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누드-7화 (7/47)
  • 7. 두 가지 거래

    101동 정문 앞에는 경찰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사이렌 소리는 없었지만, 경광등은 번쩍번쩍 요란하게 돌았다. 날이 추워서인지 나와서 구경하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하지만 창문 너머로 흘끔대는 시선들이 바늘 뭉치처럼 따가웠다.

    홍연은 짙게 선팅한 차창 너머로 가만히 상황을 살폈다. 조금 전 아파트 정문을 통과하면서 앰뷸런스 한 대와 경찰차 한 대를 지나쳐 보냈다. 상황은 정리된 것 같다. 한발 늦은 걸까. 아이는 손목이 잘렸을까. 설마, 딸의 손목을 정말 자를 아버지가 있을까. 겁주려고 위협만 한 거라면 모를까.

    ……일단, 경찰차가 왔으면 그 아이의 안전은 확보가 된 거겠지.

    “최 실장님은 차에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한 전무가 문을 열고 경찰차 쪽으로 다가선다. 그는 이곳까지 오는 내내 깍지 낀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눈을 감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침착한 것을 넘어 움직임조차 없었다. 입술만 보일 듯 말 듯 계속 달싹였던 걸 보면 절박하게 기도문을 외우던 게 아닐까 싶다.

    “추운데 고생 많으십니다. 피해 학생은 괜찮습니까? 크게 다치진 않았습니까?”

    어이구, 일을 벌어요, 일을.

    홍연은 핸들에 이마를 대고 한숨을 쉬었다. 막 출발하려는 경찰차를 잡아 세운 한 전무는 허리를 굽히고 운전석의 경찰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경찰의 미심쩍은 시선이 한 전무를 아래위로 훑어 내린다.

    “실례지만 피해 학생과 어떻게 되십니까?”

    “제가 신고한 사람입니다. 한이원이라고 합니다.”

    “아, 그러시군요. 그러잖아도 신고자분께 몇 가지 확인할 게 있었는데.”

    이원의 신분증을 확인한 경찰이 반색하며 차에서 내린다. 홍연의 등 뒤로 스멀스멀 불길한 느낌이 올라온다.

    신고자분은 피해 학생과 어떤 관계십니까. 폭행 사실을 어떻게 알고 신고해 주셨습니까. 몇 가지 묻던 경찰은, 두 사람이 전혀 모르는 사이이며, 한강에서 몇 시간 전에 처음 만났다는 이야기까지 나오자 묘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뒤에 있던 다른 동료와 몇 마디 주고받은 경찰이 조금 딱딱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은데, 서까지 잠시 동행해 주시겠습니까?”

    “전무님, 지, 지금 경찰서에 가신다고요? 박 이사 부르겠습니다. 이게 무슨! 전무님!”

    “됐습니다. 가면 그 아이 상황을 좀 알 수 있을 겁니다. 차 몰고 따라오세요.”

    기겁하는 홍연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한 전무는 경찰차 뒷좌석에 올라탔다.

    조사 시간은 길었고, 내용은 간단하지 않았다.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이원은 참고인이 아니라 피의자라도 된 것처럼 오랫동안 조사를 받았다. 특히 그 500만 원을 왜 주었는지에 대해서 집요하게 추궁당해야 했다.

    이원이 마포 대교 위에서 있던 일을 설명하자 조서를 쓰던 형사는 피식피식 웃으며 같은 설명을 계속 반복하게 했다. 잠자코 조사에 응하던 이원은 휴대 전화를 보여 줄 수 있느냐는 말에 짤막하게 한숨을 짓더니 대기하고 있던 홍연에게 고개를 돌렸다.

    “박원주 변호사님 호출하세요.”

    그 말을 끝으로 이원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지금 이게 뭡니까! 기껏 죽을 목숨 건져 주고, 등록금도 대신 내 주고, 폭행 신고까지 해 준 사람에게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감사장을 주진 못할망정 왜 범죄자 취급이냐고! 아이를 팬 건 이 사람이 아니고 아버지 아닙니까! 게다가 오늘 아침에 장례식 마치고 온 사람한테!”

    여의도에서 등촌동까지 20분 만에 달려온 박원주 이사가 길길이 날뛰며 상황을 정리했다. 변호사가 온 후, 이원이 누구인지 알게 된 형사가 갑자기 태도를 바꾼다.

