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누드-15화 (15/47)
  • 15. 비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 줄 수 있겠니?”

    차 안은 어둡고 조용했다. 차는 도로를 달릴 때도 조용했지만 시동이 꺼진 상태에서는 진공처럼 적막했다. 어떤 말도 밖으로 빠져나갈 것 같지 않았다. 우연이 바짝 날이 선 목소리로 속삭인다.

    “뭘 알고 싶으세요, 아저씨?”

    그녀를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이 되살아났다. 무수히 상처를 입고 구석 끝까지 내몰린 아주 작은 고양이가, 몸을 발발 떨며 조그만 발톱을 세우고 하악, 하악, 하고 있다. 이원은 조용히 기다렸다. 우연은 위악을 가장할 때, 가장 깊은 속을 드러내곤 했다.

    “아빠 말대로 제가 정말 채팅 앱으로 남자들이랑 자고 다녔는지 알고 싶으세요? 몇 명이랑 그 짓을 했는지 궁금하세요? 아니면, 아빠가 성교육을 얼마나 엄하게 했는지 알고 싶으세요?”

    이원은 가만히 우연을 내려다보았다. 예전에 아빠의 성교육에 대해 물었을 때, 그녀는 단호하게 부인했었다. 하지만 지금, 바들바들 떨며 위악을 가장하는 그녀는 그것마저 털어놓고 싶을 만큼 절박하고 애처로워 보였다.

    그녀는 지금 유일하게 신뢰하는 한 사람에게 매달려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래도 나를 믿어 줄 거예요? 이래도? 이래도? 그래도 나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을 건가요?

    “아저씨는 아빠 말을 믿어요?”

    “……경찰에서도 예전에 그 앱이 있었던 건 확인했었다며.”

    이원은 부인하지 않았다.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우연은 목을 쥐어짜듯이 물었다.

    “그랬겠죠. 맞아요. 그래서 지금까지 아빠 말만 고대로 믿고 계셨던 거예요? 저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그걸 어떻게 묻겠어. 네가 대답하고 싶겠니?”

    “그럼, 지금이라도 말하면 믿어 주실 건가요? 제가 무슨 말을 하든? 아무리 믿어지지 않아도?”

    이어지는 밀도 높은 침묵에 목이 졸리는 것 같다. 한참을 생각한 후, 아저씨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눈빛은 복잡했으나, 대답은 간결했다.

    “그래.”

    후우. 갑자기 기운이 훅 빠지면서 눈이 시큰해졌다.

    우연은 믿음이 합리적인 이유에 의해 형성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믿음은 의지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의지는 믿음을 뒷받침할 논리적인 이유들을 만들어 낸다.

    아저씨가 나를 믿는다면, 내 말이 경찰이나 아빠의 말보다 더 타당하고 논리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아저씨가 내 말을 믿어 주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저렇게 진지하고 심각한 얼굴로. 눈시울로 뜨끈한 눈물이 주르르 고였다.

    우연은 그의 앞에 고개를 숙이고 고해하듯 속삭였다.

    “아빠는…… 늘 입버릇처럼 말했어요. 딸은 가정 교육을 잘 받아야 한다고.”

    * * *

    아빠는 늘 입버릇처럼 말했다. ‘딸은 가정 교육을 잘 받아야 한다’고. 특히 성교육은 가정에서부터,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아빠는 강당에 전교생을 몰아넣고 구태의연한 강의와 영상을 보여 주던 성교육을 경멸했다. 그는 일상 대화에서 오가는 장난스러운 음담패설이나 가벼운 스킨십으로 ‘자연스러운 성교육’을 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같이 영화를 보다가 배우들끼리 애무하는 장면이 나오면 ‘우연이 너, 지금 쟤들이 뭐 하는 건지는 아냐?’ 하고 물어보곤 했다. 모른다고 대답하면 ‘모르긴 뭘 몰라, 다 알면서.’ 하며 히죽히죽 웃곤 했다. 그때마다 우연은 영화를 보던 자신의 눈깔을 뽑아 버리고 싶었다. 지나갈 때 엉덩이를 툭툭 치거나 둥그렇게 쓰다듬는 건 일상이었다. 그러다가 생리대가 손에 걸리면 ‘어이구 너 그거 하냐? 콩알만 한 줄 알았더니 다 컸네?’ 하며 씩 웃곤 했다.

    가끔 옷 속에 손을 넣어 가슴을 만져 보기도 했다. ‘이거 이거, 아직도 이렇게 밋밋해서 어쩌나. 언제 키워 시집보내나?’ ‘첫날밤에 손에 뭐라도 잡히는 게 있어야 예의인데, 이걸 어쩌나?’ 하며 너털웃음을 웃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쭈뼛하고 소름이 끼쳤다. 거대한 바퀴벌레가 가슴 위를 슬슬 기어 다니는 것 같고, 구역질이 치밀었다. 어떤 때는 혀를 깨물고 죽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싫다는 내색을 할 순 없었다. 아빠는 자존심이 너무 강해서 자신의 호의나 장난이 거부당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옆에서 짧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린다. 아저씨가 고개를 옆으로 틀더니 한 손으로 입가를 쓸어내린다. 완강하게 각이 진 턱에 자잘한 근육이 치솟는 것이 보였다. 우연은 치부를 간신히 가리고 있던 마지막 천 조각까지 완전히 벗겨진 기분이었다. 한 마디, 한 마디, 구토를 하는 기분으로 천천히 말을 잇대었다.

    “얼마나 자랐나 본다고, ……매일 그러는 건 아니었어요.”

    급히 말을 덧대고 보니 더 비참했다. 난 왜 그런 짓을 당해 놓고 변명까지 해 주어야 할까.

    아저씨의 입술이 들썩였지만 험한 말은 튀어나오지는 않았다. 한 번, 두 번. 낮은 신음만 흘러나온다. 하지만 우연은 더러운 욕설을 들은 것보다 훨씬 부끄러웠다.

    ‘아니야, 다른 집 아빠들도 대충 비슷할 거야.’

    ‘그래. 친구들도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이런 창피한 경험은 다 있을 거야.’

    한때 그렇게 믿었다. 애써서 믿었다. 아니 믿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다른 아빠들은 이러지 않는다. 다른 친구들은 이런 일을 당하지 않는다. 진실을 알게 되는 것은 마취가 풀리는 것과 비슷해서, 우연은 매일매일 조금씩 더 고통스러워졌다.

    하지만 싫다고 할 수 없었다. 아빠에게 반항하지 못하도록 세뇌라도 걸린 것 같았다. 아빠의 말을 거부했다가는 숨을 쉴 수가 없고, 금방이라도 죽어 버릴 것 같은 공포에 시달리곤 했다.

    언제부터 그런 무섬증이 나타났는지도 또렷이 기억난다. 여섯 살 때였다. 유치원에 반바지를 입고 가겠다고 떼를 썼다. 엄마는 추워서 안 된다고 했고, 우연은 울기 시작했다. 엄마는 딸이 우는 소리를 견디지 못했고, 결국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입어! 입 닥치고 주는 대로 입어! 좆만 한 년이 왜 벌써부터 반항이야, 왜애애!

    다음에 기억나는 장면은 아빠의 주먹에 맞은 엄마가 붕, 날아서 벽에 부딪히는 모습이었다. 아빠는 평소에는 다정한 애처가 딸바보였지만, 신경을 긁으면 괴물로 돌변했다. 아빠는 엄마의 가슴을 무릎으로 누른 후 주먹으로 미친 듯이 뺨을 후려쳤다.

