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누드-19화 (19/47)
  • 19. 이방인

    “신인전 공모에 우연이를요?”

    이원은 눈앞에 서 있는 비서실장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동그란 안경 너머 까만 눈동자가 흥분한 듯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엉뚱한 소릴 할 때의 딱 그 표정이다.

    “어제 올라온 서류 중에, 강석주 관장이 이원미술관 신인전 공모 요강 올린 게 있잖습니까? 거기에 우연이 작품을 출품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벌써 데뷔시키자는 겁니까? 이제 스무 살밖에 안 된 아이를요?”

    이원은 헛웃음을 지으며 팔짱을 꼈다. 최 실장도 은근히 우연을 아끼고 있다는 건 알지만 이런 제안은 좀 당황스럽다.

    이원미술관 신인 화가 공모전은, 개인전을 아직 열지 못한 신예 화가를 발굴해서 후원하는 이원메세나재단의 중장기 프로젝트다. 당선된 화가들에게는 상금과 판매 대금 전액, 그리고 개인전 무료 대관의 기회를 5년간 제공하며, 재단에서 운영하는 과천의 아트빌리지에 5년간 입주할 권리도 준다.

    나름 공정하다는 평가에, 적당히 권위도 있는 데다, 신인전을 통해 데뷔한 화가들이 라인을 형성해 화단에서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 보니, 젊은 화가들의 지원이 엄청났다.

    “나이 제한 있는 공모전도 아닌데 무슨 상관입니까. 피카소가 고전주의 테크닉을 마스터했다는 시기가 겨우 열다섯 살이었습니다. 청색 시대를 열었던 건 스무 살이고요.”

    “그건 피카소였으니까.”

    “혹시 압니까? 우연이도 피카소보다 더 유명해질지? 가능성이야 무궁무진하죠!”

    이원의 심드렁한 반응에도 최 실장은 끈질겼다.

    “전무님 초상화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완전히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 실력이면 충분히 승산 있습니다. 손 원장님도 말씀하셨잖습니까. 전시회 같은 목표를 주는 것도 치료에 효과가 있을 거라고요.”

    손 원장의 전시회 제안이라. 이원은 다시 쓴웃음을 지었다.

    ‘투약과 상담 말고도, 성취감을 줄 수 있는 프로젝트를 주면 무기력과 우울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학교 동기들하고 작은 연합 전시회라도 열면 어떨까요? 구민 회관 홀이라도 빌려서.’

    이원은 그 제안을 일소에 부쳐 버렸다. 손 원장은 미술에 쥐뿔 아무런 안목도 없다. 본사 로비에 걸린 잭슨 폴록의 작품을 보고 원숭이가 낙서를 했느냐 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이었다. 우연의 실력을 심리 치료용 전시회 수준으로 생각한다는 걸 알게 되니, 자신까지 후려쳐진 것 같고 자존심이 상했다.

    적어도 우연이의 데뷔는 단독 개인전으로, 다들 알 만한 갤러리에서, 고급스러운 도록을 갖춰서, 컬렉터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큼 본격적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최 실장님. 지금 우연이는 안정이 필요합니다. 굳이 스트레스를 줄 필요가 있을까요?”

    “전무님, 우연이는 지금까지 그림으로 스트레스를 풀어 왔습니다. 탈출구였죠. 게다가 이원 신인전은 화가들이 가장 선망하는 등용문입니다. 데뷔 무대로 그 이상 좋을 순 없겠죠. 무엇보다…….”

    홍연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더니 목소리를 낮춰서 숙설거린다.

    “당선되면 우연이 앞엔 그야말로 탄탄대로가 열리는 겁니다. 이원 신인전에 컬렉터들이 몰려와서 매의 눈으로 샅샅이 둘러보고 가시는 거, 아시잖습니까. 제대로 된 컬렉터들 눈에 들면 바로 꽃길이죠.”

    비식 웃음이 나왔다. 우연에게 이미 제대로 된 컬렉터가 붙었다는 생각은 안 드나? 게다가 저 오지라퍼 비서실장이 깜박 잊어버린 게 있었다.

    “다 좋은데……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네?”

    “짜고 치는 것도 아니고, 전원 외부 심사 위원으로 이뤄지는 블라인드 심사 아닙니까. 그리고 작년에 열 명 뽑는데 750명 접수했던 거 잊으셨습니까? 자칫하면 꽃길은커녕 자존감만 바닥으로 처박힐 텐데요?”

    최 실장이 멍청한 표정을 짓는다. 이원은 드디어 유쾌하게 웃었다.

    “우연이에게 한번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 * *

    우연의 감정에는 중간층이 없었다. 묘지처럼 적막하고 수의처럼 정갈한 그의 공간에서, 우연은 끔찍하게 행복하거나 끔찍하게 불행했다. 아저씨가 출근한 후에는 깊은 안도감과 더 깊은 허무감에 푹 가라앉았고, 퇴근한 후에는 심장이 조여드는 불안감과 숨이 멎을 것 같은 고양감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우연은 자신의 감정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고, 이해할 수도 없었다.

