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누드-16화 (16/47)

16. No.1 붉은 수국과 분홍색 딸기 무스케이크

수국의 색깔이 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아저씨가 두 번째로 왔던 날이었다. 아저씨가 처음 왔던 날, 그의 옆을 구름처럼 감싸고 있던 꽃 무더기는 함박눈처럼 새하얀 색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로 오신 날에는 푸르스름한 색으로 살풋 물들어 있었다. 우연은 그제야 기숙사 주변에서 매일 보던 꽃이 계속 변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정갈하고 깨끗한 이미지의 아저씨는 눈부신 흰색에도, 은은한 푸른색에도 잘 어울렸다.

지금은 완벽한 마젠타, 진하고 화려한 꽃분홍색으로 물들었다. 붉은 수국의 파도가 바람에 따라 크게 일렁거리는데 이제야 만개하기 시작한 해바라기들이 붉은 물결 위에서 둥실둥실 떠오른다. 커다란 붓에 황금 물을 듬뿍 묻혀 확 흩뿌려 놓은 듯 눈이 부셨다. 처음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했던 두 꽃의 조합은, 절정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완벽해졌다.

우연은 예전과 달리 조용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친구들은 기말시험과 과제 때문에 영혼이 갈려나가고 있는데 그것마저 시들하게 느껴졌다. 혜진이 눈치채고 조심스러워할 정도 였다.

그렇다고 우울하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이상할 정도로 자신을 사로잡고 있던 흥분이 얼추 가라앉고, 어느 정도 평정심을 되찾은 기분이었다.

우연은 시간만 나면 창가에 턱을 괴고 앉아 꽃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곳에 아저씨가 서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아저씨는 이 붉은 색깔과 잘 어울릴까?

아니. 고개를 힘껏 저었다. 아저씨는 새하얀 눈으로 덮인 알프스 산정의 호수처럼 청정하고 맑은 사람이었다. 흰색, 혹은 푸른색이 잘 어울릴 것이다. 이렇게 천박할 정도로 화려한 색깔과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다.

창문으로 달큼하고 향긋한 냄새가 도둑괭이처럼 살금살금 들어온다. 화사한 붉은 파도 곁을 지날 때면 그 지독한 향기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우연은 자신의 감정도 저 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아저씨와의 관계는 지난번의 만남을 기점으로 큰 변화를 맞았다. 짧은 순간이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밑바닥을 명료하게 들여다보았고, 그 후, 예전과 같은 관계로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우연은 아저씨를 좋아하는 감정을 더 이상 덕질, 팬질, 사생질 따위의 낱말로 포장할 수 없게 되었고, 아저씨 역시, 자신을 격려하며 지지해 주는 후견인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아저씨는 그 전부터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지난 상태였을지도 모른다. 막연한 확신이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상대방이 두르고 있는 뭔가를 깨뜨렸고, 깨진 곳을 통해 서로의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들어가지 못했던 곳까지, 밑바닥에 가라앉은 진흙을 파헤쳐 맑은 물을 뿌옇게 진창으로 만들어 가면서.

아저씨는 그때 있었던 일을 후회할까? 부끄러워하고 있을까? 어른답지 못하다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다고?

그래서 이렇게 연락을 끊어 버린 걸까?

그날 이후, 아저씨에게선 아무 연락이 오지 않는다. 보름이 되어 가도록. 우연 역시 연락하지 않았다. 아무 때나 연락하라고 단축 번호까지 박아 두셨지만,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사람에게 해도 되는 짓은 아니었다. 우연은 그의 딸이나 동생이 아니었고, 이제는 피후견인조차 아니었다.

……그래도 한 번쯤은 전화 주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우연은 창밖에서 일렁이는 수국의 안개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들의 지나치게 진한 색과 향으로 인해, 우연은 꽃의 절정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가장 아름다운 색과 향을 가진 꽃일수록 그 최후는 추하고 더러우며 허망했다.

……아마 이 감정도 그럴 것이다.

문득 아저씨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꽃이 지기 전에. 이 감정이 혼자서 멋대로 절정으로 치닫다가 혼자서 추하게 무너지기 전에.

난 아저씨를 만나서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잘 모르겠다.

아저씨는 나를 만나면 또 무슨 말을 하실까.

그것도 역시 잘 모르겠다.

그냥, 만나야 할 것 같았다. 만나 봐야 알 것 같았다.

우연은 망설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핑계는 부족하지 않다. 알바비로 아저씨에게 맛있는 것을 사 드리려고 했었지.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살갗을 지글지글 녹일 듯한 폭염과 함께, 수국의 짙은 향기가 긴 창날처럼 폐에 쑤셔 박혔다.

벌써 여름도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 * *

세경홀딩스와 세경건설 본사는 여의도에 있다. 그러니까 학교 셔틀이 없는 시간에는 버스로 세 시간쯤, 그리고 재수 없게 버스를 놓친다면, 다섯 시간쯤 걸릴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적당히 재수가 없었던(?) 우연은 점심때가 지나서야 여의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교대 근처의 이원미술관은 가 보았지만, 여의도 본사 구경은 처음이었다.

우연은 회사 옆의 제과점에 들러 딸기 무스케이크를 샀다. 새콤한 맛은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아저씨와 함께 먹었던 딸기 무스케이크는 특별했다. 우연은 그것을 아무에게도 주지 않고 주말 내내 그것만 먹었다. 그것은 마약처럼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었다.

우연은 케이크와 꽃 뭉치를 들고 두리번두리번하며 건물 입구로 들어섰다.

“학생, 무슨 일로 왔어?”

우연은 자신이 세상을 만만하게 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내 표지판에서 전무실, 아니면 대표이사실, 그런 걸 찾아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몰래 올라가면 될 줄 알았는데, 건물 안에 들어가는 것부터 대난관이었다. 다들 지하철 개찰구처럼 생긴 곳을 통과해서 건물로 들어가는데, 사진이 박힌 하얀 카드를 대야만 길이 열렸다.

하지만 우연의 손에 들린 것은 케이크 상자와 수국과 해바라기라는 이상한 조합의 꽃 뭉치가 전부였다.

이놈의 꽃다발도 왜 이렇게 없어 보일까. 눈치껏 수국과 해바라기를 따서 아랫단만 리본으로 질끈 묶은 꼬락서니가, 아까는 감각적이고 세련되어 보였는데 이제 보니 빈티지 룩도 못 되는 노숙자 룩이다. 수국은 단 한 송이로도 한 다발만큼이나 커다란 꽃인데 그걸 욕심껏 다섯 뭉치나 넣은 데다 해바라기의 존재감도 압도적이었다. 아마 일반적인 플로리스트라면 이런 조합은 절대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우연은 이런 비정형적이며 난해한 조합이 너무 좋았다.

“학생, 무슨 일로 왔냐니까?”

남색 제복에 모자를 쓴 경비 아저씨가, 조금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여전히 팔짱을 낀 채 우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연은 전화기를 만지작대며 잠시 망설였다.

지금이라도 전화를 할까?

……여기서?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보란 듯이 아저씨를 불러낼 거야? 미쳤어?

그, 그럼 홍연 아저씨를 불러 볼까?

아니다. 그랬다간 아저씨 코빼기도 못 보고 홍연 아저씨의 잔소리만 줄기차게 듣고 돌아갈 수도 있다. 우연만큼 4차원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칭 ‘똘끼 충만’, ‘의리 박약’을 호언하던 이상한 비서실장 아저씨라면, 아무 용건도 없이 아저씨를 만나려는 사람을 그냥 통과시켜줄 리 없다. 원래 홍연 아저씨의 임무가 아저씨와 통화하려거나 만나려는 사람을 거르는 일이 아니던가.

일단 저 개찰구만 통과하면 어떻게든 사무실까지 찾아갈 수 있을 텐데. 아저씨는 세경홀딩스와 세경건설에서 대표이사 혹은 전무라고 불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이름이 붙어 있는 방만 찾아가면 되는 것이다.

잠시 궁리하던 우연은 고개를 반짝 들고 배시시 웃었다.

“아저씨, 부탁드릴 게 있는데요.”

* * *

“시간이 늦었으니 일단 점심이나 같이하실까요.”

이원의 말에 회의장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 쉬는 소리가 들린다. 벌써 오후 2시. 대규모 재개발 사업 참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회의가 다섯 시간째 이어지고 있었다. 다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나이가 꽤 있는 몇몇 부장과 상무들은 대놓고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세경건설이 현재 고심하는 재개발 건은, Y시의 3개 지역이 연합해서 추진하는 총 8000세대 규모의 대형 사업으로, 규모만으로 보면 뉴타운 사업이라 불러도 될 정도였다. 하지만 크고 작은 문제들이 첩첩이 포진해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입지는 좋았다. 주변에 대학 캠퍼스가 4개나 포진한 구도심에, 터미널과 전철역이 있는 교통 요지이고, 세종―포천 고속도로의 수혜지 중 하나이기도 했다.

하지만 대규모 반도체 단지 유치 소문이 10년 넘게 떠돌다 결국 흐지부지 사라진 상태이며, 지역 부동산 경기는 심각하게 얼어붙었고, 중도금 대출마저 막힐 거라는 정보도 있었다. 그렇다면 대규모 미분양 사태는 피할 수 없다. 그것도 모자라 조합원들끼리 패가 갈려 8년 동안 극심하게 싸우는 중이었다. 하여, 세경건설을 비롯한 두 개의 시공사가 이미 투입된 사업비를 포기하고 철수한 상태였다.

그래서 다급해진 조합에서는 공개 입찰이 아닌 수의 계약으로 전환했고, 일반 분양 물량의 절반을 시공사로 넘겨 달라는 파격적인 조건까지 받아들였다. 제안한 쪽에서조차 불가능할 거라 생각하며 끼워 넣었던 조건이었다. 이번마저 실패하면 재개발 사업 자체가 무산될 판이라, 조합 측이 손해만 면할 선에서 최대한 양보를 한 셈이었다. 이곳은 조합원의 수가 많지 않은 데다, Y시에서도 어떻게든 낙후된 구시가지를 정비해 보려고 용적률을 최대한 올려 주겠다 약속한 상태여서 일반 분양 물량은 엄청났다.

조건이 좋으니 질러 보자, 리스크가 크니 포기하자, 시장 얼었다고 손 놓으면 굶어 죽으라는 거냐, 위험을 감수하기엔 규모가 너무 크다, 일반 분양분 절반이라지 않느냐! 이 미친 조건을 놓치란 말이냐? 그러면 뭐 하냐, 그거 조합 꼼수인 거 모르냐. 중도 대출 막혀서 대규모 미분양 터지면 그 물량 다 끌어안은 세경은 끝장이다! 두 세력은 서로의 의견을 밑받침하기 위해 온갖 숫자와 통계를 들이대며 열심히 싸웠다.

이원은 저들이 부러웠다. 결정은 하지 않고 싸우기만 하면 되니까. 어차피 결정하는 사람은 이원 혼자고, 최종 책임자도 이원 혼자다. 그걸 알고 있으니 다들 저렇게 자신만만 싸워 대는 것이다.

불안하다고 모든 계약마다 발을 뺄 수는 없을 것이다. 일정 규모 이상의 회사는 달리는 오토바이와 비슷하다. 쓰러지지 않으려면 계속 달려야 하고, 잠시라도 멈추면 바로 쓰러진다. 이원은 리스크 회피 성향이 높은 경영자였지만, 위험을 모조리 회피하면 기업이 망하게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아니면 폭주하다가 단번에 망하거나.

