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누드-4화 (4/47)
  • 4. 다섯 개의 초상화

    긴 이야기를 듣는 내내 아저씨는 어딘가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는 눈이 살짝 커지거나 눈썹이 꿈틀거렸고, 부모님과 친구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면, 숨이 잠시 거칠어지거나 커피 잔을 쥔 손가락 끝이 새하얗게 변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중간에 끊지는 않았다.

    우연의 이야기가 끝나자, 아저씨는 그제야 눈을 감고 가는 한숨을 쉬었다.

    “진우연 씨.”

    “네.”

    “혹시 경찰에 신고를 하거나 선생님에게 도움을 받아 본 적 있어요?”

    “……아뇨.”

    “그래요.”

    아저씨는 왜 그러느냐 묻지 않았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리고 팔을 내밀어 어깨만 조심스럽게 두드려 주었다. 톡톡. 톡톡톡. 우연은 그 손길에 깃든 위로의 의도보다 ‘왜 신고하지 않았는지’ 따지지 않는 것이 더 고마웠다. 목숨 걸고 신고할 용기가 없었다고, 그것마저 죄인처럼 변명해야 한다면 너무 비참할 것 같았다.

    신고는 말 그대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경찰들은 가정의 파탄보다 가정의 회복을 당연히 우선시했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이 112, 1366 번호를 몰라서, 손가락이 부러져서 신고를 못 하는 게 아니었다. 신고를 해도 결국 훈방 조치 된 엄마 아빠를 그날 저녁 집에서 다시 마주해야 한다. 우연은 집으로 돌아간 그들이 눈물로 반성하며 그 후로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감동적인 해피 엔딩을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아저씨, 그런데 저, 엄마 말대로 정말 사이코패스인지도 몰라요.”

    아저씨가 시선을 조용히 맞댄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그가 소리 없이 묻는다.

    우연은 어느 순간부터 엄마의 고통에 공감하기가 어려워졌다. 때리는 아빠를 말리지도, 고통스러워하는 엄마를 위로하지도 못했다. 어릴 때는 엄마를 끌어안고 같이 울거나, 엄마 때리지 말라고 아빠 다리에 매달리다가 같이 맞았던 것도 같은데, 지금은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숨어서 폭풍이 지나가기만 기다릴 뿐이었다. 알록달록 물든 엄마의 얼굴이나 자신의 몸뚱이를 보며, ‘샤갈처럼 화사하다’고 생각했고, 그때마다 확실히 내가 제정신은 아니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그 당시의 공포와 숨 막히는 느낌을 덮어 버릴 수 없었다.

    ‘엄마가 이렇게 맞는데 넌 뭐 하고 있었어! 내가 눈앞에서 칵 뒈져야 직성이 풀리겠지!’

    우연은 ‘아빠가 죽었으면 좋겠다.’ 생각하기도 했고, 어떤 때는 ‘엄마랑 아빠가 둘 다 죽었으면 좋겠다.’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인 평균 수명은 83세나 되었고, 엄마 아빠는 너무 젊은 데다 둘 다 지나치게 건강했다. 좀 억울하긴 해도 자신이 죽는 게 제일 쉽고 간단할 것 같았다.

    강도가 들어와 엄마나 아빠를 죽이는 상상도 해 보았다. 핏자국으로 엉망이 된 집의 풍경을 떠올려도, 두 사람이 칼에 난자당한 채 널브러진 광경을 상상해도, 아무 느낌이 없었다.

    정말 그런 상황이 되면 난 무서울까, 안심할까, 개운할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생각을 접었다. 어떤 결론이 나올지 두려웠다. 그 강도가 혹시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달콤한 상상은 더욱 무서웠다.

    그래서 우연은, 엄마가 ‘저 눈깔 좀 봐. 네가 무슨 생각 하는지 모를 줄 알아?’, ‘솔직히 말해 봐……. 지금 나 죽이고 싶지? 그래 안 그래? 이 사이코패스야.’ 하고 속삭이듯 중얼거릴 때마다, 한 번도 부인하지 못했다.

    “엄마가 좀 심하게 돌팔이신데……. 아니라고 싸워도 될 걸 그랬어요.”

