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논 템타비스(Non Temptabis, 시험하지 마라)
기가 막혀서.
이원은 창밖을 내다보며 혀끝에서 맴도는 말을 집어삼켰다. 우연의 맹랑한 대답은 회사에 돌아와서도 머릿속에서 맹렬하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누드모델…… 한…… 번만 해 주세요, 아저씨.’
……살다 살다 정말 별소리를 다.
앞에서 서류철을 내려놓고 있는 최 실장도 평소와 달리 조용하기 짝이 없다. ‘알바 경력 15년에 성인군자 싸패 진상 삼천 세계 인간 군상 종류별로 다 겪었다.’ 하는 자칭 만렙 수행 비서도 그 제안에는 꽤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이원이 만년필만 빙빙 돌리는 것을 보고, 최 실장이 슬쩍 묻는다.
“아까 쉼터에서 들으셨던 말이 신경 쓰이십니까?”
“아뇨. 괜찮습니다.”
그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최 실장이 어깨를 으쓱하며 싱긋 웃는다. 이원의 ‘괜찮다’는 말은 최 실장에게 부도 수표와 다름없었다.
“그래도…… 기분은 좋으시겠습니다. 그렇죠?”
이런. 최 실장은 충격을 받은 게 아니었나? 나만 충격이었나?
이원은 실소하며 가장 위에 얹힌 결재 서류를 끌어당겼다. 하지만 아무리 들여다봐도 내용은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원은 애꿎은 만년필만 집적거리다가 결국 서류철을 덮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뭔가 한바탕 휘둘린 것 같은데, 아주 불쾌했던 것만은 아닌, 좀 종잡을 수 없는 기분이었다.
“실장님, 우연이가 그린 연습장 좀 가져와 보세요.”
* * *
“누드모델……? 글쎄. 그건 좀 어렵겠는데.”
이원이 그 순간 태연하게 대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감정 표현을 절제해 온 습관 덕이었다. 우연이 자신에게만 말문을 열고 있다는 점과 의외로 당당한 태도도 그에 한몫했다. 뒤에서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홍연도 이원만큼 놀라기는 한 모양이다.
새까만 눈이 소르르 아래로 내려간다. 해 주실 수 있는 건 다 해 주신다면서. 실망에 잠긴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아무리 선물이라도 주는 사람이 내키지 않으면 못 주는 거지. 너도 누가 그런 부탁 하면 선뜻 들어준다고는 못 할 거 아니니.”
“네. 그건 맞아요……. 혹시 아저씨도 몸에 흉터나 멍이 많아요? 그래서?”
우연이 풀 죽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이원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사고 흐름은 독특한 것을 넘어 따라잡기가 좀 버겁다.
“다른 사람한테 맨몸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 그래. 난 집에서도 민소매 옷이나 짧은 바지도 안 입는걸.”
“꼭꼭 숨겨 두고 아저씨만 보시면 되잖아요. 어차피 다른 사람에겐 절대 안 보여 주고 바로 아저씨 드릴 건데.”
우연은 자신 역시 ‘다른 사람’에 포함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미련이 남은 목소리로 조그맣게 묻는다.
“그런데 아저씨, 아저씨는 집에서도 나시나 러닝셔츠나 반바지 안 입어요?”
“왜 그게 궁금……. 안 입어.”
이원은 집에서도 늘 제대로 옷을 갖춰 입고 지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어려운 손님이 워낙 많은 집이었고, 가정 교육도 몹시 엄한 편이었지만 제 성격대로 스스로 가하는 통제가 가장 심했다. 아무리 집이라도 덥다고 웃통을 벗는다든가 속옷만 입고 거실을 활개 치고 돌아다니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여름에 안 더워요?”
“냉방기 잘 돌아가서 괜찮아.”
“수영 같은 것도 안 하세요?”
“전신 수영복을 입지.”
대답을 하나씩 할 때마다 바보가 되어 가는 기분이었다. 우연의 시선도 점점 이상해진다. 뭐지 이 또라이 아저씨는? 속으로 중얼거리는 말이 들리는 것 같다.
“아저씨, 연애 같은 건 대체 어떻게 하셨어요?”
이쯤 되면 뭐라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나마 ‘섹스는 대체 어떻게 하세요?’ 하고 까발려 묻지 않은 게 다행이라 해야 할 지경이었다.
