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누드-9화 (9/47)
  • 9. 두 개의 거래

    “정말 더 안 사도 괜찮아요? 장학관 방에는 침대하고 책상, 옷장밖에 없어요.”

    “하지만, 3주도 안 돼서 기숙사 갈 건데요.”

    “어차피 기숙사에서도 필요한 거 아니에요?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기본적으로 필요한 게 은근히 많을 텐데. 옷이나 침구 말고도, 하다못해 손톱깎이, 머리빗, 반짇고리까지 살다 보면 다 필요해요.”

    이원은 우연을 장학관에 데려다주는 길에 인근 백화점에 들러 필요한 물건을 사들이는 중이었다. 일단 멍든 얼굴을 가릴 야구 모자를 사고, 목도리를 사고, 당장 잠을 자야 하니 간단한 침구와 잠옷, 티셔츠와 막 입을 옷가지도 몇 개 샀다. 샴푸, 비누, 수건, 컵, 바닥의 냉기를 막을 러그와 슬리퍼를 사고 벽시계와 책상에 놓을 스탠드도 골랐다.

    필요한 것은 자꾸 늘었다.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채 뒤를 졸졸 따라오는 우연을 보면 자꾸 사야 할 것이 떠올랐다. 다리 위에서 얇은 교복 차림에 맨다리로 발발 떨며 서 있던 모습이 계속 생각나서, 이원은 안에 털이 빽빽하게 차 있는 코트와 긴 패딩, 무릎까지 오는 털 부츠, 두꺼운 양말 세트를 기어이 사게 했다. 거칠거칠하던 손등을 생각해서 바셀린과 좋은 로션, 가죽 장갑을 사고, 눈물과 땟물로 얼룩져 있던 신발이 떠올라 쿠션감이 좋은 운동화와 편한 구두도 한 켤레씩 신겨 보았다. 구두에는 정장이 필요할 거고, 그러면 맞는 가방도 한두 개는 있어야 할 거고, 정장에 어울릴 장신구도 한두 개는 있어야 할 것이다. 본래 피부가 흰 편이니 심플하고 세련된 로즈 골드 계열 주얼리가 잘 어울릴 것 같다.

    일단 노트북은 몇 년은 편하게 써야 하니 사양 좋은 것으로, 지하 화방에도 들러서 기본 미술용품이라도 사 두라고 할까…….

    ……이건 뭘 어쩌자는 거지?

    뒤에서 짐을 몇 뭉치씩 들고 따라다니던 홍연은 현재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태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 저 책임감 강한 상사께서, ‘후견인의 맡은 바 소임’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노력하시는 건 잘 알겠다. 저 딱하고 재능 많은 예비 화가를 딱하고 애틋하게 여기시는 것도 알겠다.

    하지만 후견인이나 후원자는 부모가 아니다. 이런 건 그냥 정 관장에게 일임하거나 필요한 것을 얼마 범위 안에서 알아서 구매하라고 비용을 보내 주면 되는 일이다.

    그렇다고 이원이 원래 쇼핑을 즐기는 족속이었느냐 하면, 절대적으로 아니었다. 그는 물욕이 거의 없었고, 필요가 넘친다고 느껴야 구매 목록에 올렸는데, 그나마 한번 사면 오래오래 아껴 가며 사용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뭔가를 충동적으로 지르는 일도 드물었고, 어지간하면 퍼스널 쇼퍼를 통해 조용히 구매할 뿐이었다. 지금처럼 매장을 층층마다 휩쓸고 돌아다녔던 적은, 홍연이 알기로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원을 검소하고 소탈한 절약가로 보기는 어려웠다. 그의 구매 기준은 깐깐한 심미안을 충족시키는지 여부와 물건 자체의 품질로, 일단 마음에 들면 가격이나 브랜드 네임 따위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반드시 손에 들였다. 그는 평상시의 식사에 앤틱 알빈의 은식기나 방짜 순은 반상기를 아무 위화감 없이 사용하면서도 양복은 소공동의 오래된 양복점에서 유행을 타지 않는 스타일로 맞추었고, 굽이 닳은 구두를 수선해 신는 일에도 거부감이 없었다. 심지어 신학교에 입학할 때 대부님께 선물받은 가죽 가방을 정성껏 길들이고 수선해 가며 12년째 곱게 사용하는 중이었다. 이원은 그것을 합리적이라 여겼고, 홍연은 그것을 귀족적인 마인드라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은 아무래도 뭔가 좀 이상하다.

