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 동백나무 숲 (17/18)
  • 16. 동백나무 숲

    “으으….”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하율을 참담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던 채이가 그의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에 긴 한숨을 내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럭저럭 잘 해내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대체 어디서부터 일이 어그러진 걸까. 그저 평범한 인간이었던 이에게 차원을 넘나들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한 게 잘못이었을까? 애초에 살생을 했던 자를 심판자의 자리에 앉히지 말았어야 했나?

    꼬리에 꼬리를 문 후회가 결국 기억조차 희미한 까마득한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갔지만, 가정만으로는 끝내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제아무리 인간의 영혼을 모두 주관할 수 있는 상천제라도, 채이 역시 전지전능한 신은 아니었기에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리지는 못한다. 상황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후회를 과감하게 집어치운 채이가 만신창이가 된 하율을 다시 한번 짧게 응시했다.

    영민하고 위트가 있어 대화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었는데…. 앞으로 두 번 다시 만날 일은 없겠구나. 한때 친우였던 이의 비참한 말로를 보고 있자니 입맛이 몹시 썼지만, 채이에게는 오래 감상에 젖어 있을 만한 여유가 없었다.

    “우포청장.”

    “네, 상천제님.”

    제 부름에 공손하게 고개를 조아리는 백발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채이는 또다시 한숨이 터져 나오는 걸 막지 못했다. 생전에 강직한 선비였던 우포청장은, 죄인을 풀어주라는 하율의 지시에 따르지 않은 죄로 100일도 넘게 처소에 연금되어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는 하율의 신상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고도 처소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불의한 지시를 따를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율은 제 상전이니 항명에 대한 벌은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거였다.

    아주 약간만 융통성이 있는 자였다면 염마왕의 자리에 앉혔을 텐데. 좌포청장과 공동으로 명계를 다스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았을 테고…. 하지만 눈치가 빠르고 상황 대처 능력이 좋은 모화영은 하율의 실권과 동시에 독천옥으로 끌려갔으니 그것도 이미 물 건너간 일이다.

    현명하면서도 적당히 융통성이 있고, 담대하면서도 정의롭기까지 한 자를 대체 어디에서 찾아야 하지? 인계에 그런 인간이 존재하기는 하나? 채이는 머리가 아팠다.

    “현재 염마왕의 자리가 공석이 되었으니, 내가 적당한 자를 찾을 때까지 그대가 대리하여 업무를 수행하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하율이 정신을 차릴 수 있을 정도로만 회복되면 즉시 고륜지옥으로 보내도록 하고. 형량은 다른 죄인들과 똑같은 기준을 적용해서 정할 것이며, 행여나 판관이 인정을 베푸는 일이 없도록 그대가 직접 참관하게.”

    “그리하겠습니다.”

    핏기가 하나도 없는 하율의 얼굴을 한 번 더 들여다본 채이가 복잡한 얼굴로 돌아섰다. 하율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영혼이 소멸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그동안 정산을 미뤄두었던 생전의 죗값까지 다 합산하여 치르려면 결코 적지 않은 세월을 끔찍한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할 텐데. 태양의 숨결이 심장을 꿰뚫었는데도 영혼이 흩어지지 않은 건 신께서 내리신 형벌인 걸까, 아니면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인 걸까.

    잠시 고민하던 채이가 정답을 알 수 없는 의문을 가슴 한구석에 묻은 채로 서둘러 염라국을 떠났다. 언제나 그렇듯 유능하면서도 의로운 인물을 골라내는 과정은 결코 수월하지 않을 것이고, 인계를 모두 돌아보려면 갈 길이 멀었다. 중천주를 새로 선택해야 할 시기와 맞물리지 않은 것이 그나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아이고, 대표님! 왜 여기까지 나오셨습니까! 필요한 게 있으시면 부르시지 않고요.”

    “….”

    희주의 호들갑에 미세하게 눈살을 찌푸린 가온이 짜증스러운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필요한 거 없어. 그냥 별채에만 있기 답답해서 나왔어.”

    “그럼 외투라도 입고 나오셨어야죠. 세상에,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시려고.”

    “별채에서 여기 오는데 무슨 외투야. 바깥바람은 하나도 안 들어오는데.”

    가온이 못내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했지만, 이미 안색이 변한 희주는 전전긍긍하며 가온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온이 잠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당장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기세였다.

    “일단 앉으세요. 주치의도 절대 안정을 취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말은 무리하지 말라는 얘기였지, 아예 꼼짝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

    “담요 좀 가지고 와요, 어서! 그리고 대표님께 따뜻한 현미차 한 잔 내드려요.”

    “아니, 나는 시원한 물을 마시고 싶은데….”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찻잔을 보고 질색한 가온이 다급하게 항의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순식간에 눈과 손만 남기고 보드라운 담요로 폭 둘러싸인 가온은 어쩔 수 없이 뜨끈한 차를 마셔야만 했다. 구수한 향은 일품이었지만 갈증이 바로 해소되지 않는 느낌에 속이 조금 답답했다.

    “이것만 드시고 얼른 가서 주무세요, 네?”

    “이틀을 내리 잠만 잤는데, 어떻게 잠을 더 자? 지금도 한 시간을 누워 있다가 도저히 못 참고 나온 거라고.”

    “잠이 안 오면 그냥 누워 계시기라도 하세요. 제가 옆에서 책이라도 읽어 드릴까요?”

    “하아….”

    여전히 낯빛이 창백한 희주를 더 고단하게 만들 수는 없었기에, 체념의 한숨을 내쉰 가온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가온이 명계에서 돌아올 때까지 꼬박 사흘 동안 단 한 번도 자리에 눕지 못했다는 희주는, 반송장이 된 얼굴로 가온의 손을 부여잡으며 대성통곡을 했었다.

    - 대표님이 영영 돌아오지 못하시면, 저도 바로 따라가려고 했습니다.

    - 자식 있는 어미가 어찌 그런 험한 소리를 해. 곧 손주도 볼 사람이.

    짐짓 엄한 목소리로 나무라기는 했어도 그녀의 진심은 눈물이 핑 돌만큼 감동적이었다. 원래도 가온은 희주가 하는 말에 군말 없이 따라주는 편이기는 했지만, 오열하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이젠 정말 권 여사의 말에 꼼짝도 못 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다 드셨으면 별채로 가세요, 어서요.”

    “알았어. 간다고. 모르는 길도 아니고 내가 알아서 갈 테니까 따라나설 거 없어.”

    “제가 마음이 안 놓여서 그러는 겁니다. 지금은 대표님보다 차 관장님이 더 무섭고요. 차 관장님이 딱 두 시간 외출하셨는데, 그새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면 저희가 그분 얼굴을 어떻게 봅니까.”

    차 관장….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이 화제에 오르자 항변할 말을 찾지 못한 가온은 결국 희주와 함께 별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희주의 말마따나 지원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제게 눈곱만 한 생채기라도 난다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진다.

    “차 관장님 같은 분을 만나려고 여태 혼자이셨나 봅니다.”

    “…그러게.”

    다른 걸 다 떠나서 나를 그렇게까지 위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살면서 두 번은 만날 수는 없겠지. 희주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 가온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차지원이라는 남자에 대해 감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정말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저를 죽은 자들의 세계에서 구해온 지원은, 중천에 도착해서 가온에게 물을 마시게 하고, 보안실장이 내미는 쿠키 두어 조각을 먹인 다음, 온몸을 더듬거리며 심하게 다친 곳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겨우 제 목을 축였다.

    지원의 구두가 다 찢어져서 발에 피가 나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가는 길을 따라 벌건 발자국이 찍히는 걸 보고 나서야 알았다.

    - 차 관장! 발에서 피가 나고 있어. 얼른 치료해야 해.

    - 네. 대표님께서 무영당으로 무사히 돌아가시면 저도 치료받고 바로 쫓아가겠습니다.

