옷에 가려진 아이의 깊은 하반신까지 상상하고, 그 속으로 밀고 들어가려는 본능과 필사적으로 싸우며 그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이건, 재앙이다.

    이 미친 욕구의 기저에 약혼녀인 미현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머릿속은 이 순간 절대 떠올리지 말아야 할 것들로 꽉 차 있다. 이것들을 말끔히 지울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것 같다. 아니, 이대로 백치가 되어도 좋을 것 같다.

    이원은 이제 한 손으로는 다 감싸지지 않을 만큼 크게 부푼 살덩어리를 두 손으로 힘껏 움켜잡았다. 피가 잔뜩 몰려 예민해질 만큼 예민해진 데다,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세게 문지를수록 비명이 나올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차라리 더 아팠으면 좋겠다. 정신이 번쩍 나도록. 이 환멸스러운 쾌감을 덮을 만큼 끔찍한 고통이라도 와서, 이 정신 나간 욕구를 상쇄시키면 좋겠다.

    몸을 난도질하는 듯한 고통과 요란한 쾌감이 귀두와 그 뒤에 몰려 있는 성감대에서 한꺼번에 들끓는다. 하반신이 유리처럼 녹아 흘러내릴 것 같다. 간지럽고 폭발할 듯한 느낌이 몸의 끝자락에서부터 허벅지와 엉덩이로, 아랫배와 성기 끝으로 자근자근 모여든다. 하으, 으윽, 이제 신음은 목이 졸리는 듯한 비명에 가까워진다. 손끝이 근지럽게 저리고 오금과 종아리, 발가락 끝으로 힘이 쫙 뻗쳐 들어간다. 결국 온몸을 해일처럼 뒤덮는 것은 눈앞을 하얗도록 물들이는 그 극심한 쾌감, 단 한 가지뿐이었다.

    “아아, 우……연, 아, 흐으.”

    결국, 눌러두었던 이름과 함께, 희끄무레한 액체가 몸 밖으로 튕기듯 빠져나간다. 한 번, 두 번, 세 번, 사정이 끝날 때까지의 시간은 길었고, 새하얀 시트는 사방팔방 질척한 점액으로 뒤덮인다.

    그는 헤드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벌린 채 오랫동안 몸을 떨었다. 흉하게 부풀어 오른 살덩어리는 오랫동안 꿈틀거렸고, 요도 끝의 작은 구멍이 맥박을 따라 벌름대며 허연 체액을 꾸역꾸역 토해 놓는다. 그는 이를 악문 채 울음을 삼키듯 목으로 신음했다. 얼룩으로 주변이 난장이 된 후에도 아랫배와 허벅지는 한참 동안 더 발작했다.

    하아…….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린 땀이 턱을 타고 내려가 축 늘어진 성기 위로 툭툭 떨어진다. 옆에 놓인 티슈를 한 뭉텅이 잡아 뽑았다. 더러운 점액을 뒤집어쓴 시체 같은 살덩어리가 끔찍해서 견딜 수 없었다. 사정이 끝나 지독하게 예민해진 부분에 손이 닿자마자 허리가 비틀리는 것을, 벌을 주는 것처럼 더욱 힘껏 문질러 댔다.

    더 끔찍한 것은, 이게 시작이라는 거였다. 그의 몸은 열기가 한번 끓어오르면 여간해서 식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눌러 두었던 욕구는 한 번 튕겨 나오는 순간부터 폭주하기 시작해서, 몸을 한계까지 몰아붙인 후 정신을 잃을 지경이 되어야 놓아주곤 했다.

    이원은 질척해진 티슈 뭉치를 던져 버리고 다시 성기를 잡았다. 이제 막 끓어오르기 시작한 아랫배의 흥분이 전신의 혈관을 미친 듯이 두들기며 날뛴다. 그는 이럴 때면 자신이 충동 조절 장애나 성욕 도착자, 본능밖에 없는 짐승처럼 느껴진다. 다른 사람들은 한번 사정하면 허탈할 정도로 욕구가 사라진다는데, 자신의 욕구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꼬리가 긴 데다 집요하고 음험하기까지 했다.

    손안에 쥐어진 것으로 다시 뻐근하게 피가 몰리기 시작했다.

