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 가막살나무 빨간 열매 (16/18)

15. 가막살나무 빨간 열매

빛도 없고 소리도 없는 완전한 암흑 속. 시간의 흐름조차 가늠할 수 없는 곳에서 그저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가온이 희미하게 느껴지는 인기척에 천천히 눈을 떴다. 멀리서 어른거리던 불빛이 점점 가까워진다 싶더니, 여느 때처럼 단정한 무복 차림의 모화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초롱과 비단 보자기로 싼 꾸러미 하나를 각각 양손에 들고 나타난 모화영은 가온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천주님.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십니까.”

“….”

불편한 곳이 없냐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 이렇게 결박되어 있는데? 가급적 체력을 소비하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마음을 다스리고 있던 가온이 한쪽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모화영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것만으로도 가온의 불편한 심기는 충분히 전달되었고, 모화영 역시 딱히 긍정의 대답을 들으려는 의도는 아니었기에 구태여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지는 않았다.

잠시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가온을 응시하던 모화영은, 곧 가온의 옆에 공손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제가 들고 온 꾸러미를 펼쳐 놓았다.

“요깃거리를 조금 준비했습니다, 천주님.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을 텐데, 기력이 쇠해지기 전에 어서 드시지요. 절대로 건강을 해치시는 일이 없게 하라고 마왕님께서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지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십니다.”

“….”

가증스럽군. 고집스럽게 입을 다문 가온이 아무런 대꾸 없이 고개를 돌리자, 짧게 한숨을 내쉰 모화영이 한층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의 약점을 자극했다.

“복중에 태아를 잉태하고 계시다 들었습니다. 어차피 명계로 내려오셨으니, 아기를 위해서라도 마음을 다잡으셔야지요. 무사히 출산하시려면 말입니다.”

“….”

“천주님. 아시다시피 이곳은 가장 사악한 영혼들을 가두는 곳입니다. 때문에 이런 곳에 오래 머무시는 것은 천주님께도, 아기님께도 좋지 않습니다. 딱 한술만 뜨시면 바로 마왕님의 침전으로 거처를 옮겨 드리겠습니다. 이미 아름다운 전각 하나를 비워 말끔하게 정돈해 두었답니다.”

끝까지 말을 섞지 않을 요량이던 가온이 저를 달래는 모화영을 기가 막힌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미 하율의 바닥을 보았다고 생각했었는데, 놀랍게도 그게 전부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당신 참…,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지독한 남자네.

“그대가 아주 오랫동안 염마왕의 여인이었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런 이에게 어찌 이런 파렴치한 심부름을 시킨단 말인가. 염마왕이 뻔뻔하게 제 입으로 그대에게 새로 들일 여인의 거처를 마련하라 이르던가?”

가온의 뼈아픈 지적에 아주 잠깐 씁쓸한 눈빛을 하던 모화영이 곧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생긋 웃었다.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 적나라한 속사정을 가온의 앞에서 내색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제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이미 오래전의 일입니다. 한때 마왕님을 가까이에서 모셨던 적이 있긴 하나, 지금의 저는 그저 그분의 충실한 신하일 뿐입니다.”

“그래? 그럼 나에 대한 염마왕의 마음도 언젠가는 변하겠군. 하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지.”

“하지만 천주님을 향한 마왕님의 마음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남자가 무려 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수절하며 기다렸을 정도의 순정이니까. 이번에는 완벽하게 표정을 관리하지 못한 모화영이 서러움과 불쾌감이 뒤섞인 눈빛을 감추기 위해 황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걸 보고 있으려니 가온의 마음속에서는 염마왕에 대한 혐오감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사람에 대한 호불호가 거의 없던 가온이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싫어하게 된 건 처음이었다.

“좌포청장이 그걸 어찌 장담하지? 기어이 나를 이런 곳까지 데리고 왔으면서도 코빼기 한 번 내비치는 성의도 보이지 않는 자인데.”

“그것은 마왕님께서 지금 거동을 하실 수가 없어서….”

무의식적으로 염마왕의 입장을 대변하던 모화영이 실수했다는 표정으로 재빨리 입을 다물자, 가온의 눈동자에 의문이 가득 담겼다.

“거동을 못 해? 어째서?”

“아…,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저 급하게 처리하셔야 할 업무가 밀려서 당분간 자리를 비우실 수가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니 천주님께서는 뭔가 필요한 게 있으시면 저를 찾으시면 됩니다. 이 초롱의 불을 끄시면 제가 바로 달려오겠습니다.”

“좌포청장.”

“그럼 저도 공사가 다망하여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황급히 몸을 일으킨 모화영이 가온을 향해 대충 고개를 숙이고는 그대로 자리를 벗어났다. 언제나 여유 만만하던 모화영이 허둥대는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가온은, 그녀가 제 시야에서 사라지자 긴장이 탁 풀린 얼굴로 긴 한숨을 토해냈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사실 모화영이 나타난 순간부터 그녀가 아기에게 뭔가 해코지를 할까 봐 내내 마음이 불안했었다.

하율이 제게 아이를 살려 주겠노라 약속을 하긴 했어도 이곳에서는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다. 실제로 하율이 이렇게까지 미친 짓을 할 거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었고, 때문에 이제는 그 어떤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놀랍지 않다.

“아가, 엄마가 더 빨리 너를 알아채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어쩐지, 이상하게 몸이 늘어진다 했지. 연인과 한 침대를 쓰고 있으니 이런 일이 생길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을 했어야 했는데…. 배를 살살 어루만지며 그 안을 신중하게 살피던 가온은, 손가락만 한 아기가 새싹처럼 돋아난 작은 손발을 움직거리는 걸 지켜보며 옅게 미소를 지었다.

“많이 놀랐을 텐데 잘 버텨 줘서 너무너무 고마워. 우리 함께 무사히 아빠한테 돌아가자. 엄마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지켜줄게.”

각오를 다진 가온이 입매를 굳히며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기를 돌려받기 위해서 일단 명계행을 선택하긴 했지만, 하율의 바람대로 이곳에 얌전히 머물 생각은 애초부터 눈곱만큼도 없었다. 사후에 결국 이곳으로 다시 오게 되는 한이 있어도, 제게 남아 있는 30년은 반드시 지원의 옆에서 보내야 한다.

지금쯤은 차 관장이 모든 걸 알게 되었겠지. 얼마나 놀라고 기가 막혔을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면 좋겠는데…. 큰 충격을 받았을 지원을 떠올리니 가슴이 답답해졌지만, 가온은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꾹 참았다. 아기에게는 좋은 소리만 들려주고 싶었다.

“일단 물이 있어야 하는데….”

모화영이 놓고 간 음식들을 찬찬히 둘러보던 가온이 찻물이 담긴 주전자를 집어 들었다. 다행히 제법 묵직했다. 연한 연둣빛 찻물을 통째로 들어 올린 가온이 작은 검 하나를 만들어 냈다. 수기가 너무 부족해서 평소에 쓰던 크기의 검을 소환할 수는 없었지만, 일단은 무기를 손에 쥔 것만으로도 한결 마음이 든든해졌다.

“이제 뭐부터 시작해야 할까.”

시간이 넉넉하지 않으니 시행착오 없이 움직여야 한다. 연유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현재 염마왕은 제가 있는 곳에 무시로 드나들 만한 형편이 아닌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가 언제 들이닥칠지는 아무도 알 수 없고, 무엇보다 가온은 아직 살아 있는 상태다. 생존을 위해서는 반드시 수분 섭취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러나 명계의 것을 입에 댈 수는 없고, 따라서 닷새 이상 버티기는 어렵다.

결박을 먼저 푸는 것이 좋을까? 아무래도 손발의 움직임이 자유로워야 힘을 쓰기가 편할 텐데. 하지만 이 천에는 염마왕의 속박 주문이 담겨 있어서 완전히 끊어 내려면 적어도 한나절은 걸릴 거야. 성공하기 전에 발각되어 다시 묶이게 되면 도로 아미타불이고.

아니면 통로부터 만들어야 하나. 여기서 중천까지 통로를 만들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내가 지금 운용할 수 있는 힘이 평소의 5% 남짓…. 그렇다면 최대 80시간까지 걸릴 수도 있다는 건데…. 흐음, 그건 좀 어렵겠는데? 단순 계산으로도 꼬박 사흘이 넘게 걸리는 데다,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상태에서 80시간 내내 쉬지 않고 힘을 쓸 수는 없어.

아! 여기로 올 때 염마왕이 만든 통로를 통해서 다이렉트로 왔었지, 참. 그 통로를 이용할 수 있을까? 온 신경을 집중해서 길을 따라가 보던 가온이 짧게 혀를 찼다. 역시 용의주도한 자라 중천 쪽 입구는 막아 놨네. 그 정도는 뚫을 수 있을 것 같긴 하지만, 모험을 할 수는 없어. 모든 방법을 다 생각해보고 그중 성공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걸 선택해야 해.

신중한 눈빛을 한 가온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모든 이성과 감각을 두뇌 회전에 총동원해야 했기에, 슬그머니 드리웠던 염려와 두려움 따위는 끝내 자리를 잡지 못했다.

“형, 대표님이 지원이 형의 아기를 가지셨어?”

해수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얼굴로 묻자, 크게 한숨을 내쉰 도겸이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초유의 사태에 도겸도 큰 충격을 받긴 했지만 염마왕이 벽에 새겨 놓은 약조가 사실이라면 가온의 배 속에 있는 아기의 아버지는 당연히 지원이 될 수밖에 없다.

“아마도.”

“어떻게 그런 일이 있어? 둘이 사귀어?”

“하아…, 그래. 연말 즈음에 결혼할 예정이었지.”

“결혼?! 올해 연말에?!”

소리를 꽥 지르는 해수의 입을 다급하게 틀어막은 도겸이 그를 질질 끌고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눈치라고는 쥐똥만큼도 없는 해수였지만, 오늘은 그나마 다행으로 분위기 파악이 좀 되는지 더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큰 소리 안 낼 테니까 이것 좀 놔 봐. 두 사람이 대체 언제부터 사귀었는데?”

언제부터? 미간을 좁히며 기억을 더듬던 도겸이 어렵지 않게 기간을 계산해 냈다. 7월 말에 23일째라고 했었으니까….

“다섯 달 조금 넘었어.”

“다섯 달? 세상에, 그걸 왜 나는 여태 몰랐어? 형도 알고, 권 실장님도 아시고, 심지어 저 외국분도 아시는 것 같은데!”

분기탱천한 해수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가리킨 이는 리마에서 한달음에 달려온 브루엘이었다. 가온이 망자에게 환수검을 던지던 바로 그 순간, 그는 보안실장과 통화 중이었다고 했다. 5분만 빨랐어도…. 아니, 단 1분이라도…. 아쉬운 마음에 자꾸만 한숨이 나왔다.

“조용히 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리고 너 괜히 지원이 형한테 허튼소리 하지 마, 알았어?”

“나도 그 정도 생각은 있어, 뭐. 그런데 지원이 형은 의외로 되게 침착하네? 평소에는 화도 잘 내고 소리도 잘 지르더니. 독하다, 진짜. 얼굴색 하나 안 변하네.”

너는 지금 저게 침착한 걸로 보이냐? 눈이 완전히 돌았잖아. 염마왕이고 뭐고 당장 찢어 죽이게 생겼다고. 도겸이 정확하게 짚어낸 것처럼 지원은 지금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꾸역꾸역 삼키는 중이었는데, 그건 아직 제가 알아두어야 할 정보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게 인계에 딱 하나 남아 있는 경전이라고 했다고요?”

“네. 제가 분명히 들었습니다. 대표님한테 그 기준을 적용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지구 반대편에 한 개를 남겨 놨다고 했습니다.”

“그럼 일단 그걸 없애야겠네요. 아무래도 남의 나라에 있는 문화재이니 절차가 조금 복잡하긴 하겠지만….”

“아무리 복잡해도 해야죠. 페루 정부에 직접적으로….”

