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누드-12화 (12/47)
  • 12. 마법의 시간

    이원은 홍연이 책상에 올려놓은 서류를 가만히 응시했다.

    「후견 감독 종료 신고서」

    6월 9일, 이라는 날짜가 어느새 코앞으로 닥쳐 있었다.

    내일부터 우연은 더 이상 법적인 보호자가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어지간히도 신경이 쓰였다. 후견인 노릇을 한다는 게 이렇게 신경 쓰이는 건 줄 알았으면 신민희 복지사의 제안을 쉽게 수락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시간도 품도 많이 들었지만, 무엇보다 감정적인 소모가 가장 컸다.

    이원은 우연을 만날 때면 늘 알 수 없는 거슬림을 느꼈다. 거부감이나 불쾌감과는 확실히 다르지만, 어딘가 신경을 긁는 듯한 묘한 느낌이었다.

    이 거슬림의 정체는 과연 무얼까.

    생각해 보면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감정도 거슬림이었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 가는 바늘로 어딘가를 찔리는 듯하던 느낌이 아직도 선명하다. 연습장을 펼쳤을 때는 머릿속에서 뭔가 파삭 깨져 나가는 것 같았고, 그 아이가 도망치라고 속삭였을 때는 깊이 감춰 둔 마음이 날카로운 발톱에 찍혀 밖으로 끌려 나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에게 폭행당하고 있다는 걸 들은 순간, 아비란 자에게 극심한 살심이 일었고, 채팅 앱으로 이상한 남자들을 만났더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배신감과 충격으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하지만 멍과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보았을 때는 심장이 짓이겨지듯 아파 그 충격을 다 잊었다. 누드모델을 해 달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 자리에서 바로 옷이 벗겨진 것처럼 아뜩하고 얼굴이 달아오르기도 했다. 그녀는 웃음만큼이나 눈물도 많았고, 이원은 그 눈물만 보면 미칠 듯 다급하고 숨이 막혔다.

    그녀와 관련된 감정은 어떤 것이든 극도로 강렬했고 어떤 방식으로든 신경을 긁었다. 작고 겁먹은 아기 고양이가 그의 손에서 파들파들 떨다가 갑자기 조그만 발톱을 세우고 팔다리를 확 긋는 것 같았다. 절대 길들일 수 없는 도도하고 매력적인 짐승처럼, 하지만 절대적으로 보호가 필요한 눈물 나게 가련한 생명체처럼, 그녀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자신에게 끝없이 명령을 내리는 것만 같았다.

    물론 그 아이가 자신의 도움으로 그렇게 밝고 건강하게 변해 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기쁨과 뿌듯함을 가져다주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털을 바짝 세우고 하악질을 하던 고양이들이 자신에게는 배를 드러낸 채 골골골 노래를 하며 뺨을 비빌 때처럼, 그는 가슴이 저리도록 행복하고 흐뭇했다.

    하지만 그에 비례해서 불편하고 답답한 감정도 커졌다. 이원은 이 정체불명의 거북함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종국에 큰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일기 시작했다.

    그래. 아쉬운 건 없다. 해야 할 일은 최선을 다해서 해 주었으니까. 두 번이나 목숨을 구해 주었고, 법원에서 접근 금지 명령도 받아 주었다. 학비와 생활비를 제공하는 것으로 그녀의 재능에 날개를 달아 주었으며, 학교에 적응하는 것도 열심히 응원하며 지켜봐 주었다. 일전에는 자신의 주치의인 손연정 원장에게 데려가 그녀의 부모가 허투루 갖다 붙인 온갖 병명에 대해 모조리 검사도 받게 했다. 조만간 결과가 나오겠지만 현재 상태로 보면 큰 이상은 없을 듯했다.

    하지만 그는 우연이 불안해할 요소라면 먼지만큼도 남겨 둘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발목을 잡을 만한 모든 것을 끊어 낸 후 세상으로 날려 보낼 참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하고 심란하지?

    복잡한 속을 짐작한 듯, 홍연이 싱긋 웃으며 위로의 말을 건넨다.

