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누드-6화 (6/47)
  • 6. 싸구려 동정, 그 결과

    ― 한 전무님 오셨습니다.

    인터폰을 통해 들려온 경비원의 말에 최홍연 실장은 튕기듯 홀로 튀어 나갔다. 이곳저곳에서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급하게 튀어나온다. 그들은 유언장이 공개된 직후 잠적한 한이원 전무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중이었다.

    상복 차림의 도우미와 직원들이 소리 없이 현관문 앞에 열을 맞추어 섰다. 도우미들을 관리하는 송인희 여사가 바짝 틀어 올린 백발을 매만지며 앞에 섰고, 홍연은 넥타이를 바투 올리며 그 맞은편에 섰다. 송 여사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차라도 갖고 가시지, 아무리 혼자 있고 싶으셔도 이 추운 날…….”

    홍연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랬다면 위치 추적도 가능했겠지만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운전하실 만한 상태는 아니었을 겁니다. 임종 때까지 내내 회장님 곁을 지키시고, 장례식 때도 거의 못 주무셨잖습니까. 카페인 보충제까지 드시면서 버티셨는데, 장례 미사 때는 초 들고 서 계시면서 휘청휘청하시더라고요.”

    “거참. 틈틈이 눈이라도 붙이시지. 어째 그리 요령이 없으신지.”

    홍연의 뒤에 서 있던 김형기 경호실장이 딱하다는 듯 혀를 찼다.

    한 전무는 매사에 지나치게 엄한 잣대로 자신을 다스리는 경향이 있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면 아무리 힘들어도 불평 한마디 하는 법이 없고, 요령을 피우는 일도 없었다. 편안함이나 호사에 대한 욕구는 가혹할 정도로 억누르는 습관이 배어 있었다. 그러니 어려운 조문객들이 계속 들이닥치는데 어디 가서 몰래 쪽잠이라도 주무시라는 말이 먹힐 리가 없었다.

    삐르르, 삐르르릉, 띵.

    현관의 보안 해제음과 함께 회색 코트 차림의 키 큰 사내가 안으로 들어선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고 송인희 여사가 위로의 말을 전했다.

    “다녀오셨습니까, 전무님. 얼마나 상심이 크셨습니까.”

    “염려해 주신 덕분에 많이 위로받았습니다. 고맙습니다.”

    목소리는 갈라지고 잠긴 상태였지만, 말투는 안부 인사를 하듯 평이했다. 한 전무는 유일하게 남은 가족을 잃었고, 송인희 여사 역시 30년간 모시던 어르신의 부고에 크게 상심한 상태였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담백했다. 그나마 뒤에 서 있던 젊은 가사 도우미 한 명이 가늘게 훌쩍거리는 소리를 냈으나 그마저도 송 여사의 엄한 시선에 곧 사그라들었다.

    홍연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전무님? 정 박사님이라도 모셔서 진찰 좀 받으시면, 아니, 일단 수액이라도 맞으시면 어떨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견딜 만합니다.”

    그가 내민 코트를 받아 든 송 여사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회색 캐시미어 코트의 밑자락은 온통 흙투성이에 나달나달 해어져 있었다. 일부러 바닥에 대고 질질 끌고 다닌 것 같았다. 대체 한나절 동안 어디서 뭘 어떻게 하면 코트가 저 모양이 되지? 하지만 아무도 이유를 캐묻지 못했다.

    한 전무는 부하 직원이나 집에서 일하는 도우미들에게 깍듯이 예의를 지켰지만, 사람들은 길길이 날뛰는 분노 조절 장애형 상사보다 한 전무를 훨씬 더 조심스러워했다. 오래 일한 사람들일수록 그 정도는 더 심했다. 송 여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밖에서 한기가 드신 것 같은데 목욕이라도 좀 하시고 쉬시겠어요?”

    한 전무는 잠시 눈을 문질러 피곤한 기색을 눅인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욕조에 뜨거운 물 좀 채워 주시고, 그리로 차하고 과일 좀 올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최 실장님은 박원주 이사님께 이리로 오십사고 연락 넣어 주신 후에, 저에게 연락 온 것들 좀 알려 주시고…….”

    “예, 전무님.”

    “카페인 보충제도 챙겨 주세요. 의논이 길어질 것 같습니다.”