대기업 CEO 중에서 사이코패스 성향이 높은 사람들이 많다는 연구 결과가 이해가 된다. 이 지독한 도박판에서 스트레스에 짓눌리지 않고 냉정하게 판단을 내릴 수 있으며, 심지어 가책조차 받지 않는 사람들이란, 이 직군에 가장 맞춤한 인종인지도 모른다.

이원은 짧게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 후 회의 계속하겠습니다.”

열 명이 넘는 임원들에게 둘러싸여 사내 식당으로 내려간 이원은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사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식판을 챙겼다. 이원의 이런 모습에 익숙한 임직원들도 군소리 없이 식판을 들고 얌전히 그의 뒤로 줄을 섰다. 점심시간이 꽤 지났지만, 식당에 사람은 적지 않았다.

“……음?”

창가 쪽에서 여자 둘이 고개를 수그리고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눈에 띄었다. 자그마한 체구, 흰 티셔츠에 청바지, 때 묻은 운동화. 직원은 아닌 것 같고, 손님인가? 그러고 보니 맞은편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직원은, 부서는 모르지만 오가며 몇 번 인사를 받은 것 같기는 하다.

이원은 눈을 찡그리고 자그마한 여자를 응시했다. 거슬린다. 얼굴을 가리고 있는 저 단발이, 작고 좁은 어깨가, 조금 움츠러든 듯한 낯익은 실루엣이.

“……설마. 그럴 리가.”

이원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애써 피해 왔던 뭔가가 정면에서 얼굴을 후려친 기분이었다. 지금 그 애가 여기 있을 이유가 없잖아. 순간 여자가 살그머니 고개를 들어 올린다. 시선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힐끔대며 좌우를 둘러보더니 이원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챙그랑 퉁탕!

이원의 손에서 식판이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냈다.

* * *

“전무님께서, 아니 이원메세나재단에서 후원하고 있는 학생 중 한 명입니다. 안성시 인근의 서림예대에 올해 입학했고요.”

중간에 낀 홍연이 대신 대답하자 함께 있던 임직원들의 질문이 와르르 쏟아졌다.

“아, 메세나재단. 그럼 최 실장도 알고 있었겠군그래. 미술 쪽? 무용인가?”

“미술 쪽으로 알고 있습니다.”

“호, 이렇게 어린 나이부터 후원이 들어가나? 등단 화가들만 해당하는 줄 알았지.”

식당 한구석에서 갑작스럽게 대화의 꽃이 피었다. 원래 이원은 식사 중에 말이 많은 편이 아니어서 임직원들과 식사를 할 경우 다들 조용히 먹고 일어나는 분위기였는데, 대학생 한 명이 끼어들자 갑자기 분위기가 발랄해졌다. 게다가 커다란 꽃다발과 케이크까지 들고 찾아왔으니 호기심이 모락모락 일 법도 했다.

홍연은 이 난데없는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쟤 대체 왜 온 거야? 용건도 없이, 연락도 없이! 후견 기간 끝난 지가 언젠데! 전무님이 ‘지나가다 들렀어요.’ 하면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나? 왜 이렇게 생각이 없지?

물론 전무님의 최근 행보가 이 아이에게 다소 삭막하게 느껴졌을 법도 했다. 후견 기간이 끝났다고 해서 갑자기 연락을 탁 끊어 버릴 거라고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뉴욕의 약혼녀에게 다녀오더니, 우연에게 연락은커녕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그렇게 자주 연락하고 수다를 떨어 대던 우연도 딱 연락을 끊었다. 세상 살벌하지 않은가.

혹시 약혼녀가 개인 후견 여학생에 대해 언짢은 말이라도 했던 걸까. 아니면 우연이와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전무님의 점잖은 성격에 저 철없는 아이와 싸웠을 리도 없고, ‘이원 아저씨’라면 입부터 벌쭉 벌어지는 우연이가 전무님 비위짱을 긁었을 리도 없고. 오리무중이었다.

“그런데 학생, 오늘 금요일 아냐? 학교는 어쩌고?”

“설마 수업 땡땡이치고 놀러 온 거야?”

“땡땡이 아니에요! 오늘 수업 없어요!”

우연은 저도 모르게 빽 소리를 높였다가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아저씨는 가타부타 반응도 없이 조용히 밥만 먹고 있었다. 물론 우연도 알고는 있다. 이렇게 직원들이 있는 곳에서는, 아저씨에게 평소처럼 격의 없이 행동하면 안 된다는 거. 사실 아저씨가 후견인을 맡고 있던 때에도 그렇게 사적으로 친해질 수 있는 관계는 아니었다. 하물며 지금은 재단에서 후원받는 수백 명 중 한 명일뿐인데.

아저씨도 그것을 감안한 듯, 적당히 건조하고 적당히 정중하게 행동했다. 말을 붙일 용기가 나지 않는다. 더욱이 얼굴과 목이 보일 듯 말 듯 불그레하게 변한 모습을 보니 더욱 조심스러웠다.

천만다행으로, 오늘 가이드를 맡아준 총무과 김선영 언니가 대신 나선다.

“‘진로와 취업’이라는 과목에서 희망 기업체 견학 활동을 해야 하는 게 있다네요. 그래서 입사하고 싶은 회사에 견학을 와 봤대요.”

경비 아저씨는 순진하게 그 말을 믿어 주었고, 바로 총무과에 연락을 넣었다. 회사에선 그런 막무가내 학생들을 몇 번 받아 본 듯, 학교의 협조 요청 공문은 추후에 받기로 하고, 견학 매뉴얼대로 총무과 직원을 한 명 붙여 회사를 안내하게 한 것이다.

망했다.

턴 게이트 안으로 들어오는 건 성공했지만, 그 이후의 사태는 그야말로 ‘망했다’였다. 우연은 한 시간째 끌려다니며 울며 겨자 먹기로 회사 견학을 해야 했다. 사내 식당에선 무료로 점심을 제공한다, 반찬이 뷔페식으로 일곱 가지나 나온다, 하던 김선영 언니는 단백질이 풍성한 일곱 가지 반찬을 진심으로 자랑스러워하는 눈치였지만 우연은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오호. 세경건설에 들어오고 싶어? 기특하네. 그런데 이쪽 일이 좀 험한데.”

“건축사 쪽인가? 건축사 되려면 수학도 잘해야 하는데? 학생 수학 잘하나?”

“미술 전공이라며? 혹시 산디 쪽으로도 생각이 있는 건가? 가구 인테리어 쪽?”

이원이 툭 끼어들었다.

“우연 학생은 순수 회화 쪽입니다. 하이퍼리얼리즘 회화 쪽으로…… 꽤 재능이 있어요. 건설이나 인테리어 쪽으로 입사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대놓고 찬물을 끼얹는 말에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우연은 풀이 죽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아저씨가 사실을 말한 건 맞지만, 그래도 이건 좀 너무했다. 선영 언니가 해맑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전무님 말씀이 맞아요. 우연 학생 그림 정말 잘 그려요. 아까 안내해 줘서 고맙다고 저한테 초상화 한 장 그려 주더라고요.”

김 주임이 이면지에 그려진 그림을 꺼내 들고 자랑을 시작했다. 가늘고 긴 눈썹과 선량한 눈웃음이 또렷하게 드러난 드로잉으로, 얼굴을 감싼 머리카락의 흐름까지만 남기고 턱선과 목은 그대로 날려 버린 극도로 간결한 형태였다.

하지만 모인 사람들은 그 매끈하고 율동적인 선만 보고도 이 화가 아가씨가 보통 실력이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 아래로 살짝 가라앉은 눈매만으로도 그림의 주인공이 김 주임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부드럽게 올라간 입매에선 따스한 분위기도 물씬 풍겼다.

호오. 주변의 시선이 한꺼번에 몰렸다. 김우종 차장의 걸걸한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학생, 나도 한 장만 그려 주면 안 될까?”

이원은 팔짱을 낀 채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구경했다.

식사는 진작 끝났지만 모인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날 줄 몰랐다. 우연은 김 주임이 준 이면지에 대고 부지런히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직접 그림 그리는 건 처음 보는구나.

우연은 그리는 속도가 빨랐다.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몇 초 정도 눈을 말똥말똥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모델을 관찰한 후, 이면지 위에 볼펜을―연필도 아니다.― 대면 그만이었다. 볼펜 끝이 한번 종이에 닿으면 중간에 떨어지는 일도 없이 주욱 미끄러지며 얼굴의 윤곽과 이목구비의 형태를 만들어 냈고, 2분도 안 되어서 그 사람의 특징이 딱 드러나는 초상화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게 짧은 시간에 사람의 특징을 기가 막히게도 잡아낸다. 김 차장의 심술궂은 주름이라든가, 정 부장의 깐족대고 촐랑대기 잘하는 입매라든가, 신 상무의 진중하고 과묵한 시선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림을 보면, 아, 저 사람에게 이런 특징이 있었지, 이런 성격이 있었지, 하고 불현듯 깨닫게 될 정도였다.

학예사 출신인 최 실장이 넋 빠진 눈으로 구경하는 것이 보인다. 구경하는 임직원들의 탄성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지나가던 직원들이 뭣도 모르고 고개를 들이밀다가 이원을 알아보고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도망치기도 했다.

선이 흐르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우연은 이미 무아지경에 빠진 듯, 주변 상황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림을 받아 든 김우종 차장이 감탄하며 외친다.

“전무님도 한 장 그려 달라 하시죠! 이거 보십쇼. 굉장합니다.”

“아닙니다. 됐습니다. 저는 먼저 회의실로 올라가 보겠습니다.”

이원은 우연의 그림을 개나 소나 받아 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더욱이 이면지 따위에.

이 감정은 우연이가 하트 모양으로 자신에게 인사를 했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했고, 불쾌한 이유를 알 수 없어 더 불쾌했다. 저 아이와 관련된 감정에는 이성이나 당위가 제대로 작용하지 않았다. 이원은 자신의 합당치 않은 반응에 제동을 걸어야 할 필요성을 점점 자주, 점점 강하게 느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레 우연에게 말했다.

“모처럼 예까지 견학 왔는데 중요한 회의가 안 끝나서 어쩔까요. 견학 마치면 차 보내 줄 테니 학교까지 편히 내려가요.”

멈칫, 달리던 선이 멈추더니 당황한 시선이 따라온다. 갑자기 되돌아온 존댓말에 놀란 걸까. 까만 눈이 천천히 실망으로 물든다. 이원은 우연이 지난번처럼 폭주하듯 자신을 몰아세울까 두려웠다.

“아저…… 전무님, 저, 저기.”

하지만 그녀는 눈을 찡그린 채 애써 웃어 보였다.

“이거 드시라고 사 왔는데……. 꽃다발도…….”

그러고 보니 의자에는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꽃다발이 있었다. 학교에서 꺾어 온 것이 분명한 수국과 해바라기였다.

이제 수국은 화려한 붉은 색으로 물들었고, 황금빛 해바라기는 그 위에서 그 이상으로 화려하고 강력한 존재감을 뿜고 있었다. 달리나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난해한 조합에, 화려한 색감까지 더해져, 그녀의 거대한 꽃다발이 주는 시각적인 자극은 충격에 가까웠다. 그렇다 보니 비닐도 포장도 없이 초록색과 노란색 가는 리본으로 심플하게 묶은 센스가 오히려 돋보였다.

