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우연은 눈앞에 놓인 전신 거울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거울 속에서는 100호짜리 커다란 캔버스가 벽에 기대어 놓여 있고, 그 옆에서는 비쩍 마른 여자가 옷을 벗은 채 엉거주춤 서 있다.
나 원래 이렇게 형편없고 볼품없이 생겼었나?
내 몸이 이렇게 비쩍 마르고 볼품없을 줄은 몰랐다. 일단 집에는 전신 거울이 없었고, 공중목욕탕에도 가 본 적이 없었거니와, 무엇보다 몸에 항상 들러붙어 있던 얼룩덜룩한 자국이 깡마르고 흉한 몸매를 자각하지 못하게 했다.
아저씨를 만나기 전까진, 우연의 몸뚱이는 미술 수업이 끝난 후의 팔레트처럼 늘 지저분하게 얼룩져 있었다. 멍의 색깔은 천천히 변하고 느리게 빠져 나갔다. 새로 생긴 빨간 자국은 잠시 후 먹물처럼 까매졌다가 며칠 후 보라색으로, 그리고 차츰 푸르게 변한 후 누르스름한 흔적이 되었다. 하지만 깨끗한 색으로 복구되기 전에, 어김없이 새로운 멍 자국이 생겼다.
얼룩이 사라진 몸은 볼품없는 윤곽을 그대로 드러냈다. 키는 작고, 가슴은 발육이 되다 만 것 같고, 팔다리는 겨울철 나뭇가지처럼 앙상하고, 허리는 한 줌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아저씨가 허리를 한 손으로 쥐고 비틀면 척추가 꺾이고 말 것이다.
밤마다 라면을 먹으면 몸이 붓는다는 건 다른 세상 이야기였다. 지독한 야행성 체질, 불규칙한 생활, 무언가에 몰두하면 먹는 것조차 잊고 빠져드는 기질 탓인지 피부는 거칠고 몸은 근육 하나 없이 비쩍 곯았다.
……내가 대체 어디가 예쁜 걸까?
우연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 * *
자화상을 그리겠다는 말을 했을 때, 아저씨는 꽤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었다. 우연은 얼른 덧붙였다.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세요. 원판이 별로 안 예쁘니 아저씨 초상화처럼 멋지게 나오진 않을 거예요.”
“거기서 어떻게 더 예쁘니?”
무심하게 되묻던 아저씨의 말이 툭 끊어진다. 아저씨는 이런 비슷한 실수를 벌써 몇 번이나 했는데 아직도 고치지 못했다. 우연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난감해하는 아저씨를 힐끔거렸다. 조금 뻣뻣해진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 그게, 네가 예쁘다는 말이 아니라…… 아니 그게, 안 예쁘다는 게 아니라.”
“아저씨 요즘은요, 예쁘다 안 예쁘다 함부로 얘기하시면 비매너예요. 속으로만 생각하시라고요. 회사에서 그런 교육 안 받으셨어요?”
“아, 미안. 미안해.”
그걸 또 곧이곧대로 사과를 하신다. 우연이 키득키득 웃어 대자 아저씨는 조금 불그레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아저씨의 얼굴에서 천천히 웃음이 사라진다. 눈썹이 가늘게 떨리는 것 같다. 왜일까, 아저씨의 눈이 긴장한 듯 느껴지는 것은. 아저씨가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네가 나하고 가까운 사람이었으면 좋았겠다. 이런 얘기 정도는 편하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음, 그러니까…… 네가…….”
난데없는 말에 우연은 조금 긴장했다. 아저씨는 자신을 말끄러미 응시하는 우연을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맺었다.
“내 딸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면 누이동생이나.”
거짓말.
우연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오감은, 귀로 들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말을 들을 때가 있다. 원래 나오려던 말은 당연히 저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것은 우연과 거리를 유지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일 뿐이다.
“그러면 이 허허로운 집안에 웃음이 끊일 날이 없었겠지. 우연이 너도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구김 없이 자랐을 거고, 힘든 일 따위는 하나도 겪지 않았을 거고.”
아저씨는 그 요란하고 난데없는 색으로 가득한 초상화를 본 후, 큰 풍랑에 휩쓸린 듯했다. 저 되바라진 아이에게 끌려 나온 이상한 색깔의 감정, 선명하게 까발려진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아저씨가 기껏 한 짓은, 나에게 ‘사랑해.’라는 말을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구차한 상상을 해 보는 것뿐이었다.
아저씨 딸로 태어났으면 좋았겠다고? 정말 좋았을까?
물론 아저씨는 딸에게 아침저녁으로 뽀뽀를 해 주고, 이야기를 들어 주고, 손을 잡고 기도를 해 주고, 사랑한다고 말해 줄 것이다.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렇게 해 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랑해.’라는 말은, 우연이 듣고 싶어 하는 ‘사랑해.’와 천만 광년쯤 떨어진 곳에 있는 말이었다. 우연은 부루퉁한 어조로 툭툭 말했다.
“저는 아저씨 딸로 태어나고 싶지 않은데요.”
“아, 그러니?”
아저씨가 머쓱하게 얼버무린다. 우연은 가차 없이 환상을 깨뜨리기 시작했다.
“아저씨가 뭘 모르셔서 그러시는 거예요.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전 딸로 삼고 싶을 만큼 그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아니었어요.”
“…….”
“정말 제 아빠였다고 생각해 보세요. 머리 나쁘고, 정신도 맛이 간 거 같고, 예의도 상식도 없고, 거짓말이나 찍찍 하고, 아빠 약점 잡는답시고 이상한 앱이나 뒤지고 다니고, 아무리 맞아도 나쁜 버릇을 고치지 않는 딸이라니. 저 같은 딸을 키우셨다간, 서른부터 혈압 약 신세를 지셔야 했을 거예요. 별로 권장 사항이 아닌 거 같아요.”
아저씨는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우연아.”
“네.”
“일부러 그런 말만 골라서 하지 않아도 돼. 너는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였을 거야.”
“…….”
“난 너를 하느님께서 세상에 보내 주신 선물과 같은 존재라고 항상 생각해 왔어. 너는 눈부신 재능이 있는 사람이야. 그러니 너무 자학하는 말은 하지 않으면 좋겠어. 나하고의 인연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지만…….”
눈부신 재능이 없었으면요? 재능이 없으면 저는 아저씨에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가요?
겁에 질린 반문을 우연은 용케 참아 넘겼다. 그것을 입 밖으로 냈다간 완전히 진실로 확정될 것만 같았다.
“이거 하나는 그래도 기억해 줘. 아저씨는 네 보호자로는 정말 많이 부족하고 경험도 모자랐지만, 그래도 너를 돌보는 짧은 시간 동안 최선을 다했어. 너를 아끼고 걱정하고…… 사랑했던 시간이 기쁘고 행복했어.”
우연은 웃음을 멈췄다. 그의 입속에서 눌려 있던 말들이 조금씩 꿈틀거린다. 아저씨는 신중하게 선을 가늠하며, 한 마디, 한 마디 말을 이어 갔다.
“우리에게 허락된 인연이 다한 후에도, 너를 위해 항상 기도하마. 너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너에게 큰 힘이 되어 줄 거라고 믿어. 그럼 나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어.”
우연은 아저씨의 대답을 입속으로 천천히 뇌었다.
너를 아끼고, 걱정하고, ……사랑했던 시간.
‘사랑’……이라고.
이 말은 내가 원하는 그 말이 아니다. 같은 낱말이지만, 영원히 닿지 못할 반대편에 놓인 말이다. 꿈과 꿈이 같은 말이지만 영원히 닿지 못하는 곳에 존재하듯이.
시선이 맞닿는 순간, 아저씨의 눈이 살짝 벌어진다. 그 사이로 여전히 황홀하게 아름다운 세피아, 그 깊고 우아한 빛깔의 눈동자가 아주 짧은 순간 바르르 흔들렸다가 질끈 감기는 눈꺼풀 속으로 사라진다.
아마 아저씨는 모를 것이다. 지금 자신의 뺨으로 물컵에 핏방울을 떨어뜨린 것처럼 붉은 기가 퍼져 나가고 있다는 것을, 턱으로 복숭아씨의 자디잔 무늬가 선명하게 올라온 것을.
아저씨는 솔직하지 않아요.
우연은 아저씨가 필사적으로 부정하려는 마음을, 기어이 끌어내고 싶은 열망을 느꼈다. 아저씨는 거짓말을 한 건 아니다. 다만 자신을 속이는 것으로 세상 모두를 속일 뿐이다. 우습게도 그것은 아저씨의 행복과 반대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대로 놔두면 아저씨는 그 아름다운 약혼녀 언니와 결혼할 것이다. 더 맞춤한 조건을 찾기도 어려울 거고, 모든 걸 집어던지기엔 한이원이라는 사람 자체가 너무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다.