    * * *

    새벽이 되어, 이원은 침대 위에 그대로 늘어졌다. 팔다리가 낙지처럼 축 늘어진다. 시트와 가운, 속옷은 뿌연 점액에 얼룩져 주변이 온통 진창이고 몸은 끈적한 땀과 체액으로 범벅인데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난 지금까지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끝끝내 우연을 떨쳐 낼 수 없다. 몸이 녹아 문드러질 것 같은 순간까지 우연의 모습이, 그녀에 대한 더러운 욕망이 뇌에 달라붙어 떠나지 않는다. 생각하면 안 되는 것들을 도저히 떨칠 수 없었다. 의지와 이성에 반하여 계속 엇나가는 하반신을 찍어 내고 싶을 만큼 저주스러웠다.

    너 지금 뭘 어쩌자는 거야. 미현이하고 결혼도 집어치우고 그 아이와 결혼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회사 지분도 경영권도 죄다 날리고?

    아니잖아. 그런데 너 지금 대체 뭐 하는 짓이야? 우연이가 어려서 선을 긋지 못하고 감정에 휩쓸리면 네가 막아야지, 네가 더 흔들리면 어쩌려고.

    너, 설마…… 너도 미현이랑 똑같은 방식으로 우연이를 곁에 두면 어떨까, 하는 거야?

    미친 소리! 지금 네가 제정신이야?

    엄한 목소리는 더욱 단호하고 차가워진다.

    지금 네가 원하는 건 죄다. 명심해.

    이원은 머리를 감싸 쥐고 신음했다. 자신이 아주 나락까지 굴러떨어진 것이 실감이 된다.

    그래. 신부님의 말씀이 맞다. 이제 한시라도 더 붙어 있으면 안 된다.

    ……갈라서야 했다. 그때, 그날 아침이라도.

    아까 미현에게도 그따위로 협박해서는 안 되었다. 하다못해 하청을 받는 바이어에게도 그런 식으로 몰아붙이지는 않는다. 그건 동지를 하루아침에 적으로 만드는 지름길이다.

    평소의 나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방식으로 경고하고 세련되게 수습할 수 있었다. 미현은 어리석은 여자가 아니니 우연에게 제대로 사과하고 보상하는 것으로 차분히 마무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연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니 이성이 하얗게 증발했다.

    나는…… 아까 그래서는 안 되었다.

    나는…… 지금 이래서도 안 되었다.

    이원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온통 질척하게 젖어 있는 시트와 티슈 뭉치, 엉망으로 흩어진 이불과 번질번질 점액으로 뒤덮인 아랫배와 허벅지가 눈에 들어왔다. 바닥이 빙, 돌며 몸이 휘청했다.

    난, 인간도 아냐.

    이원은 이마를 벽에 댄 채 힘없이 웃었다.

    창문을 활짝 열어 냄새를 빼고, 정액으로 범벅이 된 가운과 속옷, 시트, 이불을 모조리 걷어 세탁 바구니에 던져 넣은 후 샤워실에서 뜨거운 물을 틀었다. 피부가 벌게지도록 뜨거운 물을 맞으며 몸을 씻어 내는데도 도무지 더럽다는 느낌이 사라지지 않는다.

    거울 속에선 낯선 사내 한 명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흠뻑 젖은 머리에서 물방울이 줄줄 떨어지고, 얼굴은 정액의 빛깔처럼 창백했다. 이원은 거울에 손을 짚고 웃기 시작했다. 우연은 자신을 볼 때마다 잘생겼다, 멋지다 노래를 하는데, 이원은 그저 역겹기만 했다.

    “……바로 사무실로 나가야겠다. 거기서 눈을 붙이면 좀 낫겠지.”

    아침에 우연을 볼 자신이 없었다. 아니, 이제는 보면 안 될 것 같다. 보면 볼수록 증상은 더욱 악화될 것이고, 상황을 수습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마저 잃게 될 것이다.

    “……음?”

    셔츠와 넥타이를 꺼내 들던 이원은 문득 손을 멈췄다. 보호 비닐에 곱게 싸여 옷장 구석에 걸려 있는 긴 옷이 눈에 들어온다. 작고 동그란 단추가 빼곡히 달린 검은 통옷과 허리에 두르는 파시아. 목을 감싼 검은 스탠딩 칼라 사이로 설핏 보이는 순백의 로만 칼라.

    신부님들이 입는 수단이었다.

    흐, 흐, 흐흐흐.

    이원은 실성한 듯 웃으며 수단을 꺼내 들었다. 오래전 신학교에 입학할 때 아버지 몰래 마련해 둔 것이었다. 결심이 흔들린다고 느껴질 때마다 한 번씩 꺼내 보며 마음을 다스려 왔다. 사제의 길을 포기한 후에도, 이 옷은 여전히 거룩하고 옳은 삶에 대한 지표이자 상징으로 여전히 그의 곁에 남아 있었다.