    아저씨가 출근하면 우연은 2층 기도실에 올라가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아저씨가 매일 앉아서 비밀스러운 마음을 털어놓던 장소라 생각하면 가슴이 저절로 벌렁거렸다. 기도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아저씨가 알면 화를 내겠지만, 그래도 아저씨의 폐에서 나온 공기를 마시고 싶었고, 아저씨가 남긴 냄새 한 조각이라도 맡아 보고 싶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앉아 있노라면, 그 작고 은밀한 공간이 달콤한 꿀로 꿀렁꿀렁 파도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은 꿀에 빠져 숨도 못 쉬고 죽어 가는 나방파리였다.

    엄마 아빠와의 기억도 점점 사라지는 것 같다. 이상했다. 이곳에 이렇게 앉아 있으면 지금까지 당해 온 일들은 까마득하게 먼 과거로 사라지고, 다시는 오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다. 우연은 이 작은 공간이 지구의 시간과 공간에서 덜렁 떨어져 나온 작은 결계처럼 느껴졌다.

    엄마 아빠와의 기억을 정말 완전히 잊을 수 있을까. 손 원장님 말로는, 정말 힘들고 아팠던 건 무의식이 빨리 잊도록 애를 쓴다는데.

    그럴 것 같진 않다. 완전히 잊기 위해서는 완벽하게 안전해야 한다. 밖에서 엄마 아빠를 만날 가능성이 전혀 없이, 마스크나 성형 수술 따위에 의지하지 않고도 당당하게 돌아다닐 수 있을 때에야, 나는 두 사람을 완전히 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두 사람이 죽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이 안전한 결계에서 얼마나 오래 머무를 수 있을까.

    아저씨는 나를 언제까지 견뎌 줄 수 있을까. 언제 쫓아내고 싶어질까. 내가 아저씨 말을 잘 듣고 아저씨 마음에 들면 여기 오래오래 머무를 수 있을까?

    ……진짜 뻔뻔하다 너.

    상황 빤히 알면서 여전히 그런 기대를 품고 있는 자신이 환멸스러웠다.

    우연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저씨가 언제까지라고 내보내는 날짜를 정해 두면 그때부터는 불안해서 도저히 살 수 없을 것이다.

    우연은 이제 아빠를 만나는 게 불안한지, 아저씨와 떨어지는 게 불안한지도 구별할 수 없었다. 그리고 현재의 불안정한 상태가 아빠 때문인지, 아저씨 때문인지도 구별할 수 없었다. 아저씨에 대한 감정은 극한에서 극한까지 퍼져 있었다. 너무 많은 종류의 감정이 작은 심장에 한꺼번에 뭉쳐 있어서 가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우연은 뱀파이어처럼 종일 밤이 되기만 기다렸다. 아저씨가 집에 돌아오는 시간은 관짝에 누워 있던 진우연이 다시 생명을 얻고 살아나는 시간이었다.

    * * *

    “자, 다 삼켰으면 입을 한번 벌려 보시죠, 진우연 양?”

    “아아.”

    우연은 입을 크게 벌리고 혀를 들어 보였다.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냄비에 든 라면을 우연의 앞으로 밀어 보냈다. 약을 토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아저씨는 우연이 약을 몰래 토하고 있다는 것을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 약을 먹으면 잠이 쏟아져야 마땅한데, 오밤중에 잠이 안 온다며 그 소란을 피웠으니 결국 꼬리를 잡힐 수밖에 없었다. 우연은 아저씨에게 약속한 대로 솔직하게 대답했다.

    “혀 밑에 숨겨 놨다 뱉거나, 혀 안쪽에 손가락을 넣어서 변기에 토했어요.”

    “예전에도 많이 토해 봐서, 소리 안 나게 조용히 토하는 방법을 알아요.”

    그 후 아저씨는, 우연이 약 먹을 시간이 되면, 눈앞에서 직접 약을 먹이고 입속을 검사한 후, 식당에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 가끔 피 같은 라면 국물을 얻어먹기도 했다. 매사 진지한 아저씨는, 라면 국물조차 경건하고 신중한 얼굴로 음미하듯 먹곤 했다.

    “라면도 먹었으니, 서재에 올라와서 책이나 좀 보다 내려가렴.”

    그리고 약이 다 소화될 때까지 서재에서 두세 시간을 머무르게 한 후 내려보냈다.

    우연은 서재에서 아저씨와 함께 책을 보거나,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거나, 웹 서핑을 하곤 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할 때도 있었다. 간간이 대화가 오가기도 했지만, 아저씨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대체로 고요하고 차분했다. 아저씨가 만들어 내는 침묵은 너무 편안하고 자연스러워서 기이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아저씨, 이상해요. 같이 있으면서 말 한마디도 안 하는데, 어색하지 않고 편안해요.”