    홍연은 두 번이나 짐들을 차에 옮겨 놓고 온 후, 우연이 화장실에 들어간 틈을 타서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다.

    “전무님. 지금이라도 채이정 실장을 콜하면 어떨까요. 바로 내려올 텐데요.”

    휴게실 소파에 앉아 허브차를 마시던 이원이 고개를 갸웃한다.

    “피곤하십니까?”

    “아뇨, 그건 아닙니다만, 전담 쇼퍼가 있는데 왜 굳이.”

    “그랬다간 저 애가 부담스러워할 것 아닙니까.”

    아니 지금은 안 부담스러울까요? 다 똑같은 돈지랄로 보일 텐데요.

    ……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가지 않도록 홍연은 흠, 헛기침을 했다. 이원의 눈이 가느스름해진다.

    “이상해 보입니까?”

    “아닙니다.”

    홍연이 예의 바르게 웃으며 침묵하자 이원이 풀풀 웃으며 속을 털어놓았다.

    “볼 때마다 불안하고, 걱정되고, 그러면서도 기특하고 애틋하고. 그래서 필요한 게 있으면 다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드네요. 누이동생이 대학에 들어가면 기분이 이렇지 않을까 싶어요.”

    홍연은 얼빠진 얼굴로 상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실제 누이동생이 있는 홍연은 저 말에 도저히 동조를 해 줄 수가 없었다. 상사의 궁금한 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러고 보니 홍연 씨도 여동생이 있다 했죠. 동생이 대학에 들어갔을 때 어땠습니까?”

    “이러지 않았던 건 확실합니다.”

    현실 남매의 진실은 상상하신 것과는 엄청 다릅니다. 홍연이 예의 바르게 말을 삼키며 어깨만 으쓱대자 이원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는다.

    “터울이 꽤 있다고 했었죠?”

    “예, 일곱 살 터울입니다. 일전에 임용 고시 합격했다고 발령 대기하면서 아버지 매장에서 알바를 하는데, 일을 하러 가는 건지, 삥을 뜯으러 가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하, 하하하하, 이원이 유쾌하게 웃는다.

    “홍연 씨는 동생 자랄 때 챙겨 주는 재미가 있었겠어요. 예쁜 옷이나 신발도 사 주고, 용돈도 주고, 출근할 때 학교까지 태워 주고, 외근 나갈 때 들러서 밥도 사 주고……. 제가 동생이 없어서 그런지 그런 모습이 참 부럽더라고요.”

    콜록, 콜록콜록, 홍연은 급하게 입을 가린 후, 속으로 맹렬히 부르짖었다. 아닙니다! 전무님이 모르셔서 그러는 겁니다! 실물 여동생이라는 생물은 결단코 그런 따사롭고 애틋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아닙니다아!

    그래, 없어서 저러시는 게지. 몰라서 저러시는 게지. 어머니와 여동생 사이에 끼어 샌드백처럼 얻어터지며 살아온 홍연은 저 말도 안 되는 로망을 너그럽게 이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자신은 그런 로망 따위는 눈곱만큼도 남지 않은 욜로 비혼족 사나이가 되어 버렸지만, 월급을 주는 상사의 로망까지 뭐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긴, 한 전무라면 정말 그랬을 수도 있겠다. 엄마도 형제도 없이 엄하고 바쁜 아버지 옆에서 외롭게 자라서, 형제자매가 바글바글한 집을 늘 부러워했다고 들었다. 원래 정도 많고 동물이나 아이들도 그렇게 좋아하니, 우연 또래의 동생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얼마나 예뻐하며 살갑게 챙겨 주었을까.

