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 누드-2화 (2/47)

2. 유언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났다.

하지만 남은 꼬리는 길었다. 이원은 손이 조촐한 집안의 유일한 상주였고, 아버지인 한세경 회장은 두루두루 발이 넓었다. 이름을 대면 알 법한 정재계 인사들의 조문 행렬이 밤새도록 이어져, 이원은 3일 내내 잠시도 쉬지 못한 채 자리를 지켜야 했다. 그러잖아도 밤마다 아버지 곁을 지켰던 이원은 장례 미사를 드릴 때쯤 되자 몸도 제대로 가누기 어려운 상태가 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투병은 길고 고통스러웠다. 탁월한 승부사 기질로 승승장구 사업을 키워 나가던 아버지는 10년 전에 갑작스럽게 간암 진단을 받았고, 지금까지 수술과 항암 치료, 재발의 과정을 반복해 오는 중이었다.

사제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이원은, 아버지의 와병에 결국 뜻을 꺾고, 본격적인 후계자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이름을 딴 세경그룹의 지주사(持株社)인 세경홀딩스와 휘하 11개 계열사에 대한 실무 교육이 강도 높게 이어졌다. 마지막 1년 동안은 대표이사직 승계 작업까지 빠르게 추진됐다.

공동 창업주 고 우영석 회장의 아들이자 차기 대표이사를 자처하던 우일혁 상무와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주주들과 이사진을 설득해 가며 승계 작업을 강행하는 동안 아버지의 병세는 급격히 나빠졌다. 나중에는 마약성 진통제도 거의 듣지 않아 극한의 고통에 시달렸다.

이원은 통증에 몸부림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밤마다 기도를 올렸다. 아버지는 그의 유일한 가족이었지만 그렇게 고통스러운 연명을 위해서는 차마 기도할 수 없었다. 다만 이 끔찍한 통증이 온전히 자신에게 옮겨 오기를, 그러지 못하면 이 고통에서 아버지를 속히 해방시켜 주십사 기도를 올렸다.

가끔 정신이 돌아온 아버지는 이원의 손을 움켜쥐고 힘겹게 중얼거렸다.

‘대신 아프게 해 달라고 함부로 기도하지 마라. 얼마나 아픈지도 모르고.’

‘혼자 남는 게 더 아픕니다, 아버지.’

‘이렇게 외로움 많이 타는 놈이 혼자 남아 어쩌누. 진작 장가들였어야 했는데. 좋아하는 여자 정말 없어?’

‘없습니다.’

‘눈이 하늘에 붙은 것도 아니고, 어디가 작동을 안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지금까지 한 명도 없었지? 혹시 나 죽은 다음에 다시 신학교로 돌아갈 거냐?’

쓸개즙이라도 삼킨 듯 미간을 접고 고개를 숙이는 아들에게 낮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미안하다 이원아. 내가 너한테 못할 짓을 했어…….’

‘무슨 말씀이세요. 결국 제가 선택한 일 아닙니까.’

병자 성사를 마친 직후, 그는 마지막으로 몰려오는 고통 속에서도 필사적으로 당부했다.

‘울지 마라. 웃으면서, 웃으면서 보내 다오. 의사 부르지 마라, 나는 괜찮다.’

이원은 아버지의 말을 지켰다. 그가 자신의 손을 움켜잡은 채 천천히 굳어 갈 때, 이원은 오열하며 눈물을 쏟는 대신 당신께서 안식의 땅으로 떠나셨음에 대해 조용히 감사드렸다.

아버지의 죽음을 기뻐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고통에서 해방되었음을 감사할 수는 있었고, 슬퍼하는 대신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는 것 역시 어렵지 않았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가 보통 그렇듯 두 사람은 엄마와 딸처럼 살갑거나 별스럽게 다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주관적인 기준으로도 객관적인 기준으로도 나쁘지 않은 아버지였고, 추억은 넉넉했다.

그동안 많이 힘드셨으니, 이제 좋은 곳에서 평안하세요.

이원은 목구멍을 찢을 듯 치받는 비탄과 상실감을 그렇게 갈무리해 넣었다. 아프지만 평온하고 조용한 작별이라 생각했다.

“현재 한이원 전무는 한세경 회장님의 상속 지분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회사 중역들과 이사, 주주들이 모인 본사 회의실에서, 정서형이라는 젊은 변호사가 나타나 날벼락을 터뜨리기 전까지는 그랬다.

* * *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한 전무가 상속을 받을 수 없다니?”

“뭐야? 회장님한테 혹시 숨겨 둔 자식이 있었나?”

