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신의 선물, 선물의 대가
우연이 이원미술관에 도착한 것은 저녁때가 다 되어서였다. 하지만 낮이 길어져서인지 해는 여전히 쨍쨍하고 더웠다.
우연은 가방에 든 지갑을 만지작대며 히죽 웃었다. 첫 월급을 받았다. 25만 원. 토요일에 반나절씩만 일하고 번 것치고 나쁘지 않다. 토요 데생 수업에 보조 교사 한 명을 뽑을 때 운 좋게 합격했다. 학교도 별로고 정식으로 입시 미술을 해 본 것도 아니라서 중간에 잘리지 않을까 겁도 났지만, 수강생들은 날이 갈수록 진우연 선생님만 불러 댔다. 지금처럼만 하면 잘리지 않고 오래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처음으로 번 돈이었고, 그것도 그림으로 번 돈이었다. 아저씨에게 맛있는 밥을 사 드리고 싶었다. 아저씨에게 받는 용돈이나 후원금으로 사 드리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 내가 번 돈으로 사 드려야 의미가 있지.
그때 기숙사에서 돌아간 후, 아저씨에게선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다. 이제 연락은 홍연 아저씨나 정 관장님을 통해서 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월급을 받으면 아저씨를 직접 찾아뵙고, 밥을 사 드리고,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다. 아저씨는 오늘 미술관에 있을 것이고, 별다른 일정은 없다고 들었다.
동물 과자를 보사삭보사삭 먹으며 미술관 로비로 들어섰다. 전화를 할까, 망설이던 우연은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아저씨가 왜 아무 연락도 없이 기숙사 앞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아저씨가 놀라는 얼굴이 보고 싶었다. 아저씨가 놀라서 당황하는 모습은 정말 귀여운데, 점잔을 떠는 습관이 몸에 배 있어서 여간해선 그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다.
“미술관에서 아저씨 사무실은 회의실 옆에 있다고 들었는데…….”
우연은 엘리베이터에 적힌 층별 위치도에서 이사장실을 찾아보았다. 이사장실은 나와 있지 않았지만 회의실은 있었다. 7층. 꼭대기 층이구나. 우연은 실쭉 웃었다.
드라마나 만화책에 나오는 다른 사장님처럼, 아저씨도 유리창 앞의 커다란 의자에 앉아서 담배를 꼬나물고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계시려나. 아, 물론 점잖고 예의 바른 아저씨니까 그러시진 않겠지만, 만약에 진짜 그렇게 앉아 계시면 얼마나 멋질까.
“아우우우, 죽겠다. 미치겠네 정말.”
우연은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을 쥐어뜯었다. 상상만 해도 너무 좋다. 너무 너무 너무 멋질 거야. 담배 따위 없어도, 다리 따위 꼬지 않아도 멋있을 거야. 밥을 먹어도 멋있고 잠을 자도 멋있고 심지어 화장실에 앉아 계셔도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조각상처럼 멋있을 것이다. 불경한 상상을 한 우연은 머리카락을 힘껏 잡아당겼다.
회의실 옆에는 사무실이 하나밖에 없었다. 우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방문에는 ‘재단 이사장 한이원’ 같은 멋진 명패가 붙어 있지 않았다. 방 호수조차 없이, 달랑 문 하나뿐인 작은 사무실이었다.
여기 맞나? 어디서 잘못 주워들은 건가? 아저씨가 매일 출근하는 곳은 미술관이 아니고 여의도라서 여기는 대충 만들어 놓은 건가?
노크를 할까 말까 망설이던 우연은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들리는 목소리에 손을 멈췄다.
― 일단 희소식부터 알려 드리죠. 우연 학생은 조현병이 아닙니다…….
아저씨의 목소리 말고도 귀에 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 *
“경조증이면 투약이 필요합니까? 상담만으로는 치료가 어렵습니까?”
이원은 침중하게 물었다. 손 원장은 애매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아직 확진된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 병이 확실하다면 증세에 따라 투약이 필요합니다.”
“스트레스가 사라져서 성격이 확 밝아졌을 가능성은요? 부모님이 사라지고 환경이 우호적으로 변했잖습니까. 우연이는 지금 자신이 만드는 미래에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원은 우연에게 약을 먹이고 싶지는 않았다. 몸이 약에 적응해 가는 과정은, 참는 데 이력이 난 이원으로서도 결코 녹록지 않았다. 괴로움을 구구절절 하소연하는 대신 끝까지 참는 습관이 괴로움을 배가시켰다.