    “우연이 혼자서도 잘해 나갈 테니 너무 염려 마십시오. 재단에서 학비 생활비 지원해 주는 것만 해도 굉장히 큰 메리트입니다. 필요하다면 손 원장님이 심리 치료도 계속 진행하실 거고요.”

    “그렇겠죠.”

    이원은 눈썹을 지그시 찌푸린 채 서류의 빈칸을 채운 후 서명을 했다. 이제 우연과 자신은 메세나재단을 통해 정기적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후원받고 후원하는 공식적인 만남으로 전환될 것이다.

    캘린더를 들여다보던 이원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 우연이 생일이군요.”

    * * *

    띠리릿, 띠리릿, 띠리릿.

    아침 8시, 우연은 눈을 비비며 전화기를 켜다가 번호를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이원]

    기분이 이상했다. 이 꼭두새벽부터―물론 아저씨는 이 시간이 출근 시간이긴 하지만.― 아저씨에게 전화라니.

    아저씨는 전화를 잘 받아 주기는 했지만 직접 전화를 하는 일은 드물었다. 전달 사항이 있으면 정 관장님을 통해 공식 루트로 전해지곤 했다.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우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후견 기간이 끝났구나…….”

    그동안 잘 적응해서 기특하다, 앞으로 잘해라, 그런 말씀도 하실 테고 혹시 섭섭한 게 있었니, 물어보실 수도 있고, 앞으로는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하면 안 된다는 말을 완곡하게 하실지도 모르겠다.

    각오는 하고 있었다. 이제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하면 안 된다는 것도 잘 안다. 내가 더 잘 안다. 늘 그랬던 것처럼 활짝 웃으면서 대답해야지. 아쉽고 속상한 티는 절대 내지 말아야지. 그동안 아저씨가 해 준 걸 생각하면 고맙다는 말만 수백 번 해도 모자랄 테니까.

    “여보세요, 아저씨?”

    ― 우연아, 잘 잤니? 생일 축하한다.

    뒤통수를 맞은 것 같다. 각오가 무색하게 눈물이 왈칵 튀어나왔다.

    이건, 아저씨 탓이다. 생일 축하라니. 8시 정각,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 너무 일러 무례하지도 않고, 너무 늦어 섭섭하지도 않을 그 시간에 딱 맞춰서 생일 축하 전화를 해 준다는 건 미리미리 신경을 쓰면서 기다렸다 전화를 해 주었다는 뜻이다. 아빠도 엄마도 친구도 아닌, 생판 남인 아저씨는 왜 나한테 이렇게 끝까지 자상하고 따뜻할까.

    ― 오늘 수업 없는데 뭐 할 거니? 친구들하고 생일 파티라도 할 거니?

    우연은 손등으로 눈을 힘껏 문지르며 한껏 밝게 말했다.

    “네. 친구들하고 시내에서 화려한 퐈리를 즐기다가 들어올 거예요. 열 명 넘게 모이기로 했어요.”

    ― 이야, 우리 우연이 여전히 인기 많네.

    “그럼요. 제가 인기가 좀 많죠.”

    우연은 어깨를 으쓱하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실은 생일 파티 아니고요, 혜진이가 오늘 무용과 남자애들 시내에서 버스킹한다고, 그거 구경하고 다 같이 점심 먹자고 해서요. 남자 일곱, 여자 일곱, 숫자가 딱 맞아서 그냥 과팅이 돼 버렸지 뭐예요.”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이내 예의 부드럽고 조용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 그래. 재미있겠구나. 저녁 전에는 들어오니?

    “네, 기숙사에서 저녁 먹으려면 6시 차로 들어가야 해요.”

    ― 그래, 그럼 생일 잘 보내고 재미있게 놀다 와라.

    아저씨는 다정한 목소리로 다시 축하하며 전화를 끊었다.

    우연은 전화기를 든 채 멍하니 눈만 깜박거렸다. 온몸의 기운이 쭉 빠져나간 것 같다.

