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누드-11화 (11/47)
  • 11. 키다리 아재

    [1] 수강 신청

    “음? 외출 허가증? 오늘 어디 나갈 일이 있니?”

    우연에게 전화가 온 것은 아침 8시, 여의도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뒷좌석에 앉아 있던 이원이 직접 전화를 받는다.

    홍연은 고 콩알만 한 아가씨가 전무님에게 아무 어렴성 없이 전화를 해 대는 것이 영 마땅치 않았다. 계열사 부장이나 이사들도 이원에게 이 정도로 함부로 연락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어디 쥐눈이콩만 한 게 겁도 없이! 지주사 대표이사라는 호칭을 듣고도 딱 감이 오는 게 없나?

    “그리고 외출 허가증 같은 건 내가 아니라 장학관 정 관장님한테 말씀드려야지. 외출 허가 내 주시는 분은…… 응? 나한테 물으랬다고?”

    정 관장 이 사람 진짜. 왜 이런 것까지. 이원이 들릴락 말락 혀를 찬다. 하지만 홍연은 정 관장이 왜 이렇게 과민 반응인지 알 것 같았다. 지금까지 이원메세나재단은 숱한 예술인과 영재들을 후원했지만, 재단 이사장이 직접 개인 후견을 맡았던 적은―아무리 단기라지만―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사장이 직접 장학관에 데려와 안전하게 보호하라고 신신당부까지 했으니, 원리 원칙 주의자에 쫄보인 정 관장이 진땀이 날 만도 했다.

    “그래. 무슨 일로 외출이니? 뭐? 피시방? 그러게 내가 그때……! 아, 그래, 피시방엔 무슨 일로?”

    침착하던 이원의 목소리가 확 높아지다가 얼른 가라앉는다. 홍연도 잔뜩 부아가 났다.

    지금 접근 금지 처분이 빨리 안 나와서 전무님이 노심초사하고 있는 거 알면서 뭐? 고작 피시방에 가려고 외출 허가? 왜, 호기롭게 노트북 거절할 때는 언제고? 왜애? 장학관 멀티미디어실 컴퓨터가 너무 연로하셔서 게임이 팽팽 안 돌아간다더냐. 네가 혼자 나갔다가 문제라도 생기면 그 책임을 다 전무님이랑 정 관장이 져야 하는데 너 혼자 덜렁 내보낼 수 있을 거 같으냐.

    ― 있잖아요, 그게요…….

    우연이 열을 내어 가며 열심히 설명을 늘어놓는데 들리는 거라곤 ‘있잖아요, 있잖아요.’뿐이다. 아하, 하하하, 한 전무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린다.

    “그럼, 처음이면 잘 모를 수도 있지. ……그러니까 수강 신청 하는 데 광클릭이 필요하다 이거지?”

    순간 홍연의 입에서도 풀썩, 웃음이 터졌다. 그런 이유라면야, 백번 납득하고말고.

    바야흐로 수강 신청 시즌이로다. 그렇지, 제대로 된 수강 신청을 위해서는 반드시 최고사양과 빛의 반응 속도가 보장된 피시방에 가야만 한다. 그것이 인기 과목 신청에 성공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한 전무의 말에 웃음이 싸악 가라앉았다.

    “갈 피시방이 어디니?”

    그들이 차를 되돌려 러시아워를 헤치고 도착한 곳은 장학관 인근의 ‘여우와 고양’이라는 피시방이었다. 아침 7시 20분에 서초동에서 나와 8시에 여의도를 찍은 후, 다시 러시아워를 헤치고 9시를 훌쩍 넘겨 교대 앞을 찍노라니 홍연은 기분이 아주 산뜻했다.

    출근 시간의 피시방은 사람이 거의 없었고 그나마 몇 있는 손님은 흡연실 칸막이 안에 있어서 조용했다. 아저씨, 여기요! 여기요! 야구 모자를 쓰고 앉아 있던 우연이 발딱 일어나더니 입을 벙긋벙긋 손을 팔락팔락 한다.

    이원은 그녀의 옆자리를 신청해 앉았다. 아침을 못 먹고 왔는지 책상에는 라면 그릇과 콜라와 과자 봉지가 수북했다. 아침부터 이런 걸 먹으면 속 버릴 텐데. 이원이 그릇을 반납하고 책상 정리를 하자 우연이 입가를 우글쭈글 구기며 중얼거린다.

    “귀찮게 해서 죄송해요. 새터에 가면 신청하는 방법 다 알려 준다고 하는데, 못 갔더니…….”

    이런 것 하나 야무지게 처리하지 못하다니, 날 얼마나 바보라고 생각하실까. 표정이 너무 빤해서 속이 훤히 읽혔다.

    그 모습을 보니 자꾸 웃음이 나온다. 수강 신청을 부모가 대신 해 주는 학생들도 있다고 들었는데 자신이 그 신세가 될 줄은 몰랐다. 그런 아이들을 보면 한심할 줄 알았는데 정작 눈앞에서 진땀을 쫄쫄 흘리면서 낑낑대는 모습을 보니 마냥 귀엽고 우습기만 했다.

    “새터는 왜 안 간 거니? 친구하고 선배들도 사귀고, 수강 신청 방법도 배우고, 도움이 많이 됐을 텐데.”

    혹시 비용 때문일까? 사람 만나는 게 아직은 겁이 나서? 시간이 더 필요할까? 개강이 코앞인데 아직도 그러면 어쩌나. 자꾸 잔걱정만 가지를 친다.

    이원은 자신이 이 아이에 대해 과민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후견인 신청은 접근 금지 명령을 위해서였고, 후원 업무는 결국 돈을 대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아이의 경우는 전화만 오면 무슨 일이 생겼나 긴장부터 되고, 말 한 마디 한 마디 들을 때마다 신경이 곤두선다. 물론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과민할 수밖에 없긴 한데 그래도 가끔은 자신이 지나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우연은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반짝 들더니 장난스러운 얼굴로 되묻는다.

    “아저씨, 제 얼굴 어때요?”

    “……네 얼굴? 예쁜데? 왜?”

    우연의 얼굴이 멍해지더니 갑자기 입을 틀어막고 캑캑 웃기 시작했다. 이원은 열이 오르는 뺨을 쓰다듬으며 헛기침만 했다. 뭔가 대답을 잘못한 것 같은데, 이걸 어째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홍연의 당혹스러운 시선과 알바생의 짜증스러운 눈초리가 따가웠다. 한참 웃어 대던 우연이 발개진 눈을 문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예쁘기는 뭐가 예뻐요. 이 색깔 좀 보세요. 살짝 덜 익은 바나나 같지 않아요?”

    “그게 무슨…… 아.”

    이원은 그제야 우연의 얼굴을 살펴보고는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찡그렸다. 멍 자국이 제법 깨끗해졌다 싶었는데 햇빛 아래서 보니 여전히 푸르스름한 티가 났다.

    그랬겠구나. 이원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는 마당이니 이런 흔적을 완전히 지운 후에 가고 싶었을 것이다. 우연은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제 손으로 뺨을 쭉 잡아당기며 씩 웃었다.

    “제 경험상 요 색깔이면 딱 일주일이면 괜찮아져요. 입학할 때면 우유처럼 뽀얗게 변해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이원은 웃고 있는 아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자신에게 환하게 웃어 보이려 노력하는 모습이 예뻤고, 솔직하고 밝게 말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가슴 저릿하게 고마웠다. 우연은 종달새가 지저귀는 소리처럼 경쾌하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아저씨, 이게 제가 앱에서 미리 맞춰 놓은 과목들이에요. 최소는 9학점인데 장학금 받으려면 15학점 이상은 들어야 한대요. 그래서 일단 강의 후기들 다 찾아보고 15학점 이상으로 맞춰서 짜서 담아 놨어요.”

    이원은 저도 모르게 싱긋 웃었다. 그래도 장학금 받을 생각은 하고 있구나. 기특하다. 찾아볼 건 혼자서 또 열심히 찾아보고 했구나. 기특하다, 잘한다, 장하다! 이원은 주먹을 꼭 쥐고 응원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그래, 어떤 과목들이니?”

    우연은 조금 걱정스러운 듯, 하지만 기대감에 찬 얼굴로 모의 시간표를 띄웠다. 저 이 정도면 잘했죠, 하는 득의양양한 얼굴이다. 강의 시간이 알록달록하게 표시된 일주일 시간표가 화면에 뜬다.

    “기초 드로잉 3학점, 인체 해부학과 표현 3학점, 안료의 특성과 효과 3학점, 유화의 기법 3학점, 회화Ⅰ 3학점. 총 다섯 과목 15학점. 하나도 안 겹치게 다 맞췄어요! 월화수목 주 4일 수업! 멋지죠?”

    푸웁!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더니 홍연이 급히 입을 틀어막는다. 이원도 당황했다. 아니 이렇게 막 나가는 시간표로 그렇게 자신만만한 얼굴을 하면 안 되지. 아무리 뭘 몰라도 이렇게 짜 놓으면 어떡해. 게다가 1학년 주제에 간도 크게 주 4일 수업이라니. 딱 15학점이라니. 나중에 졸업 학점 어떻게 다 맞추려고.

    “우연아, 왜 교양 필수가 하나도 없어? 1학년부터 들어야 할 전공 기초 과목도 없고? 이거 다 고학년 전공 선택 과목들 아니니? 이럼 안 되지.”

    우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진다.

    “어, 드, 듣고 싶은 거 먼저 들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럼 신청이 안 되는 거예요?”

    “신청이 아예 안 되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교필이랑 전공 기초들은 저학년 때 미리 들어 놔야지. 여기 봐봐. 공통 교필 여섯 개 그룹 중에서 학기에 하나씩은 이수해 놔야…… 전공 영어 1, 평면과 입체, 현대 미술과 철학도 1학년 전공 기초인데 왜 죄다 뺐어?”

    “철학이요? ……회화과인데 대체 철학을 왜 들어야 해요?”

    우연은 너무나도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현대 미술에서 그림 테크닉보다 더 중요한 것이 철학이라는 말을 어떻게 간단하게 설명할까, 생각하던 이원은 바로 포기했다. 그건 한 학기 강의로도 모자랄 내용이었다. 이원은 한숨을 쉬며 간단하게 말했다.