    “아, 변호사님, 그게, 그게 아니고, 그저 피의자 진술 사실 확인차 참고인에게 협조를 부탁한 것뿐입니다. 그게…….”

    “잠시만요.”

    뒤에 조용히 앉아 있던 이원이 일어나 나직이 물었다.

    “피의자라면, 진형식 씨겠군요. 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그러십니까. 대체 제 전화기에서 뭘 확인하고 싶으신지, 납득 가능한 이유를 알려 주시면 협조해 드릴 수 있습니다.”

    “전무님. 서면 답변으로 충분합니다. 전무님은 참고인이지 피의자가 아니십니다. 가해자가 아니고 피해자를 구해 주신 분이란 말입니다!”

    박 이사가 고함치는 것을 뒤에 있던 홍연이 쩔쩔매며 뜯어말린다. 순간 안쪽 방에서 진형식의 쇳소리가 터져 나온다.

    “씨발, 그 애가 원조 교제로 돈 500만 원을 받아 왔는데, 어떤 아비가 머리가 안 돌아? 500을 거저 줬다고? 어떤 미친 새끼들이 그런 큰돈을 거저 줍니까? 지가 만수르야? 중동 석유 왕이야? 500이면 한두 번 만나서 까이는 돈도 아니야. 형사님도 그 정돈 아시잖소, 엉?”

    순간, 홍연과 박 이사의 얼굴이 허옇게 떴다. 이원 역시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원조 교제? 진우연 그 애가?

    잠시 후 다시 커다란 고함이 터진다.

    “걔 그딴 짓 하고 돌아다닌 게 이번이 처음이 아냐! 고1때부터 채팅 앱으로 남자들 만나고 돌아다녔어. 내가 그때 신고도 한번 했었잖아요.”

    “이런 말 하기 쪽팔리지만, 사실 관계를 밝혀야 하니 다 말하는 거요. 그때 다리몽둥이 부러지도록 혼나고 다시는 안 할 줄 알았는데. 등록금 못 준다니까 애가 또 철없는 짓을…….”

    “우리 애랑 만난 새끼 이번이 처음 아닐 거요. 지금 당장 폰 압수해서 뒤져 봐야 한다니까! 틀림없이 우리 애 전번이나 채팅 앱이랑 연결돼 있을 거고, 통화 내역도 있을 거라고! 바로 조사 안 하면 다 지울 거니까 지금 당장 확인해 보라니까요! 그 새끼 변태야. 애한테 교복 입고 한강으로 나오라고 한 거 보라고!”

    “성매매? 채팅 앱? 이 무슨 미친……. 전무님을 뭐로 보고…….”

    뒤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원은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담당 형사는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사실 저 아버지가 없는 말을 하는 건 아니라서, 조금이라도 미심쩍으면 철저하게 확인을 하려다 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없는 말이 아니라뇨.”

    “저 사람이 딸 전화기에 성매매용 앱이 깔려 있으니 엮인 놈들 조사해 달라고 신고한 적이 있어서요. 바로 취하하긴 했지만, 전화기에 이상한 게 깔려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고……. 또 가출한 여자애들, 잘 데 없으면 그런 앱으로 남자 만나서 숙식 해결하는 경우도 꽤 있거든요.”

    이원은 눈을 감고 숨을 가다듬었다. 꽤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우연이라는 아이를 어떻게 봐야 할지 혼란스러워졌다. 그런 이상한 짓을 하고 다닐 아이로 보이지 않았는데. 물론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판단할 순 없지만, 적어도 이원은 자신의 사람 보는 눈이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잔뜩 주눅 들고 겁에 질려 있던 그 아이는 생각보다 훨씬 되바라지고 영악했던 걸까. 아버지의 성교육이라는 건 그 일로 아버지에게 호되게 야단맞았던 거였나.

    입맛이 쓰다.

    범죄자처럼 취급당했던 이유를 확인하고 나니 화가 나는 것을 넘어 허탈할 뿐이었다. 이상하게 그 아이에게 배신을 당한 기분도 들었다. 형사의 태도가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 포지션에 이입한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미성년 성매매자로 지목된 사람에 대한 경멸을 숨기기는 쉽지 않았으리라.

    만에 하나, 저 아이가 정말 그런 행동을 일삼고 다니던 아이라면.

    ……괜히 도와준 걸까?

    순간 이원은 눈을 크게 뜨고 생각을 멈췄다. 머리가 띵, 울리는 것 같다.