    - 나는 금방 가니까 빨리 치료부터….

    - 가온 씨.

    지원이 평소에 얼마나 의식적으로 미소를 짓고 있었는지, 가온은 그의 표정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처음 보는 서늘한 얼굴에 흠칫 놀랐던 가온은, 그제야 소랑이 말하던 ‘눈매 사납던 놈’이 뭘 보고 하는 말인지 알게 되었다.

    - 염마왕이 확실하게 죽은 게 아니라면, 그가 가온 씨를 다시 쫓아올 가능성도 제로는 아닙니다. 워낙 집요한 자라 총상을 입고도 그 엄청난 거리를 날아왔었으니까요. 만약에 가온 씨가 또다시 명계로 끌려간다면 이번에는 우리 둘 다 확실하게 죽습니다. 아니, 이제 우리 셋이죠. 그러니까 세 목숨 건지시려면 얼른 무영당으로 가세요. 가온 씨가 염마왕이 다가가지 못하는 곳에 계셔야 제가 마음 놓고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가온은 지원의 말에 대꾸 한마디 하지 못한 채 샘을 갈라야 했었다. 은경을 목숨처럼 지키고 있던 소랑과 얼싸안으며 재회의 기쁨을 나누면서도 시선은 자꾸 대문 쪽으로만 향했다. 한 시간가량 지난 후 지원이 말쑥한 모습으로 나타났을 땐, 가온을 비롯한 무영당 식구들 모두가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여느 때라면 고까운 기색을 보였을 소랑도 그럭저럭 호의적인 미소를 지은 채 지원에게 인사를 건넸고, 완전히 감격한 희주는 숫제 그를 교주로 모실 기세였다.

    -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차 관장님.

    - 권 여사님께서 고마워하실 일이 아닙니다. 마땅히 제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니까요.

    - 그래도요. 정말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감사해요. 앞으로 차 관장님이 말씀하시는 건 뭐든 다 듣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씀만 하세요.

    - 그러면 당분간 대표님이 찬 음식을 드시지 않도록 신경 좀 써 주십시오. 이미 들으셨겠지만, 지금 홑몸이 아니셔서.

    - 그럼요.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 와중에도 명확하게 요구 사항을 전달하던 지원이 떠오르자, 가온은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용의주도한 성격이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생사의 기로에서 막 벗어난 순간에도 완벽하게 이성을 되찾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건 처음 알았다.

    “주 대표. 컨디션 괜찮아?”

    “소랑.”

    반가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가온은 어슬렁거리며 나타나는 소랑을 보고는 낯빛을 조금 흐렸다. 언제나 윤기가 좌르르 흐르던 탐스러운 하얀 털이 눈에 띄게 푸석해져 있었고, 적당히 살이 붙어 있던 볼도 거의 반쪽이 된 상태였다. 나중에 들었지만, 물 한 모금 제대로 못 넘기고 사흘을 버틴 건 소랑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쉬지 않고 왜 나왔어? 홑몸도 아니라면서.”

    “소랑이야말로. 나 때문에 너무 고생했나 보네. 안색이 안 좋아.”

    “나야 뭐…. 집에서 편하게 있었으니까 고생이라고 할 건 없고. 험한 길 다녀온 사람들이 고생했지.”

    짐짓 쑥스러운 얼굴로 가온의 안타까운 시선을 외면하던 소랑이, 순간 눈을 빛내더니 사납게 이를 드러내며 가온의 앞을 가로막았다.

    “크르르르릉.”

    “소랑, 왜 그래?”

    “내 옆에서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마. 권 여사, 당장 사람 불러!”

    날카롭게 발톱을 세운 채 당장이라도 공격할 태세를 갖추던 소랑이, 눈앞에 나타난 까만 연기가 서서히 사람의 형상을 갖추는 걸 확인하고는 버럭 성질을 냈다.

    “뭐야, 깜짝 놀랐잖아!”

    “소랑….”

    “뭐! 이 정도 말도 못 해? 상천제가 주 대표한테나 상전이지 나한테도 상전이야?”

    난감한 표정을 짓는 가온에게 있는 대로 신경질을 낸 소랑이 빙글거리는 채이를 대차게 노려보더니 인사도 없이 팩 돌아섰다. 소랑이 채이의 정체를 확인하기까지는 불과 10여 초 남짓한 시간이 흘렀을 뿐이지만, 혹시라도 염마왕의 패거리가 나타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순간 심장이 철렁했었다.

    이 난리가 난 것도 모르고 이제야 기어 나온 주제에, 뭘 잘했다고 이렇게 요란스럽게 나타나? 까딱하면 주 대표가 죽을 뻔했다는 걸 알고는 있는 거야? 흥, 뒷북도 정도껏 치셔야지! 혼잣말이라기에는 너무나도 크고 또렷한 발음으로 투덜거리던 소랑이 바람처럼 휙 사라지자, 작게 한숨을 내쉰 채이가 조금 멋쩍은 얼굴로 웃었다.

    “예전에도 보통이 아닌 늑대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오늘은 유난히 무섭네.”

    “미안해, 채이. 지금 다들 예민해져 있어서.”

    “아니야. 나야말로 미안해. 내가 하율을 너무 믿었어. 명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주기적으로 살폈어야 했는데…. 당신 거기서 굉장히 고생했다던데, 몸은 괜찮아?”

    채이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가온은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몸의 컨디션은 워낙 극진한 보살핌을 받은 덕에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다. 다만 깊은 잠이 들 때면 어김없이 무저갱에 갇혀 있는 악몽을 꾸곤 한다. 한 침대를 쓰는 사람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지만, 노력으로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었다.

    - 하아…, 하아….

    - 가온 씨, 가온 씨! 눈 떠요, 어서. 여긴 우리 집이에요. 나랑 같이 돌아왔잖아. 이제 다 괜찮아요. 가온 씨도, 아기도, 모두 안전해요.

    실제로 명계에 있을 때는 정신이 무너진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감정 조절이 쉽지 않은 꿈속에서는 깊숙한 곳에 숨겨 두었던 두려움이 비죽이 고개를 들곤 했다. 내가 아기를 무사히 지킬 수 있을까? 아기를 살리기 위해서 결국 명계에 남는 것을 선택해야 하나? 그러면 다시는 차 관장을 만나지 못할 텐데…. 차 관장도 잃고 아기까지 보내고 나면, 과연 나는 제정신으로 살 수 있을까? 지옥에서…, 나 혼자 영원히?

    불안한 마음에 정신이 아득해지면 순식간에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숨이 턱 막혔다. 호흡을 하고는 있지만 몸에 산소가 공급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놀랍게도 지원은 그럴 때마다 귀신같이 가온의 상태를 알아차렸다. 아주 깊이 잠들어 있다가도 가온의 숨소리가 변하면 거짓말처럼 눈을 뜨곤 했다.

    - 자꾸 깨워서 미안해. 차 관장도 많이 피곤할 텐데.

    - 그런 말씀 마세요. 제 손이 닿는 곳에서는 뭘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진 않았었는데…, 아무래도 좀 걱정이 되긴 했었나 봐.

    - 당연한 일입니다. 감금 상태에 놓인 사람이라면 두려움을 느끼는 게 정상이고, 가온 씨 역시 사람이니까요. 제 앞에서까지 억지로 아닌 척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인도 자각하지 못했던 내면의 적나라한 공포를 마주하게 되는 건 상당히 괴로운 일이었지만, 지원의 따뜻한 손길이 느껴지면 바로 안심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가온은 망설임 없이 잠을 청할 수 있었던 거였다. 만약 지원을 만나기 전이었다면, 악몽을 차단하기 위해 아예 잠을 자지 않는 방법을 선택했을 것이다.

    “일단 하율에게서 염마왕의 권한을 모두 박탈했어. 더 이상은 인계에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도록.”

    “그가 아직 살아 있어?”