치료 이력이 낙인처럼 여겨지는 분위기도 걱정스러웠다. 우 이사 쪽 사람들은 이원의 정신과 치료 이력을 알게 된 후 걸핏하면 그것을 트집 잡아 그를 끌어내리려 했다. 그 아이만큼은 같은 괴로움을 겪지 않기 바랐다. 하지만 손 원장은 단호했다.
“늘 말씀드리지만, 의지만으로는 병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고혈압이나 당뇨가 의지만으로 치료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뇌를 지배하는 호르몬은 적어도 혈관에 쌓인 지방 덩어리들보다 힘이 셉니다.”
손 원장은 마음의 병을 치료할 때 ‘의지’를 크게 신뢰하지 않는다. 세로토닌과 도파민의 홍수와 가뭄에 인간의 의지는 하찮기 그지없다. ‘긍정적으로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 보일 거예요.’, ‘아이도 있는데 힘내서 이겨 내야지.’, ‘믿음이 없어서, 의지가 약하니 병이 낫지 않는 겁니다.’, ‘새벽 시장에 한번 가 보세요. 당신보다 힘들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따위의 말은 환자들에게 폭력에 불과했다.
“압니다, 원장님. 하지만 지금 우연이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정도로 좋은 상태라서요.”
손 원장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겠죠. 경조증 상태에만 머물러 있다면 누구도 치료 따윈 하고 싶지 않을 거예요. 행복하잖아요. 자신만만하고 의욕 충만하고 창의력과 영감이 넘치고 엄청난 집중력에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피곤하지도 않고 잠도 없으니 금상첨화죠.”
“…….”
“하지만 그러다 완전히 조증으로 넘어가면요? 감당할 수 없는 파행으로 치달을 수도 있고, 조현병처럼 환청이나 망상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울증 주기로 내리박힐 때, 그 충격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클 거고요.”
“감당할 수 없는 파행이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과대망상이나 자신감 때문에 책임지지도 못할 일들을 잔뜩 벌이고, 맘먹은 대로 되지 않으면 미친 듯이 분노를 폭발시키겠죠. 게다가 도파민은 쾌락과 중독에도 관여하는 호르몬이라 많은 환자들이 폭음, 폭식, 도박, 쇼핑, 섹스 중독 등에 빠지게 됩니다.”
이원은 움직임을 멈췄다. 어울리지 않는 낱말이 하나 끼어 있는 것 같다.
“섹스…… 말입니까?”
“네. 섹스요.”
손 원장은 단호하게 말했다.
“성적 욕구와 표현이 특히 심해지는 게 조증의 전형적 증세 중 하납니다. 거기다 충동 제어가 잘 안 되니 금방 사랑에 빠지고, 섹스에 미친 듯이 탐닉하고, 쉽게 바람을 피우다 헤어지길 반복하죠. 본인도 본인이지만 당하는 주변 사람은 또 무슨 죄예요.”
맙소사. 눈이 저절로 커진다. 이원이 몸을 가늘게 떨자 손 원장이 한숨처럼 묻는다.
“조증 여부 진단을 정확하게 해 보고 싶은데 우연이는 저한테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신 전무님께 여쭤볼까 싶어요. 아무래도 지금 그 아이에 대한 정보를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게 전무님이시라.”
“예.”
“혹시 우연이가 제가 말씀드렸던 행동을 보인 적이 있습니까? 의욕 과잉이나 지나친 과몰입 상태 말고도, 중독이나 성과 관련된 문제를 일으킬 만한 말이라든가, 기록이라든가…….”
……설마.
이원은 눈썹을 찌푸렸다. 마음에 걸렸던 것들이 하나, 둘 꼬리를 물고 끌려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그 아이가 저에게 누드모델을 해 달라고 조른 적이 있었습니다. 기가 막혀서 단호하게 거절하긴 했습니다만…….”
손 원장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아, 역시, 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녀가 나직한 한숨과 함께 조용히 채근했다.
“그리고요?”
이원은 잠시 망설였다. 이 내용도 말을 해야 할까. 자신의 마음을 무겁게 누르던 내용, 아무에게도 알게 하고 싶지 않은 그 아이의 치부. 하지만 이원은 고개를 저었다. 눈앞의 여자는 의사였고, 우연을 치료할 사람이었다. 정확한 진단을 위해서는 알고 있는 것을 모두 알려 주어야 하는 것이 맞다.