아저씨는 그 언니를 사랑할 것이다. 원하는 것을 억누르고 자신을 속이는 데 너무 능숙한 아저씨는 결국 그 언니를 사랑한다고 믿고야 말 것이다. 어쩌면 행복해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행복하다고 믿어질 때까지 자신을 세뇌하고야 말 테니까.
우연은 다시 웃었다. 자신의 의지대로 최면에 걸린 아저씨는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고 인내하며 하루하루, 차근차근 바삭바삭 말라 가며 불행해질 것이다.
나의 눈에도 잘 보이는 미래를 아저씨는 왜 보지 못할까?
아저씨는 남은 긴 세월을 살아가기 전에, 반드시 자신의 심연과 직면해야 한다. 자신의 밑바닥에서 꿈틀대는 진짜 목소리를 듣고, 자신의 감정을 용감하게 직시해야 할 것이다.
나는 나를 모두 드러내어 고백하고, 유혹하며, 간절히 손을 내밀어 볼 것이다. 아저씨에게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줄 것이다.
나는 아저씨의 마음을 끌어낼 수 있을까. 그 무겁고 혹독한 최면을 깨 줄 수 있을까.
아저씨는 감당할 수 있을까. 마음을 두르고 있는 갑옷이 모조리 벗겨졌을 때, 자신에게까지 숨겨온 내면이 벌거벗겨진 채 사람들 앞에 끌려 나왔을 때 아저씨는 과연 어떻게 하실까. 외면하고 모르는 척 버티실까? 아니면 용감하게…… 새로운 선택을 하실까?
우연은 눈꼬리를 가늘게 접으며 활짝 웃었다.
“제 자화상, 기대하세요.”
* * *
“최 실장님, 지난번 우연이가 이 초상화 작업할 때, 시간이 어느 정도 걸렸습니까?”
침실에 숨겨 두었던 <붉은 수국과 분홍색 딸기 무스케이크>가 방금 서재로 끌려 나온 참이었다. 물결무늬 유리창을 투과한 숨 죽은 빛이 그림에 닿자, 화려하고 도발적인 색이 활짝 피어난다. 색깔들이 와글와글 미친 듯이 떠들어 대는 것처럼 보인다. 그림 속의 이원은 탐욕스러운 색들의 향연에 믿을 수 없을 만큼 잘 어울렸다.
홍연은 기억을 더듬으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작업하는 걸 직접 본 게 아니라 정확히는 모릅니다만, 한숨도 안 자고 작업했다면 60시간 남짓 들었을 겁니다. 금요일 오후부터 월요일 새벽까지요.”
“60시간이라…….”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이원은 시선을 여전히 그림에 둔 채 물었다.
“극사실화인데, 그게 정말 가능할까요?”
“가능할까요, 라고 의심하시기엔, 그 증거가 확실하게 눈앞에 있지 않습니까?”
“……그렇죠.”
“굳이 설명을 붙이자면 아크릴 작업이라 건조가 빠르기도 하고, 아웃 포커스와 배경 부분은 흐릿하게 처리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수도 있습니다만……. 사실 제가 빈 캔버스를 주고 직접 완성본을 받으러 가지 않았으면 저도 믿지 못했을 겁니다.”
홍연은 처음 그림을 보았을 때의 충격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한 전무의 호출에 기숙사로 다시 올라갔을 때, 그 작은 방은 초상화가 내뿜는 형형한 색으로 꽉 차 있었다. 살아 있는 것처럼 무섭게 생생한 묘사, 기이하게 초현실적인 분위기. 그림은 그 작은 공간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다.
물론, 모델 당사자가 받은 충격은 훨씬 심한 듯했다. 그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입을 꽉 다문 채 그림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글대는 눈빛은 방 전체를 집어삼킨 그림의 파워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듯했다. 룸메이트였던 아이는 말 한마디 못 한 채 옆에서 달달 떨고 있었다.
한 전무는 그림을 눈에 띄지 않도록 포장해서 보관하라고 했다가, 며칠 후 침실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침대에 누웠을 때 시선이 가장 잘 닿는 곳에 세워진 그림을 보고, 홍연은 불현듯 궁금해졌다.
대체 한 전무는 밤마다 저 그림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화사하고 색기 어린 표정으로 웃고 있는 자신을 보며, 정신이 나갈 정도로 도발적인 색의 폭포를 보며, 대체 무슨 생각을.
그날 이후 한 전무는, 바이어나 손님들과의 저녁 약속을 하나둘 취소하거나 옮기기 시작했다. 저녁 시간은 오로지 그 작은 아이와 함께 보냈다. 퇴근 때마다 간단한 쇼핑을 하는 습관도 새로 생겼다. 그는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인형이나 꽃, 혹은 수제 쿠키나 초콜릿 따위를 사 들고 귀가했다. 그것도,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않고 수제제과점이나 매장에 가서 직접 골랐다. 쇼핑 목록이 분홍색 커튼, 노란 플라워 패턴으로 가득한 침구, 분홍 토끼 모양의 깔개, 병아리 모양의 슬리퍼에 이르면 뭐라 할 말이 없어졌다.
그림을 노려보던 한 전무가 침통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홍연 씨. 우연이가 자기 방에서 안 나온 지 벌써 나흘쨉니다.”
“예?”
홍연은 어리둥절했다. 어쩐지 요새 얼굴도 보이지 않고 이상하다 했다. 보통 집에 모셔드릴 때, 아이는 으레 송 여사와 함께 현관까지 나와 “이원 아저씨이이…….” 하고 배슬배슬 웃으며 이원을 맞곤 했다.
“왜 방에서 안 나오고 있는 겁니까?”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밥은 알아서 먹을 테니 문도 열지 말고 노크도 하지 말고, 절대 방해하지 말라고 했다는데…….”
아아. 홍연은 조금 얼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전무님. 호텔에서도 절대 들어오지 말라고 사흘 내내 문을 걸어 잠그고 작업을 했어요.”
“문제는, 방에 먹을 게 없어요. 제가 방에 놓아둔 쿠키하고 초콜릿 같은 게 전부예요.”
“……나흘 동안 한 번도 밖에 나오지 않았습니까?”
“송 여사님이 식사하라고 할 때마다 거절했다는데, 어제는 너무 걱정스러워서 노크를 했더니 안에서 미친 듯이 화를 내는 바람에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네요. 뭔가 깨지는 소리도 나고. 그래서 지금은 노크도 안 하고 청소기도 안 돌리고 쥐 죽은 듯 기다리는 중이라고 합니다.”
맙소사. 성깔 장난 아니네. 홍연이 질린 얼굴로 입을 다물자 이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나흘 동안 방의 불이 한 번도 꺼진 적이 없어요. 지금까지 한숨도 안 자고 작업을 하고 있다는 뜻이겠죠. 대체 작업을 어떻게 하기에 저럴까. 100호 캔버스를 정밀 묘사로 채우려면 대체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까, 그 전에 쓰러지지는 않을까. 걱정돼서 미칠 지경입니다.”
후우. 홍연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천재 화가’의 이미지 그대로로군요.”
“……글쎄요. 그보다 저는 경조증 증세가 아닐까 걱정스러운데요. 지금 우연이는 약도 먹지 않고 있습니다. 전시회 따윈 말도 꺼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원은 이마를 짚은 채 깊게 신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절대, 절대 그런 제안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시회하고는 상관없이, 우연이 작업 스타일이 그런 것 같습니다. 전무님.”
“홍연 씨, 난 지금이라도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서 아이를 끌어내야 하나 고민 중입니다.”
“금방 끝날 겁니다. 집중하면 작업 속도가 워낙 빠르니까요. 그림 그리는 거 보셨잖습니까.”
홍연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양극성 장애를 천재병이라고도 하니까요. 머리 좋은 사람들의 양극성 장애 유병률이 몇 배나 된다는 말도 있고, 울증에서 벗어나서 조증으로 전환하는 시기가 창의력 폭발기라는 연구 자료도 있고…….”
“그렇습니까.”
“그 시기의 집중력과 작업 속도가 정말 엄청나다고 하죠. 헨델 같은 경우는 메시아 전곡을 작곡하는 데 24일밖에 걸리지 않았다는데, 그건 뭐, 불러 주는 대로 줄줄 받아 적은 수준이죠. 사실 그 창의력이라는 건 무수한 살리에리들이 갖고 싶어 안달해도 결국 얻지 못했던 능력 아니겠습니까?”
이원은 우울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요. 그런데 홍연 씨 같으면 헨델이나 고흐, 살바도르 달리로 태어나고 싶으십니까?”
