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한강 어딘가에는, ‘생명의 다리’라는 별명을 가진 다리가 있다고 한다.
여의도와 마포를 잇는 마포 대교, 그 다리의 난간에는 자살하려는 사람들을 막기 위한 따뜻한 문장들이 가득 적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생명의 다리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한다.
하지만 그곳에서 자살 시도자가 폭증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읽었을 때, 나는 그것이 생명의 다리에 예정된 운명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N극은 S극을 끌어들이고, 좋은 일에는 마가 끼며, 사람을 믿는 사람에게 사기꾼이 꼬이듯, 희망의 글귀는 절망에 빠진 자들을 끌어당기게 되어 있으니까.
나는 생명의 다리를 만든 사람들의 마음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존재했음을 안다. 다만, 그 선하고 아름다운 감정은 자연의 법칙대로 부패했을 뿐이다. 그것은 쇠못이 산소를 끌어들여 녹이 슬고, 맛있는 음식이 균을 끌어들여 썩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남녀 간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이 아름답고 열렬할수록 실망과 권태, 증오를 끌어당기며 맹렬히 부패한다. 시간은 기어이 그것을 증명해 내고야 만다.
사람들은 사랑을 오래 간직하기 위해 결혼을 한다. 그것은 맛있는 음식을 냉동실에 넣어 두는 행위와 비슷하다. 사람에게는 뭔가 오래 보존하고 싶은 게 있으면 냉동실에 처박아 두는 본능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게 있다. 냉동실에 오래 놔둔 음식은 온갖 더러운 냄새를 스펀지처럼 흡수해서 결국 썩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다. 내가 열 살 때 엄마 아빠는 서로를 향해 10년 된 냉동 돈가스를 먹는 듯한 표정을 짓곤 했고, 내가 스무 살이 된 지금은 토하기 직전의 표정을 거리낌 없이 보여 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제 그런 표정엔 상처조차 받지 않는다. 말과 주먹에 의한 상처만으로도 충분히 아파서 표정만으로 상처를 받을 겨를이 없다. 두 사람은 운명적으로 열렬히 사랑해서 결혼했고, 사랑을 이루기 위해 나를 낳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운명적인 사랑이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그 개같은 최후만 믿는다. 엄마 아빠의 삶이, 그리고 주변에 널린 수많은 아줌마 아저씨들의 삶이 그 개같은 최후를 증명한다. 혼례식 날 처음 만나 백년가약을 맺든, 불같은 사랑에 빠져 결혼식을 올리든, 참담하거나 시시한 결말은 비슷하지 않은가. 로미오와 줄리엣도 그렇게 일찍 죽지만 않았다면, 서로의 눈만 마주쳐도 지긋지긋 몸서리치는 날과 반드시 맞닥뜨리게 됐을 것이다.
그래서 가끔 궁금했다. 어느 날 문득 내 곁으로 그따위 것이 찾아오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가장 달콤한 향을 풍기며,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힘으로 찾아와서 내 목줄을 틀어쥔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속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사기꾼 같은 감정이 결혼이라는 종착점까지 다다르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막을 것이다. 조금씩 썩고 썩어 가다가 결국에는 온몸을 문드러지게 하는 나병과 같은 그 감정이, 우리 엄마나 아빠 혹은 수많은 연인을 농락했던 것처럼 나를 농락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내가 온 힘을 다해 그것을 걷어차고 짓밟고 밀어낼 것이다.
한강 어딘가에는, ‘생명의 다리’라는 별명을 가진 다리가 있다고 한다.
나는 아름다운 별명을 가진 그 다리에 가고 싶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를 만났다.
1. 생명의 다리
그날은 우연이 고등학생으로서 맞이하는 마지막 날이었다.
살다 보면 ‘반드시 지켜야 할 일’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지키지 않아도 되는 일’들이 있다. 가령, 스테이크 대신 수프를 먼저 먹어야 한다든가, 학생은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든가, 사랑 행위는 사랑하는 사람하고만 해야 한다든가, 졸업식 때는 꼭 학교에 가서 꽃다발을 들고 사진을 찍어야 한다든가 하는 것이 그렇다.
그래서 우연은 졸업식 날 아침, 학교에 가서 꽃다발을 들고 엄마 아빠와 사진을 찍는 대신 마포 대교에 가서 멋지게 번지 점프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런 나쁜 짓을 하면 절대 안 된다고 믿고 살아왔는데, 생각해 보니 안 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결심하기까지만 어려웠지, 정작 집에서 마포 대교까지 오는 것은 코를 풀듯 쉬웠다.
물론 원하던 미대에 무사히 합격하고, 한껏 자유로운 시간을 만끽할 예비 대학생의 행선지로 마포 대교가 썩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그것도 새파랗게 멍들고 새빨갛게 얼어 터진 얼굴로, 영하 12도의 칼바람 속에, 코트도 걸치지 않은 홑교복 차림으로는 더더욱.
우연은 어깨를 움츠리고 힘없이 웃었다. 이 마당에 얼굴이 예쁜지 안 예쁜지, 옷이 어울리는지 안 어울리는지 생각하다니. 엄마 말마따나, 정신이 나간 것 같긴 하다.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포기하면 편하다는 말은 사실이다. 이제는 무슨 일이 터질지 걱정 안 해도 되니까.
