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누드-18화 (18/47)
  • 18. 푸른 수염과 비밀의 방

    어떻게 이런 집을 콩알만 한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아, 혹시 ‘집’의 기준이 베르사유 궁전이나 자금성이었나?

    우연은 홀의 한가운데 서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아저씨의 집은 우연이 20년 평생 보았던 집 중에서 가장 컸다. 어지간히 커야 ‘아저씨 금수저 맞구나.’ 하며 감탄이라도 할 텐데, 넓어도 너무 넓으니 개인 집이 아니라 공원이나 박물관처럼 느껴져서 오히려 무덤덤했다.

    마당은 운동장만큼이나 넓었는데, 가장자리에는 온갖 나무가 울타리처럼 빽빽하게 올라와 있었다. 무섭도록 새파란 잔디를 한참 가로질러 들어가면 새하얗고 높직한 본채 건물과 고용인들이 사용한다는 별채가 덩그러니 솟아 있었다.

    아저씨의 집에 들어온 후, 우연은 문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다. 현관 근처에만 가면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어서 도저히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집 안에선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저씨의 말대로, 집에는 경비 직원이 24시간 근무하고 있었고, CCTV도 빡빡하게 달려 있었다. 방마다 보안 벨도 설치되어 있다. 밤손님(?)께서 방으로 몰래 침입하려면 화재경보 같은 사이렌 소리를 듣게 될 거라고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저씨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었다. 현재 아저씨는 우연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기둥이었다. 이곳에 와 있는 게 민폐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대문 밖을 나서기만 하면 극심한 공포가 밀려들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빨리 괜찮아져서 나가야 해, 빨리 나아서, 하지만 아무리 기를 써도 우연은 자기 마음 하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아저씨는 우연이 조급해할 때마다 편안하게 달랬다.

    “우연아, 뭘 그렇게 조바심을 내. 지금은 네가 안정을 찾고 회복하는 게 제일 중요해.”

    “그, 그래도 아저씨가…… 너무 불편하시잖아요.”

    “아냐. 나는 네가 눈앞에 있어서 오히려 안심이 돼. 내가 손님으로 초대한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편히 지내. 외국에서 귀한 손님 오시면 우리 집으로 초대해서 같이 지낸 적도 많아. 괜찮아.”

    아저씨는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이 편안할까?’ 하는 것만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사람 같았다. 아저씨가 편할 리가 없는데, 손님으로 초대받은 거라는 말을 들으니, 나름 그럴듯하게 들리면서 슬며시 안심이 되는 것이다.

    처음에 우연은 아저씨 외엔 아무에게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입이 열리지 않았다. 송인희 여사에게도, 정 박사님에게도, 심지어 손 원장님에게도 말 한마디 할 수 없었다. 억지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생각하면, 눈앞이 하얘지고 구역질부터 났다. 홍연 아저씨나 송 할머니와 몇 마디라도 주고받게 되기까지는 일주일이나 걸렸고, 시선을 맞대고 이야기를 하게 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아저씨는 그동안 싫은 내색 하나 없이 의사를 대신 전달해 주고, 필요한 것을 하나하나 물어 가며 머무를 방을 꾸며 주었다. 아저씨는 손님방이 지나치게 썰렁한 게 신경이 쓰였는지 퇴근할 때마다 화분과 동물 인형을 사 왔다. 그 덕에 이제는 선반과 침대에 온갖 꽃들과 인형들이 가득했다.

    우연은 아저씨가 사 준 인형들을 끌어안고 잠을 잤다. 아저씨는 우연이 자기 몸뚱이만 한 고양이나 강아지 인형을 끌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면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로 웃어 주었다. 큰 인형이 시선을 피하거나 얼굴을 숨길 때 유용하다는 것을 아저씨는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아침저녁으로 안정제와 약을 먹었고, 하루의 절반은 잠을 잤다. 입맛이 너무 없어서 밥을 거의 먹지 않다 보니 안정제를 먹는데도 자꾸 살이 빠졌다.

    아저씨는 함께 밥을 먹을 때마다 ‘몇 숟가락만 더 먹으라’는 잔소리를 했다. 송 할머니에게 ‘우연이 입맛 나게 할 만한 요리로 부탁한다’는 이야기도 몇 번이나 했다. 송 할머니는 매일 과자와 케이크를 구웠고, 아침저녁 잔칫상을 차리다시피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저씨나 송 할머니를 위해서라도 뭐든 삼키고 싶었지만,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것도 있었다. 깨작대는 버릇은 엄마, 아빠에게 그렇게 많이 얻어맞으면서도 고쳐지지 않은 것 중 하나였다. 엄마는 그따위로 처먹을 거면 아가리에 깔때기를 끼워서 남은 반찬을 죄다 쑤셔 넣겠다고 이를 갈곤 했다.

    “아저씨, 목구멍에서 안 넘어가요. 토할 거 같아요.”

    아저씨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나타났다. 저도 안 넘어가서 미치겠어요. 우연은 고개를 숙인 채 한숨을 쉬었다.

    “깨작대는 거 보기 싫으면 그냥 입에다가 깔때기 박고 밀어 넣으셔도 괜찮아요. 엄마가 몇 번 그랬는데, 푸아그라 만들 때 거위들한테도 그렇게…….”

    “우연아. 그만.”

    아저씨는 이마를 짚은 채 고개를 숙이고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아저씨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자신이 몹시 부적절한 말을 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뒤늦게 아차 싶었다. 동정이나 관심을 받으려고 한 말은 아니었고, 그냥 그런 말을 들으며 살아와서, 별다른 생각 없이 튀어나온 것뿐이었다. 이런 깨달음은 늘 늦었고, 그 선은 항상 가늠하기 어려워서, 우연은 자신이 증오스러웠다.

    “미안하다. 먹기 싫으면 안 먹어도 괜찮아.”

    한참 후 아저씨는 불그레하게 물든 얼굴을 들더니,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연은 아빠 엄마에 관해서는 절대 묻지 않았다. 학교 성적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묻지 않았고, 친구들에게 연락도 답장도 하지 않았다. 그림도 그리지 않았다. 허깨비나 유령이 되어 버린 듯, 연필조차 들 수 없었다. 아무런 자극이 없는 날이 이어지다 보니 시간은 껑충껑충 뛰듯 흘렀다.

    그나마 기분이 좀 나아질 때면 살금살금 돌아다니며 집 안을 구경했다. 아저씨의 집은 미니멀리즘의 극치였다. 대리석으로 된 바닥, 기둥, 깨끗한 투톤 돌벽으로 이루어진 거실은 가정집이라기보다 호텔 로비나 갤러리 같았다. 대신, 화려한 장식은 눈에 띄지 않았고, 선이 간결한 가구 몇 점과 색감이 선명한 회화를 드문드문 배치하는 방식으로 세련되면서도 절제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아마 이런 게 아저씨의 취향이겠지.

    한숨이 나왔다.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아저씨는 고급스럽고 우아하면서도 절제된 스타일 좋아했고, 천박하고 방만한 것, 유치하고 투박한 것을 참지 못했다.

    이런 아저씨가 대체 왜 척박하고 심심한 신부님의 삶을 동경하게 되었을까.

    아저씨의 개인 공간인 2층은 1층보다 엄숙하고 무거웠다. 작은 집기나 소품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감탄사가 나올 만큼 아름답고 고급스러운 것이 많았지만, 대부분 눈에 잘 띄지 않게 배치되어 있었다.

    서재에는 책이 많았다. 동네 서점보다 많은 것 같았다. 하지만 만화책 따위는 없었다. 바닥이나 책상에는 먼지 하나 없었고, 드레스 룸이나 욕실의 집기들은 한결같이 희고, 말갛고, 손이 베일 듯 각이 잡혀 있었다. 아저씨는 그것을 보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게, 수건이나 침구, 옷 같은 걸 각 맞춰서 정리하면 뭔가 아찔한 쾌감이 있어. 속이 시원하고, 뭔가 짜릿하고, 스트레스도 좀 해소되는 것 같고. 호텔 하우스키퍼에서 제2의 적성을 찾은 것 같았다니까.”