    지금 이게 무슨 말이야. 그게 이번 일과 무슨 상관이라고.

    그 아이가 어릴 때 남자들과 자고 다녔는지의 여부는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우연이라는 아이는 아버지에게 폭행을 당한 피해자다. 그런데 내가 뭐라고 감히 ‘되바라지고 발랑 까졌으니 도움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판단한단 말인가. 이원은 잠시나마 그런 생각을 한 것이 부끄럽고 미안했다.

    이원은 전화기를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목소리가 꺼져 들어가는 것 같다.

    “선의로 도와주고도 이런 취급을 당하니 기분이 좋진 않군요.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협조는 하겠습니다만, 변호사와 제 앞에서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세 명이 달라붙어 검사를 마친 후, 형사는 시커멓게 변한 얼굴로 몇 번이나 사과했다. 우연과 이원 사이에는 접점이 먼지만큼도 없었다. 정말 우연히, 다리 위에서 만나 호의로 도와준 게 전부였다. 게다가 신인 예술가들을 꾸준히 후원해 온 이원메세나재단의 이사장이라는 입장을 감안하면 도와준 상황이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때마침 쉼터에 들어가 있다는 피해자의 진술이 전달됐고, 그녀의 진술은 이원의 진술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결국 가해자의 개소리 헛소리에 도와준 사람만 쥐 잡듯 잡은 꼴이 되고 말았다. 결론이 그렇게 나고 보니, 나중에는 서장까지 와서 몇 번이나 사의를 표해야 했다.

    “피의자에게 제 개인 정보는 절대 들어가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그나마 우연이 손목을 잘리지 않고 쉼터에 안전하게 들어간 것과, 그녀가 생각보다 순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이 고생을 하고 얻은 수확이라면 수확이었다.

    홍연과 이원이 경찰서에서 나온 것은 저녁 8시가 넘어서였다. 이원의 목소리는 꺼질 것 같았고, 발은 바닥에 질질 끌렸다. 운전대를 잡은 홍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전무님.”

    “……답답하네요.”

    뒷좌석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고 있던 이원은 한참 만에야 조용히 덧붙였다.

    “괜찮습니다.”

    물론 홍연은 그의 ‘괜찮다’는 말을 믿은 적이 없었다. 그는 늘 괜찮다, 라고 대답했고 힘들다는 내색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경영 일선에 뛰어든 후부터 괜찮았던 적이 별로 없었다. 불면증이 너무 심해져 잠을 자는 것 자체가 전쟁이었고, 비밀리에 상담 치료를 받거나 약을 받아 오곤 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정형기 박사가 바로 따라 올라왔다. 간단한 진찰을 마친 그는 한숨을 쉬며 수액 팩을 꺼내 들었다. 이원은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침대에 늘어진 채 수액을 맞았다.

    “이젠 정말 주무셔야 합니다. 그러잖아도 불면증이 심하신 분이 카페인까지 내리 드셨다고요.”

    “예. 죄송합니다.”

    “저한테 죄송할 일이 아니지요. 사람이 잠을 못 자면 졸려 죽겠다, 로 끝나는 게 아니라 정말 죽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예. 앞으론 안 그러겠습니다.”

    “어휴, 대답은 또 잘하시죠!”

    정 박사가 투덜거린다. 이원은 한 손으로 눈을 가린 채 가물가물 촛불이 꺼지듯 웃었다.

    “……그런데 전무님. 미현 양께서 지금 접빈실에서 와 계십니다. 오늘 뵙기 어려우실 것 같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는데 기어이 찾아오셔서……. 어떻게 할까요, 전무님.”

    송 여사는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홍연은 지글지글 화가 치솟았다.

    그래, 마음이 급한 건 알겠다. 어머니의 평생 숙원이었던 성일호텔의 경영권이 손에 들어올지 말지 결정되는 판이니 흥분이 될 만도 하겠지.

    그래도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으면, 다만 하루 이틀이라도 편히 쉬게 해 주면 안 되나. 막 장례식 마치고 와서 이렇게 힘들어하는 사람을, 오밤중에 쫓아와서 기어이 이렇게 볶아쳐야 하나.

    눈을 감고 누워 있던 사내의 미간이 깊이 찌푸려진다. 긴 한숨, 짧은 신음. 하지만 그는 이내 눈을 뜨고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박사님, 바늘 좀 빼 주세요. 잠시만 내려갔다 오겠습니다.”

