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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18/18)
  • Epilogue.

    이제 겨우 아기 티를 벗은 어린 소년이 양팔에 서류를 가득 든 비서를 대동한 채 서늘한 얼굴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제게 인사를 건네는 직원들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사방이 유리로 둘러싸인 긴 복도를 빠르게 걸어갔다. 아이답지 않은 날카로운 눈빛에는 이미 짜증이 가득했다.

    “인계 지부장은 대체 뭐 하는 인사길래 수사관 넷이 동시에 사라지는 것도 몰라? 제정신이야?”

    “아무래도 신입들이라 막상 인계로 돌아가고 보니 유혹을 이기기가 어려웠나 봅니다.”

    “그러니까 애초에 신입들로만 팀을 꾸리지 말았어야지! 그 정도는 상식 아니야? 한두 번 실수했으면 정신을 더 바짝 차려야지, 지부장 노릇이 벌써 몇 년짼데 아직도 그렇게 일처리가 엉성하면 어떡해?!”

    미간을 확 찌푸리며 버럭 소리를 내지르던 소년이 복도 끝에 다다르자 한껏 긴장한 얼굴로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는 조금 느슨해진 넥타이를 타이트하게 조이며 재킷의 단추를 단정하게 채웠다. 수십 년 동안 꽤나 혹독하게 심장을 단련시켜 왔지만, 아무런 장식이 없는 은백색의 커다란 문 앞에 설 때면 언제나 처음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곤 했다.

    “마왕님. 태무영입니다.”

    방금 전까지 있는 대로 신경질을 부리던 무영이 못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도착을 고하자, 보기만 해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육중한 문이 소리도 없이 스르르 열렸다. 비서에게서 서류를 받아 든 무영은 마른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신속하게 집무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명계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전면창 앞에 서 있던 지원이 슬쩍 고개만 돌려 무영의 인사를 받고는, 들고 온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으라 가볍게 눈짓했다. 즉각적으로 지시에 따르며 가만히 눈치를 살피니 다행히도 생각했던 것만큼 살벌한 기세는 아니었다. 가끔 그가 진심으로 분노할 때면 명계 전체가 화염에 휩싸이는 경우도 있는데, 오늘은 그렇게까지 일이 커질 위험은 없어 보였다.

    “죄송합니다, 마왕님. 제가 아랫사람 단속을 제대로 못 해서….”

    “태 국장.”

    “네, 마왕님.”

    간단하게 무영의 말을 자른 지원이 손목을 들어 올려 시간을 확인하더니 약간 조급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인계 지부장은 당장 불러들여서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 후임자는 내가 후보들을 천천히 살펴보고 결정할 테니까 업무는 일단 지부장 보좌한테 대행하라고 하고. 그리고 앞으로는 수사팀에 반드시 선임 수사관을 한 명씩 포함시키도록 해. 이제 그 정도 인력 풀은 되잖아?”

    “네, 물론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도망친 수사관들은 사흘 내로 잡아 와.”

    “…알겠습니다.”

    염마왕의 명령에 감히 토를 달거나 반기를 들 수는 없었기에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면서도, 무영은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일전에 비슷한 사례가 발생했을 때는 당장 하늘이라도 쪼갤 듯 분기탱천해서 반나절 안에 잡아 오라고 추상같은 명령을 내렸던 지원이었다. 일각이라도 늦어지면 연대 책임을 묻겠다는 살벌한 첨언에 수백 년간 포청에서 추격조로 활동했던 감독 수사관 전원이 출동해야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왜 이렇게 느긋하시지? 화를 안 내시니까 그건 그것대로 또 불안한데…. 수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오늘부터 며칠 동안 자리를 비울 거야. 가급적이면…. 아니, 절대로 연락하지 마. 연락해도 응하지 않을 테니까.”

    “…네? 호, 혹시 무슨 큰일이라도….”

    “사생활.”

    짧게 대꾸한 지원이 손가락을 딱 튕기며 집무실 중앙에 커다란 불길을 일으키더니 삽시간에 자취를 감췄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말 한마디도 붙여 보지 못한 무영은 한동안 어리둥절한 얼굴로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지원이 염마왕으로 재직한 지난 50년 동안, 그가 명계와의 연결을 완전히 끊었던 것은 중천주의 장례식이 열렸던 기간이 유일했다. 아내와 사별한 후로 여자는 그림자도 안 쳐다보시던 분께 대체 무슨 사생활이…. 못 견디게 궁금했지만, 끝내 답을 알 수는 없었다.

    “차 대표.”

    사랑채 앞 정원에서 여유롭게 손님을 맞이하고 있던 시윤이 저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반색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 회장님, 오셨습니까.”

    “별일 없지?”

    “그럼요.”

    얼굴에 여유가 전혀 없는 지원을 보며 시윤이 속으로 조용히 혀를 찼다. 평소라면 주위의 시선을 의식해서 제게 적당히 존대했을 지원이 그런 건 아예 신경도 안 쓰는 걸 보니 애가 닳을 대로 닳은 모양이었다.