    * * *

    이원은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그고 눈을 감았다. 온몸이 버터처럼 녹아내리는 것 같다. 보름 가까이 쌓였던 피곤이 백만 대군처럼 몰려와 정신이 아득해진다. 살을 저미듯 파고들던 매서운 한기가 그제야 몸을 빠져나가려는지 때늦은 소름이 두어 번 몸을 훑고 지나간다. 그때마다 다리 위에서의 기억이 뇌를 할퀴듯 긁어 댔지만, 이원은 고개를 흔들며 애써 털어 냈다. 밀도 높은 일상으로 다시 플러그인 해야 할 시간이었다.

    똑똑똑.

    깜박 졸았나 싶을 때 욕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보드랍고 향긋한 차 냄새가 코를 간질인다. 최 실장이 티 포트와 찻잔, 그리고 곱게 장식된 사과가 얹힌 쟁반을 들고 들어온다. 그는 샤워 커튼을 살짝 열고, 욕조를 덮고 있는 편백목 덮개 위에 쟁반을 내려놓은 후 다시 커튼을 치고 뒤로 물러났다.

    “감사합니다, 최 실장님.”

    송 여사의 차 우리는 솜씨는 확실히 일품이었다. 평소에는 숙면을 위해 카모마일차를 올리곤 했지만, 지금은 일정이 남아 있는 것을 감안한 듯, 홍차가 올라왔다.

    송 여사는 자신의 필요와 취향을 잘 헤아려 주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적자색 장미 문양이 화사한 작은 티 포트와 찻잔은 붉은 차에 잘 어울렸다. 최적의 농도임을 나타내는 투명한 카민 컬러, 코끝에 감기는 달고 우아한 향기는 가장자리의 금장과 화려한 붉은 꽃문양과 어우러져 오감의 만족도를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그는 욕조에 몸을 담근 채 천천히 차를 마셨다. 맛이 잘 느껴지지 않으니 나긋나긋한 차 향기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접시에 얹힌 사과도 입에 넣었다. 입안은 모래를 채운 것같이 껄끄러웠지만, 칼집을 곱게 내서 꽃 모양으로 장식한 사과를 눈으로, 아삭아삭하는 식감으로 천천히 음미하는 것은 그가 누릴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호사 중 하나였다.

    이원은 자극과 쾌락에 한계 효용의 법칙이 강력히 작용함을 일찍이 배워, 말초적인 즐거움을 절제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다만 타고난 기질상 섬세하고 탐미적인 호사까지 포기하기는 어려웠다.

    “최 실장님, 제가 전화기 꺼 둔 사이 착신으로 연락받아 두신 게 있습니까?”

    “예, 전무님. 100통가량 전화가 왔습니다.”

    “콜센터가 따로 없군요. ……급한 것부터 알려 주세요.”

    “아까 회의실에 계셨던 이사님들과 우성희 이사님, 우일혁 상무님, 세경중기 왕철성 대표이사, 이원메세나재단의 김민석 사무장, 미술관의 강석주 관장, 서울 지역 장학관 정재경 관장에게도 연락이 왔습니다. 세경홀딩스 김석우 상무님과 홍보기획부의 최경식 부장님, 나언희 차장님께서 유언장 내용이 사실인지 확인 여부와 보도 자료 가이드라인을 정해야 할 것 같다고 전화 주셨습니다.”

    “예.”

    “정상용 본당 신부님께 연락이 왔습니다. 시간 괜찮으실 때 뵈었으면 하신다고요.”

    “아, 예. 아까 유언장 내용 대략 말씀드렸습니다. 그 일 때문일 겁니다.”

    “전무님 괜찮으신지 걱정하시면서, 아무리 늦어도 괜찮으니 언제든 사제관으로 오십사 하십니다.”

    “예, 신부님께는 제가 직접 연락드리고 가 뵙겠습니다.”

    “그리고 필동의 재종 백부님과 백모님께서 들어오면 바로 알려 달라고 하셨습니다. 몸도 안 좋으실 텐데 연락이 안 된다며 걱정이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신원을 밝히지 않고 전무님을 찾으시던 분도 일곱 분이나 있었습니다. 미등록 번호에 하나같이 예의 없고 막무가내였던 걸 보면 아마 기자들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기자라 하면 차단될 게 뻔하니까…….”

    “아아…… 예.”

    일일이 기억해 두어야 하는데 벌써 어질어질 가물가물하다. 연락이 안 돼서 걱정?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그중에서 진짜 내 걱정을 하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다들 지금 우 상무와 나 중에서 어느 쪽에 줄을 대야 할지 간보고 있는 거겠지.

    뭐라고 연락을 해야 할까. 충성도를 시험할 기회로 잡기엔 유언장에 담긴 지뢰가 너무 치명적이었다. 그리고 왜 미등록 번호가 함부로 접근을 하는 걸까. 어디에서 보안이 뚫렸을까.