    뭔가 이상하다. 아저씨가 무슨 용건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말하지 않는다. 후견 기간이 끝났다는 말도, 앞으로 잘 지내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우연은 아저씨가 삼켜 넣은 말이 무엇인지, 자신의 말 중에서 아저씨를 불쾌하게 한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이원은 자신의 앞에 놓인 것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어제 송 여사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만든 딸기 무스케이크, 금목걸이와 팔찌 세트가 든 상자, 그리고 플로리스트가 정성껏 만들어 준 자그마한 꽃다발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과 미팅이라.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원의 속에서 기묘한 감정이 치솟았다. 궁금함 같은 중립적인 감정은 아니었고, 쾌보다는 불쾌에 가까운 감정인데, 정확한 실체는 불분명했다. 이원은 자신의 속에서 치솟는 감정을 정확히 정의하기 어려울 때가 종종 있었다. 감정을 다스리는 과정에서 자기 검열이 지나쳐서 생긴 일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딱히 고쳐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타인에 대한 거리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감정에 대해 거리를 두는 것 역시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엊저녁, 이 선물들을 하나하나 고르며 가벼운 흥분과 고양감을 느끼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저녁을 같이 먹자 할까, 몰래 내려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서프라이즈로 놀래 줄까. 그 아이가 좋아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가슴 두근거렸던 자신이, 지금 생각하니 너무 낯설고 괴이했다.

    홍연이 노크를 하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무님, Y시 3개 구역 재개발 건 회의 준비 다 됐습니다.”

    이원은 시계를 확인한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세경건설의 사활이 걸린 대형 프로젝트를 앞두고 이런 고민이나 하고 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오늘 선물은 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 생일이니까.

    ……어지간히 좀 하자.

    그는 회의실로 걸음을 옮기며 쓰게 웃었다.

    * * *

    우연은 달렸다. 아무리 팔다리를 휘둘러도 친구들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진다. 막차가 학교 앞에 도착한 건 10시 4분 전, 기숙사 문 닫는 것은 10시 정각. 학교가 외지고 인적이 없어 위험하다는 이유로 기숙사 통금 시간은 무려 10시 정각이다. 몇 년간 선배들이 ‘배고파서 못 살겠다, 한 시간만 늦춰 달라.’ 아무리 시위를 해도 기숙사 측은 요지부동이었다.

    경고 세 번, 삼진 아웃으로 걸리면 다음 학기에 기숙사 탈락이다. 우연은 공동 과제 때문에 이미 경고를 두 번이나 먹어서 한 번 더 걸리면 끝장이었다.

    고거 조금을 달렸다고 다리가 휘청거린다. 난 왜 이렇게 저질 체력이지. 너무 숨이 가빠서 토할 것 같다. 오늘 하루는 엉망진창인데 마무리까지 아주 산뜻해 죽겠다.

    드디어 기숙사 건물 지척에 다다랐다. 우연은 달리고 달렸다. 말을 듣지 않는 팔다리를 욕해 가며, 필사적으로 허위허위 달렸다.

    하악, 하악, 하악.

    기숙사 앞에 거의 도달한 우연은 문득 어떤 시선을 느꼈다. 주위를 둘러보니, 맙소사. 어둠에 잠긴 벤치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자신을 유심히 보고 있는 것 같다.

    헉!

    등 뒤로 소름이 오싹 끼쳤다. 입에서 비명이 튀어 나가려는 걸 황급히 틀어막았다. 여기서 멈추고 교문 밖으로 도망갈까, 소리를 지를까. 생각하던 우연은 고개를 저었다. 과민 반응하면 안 된다. 우연은 필요 이상 과민하게 공포 반응이 올 때가 많아서 그것을 완화하기 위한 상담 치료를 시작한 참이었다.

    아니야, 괜찮아. 사람 앉으라고 놔둔 벤치에 사람이 앉아 있는 것뿐이다. 그냥 이대로 달려서 기숙사 안으로 들어가면 된다. 안에 사감 선생님도 계시고 사람들도 많으니까 별일은 없을 것이다.

    그그그그그그. 그그그.

    커다란 철제 출입문이 천천히 닫히고 있었다. 우연은 젖 먹던 힘을 다해 문을 비집고 뛰어 들어갔다.

    콰당탕.

    간발의 차이로 건물 안에 들어온 우연은 바닥에 주저앉아 헐떡거렸다. 너무 숨이 차서 토할 것 같고 하늘이 노랗다.

    후아, 후아, 아아, 살았다.