브루엘과 현호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지원이, 구체적인 실천 방안이 거론되기 전에 서늘하게 말을 잘랐다. 그건 지금 당장 급한 게 아니고.

“권 실장님.”

“네.”

“최대한 빨리 카넬리언 원석을 구해주십시오. 지름은 2cm 정도, 오차범위는 3mm 미만으로. 가급적 완전한 구형에 가까워야 하고,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걸로…, 뭘 하시려고요?”

“대표님을 모시러 가야죠.”

지원의 목소리가 워낙 덤덤했기에, 브루엘과 현호가 그 대답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 건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큰 충격에 빠진 두 사람은 그대로 굳어 버렸는데, 지원을 더 오래 겪어 왔던 현호의 반응이 그나마 조금 더 빨랐다.

“지금…, 명계로 가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물론입니다. 처자식이 납치를 당했는데, 찾으러 가는 건 당연한 일 아닙니까?”

처자식…. 지원의 무심한 반문에 순간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현호와 브루엘은 그저 입을 떡 벌린 채 그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반듯한 얼굴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크게 들썩이는 가슴은 지원의 인내심이 대단히 빠른 속도로 닳고 있다는 걸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제야 두 사람은 지원이 지금 분노를 폭발시킬 시간조차도 아까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간이 없습니다. 명계의 어지간한 곳은 다 둘러봤었지만, 아까 그 통로의 반대편처럼 오로지 암흑만 존재하는 곳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는 건 현재 대표님이 갇혀 계시는 장소가 무저갱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을 무저갱에 가두다니…. 대번에 인상을 구긴 브루엘과 현호는 염마왕의 악랄함에 치를 떨었지만, 지원의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침착하기만 했다.

“대표님은 뭐든 쉽게 포기하실 분이 아니니 어떻게든 돌아올 방도를 궁리 중이실 겁니다. 하지만 음기가 강한 명계에서 사람이 컨디션을 유지하는 건 물리적으로 한계가 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그것도 임신부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과연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하지만…. 

“권 실장님. 지금도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서 카넬리언 원석을 구해주십시오. 제가 빈손으로 명계에 뛰어드는 걸 보고만 있을 작정이 아니시라면 말입니다.”

파랗게 질린 입술을 달싹이던 현호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거의 뛰다시피 중천을 빠져나갔다. 그럼 이제 다음은 무저갱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 지원의 차분하면서도 예리한 눈빛이 브루엘을 향했다.

“브루엘. 혹시 무저갱의 위치에 대해 아는 바가 있습니까?”

“글쎄요. 지옥의 가장 밑바닥에 존재한다는 기록이 있긴 하지만,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습니다. 다만…, 염마왕의 별이 속한 별자리 아래에 있지 않을까 추정하고 있습니다.”

“염마왕의 별이요?”

“네. 현재 지구에서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별자리입니다. 그 생김새는 대충 알지만, 일단 지도가 있어야 대강이라도 위치를 잡을 수 있을 텐데….”

몹시 심란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던 브루엘은, 제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만년필을 꺼내 든 지원이 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자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했다. 마치 낙서를 하듯 빠른 속도로 쓱쓱 그려지는 그림을 가만히 바라보던 브루엘은, 지원이 지금 그리고 있는 것이 명계의 지도라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지도를 그릴 수가 있습니까? 이 자료를 대체 어디서 봤습니까?”

“일전에 명계에 갔을 때 제 눈으로 직접 봤습니다. 공교롭게도 명계 전체를 돌아볼 기회가 있어서…. 대충 눈대중으로 가늠한 거라 거리의 비율은 정확하지 않습니다만.”

이 자식, 대체 뭐 하는 놈이야? 그림을 그리는 자라는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완전히 얼이 빠진 얼굴로 지원의 얼굴과 지도를 번갈아 바라보던 브르엘이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제 뺨을 찰싹 소리가 나게 내리쳤다. 내가 지금 이자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되지.

“무저갱은 아마도 산속에 있을 겁니다. 무저갱 전체를 토사로 덮고 그 위에 식물이 뿌리를 내리게 해서 입구를 쉽게 찾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는 기록을 본 적이 있습니다.”

산이 있는 곳을 위주로 신중하게 지도를 살피던 브루엘이 고민 끝에 네 개의 점을 찍었는데, 그가 마지막으로 체크한 곳은 염마왕의 침전이 있는 곳이었다. 여태까지 간신히 평정을 가장하던 지원의 얼굴에 순간 미세하게 금이 갔다.

“그 입구는 어떻게 찾을 수 있습니까.”

“달빛을 모아 문을 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저 단순한 비유라고만 생각했었는데, ‘태양의 숨결’이 실존하는 보석을 뜻하는 걸 보면 아마도 월장석 류의 보석으로 표시를 해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지금까지 습득한 정보를 빠르게 정리하던 지원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저를 지켜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해수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했다.

“연해수.”

지원의 손짓에 한달음에 달려온 해수는 몹시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지만, 용케 입을 열지 않고 참고 있었다. 눈치도 없는 놈이 이럴 땐 좀 기특하네. 설핏 웃음을 흘린 지원이 해수의 손에 들린 총을 가리켰다.

“그거 이리 내. 나중에 똑같은 걸로 열 개 사줄게.”

“이걸로 뭘 하려고요?”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은 지원이 해수의 손에서 총을 낚아채더니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는 스펀지 공 세 개를 주워 장전했다. 철컥 소리가 나게 슬라이드를 당긴 지원이 세 발을 연달아 쏘더니 조금 못마땅한 기색으로 혀를 찼다.

“쯧, 15m가 고작이네. 너는 아까 좀 더 멀리까지 쏘지 않았어? 거의 50m 가까이 되는 것 같았는데.”

“저는 이걸로 귀신 잡는 사람이잖아요. 일반인하고는 다르죠. 아까 총알로 쓴 건 스펀지보다는 무겁기도 했고…. 그런데 이걸 가지고 뭘 할 건데요? 이거 장난감이에요, 형. 조카 주려고 산 거라고요.”

“그래, 나도 내가 이런 알록달록한 물건을 들고 다녀야 한다는 게 미학적으로 참 용서가 안 되기는 하는데…. 명계에 최소한의 방어 도구도 없이 갈 수는 없지 않겠냐?”

“어딜…, 가요?”

제 귀를 의심하며 얼떨떨하게 되묻던 해수가 브루엘과 도겸의 눈치를 빠르게 살피더니 기함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미쳤어요, 형? 살아 있는 사람이 어떻게 명계에 가요? 돌아오지 못하면 어쩌려고!”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린 지원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조금 웃었다. 이번에는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망설임도 없는 제 자신이 지원도 마냥 신기했다.

- 만에 하나 돌아오지 못할 상황이 생긴다고 해도?

- 네. 대표님이 그곳에 계시면요.

내가 여자 때문에 목숨을 걸 수도 있는 인간이었구나. 약속이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거였어. 고작 말 한마디였을 뿐인데…,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네.

“그래도 가야지. 대표님이 거기에 계시니까.”

“형!”

“해수야.”

더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해수의 이름을 부른 지원이 제 반지를 빼서 그의 손에 꼭 쥐여 주었다. 가온의 약지에 웨딩밴드를 미리 채워두었던 것이 이렇게 다행스러울 수가 없었다.

“대표님이 무사히 돌아오시려면, 한 쌍을 이루는 물건을 인계에 남겨 두어야 해. 그러니까 이거 어디에 흘리지 말고 잘 가지고 있어. 그럴 수 있지?”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는 해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몇 차례 더 종용하자, 거의 울상이 된 해수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이제 총알만 챙기면 되나. 바로 그때 얼핏 봐도 묵직해 보이는 천 가방 하나를 손에 든 현호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기대했던 것보다 많이 구해 오셨네요.”

“옆 건물에 있는 보석상을 싹 털었습니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한 현호가 정말이지 내키지 않는 손길로 지원에게 가방을 내밀었다. 평범한 인간이 저런 장난감 총 하나를 들고 염마왕을 상대하러 지옥에 가다니. 생각할수록 기가 막힌 일이었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찾아보면 있을 수도 있겠죠.”

한가하게 고민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서 그렇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지원이 총과 가방을 코트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평소 주머니에 뭔가 불룩하게 집어넣는 걸 대단히 꼴불견으로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저기요, 차 관장님.”

모두를 향해 작게 고갯짓을 한 지원이 막 떠나려는데, 웬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그를 돌려세웠다. 돌아보니 음성의 주인은 판정원인 채윤이었다. 오다가다 서로 안면만 익혔을 뿐, 대화를 나누는 건 처음이었다.

“얼핏 들으니까 지금 명계에 가시는 것 같은데…. 이거 가지고 가세요.”

“이게 뭡니까?”

“망자들한테 인간의 기척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향수에요. 저희 할아버지가 가이드이면서 조향사이신데, 제가 어릴 때 귀신을 너무 무서워해서 만들어주셨거든요. 지금도 밖에 나가면 악령들이 너무 달라붙어서 항상 뿌려요.”

안 그래도 포청 관원들의 눈을 어떻게 피해야 하나 계속 고민 중이던 지원은 채윤이 내미는 작은 용기를 감사히 받아 들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한 번 뿌리면 효과가 서너 시간 정도 지속되는데, 휴대용으로 가지고 다니던 거라 양이 많지는 않아요. 아마 스무 번 정도 사용하실 수 있을 거예요.”

여차하면 법궁에 들어서자마자 총을 휘갈기고 시작할 과격한 결심까지 하고 있던 지원이 크게 한시름 던 얼굴로 다시금 채윤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모두를 향해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형, 꼭 돌아와야 돼요.”

“그래.”

“대표님이랑, 아기랑…, 다 데리고 와요.”

“당연하지.”

눈물을 글썽이는 해수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지원이 성큼성큼 걸어서 명계수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의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남은 이들은 몹시도 침통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지금은 그저 무사 귀환을 기도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으으…, 카울라….”

정성스러운 손길로 하율의 땀을 닦아 주던 모화영은 열에 달뜬 목소리로 신음하는 하율을 내려다보며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밤새도록 간호하고 있는 저는 안중에도 없이 다른 여인만을 찾는 그가 야속했지만, 그럼에도 차마 그의 옆을 떠날 수 없는 제 자신이 너무나도 초라하고 한심했다.

“…좌포청장?”

“네. 접니다, 마왕님. 정신이 드십니까?”

“내가…, 얼마나 이러고 있었지?”

“꼬박 하루가 지났습니다. 통증은 좀 어떠십니까.”

흐릿한 시야의 초점을 맞추기 위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 하율이 일그러진 얼굴로 작게 웃었다. 처음 총에 맞았을 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는데, 하룻밤이 지나니 조금 나아진 것 같았다. 물론 가온을 손에 넣는 대가라고 생각하면 이런 고통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

“가온은?”

제 질문에는 대꾸도 하지 않은 하율이 가온의 안부부터 묻자, 모화영의 손에 들려 있던 비단 수건이 확 구겨졌다. 하지만 대답하는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공손하고 나긋나긋했다.

“그저 조용히 앉아 계십니다.”

“뭘 좀 먹었어?”

“아직….”

쯧. 못마땅하게 혀를 찬 하율이 몸을 일으키려다 가슴을 부여잡으며 풀썩 쓰러졌다.

“으윽.”

“마왕님!”

가온이 어쩌고 있는지 너무 궁금하고 걱정스러웠지만, 극심한 고통에 한 발자국도 뗄 수 없었던 하율은 다시 침상에 누울 수밖에 없었다. 아픔이라는 감각을 느껴본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몸이 통증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마왕님, 괜찮으십니까?”

“아니.”

오만상을 찌푸리면서도, 하율은 몹시도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제 시간은 많으니까. 그자와 함께한 시간은 고작 1년 남짓…. 이곳에서 지내다 보면 언젠가는 과거를 잊고 마음이 풀릴 날이 오겠지. 마음이 느긋해진 하율이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러느라 모화영의 눈빛이 사나워지는 건 미처 보지 못했다.