    “숨은 붙어 있어. 내가 조금 전에 봤을 땐 의식은 없었지만. 정신을 차리는 대로 합당한 처벌을 받게 할 생각이야. 당연히 고륜지옥에서 수천 년을 보내게 되겠지. 사람을 워낙 많이 죽였으니까.”

    “…그래.”

    조금 놀란 눈으로 채이의 말을 듣고 있던 가온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나도 괘씸한 마음에 하율이 당장 죽어 없어지길 바랐었지만, 어쩌면 그에게는 죽는 것보다 긴 통한의 세월을 보내는 것이 훨씬 더 괴로운 형벌일 수 있다. 아마도 반성은 안 하겠지. 그래서 더욱 괴로울 테고. 그게…, 하나도 불쌍하지가 않네. 쌍방이 될 수 없는 연심이라는 건 이렇게 추악해질 수도 있는 거구나.

    씁쓸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는 가온을 가만히 지켜보던 채이가 부러 목소리를 높이며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찌 됐든 그건 이미 끝난 일이고….

    “오는 길에 중천주께 경사가 생겼다는 말을 들었는데 말이야. 아기 아버지는 지금 어디에 있어? 너무 궁금해서 마음이 막 설레더라고.”

    “아, 잠깐 볼일을 보러 나갔어. 바쁜 사람이거든.”

    “당신이 인간 남자와 이렇게까지 친밀한 관계가 될 줄은 정말 몰랐어.”

    “…나도.”

    설핏 웃음을 짓던 가온이 익숙하면서도 다급한 발자국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한눈에 봐도 단단히 심사가 틀린 게 분명한 지원이 대단히 빠른 속도로 걸어오고 있었다. 귀가하기 전에 이미 연락을 받았는지 지원의 가늘어진 눈꼬리에는 경계심이 가득 매달려 있었는데, 그걸 보고 있으려니 가온은 또다시 웃음이 났다. 무조건적으로 내 편인 사람이 있다는 게 새삼 몹시도 든든했다.

    “왔어? 백 상무는 잘 만났고?”

    “네. 괜찮으십니까, 대표님.”

    “그럼. 인사해, 차 관장. 채이…, 아니. 상천제님이셔.”

    “처음 뵙겠습니다. 차지원입니다.”

    상황이 다 정리된 다음에 행차하실 거면 미리 연락이라도 할 것이지…. 겨우겨우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집안에 왜 또 소란을 만들어? 못마땅한 눈빛을 굳이 감추지 않은 지원이 영 내키지 않는 태도로 말투만 공손한 인사를 건네자, 그를 유심히 관찰하던 채이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재밌네? 그럭저럭 얌전한 척을 하고는 있지만 이자도 아까 그 늑대 못지않게 사납고 예민한 종자인데…. 흐음, 주인의 앞에서만 꼬리를 내리는 맹수라…. 세상에, 갸륵하기도 하지. 그나저나 가온처럼 곧고 순수한 사람이 어쩜 이렇게 계산속이 빠른 자를 옆에 두었을까. 그래도 사리는 밝은 것 같고…, 나를 보고도 전혀 주눅 들지 않는 걸 보면 제법 배포도 있는 것 같긴 한데….

    찬찬히 지원을 살펴보던 채이가 순간 눈을 반짝였다. 가만, 이거 완전히 물건인데? 중천주로 세우기에는 지나치게 사고가 유연하긴 하지만….

    “차지원 씨. 염마왕 자리가 현재 공석인데, 혹시 그 자리에 앉아 볼 생각 있어?”

    고작 며칠 사이에 눈에 띄게 해쓱해진 지원의 얼굴을 대단히 할 말이 많은 얼굴로 노려보던 동하가, 일단 말을 아끼며 그가 내민 상자를 열어 보았다. 푹신한 이끼가 가득 깔려 있는 상자 안에는 어린아이 팔뚝만 한 삼 한 뿌리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문외한인 동하의 눈에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사이즈였다. 설마 이게 도라지는 아닐 테고.

    “뭐냐, 이건?”

    “150년 근 천종산삼. 아버님께 갖다 드려. 적기에 적절한 도움을 주신 것에 대해서 대표님께서 아주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전해 달라고 하셨어.”

    “허.”

    우리 아버지가 대한민국 자연삼의 씨를 말리고 있다는 건 또 어떻게 알고…. 하긴 제니스의 정보력이면 그 정도는 우습나? 뭐, 어쨌든 아버지는 좋아하시겠네. 이 나이에 동생이라도 생기는 건 아닌가 몰라. 일단 산삼을 잘 챙겨 둔 동하가 삐딱하게 고개를 꺾었다.

    “이게 다냐? 나한테는 뭐 없어?”

    “일은 너희 아버지께서 해결하셨는데, 네가 왜 콩고물 얻어먹을 생각을 해?”

    “이 새끼 말하는 싸가지 좀 봐라? 아버지는 친구한테 전화 한 통 하셨을 뿐이고, 나는 그 대가로 당장 이번 주말부터 선 시장에 팔려 나갈 판인데…. 그깟 콩고물 좀 노리면 안 되냐?”

    발끈하는 동하를 무감하게 바라보던 지원이 얼음이 덜그럭거리는 유리잔을 들고 차가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것도 계속 마시다 보니까 먹을 만하네. 한여름에도 뜨거운 커피만을 고집하던 지원이었지만, 며칠 동안 극심한 갈증에 시달리다 보니 더운 음식은 목으로 잘 넘어가질 않았다.

    “잘됐네. 어차피 너 만나는 여자도 없잖아. 거기서 또 극적으로 운명이 등장할지 어떻게 알아? 사람 일 모르는 거다?”

    “야. 내가 어지간해서는 쪽팔려서 이런 말 잘 안 하는데…. 나 BS그룹 백동하야. 내가 선 자리에서 만나게 되는 상대는 이미 내가 다 알고 있는 여자들이라고. 그중에 운명이 있었으면 진작 알아봤겠지.”

    “사람을 한두 번 보고 그런 걸 어떻게 알아. 다시 보면 또 다른 느낌이 들 수도 있지.”

    “너는 첫눈에 인연이라는 걸 알아보셨다며. 그래서 완전히 진상처럼 들이댔다며. 너는 뭐 천리안이냐?”

    살짝 흥분한 동하가 손가락질까지 해가며 목소리를 높이자, 빨대로 얼음을 휘휘 젓던 지원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너 기억력 좋다?”

    “그걸 이제 알았어?”

    소리를 빽 지르던 동하가 흉터가 가득한 지원의 손등을 보고는 입매를 확 일그러뜨렸다. 어딜 가서 뭘 하고 왔길래 그 매끈하던 손이 저 모양이야? 아까 들어올 때 보니까 걷는 것도 조금 이상하던데…. 정말 험하게 구르긴 했나 보네. 평소에 지원은 워낙 요령이 좋고 반사 신경이 뛰어나서 실수로라도 어딘가에 부딪치는 일이 거의 없는 인간이었다. 인상을 구긴 채 커피 한 잔을 쭉 들이켠 동하가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미뤄두었던 질문을 꺼냈다.

    “너…, 진짜로 지옥에 갔다 왔어?”

    “응.”

    “거기가 원래…, 그렇게 멋대로 갔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올 수도 있는 데냐?”

    “일반적으로는 그러기 어렵지. 우리도 쉽지 않았어. 네가 발 빠르게 움직여 준 건 진짜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해. 정말 타이밍이 예술이었지. 한두 시간만 늦었어도 일이 잘못됐을 가능성이 더 높았을 거야.”

    지원의 침착한 대꾸에 동하는 소름이 쫙 끼쳤다. 일이 잘못됐을 가능성이라니. 지옥에서 돌아오지 못했을 거라는 얘기야? 우와, 이 미친 새끼…. 그런 말을 하면서도 눈썹 하나 까딱 안 하는 것 좀 봐. 무, 무슨 사랑을 이렇게 살벌하게 해?