    “안 들으면 졸업 못 해.”

    “……나중에 들으면 안 돼요?”

    “나중에 시간 못 맞추면 펑크야. 교양 학점 부족이나 필수 과목 이수 못 해서 제때 졸업 못 하는 사람도 꽤 있어. 고학년 전공 선택들이 맘에 드는 건 알겠는데, 좋아하는 걸 아껴 놨다가 나중에 하는 게 좋지 않아?”

    “아끼면 똥 된대요. 나중에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요. 가장 맛있는 것부터 제일 먼저 먹는 게 손해가 없는 거잖아요.”

    이원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한숨을 삼켰다.

    그 말이 또 아주 틀린 건 아니다. 이원은 마시멜로 실험에서 간식을 먼저 먹었던 아이들에 대해, 참을성이 없었다기보다 약속된 미래를 믿지 못했던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곤 했다. 그 실험은 부모의 양육 방식과 신뢰도 테스트에 더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우연의 이런 반응 역시 기존 사회나 어른들에 대한 신뢰의 부재를 의미했다. 상대에 대한 불신이 디폴트로 깔려 있는 기업의 의사 결정도 대체로 저 원칙에 따라 이루어지는 걸 보면 우연의 반응을 아주 틀리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지금은 그래선 안 되지 않겠니. 이제 1학년이면 그래도 남들하고 좀 비슷하게 신청해서 비슷하게 가 보면 안 되겠니. 다행히 눈치 빠른 홍연이 뒤에서 붙임성 있게 추임새를 넣는다.

    “우연아, 그거 다 실기 과목이잖아. 내 친구 중에 미대 졸업생이 많아서 좀 아는데, 그거 다 신청했다간 죽어. 정말 죽어.”

    “너 미대에 과제가 얼마나 많은지 아직 모르지? 이거 다 했다간 여름 방학도 되기 전에 장례 치를걸?”

    “살아남아도 대대적인 학점 굴욕과 거대 흑역사를 안겨 줄 거야.”

    하지만 우연은 눈을 내리깔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면서도 자신이 고른 과목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아저씨가 대학에 오면 그림만 신나게 그리면 된다고 하셨잖아요.”

    “아저씨, 배울 게 너무너무 많아요. 지금 당장, 내일부터라도 다 배우고 싶단 말이에요.”

    “안료의 특성과 효과라니, 인체 해부학이라니 대박! 완전 재밌을 것 같지 않으세요?”

    “궁금해서 미치겠는데 그걸 어떻게 3학년 4학년까지 기다려요? 전 말라 죽고 말 거예요.”

    “아저씨 초상화 빨리 받고 싶지 않으세요? 제가 유화든 과슈든 아크릴이든 부지런히 배워야 조금이라도 더 좋은 작품을 빨리 받으실 수 있지 않겠어요?”

    “전 할 수 있어요. 그림이 제일 쉬워요! 제가 솔직히 국영수 몽땅 8등급이었는데, 오로지 실기 100%로 이 학교에 입학한 거라니까요? 아저씨, 아저씨?”

    흑역사인 내신 8등급까지 가차 없이 까 보이는 맹렬한 기세에 이원은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협상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천만다행히, 우연이 화장실에 다녀온다며 자리를 비운다.

    자, 이걸 어쩐다?

    이원은 우연이 펼쳐 놓은 커리큘럼을 보며 한숨만 쉬었다. 신청 시간까지 30분. 보면 볼수록 답이 나오지 않는다. 분명히 중간에 펑크가 나고 말 텐데. 1학년 첫 학기부터 4년 만에 제대로 졸업할 수 있을지 걱정해야 한다니. 시간 안에 설득이 될까?

    이원은 홍연을 돌아보며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홍연 씨, 이거 그냥 놔두면 안 되겠죠?”

    “당연하죠, 전무님. 시간도 겹칠 거고, 제2외국어나 교양 필수를 4학년 때 신청했다가 낙제하면 방법도 없습니다. 아시겠지만 이원메세나재단에선 5년씩이나 학비를 대 준 역사가 없습니다.”

    “그렇겠죠? 후견인으로서 ‘이건 안 돼.’ 하고 딱 잘라서 막아야겠죠?”

    “물론입니다. 권력은 이럴 때 남용하라고 있는 겁니다, 전무님.”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고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어떤 과목으로 대치하면 좋을까.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연구를 시작했다.

    “일단 필수인 전공 영어 1하고, 평면과 입체, 현대 미술과 철학부터 넣고……. 아, 요새는 코딩도 필수군요. 거기에 보고서 작성, 기초 드로잉까지 넣으면 13학점인데 벌써 5일 수업 확정이네요.”

    “전무님, 1학년 주제에 감히 주 4일 수업으로 짜는 건 용납할 수……. 무리가 있습니다.”

    “생활 체육 그룹도 교양 필수에 들어 있으니 지금 신청하면 좋겠네요. 체력이 너무 약해 보여서요. 요가, 수영, 승마, 초급 발레, 농구, 라틴 댄스는 뭐지…….”

    “발레는 무용과가 있어서 원하면 제대로 배울 수 있을 테고, 승마는 근처에 승마장이 있어서 개설된 모양입니다. 지역 특혜 과목이네요 이건.”

    이원은 우연에게 어떤 운동이 잘 어울릴까 곰곰이 생각했다.

    “우연이 발레 잘할 것 같은데요. 그 아이가 체력은 좀 부족해도 움직임을 보면 고양이처럼 유연하고 정말 부드럽거든요. 어깨 움츠리는 버릇도 교정될 테고…….”

    “전무님. 발레는 생각보다 체력 소모가 엄청나다 들었습니다. 걸음걸이도 좀 특이해지고. 유연성이 좋으면 요가가 더 낫지 않을까요. 집에서도 할 수 있고요.”

    “음, 심리 치료 쪽으로 보면 승마가 훨씬 나을 것 같기도 하네요. 말하고 교감하는 즐거움이 크거든요.”

    “저, 승마는 좀……. 워낙 접근성이 낮은 스포츠라……. 그, 그리고 모든 사람이 전무님처럼 동물들과 교감할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홍연이 식겁한 얼굴로 만류하자 이원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아니 그런데 여기 교양 과목 왜 이렇게 부실해.”

    “아무래도 학교 규모도 작고 위치도 외지고 하니…….”

    오죽하면 국장도 학자금 대출도 안 나오겠습니까, 하는 투덜거림은 예의상 꼴랑 삼켰다. 현재 점잖은 상사께서는 자신의 위치를 길고양이에게 간택당한 지갑, 아니 집사 정도로 여기고 있는바, 주인님(?)의 학교를 후지다고 까대면 어떤 후폭풍이 닥칠지 모르는 것이다.

    “홍연 씨, 이건 어떨까요. 생활 속의 민법과 형법. 살다 보면 굉장히 유용한 과목인데, 하다못해 경찰서에 갔을 때 미란다 원칙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사회 경제 그룹 쪽에선 범죄학이나 소비자 의사 결정론 이런 것도 은근 재미있었는데.”

    “아, 예.”

    홍연은 한숨을 쉬며 잠시 물러앉았다. 물론 재미있으셨겠죠. 라틴어, 히브리어, 고대 철학, 중세 철학 배우시다가 편입하셔서 민법과 형법, 범죄학, 소비자 의사 결정론을 배우시려니 얼마나 재미있으셨겠습니까.

    하지만 이원이 후견인의 알량한 권력을 남용하기 위해 아무리 열심히 테트리스를 맞추며 기다려도 우연은 돌아오지 않았다. 15분밖에 남지 않았을 때, 이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에 간 지 지나치게 오래된 것 같다.

    “최 실장님. 잠시만 여기 계세요.”

    그는 조심조심 피시방 전용 여자 화장실을 찾아가서 복도를 오락가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나오지 않는다. 여자 친구를 사귀어 본 적이 없었던 이원은 여자 화장실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려 본 경험도 없어서 이 상황이 좀 어색했다.

    불러 볼까, 말까. 화장실 밖에서 빨리 나오라 재촉하는 게 몹쓸 짓이라는 상식은 있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급하고도 너무 급했다.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2분 정도 기다리던 이원은 결국 다섯 번쯤 헛기침을 하고 조심스럽게 불러 보았다.

    “우연아, 시간 다 되어 가는데. 얼른 나와야 할 것 같아.”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우연아, 우연아, 안에 없니?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데 여전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점점 애가 타기 시작했다. 변태가 될 위험을 무릅쓰고 화장실 안에 들어가기까지 1분이라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아저씨이이…….”

    아까의 패기와 용기는 어디로 가고 다 찌그러진 목소리가 들린다. 울기 일보 직전인 것 같다. 이원은 무슨 사태가 났는지 대충 파악하고 푸스스 웃음을 삼켰다.

    “화장지 갖다줄까?”

    “왜 아저씨가 왔어요……. 딴 사람한테 가 보라고 하지.”

    안에서는 엉뚱한 소리가 튀어나온다. 어지간히 창피하고 속상한 모양이다.

    예전에 압박 면접의 질문지 중 ‘화장실에서 볼일을 봤는데 화장지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느냐’ 하는 내용이 있었다고 했다. 그때 쏟아져 나왔다는 더럽고 창의력 넘치는 대답들을 이원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때 이원은 면접 대상자가 느꼈을 수치심과 곤혹스러움에 심하게 이입해서 듣기가 너무 불편하고 거북했었다. 지금은 그 거북함의 딱 열 배쯤 되는 것 같다. 심지어 저 아이 말대로 왜 내가 왔을까 싶어 미안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최 실장이나 피시방 아르바이트생을 보내는 게 나았을까, 생각하던 그는 황급히 하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오는 게 낫지, 다른 사람에게 저 아이를 망신시킬 수는 없었다. 그는 우연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했다. 이런 일은 매우 흔하다는 듯.

    “여기 관리자 일 제대로 안 하네. 조금만 기다려. 바로 갖다줄게.”

    “아, 아저씨, 저기, 화장지 넣어 주실 때 저…… 만 원만 같이 빌려주시면 안 돼요?”

    “만 원? 갑자기 만…… 원은 왜?”

    화장실 안에 있던 우연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찔끔했다.