꽃다발을 집어 들자 리본 꼬리에 매달린 작은 카드가 보였다. 이원은 남들이 그것을 볼까 하여 한 손으로 감싸 쥐고 빠르게 읽었다.

[아저씨,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고맙습니다. ♡♡♡]

별 내용은 없었다. 잘 지낸다는 걸 보고하기 위해 꽃다발과 케이크를 들고 상경할 필요는 없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의 눈은 그 짧은 문장을 무슨 중요한 내용이라도 되는 것처럼 몇 번이나 읽고 있다. 글자가 달고 향긋하게 느껴진다. 입속으로 천천히, 곱씹어 가며 읽는다.

아저씨.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고맙습니다 ♡,♡,♡.

거슬린다.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쓰였을 게 분명한 저 얄궂은 기호 하나하나가 따귀를 후려치는 것 같다. 뱃속 깊은 곳에서 열기가 출렁거린다. 그날 밤에 사정없이 몰리고 흔들렸던 것처럼.

이원은 자신의 어설픈 꼬락서니를 보며, 적절한 거리감이 필요한 상황임을 다시 절감했다. 안전과 보호와 후원을 약속한 것과 별개로, 자신에게는 감정에 휩쓸릴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도 안 된다. 늦기 전에. 지금도 늦은 감이 있다.

지금 우연은 자신을 피하지 말고 봐 달라고 애걸하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에게 와 닿는 순간 명령이 되었다. 이원은 가늘게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우연 학생. ……회의 끝날 때까지 조금 기다려 줄 수 있겠어요?”

“……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최대한 사무적으로 말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면 섭섭할 테니, 가기 전에 사무실에 잠시 들르도록 해요.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근황도 좀 이야기해 주고. 케이크와 잘 어울리는 차도 있으니까.”

새까만 눈이 크게 벌어지더니, 이내 한 손으로 입을 막고 발을 동동거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눈물이 터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 우연은 여전히 감정을 감추지 못했고, 여전히 눈물이 많았다.

“김 주임, 견학 끝나는 대로 우연 학생을 내 사무실로 데려다주세요.”

그리고 이원은 그녀의 눈물에 속수무책이었다. 여전히.

회의가 속개되었다. 하지만 팽팽한 싸움은 점점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사업 타당성에 대한 근거와 반대 이유는 나올 만큼 나왔다. 사람들은 더 이상 강경하게 의견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견이 좁혀지지도 않았다. 모든 것은 늘 지나치게 불확실했고, 안개 속에서 도박을 감행해야 하는 건 여전히 이원 혼자였다.

도저히 집중할 수 없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도박에 가까운 모험이었다. 오전까지만 해도 포기 쪽으로 기울었다. 그런데 지금은 속에서 무언가 강하게 자신을 충동하고 있었다. 당분간 이 바닥에서 안전하게 돈 벌 길은 없어. 서서히 확실하게 망할래, 몇 단계 뛰어오를 가능성이 있는 쪽에 올인해 볼래.

누군가 깊은 마음속에 묶인 괴물의 고삐를 끊으려 충동질한다. 끊어질까 봐 신경이 곤두서면서도 고삐가 후련하게 끊어지길 기다리는 마음이 얽힌다. 확 망하면 또 어떻게 되는데? 적어도 미현이랑 결혼할 필요는 없으니 그건 좋은가?

미쳤다 한이원.

손끝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보인다. 회의실 앞의 창문에서 자꾸 뭔가가 오르락내리락한다. 작고 새까만 머리의 윗부분이 보였다 만다 한다. 창밖에서 폴짝, 폴짝 뛸 때마다 반질반질 빛나는 단발머리가 나풀, 나풀 팔락인다.

심하게 거슬린다. 너는 언제부터 거기 와 있었니. 벌써 견학이 끝났어? 이번 재개발 건, 지를까, 포기할까. 몇 년 동안 천문학적 자금을 쏟아부어야 할 일. 조합원들끼리의 난투극. 저 아이는 뭐가 저리 궁금할까. 아버지도, 다른 시공사들도 의욕적으로 추진하다가 포기하고 물러난 지역. 역시 우연이를 돌려보낼 걸 그랬나. 저 아이는 왜 여기까지 나를 찾아왔을까.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나는 그 말을 들어도 정말 괜찮을까?

팅, 머릿속에서 무엇이 끊어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의 시선이 화살처럼 와서 꽂힌다. 이럴 때면 늘 심장이 짓눌려 터질 것 같다.

아버지는 나를 잘못 보셨다. 나는 무력하고, 약해 빠졌고, 이런 것을 감당할 만큼 강건한 사람이 아니다.

아마도 이번 재개발은 총시공비만 2조 가까이 들 것이다. 불경기에 리스크가 너무 크다. 도박이다. 만약 실패한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회사는. 이곳에 매달린 사람들은. 아니, 그래도 만약 성공하면?

잭팟 아니면 파산.

등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냥 포기할까. 다른 경영자들은 이 압사당할 듯한 무게를 어떻게 버티는 걸까. 사람들은 나를 한심하다 할까. 무모하다 할까.

……밖에서 기다리는 저 아이는 이런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원은 저도 모르게 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연의 머리가 다시 톡 튀어 올랐다가 가라앉는다. 순간, 깊은 심연에서 무언가가 고삐를 끊고 펄떡 뛰어올랐다.

이원은 모인 사람을 둘러본 후 무겁게 입을 뗐다.

“계약합니다.”

회의장이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이내 술렁대는 소리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이원은 리스크 관리를 잘 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고 이런 도박 같은 모험을 감행하는 스타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다들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유를 묻는 사람도 없었다. 이원은 혼란한 속을 짓누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재무금융부 김 차장님과 주택사업부 정 부장님은 다다음 주까지 사업 계획서 초안과 PF 가이드라인을 잡아서 보고해 주십시오. 1급 보안 문서로 작성하시고, 외부에 기밀은 철저히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PPT 작성이나 공개 메일, 메신저에서 관련 내용을 언급하는 것은 금지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이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확한 회의 일정은 추후 개별 통지하겠습니다. 그때 다시 뵙도록 하지요.”

* * *

……굉장하다.

우연은 홀린 듯이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렇게 궁금했던 아저씨의 사무실이다. 안쪽에 있는 커다란 책상 위에는 ‘대표이사 전무 한이원 CEO HAN YI WON’이라 적힌 검은 명패가 놓여 있었다. 아저씨는 그 앞에서 우연이 가져온 수국과 해바라기를 항아리 모양의 화병에 하나씩 꽂고 있다.

진짜…… 진짜 대단하다.

아저씨의 사무실은 생각보다 컸다. 엄청 컸다. 책상도 크고 소파도 크고 천장도 높았다. 대리석 바닥은 먼지 하나 없이 깔끔했고, 벽에 대체 무슨 짓을 해 놓았는지 모르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했다.

의자 뒤의 벽은 커다란 유리로 되어 있었는데 높은 층에 있어서 그런지 국회 의사당과 방송국을 비롯한 많은 빌딩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멀찍이 보이는 다리도 눈에 익었다. 아저씨와 처음 만났던 생명의 다리, 마포 대교였다. 저 다리를 매일 보면서 일을 하신다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이곳에서의 아저씨는 지나치게 낯설었다. 상상처럼 담배를 꼬나물고 다리를 꼬고 앉아 계신 건 아니었지만, 밖에서 만났을 때처럼 다정하지도 않고 부드럽지도 않았다. 의례적인 웃음으로 직원들의 인사를 받고, 무표정한 얼굴로 긴 보고를 받고, 의견을 듣고, 미간을 깊이 찌푸린 채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최종 결정을 내렸다.

만화나 드라마에서 본 멋진 CEO들처럼 아저씨도 간지가 철철 흐르겠지, 막연히 상상했었는데, 실제로 보니 무서운 쪽에 가까웠다. 아니, 사실은 고통스러워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계약합니다.” 위엄 있고 단호한 목소리로 결론을 내릴 때, 아저씨는 어쩐지 도망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동안 바빠서 정신이 없었구나. 미안하다. 갑자기 뉴욕 출장을 다녀오는 바람에 일정이 고스란히 밀린 데다, 재개발 건으로 정신이 없었어. 거기에 동남아 해상 공항 수주 건도 걸려 있어서.”

“상담 치료는 계속 진행 중이라고 이야기 들었다. 치료 안 해도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도 절대 너 혼자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알았지?”

아저씨가 적절한 거리를 두며 대화를 이끌어 가는 방식은 자연스럽고 편안하면서도 품위가 있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소탈하고 진솔하고 호감이 간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우연이 느낀 것은 거리감이었다. 예전에 아저씨는 자신과 대화할 때 종종 평정을 잃었고, 이렇게 매끄럽게 대화를 주도하지도 않았다.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마음에 담은 말은 덮어 두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른 대화로 이끌어 가는 바람에, 우연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계속 갈팡질팡했다.

“아, 수국이 정말 색이 곱게 들었구나. 해바라기하고 같이 있으니 파격적이면서도 근사해. 어떻게 이걸 여기까지 가져올 생각을 했어.”

그는 우연이 가져온 꽃다발을 백자 항아리 모양의 화병에 하나하나 꽂았다. 대대로 물려받은 보물이나 되는 것처럼, 손길이 어찌나 섬세하고 조심스러운지 몰랐다. 긴 해바라기와 둥글게 뭉친 수국 덩어리와 백자 화병, 흰색과 붉은색과 황금색의 조화는 생각보다 아름다웠다.

“나중에 또 구경 오세요. 색이 점점 예뻐지고 있어요.”

“수국은 이 색깔이 절정이야. 사진으로 보내 주면 고맙게 받으마.”

식물에 대해 잘 아는 아저씨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대놓고 거절하는 것을 알아차린 우연은 다시 풀이 죽었다.

“그나저나 우연이 너, 아무한테나 함부로 그림 그려 주지 마라. 아까만 해도…….”

“네? 그러면 안 돼요? 전 아저씨가 좋아하실 줄 알고 더 열심히 그려 드린 건데요?”

목소리가 저절로 높아졌다. 아저씨가 당황한 목소리로 되묻는다.

“내가…… 왜?”

“그, 우 이사님? 우 상무님? 성일호텔인가 그쪽이요! 거기서 이원메세나재단이 돈을 펑펑 낭비한다고 맨날 그렇게 욕을 한다면서요.”

“그건 또 누가.”

“아, 홍빵, 아니 홍연 아저씨가 하신 얘긴 아니에요. 그 정도는 저도 알아요! 그래서 일부러 본때를 보여 준 거예요. 봐라, 이렇게! 실력이! 괜찮은! 학생을! 메세나재단에서! 후원하고 있다! 하고 보여 드리려고요!”

아저씨의 얼굴이 멍해졌다. 허, 참 내. 기가 막힌 듯, 짤막한 웃음이 터졌다.

“그래. 마음은 고맙다만 괜찮다. 어차피 미우면 무슨 짓을 해도 미워 보이는 게 사람 마음이라 별 소용은 없을 거야. 난 이제 거기서 칭찬을 하든 욕을 하든 별로 신경 쓰지 않아.”

“제가 신경 써요! 아저씨 욕하는 놈들은, 제가 죽여…… 가만 안 둬요.”

아저씨의 웃는 얼굴에 드디어 생기가 돈다.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우연은 그 차이를 검은색이 흰색으로 바뀌는 것처럼 또렷이 알아볼 수 있었다. 아저씨는 우연과의 거리를 조심스럽게 재조정하려 했던 모양인데 아무래도 실패한 듯했다.