“……아버지 말에 의하면, 그 아이가 몇 해 전에 성인용 채팅 프로그램으로 어른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던 것 같습니다. 경찰에서도 앱이 깔려 있던 게 맞다고 했었고요.”
이원은 천천히 피가 식어 가는 것을 느꼈다. 그 일을 이해하려 노력했던 게 부질없는 짓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절박한 몸부림이 아니라, 조증이 발현된 상태로, 말 그대로 섹스가 하고 싶어 저지른 짓인지도 모른다. 청소년들의 첫 번째 성 경험 연령이 만 13세 안팎이라는 통계를 감안하면, 이렇게 놀랄 일도 아니다.
이원은 성욕이 담백한 편은 아니었지만, 지독한 의지로 절제하고 다스리며 살아왔다. 얼마 전까지 신학교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섹스 중독이나 불륜에 빠지는 사람들은, 그가 가장 이해하고 싶지 않은 부류의……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경멸하는 인간 군상이었다.
손 원장은 덤덤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증으로 올라갈수록 성적인 욕구가 강해지고, 그 표현도 대담해지고 거침이 없을 겁니다. 청소년 때 벌써 그런 일이 있었다면 지금은 더욱 그럴 수 있고요. 전무님께서는 그 아이와 접촉할 때, 충동을 제어할 수 있는 상황을 잘 유지하셔야 할 거예요.”
이원은 조용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안이했다. 그렇게 긴 세월 학대를 당했던 아이가 몇 달 만에 기적처럼 회복되었다고 믿은 게 더 멍청했다.
눈물에 흠뻑 젖어 있던 작고 갸름한 얼굴을 떠올리기만 하면 이원은 늘 목이 쓰렸다. 자신이 내민 손을 붙잡고 진창에서 벗어나려 힘껏 발버둥 치는 모습이 기특했고, 밝고 행복하게,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이려 애쓰던 마음이 너무 예뻤다. 기숙사 창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천진하게 웃던 그 모습을 생각하니, 가슴에서 격통이 일었다.
……그 모습 그대로만 유지해 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는데.
“원장님, 우연이는 아직 이 결과 듣지 못했죠?”
“네, 다음 주에 와서 듣겠죠.”
“그럼 상담 치료를 더 진행해 보고, 약물 치료는 경과를 보면서 결정해도 괜찮겠습니까?”
“…….”
“그 끔찍한 환경에서도 자기 세계를 지켜 낸 아이입니다. 이제 겨우 원하던 길을 찾고 행복해하는데, 그렇게 두려워하던 정신과 약을 먹어야 한다면 충격이 크지 않겠습니까.”
“약물 치료가 내키지 않아서 그러세요?”
“아무래도…….”
“물론 아직 확진 상태는 아닙니다. 당연히 경과를 지켜볼 생각입니다만…….”
손 원장은 씁쓸한 얼굴로, 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전무님. 약을 쓸 시점이 되면 누구보다 보호자나 주변 사람이 단호해지셔야 합니다. 부모님과의 관계가 단절됐으니, 그 역할은 당분간 전무님이 해 주셔야겠죠.”
“……예.”
“치료에 요행이나 기적은 없습니다. 증세가 심해져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기 전에, 적절한 투약과 상담 치료로 관리해 주는 게 치료의 정석이라는 거 잊지 말아 주세요. 그게 환자와 주변 사람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에요.”
“명심하겠습니다.”
손 원장은 기적을 믿지 않았다. 다만 운은 믿었다. 우연이라는 아이는 한이원이라는 사람을 만났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운이 좋았다. 그녀의 뱃속에 박힌 심연이 다시 드러날 때, 저 따뜻하고 품이 넓은 보호자는 충분히 견고한 지지대가 되어 줄 것이다. 그 딱한 아이를 위해서 기꺼이 손을 내밀고, 발을 받쳐 주고, 등을 내어 줄 것이다. 불안정한 정신에 휘둘리던 예술가들을 단단히 붙잡고 받쳐 주었던 수많은 패트런들처럼.
다만, 손 원장의 눈에는 이원 역시 환자였다. 미친 듯이 흔들리는 파도 위에서 이를 악물고 버티고 서 있는 거룻배일 뿐이었다.
“요새 전무님 상태는 좀 어떠신가요.”
“괜찮습니다. 잘 먹고,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잘 자려고 노력합니다.”