“귀신을 그렇게 무서워하는 사람이 향수를 놓고 가면 어떡해? 모처럼 쉬는 날에 사람 낮잠도 못 자게…. 당신 요새 자주 깜빡깜빡한다? 그러니까 내가 아몬드 열심히 먹으라고 했잖아. 언제까지나 이팔청춘이 아니에요.”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려던 채윤이, 남편의 무뚝뚝한 타박에 고개를 홱 돌리며 사납게 눈꼬리를 치켜떴다. 세상에는 애인을 구하러 지옥에 가는 남자도 있는데, 고작 차로 20분 거리를 데리러 와 놓고 생색은! 자기가 항상 옆에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칠 때는 언제고!

“놓고 온 게 아니라 나보다 더 필요한 사람한테 준 거야.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중천에 근무하는 사람 중에 당신보다 더 겁이 많은 사람이 있어? 에이, 그럴 리가.”

코웃음 치는 남편을 빤히 쳐다보던 채윤이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록 남편도 중천 소속 직원이긴 하지만, 중천에서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에 대해서는 보안실의 공식적인 발표가 있을 때까지 비밀을 유지하는 것이 기본이다. 생전의 과오가 사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중천의 직원들은 별다른 제재가 없어도 그 규정을 알아서 잘 지키곤 했다.

더욱이 오늘 벌어졌던 일은 중천에서 수십 년을 근무했던 직원들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대형 사고였다. 함부로 떠벌리기도 겁이 날 정도였다. 염마왕이 중천주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는 것도 놀라운데, 일부러 악령을 풀어서 소란을 일으킨 것으로도 모자라 기어이 납치까지 하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어? 생각할수록 어처구니가 없다.

그나저나 차 관장님은 명계에 잘 도착하셨을까? 향수는 좀 도움이 되었으려나. 두 사람 사이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아이까지 가질 정도로 깊은 관계였을 줄은 몰랐네. 만약에 대표님이 명계에서 돌아오지 못하시면 중천은 어떻게 되는 거지? 제니스 컴퍼니 쪽도 문제고….

채윤이 심각한 얼굴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그녀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던 남편이 지나가는 말처럼 슬그머니 입을 뗐다. 원래도 혈기 왕성한 타입은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유독 얼굴색이 안 좋은 것 같아서 조금 걱정이 되었다.

“중천에서 일하는 거 많이 힘들어?”

아주 어렸을 때 영안이 트인 채윤은 귀신을 매우 두려워하는 아이였다고 했다. 때문에 그녀는 할아버지가 직접 제조한 향수가 없으면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고, 어딜 가든 해가 떨어지기 전에는 반드시 귀가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대학교 후배였던 채윤이 저녁 모임에 전혀 참석하지 않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던 그는, 어느 날 우연히 그녀가 귀신을 볼 줄 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등학생일 때부터 아르바이트로 가이드 일을 해 왔던 그는 자신이 귀신을 쫓아주겠노라며 그녀에게 호기롭게 데이트를 신청했었다. 밤거리를 걷는 게 처음이라던 그녀의 상기된 표정은, 15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대학을 졸업한 채윤은 긴 고민 끝에 판정원을 직업으로 선택했다. 귀신들이 너무 달라붙어서 다른 일을 하는 건 불가능했고, 그렇다고 혼자서 망자를 쫓아다니는 건 도저히 할 수가 없을 것 같다는 게 이유였다. 다행히 채윤은 중천에 잘 적응했다. 중천에서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망자를 상대할 수 있는 데다 보안 요원들이 상주하고 있으니 악령이 나타나도 크게 무섭지가 않다고 했다.

그래도 마냥 쉽지는 않겠지. 중천에는 그야말로 별의별 진상들이 다 몰려드니까. 새삼 아내가 안쓰러워진 남편이 표정을 조금 흐렸다.

“뭐, 익숙해져서 이제는 할 만해.”

“정 힘들면 좀 쉬지 그래? 휴가를 내든지, 아니면 휴직이라도.”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 건데?”

“아니…. 오늘 좀 힘들어 보여서. 안 그래도 요새 좀 마른 것 같기도 하고.”

오늘 왜 이래? 뭘 잘못 먹었나?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안 하던 말을 하는 남편을 쳐다보던 채윤이 곧 눈매를 갸름하게 접으며 작게 실소했다.

“흥. 그래도 그만두라는 말은 안 하네?”

“그건 좀…. 아직 대출금도 많이 남았고…. 애들 학원비도 장난 아니고….”

남편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자, 입꼬리를 슬쩍 들어 올린 채윤이 소리 없이 씩 웃었다. 하긴, 이런 게 사람 사는 거지. 힘들어도 꾸역꾸역 직장 생활 하면서, 나를 적당히 위해주는 남편과 함께 평범하게 애들 키우고, 열심히 모아서 대출금도 갚고…. 나는 이 정도로 족해. 말 그대로 목숨까지 거는 불같은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아.

“걱정하지 마. 안 그만둬.”

“걱정을 하는 게 아니라….”

“알았으니까 앞이나 보세요.”

집에 도착해서 모처럼 남편과 팔짱을 끼고 동네 산책에 나선 채윤은, 앙상한 가지에 탐스러운 빨간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나무 한 그루를 발견하고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제가 쓰는 향수의 미들 노트 원료로 쓰이는 꽃이 피는 나무였다.

“저게 무슨 열매지? 산수유인가?”

“아니. 가막살나무.”

“개박살나무? 무슨 나무 이름이 그렇게 과격하냐?”

남편의 우스꽝스러운 대꾸에 헛웃음을 짓던 채윤이 아무 말 없이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소박한 행복을 지향하는 남편에게 굳이 그런 비장한 꽃말을 가르쳐주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채윤은 죽음을 불사하고 사랑을 선택한 한 남자를 마음속으로 조용히, 그리고 간절히 응원했다.

그 사랑이 반드시 무사하기를. 그래서 아주 오랫동안 변치 않고 아름답기를. 부디…. 제발….

염마왕의 침전이 있는 돌산 앞에 선 지원이 마음을 다잡기 위해 천천히 호흡을 고르며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밤낮의 구분이 없어서 시간의 흐름을 잘 느끼지 못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명계에 발을 들인 지 벌써 하루하고도 반이 지났다. 그동안 1분 1초도 쉬지 못하고 계속 움직이느라 기력이 조금 떨어지긴 했지만, 몸이 고단한 건 그래도 참을 만했다. 그보다는 가온의 안위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게 지원을 더욱 힘들게 했다.

“여기에는 꼭 있어야 되는데….”

브루엘이 찍어준 두 군데의 후보지를 거쳐 세 번째로 이곳에 도착했다. 만약 여기에서도 무저갱을 발견하지 못하면 네 번째 후보지를 찾아 나서야 하는데, 그곳은 다른 세 개의 후보지와는 달리 명계의 반대편 끝이라 걸어서 가려면 며칠이 걸릴지 알 수 없다.

“24시간 안에 정상을 찍을 수 있을까.”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 꼭대기를 잠시 응시하던 지원이 거의 평지를 걷는 속도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예전에 왔을 때 이 산을 걸어서 올라가려면 족히 사흘은 걸릴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지금 지원에게는 그만한 여유가 없다. 때문에 어떻게든 하루가 지나기 전에 정상을 찍어야 한다.

“망할. 신발이나 갈아 신고 올 것을.”

비교적 발이 편한 신발을 신기는 했어도, 구두를 신고 계속 걷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산을 오르는 것은 정말이지 쉽지 않았다. 계단을 오를 때는 그래도 괜찮았다. 계단이 끊겨서 아무런 안전장치가 없는 바위를 탈 때면, 발이 미끄러져서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차라리 신발을 벗어 던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바닥이 너무 거칠고 험해서 그럴 수도 없었다.

그렇게 여덟 시간을 쉬지 않고 산을 오르던 지원이 종아리가 터질 것 같은 통증을 느끼고는 처음으로 걸음을 멈췄다. 평소에 피트니스에서 어마어마한 운동량을 소화하던 지원에게도 돌산을 뛰다시피 오르는 건 상당히 버거웠다. 마음은 급한데, 숨은 턱 끝까지 차올랐고, 그 와중에 다리에는 쥐가 났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허억…, 허억.”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숨을 몰아쉬고 있으려니 시원한 물 한 모금이 간절했다. 목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을 그저 견디고만 있으려니, 그동안 간신히 눌러두었던 염마왕을 향한 극렬한 적개심이 마치 용암처럼 치솟았다.

“하아, 하아…. 그 새끼를 어떻게 죽여야 할까. 갈기갈기 찢어 죽여도 속이 안 풀릴 것 같은데….”

쉽게 통제가 안 되는 분노로 이성이 들락날락하는 중에도, 지원의 날카로운 눈은 쉬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며 높이를 가늠했다. 이 정도면 1/3은 올라온 건가. 시간상으로는 그 정도는 올라왔어야 하는데. 주변을 휘휘 살피던 지원이 독특한 수형을 가진 나무 한 그루를 발견하고는 눈썹을 조금 찡그렸다. 기둥이 덩굴 식물처럼 구불구불했는데, 희한하게도 쓰러지지 않고 멀쩡하게 잘 자라고 있었다.

“저게 열매인가?”

나무 가까이로 다가간 지원이 가지 끝에 매달린 반짝거리는 것들의 정체를 확인하려고 막 손을 뻗은 순간, 갑자기 발밑이 푹 꺼지더니 비명 한 번 지를 새도 없이 어두컴컴한 산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는 한없이 밑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

담력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던 지원이었지만, 바닥을 알 수 없는 곳으로 추락하는 것은 그야말로 간담이 서늘해지는 일이었다. 게다가 가끔씩 휙휙 지나치는 풍경은 지원을 더욱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암흑 속에 군데군데 화석처럼 박혀 있는 각양각색의 지옥들은 염라국 지상에서 봤던 것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 세상에 고륜지옥보다 더 끔찍한 곳은 없다고 생각했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라는 걸 오늘 알았다.

“씨….”

한참 만에 가까스로 바닥에 내려선 지원은 저도 모르게 욕설을 툭 내뱉었다. 가온과 사귀기 시작한 이후로는 혼자 있을 때도 언행을 조심하려고 노력해 왔지만,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식겁했던 탓에 감정이 조절이 되질 않았다.

“뭐야, 여긴.”

지원이 떨어진 곳은 벽과 바닥도 구분할 수 없는 온전한 어둠의 한복판이었다. 여기가 바로 무저갱이구나.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심지어는 바닥이 딱딱한지 푹신한지 구분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섬뜩한 기운만이 도처에 가득했다.

“제대로 온 것 같긴 한데…. 나가는 건 또 어떻게 해야 되나.”

산 넘어 산이라는 게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이었다. 난감한 얼굴로 길게 한숨을 내쉬던 지원이 애써 정신을 수습하고는 조심스럽게 라이터를 켰다. 그리고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지독한 어둠에 적응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작은 불빛 하나에 의존한 채 무저갱 안을 헤매던 지원은 이곳 전체가 거대한 무덤과 같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곳곳에 시신이나 다를 바 없는 상태의 망자들이 마치 쓰레기처럼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는데, 하나같이 다 산 채로 화형이라도 당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떤 지옥에서도 이토록 고통스러워하는 망자는 본 적이 없었다.

“하아….”

섣불리 말이 나오지 않는 처참함에 그저 깊은 한숨만 내쉬던 지원이 어디선가 희미한 빛이 비치는 것을 발견하고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긴장 반, 기대 반으로 빛을 따라가니 새하얀 족자 두 개가 둥실둥실 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크기와 모양은 똑같았지만 하나는 단단히 봉인되어 있었고, 다른 하나는 그저 느슨하게 둘둘 말려 있는 상태였다.

잠시 망설이던 지원이 느슨하게 말려 있는 족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제 손이 닿자마자 스르르 풀려나가는 족자를 반사적으로 받아 든 지원은, 족자 안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는 대번에 입매를 비틀었다.