    생각해 보면 웃긴 일이다. 그 길을 포기했으면 얼른 처분할 것이지, 무슨 미련 청승을 떠느라고 이걸 아직까지 남겨 두었을까.

    속에서 이죽대는 소리가 들린다.

    웃기는 놈. 넌 자학이 취미냐?

    이원은 비웃음에 맞서 싸우는 대신 그것을 곱게 접어 가슴에 안았다.

    나는 이제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이 옷이 곁에 남아 있는 것이 죄스럽고 불편하게 느껴질 만큼.

    내가 어떤 놈이란 걸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하긴, 나도 나를 잘 몰랐으니.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원은 수단을 두 팔로 안은 채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비틀비틀 아래층으로 내려간 이원은 거실 벽에 설치된 벽난로에 장작을 몇 개 집어넣은 후 점화 스위치를 넣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사방은 어두웠고, 깨어 있는 사람도 없어, 넓은 집은 무덤 속처럼 조용했다.

    따르르, 딱, 딱.

    화르르르.

    투명한 유리 너머로 자그마한 불덩어리가 치솟으며 주변을 동그랗게 밝혔다. 이원은 장작으로 불이 옮겨붙을 때까지 한참 동안 불꽃을 쳐다보았다. 일렁대는 불규칙한 움직임이 생각을 마비시키는 것 같다.

    “아저씨.”

    숨결만큼이나 희미한 소리에 이원은 퍼뜩 소스라쳤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자신은 여전히 어둑어둑한 거실 구석에 혼자 서 있다.

    ……헛것을 들었나?

    순간 조금 더 선명해진 소리가 귀에 와 닿는다.

    “아저씨. ……아저씨.”

    이원은 눈을 크게 뜨고 우연의 방이 있는 방향을 응시했다. 복도는 여전히 어둠에 묻혀 있지만, 부연 형체가 천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가슴에서 쾅쾅대는 소리가 난다. 기대와 흥분으로 신경이 바짝 날이 선다.

    더 이상 우연이를 보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눈은 어둠 속에서 목소리의 주인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다. 이 정도면 조건 반사 아닐까. 우연을 보지 않기 위해 일찍 출근하기로 해 놓고, 고작 목소리 한 조각에 정신이 튕겨 나갈 듯 긴장한다.

    “우연이구나. 일어났니?”

    우연은 무릎까지 내려오는 새하얀 옷을 입고 방문 앞에 유령처럼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하얀 옷은 자신의 드레스 셔츠다. 우연이 쓰러졌을 때 급하게 벗어서 감싸 주었던 옷.

    우연은 세탁할 때를 제외하면 그 셔츠를 절대 내놓지 않았다. 그리고 밤에 항상 그 옷을 입고 잤다. 아무도 셔츠를 뺏어 오지 못했다. 셔츠는 너무 크고 우연의 몸은 더욱 야위어서, 나무젓가락으로 만든 허수아비가 하얀 자루를 뒤집어쓰고 허청허청 움직이는 것 같았다.

    다시 가슴이 쿵쿵대고 뛰었다. 이원은 움직이지 못했고, 우연은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다가왔다. 하지만 예전처럼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는 대신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시선을 피한다. 작고 하얀 얼굴에 불그레하게 열이 올라 있었다. 이원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내가 시끄럽게 해서 일어났구나. 미안해.”

    “……아니에요.”

    “잠은 좀 잤니?”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이제 우연은, 침묵할지언정 이원에게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몸은…… 괜찮아?”

    괜찮을 리가 없다. 어제 맞은 뺨이 여전히 붉어 보인다. 이원은 한 손으로 우연의 뺨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아파서 죽을 것 같다. 이 아이가 한 대를 맞는 것보다 자신이 백 대를 맞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이제는 누가 이 아이를 때린다는 상상만 하면, 피가 거꾸로 솟고, 그 사람을 죽여 버릴 것만 같았다.

    안아 주고 싶었다. 꼭 끌어안고 등을 두드려 주고 싶었다. 미안해, 아팠지. 얼마나 아팠니. 하지만 이원은 필사적으로 버티고 서서 더듬더듬 말했다.

    “많이, 많이…… 아팠지. 미안해. 미안해 우연아, 내가 있었어야 했는데…….”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어제 미현이가, 정말 미안하다고, 전해 달라고, 와서 보상하고 직접 사과하고 싶다고…….”