    “왜, 이상하니?”

    “네. 엄마 아빠가 이렇게 조용하면 긴장감이 대박이었거든요. 되게 신기해요.”

    침묵이란 폭풍 전야처럼 뭔가 불안한 것이었다. 아빠가 재수 없는 소리라도 떠들고 있어야 안심이 되었고, 조용한 상황이면 무슨 말이든 나오는 대로 주워섬기지 않으면 목이 졸리는 것 같았다. 알고 보니 말이 없다는 건 이렇게 편안하고 좋은 거였는데.

    그랬구나. 아저씨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말보다 침묵이 더 편안하고 귀해. 나도 신학교에서 알았어. 거기선 저녁 시간이 아예 침묵 시간으로 정해져 있었거든.”

    신학교에서의 저녁 시간은 Altum Silentium, 대침묵 시간이었다. 이원은 절대 침묵에 잠긴 그 시간을 한없이 사랑했다. 하느님께 깊이 침잠하고 자신을 돌아보노라면, 세상은 어느덧 적요해지고, 마음은 평온해진다. 조용히 혼자 보내는 시간은, 보석처럼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우연은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는 지금까지 저녁 시간을 그렇게 보내오고 계셨구나. 이곳에서 일하는 분들이 저녁때 2층에 함부로 올라오지 못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은 가장 사적인 그 시간과 공간을 우연에게 나누어 주고 있다.

    다만, 아저씨는 다른 사람에게 오해를 살 만한 상황은 절대적으로 피했다. 아저씨와 함께 있는 자리에는 송 할머니나 경호원인 민정 언니가 동석했다. 우연과 아저씨 사이에는 따뜻하고 우호적인 분위기와 적정한 거리가 동시에 유지되고 있었다. 이것은 순전히 아저씨의 노련한 거리 두기 덕분이었다.

    그래서 우연은 끔찍하게 행복했고, 밑도 끝도 없이 불행했다.

    아저씨의 감시는 나름 괜찮은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우연이 자그마치 책을 읽기 시작했던 것이다.―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낮 동안 서재의 책장과 인터넷을 열심히 뒤져 ‘있어 보이는’ 책들을 골라 둔 후, 그것을 뽑아 들고 아저씨 앞에서 읽는 척했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순수이성비판’, ‘이방인’. 어디선가 한 번씩 들어 본 듯한 책들이었다.

    하지만 그 책을 들고 있을 때 아저씨가 피식피식 웃는 걸 보면, 진짜로 읽는다고 믿지는 않는 것 같았다.

    아저씨의 웃음이 오기를 불렀다. 물론 칸트와 니체는 오기만으론 해결할 수 없는 에베레스트였지만 다행히 ‘이방인’은 동네 뒷산쯤은 되어 보였다. 두께도 얇았고, 내용도 어찌어찌 이해할 수 있었고, 이해가 안 되면 인터넷의 도움도 받을 수 있었다. 어쨌든, 명색 대학생이면 이 정도는 나도 읽어 봤다 큰소리칠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깜짝 보너스까지 나타났다!

    “우와, 아저, 아저씨, 여기 이거 이거, 아저씨가 적어 두신 거죠?”

    우연은 환성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책의 가장 뒷장에 영어로 적힌 메모가 있었던 것이다. 이 집에서 감히 아저씨의 책에 낙서를 할 만큼 용감한 사람이 있을 것 같진 않으니, 아저씨가 직접 쓴 문장일 것이다.

    아저씨는 깔끔한 성격과 달리 글씨체가 깔끔하지는 않았다. 뒤로 많이 눕혀서 필기체로 길쭉길쭉 날려 쓰는데, 악필에 가까웠다. 우연은 그런 점마저 의외롭고 좋아서 미칠 것 같았다.

    “이거 아저씨가 감상 적어 두신 거예요? 남이 못 보게 영어로? 무슨 뜻이에요?”

    “영어 아니고 프랑스어야. 내 감상 아니고, 알베르 카뮈가 이방인에 대해 말했던 내용이고.”

    “우와 아저씨 프랑스어도 아세요? 대박이에요.”

    “겨우 그런 거로 비행기야? 이래 봬도 중국어, 일본어도 할 줄 알아. 아, 라틴어도 조금.”

    “라틴어 같은 건 왜 배워요? 아, 신학교에서?”

    “그 전부터 배웠어. 유학 생활 할 때 라틴 전례 미사를 드렸거든.”

    아저씨는 아주 가끔, 겸손 겸양의 가면을 벗어 치우고 소심하게 자랑을 했다.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그럴 때 아저씨는 숨 막히게 귀여웠다. 자랑을 해 놓고는 그게 또 뻘쭘했는지 멋쩍게 웃으며 해석을 해 주었다.