“고흐는 됐고, 달리 정도라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별 미친 그지깽깽이 쇼를 다 하면서 살았어도 어쨌든 제 꼴리는 대로 살았고, 살아생전 이름도 얻었고, 돈도 꽤 벌었으니까요.”
“달리도 갈라가 곁을 떠난 뒤엔 시궁창 아니었습니까?”
“전무님. 유명한 예술가 중에서 인생이 시궁창 아니었던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정신 분열 자살, 조울증 자살, 알코올 중독 자살, 성병 요절, 마약 중독 요절, 실연 자살, 음주 익사, 가오 잡다 전사, 근친혼 유전병, 정신 병원 고독사, 돈 못 벌어 아사, 정말 이름깨나 날린다는 예술가들은 왜 하나같이 이 모양인지 모르겠습니다. 바흐 같은 건전하고 성실하고 규칙적이고 가정적인 천재가 너무나 비정상적으로 느껴진다니까요!”
줄줄이 쏟아 내는 말에 이원의 입에서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홍연 씨, 보통 예술가들의 ‘창조적인 영감’의 토대를 ‘사회 문화적 제약이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이라고 보지 않습니까?”
“예. 그렇죠.”
“그런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에서 튀지 않게, 상식적으로, 평범하게 살기를 기대하는 것도 무리 아닐까요?”
“그러니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로 사고를 치고, 몇 십 배로 상처를 받는 거겠죠. 그걸 견디지 못하면 끝나는 거고요.”
“우울한 결론이네요.”
“하지만 그런 천재를 철옹성처럼 보호하고 지지하는 패트런이 곁에 있다면, 사정은 많이 달라질 겁니다.”
홍연의 장담에 이원이 고개를 돌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온갖 감정이 뒤엉킨 눈이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물론입니다. 그리고 패트런의 첫 번째 조건은 돈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돈이 최고죠.”
전직 큐레이터의 간결한 결론에, 이원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 * *
우연은 옆으로 비스듬히 서서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허옇고 꺼칠한 얼굴에 핏방울처럼 붉은 입술과, 새까맣고 커다란 눈동자가 기이하게 반짝거린다. 풀이 죽은 눈이 아니라 도발이라도 하듯, 서슬 푸른 오기가 느껴져서 마음에 들었다.
거울을 보며 빠르게 스케치를 하기 시작했다. 필요하다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밑칠이 된 거대한 캔버스들과 고급 물감, 붓 따위가 공수되는 걸 보면 아저씨가 정말 돈이 많긴 많은가 보다.
연필 끝에서 몇 개의 선이 흘러나와 하얀 천 위를 크게 가로지른다. 우연은 별도로 선을 따서 옮기는 대신 캔버스 위에 바로 스케치를 한 후, 색을 올린다. 머리와 어깨, 척추와 엉덩이로 이어지는 형태가 울퉁불퉁, 툭툭, 단숨에 만들어진다.
“아저씨, 제가 정말 예쁜가요? 아무리 봐도 이렇게 볼품이 없는데, 어디가요?”
아저씨는 어쩌다 나 같은 걸 예쁘다고 믿게 되었을까. 어쩌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최면에 걸리셨을까. 감정이 그 정도로 왜곡되고 비틀리는 건 조울증만큼이나 병적인 증세 아닐까.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런 최면에 사랑이라는 멋진 이름을 붙여 주었을까.
생각할수록 신경이 갈려 나가는 것 같다. 이 빌어먹을 감정은 생각보다 낭만적이고 아름답지 않다. 재앙이고 징벌이며 머리채를 잡고 휘두르는 폭력이었다.
우연은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그림에 집중했다.
시간은 빠르게 혹은 느릿하게, 요란하게 혹은 기척 없이 흘렀다. 우연은 옷을 벗은 채 거울을 보며 쉼 없이 그림을 그렸다. 넓은 저택은 심해처럼 고요해졌다. 그래서 우연은 밤이건 낮이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모든 것을 쏟아부을 수 있었다.
“후우…….”
머리채를 잡혀 이리저리 휘둘린 듯, 온통 산발이 된 작은 여자가 화폭 위에서 윤곽을 드러낸다. 엉망으로 두들겨 맞고 질질 끌려다닌 듯, 검붉은 피딱지와 멍 자국으로 뒤덮인 나신을 고스란히 드러낸 여자아이의 모습이었다.
첫날은 송 할머니가 두어 번 노크를 했었다. 아가씨, 식사하세요. 점심때가 되었습니다. 시원한 과일 음료 냈는데 한 잔 드시겠어요. 아가씨, 전무님께서 함께 저녁 드시자고 하십니다.
하지만 옷을 다시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가서 뭔가를 먹는 것조차 극도로 귀찮게 느껴졌다. 안 먹어요. 할머니, 배 안 고파요. 목 안 말라요. 괜찮아요. 방해하지 마세요! 제발 방해하지 마시라고요! 점점 신경질적으로 변하는 반응에 이튿날부터는 조용해졌다. 방으로 연결된 인터폰과 전화선까지 뽑아 버린 우연은 무덤처럼 괴괴하게 바뀐 공간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캔버스 위로 붓이 지나갈 때마다 꽃이 한 송이, 한 송이 피어난다. 깡마른 몸 위로 얼룩덜룩 꽃밭이 만들어진다. 검붉은, 새파란, 붉은, 누르스름한, 온갖 색의 꽃들은 창백한 피부 위에서 한껏 화사해진다.
이제, 온몸이 장마 후의 꽃밭처럼 물든 여자가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손을 한껏 내밀고, 반짝반짝하는 새까만 눈을 바짝 치뜬 채, 도발적으로 활짝 웃고 있다.
자, 아저씨. 보세요. 이래도, 이래도 예쁘다고 하겠어요?
윙, 귀에서 이명이 울린다. 언제부터인지 바닥이 확확 위로 치솟으며 어지러웠다. 입이 바짝 마르고 천장이 빙빙 돌기도 한다. 물을 마셔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마시러 가고 싶지 않았고, 배가 고프면서도 뭔가를 먹으러 나가기가 싫었다. 이 순간에서 빠져나가고 싶지 않았다.
방에 딸린 욕실에서 수돗물을 마시고, 벽장의 과자를 먹으며 버텼다. 과자에선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아 결국 몇 조각만 먹고는 부슬부슬 손으로 뭉개 버렸다. 머릿속은 술에 취한 것같이 흐리멍덩하면서도, 잘 벼려진 칼날처럼 명료했다.
똑똑똑.
파사삿!
노크 소리가 다시 들리는 순간,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밀도 높은 공기가 돌에 맞은 유리처럼 바스러진다. 갑자기 맨살에 감기는 공기의 흐름이 느껴지며 우연은 바로 현실로 내동댕이쳐졌다.
“아가씨, 제발 식사라도 드시고 하세요. 쓰러지신 건 아니에요? 아니면 약이라도…….”
문손잡이가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열쇠로 열려는 건가? 순간, 걷잡을 수 없이 공포가 치밀어 올랐다.
“드, 들어오지, 오지 마, 오지 말랬잖아요!”
허둥지둥 옷을 찾다가 탁자에 세게 부딪쳐 넘어지고 말았다. 와장창, 탁자 위에 놓였던 꽃병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꽂혔던 꽃과 벗어 둔 옷가지가 물과 함께 바닥에 촥 흩어지고,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에구머니, 아가씨! 문은 계속 덜그럭대고, 몇 걸음 움직이니 발이 뜨끔하며 피가 난다.
……아우 씨.
발꿈치에서 새빨간 피가 뭉글뭉글 기어 나와 뭉친다. 아픈 것은 잘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림 그리는 걸 멈추고, 지혈을 하고, 산산이 흩어진 유리 조각을 치워야 한다 생각하는 순간 불같이 화가 치솟았다. 아악, 아아아악, 아아악! 우연은 발을 콱콱 굴러 가며 방문을 향해 악을 썼다.
“들어오지 말랬잖아요! 방해하지 말랬잖아! 왜 내 말을 안 들어줘! 배 안 고프다고요! 오지 말라고 하면 제발 오지 말란 말이에요!”
밖은 다시 조용해졌다. 바닥에는 짓눌린 봉숭아 같은 핏자국이 어지럽게 찍혔고, 사금파리와 물에 젖은 옷가지가 이리저리 흩어져 난장이었다. 발이 아파야 하는데, 발 대신 엉뚱한 곳만 아팠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눈알이 뻐근하고, 피부가 따끔거린다. 우연은 쭈그리고 앉아 발에 박힌 사금파리를 빼내며 숨을 헐떡였다. 온몸이 벌벌 떨린다. 신경이 미쳐 돌아가는 것 같다. 그림을 빨리 끝내지 않으면 죽어 버릴지도 모르겠다.