물론 마음 한구석이 분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미안하다 우연아, 내가 잘못했다, 몸부림치며 통곡하는 엄마 아빠를 보고 싶긴 했다. 그 꼴을 딱 5분만 볼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 수도 있을 것 같다.
바보야. 바랄 걸 바라야지.
그들의 뇌 속에는 후회나 반성의 기능이 없다. 엄마는 ‘부모 가슴에 대못을 박은 년’이라 원망하며 울 것이고, 아빠는 학교로 달려가 ‘어떤 개같은 연놈들이 우리 애를 괴롭혔느냐.’ 하며 길길이 날뛸 것이다. 그 꼴을 보느니 아무것도 못 보는 게 낫다.
우연은 난간에 손을 짚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설을 앞두고 갑자기 날이 추워져서 한강은 가장자리부터 허옇게 얼어들고 있었다.
이제 남은 희망은 단 하나였다. 되도록 빨리, 되도록 안 아프게.
찬물에 심장이 멎는 게 빠를까, 머리가 깨져서 죽는 게 빠를까.
……어느 쪽이든 좋아. 익사만 아니면 돼.
우연은 의식이 있는 채로 겪어야 할 일이 분의 고통이 너무 무서웠고, 이런 생각이나 해야 하는 자신이 너무 처량했다.
“별거 아니야. 겁먹을 거 없어. 번지 점프랑 다를 게 뭐야?”
……발에 줄이 안 묶인 거 빼고.
“그냥, 하나 둘 셋! 점프! 하고 뛰면 되는 거야. 실제로 해 보면 하나도 안 무서울 거야.”
번지 점프 안 해 봤잖아.
“멍청아, 그래도 자이로드롭은 타 봤잖아.”
아, 맞다. 작년에 롯데월드 갔을 때 타 봤었지.
비명도 지를 수 없을 만큼 아주 짧은 시간에 모든 것이 끝났다. 그런 경험은 난생처음이었다. 놀랍도록 깔끔한 결말이었고, 내려오고 나니 너무 허망해서 주변을 한참 두리번거렸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비명은커녕 찍소리가 나오기도 전에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그러니 촌스럽게 질질 울거나, 듣지도 못할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대신 팔을 활짝 벌려 만세를 부르며 뛰어내리면 되는 것이다.
죽음이 반드시 슬픈 것만은 아닌데 사람들은 그걸 잘 모른다. 평생 죽도록 고생하고 죽을 만큼 아파하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왜들 그렇게 야단스레 울어 댔는지 모르겠다. 물론 보고 싶을 때 못 보게 되면 섭섭하긴 하겠지. 하지만 당사자가 고통에서 벗어날 권리는 남들이 보고 싶어 하는 권리보다 우선해야 옳다. 그러니까 존엄사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겠다.
우연은 자신의 죽음이 존엄사인지 아닌지 잠시 생각해 보다가 눈물이 핑 돌 것 같아 얼른 포기했다. 아무리 허세를 부리고 쿨한 척해도 입에서는 자꾸 울음이 터져 나오려 한다.
추위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벌겋게 언 손이나 스타킹조차 신지 않은 맨다리, 얇은 교복으로 감싸인 피부에서 느껴지는 것은 온통 아프다는 감각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오래전부터 통각만 존재했던 것 같다. 미각이든, 후각이든, 촉각이든, 청각이든, 우연의 모든 감각은 아파, 더 아파, 죽을 만큼 아파, 라고만 말했다. 이제 간신히 스무 살이 되었는데, 느낌으로는 이백 살쯤 처먹은 것 같았다.
자꾸 이렇게 우울하고 나쁜 생각만 하는 자신이 너무 싫었다. 힘들어도 건강하게 생각하고 밝게 웃어야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하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나쁜 생각만 든다. 알코올 중독, 담배 중독처럼 나쁜 생각만 하는 것도 중독이 아닐까 싶다.
……그래. 어차피 난 정상이 아니라니까, 뭐.
병신, 정신병자, 미친년, 사이코패스. 엄마와 아빠는 우연을 그렇게 불렀다. 친구들도 우연을 ‘4차원 또라이’, ‘우와 저 미친!’, ‘헐, 대박!’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우연은 그 말이 욕인지 칭찬인지,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따돌림인지 피해망상인지 늘 헷갈렸다.
자신의 행동이나 말이 옳은지 그른지, 상황에 맞는지 안 맞는지도 늘 헷갈렸다. 말을 하고도 후회하고 삼키고도 후회했다. 일을 저질러 놓고도 후회하고, 포기하고도 후회했다. 후회는 쉴 틈 없이 반복되었다. 그래서 우연은 늘 겁에 질려 있거나, 분노가 끓어오르거나, 짜증이 나거나,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모르는 몸에 들어가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운 좋은 영혼처럼, 리셋 버튼을 띡 누르자마자 되살아나는 게임 캐릭터처럼. 자신의 삶은 난도가 너무 높은 극악 코스로만 이루어져 있으니, 이런 코스에는 리셋 버튼이나 비상 탈출 버튼이 어딘가 숨겨져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 전, 우연은 드디어 숨겨진 버튼을 찾아냈다. 비상 탈출 버튼이었다. 이제 버튼을 눌러서 잠긴 문을 열고 안전하게 탈출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버튼은 오늘 아침 폭발했다.
