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누드-17화 (17/47)

17. 트리거

6월 마지막 주, 시험 기간은 찌는 듯이 덥고 지루했다. 우연의 삶은 갑자기 짜증스럽고 지루해졌다. 상담 치료도 알바도 내리 걸렀다. 기말고사 핑계를 댔지만, 시험은 하나도 치르지 않았다. 이젠 전과목에서 F가 나와도 상관없었다.

아저씨에게선 꾸준히 문자가 왔다. ‘시험공부 잘 하렴.’, ‘더운데 공부하느라 고생 많다, 힘내라.’ 같은 짤막하고 의례적인 문자였다. 우연은 그 짧은 문장이 조각조각 부러지고 가루처럼 분해될 때까지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욕을 했다. 좋아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아이에게는, 이따위 짓을 하면 안 된다. 후견인이면 후견인답게, 후원 재단의 대표면 대표답게. 그거면 충분한 것이다. 이렇게 자상하게 챙기고 여지를 주는 건, 헌법으로 강력하게 금지해야 마땅하다.

아저씨는 사형당해 마땅할 큰 죄를 지은 것이다…….

우연이 좋아하는 딸기 무스케이크가 기숙사로 배달되었다. 버릴까, 나눠 줄까 한참 고민했다. 버리자니 아깝고 나눠 주자니 화가 났다. 결국 자신의 배 속에 버리기로 결심했다.

한밤중에 일어나 케이크를 먹었다. 콧물을 훌쩍대며 금박 바닥이 말갛게 되도록 핥아 먹었다. 고맙다는 답장은 하지 않았다. 전화도 하지 않았다. 전화가 와도 받지 않았다. 그래도 별다른 나무람은 없었다.

기숙사를 둘러싸고 있는 수국은 더욱 붉게 타오르며 기승했고, 해바라기는 껑충하게 웃자라 생뚱한 존재감을 뻗대었다. 우연은 그들의 조화가 추하고 역겨워지기 시작했다.

점점 깊은 우울감으로 빠져들었다. 기숙사에서, 학교에서, 화장실에서, 편의점에서,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가, 아무 이유도 없이 불쑥 눈물이 치솟았다. 언제 눈물이 지뢰처럼 폭발할지 몰라, 친구들을 슬슬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 예전에 힘들었던 일, 앞으로 힘들 일만 자꾸자꾸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무기력증이 서서히 우연을 집어삼켰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잠만 자고 싶은데, 잠도 잘 오지 않았다.

같은 기숙사 친구들이 맛있는 것도 사 주며 토닥여 주었지만, 이유를 알 수 없으니 그들의 위로는 늘 헛수고였다. 우연은 그것도 부담스러웠다. 우울감이 길어지면 옆에서 아무도 버티지 못한다. 친구도, 부모도, 자식도, 사랑하는 사람도. 그건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의 잘못이 아니었다. 엄마의 우울과 히스테리가 우연의 잘못이 아니었던 것처럼. 우연은 간신히 얻은 친구들까지 잃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잘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힘으로 상처도 잘 극복해 나가고 있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아저씨를 좋아하고, 저도 모르게 들떠 있느라 덮여 있던 것에 불과했다.

아저씨를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연은 조금 기운이 나면 휴대 전화에 매달려 검색만 했다. 이제 검색의 대상은 한이원 전무, 한이원 대표이사가 아니라 ‘유미현’으로 바뀌었다.

유미현이라는 배우는 두루두루 평이 좋았다. 천의 얼굴, 천의 목소리, 여왕 마고, 브로드웨이 진출, 산타바바라 극장 2년 전속 계약. 재벌 3세. 아저씨의 약혼녀라는 말은 아직 돌지 않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찍힌 사진은 두어 장 돌아다니고 있었다. 얼굴이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어도 우연은 아저씨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어떤 사진에서든, 여자는 훤칠하고 당당하며 화려했다. 자신은 감히 옆에 서지도 못할 정도였다. 아무리 트집을 잡고 싶어도 아저씨와 잘 어울리는 여자라는 건 부인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여자를 깎아내리려는 마음이 너무 추해서, 우연은 그 짓도 그만두었다. 그 정도로 지질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흥분이 가라앉자 현실이 조금씩 보였다. 보일수록 한심하고 기가 막혀서 눈물이 났는데, 그래도 아저씨를 좋아하는 마음이 없어지지 않아서 또 눈물이 났다.

수업을 빼먹고 침대나 옥상, 학교 앞 편의점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반년 전, 이 학교에 오지 못한다 했을 때는 정말 죽고 싶었는데, 지금은 학교에 와 있는데도 죽고 싶었다. 이젠 학교에서 잘려도 아무 상관이 없을 것 같다.

하늘은 왜 이렇게 눈깔을 후벼 파는 것처럼 새파랗고, 햇볕은 왜 이렇게 다리미로 눌러 대는 것처럼 뜨거운지, 이 빌어먹을 눈깔은 왜 시도 때도 없이 질질 눈물을 쏟아 내는지, 우연은 자신과 주변을 이루고 있는 모든 구성 요소가 다 짜증스러웠다.

“……에이 씨.”

마지막 시험까지 모조리 째 버린 우연은 학교 앞 편의점 의자에 구부정하니 앉아 코를 훌쩍거렸다. 과제는 다 냈지만, 시험을 모조리 째 버리니 교수와 조교들이 번갈아 문자를 넣고, 같은 과 친구들은 기숙사 방까지 찾아와 야단야단을 한다. 이젠 만사가 다 귀찮았다.

아저씨에게 말하지 않은 게 다행이다. 대문 앞에서 그 장면을 본 게 정말 다행이다. 아저씨가 그 말을 들었으면, 그 그림을 보았으면, 속으로 얼마나 나를 비웃었을까.

아저씨는 왜 서른둘이나 먹은 돈 많은 아저씨일까. 나는 왜 미친년처럼 그런 중년 아저씨를 좋아하게 됐을까. 아저씨가 대학생 정도만 되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왜 금수저 뮤지컬 배우가 아니고, 아빠한테 얻어맞고 성추행이나 당하던 별 볼 일 없는 아이일까. 돈도 많고 귀하게 자라고 능력도 많은 아저씨 눈에는 내가 얼마나 하찮고 우습게 보일까. 동정심으로 도와주던 아이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고백하면 아저씨는 얼마나 같잖고 가소로울까.