어느덧 캔버스에 자신의 모습이 완전히 드러났다. 비쩍 마르고 곯아 있는,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뒤엉킨, 온몸과 얼굴이 온갖 색깔로 얼룩덜룩 물든 앳된 여자 한 명. 가슴도 치부도 전혀 가릴 생각을 하지 않고, 손을 앞으로 한껏 뻗은 채, 그림을 보는 사람을 향해 도도하게 웃어 보이는 그 모습. 지독하게 혐오스러우면서도 기이할 정도로 사랑스러워 보이는 저 얼굴.
아저씨. 이래도 내가 정말 예뻐요?
우연은 키들키들 웃으며 오른쪽 귀퉁이에 이름과 제목을 썼다. 그림의 제목은 애초부터 정해져 있었다.
<사랑>
우연은 제목을 적어 놓고는 낄낄대고 웃었다. 저렇게 화려한 만신창이 꼬라지가, 제목하고 어쩜 이렇게 엿같이 딱 어울릴 수가.
이 그림은 자화상을 빙자한, 사랑에 관한 그림이다. 저 여자는 우연 자신이기도 하지만,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이기도 했다. 그러니 도저히 다른 제목이 될 수 없다.
<사랑>
<사랑>
사랑해.
……아저씨, 사랑해.
봐요, 아저씨. 나는 지금 이 개같은 감정에 이 모양 이 꼴로 질질 끌러가고 있어요.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도록 반항조차 못 해. 아저씨, 사랑해. 사랑해.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이, 나는 지금 아저씨를 사랑해. 그냥 사랑해. 뻔뻔한 거 알아, 조건이고 나발이고 가진 거 하나도 없어요. 비웃음당할 거 알아. 그래도 난 그냥 아저씨를 사랑해. 이 감정이 이렇게 이성도 없고 난폭하게 나를 휘두를 줄은 몰랐어. 아저씨. 사랑해. 나는 아저씨를 사랑해.
나는 이렇게 내 마음을 모조리 벗어서 보여 드렸어요.
그러니 이제 아저씨가 대답해 보세요.
……아저씨, 날 사랑해요?
“우연아! 우연아!”
파드득, 소리가 갑자기 선명하게 느껴진다. 지금까지 물에 잠긴 듯 먹먹하게 들리던 모든 소리에 갑자기 날이 선다. 우연아, 우연아! 쾅, 쾅쾅, 고막을 송곳으로 쑤시는 것처럼 아팠다.
“우연아, 문 열어. 안 들려? 너 지금 괜찮아? 진우연!”
아저씨가 문을 부술 것처럼 두들겨 댄다. 쾅, 쾅쾅쾅! 쾅!
“송 여사! 열쇠!”
“전무님, 열쇠로는 안 열립니다. 안에서 걸쇠로 잠그시고, 외시경도 안 보이게 막으셨어요.”
우연은 히죽히죽 웃었다. 머리는 무겁고 몸은 끈적끈적한데, 맨살에 와 닿는 공기가 너무너무 뜨겁다는 것이 뒤늦게 느껴졌다. 지독하게 더운 여름. 에어컨을 켜는 것을 잊거나, 끄는 것을 잊어, 방은 너무 뜨겁거나 너무 추웠다.
옷을, 옷을 입어야 하는데.
우연은 멍하니 사방을 둘러보았다. 옷이 어디 있더라? 옷이 대체 어디에. 꿈속에 서 있는 것처럼 시야가 몽롱했다. 콰작, 콰작, 콰작! 콰당탕, 뭔가 시끄러운 소리가 아련하게 뭉그러져 들린다.
“진우연! 너 지금 뭐 하고…….”
뒤를 돌아보니 손잡이가 박살 난 문과, 입을 반쯤 벌리고 서 있는 아저씨가 보인다.
어? 어떻게 들어왔지? 분명 걸쇠로 문을 잠가 두었는데.
귀로 윙, 날카로운 이명이 인다. 아하, 아저씨다. 아까 들었던 시끄러운 소리와 아저씨의 출현이 뒤늦게 연결된다. 아저씨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아저씨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몸으로 문을 막고 서는 것이 보인다.
“……옷 입어.”
우연은 엉거주춤 가슴을 가린 채 쭈그리고 앉아 물었다.
“아저씨…… 지금 몇 시예요?”
“송 여사!”
아저씨는 대답하는 대신 문밖으로 고함을 지른다. 당장 정 박사님 호출해요! 이쪽으로 오진 마세요! 송 여사! 옷 좀 갖다줘요. 송 여사 어디 있어! 아저씨의 고함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며칠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밤이 몇 번, 낮이 몇 번, 지나가기는 했는데.
아저씨가 다급하게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하다. 아저씨는 저렇게 쿵쿵쿵 큰 소리를 내며 걸어 다니는 사람 아닌데. 저렇게 막 반말하고 고함지르는 사람이 아닌데. 항상 부드럽고, 정중하게 말씀하시는 분인데.
아저씨가 몸을 감싸 주려는 듯 바닥에 놓인 이불을 확 걷더니, 그 밑에 깔려 있던 사금파리와 흠뻑 젖은 옷 뭉치, 여기저기 난장으로 찍힌 핏자국을 보고 얼굴을 확 일그러뜨린다.
“이게, 대체, 이게…….”
아저씨의 목소리가 우들우들 떨린다. 반면 우연의 눈꺼풀은 점점 무겁게 내려앉는다. 아저씨가 급하게 넥타이를 잡아 빼는 것이 보인다.
……응?
몸 위로 가벼운 천이 덮이더니 몸이 위로 붕 떠오른다.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아래로 맥없이 늘어진다. 아저씨의 맨살이 뺨에 와 닿는다. 몸이 후드득 떨렸다. 아저씨가 와이셔츠를 벗어서 몸을 감싸 주신 것을 뒤늦게 알았다. 쿵쿵, 쿵쿵, 뺨과 맞닿은 아저씨의 몸은 단단하고 따뜻했고, 거기서 들리는 소리는 시끄러웠다. 아저씨가 으득대며 내뱉는 소리가 심장 소리와 함께 왕왕거린다.
“이게 무슨 미친 짓이야. 너 이러다 잘못되면 죽어! 원래 작업 스타일이 이렇다고 해서 불안해도 참고 기다렸더니, 이게 무슨…….”
하지만 아저씨는 벽에 기대어진 캔버스를 보더니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움직임을 멈춘다. 말을 잇지도 못한다. 각진 턱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아저씨는 읽었을까. 들었을까. 아저씨, 사랑해. 아저씨, 사랑해, 사랑해. 하, 하, 아하하, 깔깔깔. 사랑해. 이 빌어먹게 강력하고 난폭하며 현재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감정이 내지르는 소리를 아저씨는 지금 듣고 있을까.
이 소리를 들은 아저씨의 진짜 속마음은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자, 아저씨. 이제 솔직하게 대답해 봐요. 아저씨가 결혼하기 전에, 자신의 진짜 마음을 모르는 척 영원히 덮어 버리기 전에, 한 번이라도 제대로 대면해 보세요.
아저씨의 마음 바닥, 그 진흙 아래 깊이 감춰진 진짜 말을 듣고 싶어요.
아저씨의 피부에 소름이 와짝 돋는 것이 느껴진다. 까무룩, 눈앞이 깜깜해진다.
* * *
우연은 의식을 놓은 채 이원의 침대 위에 누워 있다. 링거액이 팔뚝의 가는 혈관을 타고 느릿느릿 흘러 들어간다.
후우우.
이원은 폐가 녹아내릴 듯 한숨을 쉬었다. 저 링거액이 돼서, 저 아이의 머릿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고 싶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아니, 네 탓을 할 일도 아니다. 나야말로 대체 무슨 생각으로 상황을 이 지경까지 끌고 왔는지 모르겠다.
너에 대한 선택은 늘 이성적이지 못하고 충동적이었다.
나는 왜 생명의 다리 위에서 너를 도와주었을까. 박 이사님 말대로 신고만 하고 끝내도 되었을 것이다. 초상화 다섯 점 따위의 황당한 약속을 받을 필요도 없었다. 경찰서까지 따라갈 필요도 없었고, 병원에 꼭 가야 할 이유도 없었다. 내가 후견인이 되어야만 했던 것도 아니다. 정 관장을 후견인으로 지정하고 학비만 지원하게 했어도 충분했을 것이다.
……누드모델 따위의 정신 나간 소리도, 당연히 들을 필요가 없었다.