“그래도 아깝지 않니. 그렇게 소중한 그림을 이면지에. 나한테는 아직 한 장도 안 그려 줬으면서 남한테는 개나 소…….”

갑자기 말이 멎었다. 아저씨기 아차 싶은 얼굴로 고개를 돌린다. 아저씨는 우연에게 점점 속마음을 잘 들켰다. 아니, 우연이 아저씨의 표정을 너무 잘 읽게 된 건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그려 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그냥 한 말이지. 나는 나중에 제대로 된 초상화를 받으면 되잖니.”

이젠 아저씨의 ‘괜찮다’는 말이 썩 신뢰가 가지 않았다. 아빠에게 얻어맞은 뺨을 비비며 “괜찮아, 별로 안 아파.” 하고 중얼대던 자신을 보는 기분이었다. 홍연 아저씨의 ‘전무님의 괜찮다는 말은 이제 신용도가 바닥입니다, 바닥.’ 하는 말이 실감이 되었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다 그려 주면서 아저씨만 안 드리는 건 말도 안 돼요. 아저씨는 이면지 말고 새 종이로, 저기 복사지 많은데 저걸로 해 드릴게요. 네?”

아저씨는 두 번 거절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권해 주길 기다리기라도 한 듯 바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굳이 그릴 거면 이거 써라. 복사지는 좀 그래.”

아저씨의 캐비닛에서 나온 것은 놀랍게도 4절 스케치북과 큼직한 필통이었다. 필통에는 2B, 4B, 6B, 8B 연필에 스틱 콩테와 목탄까지 나란히 들어 있었다. 템빨에 집착하는 건 뭔가를 배울 때 실력은 없으면서 의욕과 돈만 많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니, 아저씨가 예전에 그림을 열심히 배웠지만 전혀 소질이 없었다는 소문이 사실인 듯했다.

아저씨가 책상 앞에 어색하게 앉아 묻는다.

“그리려면 무슨 포즈를 취해야 하니? 가만히 있어야 하니?”

“아뇨, 조금 움직이셔도 괜찮아요. 제가 잘 잡아서 그릴게요.”

우연은 아저씨의 모습을 찬찬히 관찰하며 윤곽선을 잡기 시작했다. 사실 아저씨를 볼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우연은 열심히 바라보았다. 아저씨는 아무리 많이 봐도 질리지 않았다. 매번 새롭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진짜 초상화는 언제 그려 줄 거야?”

“나중에요. 그림을 잘 그리게 되면요.”

“지금도 완벽한 것 같은데.”

“아니에요. 색에 대해선 배울 게 정말 많아요. 1학년 때부터 안료 수업 듣고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처음에 우연은 아저씨 초상화를 최대한 빨리 그려서 빚을 갚고 싶었다. 이제는 그렇지 않다. 어느 순간부터 우연은 계약 이행을 자꾸 미루고 싶어졌다. 다섯 번째 그림은 최대한 늦게, 늦게, 아주 늦게 드리고 싶었다. 아저씨와 자신 사이에 연결 고리를 남겨 두고 싶었다. 연결 고리는 많을수록 좋다. 그게 빚이라도.

“그래, 당장 기말고사가 코앞인데, 서울까지 무슨 일로 행차하셨는지 물어도 될까?”

“기말고사, 그까짓 거!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 있는데 그게 문젠가요?”

“아하? 그 엄청 중요한 일이 뭔데?”

“제가 주말마다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았겠어요? 벌써 한 달이 훨씬 넘지 않았겠어요?”

“그렇지.”

“그래서 제가 첫 수입을 몽땅 털어서 아저씨에게 한턱 쏘려고 상경했다 이거죠. 오늘 저녁에 비싼 호텔 뷔페 출격! 어떠세요?”

푸핫, 아저씨의 입에서 갑자기 웃음이 터진다.

“아니, 한 달 알바비를 다 털어서 나한테 밥을 사 주면 어떡해.”

“왜요! 그러려고 알바하는 건데요!”

아저씨의 눈이 살짝 커지는 것이 보인다. 짙고 아름다운 갈색 눈동자가 낯선 감정을 머금고 흔들린다. 하지만 아저씨는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미안해서 어쩌지, 내가 오늘 선약이 있어. 중요한 약속이라 어렵겠는데.”

우연은 풀이 죽었지만 일단 한 걸음 물러섰다. 아저씨처럼 바쁜 사람과 약속도 없이 만나서 바로 식사를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늘은 어차피 아저씨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럼 내일 저녁은 어떠세요? 제가 다시 올라올게요. 알바 때문에 어차피 올라오니까…….”

“미안해. 내일도 약속이 있어.”

“그, 그럼, 어, 일요일은…….”

“그게, 우연아, 내가 주말 내내 중요한 약속이 있어. 미안.”

우연은 아저씨의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이건 너무 야멸차고 선명한 거절이었다. 성질대로라면 “관둬요, 그럼.” 하고 일어날 거 같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몸도 움직이지 않는다. 눈시울이 뻐근한데 이상하게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다.

“우연아. 다음 주나 다다음 주는 꼭 시간을 낼게. 아, 곧 방학이겠구나. 그때로 미루면 안 될까?”

우연은 다시 얼빠진 얼굴로 아저씨를 올려다보았다. ‘마음으로만 받겠다, 먹은 것으로 하겠다.’ 하는 말이 나올 줄 알았더니 다음 주에 만나잔다. 와, 저 점잖아 보이는 아저씨에게 이런 밀당 본능이 있을 줄이야. 지옥과 천국을 오락가락하는 것 같다.

똑똑.

홍연 아저씨가 접시에 곱게 담긴 케이크를 두 조각 가지고 들어와서 우연이 그림을 그리는 탁자와 아저씨의 책상 위에 얌전히 내려놓고는 물러났다.

“딸기 무스 사 왔구나. 네가 좋아하는 거니?”

“네. 마약이 따로 없어요. 꿀꿀할 때 먹으면 얼마나 행복해지는지 몰라요.”

사실 우연은 단 것은 허발하고 좋아했지만 새콤한 맛은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저씨가 딸기 케이크를 선물한 후, 그것은 자신의 입맛 따위를 물리치고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케이크의 기준이 되어 버렸다.

달그락. 달그락.

아저씨는 케이크를 한 입 머금고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눈썹이 가만히 찌푸려진다. 왜 저러시지? 원래 케이크를 안 좋아하시나? 하지만 눈썹을 찌푸리는 그 모습마저도 너무 아름답고 우아해서, 우연은 나라를 말아먹었다는 어떤 미인에게 홀린 사나이가 된 듯했다.

길고 짙은 속눈썹이 아래로 천천히 내려가 갈색 눈동자를 반쯤 덮었다. 깜박, 깜박깜박, 그는 케이크를 입에 머금고 눈을 내리깐 채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우연은 연필을 잠시 멈췄다.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아저씨는 케이크를 아주 집중해서, 천천히, 조심스럽게 먹었다. 지난번에 기숙사 앞에서 드실 때도 저렇게 먹었다.

“아저씨, ……맛있어요?”

아저씨가 고개를 든다. 케이크 조각을 입에 머금고 있는 표정이 기묘했다.

“……달구나.”

역시, 단 음식은 안 좋아하시나?

“에이, 그럼 케이크가 달지, 짜요?”

“음, 송 여사님이 만들어 준 것보다 단맛이 훨씬 강하지만 그래도 새콤하고 딸기 맛이 나. ……그래. 딸기 무스니까, 당연하겠구나.”

아저씨는 낯선 얼굴로 중얼거렸다. 우연은 딸기 케이크에서 딸기 맛이 나는 것을 신기해하는 아저씨가 더 신기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정상적이지 않은 구석이 있다더니, 그 말이 아저씨에게도 해당하는 것 같다.

우연이 열 장이 넘는 드로잉을 남기는 동안, 아저씨는 소리도 없이 케이크 두 쪽을 다 먹었고, 홍연 아저씨가 새로 가져다준 케이크도 거절하지 않고 받는다. 케이크를 먹기 위해 차도 두 잔이나 새로 내 달라고 한다. 홍연 아저씨도 놀란 눈치인 걸 보면, 아저씨가 이렇게 케이크를 많이 먹는 건 상당히 드문 일인 듯했다.

“이렇게 잘 드실 줄 알았으면 두 개 사 올 걸 그랬어요. 아저씨, 케이크 좋아하세요?”

이게 무슨 어려운 질문인지, 아저씨는 한참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때는 정말 좋아했던 것 같아. 그래서 자주 먹지 않으려고 노력했지.”

아니 자기가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를 한참 생각씩이나 해야 안단 말인가? 그리고, 좋아하는데 왜 안 먹으려고 노력했지? 변태인가? 왜 그런 해괴한 짓을? 우연은 이럴 때마다 아저씨가 자신과 완전히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왜요? 좋아하면 자주 먹으려고 노력해야죠.”

“쾌락에도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이 적용되니 절제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어떻게 사람이 매번 자기 좋은 일만 하고 살겠어.”

무슨 말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우연은, 손을 멈추고 진지하게 조언해 주었다.

“아저씨, 한계 나발의 법칙이 뭔지는 모르지만요, 케이크를 못 먹게 만드는 법칙이라면 악마가 만든 게 틀림없어요. 인간이 행복할 기회를 뺏어 버리잖아요. 성수 사다가 케이크 주변에 촥촥 뿌려서 악마를 물리친 다음에 마음껏 드세요. 그게 하느님께서 원하는 길일 거예요.”

푸웃, 아저씨가 케이크를 입에 문 채 웃음을 터뜨렸다. 우연은 아저씨가 너무나 안타까워 손까지 저어 가며 열심히 설득했다.

“생각해 보세요. 좋아하는 일만 하면서 살기에도 시간은 모자라잖아요! 80까지 어찌어찌 산다 쳐도, 아저씨는 이제 48년밖에 안 남았어요. 세상에! 남은 인생 겨우 48년에, 시간을 아껴 아껴 좋아하는 케이크만 골라 먹어도 모자랄 판에 참긴 왜 참아요! 저요? 아이참! 아저씨가 남 걱정하실 때예요? 저는 100년은 남아 있을 거예요. 여자는 남자보다 20년은 더 살고, 제가 아저씨보다 12년이나 더 젊고, 제가 죽을 때쯤 되면 평균 수명은 120살로 늘어나 있을 거니까요. 아이, 아저씨! 그렇게 웃지 말고 위기의식 좀 느끼시라니까요!”

“진우연. 너, 정말…….”

하지만 아저씨는 반박하지 못하고, 한참을 웃더니 두 손을 들었다.

“알았다, 알았어. 좋아하는 일만 하면서 살 거면 너도 케이크 좀 더 먹지 그래?”

“아뇨. 전 위험해서 안 돼요.”

“아니, 케이크가 왜? 혈관이 안 좋아? 심장병이라도 있어?”

아저씨의 생각은 여전히, 너무나 중년다웠다. 케이크와 혈관과 심장병이라니. 이 얼마나 아방가르드한 조합이란 말인가. 하지만 우연은 그 조합마저 중후하고 참신하게 느껴졌다. 이것도 병이라면 병이었다.

“피부가 위험하죠. 케이크 하루 두 쪽 이상 먹으면 여드름 폭발하거든요. 볼케이노 백만 개가 얼굴에 부바바바바!”

아저씨가 기가 막힌 얼굴로 웃기 시작했다.

“말이 앞뒤가 다르잖아!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산다며! 좋아하는 케이크에 비하면 여드름이 문제야?”