여기저기서 웅성대는 소리가 터졌다. 이원은 헛웃음을 지으며 징징 울리는 머리를 흔들었다. 이게 무슨 헛소리지. 유산 상속엔 아무 문제가 없었고, 아버지는 세금 문제까지 깔끔하게 정리해 놓고 가셨다.

하지만 정 변호사가 아버지의 자필 유언장을 마패처럼 들어 올린 후 큰 소리로 읽어 내려가자 분위기가 얼음처럼 싸늘해졌다.

「한세경의 상속분 (주)세경홀딩스의 보통주 785,500주, 25%의 지분에 대하여 상속인 한이원은 우성희 이사의 딸 유미현과의 혼인 신고를 필하기 전까지 상속 지분을 행사할 수 없음.」

이원은 말 한마디 없이 유언장 내용을 듣고 있었다.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화살처럼 자신에게 와서 꽂히는 것이 느껴진다. 공개를 마친 정 변호사가 유언장 원본을 책상에 내려놓으며 이원에게 물었다.

“혹시 이 내용을 알고 계셨습니까?”

“아닙니다. 지금 처음 들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숨을 들이쉬는 소리와 술렁대는 소리가 흩어진다. 이원은 분노하거나 당황하기보다 의아했다.

대체 아버지는 왜 일언반구 의논도 없이 이런 유언을 남기셨을까?

신학교에서 기껏 끌어낼 때는 언제고, 지금 와서 지분 상속을 못 해 주겠다?

미현은 공동 창업주 우영석 회장의 손녀딸이면서 한국에서 꽤 이름이 알려진 뮤지컬 배우다.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이긴 했지만, 신학교 입학 후로는 교류가 거의 없었다.

물론 이 바닥에선 철저하게 재산과 권력에 따라 이합집산이 이루어졌고, 결혼을 이합집산의 도구로 쓰는 일은 흔하다 못해 당연한 일이긴 하다. 아버지 역시 세경건설을 키우기 위해, 불임 판정을 받아 이혼당했던 여섯 살 연상의 어머니와 결혼했으니까.

부동산 재벌 소리를 듣던 외조부의 무남독녀였던 어머니는 아버지를 정말로 사랑했던 듯했다. 그녀는 물려받은 전 재산을 세경건설에 밀어 넣었고, 사업이 궤도에 오르는 것을 보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일곱 번의 시험관 시술 끝에 얻은 어린 외아들에게 지분과 재산을 모두 넘기면서, ‘이원이를 위해서라도 절대 재혼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원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정말 사랑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돌아가실 때까지 다른 여자를 한 명도 두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대체 아버지는 왜 이런 무리한 조건을……?

이원은 무거운 머리로 여러 가지 계산을 돌려 보았지만, 확실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돌아가시기 전에, 나에게 사귀는 여자가 있는지 확인하셨던 이유가 이건가? 그래도 당사자에게 미리 언질은 해 두어야 하는 거 아닌가?

어느 부모도 성인 자녀의 혼인을 강제할 순 없다. 자유 의지를 제한하는 유언 역시 유언으로서 효력을 상실한다는 것도 모르셨을 리가 없다.

맞다. 엄밀히 말하면, 아버지는 혼인을 강제한 게 아니다. 이 유언은 부담부(조건부) 유증이며, 그래서 여전히 유효하다. 조건을 거절하려면 상속받은 지분을 포기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내 지분만으로는 우 이사 일가와 절대 맞설 수 없다.

세경그룹은 모두 비상장사로, 모회사인 홀딩스 출자 지분은 이원의 집안에 45%, 우 상무 집안에 55%로 나뉘어 있었다. 한세경 회장 25%, 한이원 전무 20%, 우일혁 상무 25%, 우성희 이사 20%, 나머지 10%는 우씨 집안에 분산되어 있다. 그래서 그쪽에서 우 상무를 홀딩스 대표이사로 밀어 올리겠다고 결심하면 자신은 쫓겨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만약 유언의 조건을 받아들이면 반대의 상황이 펼쳐진다. 이원은 65%, 과반의 지분을 확보하면서, 앞으로 그룹 지배권을 놓고 힘겨루기를 할 필요가 없어진다.

아버지는 우 이사 일가와의 오랜 힘겨루기를 버거워하셨다. 특히 우일혁 상무의 끝없는 공격과 견제에 극도로 피곤해했고, 경영권 방어를 위해 불필요한 에너지를 너무 많이 낭비해 왔다. 아들에게는 안정적인 경영권을 넘겨주고 싶으셨을 것이다. 그것까지는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이원은 우성희 이사를 향해 천천히 눈을 돌렸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냉랭하게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반응을 보아하니, 아버지와 우 이사 사이에 물밑 협상이 있었던 것 같긴 하다.