    ‘시끄러워, 아침부터 왜 이 지랄이야. 뭐? 애가 옷을 안 입어? 그럼 팔다리 부러뜨려서라도 입혀. 아니면 빨가벗겨서 보내. 왜 애 하나 못 잡고 이래, 엉?’

    아빠가 고개를 확 돌리더니 우연을 향해 시근덕대며 다가온다. 쿵, 쿵, 쿵, 쿵. 완전히 얼어붙은 우연의 입에선 울음 대신 끽끽대는 소리만 튀어나왔다.

    철커덩, 촤르르.

    아빠는 우연의 멱살을 틀어쥐더니 베란다 난간 밖으로 팔을 쭉 내밀었다. 두 발이 대롱대롱하며 허공을 휘젓는다. 온몸이 얼어붙는 공포, 구토감, 새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몸이 빳빳하게 굳으며 숨이 막힌다. 버둥대려 해 봐도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는다. 다리 사이로 오줌이 지르르 흘러내려 까마득한 아래로 방울방울 떨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눈앞에 섬광이 번쩍대더니 노란 구름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아빠가 이를 갈며 중얼대는 소리가 들렸다.

    ‘말 안 듣는 딸은 필요 없어, 여기서 떨어져 죽을래? 아니면 다음부터 말 잘 들을래?’

    그 뒤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때 의식을 잃고 경기를 일으켰다 했다.

    그 후부터 우연은 아빠가 옆에 있으면 목이 졸리는 듯 숨이 막혔고, 뭔가를 묻거나 시키면 눈앞이 하얘지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반항이라도 했다간 바로 죽어 버릴 것 같았다. 실제로 몇 번 의식을 잃고 쓰러지기도 했다. 아빠는 우연이 쓰러질 때마다 몸이 약해서 그렇다며 보약을 지어 주고 다정하게 토닥이며 재워 주었다.

    호기심이 많고 엉뚱한 생각을 자주 하여 친구들을 잘 웃겼던 우연은 그때부터 비슬비슬 겉돌기 시작했다. 3학년 때까지 한글을 제대로 읽지 못했고, 6학년 때까지 이불에 오줌을 쌌다. 엄마는 그때마다 홀딱 벗겨서 아파트 복도로 내쫓았다.

    ‘나한테 반항하느라고 일부러 이러지! 창피를 당해 봐야 정신 차리겠지! 지린내에 콧구멍이 썩어 문드러져 봐야!’

    엄마는 소변이 묻은 옷과 이불도 빨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우연의 방에는 비릿하고 싸하다가 점점 날카롭게 변해 가는 지린내가 겹겹으로 쌓여 있곤 했다.

    ‘여, 여보! 지금 더럽게 뭐 하는 거야? 애가 만지는 거 싫어하는 거 안 보여?’

    그 말을 처음 했던 엄마는 죽기 직전까지 맞았다. 우연은 너무 무서워서 엄마에게 고마운 마음도 미안한 마음도 느끼지 못했다. 썩은 시래기처럼 늘어져 신음하는 엄마 옆에서 아빠는 우연의 멱살을 틀어쥐고 물었다.

    ‘더러워? 싫어? 아빠가 이러는 거 싫으냐고! 아빠가 너 똥 기저귀, 오줌 기저귀 다 갈아 주며 키웠는데, 이제 와서 이게 무슨 개소리야! 대가리 컸다고 아빠 무시해? 무시하냐고!’

    빳빳하게 몸이 굳었다. 허공을 휘젓던 다리, 다리를 타고 흘러내리던 뜨뜻미지근한 감각이 되살아나면서 숨이 콱 막혔다.

    ‘괜찮아, 요, 괜찮아 아빠, 더럽지 않아. 싫은 거 아니야.’

    우연은 발발 떨며 필사적으로 웃어 보였다.

    어느 순간부터, 우연은 자신의 몸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가슴이 나오는 거나, 허리가 가늘어지는 거나, 매달 생리를 하는 것이 끔찍하게 증오스러웠다. 몸을 함부로 망가뜨리고 싶은 강박에 시달리기도 했다. 아빠 손이 닿은 곳의 껍질을 벗겨 내고 싶었다. 가슴을 식칼로 잘라 내어 마구 으깨 버리거나 다리미로 지져 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불쑥불쑥 치밀었다.

    우연은 벌레가 기어 다니는 기분이 들 때마다 가슴이나 목, 팔뚝을 미친 듯이 긁어 댔다. 아프면 아플수록 시원하고, 고통스러울수록 안심이 됐다. 피부는 처음엔 붉어지다가, 부풀다가, 작은 피 알갱이가 스며 나오다가, 결국엔 길고 붉은 핏줄기가 생기곤 했다.

    피가 나면 섬뜩하면서도 조금은 속이 후련해졌다.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른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며칠 후 피딱지로 얼룩덜룩 얽힌 팔이나 가슴을 보면 암담하고, 한심하고, 자신이 미친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따위로 행동하지 말고 아빠에게 용감하게 말해야 했다. 오래전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배운 대로.

    싫어요, 싫어요, 만지지 마세요.

    싫어요, 아파요, 때리지 마세요.

    우연은 유치원에서 배운 그 간단한 말조차 하지 못하는 자신이 늘 병신 같았다. 하지만 막상 그 상황이 되면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실 아마 백번 되돌아가도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해서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장담할 수는 없었다.

    주변에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체육관을 운영하는 아빠는 키는 작았지만 힘은 무시무시했고, 의리를 중시하는 사나이였지만, 뒤끝도 길었다. 조금이라도 꽁한 것은 기어이 몇 배로 보복을 하고야 말아서, 다들 그를 무서워하고 조심스러워했다.

    다만 평소에는 우연과 엄마를 얼마나 끔찍하게 아끼고 예뻐하는지 몰랐다. 주변 사람들 말로는 그런 애처가와 딸바보 아빠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우연은 아빠가 폭발할 때마다 늘 엄마와 자신이 뭔가를 잘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휴대 전화에서 성인용 채팅 프로그램을 발견한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우연은 아빠에게서 물려받은 구형 휴대 전화를 사용했는데, 그는 그곳에 위치 추적 프로그램 따위를 몰래 심어 두고 딸의 생활을 감시했다.

    우연은 그 휴대 전화에서, 깊이깊이 숨겨 놓은 앱을 몇 개 발견했다. 다른 것들은 모두 지우고 주었는데 그것은 너무 깊이 숨겨 두어 미처 지우지 못했던 듯했다.

    심심했던 건지 고약한 호기심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우연은 아빠가 잠을 자고 있을 때, 어느 채팅 앱에 들어가서 아빠가 싸질러 놓은 대화들을 읽었다. 아빠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는 단 한 종류로, 절대 바뀌는 법이 없었다.

    채팅 앱이 단순히 모르는 사람과 수다 떨고 노는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데는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아빠는 그곳에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이상한 말을 너무 많이 했다. 만나자는 약속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우연이 봐도 아빠는 분명 더럽고 나쁜 짓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오가는 링크를 타고 돌아다니기 시작한 것은, 그곳에 세 번째 들어가면서부터였다. 우연은 그날 남자와 여자가 키스 이후로 하는 짓거리들을 눈앞에서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구역질이 치밀었다. 동시에, 아빠가 몸을 만질 때마다 벌레처럼 기어 다니는 듯한 그 느낌의 정체도 확실히 자각하게 되었다.