이원은 도를 넘어간 질문이라고 언짢은 내색을 할까 하다가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적어도 지금은 저 아이의 속에 맺힌 것을 최대한 끌어내는 게 우선이지, 말버릇과 예의를 따지며 훈계를 할 때는 아니었다. 행동 교정보다는 치료가 절대적인 우선순위임을 이원은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우연에게 화를 낼 자신이 없었다. 그러면 저 겁 많은 아이가 바로 눈물을 쏟을 텐데, 이원은 우연의 우는 모습을 보는 것이 유달리 힘들었다.
“그 이야기는 이쯤 하자. 대체 멋진 모델이나 배우들 사진 놔두고 왜 나 같은 사람 누드를 그리겠다는 건지 이유를 모르겠구나.”
“네? 이유를 모르신다고요? 그 당연한 걸 정말 모르시는 거예요?”
‘그 이야기는 이쯤 하자.’라는 부탁은 어디로 날려 먹었는지, 우연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깜박거린다. 이원이야말로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내가 누드모델이 되는 게 왜 당연한 거지?
“아저씨, 저…… 샤워하고 거울 안 보세요?”
이제 대화는 완전히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보는데.”
“좀 잘빠지고 훤칠하고 멋지다…… 하는 생각 안 드세요?”
“안 드는데……?”
조금 전까지 눈물로 와이셔츠를 적셔 놓던 아이가 이제 도발적으로 눈꼬리를 발끈 치켜세운다. 이원은 저도 모르게 찔끔 말을 멈췄다. 공포가 사라진 상황에서 우연의 반응은 빛처럼 빠르고 즉물적이며 솔직했다. 앳된 목소리가 쨍 치솟았다.
“아저씨는 자신의 몸에 대해 어쩌면 그렇게 자각이 없으세요?”
“뭐, 뭐?”
“아저씨는 반성 좀 하셔야 해요. 거울에 비친 훤칠한 키나, 얼굴 몸통 1대 7, 배꼽 상하 5대 8이라는 퍼펙트 황금 비율에 대해서 정말 아무 생각도 없으세요? 거울 보시면서 오, 이 잘생긴 사나이는 누구지, 오, 오! 이렇게 황금 비율로 미끈하게 빠진 사나이는 대체 누구지, 하는 소리 안 나오세요?”
“아, 안 나와. 잠깐잠깐, 이봐, 우연아, 진우연 씨, 그, 그게.”
“안 나온다고 하지 마세요! 나와야 정상이에요! 아저씨는요, 제가 이십 평생 봐 왔던 오빠들 아저씨들 중에서요, 몸매가 최고로 잘빠진 데다 근육의 양감도 훌륭하고 얼굴도 겁나 잘생긴 사람이에요! 아저씨에 비하면 다른 남자들은 죄다 말라비틀어진 꼴뚜기 같단 말이에요!”
푸우, 뒤에서 갑자기 웃음소리가 터졌다. 최 실장이 얼른 입을 틀어막고 문밖으로 튀어 나간다. 이원은 이런 상황은 난생처음 겪는 일이라 어물어물 꼬리를 내렸다.
“어, 그래. 내가 조, 좀 잘생기긴 했다……는 건 안다.”
등으로는 진땀이 쪼르르 흘러내리는데, 우연은 고개를 들고 따박따박 따지기까지 한다.
“그럼 왜 솔직하게 인정을 안 하고 자꾸 빼세요! 잘생겼으면 잘생겼다, 잘빠졌으면 잘빠졌다, 사람이 사실을 인정할 줄 알아야죠!”
“그럼 안 되지, 사람이 재수 없고 교만해 보이잖아.”
“아닌 척하는 게 더 재수 없고 교만해 보이지 않아요?”
“아닌 척이 아니고, 사람은 원래 겸손해야 하는 거야.”
“겸손하면 호구밖에 더 돼요? 그리고 잘생긴 사람이 잘난 척하는 건 교만한 게 아니에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고 근거 있는 자신감이니까 괜찮아요.”
“넌 외모 지상주의자냐. 사람을 공평하게 판단해야지 왜 외모로 차별해?”
“외모로 판단하는 게 불공평한 거예요? 그럼 머리 좋은 사람이 공부 잘하는 건 공평한가요? 목소리 좋은 사람이 성악가가 되는 건 공평한가요? 좋은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 사랑받으며 행복하게 사는 건 공평한가요? 그런 식으로 따지면 세상에 공평한 게 뭐가 있어요?”