우 이사님, 미현이에게 동의는 받으신 겁니까?

물론 미현만큼 조건이 잘 맞는 여자도 드물고, 미현만큼 매력적인 여자도 찾기 힘들리라는 것은 안다. 그녀는 재벌 3세라는 선입견이 무색하리만치 실력 있는 뮤지컬 배우였다. 천의 얼굴, 천의 목소리라는 별명을 가진 그녀는 드라마틱한 가창력에 카리스마 있는 무대 장악력, 그리고 화려한 외모와 농염한 분위기로 많은 이들의 찬탄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문제는, 이원이 그녀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전혀 느낄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가 가진 정보가 정확하다면, 미현은 지금 뉴욕 산타바바라 극장의 프로듀서 모리스 첸과 비밀리에 동거 중이었다. 해외에서 이제 막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미현에게 관록 있는 기획자 모리스 첸은 큰 힘이자 든든한 발판이었고, 모리스 첸에게 재벌 3세인 미현은 산타바바라 극장의 미래의 투자자로 보였을 것이다.

그와 별개로 두 사람이 사랑에 흠뻑 빠져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미현이 아버지의 제안을 수락했을지는 아무래도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이원은 우성희 이사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우 이사와 아버지의 담합이 확실하다면, 그가 가장 먼저 대화해야 할 대상은 우 이사가 아닌 유미현이었다.

그리고 우 이사에게 길길이 날뛰며 따져 줄 사람은 따로 있었다.

“씨발! 뭐 이런 좆같은 일이 다 있어? 누나! 죽은 한가 놈이랑 둘이서 짰어?”

아니나 다를까. 완전히 얼어붙은 회의장에 거센 욕설이 터져 나온다. 우일혁 상무였다.

“욕하지 마, 우 상무! 나는 모르는 일이야.”

“우 상무님! 돌아가신 회장님께 말씀이 좀 심하십니다!”

“신 이사는 입 닥쳐! 감히 어디서 끼어들어, 엉?”

신철희 사외이사 쪽을 향해 생수병이 날아갔다. 아슬아슬하게 피하지 않았으면 머리를 정면으로 맞았을 것이다. 얼굴이 시뻘게진 신 이사가 벌떡 일어나는 것을 억지로 찍어 누르려는 듯, 우 상무의 고함이 더욱 커졌다.

“모르긴 뭘 몰라? 돌아가신 아버지가 누나는 출가외인이라고 경영권 안 준다고 하니까, 이젠 딸 팔아서 내 호텔 경영권 뺏어 가려는 거잖아! 누나 정말 미쳤어?”

“시끄러워! 둘이 결혼할지 안 할지 내가 어떻게 알아? 둘이 눈 맞아서 결혼한다면 그걸 또 내가 무슨 재주로 말려?”

“씨발, 시침 떼지 마! 우리 집안 말아먹으려고 작정했어? 아버지 유언 기억 안 나? 우씨 성을 받은 건 미현이가 아니고 내 아들 지민이란 말이야!”

“우일혁 상무! 입 닥치고 자리에 앉으라고 했어!”

동생을 향해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는 우성희 이사의 표정은 험악했다. 우 이사의 반응을 보니 그녀가 남동생보다는 딸에게 판돈을 걸었다는 것이 확실해 보인다. 성일호텔의 적자 행진, 동생의 온갖 스캔들과 비리를 뒷수습하다 지친 반작용일 수도 있다.

“어쨌든 세경홀딩스 현 이사회는 한 회장님의 후임으로 한이원 전무님을 이미 승인했단 말입니다! 그러니 이사회는 그만 들볶으시고, 이따위 거 겁도 없이 함부로 던지지도 마시고! 정 아니꼬우면 주총 소집해서 이사진들이랑 대표이사랑 싹 밀어 버리시고 한번 해 보시든가! 내가 정말 이 꼴 보기 더러워서, 집어치운다 진짜!”

크게 다칠 뻔한 신철희 이사가 생수병을 집어 던지며 고함을 질렀고, 우 상무는 그의 앞으로 달려가 멱살을 잡았다. 다혈질인 신 이사도 기다렸다는 듯 멱살을 잡아 올렸다. 우 상무의 쇳소리가 깩깩 치솟는다.

“이 개새야, 놔, 안 놔? 네까짓 게 뭔데 큰소리야, 고작 사외이사 주제에, 잘라 버려 아주!”