    “Dans notre sociéte tout homme qui ne pleure pas à l’enterrement de sa mère risque d’être condamné à mort. 우리 사회에선,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사형 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

    “맞아요. 여기 남주는 엄마가 죽은 날 울지도 않고, 장례식 끝나자마자 섹스도 해요. 완전 남남 같아요.”

    우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억지로라도 읽었더니 그래도 무슨 말인지 이해는 할 수 있었다. 아, 그래. 아저씨는 조금 식겁한 표정이 되었다. 아저씨는 서른두 살이나 먹었으면서도 여전히 ‘섹스’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어색한 얼굴을 했다.

    “어, 장해요. 정말 읽기는 읽었나 보네? 뫼르소가 왜 그랬던 거 같아?”

    “엄마가 너무너무 미우니까 그랬겠죠.”

    우연은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아저씨는 약간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면 서재에서 그렇게 많은 책을 읽었는데―읽는 척했는데― 책 내용으로 대화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우연은 조금 뿌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긴장했다. 뭔가 어렵고 심오한 대화를 나누게 되면, 아저씨가 자신을 달리 보게 될 것 같긴 한데, 인터넷에서 본 평론가들의 말은 너무 어려워서 하나도 써먹을 수가 없었다. 소설보다 어려운 해설이라니. 참 웃기지도 않다.

    “왜 그렇게 생각해? 뫼르소의 어머니는 내내 모호했어. 좋은 어머니였는지, 나쁜 어머니였는지, 뫼르소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그 집 엄마가 뭔 짓을 했는지야 알 바 아니지만요, ‘나도 엄마 아빠랑 그렇게 완벽한 남남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요, 뫼르소네 엄마도 어지간히 별로였겠다 싶은 거죠.”

    우연은 단언했다. 최면을 걸어 엄마 아빠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도려내듯 없애는 것도 좋지만, 뫼르소처럼 진정한 의미에서 엄마와 완벽하게 남이 되어 버리는 것도 복수로 나쁘지 않았다. 엄마 나이도 모르고, 장례식 끝나자마자 친하지도 않은 여자랑 놀러 다니면서 섹스도 한다. 뫼르소가 엄마에 대해 무심 시크하게, 그야말로 사이코패스처럼 툭툭 내뱉을 때마다 우연은 소름이 쪽쪽 끼치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완전히 남이 되는 건, 저처럼 돈도 없고, 빽도 없고, 힘도 없는 사람에겐 가장 완벽한 복수 방법인 것 같아요. 너는 이제 내 인생에서 발가락의 때만큼도 의미 없다! 땅땅! 그런 느낌?”

    우연은 소파에 벌렁 누워 키득키득 웃었다. 물론 이 소감이 이 유명한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진짜 주제는 아닐 거라는 자각은 있었다. 막상 말해 놓고 보니 창피하기도 했다. 아저씨 귀엔 이 소감이 얼마나 우습게 들릴까?

    하지만 아저씨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우연이 누운 소파 옆으로 의자를 당겨 가까이 앉았다.

    “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아저씨는 비웃거나 뭔가를 가르치려는 표정이 아니었다. 순수하게 흥미로워하고 있었다. 우연은 고개를 반짝 들고 물었다.

    “아저씨 생각은 어땠어요? 다 읽고서?”

    갈색의 눈동자가 위쪽으로 살짝 잠긴다. 잠시 생각을 더듬은 아저씨가 한 낱말, 한 낱말 신중하게 대답했다.

    “인간은 부모든 연인이든 친구든 본질적으로 완벽한 타자(他者)…… 타인으로 존재해. 하지만 사회는 한 개인이 완벽한 타자로 존재하는 것을 용납하기 싫어하지.”

    “……?”

    한국말인데 한국말이 아닌 것 같다. 우연의 어리둥절한 표정에 아저씨는 조금 멋쩍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타자 간의 상호 작용은 논리적인 인과로 연결되는 것 같지만, 사실 아무런 원인과 결과 없이 일어나기도 해. 엄마가 죽었는데 여자하고 데이트하고 잘 수도 있고, 햇빛이 너무 강해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장례식 끝나자마자 섹스를 했다는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기도 하지. 작가는 ‘사람이든 사회든 원래 그런 부조리한 존재야.’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 같아. 물론 이건 내 생각.”

    아저씨의 말은 인터넷의 해설과 전혀 달랐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한편으론 무섭기도 했다. 원인과 결과가 없는 세상이란 복수와 증오로 가득한 세상보다 더 위험하게 느껴졌다. 적어도 복수와 증오는 합리적이고, 가끔은 정의로우며 어쨌든 이해는 할 수 있으니까.

    우연은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아저씨라면, 어쩌면 화를 내지 않고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여쭤볼 게 있어요.”

    “음?”