“전무님께서 괜찮다고 하는 말 아무도 안 믿는 건 아시죠?”
“……하하.”
“제 눈에는 전무님도 여전히 아픈 환자예요.”
“예.”
이제 그는 이런 말을 듣고도 눈을 가만히 내리깔고 싱긋 웃을 뿐이었다.
“전무님의 깊은 공감 능력이나 민감한 감수성도, 그 아이의 천재적인 재능만큼이나 놀라운 능력입니다. 그 아이의 재능이 신의 선물이라면, 전무님의 능력도 신의 선물이겠죠.”
손 원장이 씁쓸하게 웃으며 결론을 내렸다.
“다만 제가 보기엔…… 신의 선물에는 대가가 따르는 것 같아요.”
손 원장을 배웅하기 위해 문을 연 이원은 발밑에서 난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노란 과자 조각이 구둣발에 밟혀 가루가 되어 있었다.
들어올 땐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는데……?
가장 꼭대기 층에서도 가장 안쪽에 있는 이사장실 앞을, 누가 과자를 들고 지나갔을까?
이원은 과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노란색의 납작한 동물 과자. 우연이 좋아하는 과자다.
……그 애가 여기 온다는 얘기는 없었는데. 아르바이트가 끝났으니 지금쯤 기숙사로 돌아가고 있을 텐데?
잠시 후 이원은 다시 눈썹을 찡그렸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길에도 동물 과자가 떨어져 있었다.
혹시……?
이원은 한참 망설이다가 우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20번이 넘게 울리도록 전화를 받지 않는다. 뒤통수가 점점 근지러워진다. 이원은 황급히 몸을 일으켜 관리실로 향했다.
“7층 복도 CCTV 영상 확인 부탁합니다.”
* * *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우연은 버스 유리창에 이마를 댄 채 소리 없이 울었다. 그까짓 것, 내가 알게 뭐야, 지금대로만 살면 되지, 하고 억지로 행복 회로를 돌리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주변에서 흘끔대는 시선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 빌어먹을 울음은 아무리 노력해도 멈춰졌던 적이 없었다. 눈물은 무력함과 약자다움의 증거였으며, 의지로 통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설사나 구토만큼이나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돌아갈 곳이 있는 게 다행이다. 주말에 방이 비어 있는 것도 다행이다. 혜진이는 월요일 아침에야 오겠지. 하지만 주말 내내 혼자 있어야 한다 생각하니, 그건 그것대로 무서웠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다. 조현병도, 사이코패스도 아니라는 말을 엿들었을 때는 그야말로 천국에 올라간 것 같았다.
하지만 양극성 장애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바로 지옥으로 처박혔다. 맞다. 천국과 지옥은 원래 옆방처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우연은 조현병이나 사이코패스보다 성적인 욕구에 휘둘린다는 그 병이 훨씬 끔찍하게 느껴졌다.
‘성적 욕구와 표현이 특히 심해지는 게 조증의 전형적 증세 중 하납니다.’
나는 이제 어떡하지?
‘충동 제어가 잘 안 되니 금방 사랑에 빠지고, 섹스에 미친 듯이 탐닉하고, 쉽게 바람을 피우다 헤어지길 반복하죠. 본인도 본인이지만 당하는 주변 사람은 또 무슨 죄예요.’
‘성적 욕구 표현이 대담하고 거침이 없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그 아이가 저에게 누드모델을 해 달라고 조른 적이 있었습니다.’
아저씨는 경찰에서 아빠가 떠들어 댄 말을 들었던 게 분명했다. 나는 몰랐다. 아저씨가 전혀 내색하지 않아 모르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저씨는 경멸을 말끔하게 감출 줄 아는 위선자일까. 아니면 도를 닦다 못해 만사가 심드렁해진 도인일까. 어쩌면 그렇게 완벽하게 모르는 척할 수 있지?
그럼 아저씨는 그동안 나를 어떤 아이라고 생각하셨던 거지? 감당할 수 없는 파행, 과대망상, 쾌락과 중독, 호르몬, 도박, 쇼핑, 섹스 중독, 이따위 말을 들으면서 ‘그럼 그렇지.’ 하고 속으로 혀를 차셨을까?
우연은 길에 서서 두 손으로 눈물을 닦아 냈다.
아니에요, 아저씨. 나 그런 짓 안 했어요. 그렇게 이상한 생각으로 아저씨한테 누드모델 해 달라고 한 거 아니에요. 나 그렇게 이상한 사람 아니야, 아니라고!