    “어디에?”

    “아마도…, 운휴재 쪽에.”

    “그래.”

    성마른 손길로 시윤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 지원이 휙 몸을 돌려 사라지자, 시윤의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들이 흥미로운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아무리 봐도 서른을 넘었을 것 같지 않은 젊은 남자가 막 오십 줄에 들어간 제니스 컴퍼니의 대표에게 거침없이 하대하는 게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그들의 관계가 너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저분은 대표님과 어떤 관계이시길래….”

    “저희 집안의 최고 어른이십니다. 보이는 것만큼 젊지는 않으세요.”

    “어머나, 확실히 뼈대 있는 집안은 다르시네요. 요즘 같은 세상에 항렬을 다 따지시고.”

    뼈대…. 사실 우리 집안처럼 족보가 개판인 집안도 거의 없을 텐데…. 가만, 아버지가 올해 팔순이시던가? 하루 이틀 일도 아니지만, 저렇게 팽팽한 얼굴을 보고 있으면 가끔 징그러울 때가 있다니까. 한쪽 입꼬리가 비죽이 들리려는 걸 간신히 참아 낸 시윤이 최대한 겸손한 표정을 만들어내며 점잖게 웃었다.

    “그렇지도 않습니다.”

    “대표님께서 회장님이라고 부르시던데…. 어떤 사업을 하시나요?”

    “꽤 규모가 있는 보안 업체를 운영하고 계십니다.”

    눈곱만큼도 당황하지 않은 시윤이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부모님의 정체에 대해 둘러대는 건 워낙 역사가 깊은 일이라 이제는 그다지 당황스러울 것도,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뭐, 지옥을 다스리고 있다고 할 수는 없잖아? 나도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 있는데 실없는 농담이나 하는 사람으로 취급받는 건 곤란하니까. 상대가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건 더 난감한 일이고.

    한편, 아들을 희대의 사기꾼으로 만든 장본인은 아들의 존재는 벌써 잊은 채 별채 방향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지난 20년 동안 오매불망 기다려 온 순간을 맞이했다는 기쁨에 다른 건 안중에도 없었다.

    중천주로서의 임기가 끝나던 날 조용히 숨을 거뒀던 가온이 제니스 컴퍼니의 협력 업체 사장의 딸로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을 확인한 건 불과 3년 전이었다. 시윤이 내미는 사진 한 장을 받아 든 지원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다가,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한 끝에 겨우 꽉 잠긴 목소리를 냈었다.

    - 이름이….

    - 홍나연입니다. 데이원물류 홍원섭 사장의 딸이고, 올해 우리 나이로 열일곱이 되었죠. 어떻게 자리를 한번 만들어볼까요?

    - 아니. 성인이 된 후에 만나겠다. 지금 만나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 저는 어머니가 보고 싶은데요.

    - 네가 만나는 건 말리지 않겠지만, 내 눈에는 띄지 않도록 해.

    환생 여부조차 알지 못한 상태로 마냥 기다리기만 했던 17년보다, 지척에 두고도 만나지 못했던 3년이 훨씬 더 길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시윤은 나연이 법적으로 성인이 되는 시점에 맞추어 협력 업체 대표들과 그 가족들을 자택으로 초대했고, 특히 데이원물류 측에는 동반 가족에 대해 여러 번의 확인을 거쳤다. 그게 바로 오늘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며 하늘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할 무렵, 지원은 대청마루 한구석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나연을 발견했다. 기억 속의 얼굴과 똑같이 덤덤한 표정이었지만, 눈빛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후원을 둘러보는 시선에 혼란스러움이 가득했다.

    덩달아 표정을 흐린 지원이 절로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억지로 삼켰다. 뭔가 기억이 난 걸까? 괜한 짓을 했나? 무영당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났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렸어. 더 다가가기도 조심스러웠던 지원이 걸음을 멈춘 순간, 마치 거짓말처럼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낯선 사람을 만나는 일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나연에게 파티라는 건 참으로 곤혹스러운 이벤트였다. 차시윤 대표의 아들이 저랑 동갑이라는 사실과 제니스 컴퍼니 쪽에서 최근 들어 데이원물류를 유독 신경 쓰는 것 때문에 부모님은 공연한 기대를 하고 있지만, 나연은 차 대표의 아들에게 이성으로서의 감정을 털끝만큼도 느끼지 못했다. 몇 번 우연히 마주칠 기회가 있었는데, 희한하게도 나연은 동갑내기인 그가 마냥 귀엽기만 했다.

    훤칠하게 참 잘 컸구나. 성품도 반듯해 보이고. 마치 할머니가 어린 손자를 보는 것 같은 감상이 들 따름이었다. 이성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저를 어떻게든 차 대표의 아들과 엮어 보려는 부모님의 안쓰러운 노력에 그저 한숨만 나오던 나연은, 부모님이 지인을 만나서 인사를 나누는 틈을 타서 슬그머니 파티장을 빠져나왔다.