우연은 불닭볶음면을 두 개 시켜 놓고 물을 부었다. 콜라도 한 캔 따서 시원하게 들이켰다. 평소 같으면 매운맛에 공격당한 혀를 위로해 줄 쿨피스가 제격이겠지만, 지금은 콜라가 어울리는 것 같다. 맵고 짠 불닭면에 혓바닥을 온통 긁어 대는 탄산이 들어가면 고통이 극대화되면서 눈물을 철철 흘려도 좋을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맵짠맵짠으로 가득한 더러운 세상,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나 질질 쏟는 인간에게 잘 어울리는 해괴하고 불량한 조합이었다.

면이 익는 동안 우연은 콜라를 조금씩 마시며 멍하니 밖을 내다보았다. 편의점 창문 너머로 학교 정문이 보이고, 울퉁불퉁 패고 갈라진 도로로 차가 드문드문 지나간다. 후줄근한 건물들과 텅 빈 운동장에는 따가운 햇볕만 쨍쨍 박히고, 멀찍이 보이는 논에선 어떤 아저씨가 경운기를 덜덜대며 몰고 있다. 머리가 새까만 할머니가 허리를 기역 자로 구부린 채 양손에 소주병을 하나씩 들고 쪼작쪼작 노인정 쪽으로 걸어간다. 비가 오면 진창이 되는 흙바닥에는 개똥과 잡초가 함께 엉겨 있었고, 버스 정류장 옆에서 굴러다니던 수박 껍질은 일주일째 치우는 사람이 없어 새까맣게 파리만 꾀다가 이제 거의 썩어 문드러졌다. 학교 앞에는 작고 납작한 검정 승용차 한 대가 먼지를 뒤집어쓰며 서 있고, 그 앞으로 두 시간마다 한 대씩 다니는 버스가 보얀 먼지를 피우며 지나간다. 친구들이 유배지, 라고 부르는 콩알만 한 학교는 적당히 한적하고 적당히 너저분한 시골 마을에 적당히 어울렸다.

……보고 싶다.

갑자기 아저씨가 보고 싶었다. 아무 인과 관계도 없었다. 저 한적하고 너저분한 풍경을 보니까 그냥 미친 듯이 아저씨가 보고 싶었다. 보면 안 되는 거 아는데, 이놈의 주둥이에서 무슨 정신 나간 소리가 튀어 나갈지 모르는데, 그래도 막무가내로 아저씨가 보고 싶었다.

아저씨는 내가 보고 싶지 않을까. 걱정스럽지 않을까. 내가 조금 아파 보이니까 주말 내내 걱정하시던 아저씨라면, 사랑하는 게 아니라도, 조금쯤은 보고 싶지 않을까. 케이크만 보내 주면 다인가. 잘 먹었는지 궁금하지도 않을까.

……등신아. 지금 누굴 원망해? 너 정말 재수 없는 거 알지?

멍청하게 앉아 있는 여자의 모습이 유리창에 희미하게 비쳤다. 라면을 한 젓가락 먹고, 콜라를 한 모금 마시고, 손등으로 눈을 벅벅 문지르고, 또 라면을 한 젓가락 집은 채 코를 훌쩍대고 있는 꼬락서니가 너무나 구차하고 짜증이 났다.

진우연.

꿈결처럼 아련하게 떠오르는 아저씨의 목소리에 우연은 고개를 수그리고 눈을 감았다. 낮고 부드럽지만 심지가 단단한 그 목소리. 우연아. 입속에선 불이 나는데, 눈시울은 간지럽다. 우연은 힘껏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고개를 아무리 저어도 아저씨의 목소리는 계속 귓가에서 웅웅거린다. 꿀벌이 무거운 공기 속을 유영하듯, 부드럽게, 낮게, 혹은 찐득찐득할 정도로 달콤하게. 우연아, 우연아.

툭, 투툭. 결국 눈물이 발끝으로 떨어져 부서진다.

“우연이 너, 지금 여기서 뭐 하니?”

“……어?”

멍청하게 고개를 들었다. 너무나 생소한 무언가가 눈앞에 덜렁 솟아났다. 어둑한 갈색 눈동자가 우연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아저씨?

손에서 콜라 캔이 툭 떨어져서 아저씨의 발밑에 가 멎었다. 검은 구두 주변으로 갈색 음료가 동그랗게 괴는 모습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서, 우연은 입을 벌린 채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너 대체 무슨 일이야. 왜 지금 여기 앉아서 눈물을 짜고 있어. 시험 계속 안 보고 있다며.”

“이, 이건 우는 게 아니고 매워서, 그런데 아저씨가 왜, 여기에…… 출근은요?”

우연은 얼빠진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아저씨가 난데없이 삽입된 이 장면은, 아무래도 꿈같다. 허, 아저씨가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 네가 내 출근 걱정할 때야?”

“저, 저기 회사 땡땡이치면 반성문, 아니 시말서…….”

“내가 대체 누구한테 시말서를 써! 아니 그보다, 대체 왜 시험을 안 보고 이러고 있어? 연락 하나도 안 받고, 나 보고 간다더니 그냥 바로 내려가고! 그러더니 연락도 하나도 안 받고!”

아저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우연은 찔끔하며 고개를 움츠렸다. 입속에서 불덩어리가 화닥화닥 들뛴다.

“……그냥요.”

“그냥?”

“네. 그냥요. 저도 학교에 안 갈 자유가 있고…… 시험을 쨀 자유도 있잖아요.”

아저씨는 눈을 가만히 감더니 길게 한숨을 쉬었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한 번 더. 아저씨는 딱 세 번 숨을 쉬는 것으로 다시 담담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돌아갔다.

“그럼 왜 전화도 안 받은 거니?”

“……그것도 그냥요.”

불퉁하게 뻗댔다. 철없고 생각 없고 싹수도 없는 년으로 보이기에 충분할 만큼. 아저씨가 애초에 작정했던 거리감 이상으로 훠이훠이 멀어질 만큼 충분히 무례하게.

아저씨는 화를 내는 대신 의자를 꺼내 맞은편에 앉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물론 학교에 가기 싫을 때도 있겠지. 누구나 받기 싫은 전화를 안 받을 자유도 있지. 그건 나도 충분히 안다. 하지만 내가 걱정할 거라는 생각은 좀 해 주지 그랬니.”

이럴 때는 인간적으로 상식적으로 화를 내 주면 좋겠는데.

하지만 아저씨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아저씨는 감정을 다스리는 훈련을 너무 오래 해 왔다. 비인간적일 만큼. 아저씨는 정을 붙이고 좋아하는 마음을 품어도 될 만큼 빈틈이 있는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던 우연은 문득 소스라쳤다.