연락이 끊겼을 때, 굳이 직접 찾으러 갈 필요도 없었다. 사람을 보내서 찾아오게 하면 될 일이었다. 꼭 이곳으로 데려올 필요도 없었다. 병원에 입원시키고 경호를 철저하게 하는 방법도 있었다. 물론 병원에선 지금처럼 안정감을 느끼지는 못했겠지만, 집에까지 데려온 건 과잉보호라고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원은 머리를 헤집으며 신음했다. 그녀는 항상 날이 바짝 선 칼날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것 같았다.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하고, 잘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조바심이 났다. 아니, 숨이 턱턱 막혔다.
그는 우연의 부모에 대해 극렬한 적개심과 끝없는 부러움을 동시에 느끼곤 했다. 우연의 아기 때 모습, 유치원 시절, 초등학교, 중학교, 차근차근 자라가는 모습을 다 보아 왔을 어머니 아버지가 증오스러울 정도로 부러웠다.
왜 그들은 저 아이를 사랑하지 못했을까. 저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저렇게 약하고 여리고 눈물이 많은 아이를, 저렇게 독특하고 발랄하고 자유로운 영혼을, 이렇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신 재능을 타고난 아이를.
……왜 이렇게 끔찍하게 상처 주고 손쓸 수 없을 만큼 망가뜨려야 했을까.
“아저씨…….”
가는 신음 소리가 들린다. 따귀라도 얻어맞은 듯 정신이 얼얼했다. 이원은 황급히 침대 옆으로 다가앉았다.
“우연아, 괜찮아?”
고양이 인형을 끌어안은 채 누워 있던 우연이 낑낑거리며 이원 쪽으로 돌아눕는다. 여전히 눈을 꼭 감은 상태였다. 지나치게 큰 셔츠를 입어서인지 몸을 뒤척이자 목이 새하얗게 드러난다. 가는 빗장뼈가 도드라지고, 발갛게 물든 입술 위로 꺼풀이 앉았는데 그걸 이로 잡아 뜯었는지 피딱지가 조각조각 앉아 있다.
이원은 잠시 넋을 놓고 그녀의 찌푸린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아까 얼핏 보았던 우연의 모습이 떠올랐다. 바로 외면하고 와이셔츠로 감싸느라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매끄럽고 하얀 피부와, 안아 올릴 때 느꼈던 감촉만큼은 또렷하게 기억났다.
고개를 힘껏 저었다. 이런 순간에도 그따위 기억이나 떠올리는 자신이 환멸스러웠다.
“으으, 아파, 아저씨. 아저씨.”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얀 얼굴이 인상을 잔뜩 쓰고 신음한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뭔가를 잡으려는 듯, 허공을 더듬는다.
……제기랄.
“송 여사. 우연이 좀 봐 주세요.”
그 앙상한 손을 잡아 주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나서는 데,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인내심이 필요했다. 송 여사가 조용히 우연 곁에 앉아 허우적대는 손을 꼭 잡는 것을 보며, 이원은 잠시 송 여사를 밀어 내고 저 자리에 앉고 싶다는 맹렬한 충동을 느꼈다.
우연이 머물던 손님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깨끗하게 정리된 상태였고, 문손잡이도 말끔하게 교체되어 있었다. 다만 작업하던 탁자와 그림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진우연.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이원은 꽃밭처럼 찬란하게 물든 소녀의 나신을 한참 노려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상처를 모조리 드러낸 채 두 팔을 앞으로 한껏 내밀고 자신을 도발하고 있다.
아저씨, 나는 저항할 수 없어요. 이 폭력적인 감정에 반항할 수 없어.
아저씨. 사랑해. 그 빌어먹을 마음이 나를 이렇게 만신창이로 만들어서 질질 끌고 가고 있어. 나는 반항할 수 없어요.
아저씨 사랑해요.
편의점에서 우연이는 분명히 말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감정이, 자신의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고 가는 것 같다고.
……넌 그때 이미 고백을 했었구나.
그림은 보면 볼수록 익숙해지는 대신 거북하게 느껴졌다. 보는 사람의 대답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그림은 애초부터 쌍방향으로 대화가 오가게 설계된, 매우 입체적인 작품이었다.
그리고 그림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또렷해서, 도저히 잘못 들을 수가 없다.
아저씨, 사랑해요. 나는 아저씨를 원해요.
……아저씨는요?
대답해 주세요. 아저씨는요?
이원은 침대에 걸터앉아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어둠 속에서 우연의 목소리가 한 자락씩 사르락사르락 기어 나와 몸을 휘어 감는다.
‘아저씨 미안해요. 아까 기도하시는 거 들었어요. 구, 궁금해서.’
‘뭐, 결혼하시고 살아 보다가 영 안 맞으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면 되니까요.’
‘인생이 장난인가요? 먹어 보니 똥이었는데 뱉지도 못해요?’
‘그럼 신자 안 하면 되잖아요.’
‘하지만 섹스에 거부감이 든다면서요. 그럼 끝난 거 아니에요?’
기가 막힌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쏟아 내던 아이. 섹스, 라고 태연하게 말하던 붉은 입술.
이제 그 아이가, 그림 속에서 손을 내밀고 자신을 한껏 도발하고 있다.
아까 안아 올릴 때, 필사적으로 외면했던 우연의 몸이 눈앞에 있다. 가늘고 하얀 목, 가느다란 빗장뼈에 고인 좁고 깊은 그늘, 팔로 가린 사이로 설핏 보였던, 자그마한 가슴의 소복한 윤곽선, 좁고 동그란 어깨와 한 손에 쥐일 듯 가는 허리, 그리고 엉덩이와 다리로 매끈하게 이어지던, 감미롭고 우아한 선, 근육의 존재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보드랍고 말랑말랑하던 감촉.
“으흑.”
순간적으로 들이닥친 생각에 이원은 머리를 감싸 안고 신음했다.
미쳤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아니다. 이건 밤이라 그런 거다. 음욕이 불처럼 끓어오르는 밤이라서, 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그림을 봐서, 이따위,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쏟아지는 거다.
이원은 밤이 끔찍했다. 혼자 있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성욕이 고이는 것이 느껴졌다. 컨디션이 바닥으로 처박히거나 스트레스가 한계까지 치밀어 오를수록 욕구가 미친 듯이 끓어올랐다. 참고 참으면 결국 몽정으로 이어졌다. 나이 서른둘에,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이원은 정우건설 사태 때 어린아이가 눈앞에서 죽은 후, 많은 것을 잃었다. 단잠을 잃었고 미각도 잃었다.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고, 이원도 손 원장도 이것이 심리적인 원인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이원은 이 일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었지만, 죄가 없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것은 자신이 치러야 할 대가라 생각했다.
그 후부터,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음식을 끼니마다 먹는 것과 피곤해서 자는 것은 죽지 않으려고 억지로 수행하는 과업이 되었다. 매슬로의 주장은 옳았다. 자아실현이라든가, 성취감, 하다못해 말초적이고 유치한 우월감 따위조차 가장 기본적인 본능적 욕구가 이루어진 이후에야 얻을 수 있는 거였다. 먹고 쉬고 잠을 자는 가장 기본적인 즐거움을 잃자, 그 위 단계의 즐거움은 아예 찾아오지도 않았다.
이제 그가 누릴 수 있는 육체의 즐거움이란 성욕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원래 성욕이 결코 적은 편은 아니었지만, 절제하고 자신을 지킬 수는 있었다. 요새는 그것이 점점 힘겨워진다. 하지 말아야 할 더러운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도무지 떠나지 않는다. 이제는 이 집착이 도착적으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혼전, 혼외 성관계가 아닌 자위행위까지 대죄에 속하는 것에, 이원은 가끔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물론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교우들도 있지만, 죄의식에 대한 기준선이 꽤 높았던 이원은 쉽게 다스려지지 않는 성욕이 불편하고 때로 힘겨웠다.
‘하지만 섹스에 거부감이 든다면서요. 그럼 끝난 거 아니에요?’
‘섹스에, 거부감이, 그럼, 끝난…….’
‘섹스에…….’
발칙한 목소리가 자꾸 신경을 긁는다. 귀를 틀어막고 싶다. 그림 속 우연이 뻗은 손이 자신의 목을 움켜잡고 끌어당기는 것 같다, 의식이 없는 중에도 나를 향해 간절하게 내밀던 손, 나만 애타게 찾던 그 목소리, 내 팔에 달라붙듯 감기던 너의 몸, 그 당혹스러운 느낌.
아저씨, 사랑해요. 나는 아저씨를 원해요.
……아저씨는요?
제기랄. 이원은 고개를 수그리고 머리를 감쌌다.
……미쳤다 한이원. 넌 결혼할 여자가 있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하반신에서 열기가 폭발한다. 아슬아슬, 정체를 알 수 없는 경계선에 서 있던 이원은 결국 허리를 구부리고 몸을 무너뜨렸다.
* * *
새벽 미사를 마치고 사제관에 들어오니 이내 벨 소리가 들린다. 정상용 신부는 확인도 하지 않고 바로 문을 열었다.