“됐어, 괜찮아. 진짜 최후의 탈출 버튼은 남아 있으니까.”
생각해 보면 희망을 품고 버틴 기간만큼 더 손해였다. 판도라의 상자에 남은 희망이야말로 인간에게 남겨진 가장 끔찍한 저주 아니었을까?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하얀 난간으로 시선을 옮겼다. 두 손 사이로 단정한 명조체의 글자가 붙잡혔다. 자신의 절망을 끌어들인 희망, 마포 대교에 생명의 다리라는 별명을 선사해 준 아름다운 문장 조각들이 하나씩 하나씩 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잘 지내지?」
아, 씨…….
눈이 송곳에 콱 찔린 것 같다. 바보예요? 잘 지내는 사람이 여기 왜 오겠어요. 억지로 눌러둔 눈물이 그 한마디에 꾸역꾸역 기어 나온다. 어떡해. 어떡해. 우연은 발을 동동대며 눈을 꽉 감았다. 이제 송곳이 목구멍을 쑤셔 댄다. 도망치듯 걸음을 옮기자 난간에 적힌 글자들이 꼬리 치며 졸졸 따라온다.
「3년 전에 제일 힘들었던 게 뭐였는지 기억나? 기억 잘 안 나지?」
기억이 안 날 리가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인데요.
「아무튼, 바깥바람 쐬니까 좋지?」
이 글을 쓴 분은 아마 마포 대교에 혼자 와서 겨울바람을 맞아 보지 못한 모양이다. 그 바람은 지금 우연의 얼굴을 사과 껍질처럼 깎고 있었다.
그래, 까짓것 하면 되는 거야. 핵 버튼도 아니고 고작 탈출 버튼이야. 지구가 멸망하거나 그러지 않아. 그냥 누르면 돼. 번지 점프는 올라서자마자 바로 뛰어내려야 덜 무서운 거야.
하지만 우연은 자꾸 꾸물거렸다. 뱃속에 숨은 어떤 똥멍청이가 ‘날 뜯어말려 줄 문장이 하나라도 나오면 좋겠다…….’ 하면서 자꾸 다음 문장을 읽고 있었다. 문장은 대책 없이 아름답고 낭만적이었으며, 한강은 넓고, 다리는 길고, 난간의 높이는 하필 우연의 눈높이 정도였다.
「비밀 있어요?」
……있어요.
「가슴 아파서, 누구한테도, 하지 못한 얘기」
「시원하게 한번, 얘기해 봐요.」
가슴 아파서 못 한 게 아니고 무서워서 못 한 거예요…….
난…… 너무 무서워요.
결국 멈춰 서서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울면서 처량하게 죽기 싫은데, 상상 속에서 나는 멋지게 팔을 벌리고 번지 점프를 했는데, 현실은 난간의 글자 따위에 붙잡혀서 질질 짜고 있을 뿐이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으면, 한 번쯤은 시원하게 털어놔도 좋았을 텐데. 친구, 선생님, 경찰, 상담 전화, 왜 한 번도 속 시원하게 말해 본 적이 없었을까. 하다못해 아무에게든 인사라도 하고 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 남겨 두어야 할 말이 있다. 이대로 죽으면 엄마 아빠는 경찰서에 가서 철철 울면서 딸년이 철이 없어서 부모 마음에 대못을 박았다고 몰아갈 것이다. 진우연은 그렇게 홧김에 죽어 버린 철없는 년이 될 것이다.
그래선 안 된다. 엄마 아빠는 딸이 왜 시체로 돌아왔는지 제대로 알 권리가 있다. 눈물을 쏟아 내면서 반성하고 죽을 때까지 후회할 의무가 있다.
가방을 뒤져 연습장을 꺼냈다. 항상 갖고 다니는 그림 연습장이었다. 연습장을 편 우연은 시커멓게 언 손을 후후 불어 가며 글자를 적기 시작했다. 손이 너무 얼어서 글자가 제대로 써지지 않는다. 아이 씨, 아이 씨! 볼펜을 쥔 손을 치맛자락에 힘껏 비볐다. 이걸 쓰지 않으면, 엄마 아빠가 끝까지 발뺌할 텐데! 죽는 것보다 그게 더 분하다. 분하다고 또 눈물이 난다. 눈알 속 어딘가가 고장 난 것 같다. 자신을 졸랑졸랑 따라왔던 글자들이 비뚤비뚤 찌그러져 보인다.
「그럴 때 있잖아요, 모르는 사람,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막 하소연, 하고 싶을 때」
「지금 한번 해 봐요, 옆에, 전화기 있잖아요.」
글자 위로 물방울이 툭툭 떨어진다. 전화기는 없다. 집에 놓고 왔다. 지금처럼 마음 약해질까 봐. 누가 한마디만 해 주면 질질 울면서 집에 돌아갈까 봐.