“하!”

음흉한 놈. 이거 완전히 변태 아니야? 왜 남의 초상화를 멋대로 간직하고 있어? 와아, 씨…. 끄트머리 반질반질한 거 봐라. 얼마나 만지작거렸으면! 정말 스토커의 기본 자질은 고루고루 다 갖추셨네. 몹시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성마른 감탄사를 뱉어내던 지원이 가온의 말간 얼굴을 바라보며 거칠어진 숨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예나 지금이나 참 고우십니다.”

반듯한 이목구비는 지금과 다를 바가 없지만, 복식을 보니 아주 오래전에 그린 그림 같았다. 깨끗하게 잘 보존되긴 했어도 종이의 재질 역시 현대에 쓰는 것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가슴에 매듭 장식이 있고 가운 같은 배자를 입고 있는 걸 보니까 고려, 그것도 초기. 지금보다는 볼살이 좀 있는 것 같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이 정도만 되면 정말 바랄 게 없겠네. 가온의 얼굴을 가만가만 쓸어 보는 지원의 손길이 더할 나위 없이 살뜰했다.

가만, 그럼 이건 중천주가 되기 전에 그린 초상화인가? 꽤 있는 집 따님이셨을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노동 집약적인 옷을 입을 수 있는 정도였을 줄이야. 옷깃에 이만큼의 수를 놓으려면 하루 이틀 품을 들여서 될 일이 아닌데. 정작 본인은 자수가 무슨 문양인지 알지도 못했을 게 분명하지만….

아,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잠시 넋을 놓고 그림을 감상하던 지원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족자를 둘둘 말아 제 안주머니에 넣었다. 상당한 기동력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휴대하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크기였지만, 차라리 태워서 없애면 모를까 염마왕의 손에 남겨 놓고 싶지는 않았다.

“이건 또 뭐길래 이렇게 꽁꽁 묶어두셨어? 사람 더 궁금하게.”

나머지 하나의 족자를 펼쳐 보려던 지원은 족자를 묶어 둔 끈이 풀리지 않자 짜증스럽게 미간을 좁혔다. 자세히 살펴보니 매듭 자체도 단단했지만, 매듭 부분에 무언가를 녹였다가 굳힌 흔적이 있었다.

“밀랍? 흥, 이러면 더더욱 안 열어 볼 수가 없지.”

가볍게 코웃음을 친 지원이 라이터를 켜고 조심스럽게 매듭을 녹이기 시작했다. 얼마나 오래 굳어 있었는지 한동안은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엄지 끝이 화끈거릴 정도로 그을리자 비로소 돌처럼 딱딱하던 밀랍이 서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상당히 지난한 과정을 거쳐 겨우 매듭을 푼 지원은 긴 족자에 빼곡하게 적힌 글자를 보고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흐음….”

라틴어…. 왠지 눈에 익은 섬세하고 화려한 필체를 찬찬히 살펴보던 지원이 별안간 눈썹을 확 치켜떴다. 길이는 1m가 조금 못 되고, 너비는 50cm 정도…. 다채로운 색깔과 정교하게 장식된 대문자…, <코덱스 기가스> 원본이다! 이게 바로 뜯겨 나간 여덟 장 중 한 장이야! 직감적으로 족자의 정체를 알아차린 순간 온몸에 있는 털이 모조리 곤두섰다.

“망할. 이럴 줄 알았으면 라틴어 공부 좀 해 둘걸.”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문장을 빠르게 훑어 내리던 지원이 못마땅한 얼굴로 짧게 혀를 찼다. 문자의 형태는 모국어만큼이나 익숙한 로마자였지만 의미를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개중에는 뜻을 알 듯 말 듯한 단어가 몇 개 있었는데, 중간 즈음에 쓰인 단어 하나가 기적처럼 지원의 눈에 확 띄었다.

“millenárĭum…. 밀레나리움? 아, millennium!”

이거다. 이게 바로 중천주의 천 년 임기에 대한 내용이야.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킨 지원이 얄미울 정도로 정갈한 필체를 가만히 노려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걸 어떻게 할까. 일단 가지고 가서 내용을 확인해야 하나? 브루엘이 페루에서 발견한 것 외에 또 다른 정보가 적혀 있을지도 모르잖아. 경고가 하나뿐이라는 보장은 없는 데다, 현실적으로 지금 내가 이걸 다 외우는 것도 무리고. 아니면 이대로 파기해? 어쨌든 가온 씨의 발목을 잡는 문서니까 아예 없애 버리는 게 깔끔할 것 같긴 한데….

한참을 망설이던 지원이 장고 끝에 족자를 소각하기로 결정했다. 내용이 궁금하기도 했고, 역사적으로 엄청난 가치가 있는 자료를 없애는 게 아깝기도 했지만, 그 어떤 것도 가온의 안전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그래. 이렇게 숨겨 놨었다는 것 자체가 뭔가 꿍꿍이속이 있다는 얘기니까. 가온 씨한테 불리한 건 아예 흔적을 남기지 말아야 해.”

마지막으로 간단한 단어 몇 개를 눈에 담은 지원은 곧 거침없이 족자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커다란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것을 덤덤하게 지켜보았다. 불길에 휩싸인 족자가 완전히 재가 되어 흩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제 이건 됐고…. 다시 가온 씨를 찾으러 가 볼까.”

대략적인 넓이조차 짐작이 안 되는 곳을 무작정 헤맬 생각을 하니 조금 막막한 기분이 들었지만, 지원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하나…. 신중하게 방향을 가늠하던 지원이 막 첫발을 뗐을 때였다.

“…!”

어디선가 아주 미약하게 불어온 습한 바람을 감지한 지원이 고개를 홱 돌렸다. 다소 위압적이지만 음습한 명계와는 어울리지 않는 청량한 기운…. 가온이 환수검을 사용할 때마다 느껴지던 수기가 확실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제가 가온의 기운을 착각할 리는 없다.

분명히 멀지 않은 곳에 계셔. 내가 꼭 찾을 수 있어. 금세 사라진 수기의 흔적을 찾는 지원의 집요한 눈이 맹수의 그것처럼 어둠 속에서 서늘하게 빛났다.

“하아….”

최대한 기척을 죽인 채로 중천으로 향하는 통로를 내던 가온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구슬땀을 훔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기에 길은 착실하게 만들어지고 있지만, 아무래도 수기가 너무 약해서 그런지 진행 속도가 더뎠다. 아기를 위해 무리하지 않으려다 보니 더욱 그랬다.

여기에 온 지 얼마나 되었을까. 시간의 흐름은 전혀 알 수가 없었지만, 갈증과 허기의 정도로 볼 때 족히 이틀은 지난 것 같았다. 당장 탈진해서 쓰러질 만한 상태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컨디션이 좋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때문에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마냥 서두를 수가 없다. 이러다 완전히 기력이 떨어져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라도 하면 두 목숨이 연기처럼 스러지는 건 시간문제다.

“일단 무저갱에서 빠져나가는 게 나을까.”

나직하게 중얼거리던 가온이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 떴다. 천 년 가까이 중천주로서 살아온 가온에게도 온전한 무(無)의 공간이 주는 공포감을 이겨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신중한 고민 끝에 가장 탈출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를 구상했지만, 당장이라도 이곳에서 나가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했다. 이곳에 계속 묶여 있느니, 명계 한복판에 떨어져 포청의 관원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는 것이 차라리 더 나을 것 같았다.

이래서 여기가 지옥의 끝인 무저갱이구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곳에 갇혀서 결코 끝나지 않을 세월을 오직 두려움 속에서만 살아가야 한다는 게, 이렇게 무섭고 끔찍한 일이구나. 이론적으로는 익히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지만 직접 몸으로 겪어 보니 가슴에 와 닿는 무게가 달랐다.

한 영혼을 함부로 이런 곳에 처박으면 안 되는 거였어. 어떻게든 구제할 기회를 만들어 주었어야 해. 그래서 횟수의 제한이 있었던 거야. 물론 가온은 여태까지 그저 기분이 내키는 대로 악령을 벤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정말 도저히 갱생의 여지가 보이지 않고, 인계에 극심한 피해를 입히는 경우에만 검을 휘둘렀었다. 그럼에도 돌이켜 생각하니 최소한 그중 몇 명에게는 선처를 베풀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든다.

단 한 명이라도 억울하게 무저갱에 갇힌 이가 있다면, 나 역시 같은 대가를 치르는 게 맞지 않을까….

“정신 차려, 주가온. 판단력을 잃으면 안 돼.”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아랫입술을 꽉 깨문 가온이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신이 아니야. 나는 그저 내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고, 한 명의 악령을 격리함으로써 수십 배, 아니 수백 배가 넘는 사람을 구했어. 전지전능한 이의 눈으로 볼 때는 완벽한 결정이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 양심에는 한 점 부끄러움도 없어. 그러니까 이렇게 마음이 무너지면 안 돼. 염마왕이 굳이 나를 여기에 가둔 이유는 내가 이런 식으로 삶을 포기하게 만들려는 거겠지. 그런 얄팍한 수작에 넘어가지 말자.

“반드시…, 돌아갈 거야.”

악문 잇새로 각오를 다지던 가온이 멀리서 희미하게 불빛이 아른거리는 걸 발견하고는 슬그머니 수기를 흩트려 검을 감췄다. 연한 초록빛으로 빛나던 단검은 다시금 찻물이 되어 주전자 안에 담겼고, 바로 그 순간 불빛이 다가오는 속도가 빨라졌다. 신경을 곤두세운 채 인기척이 나는 방향을 주시하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더니 놀라운 음성이 들려왔다.

“대표님!”

“차 관장….”

차 관장이 어떻게 여기에….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던 가온이 얼떨떨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고 있는데, 더없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한 지원이 한달음에 달려오더니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가온의 볼을 감쌌다.

“아아….”

그가 얼마나 마음을 졸이고 있었는지 한순간에 설명하는 처절한 탄식이었다. 어떻게든 그의 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었지만, 사실 이대로 다시는 지원을 못 보는 게 아닐까 얼마나 불안했었는지 모른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 눈을 꼭 감고 있는데, 바싹 마른 입술을 가만가만 쓸어 보던 지원이 꽉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얼굴이 너무 상하셨습니다.”

“괜찮아. 그런데 차 관장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설명하자면 깁니다. 돌아가서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은 이 결박을 끊어내야겠네요. 아니, 그보다 먼저 입술이라도 축이시죠. 입술이 다 갈라져서 피가 납니다.”

순간 눈을 번쩍 뜬 가온이 찻잔에 급하게 차를 따르는 지원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생김새, 목소리, 심지어는 향수 냄새까지 평소의 지원과 똑같았지만, 제게 명계의 음식을 권하는 이는 절대로 차지원일 리가 없다. 찻물이 찰랑거리는 찻잔을 내미는 지원을 말없이 응시하던 가온이 냉랭한 목소리를 냈다.

“좌포청장.”

“대표님. 지금 무슨 말씀을….”

“상당히 재미없는 장난을 치는군. 그대가 그 모습으로 나를 보는 게 몹시 불쾌하니 지금 당장 변장을 벗도록 해. 나를 이리 묶어두었다고 해서, 내가 그대 한 사람쯤 어쩌지 못할 거라 생각하나?”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지원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볍게 실소하더니, 곱상한 여인의 얼굴로 되돌아갔다. 그리고는 아쉬운 건지, 아니면 안도하는 건지 구분하기 어려운 한숨을 조용히 내쉬었다.

“역시 천주님을 끝까지 속일 수는 없군요.”

“염마왕이 그대에게 이런 짓까지 시키던가?”

“아닙니다. 마왕님은 그저 천주님을 잘 보살펴드리라 하셨습니다. 이건 일이 조금이라도 수월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제 독단으로….”

“그대는 내가 염마왕의 옆에 머물기를 진심으로 원해?”

가온의 질문에 잠시 멈칫하던 모화영이 새침하게 눈꼬리를 접으며 생긋 웃었다. 참…, 잔인한 걸 물으시네요. 답은 이미 다 알고 계시면서.

