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누드-3화 (3/47)

3. 증오를 유발하는 그림

그림 그리는 것이 좋았다. 어릴 때부터 사물을 똑같이 그릴 줄 알았다. 미술 학원에 다닌 것도 아닌데 구도가 좋다는 말, 형태를 잘 잡는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표현이 대담하고 감각적이라는 칭찬도 항상 따라다녔다. 사물이나 사람들을 관찰하고 특징을 잡아내는 과정이 특히 재미있었다.

친구들을 관찰하면서, 우연은 ‘입으로 하는 말’과 ‘몸이 하는 말’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간과 눈꼬리의 미세한 주름의 움직임, 눈썹의 떨림, 눈동자의 움직임, 입술 끝의 미묘한 움직임, 손가락과 손의 움직임, 어깨의 각도, 몸의 기울임, 발의 움직임, 그 작은 단서들을 합치면 ‘몸이 하는 말’을 어렵잖게 읽을 수 있었다. 그것들은 대체로 그 사람의 진짜 속마음을 말하고 있었다. 재미있었다.

거기서 멈출걸, 뭐가 좋다고 조금 더 나간 게 문제였다. 더, 더, 조금만 더 집중해서 바라보다 보면 가끔씩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눈앞의 장면이 현실에서 분리되어 붕, 떠오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보이는 것은 분명 익숙한 장소, 잘 아는 친구들인데 이세계에 뚝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반대로, 사물의 윤곽이나 색들이 눈이 아릴 정도로 또렷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색깔은 바글바글 끓어오르듯 선명해지고, 사물의 윤곽선은 파르라니 날이 선다. 컵에 흘러내리는 물방울, 낡은 스웨터 소매에 이슬처럼 조롱조롱 매달린 보풀, 친구의 얼굴에 스며 나오던 땀방울, 뺨의 미세한 솜털, 눈썹의 그림자, 햇빛 속에 부유하던 먼지 알갱이들이 눈이 시릴 정도로 또렷하게 각인된다.

찰칵.

순간, 그 장면은 사진처럼 뇌리에 들이박힌다.

머릿속에는 그렇게 저장된 사진첩이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남들에게는 그런 기억력이 없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자랑스럽다기보다 무서웠다.

우연은 저장된 장면을 떠올리며 그림을 그렸다. 이 정도로 똑같이 그리면 다들 감탄하고, 좋아해 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애처로운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림 좀 그린다 하는 친구들이 앞장서서 우연을 거짓말쟁이로 몰아갔던 것이다. 그들은 이 그림이 트레이싱이라 단언했다.

그렇지만 우연은 자신의 말을 증명할 수 없었다. ‘그려 봐! 우리 눈앞에서 지금 그려 보라고!’ 하는 친구들에게 둘러싸이면 눈앞이 하얗게 되어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우연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집에 와서 펑펑 울며 자신을 거짓말쟁이로 몰아간 친구들의 초상화를 갈기갈기 찢으며 분풀이하는 것뿐이었다. 너무 분하면 칼질도 했다. 나쁜 짓이라는 가책이 일면서도, 꽉 막혔던 가슴이 조금은 뚫리는 것 같아 그만둘 수 없었다. 난도질당하는 그림은 엄마, 아빠, 자신을 미워하던 선생님으로 점점 늘어났다.

묘사 테크닉이 늘어나면서 우연은 좀 더 고차원적인 방법을 찾아냈다. 인물화를 직접 칼질하는 대신 머릿속에서 찢거나 칼질을 한 후 그것을 종이 위로 옮기게 된 것이다. 새로운 복수 방법은 가책이 덜하면서도, 좀 더 영구적이고 세련되게 느껴졌다.

“너 미쳤지! 너 정말 정신이 어떻게 됐지! 엉!”

숨겨 놓은 스케치북 더미를 발견한 엄마는 쇠 갈리는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이 그림은 뭐야! 엄마 아빠 사진에 칼질해서 그려 놓은 거야? 네년이 사람이야?”