이럴 줄 알았으면 휴대 전화 가져올걸. 마지막 리셋 버튼 누르기 전에, 선생님에게라도 전화해서 속 시원하게 얘기라도 다 해 볼걸. 아니, 아무 번호라도 막 눌러서 누구라도 받는 사람 있으면 맺힌 거나 다 털어 내 볼걸.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으면 창피할 것도 무서울 것도 없는데.
손으로 눈물을 문지르며 고개를 든 우연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어?”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다. 정말로 눈앞에 공중 전화기가 서 있었다.
「자, 당신의 얘기, 한번 해 봐요.」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 옆에 사람이 한 명 서 있었다.
* * *
평범한 아저씨였다. 강 건너 닥지닥지 포진한 고층 건물에 딱 어울릴 법한, 재미없고 어두침침한 양복 차림으로 강물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위기에 처한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뿅 나타날 거면, 차라리 슈퍼맨 코스프레가 나았을 텐데. 삼원색의 발랄함이라도 있었으면 조금은 유쾌했을지도 모른다. 우연은 머릿속에 떠오른 생뚱맞은 생각을 얼른 지웠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 이따위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정신병자 소릴 듣는 것이다. 우연은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황당한 생각이 너무 싫었다.
아저씨는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코트 자락이 찬 바람에 휘말려 퍽퍽 소리를 내며 다리를 후려갈기는 것이 그에게서 보이는 유일한 움직임이었다. 회색 털 코트와 목도리, 장갑과 신발로 온몸을 치밀하게 감싸고는 있지만, 난간에 기댄 채 강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있는 꼴을 보니 별로 따뜻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추위를 제대로 느끼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 모습을 보니, 조금 전에 보았던 문장이 다시 떠올랐다.
「자, 당신의 얘기, 한번 해 봐요.」
혹시 저 아저씨도 누군가 그렇게 말해 주길 기다리고 있는 걸까?
인물화를 자주 그리는 우연은 대상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습관이 있었고, 그 표정이나 동작의 속뜻을 유추하는 일에도 익숙했다. 사람의 몸은 혀만큼이나 풍부한 언어를 갖고 있는데, 혀와 달리 거짓말에는 미숙했다. 거짓에 미숙한 몸의 언어를 읽는 것은 대인 관계를 무서워하는 우연에게 세상을 읽는 하나의 창이 되어 주었다.
혹시 저 아저씨도 지금 나처럼 번지 점프를 꿈꾸는 걸까?
우연은 계속 흘끔대며 그를 곁눈질했다. 때마침 강 쪽에서 바람이 훅 밀어닥쳤고, 긴 코트 자락이 크게 펄럭였다.
……어?
눈이 번쩍 뜨였다. 두꺼운 코트에 감춰져 있던 몸의 실루엣이 드러나는 순간, 그를 지배하던 칙칙한 분위기가 오간 데 없이 사라지면서 미끈하고 유려한 선이 눈에 확 감겨 왔다.
우연은 그림을 많이 그릴수록 인간의 몸이 가진 선(線)에 집착하게 되었는데, 저 아저씨에게는 원초적일 만큼 뚜렷한 선의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우연은 여기까지 왜 왔는지 깜박 잊은 채 대놓고 그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일단, 아저씨는 키가 컸다. 아주 컸다. 마포 대교 난간은 우연의 눈높이 정도였는데, 저 아저씨는 난간에 팔꿈치를 대고 있었고, 149.7센티인 우연보다 머리 두 개는 더 커 보였다.
그는 키에 비해 얼굴이 작은 편이었고 몸의 비율도 좋았다. 아니, 좋은 정도가 아니라 완벽했다. 벨트 선을 기준으로 상반신과 하반신의 비율이 5 대 8, 소위 말하는 황금 비율이었다. 우연은 저렇게 완벽한 황금비를 가진 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잡지에서 보는 모델들처럼 비정상적으로 마른 체형이 아니라 적당한 부피감까지 느껴졌다. 아마 저 옷 속에는 분명 우아한 선과 풍부한 양감을 가진 몸이 숨어 있을 것이다.
찰칵.
머릿속에서 셔터가 터진다. 우연은 번지 점프 계획을 깜박 잊은 채, 손에 들고 있던 연습장을 황급히 넘겼다. 조건 반사처럼 손끝에서 미끈한 선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길고 짧고 굵고 가는 선들이 미끄러진다, 달린다, 날아간다, 화악 감겨 맺힌다. 사악, 사그락, 삭. 타타타탓. 몇 개의 선으로 머리, 등, 엉덩이, 다리의 뼈대를 순식간에 잡아낸 우연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라인 진짜 예술이다.
어깨에서 등, 허리, 다리로 뻗어 내려가는 몸의 선은 굳건하면서도 물 흐르듯 유려했다. 다만 코트의 어깨 덮개 때문인지 어깨 폭이 지나치게 넓어 보이는 게 조금 아쉬웠다.
사그락, 삭, 삭, 사악, 스스스, 탓탓탓탓.
점점 궁금해졌다. 저 아저씨는 왜 여기 온 걸까. 이런 추위에 마포 대교 한복판까지 나와 강을 들여다보며 서 있으려면 어지간한 이유로는 안 될 텐데.