“제 바람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는 오직 마왕님의 지시에 따를 뿐입니다.”

그림처럼 웃고 있는 모화영을 빤히 바라보던 가온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정작 일을 벌인 자는 따로 있는데, 애먼 이를 잡아 무엇 할까.

“그래…. 그대에게도 나름의 입장이 있겠지. 알았으니 가서 볼일 보게.”

“지금 제게 주어진 가장 큰 임무는 바로 천주님의 수발을 드는 일입니다. 그러니 일단 식사부터 하시지요. 이러다 정말 큰일 나십니다.”

“좌포청장. 그대는 내가 입에 물 한 방울 대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지 않나?”

가온의 눈빛이 한순간에 서늘해지자, 내내 생글거리던 모화영의 표정도 조금 굳었다. 기어이 돌아갈 작정인가? 흐음, 생각보다 무모한 분이셨네. 현실적으로 그건 어렵다는 걸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텐데.

현재 가온의 몸을 마치 커다란 뱀처럼 칭칭 감고 있는 천은, 하율이 아주 오래전부터 심혈을 기울여 준비해둔 덫이다. 결박을 명한 자의 의지가 없이는 절대로 풀리지 않는 주문이 걸려 있고, 어지간해서는 찢어지거나 불에 타지도 않는다.

물론 가온은 중천주이니 마음먹고 전력을 다하면 결박을 끊어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수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인계와는 달리 이곳에서는 원래 운용할 수 있던 기운의 극히 일부밖에 쓸 수 없기 때문에, 이 결박을 풀어내려면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이 들 것이다. 더구나 염마왕이 직접 제 몸의 피를 내어 적은 주문으로 완성한 결계에 손상이 생기면 즉시 시전자가 알아차릴 수 있다. 아무리 용을 써도 외부인이 염마왕의 눈을 피해 도망칠 수 있을 만큼 시간을 벌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천주님. 천주님께서 명계에 내려오신 지 이미 이틀이 지났습니다. 이렇게 물 한 모금 안 드시다가는 곧 탈수 증상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다 정말로 목숨이 끊어지시기라도 하면 아기님의 생명까지 잃게 됩니다. 아기님만큼은 무사히 인계로 보내셔야지요.”

가급적 모화영에게 제 뾰족한 심기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던 가온이 순간 눈썹을 크게 꿈틀거렸다.

“그저 심부름을 하고 있을 뿐인 그대에게 화풀이하고 싶지는 않지만 정말 가증스럽군. 그게 지금 정녕 나를 염려해서 하는 말인가?”

“물론입니다. 어차피 천주님은 영영 명계를 떠나실 수 없습니다. 일단 이 무저갱에서 나가시는 것부터가 불가능하고, 혹여 이곳을 벗어나시더라도 천주님의 예상 도주로에는 포청의 관원들이 새카맣게 깔려 있습니다. 공연히 헛된 힘을 쓰시다가 아기님을 잃으실까 저어되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제법 진심 어린 눈빛을 한 모화영이 간곡한 목소리로 저를 달래자, 기가 막혔던 가온이 짧게 헛웃음을 쳤다.

“모르는 이가 보면 진정인 줄 알겠군.”

“아기님의 무사 탄생을 기원하는 마음은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진심입니다. 저는 이제 영원히 어미가 될 수 없는 처지니까요.”

새삼 마음이 울적해졌는지 모화영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가온의 눈빛은 여전히 냉랭했다.

“남은 죗값을 치르고 환생하면 충분히 가질 수 있는 기회일 텐데?”

“하지만 그렇게 되면 마왕님을 떠나야 하지 않습니까. 명계에서의 기억도 모두 사라질 테고요. 그런 건 제게 아무런 의미도….”

긴 세월 동안 잘 갈무리하고 있던 속내를 저도 모르게 털어놓던 모화영이 매끈하던 이마를 살짝 찡그렸다. 돌아가야겠어. 이러다가는 설득을 하기는커녕, 쓸데없는 말만 줄줄 늘어놓게 될 것 같아.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모화영이 가온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천주님.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좌포청장.”

“네, 천주님.”

막 자리를 뜨려는 모화영을 불러 세운 가온이 할 말이 많은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건 이렇게 강제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설령 내가 이대로 죽는 한이 있어도 염마왕의 여인이 되는 일만큼은 결단코 없을 거라고…. 그대도 구질구질하게 남아 있는 연심 한 조각을 어쩌지 못해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심부름이나 하고 있는 처지가 된 것 아니냐고.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가온은 답답한 마음을 긴 한숨에 얹어 흘려보냈다. 굳이 모화영을 설득하기 위해 기력을 낭비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녀 역시 그걸 몰라 이런 어리석은 계획에 동참하고 있는 건 아닌 듯했다. 하긴, 이러고 있는 그대도 속이 제 속이 아니겠지. 이런 상황에서 그 시끄러운 속을 굳이 뒤집을 필요는 없고.

공손하게 제 하문을 기다리고 있는 모화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가온이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어 그중 비교적 또렷하게 남아 있는 얼굴 하나를 떠올렸다. 바로 그제까지만 해도 까맣게 잊고 있던 전생이었는데, 하율이 시도한 충격 요법 때문인지 어렴풋이 생각나는 장면 몇 개가 있었다.

“나는 염마왕의 생전에 이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어. 물론 그때도 하율은 나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드는 일에 끝내 실패했었지. 제 아이의 생명을 위협하던 남자를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어미는 없는 법이니.”

“마왕님의…, 생전이요? 두 분의 인연이…, 그렇게나 오래된 것입니까?”

드물게 놀란 표정을 짓는 모화영의 격한 반응에 가온의 가지런한 눈썹이 작게 일그러졌다. 염마왕과의 인연으로 한데 묶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문제를 일일이 지적할 때가 아니었다.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기억나는 게 몇 개 없어. 내 아이의 사랑스러운 모습, 나를 겁박하던 하율의 잔인한 얼굴, 그리고 들꽃 같던 한 여인의 처연한 표정…. 이 정도만 남았지.”

“여인…, 이요?”

“하율의 네 번째 아내. 몸이 약해서 아이를 낳지 못했었는데, 성정이 순하고 순종적이라 하율이 그럭저럭 귀애했었어. 여자가 아비나 남편의 보호 없이 살아가기에는 쉽지 않은 시대였거든. 절박했겠지. 나름의 생존 전략이었을 테고.”

그녀가 자신의 천막 옆에 불을 피워 커다랗고 먹음직스러운 사슴의 앞다리를 정성껏 굽고 있던 모습이 흐릿하게 떠오른다. 하율이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사슴 고기를 들고 제게 왔을 때 느꼈던 분노는 그보다 조금 더 선명하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 그 괘씸한 남자의 뺨을 후려치지 않은 것이 못내 후회스럽다. 내가 너에게 가지 않은 이유는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네가 이렇게 이기적이고 잔인한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말해주었어야 했다.

“제게 왜 이런 말씀을….”

“그냥 생각이 났어.”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허겁지겁 돌아서는 모화영의 뒤에 대고, 가온은 진심을 담아 한마디를 더 건넸다. 솔직히 모화영에게 그다지 좋은 감정은 없지만, 여인들이 나쁜 남자에게 휘둘려 제 삶을 엉망으로 만드는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속병이 들어 일찍 죽었지. 차라리 그렇게 죽을 수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겁도 없이 영생을 택한 너는 대체 무얼 붙잡고 그 잔혹한 세월을 버틸 작정인지 묻는 듯하는 가온의 말에 모화영은 속이 뜨끔했다. 그러나 변변한 핑곗거리는 생각나지 않았기에, 그저 도망치듯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아, 이 새끼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벌써 백 통도 넘게 시도한 통화가 또다시 불발에 그치자, 휴대폰을 책상 위에 던지듯 내려놓은 동하가 구겨진 미간을 엄지로 가만가만 쓸었다. 휴대폰이 안 터지는 곳으로 여행이라도 갔나? 그럴 작정이면 말을 하고 갔을 텐데. 지원이 동하에게 모든 일정을 공유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오래 연락이 안 될 상황이 생기면 미리 얘기를 해두는 편이었다.

물론 요즘 들어 장거리 비행이 잦아졌기 때문에 하루 정도 연락이 안 되는 경우는 흔했다. 지원과 연락이 끊긴 지 고작 이틀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이상하게 감이 좋질 않았다. 중천이니 명계니 하는 소리를 들은 직후여서 그런지 불안한 마음이 더욱 커졌다. 조바심 어린 손짓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한참을 고민하던 동하가 인터폰의 호출 버튼을 눌렀다.

“비서실장, 밖에 있습니까?”

[네, 상무님. 들어가겠습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연 비서가 방 안으로 채 발을 다 들이기도 전에, 동하의 다급한 질문이 터져 나왔다.

“차지원 관장 행방에 대해 확인된 것 있습니까?”

“아직까지는 나오는 게 없습니다. 갤러리에서도 아무 연락도 없이 사흘이나 결근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라고 당황해하고 있고, 출국 기록이나 신용카드 이용 내역도 깨끗합니다. 자택도 사흘 내내 비어 있었던 것을 확인했고, 차량 일곱 대 모두 운행이 없었습니다.”

“아니, 그럼 이 새끼가 대체 어딜 갔어? 땅으로 꺼졌을 리도 없고….”

미처 말을 맺지 못한 동하가 입속으로 험악한 욕설을 중얼거렸다. 정말 땅으로 꺼졌나? 지옥에 간 적도 있다더니, 이 미친 새끼가 이번에도 진짜 지옥에라도 간 거 아니야? 상식을 벗어나는 추측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주가온 대표 쪽은 어떻습니까? 멀쩡히 잘 출근하고 있습니까?”

“그게…, 제니스 컴퍼니 쪽의 움직임이 조금 수상합니다.”

“수상? 어떻게?”

비서의 말에 따르면 지원이 자취를 감춘 기간 동안 가온 역시 공식석상에 얼굴을 비춘 적이 전혀 없다고 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제니스 컴퍼니의 비서실에서 뜬금없이 페루에 있는 폐광산을 구입하겠다고 나섰다는 거다. 오너의 특별 지시라며 운용할 수 있는 모든 루트를 총동원해서 페루 정부를 압박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광산?”

“네. 이미 20년 전에 채굴량이 나오지 않아 폐쇄한 구리 광산인데, 갑자기 제니스에서 구입 의사를 밝혔답니다. 그것도 부르는 대로 값을 치를 테니, 최대한 빨리 채굴권을 넘기라고 종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페루 정부에서는 혹시 그 안에 뭔가 대단한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섣불리 거래에 응하지 않고 미적거리고 있답니다. 그래서 지금 제니스 본사의 비서실장과 사업부 총괄 사장이 직접 페루까지 날아가서 정부 관계자들과 접촉하고 있는 중입니다.”

차지원과 주 대표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바로 그 시점에 제니스에서는 사업과 아무런 연관도 없는 광산을 사들이려고 한다…. 뭔가 일이 터지긴 했구나. 인과 관계까지는 모르겠지만,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쨌든 그 광산이 꼭 필요하다는 뜻일 테고.

“오늘 회장님 일정이 어떻게 됩니까?”

“지금 평택 공장 순찰 중이십니다. 거기서 만찬 일정까지 잡혀 있습니다.”

“그럼 밤이나 되어야 서울로 돌아오시겠네? 일단 지금 바로 제니스 쪽 임원들하고 약속 잡아요. 가능하면 보안실장이 직접 나오라고 하고.”

“보안실장…, 말씀이십니까?”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비서는 동하가 지목한 상대가 조금 의아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더 이상 군말을 보태지 않고 즉각적으로 행동에 나섰다. 동하는 쓸데없는 지시로 부하 직원들을 괴롭히는 상사는 아니었지만, 같은 말을 반복하거나 구구절절 설명을 덧붙이는 행위를 질색하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한번 지시가 떨어지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시키는 대로 움직여야 했다.