    “아, 아니 만 원 안 주겠다는 게 아니라…….”

    더듬대는 목소리에서 아저씨가 당황한 게 느껴진다. 하긴, 이 상황에서 돈을 빌려 달라니, 누가 봐도 광년이로 볼 것 같지 않은가.

    “저, 급하게 사 올 게 있어서……. 아 씨…….”

    우연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억지로 눈물을 참았다. 여기서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요 아래 1층 편의점에서 생리대 좀 사다 주세요,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가 살짝 내려가 사 오자니 주머니에는 500원짜리 동전 하나밖에 없고.

    아 정말, 죽고 싶다. 정말 죽고 싶어 죽겠다. 아저씨가 여자였으면 좋았을 텐데. 왜 아저씨는 남자고, 아저씨 비서도 남자고, 왜 피시방 아침 알바까지 남자지. 하다못해 왜 이 피시방 화장실에는 들어오는 여자가 한 명도 없느냐고.

    안 좋은 일은 몰아서 온다는 게 맞다. 인생의 삼재가 오늘 하루에 몰아서 활짝 발현된 것이 틀림없다. 왜 화장지가 없다는 걸 발견하는 건 항상 볼일을 본 다음일까. 볼일 보기 1초 전에만 발견하면 얼마나 좋을까. 왜 나는 아까 거스름돈을 얌전히 아껴 두지 않고 라면하고 콜라하고 과자를 먹어 버렸을까. 왜 하필 이런 날, 이런 순간에 눈치 없이 생리가 터질까. 딱 두 시간만 기다렸다 터져 주면 안 되었을까. 원래 지금 할 때가 아닌데, 환경이 바뀌어서 자궁이 또 발광이 났나? 아까부터 배가 계속 아파서 짜증이 났는데, 수강 신청 때문에 긴장해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

    우연은 생리가 지긋지긋하고 치가 떨렸다. 생리를 해야만 하는 자신의 몸도 끔찍하게 싫었다. 치질은 수술이라도 할 수 있지, 이건 수술한다고 낫는 것도 아니잖은가 말이다.

    생명을 품을 수 있는 몸? 거룩한 일? 자부심을 가지라고? 개지랄 같은 소리다. 그런 소리 하는 인간이 있으면 너나 실컷 해라, 너나 한 달에 백 번 해라, 퍼부어 주고 싶었다. 우연은 무슨 사고라도 나서 자궁만 딱 잘라 내면 얼마나 좋을까, 빨리 늙어서 폐경이 되면 얼마나 인생이 즐겁고 편해질까, 그러면 울랄라 제2의 인생이 시작될 텐데, 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필요한 거 있으면 대신 사다 줄까?”

    밖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우연은 머리를 쥐어 쌌다. 무엇보다 이 빌어먹을 상황을 최악의 상황으로 만드는 건, 바로 밖에 서 있는 게 ‘아저씨’라는 점이었다. 하다못해 알바 오빠나 모르는 사람이라면 덜 창피했을 텐데. 여기 다시는 안 오면 되니까. 하지만 아저씨라니, 저 점잖은 이원 아저씨라니!

    자, 실토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할 것이냐, 말 것이냐.

    햄릿도 시저도 이순신 장군도 나처럼 비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딱 그냥 죽고 싶었다.

    “안에 사람 있어요? 이거 받아요.”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어떤 아주머니가 똑똑, 노크하더니 화장실 문 위로 종이 가방을 넘겨준다.

    가방 안에는 화장지 한 팩과 편의점에서 파는 휴대용 생리대 세트가 자그마치 다섯 종류가 들어 있었다. 라이너, 작은 것, 중간 것, 큰 것, 오버나이트. 뭘 쓸지 모르니까 종류대로 다 쓸어 온 모양이다. 어떡해. 난 몰라. 아저씨가 저거 사면서 얼마나 창피했을까. 아주머니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이어진다.

    “밖에서 어떤 잘생긴 남자가 전해 달래요. 남편인지 애인인지.”

    우연은 화장실에서 나가고 싶지 않았다. 아저씨가 늙어 죽을 때까지 영원히.

    이원이 피시방 자리로 돌아온 것은 수강 신청 프로그램이 열리기 2분 전이었다. 어디를 뛰어갔다 왔는지 땀이 살짝 맺혀 있고,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우연이가…… 수강 신청은 우리 두 사람이 알아서 해 달라네요.”

    “아, 전무님! 잘됐습니다! 알아서 해 달라니, 이건 하늘이 내린 기회입니다!”

    하지만 홍연의 쾌재와 달리 이원은 눈썹을 찌푸리고 뭔가 생각에 잠겨 있다. 아니 전무님? 이 절체절명의 중요한 시간에, 그렇게 넋 놓고 계실 때가 아닌데요. 우연이가 담아 놓은 전공 선택 과목들 얼른 빼시고, 아까 그렇게 열심히 의논해서 골라놓은 전공 영어, 보고서 쓰기, 요가인지 승마인지 발레인지, 현대 미술과 철학, 민법과 형법, 소비자 의사 결정론 등등을 얼른 집어넣어서 주 5일 21학점을 꽉 채워 주셔야 하는데……요?

    하지만 이원은 여전히 깊이 고뇌에 빠진 얼굴로 팔짱을 낀 채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시간은 점점 흘러간다. 30초 전, 20초 전, 10초 전, 삑, 삑, 삐이잇.

    “저, 전무님, 지금 10시 정각입니다!”

    홍연이 급하게 소리치는 순간, 이원은 후드득 고개를 흔들더니 우연이 바구니에 담아 둔 화면 그대로 ‘신청하기’를 눌러 버린다.

    “……아?”

    삣, 화면이 그대로 멈춘다. 두 사람은 그대로 얼어붙었고, 숨 막히는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삐빗.

    한참 후에야 화면이 원상으로 복구되면서, 신청한 5과목이 모두 접수되었다는 메시지가 뜬다. 오, 놀라운 순발력. 단 한 과목도 튕기지 않고 단번에, 모조리 성공했다. 이원은 여전히 얼어붙은 채 그대로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다. 만세 만세 만만세. 홍연은 맥 빠진 얼굴로 손뼉을 쳐 주었다.

    “음…….”

    순간 이원이 정신을 차린 듯 눈을 깜박거린다. 홍연은 큼, 헛기침을 했다. 자, 이제 이 뻘짓의 이유를 설명해 보시죠. 하는 듯한 얼굴에 이원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뻘짓의 당사자도 그 이유는 잘 모르는 듯했다.

    한참 후, 그가 내키지 않는 듯, 속을 실토했다.

    “음, 그래도…… 우연이가 애도 아니고, ……자기 수업이니까, 말아먹어도…… 자기가 말아먹게 놔둬 보는 게…….”

    “예?”

    “……그게, 흑역사도, 뭐, 나이 먹으면 다…… 재미있는 경험 아니겠습니까.”

    그러더니 바로 우연의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난다. 뭐래? 홍연은 얼빠진 얼굴로 상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목덜미와 귓가가 조금 붉어진 것처럼 보였다.

    피시방 문가에 종이 가방을 끌어안고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는 우연의 모습이 보인다. 덜 익은 바나나 같다던 얼굴은 이제 폭 익은 복숭아 같다.

    이원은 옆을 지나가면서 우연의 머리를 어색하게 헤집더니 덤덤하게 “가자.” 하고 앞장을 선다. 아, 아저씨, 아, 씨 난 몰라, 아저씨이이, 우연이 발을 동동대더니 자포자기한 듯 바로 종종대며 따라간다. 이원은 다리가 길고 우연은 키가 작아 이원이 한 걸음 걸으면 우연은 두 걸음을 총총 뛰어야 했다.

    아저씨. 응. 아저씨, 왜 웃어요. 웃지도 못하니. 아저씨, 좀만 천천히 가요, 다리 길다고 자랑하세요? 다리 긴 것도 잘못이냐. 아저씨, 수강 신청은요? 글쎄. 난 잘 모르겠네. 아이, 아저씨, 이상한 거 집어넣었죠? 궁금하면 가서 확인해 봐. 아저씨, 국어 영어 수학 그런 거 막 넣었죠! 21학점 꽉 채웠죠! 글쎄다. 아저씨, 아저씨이이.

    홍연은 이원의 이상 행동의 이유를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았다.

    [2] 통화

    “아, 그래. 학과 엠티는 잘 끝났니? 재미있었어? 피곤하지 않니? 이따 데리러 갈까?”

    “재미있었다니 다행이구나. 운동회? 엎어졌다고? 왜! 다치진 않았어? 옷이 찢어져? 괜찮아? 운동 못 한다며 왜 이어달리기 같은 데 나가고 그래! 등수가 무슨 상관이야!”

    “재미있는 룸메이트 만난 모양이구나. 잘됐다. 기숙사 2인실이랬지. 남매가 다섯이래? 이름이 혜진이? 발레 전공이야? 오리처럼 걷는 건 또 뭐야. 어, 우, 우연아, 영상 하지 마! 안 보여 줘도 돼, 우연……, 푸웃, 와하하하.”

    이원은 다시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통화가 길어질 듯했다.

    바야흐로 신학기를 무사히 맞이한 신입생께서는 사나흘에 한 번씩 꼬박꼬박 전화를 했다. 용건이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하라는 이원의 당부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모양인데, 그 용건이라는 게, 백만 번 들어도 하잘것없었다. 홍연을 거쳤으면 백에 아흔아홉은 잘려 나갈 시시껍적한 수다 쪼가리였다.

    하지만 우연이 이렇게 전화를 열심히 하는 이유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원의 도움으로 그야말로 새 인생을 시작하게 됐고, 그에 대한 고마움과 벅찬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이 누리고 있는 행복을 적극적으로 알려 주는 것으로 고마움을 표현하는 중이었다.

    그 마음이 너무 기특하고 예뻐서 이원은 그녀의 전화를 늘 직접 받았고, 놀라운 인내심(?)으로 그 수다 나부랭이를 끝까지 웃으며 들어 주었다.

    우연은 걱정했던 것보다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아니, 지나치게 잘 적응한 것 같기도 하다.― 그 두메산골 시골 학교에서 뭐가 그리 신나고 재미있는 게 많은지, 아저씨, 있잖아요, 아저씨, 있잖아요, 하며 웃음 섞인 수가다 끊이지 않는다.