나는 왜 화를 잘 안 내는 사람을 비인간적이라 생각하고 있을까.

나는 왜 아빠처럼 화를 잘 내는 사람을 인간적이라 생각하고 있을까.

우연은 참담한 마음으로 아저씨를 올려다보았다. 아저씨는 비인간적이지 않다. 지금까지 만나 본 사람들 중 가장 따뜻하고, 배려가 깊으며, 어른스럽고, 인간적이다. 내가 원하는 그 감정이 아저씨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아저씨가 조건 없이 많은 것을 베풀어 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순수한 선의와 호의만으로.

역시, 내가 아저씨를 좋아했던 게 잘못이다.

그 마음을 멋대로 자라도록 놔둔 게 잘못이야.

걱정이 듬뿍 담긴 저 눈은 지금도 여전히 사람을 끌어당긴다. 아저씨의 눈은 왜 하필 저렇게 깊고 부드러운 세피아일까. 저렇게 황홀하고 따스한 색이 아니라 온통 새까만 색이었으면 아저씨를 조금쯤 덜 좋아할 수도 있었을 텐데. 우연은 한풀 누그러든 목소리로 물었다.

“아저씨, ……저 걱정하셨어요?”

“당연하지 않니. 아프다고 갔는데 치료도 안 받고, 전화도 안 받고, 온다더니 오지도 않고, 상담 치료도 아르바이트도 시험도 다 날려 버리고 있는데 어떻게 걱정이 안 되겠어?”

아저씨가 원망스럽다. 걱정한다는 말 따윈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상한 마음이 다시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지 않게.

“저 잘 지내고 있었어요. 여기까지 귀찮게 안 내려오셔도 되는데……. 아, 맞다. 제가 뭔가 잘못되면 아저씨 재단에서 책임지셔야 하는 건가요? 그래서 여기까지…….”

순간 아저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우연아. 아저씨하고 너하고 그 정도 사이밖에 안 됐었니?”

아저씨는 화가 났다기보다 상처를 입은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 정도 사이밖에 안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문제인 거예요. 아저씨. 그래서…….

“너 같으면 걱정이 안 되겠어? 무슨 일이 생겼나, 혹시 많이 아픈가, 내가 염려하는 마음을 안다면 전화 정도는 받아 주었어야…… 우연아!”

말을 멈춘 아저씨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표정이 퍼져 나갔다. 우연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안 되겠어, 나 어떡해…….

아저씨는 왜 그딴 말을 함부로 하고 그래요, 나한테 어떡하라고. 나한테 대체!

이런 상황에서도, 아저씨를 보자마자 좋아라 하며 날뛰는 마음이 미친 것 같다. 이 빌어먹을 감정은 그냥 폭군이었다.

이성과 의지는 이 폭군의 횡포에 끔찍하게 무기력했다. 머리채를 잡힌 채 질질 끌려다닐 때, 멱살을 잡혀 베란다에 대롱대롱 매달렸을 때, 축 늘어진 다리를 타고 오줌이 흘러내리는데 손조차 올리지 못하는 무력하고 절망적인 느낌과 비슷했다.

저 말에 넘어가면 안 돼. 네 마음을 눌러야 해, 뭉개 버려야 해.

아저씨는 약혼녀가 있어, 조건 잘 맞고, 나이도 잘 맞고, 예쁘고, 능력 있는 여자가 있어.

키스도 하고, 허리도 만지고, 이제 같이 섹스도 했을…… 여자가.

병신처럼 이렇게 질질 끌려가면 너만 죽어…….

머리로는 안다. 머리로만 안다. 몸은 반항하지 못한다. 마음도 반항하지 못한다.

항복해. 포기하면 편해. 인정해. 그냥 말해 버려. 당장 말해 버리라고!

좋아하는 감정이 죄가 아니잖아. 한 번은 확인해 보기로 했잖아. 용기백배해서!

우연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저씨의 목소리가 단번에 높아진다.

“우연아, 왜 그래. 정말…… 무슨 일이 있었어?”

“어, 없어요, 하나도, 없어요, 그냥, 그냥…….”

우연은 밖으로 튀어 나가려는 말을 삼키고, 삼키고, 계속 삼켰다. 하지만 아저씨는 정말로 끈덕지게 대답을 기다렸다.

“내가 너무 한심하고 싫어서 그래요. 기억을 모조리 지워 버리고 싶어요. 뇌 속을 박박 긁어내고 싶다고요!”

차라리 그날 그 장면을 못 보는 게 좋았을 텐데. 아니, 아저씨한테 고백했다가 그 자리에서 대놓고 거절당하는 게 좋았을 텐데. 그럼 아저씨가 여기까지 내려올 일도 없었을 텐데.

아저씨가 좋아, 너무 좋아, 미칠 것처럼 좋아.

나는 아저씨를 사랑해!

주인을 찾아낸 고백은 구역질처럼 계속 치밀어 올랐다. 꾸역꾸역 그것을 삼키려니 목구멍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우연은 고개를 숙이고 목멘 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저씨, 죄송해요. 내 감정이 맘대로 안 돼요. 그게 내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고 다니는 거 같아요. 그런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제기랄.”

아저씨가 짤막하게 욕설을 뱉는 것이 낯설다. 턱 아래의 근육이 복숭아씨 모양으로 날카롭게 곤두선다.

아저씨는 한참 만에야 무겁게 입을 뗐다.

“그랬구나. 많이 밝아진 것 같아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그동안 계속 힘들었구나. 미안하다. 내가 진작 알아차리고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이건 무슨?

아아. 우연은 아저씨가 오해한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경조증에서 울증으로 주기가 바뀌어서 이러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정해 줄 용기는 나지 않았다. 다행이야, 오히려 다행이야. 괜찮아, 더 말해, 조금 더 말해 봐! 속에 숨어 있던 다른 진우연이 계속 자신을 충동질한다.

“진작 알아차려요? 제 마음을요? 아저씨가 무슨 재주로요?”

“우연아.”

“아저씨는 절대 모르실 거예요. 영원히 모르실 거예요…….”

아저씨는 이런 사랑을 해 보았을까. 시작도 하기 전에 제 손으로 짓뭉개야 하는 그런 암담한 사랑을 해 보았을까. 이렇게 몸이 찢어지는 듯한 상실감을 겪어 본 적이 있을까.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랑하고야 마는 끔찍한 기분을 알까. 그것을 의지로 막지 못하고 질질 끌려가는 그 절망감을 아저씨는 알까.