“문제죠. 아무리 케이크를 사랑해도 여드름 짜는 느낌까지 사랑할 순 없죠. 으, 구려.”

아저씨는 살짝 곤란한 얼굴이 되더니 목소리를 낮춰서 대답했다.

“그래도 음, 어…… 뭔가 시원한 느낌은 있지 않아?”

어? 아저씨도 여드름을 짜 보긴 했을까? 그 구리고도 시원한 느낌을 알까? 갸웃하던 우연은, 그렇게 생각하던 자신에게 다시 충격을 받았다. 선생님은 화장실도 안 간다고 믿는 유치원생도 아니고, 이게 무슨 멍청한 생각일까. 아저씨라고 무방광, 무땀샘 생물일 리도 없는데. 그래도 우연의 마음속에 있는 한이원은 여전히 천사와 인간의 중간쯤 있는 존재였다.

“물론 시원할 때도 있죠. 노랗게 잘 익은 다음에 짰는데 황금빛 왕건이가 탁 튀어나오면, 그 알싸하면서도 후련한 느낌이 죽이죠. 피가 나오면 통쾌하고, 피딱지가 떨어진 다음에 쏙 들어간 분화구를 보면 완전 뿌듯하고 보람차죠.”

“음…….”

“하지만, 실패의 고통이 너무 크잖아요. 힘껏 눌렀는데 밖으로 터지는 대신 속에서 뭉그러지면!”

으으, 아저씨가 눈을 확 찌푸리고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친다. 역시, 아저씨도 해 본 게 틀림없구나. 우연은 알 수 없는 동질감을 느끼며 엄숙하게 결론을 내렸다.

“그런 게 백만 개쯤 덕지덕지 얼굴에 솟아난다 생각해 보세요. 고작 케이크를 두 쪽 먹었다는 죗값으로는 너무 잔혹하잖아요.”

아하, 하하하. 아저씨는 다시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어?”

분홍색 무스 크림을 입술에 묻힌 채 파안대소하는 아저씨 얼굴이 몹시 낯설었다. 아저씨가 자기 손으로 얼굴에 크림을 묻혔을 때 잠깐 느꼈던 이질적인 느낌이 다시 살아난다.

“왜? 뭐 묻었니? 이런.”

입술 끝을 만져 본 아저씨가 손가락에 묻은 크림을 보고 나직하게 혀를 찬다. 아저씨는 멀리 놓인 티슈를 빼는 대신 혀로 얼른 손가락을 핥고, 입술 주변에 묻은 케이크도 핥았다.

띵, 다시 머리가 울린다.

우연은 아저씨의 붉은 혀가, 희고 고른 이 사이를 빠져나와 입술 위로 부드럽게, 소리 없이 미끄러지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두 번, 세 번, 그리고 한 번 더. 혀가 지나간 아래로 붉고 윤기 흐르는 입술이 드러나는 순간, 우연은 그만 숨이 턱 막혔다.

선명하고 날카로운 어떤 색이 아저씨 주변에서 확 번진다. 아니, 폭발한다. 환각은 아니고 우연이 여러 가지 색의 조합을 빠르게 상상하며 채워 넣는 것이지만, 그 속도가 너무 빨라 의식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고, 그 이미지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선명했다.

아저씨하고 분홍색 수국이 이렇게 잘 어울렸나?

……전에는 가장 안 어울리는 색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시간이 서서히 멎어 가는 듯, 아저씨의 움직임도 슬로비디오처럼 느껴진다.

찰칵.

장면이 완전히 정지한다. 깜박, 깜박깜박. 몇 번 눈을 깜박이자 자연의 색을 뛰어넘은,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띠게 된 그 장면이 다시 움직인다. 아저씨가 웃는다, 입술을 움직여 무슨 말을 한다, 손으로 입가를 매만진다, 다리를 꼰다, 옆으로 돌아앉아 꽃을 본다, 고개를 살짝 수그리고 부드럽게 웃는다.

찰칵, 찰칵, 찰칵.

눈을 반쯤 내리깐 아저씨가 느릿하게 팔을 움직여 티슈를 꺼내 손가락과 입술을 닦는다. 팔과 손, 손가락과 입술로 흘러가는 움직임은 이럴 때조차 지독하게 우아하고 품위 있다.

그 형태와 색의 흐름이 너무 아름다워서 우연은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기만 했다. 기억해. 정확하게, 자세하게. 몸의 형태, 움직임, 시선, 살짝 내리깐 눈꺼풀과 부드럽게 굴곡지며 뻗어 내려간 긴 속눈썹, 가볍게 말려 올라간 입술선, 크림이 흩어질까 신경 쓰느라 미미하게 찌푸린 미간, 이마 위로 몇 가닥 흘러내린 고집스럽고 빳빳해 보이는 머리카락, 이마와 머리 사이의 경계에서 잘게 흩어진 솜털 같은 머리칼, 그 사이에 스며 있는 작은 땀방울. 아저씨를 나타내고 있는 모든 요소를 하나도 빼놓지 말고!

커다란 창에서 들어온 황금빛 햇살이 아저씨의 얼굴로 내려앉는다. 빛이 정면으로 맞닿은 부분은 반짝반짝 빛이 감돌고, 굴곡 뒤로 이어진 그늘 부분에선 황홀한 어둠이 자리 잡는다. 흑과 백의 강렬한 콘트라스트가 선이 굵고 단정한 이목에서 근사한 조화를 이루었다. 아, 미칠 것 같다. 숨이 막히고 목이 졸린다.

그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있는 요소는 불가해한 영역에 속해 있다. 우연은 그 아름다움의 원천을 분석할 수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장면 자체를 최대한 충실하게 기억해 두는 것뿐이었다. 찰칵, 찰칵, 찰칵. 머릿속에서 카메라 플래시 터지는 소리가 이어진다. 아니, 사실 이건 플래시 소리가 아니라 심장이 덜그럭대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우연은 스케치북을 덮고는 멍하니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연필로 그릴 수 있는 장면이 아니다. 색이 필요했다. 특히 그 낯설고 선명한 색이 아저씨 주변으로 폭발하듯 밀려오던 그 느낌은, 흑백으로 도저히 표현될 것 같지 않다.

아저씨를 그려야 한다. 제대로 색깔을 갖춘 그림으로. 이렇게 폭발하듯 밀려오는 색으로.

나는 왜 아저씨에게 이 색을 느꼈을까?

이 색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알 수 없다. 그저 기분이 이상하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지워진 것 같다. 식은땀이 나고, 속이 토할 것처럼 울렁거린다. 우연아? 아저씨가 급하게 일어나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너 지금 좀 불편해 보인다. 괜찮니?”

“아, 네, 괜찮아요. 괜찮…….”

아저씨의 무거운 시선이 따라온다. 우연은 스케치북을 내밀고 필사적으로 웃어 보였다.

“많이 그렸어요.”

아저씨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스케치북을 열었다. 콩테와 6B 연필로 그린 그림은 아까 이면지에 그린 볼펜 그림들과 달리 반역광의 명암이 들어가 깊이감이 있고 양감이 풍성했다. 스케치북이 한 장씩 천천히 넘어간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는데, 시간은 느릿느릿 흘렀다. 목이 조여드는 것처럼 긴장된다.

“대단하구나, 그 짧은 시간에.”

“……맘에 드세요?”

“당연하지. 맘에 드는 정도가 아니라 감탄스러워서 말이 안 나오는구나. 일단 정착액을 좀 뿌려 두자.”

캐비닛에서 픽서티브를 꺼내 온 아저씨는 한 장 한 장 그림을 넘기며 칙칙 뿌렸다. 이어지는 아저씨의 목소리에는 한숨이 한 자락 배어 있었다.

“대단하구나. 나도 그림을 꽤 열심히 배웠는데, 이건 비교 자체가 안 되네. 뭔가 불공평해.”

“아니에요. 공평해요. 제 인생에서 수학은 구구단이 끝이고, 영어는 알파벳이 끝이거든요. 하지만 아저씨는 영어도 잘하시고, 회계사 자격증도 있으시다면서요.”

“그게 무슨 상관이니. 이제 휴대 전화에 계산기, 번역기 다 있는데.”

“하지만 외국에 서류 보낼 때, 번역기 돌리는 사람을 시키진 않으실 거잖아요.”

“음. 그건 그래.”

“하긴. 세상이 불공평한 건 맞죠. 아저씨 보면 몰빵도 이런 몰빵이 없다니까요.”

우연은 열이 오르는 눈으로 아저씨를 올려다보았다. 횡설수설, 입에서 무슨 말이 나가는지 모르겠다. 아저씨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는다.

“내가 무슨 몰빵이야.”

“아이참, 아저씨. 인정할 건 좀 인정하세요. 하느님은 세상에 태어날 모든 아기들에게 복을 골고루 나눠 주려다가요, 아저씨 앞에서 실수로 축복 주머니를 쫄딱 쏟아 버린 거라고요.”

“뭐?”

“그래서 당황한 하느님이 급하게 뭔가를 뺏어 오려고 했는데, 고작 손에 잡힌 게 그림 그리는 재능이었다 이거죠. 아저씨는 뭔가를 더 뺏기기 전에 날름 도망친 거고요. 아저씨는 분명 다른 아기들보다 한두 달 먼저 태어났을 거예요. 그렇죠?”

우연이 열에 들떠서 한참 떠들었다. 아저씨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한참 웃다가 우연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천천히 웃음을 멈췄다.

“잠깐만.”

아저씨의 손이 쭉 뻗어 나와 이마를 짚는다. 우연은 저도 모르게 크게 소스라쳤다.

“너 열이 있구나. 어쩐지 좀 이상하다 싶더니만. 언제부터 이랬어?”

아저씨는 인터폰을 들더니 바로 최 실장 아저씨를 불렀다.

“정 박사님 일정이 어떻게 되는지 확인 좀 해 주세요. 우연이가 열이 있네요. 여기서 얼른 진료받고 약이라도 지어서 보내야겠어요.”

안 돼. 우연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 기숙사로 가면 안 된다. 아저씨의 그림을 그려야 한다. 조금 아까 보았던 그 눈부신 색깔, 이 기이한 느낌이 사라지기 전에, 지금 당장.

하지만 기숙사에는 스케치북과 4절 켄트지 나부랭이 말고는 그릴 만한 것이 없다. 더구나, 혜진이가 있으면 방에서 작업도 제대로 못 할 것이 뻔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저씨의 손이 닿았던 이마가 불에 덴 듯이 화끈거린다. 커피를 백 잔쯤 마신 것처럼 신경이 예민해진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몽롱하고 화닥화닥 하고 정신이 없다. 우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 죄송한데, 자, 장학관 빈방에서 며칠만 자면 안 될까요?”

“……음, 그건 곤란할 거야. 장학관은 학년 바뀌는 2월 말고는 방이 다 차 있어.”

“저, 그럼 아저씨 집에서 며칠만 재워 주시면 안 돼요?”

아저씨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눈을 크게 뜨고 내려다보는 아저씨의 시선에는 당혹감과 의아함이 가득했다. 몽롱한 생각을 애써 다잡기도 전에 아저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갑자기 내 집에? 몸이 많이 안 좋으니?”

우연은 순간 자신이 얼토당토않은 부탁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기숙사 통금에 걸린 친구들 중 인터폰으로 사감님을 호출해 벌점을 먹는 대신, 자취하는 친구 집으로 가서 하룻밤을 자고 오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친구 집에 가서 밤새 공동 과제를 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저씨는 친구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굉장히 어려워하는 위치의 사람이다. 특히 지금처럼 조심스러운 상황에서, 이런 요상한 부탁을 해 버리다니.