“외면의 아름다움은 오래가지 않아. 진짜 오래가는 건 내면의 아름다움이야.”
“아 진짜, 왜 자꾸 80살 할아버지 같은 말씀만 하세요? 아저씨같이 멋진 사람이 꽃중년이란 소리 대신 꼰대 아재 소리나 듣고 다니면 그 얼마나 비극이에요?”
충격을 받은 이원이 입을 벌린 채 대답도 못 하자 우연이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말을 돌린다.
“아저씨가 저한테 그러셨잖아요. 하느님이 저한테 그림 재능을 선물로 주셨다면서요. 그럼 아저씨한테는 외모를 선물로 주신 거예요. 현대 사회에선 몸매나 얼굴이야말로 최고의 재능 아닌가요?”
눈치를 보는 주제에 속의 말은 또 다 한다. 말문이 터지니 자유분방하게 튀는 생각도 고스란히 튀어나오는데, 이 뒷감당이 보통 일이 아니다. 친구들에게 겁먹지 않고 이야기를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은 조금 접어 둬도 될 것 같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선물을 준 두 사람을 운명처럼 만나게 하셨죠! 이유가 뭐겠어요. 내가 준 환상의 재능으로 내가 준 환상의 몸매를 그려라, 그거 아니겠어요? 정 쪽팔리면 주요 부위 한 뼘만 살짝 가리면 되잖아요, 네?”
머릿속이 매시트포테이토가 되어 가는 것 같다. 이건 뭐, 건방지고 되바라지고 그런 수준을 넘어 놓으니 화도 안 난다. 우연이 성격이 원래 이런가? 세상에 다중 인격도 아니고 비포 애프터가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 최 실장은 뒤에서 입을 틀어막고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이게 웃을 일은 아닌데…….
제기랄. 이원은 고개를 숙이고 입을 가린 채 몇 번 헛기침을 해 보았다. 하지만 웃음을 너무 누르고 있으니 어깨가 자꾸 꿈틀거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안타깝고 비장한 마음뿐이었는데, 이젠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많은 천재 예술가들이 그렇듯, 우연 역시 호기심이나 생각을 적당한 선에서 끊지 않고 거침없이 가지를 뻗도록 내버려 두는 것 같았다. 이쯤이면 더 묻지 않겠지, 이 선까지 넘어오진 않겠지, 하는 안전거리가 아예 없었다. 먼 거리에서 흘끔대며 관찰하는 듯하다가 어느 순간 훅, 들이닥친다.
게다가 우연은 ‘상식적으로’ ‘예의 바르게’ ‘적당히’ 걸러 말하는 법을 몰랐다. 모 아니면 도, 아예 입을 다물거나 생각하는 것을 모조리 쏟아 내거나 둘 중 하나였다. 원래 성격 탓인지, 불안정한 가정 환경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물론 함묵증보다는 백배 낫지만, 이대로 놔둬도 되나 싶기도 했다.
“그러니까 아저씨, 딱 한 번만 해 주시면 돼요. 금방이면 돼요. 사진 같은 것도 필요 없어요. 아무도 안 보여 주고 혼자 그릴게요. 완성되자마자 바로 아저씨 드릴게요. 맹세해요. 비너스, 라오콘, 다비드상보다 질 좋은 몸매, 아니, 비율하고 양감이 이렇게 퍼펙트한 바디를 그림으로 남겨 두지 않는 건 범죄예요.”
이원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우연의 말은 거칠었지만, 의도는 불순하지 않았다. 채팅 앱이니 뭐니 하는 선입견을 제하고 생각한다면, 그냥 아름다운 육체를 그려 보고 싶다는 화가다운 욕심만 투명하게 읽혔다.
신의 선물을 받은 화가들 중 육체의 아름다움에 심취한 자들은 적지 않았다. 그들은 모델이 된 청년들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탐욕적으로 박제했다. 그리스, 로마, 르네상스, 신고전주의 시기 미술가들의 작품에서 보이는, 인간의 몸에 대한 노골적인 찬미. 이원은 그것 역시 인간을 빚은 하느님의 솜씨에 대한 찬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수백 년 전, 몇몇 운 좋은 청년들은 천재 화가의 모델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영원한 젊음과 불멸의 아름다움을 얻었다. 지금 나에게도 그런 기회가 온 것이다. 눈부신 재능이 없어도 돈으로 그 재능을 살 수 있고, 그 재능에 편승해 영원히 이름을 남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래. 그 정도 수준의 작품이 나온다고 장담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비밀리에 개인 소장만 할 거라면, 완전한 전라(全裸)도 아니라면.
