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누드-13화 (13/47)
  • 13. 엠패스, 사이코패스

    “우연이의 현실 지각 능력엔 별 이상이 없습니다. 이미지를 강렬하게 느끼거나 사진처럼 기억하는 능력이 놀랍긴 하지만, 환시는 아니고 환청이나 망상도 없습니다.”

    토요일 오후, 미술관 이사장실에 있던 이원을 방문한 것은 손연정 원장이었다. 검사 결과도 나왔고, 의논할 것도 있으니 퇴근길에 잠시 들르겠다는 연락이 있었다. 손 원장은 이원과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있었고, 병원은 미술관에서 지척이었다.

    그동안 상담 치료에 심한 거부감을 보이던 우연은, 뜬금없이 손 원장에게 검사와 치료를 받기로 결심했다. 손 원장이 이원을 고등학생 때부터 치료해 온 사람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아저씨에 대해 먼지 부스러기 같은 정보라도 더 얻어 보겠다는 속이 빤히 보였다. 실제로 우연은 검사 결과를 아저씨에게 알려 줘도 좋다고 동의한 후, 아저씨의 과거를 캐내려는 거래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것을 알게 된 이원은 뒤늦게 식은땀을 흘렸다. 애석하게도 그녀는 의사에게 비밀 유지의 의무가 있다는 건 모르고 있었다.

    손 원장이 이원을 알게 된 것은 꽤 오래전의 일이었다.

    그녀가 처음 만났던 소년은 조각처럼 반듯하고 아름다운 외양을 갖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얼굴에 그늘이 깊었다. 손 원장은 몇 마디 나누기도 전에, 소년이 감수성이 풍부하고, 기질적으로 민감하며, 공감 능력이 몹시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HSP(Highly Sensitive Person), 선천적으로 감각이 예민하고 까다로우며, 공감과 이입 능력도 지나치게 좋은 사람들이 있다. 부모나 형제, 친구들의 감정을 너무나 쉽게 눈치 채고, 자신의 감정처럼 이입하여 함께 기뻐하고 함께 괴로워하는 사람들. 타인의 감정에 전염되기 쉬우며, 그래서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기 쉬운 민감하고 연약한 사람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런 민감함 혹은 공감 능력을 갖고 살지만, 그 증세는 의외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나는 왜 이렇게 쓸데없이 예민해서 나도 힘들고 남도 힘들게 할까?’ 하며 자책하고 괴로워하곤 한다.

    ……눈앞의 소년 역시 그랬다.

    그는 잔인한 장면이 나오는 영화를 보지 못했고, 주변 사람들이 괴로워할 때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이 갈려 나가는 것처럼 느꼈다. 그는 어쩌면 ‘엠패스(Empath, 사이코패스의 대척점에 있는 사람)’로 분류될 수도 있을 듯했다.

    주변 사람들은 자신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는 소년의 선의를 함부로 이용했다. 소년의 배려와 도움은 같은 배려와 도움으로 보답받는 대신, 더 많은 요구와 기만과 끝없는 하소연으로 되돌아왔다. 영민한 소년은 그것을 알면서도 놀랄 만한 인내심으로 말없이 견뎌 냈다.

    그뿐만 아니었다. 소년은 종교의 영향인지, 도덕적 기준마저 너무 높았다. 나이답지 않게 지나치게 경건했으며, 일순 스치고 지나가는 삿된 마음이나, 자신을 괴롭게 한 사람들에 대한 원망 한 자락조차 죄라고 생각했다.

    소년은 오랫동안 불면에 시달렸다. 그의 불면은 오로지 심인성이었고, 약을 먹여 재우는 것이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는 것을 손 원장은 바로 알아챘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 겹겹이 쌓여 있는 고통 덩어리를 밖으로 끌어내기는 쉽지 않았다. 집안 환경도 좋고, 행실도 반듯하기 그지없는 이 소년의 치료는 소년원을 들락날락하는 아이들보다 몇 배는 더 어려웠다.