    “화 안 내실 거죠?”

    “……안 내마.”

    아저씨는 내용을 듣지도 않고 함부로 약속해 주었다. 우연은 목소리를 낮춰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엄마 아빠 장례식 날 꼭 울어야 하나요? 뫼르소처럼 눈물이 안 나오면 어떡하죠? 관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싶으면 어떡하죠?”

    아저씨는 잠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우연은 계속 진지하게 물었다.

    “뫼르소처럼 밤새 파티를 하고 싶으면 어떡하죠? 섹스가 미친 듯이 하고 싶으면 어떡하죠? 아빠가 지랄하던 대로 채팅 앱에서 아무 남자나 만나고 싶으면?”

    “그러고 싶어?”

    “……그럴 것 같아요. 그리고 만약에 제가 양극성 장애 환자가 맞고 조증 상태라면 그럴 가능성이 아주 크겠죠.”

    우연은 눈을 내리깔고 대답했다. 아저씨의 눈을 볼 용기가 없었다.

    한참 후, 아저씨의 커다란 손이 머리 위에 조심스럽게 얹혔다.

    “그날, 너를 깊이 위로하고 따뜻하게 안아 줄 수 있는 사람이 네 곁에 있기를 기도하마.”

    * * *

    “우연이 아직 잡니까.”

    갑자기 들린 아저씨의 목소리에 우연의 눈이 번쩍 떠졌다.

    눈앞은 미지근한 어둠이었다. 우연이 잠을 푹 자도록 창에는 두꺼운 암막 커튼이 쳐져 있었지만, 커튼 밑으로 희미한 새벽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아저씨의 목소리는 방문 밖에서 나직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송 할머니가 대답하는 소리도 희미하게 들린다.

    “네. 늦게까지 주무실 것 같습니다. 어제 늦게 잠자리에 드셔서요. 새벽 미사 다녀오시게요?”

    “예. 오늘 아침은 회사 식당에서 먹을 테니 차려 두지 마세요.”

    우연은 살금살금 발끝으로 걸어 문 앞에 섰다. 걸쇠까지 단단히 잠가 둔 방문 밖에선 여전히 인기척이 있다. 외시경 렌즈에 눈을 바짝 갖다 댄 우연은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복도의 희미한 불빛 아래서, 아저씨가 방문 앞에 고개를 푹 숙이고 서 있다. 한 손은 문에 대고, 한 손은 가슴을 지그시 누르고 있다.

    대체 지금 뭘 하시는 거지?

    하지만 한참 기다려도 아저씨는 그 자세 그대로 석상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송 할머니는 몇 걸음 뒤에서 두 손을 모으고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다. 팽팽하게 긴장한 등으로 진득하게 땀이 흘러내린다.

    ……설마?

    우연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 아저씨의 얼굴이 닿은 위치에 귀를 바짝 갖다 댔다. 들릴락 말락, 아주 가는 목소리가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연은 한참 후에야 아저씨가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왜 여기서?

    혼란스러워하던 우연은 이내 영화에서 가끔 보던 장면을 떠올렸다. 다정하고 가정적인 아빠 엄마들은 저녁마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주고 기도를 해 주곤 했다.

    맙소사. 그럼 아저씨는 내가 잘 때마다 이렇게 기도를 해 주고 가셨다는 건가?

    조심스러우니 방에 들어오지는 못하고, 이렇게 방문 앞에서? 매일매일?

    우연은 멍하니 그렇게 서 있었다. 이건 뭔가 이상하다. 저렇게 작고 낮은 목소리로 기도하는데, 텔레파시라도 통하는 듯, 우연의 머릿속으로 또렷하게 들이박힌다.

    “저 아이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힘겨운 고통에서 이제는 벗어나게 해 주시고 당신의 능력으로 깨끗이 회복시켜 주십시오. 저 아이가 혼자 지고 가기에 짐이 너무 버겁습니다.”

    순간 눈이 시큰했다. 우연은 눈치 없는 눈을 벌주기라도 하듯 힘껏 감았다. 제발 눈물이 나오지 마라. 흐느낌도 나오지 마라. 이 빌어먹을 몸과 마음은 왜 하나도 주인의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을까.

    “제가 우연이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해 주세요.”

    아저씨는 한참 동안 침묵했다. 숨이 막힌다. 더는 견디지 못하겠다 느낀 순간, 아저씨는 긴 한숨과 함께 나직한 속삭임을 토해 냈다.

    “이런 고통이 존재하는 것 역시 당신의 뜻이면,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큰 뜻이 있어 이런 고통을 허락하신 거라면…….”

    그의 목소리는 점점 간절하게 바뀌어 간다.

    “저 아이에게 주어진 고통은 제게 주세요. 너무 힘든 짐입니다. 제가 안고 갈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저 아이가 아픈 것은 저에게 주세요. 제가 감당하겠습니다. 저에게 주세요. 반복되는 목소리는 진실한 것을 넘어 성스럽기까지 했다. 결국 눈물이 툭 터지고 말았다.