    이야기를 듣던 아저씨가 눈썹을 찌푸리며 단언했다.

    “네? 아저씨가 그걸 어떻게 아세요?”

    “남을 죽이는 상상만으로도 겁에 질리고, 차근차근 계획 잘 잡아서 복수하는 대신 울면서 한강에 뛰어오는 사람이 어떻게 사이코패스가 돼요? 엄마가 뇌 과학자도 의사도 아닌데, 진우연 씨가 돌팔이 진단을 너무 심하게 믿었네요.”

    “그치만, 아, 아저씨도 의사 선생님은 아니시잖아요. 의사 선생님이세요?”

    “아, 의사는 아니에요. 물론 나도 돌팔이지만 그래도 사이코패스 범죄자들을 연구한 교수님한테 주워들은 내용이니 좀 덜 돌팔이죠.”

    우연은 멍청한 얼굴로 눈만 깜박거렸다. 사이코패스가 아니라는 말은 반가웠지만, 뭔가 수상하긴 마찬가지였다. 대체 이 아저씨는 뭐 하는 사람이기에 ‘사이코패스 범죄자를 연구한 교수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을까? 그러고 보면 가족 살인이나 유혈 낭자 칼부림 이야기에 이렇게 태연한 것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아저씨 경찰이에요?”

    “아니요.”

    “조폭이에요?”

    “……아니에요.”

    아저씨는 눈썹을 찡그리며 짧게 웃었다. 재미있어서 웃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뭐 하시는 분이에요?”

    “그냥…… 요 근처에 있는 건설 회사 다녀요.”

    우연은 눈을 깜박이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까지는 살벌하고 칙칙하게 보이던 빌딩 숲이었는데, 아저씨가 근무한다는 말을 들으니 갑자기 건물에 발그레하게 생기가 도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근처 어떤 빌딩일까. 무슨 일을 하실까. 난데없는 궁금증이 꼬리를 물었지만,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우연은 어릴 때부터 이리저리 4차원으로 튀는 호기심이 무척 많았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냈을 때 좋은 반응이 돌아왔던 적이 없었다.

    아저씨의 신중한 목소리가 들린다.

    “그럼, 진우연 씨 어머니가 정신 분열, 아니 조현병이라고 했던 것도 의사 선생님 정식 진단은 아닌 거죠?”

    “네.”

    “조현병이면 심각한 병인데 왜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을까요?”

    “병원 기록으로 남으면 나중에 취직도 못 하고 시집도 못 간다고 했어요. 그림만 안 그려도 훨씬 나아질 거라면서요.”

    “아아, 저런. 시집가는 게 그리 중요해서?”

    아저씨가 헛웃음을 짓는다. 그 짧은 웃음에서도 아저씨가 엄마의 말을 얼마나 황당하게 생각하는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내 생각인데, 어머니는 사실 우연 씨를 조현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홧김에 나오는 대로 말했을 수도 있고, 겁을 주면 딸이 좀 고분고분해지지 않을까 해서 그랬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어릴 때부터 그런 말을 계속 들으면 당사자는 정말로 믿게 되겠죠.”

    너무 기가 막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우연이 마포 대교까지 끌려온 가장 큰 이유는 암담한 미래 때문이었고, 그 암담함 중 큰 이유가 바로 정신 분열증이라는 말이었다. 그럴 리가 없어, 그게 사실이면 너무너무 좋겠지만, 설마 그럴 리가.

    아저씨가 연습장을 들어 올린다.

    “이 그림들은 보고 그린 건가요, 기억해서 그린 건가요.”

    “기, 기억해서…….”

    “그럼 떠올린 장면이 실제 눈앞에 있는 게 아니고 기억이라는 인식은 있어요?”

    우연은 어이없는 눈으로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저씨의 얼굴은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했다.

    “당연하죠. 제가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에요.”

    “혹시 기억을 떠올리는 거 말고, 실제로 없는 물건들이 보이거나, 없는 사람이 보이거나 그런 적은?”

    “아뇨. 그런 적은 없는데요.”

    “혹시 환청은? 아무도 없는데 엄마 아빠나 친구들이 막 욕하는 소리라든가.”

    “그런 건 없는데요……. 실제로 욕을 처듣죠. 차라리 그 욕이 환청이면 좋겠어요.”