    “아까 노트북을 사서 보냈어야 했는데. 가격표를 미리 치웠어야 했어요. 아니…… 그냥 좀 저렴한 쪽에서 골라 보라고 할걸.”

    이원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목소리에서 아쉬움이 뚝뚝 떨어졌다.

    조금 전 디지털 가전 매장에 들른 그는 노트북 코너로 가서 원하는 사양의 프로세서와 메모리, 그래픽 카드 등을 쭉 적어 판매원에게 내밀었다. 그는 원하는 가격보다 원하는 사양을 우선하는 쪽이었다. 때마침 매장에는 그에 딱 부합하는 물건이 디스플레이 되어 있었다.

    다만 문제는, 등록금과 동일한 숫자의 가격표가 ‘눈에 잘 띄게’ 붙어 있다는 점이었다.

    “어, 아저씨, 이거, 가격 이상한 거 아니에요……?”

    우연은 옷이나 이불, 가방을 살 때까지는 크게 부담스러워하는 기색이 아니었고―가격표가 안 보였으니까.―, 원하는 것도 망설임 없이 바로바로 낙점했다. 아저씨, 고맙습니다. 어떡해, 이거 너무 예뻐요. 잘 쓸게요. 와, 너무 좋아요. 완전 좋아요. 우연은 눈물을 글썽글썽, 발을 동동거리며, 고마워서 어쩔 줄 모르는 자신의 마음을 숨김없이 표현했다.

    그녀는 취향이 뚜렷했고, 호불호의 표현도 확실했다. 무난한 것보다는 인상적인 것, 강렬한 톤의 포인트, 심플한 바탕에 파격적인 요소가 가미된 디자인을 좋아했다. 본인의 스타일이 확고하니 유행 따위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게 더 예쁜 거 같아요? 저게 더 예쁜 거 같아요? 하고 의견을 묻는 일도 전혀 없었다. 특이하다면 꽤 특이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격을 몰랐을 때’의 일이었다. 디지털 가전 매장에 들어설 때만해도 달뜬 표정을 숨기지 못하던 우연은 가격표를 보자마자 파랗게 질린 얼굴로 걸음을 멈췄다.

    “안 사도 돼요. 필요하면 제가 나중에 살게요.”

    우연에게 ‘500만 원’은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금액의 분기점 정도로 여겨지는 듯했다. 이원은 얼른 따라가 달래듯 말했다.

    “어차피 필요하니까 불편하게 지내지 말고 구매해요. 처음에 저렴한 걸 사면 금방 사양이 낮아져서 바꿔야 하니까, 처음부터 제대로 된 물건을 들이는 게 나아요.”

    “안 필요해요, 하나도 안 필요해요. 정말이에요.”

    “포토샵이나 일러스트 같은 프로그램은 안 배울 거예요? 아예 프로그램까지 깔아서…….”

    전무님, 프로그램들도 몇십이 아니라 백 단위인데요. 홍연이 뒤에서 입을 뻐끔거리기 무섭게 우연이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저는 회화과니까 괜찮아요. 포토샵 그런 거 안 할 거예요. 그리고 기숙사에 공용 컴 있대요. 그거 쓰면 돼요.”

    이원은 우연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며 잠자코 물러났다. 우연이라는 아이는 늘 겁에 질려 있었지만 자기 의견만큼은 확실했고, 적어도 이원에게는 그 의견을 두려움 없이 표현하고 있었다.

    그 행동은 어쩌면 ‘신뢰’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저 아이가 부담스러워하는 일은, 그게 무엇이든 하고 싶지 않았다.

