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눈밭의 수선화
[죽은 자를 인도하는 자는 망자가 신속하게 판정을 받을 수 있도록 힘을 다하라. 산 자의 땅에 죽은 자가 오래 머무는 것은 좋지 않다. 또한 판결을 행함에 있어 사사로운 감정을 배제하고 온전히 공과 과로만 판단하라. 망자는 생전의 지위나 형편이 아닌 오직 자신의 행위로써만 판정을 받을 것이다. 생전에 부자나 고관이었다 하여 치우친 저울을 내밀지 말고, 과부나 고아라고 과실을 감하여 주지 말라. 그리하는 것은 공평하지 아니하다. 사후의 평안은 오로지 자신의 선함으로만 얻을 수 있고, 가난한 이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은 산 자들을 다스리는 이의 몫이다.
죽은 자를 인도하는 자는 해가 천 번 바뀌는 동안 하늘과 땅 사이를 지킬 것이다. 모든 망자는 그의 명령에 복종할 것이며, 그가 정한 규칙을 준수하여야 한다. 그의 명을 따르지 않고 심판을 거부하며 산 자의 땅에 극심한 혼란을 야기하는 망자는 악귀라 칭할 것인데, 그중 산 자에게 해를 끼치는 악귀는 즉시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곳으로 보낼 수 있다. 그것이 죽은 자를 인도하는 자에게 주어진 가장 강력한 권한이다. 환생의 기회가 여러 번 남아 있던 악귀라도 어둠만이 존재하는 곳에 갇히면 세상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며, 지옥의 왕조차도 그의 결정을 번복할 수 없다.
따라서 죽은 자를 인도하는 자가 망자를 어둠의 끝으로 보낼 때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망자의 직전 생은 물론이고 이전의 모든 생의 잘잘못을 낱낱이 가려 도저히 갱생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만 그러한 형벌을 내릴 것이며….]
- 7장 中
“이게 끝입니까?”
“네. 4년 전에 저희 도서관에 작은 화재가 났었는데, 하필이면 고서를 모아 놓은 곳에 불이 번져서…. 이것도 저희 사서가 손등에 화상을 입으면서까지 간신히 꺼내 온 겁니다. 안타깝게도 마지막 장은 완전히 타버리고 말았죠.”
군데군데 그을음이 묻어 있는 종잇조각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브루엘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도 여태까지 한 번도 발견하지 못했던 자료이긴 했지만, 브루엘에게 정말 필요한 내용은 바로 이다음 장이었다. 분명히 이다음에 뭔가 경고의 메시지가 있을 것 같은데…. 하필이면 4년 전에 타버렸다니. 내가 조금만 더 빨리 연구를 시작했으면 좋았을걸.
브루엘은 각종 문헌을 닥치는 대로 조사한 끝에, <코덱스 기가스>의 사라진 여덟 장이 기원전 9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코덱스 베루스>와 동일한 내용일 수도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러나 무려 3천 년 전에 파피루스에 고대 히브리어로 기록된 <코덱스 베루스>의 원본은 당연히 남아 있지 않았고, 그 사본조차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크리스트교가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던 시대에, 교리에 반하는 내용이 쓰인 서적은 무조건 태워 없앤 탓이다. 면죄부를 팔아 치워야 하는 입장에서 공정함의 대명사인 중천주의 존재를 인정하는 건 아무래도 영 껄끄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슬라이드 자료도 없나요?”
“네, 이 책은 없습니다. 어떻게든 영상으로 남겨 놓으려고 수차례 시도하긴 했는데, 희한하게도 사진을 찍을 때마다 필름이 망가지더라고요. 그래서 저주받은 책이라는 얘기도 나왔었죠.”
저주라…. 그 저주를 대체 누가 걸었을까. 진짜로 염마왕인가? 잔뜩 눈썹을 찌푸린 브루엘이 썩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본래 신의 직접적인 개입을 통해 기록된 책은 그 자체로 예언서의 기능을 한다. 그 책이 존재하는 한, 신이 정한 규칙은 일점일획도 변하지 않을 거라는 계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예언서가 모두 사라져서 인간들이 아무도 그 내용을 알지 못하게 되면, 규칙도 효력을 잃는다는 뜻과 같다.
바로 그 사실을 노리고 누군가가 책을 없애려 든다는 건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하지만 그 주체가 염마왕이라고 보기에는 뭔가 딱 들어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요즘 갑자기 폭주하기 시작한 염마왕이 마냥 제멋대로 굴면서도 신의 심판을 피하고자 했다면, 자신에 대한 경고가 적힌 부분을 파기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현재 중천주에 대한 내용은 거의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지옥의 왕이 묘사된 사본은 간혹 발견할 수 있었다. 제가 소장하고 있는 것도 지옥의 왕에 대한 기록은 거의 온전하게 남아 있다.
그럼 대체 누굴까? 혹시 전임 중천주일까? 하지만 전임 중천주는 대표님처럼 인계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끼칠 수 없었을 텐데. 문명이 들어오기 전의 아메리카 대륙에 살던 원주민이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정보를 앉은 자리에서 기민하게 파악할 수 있었을 리도 없고.
“그런데 이 책은 왜 이렇게 열심히 찾으시는 거예요? 이건 위경(僞經 : 출처가 확실하지 않아 성서에 기록되지 못한 문헌)조차도 아닌, 그저 잡서일 뿐인데요.”
“그저 학문적인 호기심 때문입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간단하게 대꾸한 브루엘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 다음 도서관을 나섰다. 바티칸 자료 보관실에도 없고, 옥스퍼드 도서관에도 없고, 카이로 국립도서관에도 없으니…. 이제 또 어딜 가 봐야 하나. 이렇게 무식하게 발로 뛰어서 어느 세월에 찾아낼 수 있을까. 대표님께 득이 될지 해가 될지 알 수가 없으니 공개적으로 수배할 수도 없고….
그래도 한 가지 고무적인 사실은 조사가 진행될수록 발견되는 내용이 조금씩 많아지고 있다는 거였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한 브루엘이 태블릿을 꺼내 이메일을 확인했다. 각국의 대학과 박물관, 그리고 국립도서관 등에 수백 통의 메일을 보내두었는데, 예상했던 대로 그런 자료는 소장하고 있지 않다는 답변이 대부분이었다.
“응? 이건 뭐야?”