눈 딱 감고 한번 해 볼 수도 있지 않을…….
“……!”
순간 이원은 번쩍 정신을 차렸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려 했던 자신을 믿을 수 없었다. 민망하고 창피하고 그런 건 둘째 치고, 누드모델을 해 주었다는 게 들통이라도 나면 그야말로 끝장이었다.
……내가 정신이 나갔구나.
“멋지게 봐 줘서 고맙다만, 그래도 안 되겠다. 이제 그 얘긴 그만하자.”
작은 입술이 멍하니 벌어진다. 쉽게 흥분했던 우연은 풍선의 주둥이가 풀린 것처럼 금방 풀이 죽었다.
이원은 입학 선물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는 게 안전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 * *
아까워.
이원은 기안 서류철을 건성으로 뒤적거렸다. 우연의 목소리가 다시 불쑥 치민다.
‘누드모델…… 한…… 번만 해 주세요, 아저씨.’
방울새 소리처럼 가늘고 맑은 목소리. 그녀의 목소리를 떠올리면 트라이앵글 진동음이 길게 꼬리를 끌며 귓가에 사르르 감겨드는 기분이 들었다.
안쓰럽고, 걱정스럽고, 고맙고, 원망스럽고, 되바라지고, 실망스럽고, 기특하고, 맹랑하고, 어찌 보면 대단하고. 우연에 대한 감정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한 번도 단일한 적이 없었다. 그녀에 대한 느낌은 무엇이든 강렬했고, 독특했고, 극과 극을 오갔다.
……맹랑하다.
아까워.
아까워, 아까워, 아까워.
……정신 나갔지, 너.
이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앞을 오락가락했다. 와이셔츠를 새로 가져오게 해서 갈아입기까지 했지만, 아까의 거슬리던 감촉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최 실장이 곁으로 다가오더니 캐비닛에 놓아둔 우연의 연습장을 서류철 위에 얌전히 얹어 놓는다. 비서실을 보니 다른 직원은 퇴근했고, 최 실장 혼자였다. 이원은 자신 때문에 최 실장까지 퇴근이 늦어지고 있다는 걸 알고 미안해졌다. 먼저 퇴근하세요, 하려던 이원은 잠시 망설였다.
“홍연 씨.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홍연은 눈을 실긋, 가늘게 떴다.
홍연…… 씨라.
한 전무는 자신을 부를 때 보통은 최 실장, 이라는 직함으로 불렀지만, 가끔 ‘홍연 씨’라고 부를 때가 있었다. 처음에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부르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 섬세하고 점잖은 상사께서는 두 가지 호칭을 의식적으로 구별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연봉은 딱 1인분밖에 안 주면서 눈치껏 모드 전환까지 요구하다니, 고약한 일이었다.
모시기 편한 성격이라 생각했는데, 한 전무는 의외로 말 붙이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쓸데없이 진지했고, 시답잖은 수다나 농담을 즐기지도 않았으며,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드물었다.
다만 ‘홍연 씨’라고 부를 때는 바로 그 ‘드문 때’였다. 그것은 비서실장에게 어울릴 법한 대답 대신 사적이고 친밀한, 혹은 솔직한 반응을 원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한 전무가 홍연의 스스럼없는,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격의 없는 태도를 적절한 선까지 용인하는 이유는 바로 이렇게 모드 스위치를 요구할 때가 있기 때문이었다.
홍연은 이원미술관 입사 면접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연예인 뺨치게 생긴 젊은 면접관이 나이 지긋한 면접관들 틈에 끼어 앉아 단체 면접으로 들어온 지원자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다.
그는 다른 면접관들의 소위 ‘압박 면접’에 당황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 지원자들을 웃음기 어린 인사 한마디로 편안하게 만들고, 그들의 숨겨진 장점을 잘 끌어내는 희한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와의 대화는 시종일관 부드럽고 따뜻한 분위기였는데, 이상하게 마음에도 없는 모범 답변 대신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실제로 앞선 면접자들의 거짓말이나 허풍을 기가 막히게 잡아내기도 했다.