다행히 제니스 컴퍼니 쪽에서는 동하의 면담 요구를 두말없이 수용했다. 접촉을 시도한 비서가 살짝 당혹스러웠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나오는 바람에 약속 시간은 한 시간 후로 정해졌다. 다만 현재 내부의 상황이 좋지 않아 사무실을 떠날 수 없으니, 가급적이면 본사로 방문해 주십사 하는 정중한 요청이 있었다.

이후의 일정을 모두 뒤로 미루고 제니스 컴퍼니 본사로 달려간 동하는 왠지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위압적인 건물을 올려다보며 입매를 조금 굳혔다. 그간 잘도 위장하고 있었네. 평소 영적인 존재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편은 아니었지만, 망자들이 모여드는 곳이라고 생각하니 약간 섬뜩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백동하 상무님 되십니까.”

“네.”

“보안실장 권현호입니다. 바쁘신 중에 이곳까지 찾아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급작스러운 요청에 응해주셔서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입구까지 마중을 나온 보안실장의 정중한 안내에 따라 처음으로 제니스 본사에 발을 들인 동하는, 첩보 기관을 방불케 하는 최첨단 보안 검색대를 줄줄이 통과하며 속으로 조용히 혀를 내둘렀다. 특히 보안실로 향하는 길은 일반인들이 드나드는 출입구와는 완전히 구별되어 있었는데, 어찌나 물 샐 틈 없이 지키고 있는지 설혹 에단 헌트가 등판한다 하더라도 도저히 뚫을 수 없을 것 같았다.

[47층. 올라갑니다.]

이 건물이 48층짜리였지, 아마? 엘리베이터에 오른 동하는 한쪽 구석에 버젓이 자리 잡고 있는 49층 버튼을 애써 외면했다. 동하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기민하게 알아차린 현호는 지극히 속이 시끄러운 중에도 조금 웃었다. 누가 친구 아니랄까 봐, 하는 짓이 지원과 똑같았다.

47층에 도착해서 복도 끝에 위치한 작은 회의실로 안내된 동하는 제가 도착하기 직전에 세팅된 것이 분명한 찻잔을 못내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정갈하게 놓인 찻잔에서는 그윽한 향이 나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는데, 차를 준비해 둔 이의 기척은 어디에서도 느껴지질 않았다.

그러고 보니 긴 복도를 지나는 동안 제니스 컴퍼니의 직원들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외부인의 방문에 모두가 촉각을 곤두세운 채 경계하고 있다는 뜻이다. 참 알면 알수록 징그러운 동네야. 일단 예의상 차를 한 모금 마신 동하가 그대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차 맛은 더없이 훌륭했지만, 그걸 느긋하게 즐길 만큼 마음이 여유롭지 못했다.

“권 실장님. 제가 차지원 관장과 아주 막역한 사이입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저한테는 나름 생명의 은인이고요. 그런데 요즘 차 관장이 하고 다니는 짓이 영 미덥지가 않아서, 제니스 컴퍼니에 대해서 조금 알아봤었습니다.”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침착하게 대꾸하는 현호를 뚫어져라 응시하던 동하가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꺼냈다.

“피차 점잖게 말을 돌릴 만큼 한가하지 않은 것 같으니 거두절미하고 묻겠습니다. 차지원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백 상무님은 차 관장님이 어디에 계실 거라고 생각하시기에 이렇게 다급하게 달려오셨습니까.”

현호의 반문에 숨을 한 번 크게 몰아쉰 동하는 선뜻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질문을 힘겹게 꺼냈다. 제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걸 감지했지만, 그딴 걸 정돈할 정신은 없었다. 

“차지원…, 정말로 지옥에라도 갔습니까?”

“….”

내내 차분함을 가장하던 현호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표정을 일그러뜨리자, 동하의 입이 떡 벌어졌다. 동년배의 다른 이들보다는 그래도 이것저것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살아왔다고 생각했었지만, 이보다 더 황당무계한 일은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동하는 제 입으로 이런 비현실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그…, 미친 새끼가…, 진짜로 지, 지옥에 갔다고요? 왜요? 그 자식 혹시…, 죽었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차 관장님은 대표님을 모시러 명계에 가셨습니다.”

“하!”

반사적으로 헛바람을 토해낸 동하가 아직도 김이 올라오는 뜨끈한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목구멍에 따끔거리는 통증이 느껴지는 걸 보니 꿈은 아닌 게 분명했지만, 도무지 현실감이 들질 않았다. 침통한 얼굴로 시선을 떨구고 있는 현호를 바라보며 한참 동안 거친 숨만 몰아쉬던 동하가 간신히 기업가로서의 마인드를 끄집어냈다. 사건이 벌어진 연유는 차후에 충분히 논할 수 있으니, 일단은 이미 벌어진 사건을 해결하는 게 급선무다.

“그럼 두 사람을 무사히 돌아오게 하려면 이곳에서는 어떤 일을 해야 합니까?”

“솔직히 말씀드려서 인계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별로요…. 그래도 뭔가 하기는 하고 있다는 뜻이네요. 페루에 있는 폐광산을 구입하고자 하는 것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입니까?”

“네. 현재 저희가 두 분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건 그게 다입니다. 무너진 집에 깔린 사람을 구한다고 나서서 고작 벽돌 한 장을 치우는 것 정도의 도움밖에 되지 않겠지만요.”

그마저도 수월하게 진행되지 않고 있습니다만…. 침통하게 말끝을 흐리던 현호가, 동하의 말을 듣자마자 기대에 찬 얼굴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쪽 분야라면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 실장님께서도 그런 것 때문에 이 정신없는 와중에도 저를 만나주셨을 테고요. 그러니 그 광산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 간단하게라도 설명을 좀 해주시죠. 저도 제 윗분께 부탁을 드려야 하는 처지라, 최소한 제 스스로는 그 이유를 납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잠시 후, 거의 뛰다시피 제니스 본사를 빠져나온 동하는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오르자마자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평택 공장까지는 아무리 밟아도 1시간 반…. 직접 달려가기에는 한시가 급했다.

“아버지, 저예요. 공장 시찰 중이신 거 알아요. 끊지 마세요, 제 용건이 더 급해요. 지금 바로 페루 부통령한테 연통 좀 넣어주세요. 그분이 아버지 대학 동기라면서요. 제니스 컴퍼니에서 페루에 있는 폐광산을 하나 구입하려고 하는데, 정부에서 미적거리고 있대요. 그러니까 그 거래가 최대한 빨리 진행될 수 있도록 해주세요. 안 해주시면 저 사표 냅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노성에 인상을 찌푸리며 잠시 귀에서 휴대폰을 떼어냈던 동하가 어린애처럼 막무가내로 드러누웠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게임기를 사달라며 단식 투쟁을 감행했던 일곱 살 이후로, 아버지에게 이렇게까지 생떼를 쓰는 건 처음이었다.

“아, 나중에 다 설명할 테니까 일단 해주세요. 차지원 목숨이 달린 일이라고요. 네,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선이든 소개팅이든, 아버지가 하라는 건 군말 없이 다 할 테니까 그 문제부터 빨리 해결해주세요. 지금 당장이요.”

미약하게 느껴지던 수기가 다시금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바람에 지원은 할 수 없이 걸음을 멈췄다. 파도가 몰려오듯 주기적으로 기운이 강해질 때가 있으니, 그때까지 얌전히 기다려야 했다. 마음은 급하고 몹시도 애가 탔지만, 그렇다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곳을 정처 없이 헤매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무리는 안 하셨으면 좋겠는데….”

가온이 이 와중에도 포기하지 않고 뭔가를 끊임없이 시도하는 건 물론 대단히 감탄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가온이 명계로 끌려온 지 벌써 사흘째다.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로 안간힘을 쓰고 있을 가온을 생각하니, 지원은 너무 속이 상해서 창자가 다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염마왕의 머리통에 총알을 퍼부을 상상을 하는 것만이 들끓는 노기를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왔다!”

숨소리조차 죽인 채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지원이 한순간 커다란 너울처럼 일렁이는 수기를 감지하고는 눈을 번쩍 떴다. 가는 실처럼 이어지는 기운을 놓치지 않으려고 발걸음을 서두르던 지원은, 두어 시간을 끈질기게 쫓은 끝에 마침내 가온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온 씨!”

“….”

한달음에 달려간 지원은 가온의 몰골을 확인하고는 형편없이 구겨지는 표정을 어쩌지 못했다. 염마왕을 향한 극렬한 분노로 인해 절로 이가 갈렸다. 이런 쳐 죽일! 여자를, 그것도 임신부를 이렇게 묶어 두다니. 사방에서 뻗어 나온 두툼한 천이 가온의 몸을 마치 미라처럼 둘둘 감고 있었는데, 길게 이어진 천에는 붉은색 염료로 쓰인 글씨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도 호의적인 의도가 아닌 것이 분명했다.

지원의 가슴을 더욱 철렁하게 만드는 건 저를 빤히 쳐다보는 가온의 시선이었다. 지원의 얼굴을 보면서도 반가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는 가온을 보고 있으려니 불안한 마음에 심장이 바짝바짝 조여들었다.

왜 이러시지? 나를 못 알아보시는 건가? 아니면 뭔가 큰 충격을 받아서 정신을 놓치셨나? 혹시 아기를…. 가온이 입을 열기까지는 불과 30초 남짓한 시간이 흘렀을 뿐이지만, 그동안 우후죽순으로 솟아오른 오만 가지 생각이 지원의 속을 사납게 할퀴었다.

“좌포청장. 이런 장난질은 한 번으로 족하지 않나?”

한 번에 이해가 가지 않는 가온의 말에 잠시 눈을 가늘게 뜨던 지원이, 곧 맥이 탁 풀린 얼굴로 흐릿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살벌할 정도로 기세가 사나워진 가온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더 다가가지 않고 그녀의 앞에 얌전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좌포청장이 제 외양을 뒤집어쓰고 가온 씨를 홀리려 했었나 봅니다.”

“….”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긴장을 놓지 않고 끊임없이 경계하시는 건 정말 잘하고 계시는 겁니다.”

가온의 눈빛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자, 어떻게든 미소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던 지원이 단번에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극도로 지쳐 보이는 연인을 당장 품에 안고 달래고픈 마음을 억누르는 건 정말이지 너무나도 괴로운 일이었다. 지원은 더없이 안타까운 눈으로 가온을 바라보며 조곤조곤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 것도 많고, 해주고 싶은 말도 많았지만, 당장은 그녀에게 제 정체를 확인시키는 일이 가장 중요했다.

“저는 무화과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대표님. 달기만 한 과일보다는 약간의 상큼함이 가미된 맛을 좋아하거든요. 타시의 호텔에서 무화과 타르트를 먹으면서 대표님과 식성이 비슷한 척했던 것은 그저 좋아하는 여자한테 잘 보이고자 개수작을 부린 거였습니다. 논숨에 대표님과 단둘이 남기 위해 제가 얼마나 치밀하게 작전을 세웠었는지, 아마 전혀 모르셨을 겁니다.”

순간 일자로 굳게 다물렸던 가온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대표님께서 제가 하는 운동의 50%를 따라오실 수 있으면 뉴욕이 아니라 달나라에 가신다고 해도 말리지 않겠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죠. 죄송하지만 빈말이었습니다. 일반인의 우주여행은 아직까지는 안정성을 보장할 수 없으니까요. 혹여나 진심으로 원하신다면 상업 비행이 어느 정도 정착된 이후에 다시 한번 신중하게 고려해 보겠습니다.”

아무리 변장술이 뛰어나다고 해도…. 차 관장이 아닌 다른 사람이 이런 말까지 할 수는 없어. 마구 흔들리는 가온의 눈동자를 애틋하게 바라보며 오직 두 사람만 공유하고 있는 추억들을 하나씩 풀어놓던 지원이, 불현듯 뭔가 민망한 기억을 떠올렸는지 살짝 멋쩍은 얼굴로 설핏 웃었다.