    후우, 아저씨가 눈썹을 찌푸리며 긴 한숨을 쉬었다. 왜인지 모르지만 깊은 분노가 느껴졌다.

    “우연 씨, 내가 보기에 우연 씨는 조현병이 아니라 특별한 장면 기억력을 갖고 있는 거 같아요. 물론 내가 정신과 의사는 아니지만, 어쨌든 조현병 증세 같지는 않아요.”

    “네? ……아저씨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우연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설마?

    “조현병 환자들은 환각과 실재를 구별하지 못해요. 이렇게 제대로 된 대화를 이어 가지도 못하고, 그림도 제대로 못 그려요. 하물며 하이퍼리얼리즘 회화라니, 말도 안 돼.”

    “그, 그렇지만, 갑자기 매일 보던 애들이 막 이상하게 느껴지고, 다른 세계에 떨어진 거 같고 그럴 때도 있는데요?”

    “나도 매일 보던 장소나 사람들이 낯설고 이상하게 느껴질 때가 가끔 있었어요. 낡은 흑백 사진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고. 다른 세계에 떨어진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그런 건 환각이 아니라 비현실감이라고 들었어요.”

    “……예? 아저씨도요? 정말이에요? 진짜요?”

    아저씨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담해 주신 선생님이, 스트레스 때문에 일시적으로 그럴 수 있다고 했어요. 물론 비현실감도 좋은 증세는 아니지만, 조현병처럼 심한 것도 아니고 불치병도 아니에요. 스트레스가 사라지면 호전되고, 주변에 물어보니 힘들 때 이런 증세를 겪은 사람이 의외로 꽤 있었어요.”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비현실감? 정신 분열증인지 뭔지 그거 아니라고?

    의사도 아닌 사람의 말을 바로 믿기는 어려웠지만, 그렇게 따지면 사실 엄마도 의사는 아니었다. 게다가 눈앞에 멀쩡하게 서 있는 아저씨도 겪었고, 다른 사람들도 종종 겪는다는 말을 들으니 갑자기 안심이 되었다.

    “어, 어……?”

    갑자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등을 짓누르던 바윗덩어리 하나가 갑자기 사라진 건데, 웃음이 나와도 시원찮을 판에 눈물만 미친 듯이 쏟아졌다.

    “…….”

    소리도 기척도 없이, 눈앞으로 손수건이 내밀어진다. 네 귀가 칼날처럼 반듯하게 접힌, 검고 흰 프랙털 패턴의 손수건이었다.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는 남자들이 있긴 있구나. 설마 이런 것까지 옷이랑 색깔 맞춰서 갖고 다니는 걸까. 이런 상황에서 드는 생각마저 병신 같았다. 손수건에 얼굴을 파묻자 목도리에서 옅게 풍기던 향기가 훅, 머릿속으로 치고 들어온다.

    “그렇게 걱정되면 검사를 받아 보면 되지. 원한다면 이쪽 전문 선생님을 소개해 줄 수도 있어요. 아마 큰 이상은 없을 거예요. 아직 어린 학생이 속으로만 이리 앓으면 어떡해.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어요.”

    우연은 그렇게 한참 흐느꼈고, 아저씨는 말없이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아저씨는 조용한 기다림에 익숙한 것 같았고, 침묵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신비한 재능이 있었다.

    흐느낌이 잦아들 때가 되자, 아저씨가 조금 머뭇대며 입을 열었다.

    “음, 그런데 물어볼 게 하나 있는데.”

    “……네.”

    “아버지의 성교육이라는 게…… 어떤 건지 말해 줄 수 있어요?”

    어찔했다. 아까 대충 휙휙 넘기는 것 같더니 연습장에 써 놨던 말을 죄다 읽었나 보다. 우연이 당황해 하자 아저씨는 난감한 듯 눈썹을 찌푸리더니 짧게 한숨을 쉬었다.

    “……미안. 불편하면 말 안 해도 돼요.”

    아저씨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늘이 짙게 내려앉은 눈가와 실핏줄이 터진 눈은 많이 피곤해 보였지만, 깊고 어두운 갈색 홍채는 여전히 부드럽고 따뜻했다. 우연은 잠시, 아주 잠시 그 따뜻함에 넘어가고 싶었다.