아저씨의 몸이 무척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수려한 이목구비와 깊은 색깔의 눈동자를 볼 때마다 가슴이 떨릴 정도로 황홀했다. 아저씨의 몸이야말로 신의 완벽한 선물이었다, 내 같잖은 그림 솜씨보다. 정말 그려 보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흐으, 씨. 내가 들어도 정신병자 같은 이유다.
우연은 학교까지 터덜터덜 걸었다. 눈물이 자꾸 발끝에 채였다.
“우연아.”
몸이 돌처럼 굳었다. 잘못 들은 것 같다. 여기서 들려선 안 될 목소리였다.
어둠이 스민 교문 앞, 키가 큰 누군가가 서 있다. 가로등이 역광으로 비춰서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지만, 몸의 윤곽만 봐도 알 수 있다.
아저씨가 왜 여기 와 있지? 어떻게 여기 와 있지?
아저씨를 보면서도 아저씨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바다 위에 버쩍 솟아오른 느티나무처럼, 저곳에 서 있는 아저씨는 낯설고 이상했다.
“8시 넘었는데, 저녁은 먹었어?”
“……아뇨.”
뒤늦게 맹렬한 허기가 위를 긁는다. 우연이 고개를 숙이자 아저씨가 천천히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많이 배고프겠구나. 뭐라도 좀 먹자.”
아저씨는 왜 울고 있느냐 묻지 않았다. 알고 있다. 우연이 문밖에서 선생님과 아저씨의 대화를 엿들은 거.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알고 계신다.
주변은 기이하리만치 적막했다. 워낙 외진 학교이고 주말에는 학생들도 많이 빠져나가 더욱 그랬다. 자동차도 거의 다니지 않고, 편의점과 햄버거 매장의 형광등 불빛만 흰 곰팡이처럼 덩그러니 피어 있었다. 아저씨는 햄버거 매장에 앞장서서 들어갔고 우연은 잠자코 따라 들어갔다.
햄버거 두 개와 오렌지주스, 우유가 담긴 쟁반이 탁자 위에 놓인다. 우연은 오렌지주스와 우유를 보며 멍하니 눈을 껌벅거렸다. 햄버거 따위를 먹으면서 콜라 대신 오렌지주스와 우유를 주문하는 사람은 대체 무슨 생각일까. 이런 상황에서조차 내 건강을 생각한 저 꼴같잖은 조합이 웃겨 죽겠다. 그런데 왜 눈이 시릴까. 그냥 눈물이 났다. 조현병 사이코패스는 아니라도 뇌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건 맞는 것 같다.
“왜 콜라가 아니에요? 왜 우유예요?”
“콜라보다는 우유가 건강에 좋을 것 같아서. 싫으니?”
“햄버거엔 콜라를 먹어야죠! 왜, 흐,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 흐, 흐어, 않고, 맘대로 시켜요! 막, 해으, 햄버거 같은 나쁜 음식에는 막, 콜라같이 나쁜 거 먹어야 당, 당연한 거라구요, 나쁜 거에는, 나, 나쁜 거가 어울리는 거예요! 아저씨는 왜 그것도 몰라요!”
아저씨는 손에 들고 있던 햄버거를 내려놓았다. 짙은 갈색 눈동자에서는 너무 많은 감정이 섞여서 오히려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연은 남은 말꼬리까지 완전히 뱉어 낼 수 있었다.
“아저씬, 흐으, 야, 약, 머, 먹일 거죠! 안 먹는다 하면 몰래라도 먹일 거죠!”
거짓말에 익숙하지 않은 아저씨는 아니라고 대답해 주지 않는다. 당연하다. 이건 친절이나 다정함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니까. 중병에 걸린 환자가 약 먹기 싫다고 할 때 “싫으면 먹지 마.” 하고 치워 버릴 보호자가 어디 있을까. 몰래라도 먹일 것이다. 억지로라도 먹일 것이다, 화를 내면서라도 기어이 먹일 것이다.
흐느끼는 우연의 머리 위로 큰 손이 덮였다. 부드럽게 머리를 쓸어내리는 손길은 여전히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다. 우연은 천천히 몸을 구부리며 이마를 탁자에 댔다. 목에서 쥐어짜는 듯한 소리가 났다.
“엄마 말이 맞잖아요. 저 이상한 거 맞잖아요. 지금 내가 행복한 것도, 아저씨가 미치게 좋은 것도 다 조증 증세라는 거잖아요. 진짜가 아니라 가짜 감정이라는 거잖아요.”