“아, 아니야 엄마. 칼질 안 했어. 찢지도 않았어. 그냥,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상상하다 보면 이렇게 보여…….”

“그거 환각이잖아!”

엄마의 입에서 다시 찢어지는 비명이 튀어나오며 우연의 말허리를 끊어 버렸다.

“아아, 환각이라니, 내가 너 때문에 미쳐 죽겠다. 지금까지 속 썩인 것도 모자라서 이젠 정신 분열증이야? 가지가지 한다! 가지가지 해! 이제 어떡해!”

“정……신 분열?”

“실제로 없는 게 똑똑히 보이고, 멀쩡한 게 이상하게 비틀려 보이는 게 환각이야! 빼도 박도 못 하는 정신 분열 증세라고! 나중엔 이상한 소리도 듣고, 칼 들고 자기 귀도 자르고 남도 죽이고 그러는 거야!”

엄마는 그림을 갈기갈기 찢으며 날카롭게 고함을 질렀다.

“우연이 너 그림 그리는 거 당장 집어치워! 그림 그리다 미친 사람이 한둘이야? 너도 정신 병원 끌려가고 싶어? 더 그리면 손모가지 잘라 버릴 줄 알아!”

엄마는 자신의 팔자를 한탄하며 오래오래 울었고, 우연은 파랗게 질린 채 오래오래 떨었다.

그날 우연은 인터넷을 밤새 찾아본 후, 자신의 인생이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포기했다.

그래도 우연은 그림을 계속 그렸다. 다만, 비틀리고 파괴된 형태의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된 후, 그녀의 그림은 좀 더 간접적인 형태로 바뀌게 되었다. 극도로 사실적인 묘사나 기이한 구도만으로 사람들의 내면을 표현하게 된 것이다. 우연은 사람들이 은연중에 드러내는 ‘몸의 언어’를 통해, 그들의 부정적인 감정과 음습한 악의, 비열한 우월감과 열등감 따위를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박제하는 데 집중했다.

실물처럼 정밀하게 그려진 우연의 인물화들은 기괴하고 섬뜩한 사진처럼 보였다. 이제 우연의 그림을 좋아하는 친구들은 아무도 없었다. 처음에는 사진처럼 정밀하고 생생한 그림을 신기해했지만 이내 소름 끼친다, 무섭다, 하는 반응이 돌아왔다. 자신을 모델로 그린 그림을 보고 대놓고 화를 내는 아이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인물을 그리지 못하면 정물을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정물화 역시 이상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원형을 닮았으나 기이하게 변형된 크기와 과장된 구도, 지나치게 선명한 색감과 지독하게 정밀한 세부 묘사로 인해 피사체는 도리어 초현실적인 이질감을 얻곤 했다. 친구들은 우연이 그린 말라비틀어진 꽃잎 하나에서도 맹렬한 적의를 느꼈다. 친구들은 우연을 슬슬 피하거나, 머리에 대고 손가락을 빙빙 돌리며 수군거렸다.

그때부터 우연은 남에게 보여 주지 않고 혼자 그림을 그렸다. 하루 열두 시간 넘게 그림만 그린 적도 많았다. 이제 우연에게 남은 것은 그림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림 그리는 동안은 시간 감각도, 공간 감각도 없었다. 더위도 배고픔도 소음도 잘 느끼지 못해서 현기증, 탈수로 쓰러진 적도 있었다. 그럴 때는 엄마 말대로, 자신이 백치나 정신병자처럼 느껴졌다.

친구들은 더 이상 우연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선생님들도 건드리지 않았다. 우연은 유령처럼 투명한 존재로 변해 갔다. 그림은 현실에서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연습장과 스케치북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는 결계이자 신성한 도피처였다. 우연은 자신의 결계를 선과 색으로 가득 채웠다. 그림이 하나하나 완성될 때마다 마약이라도 맞은 것처럼 아찔한 황홀감이 치솟았다. 우연은 이 황홀한 마약에 점점 깊이 빠져들었다. 그림은 단순한 취미가 아닌, 강력한 진통제이자, 마약이자, 산소 호흡기이자 구명줄이었다.