    ……이게 뭔데 아저씨가 멋대로 가져가고 말고 해요?

    아저씨 바보예요? 호구예요? 왜 남이 아파야 할 몫까지 함부로 가져가겠다고 그래요?

    내가 지금 왜 이렇게 아픈 줄이나 알아요? 그게 아빠 때문인지 알아요? 뭘 좀 알고서나 그런 기도를 하시란 말이에요.

    아저씨는 아마 사람이 아닐 것이다. 하늘에 살던 누군가가 호기심으로 세상에 잘못 내려온 게 분명하다.

    사람이면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 있을 수 없다. 이기적이지도 못하고, 남을 미워하지도 못하고, 남의 아픈 것까지 모조리 끌어안아야 직성이 풀리는 열등한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라면, 진작 멸종되었을 것이다. 천 년 전, 만 년 전, 아니, 백만 년 전쯤에.

    아저씨는 아주 오래전에, 진작 멸종되었어야 할 족속인 거다.

    우연은 아저씨가 손을 대고 있는 부분에 얼굴을 갖다 대고 비볐다. 힘주어 감은 눈꺼풀 틈으로 눈물이 울컥울컥 흘러넘쳤다.

    아저씨, 사랑해요. 이 자리에서 죽어도 좋아. 괜찮아. 나는 아저씨를 사랑해.

    아저씨가 믿는 하느님, 당신이 정말 계신다면 저 좀 어떻게 해 주세요. 이 마음을, 제발 어떻게 좀!

    ……나는 이제 어떡하면 좋아요…….

    기도를 마친 아저씨가 조용히 몸을 돌린다. 그의 등은 넓고, 뒷모습은 굳건하고, 움직임은 우아했다. 그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은 여전히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 우연은 자신이 더 이상 참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아저씨. 사랑해요.”

    입술이 멋대로 달싹인다. 한숨처럼, 바람처럼, 햇볕에 잘 마른 이불자락이 버스럭대는 소리처럼.

    “아저씨,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요.”

    사랑은 설득되지 않는다. 사랑은 의지로 만들 수도 없고, 의지로 없앨 수도 없다. 사랑에는 의도와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 자체가 의도고 목적이고 존재 이유다. 그래서 없애 버릴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숨기지 못할 것이다. 입을 틀어막아도 눈이 말을 할 것이고, 눈을 뽑아 버려도 온몸이 고함을 지를 것이다. 내가 혀를 물고 죽어 버린다 해도, 아저씨는 내 시체에서 흐른 핏자국에서 나의 사랑 고백을 듣게 되고야 말 것이다.

    아저씨의 발걸음이 잠시 멈춘다. 하지만 돌아보지는 않는다. 아저씨가 이 말을 들었을까. 이를 악물고 숨을 참았다. 등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좋은 꿈 꾸렴.”

    아저씨는 조용히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투욱, 툭, 투욱, 툭. 희미해지는 발걸음 소리마저 집어삼키고 싶을 만큼 욕심이 난다. 우연은 문에 귀를 바짝 댄 채 줄곧 서 있었다.

    사랑해, 사랑해, 아저씨, 사랑해요.

    현관문이 닫히고도 한참이 더 지난 후에야 우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래, 나는 나에게 솔직하겠다. 사랑은 우리의 골치 아픈 상황 따위 모른다. 아저씨가 왜 그런 굴욕적인 결혼을 받아들이는지, 약혼녀 언니는 왜 사랑하는 남자를 두고 아저씨와 결혼하는지, 재벌의 결혼 문화는 왜 이 모양인지, 내 조건이나 처지가 어떤지, 사랑은 그따위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

    아저씨는 나를 사랑해.

    나도 아저씨를 사랑해.

    아저씨는 그 언니와 결혼하면 행복하지 못할 거야. 죽을 때까지.

    우연은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눌러온 이 마음이 터질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결론이 어떻게 날지 모르지만, 이 마음은 아저씨에게 어떤 방법으로든 전달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은, 아저씨와의 인연이 완전히 끊어지는 때일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고 고통스러우며 슬픈 종말일 것이다.

    그 이후의 일은, 아저씨가 믿는 하느님만이 아실 것이다.

    우연은 문에 두 손을 댄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

    혼자서 조용히 기도실에 올라갔다. 아저씨의 기도실에서 처음으로 올리는 기도는 방 주인의 그것처럼 장중하지도 않고 예의 바르지도 않았다. 일단 뭘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냥 방 한가운데 멀거니 서서 아저씨와 이야기를 하듯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하느님, 전 아저씨가 좋아요. 그러니 전 이제 어떡하면 좋아요?”