멈칫, 쓰다듬던 손길이 멈춘다. 우연은 자신의 말 중 삐끗 잘못 나간 게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아저씨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어서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과대망상, 중독, 폭음, 폭식, 도박, 그, ……남자랑 이상한 짓에 미치게 된다면서요.”
“원장님께 제대로 직접 듣는 게 좋았을 텐데.”
아저씨는 무겁게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우연아, 그렇게 안 좋을 쪽으로만 생각하진 마. 확진 안 났잖아. 병이 아닐 수도 있고, 맞아도 양극성 장애 2형은 경조증에서 조증으로 안 넘어가는 경우도 많아. 그리고 천재 예술가들 중에선 그런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았어.”
“그래서, 그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았대요?”
우연은 그의 위로를 날카롭게 튕겨 냈다.
“반 고흐, 마크 로스코, 슈만, 차이콥스키, 헤밍웨이, 버지니아 울프! 조울증 앓다가 자살한 사람들이래요. 그거 말고도 조울증으로 죽도록 고생한 예술가들이 한두 명이 아니던데요? 득시글득시글해요! 아까 오면서 검색으로 찾아봤어요. 몽땅 다 찾아봤단 말이에요!”
울부짖는 듯한 대답에 그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저씨가 그랬잖아요. 내 재능은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그 대가가 이런 거예요? 누가 달라고 했어요, 선물?”
“우연아, 양극성 장애는 조현병하고는 달라. 잘만 관리하면 건강하게 지낼 수 있어. 혈압이나 당뇨 관리하는 것처럼. 제발 미리 염려하지 말자.”
아저씨는 절망적인 눈으로 여전히 희망을 말했다. 저 간절한 희망에 동조할 수 있으면 좋겠다. 손 원장님이 뭘 몰라서 그래요. 저는 과대망상도 없고, 허풍도 안 치고, 돈 훔쳐서 펑펑 쓰는 그따위 짓도 안 했어요. 모르는 남자들하고 이상한 짓도 안 했어요. 그림에 미쳐 있던 건 중독이 아니고 집중력이에요! 하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우연은 알고 있었다. 희망은 판도라가 받은 선물 중 가장 악질적인 것이었다.
눈을 드니 추레하게 벌어진 햄버거가 보였다. 배가 고픈데 입에 맞지도 않는 햄버거를 어울리지도 않는 주스와 함께 먹고 있던, 아니 그나마 먹지도 못하고 있는 아저씨가 눈에 보였다.
아주 짧은 순간, 낯익은, 그리고 낯선 냄새가 뺨을 사락 훑고 지나간다. 아저씨의 향이다. 자각하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푸른빛이 감도는 듯 산뜻하고 청량한 향수 냄새 사이로, 달큼한 크림색, 혹은 크림슨, 무겁고 짙은 느낌의 무언가가 딱 한 가닥 스며 있었다.
저도 모르게 몸이 떨린다. 약한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무겁고 나른한 안개가 뱃속에 퍼지는 것 같았다. 뭔가 감히 상상도 하면 안 되는 어떤 것이.
우연은 고개를 들어 아저씨를 똑바로 응시했다.
“원장님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저는 나중에 쇼핑이나 도박에 중독되기도 쉽고, 섹스 중독자가 될 수도 있어요. 이거 한번 보시라고요.”
아저씨의 눈앞으로 왼팔을 내밀었다. 팔 안쪽의 한 부분을 두 손가락으로 누르자 샤프심 반 토막 정도 되는 가늘고 긴 것이 희미하게 피부 속에서 윤곽을 드러냈다. 아저씨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그것을 들여다본다.
“그게…… 뭐니?”
“임플라논이에요.”
“임플라논이 뭐니?”
충격을 받고 놀라야 할 아저씨는 임플라논이 뭔지 몰랐다. 얼굴이 저절로 일그러졌다. 한때 신부님이 되려 했다는 아저씨는 이쪽으로 지나치게 무지한지도 모른다.
“……피임약이에요.”
아저씨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진다. 앞으로 모아 깍지를 끼고 있던 두 손에 힘줄이 팽팽하게 불거졌다. 그의 상반신이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는 것을 보며, 우연은 쥐어짜듯 덧붙였다.
“엄마가 병원에 질질 끌고 가서 심어 줬어요.”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