    “그리고 유미현 양에게서 다섯 번 전화가 왔습니다. 이곳에 와서 기다리시겠다는 걸, 도착하면 연락드리겠다고 일단 막아 두었습니다만…….”

    “네, 잘……하셨습니다. 일단…….”

    이원은 혼몽한 중에도 우선순위를 제대로 잡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친척들에겐 제가 들어왔다고 기별부터 주세요. 필동에는 일이 정리되는 대로 전화드린다 해 주시고, 미현이가 집으로 찾아오면 1층 접빈실에서 기다려 달라고 하시고, 2층으로는 올라오지 못하게…….”

    홀과 접빈실, 식당, 객실이 있는 1층은 외부인들도 내왕이 잦은 곳이었지만, 2층은 한 전무의 침실과 서재 등으로 구성된 개인 공간이었다. 허락받지 않은 이들은 발을 들일 수 없는 곳으로, 미현 역시 이곳에 단 한 번도 올라와 본 적이 없었다.

    “홀딩스 이사님들은 직접 만나 설득해야 하니…… 개별 면담 시간을 잡아 주세요. 우일혁 상무님은 이사회 전까지는 만나지 않습니다. 최 부장님, 나…… 차장님께는 철저하게 보안 유지…… 엠바고 요청을, 음, 그리고 우성희 이사님께는…… 제가, 바로 전화드린, 으음…….”

    퐁,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말소리가 툭 끊어졌다.

    잠시 기다리던 홍연은 커튼을 살짝 걷고는 한숨을 쉬었다. 물 위에는 반쯤 먹다 만 사과 한 조각이 동동 떠 있었고, 한 전무는 고개를 숙인 채 그대로 잠에 녹아 버렸다.

    어지간히 피곤하셨나 보다. 홍차를 드셨는데도 이렇게 잠에 떨어지는 걸 보면.

    한 전무는 몇 해 전부터 끔찍한 불면증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수면 유도제 없이는 잠드는 게 쉽지 않아, 뜨거운 물에 몸이 녹진녹진 녹아 버릴 때까지 앉아서 카모마일차를 마시는 습관이 있었다.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가 자는 걸 보면 하늘이 두 쪽 나도 깨우지 않았다.

    “아무리 바빠도 일단 좀 주무시는 게 좋겠습니다. 전무님.”

    홍연은 물속에서 사과를 건져 내고 물 온도를 살짝 낮춰 세팅한 후 조용히 욕실 문을 닫았다.

    * * *

    욕실에서 나온 후부터 찜찜한 기분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다. 불안, 초조함이 뒤섞인 이 감정은 이유가 없었고, 그래서 불길하게 느껴졌다. 이원은 거실을 오락가락했다. 하지만 불길한 예감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만 했다.

    혹시……?

    이원은 차를 몰고 바로 마포 대교로 되짚어 나갔다가, 기겁하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이, 이런 맙소사!”

    이원은 비상등을 켜고 다리 가장자리에 차를 세웠다. 예감은 적중했다. 교복 차림의, 키가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한강을 향해 몸을 기울인 모습이 눈에 확 들어온다. 진우연, 아까 보았던 그 아이였다. 아까 서 있던 그 자리, 아까보다 훨씬 위태로운 모습. 얼굴을 감싸고 있는 단발머리가 바람에 요란하게 팔락거리며 그녀의 뺨을 후려갈긴다.

    “잠깐만, 기다려 봐요. 하지 마, 잠깐만!”

    이원은 인도로 훌쩍 올라가 달리기 시작했다. 목이 잠겨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아저씨, 틀렸어요. 아저씨 말은 다 틀렸어……!”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이봐, 진우연 씨!”

    “물에 빠지는 걸 잡아만 놓으면 될 줄 아셨죠? 알아서 잘 먹고 잘 살 줄 알았죠? 돈만 주면 문제가 다 해결될 줄…….”

    “왜 이래! 잠깐, 내 말 좀 들어 봐요. 잠깐만, 기다려 봐! 방법이 있을 거야!”

    이원이 다급하게 고함을 질렀지만, 우연은 처량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저씨!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라면 애초에 생명의 다리 같은 데 찾아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이런 맙소사.

    가까이 다가간 이원은 걸음을 멈추고 이를 물었다. 이제 우연의 얼굴은, 갖가지 아이섀도와 립스틱을 멋대로 뭉개 놓은 것처럼 변해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외투를 입지 않았고, 여전히 맨다리였다. 저 앙상한 종아리에 찬 바람이 휘감길 때마다, 이원은 자신의 다리에 채찍질을 당하는 것 같았다.