    “너 차지원 맞아? 너 같은 놈이 어떻게 여자를 그렇게까지 사랑할 수가 있냐?”

    “그러게. 나도 참 신기하다.”

    순순히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지원이 휴대폰의 진동이 울리자마자 미간을 확 좁히며 민감하게 반응했다. 권 여사님이 왜…. 내가 딱 두 시간만 외출하겠다고 했는데…. 그새 또 무슨 일이 생겼어?!

    상천제가 등장했다는 소식에 그의 날아오다시피 집으로 돌아온 지원은, 일단 가온의 기운이 안정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가온과 채이는 꽤나 돈독한 신뢰를 나누는 사이인 듯했다. 하지만 저를 샅샅이 살피는 채이의 눈빛은 그다지 편안한 느낌을 주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그녀가 꺼낸 제안은 지원을 더욱 경악스럽게 했다.

    “차지원 씨. 염마왕 자리가 현재 공석인데, 혹시 그 자리에 앉아 볼 생각 있어?”

    “아니요.”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굳이 정돈하지 않은 지원이 채이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직원이 열 명도 안 되는 갤러리 하나를 책임지고 운영하는 것도 이래저래 성가실 때가 많은데, 명계라니.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프다. 더구나 처자식을 여기에 두고?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지금 당장 명계로 가라는 건 아니야. 천천히 시간을 두고 생각해도 돼.”

    “사양하겠습니다.”

    “앞으로 30년만 있으면 가온은 이승을 떠나게 될 텐데…. 가온을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아?”

    “….”

    줄곧 단호한 태도를 견지하던 지원이 순간 멈칫했다. 다시 만나고 싶지 않느냐고? 그럴 리가 있나. 지금도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는 게 너무 아까워서 돌아 버릴 판인데.

    이제 기한은 채 30년도 남지 않았고, 지원은 환갑도 되기 전에 가온을 떠나보내게 된다. 기대 수명이 80세를 넘어가는 시대이니, 딱 평균만큼만 산다고 해도 가온이 없는 세상에서 20년도 넘게 버텨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당연히 견디기 녹록한 세월은 아닐 것이다.

    “누구 한 사람이 전생의 기억을 붙들고 있지 않는 한, 당신들이 각자 환생한 이후에 다시 만날 수 있는 확률은 극히 희박해. 행여 마주친다고 해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할 가능성이 높고. 환생의 시기가 다르면 아예 접점이 없는 상태로 끝날 수도 있지.”

    애타는 마음에 직격탄을 맞은 지원이 눈썹을 조금 찡그리며 살짝 떨리는 숨을 길게 뱉어냈다. 마치 재회를 보장하는 것처럼 들리는 채이의 제안은, 솔직히 대단히 유혹적이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지원은 그 달콤한 향기에 가려진 씁쓸한 이면을 불과 며칠 전에 제 눈으로 확인했었다. 하율의 광기 어린 집착이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불러왔는지 알지 못했다면, 어쩌면 이 허울 좋은 미끼를 덥석 물었을 수도 있다.

    신속하게 머릿속을 정리한 지원이 천천히 숨을 고르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염마왕의 전철을 답습할 생각은 없습니다. 대표님이 또다시 명계에 발을 들이시는 것도 원치 않고요. 하지만 만 오천 년을 기다리다가 대표님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저 역시 염마왕이 했던 짓과 크게 다르지 않은 행동을 하게 될 겁니다. 사랑하는 이에게 그런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흐음. 사랑이라는 게 원래 아름답기만 한 건 아니지만…. 그러면 이번 생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인연이 끊겨도 괜찮아?”

    “채이.”

    지원과 채이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가온이 처음으로 말을 끊었다. 평소 표정의 변화가 크지 않던 가온이었지만, 놀랍게도 지금은 그녀의 심기가 불편해졌다는 걸 누가 봐도 확실하게 알 수 있을 정도로 미간을 확 찌푸리고 있었다.

    “그 얘기는 그만했으면 좋겠어. 차 관장은 절대로 염마왕이 되지 않을 거니까.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곳에서 영원을 살게 내버려 두지도 않을 거고.”

    “가온….”

    “나한테 전해줄 이야기는 다 한 거지?”

    용건이 끝났으면 이만 가보라는 뜻이었다. 답지 않게 냉정한 가온의 축객령에 잠깐 묘한 표정을 짓던 채이가 소소한 안부를 몇 가지 더 묻더니 순순히 작별 인사를 건넸다.

    “조만간 다시 올게.”

    “친구로서 놀러 오는 거라면 언제든 환영이야.”

    뭔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온다면 나도 응대를 달리할 수밖에 없고. 가온의 서늘한 표정에도 미소를 잃지 않은 채이가 발랄하게 손을 흔들더니 곧 연기처럼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그녀가 사라지기 직전에 보인 의미심장한 눈빛을 깨끗하게 털어내지 못한 두 사람은, 한참이 지난 후에도 쉽게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잘 준비를 마치고 침실로 들어온 가온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지원이 제가 들어오는 것도 모른 채 심각한 얼굴로 상념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채이가 애먼 사람을 찔러놨군. 하긴, 원래 이런 일에는 도가 텄으니까. 사람의 속내를 정확하게 읽고 가장 예민한 부분을 건드려서 결국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 채이의 주특기지.

    “차 관장. 안 자?”

    “아, 가온 씨…. 벌써 씻고 오셨어요? 자야죠, 시간이 많이 늦었네요.”

    금세 표정을 정돈한 지원은 시원스럽게 대꾸하고는 바로 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시간이 꽤 흐른 뒤에도 잠이 드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지원의 팔을 베고 누운 가온 역시 여느 때와는 달리 쉽게 잠들지 못했다. 그가 밤잠을 설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지 너무나도 훤히 짐작이 갔던 가온은, 결국 한숨이 흘러나오는 걸 막지 못했다.

    “하아….”

    “잠이 안 오십니까? 어디 불편하세요?”

    천천히 눈을 뜬 가온은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몸을 일으킨 지원이 못내 걱정스러운 얼굴로 저를 바라보자, 가볍게 고개를 젓고는 그의 손을 잡아끌어 제 옆에 다시 눕혔다. 그리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지원의 입장에서는 제 말이 명령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아 조심스러웠지만, 도저히 한마디 보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원은 이미 마음을 굳힌 일을 두고 쓸데없이 고민하는 성격이 아니다. 이렇게 계속 생각을 한다는 건, 아직 마음을 완전히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차 관장.”

    “네.”

    “언젠가 나한테 중천주가 된 걸 후회하느냐고 물었던 걸 기억해?”

    “물론입니다. 태백에 가기 전날, 서고에서였죠.”

    기억력 한번 비상하기도 하지. 지원의 즉답에 작게 소리를 내어 웃던 가온이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다시 물었다.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도 기억나?”

    “그럼요.”

    지원은 어떻게든 가온에게 말 한마디라도 붙여 보려고 별의별 수작을 다 부렸던 때를 떠올리며 조용히 웃었다. 그날 보안실에 커피 서른두 잔을 돌린 이후로 본사에 방문할 때마다 차마 빈손으로 갈 수가 없어서 케이크 하나라도 들고 가는 게 습관이 되었다. 그렇게 사다 나른 간식값을 모두 계산하면 경차 한 대 값은 족히 나온다. 그 돈이 아깝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예약까지 걸어서 간신히 구입한 마카롱이 가온의 눈에 띄기도 전에 모두 사라졌을 때는 솔직히 속이 조금 쓰렸었다.

    - 그냥 궁금해서요. 중천주가 되기 전에는 어떤 삶을 사셨는지, 원해서 중천주가 되신 건지, 뭐 그런 것들이요.

    - 원해서 한 거냐고 묻는다면, 글쎄. 억지로 한 건 아니지만 어떤 일인지 미리 알았더라면 거절했을 거야.