    쇼핑을 끝낸 이원은 장학관까지 따라가 짐 정리 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장학관의 정재경 관장이 화들짝 튀어나와 직접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1인실 방은 꽤 좁았지만 창문이 커서 환했고,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다. 다만 가구는 정말 침대와 책상, 옷장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우연은 짐 정리를 시작한 지 1분 만에 작업에서 퇴출당했다. 팔이 불편해서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는 것도 있었지만, 정리 정돈 능력이 심각하게 부족했다. 이원이 하나를 정리하면 우연은 다섯 개를 어질렀다. 강박에 가까운 정리벽이 있는 이원이 보기에, 우연은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였다.

    결국 우연은 의자에 꼼짝 말고 앉아 있으라는 벌을 받았다. 그녀는 잘생긴 정리 요정이 침구를 구김 없이 쫙 펴서 네 귀퉁이 각을 잡아 빠르게 침대를 세팅하고, 옷을 크기대로 착착 걸어 놓고, 욕실 수건을 백과사전처럼 각을 맞춰 꽂아 넣는 것을, 눈을 반짝이며 열심히 구경했다. 한 가지 정리가 끝날 때마다 아낌없는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와……. 아저씨는 어쩌면 그렇게 정리를 잘하세요? 세탁소나 청소 요정 알바 같은 거 하시면 돈 진짜 많이 버실 것 같아요.”

    “맞아요. 호텔에서 하우스키핑을 반년 동안 해 봤는데 적성에 잘 맞더라고. 내 생각에도 그쪽으로 나갔으면 대성했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해맑은 대화를 들은 홍연은 뒤에서 쓴웃음을 지었다.

    이원이 후계자 수업을 위해 성일호텔에 순환 배치를 받았을 때였던가. 우 상무가 그를 골탕 먹인답시고 반년간 하우스키핑과 세탁만 시킨 적이 있었다. 이원은 그 일을 불평 한마디 없이 묵묵히 해냈고, 한 회장 역시 아들이 그곳에서 수모를 당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원이 한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잠자코 지켜보기만 했다.

    1년의 순환 근무 기간 동안, 그는 호텔 핵심 직원들을 절반 넘게 자기편으로 만든 후 온갖 자료와 정보를 산더미같이 확보해 홀딩스로 되돌아갔다.

    2개월 후 한 전무는 세경홀딩스에 ‘성일호텔 영업 이익 개선 방안’이라는 보고서를 제출하며, 성일호텔과 우 상무의 경영상 문제점을 그야말로 가을철 볏단 타작하듯 맹렬하게 두들겨 댔다. 동일 매출 가정에서, 적자 상태의 호텔에 22%의 영업 이익 상승 방안도 함께 제시했다. 우 상무는 새파란 게 아무것도 모르고 날뛴다고 이를 갈며 펄펄 뛰었지만, 누나인 우성희 이사와 대판 싸운 끝에, 제안의 일부를 슬그머니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때 배운 가닥이 여전히 남아 있는지, 이원이 직접 정리한 방은 20분도 되지 않아 호텔 스위트룸처럼 반드르르해졌다.

    그가 이 방에서 저지른 단 한 가지 실수는 보일러 온도를 무려 27도로 세팅해 놓았다는 점이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이원은 저 아가씨를 쪄 죽일 작정인 듯했다. 정리를 마쳤을 때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숭얼숭얼 얽혔고, 창문에는 보얗게 습기가 차 있었다.

    최 실장이 음료수라도 사 오겠다며 나간 틈을 타서, 이원은 우연에게 사과했다.

    “그때 많이 놀랐죠. 얼마나 아팠어요.”

    “……네.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마포 대교에서 간신히 살아왔는데, 하마터면 집에서 죽을 뻔했지 뭐예요.”

    우연이 배슬배슬 웃으며 살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이원은 의외의 대답에 빙긋 웃었다.