    우연은 세상은 넓고 변태는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긴 뭐 하는 방인가요?”

    서재와 아저씨의 침실 사이에 끼어 있는 방은 용도를 알 수 없었다. 조그마한 쪽문이 붙어 있는 아주 작은 방이었다. 창고나 붙박이 옷장처럼 보이기도 했다.

    “별 건 없어. 볼 것도 없고.”

    “비밀의 방인가요? 푸른 수염의 방 같은?”

    “……하하.”

    아저씨는 대답하는 대신 커튼을 쳐서 쪽문을 완전히 가리고 어물쩍 넘어갔다. 침실과 비밀의 방은 비공개였다. 정체가 궁금하긴 했지만, 어느 정도 짐작은 되었기에 우연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영화에서 보면, 재벌가 서재의 책장 뒤나 커다란 액자 뒤엔 으레 비밀 공간이 있게 마련이고, 그곳에는 도끼로 찍어도 끄떡없을 금고가 숨어 있곤 했다. 금괴와 보석, 항아리, 현금 뭉치가 쌓여 있는 금고. 물론 금고 안에 덕질 물품이나 19금 컬렉션이 숨어 있을 수도 있지만, 우연은 저 점잖고 품위 있는 아저씨가 그 정도 변태까진 아닐 거라 믿었다.

    2층 개인 공간 오픈이 굉장히 드문 일이라는 것을, 우연은 나중에야 알았다.

    * * *

    우연은 눈을 말똥말똥하며 새까만 천장을 응시했다.

    잠이 오지 않는다. 약만 먹으면 종일 몽롱한 게 짜증이 나서 한두 번씩 약을 토하기 시작했는데, 그러면 그날 밤은 어김없이 불면 당첨이었다.

    “휴…….”

    처음에는 도로 자려고 애를 썼지만, 지금은 자지 않는다. 아니 요 며칠 동안은 잠을 안 자려고 일부러 약을 뱉어 내고 있었다. 밤에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생긴 것이다.

    그것은 아저씨의 소리를 모아들이는 일이었다.

    우연은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인 채, 위층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우연의 방은 1층에서도 가장 안쪽에 있는 아늑하고 조용한 방이었고, 바로 위는 아저씨의 침실이었다. 깜깜하면 깜깜할수록, 조용하면 조용할수록 청각은 더욱 예민해졌다.

    더워서 활짝 열어 둔 창문을 통해 아저씨가 조곤조곤 통화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내용은 잘 들리지 않았고, 낮고 은은하게 퍼지는 목소리만 들렸다. 가끔은 진지한 목소리였고, 가끔은 달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짧은 웃음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아저씨는 웃음소리마저 저렇게 달았다.

    우연은 저 달콤한 목소리를 듣는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아마도 뉴욕에 있는, 아마도 지금 아저씨 눈에 최고로 사랑스럽고 멋있게 보일 여자.

    ……약혼녀 유미현.

    지금 뉴욕은 아침 시간인데, 이렇게 규칙적으로 전화를 하는 걸 보면, 모닝콜이라도 해 주는 걸까. 뮤지컬 배우라면 8시나 9시 정도까지 늦잠을 자는 게 당연한지도 모른다.

    우연은 멍하니 아저씨의 목소리를 들었다. 내용은 별로 듣고 싶지 않아서 목소리만 들었다. 아파할 일이 아니라고 설득 따위는 하지 않는다. 아픈 건 맞으니까. 하지만 아저씨의 목소리를 기억에 담아 두는 것은 한없이 달콤한 일이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저씨는 목소리를 크게 내서 통화 내용이 들리게 하는 일도 없고, 약혼녀와 길게 수다를 떠는 일도 없었다.

    귀를 잔뜩 곤두세우고 있노라니 이제 발소리가 들린다. 이제 우연은 아저씨의 슬리퍼 소리와 맨발 소리를 구별할 수 있다. 슬리퍼일 때는 투욱, 투욱 꼬리가 긴 소리가 났고 맨발일 때는 궁, 궁, 궁, 하는 조금 짧지만 은은하고 묵직한 소리가 났다. 그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무 욕조에 물 채우는 소리가 들린다. 아저씨는 밤마다 아로마 오일을 떨어뜨린 뜨거운 물에 푹 잠겨 카모마일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역시 돈 많으면 뭔들, 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불면증 때문에 억지로 들인 습관이라고 했다. 불면증이 너무 심해 마약 빼놓고는 안 해 본 짓이 없다는 말에, 우연은 ‘돈 많으면 뭔들’ 하고 생각한 것이 미안해졌다.

    잘박잘박.

    찰그락, 퐁, 찰그락.

    물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환청인지도 모르겠지만 상관없었다. 깜깜한 어둠 속, 우연은 들릴 듯 말 듯 한 물소리를 들으며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했다. 저렇게 다 큰 아저씨가 손발을 팔락팔락 저으며 물장난이라도 하는 걸까. 지금 어떤 포즈로 쉬고 계실까. 욕조에 등을 기댄 채 느긋하게 늘어져 계실까. 푹 퍼져 늘어진 아저씨의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궁금하다. 보고 싶다. 두근댄다. 숨이 밭다. 웃음이 나온다. 울고 싶기도 했다.

    우연은 아저씨와 함께 있을 때, 그리고 아저씨를 생각할 때만 살아 있다는 실감이 났다. 그때만 되면 죽어 있던 모든 감각이 싱싱하게 살아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빌어먹을 감정을 키워 봤자 정말 부질없고, 결국 자신만 아프리라는 걸 알면서도 아저씨 생각하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삐비비빗.

    밤 1시를 알리는 시계 소리가 들린다. 물소리가 그치고 조용해졌다.

    목욕은 끝났지만, 주무시는 건 아니다. 창밖으로 내려앉는 2층의 노란 불빛을 보면, 서재에 불이 켜져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아니다. 사방은 기이할 정도로 적막했다. 우연은 어둠 속에서 눈을 깜박이며 생각했다.

    왜 아무 소리도 안 들리지?

    귀를 바짝 기울이는 사이, 어떤 감각이 습관처럼 불쑥 솟아올랐다.

    ……배고파.

    습관의 힘은 무서운 것이다. 우연은 밤만 되면 배가 고팠다. 친구들과 야식을 먹던 습관을, 몸이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낮 동안에는 몸의 감각과 요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몸의 감각은, 아저씨와 함께 있을 때만 맹렬하게 소생하는 것 같았다.

    배고파, 배고프다. 라면이 먹고 싶다.

    우연은 옆방에서 주무시는 송 할머니가 깨지 않도록 살그머니 일어났다. 아저씨와 같이 밤참을 먹으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기숙사에 살면서 제일 재미있던 때는 자기 전에 친구들과 치맥이나 피자, 라면을 먹으면서 수다를 떠는 시간이었다. 그 순간은 모든 사람과 영혼까지 친해질 수 있는 마법의 시간이었다. 친구를 만드는 데 서툴렀던 우연은, 마법의 시간 덕에 같은 층의 친구나 언니들과 쉽게 친해질 수 있었고, 학교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우연은 2층을 곁눈질하며 중얼거렸다.

    “아저씨 안 주무시면 같이 라면이나 먹자고 해 볼까?”

    아저씨도 지금쯤이면 분명 배가 출출하실 거다. 저녁 드신 지 여섯 시간이 지났고 목욕까지 하셨으니까.

    아니, 사실 그건 핑계다. 우연은 자신의 사악한 마음을 바로 인정했다. 친구들과 자신을 연결해 주었던 마법의 시간이 아저씨와 자신에게도 다시 찾아와 주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사악한 마음이 아니었다. 이놈의 집구석에선 라면이든 컵라면이든 인스턴트 딱지가 붙은 건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식당 불을 켜고 이곳저곳 살금살금 찾아보던 우연은 누군가 어깨를 확 잡는 바람에 기절할 듯 놀랐다.