    신기한 일이다. 그렇게 눈치를 보고 눈물 바람을 하던 아이가 몇 달 만에 저렇게 바뀌다니. 물론 밝아지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건 알겠지만, 사람의 성격은 단시간에 쉽게 바뀌는 게 아니다. 만약 본래 성격이 저랬는데 부모에게 짓눌려서 성격이 변했던 거라면 진심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토요일에 신촌은 왜? 아하, 주말 알바 면접? 흠. 이번 토요일에 손 원장님하고 상담 치료 있지 않아? 아, 올라오는 길에. 돌아다니기 바쁘겠구나. 그럼 내가 차 보내 줄까? 토요일에는 셔틀버스도 운행 안 하잖니. 그래, 면접 끝나면 전화하고. 같이 저녁이나 먹자.”

    저녁이요? 우와아아! 정말이죠! 정말이죠! 꺄아아! 아저씨 멋져요! 환호성에 삑삑빽빽. 아주 아이돌 팬클럽 나셨다.

    옆에 앉아 있던 홍연은 속으로 비죽비죽 웃으며 상사를 흘낏 곁눈질했다. 후견인도 참 극한 직업이다, 극한 직업. 신기한 것은, 시간 낭비와 시끄러운 것을 그렇게나 싫어하는 상사께서 저 시시하고 영양가 없는 통화 시간을 진심으로 즐기고 있다는 점이었다. 우연에게 전화가 오면 무겁고 장중한 사무실에 엉뚱하고 발랄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다른 사람과 통화할 때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약혼녀나 가까운 친척, VIP 바이어들과 통화를 할 때 이원의 표정은 부드럽고 말투는 나긋나긋 매끄러웠다. 그는 웃음이든 말투든 늘 적절한 선을 유지했다. 하지만 통화는 5분을 넘기는 적이 없었고, 전화를 끊으면 입가에 머무르는 웃음도 바로 사라졌다.

    반면, 우연과의 통화에서 들리는 이원의 웃음소리는 특이했다. 일단 매끈하지 않았다. 그답지 않게 눌린 듯, 숨죽인 듯 키득대는 소리를 내기도 했고, 와하하하 홍소가 터지기도 했다. 통화는 일이 분 만에 끊어지기도 했지만 10분 이상 이어질 때도 많았다. 그리고 전화를 끊은 후에도 오랫동안 미소를 머금고 있거나,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도 문득 생각난 듯 피시시 웃음을 흘리곤 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행동하는 것을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물론, 이원이 우연의 재능을 단번에 알아보았고 그녀를 제대로 후원해 대형 화가로 키우려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럴 때 보면 후원자라기보다 친동생처럼 아껴 주는 느낌이 더 강했다. 실제로 저 사람 성격에, 어린 동생이 있었으면 저렇게 살뜰하게 챙겨 주었을 것 같기도 했다.

    그것 말고도 두 사람 사이에 남들이 알 수 없는 일종의 공감대가 놓여 있다는 생각도 든다. 일단, 이원이 저 아이와의 만남을 계기로 사제의 길을 포기하고 미현과 결혼을 결정한 건 확실했다. 하지만 자세한 내용까지는 알 수 없었다. 감히 물어볼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그저 짐작만 할 뿐이었다.

    전화를 끊은 이원이 홍연에게 고개를 돌린다.

    “이번 토요일 근무가 최 실장인가요? 아, 황창희 대리던가요. 토요일에 서초동 대신 안성으로 가서, 우연이 픽업해서 손 원장님 병원에 내려 주라고 전해 주세요. 상담 끝나면 신촌 쪽 화실에 내려 주시고요. 그 애가 스케줄이 많네요.”

    어이구 불쌍한 황 대리, 주말에 장거리 뛰게 생겼네. 이원 역시 뭔가 마뜩잖은지 팔짱을 끼고 심각하게 묻는다.

    “그런데 최 실장, 그 애가 왜 굳이 아르바이트를 하겠다는 걸까요. 아무리 주말이라도 안성에서 신촌이면 드나들기도 힘들고, 일단 학교 간판이 안 받쳐 주면 아무리 그림 잘 그려도 안 뽑아 줄 텐데. ……혹시 재단에서 지원하는 생활비가 부족한 걸까요?”

    “아껴 쓰면 부족하진 않을 겁니다. 사회생활도 할 겸 혼자 힘으로 얼마라도 벌어서 보태려고 하는 거겠죠.”

    “그런 거라면…… 정말 기특하네요. 사람들 속에서 부대끼는 거 아직 힘들 텐데.”

    홍연은 슬며시 부아가 났다. 말끝마다 뭐가 그렇게 기특하고 장한지. 대학생이면 개나 소나 하는 알바를 가지고 아주 착즙을 하십쇼. 나만 해도 고등학교 때부터 취업 직전까지 15년을 알바 인생으로 살았는데, 그런 저는 기특하지 않으십니까? 예? 이런 기특한 부하 직원에게 연봉을 한 2천만 원쯤 팍팍 올려 주고 싶지 않으십니까, 예?

    “차라리 교내 근로가 낫지 않을까 싶은데. 학교 안에서만 하면 되니까요. 혹시 최 실장 교내 근로 해 보셨습니까?”

    “저야, 나이트 삐끼하고 새우잡이 배 말고는 안 해 본 알바가 없는걸요. 교내 근로가 알바의 꽃이자 꿀 중의 꿀인 건 확실합니다.”

    “역시 그렇죠?”

    “그런데 전무님. 그거 국장 제약 있는 학교는 안 될 수도 있고, 된다고 해도 부모님 소득 분위 인증인지 뭔지 해 줘야 할 겁니다. 우연이는 그게 곤란하잖습니까? 아무래도 교내 근로는 어려울 것 같은데요.”

    “음. 그거, 부모 대신에 후견인이 인증하면 안 되는 걸까요? 후견인 기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지금이라도…….”

    이쯤 되면 도저히 좋은 말이 안 나간다. 홍연은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전무님은 전무님 소득 분위가 대체 몇 등급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아하…….”

    바보 도 트는 소리를 하며 그가 드디어 입을 다문다. 홍연은 저 똑똑한 상사께서 4차원 아가씨와 접선할 때마다 뇌세포가 푹푹 죽어 나가는 것 같아 심히 걱정스러웠다.

    [3] 덕질, 팬질, 사생질

    토요일, 토요일, 오늘은 토요일이다! 예아! 예아! 예아아아!

    우연은 이불을 덮은 채 발을 퍼덕거렸다. 오늘은 서울에 올라가는 날이다. 서울 올라가서 이원 아저씨를 만나는 날이다. 원래 목적은 상담 치료하고 검사를 하고 주말 알바 면접을 하는 거였는데, 어느새 여행의 목적이 아저씨 만나는 것으로 바뀌었다.

    아, 좋아. 정말 좋아!

    아침부터 가슴이 우당탕쿠당탕 말 달리듯 뛰어 대고, 펄럭대는 이불에서 튀어나온 먼지들은 아침 햇살 속에서 늴리리 늴리리 춤을 추었다. “야 진우연! 먼지 나!” 아래층 침대에서 혜진이가 투덜대는데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예전에 집에 있을 때는 토요일만 되면 이 긴 주말을 어떻게 보내나 숨이 막혀 미칠 것 같았는데 이젠 숨이 너무 뿜뿜거려 미치겠다. 이러니까 사람들이 주말을 사랑하는 거구나. 얄리얄리 얄라셩 뿜빠라뿜빠. 20년 만에 처음으로 깨달은 인생의 진리였다.

    우연은 자신이 이렇게 변해 가는 것이 신기했다. 집에 있을 때는 자신이 늘 소금물에 절은 배추처럼 느껴졌다. 나쁜 생각은 며칠에 한 번씩 해일처럼 머릿속을 휩쓸었고 불안감, 절망감, 무기력감에 푹 절면 몸까지 바닥에 축 들러붙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 증세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지금은 뭘 해도 잘 될 것만 같고, 실제로 잘해 나가고 있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에너지가 넘쳤다.

    친구들은 학교를 깡촌이니, 유배지니, 심심해 죽겠다고 욕을 해 대지만, 우연에겐 재미있는 일들이 너무너무 많았다. 잠 잘 시간도 아까울 정도였다.

    그녀는 수업 시간 10분 전부터 강의실 앞자리에 앉아 발을 동당대며 수업을 기다렸고, 남들이 허섭하다 욕하는 도서관을 들랑대며 자료 서적을 잔뜩 빌려 신나게 들이팠다. 밤이건 낮이건 미친 듯이 그림을 그려도 이제 아무도 욕을 하지 않았다.

    대인 관계에서도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일단 룸메이트인 혜진이 붙임성이 좋고 너그러워, 대인 관계에 서투른 우연에게 큰 도움이 되어 주었다. 밤에 기숙사에서 몰래 받아먹는 치맥의 맛은 천지개벽 신세계였으며, 옆방 친구들과 같이 햄버거와 컵라면을 먹으며 수다를 떠는 야참 타임은 초중고 12년간 학교에서 겉돌았던 우연마저 모든 사람과 친해지게 만드는 ‘마법의 시간’이었다. 학과 개강 파티에서 생전 처음 먹어 본 3대 7 황금 비율의 소맥은 음치, 박치인 우연이 친구들과 길바닥에서 떼창, 떼춤에 참여하게 하는 만용을 불러일으켰다.

    조원들과 함께하는 밤샘 공동 과제도 그렇게 재미나고 좋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무시무시한 작업 속도와 높은 퀄리티를 보여 주었고, 새롭고 기발한 4차원적 발상을 화산처럼 쏟아 내는 아이디어 뱅크이기도 했다. 혜진의 부탁으로 무대 배경에 쓰일 그림을 하룻밤 만에 뚝딱 그려 주면서 ‘참 쉽죠?’라는 별명이 붙은 이후, 그녀는 동기들에게 섭외 1순위 황금손으로 떠올랐다. 반(反)호구 정책을 표방하는 우연은 먹을 것을 꼬박꼬박 조공 받는 것으로 나름 대가를 챙겼다. 현재 우연은 커피나 밥을 제 돈 내고 사 먹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인기를 구가하는 중이었다.