“자르라고! 내가 돌아가신 한 회장님 부탁만 아니었으면, 어이구, 진짜 한주먹감도 안 되는 걸!”

“씨발, 낼모레면 무덤에 들어갈 새끼가 어디서 틀니 딸그락대는 소리나 하고 자빠져서! 쳐 봐, 아주 관짝에 눕게 해 주지! 쳐 보라고, 엉?”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기겁을 하며 팔다리를 하나씩 끌어안고 한 덩어리로 엉겨 붙었다. 회의장은 이내 왁자한 고함과 함께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원은 딱히 말릴 생각도, 상황을 정리할 생각도 없이 팔짱을 낀 채 내버려 두었다. 머리는 깨질 것 같은데 눈앞에 벌어지는 광경은 영 현실감이 없는 것이, 개그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그는 남은 힘을 끌어모아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실소를 막았다.

[전무님. 유미현 씨가 지금 막 본사 정문을 통과했다는 전언이 왔습니다.]

[일단 접빈실로 모시고 차를 대접해 드리면서 시간을 끌라고 해 두었는데요.]

[지금 가 보시겠습니까?]

문가에서 대기하던 최홍연 비서실장이 휴대 전화를 확인하더니 이원 쪽으로는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문자를 보낸다. 당연히 미현은 지금 회의실에 들어오면 안 된다. 최 실장은 가끔 지나치게 격의 없었지만, 감이 좋고 눈치 빠른 것만큼은 요긴하고 고마웠다. 특히 이럴 때.

이원은 답문을 보내는 대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최 실장이 기척 없이 따라오는 것을 물릴까 하다가 그대로 두었다. 증인이 필요할 수도 있다. 미현이가 아버지, 우 이사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유언장이 공개된 이상 자신과 가장 먼저 만나야 했다.

“후우우…….”

무거운 한숨이 닿은 거울에서 부연 안개가 번져 나간다. 접빈실에 가기 직전, 급하게 세면실에 들른 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거울에 비친 몰골이 아주 볼만했다.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고, 충혈된 눈에 안약을 넣었다. 뺨을 몇 번 쳐서 창백한 안색도 감추고, 꺼칠한 피부에 로션도 바르고, 향수를 뿌리고, 가글까지 한 후 차근차근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하지만 손끝이 떨리는 것은 끝내 감춰지지 않았다.

“최 실장님, 카페인 캡슐 하나만 부탁합니다.”

최홍연 실장의 입가가 들썩거린다. 걱정과 잔소리가 많은 성격상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떠들어 댈 것 같아 지레 피곤해졌다. 하지만 눈치 빠른 사내답게 짧게 한숨만 쉴 뿐 잠자코 약을 내주었다. 지금 미현과의 만남은 너무나도 중요했고, 피곤에 지쳐 빈틈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약은 여전히 독했고, 속은 여전히 아팠다.

* * *

“……내용을 알고 있었다니 놀랍구나. 유언장은 15분 전에 공개됐는데.”

상하이 공연을 마치고 바로 귀국했다는 미현의 얼굴은 화장기 하나 없이 청초하고 입술만 선명하게 붉었다. 지친 시신경은 그 화려한 색을 통증으로 감각했다.

“오빠, 이 마당에 서로 순진한 척은 하지 말자. 어차피 엄마하고 한 회장님 사이에 시크릿 서밋이 있었던 건 오빠도 알 거 아냐. 엄마가 뒤에서 협조 안 했으면, 오빠는 이번에 홀딩스 대표이사에 절대 못 올라갔고, 앞으로 자리를 지키지도 못할 거야.”

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아버지의 후광 없는 이원의 위치는 우 상무보다 훨씬 취약했다.

“그래,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뭐야. 나 취조당하는 거야? 멋진 반지나 프러포즈를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건 좀 심한데?”

미현은 짧게 웃더니 결론을 툭 집어 던진다.

“결혼하자, 오빠.”

순간,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숨을 밭게 들이쉬었다. 미현이 팔짱을 끼며 투덜거린다.

“매력적인 레이디의 프러포즈에 반응이 이게 뭐야? 세경그룹을 외삼촌 안 주고 오빠한테 주겠다는 건데, 좀 더 열광적으로 반응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호텔 경영권을 뺏어 오고 싶은 게 아니고?”

“까놓고 말하면 그렇지, 뭐.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출가외인에겐 안 된다고 하니, 출가외인에게 이런 식으로 뺏겨 보는 것도 좋지 않겠어?”

미현은 시원하게 인정하며 덧붙였다.