    뒤늦게 안도감이 몰려왔다. 아까 찜찜한 시선이 그냥 과민 반응이면 좋을 텐데. 더워서 시원한 벤치에 앉아 있던 사람이면 좋을 텐데. 학생일까, 교수님일까, 아니면 퇴근 안 한 직원일까. 대체 왜 이 시각까지 퇴근도 안 하고 여자 기숙사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을까? 무슨 짓을 하려고. 혹시 외부 사람이 들어와 앉아 있는 걸까.

    “진우연, 아슬아슬 세이프야.”

    사감 선생님이 철제 출입문이 잠긴 것을 확인하더니 짓궂게 웃어 보인다. 사감 선생님은 나이도 젊은데 얼마나 고지식하고 얄짤없는지 모른다. 1분이라도 늦으면 영락없이 인터폰으로 사감님을 호출해야 해서, 기숙사 사생들은 학장님보다 사감님을 더 무서워했다.

    우연은 가방을 주워 들고 비슬비슬 방으로 올라갔다. 대답할 기운도 없다. 방은 2층이었는데 고 열댓 개 되는 계단을 올라가는 것만 해도 다리가 후들후들하고 죽을 것 같았다.

    방에 올라간 우연은 침대에 주저앉아 한참 숨을 몰아쉬었다. 너무 뛰어서 그런지 구토감이 가시지 않는다. 그냥 울고 싶었다. 오늘 하루는 너무너무 엉망이었다.

    아저씨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꿀 같은, 진통제 같은, 마약 같은 그의 목소리가.

    띠르르르릇, 띠르르르릇.

    우연은 소스라치게 놀라 전화기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몸을 후드득 떨었다. 화면에서는 조금 전까지 간절하게 생각했던 이름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한이원]

    띠르르르릇, 띠르르르릇, 띠르르르릇.

    사람들은 타이밍이 지나치게 맞춤할 때 운명적이라는 말을 붙여 넣곤 한다. 지금처럼. 우연은 이 전화가 운명적이라고 믿고 싶은 마음을 필사적으로 눌렀다. 일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연결이 이렇게 흔할 리가 없다. 불현듯 어떤 느낌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설마?

    우연은 전화를 받는 대신 창문을 열었다. 딸깍. 기다린 것처럼 전화가 끊어진다.

    “굿 이브닝.”

    창문 아래에서 키가 큰 남자가 위를 올려다보며 서 있었다. 아, 역시. 우연은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기숙사 건물의 환한 불빛 덕에, 이제야 그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인다. 조금 기운이 없는 듯, 하지만 예의 다정하고 따뜻한 웃음을 띤 그가 손에 들린 화사한 꽃다발을 들어 보인다.

    “……생일 축하한다.”

    “아, 아저씨! 언제부터 기다리셨어요!”

    이건 반칙이다. 말도 없이 이렇게 와 계시면 나는 어떡해. 아까 알아봤으면 다음 학기에 기숙사에서 잘리는 한이 있어도 안 들어오고 아저씨를 만났을 것이다. 아니, 생일이고 나발이고 기숙사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고 아저씨만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음, 아까 5시 반에 도착했지. 6시 차를 타고 온다고 해서.”

    “저, 전화를 하지 그러셨어요! 약속 다 집어치우고 바로 뛰어왔을 텐데! 잠깐만요. 나갈게요, 바로 나갈…….”

    안절부절못하며 몸을 돌리자 창문 아래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올라왔다.

    “나오지 마, 우연아. 너 벌써 경고 두 번 받았다고 하지 않았어?”

    “맞긴 맞는데, 아저씨가 여기까지 오셨는데 어떡해요! 미안해서, 아저씨…….”

    우연이 창문에 매달려 발을 동동대자, 이내 달래는 듯 부드러운 목소리가 아래에서 올라왔다.

    “약속한 것도 아닌데 미안할 게 뭐가 있어. 깜짝 놀라는 얼굴이 보고 싶어서 일부러 전화 안 했어. 네가 재미있게 놀다가 과팅 깨고 튀어나올까 봐. 난 그런 중년 꼰대 아재는 되고 싶지 않아.”