    우연은 그날 새벽, 약혼녀와 함께 집에서 나와 깊이 입을 맞추던 아저씨의 모습을 상상했다. 상상하고 싶지 않은데 머리에 끌로 박은 것처럼 떨쳐지지 않는다.

    “아저씨하고 그 언니는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에요. 그 언니하고 섹스를 하고 싶지 않대요. 그런데 왜 같이 잤을까요? 그렇게 참기 힘들었을까요?”

    고개를 흔들었다. 대체 섹스 따위에 왜 사랑이라는 말을 붙인 걸까? 그렇게 더럽고 이상하고 창피한 일에. 싫어하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과도 할 수 있고, 강제로 당할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섹스를 사랑 행위라고 이름 붙인 개새끼는 아마 진성 사이코패스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던 우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한심해. 멍청해. 아저씨가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장소에서 이따위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그 언니는 좋아하는 남자가 따로 있대요. 그런데 왜 아저씨하고 결혼하려는 걸까요? 미친 거 아니에요? 그걸 알면서도 결혼하는 아저씨도 제정신은 아닌 거죠? 그렇죠?”

    우연은 숫제 떼를 쓰듯 조르기 시작했다.

    “결혼은 하느님 앞에서 약속하는 거라면서요. 그러면 그딴 식으로 야매로 하면 안 되잖아요. 하느님이 막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둘 다 하느님 이름 걸고 사기 치는 거잖아요, 그거.”

    아저씨는 이런 식으로 기도했던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어떤 게 바른 방법인지도 모르겠고, 이보다 절실한 내용도 없었다. 그러니 기도를 잘못해서 지옥에 떨어진다면 그것도 어쩔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어차피 지옥에 떨어질 거면, 하느님한테 하고 싶은 말을 다 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하느님, 제가 아저씨랑 결혼하겠다는 게 아니에요. 저 그렇게 뻔뻔하지 않아요.”

    …….

    “아저씨는 불행한 결혼을 하지 말고 헤어지고, 대신 좋아하는 저와 사랑하면 되지 않나요? 저도 좋아하는 아저씨와 사귀고 사랑할 수 있잖아요. 결혼하는 거 아니고 사귀기만 하는 건데도 안 돼요? 왜 안 돼요?”

    내가 원하는 것. 아저씨의 옆에서 그 아름답고 능력 있는 약혼녀 언니처럼 진하게 입맞춤을 받고, 그 이상의 것을 나누고 싶은 것, 모든 것을 극한까지 주고받는 관계.

    우연은 말을 멈추고 저도 모르게 콧방귀를 뀌었다. 뻔뻔하지 않다지만 뻔뻔하기 짝이 없다. 아저씨가 약혼녀 언니와 헤어지고 자신의 곁에 있는 것은, 신데렐라가 거지와 결혼하는 것보다 열 배나 황당한 결말이다. 하지만 돈이니 책임이니 다 때려치우고 아저씨의 행복 자체만 놓고 생각하면, 또 그게 옳은 선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날, 너를 깊이 위로하고 따뜻하게 안아 줄 수 있는 사람이 네 곁에 있기를 기도하마.’

    아저씨는 자신이 그 사람이 되어 주겠다는 대답은 절대 하지 않는다. 영원히 하지 않을 것이다. 우연은 눈을 내리깔고 고집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그날만큼은 아저씨가 내 옆에 있어 주면 좋겠어요.”

    그때까지는 아저씨가 결혼 안 하면 좋겠어요. 결혼했어도 그때는 이혼한 상태면 좋겠어요. 이혼 안 했어도, 흐으, 씨, 딱 며칠만, 아니 딱 하루만이라도 내 옆에 있어 주면 좋겠어요. 그러면 안 돼요? 절대? 그 언니도 다른 남자 있잖아요! 아저씨는 왜 그러면 안 돼요? 그게 죽을 만큼 큰 죄는 아니잖아요.

    하느님이든 부처님이든 누구라도 대답 좀 해 주세요. 환청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하지만 눈앞에 놓인 작은 성모상은 부드럽게 웃고 있을 뿐,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 따윈 들리지 않았다. 우연은 고개를 쳐든 채 훌쩍대며 중얼거렸다.

    “세상엔 이 여자 저 여자 골라 가며 바람피우고도 큰소리치면서 사는 개새끼들도 많잖아요. 저는 왜 하루도 욕심내면 안 돼요?”

    아저씨를 며칠만 저에게 주세요. 아니, 하루만이라도 좋아요. 나를 이 모양 이 꼴로 살게 하셨으면, 그런 로또 같은 며칠 정도는 주어도 되잖아요.

    왜 아저씨는 우리 아빠처럼 제멋대로에 이기적인 개새끼가 아닌 거예요?

    왜 아저씨는 약혼녀 언니처럼, 그리고 나처럼 뻔뻔하지 못한 거예요?