그중에 눈에 확 들어오는 제목 하나를 발견한 브루엘이 황급히 메일을 열어보고는 서서히 눈을 크게 떴다.
“페루 산마르코 대학의 알베르토 피사로 교수…. 본교에 해당 자료를 소장하고 있지는 않지만, 최근 발굴된 유적지에서 귀하가 찾는 내용의 문헌과 아주 흡사한…. 어? 진짜로?!”
완전히 흥분한 브루엘이 바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잔뜩 신이 난 얼굴로 최근에 가장 많이 통화했던 상대에게 전화를 걸었다.
“권 실장님. 나 르지프 브루엘입니다. 지금 카이로에 있는데 최대한 빨리 리마로 갈 수 있는 항공권을 구해주십시오. 지금 당장이요!”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는 가온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지원이 시간을 확인하고는 짧게 혀를 찼다. 가온이 비행기 안에서 이렇게 곯아떨어지는 건 처음 있는 일이라 가능하면 끝까지 내버려 두고 싶었지만, 공복이 너무 길어지는 게 마음에 걸렸다. 인천에 도착하면 바로 본사로 가야 하는데, 북적거리는 공항에서 대충 끼니를 때우는 것보다는 차라리 비행기 안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편이 낫다.
한 번 뒤척이지도 않고 주무시네. 잠귀도 밝으신 분이 얼마나 피곤했으면…. 일주일 동안 미국과 캐나다의 아홉 개 도시를 도는 강행군이었으니 가온이 버티지 못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평소 체력에는 자신이 있는 지원조차도 이번에는 살짝 힘에 부칠 정도였다.
거기다 하필 오늘은 또 보름…. 다들 살아생전에는 엄연히 이성과 지성이 존재하는 만물의 영장이었을 텐데, 왜 죽고 나니까 금수처럼 보름마다 이 지랄들일까. 무슨 늑대인간도 아니고. 입 속으로 조용히 욕설을 뇌까리던 지원이 막 표정을 정돈하고 가온을 깨우려던 찰나였다.
뭐지? 불현듯 이질적인 기운을 감지한 지원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특별히 이상한 점은 눈에 띄지 않았다. 일등석 안에는 처음 탑승했던 대로 저와 가온을 제외한 두 명의 승객이 더 있을 뿐이었고, 오가는 승무원들도 다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이상하네. 분명히 뭔가 낯선 기운을 느꼈는데…. 사람이 아닌 것 같은…. 하지만 상식적으로 가온이 있는 곳 근처에 귀신이 제 발로 다가온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아무리 나이가 어리고 지능이 떨어지는 영혼일지라도 중천주에 대한 두려움은 본능이다.
“흐앙.”
피곤한 탓에 신경이 예민해진 거라고 생각하던 지원이, 이번에는 나약하지만 확실한 울음소리를 듣고는 홱 소리가 나게 고개를 돌렸다. 주변에는 성인들밖에 없는데 제 귀에 들린 건 분명히 어린 아기의 소리였다.
내가 아무리 기력이 떨어졌어도 환청을 들었을 리는 없어. 슬쩍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이리저리 둘러보던 지원은 제 옆 좌석 아래에 무언가 작은 것이 웅크리고 있는 걸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내뱉었다.
“허!”
아이고…. 아직 사람이 다 되지도 못한 녀석이 어쩌다 여기까지 왔냐, 응?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한 채 꼬물거리고 있는 건, 지원의 주먹 두 개 크기도 되지 않는 작은 아기였다. 형태를 보니 태아인 듯했다. 안타까움에 절로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가, 아저씨한테 올 수 있겠어?”
바들바들 떨고 있는 태아는 지원의 목소리에 반응을 보이기는 했지만, 움직이지는 못했다. 하긴. 아직 말은 못 알아듣겠구나.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 뜬 지원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조심스럽게 옆자리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들에게 미친놈으로 보일 각오를 하고는 태아의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대화가 통할 상태는 아니었지만, 급작스러운 환경 변화에 태아가 잔뜩 겁을 먹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아가. 아저씨가 도와줄게. 그러니까 무서워하지 마, 알겠지?”
가능한 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태아를 달랜 지원이 손을 뻗어 살포시 아기를 잡은 순간, 머리 위에서 당혹스러움을 완전히 감추지 못한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님, 무얼 떨어뜨리셨습니까?”
망할. 아주 잠깐 당황했던 지원이 곧 능숙하게 표정을 감추고는 여유롭게 웃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 펜이 보이지 않아서 혹시 떨어뜨렸나 했는데, 여긴 없는 것 같네요. 신경 쓰지 마세요.”
“어떻게 생긴 펜을 잃어버리셨습니까? 말씀해주시면 찾아보겠습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고작 펜 하나 때문에 그런 소동이 벌어지면 더 마음이 불편할 것 같네요. 신경 쓰실 거 없습니다.”
지원이 도움을 거절하고 나서도 몇 번이나 더 펜을 찾아보겠다던 승무원은, 어쩔 수 없이 표정을 굳힌 지원이 조금 딱딱한 목소리를 낸 후에야 겨우 자리를 떴다. 지나치게 친절했던 승무원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제자리로 돌아온 지원은 조금 다급한 목소리로 가온을 깨웠다.
“대표님.”
“으응.”
“잠깐 일어나셔야겠습니다.”
“왜? 무슨 일인데?”
나른하게 대꾸하던 가온이 지원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닫고는 반짝 눈을 떴다. 드물게 몹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지원의 얼굴을 못내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가온이, 지원의 손바닥 위에 놓인 태아의 영혼을 발견하고는 눈썹을 확 찡그렸다.
“이런.”
“어떡하죠? 저는 이렇게 작은 아기의 영혼은 본 적이 없어서…. 중천으로 보내야 할까요? 아직 태아인 것 같은데 혼자 갈 수 있을까요?”
태아의 상태를 유심히 살피던 가온이 지원의 걱정스러운 질문에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차 관장. 중천으로 보내면 안 돼. 이 아이는 아직 망자가 아니야. 생령이라고.”
“생령…, 이요?”
“그래. 뭔가 충격을 받아서 튕겨 나온 모양인데, 아직 육신이 살아 있어. 그러니까 늦기 전에 돌려보내야 해.”
지원의 손에서 태아를 건네받은 가온이 양손으로 조심조심 아이를 받치고는 심각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혹 있는 경우지만, 애석하게도 언제나 결과가 좋은 건 아니다. 확률은…, 반반쯤 되었던가. 무사했던 케이스 중에 이 녀석보다 더 작은 아기가 있었나? 딱히 떠오르는 기억이 없어서 가온은 마음이 급해졌다.