    아까부터 생각한 건데, 이 아이는 말하는 방식이 꽤 독특했다. 보통은 이럴 때 괜찮아요, 라거나 이제 많이 나았어요, 라고 할 텐데. 쉽게 겁에 질리고 눈치를 보는 태도와 달리 자기주장이 확고하고 표현도 거침이 없었다. 본래 타고난 성격이 그런 걸까. 그렇게 짓눌린 환경에서도 이런 성격이 살아남는구나. 놀랍다면 놀라웠다.

    “이렇게 다치게 한 거 미안해요. 내가 생각이 짧았어요. 학교에 얘기해서 지정 장학금 같은 거로 처리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럼 아버지도 의심 안 하고 이런 고생도 안 했을 텐데.”

    우연이 고개를 반짝 든다.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듯, 눈이 커다라니 벌어져 있다. 길고 진한 속눈썹이 파들파들 떨리는 것이 보인다.

    “왜…… 아저씨가 사과를 하세요? 때린 아빠는 짹소리도 안 하는데? 아저씨는 저한테 사과를 하실 게 아니라 고맙다는 인사를 받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자, 잠깐만.”

    “아저씨가 신고도 해 주셨다면서요? 신고 안 해 주셨으면 저 정말 손모가지가 아니라 모가지가 부러져서 죽었을지도 몰라요. 지금까지 저나 엄마가 맞을 때 신고해 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단 말이에요…….”

    분노로 파들파들 떨리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아저씨는, 저, 저한테 무슨 짓을 하셨는지 제대로 아셔야 해요. 아저씨는요, 제 목숨을 구해 주고, 인생을 완전히 새로 시작하게 해 주신 거예요.”

    “알았어, 알았어요. 그런 말 안 할게요. 그만.”

    이원은 의자를 끌어당겨 우연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 주었다. 하지만 우연은 목을 쥐어짜듯 끝까지 말을 이었다.

    “저, 저는 리셋…… 버튼 누르고 인생…… 새로 시작한 거예요. 저, 저는 어, 어떻게 은혜를 갚을지도 모르겠는데, 고맙다고, 정말 고맙고 죄송하다고 말씀이라도 드리려고, 복지사 선생님한테, 얼마나 부탁을, 근데, 아저씨는 왜 계속 뭔가를 해 주면서, 자꾸, 미안하다고, 제발 그러지 마세요, 진짜, 바보 아니냐고요…….”

    아저씨,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녀는 이원의 무릎 위로 짠물을 뚝뚝 떨구며 하염없이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명치가 점점 묵직해진다.

    이러지 마. ……나는 이런 감사를 받을 자격이 없어.

    목숨을 구해 준 건 사실이다. 재능을 꽃피울 수 있도록 첫걸음을 떼게 해 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온전한 호의나 조건 없는 순수한 도움이 아니었다. 잘만 키우면 거대한 이익을 가져다줄 작은 천재, 대형 화가가 되리라는 기대, 신이 허락한 놀라운 재능을 돈으로 지배하려는 욕망이 숨어 있었다. ‘너는 저 아이의 재능을 꽃피우고, 그 눈부신 이름에 기생하는 제2의 메디치가 될 것이다.’라고 속삭이는 목소리를 분명히 자각하고 있지 않았던가.

    감정의 한쪽 끝이 당겨지자, 뱃속에 엉겨 있던 자괴감 덩어리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나는 그날 두 개의 거래를 했다. 아버지의 시신 뒤에서는 내 몸뚱이와 남은 인생을 돈으로 맞바꾸는 거래를 했고, 생명의 다리 위에서는 그렇게 얻은 돈으로 신이 내린 재능을 포획하듯 거래했다. 너절한 욕망은 호의와 동정이라는 가면으로 매끈하게 가려졌을 뿐이다. 호의와 동정이 실제로 없었던 것은 아니니 가면은 더욱 그럴듯했을 것이다.

    나의 생각과 행동은 얼핏 보면 호의와 헌신, 희생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지만, 한 겹만 들추어 보면 더러운 욕구와 이기적인 계산으로 꽉 들어차 있다. 심지어 그것을 인식조차 못 하도록 스스로를 세뇌하기도 한다. 나는 속물덩어리일 뿐 아니라 위선자이기도 하다.