“그리고 경영 능력도 외삼촌보다 오빠가 몇 수 위인 것 같고. 저번에 정우건설 박살 낸 실력 보면.”

몇 해 전 세경건설은, 6천억 규모의 수주전에서 온갖 루머를 풀어 가며 집요하게 방해 공작을 하던 정우건설을 물리치고 기어이 시공권을 낙찰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악성 루머에 일일이 반박하는 전면 기사를 내고, 치밀한 뒷조사와 대대적인 법적 대응으로 맞불을 놓고, 검찰에 온갖 자료를 쑤셔 박아 대규모 세무 감사가 떨어지게 한 끝에 정우건설을 파멸로 밀어 넣은 것이 바로 이원이었다. 정우건설의 부도, 대표와 일가족의 동반 자살, 거리로 나앉은 직원들과 가족들이 울면서 시위하는 장면이 뉴스에 오르내렸지만 주변에선 그것을 이원의 ‘화려한 승리’로만 기억했다.

이원은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물었다.

“이 결혼은 누가 제안한 거니? 우 이사님? 우리 아버지?”

“나.”

“……아하.”

“회장님도 무척 반가워하시던데? 그동안 골머리 앓던 경영권 문제가 한 방에 해결되는 거잖아. 오빠 신학교 가기 전까지만 해도, 나만 보면 며느리 삼고 싶다고 하셨는걸.”

“…….”

“그리고 오빠도 나하고 굉장히 친하게 지냈었잖아. 어렸을 때, 주말마다 우리 집에 놀러 와서 나랑 강아지들이랑 재미있게 놀았던 거, 기억 안 나?”

그래. 그렇게 멋대로 오해할 줄 알았다. 이원은 쓴웃음을 지그시 삼켰다.

미현은 어릴 때 강아지를 무척 좋아했었다. 특히 꼬물꼬물 귀여울 때는 물고 빨고 애지중지 야단도 아니었다. 하지만 1년 정도 지나 몸집이 커지면 ‘개가 아직도 똥오줌을 못 가리네, 말썽을 부리네.’ 따위의 핑계를 대며 다른 집으로 보내 버렸다.

이원은, 강아지가 말썽을 부리지 않으면 미현이가 끝까지 키워 줄 거라고 믿고, 주말마다 찾아가서 강아지를 보살피고 차근차근 교육을 시켜 주었다. 하지만 미현은 6년 동안 네 마리의 강아지를 기어이 파양했고, 그 후 이원은 미현의 집에 완전히 발을 끊었다.

“아기까지 생기면 그야말로 양가 대통합 아냐. 회장님이 손주 한번 안아 보고 싶어서 얼마나 애를 태우셨는데. 오빠 진짜 불효자 소리 들어도 할 말 없다.”

저 말은 대놓고 가책을 유발하려는 걸까. 장례식을 막 끝내고 돌아온 자신에게 손주니 불효자니 운운은 꽤 모질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나하고 상의 하나 없이 그런 결정을 하실 분은 아닌데.”

“오빠랑 어떻게 상의를 해? 신학교로 다시 튈 생각만 하고 있는데. 그때 그런 말을 꺼내셨으면 당장 회사 그만둘 테니 전문 경영인 영입하라는 대답이나 들으셨겠지.”

이원의 눈썹이 확 찌푸려졌다. 미현의 한쪽 입가에 비죽이 웃음이 걸린다.

“회장님이 모르셨을 거 같아? 지금까지 여자 한번 안 사귀고 선도 죄다 거절하더니, 작년부터 예비 신학생 모임에 꼬박꼬박 나가고 있었다며?”

“그래.”

이원은 잠자코 시인했다. 맞다. 아버지는 늘 불안해하셨다. 그러니 미현의 제안이 얼마나 기꺼우셨겠는가. 결혼을 하면 사제가 될 수 없고, 경영권 분쟁도 자연스럽게 사라질 테니.

“그렇구나. 그러면 상속 제한은 왜 걸린 걸까?”

이원의 감춰진 분노를 짐작한 듯, 미현의 말투가 조심스러워진다.

“일단, 회장님께 두 가지 조건을 걸었어. 첫 번째가 성일호텔 경영권은 나한테 달라는 거.”

역시 예상대로다. 다만 관록 있는 우성희 이사가 아니라 경영 수업도 제대로 받지 않은 미현이라는 게 의외이긴 했다. 하긴, 미현은 어릴 때부터 당차고 욕심도 많고 사람을 부리는 데 익숙했다.

“그래. 그러면 두 번째는?”