“우연아, 너 혹시 서림예대에 원서 넣어 볼 생각 있니?”

탈출의 기회는 엉뚱한 쪽에서 찾아왔다. 고3 여름 방학이 끝난 직후, 담임 선생님이 보여 준 것은 경기도 안성에 있는 작은 예술 대학 모집 요강이었다.

“그 학교 회화과에 ‘실기 100% 특별 전형’이 있어. 그거라면 한번 해 볼 만하잖니? 뭐 대학 평가 점수가 좀 나빠서 학자금 융자나 국가 장학금은 당분간 안 될 것 같지만, 아르바이트 같은 거 하면 될 거고.”

담임 교사는 미술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그녀는 우연의 놀라운 재능을 늘 아까워했다. 그녀는 미술실 구석에 숨어 그림만 그리던 우연에게 이론과 회화의 기초를 잡아 주고, 아르쉬 수채 패드나 비싼 물감도 예산 안에서 빠듯하게나마 지원해 주었으며 아크릴과 유화의 다양한 기법도 가르쳐 주었다. 우연은 하나를 알려 주면 열이 아니라 백, 이백을 껑충껑충 배워 나갔다.

“경기도 안성……? 기숙사? 실기 100%?”

다른 내용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성적을 안 본다는 것과 기숙사라는 말만 대문짝만하게 보였다.

그러잖아도 우연은 졸업하면 아빠가 운영하는 체육관에 나가서 일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24시간 아빠와 붙어 지내야 하는 것이다. 그것만 생각하면 목이 졸리는 것 같고 숨을 쉴 수 없었다.

그 일을 안 하겠다고 말이라도 꺼내 보려면, 대학에 입학하거나, 체육관보다 번듯한 직장에 취직이라도 해야 했다. 그래야 씨알이라도 먹힐 것이다.

하지만 변변한 능력도 없고, 숫자에 유난히 약한 데다 늘 주눅이 들어 말 한마디 야무지게 못 하는 처지니 알바 자리 하나 제대로 구할 수 없을 것이고, 모의고사든 학생부든 8등급 9등급으로 도배해 놓은지라 대학도 포기 상태였다.

하지만 실기 100%라면 해 볼 만했다. 입시 미술을 해 본 적은 없었지만, 그림 그리는 건 자신 있었다.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집에서 정당하게 탈출할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직감했다.

“원서 한번 넣어 봐라. 네가 그렇게 그림을 잘 그린다니.”

입시 면담을 하고 돌아온 아빠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말이 나왔다.

“네 담임이, 거 머리 길고 예쁘장한 선생님 있잖냐. 안성 근처 서림예대인가, 거기에 실기로만 입학하는 특별 전형이 있다고, 원서 꼭 넣어 보라더라. 네가 미술 천재라고 하면서.”

담임 교사는 어쩌면 지혜로웠고, 어쩌면 교활했다. 한때 학부모회 임원으로 딸바보 행세를 하던 아빠의 명예욕을 건드렸다.

“입에 발린 말이지만 기분은 좋네. 아무렴 우리 딸이 고졸인 것보단 대졸인 게 훨씬 좋지. 우리 딸 합격하면 내가 콩팥을 떼서라도 보내 주마.”

우연은 그날 밤 베개가 흥건해질 정도로 울었다. 아빠가 허락해 줬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우연이 너, 그 먼 데 꼭 가야겠니? 졸업해 봐야 어차피 이름도 모르는 학교잖아. 그러느니 그냥 아빠 체육관에서 일하지 그래. 사람 자꾸 그만둬서 구하기도 힘든데.”

졸업식 날 아침, 급하게 밥을 욱여넣던 손이 엄마의 말 한마디에 딱딱하게 굳었다.