    저게 그렇게 좋을까? 정말? 보는 것만 해도 토할 것 같은데?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우연은 그 더럽고 무섭고 구역질 나는 장면들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때마다 발가락 끝이나 손가락 끝이 곱아들기도 하고, 몸의 한 부분이 이상하게 가렵고 화끈대는 것처럼 느껴졌다.

    생각을 지울 수도 없었다. 그 장면들은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치밀어 허공에 둥둥대며 우연을 따라다녔다. 그럴 때면 팔다리를 힘껏 긁거나 손등을 피가 나도록 깨무는 것으로 벌을 주었다. 그래도 중독이 된 것처럼, 그 짓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빠가 여기서 만난 여자들과 그 이상한 짓거리를 실제로 하고 다닌다는 걸 알게 된 후, 우연은 흥분으로 몸을 떨었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아빠의 약점을 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 아빠를 감옥에 넣을 수 있을지 모른다. 뒷조사를 해서 엄마에게 알려 줄 생각은 아니었지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아빠의 약점을 하나라도 잡아 두고 싶었다. 우연은 밤마다 채팅창에서 아빠의 대화 자료를 모아 클라우드에 깊이깊이 쌓아 두기 시작했다.

    ‘이 개같은 년이 어디서 더러운 짓거리만 먼저 배워서! 아이디 뭐야, 당장 대!’

    우연의 전화기에서 그 애플리케이션을 발견한 아빠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딸의 뺨을 후려쳤다.

    ‘누구야! 어떤 새끼야! 어떤 새끼하고 더러운 짓을 하고 다닌 거야! 죽여 버린다!’

    그는 우연이 감히 자신의 아이디로 들어갔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자신이 깔아 놓은 앱이 미처 지워지지 않고 남았으리라는 가능성을 무의식적으로 부인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우연은 새파랗게 질린 채 필사적으로 거짓말을 했다.

    ‘몰랐어, 아빠, 정말 몰랐어요. 치, 친구들이, 다, 깔고 있어서, 그냥, 그냥…….’

    거짓말은 당연히 먹히지 않았다. 친구들? 어떤 년들? 아니, 새끼들이겠지. 아이디가 뭐냐고 묻잖아! 지금까지 어떤 새끼들을 만나고 다녔냐고! 연락처 대!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하지만 우연은 끝까지 입을 열지 못했다. 아빠의 뒤를 캐고 다닌 것을 들키면 그때는 말 그대로 정말 죽을 테니까. 아빠의 약점을 하나라도 잡아 보고 싶었던 거지, 맞아 죽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느니 차라리 ‘철딱서니 없이 채팅으로 만난 어른들과 함부로 자고 다니는 년’이 되는 게 나았다.

    아빠의 분노는 무시무시했다. 자신의 더러운 짓을 들킬 뻔했다는 충격에, 순진한 줄 알았던 딸에 대한 배신감, 친구 이름과 아이디를 끝까지 실토하지 않는 데 대한 분노가 겹치자 그대로 이성이 날아가 버렸다. 자칭 딸바보 아빠는 ‘당장 실토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때린다.’라고 공언했고, 실제로 맞다가 죽을 뻔하기도 했다.

    그 일이 있고 우연은 두 달 가까이 학교에 가지 못했다. 아빠는 경찰서에도 찾아가고 학교에도 찾아갔다. 잔뜩 흥분한 아빠가 교장실로 찾아가 ‘전교생의 전화기를 모조리 검사해야 한다.’ 하며 열변을 토하는 바람에 우연은 졸업할 때까지 이상한 시선에 시달려야 했다.

    ‘따라와, 당장 병원에 가자.’

    온몸에 먹물처럼 든 피멍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엄마는 우연을 질질 끌고 산부인과로 갔다. 언놈의 씨인지도 모를 거 싸지르느니 이게 낫지. 어디서 사고 치고 기어들어 와서 어떤 개애새끼 씨나 싸지르는 꼴을 보느니 이게 낫지. 눈깔을 희번덕대며 중얼대는 엄마는 반쯤 미친 것 같았다.

    이야기를 마친 우연은 고개를 아래로 푹 처박았다. 말을 끊자마자 괜히 말했다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의 턱선이 딱딱하게 굳어 가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의 얼굴을 도저히 볼 수 없었다. 아무리 좋게 들어 준다 해도, 음란한 성인용 대화 창과 영상을 밤마다 염탐하던 여자애가 정상적으로 보이진 않을 것이다. 더욱이, 성적 욕구가 심해지는 게 조증의 전형적 증세라면.

    아저씨의 거칠고 갈라진 목소리가 천천히, 한 토막씩 흘러 들어왔다.

    “……혹시, 그, 다른 일은…… 정말 없었니?”

    “다른 일이요? 무슨 일이요? ……아.”

    그래, 믿어 준다 약속했어도 믿기 어려운 내용이란 건 안다. 우연은 목이 꽉 잠기는 것을 참으며 간신히 대답했다.

    “없었어요.”

    “……그래.”

    그는 우연을 미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시선에 실린 감정은 의심일까, 아니면 경멸일까. 우연은 얼굴 껍질이 벗겨지는 것처럼 부끄러웠고, 미친 듯이 화가 났다. 괜히 말했다. 죽어도 말하지 말걸. 우연은 눈을 치뜨고 악을 썼다.

    “진짜 없었다고요! 정말이에요!”

    “그래, 알았어. 다행이구나. 미안해, 알았어.”

    그는 조심스럽게 침묵하며 우연의 말을 기다렸다. 다른 말을 기다리는 것처럼. 하지만 그 말이 나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 잠깐……?

    순간 우연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머리카락이 쫙 곤두서는 것 같다. 아니다. 아저씨는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게 아니다. 다만, 더 큰 것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불현듯 엄마의 희번덕대는 허연 눈자위가 떠올랐다. 엄마는 왜 굳이 고등학교 1학년인 딸에게 이런 이상한 걸 심어 주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지나치게 과한 반응이었다. 그 반응은 상식적인 분노라기보다, 이성을 잃을 정도의 공포 반응에 가까웠다.

    순간 섬뜩한 느낌이 척추를 가로지른다.

    ‘언놈의 씨인지도 모를 거…… 어떤 개애새끼 씨나 싸지르는 꼴을 보느니…….’

    언놈의 씨인지도 모를 거, 개애애새끼 씨.

    자, 잠깐만. 그거…… 채팅 앱의 남자들을…… 말하는 게 아니었나?

    소름이 와락 끼쳤다. 이제야 알겠다. 엄마가 생각한, 엄마가 제일 무서워한 사태가 뭐였는지. 엄마가 진짜 걱정했던 ‘언놈’이 대체 누구였는지도.

    ……그리고 아저씨는 지금 엄마와 같은 두려워하는 것이다.

    “아, 아니야, 아니야, 아저씨 아니에요!”

    부르짖는 순간, 우연은 머리가 띵, 울리는 것을 느꼈다.

    ……아니야. 나도 어쩌면 알고 있었던 건지도 몰라.

    아니, 솔직히 말하면, 정확하게 느끼고 있었던 건지도 몰라.

    맙소사. 그렇다. 내 무의식은 아빠의 말투, 눈빛, 웃음, 내 몸을 주물러 대던 그 손길 하나하나에 담긴 그 더러운 의도와 욕구를 정확하게 느끼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그래서 그렇게 소름 끼치고, 벌레가 다니는 것 같고, 구역질이 났던 거였다. 아빠는 알면서도 제어하지 않았고, 엄마는 알면서도 막아 주지 못하고 피임약이나 심어 줄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 의지는 알면서도 억지로 무시하고 모른 척했다. 그걸 인정하면, 바로 들이닥칠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었으니까.