저 아저씨도 혹시 누군가에게 머리채를 잡히고 쌍코피 터지도록 따귀를 맞았을까? 백치, 머저리, 정신병자, 사이코패스 소리라도 들은 걸까?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몹쓸 짓을 당해 왔을까?
눈을 깜박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럴 리가 없다. 저 아저씨는 나처럼 작고 약해 빠진 여고생이 아니다. 저런 아저씨를 때리려면 저도 반 죽을 걸 각오하고 덤벼야 할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읽어 낼 수 없었다. 아쉬웠다. 저 얼굴을 좀 더 가까이, 정면에서 볼 수만 있다면 좀 더 많은 것을 읽을 수 있을 텐데. 하지만 더 가까이 다가갔다간 바로 들키겠지. 그럼 끝장이다.
우연은 빠르게 스케치를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오른쪽으로는 한강이 느릿하게 흘렀고 왼쪽으로는 차들이 무서운 속도로 지나갔다. 그 사이로 시간은 느릿하거나 빠르게 흘러갔다.
갑자기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귀에 떨어졌다.
“거기 학생, 지금 뭐 하는 겁니까?”
헉, 드, 들켰나?
우연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다가 빳빳하게 얼어붙었다. 차갑게 날이 선 눈동자가 우연을 정면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반듯하고 수려한 얼굴이었지만 눈가엔 그늘이 짙었고, 표정은 오금이 쪼그라들 정도로 써늘했다. 머리가 핑그르르 돌았다.
……어떡해. 나 어떡해.
우연은 허둥지둥 뒷걸음질하다가 난간에 부딪혀 연습장을 놓쳤다. 연습장은 저 앞쪽으로 튕겨 바닥에 떨어졌다. 공포에 휩싸인 우연은 주우러 가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서 울상만 지었다. 턱이 달달 떨렸다.
“어, 아, 아저, 아저씨, ……그게.”
그의 미간에 굵직한 주름이 잡혔다. 순간 우연은 긴 코트 안에 감춰져 있던 양복이 아무 무늬도 없는 검은색이고, 턱 끝까지 바짝 졸라맨 넥타이 역시 새까만 색임을 뒤늦게 발견했다.
……그럼 혹시?
조폭이 아닌 다음에야 까만 양복, 까만 넥타이로 출근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저런 복장은 회사보다 장례식장 같은 곳에 더 어울릴 것이다. 살벌한 목소리가 재차 튀어나온다.
“지금 뭐 하냐고 물었는데?”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겁에 질리면 머리가 텅 비어 버리는 것 같다. 몰래 훔쳐보고 그리는 게 그렇게 큰 잘못인가? 몰카도 범죄니까 몰래 그림을 그리는 것도 범죄일까? 그럼 나 지금 경찰서에 끌려가는 건가? 두 손 모으고 싹싹 빌어야 할까?
……제발 누가 알려 줬으면 좋겠다.
공포는 걷잡을 수 없이 부풀었다. 당장에라도 저 키 큰 아저씨가 달려와 머리채를 붙잡고 주먹질을 할 것만 같다. 아빠처럼 배를 펑, 걷어찰 것도 같다. 그때마다 우연은 붕, 날아가 화장실 문에 부딪히곤 했다. 그러니 아빠보다 훨씬 덩치 큰 저 사람에게 얻어터졌다간, 분명 대륙 간 탄도 미사일처럼 날아갈 것이다. 미지근한 눈물이 때 묻은 운동화 끝으로 툭툭 떨어진다.
그런데 이상하다. 캐묻는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발발 떨며 고개를 드니 우연을 노려보던 눈이 크게 벌어져 있다. 그의 시선이 퉁퉁 부은 눈과 새빨갛게 얼어 터진 얼굴, 스타킹도 안 신은 맨다리, 얄따란 교복을 차근차근 짚어 나간다.
“……이런.”
아저씨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젓더니 우연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우연은 황급히 뒷걸음질했다. 그가 한 걸음 다가오면, 우연은 두 걸음 뒷걸음질했다. 그의 보폭은 우연의 두 배쯤 되는 것 같았다. 다시 한 걸음, 또 한 걸음. 우연은 서너 걸음 후다닥 뒤로 뛰었다.
아저씨는 다가오기를 멈추고 어색하게 손을 들었다. 알았어. 겁을 주려는 건 아니야. 그냥 거기 서 있어요. 어색하게 내민 손이 그렇게 말했다.
마, 맙소사, 안 돼!
소리 없는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가 허리를 굽혀 연습장을 주워 펼친 것이다. 안 돼요, 제발 보지 마세요! 우연은 입을 틀어막은 채 발을 동동 굴렀다.
다른 사람이 그림을 구경하는 것이 두려웠다. 조금 전 그린 아저씨의 모습은 그나마 러프 스케치 상태지만, 앞에는 그동안 그려 둔 그림이 수십 장이나 들어 있었다. 사진처럼 정밀하게 묘사된 인물화가 대부분인데, 그로테스크한 구도와 묘사 때문에 ‘정신병자의 그림’, ‘증오를 유발하는 그림’으로 불렸다. 그림의 모델이 된 친구들은 눈썹을 우그리며 ‘미친…….’이라는 말로 소감을 끝내곤 했고, 엄마 아빠는 대놓고 그림을 찢으며 화를 냈다.