“평화를 빕니다, 안드레아 신부님. 바쁘신데 시간 뺏어서 죄송합니다.”
문밖에 서 있던 양복 차림의 키 큰 사내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숙인다. 새벽 미사 전에 고해 성사와 상담을 신청했던 이원이었다.
“어, 어서 와, 어서 와요. 아무리 바빠도 이원 형제만큼 바쁠까? 게 앉아요, 편히 앉아. 뭐 좀 마실까요? 커피는 안 마신댔던가? 우유 좀 데워 줄까요?”
안드레아 신부는 수선스럽게 환영하며 이원을 소파에 앉혔다.
환갑을 목전에 둔 정상용 안드레아 신부는 이원이 다니는 성당의 주임 신부로, 4년 전 부임한 첫해부터 이원과 격의 없이 지내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그는 신심이 돈독하고 헤아림이 깊은 이원을 퍽 아꼈고, 나이 많은 이원이 신학교에 재입학을 하려 할 때 예비 신학생 모임에 들 수 있도록 사방팔방 애를 써 주기도 했다.
이원이 자리에 앉아 짧게 기도하는 사이, 안드레아 신부는 정말로 우유를 레인지에 넣고 데우기 시작했다.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리는 이원은 카모마일차와 국화차 외의 차 종류는 입에 대지 않았는데, 자칭 타칭 잠의 축복을 넘치게 받은 카페인 마니아 안드레아 신부의 사제관에 카모마일차 따위가 있을 턱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다행히 이원은 뜨거운 우유를 곧잘 마셔서, 안드레아 신부는 참으로 흡족했다. 안드레아 신부는 우유든 커피든 설탕을 듬뿍 넣어서 대접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 괴악한 취향에 불평 한마디 없이 다 마셔주었던 손님은 이원이 유일했다.
“그래, 요새 어떻게 지내요? 무슨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나?”
이원이 잔을 내려놓더니 고개를 살짝 수그리고 웃는다. 평상시 같으면 아니라고 괜찮다고 하는 대답이 나올 법한데 오늘따라 그런 말조차 나오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어둑어둑한 새벽빛으로 봤을 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창백하면서 괴로운 듯한 분위기가 무겁게 고여 있었다. 하지만 무엇이 문제인지 입을 열기는 쉽지 않은 듯했다. 안드레아 신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고해 성사를 먼저 보겠어요? 마지막으로 언제 받았지?”
“그러겠습니다. ……보름 전입니다.”
이원이 조용히 소파에서 내려와 카펫 위에 무릎을 접고 고개를 숙인 후 성호를 긋는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안드레아 신부는 그의 둥글게 숙여진 어깨와 등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하느님께선 우리의 마음을 비추시니, 그분의 자비하심을 믿고 그동안 지은 죄를 고백하세요.”
그는 꽤 길게 이어지는 이원의 침묵에도 잠자코 기다렸다. 한참 만에야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젯밤에 손으로 죄를 저질렀습니다.”
뭉뚱그려 이야기하려는 유혹을 느낀 듯,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고개를 흔들고 이내 구체적으로 고백했다.
“……음란한 망상에 물리치지 못하고, 밤새…… 새벽까지 수음을 했습니다.”
반쯤 내리깐 눈빛은 담담했고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뒤따라 흘러나오는 가는 한숨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환갑을 앞둔 노신부는 그의 고민을 충분히 이해했다. 젊고 건강한 몸에 들끓고 있을 성욕은 깊은 신앙과 의지로도 누르기 버거울 때가 있을 것이다. 더욱이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기 짝이 없는 이원은 그 욕구를 철저하게 통제하려 노력했고, 그래서 그 버거움이 더욱 커 보였다. 한번 통제의 끈을 놓치면, 폭발하듯 터지는 반작용과 그에 따른 자괴감이 늘 만만치 않은 듯했다.
다시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안드레아 신부는 기다렸다. 할 말이 더 있을 것 같다. 이 내용만이라면, 굳이 상담을 요청할 것 없이, 아까 고해소에서 고해 성사를 보고 돌아갔을 것이다.
이윽고 그가 힘들게 입을 열었다. 인정하기 싫은 어떤 것을 억지로 실토하는 것처럼.
“……약혼녀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 자꾸 마음이 향합니다. 그 여자를 생각하며 끝없이 더러운 상상을 하고, 죄를 짓게 됩니다.”
역시나. 안드레아 신부는 한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자매님과의 관계는 어떻게 됩니까?”
“제가…… 올해 초에 잠시 후견인 역할을 한 적이 있는…… 대학생입니다.”
담담하게 고백하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좀 더 자세히 말해 보세요. 혹시 그 학생이 이원 형제와 자주 접하는 상태입니까?”
“지금 집에서 보호하는 중입니다. 부모에게 학대를 받아 한강에서 자살하려던 아이를 구해 주었다가…….”
접근 금지 상태인 부모가 학교로 찾아오는 바람에 공황 발작을 일으켰다, 불안감이 너무 심해서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한다, 지금 믿고 의지하는 건 나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다, 더듬더듬 설명하던 이원이 말을 멈추고 고개를 숙인다. 여기까지 와서 자신을 변명하는 것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저는 약혼녀가 있고…… 머지않아 결혼합니다. 이 마음이 잘못되었다는 건 잘 압니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그 자매를 향한 더러운 음욕이, 점점 커지기만 해서…… 너무 죄스럽고, 한심하고…… 고통스럽습니다.”
그의 기나긴 고백이 이어지는 동안, 안드레아 신부는 속으로 깊이 탄식했다. 이원은 더러운 음욕이라 말하지만, 그의 성격상 그것은 잠시 스치고 지나가는 더러운 욕구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그가 깊이 품고 있는 감정이 ‘더러운 음욕’보다 훨씬 아름다운 이름을 갖고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안드레아 신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조언을 신중히 가늠했다. 상황은 생각보다 간단치 않았다. 그는 이원의 결혼이 막중한 책임과 거대한 자산이 걸린 계약이자, 유언에 매인 것임을 알고 있었다.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해서 계약을 무르거나 파혼을 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섣부른 조언을 했다간 이원에게 독이 될 것이 분명했다.
이럴 때는 원칙적인 방향으로 이야기를 해 줄 수밖에 없다. 안드레아 신부는 한숨을 감추지도 않고 무겁게 입을 떼었다.
“이원 형제, 죄를 차단하기 위해서는, 죄를 유발하는 환경부터 차단해야 하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사랑하게 만드셨지만, 아내가 아닌 다른 자매를 대상으로 성적인 상상을 하며 스스로 욕구를 푸는 것은 죄악입니다. 약혼녀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 하니, 더더욱 멈춰야 합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자매님은 위험해질 것이고, 형제님의 죄와 상처도 커질 것입니다.”
“……예.”
“죄가 마음을 스치고 지나갈 수는 있지만, 마음을 지배하도록 방치하면 안 됩니다. 속히 마음을 정리하고, 자매를 안전한 다른 장소로 보내는 게 좋을 듯합니다.”
순간 이원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갈색 눈동자에서 격렬한 저항이 들끓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저도 모르게 더듬더듬 덧붙인다.
“그런데 신부님. 실은 그 자매도…… 저를 좋아……하는…….”
아. 그가 짤막하게 신음하며 한 손으로 입을 가린다. 제 입에서 나온 말을 믿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크게 벌어진 눈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아, 안타깝다, 안타깝다. 안드레아 신부는 급히 고개를 숙이는 저 덩치 큰 청년의 등이 못 견디게 딱하고 안쓰럽게 느껴졌다.
“혹시, 지금이라도 약혼을 파하고 그 자매님과 결혼할 생각이 있는 겁니까?”
“아, 아닙니다, 신부님. 그런 말이 아닙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비난하려 물어본 게 아닌데, 그는 크게 치죄라도 당한 듯, 바로 고개를 저었다.
“주님께 간구하세요. 상처 입은 자매에게는 상처를 이길 힘을, 이원 형제에게는 마음을 다스릴 힘과 위로의 은총을 주시기를. 주님께선 벌하심을 즐겨하지 아니하시고 용서하시고 축복하시길 즐거워하시는 분이시니, 반복되는 죄에 실망하지 마시고 통회하고 용서를 구하세요.”
“……예.”
보속과 이원의 꽤 긴 통회 기도가 끝난 후, 그는 이원의 머리 위에 두 손을 얹고 사죄경을 읊었다. 그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한이원 형제에게 용서와 평화를 주소서. 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의 죄를 사합니다.”
“아멘.”
성호를 긋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이원의 머리 위로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원 프란치스코 형제.”