“빨리 임신부를 찾아. 아직 만삭은 아니겠지만 아이가 이 정도로 컸으니 겉으로 보기에 확연히 티가 날 거야.”
“알겠습니다.”
가온과 지원은 곧바로 양쪽으로 갈라져서 승객들을 하나씩 살피기 시작했다. 처음 겪는 사태에 지원도 꽤나 마음이 초조해졌지만, 가온은 제 손바닥 위에 있는 태아가 움찔거리며 몸을 떨 때마다 이대로 아기의 숨이 끊어지기라도 할까 봐 입이 바싹바싹 말랐다.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로 이코노미석의 절반 정도를 훑었을 때였다.
“어? 대표님!”
저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힐끔 고개를 돌린 가온은, 대여섯 칸 뒤에서 반색하며 일어나는 젊은 여자를 보고는 대번에 얼굴을 굳혔다.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에 반사적으로 시선을 내리니 누가 봐도 임신부인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동그랗게 배가 불러 있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대표님! 이렇게 다 만나네요? 어디 출장 다녀오시는 길이세요?”
“앉아라, 다인아. 그렇게 벌떡벌떡 일어나지 마.”
“아유, 저 괜찮아요. 이제 안정기라 이렇게 여행도 다니는 걸요? 그런데 손에 들고 계시는 건….”
생글생글 웃고 있던 다인이 삽시간에 사색이 되자, 재빨리 손을 뻗은 가온이 그녀가 풀썩 쓰러지지 않도록 팔을 꽉 붙잡았다. 그리고는 그새 눈물이 그렁해진 다인과 눈을 맞추며 더없이 침착한 목소리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괜찮아. 네 아기는 무사해. 잠깐 놀라서 튕겨 나온 것뿐이야. 일단 앉아, 응? 울지 말고. 지금부터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
“대표님…, 그 아기가…. 하아…, 제 아기….”
“그래. 내가 다시 잘 넣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천천히 앉아. 엄마가 불안해하면 아기도 불안해져. 그러니까 정신을 잘 붙들고 있어야 해. 나를 못 믿어?”
“흐윽…. 믿어요. 믿어요, 대표님.”
울음이 터진 다인을 달래서 간신히 자리에 앉힌 가온은, 당최 영문을 알 수가 없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의 남편에게 정중하지만 대단히 위엄이 서린 목소리로 거의 명령과도 같은 요구를 했다.
“설명은 나중에 할 테니 잠깐 자리 좀 비켜주겠습니까.”
“네? 아니, 갑자기 이게 무슨….”
“빨리 일어나, 오빠! 대표님 앉으시게 얼른 일어나라고!”
“어? 알았어, 알았어. 일어날 테니까 울지 마.”
당황한 남편이 황급히 자리를 비키자마자 다인의 옆에 앉은 가온이 일단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진정시켰다.
“숨을 천천히 쉬어라, 다인아. 네 아기는 지금 말로 설득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모체의 상태가 안정되어야만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거야. 지금처럼 엄마의 호흡이나 심장 박동이 불안하면 본인이 안전하지 않다고 느낄 수 있어.”
“흑…, 흑…. 네….”
“좋아, 잘하고 있어. 쉬이, 다 괜찮아. 나를 믿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다.”
잠시 패닉에 빠졌던 다인은 지극히 신뢰감을 주는 가온의 목소리를 들으며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내밀어 가온이 건네는 자신의 아기를 소중하게 받아 들었다. 다행히도 다인의 배 위에 올려진 아기는 엄마의 기운을 느끼고는 곧 익숙한 공간을 찾아 꼬물꼬물 움직이기 시작했다. 태아의 영이 육신과 완전히 합체가 될 때까지 신중하게 지켜보던 가온이 지그시 눈을 감으며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표님…, 이제 된 거예요? 제 아기가 제대로 자리를 찾았어요?”
눈물범벅이 된 다인의 얼굴을 다정하게 손으로 닦아 준 가온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주 씩씩하고 영리한 아기를 가졌구나.”
“정말 감사해요, 대표님. 이렇게 대표님을 만나서…, 너무 다행이에요.”
“쉬잇. 울면 안 된다니까. 지금은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해.”
다인을 눕히기 위해 의자를 뒤로 젖히려던 가온이 좌석 간의 공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온 지원이 언제나 그랬듯이 지금 당장 가온이 가장 반길 만한 소식을 전했다.
“일등석에 자리 두 개를 마련해두었습니다, 대표님. 지금 바로 그쪽으로 옮기시죠.”
순간 말문이 턱 막힌 가온이 입을 조금 벌린 채로 지원을 올려다보았다. 어떻게든 다인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뭐부터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는데, 이렇게 또 지원은 아무렇지도 않게 제 필요를 채운다. 내가 여태까지 차 관장 없이 어떻게 살았을까. 감격에 겨웠던 가온이 간신히 입을 열어 짤막하게 대꾸했다.
“…고마워.”
“별말씀을요. 두 분 다 일어나세요. 아내분부터 모실 테니, 남편분은 짐을 챙겨서 앞으로 오시고요.”
“네? 아, 네…. 가, 감사합니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남편에게 지극히 사교적인 미소를 지어 보인 지원이 가온을 도와 다인을 부축했다. 다인이 아이를 무사히 지키게 된 것은 지원에게도 퍽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생면부지의 태아가 목숨을 건진 것보다는, 가온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진 것이 지원을 더욱 기쁘게 했다.
“그래서 제가 엄마한테 막 울면서 덤볐었거든요. 나도 귀신이 다 보이는데, 왜 나는 가이드가 되면 안 되냐고요.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정한다고요.”
“그래…, 그랬었지. 이제 와서 말이지만, 권 여사가 그때 속을 많이 썩었었다.”
“그러니까요. 지금 생각하면 엄마한테 그게 그렇게 미안할 수가 없더라고요. 사람은 아이를 가져야 철이 든다는데, 저도 이제야 어른이 되나 봐요.”
“지금이라도 그리 생각한다니 기특하구나.”
반듯하게 누운 다인의 옆에 앉아 비행기가 착륙할 때까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손을 어루만지던 가온은, 한결 혈색이 좋아진 다인을 못내 애틋하게 바라보며 아쉬운 작별을 나눴다.