    우연은 울다가 웃다가 다시 눈물을 훔치며 낄낄거렸다. 정신과 약은 짝사랑에 아무 효과도 없다. 손톱만큼도 없다.

    답답해진 우연은 환기팬을 막고 있는 덮개를 조금 밀어 보았다. 환기구는 아저씨의 방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덮개가 조금 열리는 순간, 날개 사이로 방 안의 모습이 언뜻 눈에 들어왔다.

    우연은 쿵쿵대는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그 틈으로 눈을 가져다 댔다. 우연이 내내 궁금하게 생각했던 아저씨의 침실은 생각보다 훨씬 어둡고, 단순하고, 밋밋했다. 큼직한 침대와 단순한 탁자, 커다란 의자만 어렴풋이 보일 뿐이었다.

    “어, 저건 뭐지?”

    가만히 눈을 깜박거렸다. 침대 옆의 안쪽 벽에, 큰 액자 같은 것이 기대어져 있었다. 액자는 아니고, 뭔가, 낯익은, 몹시 낯익은…….

    ……캔버스?

    콰당.

    황급히 밖으로 나와 침실 문을 열었다. 침실에 들어오지 말라던 경고와 달리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문을 활짝 연 우연은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 버렸다.

    “저게 왜 …… 여기 와 있어?”

    침대 옆에는 낯익은 그림이 세워져 있었다. 온갖 종류의 분홍색과 붉은색으로 물든, 매우 거대한 초상화가.

    등으로 소름이 쫙 끼치면서 온몸으로 열이 확 뻗쳐 나간다. 가슴이 울렁거린다. 저 그림이 아저씨의 침대 옆에 있다는 것, 누웠을 때 시선이 가장 잘 닿는 위치에 놓여 있다는 것의 의미가 뭐겠는가.

    ……아저씨가 원하는 건, 결국 내가 원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

    아저씨도 지금 힘겹게 버티고 있는지도 몰라.

    우연은 두 손으로 입을 막고 덜덜 떨었다.

    이건 기회다. 나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이 관계의 종말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일은 전혀 상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

    우연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바로 알아차렸다. 내 마음을 전해야 한다. 아저씨에게 제대로, 조금이라도 어긋나지 않게, 확실하게 전해야 한다. 일이 더 늦어지기 전에, 손쓸 수 없게 되기 전에. 실패하면 그 순간 관계가 끝장나리라는 건 알지만, 우연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전하지 못하면 어차피 둘 다 불행한 결말로 끝나고 말 테니까.

    그리고 우연은 말보다 강력하게 마음을 전할 방법을 단 한 가지밖에 알지 못했다.

    * * *

    우연은 그날 저녁 아저씨가 그림을 좀 그려 보겠느냐, 전시회에 혹시 참가할 생각이 있느냐 조심스럽게 물었을 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최하는 곳이 어딘지, 상금이 얼만지, 무슨 혜택이 있는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려야 할 그림이 있다. 아저씨에게 반드시 보여 주어야 할 그림. 지금 머릿속은 그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두 점 이상 제출하라는데…….”

    “하나는 아저씨가 가져오신 초상화 있으니까, 하나만 더 그리면 되겠네요?”

    무심한 듯한 우연의 대답에 아저씨의 움직임이 잠시 굳었다.

    “집으로 가져온 거 알고 있었어?”

    “네? 당연하죠. 설마 제가 몰랐을 거라고 생각하신 거예요?”

    뻔뻔할 정도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자 아저씨는 난처한 얼굴로 한숨을 쉬다가 이내 납득이 갈 만한 이유를 생각해 낸다.

    “……맞다, 혜진이에게 들었겠구나.”

    아저씨는 우연이 몰래 침실에 들어가서 그림을 봤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우연은 아니라고 정정해 주는 대신 시큰둥하게 말을 돌렸다.

    “그래도 그림을 보셨으면 소감 정도는 얘기해 주실 줄 알았는데.”

    “멋있었어.”

    대답은 지나치게 간단했다. 그래서 우연은 그 그림이 아저씨에게 불러일으킨 파장이 생각보다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우연은 수백 가지 감정이 얽힌 갈색 눈동자를 빤히 응시했다.

    “커다란 캔버스를 구해 주세요. 아저씨.”

    “어느 정도?”

    “큰 거요, 아주 큰 거. 제 키보다 큰 거요.”

    “전작하고 같은 크기로 맞춰서 준비하마. 혹시 이번에도 내 초상화니?”

    “아뇨.”

    “오호? 전부터 생각해 둔 주제가 있니?”

    우연은 생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부터 생각해 둔 건 아니었다. 아저씨의 침대 옆에서 자신의 그림을 본 순간, 아저씨가 밤마다 저 그림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상상하는 순간, 벼락처럼 주제가 정해졌다. 두 번째 계약 작품이 무엇이 되어야 할지.

    “제 자화상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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