    “별건 아니에요.”

    하지만 우연은 넘어가지 않았다. 최후에 남은 이성 한 자락이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 지경까지 비참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짙은 갈색 홍채가 우연을 조용히 응시한다. 할 말이 많은 눈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손을 뻗어 핫초콜릿 컵을 꼭 쥐고 있는 우연의 손을 가만히 토닥일 뿐이었다. 그래요. 그래요. 그 손길이 너무 조심스러워서 우연은 아저씨가 자신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의 집안일에 함부로 관여하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안타까우니까 조금만 얘기할게요.”

    “네.”

    “진우연 씨는 그림에 재능이 있어요. 물론 사람들이 그 그림들을 싫어하는 이유는 알 것 같아요. 자기도 인정하고 싶지 않던 속마음이 갑자기 모든 사람 앞에 까발려지면, 부끄럽기도 하고, 화도 나지 않겠어요?”

    “나쁜 재능인가요?”

    “아니, 멋진 재능이에요. 신의 선물이죠. 예술에는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도저히 성취할 수 없는 영역이 있어요.”

    아저씨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단언했다.

    “계획대로 미대에 가면 좋을 것 같아요. 미대에서는 우연 씨의 능력을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을 거예요. 그림도 마음껏 그리고 상담 치료도 받으면 마음도 훨씬 안정될 거고, 기숙사 생활이라고 하니 집에서 벗어날 좋은 기회가 될 거예요.”

    다시 눈 안쪽에서 욱신, 통증이 치밀었다. 그것이 좋은 기회라는 걸 몰라서 마포 대교까지 갔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이 등록 마감일인데요. 아빠가…… 십 원 한 푼도 안 준다고……. 구, 국가 장학금도, 안 나오는 학교라는데, 학……비랑 기숙사비만 498만 원이고…….”

    우연의 흐느끼는 말에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안쪽 주머니에서 손바닥 정도 되는 작은 종잇조각을 꺼냈다. 저게 뭐지? 메모지인가? 무슨 말을 써 주려고? 우연이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아저씨는 탁자에 종이를 놓고 무언가를 적어 넣기 시작했다.

    잠시 후 눈앞으로 작고 얇은 종잇장이 다가왔다.

    “자, 일단 받아요.”

    “이, 이게 뭔가요?”

    우연은 두 손으로 종이를 받았다. 글자를 읽는데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 이게 뭐야? 너무 황당하니 글자를 아무리 되풀이해 읽어도 여전히 정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일금 오백만 원정 ₩5,000,000」

    금액이 적혀야 할 부분이 공란으로 남아 있는 수표였고, 아저씨가 적어 넣은 것은 ‘오백만 원정’이라는 글자와 숫자였다. 그리고 그 아래쪽으로 한이원, 이라는 흘려 쓴 듯한 이름과 서명이 꼬리처럼 달려 있었다.

    “나도 주제넘은 짓이란 건 아는데, 그래도 진우연 씨에게 어떻게든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상하다. 뭔가 얼떨떨하고 정신이 없다. 지금 다시 다른 차원의 세계로 이동해 버린 걸까? 눈앞에 보이는 핫초콜릿과 나무 탁자, 김이 서린 유리창, 그 너머로 보이는 빌딩 숲, 풍경이 달린 낡은 유리문, 그리고 아저씨의 모습이 무서울 정도로 낯설게 느껴졌다.

    “이거…… 돈 맞아요?”

    “맞아요. 입학금 넣는 계좌에 그대로 입금하면 돼요.”

    “아저씨…… 돈 많아요?”

    얼빠진 말이 튀어나오자마자 아저씨는 픽 실소를 터뜨렸다. 아, 이런 말은 해서는 안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 따라왔다.

    하지만 우연은 고맙다는 말도, 왜 주느냐는 말도 하지 못했다. 눈물이 다시 폭포처럼 쏟아졌던 것이다. 우연은 입을 벌린 채 그를 올려다보며 하염없이 울었다.