“항상 조심해야 한다.”
“네, 그럴게요. 두 목숨 살려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인사는 이제 되었고…. 다인아, 아이를 낳을 때까지 무영당에서 지내는 건 어떻겠니? 권 여사가 쓰는 독채에 남는 방이 있으니 지내기에 불편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이전에도 내가 여러 번 얘기했었지만 무영당은 네 친정이나 다름없으니 언제든 와서 네가 원하는 만큼 머물러도 된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해요, 대표님. 그래도 엄마를 그렇게까지 힘들게 하고 싶진 않아요. 나중에 아기를 낳으면 몸조리는 무영당에서 할게요. 미리 잘 부탁드려요.”
“그래. 원하는 대로 하렴.”
인자하게 미소를 지은 가온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남편의 손을 잡고 공항을 나서는 다인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내내 묵묵히 그 옆을 지키고 있던 지원이 가온의 얼굴을 힐끔 살피더니 조용히 손수건을 건넸다.
“눈가에 뭐가 묻었습니다, 대표님.”
“…응. 고마워.”
떨리는 손으로 손수건을 받아 든 가온은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내내 얼굴을 가린 손수건을 떼어 내지 못했다. 아무 말 없이 가온을 부축해서 차에 태운 지원은, 아무도 없는 곳에 이르러서야 소리를 내어 흐느끼기 시작한 가온을 꼭 끌어안았다. 솔직히 그녀의 서러움이 다 이해되진 않았지만, 이렇게 눈물을 철철 흘리는 가온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너무 안 좋았다.
“정다인 씨가 권 여사님의 따님인가 봅니다.”
“응…, 권 여사의 외동딸. 어릴 때 쭉 무영당에서 컸어. 권 여사가 혼인한 지 6년 만에 어렵게 가진 아이였지.”
그래서 이렇게 정이 깊은가…. 이거 은근히 신경이 좀 쓰이는데? 대표님이 누굴 이렇게 특별하게 대하는 건 처음 아닌가? 흐음, 생각했던 것보다 나 훨씬 더 중증이구나. 남자만 경계 대상인 줄 알았는데, 가온 씨의 눈길이 닿는 건 여자라도 썩 달갑지가 않네. 쯧, 괜히 일등석으로 옮겨줬나. 아니야, 임신부를 상대로 그런 생각까지 하는 건 너무 치졸하지. 가온 씨가 이런 내 속내를 다 알면 당연히 좋다고 하지 않을 테고.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하며 살짝 불편해진 심기를 애써 다스리던 지원은,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이던 가온이 나직하게 덧붙인 말을 듣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내 동생.”
동생?! 너무나도 뜻밖의 정보에 잠시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하던 지원이 살짝 굳었던 머리를 가까스로 회전시켰다. 가온 씨의 동생이라면…, 중천주가 되기 전의 가족인 건가?
“가온 씨의 친동생입니까?”
“친동생이었지. 예전에.”
“그걸…, 권 여사님도 아시나요?”
이미 축축하게 젖은 손수건 대신 제 손등으로 대충 얼굴을 훔친 가온이 옅게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 생에서는 권 여사의 딸이니까. 괜히 나와의 인연을 알게 되면 내 앞에서 마음껏 엄마 노릇도 못 할까 봐. 한숨처럼 속삭이는 목소리가 너무 안쓰러워서 지원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잠시나마 그 인연을 질투했던 속 좁은 자신을 통렬하게 비난하며, 지원은 가온을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목숨처럼 사랑하는 연인에게 고작 이 정도밖에 해 줄 수가 없다는 게 너무 한심하고 기가 막혔다.
어슬렁어슬렁 후원을 돌아다니던 소랑은 눈을 반쯤 감은 채 지원에게 거의 안기다시피 귀가하는 가온을 지켜보며 혀를 끌끌 찼다. 어제저녁에 귀국해서 바로 중천으로 갔다고 하니 응당 초주검이 되어 돌아올 줄은 알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상태가 심각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별채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뱅글뱅글 맴돌던 소랑은, 1시간 정도 지난 후에 말끔해진 지원이 나오는 걸 보고는 슬그머니 다가가 말을 붙였다.
“주 대표는? 자?”
“응. 방금 잠드셨어.”
“이번 보름은 유독 심했나 봐?”
“아니. 중천에서는 다른 때하고 크게 다를 바 없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마음고생을 좀 하셨어. 비행기 안에서 권 여사님의 딸을 우연히 만났는데, 사고가 좀 있었거든. 하마터면 태중의 아이를 영영 잃을 뻔했지.”
“아…, 다인이. 얘기 들었어. 권 여사가 식겁하더군.”
대충 짐작이 간다는 표정을 짓는 소랑을 빤히 쳐다보던 지원이 지나가는 말처럼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물었다.
“가온 씨의 동생이라던데. 그러면 너도 이전부터 알고 있었겠네?”
“당연하지. 한집에서 4년이나 살았는데…. 가만, 주 대표가 너한테 그런 얘기도 해?”
“가온 씨는 나한테 비밀 없어.”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던 소랑이 지원의 무심한 대꾸에 입매를 비틀었다. 이 자식이 하는 말은 왜 이렇게 다 재수가 없지? 가온은 저한테도 비밀이 없다고 쏘아붙일까 잠시 고민하던 소랑이 입을 꾹 다물었다. 관두자, 어린놈하고 다퉈 봐야 내 체면만 깎이지.
“주 대표가 엄청 예뻐하던 늦둥이 동생이었어. 중천주가 되기 위해서 집을 떠나던 날, 아이가 많이 울었었지. 강생이도 데리고 가면서 나는 왜 놓고 가냐고.”
가온이 굳이 밤을 택해 집을 나섰던 건, 띠동갑의 어린 동생과 차마 얼굴을 마주 보며 이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문 앞에서 소랑과 실랑이질하는 사이에, 잠들었던 아이가 기민하게도 소란스러움을 감지하고는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왔다. 안 그래도 요 며칠 집안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던 아이는, 가온이 든 작은 짐 보따리를 보자마자 그녀의 손을 부여잡으며 눈물을 펑펑 쏟아내기 시작했다.
- 언니! 언니, 어디 가! 나도 같이 가!
- 그럴 수 없어. 정말 미안해.
- 강생이는 데리고 가면서! 나를 놓고 가면 언니도 못 가!