“오빠가 우리 제안을 거절하고 신학교로 돌아갈 생각이라면, 아예 처음부터 그룹 경영에서 손 떼게 해 달라는 거. 언제 튈지 모르는 사람만 믿고 외삼촌을 배신할 순 없잖아? 그러느니 애초에 외삼촌 쪽으로 줄을 서서 콩고물이라도 얻어먹는 게 낫지.”

“…….”

“특히, 신부님들 중에선 개인 재산을 교단에 희사하는 분들이 많다고 들었어. 하지만 우린 종교 재단에서 지분을 45%나 갖고 그룹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건 절대 용납 못 해. 전문 경영인은 외삼촌한테 씨알도 안 먹힐 소리니 말도 꺼내지 말고.”

“아하. 그래서 조건 이행을 보장할 안전장치로 지분 상속에 조건을 걸어 달라 한 거니?”

미현은 웃음기를 거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정말 미안한데 그럴 수밖에 없었어. 우리도 모든 패를 다 거는 거잖아. 오빠만 입맛에 맞게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서. 회장님은 그 요구가 타당하다고 받아들이셨고.”

이원은 눈을 감은 채 잠시 말을 골랐다. 아버지가 왜 그따위 유언을 남겼는지 드디어 알게 되었지만, 속이 후련하지는 않았다.

미현과 아버지의 염려가 기우는 아니었다. 이원은 정우건설 대표 일가의 동반 자살 이후 극도의 죄책감과 고통을 겪었고, 경영 쪽이 자신의 길이 아닌 것 같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길을 잘못 들었다, 내게 주어진 길은 이게 아니다, 기도하고 숙고할 때마다 그는 점점 초조해졌다.

자퇴 경력도 있고, 나이도 서른이 넘은 상태로 신학교에 다시 돌아가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원은 마지막 기회라도 잡고 싶었다. 너무 늦은 것은 없다. 지금이라도 돌이킬 수만 있다면, 나에게 가장 맞는 길로, 간절히 원하는 길로, 그분께 약속한 길로 가는 것이 옳지 않을까.

아버지를 원망하고 싶진 않았다. 평생 일군 기업을 뺏기지 않으려는 본능과 아들에게 안정적인 경영권을 만들어 주고 싶었던 절박한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미현의 현명함과 야심도 비난할 순 없었다. 그녀가 제시한 조건은 충분히 합리적이었고, 서로에게 유익했다.

“그래. 상당히 괜찮은 거래구나.”

신랄한 말을 부드러운 목소리로 포장하는 것은 익숙했지만, 미현은 그 신랄함을 알아차릴 만큼 눈치가 좋았다. 붉고 날렵한 입매가 무겁게 가라앉는다.

“굳이 거래라고 자조할 건 없어, 오빠. 다들 그렇게 조건 맞춰 결혼하고, 정 붙이면서 살지. 솔직히 이 바닥에서 누가 연애결혼을 해. 그래도 다들 잘 살잖아.”

“그렇지.”

“오빠가 원래 혹독하고 까다로운 사람인 거 알아. 솔직히 나만큼 오빠 성격 잘 알고, 잘 맞춰 줄 사람이 있을까? 이거야말로 윈윈이지.”

“…….”

“결혼하면, 아이도 많이 낳고, 마당에 큰 강아지들도 키우자. 오빠 동물이랑 아이들 좋아하잖아. 다 오빠 하고 싶은 대로 해. 주말마다 아이들한테 둘러싸여서 오붓하게 시간 보내는 것도 좋고, 나 공연 없을 때 길게 휴가 내서 가족 여행도 다니자. 솔직히 우리가 맘만 먹으면 못 할 일이 뭐가 있겠어?”

미현은 그가 사랑하는 것들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다만, 도회적이고 강한 도전과 자극을 즐기는 미현은 그 소박함을 진저리 나게 싫어하고 경멸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이원은 미현의 말에 깊은 모욕감을 느꼈다.

하지만 모욕감을 굳이 드러내지는 않았다. 이미 가부의 선택지가 주어진 상황에서 굳이 미현과 싸울 필요는 없다.

다만 마지막으로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산타바바라의 프로듀서, 모리스 첸이던가? 그 사람하고 찍힌 사진이 가끔 뜨던데. 혹시 브로드웨이로 진출할 계획이 있니?”

가볍게 찌른 말에, 미현은 놀란 내색조차 없이 웃는다.

“옐로 페이퍼에서 떠드는 걸 뭘 신경 쓰고 그래? 어차피 죄다 쓰레기 소설인데.”

“NYT가 옐로 페이퍼에 쓰레기 소설은 아니지.”