    네가 그날 내 속을 파헤쳐서 알려 주지 않았으면, 나는 여전히 진실을 깨닫지도 못하고 아버지나 미현이를 원망하며 갈팡질팡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느새 우연은 허리를 구부리고 이원의 가슴에 머리를 댄 채 울고 있었다. 이원은 작은 어깨를 밀어 내지 못하고 망설였다. 우연은 날개가 부러진 작은 새처럼 떨며 흐느꼈다. 와이셔츠가 축축하게 젖는 것이 느껴졌다.

    이원은 그녀의 어깨를 밀어 내는 것을 포기했다.

    “……그래. 지금까지 잘 견뎌 줘서 장해요. ……고맙고.”

    이원은 한참 만에야 잠긴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최 실장이 얼른 와야 할 텐데, 싶다가도 지금은 절대 오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제발 이 아이의 눈물만 멈출 수 있다면, 아니 이 자리를 피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연이 눈물로 뒤덮인 얼굴을 들고 살그머니 묻는다.

    “그런데 아저씨, 여쭤볼 게 있는데요.”

    “그래요.”

    “아저씨는 제가 싫으세요?”

    ……뭐?

    이원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는지, 아이의 사고의 흐름이 진심으로 궁금했다. 이 아이의 생각은 가끔 난데없는 방향으로 튀는 듯했다. 다만 왜 4차원 또라이라는 별명을 갖게 됐는지는 알 것 같았다.

    “싫을 리가 있어요?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해요?”

    “그런데 왜 자꾸 존댓말 하세요? 제가, 혹시 그렇게 마음에 안 드세요?”

    “진우연 씨…… 잠깐만요, 뭐?”

    “왜 아직도 저한테 진우연 씨라고 해요? 드라마에 나오는 노티 나는 부장님 같잖아요.”

    방문 앞에서 짧게 헛웃음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최 실장이 들어오려다 우연이 우는 소리에 못 들어오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원은 당황한 것을 넘어 어이가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분명 그때 학생이라는 말이 싫다고 해서…….”

    “이제는 우연아, 라고 하실 수도 있잖아요. 친구들처럼 우연아, 4차원 또라이 진우연, 이렇게.”

    잠시 말문이 막혔다.

    “……나는 원래 모르는 사람한테는 나이가 어려도 말 내리지 않아요. 존댓말 듣는 게 더 기분 좋지 않아요?”

    “이젠 좋지 않아요! 아저씨하고 저하고 이제 모르는 사이도 아니잖아요.”

    뭐 썩 잘 아는 사이도 아니잖아. 이원의 당황한 얼굴에 우연은 눈을 내리깔고 중얼거렸다.

    “아저씨 존댓말은 너무 정중해서 느낌이 이상해요. 너와 가까워지기 싫다, 하는 것처럼 들려요.”

    이런 맙소사. 뒤통수를 정통으로 맞은 것 같다.

    맞다. 정중한 말에 깃든 격식과 예의는 사람들 사이에 거리를 만든다. 이원은 이 적절한 거리감을 사랑했다. 공감이 너무 지나쳐 남의 고통마저 깊게 이입하던 소년 이원의 애처로운 방어 기제에서 시작된 습관이었다.

    다만,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우연이 그런 것까지 느끼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하긴, 이 아이는 처음 만났을 때, 나조차 모르는 내 마음을 가장 먼저 읽어 준 사람이었다.

    이원은 당황한 마음을 제대로 감추지 못한 채 대답했다.

    “어……. 그, 그래요. 그럼 말 내릴게요.”

    “우연아, 해 보세요.”

    “우연아.”