    왜요? 왜, 왜 주시는 거예요? 아저씨는 나 오늘 처음 만났는데? 아저씨는 내 이름밖에 모르고, 어디 사는지도 모르고, 어떤 애인지도 모르는데? 5백 원도 아니고, 5천 원, 5만 원도 아니고, 불쌍하다고 턱 쥐여 주기엔 너무 큰돈 아니에요?

    아저씨 정말 뭐 하는 사람이에요? 위기에 처한 누군가를 구하는 사명이라도 받았어요? 왜 이렇게 쓸데없는 곳에 돈을 막 뿌리고 그래요?

    우연의 소리 없는 질문 무더기에 아저씨는 덤덤한 어조로 대답했다.

    “살다 보면, ‘이 순간에 이 일은 꼭 해야 하는구나.’ 하고 확신이 드는 일이 있어요. 그리고 세상에선 전혀 모르는 사람끼리 도움을 주고받는 일들도 종종 일어나요. 물론 지금 500만 원보다 더 필요한 건 진우연 씨의 용기겠지만.”

    수표를 쥔 두 손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떨린다. 저 아저씨는 진심이다. 알량한 동정심이나 우월감 한 자락 없이, 우연이 비굴함을 느끼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용기를 강요하는 건 아니에요. 어느 쪽이든 원하는 길을 선택할 기회가 생겼다고만 생각하면 돼요. 받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도 괜찮아요. 내가 데려다줄 테니까.”

    집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등으로 소름이 쫙 끼쳤다.

    안 돼. 절대 안 돼.

    이제 집에 돌아가면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재수가 좋으면 몸이 먼저 죽을 것이고, 재수가 없으면 정신이 먼저 죽을 것이다. 재수가 더럽게 없으면, 내 인생이 산 채로 썩어 가는 꼴을 관찰하며 몇십 년에 걸쳐 서서히 죽어 가게 될 것이다.

    이런 기회는 아마 다시 오지 않을 거다.

    우연은 이 순간의 결단이 남은 평생을 바꾸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위험하고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결정이었다. 아빠는 가려면 네 돈으로 가라고 했지만 정말 이 돈으로 서림예대에 입학해 버린다면 어떻게 반응하실지 알 수 없었다.

    무서워서 목이 졸리는 것 같았다. 죽으려고 결심했을 때는 죽을 때 얼마나 아플까 하는 것만 무서웠는데, 살아남으려고 결심하니 모든 것이 무서워서 죽을 지경이었다.

    “저, 아저씨.”

    “음?”

    아저씨가 시선을 맞추며 웃는다. 숨이 턱 막힌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선하게 웃을 수 있을까.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눈부시게 아름다워 보일 수 있을까. 가슴이 꽉 막히는데, 왜 막히는지 알 수 없었다. 슬픈 것도 아니고 아픈 것도 아닌데 눈시울이 자꾸 시큰대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아팠다. 우연은 한마디씩, 속삭이듯 물었다.

    “엄마 아빠가, 가지 말라는 길로, 억지로 가면…… 저는…… 어떻게 될까요?”

    아저씨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접힌다.

    “진우연의 길이 새로 생기겠죠.”

    진……우연의 길?

    진우연의 길. 나의 길. 우연은 입속으로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너무나도 상식적이고 당연한 말이 가슴을 후려갈겼다. 아빠 엄마가 멋대로 파헤치고 꺾고 뒤집는 길이 아닌, 나를 위한 길,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더 밝아지고 넓어지는 진우연의 길.

    방법은 어떻게든 생길 거야. 마음만 먹는다면, 차근차근, 하나하나, 어떻게든.

    첫 번째 걸음만 디디면, 두 번째 걸음은 더 쉬워질 거야. 세 번째는 더, 더 쉬워질 거야.

    두 손으로 수표를 꼭 쥐었다. 입술이 벌벌 떨리는 것이 불안 때문인지 흥분 때문인지 구별도 되지 않았다.

    “아저씨, 저 이거 못 갚는데 어떡해요?”

    “갚으라고 빌려주는 거 아니에요.”

    아저씨의 덤덤한 대답에 오히려 겁이 덜컥 났다. 무슨 카드론, 무슨 무슨 머니, 돈 빌려준다는 광고는 다 사기야. 덥석 받았다간 나중에 어디로 끌려가서 눈깔 뽑히고 콩팥 잘리고 심장 떼여서 죽는 거야. 아빠 엄마의 위협적인 목소리가 왕왕거렸다.