    “히익! 사, 사람…….”

    “무슨 일이에요, 아가씨?”

    등 뒤에는 하얀 머리, 하얀 잠옷의 송 할머니가 유령처럼 서 있었다. 안 들키게 살짝 나왔다 생각했는데 잠귀가 생각보다 밝으신가 보다. 우연은 뒤늦게 가슴을 쓸어내리며 더듬더듬 물었다.

    “저, 저기, 할머니, 라면이나 컵라면 좀 있어요?”

    “……라면이요? 지금? 시장하세요?”

    “아, 저도 고프긴 한데, 아저씨도 출출하면 같이 드시자고 해 보려고요. 지금 서재에 계시는 것 같아서…….”

    송 할머니는 눈을 깜박깜박했다. 무슨 해괴한 말을 들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풀고 풀풀 웃으며 대답했다.

    “여기엔 라면 같은 건 갖다 놓지 않아요. 하지만 아가씨가 드실 거면 별채에서 갖다드릴게요. 직원들이 출출할 때 종종 먹거든요.”

    “아, 네 고맙습니다.”

    “그리고 전무님은 밤참을 드시지 않으세요. 라면 같은 건 낮에도 안 드시고요.”

    “치킨이나 피자도요? 치맥, 아니 치콜 같은 것도 안 드세요?”

    “어릴 때는 제가 해 드리면 무척 좋아하시긴 했지만, 지금은 세끼 식사 외에는 안 드십니다.”

    “네? 집에서 치킨 피자를 만든다고요?”

    “집에 바비큐 그릴도 있고 돌화덕도 있으니 원하시는 건 다 만들어 드렸지요. 제가 이래 봬도 한식, 중식, 양식, 일식, 제과 제빵 자격증까지 다 가지고 있답니다. 그때 아가씨한테 드린 무스케이크도 제가 구웠는걸요.”

    송 할머니의 말에선 자부심이 넘쳤지만, 표정은 왜인지 씁쓸해 보였다. 우연은 송 할머니의 찬란한 경력보다 아저씨가 ‘치킨이나 피자나 라면을 안 드신다’는 것이 더 충격이었다.

    “……대체 아저씨는 인생을 무슨 재미로 사시는 거예요?”

    “그러게 말이에요. 다른 집에선 오밤중에 라면을 여섯 개씩 끓여 먹고 피자, 치킨을 산더미처럼 시켜 먹어서 골치라는데, 저는 제발 그런 골치 좀 앓아 봤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송 할머니의 가슴 아픈 넋두리를 들으며 우연은 아저씨가 외계에서 온 생명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지구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들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파견된 외계인. 우연이 얼빠진 얼굴로 킬킬대자 송 할머니도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호호 웃었다.

    “할머니, 그래도 아저씨한테 한번 여쭤보는 건 괜찮겠죠? 밤에 먹는 라면이 얼마나 맛있는지 아저씨가 아직 모르셔서 그래요.”

    송 여사는 우연을 올려 보내도 좋을까 잠시 망설였다.

    이원은 저녁 식사 후엔 아무도 2층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고, 혼자 조용히 시간을 보내며 휴식을 취하곤 했다. 그의 스케줄 시트는 15분이나 30분 단위로 짜여 있고, 수행 비서는 두 명이 필요했다. 그는 끝없이 무언가를 결정해야 하는 최종 책임자였지만, 그 압사당할 듯한 책임의 무게를 늘 힘겨워했다.

    그는 자질 부족을 느낄 때마다 깊이 자책했고, 자신의 선택으로 피눈물 흘리게 된 사람들을 생각하며 심한 가책에 시달렸다. 거기에 백약무효 불면증으로 인한 피로감도 첩첩이 겹쳐, 그는 매일 만신창이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를 자리에서 버티게 하는 건 성취감이 아닌 초인적인 인내심과 책임감이었다. 그래서 이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동굴에 깊이 틀어박혀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려 애쓰는 그를 절대 방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송 여사는 곰곰 생각에 잠겼다. 우연 아가씨는 모르겠지만, 이원이 누군가를 집에 들이고, 첫날부터 자신의 공간을 오픈해서 보여 주는 건 대단히 드문 일이다. 더욱이 이 아가씨의 생일 케이크를 챙겨 들고, 직접 안성까지 찾아가지 않았던가. 그 케이크를 몇 번이나 다시 만들어 달라고 할 때, 그것을 신중한 태도로 조금씩 입에 넣어 볼 때, 그는 꽤 낯선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결국, 송 여사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전무님이 아직 서재에 계시면 한번 여쭤보셔도 괜찮겠죠. 반가워하실지도 모르겠네요. 라면은 제가 별채에서 가지고 올게요.”

    우와. 고맙습니다. 우연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꼬박인다. 안 된다고 할까 봐 어지간히 조마조마했던 모양이다.

    “할머니, 그럼 라면만 갖다 놓으시고 들어가서 주무세요. 라면은 제가 끓여서 먹고 아저씨도 드릴게요. 정말 고맙습니다.”

    우연은 마법의 시간에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것이 싫었다.

    어? 어디 가셨지?

    2층으로 올라온 우연은 고개를 갸웃하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서재에는 불이 켜져 있다. 하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욕실도 비어 있었다.

    아하, 주무시러 들어가셨는데 서재 불을 깜박 잊어버리고 안 끄신 거구나.

    우연은 굳게 닫힌 침실 문을 보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밤참 같이 먹자고 기껏 주무시는 걸 깨울 수는 없다. 더욱이 아저씨는 불면증이 있다고 했다.

    달칵.

    서재의 불을 끄고 1층으로 내려가려던 우연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이게 뭐지?

    2층이 온통 깜깜해지자, 갑자기 실처럼 가는 빛살 한 줄기가 거실 바닥으로 길게 드러났다. 빛은 침실 옆 커튼 뒤에 가려진 비밀의 방, 그 문틈으로 나오고 있었다.

    어? 지금 침실에서 주무시는 게 아닌가?

    우연은 깜깜한 어둠 속에 가만히 서 있었다. 심장이 크게 요동한다. 밀도 높은 침묵이 온몸을 지그시 누르는데, 거미줄처럼 가는 소리가 귓속으로 살그머니 흘러 들어온다.

    웅웅웅웅, 웅웅웅.

    벌의 날갯소리처럼 깊고 낮은 울림이었다. 아저씨의 목소리는 분명한데 뭔가 좀 이상했다. 잠꼬대를 하는 것도 같고, 조용조용 속삭이는 것도 같다.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 문을 가린 커튼을 소리 없이 걷었다. 이러면 안 되는 건 아는데,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이곳은 무엇을 하는 곳이고, 아저씨는 대체 뭘 하시는 걸까.

    정신없이 뛰는 가슴을 누르며, 빛이 새 나오는 문틈에 귀를 살그머니 가져다 댔다. 소리가 조금 선명해진다.

    “……천주의…… 당신의 보호에…… 어려울 때에…… 외면하지 마시고…… 영화롭고 복되신…… 생각과 말과 행위로 지은 죄와 의무를 소홀히 한 죄를…… 그 가운데 버릇이 된 죄를 깨닫게 하소서…….”

    우연은 눈을 깜박깜박하며 비밀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아 이런, 맙소사.

    이곳은 아저씨의 개인 기도실이었다. 그래서 우연에게 보여 주지도 않고 설명해 주지도 않았던 것이다. 아저씨에겐 이곳이 침실 이상으로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공간이었기 때문에.

    바보 진우연. 금고라니. 오해를 해도 어떻게 그런 오해를 했을까.

    우연은 문을 노크하려다 잠시 멈칫했다.

    혹시 기도할 때 방해받으면 싫어하실까? 그것도 라면이나 같이 먹자는 이유로?

    그럼 그냥 갔다가 나중에 와야 하는 걸까?

    나중에 언제? 5분 후? 한 시간 후?

    종교가 없는 우연은 기도 시간이 어느 정도로 중요한지 가늠할 수 없었고,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한지도 몰랐다.