    고등학생 때와는 너무 달라진 분위기에 우연은 어리둥절했다. 내가 뭔가 많이 달라진 걸까? 아니면 주변 사람들이 달라진 걸까? 재능 있는 사람을 은근 떠받드는 예대의 특성인가? 우연은 이렇게 우호적인 분위기가 어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온 자신이 몹시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나한테 정말 이런 날이 오다니.

    이 모든 것이 우연에게는 기적이었다. 소금물에 푹 절어 있던 진우연은 죽어 버리고, 조그만 일에도 발이 붕붕 떠서 하늘을 나는 에너자이저 진우연이 새로 태어난 것이다. 이런 게 바로 행복이구나 싶었다.

    다른 아이들은 평소에도 이렇게 기분 좋고 들뜬 상태로 살고 있었던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 지난 19년을 소금에 전 배추로 보낸 것이 억울하고 분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지금 찾아온 행복이 너무 고맙고 좋아서 분한 마음을 얼른 지워 버리곤 했다.

    그리고 이 행복의 시작에는 이원 아저씨가 있었다.

    그는 우연이 누리고 있는 행복의 시작이자 토대이자 전부였다. 그래서 우연은 자신이 이렇게 열심히,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과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마음이 그에게 잘 전해지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가 조금이라도 기뻐하고 뿌듯해하기를 바랐다.

    ……그녀가 아저씨를 생각할 때마다 이렇게 벅차고 눈물 나게 행복하듯이.

    “……오늘은 또 어떤 기사가 떴을까?”

    우연은 침대에 엎드린 채 스마트폰에 검색어를 입력했다.

    한이원, 세경건설, 세경홀딩스, 한이원 대표이사, 한이원 전무, 이원메세나재단…….

    우연은 아침마다 아저씨에 대한 새로운 기사가 있는지 검색했다. 물론 아저씨는 연예인이 아니기 때문에 기사가 자주 뜨지 않았다. 특이한 건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사진이 단 한 장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인터넷에 떴다 하면 바로 실검에 뜰 정도로 멋진 얼굴인데, 진심으로 아까운 일이었다.

    새 기사가 없으면 세경홀딩스나 세경건설, 이원메세나재단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새 소식이 있는지 매의 눈으로 살펴본다. 홈페이지에서는 대표이사 동정이 가끔 올라오는 편이었고, 우연은 그 재미없는 내용을 토씨 하나, 점 하나 빼놓지 않고 샅샅이 읽었다.

    한번 꽂힌 건 끝장을 보는 성격이었다. 그림을 그릴 때도 그랬다. 이제는 아저씨에게도 꽂힌 것 같다. 아저씨에 대해서라면 모든 것이 궁금했고, 아저씨의 생각도 모조리 알고 싶어 애가 달았다. 그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면 영혼도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아저씨의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정보 수집은 당연하게도 난관에 부딪혔다.

    “……아, 씨. 이거 한국말 맞아? 분명 한글인데 왜 움파룸파어 같지?”

    기사 한 줄을 읽는데 모르는 낱말이 열 개가 넘게 나온다. 한두 번이 아니고 매 문장이 그 지경이었다. 기분이 더러웠다. 10미터 걸어가면서 열 번쯤 돌에 걸려 엎어지는 것 같았다.

    아저씨는 우연과 완전히 다른 우주에 살고 있었다. 주식회사와 그냥 회사는 차이가 뭐고, 상장사와 비상장사는 또 뭐고, 계열사, 자회사, 지주사 이딴 건 또 뭐냐. 사장, 회장이 제일 높은 건 알겠는데 과장이 높은지 부장이 높은지 전무가 높은지는 계속 헷갈리고, 대표이사와 이사장과 사장님과 회장님의 차이는 죽어도 모르겠다.

    그것뿐이면 말을 안 한다. 재단이니 법인이니 하는 것도 골치 아픈데, 이 빌어먹을 낱말들이 재단법인, 사단법인, 영리법인, 비영리법인, 비영리공익법인, 이런 식으로 새끼까지 친다. 하지만 우연은 굴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다. 원래 팬질에는 많은 장애가 있는 법이고, 팬심은 이런 장애와 고난을 극복하며 더욱 굳건해지는 법이다. 다음 학기에는 경제 경영 관련 과목을 모조리 들어야겠어, 우연은 주먹을 꼭 쥐고 결심했다.

    “야, 너 또 발동 걸렸냐? 아주 발작을 해라! 아 먼지 좀 진짜! 야!”

    2층 침대에서 몸을 꼬며 캑캑대는 우연을 보고 결국 혜진이 고함을 빽 지른다.

    혜진은 룸메이트가 된 그림쟁이 친구가 처음엔 맹렬한 열공 족속인 줄 착각했다. 특히 경제, 경영이나 사회 복지 사업에 관심이 많은가 보다 했다. 하지만 두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깨닫고야 말았다. 경제 경영 복지는 개뿔, 저 조그만 그림쟁이 친구는 ‘1:7, 5:8 황금비를 자랑하는 모 재단 이사장님’ 덕질에 빠진 것뿐이었다.

    혜진은 그 오묘한 취향을 이상하다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덕질의 세계가 워낙 드넓고 취향 존중의 세계인 데다, 우연이라는 친구 자체도 워낙 특이했기 때문이었다.

    친구는 성격이 극과 극을 오갔다. 어떤 때 보면 되게 겁이 많고 눈치를 보는 것 같으면서도, 어떤 때는 팩트 폭격과 돌직구를 거침없이 던지기도 했다. 국영수 8등급에 실기 100% 특별 전형으로 들어왔다는 게 뭐 그렇게 자랑스러운 내용은 아닌데, 우연은 그런 사실을 까발리는 데에도 거침이 없었다.

    물론 그런 흑역사를 까발려도 상관없을 만큼, 친구는 그림 하나는 잘 그렸다. 엄청나게 잘 그렸다. 하지만 교양이나 상식은 또 바닥이었다. 장면 기억력은 좋은데 텍스트 기억력은 형편없었고, 숫자 계산은 그야말로 쥐약이었다. 관심이 있으면 책 한 권을 통째로 외울 지경으로 들이팠고, 관심이 없으면 때려죽여도 낱말 하나를 외우지 못했다. 몸의 움직임은 고양이처럼 유연하고 아름다웠지만 타고난 몸치에 저질 체력이었다. 모든 것이 극단으로 치우쳐 있고, 균형과 조화 따위는 1그램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니 ‘잘생긴 이사장님 덕질’ 따위는 이 친구 기준에선 특이한 축에도 끼지 못하는 일이었다.

    다행히 우연은 민폐를 끼치거나 친구들이 싫어하는 것을 알면 바로 사과하고 고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게 느껴져서 호감이 갔다. 지금도 먼지 난다고 짜증을 내니까 퍼덕퍼덕하던 격한 몸부림이 바로 멈춘다.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얼굴이 이불 사이에서 쏙 튀어나오며 멋쩍게 웃는다.

    “쏘리 쏘리. 기지개 좀 켰어, 기지개!”

    우연은 자신의 덕질이 적들에게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대놓고 하는 덕질이 비밀에 부쳐질 리가 없었다. 세경그룹과 한이원 대표이사에 대해 수험생처럼 열심히 공부한 우연은 세경그룹의 기본 정보와 역사, 대표이사의 신상에 대해 눈을 감고도 줄줄 외울 수 있을 경지에 도달했다.

    세경그룹 소속사는 총 12개로, 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지주사(持株社) 세경홀딩스 밑으로 세경건설, 중기, 키친, 퍼니처, 창호, 홈시스, 조명 등의 건축 관련 계열사들과 공동 창업주 우영석 회장의 성일호텔, SI여행사, 성일용역 등이 있다. 여기에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이원메세나재단이 추가된다. 이 재단은 아저씨가 대학생 때부터 실무에 직접 참여하며 경영 감각을 익힌 곳이라고 했다.

    아저씨의 호칭은 아무리 봐도 헷갈렸다. 홀딩스나 건설에서는 아저씨를 대표이사 혹은 전무라 했고, 이원메세나재단에서는 이사장님이라 불렸다. 그 차이점을 끝내 이해할 수 없었던 우연은 할 수 없이 그냥 외웠다.

    서른두 살이나 먹고도 자신이 중년인 걸 몰랐던 저 아저씨는, 당연히, 멋지게도 군대에 다녀왔으며, 한때 신부님이 되려고 했으며―이 아저씨가 미쳤나! 외모, 아니, 재능 낭비도 유분수지!― 놀랍게도 아직 결혼을 안 했다고 한다.

    아니 왜? 아저씨가 대체 뭐가 모자라서! 잠시 생각하던 우연은 맹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결론은 하나다. 아저씨는 눈이 높은 것이다. 어어엄청스레 높은 것이다.

    아무렴, 당연히 그래야지. 아저씨 정도 되는 사람은 아무하고나 함부로 사귀면 안 된다. 신체 강건하고, 애국심도 충만하며, 성격 착하고, 돈도 많고, 능력 쩔고, 비주얼까지 울트라 갑질을 하는 사나이라면 대한민국 최고의 여자와 사귀어야 한다. 적어도 여왕처럼 기품 있고, 배우처럼 아름다우며, 똑똑하고 능력 있고, 여튼 조따 멋진 여자여야 하는 것이다.

    어디 이상한 여자만 붙어 봐라. 가만 안 둔다 진짜.

    며칠 전 인터넷에서는 아저씨와 유미현이라는 뮤지컬 배우 사이에 ‘뭔가 있다―카더라―아님 말고’ 통신이 유령처럼 떠돌았다. 속에서 부글부글 화가 치밀었다. 이 쓰레기 같은 기사는 뭐야! 왜 아무 상관도 없는 아저씨를 엮어! 기자가 저 배우한테 돈이라도 받았나? 나라에서 뭔가 숨길 일이 있나? 그런 일이 있으면 아이돌 스캔들을 터뜨린다는데?

    원래 아이돌이란 조금이라도 유명해지는 순간부터 온갖 종류의 ‘카더라―아님 말고’ 통신들에 휩쓸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아저씨는 아이돌이 아니고 사업가 아니냐고. 물론 아이돌만큼이나 잘생기긴 했지만 사업가란 말이야, 사업가! 이런 엉터리 기사를 쓴 기자들은 월급이 아니라 벌금을 받아야 한다고! 어디 개구리 두꺼비 같은 것들이 달라붙어서 껄떡껄떡 꽥꽥 울고 있냐고! 감히!