내내 고개를 돌리고 있던 그녀의 모친은 장장 천 년이라는 시간 동안 홀로 막중한 책임을 감당해야 할 딸을 어떻게든 웃는 얼굴로 보내려고 안간힘을 썼었지만, 막내딸의 오열에 속수무책으로 울음이 터졌다. 끝까지 먼 하늘을 바라보며 뒷짐을 지고 있던 부친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집안은 초상집을 방불케 하는 눈물바다가 되고 말았다.
“그때는 나도 지금 같지 않았을 때라…. 주 대표가 왜 동생을 안 보고 떠나려고 했는지 잘 몰랐어. 미리 알았다면 좀 더 조용히 했을 텐데…. 나중에 알고 나서 많이 미안했었지.”
“그렇게 떠나고 나서 가족들을 다시 안 보셨어?”
“부모님은 서너 번 만났던 것 같지만, 동생은 안 본 걸로 알아. 병이 들어 죽은 걸로 되어 있는 상태였으니 아이에게 혼란을 주고 싶지 않았겠지. 요즘처럼 복잡한 세상이라면 또 모를까, 나이를 먹지 않는 걸 들키지 않으려면 살던 곳에 자주 드나들 수가 없었거든. 혹시라도 소문이 퍼져나가면 그것도 곤란한 일이었을 테고.”
서너 번…. 평생 가족의 얼굴을 보는 횟수로는 비루할 정도로 적은 숫자다. 가슴에 무언가 묵직한 것이 꽉 들어차는 기분에 지원은 속이 몹시 답답해졌다.
- 지금은 경험이 쌓이고 눈치가 늘어서 그럭저럭 노련한 척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정말 엉망이었어. 한 30년 정도는 매일매일 울면서 도망가고 싶었지.
그 말을 할 때 가온 씨의 표정이 어땠더라…. 그날의 나는 왜 머저리처럼 적당한 위로의 말 한마디도 건네지 못했나.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못하고 그저 혼자서 꾸역꾸역 견디는 동안 얼마나 힘들고 막막했을까. 그 고독함의 정도를 짐작조차 할 수가 없어서 지원은 더욱 마음이 아팠다.
입을 꾹 다문 지원을 흘깃 쳐다보던 소랑의 눈길에 평소와는 달리 약간의 온기가 담겼다. 어쨌든 주 대표가 지금이라도 이렇게 사는 건 참 잘된 일이야. 천 년 동안 이렇게 많이 웃는 걸 본 적이 없었는데….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게 다 이 애송이 덕분인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
“더 궁금한 거 없어?”
마음이 너그러워진 김에 모처럼의 친절을 베풀었던 소랑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오는 질문에 바로 오만상을 찌푸렸다.
“강생이가 무슨 말이야?”
“…뭐?”
“아…, 강아지라는 뜻인가? 그때는 좀 귀여웠었나 봐?”
이 자식이! 뻔히 다 알면서! 금세 안색이 변하는 소랑을 보며 나직하게 웃음을 터트리던 지원이 천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요즘 들어 가온은 제가 없으면 깊이 잠들지 못하기 때문에 오래 자리를 비울 수가 없다.
“아무튼 얘기해줘서 고마워. 궁금한 게 생기면 그때 또 물어볼게.”
“흥.”
이미 늦었거든? 대차게 코웃음을 친 소랑이 홱 돌아서더니 바람처럼 훌쩍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지원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조심스럽게 별채 안으로 발을 들였다.
간만에 늦잠을 자고 일어난 가온은 잠시 자리에 누운 채로 서서히 오감을 깨웠다. 최근에 워낙 무리를 해서 그런지 푹 잔 것 같은데 쉽게 정신이 들지 않았다. 멍한 정신만큼이나 느릿하게 돌아가던 시선이 창문가에서 한 번 멈췄다. 암막 커튼을 쳐 놓았는데도 방이 어둑하지 않은 걸 보니 날이 밝은 지 한참 된 것 같았다.
이제 정말 몸이 예전 같지 않네. 많이 잤는데도 몸이 가뿐하지가 않아. 나이를 먹는다는 게 이런 건가…. 그런데 차 관장은 언제 일어나서 나갔지? 내가 이렇게 사람 드나드는 것도 모르고 잠을 자다니.
“…누가 연락이 와요? 송영진? 그 친구가 또 왜…. 뭐? 허! 이게 진짜 나하고 해보자는 거야? 봄 전시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 그림 한 장 때문에 내가 얼마나 욕을 먹었는데.”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천천히 몸을 일으킨 가온은, 침실 밖에서 들려오는 지원의 조곤조곤한 목소리를 듣고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통화 중인가…. 평생 누군가와 함께 사는 삶을 그려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연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게 이렇게 가슴을 벅차게 만들 줄은 정말 몰랐다.
“보좌관? 하아…, 정말 별 거지 같은 게 계속 사람 신경을 건드리네. 아니. 이번에는 송 의원이 직접 찾아와도 송영진 그림은 안 겁니다. 사람이면 양심이 있어야지. 소란 만들기 싫어서 한 번 굽혀줬더니 내가 아주 호구로 보이나 본데….”
흐뭇하게 미소를 짓고 있던 가온이 통화 내용을 들으며 조금씩 표정을 굳혔다. 자고 있는 저를 의식해서인지 지원의 목소리는 아주 낮고 부드러웠지만, 오고 가는 대화의 내용은 그렇지가 못했다. 언제나 부드럽고 정중한 어휘만을 사용하던 지원이 정제되지 않은 단어를 마구 내뱉는 걸 보니 제대로 화가 난 것 같았는데, 대충 내용을 짐작해보니 송태윤 의원이 또다시 지원의 갤러리에 제 아들의 그림을 걸어달라고 생떼를 쓰는 모양이었다.
그건 안 되지. 어디서 그런 것도 그림이라고…. 가지런하던 눈썹을 한껏 찡그린 가온이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알겠어요. 내가 송 의원 보좌관하고 통화하겠습니다. 혹시 또 전화가 오면 그냥 무조건 모른다고만 하세요. 그런 건 다 관장이 결정하는 거라고 얘기해요. 그리고…, 아! 자세한 얘기는 내일 하죠. 그래요, 내일은 정상적으로 출근할 겁니다. 네…. 네, 내일 봅시다.”
가온의 기척을 바로 알아차린 지원이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생긋 웃어 보이고는 서둘러 통화를 종료했다. 그 해사한 미소가 어찌나 자연스러웠는지,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지원이 지금 꽤나 기분이 상한 상태라는 걸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였다.