    하지만 우연은 그 목소리에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진우연의 길로 한 걸음 내디디려면, 엄마 아빠의 말이 아닌, 오늘 처음 만난 이 아저씨의 말을 믿어야 했다. 이 호의가 순수한 것이라고 믿어야 했다. 지금껏 배운 상식대로라면 생판 모르는 사람의 호의는 절대 믿어선 안 되는데, 잘 아는데, 그래도 우연은 간절히 믿고 싶었다.

    “그래도, 이 큰돈을 어떻게 공짜로 받아요? 이, 일단 너무 이상하고, 무섭고, 저, 저도 거지는 아닌데…… 그게.”

    정신이 없으니 말이 걸러지지 않고 횡설수설한다. 아저씨는 가늘게 한숨을 쉬며 조금 맥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그렇게 이상하고 무서운 사람으로 보여요?”

    “아, 아뇨, 절대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하긴, 오늘 처음 봤으니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래요. 정 갚고 싶으면,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천천히 갚아요. 그럼 되겠죠?”

    “아, 아니에요! 돈 많이 안 벌어도, 조금만 벌어도 갚을게요. 대학 가면 알바도 하고, 아, 그림도 팔아서 갚을게요.”

    아저씨의 한숨 소리가 좀 더 길어진다.

    “아르바이트로는 학비는 고사하고 생활비 대기도 정신없을 텐데, 그림 팔아서 어떻게 갚으려고요?”

    “그래도, 싸게 내놓으면 팔리지 않을까요? 그림 한 장에 얼마쯤 하는지 모르지만…….”

    “뭐, 미대 졸업 전시회쯤 되면 컬렉터들이 가능성 있어 보이는 작품을 가끔 사 두기는 한다고 들었어요. 아주 가끔. 호당 2만 원이나, 잘 받으면 호당 3만 원 정도? 10호짜리 그림이면……. 아, 그림 호수 몰라요? 4절 스케치북 비슷한 사이즈 그림이면 2―30만 원쯤 받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재학생 그림은 시세도 없어요. 그걸 누가 사.”

    아저씨는 의외로 미술에 관심이 많은 듯했다. 우연은 너무 속상하고 안타까워 조금 더 우겨 보았다.

    “그, 그래도, 반값 세일 하면? 그럼 오십 장 팔면 500만 원 나오잖아요.”

    “갤러리 대관료나 판매 수수료도 있는데? 수수료 막 절반씩 떼어 주고 그러는데?”

    “그, 그럼…… 백 장? 저, 그, 그림 엄청 빨리 그릴 수 있어요. 아, 아니면…… 갤러리 말고 인터넷에서 팔면 되지 않아요? 경매 사이트 같은 데서…….”

    “경매 사이트 어디요? 서울 옥션? 케이 옥션? 그런 데서 전시회 한번 안 한 학부생 그림을 팔…….”

    하지만 뭔가 신랄한 말을 부다다다 내뱉을 것 같던 아저씨는 우연이 겁먹은 얼굴로 어깨를 움츠리는 것을 보자마자 금방 고개를 저으며 이마를 짚었다.

    “미안해요. 이런 말을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정말 갚으라고 주는 돈 아니에요. 학교 다니는 것도 힘든데 왜 그런 고생을 사서 하려고 해.”

    “…….”

    “정 부담스러우면 내가 우연 학생 그림을 사 줄 테니까, 그걸로 갚는 거로 해요. 그건 어때요?”

    갑자기 눈앞으로 구원의 서광이 촤르르 내려오는 것 같다. 우연은 아저씨가 말을 무르기 전에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네네! 얼마든지 말씀만 하세요! 아저씨가 원하는 그림은 다 그려 드릴게요.”

    “그래, 그래요. 알았으니까…….”

    “저, 수채, 아크릴, 유화도 배웠어요. 인물화, 풍경화, 정물화도 잘 그릴 수 있어요. 초상화 같은 거 원하시면, 네, 저 인물화 잘해요! 좋아하시는 포즈, 구도, 분위기, 다 맞춰서 해 드릴게요! 백 장이든 천 장이든 말씀만 하세요. 정말이에요!”