아 맞다!
우연은 속으로 다시 한번 비명을 질렀다. 그것 말고도 방금 엄마 아빠에게 남겨 둔 말이 있었다. 앞으로 영원히 안 볼 거라 생각해서 그동안 못 했던 말을 속 시원하게 다 갈겨 놨는데. 어떡해. 난 몰라. 눈앞이 노래졌다.
「김현주
엄만 좋겠다. 하나뿐인 딸이 미친년이라……
……백치 천치 머저리 정신병자 사이코패스라……
……태어난 게 내 탓이야? 둘이 좋아서 낳아 놓……
……소원대로…… 나가 죽을 테니까 엄마도……
진형식
……왜 사람을 맨날 개 패듯…… 뱀술 처먹더니 눈에 뵈는 게……
……탬버린 아줌마…… 체육관 아줌마…… 같이 자니까 좋아?
……채팅 앱…… 더러운…… 확 에이즈 성병에 잔뜩 걸려서 뒤져……
성교육 안 해도 돼…… 드럽고 소름 끼쳐, 재수 없는……
미대 보내 준다더니…… 울면서 비니까 신나지? 정말 뒈지니까 신나지?」
이럴 줄 알았으면 쓰지 말걸. 죽어도 쓰지 말걸.
우연이 입술과 손톱을 번갈아 물어뜯는 동안, 아저씨는 연습장을 뒤적이며 자신의 그림을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아저씨는 다른 그림에는 관심이 없는 듯, 연습장을 넘기는 속도는 빠른 편이었다.
드디어 움직임이 멎었다. 자기 그림을 찾은 것이다.
그는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난간에 기대서 있는 자신의 러프 스케치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잠시 후 아저씨가 연습장을 덮고 고개를 들었다. 표정은 여전히 딱딱하고 눈썹도 계속 찌푸린 상태였다. 하지만 눈물로 얼룩지고 퉁퉁 부어터진 우연의 꼬락서니를 보더니, 하려던 말을 지그시 삼켜 넣는다.
잠시 후, 그의 입술 사이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춥지 않아요, 학생?”
“아? 네?”
어찌나 뚱딴지같은지, 우연은 몹시 당황했다. 아저씨의 팔이 고무고무처럼 뻗어 나와서 뺨을 후려갈겼어도 이보다는 덜 당황했을 것 같다.
“오늘 영하 12도인데 옷이 너무 얇아 보여요. 바람도 이렇게 센데.”
“아, 안 추워요. 괘, 괜찮아요. 하나도 안, 안 추…….”
“혹시 무슨 일이 있어요?”
제기랄. 눈치챘나 보다. 세종 기지 앞에서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우연은 숨겨 둔 이야기를 실제로 털어놓는 것이 이렇게 부끄러울 줄은 몰랐다.
“……정말 괜찮아요! 오늘이 졸업식이라 그냥 기념으로 한번 와 본 거예요. 저, 저는 굉장히 괜찮고, 아주 정상이에요.”
“글쎄, 이렇게 어린 학생이, 이렇게 추운 날, 그런 얼굴로…… 졸업식 날 학교 대신 한강에 오는 걸…… 아주 정상이라고 하긴 ……좀 어려울 거 같은데…….”
아저씨는 신중하게 말을 고르는 것 같았다. 부모님이 여기 온 거 알아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 걸 보면 생각과 배려가 깊은 사람인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정상이니 비정상이니 판단당하는 일은 아팠다. 그것은 우연의 아킬레스건이었고, 아빠, 엄마, 친구들이 하는 말로도 충분했다. 우연은 바늘에 찔린 고양이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저 그렇게 어리지 않아요. 키가 좀 작아서 그렇지, 고등학생이에요.”
“음, 중학교 졸업이 아니었나요? 미안해요. 그래도 고등학생 정도는 보통 어리다고 하지 않을까?”
아저씨가 가볍게 웃는 모습에 짜증이 치솟았다. 나이 적다고 무시하나? 아저씨 아줌마들은 교복 입은 학생이라면 일단 꼰대질부터 하려는 경향이 있다.
“아뇨, 절대 어린 거 아니에요. 저 오늘이 졸업이고, 아저씨랑 똑같은 성인이에요. 아저씨네 애들이 몇 살인지는 모르겠지만요, 교복 입었다고 무조건 어린애 취급 하면 꼰대 아재 소릴 듣게 될 거예요.”
아저씨의 입이 살짝 벌어진다. 입술이 잠시 들썩이더니 이내 짧은 헛웃음이 튀어나온다.
“학생, 나 그렇게 나이 많지 않아요. 애도 없고, 아니, 일단 결혼도 안 했어. 아직 젊어요. 겨우 서른둘이야.”
뭐, 젊다고? 나이를 서른둘이나 먹어 놓고? 진심 뻔뻔하다. 우연은 저도 모르게 속의 말을 해 버리고 말았다.
“그거 보세요. 중년 맞잖아요.”
“……허.”
아저씨는 장갑을 낀 손으로 입을 문지르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마 저 동작은 당황했다는 뜻이겠지. 그런데 왜? 사실을 사실대로 말한 것뿐인데 왜 저런 반응일까?