    - 후회하십니까?

    - 수도 없이 했지. 특히 초반에는.

    지원은 가온에 대한 일이라면 뭐든 다 기억했고, 특히 그날 서고에서 나눴던 대화는 녹음기를 재생시킨 것처럼 거의 완벽하게 되살릴 수 있다. 그날의 날씨, 가온이 입고 있던 옷의 색깔, 심지어는 혀끝에 감돌던 커피의 풍미까지도 모두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커피가 줄어드는 걸 안타까워하던 가온의 귀여운 얼굴이 눈에 선했던 지원이 입꼬리를 조금 크게 들어 올렸을 때였다.

    “차 관장의 인생을 내가 결정할 수는 없지만, 나는 반대야.”

    가온의 단호한 말투에 지원의 눈이 조금 커졌다. 중천주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을 때의 가온이 이렇게까지 명확하게 부정적인 견해를 밝히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다.

    “제가 염마왕이 되는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응. 내가 이래라저래라 간섭하고 싶진 않은데, 채이의 말 때문에 계속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아서…. 채이의 말이 그럴듯하게 들렸겠지만, 그녀의 제안이 100% 호의에서 나온 거라고 생각하면 안 돼. 상천제의 상식은 인간 사회에서 통용되는 개념과는 많이 달라. 채이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큰 혼란 없이 인간들의 영혼을 관리하는 일이야. 오랜 벗의 연심 같은 건 기분이 내키면 지켜줄 수도 있고, 상황에 따라서는 이용할 수도 있다는 뜻이지.”

    “하지만 상천제의 의도가 무엇이든, 가온 씨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더 높은 방법이 있다면 그쪽을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그걸 선택할 수 있는 기회는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일 테고요.”

    그래, 그럴 것 같았어. 깊은 한숨을 내쉰 가온이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느릿하게 말을 꺼냈다.

    “중천주가 된 걸 얼마나 많이 후회했는지 다 셀 수도 없어. 너무 힘들고 괴로웠는데, 아무한테도 하소연할 수가 없었지. 마지막에 차 관장을 만날 수 있어서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이 좋았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이 노릇을 하겠냐고 묻는다면…. 차 관장한테는 정말 미안하지만 단칼에 거절할 거야.”

    “그러셔야죠. 저도 가온 씨가 이 고생을 두 번 하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차 관장이 염마왕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내 마음도 그와 똑같아. 염마왕의 자리에 앉는 건 중천주가 되는 것보다 훨씬 더 고된 일이고.”

    “알고 있습니다.”

    고개를 들어 올려 지원과 눈을 맞춘 가온이 그의 수려한 얼굴을 손끝으로 가만히 쓸어 보았다. 이 당당하고 아름다운 남자가 집착과 광기에 휘둘려서 본성을 잃을 수도 있다고 상상하면 몸에 오한이 난다.

    “나 때문에…, 나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 차 관장의 영혼을 희생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나한테는 천 년도 너무 길었거든? 영원이라는 세월을 우습게 생각하지 마. 이런 말, 듣기 거북하겠지만…. 하율도 한때는 해맑은 미소가 빛나던 소년이었을 때가 있었어.”

    “…네.”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긴 말을 마친 가온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다가 어느샌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가온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오기 시작하자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킨 지원이 방 안의 조명을 모두 낮췄다. 그리고는 흐릿한 불빛에 의지해서 가온의 말간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가온 씨의 마음은 너무나도 잘 알겠지만…. 쉽게 포기는 안 되네요.”

    염마왕이라…. 죄인들을 후려치는 일 자체는 할 만할 것 같기도 한데…. 영원이라는 시간은 아무래도 너무 부담스럽단 말이야. 그 음침한 명계에서 거주하는 것도 영 내키지가 않고. 그나저나 영혼도 햇빛을 오래 못 쬐면 우울해지나? 그래서 그 작자가 그렇게 비뚤어진 건가?

    베개 위에 흩어진 가온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살살 어루만지던 지원이 또다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만에 하나 내가 염마왕이 된다면 그 정체불명의 건축 양식부터 손봐야겠어. 선사 시대에 살던 인간이라 그런지 미적 감각이 영…. 쯧, 아무거나 좋아 보이는 걸 다 갖다 붙인다고 예술이 될 줄 아나. 직제도 너무 구식이고. 세상에, 21세기에 포청이 웬 말이야? 태무영이 포졸 어쩌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완전히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지원이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동이 터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그저 단순한 상상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애써 위안했지만, 왠지 섬뜩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관장님, 손님 오셨습니다.”

    간만에 갤러리에서 하루를 꼬박 보낸 지원이 난처해 보이는 비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서 어쩌라고? 약속도 없이 방문한 손님이라면 최소한의 인적 사항을 파악해서 보고하는 게 비서의 할 일 아닌가? 굳이 말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비난의 기색이 역력한 지원의 눈초리에 비서는 몹시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소속과 직위를 말씀하진 않으셨습니다. 그저 채이라고 하면 아신다고….”

    채이…? ‘조만간’이 하루 뒤를 말하는 거였어? 삽시간에 표정이 일그러진 지원이 쿡쿡 쑤시기 시작한 관자놀이를 짚으며 들여보내라고 손짓했다. 비서가 미처 지원의 의사를 전달하기도 전에 기세 좋게 문을 열어젖힌 채이가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걸어 들어오자, 그녀의 차림새를 확인한 지원의 얼굴이 더욱 심하게 구겨졌다.

    허! 이 엄동설한에 손바닥만 한 미니스커트…. 게다가 가죽? 얼씨구. 망사 스타킹에 초커까지. 무슨 개 목걸이도 아니고. 심지어 이 와중에 벨트는 쇠사슬이야! 어휴, 이게 대체 언제 적 패션이야? 양심도 없지, 어떻게 남의 직장에 이러고 나타나?

    제 책상에 걸터앉는 채이를 너무나도 못마땅한 시선으로 훑어보던 지원이 대놓고 질색하자, 입꼬리를 크게 들어 올린 채이가 유쾌하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안녕? 어제 그 조신하던 남자는 어디 갔나 봐?”

    “그 남자는 주가온 전용이라서요. 아무 데나 얼굴 내밀지 않습니다. 그보다 일단 거기서 내려가시죠. 제가 곧 결혼하는 걸 직원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쓸데없이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싶지 않네요.”

    “흐음. 방문하는 여자 손님이 한둘이 아닐 텐데, 그럴 때마다 오해를 산다면 본인의 평소 행실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닐까?”

    뭐가 어째? 발끈한 지원이 아주 미세하게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제 평소 행실은 지극히 건전하고 상식적입니다. 문제는 이 날씨에 그런 해괴한 차림으로 나타나신 분께 있죠. 내려가십시오. 곧 비서가 차를 가지고 들어올 겁니다.”

    피식 웃음을 흘린 채이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뭐, 객은 주인의 뜻을 따라 줘야지. 지원의 안내에 따라 소파에 가서 앉던 채이는 그가 커다란 쿠션 하나를 제 다리 위에 던지듯 내려놓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보기보다 보수적이네. 정말 재밌어. 주가온처럼 점잖은 사람이 어쩌다 이렇게 여우 같은 남자한테 넘어갔을까 했는데, 의외로 제법 귀여운 구석이 있었네. 생긴 대로 입맛은 고급이시고. 착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우아한 태도로 차를 마시던 채이는 비서가 문을 닫자마자 바로 용건을 꺼냈다.

    “생각은 좀 해 봤어? 내가 보기엔 전혀 흥미가 없는 것 같진 않았는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뭘까?”

    “왜 제게 이런 제안을 하셨습니까? 정말로 제게 염마왕으로서의 자질이 있습니까?”