    가슴이 둥둥 뛰기 시작했다. 그렇다. 초상화! 저 아저씨라면 아주 멋진 초상화가 나올 것이 분명하다. 멋진 그림도 그리고 빚도 갚고. 이거야말로 꿩 먹고 알 먹기 아닌가.

    아저씨는 보면 볼수록 매혹적인 피사체였다. 희고 깨끗한 피부, 선이 수려하면서도 단정하게 조화를 이룬 이목구비, 저 절제된 표정에 진짜 감정이 담기면 어떤 그림이 나올까. 사람을 빨아들이는 듯한 저 황홀한 색깔의 눈동자를 그려 볼 수만 있다면.

    특히 완벽한 비율과 양감의 조화를 이룬 저 몸을 그려 보고 싶었다. 볼수록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몸이라는 확신이 왔다. 허여스름한 모조 석고상 따위가 아닌 살아 움직이는 모델의 전신상. 대형 캔버스에 제대로 그린다면 굉장한 것이 나오리라는 감이 왔다.

    “물론 아무 데나 되는대로 걸기엔 풍경화나 정물화가 좋겠지만요, 이야기를 상상하게 만드는 건 역시 인물화죠! 아저씨 초상화들로 가득한 방을 상상해 보세요! 그, 루이 몇 세더라, 베르사유 궁전에 살던, 로커처럼 파마머리를 찰랑찰랑 흔드는 그 왕이 된 것 같지 않겠어요? 그럼 방을 둘러볼 때마다 기분이 엄청 좋겠죠!”

    “좋지 않아요. 동서남북이 내 얼굴로 꽉 찬 방이라니, 그런 무서운 곳이 어디 있어요.”

    아저씨가 낮게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그리고 루이 14세는 대머리고, ‘찰랑찰랑’은 가발이었어요. 게다가 똑같은 인물화만 줄줄이 그리다니, 그게 말이 돼요?”

    “말이 왜 안 돼요? 모네 할아버지도 똑같은 수련 그림을 수백 개나 그려 댔는걸요. 사람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꽃보다 훨씬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다고요.”

    우연의 반박에 아저씨가 눈을 둥그렇게 뜬다.

    “그래도, 음, 벽에, 초상화를 100개나 걸려면 집이 베르사유 궁전처럼 커야 할 텐데 우리 집은 콩알만 해서…….”

    “그, 그럼…… 베란다나 창고 같은 데 쌓아 두셔도 되지 않나요? 그것도 안 되면 침대 밑이나, 소파 밑이나…….”

    “베란다? 창고? 침대 밑? 그림 다 망가질 텐데?”

    우연은 풀이 죽었다. 왜 자꾸 안 받으시려고 하는 걸까?

    “아, 저기, 혹시 아저씨 초상화도 연습장 그림처럼 무섭게 비틀어서 그릴까 봐요?”

    “…….”

    “안 그럴게요. 절대 안 그래요. 아저씨처럼 멋진 모델을 이상하게 그렸다간 천벌을 받아서 열 손가락 열 발가락, 손모가지 발모가지 죄다 부러지고 말 거예요.”

    “아니, 왜 이렇게 말이 과격해…….”

    푸, 흐흐흐흐, 드디어 포기했는지 아저씨가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내민다.

    “그래요, 알았어요, 알았어. 그래도 5만 원짜리 초상화 100점은 양심상 너무 후려치는 것 같으니까, 100만 원짜리 초상화 다섯 점으로 바꿔서 퉁칩시다. 크기는 20호 이상, 오케이?”

    우연은 손가락을 마주 거는 대신 아저씨를 시무룩하게 올려다보았다. 아저씨는 이 약속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저놈의 손가락을 보아하니 아주 자알 알겠다.

    어른들의 약속, 특히 이렇게 엄청난 돈이 걸린 계약을 새끼손가락으로 하는 법은 없다. 아직 사회 경험이 없는 우연도 그 정도는 안다. 거지한테 적선하거나 호구에게 작정하고 돈 뜯는 게 아니고서야.

    물론 우연은 거지가 될 생각도 없었고, 아저씨를 호구로 만들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이러시면 안 되죠, 아저씨. 이런 건 제대로 계약서를 써야죠.”