물론 강력한 희망 사항이긴 했다. 아저씨네 집에 초대받아 놀러 가면 얼마나 좋을까. 행복해서 미쳐 버리겠지. 하지만 뇌가 있다면, 이런 희망 사항은 상상 속에서만 놔둬야 하는 거 아니냐고.

“……미안하지만 우리 집은 어렵겠구나. 이번 주말에 행사도 있고 집에 중요한 손님도 오셔서. 차라리 입원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아저씨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하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저, 입……원할 정도는 아니에요.”

아저씨의 침묵이 무섭게 느껴진다. 대체 날 얼마나 이상한 아이로 생각하실까,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은데, 다시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린다.

“최 실장님, 호텔에 우연이가 쉴 만한 방 하나 잡아 주시고, 오늘 안으로 정 박사님 예약 좀 잡아 주세요.”

우연은 입을 멍청하게 벌린 채 중얼거렸다.

“호……텔이요?”

“그래. 학교 내려가기도 힘들 것 같으면, 지금 호텔로 들어가서 쉬어. 주말에 기숙사에서 열이라도 나면 병원 가기도 힘들 거 아니니. 조용한 방으로 잡아 놓으라 할 테니 며칠 푹 쉬다가 월요일 아침에 편히 내려가.”

난데없는 결론에 우연은 얼떨떨했다. 아저씨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덧붙인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홍연은 대표이사실에서 우연이 비틀비틀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보고 당황했다. 들어갈 때는 멀쩡했는데, 지금은 벌겋게 열이 올라 있었다. 한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왜 갑자기?

한 전무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케이크를 좋아하지 않았다. 과일을 제외하면 단 것 자체를 거의 먹지 않았다. 아니, 먹는 것 자체에 흥미가 없었다. 본가 고용인들 사이에서는, 그가 극도의 스트레스로 불면증을 얻으면서 미각도 거의 잃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인생의 즐거움을 대부분 상실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뭔가 이상했다. 우연의 생일 때 송 여사에게 생딸기가 듬뿍 든 케이크를 만들어 달라고 하더니만, 다음날부터 매일 똑같은 케이크를 구워 달라 부탁하기 시작했다. 그래 놓고는 케이크를 대령하면 딱 한 입 먹고는 물리는 짓을 되풀이했다. 잠시 기대에 찼다가 씁쓸하게 웃는 패턴도 똑같았다. 그의 이상 행동은 일하는 도우미들과 홍연이 일주일 내내 딸기 무스케이크를 그야말로 물리게 먹은 후에야 간신히 멈췄다.

그러더니 오늘은 우연이 사 온 케이크를 세 조각이나 먹어 치운다. 저 정도 먹으면 토할 것 같을 텐데? 걱정하고 있으니 이젠 ‘우연이가 임원들에게 그려 주었던 그림을 모조리 수거해 오세요.’라는 말도 안 되는 문자까지 보낸다.

아니, 모델 본인에게 나눠 준 초상화를 무슨 핑계로 다시 뺏어 오느냐고.

물론 ‘후원 예술가의 작품 관리를 위해 재단에서 그림 회수를 요청해 왔다.’라는 기발하다 못해 황당한 핑계를 생각해 낸 자신이 천재 같긴 했지만, 그래도 그들의 투덜거림은 고스란히 홍연의 몫이었다.

“홍연 아저씨, 부탁이 있는데요.”

열이 올라 뺨이 벌겋게 물든 우연이 눈을 기이하게 번뜩이며 속삭인다.

“캔버스 좀 구해 주세요.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그림? 호텔에서? 몸 안 좋다면서.”

“아니요. 안 좋지 않아요. 좋아요. 아주 좋아요. 열흘간 밤샘해도 될 지경이에요.”

“아니 그러면 왜…….”

“그리고 그림 도구하고 아크릴 물감하고 형광 물감 세트도요. 반짝거리고 펄이 잔뜩 든 것이면 더 좋아요. 의사 선생님은 안 오셔도 돼요. 홍연 아저씨도 안 오셔도 돼요. 아무도 오지 마세요. 하나도 안 아파요.”

우연은 홍연의 이야기는 듣지도 않고 흥분한 상태로 계속 중얼거린다.

“아저씨 초상화를 그릴 거예요. 빨리 그려야 해요. 잊어버리기 전에. 그러니까.”

홍연은 그녀가 이상한 열기에 휘말린 것을 깨달았다. 끝나기 전엔 아저씨에게 절대 얘기하지 마세요.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는 아예 마약에 취한 것 같았다.

전무님께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홍연은 주춤거렸다. 빛나는 작품에는 재능과 운과 타이밍이 필요하다. 방해하면 안 된다. 하늘이 내린 천재가 그린, 제대로 된 초상화가 보고 싶었다. 홍연은 공범자가 된 기분으로 조심스레 물었다.

“캔버스는 몇 호짜리로?”

“큰 거요, 아주 큰 거, 제 키보다도 큰 거.”

우연이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 * *

100호 캔버스는 상상보다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했다. 우연보다 키가 한 뼘은 컸고 폭도 넓었다. 일곱 종류의 아크릴용 붓과 두 종류의 백붓, 그중 하나는 폭이 한 뼘이 넘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 목탄, 연필, 용량이 큰 고급 아크릴 물감 두 세트와 형광빛 펄을 한껏 머금은 보디 페인팅용 물감들, 페이퍼 팔레트, 말하지도 않은 건조 지연제와 매트 바니시, 글로스 바니시까지 빠짐없이 사 온 걸 보니 홍연 아저씨가 학예사 출신이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아저씨가 잡아 주라고 했다는 호텔 방은 생각보다 넓고 고급스러웠다. 침실은 하나였지만 거실이 널찍하고 한강과 빌딩 숲이 환하게 내려다보였다. 하지만 우연은 그 풍경을 즐길 생각도 들지 않았고, 스위트룸이란 이런 곳이구나 감탄할 새도 없었다.

“겁도 없지, 진우연.”

새하얗고 거대한 캔버스를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오싹 소름이 돋았다.

우연은 밑칠이 된 하얀 바탕 위에 아까 훔쳐 낸 장면을 떠올렸다. 순간 발가락이 곱아들면서 찌릿한 감각이 등줄기를 쫙 긁어내렸다.

동시에, 선명한 색깔이 폭발하듯 터져 나와 캔버스를 확 뒤덮는다.

연필을 쥔 오른손을 크게 휘둘렀다. 캔버스가 너무 커서 벽에 기대 놓고 작업을 해야 했다. 100호 크기가 익숙하지 않아 약간 애를 먹기는 했지만, 밑그림은 순조롭게 진척되었다.

밑그림을 완성하니, 이젠 그 속에 갇혀 있는 색들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아우성이다. 페이퍼 팔레트 가장자리에 몇 가지 물감이 차근차근 얹히기 시작했다. 우연은 수채나 유화보다 아크릴을 훨씬 좋아했는데, 빨리 마르고 안정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빨리 굳는 아크릴 물감에는 찢어 쓰고 버리는 페이퍼 팔레트가 편했다.

서둘러야 했다. 우연은 채색 속도가 몹시 빠른 편이었지만 아크릴이 굳는 속도도 빨랐고, 무엇보다 해가 있을 때 최대한 많은 작업을 해 두어야 했다. 인공광 아래서의 색감은 자연광에서 본 색감과 달라 보일 때가 있었다.

침실에서 시간을 알리는 벨 소리가 몇 번 들리는 동안, 빛의 각도가 살금살금 바뀌나 싶더니 어느새 사방이 어둑어둑해진다. 우연은 불이란 불은 모조리 켰다. 낮처럼 환해졌고, 그때부터 시간은 흘러가는 줄 모르게 흘러갔다.

아저씨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남성적이고 굵직한 턱의 윤곽에 섬세하고 매끈하게 다듬어진 이목의 선, 살짝 흐트러진 머리카락, 길고 짙은 속눈썹, 홍채 위로 번져 가는 깊고 풍성한 세피아, 결이 곱고 색이 맑은 입술은 눈이 아리도록 붉다. 말갛고 깨끗한 피부가 우연의 손이 닿는 곳마다 화려한 꽃처럼 피어오른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아저씨는 눈부시게 빛났다. 초여름의 노란 햇빛이 머리카락에서 자잘하게 반짝였고, 반역광 상태의 뚜렷한 콘트라스트까지 드리워져 신비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케이크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조차 한참 고민하던 아저씨는 분홍색 무스케이크를 세 쪽이나 소리 없이 먹어 버렸다. 맑고 붉은 입술에 묻은 무스케이크, 그 입술 가에서 뭉개졌던 짙은 분홍색 크림 덩어리는 아저씨의 뺨으로 죽 그어 내려오던 하얀 크림만큼이나 강렬했다.

그 순간 아저씨가 만들어 냈던 순백의 선정성은 소름 끼치게 저릿했는데, 나는 그때 그것을 몰랐다.

혹시 그때 아저씨도, 얼굴에 크림을 문지른 나를 보며 비슷한 생각을 하셨을까.

아저씨의 주변으로 항아리를 벗어난 거대한 수국 뭉치와 해바라기가 침략을 시작한다. 맑고 선정적인 분홍색이 캔버스를 점령한다. 아저씨와 너무나 어울리지 않을 것 같던 이질적이고 요란한 그 색깔은 입가의 크림을 핥아 내던 붉은 혀와 마주치는 순간 무섭도록 싱싱해졌다. 딸깍, 아저씨와 색의 연결 고리가 만들어졌다. 살짝 말려 올라가는 혀끝의 하이라이트를 매끈하게 찍어 넣으며, 우연은 아랫배가 저릿한 느낌에 몸서리를 쳤다.

이것이 우연이 아저씨에게서 발견한 색이었다. 다른 사람은 결코 발견하지 못했을, 아저씨의 진짜 색깔.

그림을 그리는 동안 우연은 무엇을 먹었는지 무엇을 마셨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취한 듯, 몽롱한 듯, 홀린 듯, 혹은 극도로 긴장한 듯한 이상한 느낌이었다. 친구들의 문자가 거슬려서 전화기를 꺼 버렸고, 눈앞이 핑그르르 돌거나 목이 졸아붙을 즈음에야 냉장고와 찬장에서 뭔가를 꺼내 먹었다. 방광이 터질 것 같으면 그제야 화장실에 갔다. 신이라도 지핀 것처럼 주변에 대해 감각이 없었다. 몸의 모든 감각은 오로지 눈앞의 그림에만 집중되었다.

DND(Do Not Disturb, 방해하지 마시오) 팻말을 걸어 둔 덕인지 사흘 동안 방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연은 1분도 쉬지 않고 계속 그림을 그렸다. 금요일 오후부터 월요일 새벽까지, 꼬박 61시간이었다.

“……아저씨, 지금 뭐 하세요?”

우연은 비틀비틀 바닥에 주저앉아 막 완성된 그림을 빤히 바라보았다.

눈앞에는 아저씨가 앉아 있다. 한 손에는 포크를 들고, 한 손으로는 턱을 괸 채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다. 핫초콜릿을 머금은 듯한 눈은 부드럽고 달콤한 웃음을 담고 있다. 비스듬히 돌려진 고개, 얇고 단정한 입술을 살짝 벌리고, 입술에 묻은 분홍색 무스 크림을 붉고 탄력 있는 혀로 핥고 있는 아저씨는 실제보다 더욱 생생했다.