아저씨는 괴로운 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 나는 잘 몰라. 네가 그렇게 힘들어했던 경험을 어떻게 감히 안다고 하겠니. 미안해. 다 이해하지 못해서 미안해. 그러니까, 우연아.”

“아, 씨! 하지 마세요! 미안하다는 말 좀 안 하면 안 돼요? 왜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자꾸…… 흐, 씨!”

“그래, 안 할게. 미안, 안 할게.”

아저씨는 미안하다는 말을 안 하겠다는 순간까지 미안해했다. 왜 아저씨의 세상엔 미안한 것밖에 없을까, 왜!

“일단 서울로 가자. 며칠 쉬면서 치료부터 받자.”

“안 가도 돼요, 흐으, 치료 안 받아. 하, 학교 가야 해요. 기, 기말고사가…….”

“지금까지 시험 모조리 날려 먹은 놈이 시험 핑계를 대고 있어? 손 원장님한테 치료받는 게 더 급해.”

“정신과 약 안 먹어요! 먹을 필요 없어요!”

아저씨, 이거 조울증 아니에요. 저도 모르게 사랑에 빠졌다가, 시작도 못 하고 끝장이 난 것뿐이에요. 실연해서 슬프다고 정신과 약을 먹진 않잖아요.

하지만 우연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감정이 정상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항상 어려웠다. 천국에 있다가 갑자기 지옥으로 떨어진 것처럼 극단적으로 느껴지는 이 감정 변화가, 정상적인 범위인지 확신할 수 없다. 다른 사람으로 살아 본 적이 없으니 ‘정상적인 감정 변화’가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기록에 남는 것 때문에 그래? 아직도 엄마 말에 그렇게 매여 있을 거야? 몸이든 마음이든 아프면 약 먹으면서 치료하는 게 당연한 거야.”

목소리를 높이려던 아저씨는 이내 이마를 짚고 고개를 흔들었다. ‘필요하면 강제로 약 먹여도 된다’는 말을 분명 떠올렸을 테지만, 아저씨는 반발심을 불러일으킬 만할 말을 신중하게 잘 거르는 편이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걱정하는 거 충분히 이해한다. 그럼 기록에 안 남게 하면 괜찮겠지?”

“그래도 싫어요. 저는 지금 분명 우울하지만, 조울증은 아니라고요.”

아저씨는 눈썹을 찡그리고 가늘게 한숨을 쉰다. 우연은 조용히 목소리를 낮췄다.

“아저씨, 제가 왜 아픈지는 제가 제일 잘 알아요. 이건 상담받고 약 먹어서 치료되는 병 아니에요.”

“진단이나 치료는 네가 하는 게 아니고, 의사 선생님이 하시는 거야.”

“아니에요. 절 여기까지 회복시킨 건, 의사 선생님이 아니고 아저씨였어요.”

놀랍게도 아저씨는 그 말에 반박하지 않는다. 우연은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중얼거렸다.

“……아저씨는 제가 지금 왜 아픈지 모르세요. 얼마나 아픈지 모르세요. 아무것도 모르세요.”

모르시는 게 좋아요. 끝까지 모르시는 게 좋아요, 하는 말은 용케 삼켰다. 아저씨는 우연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무겁게 한숨을 토했다.

“네가 아픈 만큼 나도 아프면 좋을 텐데. 그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텐데. 네가 왜 아직도 이렇게 아파하는지, 얼마나 아파하는지……. 그러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

그 말을 듣자마자 이제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우연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아저씨에게 기대 흐느끼기 시작했다. 설지 않은 향기가 코로 한 가닥 스며든다. 아저씨의 체취가 스며든 은은한 향이 코의 점막을 손톱처럼 긁어 댄다. 이제 몸은 아저씨와 관련된 것이면 뭐든지 지나치게 선명히 감각한다.

아저씨의 동작이 지난번보다 조심스러워졌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는 지난번처럼 끌어안고 진정시키는 대신, 커다란 손으로 어깨를 조심스럽게 토닥인다. 하지만 그 조심스러운 움직임은 여전히, 너무나도 따뜻했다.

우연은 아저씨의 가슴에 얼굴을 대고 조금 더 울었다. 아저씨는 그것까지 밀어 내지는 않았다. 아저씨의 날숨이 너무 달고, 아저씨의 손이 너무 크고, 아저씨의 품이 너무 넓다는 느낌뿐이었다. 아저씨의 품 안에서 자신은 먼지만큼 작았다.

얇은 천을 사이에 두고 아저씨의 심장 소리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짙은 안개를 뚫고 퍼지는 큰북의 울림처럼 길고, 깊고, 넓은 소리다. 그의 목소리만큼이나 굵고 차분하며, 그의 말투처럼 부드럽고 단 소리였다.

아저씨도 자신과 똑같이 심장을 갖고 있다는 것이 이상했다. 아저씨도 피부 속에 지방과 근육이 있고, 갈비뼈가 있고, 심장이 있고, 그곳에서 붉고 뜨거운 피가 북소리를 내며 내닫고 있다는 것이 이상했다. 그리고 그것을 이상하게 느끼는 자신이 더 이상했다. 모든 것이 생소하고, 신비롭고, 자꾸자꾸 이상했다.

와이셔츠의 희고 얇은 천은 눈물에 흥건하게 젖어 가면서 뒤에 감추고 있던 피부를 반투명하게 드러냈다. 아저씨의 속살은 얼굴보다 희었고, 감춰진 근육은 단단하고 날카로운 굴곡을 갖고 있었다. 맞닿은 체온은 따뜻하다기보다 뜨거웠다.

눈앞이 아뜩해지면서 어떤 색이 머릿속에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마젠타, 오페라, 철쭉, 꽃분홍. 그림 속에서 아저씨를 지배했던 천박한 붉은색들이 머릿속에 자욱해진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몸의 깊은 구석이 가려워지기 시작했다.

가려움증은 아저씨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던 여자의 기억을 되살렸다. 그 여자는 아저씨의 어깨를 끌어 내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끌어당겨 키스를 했다. 이 가슴에 안겨서, 너무나 당당하게, 그렇게 오래오래. 이제 가려움증은 그곳을 도려내고 싶을 만큼 극심해졌다.

그 여자는 내가 지금 느끼는 이런 촉감을 알고 있을까.

당연히 그렇겠지.

그 여자도 내가 느끼는 이런 감정을 품고 있을까.

당연히 그렇겠지.

아저씨는 그 여자에게 같은 감정을 품고 있을까.