    내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던 채이가 지원의 질문에 조금 진지하게 표정을 바꿨다. 채이의 눈빛이 달라지자, 줄곧 삐딱하게 굴고 있던 지원도 반사적으로 태도를 고쳤다. 70년대 록 가수 같은 비주얼을 하고는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에 나타난 위엄은 누가 봐도 범상치 않은 것이었다.

    “사실 염마왕이 되기 위한 조건 같은 건 없어. 중천주는 그간 열 명도 넘게 바뀌었으니까 나름대로 기준이라는 게 정립되어 있지만, 염마왕을 뽑는 건 이번이 고작 두 번째라. 다만 고집이 있으면서도 사고가 유연하고, 대범하면서도 섬세한 이를 골라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 마침 그대가 내 눈에 띄었고.”

    “저를 한 번밖에 안 보셨는데, 제가 그런 인물이라는 걸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내 눈에는 보이니까.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런 이들을 골라내는 게 상천제가 하는 일이고.”

    물론 적임자를 골랐다고 해서 그 결과가 언제나 아름다운 건 아니지만.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서 고르고 골랐음에도 불구하고,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중천주도 있었고, 임무를 내팽개친 채 골방에 틀어박혔던 이도 있었다. 또한 본분을 잊고 폭주한 끝에 자신을 파멸의 길로 몰아넣은 염마왕을 처리한 것이 바로 어제다. 새삼 입맛이 썼던 채이가 차를 한 모금 홀짝였다.

    “우리도 완벽한 존재는 아니라 실수도 하고, 실패도 해. 그러면서 하나씩 배우는 거지. 처음에 하율을 염마왕으로 선택했을 때는 생전에 결실을 맺지 못했던 인연의 존재가 긴 세월 동안 그를 버티게 만들어 줄 원동력이 될 거라고 생각했었어. 집착이 애정보다 크면 그 애정은 파괴적인 방향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는 것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고.”

    집착이 애정보다 크면, 이라…. 과연 가온 씨를 향한 나의 애정은 집착보다 크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애초에 집착과 애정의 정도를 그렇게 단순하게 수치화시킬 수가 있나? 애정이 커질수록 집착도 커지는 거 아닌가? 나 역시도 나중에 가온 씨가 다른 놈의 아이를 배 속에 담고 있는 걸 보게 된다면 한순간에 눈이 뒤집힐 것 같은데….

    고민에 빠진 지원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채이가 달칵 소리가 나게 찻잔을 내려놓으며 그의 주의를 끌었다. 당연히 심사숙고할 일이라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마냥 기다려 줄 수는 없다. 지원이 끝내 그 자리를 고사한다면, 서둘러서 다음 후보를 찾아야 한다.

    “어쨌든 뜻이 아예 없는 건 아닌 거지?”

    “네.”

    “결정을 망설이는 이유가 뭐야? 불만 사항이 있다면 지금 얘기해 봐. 내 선에서 조율이 가능한 부분이라면 맞춰줄 테니까.”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로 영원이라는 기간이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종신직이라는 게 마음에 걸리신다?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채이가 호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렇게 하자. 일단 시험 삼아 천 년 동안 한번 해보는 거야. 그러고 나서 더 할 수 있겠다 싶으면 기간을 연장하는 거지. 어때?”

    “천 년이요….”

    “중천주의 임기보다 더 짧게 끊을 수는 없어. 그럼 두 번째는?”

    “저는 문명화된 인간이라 인계를 완전히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햇빛도 계속 보고 싶고요. 중천주처럼 인계에 적을 둔 채로 명계로 출퇴근할 수 있다면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명계로 출퇴근…. 지원의 기상천외한 요구에 생각이 많아진 채이가 장고 끝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율은 이미 망자가 된 상태에서 죄인으로 분류가 되어 명계로 내려왔었기 때문에 햇빛을 볼 수 없다는 금기가 있었던 거였지만, 지원은 아직 살아 있는 상태이니 딱히 안 될 건 없을 것 같았다.

    그럼 경전에서 ‘태양의 숨결’ 부분만 삭제하면 되나? 나까지 거기에 손을 대는 건 별로 안 좋아하실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뭐 어쩔 수 없지. 염마왕 자리를 무한정으로 비워둘 수도 없고. 그건 안 된다고 하시면 나도 더는 못 하겠다고 드러눕지 뭐. 그러면 세상은 그야말로 개판이 되겠지만.

    “좋아, 두 가지 조건 다 원하는 대로 해주지. 대신 빨리 결정을 내리도록 해. 딱 사흘 줄게.”

    목적지도 모른 채 지원을 따라나선 가온은, 세월의 흔적이 아주 멋스럽게 묻어나는 고급스러운 저택 앞에 서서 꽤나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기운이 아주 좋은 사람이 정성껏 터를 닦고 올린 건물인 듯했다.

    “여기가 어디야? 빈집인 것 같은데도 기운이 되게 좋네.”

    “제가 어렸을 때 살던 집입니다. 지하실에 대한 안 좋은 추억이 있어서 들어와 살 수는 없고, 그렇다고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을 팔아 치울 수도 없고 해서 그냥 가지고만 있었죠.”

    “…그래?”

    지원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집을 애틋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가온이 불현듯 어딘가에서 음산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걸 감지하고는 서늘하게 표정을 굳혔다. 수기를 모으려고 손을 들어 올리던 가온은, 지원이 제 손을 꼭 잡자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안 그러셔도 됩니다, 가온 씨.”

    “차 관장. 지금 이 집에….”

    “네, 압니다. 제가 보여드리려는 게 바로 그겁니다.”

    대체 뭘 보여주겠다는 거지? 가온은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지원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그저 아무 말도 없이 제 손을 잡아끌기만 했다. 어쩔 수 없이 지원을 따라 집 안으로 발을 들인 가온은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한결 날카로워진 눈빛으로 지원을 쳐다보았다.

    “왜 차 관장의 집에 명계로 통하는 통로가 있어?”

    “역시 대표님은 바로 아시네요.”

    “나는 지금 이유를 물었는데.”

    “일단 내려가서 보시죠. 설명은 나중에 하겠습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계단을 내려간 가온은, 텅 빈 지하실 정중앙에 시뻘건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고는 눈매를 갸름하게 접었다.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불길이었지만, 놀랍게도 열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인간이 아닌 다른 차원의 무언가를 경계하는 불이라는 뜻이다. 나와 상의도 없이 제집 지하실에 덜컥 명계로 통하는 길을 내다니. 지원의 의도가 서서히 명확해지자, 가온의 기분은 점점 더 나빠졌다.

    “이게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어?”

    “두 시간 전에 상천제께서 만드셨습니다.”

    “오늘 채이를 만났어?”

    “네.”

    “하!”

    어처구니가 없는 얼굴로 헛웃음을 지은 가온이 거칠어진 숨을 고르기 위해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제가 분명히 반대 의사를 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지원을 꼬드긴 채이도 괘씸했고, 얼마나 긴 고통의 세월이 펼쳐질지도 모르면서 겁도 없이 덤벼든 지원에게도 화가 났다.

    “그래서. 기어이 지옥에 가서 영원을 살겠다고? 기약도 없는 만남에 목을 맨 채로?”

    “저는 그렇게는 못 합니다, 대표님.”

    “그럼 이건 뭔데?”

    “일단 임기는 천 년으로 정했습니다. 임기 끝난 후에 할 만하면 연장하고, 아니면 그만두기로 합의했죠.”

    “…뭐?”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을 하는 가온에게 빙긋이 웃어 보인 지원이 채이와 정한 두 번째 조건을 마저 설명했다.

    “저는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주거지는 인계에 두기로 했습니다. 명계로는 이 통로를 이용해서 출퇴근을 할 겁니다. 가온 씨가 중천에 왔다 갔다 하시는 것처럼요.”

    “출퇴근?”