그리고 그 주변을 형광빛이 감도는 붉은 수국과 해바라기가 감싸고 있다.

<붉은 수국과 분홍색 딸기 무스케이크>

제목이 아주 그럴듯하다. 케이크 따위는 보이지 않지만, 달콤한 존재감은 그 큰 화면을 꽉 채우고 있었다. 우연은 다시 물었다.

“아저씨, 딸기 케이크에서 딸기 맛이 나는 게 그렇게 신기하세요?”

…….

“그 케이크, 제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한다는 거 알고 계세요?”

…….

“제가 원래 딸기 안 좋아했던 건 아세요? 그런데 이제 세상에서 딸기를 제일 좋아하게 된 건 아세요?”

아저씨는 지금 우연에게 대답하고 있다. 뭐라고 하는지는 들리지 않지만. 아, 아니, 들리는 것도 같다. 저 붉고 매끄러운 입술이 달싹대며 움직이고, 그 사이에서 무슨 말인가 흘러나오는 것 같다. 우연은 몽롱한 듯, 취한 듯, 그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여드름 짜 본 적 있으시죠? 짜다 실패하면 느낌이 어땠어요? 아저씨는 정말 좋아하는 음식이 뭔가요? 시래기, 샐러드, 풀떼기, 보리굴비, 현미 콩밥, 잡곡밥 같은 거, 정말 좋아해서 드시는 건 아니죠?”

우연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속으로는 울고 싶었다. 아저씨에게 말을 걸 때마다 뭔가가 온몸을 할퀴는 것 같은데 그 느낌이 너무 낯설어서 무서웠다.

그림 속에서의 아저씨는 형광빛이 감도는 분홍색에 둘러싸여 있었다. 저 투명한 입술 가에 머물러 있는 딸기 무스 크림의 색, 그것을 핥고 있는 혀의 불그레한 색, 막 절정기를 맞이한 수국, 자신의 색을 잃어버린 해바라기, 한없이 달콤하고 나른하며 끈적한 오페라, 마젠타, 퍼머넌트 로즈, 크림슨. 요란하고, 천하고, 도발적이고, 가볍고, 불편한 온갖 색깔들.

아저씨와 정말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점잖고 무거운 양복은 윤곽선과 무게를 잃었고, 거대한 화폭에서 드러나는 것은 아저씨의 얼굴과 목, 손, 포크, 뱀처럼 목을 휘감았다 뚝 떨어지는 검푸른 넥타이, 그리고 그를 에워싸고 아우성치는 꽃의 물결이었다. 청순하고 가련하던 순백의 수국은 어느새 요부처럼 진한 색으로 치장하고, 꽃잎이 온통 분홍색으로 물든 해바라기는 화면을 초현실적인 공간으로 만들었다. 온갖 종류의 적색으로 물든 해바라기는 아름답다기보다 그로테스크했다. 묘사 자체는 언제나 그랬듯 극도로 사실적이었으나, 이렇게 비현실적인 색으로 인해 화폭 안은 샤갈의 그림만큼이나 환상적인 분위기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아저씨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어떡해. 나 어떡하지.”

그림을 홀린 듯 들여다보던 우연은 점점 무서워졌다. 아저씨의 영혼을 한 조각 훔쳐 와서 캔버스 위에 으깨 발라 놓은 것만 같았다. 지금 이 작은 방에 아저씨가 와 있는 것 같다. 몰래 찾아와 내 귀에 대고 달콤하게 속삭이고 있는 것 같다.

우연아.

눈을 꽉 감고 몸을 떨었다. 뇌가 찐득한 꿀에 녹아내리는 것 같다. 손끝과 발끝이 곱아들고, 아랫배 깊은 곳, 아니 사타구니 사이로 찌릿찌릿 전류가 흐르는 것 같다. 너무 좋아서 울고 싶기도 했고, 미친 듯이 웃고 싶기도 했다. 아, 좋아, 정말 좋아! 좋아서 미치겠어, 나 어떡해.

“이원 아저씨, 좋아해요.”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몸이 화닥닥 튕겨 일어난다. 갑자기 시간이 멈춰 버린 것 같다. 아저씨는 여전히 눈을 반쯤 감고 턱을 살짝 들어 올린 채, 오만하게, 섹시하게, 다정하게, 쌀쌀맞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그림에게 한 말이다. 아저씨는 듣지 못했어. 아저씨, 좋아해요. 아저씨가 좋아요. 입술이 여러 번 달싹이는 동안 혀는 점점 용감해졌다.

아저씨가 웃는다. 섹스를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다는 순결한 아저씨가, 저렇게 색기 넘치는 얼굴로, 입술을 살짝 벌리고 속삭인다.

……네가 하려던 말이 정말 그거야?

간지러운 숨결이 뺨에 와 닿는 것 같다. 우연은 눈을 꽉 감고 심호흡을 했다.

“아뇨.”

두려웠다. 마음에서 자란 낯선 싹. 하지만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싱싱하고 예뻤던 그 싹.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무서웠다.

하지만 그 싹은 이제 너무 커져서, 도저히 모르는 척 넘길 수 없게 돼 버렸다. 팬질, 덕질, 사생질, 그따위 말로는 도저히 바꿔 부를 수 없게 된 이름. 우연은 이제 팔을 활짝 벌려서 그 이름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아뇨. 실은 다른 말이에요, 아저씨.”

누가 그랬다. 만물에는 단 하나의 어울리는 이름이 있다고. 쿨하고 단호한 4차원 또라이는 오늘, 지금, 이 마음과 이 그림에 바른 이름을 붙여 주고, 아저씨가 묻는 말에 용감하고 당당하게 대답할 것이다.

“아저씨, 나는요, 아저씨를…….”

사그락, 사락, 나뭇잎이 비벼지는 듯한 소리가 혀와 입천장 사이로 흘러나왔다.

몸이 들들 떨리는 것이 멎지 않는다. 난 정신이 이상한 게 아닐지도 몰라. 아저씨를 만날 때마다, 생각할 때마다 항상 흥분하고 들떠 있던 이유는, 경조증 따위가 아닐지도 몰라.

그래서 어쩔 건데? 정말 아저씨한테 고백하기라도 할 거야?

우연은 머리를 감싼 채 히득히득 웃었다. 물론 그럴 생각은 없었다. 나는 가진 것 없는 4차원 화가 지망생일 뿐이고, 아저씨는 대기업의 젊은 총수니까. 가진 것 많고, 능력이 출중하며 인품마저 흠잡을 데 없는.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뻔뻔하다는 말로도 커버가 안 되는 것이다. 아저씨가 얼마나 당황하시겠느냐고.

……왜 안 돼?

갑자기 맑은 목소리가 안에서 분수처럼 솟아오른다.

안 될 이유가 뭐야? 아저씨가 어떤 마음인지 설마 모른다고 할 거야?

아저씨는 너를 좋아해. 처음에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너를 좋아해. 확실해.

아저씨가 너에게 했던 행동을 생각해 봐. 엄마 아빠도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해 주진 못해.

행복 회로나 착각이 아니야. 아저씨는 너를 좋아해. 믿어도 돼.

결혼해 달라는 게 아니잖아. 그냥 사랑하자는 거잖아. 결혼이 끼어들지 않은 사랑이야말로 가장 계산 없고 순수한 사랑 아니냐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게 뭐가 어때서. 이 감정이 죄는 아니잖아. 내가 돈이 없는 게 죄가 아니잖아. 내가 열두 살이나 나이가 어린 게 죄가 아니잖아.

……그러면 아저씨에게 고백하고 사귀어 달라고 말해 볼 수도 있잖아.

아저씨는 너를 사랑해.

나를 믿어. 아저씨는 너를 사랑해.

어느덧 창문이 보얗게 밝아 오고 있었다. 우연은 비틀비틀 침대로 가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아저씨에게 약속했던 결혼 부케나 웨딩 케이크 조공은 아무래도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을 갖다드려야지. 첫 번째 그림. 오늘 당장. 내가 그림 그리던 거 모르실 텐데, 첫 번째 그림부터 이렇게 어마어마한 게 짠 나타나면 아마 깜짝 놀라실 것이다.

……아저씨는 이 그림에서 내가 하려는 말을 들으실 수 있을까?

당황하진 않으실까? 받아들이실 수 있을까? 내 마음을, 아니, 아저씨 자신의 마음을.

용기를 줘. 아저씨에게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아저씨의 반응을 견뎌 낼 수 있는 용기를.

아저씨의 사랑을 아저씨의 입으로 확인할 수 있는 용기를.

우연은 몸을 동그랗게 말고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숨을 죽인 채 우는 것처럼 웃었다.

* * *

― 학교 지각해도 괜찮아? 시험 기간 아니야?

― 오늘 월요일이라, 러시아워 걸리면 수업 전까지 도착 못 해. 너 지각해서 시험 못 보면 내 책임인 거 알아?

― 이래 봬도 대 세경그룹 대표이사의 최측근 수행 비서로 나름 자부심을 갖고 사는데, 네 부탁 들어주다가 시말서 따위 쓰고 싶지 않다고!

전화기에선 홍연 아저씨의 잔소리가 줄줄 이어졌다. 아, 정말이지 홍연 아저씨는 왜 드라마나 책에서 보았던 ‘조용하고 점잖으며 뭔가 부탁하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주는 능력 있는 비서’가 아닌 걸까.

“지금 시험이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뭐, 과제를 내긴 냈으니 F는 안 나올 거고, 그럼 됐지 뭘 그래요!”

물론, 한때 장학금을 꿈꾸었던 우연이었기에, 시험을 말아먹는 것이 조금은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홍연 아저씨의 시말서는 아주 많이 신경이 쓰였다. “제가 시말서인지 뭔지 대신 써 드리면 안 될까요? 제가 중고등학생 때부터 모아 놨던 반성문 샘플이 벌써 백 장이 넘거든요.” 하며 살살 부탁할 때도 내내 시큰둥하던 홍연 아저씨는, 우연의 한 마디에 단숨에 태도를 바꾸었다.

“첫 번째 그림이 다 돼서, 아저씨한테 갖다드리고 싶어서요.”

― 옙! 당장 호텔로 날아가겠습니다!

겉을 꽁꽁 감싼 거대한 캔버스를 질질 끌고 1층까지 내려오자, 로비로 막 들어서던 홍연 아저씨가 황급히 달려와 그림을 받아 든다.

“와, 미치겠네. 혹시나 해서 밴을 끌고 오긴 했는데, 정말 벌써 다 된 거야? 아무리 손이 빨라도 사흘 만에 100호짜리 초상화를? 미쳤어, 미쳤어! 잠은 좀 잤어? 열나는 건 좀 괜찮아졌고?”

“한숨도 못 잤어요. 열은 안 나요. 말짱해요.”

“그럴 줄 알았네. 이거나 드셔.”

홍연 아저씨는 턱으로 주머니를 가리켰다. 주머니 속에는 에너지 드링크가 한 병 들어 있었다. 사흘이나 잠을 못 잔 사람을 잠시라도 재울 생각은 않고, 카페인부터 퍼부을 생각을 하다니, 이 아저씨도 꽤나 또라이 기질이 있다.

홍연 아저씨는 우연이 상상하던 ‘회장님의 전지전능한 비서’의 모습과 많이 달랐지만, 아저씨가 왜 홍연 아저씨를 옆에 두는지는 알 것 같았다. 우연은 속으로 열심히 흉을 보면서도 얌전히 에너지 드링크를 꺼내서 마셨다.