……당연히 그렇겠지.

그럼…… 두 사람은 이런 촉감 정도는 익숙할까.

우연은 생각을 멈췄다. 대답이 튀어나오기 전에 필사적으로 생각의 꼬리를 뒤로 잡아 끌었다. 아니, 아니겠지. 아니었으면 좋겠다. 절대, 절대로! 고래고래 악을 쓰는 사이로 선명한 대답이 튀어나온다.

당연히 그렇겠지! 당연히 익숙하고, 당연히 모든 것을 나눈 사이겠지! 보고 싶다는 이유로 갑자기 뉴욕으로 날아갈 만큼 열렬한 사이니까!

약혼녀인데, 그 먼 곳까지 가서…… 손만 잡고 키스만 하고 오진 않았을 거 아냐. 집에서 재우면서, 굿 나잇 키스만 하고 방문을 닫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아저씨는…… 그게 첫 번째 섹스였을 것이다. 느낌이 어땠을까. 얼마나 좋았을까. 절대 잊지 못하겠지. 그 여자는 또 아저씨에게 안겨서 얼마나 황홀했을까.

발끝에 떨어진 눈물이 퍽퍽 소리를 내며 깨져 나간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세상을 만든 것이 아저씨가 믿는 신이라면, 그 신도 공평하지 않다. 나도 아저씨를 좋아하는데, 아저씨의 심장 소리와, 뜨거운 체온과,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를 차지하는 건 그 여자가 될 것이다. 아니, 아저씨는 이미 그 여자의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옷이나 질척하게 더럽혀 놓고는 바로 물러나야 한다. 그것이 세상이 공평치 않게 만들어졌음의 증거다.

“아저씨, 앞으론 안 이럴게요. 다시는 안 이럴게요. 오늘만 좀 봐주세요.”

“괜찮아. 힘들면 언제든지 얘기해도 돼.”

아저씨는 자신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다. 돈을 쏟아붓든, 약을 쏟아붓든, 자신이 단단한 바위가 되어 불안정한 나를 받쳐 준다고 했었다.

하지만 이건 아저씨가 받쳐 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아저씨는 그러지 못할 것이다. 내가 아는 한이원, 그 신중하고 반듯한 아저씨라면 사랑하는 약혼녀를 곁에 두고 절대.

“아니에요. 다음에 만날 땐 원래 진우연으로 돌아와 있을게요.”

“이것도 원래의 진우연이잖아.”

아저씨가 짧게 웃는 소리가 뺨을 통해 몸을 통과한다.

“어느 쪽의 진우연이든 충분히 멋있어. 괜찮아.”

아저씨의 말은 혀가 아릴 만큼 달고, 목구멍을 긁는 것처럼 따갑다. 아저씨의 발을 끈적하게 두르고 있는 저 불량하고 중독성 강한 갈색의 음료처럼.

“상태가 뭔가 아니다 싶으면 바로 전화해. 버티면 더 힘들어. 치료받으면 바로 좋아질 거야.”

“…….”

“매일 너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 네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기를. 네 재능이 세상에서 눈부시게 피어나기를. 남은 인생 내내, 눈물 대신 웃을 일만 남아 있기를…….”

“분수없이 좋은 것만 탐내다간 반드시 값을 치르게 된대요.”

우연은 급하게 말을 잘랐다. 그 말은 자신에게 하는 경고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저씨는 고개를 저으며 담담하게 웃었다.

“하느님한테, 그 값은 내 앞으로 달아 놔 주세요, 할게. 그러니 걱정 말고 맘껏 탐내도 돼.”

난 이 중독에서 영영 못 벗어날지도 몰라.

절망에 가까운 확신에, 우연은 아저씨를 올려다보며 힘껏 웃었다.

* * *

“야 진우연, 너 시험 다섯 과목 모조리 쨌다며? 제정신 아니지 엉?”

“조교 선생님이 네 걱정을 다 한다? 너 어떻게 된 거냐고! 수습 안 될 수도 있다고, 한번 와 보래.”

기숙사로 돌아간 우연은, 방에서 씩씩대며 기다리던 친구들과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같은 과 현영이와 미지였다. 옆에서 혜진이도 끼어들어 대체 무슨 일이냐, 너 요새 밥은 먹고 다니냐? 끝없이 물어보고 걱정을 해 댄다. 행복할 때는 친구들의 애정 어린 관심이 좋았지만, 이제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짜증스럽고 힘들었다.

“아 씨, 쫓겨나든 말든 다 귀찮아. 식당도 가기 싫어. 움직이기도 힘들다고!”

“그러면서 아침저녁 편의점으로 등교하냐!”

현영이가 큰 소리로 투덜대더니, 침대 사다리를 오르던 우연을 1층 침대로 주저앉혔다.

“할 말이 있어서 아까부터 기다렸단 말이야. 유선이도 지민이도 다 너 들어오는 것만 기다렸어.”

“나를 왜? 시험 다 끝났으면 빨리 집에 갈 생각 안 하고.”

“오늘 학교에 유명한 미술 잡지 기자 왔었다?”

“그게 뭐?”

우연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아무 얘기도 듣기 싫었다. 하지만 현영이는 끈질기게 이야기를 이었다.

“우리 과 애들이랑 수위 아저씨가 학교 담장에 노상 방뇨하는 인간을 잡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미술 잡지 ‘아트가디언’ 기자라는 거야.”

“순수 미술 계열 학과에 재학 중인 신입생들을 취재하는 중인데, 유명한 미술 영재나 기관 특별 후원을 받는 학생들을 중점적으로 다룬다는 거야.”

“한 달 후에 특집 기사가 나간대.”

“어쩐지 요 며칠 편의점 근처에서 몇 번 본 것 같더라니.”

미술 영재 좋아하시네. 이 깡촌 예대에 무슨 놈의 영재야. 뭐 취재할 게 있다고. 근데 개새끼도 아니면서 왜 학교 담벼락에 오줌을 싸. 우연은 짜증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그래서는 뭘 그래서야. 서림예대 회화과에서 제일 눈에 띄는 신입생이 누구겠냐? 나도 그렇고, 다른 애들도 죄다 진우연이라고 한 거지! 만장일치! 완전 대박! 야, 빨리 고맙다고 안 해?”

우연은 이불에 파묻힌 채 한숨을 쉬었다. 몇 주 전만 해도 이런 말을 들었으면 아저씨에게 자랑할 생각에 하늘을 날아다닐 것 같았겠지만, 지금은 부담스럽고 거북하기만 했다.