오늘은 졸업식이기도 했지만 서림예대 등록 마감일이기도 했다. 아빠는 분명 오늘 직원들 명절 보너스 미리 주고 등록금을 넣어 준다고 했다.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후려치고 지나간다.

“알아보니 너희 학교 학자금 대출 안 되는 학교더라? 얼마나 학교가 후지면 그래? 너 학비 내려면 생돈 다 내야 하는 거더라?”

“그, 그거…… 말했잖아. 말했는데…….”

우연은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쥐어짰다. 분명히 말했다.

“그래서? 네가 말하면 이번 학비 498만 원이 뚝 떨어지냐고. 엉? 아빠도 학자금 대출, 국가 장학금 한 푼도 안 된다는 얘기 듣고, 뭐 그따위 학교가 다 있냐고 하더라.”

“…….”

“이번 학기로 끝도 아니잖아. 학비만 498만 원인데 그게 끝이 아니라 시작이잖니. 기숙사는 2학기부터 성적순으로 자른다는데 네가 거기 될 것 같아? 그럼 방 월세에 밥값에 용돈에 생활비에, 그 비싼 재료비에, 아빠 버는 돈이야 매달 뻔한데 어떻게 그 돈을 다 대? 예술은 돈 많은 집 애들이나 하는 거야.”

“어, 엄마……, 이번만 대 주면 내, 내가 알바할 거야.”

“알바 좋아하시네. 학비 빼고 방값 밥값 생활비로만 한 달 150은 있어야 할걸? 네가 무슨 재주로 그 돈을 벌어? 150은커녕 15만 원도 못 버는 게?”

목이 콱 메었다. 지금 엄마가 이러면 안 된다. 도망치게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시끄럽고 귀찮게 하면 홧김에 일을 뒤엎는 게 버릇인 아빠가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아니야, 그래도 아빠가 보내 준다고 했잖아…….”

“너 진짜 이기적이다. 집안이 거덜 나든 말든 너 꼴리는 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겠어? 정말 엄마 아빠 콩팥 떼어서 팔아? 응? 팔까?”

“내가, 내가 갚을게. 돈 벌어서, 나중에 돈 벌어서 다 갚을게 엄마!”

“환쟁이들이 무슨 재주로 돈을 버니? 환쟁이, 연극쟁이, 시인, 굶어 죽기 딱 좋은 직업인데! 알아 몰라?”

쯔으읏, 혀 차는 소리가 들린다. 엄마는 혀를 찰 때 쯔으으…… 하고 길게 꼬리를 빼는 놀라운 기술을 갖고 있었다. 그 뒤로 독기 어린 혼잣말이 쟁강쟁강 달라붙었다.

“저거 참 못됐어. 아픈 엄마 두고 제 몸뚱이만 쏙 빠져나갈 생각만 해. 못된 년.”

아아, 이제야 알겠다. 엄마는 애초에 자신을 놓아 보낼 마음이 전혀 없었다. 엄마가 턱을 들고 자애롭게 웃는다. 목소리마저 솜털처럼 보들보들해진다.

“우연아. 그냥 아빠 일 도우면서 공무원 공부 해, 응? 공무원은 여자 직업으로 최고고, 시집도 그렇게 잘 간다더라. 어젯밤에 아빠한테도 너 체육관 일 하는 틈틈이 공무원 공부나 시켜 보자 했더니 그게 나을까, 대출도 안 나오는데, 그러시더라고.”

눈물이 왈칵 치밀었다. 불길한 예감은 어쩌면 이렇게 어긋나는 법이 없을까. 울면 안 되는데, 지금 시끄럽게 해서 아빠 비위까지 거슬리면 끝장인데. 그래도 멍청하게 벌어진 입에선 꺽꺽 소리가 자꾸 기어 나왔다.

“어머어머, 얘 좀 봐. 얼굴이 왜 그래?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인데? 울어? 너 우니?”