“제주도에서 봤던 프랑스 영화는, 하늘에 맹세코 야릇한 분위기를 노리고 고른 것이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처음 봤을 때 너무 지루해서 30분을 넘기지 못했던 영화라, 정말로 대표님을 빨리 재우려고 선택한 거였습니다. 당시에는 무슨 말을 해도 변명처럼 들릴 것 같아서 제대로 해명할 수가 없었죠. 그럴 정신도 없었고요.”

“하.”

“가온 씨의 어린 동생이 소랑을 강아지 취급했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웃음을 참느라 상당히 고생했었습니다. 대놓고 웃으면 소랑이 발톱으로 할퀼 것 같았거든요. 아시다시피 꽤 성격 있는 늑대라.”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기대감을 겨우겨우 억누른 가온은,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하는 지원을 떨리는 눈으로 천천히 훑어보았다. 평소와 한 치도 다를 바가 없는 말끔한 모습으로 나타났던 지난번과는 달리, 지금 제 눈앞에 있는 남자는 처음 보는 행색을 하고 있었다.

미소를 짓고는 있지만 여유가 거의 사라진 표정, 푸석하고 해쓱해진 얼굴,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 군데군데 그을리고 찢어진 옷자락…. 얼마나 고생을 하면서 저를 찾으러 왔을지 너무나도 확연하게 알 수 있는 모습에, 가온은 울컥하는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했다. 심장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세차게 두근거렸다.

세상 그 누구도…, 이런 것까지 흉내 내진 못해.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거리던 가온이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정말로…, 차 관장이야?”

“네.”

“어떻게 여기까지…. 어쩌자고 이런 무모한 짓을…. 다시는 못 돌아갈 수도 있는데!”

“어딜 가시든 따라가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침착하게 대꾸한 지원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가온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한껏 일그러진 가온의 얼굴을 잠시 애처롭게 바라보다 곧 팔에 힘을 주어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지원이 태연을 가장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아아….”

드디어 가온을 품에 안은 지원이 눈을 질끈 감으며 덜덜 떨리는 긴 한숨을 토해냈다. 아직 아무것도 해결된 건 없지만, 익숙한 온기를 느끼고 있으려니 그제야 겨우 숨통이 트였다. 늦기 전에 가온을 되찾지 못할까 봐 사실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른다. 골프채 하나를 움켜쥐고 컴컴한 지하실에서 버티고 있었을 때도 이렇게까지 공포스럽지는 않았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대표님.”

“차 관장이 왜.”

“제가 부주의한 탓에…. 이런 몸으로 이렇게 험한 꼴을 당하시게 해서….”

너무나도 그리웠던 이의 품에 안겨 요동치는 마음을 달래고 있던 가온이 짧게 실소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는 깊이 자책하고 있는 지원을 다독이기 위해 제 안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유머 감각을 모조리 긁어모았다.

“굳이 책임 소재를 묻는다면 이건 쌍방 과실이지.”

“죄송합니다.”

“그런 말, 하지 말라니까. 그러면 내 침대에 다시는 못 올라올 거라고 했었잖아.”

“….”

이 와중에도 그건 싫은가 보지? 자못 엄한 표정을 지으며 지원을 나무라던 가온이, 입을 꾹 다무는 그를 보며 작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양손으로 지원의 거칠어진 볼을 감싸 쥔 가온이 잔뜩 갈라진 그의 입술에 살포시 입을 맞췄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뇌리에 잠깐 스쳤지만, 지금은 두 사람 모두에게 최소한의 위로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그나저나 용케 여기까지 왔네? 포청의 관원들이 쫙 깔려 있다던데.”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가온의 필사적인 노력에 힘입어 그럭저럭 평정심을 회복한 지원이, 해수가 염마왕에게 총을 쏜 것부터 채윤에게 향수를 받게 되기까지의 경위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염마왕이 해수가 쏜 총에 맞아서 피를 흘렸다고?”

“네. 실제로 사람이 총상을 입은 것처럼 피투성이가 된 채로 극심한 고통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코덱스 기가스>에 적혀 있던 ‘태양의 숨결’이 카넬리언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원래 태양의 보석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거든요.

태양의 숨결이 그의 심장을 꿰뚫어 안개처럼 흩어지게 할 것이다…. 경전의 한 구절을 나지막이 중얼거리던 가온이 그제야 뭔가 이해가 간다는 표정을 지으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내게 직접 오지 못하고 좌포청장만 보냈던 거였나. 정말로 부상 때문에 거동을 못 하고 있는 거라면 이쪽으로선 다행스러운 일인데….

“그리고 브루엘의 말로는 월장석이 무저갱의 입구를 표시하고 있을 거라고 했었는데, 제가 이곳으로 떨어지기 직전에 정말 달빛처럼 은은한 빛을 내는 열매가 매달린 나무를 보았습니다. 달빛을 모아 문을 냈다는 전설이 있다고 하더군요.” 

“흐음….”

“대표님께 당장 알려드릴 것들은 대충 다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그럼 이제 이 결박을 풀어야겠습니다. 이런 꼴로 계시는 걸 더는 못 참겠네요.”

가온의 몸을 칭칭 감고 있는 천을 이리저리 꼼꼼하게 살피던 지원이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우와, 이 또라이 새끼! 진짜 변태처럼 야무지게도 묶어 놨네. 짜증스럽게 혀를 찬 지원이 손으로 일일이 더듬어 보기까지 했지만, 뭔가 초자연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결박했는지 어디에서도 매듭이 보이질 않았다. 천을 아예 찢어 내거나 태우려는 시도도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풀 수는 없을 거야. 염마왕의 피로 주문을 써서 완성한 주술이라. 그 주문의 내용은 경전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참…, 가지가지 하네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일단 지원이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던 가온이 그에게 조금 뒤로 물러나라고 손짓한 후에, 이제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수기를 몽땅 끌어모아 자그마한 검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는 하나의 지점을 정해놓고 정확하게 검을 휘둘렀다. 평소의 반의반에도 못 미치는 검의 크기에 경악하는 지원을 보고 있으려니, 가온은 이런 기막힌 상황 속에서도 자꾸만 웃음이 났다.

“다른 방법은 없을 것 같아. 그저 낙숫물로 댓돌 뚫듯 서서히 끊어 내는 수밖에.”

한참을 말없이 검을 휘두르는 동작에만 집중하고 있던 가온이 갑자기 낭패로운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좁히자, 가온을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던 지원의 눈이 한순간에 날카로워졌다.

“아!”

“왜 그러십니까, 대표님. 어디 불편하십니까?”

“생각해 보니까 가락지를 안 끼고 왔어.”

순간 가슴이 철렁했던 지원이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아무 말 없이 제 왼손을 들어 보였다. 지원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이던 가온이 곧 허탈한 얼굴로 웃음을 터트렸다.

“차 관장은 진짜 대단한 사람이네.”

“아닙니다. 중천주를 애인으로 둔 남자라면 이 정도는 기본이죠.”

“차 관장은? 금 거북이 가지고 왔어?”

“물론입니다. 염마왕이 만든 통로를 찾아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만약을 대비해서 항상 휴대하고 있었습니다.”

“하하.”

입가에 가득 담긴 미소를 지우지 못한 가온이 다시금 심기일전해서 검을 휘두르려고 팔을 든 순간, 내내 그 어떤 물리적인 공격에도 끄떡도 하지 않던 결박이 돌연 느슨해지더니 거짓말처럼 스르르 풀려나갔다. 뭐지? 염마왕이 근처에 왔나? 눈빛이 매섭게 돌변한 가온이 들고 있던 환수검을 공격형 그립으로 바꿔 쥐고는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별다른 기척은 느껴지질 않았다.

“어찌된 일이지? 이게 이렇게 저절로 풀어질 리가 없는데.”

“혹시…, 경전이 모두 사라지면 주문이 힘을 잃는 게 아닐까요?”

지원의 조심스러운 추측에 가온의 눈이 커다래졌다.

“경전이 사라져?”

“브루엘이 페루의 폐광산에서 경전의 일부가 벽에 쓰인 것을 발견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보안실장이 그걸 바로 처리하겠다고 했었습니다. 그것을 파괴하면 인계에 남아 있던 마지막 경전이 사라지는 거죠.”

“하지만 염마왕은 교활한 자라 그것 하나만 남겨 놨을 리가 없어. 어딘가에는 또 다른 경전을 감춰 두었을 거야.”

가온의 말에 입꼬리를 크게 들어 올린 지원이 여느 때처럼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그 또 다른 경전은 제가 조금 전에 불태웠습니다. 이곳에서 반나절 정도 떨어진 곳에 라틴어가 적힌 족자가 하나 있었는데, 글씨체로 볼 때 유실되었던 <코덱스 기가스>의 일부인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 처리할까 조금 망설였었는데, 과감하게 없애버리길 잘했군요.”

그러면…, 천 번이라는 횟수 제한이 아예 사라졌다는 건가? 얼떨떨하던 가온의 얼굴이 서서히 환해졌다. 그저 어두컴컴하기만 하던 앞길에 작은 불빛이 하나씩 켜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럼 이제 여기에서 나가면 됩니까?”

“그래. 한 번에 중천까지 갈 수는 없지만, 일단 무저갱을 빠져나갈 수는 있어.”

자신 있게 대꾸한 가온이 환수검을 크게 휘두르자, 가온의 발밑 공간이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서로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인 두 사람은 손을 꼭 잡은 채 벌어진 공간의 틈으로 힘차게 뛰어내렸다.

“좌포청장.”

“네, 마왕님.”

“오늘 가온에게 가 보았어?”

“이 탕제를 다 드시면 바로 무저갱으로 내려가 보겠습니다.”

탕제…. 모화영이 내미는 약그릇을 힐끔 쳐다본 하율이 한쪽 입꼬리를 비죽이 들어 올렸다. 누가 봐도 명백한 비웃음에, 밤새 약을 달인 모화영은 내심 깊은 상처를 받았다. 그가 고마워하리라는 기대를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런 반응은 좀 너무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끈 고개를 들었다.

“나는 살아 있는 사람도 아닌데, 이런 약이 무슨 소용이라고. 이런다고 상처가 낫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이걸 드시면 통증은 조금 덜해질 것입니다. 그래야 견디기에 더 수월하시겠죠.”

“되었으니 치워. 나는 지금 이 고통조차도 기꺼우니.”

하율의 냉정한 거절에 모화영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던 하율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한테 이럴 필요 없으니, 가서 가온에게 밥 한술이라도 먹이도록 해. 기껏 정성 들여 꾸며 놓은 전각인데, 한시라도 빨리 주인이 들어와야지.”

“…네.”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 모화영이 참담한 표정으로 침실을 나섰다. 그리고는 무저갱으로 향하는 반짝거리는 입구를 복잡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지금은 도저히 가온에게 가서 먹을거리를 내밀며 사정할 기분이 아니었던 모화영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돌아서고 말았다. 바로 그 순간에 무저갱의 한구석이 뚫렸다는 것을 당시에는 알아차릴 방도가 없었다.

“으음, 여기가 어디쯤일까?”

“탄화옥이 있는 화산 근처입니다. 거리상으로는 절반 정도 날아왔네요. 방향도 좋습니다. 산을 두 개나 넘어야 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쪽 길이 몸을 숨기기에는 한결 수월할 것 같습니다. 만약 반대쪽이었다면 우포청사를 가로질러야 했을 겁니다. 그건 생각만 해도 아찔하네요.”

이렇게 구체적인 답변이 돌아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가온이 소리 없이 기함하며 지원을 쳐다보았다. 방금 제가 한 말은 지원에게 질문을 던졌다기보다는 답답한 마음에 그냥 혼잣말을 중얼거린 거였다. 법궁이 있는 방향만 확인할 수 있으면 절반은 해결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었는데…. 입이 절로 떡 벌어졌다. 

“그걸…, 차 관장이 어떻게 알아?”

“전에 왔을 때 명계 전체를 둘러봤었으니까요. 염마왕이 친히 구름에 태워 주었던 덕분이죠. 본인은 이런 일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만요.”