    반면 무영당 그 자체는 나연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난생처음으로 무영당에 방문한 나연은 사실 동네 어귀에 들어설 때부터 기이할 정도로 맹목적인 호감을 느꼈는데, 각종 야생화가 피어 있는 정원에서부터 기둥의 무늬와 기와의 색깔까지 어느 하나 빼놓지 않고 다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나 여기가 왜 이렇게 낯이 익지? 결코 허락도 없이 남의 집을 돌아다니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이 여기저기 구경하던 나연이 소박한 돌길을 따라 걷다가 이름처럼 편안한 느낌을 주는 고아한 별당 앞에 멈춰 섰다. 雲休齋(운휴재)…. 누가 지었는지 굉장히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마루에 앉아 연못에 비친 붉은 구름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던 나연이 문득 인기척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연못 건너편에는 외모에 별 관심이 없던 나연의 눈에도 상당한 미남으로 보이는 남자가 꽤나 복잡한 얼굴로 서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도 이상하게 낯설지가 않은 남자를 빤히 쳐다보던 나연이 문득 정신을 차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정원이 너무 예뻐서 구경을 하다가 그만….”

    “괜찮으니 앉아요. 어린 친구들 취향은 아닐 텐데, 좋게 봐줘서 고맙네요.”

    아름다운 얼굴에 걸맞은 나직하고도 근사한 목소리에 나연은 귀가 조금 간지러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왠지 그리운 느낌이 드는 다정하고 따뜻한 음성이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내가 옆으로 가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한참 어린 저에게 정중하게 묻던 남자는 천천히 걸어오더니, 행여 제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염려가 되었는지 조금 거리를 벌리고 앉았다.

    “대학생?”

    “네. 올해 신입생입니다.”

    “전공은?”

    “공예과에요. 도예 전공이요.”

    “도예….”

    남자가 갑자기 웃는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눈을 동그랗게 뜨던 나연은 그가 저를 은근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불현듯 심장이 덜컥거렸다. 면역이 전혀 생성되지 않은 종류의 일이어서 숨 쉬기가 조금 불편해졌을 정도였다. 다행히도 남자는 나연이 부담스러워하는 걸 기민하게 알아차리고는 곧바로 시선을 거뒀다. 하지만 질문 공세는 계속 이어졌다.

    좋아하는 음식, 즐겨 듣는 음악, 최근에 제일 재밌었던 일,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지…. 남자는 나연의 대답을 경청하며 대부분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미소를 지었고, 때로는 작은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별것도 아닌 대화가 너무 즐거워서 시간 가는 줄 모르던 나연이 어느샌가 해가 완전히 진 것을 확인하고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내가 처음 보는 사람과 이렇게 오래 떠들었다니….

    “이제 그만 가 봐야겠어요. 부모님이 찾으실 것 같아요.”

    “그래요.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을게요.”

    “물어보세요.”

    “이름이…, 뭘까?”

    “나연이요. 홍나연.”

    “홍나연, 예쁜 이름이네요. 나는 차지원이에요.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요. 진심으로, 아주 많이.”

    차지원…. 왠지 입에 착 붙는 이름을 저도 모르게 여러 번 중얼거리던 나연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이상하게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이제 정말 가야 되는데…. 휴대폰도 놓고 와서 엄마가 엄청 걱정하고 있을 텐데….

    하지만 그저 온화하게 웃으며 저를 쳐다보고 있을 뿐인 지원의 시선이 제 발목을 꽉 붙들어 맨 것 같아서 도저히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어쩌지? 이대로 가면 안 될 것 같은데…. 하아, 나 이 사람을 한 번 더 만나고 싶어. 하지만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초조하게 입술을 달싹이는 나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지원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여전하시네, 우리 마나님. 표정이 참 솔직하기도 하지. 난 사람들이 저 얼굴을 두고 포커페이스라고 하는 걸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

    “나연 씨.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네.”

    일말의 고민도 없이 나오는 즉답에 작게 소리를 내어 웃던 지원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로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나연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며 한결 진지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내일 뭐 해요? 약속 있어요?”

    “아니요, 없어요.”

    “그럼 우리 내일 만날래요?”

    “네.”

    “아침부터 봐도 괜찮겠어요?”

    “좋아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나연을 예뻐 죽겠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지원이 지갑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오늘을 위해 아주 오랜만에 만든 명함이었다.

    “집에 가서 전화해요.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늦어도 꼭 전화 줘요, 응?”

    “그럴게요.”

    한 번에 돌아서지 못하고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나연을, 지원 역시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한참을 그냥 그렇게 서 있던 지원이 어느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서 풀썩 주저앉더니 벌게진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서로를 목숨보다 더 사랑했던 연인이 막 두 번째 사랑을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더 가이드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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