이원은 고개를 들고 주임신부를 조심스럽게 올려다보았다. 주임 신부님은 진지하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을 때, 이렇게 이름과 세례명을 같이 부르는 습관이 있었다. 그는 이원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의 성욕 역시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거예요. 배우자와 온전히 연합하여 아이를 낳고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이루기 위해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선물임을 잊지 마세요. 사정이 허락한다면 빠른 시일 안에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게고.”
이원은 쓰게 웃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남자와 여자는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 좋다, 나처럼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라고 권하면서도 자제할 수 없으면 혼인하라고 하셨다. 욕정에 불타는 것보다는 혼인하는 게 낫다고. ‘욕정에 불타는’ 자신 같은 인간에게 약혼자와 빨리 결혼하라는 충고는 성서에 매우 충실한 해답이 될 것이다.
다만, 자신의 결혼은 주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답지 못하다. 아내에게는 정부가 있고, 남편은 그걸 알면서도 묵인하며, 남편 역시 마음에 품고 있는 여자가 있다. 그리고 이 결혼의 유일한 목적은 돈이다. 이원이 생각하는 자신의 결혼의 실체는 그랬다.
“신부님. 저는 제 결혼과 저희의 삶이, 그분께 영광이 아니라 누를 끼칠까 죄스럽고, 염려스럽습니다.”
“이원 형제, 결혼은 축복의 통로이자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징벌의 도구가 아닙니다.”
잠시 눈썹을 찡그렸다. 신부님이 하고 싶은 말이 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세경그룹의 상속을 선택하면, 어차피 이 결혼을 피할 수 없으니, 어차피 자신이 안고 가야 할 짐이었다. 거래든 계약이든 징벌이든 노예처럼 팔려 간다 하든, 달라질 것은 없었다.
“물질은 주님께서 허락하신 무수한 축복 중 지극히 일부일 뿐이에요. 물질을 위해 하느님의 더 크고 선하신 축복을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세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다스렸다. 지금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면 어찌할까. 가슴에서 얼얼한 통증이 가슴에서 느껴졌다.
“그럼, 상속분을 포기하고 회사도 포기하고 이 결혼을 파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일까요?”
노신부의 난처한 듯한, 짧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분의 뜻은 인간의 계산으로는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곳에 있어요. 다만, 이원 형제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깊이 묵상하며, 잘 생각해 보고 결정하면 좋겠어요.”
“……명심하겠습니다, 신부님.”
이원은 수굿이 대답하면서 속으로 쓴 물을 삼켰다.
아마, 세속의 물욕을 완전히 접고, 청빈하고 거룩한 길을 평생 걸어온 신부님이라면, 어쩌면 세경그룹조차 포기할 만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으리라. 한때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원은 결국 사제가 될 수 없었고, 이제 와서 회사를 포기할 수도 없었다. 세경그룹은 이원의 손에 남은 유일한 것이었고, 여기까지 와서 회사를 집어던지는 것이야말로 가장 멍청한 짓일 것이다.
마음을 정리한 이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에서 조용하고 따뜻한 목소리가 따라왔다.
“두 분 모두에게 하느님의 화평과 치유가 임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 * *
이원은 대문을 열고 천천히 마당으로 걸어 들어왔다.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노곤하고, 한 걸음 한 걸음 디딜 때마다 무릎이 허청거렸다. 허리와 허벅지까지 뻐근하고 머리가 물에 잠긴 것처럼 무겁기만 하다.
아무래도 오전엔 출근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미친 짓을 했다고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오전에 있는 이사회를 오후로 미룰까 고민하던 이원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Y시 재개발 사업을 강행하기로 한 후부터 매 순간이 전쟁이었다. 사고가 나서 혼수상태가 아닌 한 회사에 나가 앉아 있어야 할 상황이었다.
게다가 시트와 이불을 모조리 걷어서 세탁실에 처박아 놓았으니, 출근도 못 하고 늘어져 있으면 송 여사나 일하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할지 뻔하다.
7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 아침 햇살이 송곳으로 피부를 찍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원은 독기가 바짝 오른 이 계절이 종종 고통스러웠다.
우연이가…….
잠시 걸음을 멈춘 이원은 단단히 결심하고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래. 우연이를 다른 곳으로 보내야 한다는 신부님 말씀이 백번 옳다.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을 바로 찾아봐야겠다.
경호원하고 간호사를 배치해 두고, ……송 여사도 그곳으로 보내야 할까.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건 또 무슨 부질없는 짓일까. 송 여사를 딸려 보낸다는 건 계속 자신의 영역 안에서 그 아이를 보고 있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이원은 눈앞에 펼쳐진 정원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잡초 하나 없이 바짝 깎인 후 아침 이슬을 흠뻑 먹어 새파랗고 싱싱하게 물이 오른 잔디, 담장을 따라 울창하게 솟아오른 나무들, 나무 사이에 드문드문 배치된 굵직굵직한 수석과 나무 벤치, 그리고 안쪽으로 새하얗게 솟아오른 본채와 별채 건물. 자신의 취향대로 꾸미긴 했지만 지나치게 깔끔해서 가끔 집이 공원묘지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음?”
현관문 앞 벤치 근처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움직인다. 키가 작고 몸집이 가녀린 누군가가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마당에 깔린 돌 위를 내려다보며 조심조심 걷고 있다. 폴짝, 빙그르르. 폴짝, 폴짝, 빙그르르. 이 집에서는 흔치 않은 움직임이다. 죽어 있던 풍경에 생기가 확 돈다. 이원은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아! 우연이가 정신을 차린 건가?
설마, 잠옷을 입고 마당에 나온 건가?
아니, 잠깐. 지, 지금 건물 밖으로 나온 건가?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이원은 뻣뻣하게 굳은 채 우연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처음에는 조심조심,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딛다가 나중에는 치맛자락을 팔락팔락하며 거칠게 다듬어진 포장석 위를 깡충깡충 뛰어다닌다. 단발 머리카락이 폴락, 폴락, 나풀거린다. 이원은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맙소사, 어제 내가 입혀 준 와이셔츠를 아직도 입고 돌아다니는 거야?
……그것도 맨발로?
우연이 그가 있는 쪽을 향해 몸을 돌린다. 순간 움직임이 멈춘다. 조붓하고 동그란 어깨 위로 햇살이 내리꽂힌다. 자그마한 몸이 아침 햇살에 둘러싸여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아저씨!”
우연은 잠시 주춤하더니 이내 마당을 가로질러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가? 처음엔 조심스럽게 걷는 것 같더니 나중에는 와이셔츠 단을 잡고 막 달려온다. 이원은 급히 마주 달려갔다.
“우연아! 맨발로 뛰지 마. 넘어진다, 다쳐! 진우연!”
“아저씨! 아저씨! 새벽부터 어딜 다녀오시는 거예요! 기다렸단 말이에요.”
활짝 웃는 얼굴이 앞으로 들이닥친다.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전혀 숨기지 않는다. 눈앞까지 달려온 우연이 잠시 머뭇대다가 무엇인가를 결심한 듯, 고개를 반짝 들어 올린다. 웃는다. 말갛고 투명한 얼굴로, 이렇게 구김 없이 활짝 웃는다.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손을 쥐어뜯으며, 발까지 동동대며 웃는다. 이미 그림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모조리 까발렸으니, 더 이상 속을 숨기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원은 눈도 깜박이지 못한 채 잠시 입술을 떨었다.
“……새…… 새벽 미사에 다녀왔어.”
“일요일만 성당에 나가는 게 아니고 새벽에도 자주 가시나 봐요.”
“새벽에…… 미사가 있는 날도 있고, 저녁에 있는 날도 있어. 우연아, 그런데 너 어떻게 아저씨 옷만, 아니, 맨발로 이게 무슨…….”
“에이 아침부터 잔소리. 만나자마자. 어차피 길이는 원피스 잠옷하고 비슷하고, 반바지도 입었는데요 뭘. 아저씨, 이 옷 저 주시면 안 돼요?”
우연이 와이셔츠 앞자락을 팔락대며 혀를 쏙 내민다. 이원은 도저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이 아이는 저 옷이 내 옷이기 때문에 일부러 벗지 않는 것이다.
“그래. 맘에 들면 얼마든지.”
이원은 시선을 돌리는 척하면서 슈트를 벗어서 우연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어깨가 넓은 이원의 양복이 어깨가 좁은 우연에게 걸쳐지자 무릎까지 푹 덮이고 만다. 판초 같아요! 우연이 손을 펄럭이며 웃는다. 이원은 무릎을 접고 앉아 달래듯 말했다.
“맨발은 안 돼. 절대 안 돼, 돌에 찍히면 바로 피 난다. 그리고 너 며칠 전에도 발에서 피 났는데 거기 흙이라도 들어가서 파상풍 걸리면 어떡할 거야.”