    아, 역시 은근 뒤끝 작렬. 아니 사실 뒤끝이라기보다 아저씨에겐 중년 꼰대라는 말이 꽤 큰 충격이었던 것 같다. 우연은 뻔뻔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대체 누가 아저씨를 중년 꼰대라고 해요! 캭 죽여 버린다 진짜! 얼른 부르시지 그랬어요. 과팅 재미없었어요! 조따, 좁쌀만큼도 재미없었다고요!”

    하하하, 하하하하. 아저씨가 위를 올려다보며 유쾌하게 웃는다. 손에 들린 동그란 꽃다발, 벤치에 놓인 상자와 종이 가방을 보니 더 속상해서 미칠 지경이다. 5시 반에 오셨으면 저녁을 같이 먹을 생각이셨던 것 같은데, 지금 얼마나 시장하실까. 얼마나 힘드셨을까. 날도 더웠는데. 눈물이 날 것 같다.

    우연이 속상해하는 것을 눈치챈 듯, 부드럽게 달래는 듯한 목소리가 올라왔다.

    “정말 미안해하지 마. 여기 앉아서 꽃향기를 맡고 앉아 있으니 회사에서 도망 나와 천국으로 피정 온 기분이었어. 수국 울타리가 학교 명물이라더니 정말 장관이더라.”

    “……아저씨 오늘 회사에서 힘든 일 있었어요?”

    “늘 힘들지. 내가 능력이 많이 부족하거든.”

    아저씨는 웃는 표정으로 담백하게 시인했다.

    “대규모 재개발 건으로 회의를 네 건이나 했어. 다들 엄청 자신만만하게 싸우는데, 정작 결정해야 할 나는 무서워 죽겠지. 그런데 내가 무서워하는 건 아무도 모르더라.”

    대답이 너무 솔직해서, 저렇게 대답하면서도 초연하게 웃는 모습이 너무 맑고 깨끗해서, 우연은 이상했다. 어떻게 저런 아저씨가 그 큰 그룹을 이끌어갈 수 있을까. 업계에서 말하는 한이원 대표이사는 합리적이고 냉정한 경영자였다. 직관적으로 문제점을 찾아내고 그것을 가차 없이 도려내는 해결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연이 아는 한이원은, 바로 요 창문 아래에서 저렇게 맑고 선량하게 웃으며, 배려심이 깊고 다정하며, 회의 들어가는 게 무섭다고 솔직하게 실토하는 사람이었다. 이 한이원과 저 한이원 사이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는 것 같았다.

    “방에 혜진이 자는 거 아니니? 이렇게 이야기해도 괜찮아?”

    “집에 올라갔어요. 월요일이나 되어야 올 거예요. 주말엔 기숙사가 많이 비어요.”

    “그렇구나. 오늘 친구들하고 뭐 하고 놀았어?”

    “버스킹 구경하고, 방 탈출도 하고, 피방 가서 게임도 하고, 볼링도 치고, 다이소 관광도 했어요. 시내에서 몇 정거장만 들어가면 굉장히 큰 다이소가 하나 있거든요. 3층 건물 전부 다요. 넓고 물건도 엄청 많아요.”

    “저런, 대체 다이소가 언제부터 관광지가 된 거니?”

    “아니, 아저씨! 거기가 얼마나 핫 플레이스인데요! 아저씨 졸업하신 지 너무 오래되신 거 아니에요? 다른 나라에선 다이소 깃발 관광도 온다고요!”

    우연이 창틀에 팔을 괴고 자질구레한 수다를 늘어놓는다. 하, 하, 하하하. 이원은 계속 웃었다. 재미있지 않은 말에도 계속 웃음이 나왔다. 그녀와 이야기를 할수록 꿈속에 서 있는 듯, 자꾸 현실감을 잃었다.

    “알차게 놀았구나! 재미있었겠네.”

    “아니에요. 죄다 엉망이었어요. 버스킹은 시끄럽고, 방 탈출은 문제 하나도 못 풀고, 탈출도 못 했어요. 저만 돌대가리인 건 아니었다는 게 위안이긴 했죠. 게다가 다이소에선 3만 원어치나 충동구매를 했다고요.”

    “하하, 하하하하하. 가격이 얼마건 잘 쓰면 되지.”