    우연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우연아, 4차원 또라이 진우연. 낯선 느낌이 익숙해지도록 몇 번 되풀이했다. 우연은 손바닥으로 눈가를 빡빡 문지르더니 살그머니 웃으며 네에, 아저씨, 네, 이원 아저씨, 하고 대답한다. 우연의 눈매는 이럴 때 꽤 순진하고 귀여워 보였다. 이원 아저씨, 자신의 이름이 붙은 호칭이 귀에 간지럽게 감겼다.

    “거봐요. 얼마나 듣기 좋아요. 한 뼘쯤 더 가까워진 것 같죠?”

    “그러네.”

    최 실장이 뒤늦게 들어와 탁자 위에 음료수 몇 가지를 내려놓는다. 과일주스 몇 개가 두서없이 튀어나온다. 이미 방은 후끈후끈 더웠고, 목이 마른 이원은 주스를 달게 마셨다. 우연의 목에서도 꼴락꼴락 경쾌한 소리가 났다. 이원은 왜인지 저 소리에도 가슴이 지끈거렸다.

    “오늘 바로 접근 금지 가처분 신청할 거고, 정식 명령도 금방 나올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편히 지내. 메세나재단에서 정식으로 후원 들어가니까 이따 정 관장님한테 인적 사항 알려 주고.”

    “네.”

    “하고 싶은 거 있으면 이제부터 눈치 보지 말고 다 해. 이젠 말릴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당연히, 당연히 그럴 거예요…….”

    입은 웃고 있는데 입꼬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하기 싫은 건 하나도 안 할 거예요. 엄마 아빠는 절대 만나지 않을 거고, 집 근처는 가지도 않을 거고…….”

    “그럼.”

    “하루 종일 맘껏 그림만 그릴 거예요. 친구도 사귀고, 미팅도 하고, 놀 때는 신나게 놀고, 알바, 알바도 할 거예요. 돈 열심히 모아서 아저씨한테 빚진 거 얼른 갚을 거예요.”

    “……그래.”

    대답을 하는데 자꾸 목이 잠기는 것 같았다.

    “술도 마셔 보고, 담배도 한번 피워 보고, 화, 화장도 하고, 머리 하얗게 탈색도 하고, 배꼽 같은 데 피어싱도 해 볼 거예요.”

    “……그래, 그래.”

    이원은 우연을 내려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희한한 일이다. 어지간히 반듯하고 의지 굳은 학생이나 너드 범생이가 아니라면, 술이나 담배, 화장 따위를 시작하는 건 보통 중‧고등학생 때 아닌가? 물론 성매매 채팅 앱까지 깔았었다는 저 아이가 반듯하고 의지 굳은 모범생이었다고 보기엔 상당히 무리가 있지만, 자신이 생각했던 ‘되바라지고 발랑 까진 아이’와도 꽤 거리가 있는 듯했다.

    “이제부터는 하고 싶은 말도 겁내지 말고 해 봐. 다른 사람들은 엄마 아빠처럼 멋대로 화내고 때리지 않아.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마음 아프게 하는 말은 안 되지만, 남과 다른 의견을 말한다고 비난받을 이유는 없어.”

    “……네.”

    우연이 시선을 똑바로 맞추며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아마 저 아이는 다른 사람과 편하게 이야기하고, 제대로 된 대인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그 과정이 생각보다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저 아이는 그것을 피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열심히 해 볼게요.’

    ‘제가 잘하나 봐 주세요. 끝까지 봐 주세요.’

    우연이 그를 향해 다짐하는 말이 똑똑히 들리는 것 같다. 비장한 각오와 눈물, 웃음이 뒤섞인 그녀의 표정은 설명하기 어려운, 이상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새까맣게 젖은 눈이 이제 반짝거리며 빛을 내기 시작했다. 얼룩덜룩 멍든 얼굴인데도 생동감이 넘쳐흐른다. 신에게 놀라운 재능을 선물받은 저 아이는 이제 손목 발목의 족쇄를 모조리 끊고 세상으로 날아가려고 하고 있었다.