    그래서 소년이 사제가 되겠다고 했을 때 손 원장은 놀라지 않았다. 그 길이 그에게 가장 덜 아픈 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사람의 고해를 들어야 하는데 괴롭지 않겠느냐는 말에 소년이 대답했던 내용도 비슷했다.

    ‘신부님들은 다른 이들의 고통과 죄를 해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듣고 응답하시며 용서하시고 위로하시는 분은 하느님뿐이시죠. 저는 그들의 죄와 아픔을 듣고, 그분의 용서를 전달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한 후에 들은 내용을 잊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래야만 하고요.’

    그녀는 무신론자였다. 하지만 이 소년에게는 그렇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길이 가장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끄러운 세사와 온갖 악의에서 한 걸음 떨어진 곳에 존재하는 직분. 사람들의 탐욕과 슬픔, 고통에서 적절한 거리를 둘 수 있는 곳. 사제들은 돈을 벌기 위해 온갖 인간들과 얽혀 필사적으로 진흙탕 싸움을 할 필요도 없고, 가정에서의 벌어지는 온갖 치졸한 갈등과 근심, 아들, 딸 손자 손녀로 영원히 이어지는 근심의 고리에 엮일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손 원장은 그의 아버지인 한 회장이 당혹해할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소년의 선택을 축하해 주었었다.

    ‘신학교를 자퇴하고 경영대에 편입했습니다, 원장님.’

    ‘세경홀딩스와 세경건설에서 후계자 수업을 받게 됐습니다, 원장님.’

    평화는 얼마 안 가 깨어졌다. 아버지의 와병 후 사제의 길을 포기해야 했던 소년은 바로 경영 일선에 내몰렸고, 칼을 잡고 상대에게 가차 없이 휘두르는 방법부터 배워야 했다. 자신의 탁월한 공감 능력이나 섬세한 시선으로 상대의 의도를 읽어 내고 그것을 역으로 이용하는 법, 비굴하게 인내하는 법, 객관적으로 문제를 파악하고, 필요에 따라 잔혹한 결정도 내리며, 그 결과 빚어진 희생과 눈물을 외면하는 법도 악착같이 배워야 했다.

    이제는 혼자만의 희생이나 괴로움으로 끝나지 않았다. 청년이 된 소년의 뒤에는 그 큰 회사에 생계를 대고 있는 수만 명의 고용인과 그들에게 딸린 가족들이 납덩이처럼 매달려 있었다.

    손 원장은 이원의 손으로 파멸시킨 정우건설 대표이사 일가족이 동반 자살을 택했을 때를 잊지 못했다. 세 살이었던 막내 아기만 3도 화상을 입은 채 살아남아 중환자실에서 한 달 동안 버텼다. 부도가 난 정우건설과 하청업체 직원들은 사경을 헤매는 어린아이의 끔찍한 사진을 앞세우고 연일 몰려와 시위를 하고 돌을 던졌다.

    이원은 밤마다 병실을 찾아가 아기의 발치에 엎드린 채 가슴을 쥐어뜯으며 소리 없이 오열했다. 그는 진심으로 그 아이를 대신해서 죽고 싶어 했다. 손 원장은 아마 그가 아기의 고통을 실제처럼 겪지 않았을까 걱정했지만, 이원은 그녀의 질문에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아기가 죽은 후, 손 원장은 그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물러나는 대신, 그 상황을 정면 돌파하는 쪽을 택했다. 시위 참가자 전원 형사 고소와 손배소라는 초강수로 상황을 정리한 이원은 이듬해 초 주주 43인 전원이 모인 주총에서 기립 박수를 받았다.

    ‘돌아가고 싶습니다, 원장님.’

    일그러진 얼굴로 말하던 그는 결국 이를 꽉 문 채 말을 맺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음식의 맛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종잇조각 고무 조각을 씹는 것 같습니다.’

    ‘피부의 감각이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검사를 해도 이상이 없다는데, 대체 왜.’