    “3천 원짜리 슬리퍼랑 캐릭터 테이프 같은 건 왜 샀는지 모르겠다니까요?”

    우연은 한숨을 퐁퐁 쉬며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점심때는 떡볶이에서 벌레 나오고, 저녁때는 혜진이랑 미연이가 소맥 두 잔 먹고 토하고, 생전 처음 미팅해 보는데 어디서 아저씨 발톱의 때 같은 것들이 나한테 잘난 척, 잘생긴 척을 하면서, 저한테 키 작다고 돌려 까잖아요! 아저씨에 비하면 멸치 해파리 꼴뚜기 같은 것들이! 기분 나빠서 안 한다고 엎었어요. 완전 개매너 아니에요?”

    “매너 정말 나쁘네. 그런데 미팅 처음 해 보는 거였어?”

    “네. 제가 무려 여중 여고를 나왔는데 인기도 없고 존재감도 없는 유령이라 남친 한 번 못 사귀어 보고 대학에 왔단 말이죠. 그래서 나름 기대를 했단 말이에요.”

    이원은 잠시 말을 멈추고 희미하게 웃었다.

    저렇게 말하는 우연은 사실 성매매용 채팅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남자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던 전적이 있다. 내가 그걸 알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저렇게 말하는 거겠지만.

    물론 이렇게 새 출발을 한 상황이니, 그 일을 없던 것처럼 덮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때는 생각이 성숙하지 못한 어린 나이였고, 한계까지 몰린 상황이었다. 한껏 짓눌린 아이가 스스로를 지키려는 의지를 상실했을 수도 있고, 형사의 말대로 집에서 탈출하고 싶어서 먹여 주고 재워 주는 사람을 찾겠다고 채팅 앱을 이용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일이 생각날 때마다 이원은 늘 가슴이 아프고 괴로웠다. 애써 아닌 척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차라리 그러지 말라고 해 주고 싶었다.

    그 일에 대해 선입견 없이 대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이원은 그때마다 자신의 수양이 부족함을 절감했다. 더 기도하고 노력할 부분일 것이다. 고해 신부님들이 수많은 교우들의 비밀을 듣고도 깨끗이 잊고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대하시는 것이 새삼 존경스러웠다.

    이원은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 낸 후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이걸 어쩔까. 저 앞의 편의점에라도 맡겨 놓고 갈까?”

    이원은 꽃다발과 케이크 상자를 들어 올렸다. 창문에서 떨어질 듯 몸을 앞으로 내민 우연이 다급하게 외친다.

    “잠깐만요! 잠깐만요! 안 그러셔도 돼요. 다 방법이 있어요!”

    잠시 후 창문으로 뭔가 나일론 줄에 묶여 천천히 내려온다. 이원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닥까지 내려온 커다란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속이 빈 택배 상자였다.

    “이, 이게…… 뭐니?”

    “이거 저희가 밤에 배달 아저씨들한테 치맥이랑 피자랑 떡볶이 받아 먹을 때 쓰는 방법이에요. 아무리 외진 곳이라도 명색이 대학 기숙사인데 통금이 10시가 뭔가요. 10년째 ‘배고파서 못 살겠다, 한 시간만 늦춰 달라!’ 시위를 해도 까딱 안 하니 저희도 살 궁리를 찾아야죠.”

    이원은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배고픈 아이들의 절박함이 귀엽고 유쾌하게 느껴졌다.

    “그 살 궁리라는 게 라푼젤이야?”

    “에이, 선녀들 두레박이죠! 라푼젤이면 왕자님이 이걸 잡고 올라와야 하잖아요.”

    “못된 나무꾼도 두레박 타고 올라갔는걸.”

    “그럼 아저씨도 못된 나무꾼처럼 이거 타고 올라오실래요? 그럼 저는 풍기 문란으로 기숙사에서 잘리는 거죠!”

    “잘리는 건 내 알 바 아니다만, 내가 올라가기엔 두레박이 너무 부실해 보이는데?”

    “그래도 호박보다는 택배 상자가 더 단단하겠죠. 신데렐라의 마차도 원래는 호박이잖아요. 아직 12시도 안 됐으니 부서지진 않을 거예요.”

    “하하, 하하하. 마법의 시간이야?”