“일어나셨습니까. 어제는 정말 병이라도 나실까 싶어서 너무 걱정스러웠는데, 확실히 안색이 좋아지셨네요.”
“송태윤이가 또 속 썩여?”
단도직입적인 가온의 질문에 잠시 멈칫하던 지원이 곧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생긋 웃었다. ‘속을 썩인다.’ 정도로 표현하기 버거울 만큼 거센 압박이 들어오고 있는 상태지만, 그런 걸 일일이 가온에게 일러바칠 수는 없다.
“자식 사랑이 지극하신 송 의원께서 나이 서른이 다 되도록 제구실을 못 하는 막내아들이 영 마음에 걸리시나 봅니다. 그렇다고 제가 계속 그 뒤치다꺼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 그림을 또 걸어 달래?”
“하하, 네. 염치도 없는지 그 부탁을 또 하네요.”
진심으로 질색하는 가온의 표정을 보며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린 지원이 가온의 허리를 감싸며 가볍게 입을 맞췄다.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얼른 식사하셔야죠. 준비하고 계세요. 권 여사님께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차 관장, 송태윤이 계속 귀찮게 굴면….”
“그런 건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가온 씨가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두 번은 타협할 수 없으니 거절하면 됩니다. 자,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지 마시고 얼른 화장실부터 다녀오세요. 벌써 12시가 다 되어 갑니다. 이미 건너뛴 아침은 어쩔 수 없지만, 하루에 적어도 두 끼는 꼭 챙겨 드셔야죠.”
깔끔하게 말을 자른 지원이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지만, 사태는 생각만큼 수월하게 해결될 것 같지 않았다. 보통 가온과 있을 때는 어지간한 전화는 받지 않던 지원이 식사 중 두 번이나 자리를 비우기도 했다. 간단히 거부 의사를 밝히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얘기라는 뜻이었다.
일단 묵묵히 식사를 마친 가온은, 외부에 볼일이 있다는 지원이 외출하자마자 보안실장을 호출했다. 그리고는 불쾌한 심기를 은근히 드러내며 아주 단호하게 지시를 내렸다. 미처 인지하지는 못했지만, 가온이 제가 가진 권력을 중천이나 제니스 컴퍼니가 관련되지 않은 일에 휘두르는 건 난생처음이었다.
“지금 바로 송태윤 의원에 대해 알아 와, 3시간 안으로. 특히 약점이나 비리 쪽은 하나도 빼놓지 말고 다 털어 오고. 보고서 들일 때 비서실장도 같이 들어오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송태윤 의원한테 뭘 하실 생각이신지….”
현호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가온은 제가 하고자 하는 바를 아주 간결한 단어로 설명했다.
“경고.”
국내의 내로라하는 미술 관계자들의 모임에 참석한 지원은 하품을 참기 위해 벌써 수십 번째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말이 좋아 세미나지, 누가 더 거하게 돈지랄을 했는지 자랑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자리였다. 반기에 한 번씩 열리는 세미나는 항상 그럴싸한 주제를 붙이곤 했지만, 결국은 누가 더 비싸고 유명한 작품을 사들였는지 탐색하고 견제하는 게 주목적이다.
그나마 그건 간간이 작품을 보는 재미라도 있었다. 세미나 후의 리셉션은 그야말로 각종 가식과 아부가 난무하는 천박한 교제의 장이었다. 이런 자리에 올 때마다 지원은 제게 막대한 재산을 물려주신 부모님께 정말이지 마음을 다해 깊이 감사했다. 만약 갤러리 화담에도 스폰서가 필요했다면, 지원은 지금처럼 이렇게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그들을 비웃지 못했을 것이다.
노인네들 기운도 좋아. 나도 이렇게 좀이 쑤시는데, 몇 시간씩 참 지치지도 않고 잘도 떠드시네. 다 같이 어디서 산삼이라도 캐 드셨나. 어쨌든 이제 대충 눈도장은 다 찍은 것 같고…. 그럼 슬슬 토껴 볼까. 지금 출발하면 가온 씨랑 같이 저녁을 먹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슬쩍 시간을 확인한 지원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빠져나가려고 기회를 보고 있을 때였다.
“차지원 관장님.”
이런…. 신경질적으로 눈썹을 꿈틀거린 지원이 대외용 미소를 장착한 후 천천히 돌아섰다. 저를 부른 이는 국내에서 예술가 육성 사업을 가장 활발하게 하고 있는 언론사 사주의 딸이었다. 동하와 친분이 있어서 사적인 자리에서 마주친 적이 몇 번 있는데, 워낙 총명하고 유능해서 오빠들을 제치고 부친에게 후계자로 낙점받았다고 했었다. 저와 비슷한 연배지만 간단히 무시할 수는 없는 인물이다.
“오랜만입니다, 부사장님.”
“그러게요. 이런 자리에서 보니까 더 반갑네요. 참, 미리 축하드려요. 곧 결혼하신다면서요.”
저와 그다지 친분이 깊지 않던 그녀의 살가운 축하 인사에 지원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중천 쪽 사람들은 비밀 유지에는 워낙 단련이 되어서 알게 되었더라도 함부로 떠들고 다니지 않았을 텐데….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 얘기를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G일보 사장 비서실에 친구가 있어요.”
“G일보요?”
“송태윤 의원이 일전에 차 관장님한테 아주 크게 실례를 범했다면서요. G일보 사주께서 그 일을 오늘 아시고 노발대발하셨다던데요?”
송태윤 의원…, G일보…, 그리고 내 결혼이 어떻게 한 카테고리 안에 묶였을까. 머릿속에 온통 의문이 가득했지만, 지원은 일단 당황한 티를 조금도 내지 않고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최대한 점잖은 어휘를 골라 두루뭉술하게 대꾸했다.
“실례까지는 아니었고, 조금 무리한 부탁을 하셨었습니다.”
“그게 실례죠. 송 의원 아들이 어떻게 학위를 땄는지 미술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아무튼 울며 겨자 먹기로 그림 걸어 준 갤러리가 꽤 되는 걸로 아는데 덕분에 다들 한시름 덜겠네요. 제니스 컴퍼니에서 G일보하고 GNTV에 올렸던 광고를 다 빼겠다고 나오는 마당에, 송 의원이 지금 늦둥이 아들 취미생활에 장단이나 맞춰줄 형편이겠어요?”