    “그리고 아직 염마왕이 되기로 정한 건 아닙니다. 아무리 제 인생이라지만 가온 씨의 허락 없이 이런 중차대한 문제를 함부로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마음을 정하기까지 사흘의 말미를 얻었으니, 정 내키지 않으시면 환수검으로 이 통로를 없애면 됩니다.”

    극심한 혼란에 빠진 얼굴을 하던 가온이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이다가 기막힌 목소리로 물었다.

    “차 관장은…, 정말로 염마왕이 되고 싶어?”

    “딱히 염마왕이 되고 싶은 건 아닙니다. 그저 가온 씨를 한 번이라도 더 만나고 싶을 뿐입니다.”

    “하아….”

    손으로 눈을 가린 가온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어쩌려고 이런 무모한 짓을…. 그 와중에 기한을 두었다는 건 그나마 다행한 일이지만. 이제 겨우 서른밖에 안 된 애송이가, 천 년이 얼마나 어마어마하게 긴 세월인 줄도 모르고.

    “차 관장은 왜 이렇게 사람을 비겁하게 만들어?”

    “가온 씨.”

    “차 관장의 미래를 생각하면 이딴 통로 당장이라도 없애야 하는데, 왜 그걸 망설이게 해? 왜…, 눈 딱 감고 돌아서고 싶게 만들어?”

    가온의 커다란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리자, 지원의 표정도 대번에 흐려졌다. 가온에게 다가가 그녀를 꼭 끌어안은 지원이 더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도저히 이 기회를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온 씨를 다시 만날 수도 있는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하면, 남은 30년이 온전히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았어요.”

    “그러니까 왜…. 나도 그 기회를 기대하게 하는 거야? 왜 차 관장의 희생을 받아들이고 싶게 만드는 거냐고.”

    “희생이 아닙니다. 제 욕심이죠. 그러니까 허락해 주세요. 30년이 지난 후에, 우리가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면서 웃으며 안녕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지원은 파르르 떨리는 가온의 눈가를 가만가만 쓸어내리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가 덧붙인 협박은 눈가에 핑 돌던 눈물을 삽시간에 쏙 들어가게 할 정도로 엄청나게 충격적이었다.

    “아니면 가온 씨가 이승을 떠나실 때 저도 그 무덤에 같이 들어가겠습니다.”

    몹시 심란한 얼굴로 차에서 내려선 지원은 탐스러운 꽃송이가 흐드러지게 매달려 있는 아름드리 동백나무를 보고는 무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가온의 고향집 뒷산에 동백나무 숲이 있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적은 있지만, 눈앞에 펼쳐진 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절경이었다.

    야트막한 언덕 중턱에 있는 집으로 올라가려면 양옆으로 동백나무가 빼곡하게 심어져 있는 오솔길을 조금 걸어야 했는데, 만개한 동백꽃이 뿜어내는 진한 향기에 취기가 느껴질 지경이었다. 사람의 키를 훌쩍 넘기는 커다란 나무에 꽃이 얼마나 많이 피었는지 공기마저 붉게 보였다.

    동백꽃이 원래 이렇게 예쁜 꽃이었나. 이런 곳에는 좋은 마음으로 둘이 함께 왔어야 했는데. 당신은 오늘 하루 종일 어떤 심정으로 이곳에서 시간을 보냈을까.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보고 있으려니 지원은 마음 한구석이 점점 더 아려왔다. 말을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었어. 더없이 착잡한 기분으로 비단처럼 곱게 깔린 꽃길을 걸으며, 지원은 때늦은 후회를 거듭했다.

    염마왕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면 따라 죽겠다는 지원의 협박에 큰 충격을 받은 가온은, 여러 가지 감정이 요동치는 눈빛으로 지원을 한 번 바라보더니 그대로 입을 닫았다. 그리고는 바로 별채에 틀어박혀서 이틀 밤이 지나도록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 가온 씨. 차라리 저를 때리십시오. 속이 상한다고 식사를 안 하시면 어떡합니까.

    반나절을 애걸복걸한 끝에 간신히 가온의 손에 숟가락을 들리기는 했지만, 잠은 억지로 재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밤새도록 한숨만 내쉬는 가온을 옆에서 지켜보는 건 정말이지 고역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온의 뜻대로 하겠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다시 만나고픈 열망이 너무나도 간절해서 도저히 포기가 안 되었다. 별수 없이 가온을 따라 꼬박 이틀 밤을 지새운 지원이 새벽녘에 잠깐 졸다가 문득 허전함을 느끼고는 번쩍 눈을 떴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보니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 대표님 어디 가셨습니까?

    - 고향집에….

    - 고향집…, 이요?

    이 새벽에? 혼자서? 당연히 중천에 급한 일이 생겨서 나갔을 거라고 생각했던 지원이 아연실색하자, 난감하게 말끝을 흐리던 희주가 못내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워낙 강경하셔서 차마 말릴 수가 없었어요. 어휴, 여태 이러신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아침도 안 드시고….

    - 죄송합니다.

    - 저한테 미안해하실 일은 아니죠. 저는 두 분의 입장이 다 이해가 가서 뭐라고 말을 못 보태겠네요.

    당장이라도 가온의 뒤를 쫓아가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아침부터 도저히 미룰 수 없는 일정이 있었다. 평소 대외용 미소를 만들어 내는 일에는 그다지 힘을 들이지 않던 지원이었지만, 오늘은 여러 번 이를 악물어야 했다. 지금 이 마당에 갤러리가 대수인가 하는 생각도 문득문득 들었다. 그러나 일까지 내팽개치면 가온을 더욱 화나게 만들 것 같아서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천 번도 넘게 시간을 확인하던 지원이 간신히 운전대를 잡을 수 있었던 건 점심때가 한참 지난 후였다. 서울을 벗어나기가 무섭게 액셀을 밟기 시작한 지원은, 과속 단속 카메라가 등장할 때마다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저 혼자라면 범칙금 낼 각오를 하고 그냥 지나쳤겠지만, 앞 차들이 속도를 줄이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보조를 맞춰야 했다. 자가용 비행기를 구입해 두지 않았던 것이 천추의 한이었다.

    쌍수를 들어 찬성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단식 투쟁에 가출까지 감행하실 줄이야…. 결국 내가 져 드려야 하나. 하루라도 더 보고 싶어서 하는 짓인데, 이렇게 서로 감정이 상하면 의미가 없지 않나. 이런 식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도 너무 아깝고.

    장고 끝에 양보하는 쪽으로 마음을 거의 굳힌 지원이 정원 한구석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가온을 발견하고는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아무리 볕이 좋아도 그렇지, 한겨울에 이렇게 밖에 앉아 계시면 어떡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고 무심하게 고개를 돌리던 가온은, 지원이 코트를 벗어 제 어깨에 두르자 이틀 만에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썩 다정한 음성은 아니었지만, 노기가 섞여 있지도 않았다.

    “안 추워.”

    “보는 제가 추워서요.”

    “안 그래도 안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어.”

    “그럼 안에 들어가셔서 벗으세요. 지금은 감기에 걸려도 약도 못 드시잖아요.”

    지원은 코트를 다시 제게 돌려주려는 가온을 부드럽게 제지하며 그녀의 어깨를 살포시 감싸 안았다. 여전히 속은 복잡했지만, 가온이 제 손길을 거부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뭘 좀 드셨습니까?”

    “먹었어. 죽이랑 과일이랑 조금씩…. 여기 관리하는 이도 권 여사 못지않게 한 고집 하는 사람이라.”

    “잘하셨습니다. 이곳 풍광이 굉장히 좋네요. 여기가 예전에 가온 씨가 사시던 집입니까?”

    “터는 여기가 맞고, 집은 너무 오래되어서 다시 지었어. 최대한 원래 모습대로 짓고 싶었는데, 머릿속에 있는 그림을 도면으로 옮길 재주가 없어서…. 한 70%나 살렸나….”