    댓글로 폭탄 테러를 하고 싶어 손이 드릉드릉한다. 아무리 단전 호흡을 하며 심신을 다스려도 전사의 본능을 누르기는 쉽지 않았다. 아저씨에게 들킬 염려만 없었다면 기사마다 찾아다니며 진작 테러를 퍼부었을 것이다.

    그 외에도, 우연은 인터넷에서는 절대 말하지 않는 ‘중요 정보’도 많이 알고 있었다. 아저씨의 몸은 배꼽 선을 기준으로 5:8, 얼굴과 몸의 비율은 1:7 황금 비율이고, 눈동자는 멋진 세피아 컬러이며, 그 눈을 반쯤 사르르 감으면 엄마야, 그야말로 황홀경이고, 웃을 때면 입술 끝이 양쪽 위로 샥 말려들어 가면서 대박 섹시해지고, 키는 187센티, 몸무게는 옷 벗고 78킬로―이건 아저씨에게 세 번이나 물어봐서 알아낸 것으로, 특급 정보다.―, 뭔가 참을 때면 입을 쓰다듬거나 주먹을 지그시 쥐는데 그때마다 턱에 오돌토돌 귀여운 복숭아씨가 생겨난다.

    개그 감각은 심각하게 부족하지만 남의 개그에 많이 웃어 주는 것으로 벌충된다. 어차피 얼굴만 봐도 발쭉발쭉 웃음이 나니까 도긴개긴이다.

    하루 두 시간씩 운동을 하고, 담배는 피워 본 적이 없으며, 술은 와인만, 식사할 때 가끔씩, 그것도 두 잔 이내로만 마신다고 했다. 딱히 취미 생활이랄 건 없지만, 시간이 나면 책을 보고, 공연이나 전시를 관람하며, 일요일마다 꼬박꼬박 미사를 가고, 새벽 미사도 일주일에 세 번이나 간단다. 생각보다 굉장히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동물을 좋아하지만 아무것도 기르지 않고, 식물도 좋아하지만 마당 관리는 정원사가 한다고 했다.

    이렇게 써 놓고 보니 굉장히 재미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데, 당사자는 그 재미없고 심심한 일과를 행복한 삶이라 믿고 있었다. (누가 세뇌를 걸었는지 진심 능력자다.) 아니, 치맥과 소맥에 잠겨 길바닥에서 막춤 한 번 안 춰 본 사람과 어떻게 인생을 논할 수 있겠느냐고.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아저씨는 기겁하며 10분 동안 폭풍 잔소리를 해 댔다. 너 대체 언제 술 먹고 길바닥에서 막춤 췄어? 대체 어쩌자고!

    우연은 그런 중년다운 아재력이 아저씨의 유일한 단점이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것마저 멋지게 느껴진다. 아재력이 이원 아저씨에게 발현하면, 그게 고전이고 전통이며 클래식이고 앤티크가 되는 것이다.

    우연은 아저씨의 모든 것이 좋았다. 아저씨 앞에서는 많이 떠들고, 많이 울고, 많이 웃어도 창피하지 않았다. 아저씨 역시 우연의 말이라면 아무리 시시한 이야기라도 조금도 비웃지 않고 진중하고 따뜻하게 받아 주었다.

    아저씨와 마주 앉아 있을 때면, 심장에 있는 작은 난로에 따끈따끈하게 불이 지펴지는 것 같았다. 눈을 감고 아저씨를 생각하면, 그 열기가 혈관을 타고 짜르르르 달려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연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푸욱 한숨을 쉬었다.

    보고 싶다, 아저씨.

    * * *

    “우엉아! 엉느님, 지금 서울 가는 차 기다리는 거야?”

    주차장에서 위를 올려다보니 강당 창문턱에 혜진이가 매달려 빽빽대고 있다. 발레 공연 때문에 팀 연습이 있다더니 정말 똥 머리에 짧은 튀튀 차림이었다.

    “응, 조금 있으면 도착할 거야!”

    “우엉님! 엉느님! 잠깐만, 20분, 아니 15분만 기다려 주라! 가는 길에 나 좀 태우고 가다 서울에 가서 전철역에 흘려 주면 안 돼?”

    뭐래. 지금 서울에서 날 오매불망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데……는 아니고, 내가 오매불망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널 20분씩이나 기다려 주게 생겼냐.

    “안 돼! 기사 아저씨 바빠서 바로 가야 해.”

    단호하게 거절했다. 우연은 적당히 돌려 말하거나 간접적으로 곱게 거절하는 요령이 아직 부족했고, 혜진은 그런 우연을 4차원 단호박이라고 불렀다.

    “와, 단호박 점칠이 저거 존나 치사해! 그럼 10분! 번개처럼 갈아입고 내려갈게, 아 쫌!”

    “김혜진 너, 자꾸 점칠이라고 부르면 죽는다, 진짜!”

    “점칠이 무슨 뜻이니?”

    “으악, 으아악!”

    갑자기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우연은 물개처럼 비명을 질렀다. 끼아아아! 2층 창턱에 개구리처럼 붙어 있던 혜진도 사이렌 같은 비명을 뽑아냈다. 이원도 기겁하며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왜, 왜 이래, 우연아. 아저씨야. 왜들 이래!”

    “아, 아, 아저씨가 왜 여기 오셨어요! 노, 놀랐잖아요!”

    “왜, 내가 오면 안 되니?”

    “아, 아뇨! 절대 안 되지 않고요, 완전 괜찮고요, 전 홍연 아저씨 오실 줄 알고…….”

    아저씨는 입을 비죽거리며 웃었다.

    “기대를 깨서 미안하구나. 최 실장 오늘 쉬는 토요일이고, 나도 바람 좀 쐬고 싶어서 직접 내려온다 했지. 네가 보이기에 반가워서 얼른 나온 건데, 반가워하지 말 걸 그랬다.”

    “아니에요. 얼마든지 반가워하셔도 돼요. 이제 얼른 반가워하시란 말이에요! 아이, 씨!”

    우연은 얼굴을 구기며 울상을 했다. 아저씨보다 내가 더 반가웠다고요! 홍연 아저씨보다 백만 배는 더 반가웠는데 반가워할 기회를 놓친 것뿐이라고요. 아이, 아저씨는 왜 이렇게 사과를 함부로 하고 그러세요.

    “기사 아저씨, 안녕하세요? 저 우연이 친구 김혜진이라고 하는데요, 올라가시는 길에 이사장님 몰래 저 좀 태워 주시면 안 돼요? 아무 전철역에서나 내려 주시면 되는데.”

    아저씨가 운전기사인 줄 아는 친구가 겁도 없이 끼어들어 부탁을 한다. 아저씨는 자기가 그 이사장이라고 양심선언을 하는 대신 태연하게 딜을 걸었다.

    “점칠이 무슨 뜻인지 알려 주면, 한번 생각해 볼게요.”

    “혜진아! 너 말하지 마! 말하면 죽어! 죽어어!”

    우연이 숨넘어가는 소리로 언로를 틀어막자, 이번에는 옆의 창문에 붙어 있던 다른 똥 머리 튀튀들이 앞다투어 천기누설을 시작했다.

    “우엉이 키요! 4년째 149.7이래요!”

    “아니야! 아니거든? 150 됐거든?”

    “웃기시네. 너 키 잴 때 봤거든? 149.7 맞거든? 자꾸 우길래!”

    “야, 인생 20년쯤 살았으면 점칠을 운명으로 받아들일 때도 됐잖아! 운명에 함부로 맞서 싸우는 거 아니야!”

    여기저기서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터졌다. 아저씨는 대놓고 웃진 않았지만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손등으로 입을 막더니 어깨를 꿈틀거렸다. 그게 더 기분 나빴다. 우연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 고함을 질렀다.

    “야! 너희들 죽었어, 엉? 혜진이 너 안 태워 줘!”

    “우엉아! 나는 대답 안 했어! 어, 그냥 가? 정말 가? 엉느님, 야! 이 의리 없는 인간아!”

    “혜진 씨라고 했나요? 3분 기다릴게요! 오래 못 기다려요!”

    아저씨가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기다려, 기다, 우연아! 기사 아저씨이이! 쫌만요!”

    혜진이는 빳빳하게 위로 퍼진 치마 아래로 헐렁한 운동복 바지를 껴입고, 상의도 한쪽 팔만 끼운 채, 가방을 끌어안고 헐레벌떡 뛰어 내려왔다.

    저게 미쳤구나. 저 버스럭대는 치마를 벗으려면 옷의 구조상 웃통까지 한꺼번에 다 벗어야 하는데, 아저씨가 운전하는 차에서 어떻게 벗으려고?

    아저씨는 근엄하게 입을 다문 채, 운전대를 꽉 붙잡았다. 아니다, 입술 끝이 아주 조금 위로 꿈틀, 위로 말려 올라갔다.

    “김혜진 씨는 집이 어디예요?”

    “아, 저, 반포 쪽인데요.”

    “그럼 고속버스터미널역에서 내려 줄게요.”

    그것도 유동 인구 갑 오브 갑인 터미널역이란다. 오늘 인터넷에서 ‘고터역 추리닝 발레복’ 실검 뜨는 데 한 표. 우연은 아저씨가 자신의 작은 키를 놀린 친구에게 소심하게 복수를 해 주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침은 잘 먹었어? 출출하면 뭐 좀 먹을래? 간식 사 온 거 있다.”

    종이봉투 안에는 샌드위치와 동물 쿠키, 고래밥, 딸기우유, 바나나우유 같은 것들이 두서없이 들어 있었다. 우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동물 쿠키와 딸기우유를 들여다보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과자를 일일이 기억하고 골라서 사 오신 것이 너무 신기했다. 슈퍼에 들어가서 이것들을 주섬주섬 고르고 있었을 아저씨의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이 살랑살랑 간지러웠다. 우연이 감격에 겨워 동물 쿠키를 들고만 있자 혜진이 냉큼 과자 봉지를 빼앗더니 샌드위치를 대신 손에 쥐여 준다.