    “아뇨. 안 와도 돼요. 사과도 보상도 다 필요 없어요. 절대 보고 싶지 않아요.”

    우연의 격렬한 거부에 이원은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그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새까만 눈동자가 이원을 흘끔흘끔 훔쳐보다가 휙 도망치기를 반복한다. 속이 격렬하게 출렁거렸다. 결국 궁금한 것이 이긴 듯, 우연이 조그만 목소리로 묻는다.

    “아저씨가 안고 계시는 게 뭔가요?”

    이원은 속으로 혀를 찼다. 페치카에 불이 붙으면 바로 태울 생각이었는데.

    “수단이라고 하는 옷이야. 신부님들이 입는 옷.”

    “한번 봐도 돼요?”

    이원은 곱게 접힌 옷을 조심스럽게 펴서 보여 주었다. 아. 맞다. 이거 본 적 있어요. 성당에 가 본 적이 없는 우연이 알은척을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어디서 봤어?”

    “영화에서 봤어요. 굉장히 멋진 모델 배우가, 네, 강동원이 신부님 역할을 해서 이 옷을 입고 있었는데, 돼지를 안고 뛰는데도 간지가 좔좔…….”

    뜬금없이 열렬한 반응에 이원은 웃었다. 우연도 말간 얼굴로 히죽대며 따라 웃는다.

    우연의 감정과 반응은 예측하기 힘든 방향으로만 튀는 럭비공 같았다. 예측 가능한 질서와 똑바른 길로만 이루어진 이원의 세계에서, 우연은 피카소였고, 달리였고, 마그리트였고, 프랜시스 베이컨이면서, 한편으로는 유쾌하고 명랑한 보테로이자 형형색색의 백일몽을 펼쳐 보이는 샤갈이었다. 그녀의 내면은 만화경 같은 무수한 색의 단면들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이거 입어 보신 적 있어요?”

    “아니. 중간에 학교를 그만둬서. 4학년 때 착의식을 해야 입을 수 있거든.”

    이럴 줄 알았으면 성소 주일에 수단 체험이라도 한번 해 볼 걸 그랬나. 수단이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이라고 믿으면서도 체험으로라도 입어 본 적은 또 없었다.

    “그럼 지금이라도 한번 입어 보세요. 그동안 내내 갖고 계셨으면서, 잘 어울리는지 궁금하지도 않으셨어요?”

    이원은 물끄러미 우연을 내려다보았다. 이 옷이 가지고 있는 깊고 무거운 의미를 전혀 모르는 아이는, 이원의 마음을 대신해서 입 밖으로 내놓는 데 별 주저함이 없었다.

    맞다. 이걸 내 손에서 영구히 떠나보내기 전에, 한 번쯤은 입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 예비 신학생들도 체험 삼아 입어 보기도 하는 옷인데.

    이원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 사제복에 천천히 몸을 밀어 넣었다. 이제는 긴장감이나 떨림이 아닌 거북함과 죄스러움만 느껴져서 서글펐다. 그래도 오기처럼 목 끝에서 다리까지 이어지는 많은 단추들을 차례차례 채우고, 복종과 순결을 상징한다는 희고 긴 로만 칼라까지 기어이 목에 끼워 넣었다.

    검은 유리창에 자신의 모습이 흐릿하게 비친다. 수단은 지나치게 검고 엄숙했고, 자신의 얼굴은 지나치게 창백하고 음탕해 보였다. 어울리지 않는다. 이원은 새삼 충격을 받았다. 순결, 헌신, 세속에서의 죽음을 상징하는 이 거룩한 옷에, 자신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진작 입어 볼걸.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옷이라는 걸 빨리 알았어야 했는데. 그러면 작년에 다시 학교로 돌아가려는 부질없는 노력을 안 했을 수도 있는데.

    생각해 보니 이 옷을 입은 모습을 보는 것은, 너 한 사람뿐이겠구나. 수단 차림의 한이원을 본 처음이자 마지막 사람. 우연은 멋있다고 환호성을 지르는 대신 조용히 그의 모습을 지켜봐 주었고, 이원은 잘 어울리느냐 묻는 대신 그녀를 향해 조용히 웃어 보였다.

    우연이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속삭이듯 묻는다.

    “아저씨, 이거 입고 기도하면 효과가 더 좋은가요?”

    “글쎄. 그건 하느님만 아시겠지.”

    이런 더러운 놈의 기도를 과연 들어주실까. 이원은 쓰게 웃었다.

    “제 생각엔 더 좋을 것 같아요. 강동원한테 기도 받는 기분이 들어서요.”