    ‘원장님, 자꾸 비현실감에 빠집니다. 회의하다가, 갑자기 넋을 잃고 두리번거리게 됩니다.’

    ‘상황에 맞는 표정이 잘 안 나옵니다. 원장님.’

    그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끔찍하게 고통스러워했고, 그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의 쾌차를 말하면서도 아버지의 죽음을 꿈꾸기 시작했다. 지분을 상속받으면, 전문 경영자를 두고 자신은 원래의 길로 돌아가려는 계획인 듯했다.

    하지만 이원은 자신이 아버지의 죽음을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은커녕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손 원장은 그 사실을 그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 그러잖아도 그를 자책과 고통으로 몰아넣는 요소들은 너무나 많았다.

    한 회장이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할 때부터, 이원은 자신의 괴로움을 전혀 내색하지 않게 되었다. 이쪽 길을 포기한 것인지, 저쪽 길을 포기한 것인지, 병이 나은 것인지, 자포자기한 것인지는 영 알 수 없었다.

    다만 안타까웠다. 저 자리에 맞지 않는 섬세하고 따뜻한 내면과 깊은 공감 능력이 늘 안타까웠다.

    * * *

    이원은 손 원장이 서류 봉투에 챙겨 온 검사 결과지와 뇌파 그래프, 스캔 사진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는 것을 초조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현실 지각 능력이 정상이라니, 나쁜 결과가 나올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왜인지 입속이 마르고 조마조마하다. 그런 이원을 보며 손 원장이 빙그레 웃는다.

    “일단 희소식부터 알려 드리죠. 우연 학생은 조현병이 아닙니다. 물론 반사회적 인격 장애도 아니고요. 부모님이 딸을 사이코패스로 만들려고 무척 애를 쓰신 모양인데, 사이코패스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죠.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어요.”

    후우우. 이원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무거운 짐이 하나 떨어져 나간 것 같다.

    손 원장은 반사회적 인격 장애 범죄자―소위 사이코패스 범죄자―들을 심층적으로 연구해 온 전문가였다. 환경이 악인을 만든다는 상식과 달리 그녀는 사이코패시(Psychopathy)에는 유전적, 선천적 요소가 훨씬 강하다고 말하곤 했다. 물론 두 가지는 상호 영향을 주는 부분이 있고, 어린 시절의 학대는 그 유전 요소를 촉발하는 트리거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이 바라보는 인간의 삶은 이원의 생각보다 훨씬 결정론적이었다. 세상은 인간의 의지력이 무참해지는 냉정한 곳이었다.

    다만 손 원장의 검사와 분석은 냉정한 만큼 객관적이었고, 이원은 그것이 더 믿음직하게 느껴졌다. 더욱이 우연에게 사이코패스니 조현병이니 하는 말도 안 되는 혐의를 확실히 벗겨 주려면, 손 원장 정도 되는 전문가의 견해가 필요했다.

    다행히 결과도 이렇게 좋다. 소식을 전해 주면 그 아이가 얼마나 좋아할까. 신나게 팔짝팔짝 뛰려나. 기뻐하면서 오래오래 흐느낄지도 모른다. 웃음도 많지만, 눈물도 많은 아이니까. 아니면 4차원 단호박이라는 아이답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상한 반응을 보여 줄지도 모른다. 그때 기숙사에서처럼.

    생각은 쉴 새 없이 그 시간, 그 장소로 돌아갔고, 이원은 그때마다 뜬금없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래서 이원은 우연과의 접점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물론 전무님도 조현병이 아니란 건 짐작하셨겠지만, 굳이 원하는 대로 검사를 다 해 드린 건 그래야 두 분이 안심할 것 같아서예요. 보험이 안 돼서 유감입니다만 메세나재단 쪽에서 비용으로 처리하실 테니 걱정 안 해도 되겠죠?”