    이원은 이제 막 새 인생을 시작한 저 아이의 반짝이는 미래가 부러웠다. 반면 자신에게 남은 것은, 길고 지루한 시간. 거룩한 사명도 잃고, 삶의 기쁨도 잃고, 행복에 대한 기대마저 사라진 황량한 미래와 원치 않았던 것들뿐이었다. 이원은 잠시 헛기침을 했다. 저 아이를 볼 때마다 느껴지던 목이 죄는 듯한 통증의 정체가 이걸까. 확실치 않았다.

    ‘그래도 잘했다, 이원아.’

    누군가가 속에서 새로 말하기 시작했다.

    ‘넌 옳게 행동한 거야. 저 얼굴을 보렴.’

    ‘너는 저 아이에게 날개를 달아 준 거야. 잘한 거야. 정말 잘한 거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목소리 같기도 하고, 엄하게 보속을 명하며 부드럽게 위로하던 신부님의 목소리 같기도 하고, 혹은 어렸을 적에 들었던, 아주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깊고 부드러운 울림 같기도 했다.

    지금껏 태연한 척 삼켜 넣었던 오열이 때를 모르고 튀어나오려 한다. 꿀꺽, 꿀꺽, 이번에도 이원은 목구멍을 넘어오려는 덩어리를 필사적으로 삼키고 웃어 보였다. 서른둘은 눈물에 자유로울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자 그럼 피곤할 테니 오늘은 푹 쉬자. 다른 준비는 내일부터 차근차근 하면 되니까. 입학 선물로 받고 싶은 건 없어?”

    새까만 눈이 다시 동그래지더니 사방을 빙 돌아본다. 아니 지금까지 사 주신 이것들은 다 뭐고요? 쟁강쟁강 따지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이원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것들은 네 생활용품인 거고. 내가 개인적으로 하는 입학 선물과는 엄연히 다르지.”

    우연은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만 깜박거린다. 이원은 아까 본 컴퓨터를 입학 선물이라고 하면서 그냥 보내 버리면 어떨까, 잠시 궁리했다. 화를 내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부담스러워하려나.

    나도 참.

    이원은 혼자 고소했다. 그는 물욕이 거의 없지만 한번 마음에 담은 것은 기어이 손에 넣고야 마는 이상한 고집이 있었는데 오늘은 그게 저 아이를 위한 선물에 꽂혀 버린 모양이다.

    “입학 선물, 제가 원하는 거 말해도 돼요?”

    고개를 들어 올린 우연의 발갛게 젖은 눈이 깜박깜박한다. 생생한 기대감이 화르르 뻗쳐오르고 있었다. 의외였다. 원하는 게 있었나? 그럼 아까 말해도 됐을 텐데.

    “당연하지. 원하는 게 있으면 알려 줘. 최대한 구해 볼 테니. ……물론 너무 비싼 건 안 돼. 경복궁, 노이슈반스타인 성, 만리장성, 그런 건 곤란해.”

    이원의 농담을 알아들은 우연은 눈가에 물방울을 매단 채 키득키득 웃었다.

    “아저씨, 제가 나중에 아저씨한테 그림 그려 드린다고 약속했잖아요. 초상화.”

    “그랬지.”

    “그러면 당연히…… 모델도 해 주실 거죠? 어, 저기, 제가 아무리 기억력 상상력이 좋아도 전부 다 상상으로 그릴 순 없으니까요.”

    “……그야 그렇지. 그럼 선물이란 게, 나중에 모델…… 해 달라는 거니?”

    어리둥절했다. 고작 그런 걸 선물로? 초상화를 원한다면 당연히 해 주어야 하는 건데?

    대답은 바로 나오지 않는다. 이원이 화를 낼까 봐 겁내는 것처럼 작은 어깨가 둥그렇게 움츠러든다. 하지만 우연은 작은 목소리로, 하지만 도저히 잘못 듣지 못할 만큼 또렷하게 대답했다.

    “누드모델…… 한…… 번만 해 주세요,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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