“…하하.”
정확하게 아는 바가 없으니 대답할 말이 궁했다. 말을 아끼는 척 웃음으로 대답을 얼버무린 지원이 슬쩍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쉴 새 없이 협박성 메시지를 보내던 송 의원의 보좌관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연락을 딱 끊었다. 아무래도 송 의원과 G일보 사이에 일반인들이 모르는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게 분명했다.
내가 무영당을 나선 게 한 시쯤이었고, 지금이 다섯 시 반. 고작 네 시간 반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제니스 컴퍼니의 광고를 빼겠다고 했다는 건 오너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얘긴데…. 가온 씨가 정말로 그런 지시를 내렸을까? 나 하나 건드리지 말라고 G일보를 후려쳤다고? 정황상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결혼은 언제 하세요?”
“음…, 결혼이요.”
딱히 정해진 건 없지만 지원이 지금 그런 식으로 대답을 하면 거하게 철퇴를 휘두른 가온의 입장이 우스워진다. 그렇다고 거대 언론사 부회장을 상대로 대충 허위 정보를 제공할 수도 없다. 살짝 난감해진 지원이 적당한 대답을 고르고 있는데, 어디 중요한 자리에 다녀오는 길인지 착장에 잔뜩 힘을 준 동하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게 보였다.
저 자식이 뜬금없이 여긴 웬일이지? 의아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지원을 꽤나 의미심장하게 응시하던 동하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더니 작게 혀를 찼다. 물론 장차 대한민국의 언론을 이끌어갈 김 부회장을 바라볼 땐 낯빛을 더없이 유순하게 바꾸는 걸 잊지 않았다.
“오랜만이에요, 누나.”
“아, 백 상무. 바쁘신 분이 어떻게 이런 자리에까지 와?”
“오후에 체인트호텔에서 한무협하고 기재부의 합동 간담회가 있었어요. 끝나고 본사로 돌아가는 길에 여기에서 세미나가 있었다길래 차 관장 얼굴 좀 보러 잠깐 들렀죠. 대화 중에 끼어들어서 죄송해요, 누나. 그런데 제가 시간이 별로 없어서.”
“아니야. 백 상무 바쁜 사람인 건 다 아는 사실인데 뭐. 그럼 얘기들 나눠요. 차 관장님, 나중에 봐요.”
상냥하게 인사를 건넨 김 부회장이 눈치 빠르게 자리를 비켜주자, 가식적인 미소를 단숨에 걷어치운 동하가 못내 어이가 없는 목소리를 냈다.
“너희 대표님, 보기보다 엄청 화끈하시더라? G일보 측에 별다른 말도 없이 무작정 광고를 내리겠다고 통보하셨다던데?”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
역공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못한 동하가 순간 멈칫하자, 지원의 눈매가 대번에 가늘어졌다. 김 부회장이야 우연히 지인을 통해 알게 되었다지만, 동하에게는 정보를 획득한 경위를 타당하게 만들어 줄 핑곗거리가 없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김 부회장을 만난 이후로 줄곧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터라 지원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뾰족해졌다.
“너 아직도 가온 씨 뒷조사하냐?”
“아니, 뭐…. 뒷조사라기보다는 평소처럼 경쟁사의 근황을 살피던 중에….”
“경쟁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BS그룹이 화장품도 만드냐?”
“만들긴 해. 팔진 않지만.”
허! 지원은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는 동하를 노려보며 짧게 실소했다. 이게 지금 뭘 잘했다고 꼬박꼬박 말대꾸야? 지원의 호흡이 서서히 거칠어지는 걸 기민하게 감지한 동하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지금 한가하게 지원과 말장난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너 송태윤 의원하고 G일보 사주가 무슨 관계인 줄은 알아?”
“…몰라. 읊어 봐.”
“둘이 같은 조직 출신이야. 진짜로 사람 패고 찌르는 조폭 똘마니 시절에 처음 만나서 형 동생 하면서 지내다가 둘 다 아주 성공적으로 신분 세탁한 케이스지. 처음부터 지금까지 송 의원의 정치 자금은 G일보가 다 대고 있고.”
조폭 똘마니…. 어쩐지 하는 짓이 딱 양아치 같더라니. 어떤 거죽을 뒤집어쓰고 살아도 사람은 결국 근본을 숨길 수가 없는 거지. 경멸의 눈초리를 감추지 못한 지원이 제 눈빛이 사나워지는 걸 자각하고는 황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는 지원의 모습을 빠짐없이 지켜보던 동하가 한결 더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오늘 오후에 G일보 전체가 발칵 뒤집혔었어. 제니스 컴퍼니에서 밑도 끝도 없이 모든 광고를 다 빼겠다고 나오는 바람에. 어리둥절한 임원들이 직접 제니스 본사로 찾아가서 이유라도 알려달라고 사정사정했는데, 너희 대표님이 ‘갤러리 화담의 차지원 관장이 내 약혼자’라고 딱 한마디 하셨대.”
“하하하. 그래?”
“웃을 일이 아니야. G일보 입장에서는 날벼락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고. 다급하게 사방팔방으로 알아보던 중에 송태윤이 걸려 나왔고, 다시는 화담에 개인적으로 접근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나서야 광고 철회 건은 없던 일이 됐지. 그게 정확하게 3시간 안에 벌어진 일이야. 게다가 G일보 회장실로 불려간 송 의원이 재떨이를 맞고 나왔대. 걸핏하면 국회에서도 드러눕는 인간인데, 그 성질에 가만히 있을 것 같아?”
흐음…, 그렇게 된 사연이군. 이제야 전후 사정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 지원이 못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폭하고 얽혔다는 얘기에 이 녀석도 이렇게 사색이 되어서 부리나케 쫓아온 거고. 하하, 귀여운 놈. 반면 동하의 얼굴은 점점 더 굳어졌다.
“너 지금 이게 좋아할 일인 것 같냐? 왜, 너희 대표님이 이렇게 호기롭게 나오시니까 마냥 설레? 너 조폭 출신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그 둘이 지금까지 자기들한테 거슬리는 사람을 몇 명이나 소리 소문도 없이 치웠는지 알아?”
“내가 그런 것까지 알고 싶지는 않고…. 어쨌든 이젠 송 의원이 나를 귀찮게 하지는 않겠네. 속이 다 시원하다. 가온 씨도 참,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하여간 우리 가온 씨는 스케일도 크셔.”