    ……지금처럼.

    “아아악, 아으아아! 정말 아니야! 아니란 말이야!”

    우연은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미친 듯이 계속 비명을 질렀다. 아저씨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우연아, 진정해. 그런 거 아니야. 내가 잘못 생각했어. 설마 엄마가, 아빠가, 설마. 아닐 거야. 아저씨 좀 봐, 미안해, 우연아.”

    우연은 머리를 움켜쥔 채 끅끅대며 대시 보드에 이마를 박았다. 쾅, 쾅. 미쳤어. 미쳤어. 쾅쾅쾅! 엄마는 미쳤어. 아빠도 미치고 엄마도 미쳤으니 내가 정신이 이상한 게 당연한 거야. 두세 시간 전만 해도 하늘을 날 듯 행복했던 것이 거짓말 같다. 쾅쾅쾅, 쾅쾅. 나는 여전히 지옥에 있었고, 잠시 마약을 한 대 맞고 천국에 왔다는 착각을 했던 것뿐이다. 쾅쾅.

    “그만.”

    잠시 숨을 멈췄다. 아니,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아저씨의 두 팔이 등과 어깨를 짜부라뜨릴 것처럼 누르고 있었다. 우연은 아저씨의 가슴에 뺨을 댄 채 숨을 헐떡거렸다. 아픈 것도 자괴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제는 부끄러움조차 날아갔다. 아저씨가 끌어안고 짓누르는 힘은 생각보다 거대했고, 귓가로 느껴지는 숨결은 단정하지 못했다. 가슴 속으로 무지막지한 해일이 들이닥쳤다.

    “미안해 우연아. 미안해, 내가 오해했어.”

    “아저씨, 나, 앱으로 사람 만나지도 않았고 이상한 짓도 안 했어요. 누구하고도, 아무하고도, 정말이에요. 나 그런 이상한 애 아니야, 정말 아니라고…….”

    “알아, 알았어. 미안해 우연아. 그동안 오해해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우연은 그의 팔에 갇혀 한참을 몸부림쳤다. 그의 팔은 쇠로 만든 사슬처럼 그녀를 옥죄었다.

    진정이 되기까지 시간이 한참 걸렸다. 아저씨는 그 상태 그대로 그 긴 시간을 견뎌 주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우연은 그제야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아저씨가 어깨를 꿈틀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저씨?”

    이런 맙소사. 아저씨는 자신을 안은 채 고개를 위로 들고 울고 있었다. 눈물은 이미 그의 목까지 타고 내려와 옷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얼마나, 힘들었어?”

    “……아저씨.”

    “얼마나 힘들었니.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어. 너 혼자, 지금까지, 어떻게 버텼어…….”

    우연은 눈을 감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댄 채 그의 긴 흐느낌을 들었다. 그는 자신과 달리 울부짖음조차 깊고 조용했다. 그의 심장 소리는 부드럽고 안온했으며 가슴은 따뜻했고, 품은 넓고, 자신을 단단하게 끌어안은 팔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우연은 그가 자신의 마음에 온전히 이입하며 자신의 기나긴 고통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의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이젠 아프지 마라. 다시는 그렇게 힘들지 마라. ……내가 그리 만들어 줄게.”

    우연이 의아한 듯 품에서 바르작대더니 고개를 든다. 이원은 눈물에 젖은 새까만 눈동자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 멍 자국으로 얼룩덜룩했던 얼굴은 이제 뽀얗고 매끄러웠고, 길고 숱이 많은 속눈썹은 눈동자에 짙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살구씨처럼 크고 동그란 눈, 먹물처럼 새카만 눈동자가 눈물에 흥건히 젖을 때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애처로웠다. 몇 시간 전으로 되돌릴 수만 있다면, 이 아이가 며칠 전처럼 발랄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 이원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만들면 돼.

    불현듯, 강력한 목소리가 치밀었다.

    이원은 그 순간 우연의 앞에 나타난 장애물을 불도저로 모조리 밀어 내고 산산조각 내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 작은 자갈 조각 하나 남지 않도록, 완전히 가루처럼 바스러지도록.

    “많이 힘들었지. 이젠 괜찮아질 거야.”

    이원은 우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세상에서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없고, 사람이 감당하지 못할 시련은 없어. 하느님이 그런 건 허락하지 않으신다. 내가……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마.”

    Deus qui non patietur vos temptari super id quod potestis,

    그분께서는 여러분에게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게 하지 않으십니다.

    sed faciet cum temptatione etiam proventum ut possitis sustinere.

    그리고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십니다.

    이 절대 명제를 이원은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우연의 ‘벗어날 길’로 하느님이 자신을 보내신 거라면, 이원은 기꺼이 그 일을 끌어안을 생각이었다.

    “하나씩 되돌리면 된다. 하나씩 하나씩 하면 돼. 부모님을 떼어 냈고, 접근하지 못하게 막았고, 네가 원하는 학교로 와서 새로운 인생도 시작했어. 앞으로도 문제가 하나씩 나타날 때마다 그렇게 차근차근 처리하면 돼. 못 할 건 없어.”

    “……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동원할 수 있는 것도 모조리 동원하마. 만에 하나 마음이 불안정해져도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안정적인 상태로 되돌려 놓을게. 그러니 우연이 너는 아무 염려 마라.”

    돈이 필요하면 폭포처럼 쏟아붓고, 위험하다면 철통같은 환경을 만들면 돼. 인맥이 필요하면 거미줄처럼 연결해 주고, 정신이 불안정해지면 평생 약을 써서라도 안정적인 상태를 만들어 주마. 정서적인 지지 기반이 필요하면, 내가 단단한 바위가 되어 줄게. 그러니 너는 지금처럼만 있어 주면 된다. 딱 지금처럼만.

    이원은 잠시 말을 멈췄다. 자신의 무지막지한 열망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지금은 이 아이와 거리를 두어야 할 때였다. 이 마음이 과연 옳고 선한 것인지조차 확신이 들지 않았다.

    이 아이의 ‘벗어날 길’은 과연 그분께서 마련하신 걸까?

    지금 내가 이렇게 열렬히 돕고자 하는 마음도 정말 그분에게서 온 것일까?

    알 수 없다. 그분의 뜻은 너무 크고, 그분의 시간은 너무 길다. 미련한 인간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다만 확실한 것은, 이 작은 아이를 보호하고 행복하게 해 주고자 하는 막무가내의 열망뿐이었다.

    우연이 천천히 손을 뻗는다. 가늘고 하얀 손가락이 이원의 뺨을 찬찬히 훑어 내린다. 이원은 그제야 자신의 얼굴이 흠뻑 젖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원은 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는 대신 우연의 손길을 그대로 방치했다. 움직임은 느리고 조심스러웠으며, 어떤 감정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이원은 그 손을 자신의 손으로 감싸 잡고 뺨에 지그시 눌렀다. 옳지 않다. 손과 맞닿은 곳으로 열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이것은, 옳지 않다. 이원은 힘껏 눈을 감았다.

    “전화기 좀 줘 볼래?”

    띠띠띠, 띠띠띠.

    우연이 패턴을 해제한 전화기를 아저씨에게 내밀자, 아저씨는 자신의 번호를 단축 번호로 등록했다. 우연의 단축 번호 1번은 원래 아빠였는데 지금은 차단된 상태였다.