홍연은 그 면접에서 했던 답변도 아직 기억하고 있다. ‘상사의 사적이고 부당한 갑질이 있을 경우 어찌 대응하겠느냐.’ 하는 질문에, 홍연은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속에 있는 말을 고스란히 늘어놓았었다. 거대 흑역사가 탄생하던 순간이었다.
‘사랑하는 이원메세나재단의 무궁한 발전과 이원미술관의 건강한 조직 문화를 위해, 언제든지 잘못된 것을 알려 드리고, 그래도 안 되면 충심으로 따지고, 그래도 안 되면 성실하게 싸우고, 그래도 안 되면 충만한 애사심으로 윗선에 조목조목 일러바칠 것이며, 그래도 안 되면 때려치우고 나가겠다, 나는 비혼족이라 굶어 죽어도 꿀릴 것 없다!’
그야말로 전무후무 용기백배한 대답이었지만, 사실 합격하기 글러 먹은 대답이기도 했다. 홍연은 미술관 문을 나서며 내가 무엇에 홀렸던고, 나는 망했다, 망했다를 골백번 복창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며칠 후 홍연은 재단 이사장에게 직접 합격 전화를 받았다. 홍연은 그제야 그 젊은 면접관이 재단 이사장인 것을 알고 일주일 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젊은 이사장은 몇 년간 홍연을 눈여겨본 후, 세경홀딩스 비서실로 발탁했다. 그의 취업 및 인사이동은 한동안 세경그룹의 인사 미스터리 혹은 괴담으로 회자되었다.
이제 홍연은 자신이 발탁된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다. 자기 자신에게 유난히 엄한 상사께서는 홍연의 반권위적 태도와 유쾌하면서도 거침없는 직언을 기껍게 여겼다. 그것이 높은 직위에 달라붙기 쉬운 권위 의식과 교만을 막아 주리라 기대하는 듯했다. 가끔은 눈높이가 맞는 수준 높은 대화 상대를 원하기도 했고, 친구처럼 편하게 이야기할 상대를 필요로 하는 듯도 했다. 이원은 홍연과 동갑이었고, 상사라는 점을 빼놓으면 꽤 좋은 대화 상대이기도 했다.
“예, 전무님. 말씀하십시오.”
“음, ……제가 정말 잘생겼습니까? ……아니, 몸 비율이 좋은 편입니까?”
홍연은 자신의 상사를 무례하게 쳐다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건 자각이 없는 걸까, 신종 자랑법일까. 어쨌든 멀티태스킹이 잘 안 되는 상사께서 오늘 기안 서류에 서명을 한 개도 하지 못한 이유를 알게 됐으니 속은 시원했다.
“무슨 대답을 원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키가 15센티나 작은 부하 직원에게 묻기엔 적절하지 않은 질문 같습니다.”
“어…… 이런. 미안합니다. 아, 미안하다고 하는 게 더 미안한 일일까요?”
한 전무는 건성으로 사과하며 연습장을 열었다.
홍연은 그림이 한 장 한 장 넘어갈 때마다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이 빌어먹을 연습장 안에는 뭐 하나 무난한 그림이 없다. 모델은 다양한 편이고, 전신상, 반신상, 두상, 흉상, 혹은 손이나 발, 정면, 측면 등 형태와 구도도 가지각색이었지만 어느 그림이든 미친 존재감이 뻗쳐오르고 있었다.
일반적이지 않은 구도, 신체의 일부만 극단적으로 확대한 형태, 불안정한 배치, 렌즈를 투과해서 그린 듯 일그러지고 왜곡된 형상들이 소름 돋을 정도로 정밀하게 묘사되었다. 그래서 모든 그림에는 사진처럼 익숙하고 일상적이면서도 초현실적인 분위기가 공존했다.
“아무리 봐도 지독한 그림들입니다. 척 클로스에게 프랜시스 베이컨하고 살바도르 달리가 동시에 빙의한 게 아니고서야.”
한 전무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렇네요. 이런 실력을 갖고 있으니 저한테도 그리 맹랑한 제안을 했겠죠.”
“지금까지 누드화는 그려 본 적도 없을 텐데 말이죠. 아, 혹시 몰래 해 봤으려나? 하긴, 야동으로 인체 데생 연습하는 애들도 있다 하니까요.”