    박 이사와 정 박사는 한숨을 쉬었지만 말리지 않았고, 홍연과 송인희 여사는 한숨조차 쉬지 않았다. 그에게는 아랫사람의 한숨조차 짐이라는 것을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

    * * *

    “연락 안 돼서 걱정했어, 오빠. 잘 생각해 보고 대답해 준다더니, 정말 그것 때문에 잠적할 줄은 몰랐지.”

    접빈실의 창가에 서서 기다리던 미현은, 장례식보다 레드 카펫에 더 어울릴 만한 우아한 블랙 실크 드레스 차림이었다. 하얀 대리석 바닥, 화려한 샹들리에 조명, 그리고 별이 총총한 하늘이 보이는 창문 옆에서 검은 드레스 차림으로 서 있는 여자는 화보 속 모델처럼 보였다.

    “많이 피곤해 보여, 오빠.”

    “괜찮아.”

    “괜찮다니 다행이네. 그래, 결론은 내렸어?”

    ‘……아저씨. 하기 싫으면 도망쳐도 돼요.’

    갑자기 귀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쟁, 하고 울린다. 이원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 아이를 떠올리는 순간,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치밀어 오른 감정의 정체는 단일하지 않았다. 당혹, 연민, 안도, 고마움, 미안함, 혹은 실망, 배신감, 그 모든 감정은 다만 강렬했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도망칠 수 있으면 도망치고, 도망친 데서 행복할 수 있으면, 그렇게 행복하게 살면 되잖아요.’

    ‘……아저씨가 행복한 것만큼 중요한 게 어디 있어요.’

    그 작은 아이는 깊이 숨겨진 본심을 단번에 찍어 내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도망, 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이원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격통이 일었다.

    왜 그리 아팠는지 잘 알고 있다. 그 말이 진실이었기 때문에.

    맞다. 나는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어깨에 지워진 짐과 족쇄들을 다 벗어 던지고 싶었다. 나에게 더 잘 맞는 길, 내가 갈구했던 길, 평화롭고 안온한 길로 가고 싶었다.

    그것을 사제성소, 그분의 부르심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저도 모르게 그렇게 세뇌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그 거룩하고 평화로운 길로 되돌아가려고 발버둥 쳤다.

    하지만 진실은 그게 아니었다.

    이원은 눈을 반쯤 감고, 예비 신학생 모임에서 들었던 사제성소 확인 조항들을 떠올렸다. 오랜 시간, 외울 정도로 반복해서 자문자답했던 그 질문들은 그가 기억하기로 열 개가 훌쩍 넘었고, 그중 두 번째 내용은 이러했다.

    「너는, 사회생활과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도피하려는 건 아닌가?」

    너는, 사회생활과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눈을 힘껏 감았다. 누가 가슴을 송곳으로 찍어 대는 것 같아서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다. 진실을 인정하는 것은, 종종 이렇게 심하게 아팠다.

    ……그래. 인정한다. 나는 도피하려 했던 게 맞다. 힘든 길에서, 압사할 듯한 책임감에서 꼴사납게 도망치려 했었다.

    다만, 나는, 지금까지 그 마음을 인정하지 않고 외면하고 부인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 아이가 그 마음을 환한 햇빛 아래 질질 끌어내기 전까지.

    그것을 안 이상, 학교로 돌아가면 안 된다. 절대 안 된다. 그분의 길은 힘들면 이리로 도망치라고 열려 있는 비상구가 아니다. 편하다는 이유로 선택하는 길이 되어서도 안 된다. 온 인생을 걸고 그분께 삶을 헌신하는 분들만이 감당할 수 있는 거룩하고 어려운 길이다.

    나는 그분의 뜻을 더 깊이 헤아리려 노력해야 했고, 내 이기적인 욕심과 도피하려는 마음을 좀 더 일찍 직시했어야 했다.

    그분께서 그 아이를 우연히 만나게 한 이유가 혹시 이것 때문일까.

    알 수 없다. 그분의 뜻은 늘 인간의 지혜와 계산을 뛰어넘는 곳에 존재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나는 이제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나에게 주어진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원은 다섯 발짝쯤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미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뭇 사람들의 찬탄대로, 미현은 여신처럼 당당하고 우아하며 지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여자였다.

    ……그래. 이 정도면 과분하다 생각해야겠지.