    아련한 표정을 짓는 가온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지원이 소리 없는 한숨을 가만히 내쉬었다. 아아…, 더는 못 버티겠다. 가온 씨가 슬퍼 보이니까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아. 어차피 못 이길 싸움이라면 괜히 기력 낭비할 거 없이 한시라도 빨리 항복하는 게 낫겠어. 가온의 뜻에 따르기로 결심한 지원이 막 입을 떼려는 순간, 가온이 그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차 관장.”

    “네.”

    “차 관장은 한 번 본 건 안 잊어버리는 사람이니까…. 나중에 무영당을 헐고 다시 지어야 할 때가 오면, 지금하고 똑같이 지어 줘.”

    응? 우리가 살아 있을 때 그럴 일이 생길까? 무영당은 잘만 관리하면 앞으로 수백 년도 너끈히 버틸 텐데. 화재가 나지 않는 이상 무영당을 다시 지을 일이…. 가온의 뜬금없는 부탁에 잠시 의아한 얼굴을 하던 지원이 불현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설마…, 설마…!

    “가온 씨.”

    “에밀 갈레의 화병은 어디 기증하지 말고 잘 가지고 있어. 차 관장이 샀지만, 그건 내 거잖아.”

    “물론입니다. 잘 보관하고 있겠습니다.”

    지원의 표정이 환해지자, 덤덤하던 가온도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곧바로 터져 나온 한숨은 옅게 피어올랐던 미소를 흔적도 없이 사그라지게 만들었다. 지원이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는 건 처음 있는 일이니 제가 굽혀주는 게 맞다고 생각하지만,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힘들 거야.”

    “각오하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이 힘들 거야.”

    “감수하겠습니다. 가온 씨를 다시 만날 수만 있으면요.”

    “힘들 걸 뻔히 알면서도…, 끝까지 반대하지 못해서 미안해.”

    가온은 이번 생에 지원을 만난 건 그야말로 천운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엄청난 행운을 다음 생에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심하게 흔들렸다. 못 이기는 척 넘어가고 싶었다. 그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도망친 거였는데…. 이 집을, 이 집에 살던 사람들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그리워했었는지 되새기기 위해 굳이 여기까지 온 거였는데….

    “사랑합니다.”

    “하아….”

    지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제 겉옷을 벗은 순간,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나는…, 이 남자를…, 한 번 더 만나고 싶어. 커다란 눈망울을 가득 채운 눈물방울이 유리알처럼 또르르 굴러떨어지자, 가온의 떨리는 숨을 제 입술에 담은 지원이 나직한 목소리로 끊임없이 속삭였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영혼을 거는 데 그 외의 다른 이유는 필요치 않았다.

    막 부쳐 낸 진달래 화전을 식탁 위에 올리던 희주는, 다정하게 손을 잡은 부부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식당 안으로 들어오자 눈꼬리를 반달 모양으로 접으며 활짝 웃었다. 얼마 전에 겨우 입덧이 끝난 가온이 이것저것 먹을 것을 찾는 것도 너무 반가웠고, 명계의 주인이 바뀐 뒤로 중천주의 부담이 한결 줄어든 것도 더할 나위 없이 흐뭇했다.

    지원은 염마왕의 자리에 앉자마자 미처 적응을 마치기도 전에 새로운 지옥을 만들어내는 기염을 토했다. 혈루옥이라고 명명한 신설 지옥은 사후에 가이드의 지시에 즉각 응하지 않고 버티던 이들을 수감하는 지옥이다. 말썽을 부리며 도망치다 잡혀 온 망자들은 인계에서 버틴 기간만큼 혈루옥에서 말 그대로 피눈물 나는 반성의 시간을 가지게 되는데, 그 기간은 전체 형기에 합산되지 않도록 규정을 정했다.

    그 사실이 인계에 거주하는 망자들에게 소문이 나면서 가이드의 지시를 거부하는 망자들의 수가 대폭 줄었고, 더불어 악령의 출현 빈도도 낮아졌다. 염마왕이 중천주의 남편이었기에 가능한 조치였다.

    “그래서 두 개의 포청을 하나의 기관으로 통합하고 HBI로 명칭을 변경하기로 했습니다. 아무래도 포청은 너무 시대에 뒤떨어진 것 같아서요.”

    “HBI?”

    “네. Hell Bureau of Investigation의 약자입니다. FBI에서 차용했죠. 그리고 조만간 중천과 공조 시스템을 만들려고 합니다. 이를테면 인터폴 비슷하게요. 인계에서 나름대로 악령들의 등급을 정하면 그중 적색수배 등급의 망자는 HBI 요원이 직접 체포하는 겁니다. 아무래도 인간들은 운신에 물리적인 제한이 있으니까요. 에스코트 과정에서 부상을 입을 우려도 있고요.”

    “중천의 입장에서는 고마운 제안이긴 한데…. 그러면 명계에 너무 부담이 되지 않을까?”

    “전혀요. 명계에 차고 넘치는 게 인적 자원이니까 인력이 부족하면 충원하면 됩니다. 모범수들에게 그런 기회를 주면 수감 생활의 충실도도 저절로 올라갈 테고요.”

    너무나도 산뜻하게 대답하는 지원을 바라보며 가만히 눈을 깜빡이던 가온이 살짝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힘들지는 않아?”

    “네. 명계에 머물고 있을 때 호흡이 조금 답답한 거 말고는 딱히 불편한 건 없습니다. 그것도 차차 적응되고 있고요.”

    “차 관장은 원래 뭐든 잘하는 사람이긴 했지만, 염마왕 노릇까지 이렇게 잘 해낼 줄은 몰랐어. 3개월 차 염마왕 같지가 않아.”

    “그러니까요. 몰랐는데 제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걸 좋아하더라고요. 다들 제가 시키는 대로 토 달지 않고 착착 움직이니까 아주 재밌습니다.”

    “하하하.”

    요즘 들어 웃음이 많아진 가온이 크게 소리를 내어 웃다가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우리 시윤이가 일어났나 봐. 여기 발 내미는 거 보여?”

    “아니, 넓은 자리를 놔두고 대체 왜 옆구리에 가서 축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엄마가 얼마나 불편한 줄도 모르고.”

    “너무 뭐라고 하지 마. 애가 다 듣는다고 했어.”

    “들으라고 하는 말입니다. 듣고 시정을 좀 하면 좋겠네요.”

    “시정이라니…. 시윤이가 차 관장 부하 직원이야?”

    바쁘게 손을 놀리면서도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쫑긋 기울이고 있던 희주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신혼부부의 알콩달콩한 모습도 참으로 보기 좋았고, 어려운 고비를 무사히 잘 넘기고 씩씩하게 자라고 있는 아기도 기대가 되었다. 염마왕 아빠와 중천주 엄마 사이에서 태어나는 아이는 대체 어떤 아이일까? 벌써부터 너무 궁금해서 잠이 오지 않을 지경이다.

    “차시윤. 말로 할 때 원위치 하지? 엄마 등까지 갈 셈이야?”

    “아기한테 너무 무섭게 말하지 말라니까.”

    “귓등으로도 안 듣는데요?”

    “차 관장도 지금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고 있잖아.”

    눈꼬리를 살짝 들어 올린 가온이 지원의 손등을 찰싹 내리치자, 지원이 허리까지 접어가며 박장대소했다. 짐작건대 항상 무덤덤하던 가온이 발끈하는 게 재밌어서 부러 더 건드리는 모양이었다. 지원이 요즘 얼마나 가온을 귀여워하는지는 당사자인 가온만 빼고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저를 차 관장이라고 부르실 겁니까? 애도 곧 태어나는데.”

    “….”

    “여보라고 한 번만 불러 보시라니까요?”

    “그건 못 해.”

    입을 꾹 다문 가온의 볼을 꾹 찌르던 지원은, 기어이 손등을 한 대 더 맞고 나서야 장난을 멈췄다. 오늘도 여느 때와 같이 평화롭기 그지없는 무영당의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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