“그럼 어, 음…… 포즈가 너무 한정되지 않겠습니까?”
한 전무가 진지하게 되물었다. 왜 이런 것까지 진지할까 이 사람은. 홍연은 비죽 치미는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왜 이러십니까. 세상은 넓고 체위는 많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밤마다 심혈을 다해 새로운 동작을 개발하고 있을 텐데요. 지금까지 개발된 포즈만 해도 10만 8천 종쯤 될걸요? 전무님, 설마 18세기 미국의 퓨리턴도 아니고, 정상위 한 가지만 알고 계신 건 아니죠?”
“설마요.”
이원이 난처하게 웃는 것을 보며, 홍연은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의 상사는 성적으로 절제하는 훈련을 너무 오래 해 왔다. 그의 휴대 전화나 컴퓨터는 증류수처럼 맑고 청정했고, 그는 남자들 사이에서 흔히 오가는 화장실 농담마저 거북해했다.
“홍연 씨, 사실 이 연습장에 누드화가 없다곤 할 수 없어요. 어떻게 보면 우연이는 그쪽 방면으로 전문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네?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는데 누드는 한 장도 없었는데요.”
이원은 연습장의 중간 부분을 잡아 펼쳤다. 살짝 달아오른 동그스름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는 곱상한 여자 얼굴이 나타났다.
“이게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홍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누드화가 아닌데?
“……아……마도 우연 학생의 어머니, 김현주 씨 아닐까요?”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죠?”
“그냥 알았습니다.”
느슨하게 풀어진 옷차림, 좌우로 흐트러진 머리카락, 지치고 짓눌린 듯한 표정과 광기에 어스름하게 잠식된 눈동자, 옆으로 살짝 비틀린 고개의 각도. 미소를 짓고 있는 예쁜 외모와 달리 그림 전반에서는 기괴하고 불안정한 분위기가 뭉클뭉클 솟구쳤다.
이원은 연습장을 몇 장 더 넘겼다. 이마가 좁고 광대뼈가 불룩하며 턱이 뾰족한 사내가 나타난다. 눈은 부리부리 큰 편인데 눈동자는 작았고, 그 와중에 무언가를 노려보는 바람에 흰자위가 더 넓어 보였다. 두툼한 입술의 한쪽 끝이 조금 비틀려 위로 올라가 있었고, 목은 굵고 짧았다.
“이 그림은요?”
“……아마, 진형식 씨? 우연 학생의 아버지 같습니다.”
“그렇죠. 홍연 씨는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냥, 그럴 것 같았습니다.”
“맞습니다. 그냥 알게 되죠. 저도 그랬습니다.”
이원은 연습장을 한 장씩 빠르게 넘기기 시작했다.
“다른 그림들도 그냥 알겠습니다. 우연이를 좋아하는 친구, 싫어하는 친구, 탐색하는 눈, 호기심 어린 눈, 경계하는 눈, 호의의 몸짓, 악의의 몸짓, 배경으로 쓰인 물건, 분위기…….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모델이 어떤 사람이구나, 우연이에게 어떤 마음을 갖고 있구나, 하는 것이 확 느껴지죠.”
홍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 전무가 제대로 본 것이 맞다. 그녀는 외면을 관찰하는 눈이 훌륭했지만, 내면을 관찰하는 시선은 더욱 매서웠고, 그것을 그림으로 형상화하는 솜씨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그 아이는 그림으로 한 사람의 내면을 다 까발려 놓습니다. 예의 바르고 점잖게 위장하고 있는 것들을 모조리 벗겨서 맨살을 드러내죠.”
“내면의 누드……라는 말씀이십니까.”
이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팔짱을 낀다. 얼굴에선 웃음기가 사라졌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홍연은 끈덕지게 기다렸다.
“홍연 씨, 나는 아까 그 아이가…… 나를 어떻게 그릴지 궁금했어요.”
낯선 욕망이 은은하게 끓어오르는 이원의 얼굴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
“내가 과연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지, 두렵고 걱정이 됐습니다. 그 아이가 내 속에서 어떤 모습을 보았는지, 내 어떤 부분이 박제되어 버릴지.”
그래서였나. 확실히, 아까 한 전무가 우연이라는 아이에게 보여 주었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이상한 점이 많았다.