    “1번으로 등록했어. 무슨 일이 생기면 1번을 누르면 돼. 경찰에 신고하는 게 무서우면 나한테라도 전화해. 내가 대신 처리해 줄게.”

    우연은 단축 번호 1번에 적힌 ‘한이원’이라는 글자만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분명히 아저씨가 거리를 둘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가까이 끌어당기는 것 같다.

    그의 호의는 늘 이해할 수 없었다. 항상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풀고, 의지할 담벼락이 되어 주었다. 그의 헤아림은 인간의 영역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우연의 어깨를 가만히 토닥이며 말했다.

    “다음엔 그렇게 무서운 일 있으면 도망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도망치는 거야. 그 자리에서 버텨 낸다고 힘든 상황이 달라지는 법은 없어. 알았지?”

    “하지만…… 아저씨는 도망치지 않았잖아요. 아저씨는, 무섭고 힘들어도 최선을 다해 맞서고 계시잖아요. 나처럼 무작정, 비겁하고 약해빠지게 도망치지 않으셨잖아요…….”

    아저씨는 자신보다 훨씬 용감했다. 적어도 두려워하는 것에서 도망치는 대신 맞서서 버틸 용기가 있었다. 아저씨는 짤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난 도망칠 곳이 없었던 것뿐이야.”

    “…….”

    “무서울 때 도망치고 숨는 건, 인간이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는 증거야. 비겁하고 약해빠진 게 아니야. 괜찮아.”

    우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임플라논……? 이건 내일 당장 병원에 가서 빼도록 하자. 그동안 얼마나 신경이 쓰였을까.”

    순간, 속에서 알 수 없는 반발심이 치솟았다. 싫, 싫어요. 안 가. 안 해요! 발작처럼 튀어나오는 대답에 아저씨가 황급히 말을 덧댔다.

    “혼자 가라는 거 아니야. 민정 씨나 송 여사님한테 부탁, 아니, 그래그래 알았어.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게 싫으면 아저씨가 같이 가 줄게.”

    “싫어. 싫어요. 안 가요. 안 빼요. 그냥 둘 거야! 안 뺀다고요.”

    아저씨는 더욱 맹렬해진 거부 반응에 아연한 얼굴이었다. 왜 이런 걸 계속 놔두겠다는 거야? 나라면 이따위 것은 살을 잡아 뜯어서라도 빼고 싶을 텐데. 아저씨의 당혹한 눈은 그리 묻고 있었다. 물론 아저씨는 자신처럼 그렇게 격하게 말하지는 않는다.

    “놔두려는 이유가…… 있니?”

    “……펴, 편하고, 좋아요. 뺄 이유가 없어요.”

    우연이 눈동자를 아래로 내리깔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이원은 기가 막혔다. 편하다? 좋다? 뭐가 편한데? 피임약이 편한 부분은 단 한 가지 아닌가? 그는 순간적으로 분노를 느꼈고, 잠시 후 등 뒤를 타고 오르는 한기에 멈칫했다.

    나는 왜 화가 날까? 그냥 놔두겠다는 말을 이해할 순 없지만, 화를 낼 일은 아니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너무 낯설었다. 우연이 변명처럼 말을 덧댄다.

    “저, 저기, 그게요, 생리통이나 생리 전 증후군 심한 애들 중에서, 치료하려고 이런 거 시술하는 애들 가끔 있대요.”

    말도 안 되는……!

    이원은 총알처럼 튀어나오려는 말을 눌렀다. 우연은 그의 얼굴을 곁눈질하더니 어깨를 움츠리며 뒤로 물러앉았다. 하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고집스럽게 말을 이었다.

    “정말이에요. 저도 생리통도 줄고 기간도 짧아져서 좋아요. 그냥 놔둘 거예요.”

    “겨우…… 그런 이유 때문에?”

    “겨우 그런 이유 아니에요! 그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요? 아저씬 모르잖아요! 얼마나 아프고 기분 더럽고 지겨운지 모르잖아요! 난 자궁이든 난소든 모조리 잘라 내서 바닥에 놓고 몽둥이로 두들겨 패서 박살을 내고 싶다고요! 아주 바닥에 박박 갈아서 뭉개 버리고 싶단 말이에요!”

    우연은 지뢰라도 밟은 것처럼 맹렬하게 분노를 터뜨렸다. 눈물에 젖어 있던 동그란 눈에는 순식간에 적의가 이글대고, 꽉 움켜진 작은 주먹은 바들바들 떨렸다.

    “그리고, 아저씨 말대로 이거 뺐다가, 나중에 무슨 일이 나면 어떡하실 건데요!”

    “무슨 일이 일어나긴 무슨 일이 일어나. 원래대로 돌아가는 거지.”

    “그랬다가 제가 정말 조증이 오면요? 갑자기 남자랑 미친 듯이 자고 싶어지면요?”

    이제 걷잡을 수 없는 말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우연은 발갛게 물든 얼굴로, 목을 비틀어 짜듯 속삭였다.

    “아무 남자하고 막 자고 돌아다니다가 아기라도 생기면 전…… 어떡해요? 낳아요? 죽여요?”

    이원은 점점 미칠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없다고 안심시키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조증 상태의 성욕에 대해서는 이원도 아는 바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연아, 진정해. 이 얘긴 나중에 하자. 아직 확진도 아니고, 증세가 크게 나타난 것도 아니잖아. 왜 자꾸 극단적인 얘기만 하니?”

    이원은 자신이 끝없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이 아이의 공포와 불안감을 어떻게 메꾸어야 할까. 이 폭주를 어떻게 막아야 할까. 눈앞이 캄캄했다.

    “아저씨도 그렇게 생각했잖아요. 누드모델 해 달라고 한 거, 기가 막히다고 했잖아요. 채팅 앱에서 처음 만난 남자들하고 이상한 짓 하고 돌아다녔다고 생각했잖아요. 아빠 말이 진짜라고 생각하고 속으로 경멸하고 있었잖아요…….”

    “왜 그렇게 생각해! 그러지 않았어!”

    “거짓말!”

    이원의 입이 턱 막혔다. 우연의 비난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고, 그의 입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그는 뒤늦게 더듬대며 누더기 같은 변명을 덧댔다.

    “아니야. 네 행동을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었어.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알지 못하는 아픈 이유가…….”

    “아픈 이유 같은 거 없으면요? 그냥 궁금해서, 해 보고 싶어서, 해 보니 짜릿해서 계속 잤으면요? 그랬다면 아저씨는 저를 어떻게 생각하셨을 건데요?”

    우연이 눈을 크게 뜨고 반격하기 시작했다. 처참하게 까발려진 마음은 자괴감과 맞물려 순식간에 극단으로 치달았다.

    “해 보고 싶으면 할 수도 있지 않아요? 한번 해 보니 좋아서 눈이 뒤집힐 수도 있죠. 그러면 어때서요? 남자랑 자는 게 맞아 죽을 만큼 큰 잘못은 아니잖아요.”

    이원은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목이 염산에 녹는 것처럼 아프다. 얼핏 들으면 우연의 사고가 건강하지도 상식적이지도 않은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 이 위악적인 반응은 우연의 애처로운 방어 기제였다. 이럴 때마다 이원은 우연이 그동안 얼마나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몰리면서 살아왔는지 뼈저리게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우연아, ……성관계는 배우자나 연인 관계에서만 허락되는 거야. 상대를 깊이 신뢰하고, 존중하고, 사랑한다는 마음의 표현이야. 그런 마음 없이 몸의 쾌락만 요구하는 관계라면 얼마나 위험하고 허망하겠니.”