    쇼윈도 부부에게는 그 나름으로 통용되는 룰이 있다. 사랑이 없어도 계약은 이어져야 하며, 부부간의 의무 역시 성실히 수행해야 할 것이다. 계약은 서로에게 필요한 지지 기반을 제공할 것이고, 부부로 함께 살다 보면 당연히 아이들도 생길 것이다. 그러다 보면 정이 들 수도 있고, 어쩌면 정말로 사랑하는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든 안 되든, 이젠 선택의 여지가 없지 않은가.

    마음을 결정한 이원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분한 청혼을 받게 돼서 민망하고 낯이 없다. 진심으로 고맙고, 기쁘게 받아들일게.”

    미현의 입술이 살짝 벌어진다. 깜박깜박, 긴 속눈썹이 곱고 우아하게 움직였다. 이원은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좋은 남편이 되도록 최선을 다할게. 잘 부탁해, 미현아.”

    “이럴 때는 사랑해, 라고 해 주어야 하지 않아?”

    미현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으며 이원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눈동자가 살짝 젖어 드는 것이 보였다.

    저 눈물은 그래도 조금쯤은 믿어도 되는 걸까?

    순간 저도 모르게 쓴웃음이 스며 나왔다. 그걸 믿기엔 미현은 너무나도 연기력이 출중한 배우였다. 불필요하게 감정을 자극하면 역효과만 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눈물조차 가장 적절한 선에서 멈출 수 있을 만큼.

    하지만 이원은 미현만큼의 연기력을 끌어올릴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미현이 원하는 대로 대답하는 대신, 허리를 깊이 숙이고 하얗고 보드라운 손등 위에 입을 맞췄다.

    “아직은 그런 표현이 낯설어서…… 좀 쑥스럽네. 미안해.”

    “뭐, 충분히 이해해. 그럼 나 없는 동안 거울 보고 연습 열심히 해 줘.”

    미현은 화사하게 미소 지으며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후회하지 않게 해 줄게. 오빠.”

    나른한 향기가 이원의 코에 훅 끼친다.

    “염려하지 마. 내가 전부 다 조용하게 정리해 놓을 테니까. 외삼촌이 아무리 엄마를 들볶아도 내가 결혼하겠다는데 무슨 재주로 판을 뒤집겠어?”

    “여기저기 정리할 게 많을 텐데 조용히 해 주겠다니 고맙구나. 내가 시끄러우면 잠을 잘 못 자서.”

    예상외의 대답에 미현이 얼굴을 잠시 굳힌다. ‘여기저기 정리할 것’이 외삼촌뿐만 아니라 모리스와의 관계도 의미한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린 것이다. 끝까지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이원의 구차한 자존심이었다.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그의 이름을 언급할 일은 없을 것이다.

    “걱정 마, 오빠. 요새는 층간 소음용으로 성능 좋은 귀마개도 나온다더라.”

    소문과 기사는 귀에 들어가지 않게 해 주겠다, 극도로 오만한 배려였다. 순간적으로 이원의 입가가 딱딱하게 굳는 것을 본 미현이 빠르게 덧붙였다.

    “오빠가 힘들지 않도록 나도 최대한 노력할게. 우리 재미있게 잘 살아 보자.”

    검은 옷의 조커는 매혹적으로 웃으며 이원과 이마를 맞댔다. 속삭임에 섞인 날숨이 달짝지근했다.

    모리스와의 관계를 정리하겠다는 대답은 아니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말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이 눈치 빠르고 현명한 여자는 이원을 오래 알았고, 그의 결백함과 자존심이 감당할 수 있는 마지노선을 세심하게 가늠하는 중이었다. 여기서 더 욕심을 내면 이원이 판을 엎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한 걸음 물러선 것이다.

    ……여기까지가 내가 얻을 수 있는 선이구나.

    이원은 참담함을 누르고 조용히 여자의 뺨에 입을 맞췄다. 바짝 말라서 꺼풀이 일어난 입술에서 건조한 소리가 났다.

    그날 밤, 이원은 지친 몸을 끌고 사제관을 찾아가 주임 신부에게 아버지의 유언과 자신의 약혼 소식을 고했다. 괜히 무리한 청을 드려 주임 신부님과 주교님까지 번거롭게 해 드려서 면목이 없다고 사죄하던 그의 얼굴은 담담하고 차분했다.

    집에 돌아온 그는 며칠 동안 식사도 거른 채 몹시 앓았다. 체온은 39.3도에서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가끔 흐느끼는 것처럼 오래오래 신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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