    “키 크고 잘생겼다고 효과가 더 좋아지진 않아.”

    “아니에요. 혜진이네 엄마가 그러시는데, 신부님이든, 목사님이든 일단 잘생기고 봐야 한대요. 그래야 은혜도 따따블이고 기도발도 따따블인 거래요. 그러니 아저씨 기도발이 달릴 리가 없잖아요. 죽은 사람도 벌떡 일어날 거라고요.”

    “혜진이네 어머니 성당 다니신대?”

    “그건 모르죠.”

    우연이 입을 가리고 키득키득 웃었다. 조그만 어깨를 씰룩이며, 눈을 가늘게 접고 곱게 웃는다. 희고 붉고 작은 저 얼굴이 처연하고 애처롭다. 예쁘다. 목이 졸리는 것처럼 사랑스럽다. 이 아이를 피해 도망치려 했던 생각이 말갛게 사라진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이럴 줄.

    “기도해 줄까? 지금 내 기도발이 따따블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너를 축복해 달라는 기도는 해 줄 수 있어.”

    “네. 해 주세요. 분명 따따블일 거예요.”

    우연은 기다렸다는 듯 난롯가의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두 손을 모으더니 이원을 조심스럽게 올려다본다. 시선이 맞닿을 때마다 우연의 얼굴로 붉은 물감이 한 방울씩 새로 떨어지는 것 같다. 새하얀 셔츠와 어우러진 그 선정적 조합에 이원은 눈이 부셨다.

    이원은 의자 옆에 무릎을 꿇고 앉은 후 우연의 두 손을 가만히 맞잡았다. 우연이 잡힌 손을 꼭 오그려 쥔다. 심장이 잡힌 것처럼 아팠다.

    작고 붉은 입술에서 가늘게 흘러나오는 날숨이 슈거 파우더처럼 주변에 달게 흩뿌려진다. 빛의 가루가 주변에서 반짝이며 산란하는 것 같다. 이원은 우연의 손과 자신의 손을 겹쳐 가슴에 대고 천천히 성호를 그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기도문을 읊는 동안 우연은 이원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기도가 이어지는 시간 동안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아멘, 들릴락 말락 따라 하는 우연의 손으로, 자신의 손에서 나온 땀이 축축하게 스며들었다.

    눈을 뜨고 고개를 드니, 이젠 새까만 눈동자가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나의 사정, 너의 사정, 주변의 상황 따위는 전혀 거들떠보지 않는 오만하고 독선적인 영혼은, 그만큼 자신의 열망에 대해 순도가 높았다. 다른 목소리로 혼탁해지지 않고, 순수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아저씨, 사랑해요.

    난 아저씨를 원해.

    잡음 하나 섞이지 않은 그 목소리에 숨이 막힌다. 난로의 불빛과 어스름한 새벽빛에 비추어진 우연의 모습은 이제 신비롭고 거룩하면서도 지독한 욕정을 불러일으켰다.

    더는 저항할 수 없을 것 같다. 저 가녀린 어깨를 힘껏 안고 싶었다. 으스러질 정도로 단단히 안고, 몸의 구석구석을 낱낱이 집어삼키고 싶었다. 저 작은 몸이 부서질 정도로 내 몸을 밀어붙이고 싶었다. 이 욕구가 옳지 않으며 큰 죄라는 것을 알지만, 상상은 하염없이 달콤하고 잔인했다.

    너는 독이다. 달콤한 맹독이다.

    신부님 말씀이 맞다. 네 곁에 있으면 안 된다. 보아서도 안 되고, 들어서도 안 되고, 상상해서도 안 된다. 오늘 너를 안고 싶다고 생각했으면, 내일은 너를 안을 것이고, 모레는 너를 정부로 삼아 곁에 놔둘 집을 구하려 할 것이다.

    지금 이곳이 나에게 허락된 마지노선일 것이다.

    내 생각은 지금까지 충분히 짐승 같고 충분히 악했다.

    이원은 벽난로 앞에 서서 파시아를 풀고 스무 개가 넘는 단추를 천천히 풀었다. 어제 일로 많이 지쳤는지, 우연은 평소와 달리 그가 옷을 벗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희고 둥근 로만 칼라를 빼서 잠시 들고 있으라고 내주자 신기한 듯 이리저리 둘러본다.

    “이게…… 뭔가요?”

    “로만 칼라라고 해. 순결과 복종을 상징하는 거야.”