“그때 한 번 보고 명계 전체를 파악했다고?”

“네, 원래 눈으로 한 번 본 건 잘 안 잊는 편입니다.”

하긴. 그러고 보니까 차 관장은 70명도 넘는 망자의 얼굴을 다 기억해 두었다가 한꺼번에 초상화를 그린 적도 있었지.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지원을 바라보던 가온이 헛바람을 토해내자, 가볍게 어깨를 으쓱한 지원이 향수병을 꺼내서 저와 가온의 머리 위에 한 번씩 뿌렸다.

“힘드시겠지만, 지금부터는 조금 서두르셔야 합니다. 이제 향수도 거의 다 썼고, 물을 마신 지도 너무 오래되었으니까요. 도저히 못 걷겠다 싶은 순간이 오면 망설이지 말고 말씀하십시오. 어차피 대표님을 업어야 한다면,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업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응. 고집부릴 상황이 아니라는 거 알아. 기력이 떨어지면 바로 얘기할게.”

“좋습니다. 그럼 가시죠.”

유황 냄새가 지독하게 풍기는 산을 넘어가는 건 꼬박 일곱 시간이 걸렸다. 가온이 불안해하지 않게 슬쩍슬쩍 시간을 확인하던 지원은 한숨을 내쉬지 않으려고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어제 반대편에서 혼자 이 산을 넘어올 때는 세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었는데, 가온과 함께 이동하려니 배가 넘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코를 찌르는 유황 냄새가 인간의 기척을 감춰주고 있어서 향수를 아낄 수 있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건 좀 곤란한데. 이런 속도로 걸어서는 오늘 안에 법궁까지 도착하기 어렵겠어. 하지만 가온 씨가 지금보다 더 빨리 움직이는 건 불가능해. 이미 한계치를 넘기고 있는 상태고, 이러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그건 정말 큰일이지. 남아 있는 거리와 제 체력을 신중하게 가늠해 보던 지원은 세 개의 지옥을 통과하자마자 가온의 앞에 제 등을 내밀었다.

“업히십시오, 대표님. 앞으로 여덟 시간 안에 어떻게든 명계에서 빠져나가야 합니다.”

“하아….”

걸을 수 있다고 버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선뜻 업힐 수도 없었던 가온이 더없이 침통한 얼굴로 신음 같은 한숨을 흘렸다. 수기만 넉넉하다면 당장이라도 통로를 만들겠지만, 시냇물 대신 용암이 흐르는 명계에서 제게 필요한 만큼의 수기를 얻는 것은 불가능했다.

“미안해, 정말.”

“그런 말씀 마십시오. 천인공노할 죄를 저지른 건 염마왕이고, 대표님은 피해자일 뿐입니다. 위기에 처한 처자식을 보호하는 건 남자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요. 대표님이 홑몸이었다면 또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기를 생각해서라도 더는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가온을 가뿐히 업은 지원이 두 번째 산을 거침없이 올랐다. 첫 번째 산보다 더 험하고 가팔랐지만, 지원은 고작 다섯 시간 만에 산을 넘었다. 너무나도 불편한 마음으로 지원의 등에 업혀 있던 가온은 그의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염마왕을 향한 살의를 곱씹고 또 곱씹었다.

“이제 다 왔습니다, 대표님. 저기 보이는 건물이 법궁입니다. 지금부터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합니다. 쭈뼛거리면서 눈치를 보면 바로 관졸들이 쫓아올 겁니다.”

“응. 알고 있어.”

법궁에는 지은 죄가 크지 않아 형벌을 받는 대신 노역을 치르는 망자들이 상당수 있다. 때마침 교대 시간이 되었는지, 어디선가 커다란 종소리가 울리더니 한적하던 거리가 인파로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동하는 망자의 무리에 섞여 든 가온과 지원은, 염라국 입구 쪽을 향해 티 나지 않게 조금씩 방향을 틀었다. 행여나 판관들이 가온의 얼굴을 알아볼까 봐 섣불리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관졸들의 눈을 피해 드넓은 광장을 거의 다 가로질렀을 때였다.

“어이, 거기 두 사람! 일이 끝났으면 얌전히 숙소로 돌아갈 것이지, 어딜 싸돌아다니는 거야! 족쇄라도 차고 싶어?”

뒷덜미를 잡아채는 걸걸한 목소리에 가온과 지원이 걸음을 딱 멈췄다. 낭패스러운 마음에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주목의 뿌리가 있는 곳까지만 가면 망자들이 더 이상 뒤를 쫓지 못하겠지만, 그곳에 닿기 전에 잡히면 모든 게 끝이다.

어쩌지? 지금이야말로 총을 꺼낼 타이밍인가? 총알이 몇 발이나 나갈까. 탄창에 들어 있는 걸로 여기에 있는 관졸들을 다 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염마왕이 아닌 자들을 제압할 수 있을지 여부도 확신할 수 없고. 하지만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려면 지금으로선 그 방법밖에 없어. 단단히 결심을 굳힌 지원이 주머니 속에 있는 총을 막 꺼내려는 찰나, 작지만 매운 손 하나가 지원의 등을 찰싹 내리쳤다.

“아이, 참! 왜 이렇게 늦게 오는 거예요! 종소리가 울리면 바로 이쪽으로 오라고 했잖아요. 다 큰 어른들이 왜 똑같은 소리를 여러 번 하게 해?”

짜증이 잔뜩 난 듯한 아이의 샐쭉한 목소리에 슬쩍 뒤를 돌아보던 지원은 탄성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손을 내민 건 놀랍게도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아, 수완빌딩에서 취객들을 상대로 장난질을 치던 꼬맹이…. 지원과 재빨리 눈을 맞추며 그가 저를 알아봤다는 걸 확인한 아이가 막무가내로 두 사람의 등을 밀어붙였다.

“빨리 저 안으로 들어가라고요! 시간 없어요!”

“아, 무영아. 네가 일하는 곳에 새로 배정된 망자들이야?”

“네. 그런데 벌써 며칠째 길도 제대로 못 찾아서 정말 죽겠어요. 뭐, 더는 죽을 수도 없지만.”

“아이고. 어린 네가 고생이 많다. 이봐. 어리다고 무시하지 말고, 선임이 시키는 대로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도록 해. 알았어?”

윽박지르는 관졸에게 생긋 웃어 보인 무영은 법궁 구석에 있는 작은 문 안으로 두 사람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영리해 보이는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며 한껏 소리를 죽인 채 빠르게 속삭였다.

“저기 횃불이 걸려 있는 복도를 따라서 쭉 가세요. 그러면 주목의 뿌리가 있는 곳으로 바로 연결돼요. 서두르셔야 해요. 앞으로 15분만 있으면 진짜로 이 복도를 관리하는 담당자들이 올 거예요.”

“정말 고맙다, 꼬맹아.”

“뭐…, 고마워할 거 없어요. 그때 아저씨들이 아무 말도 안 해줬으면 꼼짝없이 170년 형을 받았을 텐데, 덕분에 형기가 확 줄어든 보답을 하는 것뿐이에요.”

의아한 얼굴로 지원과 무영의 대화를 듣고 있던 가온이 허리를 숙여 아이와 눈을 맞추고는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가, 이름이 뭐라고?”

“태무영입니다.”

“태무영…. 몇 년 형을 받았니?”

“17년 형을 받았습니다.”

지원에게는 툴툴거리는 목소리를 내던 아이가 가온의 질문에는 자세까지 바로 하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 간극에 설핏 미소를 지은 가온은 눈치가 비상한 무영을 기특하게 바라보며 아이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었다.

“17년이면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다시 태어나겠구나.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고 반드시 갚으마.”

“감사합니다.”

“내가 더 고맙다. 그럼 고생스럽겠지만 꾹 참고 잘 지내렴. 나중에 꼭 다시 보자.”

왠지 마음이 싱숭생숭해진 무영은 어둑한 복도를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사흘 전에 염라국에 도착한 지원을 알아봤던 것이 새삼 너무나도 다행스러웠다. 분명히 아직 안 죽은 것 같은데, 그렇다고 살아 있는 사람의 냄새도 나지 않는 지원을 이상하게 생각하던 무영은, 우연히 관졸들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 마왕님이 천주님을 무저갱에 가두셨다고?

- 그렇다니까. 그래서 지금 천주님이 혹시라도 도망갈까 봐 이렇게 경비를 잔뜩 세운 거래.

- 허! 세상에…. 중천에서 가만히 있어?

- 가만히 안 있으면? 중천의 직원들은 다 살아 있는 사람들인데,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오겠어? 목숨은 하나밖에 없는 건데.

하지만 지원은 그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걸고 명계에 왔다. 그것도 경비를 강화하라는 지시가 미처 내려오기도 전에. 사랑이라는 게 어떤 건지 나는 잘 모르지만, 저 두 사람은 정말로 서로 사랑하는 거겠지. 중천까지 아무한테도 안 들키고 잘 가면 좋겠다.

두 사람의 무사 귀환을 마음속으로 응원하던 무영이 홀가분한 얼굴로 돌아섰다. 은혜는 제대로 이자를 쳐서 갚았으니, 이젠 진짜로 일터를 찾지 못해 헤매고 있는 어리바리한 후임들을 찾으러 갈 시간이었다.

“차 관장.”

“네, 대표님.”

“정말 너무 미안한데…. 나 이제 걷기가 많이 힘들어.”

주목을 절반쯤 올라왔을 때, 가온이 별안간 푹 꺼지는 목소리를 냈다. 쉴 새 없이 사방을 경계하고 있던 지원이 황급히 가온의 얼굴을 들여다보고는 미간을 확 찌푸렸다.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는 가온의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었고, 조금씩 떨리고 있는 그녀의 손은 아랫배를 감싸고 있었다. 망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사람 간을 졸이는구나.

“배가 아프십니까?”

“조금 당기는 정도…. 지금은 참을 만한데, 더 걸으면 안 될 것 같아.”

“업히세요.”

두말할 것 없이 가온을 등에 업은 지원이 기동성을 높이기 위해 총을 꺼내 들자, 곁눈질로 앙증맞은 총신의 모양을 확인한 가온이 기운이 하나도 없는 소리를 내며 희미하게 웃었다.

“차 관장하고 참…, 안 어울리는 총이네.”

“그러니까요. 너무 폼이 안 나서 가급적이면 안 꺼내고 싶었는데, 어쩔 수가 없네요.”

“총 쏠 줄은 알아?”

“그럼요. 대한민국 육군 병장이 총 하나도 못 쏘면 그 부대는 당나라 부대죠.”

“하하….”

둘 다 낭비할 기운은 남아 있지 않은 터라, 대화는 더 이어지지 못했다. 완전히 녹초가 된 가온만큼은 아니었지만, 꼬박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로 강행군한 지원 역시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야말로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주목을 끝까지 오른 지원이 코앞에 나타난 명계수문을 바라보며 한시름 놓은 순간이었다.

“주가온!”

바로 밑에서 들려오는 악에 받친 고함 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돌린 지원이 두 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말 그대로 간발의 차였다.

탕! 탕! 탕!

가슴을 움켜쥔 채 정신없이 날아오던 하율이 불과 10여 미터를 앞두고 우뚝 멈춰 서더니, 그대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한없이 밑으로 떨어지던 하율은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부딪쳤고, 그 반동으로 서너 번 튕겨 오르다가 곧 잠잠해졌다.

“죽었을까요?”

“그랬을 지도 모르지. 안 그랬으면 더 큰일이고.”

“뭔가를 죽인 건 처음인데, 신기할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네요. 죄책감도 전혀 안 들고요.”

“정당방위니까. 이런 건 중천에서도 살인죄로 취급하지 않아. 그러니까 죄책감 느낄 거 없어.”

충격을 받을 기운도 없었던 가온과 지원은 한바탕 난리가 난 명계를 뒤로한 채 그저 덤덤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더 이상은 그들이 가는 길을 방해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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