    정말 이렇게 될 걸 몰랐어?

    쓰디쓴 자책이 뒤늦게 몰려왔다. 안일함이 후회스러웠다. 경찰에 신고까지 해 줘야 했을까. 안전한 쉼터에 인계해 주고, 학교와 집에 연락해 줘야 했을까. 새로 정착할 때까지 책임지고 보호해 줘야 했을까.

    ……나는 너를 어디까지 도와줘야 했을까.

    남을 돕는 일에는 한계가 없고, 개인의 능력과 에너지와 시간에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도움을 청하는 이들은 베푸는 자의 한계를 생각하기 싫어한다. 호의가 원망으로 돌아오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참견하지 말아야 했을까. 너는 아까 죽었을 수도 있지만, 겁이 많아 자살을 포기했을 수도 있다. 집으로 돌아갔을 수도 있다. 나는 이런 원망 따위 안 들었을 수도 있다.

    “아저씨는 나를 왜 살렸어요?”

    우연의 목소리가 점점 잠겨 들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이원은 고개를 수그렸다. 가슴에 둔통이 인다. 솔직하게 대답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알량한 동정심으로? 돈이 썩을 만큼 많아서? 아저씨가 하느님이라도 된 거 같았어요?”

    이원은 여전히 한마디도 대답할 수 없었다. 우연의 말은 틀린 게 별로 없었다.

    “왜 목숨을 건져 주고도 이런 욕을 먹는지 이해가 안 되시죠! 왜 이런 꼴을 두 번이나 봐야 하는지 궁금하시죠!”

    ……맞다. 궁금하다. 대체 너하고 나는 무슨 악연으로 엮여서.

    “운명적인 만남이라 그래요! 운명적인 만남은 원래 끝이 지랄 같거든요! 이렇게!”

    우연이 앳된 목소리로 외치며 난간을 짚고 풀쩍 뛰어오른다. 작고 몹시 마른 아이는 몸이 지나치게 가벼웠다. 휘청, 바람에 휘감긴 아이의 작은 몸이 난간 너머로 기울어진다.

    ……하느님, 제발.

    이원은 그대로 몸을 날려 난간을 타고 올랐다. 급하게 손을 뻗어 팔을 잡는 순간, ‘아, 잡았다!’ 하며 안도하는 순간, 몸이 휘청하며 강 쪽으로 고꾸라졌다. 붕, 몸이 빙글 돌더니 발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이런, 맙소사.

    이원은 눈을 크게 뜬 채, 순식간에 눈앞으로 들이닥치는 얼어붙은 강물을 노려보았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손에 꽉 잡힌 우연의 몸은 무게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새애액, 차가운 바람이 뺨을 치고 지나가며 허여스름한 얼음이 위로 확 치솟듯 다가왔다.

    파삭.

    허옇게 얼어붙은 강물이 가벼운 파열음을 내며 작고 가는 몸을 먼저 집어삼킨다. 이원은 왜인지 끝까지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첨벙.

    얼음 아래의 강물은 차갑다기보다 극심하게 아팠다. 몸이 깊이 가라앉는다. 팔다리가 아령을 매단 것처럼 무거워 움직일 수가 없다. 온통 검고, 어둡고, 숨이 막혔다. 새까만 물속에서 우연의 손을 꽉 붙잡고 위로 끌어당기는 순간, 폐가 찢어질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푸우우, 푸우, 허, 헉!”

    이원은 간신히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고 크게 숨을 헐떡였다. 멍하고 정신이 없다.

    “……이게 무슨?”

    우연을 끌어안았던 팔은 어느새 비어 있고, 자신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새하얀 것이, 부드럽고 따뜻한 솜털 구름 속에 폭 파묻혀 있는 것 같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원은 아연해졌다.

    설마, 죽어서 하늘에 올라온 건가?

    팔다리를 움직이자 뜨거운 무언가가 온몸을 휘감는다. 똑똑똑. 똑똑. 가느다란 소리가 들린다.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던 이원은 희미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크게 소스라쳤다.

    “전무님, 전무님……? 괜찮으십니까?”

    아, 이런, 맙소사. 꿈인가?

    ……왜 이런 꿈을?

    이원은 힘껏 고개를 흔들었다. 머리가 웅웅 울린다. 욕실은 뽀얀 수증기로 가득해 앞이 보이지 않았고, 피부는 물을 잔뜩 먹고 퉁퉁 불어 있었다. 목욕을 하다가 깜박 잠이 든 것을 아무도 깨우지 않았던 모양이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이런, 이런, 제기랄!