    “네. 저희는 이 상자로 야참 받아서 먹는 시간을 마법의 시간이라고 해요. 누구하고나 영혼의 절친이 될 수 있는 시간이거든요.”

    우연이 상글상글 웃으며 조잘조잘한다. 어둠에 살짝 잠긴 그녀의 얼굴은 구김 한 자락, 티 한 점 없이 말갛고 화사하다. 이원은 숨이 막혀 오는 것을 애써 억누르며 빈 상자 안에 꽃다발과 케이크와 선물을 조심조심 올려놓았다. 끈이 네 귀퉁이에 다 매여 있어서 뒤집힐 것 같지는 않았다.

    상자를 끌어 올린 우연이 환호성을 지르는 소리가 들린다. 꽃다발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볼을 비비는 모습이 보인다. 그녀는 이원 앞에서만큼은 제 감정을 표현하는데 거침이 없다. 가슴이 지끈거린다. 그러더니 선물 상자를 열고는 가감 없이 탄성을 토한다.

    우연은 그 자리에서 목걸이와 팔찌를 두르고 몸을 창밖으로 내민다. 목걸이와 팔찌를 단순하면서도 두께감이 있는 것으로 골랐던 덕에, 이제 그녀는 고대의 여신들처럼 화려하고 신비로워 보인다.

    “아저씨, 감사합니다. 정말 예뻐요! 마음에 쏙 들어요!”

    두 팔이 머리 위로 둥그렇게 올라가더니 커다란 하트를 만들어 낸다. 저도 모르게 들숨이 훅 밀려들어 왔다. 마음 한쪽에서는 괜히 조바심도 난다. 조심성 없게 저런 동작을 함부로 보여 주다니. 혹시 다른 사람에게도 저러는 건 아닐까.

    그녀는 창틀 위에 케이크를 놓고 초를 두 개 꽂은 후 불을 붙인다. 그러더니 깍지 낀 손 위에 턱을 얹고는 장난스럽게 요구 사항을 내민다.

    “노래는요?”

    “응?”

    “케이크를 주셨으면 생일 축하 노래도 해 주셔야죠. 세트잖아요. 달밤에 창문 아래 꽃다발을 들고 서 있는 남자라면 메들리로 30곡쯤 뽑아 줘야 한다고 헌법에 나와 있지 않아요?”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이원은 사뭇 난감해졌다. 물론 성당 성가대에서도 오랫동안 활동했고, 신학교에서도 독창이든 합창이든 연습을 엄청 시키기는 해서, 노래를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중인환시에 혼자 노래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러잖아도 창가에서 얼른얼른하는 그림자들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는 것만 같은데.

    하지만 지금 이곳의 분위기는 아무래도 이상했다. 하얀 솜사탕 같은 꽃 무더기가 여기저기 덩실덩실 솟아나 주변을 감싸고 있고, 이제 막 노란 꽃잎을 펼친 해바라기들이 그 뒤로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서 있다. 새하얀 안개처럼 펼쳐진 꽃 무더기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구름 밭처럼 아득했다. 이원은 그만 환상의 세계 속에 들어선 듯했다. 사방에는 수국의 지독하게 달콤한 향기가 가득하다. 꿀처럼 진득한 향기가 폐에 가득 들어찬다. 달콤한 세레나데가 어울리는 밤, 이원은 이 지독한 향기에 흠뻑 취하고 말았다.

    “생일 축하, 합니다…….”

    저도 모르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부탁대로, 제안대로, 혹은 명령대로, 조건 반사처럼 노래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청을 거절할 용기는 없었고, 부끄러웠지만 멈출 생각도 들지 않았다. 서른 번이든, 마흔 번이든, 그녀가 원할 때까지 계속 불러야 할 것 같았다.

    우연은 창가에 턱을 괴고 앉아 여신처럼 오연하게, 고양이처럼 우아하고 도도하게, 오랜 친구처럼 편안하게, 연인처럼 사랑스럽게 노래를 들었다. 몽글몽글 덩어리진 향기가 노래를 감싸 안고 회오리바람처럼 우연에게 올라가는 것 같다.