    물 흐르듯 단조롭고 빠르게 이어지는 억양을 보면 기도문이라도 외우시는 걸까? 오늘 일을 하나하나 생각하며 반성하는 걸까? 대체 아저씨 같은 사람이 반성할 게 뭐가 있어서? 탈탈 털어도 먼지 하나 나오지 않을 텐데.

    우연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시간이 훨씬 길었지만, 우연은 고요한 침묵 속에서도 그가 기도를 계속 올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들릴락 말락 흘러나오는 긴 날숨, 그 사이로 드문드문 들리는 낱말 한두 조각이 어둠 속에 흩어지는 작은 보석조각들처럼 느껴졌다.

    가슴이 두근거리면서도 뭐라고 말할 수 없이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제 깜깜한 2층 공간은 세상과 분리된 성스럽고 거룩한 곳처럼 느껴졌다. 이곳에서 아저씨는 하느님과 함께 있고, 나는 아저씨와 함께 있다. 어둠 속에 스며드는 아저씨의 목소리는 그냥 달다. 뜨겁게 녹인 초콜릿이 혀에 천천히 스며드는 것처럼, 숨 막히게 달콤하다는 느낌밖에 남지 않는다.

    “……?”

    고개를 갸웃했다. 후우우, 아저씨는 길게 탄식하듯 한숨을 쉬었다. 긴 침묵의 사이사이, 아저씨는 계속 괴로운 듯 한숨을 토해 냈다. 내용은 이제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이건 정해진 기도문이 아니고 아저씨의 개인 기도일지도 몰라.

    이쯤이면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우연은 자꾸 망설였다. 예의가 아닌 걸 알면서도 궁금했다. 미치게 궁금했다.

    아저씨가 진짜로 간절히 원하는 건 뭘까. 돈도 많고, 집도 크고, 멋진 약혼녀도 있고, 세상 사람이 원하는 거라면 다 가진 듯한 아저씨도 간절히 바라는 게 있을까? 가장 성스럽고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아저씨가 털어놓는 가장 은밀한 비밀은, 가장 사적인 소원은.

    “당신의 풍부하신 긍휼에 의지하여 간절히 바라오니…….”

    갑자기 감정이 실린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우연은 바짝 긴장했다.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지 않은 아저씨의 진짜 소원. 아저씨가 간절하게 바라는 것, 우연은 손에 쥔 인형을 꽉 움켜잡았다.

    “……미현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허락하사…….”

    아 씨, 제기랄. 우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맺어 주신 가정을 복되게 하시고…….”

    “……사랑으로 온전히 화합하여…… 삶으로 당신을 찬미할 수 있도록…….”

    한 마디 한 마디 이어질 때마다 칼날이 심장을 푹푹 찔러 대는 것 같다. 사랑하는 마음, 사랑으로 온전히 화합, 이런 점잖은 말 뒤에 숨어 있는 내용을, 우연은 너무나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른 새벽, 대문 앞에서 진하게 입을 맞추던 두 사람의 모습이 떠오른다. 유별난 기억력이 저주스러울 정도로 생생하던 그 장면. 저렇게 진실하게 기도하는 아저씨도 그때 이 집에서, 바로 저 침실에서 그 여자와 이상한 시간을 보냈을 거 아닌가.

    고요하고 성스럽던 공간이 순식간에 음탕하고 더러운 망상으로 가득 찬다. 아저씨는 섹스를 어떻게 했을까? 그때 봤던 것처럼, 깊은 입맞춤을 많이 했을까? 아빠처럼 가슴을 만지거나 엉덩이를 더듬거나 야한 영상에서 보았던 것처럼 더러운 곳까지 막 핥고 빠는 애무도 했을까? 저 점잖은 아저씨도 그럴까? 이상한 신음도 막 내고 그럴까?

    아저씨는 약혼녀에게 알몸을 보여 주면서 창피하지 않았을까? 집에서도 반바지 따위는 입지 않는다는 아저씨지만, 그래서 누드모델은 절대 해 줄 수 없다던 아저씨지만, 그 여자 앞에서라면 그 은밀한 곳까지 모조리 보여 주어도 괜찮은 걸까.

    아저씨는 그 여자랑 어떻게, 얼마나 많이 섹스를 했을까. 안고, 입을 맞추고, 침대에 올라가서, 옷을 하나씩 벗고, 그, 속옷까지 남김없이 벗고, 다음에…….

    어떤 일이 있었을지 모르지 않는다. 너무나 잘 안다. 모든 상상은 그 행위의 끝을 향해 치닫는다. 두 사람이 알몸으로 한데 얽혀 헐떡거린다. 그 숨소리와 신음이 들리는 것만 같다. 하지만 상상은 끝까지 달려가지 못하고 멈추고 만다. 그곳에 진득하게 고인 망상만 귀청이 터지도록 와글와글 떠들어 댄다.

    내 눈물에 축축하게 젖어 가던 아저씨의 얇은 와이셔츠, 그것을 통해 보았던 굴곡이 단단히 잡힌 아저씨의 몸, 그 이질적인 감촉, 깊은 속살을 도려내고 싶을 만큼 간지럽던 그 느낌. 우연은 손가락이 하얗게 되도록 인형을 움켜쥐었다.

    나를 죽여 버리고 싶다. 아니, 눈앞에 그 여자가 있으면, 같이 죽어 버리고 싶다.

    우연은 머리를 감싸 안고 가늘게 몸을 떨었다. 미쳤어. 완전히 미친 거야. 하지만 안 된다고 억누를수록 속에서 치솟는 목소리는 점점 집요해졌다.

    아저씨, 아저씨는 그 언니하고 어떻게 섹스를 했어요? 많이 했어요? 성욕이 없지 않다면서요. 아저씨도 참기 힘들다면서요. 그럼 밤새, 열 번씩, 백 번씩 하고 그랬어요? 영화에서 나오는 사람들처럼 이상한 소리도 막 나오던가요?

    그렇게 좋던가요? 얼마나 좋았어요? 넋이 나갈 만큼 좋았어요?

    추악한 제 목소리에 구토가 날 지경이었다. 눈물이 발끝으로 툭, 굴러떨어진다.

    아저씨가 믿는다는 하느님, 정말 계시면 저 좀 도와주세요. 제 목소리가 들리면, 제발 어떻게 좀 해 주세요, 이러면 안 되는데, 내 마음 좀 어떻게든, 제발.

    순간 아저씨의 긴 한숨이 다시 흘러나왔다. 귀가 바짝 곤두선다. 우연은 귀를 문틈에 바로 갖다 댄다. 아까처럼 경건하고 단조로운 기도의 억양이 아닌, 가까운 사람에게 하소연하듯, 힘든 것을 털어놓듯, 그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한탄하는 듯한 속삭임이, 들릴락, 말락, 들린다, 들리지 않는다, 들린다, 우연은 눈을 크게 떴다.

    “……미현이와 그와의 관계를 묵인하기가…… 아직 괴롭습니다.”

    우연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눈을 굴렸다.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 같다. 이게 무슨 말이야? 그와의 관계라니? 약혼녀한테 다른 남자가 있단 말이야?

    “……다스리려 노력하지만…… 아직 제가 부족해서…… 거부감이…….”

    “……그래도 부부간의 의무와 책임은 다할…….”

    들으면 들을수록 이상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들었던 말도 이상하게 느껴진다. 사랑하는 마음을 허락해 달라고 했었나? 그럼 아직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이마로 진땀이 와짝 솟았다. 아저씨의 목소리는 이제 목이 꽉 잠긴 듯, 흐느끼는 듯, 바닥으로 착 달라붙어 거의 들리지 않는다.

    “제 미련한 생각이나 선택이…… 당신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건 아닌지…… 정말 죄스럽습니다…….”

    낱말이 한 조각씩 잡힐 때마다 결론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러니까, 아저씨의 약혼녀는 다른 남자가 있고, 그래서 아저씨는 섹스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도 결혼을 해서 남편으로 의무를 다하며 살겠단다.