이원은 고소(苦笑)하며 맞받아쳤다. 미현이 모리스와의 관계를 밝히고 결혼을 거절할지도 모른다, 혹은 다 정리하고 왔다, 하는 상식적인 대답을 기대했던 게 우스워졌다. 그의 표정을 본 미현은 한숨을 쉬며 제대로 된 설명을 시작했다.

“이거 그쪽에서 엠바고 요청했던 건데 할 수 없네. 내가 주연을 맡은 ‘여왕 마고’가 산타바바라 극장에 입성하게 됐어. 2년 계약. 그 일로 요새 미스터 첸하고 의논할 게 많아.”

“…….”

“그런 비즈니스 미팅까지 일일이 신경 써야 하면 나 이쪽 일 못 해. 그런 건 오빠가 좀 이해해 줘야지. 오빠도 사업상 누구를 만났는지, 왜 만났는지, 언제 어디서 만났는지 나한테 일일이 허락받아야 하면 일이 되겠어? 안 그래?”

……이런.

이원은 그녀가 연인과 헤어질 생각이 전혀 없음을 알아차렸다. 대놓고 드러내진 않겠지만, 이원이 눈치채도 판만 깨지 않으면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아니, 이원이 이 판을 깨지 못할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서로 협조해서 공생한다 해도 관계가 동등한 것은 아니다. 거래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미현은 잃을 것이 없지만, 이원은 가진 것을 대부분 잃어야 하는 처지였다.

이원은 눈을 가늘게 뜨고 미현을 내려다보았다.

물론 이 결혼은 윈윈 계약이 맞다. 그것도 이원에게 유리한 계약. 재벌가의 결혼은 이런 형태가 당연한 것도 맞다. 결혼 생활 중 불륜을 저지르는 경우도 많다. 그래도 이렇게 처음부터 정부를 두고 쇼윈도 부부로 시작하자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이원은 다른 이들보다 도덕적 잣대가 엄한 편이었다. 적어도 미현보다 결백하거나 순진했고 ‘이 바닥의 결혼’에 어울리지 않을 법한 케케묵은 명제들도 여전히 신뢰하고 있었다. 그는 결혼 생활이란 사랑과 신뢰를 토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배우자에 대한 정조의 의무도 성실하게 지켜야 한다고 믿었다.

“내가 너보다 많이 고리타분하고 순진한 모양이야, 미현아.”

눈치 빠른 여자는 차분한 대답 뒤에 숨은 가시를 감지했다. 잠시 망설이던 미현이 한숨을 쉬며 속삭이듯 말했다.

“이원 오빠. 내가 계산만으로 이런 제안을 했다고 생각하면 오해야. 섭섭해.”

“그게 무슨 말이니?”

“실은 나 오래전부터 오빠 좋아했었어. 오빠가 신학교에 입학하지만 않았으면 고등학생 때 진작 고백했을 거야.”

……이 말은 안 하는 게 더 좋았을 텐데.

이원은 이마를 짚은 채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정결하게 남겨 두어야 할 어떤 부분에 구정물이 쏟아진 것 같다. 사랑이라는 감정까지 거래의 장식품으로 기어이 써먹어야 직성이 풀릴까? 컨디션이 평소와 같다면 역겨움을 제대로 감출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버틸 힘이 부족했다. 이원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랬구나. 알았으니 생각해 보고 대답 줄게. ……브로드웨이 진출 축하하고.”

이원은 대화를 더 이어 가려는 미현을 뒤로하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이런 말까지 들어야 하는 상황이 비참해서 견딜 수 없다. 속에서 불이 치미는 것 같다. 급히 1층으로 내려가 택시를 잡았다. 찬 바람이라도 받아야 정신이 들 것 같다.

“바람 쐴 만한 곳으로…… 제일 가까운 한강 다리, 마포 대교로 가 주세요.”

“전무님! 전무님! 몸도 안 좋으신데, 잠깐만요!”

최 실장이 급하게 따라오는 것을 손을 저어 만류했다. 주렁주렁 매달린 목줄과 천근의 족쇄, 등 뒤로 화살처럼 박히는 시선들까지 다 지긋지긋했다.

혼자 있고 싶었다.

팔에 두른 베 완장과 발목의 행건을 발견한 것은 마포 대교 한가운데에서였다. 이원은 완장과 행건을 거칠게 빼내 강으로 집어 던졌다. 이젠 머리가 끊어지는 것처럼 아프다.

제안을 거절하면?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원은 학교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재입학이 허락될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일단 나이 문제도 있고, 예전에 자퇴도 했었다. 사제성소(司祭聖召)의 확신이나 열망과는 별개로, 상황이 용이치 않았다. 자칫하면 돌아가지도 못한 채 빈손만 남게 된다.