    “아침도 안 먹었는데 과자 부스러기나 주워 먹으면 나중에 당뇨 온대. 샌드위치랑 우유 먹어. 대신 과자는 이 언니가 먹어 주마.”

    혜진이 날도적놈같이 캭캭 웃는다. 야, 안 내놔? 야아! 우연은 과자를 탈환하기 위해 빳빳한 치맛자락 위로 몸을 날렸다. 차 뒷자리에서는 금세 난투극이 벌어졌다. 아저씨가 웃으며 어깨 너머로 묻는다.

    “우연이 너 아침 안 먹었어? 왜? 늦잠 잤니?”

    “날씬해 보이려고 그런대요. 사장님인지 이사장님인지 만날 거라면서요.”

    으악, 친구 입을 틀어막기도 전에 원자 폭탄이 터졌다. 아저씨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엄해졌다.

    “진우연, 왜 날씬해 보이려고 하는데? 지금도 심하게 말랐는데?”

    ……망했다.

    아저씨는―자기도 입이 짧은 주제에― 우연이 밥을 제대로 먹는지 굉장히 신경을 썼다. 통화할 때마다 기숙사 밥은 잘 나오는지, 얼마나 먹는지, 늦잠 잔다고 아침은 거르지 않는지 물었고, 같이 식사를 할 때가 있으면, 자기는 딱 정해진 양만 먹으면서 우연에게는 배불러 터질 때까지 뭔가를 시켜 주었다.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마귀할멈처럼 뒤룩뒤룩 살을 찌우는 게 지상 목표인 것 같았다.

    “아저씨, 그게 아니고요, 실은 배가 안 고파서 안 먹은 건데요. 아저씨 볼 생각만 하면 이상하게 배가 빵빵 불러서, 그래서.”

    ……라는 말을 혜진이 앞에서 할 순 없었다. 우연은 친구의 허벅지를 꼬집으며 ‘더 이상 말하면 죽어! 과자 빨리 안 내놔?’라는 텔레파시를 쏘아 보냈다. 하지만 혜진은 꼬집힌 복수를 알차게 해 댔다.

    “우엉이가 이사장님 덕질을 하거든요. 틈만 나면 검색을, 아야, 고만 좀 꼬집어! 어, 뭐라더라, 연예인처럼 조따 잘생기고 키도 크고 비율도…… 엄마야!”

    차가 휘청하면서 하마터면 논두렁에 처박힐 뻔했다. 우연은 차라리 논두렁에 빠져서 머드 몬스터 같은 것에게 확 잡아먹히고 싶었다. 앞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덕질? 그게 무슨 뜻이에요?”

    “열렬한 팬이 돼서 미친 듯이 파는 거죠. 나중에 팬클럽, 팬 카페 다 만들어서 회장도 하고 사생도 할 거래요!”

    운전석에서 길게 앓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사생은 또 뭐고?”

    “사생활까지 쫓아다니는 스토커요. 그런데 아저씨, 정말 그 이사장님이라는 분이 그렇게 잘생겼어요? 기사 아저씨도 대박 잘생기셨는데, 아저씨보다 이사장님이 더 잘생기셨어요?”

    잠시 후 앞에서 시큰둥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잘생기지 않았어요. 성격도 까칠하고 별로고. 팬클럽 같은 거 만들었다간 안티만 백만 대군 생길 거예요.”

    운전기사가 직속 상사를 대놓고 까네? 깜짝 놀란 혜진은, 드디어 입을 다무는 게 신상에 좋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물론 썰렁해진 분위기를 수습하기엔 이미 늦었다.

    고속터미널역에 도착하기까지 세 사람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차 안에선 발레복 버스럭대는 소리와 혜진이가 뽀삭뽀삭 동물 과자 씹는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더럽게 어색하고, 더럽게 뻘쭘하고, 더럽게 썰렁했다.

    * * *

    “진우연 너! 정말 내 팬 카페인지 팬클럽인지 만들 거야?”

    이원은 혜진이 내리자마자 바로 추궁에 들어갔다. 아주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우연이 자신을 깊이 신뢰하고 고마워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 관계를 만들기 위해 이원이 부단히 노력해 온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우연의 감정이나 행동은 확실히 과한 데가 있었다. 덕질은 뭐고 팬클럽은 뭐고 팬 카페는 뭐고 사생은 또 뭐냔 말이다. 차라리 다른 친구들처럼 평범하게 연예인을 좋아하면 안 되겠냐고.

    조금 눈치를 보나 싶던 우연은 금세 뻔뻔이 모드가 되어 당당하게 대답한다.

    “……네, 일자리 구하면 아저씨 팬 카페, 팬클럽 다 만들 거예요.”

    “허, 참. 왜? 만들려면 지금 안 만들고?”

    “돈을 좀 벌어야 하거든요. 팬질 덕질에는 원래 돈이 좀 들어요.”

    아하, 그래서 알바를 하시겠다 이건가? 아하, 아하아! 기특하다는 마음이 훨훨 날개 치며 날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팬클럽 만들면 뭐 하는 건데?”

    “플래카드 만들어서 아저씨 쫓아다니면서 돈 잘 버시라고 열심히 응원하고요, 제가 그동안 열심히 수집했던 고급 기업 정보도 막 풀어서 널리널리 전파할 거예요.”

    뭐? 기업 정보라는 말에 신경이 쫙 곤두선다.

    “고급 기업 정보라니, 어떤 거?”

    “그러니까 이원메세나재단 이사장님의 나이는 올해 서른둘이고, 혈액형은 A형이고, 제 생각에 트리플 따따블 A형! 별자리는 처녀자리고, 취미는 운동과 종교 활동이고, 저 미모를 가지고 신부님이 되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었고, 유기묘 동아리 집사모에서 목욕 봉사 미용 봉사를 하는데 고양이들한테 인기 최고였다는 전설이 있고……. 뭐 그런 거요.”

    맙소사. 갑자기 긴장이 탁 풀리면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런 건 대체 어떻게 알았어?”

    “홍빵맨 아저씨…… 아, 아니아니, 저기, 검색만 좀 열심히 하면 다 나와요.”

    설마 홍빵맨이 최홍연 실장은 아니겠지? 시말서, 아니, 경고, 아니아니, 감봉! 제기랄. 머릿속에서 빨간 경광등이 왱왱거린다.

    “진우연! 그건 내 사생활이잖아. 그런 건 대체 왜 퍼뜨리려는 건데?”

    “아이돌한테 사생활이 어디 있어요?”

    “내가 아이돌은 아니잖아.”

    “왜요? 인터넷에 기사 빵빵 뜨면 아이돌이지, 아이돌이 따로 있나요? 아저씨가 민간인이라는 편견은 버리세요. 좀.”

    “…….”

    “그런데 아저씨, 왜 인터넷엔 아저씨 사진이 없는 거예요? 사진만 제대로 돌면 바로 기획사 캐스팅 들어올 텐데? 세경그룹 홍보팀 직원들은 왜 대표이사님의 우월한 미모를 사용하지도 않고 낭비하고 있어요? 다 시말서예요, 시말서!”

    근본도 없는 기괴한 말투에 끙, 소리가 다시 터져 나갔다. 그래, 어디 한번 계속해 봐라.

    “그게 다가 아니에요. 생일, 세례일, 밸런타인데이, 블랙 데이, 빼빼로 데이, 크리스마스 퐈리, 송년 퐈리, 신년 퐈리, 설날, 추석, 석가탄신일, 그런 거 전부 준비해서 축하해 드리고요, 애인 생기면 모솔 탈출 축하 퍼레이드 해 드리고요, 결혼하시면 축가도 하고요, 필요하면 춤도 추고요, 행사 노가다에 보디가드 다 뛰고요. 부케, 부토니에, 자동차 꽃 장식 그런 것도 필요하면 다 해 드리고요, 결혼기념일에 꽃다발하고 케이크도 보내 드리고요, 초상화 기차게 뽑아서 팬아트로 조공하고요, 외부 활동 하실 일 있으면 적금 깨서 밥차 조공도 하고요, 베이킹 배워서 케이크, 쿠키, 초콜릿 3종 조공 바치고요, 인터넷에 안티 생기면 좌표 찍고 떼로 달려가서 다 밟아 버리고요, 여론전 필요하면 외국 아이피 백만 개 따서 화력 지원 해 드리고요, 골치 아프게 하는 사람 있으면 그 집 앞에 몰려가서 피켓 들고 시위하고 대문에 썩은 계란이랑 토마토랑 던지고요…….”

    “푸, 하, 와하하하하!”

    결국 이원은 신나게 웃음을 터뜨렸다. 듣다 보니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도 모르게 되었다.

    “대체 왜 그런 일을 하는데?”

    그는 간신히 웃음을 멈춘 후 백미러로 우연을 보며 물었다. 고양이처럼 동그란 눈이 맹랑하게 깜박깜박한다.

    “팬이라니까요? 당연히 아저씨를 좋아하니까 하는 거죠.”

    “……아, 그런 거니?”

    너무 당당하니 할 말이 없다. 더욱이 고백한 당사자는 어찌나 쿨하신지 아이돌의 반응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당연하죠. 덕질, 팬질, 사생질은 원래 좋아하니까 하는 거예요. 얼른 고마워하시라고요.”

    “아, 그래 엄청나게 고맙구나.”

    우연이 보조개가 쏙 패도록 쌔액 웃으며 조그마한 어깨를 으쓱, 한다. 아, 대체 저 아이를 어떡해야 할까. 미치겠다. 딸을 키우는 아빠들은 이럴 때 대체 어떤 마음일까?

    “그런데 좋아한다면서 결혼도 축하해 주고 그럴 거야?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여자랑 결혼하는 건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건담이나 트랜스포머 여성 팬들을 생각해 보세요. 그 언니들이 로봇이랑 결혼하고 싶어서 덕질하겠어요? 덕질, 팬질은 연애나 결혼보다 이상적이고 순수하고 무조건적이고 고차원적인 거예요.”

    “아하, 그렇구나.”

    단번에 설득당한 이원은 핸들을 잡은 채 크게 웃었다. 잠시 걱정했던 게 무색할 정도였다. 이러니까 4차원 단호박이라는 별명이 붙지, 아가씨야.