    가운만 걸치고 급하게 밖으로 나와 보니, 아버지의 오랜 친구이자 대법 판사 출신 변호사이기도 한 박원주 이사가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빙긋 웃으며 인사를 한다.

    “좀 쉬셨습니까. 몸은 어떠십니까?”

    “죄송합니다. 피곤해서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이원은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카펫을 흥건하게 적신다. 머리는 여전히 징징 울렸다.

    “아닙니다. 많이 피곤하신 것 같아서 최 실장한테 깨우지 말라고 했습니다.”

    박 이사는 소탈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지만, 이원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저만 그리 피곤하겠습니까. 정말 죄송합니다. 옷 좀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방에 들어가서 급하게 옷을 갈아입고 나온 이원은 결국 최홍연 실장에게 한마디 쏘아붙였다.

    “최 실장님, 다음에 이런 일 있으면 바로 깨워 주세요. 이건 저에 대한 배려가 아닙니다.”

    홍연은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하면서도 들리지 않게 혀를 찼다.

    한 전무는 자신을 너무 볶아 대는 경향이 있다. 주변 사람들이 자신에게 필요 이상의 배려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거북하게 여겼다. 이런 상황이면 누구라도 잠시 눈 붙일 정도의 배려는 받을 만한데 당사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회장님께서 이런 핵폭탄을 남겨 놓고 가실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것도 저한테는 감쪽같이 숨기시고 생판 처음 보는 새파란 변호사 따위에게.”

    박 이사 역시 유언장 내용에 충격받은 것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오랜 친구인 한세경 회장에게 배신감까지 느끼는 듯했다.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진다.

    “……전무님이 자리 비우신 후에 한바탕 난리가 났습니다. 살인나는 줄 알았다니까요.”

    “결국 우 이사님이 상무님을 살살 달래시더라고요. ‘이달 내로 한 전무 쪽 결론 안 나오면 바로 임시 주총 소집해라. 그때 이사회랑 대표이사 갈면 되지.’ 하시면서…….”

    “그 말을 듣고 이젠 이사님들끼리 패가 갈려서 싸움이 붙었지요. 경찰 부를 뻔했습니다.”

    눈을 뜬 채 깜박 졸던 이원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최 실장이 회의장에서 있었던 일을 손짓 발짓 해 가며 열심히 보고하는 중이었다. 그는 우 상무 패거리를 대놓고 싫어했고 직속 상사인 한 전무를 진심으로, 열렬히 지지하고 있었다.

    박 이사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냥 이참에 날 잡고 결혼하시죠. 미현 양만큼 참한 재원도 드물죠. 집안도 잘 어울리고. 사실 회장님께서도 미현 양을 얼마나 예뻐하셨습니까. 혼자 남은 전무님께서 얼마나 적적하실지 걱정도 많으셨고요.”

    “……그렇습니까.”

    “갑작스러운 일이라 불쾌하신 마음 이해합니다. 차라리 전무님께 사귀는 분이 있었으면 회장님께서 그런 유언을 남기진 않으셨을 겁니다. 그러게 지금까지 선 한번 안 보고 뭐 하셨습니까. 신학교 나오셨을 때, 다들 선부터 부지런히 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에이, 전무님 정도면 당연히 연애를 하셔야지 왜 선을 봅니까? 서른둘, 황금처럼 좋은 나이에?”

    옆에서 최 실장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묻는다.

    “이사님. 생각해 보세요. 전무님 정도 되는 사나이를 거절할 여자가 세상에 몇이나 되겠습니까. 키 크고 섹시하죠, 돈 많고 능력 있죠, 성품 좋고 교양도 안목도 학예사급인데요. 이야, 조물주께서 이렇게 불공정 거래를 하셨으면, 예의로라도 당연히 연애를 하셔야죠, 연애를!”

    홍연은 현재 미현이 모리스 첸과 오랫동안 동거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니, 아는 정도가 아니라 이원의 지시대로 그 정보를 캐 준 게 바로 최 실장이었다. 하지만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니 농담을 빙자해 딴죽을 걸어 대는 것이다.

    같이 분노해 주는 마음은 고마웠지만,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이원은 이렇게 팔려 가듯 결혼을 해야 하고, 그것이 사람들 앞에 까발려지는 상황이 몹시 치욕스러웠다. 아내의 애인까지 눈감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상황만큼은 끝까지 숨기고 싶지만, 그것도 언제 알려질지 모르는 일이다.