“그래서 그 얘기 하려고 나 기다린 거야?”

“당연하지! 기자 아저씨가, 그럼 너하고 인터뷰 좀 할 수 있냐고 하더라. 취재에 응해 주면 학교로 잡지도 보내 주고 사례비도 20만 원이나 준대.”

“우연아, 갈 거면 얼른 가 봐, 기자 아저씨 지금 햄버거 가게에 있어.”

어느새 들어왔는지 옆방의 유선이가 끼어들어서 조른다.

“싫어, 개새끼도 아닌데 학교 담장에 노상 방뇨나 하는 놈은 다 꼴 보기 싫어.”

“그러게. 우연이 요새 몸도 안 좋은데 적당히들 좀 해라. 기자 아저씨한테, 학교나 교수님한테 정식으로 신청하라고 하든가. 이게 뭐냐?”

중간에 혜진이도 끼어들어 말려 보았지만, 친구들의 열광적인 반응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20만 원이라니까! 그 돈이면 불닭 컵라면에 쿨피스가 100세트야. 그리고 너, 아트가디언에 인터뷰 올라가기 얼마나 어려운지 알아? 그거 유명한 잡지야. 어지간한 화랑, 갤러리에서 다 구독한다고. 나오기만 하면 땡잡은 거야, 너!”

아, 우연은 조건 반사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땡을 잡았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불닭볶음에 쿨피스는 굉장히 설득력이 있다. 쿨피스 대신 콜라도 괜찮겠지. 불닭에 콜라는 인간의 자극 한계치를 증폭시키는 사악한 조합이다. 심지어 그 악마의 콜라보는 중독성마저 강했다. 어느새 옆방에서 달려온 지민이도 합세했다.

“혼자 인터뷰하기 쪽팔리면 우리랑 같이 가자. 학교에서도 잡지에 이름 나오면 좋아할걸? 너 나오면 그거 수백 권 사다 놓고 학교 홍보할 때마다 써먹을걸?”

“아, 갈 거야, 말 거야? 기회는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라고.”

우연은 드디어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일어났다. 조금 으쓱한 기분도 있었고, 아저씨에게 자신의 사진이 실린 잡지를 보여 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유미현, 그 멋진 여자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잡지에서 얼굴 내밀 정도는 돼요.’ 하고 자랑하고 싶었다. 그냥 하찮고 불쌍한 아이가 아니라, 능력 있고, 좀 더 봐 줄 만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다. 대단하다, 장하다, 기특하다, 그런 말이라도 듣고 싶었다.

……그런, 말이라도.

* * *

우연은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햄버거 가게로 들어섰다. 일전에 이원 아저씨와 함께 앉아 있던 그 구석 자리를 향해 친구들이 손을 흔들어 보인다. 그곳에 앉아 있던 선글라스를 낀 점퍼 차림의 사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순간 앞이 노래졌다.

“아아악!”

우연은 혜진의 손을 뿌리치고 문을 박차고 나왔다.

“어? 우연아! 야, 왜 그래! 잠깐만 기다려 봐!”

친구들의 놀란 목소리가 뒤에서 왕왕대며 쫓아온다. 우연은 귀를 틀어막고 달렸다. 신호등이 빨간불인데도 그대로 건너서 학교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아빠, 아빠가 왜 여기에 와 있는 거야!

접근 금지 명령. 학교와 거주지 반경 백 미터 이내. 학교에서 햄버거 가게까지 백 미터가 되는지 안 되는지는 모르지만, 아빠가 눈앞에 와 있는 이상 그따위 법을 따지기는 글러 먹었다. 우연아! 기다려! 놀란 친구들의 목소리가 급하게 따라오지만 설명할 틈조차 없었다.

앞이 노랬다 하얬다 한다. 아무리 달려도 교문까지 도착할 수 없다. 구역질이 치밀고 숨이 막힌다. 그대로 죽을 것 같다. 우연은 목을 움켜잡은 채 땅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학생, 왜, 왜 그래?”

경비실에 있던 수위 아저씨와 막 교문을 나서던 교수님 한 분이 놀란 얼굴로 뛰어온다. 친구들도 뒤에서 비명을 지르며 달려온다. 하지만 아빠는 더 빨리 달려왔다.

접근 금지 명령 따위는 아무 소용없었다. 아빠는 법을 안 지키는 것이 똑똑한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법보다 주먹이라는 신념도 있었다. 모르고 믿은 아저씨는 순진했고, 알면서 믿은 자신은 멍청했다. 우연은 목을 움켜쥐고 땅바닥에서 버르적거렸다. 팔꿈치와 무릎이 시멘트 바닥에 갈리는데 아픈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 아저씨, 살려 주세, 나, 나 좀 살려 주세…….”

“이거 놔, 왜 이래! 난 저 아이하고 할 말이 있어!”

친구들이 아빠의 팔다리에 다급하게 달라붙는다. 아빠는 혜진이와 유선이를 걷어차며 다시 다가왔지만, 교수님과 수위 아저씨가 우연을 황급히 학교 안으로 끌어들였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요! 혜진이가 고함을 지르자, 멀리서 고개를 갸웃대며 바라보던 학생들이 황급히 뛰어온다.

아빠는 바로 말투를 바꿔 애걸하기 시작했다.

“우연아, 제발 잠깐만 기다려. 아빠랑 말 좀 하자! 엄마 아빠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러냐?”

아빠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친구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주춤거린다. 교수님과 수위 아저씨의 표정도 멍청해진다. 아빠가 한 걸음씩 다가오는데 아무도 막지 않는다.

“저, 정말 아버님 맞니?”

교수님의 조심스러운 속삭임에 우연은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아빠는 둘러싼 사람들을 향해서 목멘 소리로 말했다.

“딸 얼굴 한번 보자는 게 무슨 잘못입니까?”

“…….”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대학 학비 못 대 준다고 했는데, 그게 섭섭했는지 바로 가출을 했어요. 억장이 무너집니다. 다른 집처럼 넉넉히 못 대 주는 마음이 오죽하면 화를 냈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친딸 얼굴도 못 볼 만큼 큰 잘못입니까? 대체 무슨 법이 이렇습니까.”

안 돼. 믿지 마세요. 저 말만 번드르르한 개새끼, 제발 믿지 마! 접근 금지, 접근 금지라고!

우연은 우들우들 떨며 전화기를 들었다. 이제는 한 가지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아저씨, 살려 주세요. 나 좀 살려 주세요. 전화기 위로 물이 줄줄 떨어지는 것을 보고야 우연은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저……. 아저씨? 이원 아저씨…….”