    이게 무슨 미친 소리인지 모르겠다. 대체 왜? 아저씨가 뭐가 부족해서?

    ……가만, 혹시 아저씨는 그걸 알면서도 결혼을 해야만 하는 상황인 거야?

    혹시, 거절할 수 없는 어떤 이유가 있나? 말할 수는 없지만 무슨 심각한 약점이라도 잡힌 걸까?

    맙소사. 그렇다면 이 결혼은 아저씨에게 너무나 큰 굴욕이다.

    마포 대교에서 들었던 아저씨의 목소리가 뒤늦게 떠오른다. 아저씨는 그때 고통이 고스란히 드러난 목소리로 우연에게 무엇을 선택할지 물었다.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

    나 혼자 행복한 길, 많은 사람이 행복한 길.

    그랬다. 그때 아저씨는 나처럼 인생 전체가 걸린 고민을 하고 있었고, 난생처음 만난 아이에게 아주 어렵게 고민을 털어놓았었다. 그때 내 입에서 쏟아져 나왔던, 너무나도 철없고 생각 없던 대답이 줄줄 떠오른다. 아 어떡해. 나는 어떡해. 우연은 이 빌어먹을 혀를 찍어 내고 싶었다.

    하아, 학, 하아아.

    긴장하는 시간이 길어져서일까. 몸의 반응이 이상해진다. 점점 숨이 밭아진다. 심장이 둥둥대며 뛰고, 숨이 할딱할딱 흘러나온다. 등으로 빳빳한 긴장감이 쫙 올라오는데 무서운 건지 기분이 좋은 건지 분별조차 되지 않는다. 확실한 건 안타까운 감정은 아니라는 거였다.

    우연은 도둑괭이처럼 문에 귀를 바짝 붙였다. 아저씨는 여전히 소리 없이 기도하고 있었다. 침이 바작바작 마른다. 자신이 몹쓸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새하얗게 사라졌다.

    달그락.

    문에 너무 가까이 몸을 붙인 탓일까. 들고 있던 고양이 인형의 발이 문손잡이에 걸려서 짧은 쇳소리를 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사방은 무시무시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똑같은 침묵이지만, 우연은 아저씨가 기도를 갑자기 멈춘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 제기랄, 어떡해! 난 몰라, 어떡해!

    “누구야.”

    낮고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항상 다정하던 아저씨의 목소리와 전혀 달랐다. 평소에는 다정한 푸른 수염이지만, 비밀의 방을 들키면 신부를 죽인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우연은 문 앞에서 움직이지도 못한 채 꽁꽁 얼어붙었다.

    “밖에 누구야! 밤엔 아무도 올라오지 말라 했잖아!”

    아저씨의 언성이 확 높아졌다. 그대로 기절하고 싶었다.

    우연이 끝까지 대답하지 않자 아저씨는 문을 열고 나오는 대신 달칵, 안에서 문을 잠가 버렸다. 도망가야 해, 지금이라도 도망을 가면. 하지만 몇 걸음 떼기도 전에 삐잇, 삐잇, 날카로운 벨 소리가 건물 전체에 울렸다.

    ……이, 이게 무슨?

    아래층 여기저기서 쾅쾅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댄다. 맞다. 보안 벨. 여긴 세경 회장님 저택이고, 보안이 좋아서 아저씨가 나를 이리로 데려왔던 거였지. 신분을 밝히지 않는 인기척이 있을 때, 바로 나오면 외부 침입자에게 해를 당할 수도 있으니 침대 곁의 보안 벨을 누르라는 안내까지 받지 않았던가.

    타타타탓, 투타타탓. 아래층에서 사람들이 2층으로 뛰어 올라온다. 팟, 불이 환하게 켜지며, 눈앞이 새하얗게 물든다.

    “전무님, 전무님? 괜찮으십니까?”

    “아니, 이게 무슨…….”

    우연은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몰려온 사람들을 볼 용기가 없어, 몸을 벌레처럼 동그랗게 말고 고개를 무릎에 처박았다. 사지가 경련하듯 벌벌 떨렸다.

    “외부에서 누가 들어온 겁니까?”

    아저씨의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눈앞의 문이 드디어 열린다. 흰 가운 차림의 아저씨가 무섭게 굳은 얼굴로 밖으로 나온다. 하지만 커다란 고양이 인형을 끌어안은 채 잠옷 차림으로 주저앉아 있는 우연을 보고 표정이 확 바뀌었다.

    “우연이…… 너였니?”

    “아, 아저씨…….”

    “네가…… 여기엔 왜? 아까 분명 잠을 자고 있었던…….”

    아저씨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물든다. 기도 내용을 들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우연은 허둥허둥 변명을 주워섬겼다.

    “아, 아저씨랑 라면이 머, 먹고 싶어서, 여쭤보려고…….”

    “아…… 라면? 나랑 라면이 먹고 싶어서……?”

    아저씨는 세상에서 가장 얼빠진 표정으로 되물었다. 우연은 몸을 와들와들 떨었다. 숨이 할딱할딱 차오른다.

    “배,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와서, 라면, 머, 먹, 2층에 불이 켜져 있어서, 그, 그래서 아저씨도…….”

    “들었니?”

    아저씨가 말을 탁 끊어 내며 묻는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차갑고 딱딱한 표정으로 우연을 노려본다.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화살처럼 등에 와서 박혔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머릿속에서 말이 엉킨다. 아저씨, 그, 그게, 저는. 숨이 점점 가빠지더니 목구멍이 막힌다. 아저씨, 무서워. 아저씨도, 이렇게, 무서운, 사람이었어. 목에서 꺽꺽 하는 소리가 섞이고, 숨이 가빠서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쾅, 결국 거대한 벼락이 심장으로 떨어졌다. 끽끽, 끽. 우연은 허리를 구부리고 입을 틀어막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우연아! 왜 이래. 진우연!”

    아저씨의 놀란 목소리와 함께 갑자기 몸이 확 당겨졌다. 우연은 아저씨가 자신을 안아 올린 후에야 자신이 정신없이 몸을 떨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죽을 것 같다. 아빠에게 쫓길 때처럼 거대한 공포가 다시 몰려오기 시작했다. 시익, 시익, 쌕, 쌕, 쌕, 온몸은 발작처럼 떨리고, 숨은 막히고, 눈앞은 희었다가 검었다가 편집 교차 영상처럼 확확 바뀐다.

    “모, 모몰, 하, 저, 저는, 몰라요, 아무것도, 컥, 모, 못, 컥컥.”

    “아, 그래. 알았어. 알았으니까 진정해.”

    “전, 저, 정말, 라, 아하, 하, 라면, 하아…….”

    “그래. 라면 먹자. 같이 먹자, 그래. 간만에 입맛이 돌아왔구나…… 제기랄, 왜 이렇게 떨어. 송 여사님! 김민정 씨! 거기 아무도 없습니까? 정 박사한테 연락 좀 해요!”

    우연은 와들와들 떨리는 손으로 아저씨의 등을 움켜잡았다. 물에 빠진 사람이 구명보트에 매달린 것처럼. 우연아, 제발 정신 차려, 우연아! 아저씨의 고함 소리가 꿈결처럼 아득해진다.

    * * *

    “음. 그러니까, 라면 세 개면 물 1,650밀리리터를 끓이고, 물이 끓은 후에…….”

    “저, 저기 계량컵 안 하셔도 대충 요 정도까지 담으면 돼요. 다시마는 끓을 때 먼저 넣으시고요, 면을 넣기 전에 스프를 넣으시고요.”

    이원은 대체 이게 무슨 도깨비놀음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이 아이에게 아까 뭘 들었는지 추궁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 잠자코 도깨비놀음대로 따라가는 중이었다.

    우연은 쓰러진 지 30분 정도 되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는 이원과 송 여사를 보곤 눈 밑까지 이불을 끌어 올리더니,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새까맣게 까먹은 것처럼 전혀 엉뚱한 말을 중얼거렸다.