    “어쨌든 결혼을 열 번 하시든, 백 번 하시든 끝까지 의리 있게 축하해 드릴 테니 염려 마세요. 저는 비혼주의자라 아저씨가 결혼하신다고 안티 되고, 테러하고, 그런 유치한 짓 안 해요.”

    “비혼주의자……라.”

    “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절대 결혼 안 할 거거든요.”

    단호한 대답에 이원은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저 말이 나오는 이유를 알고 있으니 입맛이 썼다. 우연에게 가정이란 지옥과 다름없을 테니까.

    ……나중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마음이 바뀔 수도 있겠지.

    이원은 우연의 스물다섯 살, 서른 살, 혹은 지금 자신의 나이인 서른두 살을 상상했다.

    사랑스러우리라. 놀라우리라. ……그리고 나보다 훨씬 눈부시리라.

    이원은 뒤에서 재잘재잘하는 아이가 일찍부터 재능을 꽃피우고, 따뜻하고 좋은 사람을 만나 흠뻑 사랑받고 상처를 치유하기를 바랐다. 안온한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라면 이 아이는 안정을 얻고 더욱 높이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지금은 그런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았다. 굳이 반박해야 싸움밖에 되지 않을 듯했다. 이원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을 돌리며 투덜거렸다.

    “그런데 우연이 너 좀 너무한 거 아냐? 내가 결혼을 열 번, 백 번씩 해서야 쓰겠어?”

    “아, 하긴 그렇네요. 지옥행 열차를 백 번이라니 말도 안……, 으악, 아, 아니아니, 그게 아니고요, 죄송해요. 취소. 꼭 타고 싶으면 딱 한 번만 타시는 거로.”

    허둥지둥 사과를 받아도 어째 기분이 요상했다. 우연은 눈치를 살그머니 보며 조심스러운 말투로 덧붙였다.

    “그래도 아저씨 나이가 나이니까, 얼른 솔로 탈출은 하셔야죠. 조금만 지나면 똥값 되시는 건 순식간이니…….”

    “똥값 되시는 건 또 뭐야. 진우연!”

    서른둘이면 나이 많은 것도 아니라니까! 그리고 약혼녀 있으니까 내 걱정은 안 해 줘도 돼! 펑, 터뜨리기도 전에 우연이 헤실헤실 웃으며 종알거린다.

    “아, 이건 엄마가 맨날 하던 말이구나. ……어쨌든 좋아하는 분 생기면 얼른 꽉 잡아서 솔탈 하세요. 이상한 루머에 자꾸 휩쓸리지 마시고요.”

    이상한 루머? 고개를 갸웃하던 이원은 이내 속으로 혀를 찼다.

    ……일전에 인터넷에 올라온 기사를 봤구나.

    이원은 자신의 사생활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에 몹시 예민해서, 세경의 홍보팀에선 보도 자료 내용이나 언론에 대한 단속이 삼엄했다. 이번 기사도 미현의 소속사와 포털에 압력을 넣어 바로 내리긴 했지만, 그 짧은 사이에 이 아이가 보았던 모양이다.

    애써 덮어 두었던 일이 떠오르니 다시 머리가 무거워졌다.

    현재 미현과는 며칠에 한 번씩 안부 전화를 하고, 서울에서 공연이 있으면 꽃다발을 들고 참석하는 정도로 관계를 이어 가고 있었다. 이원은 미현에게 깍듯하게 예의를 지켰으며 미현도 이원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도록 최대한 신경을 썼다.

    그리고 미현이 약속한 대로, 우 상무 쪽에서는 더 이상 시끄러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모리스 첸과의 소문도 최근엔 신기할 정도로 조용하다. 헤어진 것은 아니지만, 모리스가 그녀의 아파트 바로 옆에 작은 스튜디오를 구해 나간 건 확실한 듯했다. 미현은 이원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모든 조건은 자로 잰 듯 맞춤했고, 모든 상황은 잘 짜인 판처럼 질서정연하게 흘러갔다. 미현이 한국에 들어오면 조용히 약혼식을 하고, 산타바바라 극장과의 계약이 끝나는 내후년에 결혼식을 올리면 될 것이다.

    결혼하면 뭔가 특별한 감정이 생길까. 아기가 생기면 특별한 유대감이 생길 수도 있겠지. 그럼 미현도 애인을 정리하고 나에게 안착할 수도 있다. 그러다 보면 미현과 나 사이에도 사랑이 생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체한 것처럼 명치가 짓눌렸다. 후우. 이원은 한숨을 삼키며 말을 돌렸다.

    “요새 갑자기 더워졌는데 괜찮아? 아직 강의실에 에어컨 안 틀어 주지?”

    “28도 넘어야 틀어 준대요. 혜진이랑 만 원짜리 미니 선풍기 일찌감치 공구했어요. 요새 대륙발 물건들 대박 좋아요. 얼굴 앞에 틀면 에어컨 없어도 개시원해요.”

    “하하하, 나름 적응 잘 하네. 기숙사에서 지내는 건 어떻고?”

    “아주 좋지요. 밤마다 옆방 친구들이랑 치맥과 컵라면과 함께하는 마법의 시간이 열리거든요. 에헤헤. 호그와트 기숙사에서 지내는 기분이에요. 퀴디치 수업만 있으면 완벽하죠.”

    “왜. 혜진이하고 작당해서 볼드모트하고 싸우기도 해야지.”

    “에이, 아저씨가 대한민국 미대생의 라이프를 잘 모르시네. 볼드모트보다 더 무서운 악당이 쳐들어온다고요. 그, 중간고사라고, 과제하고 시험이 와라라라…….”

    주 4일 수업에 모조리 실기 과목으로 깔아 버린 주제에 그래도 학점이 무섭기는 한가 보다. 이원은 꾸역꾸역 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너 그런데 아침 안 먹은 거 정말 나 때문에 그런 거니? 다이어트 하려고? 그런 짓 안 해도 충분히 예뻐!”

    “에이, 아저씨 맨날 고짓말. 제가 예쁘긴 뭐가 예뻐요.”

    우연은 배슬배슬 웃더니 드디어 진실을 실토했다.

    “아저씨를 생각만 해도 배가 부른데, 이렇게 보고 있는데 배가 고플 리가 있어요? 보세요, 배 나온 거! 완전 임신 8개월 차! 빠바방!”

    백미러로 뒤를 흘낏 본 이원은 기가 막혀서 웃음을 터뜨렸다. 쥐어 봤자 한 줌도 되지 않을 배를 힘껏 부풀려 팡팡 쳐 대는 게 어찌나 같잖은지 모르겠다.

    “아이 아저씨, 왜 콧방귀를 뀌고 그러세요. 정말 아저씨를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니까요? 맹세코 진짜로! 저는 아기를 키울 생각은 없지만요, 아저씨처럼 예쁜 아기라면 진지하게 한 번쯤은 고민해 볼지도 몰라요.”

    “그게 무슨 소리야. 결혼 안 한다며!”

    “촌스럽게 왜 그러세요. 결혼 안 해도 정자은행 같은 데서 냉동 정자를 받아서 아기만 낳는 방법도……. 아이, 아, 아저, 아저씨, 왜 화를 내고 그러세요. 누가 정말 낳는대요? 그, 그냥 그런 방법도 있다는 거죠! 아 정말 안 키워요! 그냥 고민만 한 번 해 본다고요, 고민만! 한 번만! 아이참, 그냥 말해 본 거 갖고 왜 자꾸 화를 내세요.”

    후우우.

    이원은 그쯤 해서 멈춰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더 캐고 들었다가는 저 입에서 어떤 무시무시한 말이 쏟아져 나올지 몰랐다.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 열을 내는 자신이 바보 같았지만, 왜 이렇게 번번이 휘말리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우연이 밝게 변해 가는 모습은 좋았다. 작은 일에도 겁에 질리거나 습관적으로 눈치를 보고 어깨를 움츠리던 모습도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짓눌렸던 생각을 밖으로 거침없이 쏟아 내기 시작하면서, 걱정스러운 점도 점점 또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연은 일상적 관습을 쉽게 무시하고, 상식을 훌쩍 뛰어넘어 사고(思考)하며, 그것을 직선적으로, 적나라하게 표현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림으로든, 말로든, 하다못해 표정으로든. 아마 아이의 그런 점을, 권위적이고 과민하며 폭력적인 부모는 견디지 못했던 것 같다.

    버릇없다, 안 된다, 위험하다, 일일이 나무라면서 고쳐 주어야 할까?

    ……글쎄. 이미 저 아이의 아버지가 그런 식으로 충분히 짓눌러 왔을 텐데?

    그래도 명색 후견인이니, 고치도록 말은 해 봐야 하지 않을까?

    아니, 어지간한 부모라면 저 정도 유쾌한 수다는 귀엽게 넘겨 주지 않을까?

    특히 신경 쓰이는 것은, 뒤통수를 후려갈기듯 도발적이고 거침없던 우연의 그림들이 저런 사고방식과 말투를 많이 닮았다는 점이다.

    자유로운 영혼, 거침없는 말, 자기 검열 없는 상상력, 창조적 영감.

    그 모든 것은, 아마 하나로 연결돼 있는 거겠지.

    ……그렇다면 함부로 손대면 안 되는 것 아닐까?

    하지만 저 말버릇이 단순히 ‘예의 바르게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해서’ 그런 거라면? 상식을 의도적으로 깨뜨리는 게 아니라 상식 자체가 없는 거라면?

    어느새 목적지가 가까워진다. 차들이 복작복작 밀리는 도로의 오른쪽으로, ‘손연정 정신건강의학&상담센터’의 푸른 간판이 보인다.

    얘기를 하려면 아직 후견이라는 관계로 묶여 있을 때 해야 할 텐데. 며칠 남지도 않은 어쭙잖은 이 관계. 어떻게 하는 게 옳을까. 상식의 틀과 제약 없는 상상력, 방치와 책임감, 너그러움과 단호함 사이의 올바른 경계는 어디일까. 망설이던 이원은, 우연이 중얼거리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아저씨, 저는요, 예뻐진 게 아니고요, 행복해진 거예요. ……아저씨 덕분에.”

    이원은 우연의 말버릇을 영원히 나무라지 못할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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