“에이, 한이원이 아니라 한걱정 아저씨네. 저는 원래 맨발로 잘 다녀요.”
“정말, 말 안 듣지! 상처에 흙 들어가면 안 된다니까!”
“파상풍은 정 박사님이 알아서 하시라고 하고요, 아저씨도 한번 신발 벗어 보세요. 기분 죽여요. 일단 한 번만 벗어 보시라니까요.”
“우연아, 우연아! 그렇게 맨발로 뛰면 발에 상처 난다니까! 신발 어디 있어!”
“현관에 벗어 놓고 왔는데요!”
우연이 눈을 깜박거리며 한쪽 발을 들어 보인다. 배시시 웃는 말그레한 얼굴에 머리가 징, 울린다. 볼이 좁고 앙증맞은 그 발은 이슬에 젖어 축축했고, 물기 위로 굵은 모래알이 자르르 붙어 있었다. 다시 머리가 지끈했다.
“모래밭, 자갈밭, 풀밭, 나무, 대리석, 시멘트, 밟을 때마다 기분이 다 달라요. 그림을 그릴 때 발바닥의 느낌을 떠올리면, 모양이 아주 선명해져요.”
“……아.”
“그리고 새벽에 이슬 맞은 풀밭은요, 느낌이 엄청 좋아요. 얼른 벗어 보시라니까요.”
이원은 요 맹랑한 요구를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억지로나마 제어하던 마음을 아예 풀어 버린 아이는 이제 한껏 싱그럽고 도발적이며 생명력이 넘친다. 미치게 사랑스러웠다. 그냥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힌다.
허리를 숙이고 구두와 양말을 벗었다. 열렬한 시선이 맨발에 꽂히는 것이 느껴진다. 시원한 물을 머금은 잔디가 발바닥에 와 닿는다. 간지럽고 산뜻한 촉감과 함께 아래에 깔린 자갈과 모래의 감촉이 함께 느껴졌다.
느낌이 이상하다. 엄청 좋은지는 모르겠고, 엄청 낯설고 당황스러웠다.
이원은 우연이 이끄는 대로 천천히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디딜 때마다 혈관으로 시원한 피가 도는 것 같고, 세포마다 산뜻하고 맑은 물이 스며드는 것 같다. 분명 익숙한 집인데 새로운 세계로 자꾸자꾸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원은 이 집에서 살았던 32년 동안 한 번도 맨발로 잔디를 밟아 본 적이 없었다. 잠을 잘 때 말고는 강박처럼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맨발을 남에게 보이는 것은 무례한 일이라고 믿고 살았다.
……나는 그동안 왜 그랬을까?
“보세요, 좋죠! 느낌 좋죠!”
흥분한 우연이 풀쩍대며 주변을 돌았다. 이원은 우연의 팔을 붙잡았다. 부러질 듯 앙상한 팔목이 잡힌다. 소스라치는 감각이 그녀의 것인지 자신의 것인지조차 구별이 되지 않았다. 이원은 거의 반사적으로 우연을 훌쩍 안아 올렸다.
“뛰지 마. 다쳐.”
품에 안긴 우연은 버둥대는 대신 굳은 것처럼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원은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신발 있는 데까지만 데려다줄게.”
“아저씨, 그런데 아저씨도 맨발이잖아요.”
하아. 하. 이원은 대답하지 못하고 별채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커다란 슈트에 폭 파묻힌 우연은 이제 눈을 잘끈 감고 있다. 마른 몸이 자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이원은 숨이 조금씩 가빠지는 것을 참으며 한 걸음씩 걸었다.
입을 맞추고 싶다. 막무가내로 입술을 대고 힘껏 비비고 싶다. 눈앞에 보이는 동그랗고 매끈한 이마에, 발갛게 상기된 뺨에, 축축하게 물기가 고인 채 질끈 감고 있는 눈 위에. 팔 아래서 한들거리는 저 작은 발에, 발가락에, 조개처럼 꼭 다물린 새빨갛고 매끄러운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다.
……아니, 집어삼키고 싶다. 모조리.
아랫배로 열기가 모여들었다. 조금 전에 들었던 목소리가 귀로 징, 울렸다.
‘인간의 성욕 역시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거예요. 배우자와 온전히 연합하여 아이를 낳고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이루기 위해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선물임을 잊지 마세요.’
하지만 이원은 확신했다. 이 욕구는 옳지 않다. 길을 잘못 들었다. 자신은 지금 가지 말아야 할 길로 들어선 것이다.
‘물질은 주님께서 허락하신 무수한 축복 중 지극히 일부일 뿐이에요. 물질을 위해 하느님의 더 크고 선하신 축복을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세요.’
‘그분의 뜻은 인간의 계산으로는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곳에 있어요.’
계산할 것도 없다. 나는 당장 너를 다른 곳으로 보내고, 후견인을 바꾸고, 그림 다섯 장 따위 계약서는 찢어 버리고 너를 잊어야 한다. 보지 말아야 한다. 늦기 전에, 더 속수무책이 되기 전에.
이원은 우연은 안고 한 걸음, 한 걸음 휘청대며 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깔린 자갈 때문에 가끔 발바닥이 아팠고, 어제 깎은 잔디에서는 여전히 싱싱한 쇳내가 올라왔다.
이원은 자신이 아슬아슬하게 서 있던 경계선에서, 한 걸음, 한 걸음 금지 구역으로 들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느님께서 이 아이에게 내린 재능, 그것에 편승하고자 했던 욕심, 메디치와 미켈란젤로 따위는 이제 아무런 의미도 없다.
나는 너를 원해.
이 난데없고 폭력적인 깨달음은 재앙이었다. 벼락처럼, 그것도 너무나 선명하게 까발려진 마음은 껍질이 깨진 달팽이의 맨살과 다를 바 없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했을 때처럼 스스로를 속일 여유조차 없었다.
안겨 있던 우연이 여전히 몸을 가늘게 떨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눈을 꼭 감고 있어서 다행이다.
……다행일까?
우연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입 맞추고 싶다는 열망이 다시금 폭풍처럼 들이닥친다. 미친 것처럼, 밑도 끝도 없이, 이 작은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입술이 짓뭉개질 정도로, 입속을 샅샅이 헤집고 집어삼킬 정도로 격렬하게.
아니, 이 가느다란 몸이 으스러질 정도로 끌어안고…….
후우.
그는 이를 지그시 물고 거칠어지려는 호흡을 다스렸다.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과격한 감정에 머리가 아득해졌다.
이건 사악한 생각이다. 큰 죄다. 결혼을 포기할 게 아니라면, 이래선 안 된다. 우연이는 너보다 열두 살이나 어려. 너는 결혼할 여자가 있고, 지켜야 할 회사가 있어. 세경은 아버지가 평생을 담아 일군 회사다. 이렇게 허망하게 그쪽에 넘겨줄 순 없다.
어차피 네 손에 남은 것은…… 세경 하나뿐이잖아.
……주님, 저는,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왜애애애앵. 쓰웡, 쓰웡, 쓰웡, 쓰워어어어.
어디선가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쾌청한 하늘, 잔디만 파랗게 깔린 정원, 어느 나무에선가 요란하게 매미가 울기 시작했다. 한 마리가 울기 시작하자 주변에서 한두 마리가 따라서 악착같이 날개를 비벼 댄다. 우연은 두 팔을 올려 이원의 목에 팔을 감았고, 이원은 맨발로 천천히 정원을 가로질렀다.
말해야 해. 돌려보내야 해. 기숙사로, 병원으로, 적어도 서로를 볼 수 없는 곳으로.
하지만 입술에서는 엉뚱한 말이 자꾸 튀어나온다.
“우연이 너 방학 동안 뭐 할 거니? 무슨 계획 있어?”
“알바도 못 하게 됐는데 할 게 뭐 있나요. 먹고, 자고, 놀고, 또 먹고, 자고, 놀고.”
“좋구나. 또?”
“그림을 그릴 거예요. ……아저씨한테 빚진 거 얼른 까야죠.”
숨이 자꾸 밭아진다. 이원은 필사적으로 숨을 고르며 웃었다.
“그것도 괜찮겠구나. 아틀리에를 하나 꾸며 놓으라고 해야겠네.”
이성과 의지는 한껏 박약해진다. 고양이처럼 갸릉갸릉 웃는 소리가 가슴을 타고 올라온다. 심장이 탐욕스럽게 뛰기 시작했다.
왱, 왱, 왱, 왱, 쓰와아아아아.
매미들이 필사적으로 발정하는 쇳소리 사이사이로, 이원은 거대한 파열음을 들었다. 지금까지 자신을 위태위태하게 지탱해 주던 어떤 벽이 천천히, 혹은 급격하게 붕괴하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