    “아저씨, 배고파요.”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원은 눈을 감은 채 크게 심호흡을 했다. 후우. 후우, 후우우.

    ……좋다. 일단 나무랄 일은 나중으로 미루자. 적어도 불안 발작으로 의식을 잃었다가 막 깬 아이에게 도둑고양이 짓거리를 추궁하는 게 적절한 일은 아니니까.

    “그래. 라면 먹으러 가자.”

    이원은 길게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글바글, 바그르르.

    라면 국물이 끓어오르는 소리가 주방에 잘게 흩어졌다. 우연은 발개진 눈을 비비면서, 라면을 쫄깃하게 끓이는 팁을 이원에게 가르쳤다. 변검술사처럼 쉴 새 없이 바뀌는 얼굴이 낯설다. 물론 새벽 3시에 아이를 위해 직접 라면을 끓이고 있는 자신의 모습도 낯설기는 마찬가지였다.

    냄비에 든 라면을 조심스럽게 면기(麵器) 두 개로 나누어 옮겼다. 하지만 안 해 본 짓인 걸 티라도 내려는 듯, 국물이 주르르 그릇 옆으로 흘러 나간다.

    “아저씨. 와, 어떡해. 그렇게 끝부분이 닿게 따르면 밖으로 샌단 말이에요. 아우우, 아까워서 어떡해. 흘린 게 한 국자도 넘겠네!”

    발을 동동 구르며 흘겨보는 꼴이, 남이 안 보면 핥아 먹기라도 할 기세였다.

    이원은 국물을 한 숟가락 밀어 넣고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라면의 짜고 맵고 독한 감칠맛에 혀가 마비될 지경이다. 매일 이런 것만, 그것도 밤마다 먹었다니 몸이 남아나겠나. 조건 반사처럼 잔소리가 튀어나오려 했지만, 일단 입을 다물었다. 우연이는 환자였다.

    순간 이원은 숟가락을 멈췄다. 뭔가 뒤통수를 후려치는 것 같다.

    ……이건 뭐지?

    입안에 감도는 소름 끼치도록 짜고 매운 맛. 단번에 미뢰를 평정해 버리는 감미료의 맛.

    이원은 눈을 크게 뜬 채 우연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우연이다. 지난번 케이크도 우연이었다. 그 뒤 혼자 먹은 케이크에서는 신맛이든 단맛이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우연은 라면에 집중하느라 이원의 표정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소동을 일으켰던 것도 깡그리 잊어버린 듯, 새까만 눈을 말갛게 반짝이며 ‘면발은 역시 너구리야.’를 중얼거리며 잘도 먹는다. 겁도 없이 세 개를 끓여 놓고, 저가 태연하게 두 몫을 가져간다.

    이원은 그릇을 끌어당겨 면을 입에 넣기 시작했다. 우연처럼 빨리 먹을 수 없었다. 맛을 느끼는 것이 너무 오랜만이었고, 라면의 맛은 케이크보다 열 배는 강렬했다. 짠맛이든, 매운맛이든, 해물 맛이든, 인공 감미료 맛이든, 미칠 듯이 소중했다. 눈이 욱신거려서 고개를 수그린 채, 면발의 느낌 하나하나를 음미하며 천천히 먹었다.

    송 여사와 고용인들의 놀란 시선이 느껴졌지만,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생각 같아선 바닥에 흘린 국물 한 방울까지 핥아 먹고 싶었다. 내일 다시 확인해 봐야겠지만, 내일도 이 맛이 느껴지리라는 보장이 없으니까.

    달그락.

    그릇을 깨끗이 비운 이원은 눈을 감고 입안에 감도는 맛을 오랫동안 음미했다.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천국에 올라온 것 같았고, 새로운 세계를 영접한 것 같았다. 예민하고 섬세한 미각으로 송 여사가 해 준 반찬에 들어간 양념을 일일이 맞추며 즐거워하던 소년 시절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주 오래전 일 같았는데, 생각해 보면 미각을 잃어버린 건 5∼6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눈을 뜨니 자신을 조심스럽게 살펴보는 우연과 송 여사가 보인다. 입에서 감돌던 맵고 짠 맛이 서서히 혀 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진다. 꿈에서 깬 것 같다. 긴 한숨을 쉬며 뒤에 서 있는 송 여사와 경호 직원 민정 씨에게 손짓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들어가서 주무세요. 우연이도 바로 들여보내겠습니다.”

    이원은 우연과 함께 있을 때 송 여사나 여성 경호원을 동석하게 했다. 이런 부분은 아무리 조심해도 나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둘이서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

    달그락.

    우연이 수저를 내려놓으며 이원을 슬쩍 곁눈질한다. 이원은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우연.”

    “네! 네? 네!”

    화들짝 놀라는 걸 보니 역시 찔리는 게 있지. 이원은 조금 더 엄한 소리로 말했다.

    “남의 기도를 엿듣는 것은 예의가 아니야.”

    “어, 기도하고 계셨어요?”

    “모르는 척하지 마. 기도하는 줄 알았으면 바로 자릴 피해 주어야지.”

    “저, 그, 그게…… 무슨 내용인지 안 들렸어요.”

    “거짓말하지 마!”

    뻔한 거짓말을 듣고 있으니 속이 울렁거렸다. 이원은 실수에는 관대한 편이었지만 거짓말은 실수가 아니었다. 따라서 관용을 베풀 일이 아니었다.

    “궁금해서 몰래 엿들을 수는 있겠지. 하지만 거짓말은 서로의 관계를 근본부터 깨는 짓이야. 아저씨는 믿지 못할 사람은 가까이 두고 싶지 않아.”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다 거짓말을 하긴 하잖아요. 거짓말하는 사람을 죄다 멀리했다간 아저씨는 아무하고도 가까이 지내지 못하실 거예요.”

    놀랍게도, 우연이 바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반박한다. 기가 막혔다.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가장 기본적이고 당연한 상식마저 설득해야 한다는 건가?

    “세상 사람이 죄다 거짓말을 한다고 해서 그게 용인될 순 없어. 유무죄를 판단하는 건 머릿수가 아니라 법이야.”

    “그걸 어긴 사람보다, 아무도 지킬 수 없는 법이 더 나쁜 거 아닌가요?”

    “지키기 쉽든 어렵든, 법은 공공의 선을 위해서 옳게 행동하려는 사람들의 기준선으로서 충분히 존재 가치가 있어.”

    이원은 끓어오르는 속을 가라앉히려 길게 심호흡을 했다. 너무 당연해 논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우연 역시 트집을 위한 트집이나 궤변을 늘어놓으려는 건 아니었다. 그것도 알고는 있다. 다만 규범이나 틀에 얽매이지 않는 그녀의 성향이 문제였다. 우연은 이원이 구축한 견고하고 상식적인 세상을 이런 방식으로 흔들어 대곤 했다.

    우연이 이원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묻는다.

    “아저씨는 어렸을 때 거짓말 안 하셨어요?”

    “안 하려고 노력했어. 거짓말하면 종일 불편하고 가책이 느껴져서,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용서받는 게 속이 편했어.”

    “아저씨네 엄마, 아빠, 선생님들은 아주 착하셨나 봐요.”

    시니컬한 중얼거림에 말문이 다시 막혔다.

    “저는요, 엄마, 아빠, 선생님에게 매일매일 거짓말을 했어요. 엄마도 거짓말을 했고요. 아빠나 선생님도 분명 거짓말을 했을 텐데, 맞는 건 저하고 엄마뿐이었죠. 거짓말이 나빠서 맞은 게 아니라 힘이 약해서 맞은 거였어요.”

    야자하느라 늦은 거야. 학교에서 청소했어. 친구들하고 숙제했어. 그림 그리지 않았어, 학교에 전화해서 물어 봐! 여보, 나 오늘 학부모 상담 갔다 온 거야, 이거 친정 엄마가 사 준 옷이야, 비싼 거 아니야, 생활비 쓴 거 아니라니까. 술 안 마셨어, 친구 만난 거 아니야, 녹색 어머니회 모임……. 아, 정말이야, 맹세해.