    “아, 내 말이! 그 연애를 한 번도 안 하셨으니까 하는 말 아닌가, 최 실장!”

    “제가 부족한 사람이라 그렇습니다. ……이제 그만들 하시죠.”

    피곤한 내색을 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목소리가 갈라져 나오며, 정신이 자꾸 흩어진다. 이 자리에 그대로 고꾸라져 자고 싶다. 그냥 도망치고 싶다.

    ……안 되는데. 뭔가 해결해야 할 일이…….

    이원은 해일처럼 몰려드는 피로와 싸우며 생각의 꼬리를 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마포 대교 위에서 온몸을 난도질하던 매운 바람이 그리울 지경이었다. 순간 머리가 띵, 울리며 어떤 목소리가 후루룩 머리를 훑고 지나간다.

    ‘……아저씨. 하기 싫으면 도망쳐도 돼요.’

    아아, ……제기랄.

    작고 파리한 얼굴이 떠오른다. 얼굴이 파랗고 빨갛고 노랗던 여자아이. 꿈에서도 나왔는데 혹시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한참을 기다려도 연락이 없는 걸 보니 괜찮은 것도 같은데 왜 그런 심란한 꿈을 꾸었을까.

    쟁강대는 목소리가 귓가에서 사그락댄다. 도망쳐도 돼요. 그것 봐요. 완전 중년이잖아요. 초상화 다섯 장, 아저씨, 하기 싫으면 도망, 제대로 된 어른, 호구, 매는 피할 수 없을 때나, 아저씨, 중년, 아재미 뿜뿜……. 그 사이로 박 이사, 최 실장의 목소리가 모기 날갯소리처럼 잉잉거린다. 눈은 억지로 뜨고 있는데 의식은 자는 것도 깨 있는 것도 아닌 것처럼 몽롱했다. 간신히 입술을 뗐다.

    “……음, 박 이사님. 여쭤볼 게 있는데요.”

    “예, 전무님.”

    “중년……이 몇 살 정도를 말하는 겁니까?”

    왕왕대던 목소리들이 갑자기 사라진다. 눈을 뜨니 얼빠진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는 두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내가 지금 제정신인가?

    “한 쉰 살부터? 좀 늦나요? 마흔다섯?”

    환갑을 훌쩍 넘긴 박 이사는 중년의 기준이 꽤 높았다. 이원과 같은 나이인 최 실장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글쎄요. 마흔 정도부터 아닐까요?”

    “……서른두 살……은 아니겠죠?”

    조금 자신 없는 목소리로 묻자 최 실장이 펄쩍 뛴다.

    “아니 대체 누가 전무님한테 그런 벼락 맞을 소릴 했습니까!”

    이원은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두 사람의 얼빠진 얼굴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이원은 기왕 창피를 당한 김에 내내 걸리던 것을 한 가지 더 물어보기로 했다.

    “이사님. 만약 길 가다가 가정 폭력을 겪는 학생을 봤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바로 경찰에 신고하셔야죠. 섣불리 끼어들었다간 전무님이 엉뚱하게 뒤집어쓸 수 있으니 그러진 마시고요.”

    “현장에서 본 건 아니고 가정 폭력 사실을 알게 된 거라면요? 그런데 피해 학생이 신고를 원하지 않는다면요?”

    “물론 저야…… 원하지 않는 참견은 안 하자는 주의입니다만, 경찰이나 보호 센터에 전화 한 통 남기셔야 하지 않을까요? 전무님은 신고 의무자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원메세나재단의 이사장 아니십니까. 그곳에 청소년 장학관이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그렇습니까.”

    “혹시 아까 자리 비우셨을 때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최 실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 * *

    “안타까운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그런 방식의 도움은 권할 만하지 않습니다.”

    박 이사는 500만 원 이야기가 나오자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유가 뭡니까?”

    “값싼 동정……. 아 죄송합니다. 자립을 위한 체계적인 지원이 아닌 일회성 호의는 삶에 유의미한 변화를 일으키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전무님께선 순수한 호의로 하신 일이지만, 자칫하면 남의 집 일에 함부로 참견한다고 뒷욕이나 듣기 십상이에요. 그럴 때는 바로 신고하고 신경 끄시는 게 낫습니다.”

    이원은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겼다.

    ……순수한 호의라.

    내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가 정말 순수한 호의뿐이었을까?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분명 있었으나 그 동인이 순수했는지는 자신할 수 없었다.

    그럼 그 아이를 도우려 마음먹은 진짜 이유는 뭐였을까?