    “계약서?”

    아저씨는 순간적으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얼른 고개를 돌리고 짧게 헛기침을 했다. 자존심이 확 상한 우연은 목소리를 높였다.

    “고등학생이라고 무시하세요? 키가 조금 작아서 그렇지, 저도 아저씨랑 똑같은 성인이에요!”

    “아니, 무시한 건 아니고, 굳이 그럴 필요가…….”

    “자, 자꾸 이런 식으로 나이 어린 사람들을 무시하니까, 중년 아저씨들이 꼰대니 아재미 뿜뿜이니 그런 말을 듣는 거예요.”

    아저씨의 입가가 순간적으로 굳는다. 어떡해. 괜히 말했다. 조금만 참을걸. 심장이 쿵쿵대며 뛴다.

    하지만 그는 화를 내는 대신 시큰둥한 얼굴로 연습장을 내밀었다.

    “……허 참, 그럼 파릇파릇한 진우연 씨가 써서 주시죠, 계약서.”

    우연은 꽃분홍색 형광 볼펜을 꺼내 아저씨를 스케치한 그림 뒷장에 계약 내용을 적었다.

    「서울 선광여고 3학년 7반 15번 진우연은

    한이원 아저씨에게 초상화를 다섯 개 그려 준다. (20호 이상)」

    한 문장을 적고 나니 다음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진땀을 흘리며 머뭇거리자 머리 위에서 “주민 등록 번호, 주소, 날짜, 서명. 주민 번호는 외우고 있죠?” 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목소리에 조금 웃음기가 섞였다. 알아요 아저씨. 나도 그 정도는 안다고요. 계약서 처음 써 보면 좀 헤맬 수도 있죠. 고개를 폭 숙인 우연은 창피한 것을 덮어 버릴 만큼 최대한 예쁘게 사인을 했다.

    “좋아요. 그럼, 이 연습장은 내가 보관할게요.”

    아저씨는 군말 없이 계약서를 받았다. 우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심스럽게 손에 쥐어진 것을 내려다보았다.

    일금 오백만 원정.

    주먹을 꽉 쥐었다. 수표 속 글자가 드디어 현실감을 갖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집에 들어가기 전에 은행에 들를 것이다. 그래서 이 돈으로 입학금을 낼 것이다. 그리고 두 달 후에 그렇게나 꿈꾸던 서림예대에 입학할 것이다. 4년 동안 그곳에 틀어박혀 좋아하는 그림만 원 없이 징글징글하도록 그릴 것이다. 이것을 기회로 운 좋게 아빠 손에서 벗어나게 되면, 이제 한강에서 끈 없는 번지 점프를 하는 대신 서른, 마흔, 혹은 그 너머까지 어쩌면 재미있게, 어쩌면 신나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이후에 일어날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면 돼.

    그러니까 지금은 여기까지. 딱 여기까지만.

    우연은 두 손으로 수표를 꼭 쥔 채 고개를 들었다. 하얗게 녹아 가는 마시멜로 위로 짠물이 떨어졌다. 통, 통통. 이번에도 아저씨는 울지 말라는 말 대신 눈물이 멈출 때까지 조용히 어깨만 토닥여 주었다.

    고맙습니다, 아저씨. 정말 고맙습니다.

    우연이 깊이 고개를 숙이자 아저씨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인사를 받아 주었다. 그는 이런 작은 동작까지도 품위 있고 아름다웠다.

    우연은 문득, 아저씨가 왜 마포 대교에 와야 했는지 궁금해졌다.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불쑥불쑥 나타나는 어벤져스 히어로들이나 성냥팔이 소녀를 한껏 행복하게 해 주었던 환상이 아니고서야, 저 아저씨도 이렇게 추운 날 마포 대교 위에 서 있어야 했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아저씨, 뭐 하나 여쭤봐도 돼요?”

    “음? 그래요.”

    초콜릿색 홍채가 사르르 눈꺼풀에 잠기면서 눈가에 웃음이 가득 스며든다. 주변은 어느새 달콤한 초콜릿 향기로 가득해졌다.

    “아저씨는 무슨 고민이 있어서 오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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