    “이런, 보험이 안 됩니까? 피눈물이 나긴 하지만 반가운 소식을 주셨으니 기꺼이 감수하겠습니다.”

    이원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다만 몇 가지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전무님.”

    “예? 무슨……?”

    “일단 저와 라포르(Rapport, 의사소통 시 상대에게 느끼는 친밀감, 신뢰감) 형성이 쉽지 않습니다. 상담 치료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상상 이상으로 심합니다. 어른들과 그런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해 본 경험이 없어서일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어설픈 상담의 부작용 같습니다.”

    이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손 원장의 웃음이 씁쓸하게 변한다.

    “중학생 때, 담임 교사에게 상담을 요청한 적이 있었나 봐요. 그때 교사가 아버지와 대화를 해 보고, 폭력이 아니라 훈육이라 결론을 내렸던 모양이에요. 아버지는 학부모회 임원이고 딸바보로 통했다고 하네요. 사랑의 매에 아이가 예민하게 반응했구나, 하긴 한창 까칠할 때지, 하고 생각한 선생님이 ‘서로 오해가 있었다’면서 삼자대면 상태로 아버지와 화해를 시켰다더군요.”

    “맙……소사, 격리가 아니고 가해자와 대면이요?”

    저절로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물론 경찰이나 학교 일선에서 이런 일이 여전히 비일비재하다는 건 안다. 하지만 자신이 그런 순간에 맞닥뜨렸다 생각하자 바로 죽고 싶다는 생각부터 치솟았다.

    “우연이는 그날 아빠가 집에 오는 게 너무 무서워서 자해까지 했고요.”

    폭력을 피할 수도 없고, 반항도 할 수 없고, 사랑받기 위한 모든 노력조차 부질없음을 깨닫게 되면, 아이는 자신을 망가뜨리는 길을 스스로 걷게 된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물론 커터 날을 손목에 대긴 했지만, 정말 죽어 버릴 각오로 한 짓은 아니었다. 그저 벗어나고 싶었고, 아빠가 이거 보고 반성 좀 했으면, 하는 어설픈 희망도 조금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아버지는 우연의 머리채를 잡고 죽기 직전까지 때렸다. 아빠를 망신시키는 것도 모자라 이따위 짓거리로 날 협박해? 내가 그렇게 만만해? 네년이 죽는 한이 있어도 이 개같은 버르장머리는 고쳐 놔야겠다. 그는 딸이 입에 거품을 물고 경련할 때까지 매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날 우연은 다음번에는 ‘절대 실패하지 않을 방법’을 택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이원은 고개를 수그리고 이를 악물었다. 우연이 겪었던 아픔을 하나씩 알게 될 때마다 손톱 밑에 바늘이 느릿하게 박히는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현재 전무님께 전폭적인 신뢰를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저에게만 라포르 형성이 되어 있다는 겁니까?”

    “네. 제가 보기엔 각인에 더 가까운 것 같기도 하지만…….”

    손 원장의 얄궂은 반응에 이원은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대체 저 의뭉한 원장은 우연에게서 뭘 읽어 낸 걸까.

    자신의 감정을 자각한 것은 차치하고, 우연이 자신에게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가 당당하게 말하는 덕질, 팬질, 사생질과 자신의 마음에 잠시 깃든 이 감정에는 분명 교집합이 있었지만, 그 교차 영역이 어느 정도인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과연 그것이 ‘라포르’나 ‘각인’이라는 말로 감당할 수 있는 감정일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 아이하고 만난 지 몇 달 되지 않았고, 직접 대면해서 본 것도 몇 번 되지 않습니다.”

    “글쎄요. 상대에게 호감과 신뢰를 쌓는 데는, 시간이나 진실한 태도보다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들도 있지 않습니까?”

    “……?”

    “가령, 페로몬이라든가, 호르몬이라든가, 외모라든가, 돈이라든가, 강렬한 기억이라든가. 아기 오리가 엄마를 각인하는 데는 단 한순간이면 충분하죠.”

    “원장님.”