“전무님한테 직접 전해 드리고 학교 가면, 너 오전 시험 제시간에 못 들어가. 내가 대신 전해 드리면 안 될까?”

“안 돼요. 제가 직접 전해 드릴 거예요! 지금 당장요!”

말도 안 된다. 그림을 매개로 나는 일생일대의 고백을 하는 건데, 그러잖아도 겁나 죽겠는데 그림만 덜렁 대신 전해 주라고? 아저씨는 그림을 보면서 분명 느끼는 것이 있을 것이다. 아니, 감이 좋은 분이니 내가 하려는 말을 분명 알아들을 것이다. 그 반응을 보아야 한다. 그림을 그리면서 아저씨의 첫 반응을 보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는데!

“전무님은 지금 서초동 댁에 계실 텐데?”

“그러면, 집으로 가서 전해 드리면 되잖아요. 어차피 학교에 가는 방향이니까…….”

우연의 단호한 태도에 홍연 아저씨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그림 좀 보면 안 될까? 나 궁금해서 잠도 못 잤는데.”

“안 돼요! 서프라이즈 선물을 다른 사람한테 먼저 보여 주는 멍청이가 어디 있어요? 아저씨한테 그림 가져간단 말도 하시면 안 돼요! 절대요!”

우연은 펄쩍 뛰며 쉰 목소리로 고함쳤다. 거 다랍게 치사하네. 홍연 아저씨는 입을 비죽거리며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더니 밴의 시동을 걸었다.

“댁으로 오라신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시기에, 우연 학생이 얼굴 뵙고 인사하고 내려간다 하니까 선선히 허락해 주시네. 걱정 많이 하셨던 것 같은데.”

“걱정이요? 아저씨가 저 걱정하셨어요?”

“당연한 거 아냐? 기숙사에서 병원 나오기 힘들까 봐 일부러 호텔 잡아 주신 거잖아!”

맞다. 걱정하실 거란 생각을 못 했다. 우연은 대번에 풀이 죽었다.

“중간에 연락 좀 드리지 그랬어. 그렇게 아저씨, 아저씨 하면서 전화해 댈 때는 언제고, 아저씨가 전화하는 건 문자건 통화건 족족 씹어 버리니, 대단한 건지 뭘 모르는 건지. 내가 ‘우연이 상태 괜찮은 거 확인하고 왔습니다.’ 하고 구라 안 쳤으면 의사 데리고 바로 쫓아오셨을걸.”

“네? 문자요?”

황급히 전화기를 켠 우연은, 바로 얼굴을 구겼다. 이모티콘과 개그 영상 링크로 가득한 친구들의 문자 더미 속에 길고 정중한 안부 문자와 부재중 전화 표시가 일곱 개나 끼어 있었다. 몸이 어떤지, 열은 내렸는지, 식사는 제대로 했는지, 맛있는 거라도 좀 보내 줄까, 몸이 좋지 않으면 아무리 늦어도 꼭 전화하라는 내용이었다.

말문이 막혔다. 아저씨는 마음을 인정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충분히 연인 같았다. 나처럼 보잘것없고 이상한 애한테, 어쩌면 이렇게 한결같이 다정하고 친절할 수 있을까. 미안해서 죽고 싶으면서도 행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아저씨에 대해서라면 항상 행복하면서도 죽고 싶다는 마음이 엉켜서 따라다녔다.

이 바보야, 그러게 문자는 제때제때 확인해야지.

잠시 자학하던 우연은 이내 고개를 들고 히죽히죽 웃었다. 괜찮아. 그림 그리고 있었다고 하면 화 안 내실 거야. 오히려 기특해하시고 좋아하실 거야.

……그리고 이 그림을 보시면 기절하시겠지!

머리를 쥐어뜯다가 광년이처럼 히죽대는 꼴을 본 홍연 아저씨가 어이없다는 듯 투덜거린다.

“웃음이 나오냐? 서초동 들렀다가 제시간에 학교 들어가려면 엄청 밟아야 해. 시말서가 아니라 딱지를 뗄지도 모르는데?”

“전무님한테 비용 처리해 달라고 하시면 안 돼요?”

“이 아가씨는 또 어디서 이런 요상한 말을 배우셨나. 비용처리도 처리지만 교통 벌점이 쌓여요.”

우연이 어깨를 움츠리고 혀를 쏙 내밀자 홍연 아저씨가 픽 웃는다.

“뭐 어쨌든 좋아. 전무님 뵙고 그림 전해 드린 다음에 바로 출발. 오케이?”

우연은 맹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이 들뜨다 못해 몸이 둥둥 떠오를 지경이었다.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계속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홍연 아저씨가 앞좌석에서 웃는 소리가 들렸다.

* * *

우연은 얼음처럼 굳어 버린 채 계속 창밖만 바라보았다.

아저씨의 집은 담장이 높아서, 안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골목을 오가는 사람은 거의 없고 담장 옆에는 자동차들만 조르르 서 있었다. 우연은 홍연 아저씨가 뒤쪽으로 주차를 하자마자 문을 열고 바로 튀어 나갔다. 아니, 나가려 했다.

“아, 우연아, 잠깐.”

갑자기 문이 짤깍 잠긴다. 우연이 어리둥절해서 홍연을 쳐다보는 순간, 높고 거대한 철문이 철컹 소리를 내며 열린다.

“……어?”

철문 뒤에서 두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한 사람은 흰 와이셔츠에 조끼를 입고 있는 키 큰 남자였고, 한 사람은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원피스를 입고 있는 머리가 긴 여자였다. 두 사람은 밀착하다시피 바짝 붙어 서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팔짱을 끼고 있었다. 어……, 이런. 홍연 아저씨가 난처한 듯 머리를 긁는다.

……아저씨?

우연은 얼빠진 얼굴로 대문 앞에 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여자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던 아저씨는 잠시 후 팔짱을 풀고 여자의 어깨를 감싸 안았고, 여자는 아저씨의 허리에 자연스럽게 팔을 둘렀다.

저, 저게 뭐지? 아저씨 지금 뭐 하는 거지?

우연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정수리에 벼락이 떨어진 것 같다.

옆에 있던 주차장 문이 열리더니 새까만 차 한 대가 두 사람의 앞에 와서 선다. 아저씨는 여자의 손을 잡고 차 쪽으로 에스코트한 뒤, 차 뒷문을 열고 손을 잡아 주었다.

여자는 차의 뒷좌석에 걸터앉은 채, 문을 닫는 대신 아저씨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아저씨의 얼굴을 더듬어 끌어 내린다. 아저씨의 허리가 수그러들고, 고개가 아래로 깊이 내려가면서 비스듬하게 기울어진다. 어깨 위에 얹힌 긴 손가락들이 하얀 지렁이가 꿈틀대는 것처럼 느껴진다. 두 사람이 입술을 맞대고 있는 시간이 천년처럼 길었다. 우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였다.

이상하다. 여기는 그러니까, 아저씨 집인데. 집에서 새벽에 여자가 나왔다는 건 무슨 뜻이지?

그러니까, 아저씨처럼 점잖고 반듯한 사람이, 집으로 여자를 불러서 같이…….

아, 맞다. 주말 내내 약속이 있다고 했던가? 집에 중요한 손님이 오신다고. 손님이.

그럼 그 손님이 저 여자였던 거야?

들들들, 덜덜덜덜, 파도처럼 밀어닥치는 떨림은 이제 무슨 짓을 해도 멎지 않는다. 윙, 윙, 위위위윙, 귀청이 터질 것같이 시끄럽다. 아저씨는, 나,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었어?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나? 분명히 그런 줄 알았는데?

……내가, 착각에 빠져서 병신 짓을 한 거야?

저 여자는 누구지? 저 여자는 집에서, 주말 내내, 뭘 했을까? 아저씨는 왜 저 여자를 중요한 손님이라고 했지? 저 여자하고, 저렇게 키스도 자연스럽게 하는 여자하고, 밤새 무슨 일을. 섹스 한 번도, 안 해 봤다면서. 그거 거짓말이었어요? 생각하기 싫은데, 눈앞에 보이는 장면은 한 가지 결론만 또렷하게 말하고 있었다.

꼭 쥐었던 손을 펴 보았다. 아크릴 물감으로 얼룩덜룩한 손바닥이 보였다. 덜덜 떨리는 손이 물에 잠긴 것처럼 울렁울렁 흔들린다.

어, 어어?

손바닥 위에서 눈물이 툭,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퉁, 퉁, 투투툭. 흐, 흐으, 으으, 우연은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울기 시작했다. 왜 우는지는 모르겠는데, 눈물은 걷잡을 수 없었고, 흐느낌은 점점 울부짖음으로 바뀌었다.

덕질, 팬질, 사생질, 이상적이고 순수하고 무조건적이고 고치원적인 사랑까지가 좋았다.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똑똑한 진우연이 그 위험하고 이상한 감정에 이름을 주지 못하도록 미리 쉴드를 치고 있던 거였다.

하지만 멍청한 진우연이 그것도 모르고 함부로 이름을 줘 버렸다. 달콤한, 끈적한, 딸기 무스케이크처럼 이상한 색깔의 그 감정에.

……그렇다고 이렇게 적나라한 방식으로 뭉개 버릴 건 뭐야.

아저씨는 왜, 왜 사랑하지도 않는, 나 같은 애한테…… 그렇게, 그렇게 잘해 주셨어요……?

여자가 탄 차가 골목을 빠져나갈 때까지, 아저씨는 물끄러미 차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그러고도 뭔가 아쉬운 듯, 두어 번 돌아보며 천천히 안으로 들어간다.

철컹.

문 잠기는 소리가 나고도 한참이 지날 때까지 우연은 무릎 사이에 고개를 처박고 꼼짝도 하지 못했다. 부르릉, 시동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저씨는 나중에 뵙는 게 좋겠어, 화가 선생. ……내가 시말서 쓰고 말지 뭐.”

홍연은 내려가는 내내 울기만 하던 우연에게 이유를 묻지 않았다. 다만 중간에 휴게소에 들러 생수 한 병과 티슈 몇 장을 내밀며 몇 가지 이야기를 툭툭 집어 던지듯 설명해 주었다.

조금 전에 본 여자는, 신문에서 종종 이름이 오르내리던 유미현이라는 뮤지컬 배우라고 했다. 천의 얼굴, 천의 목소리. 어릴 때부터 친구, 한 회장님이 낙점한 며느릿감. 세경홀딩스 대주주인 우성희 이사의 외동딸.

……그리고 약혼녀.

몇 주 전 아저씨의 뉴욕 출장은 약혼녀를 만나기 위한 일정이었고, 저 여자는 어제 있었던 ‘약혼식’을 위해 잠시 귀국했다가 지금 뉴욕으로 돌아가는 길이라 했다.

“설마 미현 씨가 전무님 댁에 있을 줄은 몰랐지. 정말 미안하게 됐어.”

설명을 들어도, 사과를 받아도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우연은 발을 구르면서 고함을 질렀다.

“몰라, 몰라, 몰라요. 왜 나한테 그딴 얘기를 해요? 안 들어도 돼요. 약혼자니 뭐니 그딴 얘기 하지 마세요. 미안하긴 왜 미안한데요? 모른다고! 안 듣는다니까!”

홍연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스무 걸음쯤 떨어진 곳으로 가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우연은 그날 시험을 포기했고, 최홍연 비서실장은 경고 처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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