    이원은 연습장을 처음 열었을 때의 충격을 떠올렸다.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선명한 감정. 그랬다. 이 아이를 도와야 한다는 마음을 단번에 불러일으켰던 것은 바로 그 연습장이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책상 구석에 놓아둔 우연의 연습장을 두 사람 앞에 펼쳐 보였다.

    “헉, 이건.”

    두 사람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특히 학예사 출신인 최 실장은 그림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눈꺼풀을 바르르 떨었다.

    “……전무님. 이, 이거 그린 사람, 대체 누굽니까?”

    “방금 말한 그 고등학생입니다. 지금은 안성 근처의 서림예대에 합격한 상태고요.”

    “고등학생이 이렇게 소름 끼치는 묘사를요? 이 미친 구도를요? 소묘 전공 졸업생 중에도 이런 그림 그릴 수 있는 사람 거의 없습니다.”

    “그 500만 원에 대한 대가로 저한테 그림을 다섯 장 그려 주기로 했습니다. 20호 이상으로.”

    최 실장의 벌어진 입을 보며, 이원은 어이없게도 우쭐함과 안도감을 느꼈다. 그의 반응으로 보아, 일회성 호의라지만 그래도 대단한 재능을 가진 한 아이의 인생을 옳은 길로 인도한 게 틀림없었다. 그것도 결정적이라 할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이원은 진지하게 덧붙였다.

    “다섯 장의 그림을 받는 동안, 그 학생을 후원하며 다각도로 인연을 만들어 두면 어떨까 합니다. 가장 도움이 필요한 시기에 적절한 투자를 해 두면, 나중에 그 대가가 크게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이원미술관 전속 작가로 계약을 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죠.”

    이원의 예술적인 안목은 잘 다듬어진 편이었지만 재능은 비참할 정도로 부족했다. 석고상 하나를 수십 장 되풀이해서 그릴 만한 근성은 있었지만, 고작 선 몇 개로도 드러나는 번득이는 감각은 도저히 얻을 수 없었다.

    이원은 소위 ‘천재 화가’들의 초창기 작품들을 찾아보며, 신께서 극히 일부의 사람에게만 창조적인 영감과 재능을 허락하셨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영역 밖에 있었고, 오로지 ‘신의 선물’로서만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었다.

    이원은 그것을 질투하는 대신 그들이 부여받은 재능을 꽃피우도록 도울 수 있음을 기꺼워하기로 했다.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보티첼리, 다 빈치가 신에게 눈부신 재능을 받았다면, 메디치가의 사람들은 그 재능을 꽃피우게 돕는 자로서 돈과 권력을 허락받은 것이라 믿었다.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보티첼리, 다 빈치는 살아생전 메디치의 그늘에 기생했지만, 이제는 메디치가 그들의 이름에 기생한다. 그것이 예술과 돈의 속성이다. 이원이 메세나재단의 활동에 심혈을 기울였던 이유 역시 그것이었다.

    다행히 그가 이끄는 세경그룹은 소리 소문 없이 순항 중으로, 메세나재단의 활동을 지원하는 데 큰 부족함이 없었다.

    이원은 차분한 목소리로 결론을 내렸다.

    “이 학생은 장기적으로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랬다. 다리 위에서, 연습장을 펼치자마자 확신했다. 이 아이는 시류만 잘 타면, 그리고 제대로 된 후원자만 붙으면 대한민국 화단(畫壇)을 훌쩍 뛰어넘어, 한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로 이름을 남길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빛나는 이름에 기생하여 밀레니엄의 시간을 뛰어넘는 자가 될 것이다. 코시모 데 메디치, 로렌초 데 메디치. 고흐의 동생이자 든든한 지지자였던 테오 반 고흐. 낯선 화풍의 신진 화가들을 끝까지 후원해 결국 인상파를 19세기의 유럽 화단의 승자로 이끌었던 폴 뒤랑 뤼엘. 모네, 세잔, 피카소, 마티스를 일찌감치 알아본 모던 아트 컬렉터 세르게이 슈킨. 신이 내린 천재들의 이름 한 귀퉁이에 자신의 이름도 영구히 박제한, 더없이 지혜로웠던 투자자들처럼.

    아마도 그 아이는 약속을 지킬 것이고, 그녀의 놀라운 재능은 시간에 따라 열매를 맺어 내 앞에 창대하게 쌓일 것이다. 훗날 역사책에선 조금 전에 있었던 만남을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혹은 그 아이가 그렇게 몸서리를 쳤던 운명적인 만남이라는 말로 써 놓을지도 모르겠다.

    띠리릿, 띠리리리.