    이원은 지금 이 공간이 점점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이 지독하게 달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공간에는 우연과 자신만 서 있는 것 같았다. 홀린 듯, 취한 듯, 그는 어느새 부끄러움을 모두 잊었다.

    “와, 우엉이 오늘 생일이었어?”

    “미리 말하지! 야, 오늘 우연이 생일이래!”

    “정말? 축하해 우연아!”

    창문에서 아이들 얼굴이 삐죽삐죽 튀어나오더니 이내 손뼉 치는 소리가 따라 나온다. 같은 층 친구들과 사이가 좋다더니 사실인가 보다.

    “후우우!”

    노래가 끝난 후, 우연은 힘껏 촛불을 불어 껐다. 우연이 손가락으로 크림을 찍어 입에 넣고 구김 없는 탄성을 지른다. 맛있어요! 환상적이에요! 이번엔 크림을 찍어 얼굴에 지익, 바른다. 친구들이 하는 크림 장난을 제 손으로 해치우려는 모양이다. 그러더니 그 얼굴을 창밖으로 내밀어 이원을 내려다보며 웃는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에 인디언 전사의 문신처럼 새하얀 무늬가 그려졌다.

    가슴에 고여 있던 정체불명의 불쾌감이 어느새 종적 없다. 네 시간 반의 지루한 기다림도 어느새 깨끗하게 녹아 사라졌다.

    잠시 눈을 감았다. 수국의 향이 달다, 달다, 숨 막히게 달다.

    다시 상자가 내려온다. 상자 안을 들여다보자 작은 접시에 케이크가 한 조각 얌전하게 놓여 있다. 포크는 없었다.

    이원은 그것을 들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높은 탑에서 기사에게 명령을 내리는 공주처럼, 우연이 손가락을 들고 케이크에 찔러 넣는 시늉을 한다. 해 봐요! 아저씨도 해 봐요! 이원은 방금 우연이 했던 대로 손가락으로 크림을 찍어 한쪽 뺨에 지익, 그었다. 뺨이 간지럽다. 새큼한 냄새가 난다. 이제 향기는 석청처럼 농밀해진다.

    이원은 손으로 크림을 다시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시다, 달다. 이원은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떨었다.

    감각이 이상하다. 이럴 리가 없다. 나는 지금 정상이 아니다. 목이 막힌다.

    그는 뒤늦게 성호를 긋고, 맨손으로 케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손이 주체할 수 없게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혀에 감기는 케이크의 맛은 여전히 시고, 달고, 시고, 달았다. 거의 6년 만에 느끼는 맛이었다. 눈이 욱신대고 목이 메어서, 그는 고개를 숙이고 이를 악문 채 허겁지겁 먹었다.

    케이크가 말끔히 사라진 후, 이원은 조용히 위를 올려다보았다. 작고 하얀 얼굴이 소담하게 웃음을 머금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다정하고 사랑스러우며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상처 입고 위축된 우연의 마음은 이제 자유를 얻었고, 자유로워진 영혼은 이제 한껏 눈이 부셨다.

    이원은 그녀를 올려다보며 눈을 깜박였다.

    그동안 자신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던 감정의 정체를 드디어 알았다. 자신의 의지가 그 감정을 인정하지 못하고 파묻고 부인해 왔던 이유도 알았다.

    그리고 이원은 이 감정을 자각함과 동시에 그 결말도 알게 되었다. 가치 중립적이며 아름다운 이름을 지닌 이 감정은, 자신의 품에 안길 때 위험하며, 허락받지 못하며, 부당한, 불법한, 필연히 악한 결과를 낳는 감정으로 전락할 것이다.

    ……하느님. 저, 저에게 어쩌라고 이런 감정을…….

    우연이 그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인 후 두 팔로 커다란 하트를 그려 보이며 찬연히 웃는다. 이원은 그 모습을 새기듯 바라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웃었다.

    우연의 말이 맞다. 지금은 마법의 시간이고, 나는 저항할 수 없는 신비한 마법에, 혹은 저주에 걸린 것이다.

    이름 붙여서는 안 되는 감정. 더 나아가면 안 되는 발걸음.

    열두 시가 되기 전까지, 아주 잠시만이라도 그 환상을 누려 보면 안 될까.

    이원은 아주 잠시, 그런 부질없는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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