제안을 받아들이면?

결혼을 생각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외로움을 심하게 탔던 그는 가족들로 북적이는 집을 무척 부러워했다. 아내가 될 여자는 어떤 사람일까. 보기만 해도 가슴이 떨린다는 그 감정도 조금은 궁금했다.

나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작은 생명들이란 또 얼마나 신비로울까. 그 아이들은 나처럼 외롭게 두지 않을 것이다. 사랑을 넘치도록 주어 가며 기를 것이다. 그는 캠핑카를 몰고 가족 여행을 다니는 꿈도 꾸었고, 작은 수도원에서 아이들과 머무르며 세상에 가득한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게 해 주고도 싶었다.

그런데 이 결혼에서, 그런 게 가능할까? 나는 미현에게 손도 대고 싶지 않은데?

세경그룹이, 그곳의 수만 명 직원과 가족들이, 그들에 대한 책임이 내 인생과 내 행복보다 중요할까?

……아무것도 모르겠다.

이원은 차가운 난간을 움켜쥔 채 눈을 감았다. 돌아갈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사실 이성적인 결론은, 유언이 공개되었을 때부터 정해져 있었다. 미현과의 결혼 외에는 마땅한 선택지가 없었고, 예상 외 변수는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는 결론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설득해야 한다. 설득이 안 되면 세뇌라도 해서 받아들이게 해야 한다.

“……후우.”

고개를 저으며 왔던 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옆으로는 자동차들이 차가운 바람을 일으키며 지나가고 있었고, 다리의 끝은 까마득히 멀었다.

이제 이 길을 되짚어 나가는 순간, 더 이상 같은 고민을 되풀이하면 안 된다.

그나마 다행인 건, 미현이와 달리 자신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미현과 동일한 선택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만약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사랑만 택한다면 덜 비참할까? 덜 아플까? 더 행복할까?

……이것 역시 알 수 없다. 이원은 결국 실소를 터뜨렸다.

그는 불같은 사랑 따윈 전혀 겪어 보지 못했다. 그런 감정이 들지 않게 스스로 경계하기도 했고, 성격상 그런 감정이 가능할 것 같지도 않았다. 성욕이나 외로움은 결코 적은 편이 아니었지만, 그의 감정과 본능은 이성에게 철저하게 복종했다.

그리고 그 이성은 ‘이제 돌아가서 네게 주어진 길을 받아들여라.’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원은 길을 되짚어가는 대신 오랫동안 난간 앞에 서 있었다. 강바람은 생각보다 많이 아팠다.

“……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원은 바람 속에 감춰진 무언가를 감지했다. 차가운 바람이 온몸을 후려치는 중에, 날카로운 바늘로 찌르는 듯, 혹은 작은 발톱으로 긁어내리는 듯한 느낌이 숨어 있었다. 너무 피곤해서 그런가? 손으로 뺨을 탁탁 내리쳤다. 통증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 이상한 느낌은 점점 강해졌다. 이원은 눈썹을 찌푸린 채 고개를 돌렸다.

아하. 드디어 원인을 알았다. 교복 차림의 키 작은 여자아이가 연습장을 든 채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아이는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겁에 질려 뒷걸음질을 시작했다.

지금 뭘 하는 거지? 설마 나를 그리고 있었나?

왜? 왜 하필 지금? 왜 하필 여기서? 왜 하필 나를?

이원은 극도로 짜증이 났고, 이제는 그 표정을 도저히 숨길 수 없었다.

왜 저 아이는 학교도 안 가고 예까지 와서 사람이 괴로워하는 꼴을 구경하고 있을까? 대체 뭘 끄적인 거지? 내 꼴이 그리 재미있어 보였나?

이원은 저 연습장을 뺏어서 자신의 그림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아이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무서워하며 도망치다 연습장을 놓쳤다. 그러고는 새파랗게 질린 채 주우러 오지도 못하고 와들와들 떨었다.

지금 내 표정이 그렇게 험악한가? 왜 저렇게 무서워하지?

당황한 이원은 가까이 다가가는 대신 손을 내밀어 아이를 진정시켰다. 아이가 엉거주춤하며 뒷걸음질을 멈췄고, 이원은 그제야 허리를 굽혀 연습장을 주워 들었다. 연습장의 주인이 기겁하며 입을 틀어막는 모습이 보였지만, 이원은 기어이 그것을 펼쳤다.

순간,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던 것들이 하얗게 증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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