엄마가 눈썹을 찡그린다. 엄마는 우는 소리도 싫어했지만, 밥을 물고 입을 벌리는 것은 끔찍하게 증오했다. 목소리가 바늘 뭉치처럼 날카로워졌다.

“더러워. 얼른 입 다물어……. 얼른 입 다물고 밥 삼키라니까?”

하지만 울음덩어리가 자꾸 치받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엄마의 눈썹머리가 꿈틀거린다. 엄마의 신경은 항상 바이올린 현처럼 팽팽하게 당겨져 있고, 우연이 신경을 긁는 것을 조금도 견디지 못했다. 어흐, 으, 흐어엉, 눈물이 된장국 속으로 줄줄 떨어지자 엄마가 머리를 후려치며 날카롭게 고함을 질렀다.

“썅년아 입 좀 닥치라고! 고막이 터질 거 같아! 이 씨발년이, 왜 엄마 말을 이렇게 안 들어 처먹어! 밥 먹으면서 입 벌리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왜 입맛 떨어지게 밥상머리에서 처울고 지랄이야! 엉! 그 밥 얼른 안 삼켜? 침 떨어지잖아아악! 더러우니까 입 벌리지 마! 구역질 난다고! 더러워, 더러워어어어! 혓바닥을 확 뽑아 버려야, 씨발년아, 그 더러운 아구창 좀 다물라니까! 호치키스로 아가리 콱콱 박아 버리기 전에에에에!”

결국 신경줄이 튕겨 나간 엄마는 우연의 뺨을 움켜잡고 미친 듯이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입 좀 닥쳐! 이 빌어먹을 여편네는 왜 이렇게 아침부터 시끄러워!”

엄마의 발작은 순식간에 멈췄다. 숙취로 앓던 아빠가 방문을 걷어차고 나온 것이다. 아빠는 아침부터 계집년들이 깽깽대고 짖으면 온종일 재수가 없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우연은 덜덜 떨면서 빌듯이 말했다.

“아, 아빠. 오늘 드, 등록 마감인데…….”

“여보, 안 돼. 어제 내가 말했잖아. 얘를 뭘 믿고 기숙사에 혼자 보내. 폰에 별별 이상한 앱 다 깔아 놓던 애를 어떻게 믿고. 거기서 더러운 새끼들하고 이상한 짓 하다가 애나 덜렁 배서 들어오면 어쩌라고.”

“아냐, 엄마, 여자 기, 기숙사에는, 남자, 모, 못 들어와. 나 이제 이상한 앱 안 깔아. 그때는 모르고 깐 거야. 다 지웠어, 정말이야.”

아빠는 눈썹을 잔뜩 찡그렸다. 하지만 엄마는 집요했다.

“여보, 그래도 미대는 안 돼. 얘가 그림 그리면서 정신이 점점 이상해지는 것 같아. 이거 봐.”

엄마는 옷장 위에서 먼지가 잔뜩 얹힌 스케치북을 끄집어내 아빠 앞에서 확 펼쳤다. 우연은 멍하니 눈만 껌벅거렸다.

……저게 왜 저기 있지?

오래전 엄마가 버린 줄 알았던 스케치북. 그 안에는 엄마 아빠를 비틀고 찢은 형태로 그린 그림들이 가득했다. 우연은 엄마가 왜 저 스케치북을 남겨 두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하나하나 그림을 넘겨 보던 아빠의 얼굴이 점점 험악하게 구겨진다.

“씨발, 저거 정말 미친년 아냐? 이따위 그림이나 그리려고 그 많은 돈을 처들이겠다고 한 거야? 집에서 돈이 썩어 나가?”

얼굴 위로 스케치북이 확 날아들었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아빠는 그것을 발끝으로 콱콱 짓밟았다.

……다 끝났다.

뺨으로 천천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젠 정말 끝이구나. 정말 이렇게 허무하고 황당하게 끝장이 날 수도 있구나.