아, 설마 자기가 중년인 걸 모르나?
……아, 아니, 혹시 중년이라고 대놓고 말하면 버르장머리 없는 건가?
우연은 바로 겁에 질렸다.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면, 분위기에 맞게 제대로 대답을 한 건지 몰라서 늘 긴장했다. 아빠의 반응은 일관성이 없어서 똑같은 말을 해도 어떤 때는 재미있다며 웃었고, 어떤 때는 아가리에서 나오는 대로 씨불인다고 손을 올렸다. 대답을 바로바로 안 해도 화를 냈다. 저 아저씨도 아빠처럼 화를 내려나. 우연은 우물쭈물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양보했다.
“그럼, 아저씨 나이도 있으시니깐 제가 어린 거로 칠게요…….”
“이봐요, 학생.”
학생이라는 호칭도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저씨, 저 이제 학생 아니에요. 오늘 졸업했다니까요.”
“그럼 뭐라고 부를까요?”
“제 이름은 진우연이라고 해요.”
“……좋아요, 진우연 씨.”
아저씨가 말을 멈추고 우연을 내려다보며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짧게 웃었다. 불러 놓고 보니 좀 어색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우연은 그를 마주 보며 실쭉 웃는 것으로 새로운 호칭을 받아들였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자신을 진우연 씨, 하고 불러 준 느낌이 너무 특별하고 좋았다.
“그래요, 나는 한이원이라고 해요. 저 여의도에 있는 회사에 근무해요.”
불렀던 용건을 잊어버리고 난데없이 통성명을 하게 된 아저씨가 뒤늦게 머쓱하게 웃는다. 이원, 한이원, 우연은 큰 비밀이라도 알게 된 것처럼 고개를 숙인 채 입속으로 몇 번 이름을 불러 보았다. 입술에 순하게 올라가고 혀에 부드럽게 스며드는 이름, 예쁘고 착하게 느껴지는 이름이었다. 고작 이름을 알게 된 것뿐인데, 거리가 껑충 가까워진 것 같다.
고개를 드니 이원 아저씨가 웃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가슴에 모락모락 열기가 핀다. 그러고 보니 아저씨의 홍채 색깔이 특이하다. 세피아, 초콜릿을 연상시키는 어둑하고 부드러운 갈색, 우연이 가장 달콤하고 따스하게 느끼는 색이었다.
……어쩐지, 눈웃음이 유난히 부드럽고 따뜻해 보인다 했더니.
“잠시만요.”
아저씨가 조심스럽게 다가오더니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서 우연의 어깨에 조심스레 걸쳐 주었다. 아까부터 이걸 해 주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 같다. 안에 털이 덧대어진 코트는 따뜻하다기보다 무거웠고, 생각보다 훨씬 길어 바닥에 닿았다. 허수아비가 된 것 같았다.
아저씨의 목에 걸려 있던 검은 목도리까지 얼굴에 감기자 우연은 당황했다. 비싸 보이는 목도리에 눈물 콧물 따위를 묻힐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고개를 저어도 아저씨는 기어이 목도리를 칭칭 감아 주었다. 목도리엔 그의 체온과 달콤하고 나른한 향이 조금 남아 있었다. 우연은 목도리에 더러운 것을 묻히지 않으려고 목을 쭉 빼고 고개를 하늘로 쳐들었다. 하, 하하, 괜찮아요. 아저씨가 다시 웃는다.
“손 좀 줘 봐요.”
아저씨의 입에서 나오는 입김이 뺨에 와 닿는다. 하얀 입김 속에는 옅은 민트 향기, 아마도 치약이나 구강 청정제의 냄새일 것이 분명한 산뜻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우연이 코트 소매에 손을 넣어 내밀자 아저씨는 한쪽 무릎을 접고 앉아 허수아비처럼 늘어진 소맷단을 걷어 주었다. 그리고 어린아이의 옷을 입히듯 코트의 단추도 하나하나 목 끝까지 바짝 채워 주더니 장갑까지 벗어서 끼워 주었다. 장갑 안쪽은 새하얗고 보드라운 털로 덮여 있었는데 아저씨가 두 손을 꼭 쥐자 느낌이 이상했다. 따뜻한 것 같기도 하고 아픈 것 같기도 했다. 손을 꼼틀거렸지만 아저씨는 손을 놔 주지 않았다. 갑자기 난간을 뛰어넘을까 봐 그러는 것 같았다.
우연은 드디어 용기를 내서 그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저씨, 아, 아까 아저씨 그림 보고…… 화 안 나셨어요?”
“안 났어요. 그림 멋지던데, 왜 화가 나야 할까?”
“사람들은 제 그림을 싫어해요. 증오를 유발하는 그림이고, 정상적인 그림이 아니래요.”
갈색 눈동자가 눈꺼풀에 반쯤 가려지면서 음, 하는 낮은 한숨 소리가 흘러나온다.
“사람은 누구나 일반적이지 않은 구석이 있어요. 대체 누가 그런 험한 말을 해요?”