    한 마디, 한 마디, 대답하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이 깊은 상처를 위로하고 잘못된 방향을 바로잡아 줄 수 있을까. 내 말에 자칫 더 상처를 받지는 않을까. 하지만 우연은 눈썹을 파르르 떨며 반박한다.

    “아저씨, 지금이 조선 시대는 아니잖아요. 연애나 결혼이 싫은 사람은 그것도 못 해요? 법으로 못 하게 정한 것도 아니잖아요. 허망하긴 뭐가 허망해요? 맛있는 음식은 애인이랑 먹든, 모르는 사람이랑 먹든 상관없이 맛있는 거잖아요.”

    이원이 무거운 얼굴로 침묵하자 우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재우쳤다.

    “아저, 아저……씨는 그런 식으로 안 해 봤어요? 정말 사랑하는 사람하고만 했어요? 사랑하지 않는 여자랑 한번 해 보고 싶다는 생각도 안 해 봤어요? 단 한 번도?”

    “……진우연!”

    “왜 화를 내세요? 나, 나는 아저씨가 묻는 거 다 대답했어요. 제일 창피한 것까지 모조리 다! 근데 아저씨는 왜 자기 얘긴 안 해요? 재밌어요? 난 지금 쪽팔려서 죽을 것 같은데 아저씬 재밌냐구요!”

    새까만 눈동자에 깃든 절박함을 느끼는 순간, 심한 현기가 치밀었다. 알몸으로 매를 맞으며 자백을 강요당하는 것 같다. 나는 무슨 자신감으로 예까지 혼자 내려왔을까. 이런 반응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손 원장님과 함께 올걸. 좀 진정되고 내일 올걸. 아니 차라리 오지 말걸. 이원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안 했어.”

    순간 우연의 눈이 의심으로 물들더니 잠시 후 눈에 암담한 좌절감이 차오른다. 이원은 우연이 자신의 대답을 오해했음을 깨닫고 황급히 말을 덧댔다.

    “섹스, 한 번도 안 해 봤어.”

    저도 모르게 튀어 나간 대답에 이원은 눈을 크게 떴다. 이런 대답까지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대답은 이미 튀어나왔다. 무시무시한 침묵이 두 사람을 감쌌다.

    잠시 후 우연의 얇은 입술이 불신을 머금고 비틀린다. 들리지 않는 질문이 송곳처럼 그를 헤집어 댄다.

    왜요? 거짓말이죠? 서른두 살이나 먹었는데? 신학교는 10년 전에 그만두셨잖아요.

    이원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그는 신학교를 나온 후에도 정결한 삶에 대한 열망과 의지가 여전히 강력했고, 혼전 성관계에 대한 거부감도 상당했다.

    하지만 이런 말을 입 밖으로 당당하게 떠들기엔 자신은 너무 부끄럽고 부족한 인간이었다. 이런 가치관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신념이, 자신과 대척점에 서 있는 우연을 정죄하는 방향으로 흘러갈까 봐 두려웠다. 그는 우연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대답할 수 있는 선을 신중하게 가늠하며 입을 열었다.

    “……성당에선 결혼 외의 관계에서 성행위를 금하고 있어. 그래서.”

    길고 짙은 속눈썹이 짠물에 젖은 채 깜박거렸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정말이요? 서로 사귀는 사이라도요? 법에 걸리는 것도 아닌데요?”

    이원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현대를 살아가는 어지간한 연인들은 고행 같은 금욕 대신 관계 후 고해와 보속을 택하긴 하지만, 그것이 대죄로 정해져 있는 것은 사실이었고, 그것을 충실히 지키고 있는 사람이 드물지만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 하, 하하히히히.

    우연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웃었다. 그런 규정이 21세기인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성욕은 식욕이나 수면욕과 마찬가지로 본능 아닌가? 열다섯 열일곱에 결혼하는 조선 시대가 아니잖아. 40, 50까지 결혼을 미루는 사람도 많고, 연애만 하는 비혼족도 얼마나 많은데. 저런 규정을 문자 그대로 지키고 있는 아저씨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우연은 그것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더 중요한 것을 물어볼 것이 있었다. 꼭 알아보아야 할, 하지만 쉽게 대답해 주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우연은 고개를 들고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저씨는 혹시 성욕……이 없어요? ……그래서?”

    이원은 짧게 헛숨을 들이켰다. 어떻게 저렇게 대놓고 무례한 질문을 할 수 있을까. 우연은 여전히 묻지 말아야 할 선에서 멈추지 못했다.

    하지만 이원은 대답을 거부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저 아이가 물으면 대답을 해야만 하는 프로그램이 머릿속에 강제로 설치된 것만 같다.

    그리고 저 아이는 지금 더러운 호기심으로 묻는 게 아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절박하고 다급했다. 이원은 어렵게 입을 뗐다.

    “……그럴 리가.”

    없지 않다. 그럴 리가 없다. 그는 늘 그 문제로 전쟁을 치르며 살아왔다. 아무리 절제력과 의지가 강하다 해도 힘겨운 싸움이었다. 우연은, 드디어 자신이 묻고 싶은 것을 입에 올린다.

    “그럼 어떻게 참아요? ……노력하면, 참아져요?”

    아아, 이원은 그제야 우연이 이렇게 자신을 절박하리만치 몰아붙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파랗게 날이 서 있던 우연의 눈에 천천히 눈물이 괴기 시작했다.

    “아저씨, 만약에 제가, 나, 나중에, 증세가 좀 심해져서, 성욕이 강해져도, 다른 사람하고 미친 듯이 자고 싶어져도, 참으려고 하면 참을 수 있어요?”

    “…….”

    “한강 다리에 서서 지나가는 남자 붙잡고 한 번 자자고 조르고 싶어도, 의지로 참아져요? 훈련하면 되는 거예요? ……지금부터라도 훈련하면?”

    대답해 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게 철저하게 훈련받고 스스로를 다스려온 자신도 활활 타오르는 욕구에 못 이겨 스스로 풀어야 할 때가 있다. 다른 사람보다 성욕이 강해서인지는 모르지만, 욕구 불만이 오래 쌓이면 나중에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몽정을 겪어야 했고, 자위행위 말고는 그것을 도저히 다스릴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찾아오는 끔찍한 자괴감을 생각하면, 그런 짓을 권할 순 없다.

    이원이 끝까지 침묵하자 우연의 눈시울에 고여 있던 맑은 물이 끝내 툭, 터지고 만다. 이번에는 이원이 손을 뻗어 우연의 뺨을 천천히 감싸 안았다. 우연의 작은 몸이 다시 그의 품으로 무너져 들어온다. 이원은 그녀가 하고 싶었던 말이 머릿속으로 홍수처럼 밀려들어 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무서워요. 내가 이상해지면, 나 자신을 잃고 이상한 짓을 하고 다닐까 봐.

    그런 나를 아저씨가 경멸하게 될까 봐.

    아저씨, 만약에 그래도,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있어도, ……제발 나를 경멸하지 말아 주세요. 여전히 나를 기특해하고, 예뻐하고, 자랑스러워하고,

    ……사랑스러워해 주세요.

    그녀는 이원에게 안긴 채, 가만히 속삭였다.

    “아저씨, 난 지금 그냥 이대로만 살고 싶어요. 딱 지금 요만큼만요.”

    “……그래.”

    “딱, 지금처럼만.”

    “그래, 그래.”