엄마의 자분자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거 언제나 철이 들까. 엄마 아빠 속 문드러지는지도 모르고 집 나가서 멋대로 놀 생각에 정신이 빠져선. 집에 들어오는 돈이야 간신히 입에 풀칠할 정도인데, 개나 소나 대가리에 똥만 처박혀서는 미대니 뭐니…….”

“뭐가 어째?”

순간 밥이 차려져 있던 식탁이 뒤집혔다. 와장창, 퉁그렁. 벽과 천장으로 벌건 김칫국물이 촥 뿌려지며 사금파리 튀는 소리가 요란하게 터졌다. 엄마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주춤주춤 물러선다.

“왜 이래, 여보! 식탁은 왜…… 악!”

“간신히 입에 풀칠? 쌍년아, 집에 퍼질러 자빠져서 300만 원씩 꼬박꼬박 받아 처먹을 땐 언제고? 대가리에 똥만 차? 씨발, 네년 대가리부터 깨부숴 줄 테니 어디 똥이 처들었나 오줌이 처들었나 한번 보자, 엉! 보자고!”

아빠는 바로 엄마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아빠는 기분이 좋을 때는 무척 다정했고, 동네에선 공처가 애처가 딸바보로 소문이 나 있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무시당하는 말을 들으면 바로 폭발하곤 했다. 그리고 엄마는 신경줄이 터져 나갈 때면 그 폭발 스위치를 자주 밟았다. 엄마의 머리통이 산지사방 흔들릴 때마다 입에서는 까마귀 울음소리가 튀어나왔다.

자신이 얻어맞을 줄 알았는데, 불똥은 엄마에게 튀었다. 이럴 때 우연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말릴 수도 없고, 도망쳐서 아빠를 자극할 수도 없고, 경찰 신고는 더더욱 할 수 없었다. 생각이 빠르게 무너지며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럴 때는 정상적으로 생각을 연결할 수 없었다.

나 지금 뭘 어떡해야 하지? 드, 등록은? 서, 선생님이라도 만나서 얘기해야 하나? 엄마는? 말리면 나도 맞겠지? 그, 그냥 모르는 척, 하던 일이나 계속해야 하나? 일단, 하, 학교? 그래, 졸업식이니까, 학교에 가서, 그러면, 바, 밥부터 먹어야…….

우연은 눈앞으로 굴러온 밥그릇을 끌어안고 맨밥을 입속으로 퍼 넣기 시작했다. 생각이 아예 멈춰 버린 것 같다.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 이럴 때 뭘 어떻게 하면 된다고 말 좀 해 주면 좋겠다. 식칼로 배를 가르라고 해도 좋으니 제발 무슨 말이라도. 눈물이 밥그릇으로 줄줄 떨어져서 반찬 없이도 짠맛이 났다.

“다 집어치워! 십 원 한 푼 줄 수 없어. 그렇게 가고 싶으면 네년이 돈 벌어서 네 꼴리는 대로 가!”

아빠가 화를 내며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간 후, 엄마는 깨진 반찬 그릇 사이에 걸레처럼 널브러져 끽끽 깩깩 칠판 긁히는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우연은 화장실로 엉금엉금 기어들어 가 먹던 밥을 토했다. 습관이 된 구토는 수월했다. 반찬 없이 맨밥을 퍼먹은 덕에 변기에 토사물의 붉은 자국은 남지 않았다. 속에 남은 것도 없는데 자꾸 쓴 물이 올라와서 우연은 계속 헛구역질을 했다.

“문 열어. 너란 년은 어떻게 엄마가 맞고 있는데 밥을 처먹어? 너 때문에 엄마가 맞고 있는데 밥이 넘어가? 너도 사람이니? 미친년, 넌 정말 사이코패스야! 저걸 자식이라고. 나와, 나오라니까…….”

드륵, 드윽, 끼기기. 엄마는 화장실 문을 긁으며 숨죽여 울부짖었다.

우연은 불현듯, 생명의 다리라는 별명을 갖게 된 한강의 어떤 다리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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