우연은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쥐어짰다. 사, 살려 주세요, 아빠가 오는데 왜 아무도 안 막아, 나 좀 살려줘요. 아저씨, 아저씨.

어디까지 들으셨는지 모르겠다. “최 실장, 서림예대로 돌아갑시다, 당장!” 하는 다급한 목소리가 우연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우연아, 금방 가마. 조금만 기다려. 하는 목소리는 실제였는지 환청이었는지 아득했고, 이내 하늘이 새까매졌다.

* * *

혜진은 의자에 두 다리를 꼭 붙인 채 몸을 달달 떨었다. 우연이는 의식을 잃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우연이가 부모님과 그런 관계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다만 사감 선생님은 우연의 부모님이 접근 금지 상태인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쩐지. 기자 이야기를 들었을 때 느낌이 좀 이상하긴 했었다. 학교 담벼락에 노상 방뇨나 하던 놈이 기자라니. 학교나 교수님에게 정식 신청을 한 것도 아니고, 햄버거 집에서 친구들 통해서 인터뷰라니. 생각할수록 이상하지 않은가. 최근 우울해하던 우연이에게 활력이 될 것 같아서 끝까지 말리지 않고 따라간 게 그렇게 후회가 되었다.

우연이는 눈을 꼭 감은 채 계속 헛소리를 했다. 아저씨, 아저씨. 저 좀 살려 주세요, 아저씨, 제발 저 좀, 살려, 죽고 싶지 않아, 살려 주세요.

“오랜만이에요, 혜진 학생.”

뒤에서 들린 낮고 굵은 목소리에 혜진은 크게 소스라쳤다. 눈앞에는 전에 친구를 태우러 왔던 키 크고 잘생긴 기사 아저씨가 서 있었다. 뒤이어 사감 선생님과 보건실의 담당 간호사, 그리고 동그란 안경을 쓴 정장 차림의 남자가 따라 들어왔다. 동그란 안경이 나서서 사감 선생님에게 기사 아저씨를 소개했다.

“세경그룹 대표이사 한이원 전무님입니다. 현재 이원메세나재단 이사장으로 진우연 학생을 후원하고 계시고요.”

“아, 가끔 전화 주시던 이사장님이시군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사감 선생님이 고개를 숙이고 악수를 한다. 혜진은 기절할 듯 놀라서, 사감 선생님이 상황을 설명하라고 서너 번이나 눈짓하는데도 입만 멍청하게 벌리고 서 있었다.

“일주일 전쯤인가? 시험 기간 직전부터 우연이가 이상해지기 시작했어요…….”

혜진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우연의 급격한 변화를 이야기했다. 갑자기 시작된 무기력증, 깊은 우울, 시험 포기, 불면, 거식과 폭식, 그리고 며칠 전부터 학교 인근에서 보이던 키가 작고 몸이 땅땅한 선글라스 아저씨, 미술 잡지 기자라는 말에 속아 우연이가 햄버거 가게에 간 것까지 주섬주섬 늘어놓았다. 아빠라는 사람이 도망치는 우연이를 학교 앞까지 쫓아왔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는 아저씨의 얼굴이 푸르게 변했다.

“접근 금지 명령은 분명 제대로 나왔는데……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군요.”

“햄버거 매장이나 정류장 정도는 반경 100미터에 해당하지 않을 겁니다.”

선생님과 이사장님과의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아저씨, 아저씨……. 침대에 누운 친구가 손을 허우적대며 아저씨를 찾고 있었다. 이사장 아저씨는 황급히 침대 옆으로 다가가 허리를 수그렸다.

“우연아, 괜찮니? 정신이 좀 드니?”

“무서워, 살려, 나, 나 좀 살려 주세요, 아저씨, 무서워요.”

친구의 꽉 감은 눈꼬리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목에서는 꺽꺽대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아저씨, 나 좀 살려줘요. 나, 나 좀 숨겨 주세요. 무서워, 무서워서, 흐으, 누, 누가 나 좀 어떻게 해 줘.”

의식이 없는 중에도 눈물범벅으로 애걸하는 친구를 보자, 이사장 아저씨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하지만 아저씨는 주먹을 꽉 움켜쥐기만 할 뿐, 버둥대는 손조차 잡아 주지 않고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한다.

“사감 선생님. 기숙사는 방학 때 문을 닫습니까?”

“네, 종강하고 일주일 정도까지 더 있다가 문을 닫고, 개강 일주일 전에 다시 열어요.”

“그럼 우연이는 지금 퇴실하는 거로 하겠습니다. 지금 바로 서울로 데려가서 치료부터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수속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사감 선생님이 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사무실로 내려간다.

“최 실장님.”

“예, 전무님.”

“간호사님하고 우연이 좀 차로 옮겨 주세요. 정 박사님께도 연락 넣어 주시고요. 서울로 바로 올라가도록 하겠습니다.”

우연이가 키 큰 간호사님의 등에 업혀 내려가는 동안, 아저씨는 우연의 책상과 침대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가까이서 본 아저씨는 생각보다 훨씬 컸고 어깨와 등이 넓었다. 좁은 방에 서 있으니 뒷모습이 더욱 거대하게 보였다.

‘아저씨, 저 좀 살려 주세요. 아저씨, 무서워요. ……누가 나 좀 어떻게 해 줘.’

친구의 절박한 목소리, 아저씨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짓던 친구의 발그레한 얼굴. 불현듯, 친구가 아저씨에게 갖고 있는 감정이 이상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저씨의 표정은 지난번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아까 순간적으로 보여 주었던 표정은 깨끗이 사라지고 지금은 침착하고 차분하다. 그는 우연의 책상과 침대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혜진 학생. 우연이는 당분간 서울에서 머물러야 할 것 같은데, 혹시 우연이가 자주 사용하는 물건이나 필요한 소지품, 옷가지 몇 가지만 챙겨 줄 수 있겠어요?”

여학생 물품이라 함부로 뒤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시나 보다. 혜진은 커다란 배낭에 친구가 잘 입는 여름옷과 속옷, 생리대와 연습장, 미술용품이 든 필통, 학용품, 휴대 전화, 충전기 따위를 주섬주섬 챙겨 넣었다.

“고마워요. 폐가 많았어요.”

아저씨가 가방을 들고 나가려 할 때, 혜진은 급하게 그를 불러 세웠다.