    눈앞에서 불꽃이 탁탁 소리를 내며 타오른다. 여름이라지만 아직 선선한 새벽인데, 이원은 눈앞의 작은 불꽃에도 벌써부터 더웠다.

    난로의 문을 열고 활활 타오르는 장작 위로 수단을 집어넣었다. 옷은 순식간에 후르르 뒤틀리며 커다란 불꽃으로 화한다. 아저씨? 놀란 듯 숨을 들이쉬는 우연의 목소리가 아팠다.

    “이것도 버려요?”

    우연은 왜 버리세요, 하고 묻지 않았다. 이원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어떤 주저함도 없이 로만 칼라를 불 속으로 집어 던진다. 순결하고 아름답고 거룩한 것에 대한 어떠한 미련도 없는 아이다웠다. 탁탁. 틱, 틱. 후르르. 발갛게 달아오른 인두가 목구멍을 지그시 눌러 대는 것 같다. 이원은 지독한 통증을 신음 없이 기어이 삼켰다.

    지금 해야 할 말이 있다. 조금만 더 지나면 이 말을 꺼내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지금이 아니면, 이 순간이 아니면.

    “미안한데, 우연아. 내가 바쁜 일이 생겨서 당분간 집에 못 올 것 같아.”

    “집에도 못 오실 정도로 바빠요?”

    “응. 대규모 재개발 문제도 있고, 해외 공항 건설 입찰 준비 건도 있어서 당분간 정신없을 거 같아.”

    방학 끝날 때까지만. 너를 학교로 돌려보낼 때까지만이라도.

    이원은 다시 신음했다. 너는 과연 학교에서 안전할까. 그곳은 아빠가 알고 있는 장소이고, 이곳은 그나마 안전한 성 같은 곳이었는데.

    하지만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우연이나 자신은 이미 출입 금지 경계선을 지나 낭떠러지 앞까지 와 버렸다. 이제는 한 걸음도 더 나가면 안 된다.

    “기숙사 다시 개방할 때까지 여기 있으면서 치료 꼬박꼬박 받고, 밥 잘 챙겨 먹도록 해. 그림은, 밥도 먹고, 잠도 자면서 그려야 해.”

    “네.”

    “개학하고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겠니?”

    “……노력해 볼게요.”

    “무리할 건 없어. 아빠는 접근 금지 명령을 한번 어긴 상태라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겠지만, 정 불안하면 휴학하고 찬찬히 생각해 봐도 돼. 무슨 일이 생기면 아저씨한테 바로 전…….”

    이원은 얼른 말을 돌렸다.

    “정 관장이나 최 실장, 아니면 송 할머니에게 바로 전화해.”

    “아저씨한테 직접 전화하면 안 돼요?”

    우연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이원은 입술을 조금 떨었다. 자꾸 다른 말이 튀어나오려 한다.

    “……아저씨가 너무 바쁘면 바로 연결되지 못할 수도 있어. 그래서.”

    눈앞에서 보이지 않으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사실이기를 간절히 빌었다. 벼락처럼 찾아온 감정이니, 벼락처럼 사라지기를 빌었다. 아니, 차곡차곡 쌓였다 터진 감정이라 해도, 차디찬 심해에서 폭발한 마그마처럼 빠르게 식어 돌로 굳어 버리기를 바랐다.

    “걱정 마세요. 전화 절대 안 할 테니까, 열심히 일하세요. 돈 많이 버셔야지요.”

    잠시 침묵하던 우연이 고개를 들고 배시시 웃더니 답삭 팔짱을 낀다. 그리고 머리를 기대고 어깨를 가만히 비빈다.

    정신이 아뜩해진다. 이 자리에 이렇게 선 채 그대로 죽어 버릴 것 같다.

    이 여름이 끝날 때쯤이면 과연 괜찮아질까.

    어둠은 점점 옅어져 가고, 창문으로 부연 새벽빛이 차근차근 밀려든다.

    그러고 보니 언제 비가 그쳤던가.

    틱, 틱, 툭툭, 불꽃이 튀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 두 사람은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가만히 난로를 바라보기만 한다. 던져 넣은 옷은 흔적도 남지 않고 깨끗하게 사라졌다. 이원은 눈앞의 좁은 어깨를 으스러지도록 감싸 안으려는 욕구를 참기 위해, 발가락이 새하얗게 물들 때까지 힘을 주었다.

    비는 잠시 멈추었지만, 날은 여전히 흐릿하고 공기는 무거웠다. 태풍의 눈에 들어온 것처럼, 사방은 그리도 고요했다.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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