    그런 상황에서 솔직하게 대답하고 맞아 죽는 게 옳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한번 나와 보라고 해요. 새까만 눈동자에 맺힌 결기는 그렇게 따지고 있었다.

    이원은 다그치는 것을 포기했다. 우연은 자신에게 불행한 과거를 늘어놓으며 동정이나 관심을 받으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만 그녀의 원래 삶이 그랬다. 이원이 안내하는 대로 한 걸음씩 변하려고, 밝게 살아가려고 기를 쓰고 노력해서 괜찮아 보였을 뿐, 안에 고여 있던 내용물은 여전히 시한폭탄이었다. 솔직하게 말하고 속 편하게 용서받아야 한다는 말은 우연이 그동안 겪어 온 환경에선 너무나 팔자 좋은 도덕률이었다.

    게다가,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사회의 생태 역시, 우연이 파악한 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옳은 것이라, 바른길이라 배운 것들이, 사회에서 얼마나 무참하게 폐기 처분 되는지 이원은 잘 알고 있었다.

    이원은 무겁게 입술을 뗐다.

    “그래. 사실 아저씨도…… 무서우면 거짓말을 해……. 너보다 열 배쯤 더 많이.”

    우연의 눈이 동그래진다. 그렇게 의외의 대답이었을까? 눈시울에 순식간에 맑은 물이 괸다. 당황스러웠다. 내가 울 만한 말을 했나? 우연이 그것을 떨구지 않으려 고개를 쳐드는 순간, 눈물은 볼을 타고 조르르 흘러내려 빈 그릇 안으로 통, 떨어진다. 목멘 대답이 흘러나왔다.

    “거짓말. 아저씨는 그래도 거짓말 안 했을 거야. 엄마 아빠한테 맞아 죽어도 안 했을 거야. 아저씨는 나 같은 사람이 아니잖아요.”

    이원은 손을 내밀어 우연의 눈물을 막았다. 눈물은 이제 울컥울컥 손가락을 타고 흘러 내려갔다. 가슴이 뻐근하고 욱신거린다. 이를 지그시 물고 참았다.

    이원의 마음은 우연에게 항상 과하게 반응했다. 과하게 동정하고, 과하게 기대하고, 과하게 화를 내고, 과하게 신경을 쓰고, 과한 책임을 자처하며, 필요 이상으로 웃고, 믿을 수 없을 만큼 행복해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우연은 이원의 반응과 감각을 극대화시키는 데 특화된 미지의 생물 같았다.

    이 아이에게로 향하는 마음을 거두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하지만 결국 똑같은 자리로 끌려왔다. 이원은 이런 불가항력의 상황이 너무 곤혹스러웠다.

    “아저씨 미안해요. 아까 기도하시는 거 들었어요. 구, 궁금해서.”

    완전히 벌거벗겨진 느낌이었지만, 이원은 빙그레 웃어 주었다.

    “……앞으론 그러지 마. 나도 남에게 말하기 싫은 게 있어.”

    “아저씨는 왜 저한테 화를 안 내요? 이런 건 소리 지르고, 실망했다고 하고, 화를 내셔야 하는 거잖아요.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어요? 아저씨는 사람이 아닌 거 같아요.”

    새까만 눈에서 다시 말간 눈물이 넘쳐흘렀다.

    이원은 우연을 안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필사적으로 눌렀다. 그래선 안 된다. 이제는 안 된다.

    이원은 우연이 그린 초상화를 본 후부터 극도로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짧은 충격과 감탄이 지나간 후, 바로 위험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연의 의도와 감정을 확신할 순 없었지만 적어도 그 감정이 아슬아슬한 선 위에 서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내 감정도.

    “이제부턴 거짓말 안 할게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는 해도, 아저씨한테는 절대 안 할게요, 아무리 무서워도, 절대 말하기 싫어도, 아저씨한테는 다 할게요. 약속해요.”

    “그래. 고맙다.”

    이원은 그녀를 안아 주는 대신 냅킨을 뺨에 대 주었다. 냅킨은 빠르게 젖었다. 아저씨, 우연이 속삭이듯 묻는다.

    “아저씨, 뭐 여쭤봐도 돼요?”

    “응.”

    “아저씨도 저한테 거짓말 안 하실 거죠?”

    “……그래.”

    “아저씨, 아저씨는 왜 좋아하지도 않는 언니하고 결혼하려고 해요?”

    목에서 뭔가 턱 치받고 올라오는 것 같다. 어디까지 들은 걸까. 어떤 내용까지. 목소리가 꺼끌꺼끌하게 갈라져 나왔다.

    “예의 없구나. 무슨 대답이 듣고 싶은데?”

    “듣고 싶은 대답이 있는 게 아니라 너무 이상해서……. 아저씨처럼 잘나고 부족한 거 없는 사람이 왜 싫어하는 사람하고 결혼해요?”

    “난 잘난 사람도 아니고, 미현이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어릴 때부터 친구처럼 지내서 그런지, 사랑이라는 감정이 쉽게 안 생겨서.”

    이원은 최대한 에둘러 대답했다. 우연이 툭 질러 묻는다.

    “하지만 섹스에 거부감이 든다면서요. 그럼 끝난 거 아니에요?”

    “너……!”

    놀랍지는 않았다. 우연이라면 이렇게 적나라한 말로 푹 찌르듯 물어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원은 지금까지 그런 걸 대화의 주제로 삼아 본 적이 없어서 당황스러웠다. 묻는 우연이 더 덤덤하고 태연하다. 난생처음으로 나잇값도 못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무슨 협박이라도 받으셨어요? 결혼 안 해 주면 회사에 독가스라도 터뜨린대요?”

    “그럴 리가.”

    협박을 받은 것은 맞지만, 인정할 수는 없었다. 이원은 우연의 뺨에서 손을 떼어 냈다. 우연의 발그레한 얼굴은 천천히 말라가고 있었다.

    “그럼, 옛날 영화나 만화 같은 데 나오는 정략결혼 같은 건가요? 부모님이 집안 맞춰서 결혼 상대 정해 주고 그러는 거요?”

    이원은 자신의 결혼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덜 비참할까 계산했다. 차라리 저 아이 말대로 구태의연한 정략혼이라고 하는 게 그나마 덜 구차해 보이려나. 간신히 입이 떨어졌다.

    “옛날 영화 아니라도, 이 바닥은 지금도 그래. 기업가 집안 혼사에는 연애결혼이 거의 없어. 대부분 부모님이 정해 준 대로, 아니면 소개로 집안 조건, 상황 맞춰서 결혼해. 그래도 다들 잘 살고.”

    “이 결혼도 아저씨네 아빠가 정해 주신 거예요?”

    “그래.”

    이원은 아무 감정도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진짜 이상하다.

    우연은 의아한 눈으로 아저씨를 올려다보았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끼리, 섹스도 하고 싶지 않은 사람끼리, 정해 준 대로 만나서 잘 살 거라고? 저렇게 큰 어른이, 아빠가 시킨 대로 순순히 받아들였다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연은 굳이 이해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바로 깨달았다. 아저씨는 우연과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다. 원래 ‘그들만의 리그’에서만 통용되는 상식이란, 남들이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마련이다.

    그래도 내가 아저씨 아빠였다면, 아들이 안 좋아하는 여자하고는 결혼시키지 않았을 텐데.

    “……아저씨는 아빠가 밉지 않아요?”

    아저씨는 시선을 옆으로 돌린 채 씁쓸하게 웃는다. 끝까지 화를 내지 않는 아저씨는 여전히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화를 내지 않는 것은 칭찬받아야 할 미덕이 아니라 감정의 기능 장애에 가까워 보였다.

    “아저씨네 아버지는 아저씨보다 회사를 더 사랑한 것 같아요. 아들의 마음 따윈 코딱지만큼도, 아니, 조금도 신경 안 썼다는 거죠.”