    “아, 농담입니다……라고 할 줄 알았죠? 농담 아닙니다.”

    손 원장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에게 꽤 오랜 시간 치료를 받아온 이원은 그녀가 진심으로 하는 말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원장님, 지금 저와의 라포르가 큰 의미가 있을까요? 저는 이제 후견인이 아니고, 우연이는 지금 생각보다 훨씬 잘 적응해 나가고 있습니다.”

    “의미가 있죠. 신뢰할 만한 어른이 주변에 존재한다는 건 꽤 중요한 일입니다. 등을 받쳐 주는 든든한 벽이 있는 거니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전무님.”

    그녀는 서류 봉투에서 종이 두 장을 꺼내 들었다.

    “우연이의 상태가 전무님 생각만큼 좋은 건 아닙니다. 이 그림들을 좀 보시죠.”

    첫 번째 그림은 A4 용지를 크게 채운 화분 그림이었다.

    화분에는 꽃도 나무도 없고 가느다란 풀이 화분을 터뜨릴 듯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가는 잎 하나하나가 하늘을 향해 뻣세게 치솟았는데, 그 끝은 하나같이 바늘처럼 뾰족하고 살기등등했다. 아니, 날을 바짝 다듬은 창날을 무수히 박아 놓은 듯, 위로 올라갈수록 새파란 독기가 지글지글 넘쳐흘렀다.

    풀잎 몇 가닥은 뙤약볕에 말라비틀어져 화분 가장자리에 매달려 있었는데 사람의 시체가 늘어진 것처럼 끔찍한 느낌이었다. 위쪽 귀퉁이에 손톱만 하게 박아 놓은 태양은 작고 찌그러진 데다 생뚱맞고 이상했다.

    샤프펜슬로 그려 놓은 선화일 뿐인데 등 뒤로 소름이 돋는다. 그림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은 분명한 적의, 아니 맹렬한 살기였다. 단순히 화분에 있는 풀 그림에서 어떻게 이런 감정을 유발할 수 있을까. 손 원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통, 태양은 아버지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알고 그린 건 아니겠지만, 이 그림에서 작고 일그러진 태양은 이 독기 어린 풀의 맹렬한 적개심의 대상입니다.”

    이원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자 손 원장은 다른 그림을 내밀었다.

    “이게 오늘 그린 겁니다. 사실 이걸 보여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여기까지 찾아왔어요.”

    두 번째 그림은 A3 사이즈의 종이 위에 그려진 정물이었다. 이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극도로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었지만, 정물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는 약간 시간이 걸렸다.

    “이 그림은…… 커터 칼인가?”

    정체를 파악한 후에도 이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뭐라 말할 수 없이 특이한 구도였다. 커터 칼은 칼날이 반 정도 밖으로 빠져 나와 있었는데 칼날의 뾰족한 부분이 한가운데, 그것도 거의 정면 각도로 아주 크게 잡혀 있고 나머지 묘사는 소실점을 따라 희미하게 오른쪽으로 빠져나가듯 스며든 형태였다.

    대체 어떤 각도로, 어느 정도 거리에서 관찰해야 이런 그림이 나오는 걸까?

    잠시 상상해 보던 이원은 갑자기 소름이 와짝 돋았다.

    “미친…….”

    욱 치미는 말이 걸러지지 않고 튀어 나갔다. 손 원장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과연 어떤 상태에서 관찰해야 이런 그림이 나올 것 같습니까?”

    이원은 이를 지그시 문 채 대답했다.

    “커터 날이 눈동자에 박히면……이 형태로 보이겠죠.”

    “맞습니다, 잘 보셨습니다.”

    이원은 그림을 든 채 깊이 신음했다. 그림을 쥔 손이 들들 떨린다. 그런 이원을 달래려는 듯, 손 원장이 그의 손등을 툭툭 쳤다.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마세요. 당연히 그 포즈로 그림을 그린 건 아니니까요. 순수한 상상화예요.”