아저씨의 말투는 여전히 침착하고 안정적이었다. 그 안정감은 단순히 목소리가 굵다거나 낮다거나 하는 데서 오는 느낌만은 아니었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과 오랫동안 다듬은 품위, 그리고 어리고 겁에 질린 상대에 대한 염려와 배려가 고스란히 스며든 결과물이었다.
“저기 아저씨, 이…… 있잖아요, 엄마가 그러는데.”
“그래요, 어머니가.”
“제, 제가, 정신……, 사이코패스고…… 정신 분열증이래요. 흐으, 씨.”
말을 맺기도 전에 눈물이 굴러떨어졌다. 정신 병원에 평생 갇혀 지내거나, 귀를 자르거나, 남을 죽이거나, 자살하거나. 우연은 엄마가 예언해 준 찬란한 미래를 생각보다 많이 무서워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아, 앞으로 그, 그림 그리지 말래요. 내, 내가 그림 때문에 미치는 거래요. 더 그리면 손모가지를 잘라 버린대요…….”
아저씨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쯤에서 멈춰야 했다. 저 아저씨는 오늘 나를 처음 만났어,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누군가의 장례식장에 갔다 오는 길이라면 즐거운 기분은 아닐 거야. 그러니 이쯤에서 이놈의 주둥이를 닫아야 해.
그런데 한번 쏟아지기 시작한 울음은 도저히 멈춰지지 않았다. 짠물을 잔뜩 채운 풍선이 뇌 속에서 터진 것 같았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면서 안간힘을 써 보았지만, 눈물은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난간이 주절대던 말이 맞았다. 가슴 아파서 누구한테도 하지 못한 말이 숨어 있던 거였다. 진짜 마음은 번지 점프 같은 거 하기 싫었던 거였다. 지나가는 사람 아무라도 붙잡고 하소연하고 싶었던 거였다.
그리고 이 아저씨는 재수 없게, 혹은 개같은 운명에 의해 이 자리에 있었던 것뿐이다.
우연은 그렇게 손을 잡힌 채 한참 흐느꼈고, 아저씨는 그 자세 그대로 꼼짝 않고 기다려 주었다. 우연이 우는 걸 1초도 참지 못하는 엄마 아빠만 봐서 그런지 아저씨의 차분한 기다림은 너무나 신기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천천히 말해 봐요. 얼마든지 울어도 괜찮으니까, 숨 길게 들이쉬고, 그렇지. 길게 내쉬고, 그래요. 잘했어요.”
우연은 그가 시키는 대로 울고, 시키는 대로 숨을 길게 들이쉬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울음소리가 잦아들자 그는 그제야 허리를 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거대한 나무가 하늘로 훅, 치솟는 것 같았다.
“이쪽 끝으로 내려가면 핫초콜릿이 맛있는 카페가 있어요. 그쪽으로 가면서 찬찬히 얘기해 주는 건 어때요? 하고 싶은 얘기, 전부 다.”
눈앞에서 일렁이는 초콜릿색 홍채가 황홀하게 아름다웠다.
* * *
다리에서 내려온 아저씨는 택시를 잡아 우연을 태웠다. 빌딩 숲 사이, 좁은 골목 속에서 ‘민트코코’라는 촌스러운 이름의 나무 간판이 나타났다. 아저씨가 김이 보얗게 서린 유리문을 열어 주자 딸랑, 하는 풍경 소리가 나며 따뜻한 기운이 훅, 밀려 나왔다.
온기란 신기한 것이었다. 우연은 자신의 장대한 계획이 실패하고 아저씨의 음모가 성공했음을, 이 따끈한 온기로 실감할 수 있었다. 계획이 어그러진 것이 너무 고맙고 안심이 되어 눈시울이 후끈 더워졌다.
“어렸을 때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와 봤던 곳이에요. 난생처음 핫초콜릿을 먹어 봤는데 세상에서 그렇게 맛있는 건 처음이었죠.”
코트를 양보하고 다리 끝까지 걸어왔던 아저씨의 얼굴은 푸르게 얼어 있었지만 웃음은 여전히 따뜻했다.
난로 곁에 앉아 작은 커피 잔을 받아 든 그의 얼굴에 천천히 혈색이 돌아오는 것이 보인다. 핫초콜릿이 담긴 커다란 머그잔을 쥔 우연의 손도 점점 따뜻해진다. 구름처럼 부풀어 오른 거품 속에 새하얀 마시멜로가 동실동실 떠 있었다. 열기에 녹진녹진 녹아 흩어지는 하얀 마시멜로가 자신의 마음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콤하고 진한 음료가 입과 목을 타고 배 속으로 흘러 들어간다. 따끈따끈한 열기가 혹혹 퍼지며 우연의 언 몸을 달군다. 달고 따뜻한 것에는 마력이 깃들어 있는 게 틀림없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음식이든, 그 무엇이든.
아저씨 역시 난로 옆에서 불을 쬐며 조용히 커피를 마신다. 지금 우연의 이야기를 들으려는 게 목적이 아니라 몸을 녹이는 게 목적이라는 듯 무심하고 담담하다. 참 신기했다. 침묵이 한참 이어지는데도 편안했고, 대답을 재촉당하는 기분도 들지 않는다.
드디어 잠겨 있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오늘은 서림예대 등록 마감일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