    짤막한 벨 소리가 퍼졌다. 전화를 대신 받은 최 실장이 미간을 구기며 수화기에서 귀를 뗐다.

    “전무님, 전화기 주인 당장 바꾸라고 합니다. 미등록 번호고, 이름과 용건은 대지 않는데…… 전무님 성함도 모르는 걸 보면 기자는 아닌 듯합니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끼리 무슨 용건이 있겠습니까. 받지 않겠습니다.”

    순간, 어떤 남자의 욕설이 고막을 터뜨릴 듯한 기세로 울려 퍼졌다. 시발, 뭐가 어째! 콩밥 처먹기 전에 당장 안 바꿔! 뒤이어 누군가가 울부짖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 아빠! 정말 도둑질한 거 아니야! 나쁜 짓, 안, 했어. 정말 처음 만난 아저씨가, 도와주신 거, 아니 빌려주신 거, 그, 그림, 거짓말 아냐, 아무, 아무 짓도, 아악, 악! 아니야, 악, 정말이야! 잘못했어요. 손 자르지 마, 안 훔쳤어, 이상한 짓도 안, 아빠, 아빠아아!

    갑자기 전화가 탁 끊어진다.

    이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머리가 핑그르르 돌면서 잠이 확 달아난다.

    ……제기랄. 아까 꿈자리가 사나웠던 게 이 때문이었구나.

    ‘물에 빠지는 걸 잡아만 놓으면 될 줄 아셨죠? ……돈만 주면 문제가 다 해결될 줄…….’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라면 애초에 생명의 다리 같은 데 찾아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아저씨는 나를 왜 살렸어요? ……아저씨가 하느님이라도 된 거 같았어요?’

    꿈속에서 들었던 날카로운 목소리가 화살처럼 가슴에 박힌다.

    ……하느님 맙소사. 나는 대체 그 아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지?

    “무슨 일이십니까, 전무님? 혹 아는 사람입니까?”

    눈앞에 있는 두 사람의 낯빛도 새하얗게 변했다. 이원은 어찔어찔하는 머리를 짚으며 빠르게 말했다.

    “아까 만났던 그 학생입니다. 최 실장, 얼른 그 번호로 전화해서 그 아이가 도둑질한 게 아니고, 제가 500만 원 준 게 맞다고 확인해 주세요. 그리고 바로 경찰에 신고하세요. 지금 당장.”

    “예. 전무님.”

    침착하려고 애를 썼지만 입술이 부들부들 떨려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띠르르르, 띠르르르, 벨 소리가 길어지다가,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사오니, 하는 안내 멘트로 넘어간다. 입속이 바작바작 마르기 시작했다.

    손 자르지 마, 라니. 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당사자는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그 아이는 신의 선물을 받고 태어난 게 틀림없다. 그 재능이 너무나 선명해서 당황스러울 정도인데, 주변 사람들은 다들 눈이 멀었나? 그저 방치하기만 해도 저절로 개화할 만큼 재능이 넘쳐흐르는데, 제대로 키워 내기만 하면 척 클로스나 론 뮤익 같은 세계적인 하이퍼리얼리즘 작가로 대성할 수도 있는데, 그런 아이의 손을 자른다고?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그녀의 부모에 대해서 살심이 치밀었다. 입술을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쇠 맛이 혀로 스며들었다.

    “……청소년 보호 센터, 제기랄, 학교에도 바로 연락하세요. 선광여고 3학년, 아니, 졸업했나? 그래도 일단 학교로, 아니, 여기 경호원을 바로 보내는 게 나을까요?”

    “전무님, 진정하십시오. 경호원보다 경찰에 신고하는 게 빠를 겁니다. 최 실장!”

    “바로 신고하겠습니다, 전무님. 혹시 이 학생 인적 사항 아십니까?”

    이원은 연습장을 확확 뒤져 우연이 써 놓은 연락처와 주소를 찾아냈다. 이가 갈린다. 이 전화가 아니었으면, 나는 어쭙잖은 동정심, 혹은 무의식적인 계산이 가져온 결과를 끝내 모르고 오랫동안 흐뭇한 우월감에 잠겨 있었을 것이다.

    “등촌동 이수 아파트 101동, 거기 관리실 번호부터 알아내서 전화하세요. 403호! 아파트 관리인한테 지금 올라가서 벨부터 누르게 하세요! 이웃 주민 신고 들어왔다고 하고, 아이 격리부터 시키세요. 당장!”

    일회성 호의, 싸구려 동정은 결과가 좋지 않다, 그 말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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