    우연의 단호한 말에 아저씨가 빙그레 웃는다. 웃음 꼬리는 쓰고 아팠다. 아저씨는 그 사실을 애초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했다.’, ‘좋은 아버지였다.’라고 말했다. 아저씨야말로 습관적인 거짓말쟁이일지도 모른다.

    이제 더 이상 물어보면…… 안 되겠지.

    사실 우연이 가장 묻고 싶은 것은 “약혼녀 언니에게 정말 다른 남자가 있어요?”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질문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그게 사실이면 아저씨에게 너무 큰 치욕이고, 내가 그 사실을 아는 것 자체만으로도 아저씨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우연은 이것만큼은 끝까지 묻지 않고 가슴에 담아 두기로 결심했다.

    우연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을 돌렸다.

    “……뭐, 결혼하시고 살아 보다가 영 안 맞으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면 되니까요.”

    그래, 생각해 보니 그런 방법도 있었다. 사악한 생각인 걸 알면서도 괜스레 가슴이 둥둥거린다. 난 죽으면 아마 천국에 못 갈 거 같다. 아니나 다를까 아저씨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결혼이 장난이냐. 한번 먹어 보고 맛없으면 뱉지, 하게?”

    “인생이 장난인가요? 먹어 보니 똥이었는데 뱉지도 못해요?”

    아저씨가 지친 얼굴로 고개를 젓는다.

    “우연아. 네가 결혼에 대해 안 좋게 생각하는 건 아는데, 혼배 성사는 일반 결혼과 달라. 한 번 올리면 이혼 못 해.”

    “혼배 성사가 뭔가요?”

    “……성당에서 결혼하는 거 말이야.”

    “그럼 성당 말고 예식장이나 호텔에서 하시면…….”

    나중에 이혼할 수도 있잖아요, 라는 말은 얼른 삼켰지만, 아저씨의 표정은 이미 눈에 띌 정도로 굳어 버렸다.

    “그건 안 되지. 그럼 하느님께는 인정받지 못하는 혼인이 되는 거야. 신자들에게 결혼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맺어지는 관계고, 가정은 하느님이 만드신 작은 교회나 마찬가지야. 그런 신성한 약속을 함부로 깨뜨릴 수는 없어.”

    순간 우연은 누구에게랄 것도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왜 아저씨의 세상에는 온통 족쇄, 족쇄, 족쇄밖에 없는 걸까.

    “그럼 신자 안 하면 되잖아요.”

    아저씨의 얼굴이 기가 막힌 듯 일그러진다. 한참 만에야 허, 하며 헛웃음을 치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잘랐다.

    “그게 말이 돼?”

    “……왜 말이 안 돼요? 아저씨는 저한테 도망치라고 해 놓고, 왜 아저씨는 도망치지 않아요? 매는 도망칠 수 없을 때나 맞는 거예요. 게다가 하루 이틀 맞고 끝나는 것도 아니고 평생이 걸린 일인데!”

    “진우연! 종교는 나에게 가장 중요한 신념이야. 그렇게 남이 함부로 재단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아저씨의 눈은 큰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지글지글 끓어올랐다. 하지만 우연은 쉬운 길을 두고 엉뚱한 기도나 하는 아저씨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안타까워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하느님이 아저씨를 사랑하신다면, 이 결혼 하지 말라고 그러셨을 거예요! 분명히 그러셨을 거예요!”

    “우연아.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이 이해하지 못할 때도 많아. 어떤 길이 가장 좋을지는 그분이 가장 잘 아시는 거야. 우리는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이해하게 되고.”

    아니다. 정말 사랑하는지 아닌지는, 사랑받는 사람이 제일 잘 안다. 사랑은 원인과 결과를 납득하고 이해해야만 하는 게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아저씨는 왜 그 당연한 걸 모를까.

    “아저씨는 하느님이 사랑한다는 걸 언제 믿게 됐어요?”

    “일곱 살 때. 어머니 장례 미사 때 하늘에서 환한 빛이 내려오는 걸 봤어. 그리고 그 속에서 들려오는 부드럽고 따뜻한 위로의 음성과 부르심을 들었어. 아무도 그걸 보지도 듣지도 못했고, 나 혼자만 경험했었지.”

    다시 몸이 부르르 떨렸다. 신비롭다는 느낌이 아니라 이젠 서러움과 분노가 북받쳤다. 우연은 목멘 소리로 쥐어짜듯 입을 열었다.

    “아저씨가 환상을 보는 건…….”

    하느님의 은혜인데, 내가, 내가 이상한 장면을 상상해서 보면, 그건…… 왜 정신 분열 증세인가요……?

    하지만 우연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간신히 멈춰 섰다. 그 말은 아저씨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부분을 가장 깊이 찌르는 칼이 될 것이다. 그곳은 아저씨가 남에게 침범을 허락하지 않는 금단의 땅이었고, 그랬다가는 이 아슬아슬한 관계마저 파탄이 나고 말 것이다.

    우연의 침묵에 아저씨의 미간이 훅, 굳는 것이 보인다. 우연이 어떤 말을 삼켰을지 짐작한 것 같았다. 하지만 우연은 끝내 말하지 않았고, 아저씨도 조용히 물러났다.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자. 나는 누구하고든 종교나 정치 문제로 논쟁은 하지 않는데, 너하고 종교 문제로 싸우게 될 줄은 몰랐다.”

    “아저씨?”

    “우연아. 종교는 믿는 사람에게는 삶의 기둥이고 신념이야. 남이 함부로 판단할 영역이 아니야. 설명한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해한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도 아니야. 너와 신학 논쟁을 할 생각도 없어. 그러니 이쯤 하자.”

    우연은 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안타까운 것과 별개로, 자신이 지나치게 나갔다는 자각이 뒤늦게 들었다.

    늘 그렇듯이 이런 자각은 항상 타이밍이 늦었고, 속이 바닥까지 후벼 파이면서도 이성적으로 상황을 수습하는 건 늘 아저씨 몫이었다. 미안하고 죄스러워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은 백번 죽어도 아저씨 같은 인격자는 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나잇값도 못 하고 철없는 기도를 올려서, 그분과 네 마음까지 아프게 했구나. 나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라.”

    친절한 저 목소리가 더 아팠다. 왜 아저씨는 나에게 끝끝내 화를 내지 않을까. 내가 아픈 건 다 받아 주고 위로하고 달래 주면서, 아저씨가 아픈 건 왜 혼자서 이렇게 참기만 할까. 그 빌어먹을 나잇값이 대체 뭐길래.

    “들어가서 자렴.”

    아저씨의 얼굴에는 다시 웃음기가 돌아왔다. 우연은 울고 싶었다.

    * * *

    다음 날 아침, 아저씨는 우연을 2층으로 불러 기도실을 보여 주었다. 별다른 설명도 없이 “궁금할 것 같아서.” 한마디만 하고는 커튼을 젖히고 덤덤하게 열어 보인다.

    하얀 회벽에 작은 십자가가 걸려 있고, 그 외에는 아무 장식도 없었다. 창문조차 없는 밋밋한 벽에는 방으로 통하는 작은 환풍 구멍만 하나 뚫려 있을 뿐이었다. 작고 투박한 나무 탁자에는 검은 성서와 조그마한 성모상, 그리고 나무로 만든 묵주가 얌전히 놓여 있었고, 방석이 하나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우연은 이 작은 방이 이 저택의 진짜 중심이며, 아저씨를 아저씨답게 만드는 가장 신성한 장소임을 알았다.

    우연은 아저씨를 조심스럽게 올려다보았다.

    “성당에 안 다녀도 하느님께 기도하면 다 들으시나요?”

    “물론이지.”

    아저씨는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연은 다시 물었다.

    “저도 힘들면 여기 와서 기도해도 되나요?”

    아저씨는 눈을 가만히 내리깔고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비밀의 방에는 푸른 수염의 심장이 들어 있었고, 우연은 그 심장 속에서 오래오래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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