“저, 저것도 한번 확인해 주세요. 우연이가 짱박아 둔 건데…… 차 가져오신 김에 갖고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혜진은 구석에 놓인 사물함을 가리켰다. 사물함 뒤쪽으로 살짝 떠 있는 공간에는 우연이 억지로 틀어박아 놓은 커다란 짐 뭉치가 있었다. 종이로 둘둘 싸여 있어서 내용물을 본 적은 없었다.

“음? 이건……?”

사물함을 앞으로 당기고 커다란 짐을 끄집어낸 아저씨가 눈을 크게 뜬다. 짐은 혜진의 생각보다 훨씬 거대했다. 적어도 우연이의 키보다 큰 것은 분명했다. 아저씨가 눈썹을 찌푸린다.

“이게…… 뭐지? 그림인가요?”

“본 적은 없지만 그림이라고 들었어요. 아저씨 그림이라고 손도 못 대게 하던데요.”

“내 ……그림? 이렇게 큰 그림을 그렸다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분명 내 그림이라고 했어요?”

“네.”

짙은 눈썹머리가 더욱 깊이 모여든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끈을 풀기 시작했다. 단단한 매듭을 푸는 움직임이 신경질적으로 느껴진다.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보인다.

드디어 몇 겹으로 싸인 종이가 벗겨지고, 그림이 햇빛 아래 확 드러났다. 헉, 크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이건.”

세상에 맙소사.

혜진은 그림을 보자마자 그대로 기절하는 줄 알았다.

미쳤다, 우연이 저 애는 진짜 미쳤다.

그림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화사하고 농밀한 분홍색에 한껏 물든 주인공은, 눈앞에 서 있는 점잖고 묵직한 이 남자가 틀림없었다. 하지만 극도로 사실적으로 묘사된 얼굴과 손, 세로로 길게 늘어진 남색 넥타이와 은색 포크는 눈이 아릴 정도의 분홍색, 자주색, 붉은색 물결에 휩싸여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특히 잎이 조금씩 시들어 가는 붉은 해바라기는 환상의 세계 속에서 둥둥 부유하는 듯했다.

그 한가운데서, 눈앞의 사내는 윤기를 머금은 입술을 핏빛이 선명한 혀로 핥으며 사랑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림의 주인공은 그림 앞에서 돌처럼 굳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커다랗게 벌어진 눈, 살짝 벌어진 입술, 후드드, 후드드, 두 손이, 어깨가 경련하듯 발작적으로 떨리는 것이 보인다. 그가 두 손을 모아 힘껏 그러쥔다. 그러자 떨림은 온몸으로 퍼져 나간다. 아저씨는 한참이 지나서야 전화기를 들었다.

“……최 실장. 잠시만 올라오세요. 그림을 가져갈 게 있습니다.”

* * *

우연이 정신을 차린 것은, 서울로 올라가는 고속도로 위에서였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가장 먼저 한 짓은 머리를 쥐어 싸고 소리를 질러 댄 일이었다. 아아, 아아악, 아아아악! 온몸이 발작이라도 하는 것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옆에 앉아 있던 이원은 우연을 힘껏 끌어안고 진정시켰고, 우연은 이원의 목에 매달려 미친 듯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이원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 몸부림을 고스란히 받아 주었다.

“아저씨……?”

간신히 진정된 것은 톨게이트를 지날 때였다. 우연은 멍하니 눈을 깜박이며 이원에게 손을 뻗어 뺨을 닦아 주었다. 이원은 그제야 자신의 얼굴도 눈물로 흠뻑 젖어 있음을 깨달았다. 대체 언제, 왜 눈물이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우연은 이원의 팔에 매달린 채, 눈썹을 파르르 떨며 묻는다.

“……아저씨, 나, 어디…… 가요?”

병원에, 라고 대답하려던 이원은 잠시 멈칫했다. 우연은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입술이 다시 달싹거린다.

“나, 이제 어디 숨어 살아요……?”

병원이라고 대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지금 우연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안전함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병원, 기숙사, 학교, 쉼터, 그 어떤 곳이라도.

지금까지 우연이 건강하게 회복되어 간다고 안심하고 있던 게 멍청했다. 우연의 안전과 회복은 이렇게 신기루처럼 허망한 곳에 세워져 있었다.

“……아저씨 집에 숨어 있자.”

“전무님……?”

최 실장의 놀란 목소리가 튀어나오다가, 이원의 시선에 꼬리가 잘린다. 이원은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되풀이했다.

“엄마 아빠는 아저씨도 모르고 우리 집도 몰라. 아저씨 집에는 경호원도 있고, 허락받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못 들어와.”

“절대?”

“절대.”

이원은 단호하게 말하며 웃어 보였다.

“숨을 방도 많아. 비밀의 방도 있고, 지문으로 들어가는 방도 있어.”

“아저씨네 집…… 콩알만 하다더니.”

“잭과 콩나무의 콩이지. 콩도 종류가 많아.”

그제야 우연이 흐득흐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나마 간신히 안심한 모양이다. 하지만 집에 도착할 때까지 우연은 이원의 팔에만 매달려 있었고, 다른 사람이 묻는 말에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누가 말을 걸기만 해도 크게 소스라쳤다. 이원에게만 아주 작은 소리로 대답하고는, 바로 어깨를 움츠리고 겁먹은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원은 이를 악물었다. 몇 시간 전에 편의점에서 만났던 아이와 완전히 달랐다. 그때 어떻게든 데리고 왔어야 했다. 억지로 손목을 잡아끌고서라도 올라갔으면, 이 지경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또 확신할 수 없었다. 온통 현란한 색으로 가득한 자신의 초상화, 거대한 그림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 색깔이 극도로 위험하게 느껴졌다.

너를 내 집으로 데려가는 게 과연 옳을까.

옳지 않다. 나는 너를 곁에 가까이 두어서는 안 된다. 내가 마음을 자각하자마자 바로 뉴욕으로 갔던 이유를 잊으면 안 된다. 얼마 전 무리하게 약혼을 강행했을 때의 단단한 각오를 절대 망각하면 안 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선택의 여지는 없다.

고민을 비웃기라도 하듯, 머릿속에서 온갖 불길한 낱말들이 정신없이 엉켜 돌아간다. 우연, 조증, 울증, 불안 장애, 미현, 약혼, 결혼, 우연, 발현, 트리거, 넘칠락 말락, 아슬아슬한 컵, 어떤 감정, 위험한 감정, 양극성 장애, 공황, 마지막 한 방울, 트리거.

……트리거.

짤깍.

이원은 아이의 방아쇠가 당겨졌음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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