    이원 역시 그녀의 말을 조용히 되풀이했다. 딱 지금처럼만, 더 이상 다가오지도 말고 물러서지도 않는 이 상태 그대로. 이원은 우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너는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나는, 괜찮지 않았지만, 너는. 너만은.

    * * *

    이원에게 성욕이란 닫혀 있는 판도라의 상자였다. 열리면 그곳에서 어떤 것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항상 그것을 갈망하면서도 두려워했다.

    그는 해갈되지 못한 욕구에 늘 시달렸다. 그는 빈말로라도 성욕이 담백하다고 할 수 없었고, 음란한 망상에 젖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었다. 잠을 못 자고 피곤할수록 욕구는 기승했다.

    그는 그럴수록 자신의 마음과 환경을 철저하게 통제했다. 그에게 남은 유일한 쾌락은 성욕이었다. 그래서 제대로 절제하지 않으면 한계를 모르는 육욕에 탐닉해 진창을 구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정결한 삶에 대한 의지와 엄중한 죄의식 역시 본능만큼이나 힘이 셌고, 이원의 내면은 그 셋이 충돌할 때마다 만신창이가 되곤 했다. 그는 아무 가책도 없이 쾌락을 즐기는 인간들이 극도로 경멸스러우면서도 그 이면에서 그들을 끔찍하게 부러워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사제성소에 대한 확신이 있던 그였지만, 그 문제로 가끔 회의감을 느끼곤 했다.

    ‘주님. 제가 당신의 종으로 평생 정결하고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십대가 지나면, 군대만 다녀오면, 나이를 적당히 먹으면 점점 견딜 만할 거라 믿었지만, 점점 쌓여 가는 성욕은 반발이라도 하듯 해가 갈수록 서슬 푸르게 날이 섰다.

    성욕 앞에서 인내심이란 얇게 해어진 걸레짝 같았다. 의지만으로는 도저히 억누를 수 없을 때도 종종 있었다. 욕구가 남들보다 강한 것인지, 혹은 자제력이 남들보다 부족한 것인지, 다른 남자들도 다 비슷하게 살고 있는지, 혹은 자신만 이렇게 번번이 무너지는지 이원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체격이나 근력이 훨씬 좋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어떤 때는 집요한 욕구가 비정상적으로 느껴졌다. 이건 중독일까, 난 변태성욕을 가진 게 아닐까 하는 의심도 끊임없이 솟았다. 진심 어린 참회나 두 시간이 넘는 고된 운동, 저녁마다 바치는 기나긴 묵주 기도도 더러운 욕정을 완전히 없앨 수 없었다. 더러운 생각은 자신을 조롱하듯 불쑥불쑥 치밀어 의지를 뭉개 버렸다.

    수음 행위가 잦은 편은 아니었다. 그는 한계에 몰릴 때까지 인내하며 자신을 다스렸다. 하지만 한번 무너지면 그날 밤은 고스란히 진창이 되었다. 하룻밤에 예닐곱 번씩, 심할 때는 밤새워,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 그 짓거리를 반복한 적도 있었다. 발작처럼 밀려든 욕정은 이성과 기력과 자존감을 완전히 바닥까지 드러내고서야 썰물처럼 물러났다.

    요즘은 아버지가 미현과의 결혼을 강제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한다. 이원은 미현과의 결혼 생활에서 많은 것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섹스 하나만은 기대했다. 그것 하나만 해결되어도 좋을 것 같았다. 비웃음이 나온다. 정작 자신은 신뢰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비굴하게 결혼하면서 그녀의 부도덕을 경멸하고, 그러면서도 그녀와의 허망한 육체관계를 몰래 바라고 있지 않은가.

    ― 아니 그거면 됐지 뭘 더 바라. 대체 사람들이 결혼을 왜 한다고 생각하는데? 안정을 찾으려고? 편해지려고? 외로워서? 자식을 보고 싶어서? 웃기시네. 다들 섹스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 기왕 결혼하기로 했으니 하루 다섯 번이든, 열 번이든 원 없이 풀어 봐. 발정 난 중고등학생도 아니고, 나이 서른둘이나 돼서 종일 욕구 불만에 시달리는 것도 지겹잖아. 몽정 때마다 몰래 치우는 거 창피하지도 않아? 송 여사가 그거 모를 거 같아?

    ― 누군지 빤히 아는 신부님들께 창피스러운 고백을 할 필요도 없으니 얼마나 좋아.

    ― 됐고, 다아 됐고, 결혼하면 섹스 하나는 맘껏 할 수 있으니 본전이나 확실하게 뽑으라고.

    속에서 빈정대며 지껄이는 목소리를 잠시 방치했다. 내 마음이 이렇게나 만신창이로 무너져 있었던가, 이원은 불현듯 실감했다.

    옆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올라온다.

    “아저씨, 힘들었어요?”

    우연이 응시하는 시선이 맑고 곧다. 새까만 눈동자가 블랙홀처럼 자신을 빨아들이는 것 같다. 몸이 엿가락처럼 길게 뭉개져서 우연의 내면으로 쭈욱 빨려 들어간다. 몸이 가늘게 떨렸다. 무엇에 홀린 듯, 또 다른 이원이 다시 대답한다.

    “힘들었어.”

    이원은 빙그레 웃었다. 입 밖으로 나가지 말아야 할 말들이 손가락 사이로 자꾸 기어 나가려 한다.

    “많이?”

    “……많이.”

    눈 밖으로도, 나가지 말아야 할 것이 굴러떨어졌다.

    “손 원장님께 상담 치료 계속 받을 거지? 다른 선생님으로 알아봐 줄까?”

    10시까지 정확하게 10분 남겨 두고 이원은 우연을 기숙사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그 며칠 사이, 수국의 향기는 더욱 진해졌고, 새하얗던 꽃은 이제 푸르스름한 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 위로 생뚱하게 튀어나온 해바라기 군락은 환한 가로등 아래에서 여전히 황금빛으로 위풍당당했다.

    “아저씨가 원하시면 계속 받을게요.”

    우연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손 원장을 신뢰해서 계속 치료를 받는 게 아니다. 나를 전적으로 신뢰하니, 내가 신뢰하는 손 원장을 믿겠다는 것이다. 아까는 그것이 고맙고 기특했는데, 지금은 부담스러워 숨이 막혔다.

    우연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묻는다.

    “손 원장님이 아저씨도 치료하신 거 맞죠?”

    “맞아. 믿을 만한 분이야. 정신건강의학 쪽에서 그분처럼 제대로 된 상담 치료까지 제공하는 분은 많지 않아.”

    “만약에 병원 치료에 보호자가 필요하면, 아저씨가 해 주실 수 있으세요?”

    “당연하지 않니.”

    이원은 대답을 해 놓고 잠시 웃었다. 우연도 웃는다. 이제 후견인도 아니니 당연하지 않은데 왜 당연하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연은 그 대답이 몹시 기쁜 듯했다. 하얗고 자그마한 얼굴로 짙은 안도감이 퍼져간다.

    “아저씨, 나중에, 만에 하나 나중에요.”

    “…….”

    “제가 이상해지면 아저씨가 알려 주세요. 당사자는 모른다면서요. 자기가 정상이라고 생각한다면서요. 그래도 아저씨가 말하면 무조건 믿을게요.”

    “그래.”

    “제가 약을 먹어야 한다면, 아저씨가 그 약을 먹어야 한다고 말해 주세요. 그래야 더러운 짓, 이상한 짓 안 하게 된다고 단호하게 말해 주세요. 그러면 무조건 먹을게요.”

    “……그래.”