홍연이 그간 관찰해 온 한 전무는 ‘이기적이고 안하무인인 재벌 2세’라는 선입견을 무색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는 다른 이들의 고통에 진심으로 공감하며 같이 아파할 줄 알았지만, 자신의 고통에는 단호하고 혹독했다. 인간을 추잡하게 만드는 여러 욕구를 철저하게 절제할 줄 알았고, 어떤 길이 안락한 길인가 대신 어떤 길이 옳은 길인가를 늘 고민했다.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 있을까 싶은 정도였다. 멀리 떨어져서 볼 때는 사람 괜찮네, 멋지네, 정도였지만, 가까이서 모시게 되니 안타깝고 안쓰러울 때가 더 많았다.
저 사람을 그리게 된다면 어떤 그림이 나올까. 홍연 역시 궁금했다.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성화나 탱화 비슷한 게 나오지 않을까, 뻘쭘하게 그런 생각도 잠시 했다.
“하지만 지금은 궁금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정물화나 풍경화로 해 달라고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요. 홍연 씨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면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운 걸까?
하긴. 그는 내면이 복잡하고 억눌러 둔 마음이 깊었다. 원하는 답을 정해 놓고 물어보는 인간들은 짜증스러웠지만 원하는 대답을 눌러 달라 요구하는 사람은 늘 흥미로웠다.
“맨몸을 드러내는 것보다, 맨마음을 드러내는 게 더 신경 쓰이십니까?”
“숨겨 둔 치부가 박제된 채 천년을 흘러간다 생각하면 아찔하죠.”
“치부가 아니라 아름다움이 박제될 거라고 생각하면요? 외면의 아름다움이든, 내면의 아름다움이든. 그것만큼 남는 장사가 어디 있습니까.”
홍연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전무님. 생각해 보세요. 다비드상의 모델도 미켈란젤로 앞에서 창피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까? 하지만 쪽팔림은 순간이고 아름다움은 영원한 거죠. 자신의 몸이 먼 훗날 약동하는 젊음과 육체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다는 걸 알면, 그 모델은 지금 지하에서 얼마나 뿌듯하겠습니까.”
“…….”
“순간의 쪽팔림만 넘기는 게 관건이죠. 전무님도 제2의 다비드가 되지 말란 법이 있습니까? 게다가 화가 선생께서! 너그럽게도! 한 뼘은 가려도 된다잖습니까. 설마 한 뼘으로 모자라서 그러세요?”
“홍연 씨, 이거 참…….”
난처하게 웃던 이원은 이내 진지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홍연 씨. 민망하고 창피하고, 그런 것만 문제는 아니잖습니까. 이럴 때 단호하게 안 된다고 해 주셔야 할 분이 이렇게 유혹하고 부추기기만 하면 어떻게 합니까.”
“민망하고 창피한 게 문제가 아니라면, 대체 뭐가 문젭니까, 전무님?”
“그런 짓을 했다는 말이라도 잘못 나오면 저도 회사도 끝장입니다. 이제 갓 대학생이 된 여학생에게 서른두 살 먹은 사업가 후견인이 누드모델을 해 주었다는 소문이라도 돌아 보세요. 사람들이 ‘아, 저 학생이 그림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구나.’, ‘아, 저 남자는 사정이 어려운 화가를 도와주려는 마음이 충만하구나.’ 하고 생각할 것 같습니까?”
“그럼 기도를 하셔야죠! 성당에 그렇게 열심히 다니시면서, 이럴 때 도와 달라고 안 하면 언제 하십니까? 하느님, 제 살아생전엔 이 뻘짓을 들키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제 살아생전엔 이 요망한 그림을 저어어얼대 들키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하느님, 대신 제가 죽은 다음엔 더 이상 쪽팔릴 것도 없으니 그때부터 제 멋짐이 퍼펙트한 그림을 통해서 찬란하게 빛나고 천년만년 이어지게 하소서.”
결국 이원은 길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유혹적인 기도에 대해, 주님께서 미리 좋은 대답을 남겨 두셨죠. 논 템타비스 도미니움 데움 툼(Non Temptabis Dominum Deum Tuum,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이라고.”
“제가 확신하건대, 그분께선 라틴어 같은 거 안 배우셨을걸요?”
홍연은 유쾌하게 웃었고 이원은 어깨를 으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