    “……상상화요?”

    이원은 심호흡을 하고 다시 그림을 내려다보았다. 상상이라 생각하니 날 선 긴장감이 살짝 수그러들었지만 그림은 여전히 소름 끼치고, 어떻게 보면 감탄스러웠다.

    그렇다, 이 그림은 순수한 의미로 감탄스러웠다.

    순전히 머릿속에서 재구성한 정물. 상상으로 빚어진 정밀 묘사. 사진 같은 그림에 깃든 초현실적인 분위기, 실재가 없는 극사실화. 눈앞의 그림은 이 모든 아이러니를 단번에 아우른 작품이었다.

    고작 심리 검사를 하기 위한 그림인데, 어떻게 이런 걸 그려 놓을 수 있을까. 게다가 이 소름 끼치는 몰입감과 공포감은 대체 뭐란 말인가.

    등으로 소름이 느릿하게 흘러내렸다. 우연이는 다른 의미로 정상이 아니다. 완전히 미친 재능에 미친 정신을 타고났다. 남이 어떻게 생각할까,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하는 자기 검열 따윈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상상력을 극한까지 밀어붙이고 그것을 모조리, 완벽하게 표현하는 것에 모든 것을 쏟아부을 뿐이다.

    이 아이는 진짜 천재다. 신의 선물은 인간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이 맞다.

    사람들은 이런 아이를 어떻게 그 지경이 될 때까지 방치할 수 있었을까. 다들 눈이 멀었던 걸까.

    ……잠깐,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이원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짧은 순간이지만 우연을 걱정하는 대신 그림의 가치를 따지고 재능에 감탄했던 자신을 믿을 수 없었다. 환멸감이 울컥 치밀었다.

    “어떠십니까?”

    손 원장이 그의 반응을 주의 깊게 지켜보며 물었다. 이원은 눈을 반쯤 내리깔고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목소리가 갈라져서 나왔다.

    “굉장히 불안정한 상태라는 느낌이 듭니다…….”

    “맞습니다. 속에 시한폭탄이 하나 박혀 있는 것 같죠. 모든 적개심이 자신에게 향하고 있는 겁니다. 아버지에게 대놓고 증오를 돌릴 수 없는 거예요. 너무 두려워서.”

    이원은 그림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원장님, 우연이는 지금 원하던 학교에서 밝고 구김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너무 의욕이 넘쳐서 탈일 지경입니다. 이 그림과 현재 상태와의 괴리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마 그럴 겁니다, 전무님. 저는 그 아이의 밝은 모습이 더 신경이 쓰입니다.”

    “우연이가 연기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연기는 아닙니다. 그래서 문제가 더 크죠.”

    “그게 무슨…….”

    “전무님. 그 아이는 전무님을 만나기 전까지 간헐적으로 심한 무기력증, 자살 충동에 시달리고 있었고, 비현실감에 시달린 적도 몇 번 있습니다. 또 지금은 지나치게 밝고 의욕이 넘치는 상태죠. 그런 와중에 엄청난 창의력과 집중력으로 그림을 그려 대고 있고요. 수면 시간도 몇 시간 되지 않는다고 해요. 스트레스 환경이 사라진 것과 별개로 질병의 징후로 판단할 요소들이 있다는 말이에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질병이요? 조현병도 반사회적 인격 장애도 아니라고 아까 분명…….”

    문득 말을 끊었다. 불길한 느낌이 척추를 타고 정수리까지 쫙 뻗어 오른다. 불안정한 감정의 기복에 인생이 함몰되어 가면서도, 위대한 작품을 쏟아 냈던 천재 예술가들, 그들이 앓고 있던 것으로 추측되는 병명은.

    이원은 눈을 크게 뜬 채 입술을 떨었다.

    “설마, 양극성 장애(조울증)……일수도 있다는 겁니까?”

    손 원장은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저는 우연이가 양극성 장애 2형의 경조증(가벼운 조증) 상태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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