    “제가 안 먹겠다고, 나는 멀쩡하다고 우기면 억지로 먹이세요. 그래도 안 먹으면 음식이나 음료수에 몰래 타서 먹이세요. 절대 안 먹였다고 거짓말하셔도 돼요. 제가 지금 미리 허락해 드리는 거예요.”

    ……제기랄.

    눈 아래로 뻐근하고 근지러운 감촉이 다시 모여들었다. 이원은 눈시울에 괸 그것이 툭 터져 내려가지 않도록 눈을 크게 떴다. 우연은 이제 힘껏 웃고 있었다. 그 얼굴마저 말갛고 곱다고 느끼는 자신이 미친 것 같았다.

    “정신병 약이든, 청산가리든, 아저씨가 몰래 타서 먹인다면 다 먹을게요. 아저씨가 그렇게 행동하시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을게요. 지금, 미리, 다 허락해 드리는 거예요.”

    “……너는, 어떻게 나를 그렇게 믿는 거니.”

    이원은 쉰 목소리로 물었다. 우연이 희미하게 웃는다.

    “그냥 믿어져요. 그냥, 그냥 막 믿어져요.”

    이원은 우연과 자신 사이로 작은 터널이 뚫린 기분이 들었다. 어둡고, 음습하고, 남에게 결코 보여 줄 수 없는 지하 터널.

    우연은 철로 된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며 뒤를 돌아본다.

    “아저씨, 오늘 했던 얘기는 서로 비밀로 하는 거죠?”

    “당연하지.”

    얼룩진 얼굴로 애써 활짝 웃어 보이는 모습에, 이원은 가슴이 쥐어뜯기는 것 같았다.

    “저는 이제 괜찮아요, 아저씨. 걱정 끼쳐 드려서 죄송하고, 앞으로 다시는 안 그럴게요.”

    그녀는 무릎을 살짝 굽히고 머리 위로 커다란 하트를 그려 보이며 그에게 인사를 한다. 이원은 저 동작을 볼 때마다, 저 인사를 받았을지도 모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알 수 없는 적의를 느꼈다.

    “많이 늦었는데, 서울까지 조심해서 올라가세요.”

    웃음기 어린 인사말이 슈거 파우더처럼 훅, 흩어지며 온몸으로 내려앉는다. 우연이 고양이처럼 동그란 눈을 반짝이며 생긋 웃어 보인다.

    나는 너를 어디까지, 언제까지 지켜줄 수 있을까.

    아버지의 유언을 알기 전에 너를 알았으면, 나는 과연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이원은 순간, 강렬한 성욕을 느꼈다. 밑도 끝도 없이 너무나 맹렬한 충동이었다. 그는 드디어 자신이 몹시 위험한 선 위에 올라섰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너를 어디까지, 언제까지 인내할 수 있을까.

    알 수 없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고속도로에서 이원은 갓길에 차를 멈췄다. 한 시간 가까이 가라앉지 않는 하반신이 고통스러웠다. 잡아 누를수록 치솟는 충동은 다른 때와 달리 정확히 하나의 대상만을 향했고, 그래서 훨씬 위험하고 암담하게 느껴졌다.

    이원은 숨을 몰아쉬며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 Hello.

    약간 나른하고 달콤한, 잠에서 막 깬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미현아.”

    ― 어머, 이원 오빠?

    부산하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지금 10시면 뉴욕은 아침 8시. 지금 자다가 일어난 걸까. 미현이 침대에서 일어나 자리를 옮기는 듯, 달그락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미현아. 결혼 좀 일찍 하면 안 될까? 굳이…… 2년 후 계약 끝날 때까지 미룰 필요는 없잖아. 준비는 다 해 둘 테니, 잠깐 들어와서 결혼식 올리고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면 어떨까.”

    ― 어머나, 아침부터 난데없어라.

    수화기 너머에서 짤막한 한숨, 혹은 웃음 비슷한 소리가 들렸다. 이원은 미현이 내켜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감지했다.

    이원은 눈을 꽉 감은 채 쓰게 웃었다. 하긴. 미현 역시 이 결혼을 원치 않으니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고 싶겠지. 계약 기간 동안 뉴욕에서 모리스와 머무르는 기간을 최대한 길게 남겨 두고 싶을 것이다.

    ― 오빠가 갑자기 이렇게 서두를 줄은 몰랐어. 반갑긴 한데 궁금하네. 혹시 무슨 일 있어? 외삼촌이 갑자기 협박이라도 했어?

    “아니. 그런 건 아니야.”

    ― 그런데 왜 갑자기 그래. 누가 들으면 오빠 몸이 바짝 달은 줄 알겠어. 이런 얘기 할 거면 보고 싶어 죽겠다는 말이라도 먼저 해 주든가.

    미현은 종달새처럼 맑은소리로 웃었다.

    ― 오빠, 미안한데 조금만 기다려 줘. 나도 일생에 한 번뿐인 결혼식인데 번갯불에 콩 볶는 것처럼 급하게 해치우고 싶진 않아. 가구부터 옷, 인테리어, 같이 키울 동물들, 가족계획, 그런 거 오빠하고 하나씩 하나씩 의논하고 잘 맞춰 가면서 시작해 보고 싶어.

    아직 잠에 취한 듯한, 나른하고 달콤한 목소리를 듣는 동안 이원은 뒤늦게 의아해졌다.

    내가 왜 미현이에게 전화를 했을까? 지금 미현이하고 섹스라도 하고 싶은 걸까?

    머리가 깨질 것처럼 징징 울려 댄다. 정말 죽고 싶다. 이곳을 잘라 내기라도 해야 이 지긋지긋한 욕구에서 해방될까.

    “휴가 때 들어오는 건 가능하지? 설마 약혼식도 뉴욕에서 해야 하는 건 아니지?”

    ― 물론 오빠가 와 준다면야 바랄 게 없지만 벌써 휴가 첫날 퍼스트 클래스 티켓을 예약해 놨어. 얼마 안 남았으니 조금만 기다려 줘.

    에어컨에서 나오는 공기가 유난히 써늘하게 느껴졌다. 통화를 종료한 이원은 운전대에 이마를 댄 채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최홍연 실장.”

    띠띠띠띠. 신호음이 가더니 얼마 안 가 “예 전무님.” 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밤늦게 미안합니다. 뉴욕행 비행기 표 좀 수배해 주세요. 제일 빠른 날짜로.”

    눈앞에 놓인 터널은 깊고 어둡고 점점 좁아진다. 이원은 바닥이 진흙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진흙에 잠긴 발은 점점 깊이 빠져들어 간다.

    운전대에 이마를 댄 채 벨트를 풀었다. 여기가 고속도로 갓길인 것도, 지금 미친 짓을 하려는 것도 아는데,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우연이에게 말해 줬어야 했을까. 참을 수 있는 거, 아니야.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나는 아니었어. 나는, 절대, 아니었어…….

    갓길에 세워진 차는 긴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옆으로 다른 차들이 쌩쌩 지나가는 동안, 어둠에 묻힌 그 차는 가끔 미세하게 흔들렸다. 이제 망상은 통제되지 않고 머릿속에서 날뛴다. 거친 날숨, 억눌린 신음, 미지근한 열기, 눅눅한 비린내, 온갖 추잡한 상상과 끔찍한 자괴감이 훑고 지나간 차 속은 어느덧 서서히 적막해졌다.

    한쪽 눈꼬리로 흘러내린 짠물이 뺨에 얽힌 땀방울과 뒤섞여 무릎 위로 떨어진다.

    벌써 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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