입가에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어쩌지 못하고 있는 지원을 보고 있자니 동하는 그저 기가 막혔다. 얘가 대체 왜 이러지? 진짜로 머리가 비상한 애였는데…. 아무리 사랑에 미쳐도 그렇지, 판단력이 이렇게까지 떨어질 일이야? 수틀리면 다짜고짜 칼부림부터 하는 조폭을 건드려 놓고 무슨 똥배짱으로 이렇게 히죽거리고 있어?
“야, 차지원. 너 병원 가야 되는 거 아니냐? 지금 내 말을 제대로 이해했어?”
“걱정하지 마. 가온 씨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허술한 사람이 아니야.”
“허술하지 않기는 뭐가! 칼 쓰는 조폭한테 돈으로 협박하는 게 정상적인 대응책이야? 그쪽에서도 감히 제니스의 대표를 함부로 건드리지는 않겠지만 넌 다르지. 막말로 너 이러다 밤길에 등 뒤에서 칼이라도 맞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그럴 일 없어.”
지원의 확신에 찬 대꾸에 말문이 턱 막힌 동하는 얼굴을 완전히 일그러뜨린 채 수도 없이 헛바람을 토해냈다. 큰일이네, 진짜. 위기 감각을 완전히 상실했어.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지적을 해야 영민하던 친구가 정신을 차릴지, 동하는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송태윤 의원…, 해결하셨다면서요.”
“아….”
느긋하게 잘 준비를 하던 가온이 나직한 감탄사를 내뱉더니 조심스럽게 지원의 눈치를 살폈다. 내버려 두면 일이 너무 커질 것 같아서 일단 개입을 하긴 했는데, 자존심이 상했을까?
“기분 상했어?”
“아니요. 그럴 리가요. 저야 귀찮게 굴던 인간이 떨어져 나가서 홀가분하고 좋은데, 괜히 가온 씨가 저 때문에 지저분한 일에 손을 담그신 것 같아서 그게 조금 마음에 걸릴 뿐입니다. 이런 일, 여태 한 번도 하신 적 없잖아요.”
지원의 표정을 빤히 쳐다보던 가온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피식 웃었다.
“별로 한 거 없어. 조사는 권 실장이 알아서 해 왔고, 그쪽하고 접촉하는 건 비서실장이 다 했으니까. 내가 한 일은 송 의원의 여러 가지 약점 중에 돈줄을 고른 것 정도?”
“약점이 많은 사람인가 보죠?”
“많지. 아무래도 전적이 있다 보니 폭력 사건에 연루된 것도 한두 개가 아니고, 장관 시절에 저지른 비리는 일일이 다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였어. 그중에서 본인한테 가장 타격이 될 만한 건 선거 자금이겠더라고. 당장 내년 봄에 선거를 치러야 하니까.”
“제 친구가 조폭 출신을 건드렸다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가온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조금 짙어졌다. 안 그래도 지원이 어떻게 이렇게 빨리 정황을 파악했는지 궁금하던 차였다. 딱히 지원에게 비밀을 유지하라는 지시를 내린 적은 없지만, 외부 활동을 마치자마자 귀가한 지원에게는 물리적으로 제 측근들과 접촉할 시간 자체가 없었다. 그런데 백동하라는 복병이 있었군.
“백 상무는 아직도 내가 못 미더운가 봐?”
“죄송합니다. 언제 한 번 날을 잡아서 제대로 타이르겠습니다.”
“그럴 거 없다니까. 차 관장을 그렇게까지 걱정하고 신경 쓰는 친구가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라고 했잖아.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그런 친구가 능력도 있다는 건 더 좋은 일이고. 아무나 쉽게 가질 수 없는 인연이야. 그것도 다 차 관장의 복이니 소중히 여기도록 해.”
“네.”
진지한 얼굴로 당부한 가온이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지원에게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서류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내가 송 의원한테 따로 보낸 자료. 나는 송 의원이 감히 차 관장한테 해코지하지 못할 거라고 확신하지만, 백 상무가 계속 불안해하면 이 자료를 보여줘도 좋아. 입단속을 제대로 할 수 있다면 우리 일에 대해서 조금 설명해도 상관없고. 평생 봐야 되는 친구라면서. 언제까지나 숨기기만 할 수는 없잖아.”
가온이 내민 봉투를 받아서 내용물을 훑어보던 지원이 눈썹을 크게 들어올렸다. 봉투 안에 있는 서류에는 그간 송 의원이 평생에 걸쳐 저지른 온갖 종류의 범죄 행각이 명확한 증거와 함께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다. 심지어는 목격자가 아무도 없어서 기소조차 되지 않았던 40년 전의 폭행 치사 사건에 대한 기록도 있었다.
“이만한 자료가…, 반나절 만에 나올 수 있는 겁니까?”
“내가 마음을 먹으면.”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는 가온을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바라보던 지원이 곧 입꼬리를 크게 올리며 씩 웃었다.
“왜?”
“대표님, 너무 멋있으셔서요.”
지원의 진심 어린 감탄에 묘한 표정을 하던 가온이 아주 미세하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최대한 부끄러워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가온이 너무 귀여워서 지원의 눈꼬리가 절로 휘었다. 광대뼈가 아플 정도로 함박웃음을 짓던 지원이 가온의 허리를 끌어당기자, 그대로 안겨 온 가온이 지원의 가슴에 이마를 콩 부딪쳤다. 그 별것도 아닌 애교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지원은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한 가지만 하십시오.”
“그게 무슨 말이야?”
“멋있든지, 귀엽든지, 하나만 하시라고요. 이렇게 멀쩡한 사람 혼을 빼놓으시면 안 되죠. 아무리 그래도 상도라는 게 있는데, 양 사이드에서 동시 공격을 하시면 제가 어떻게 방어를 합니까.”
“…!”
순간 너무 어이가 없어서 뭐라고 대꾸도 하지 못한 가온이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완전히 질린 얼굴로 간신히 입을 뗐다.
“차 관장은…, 사람이…, 왜 이렇게 뻔뻔해?”
“제가 뭘요? 제가 뭐 없는 소리 했습니까?”
“제발 그 귀, 귀엽다는 말 좀 안 할 수 없어?”
“그럴 수는 없습니다. 웬만한 건 가온 씨가 원하는 대로 들어드리고 싶지만…. 이건 작정하고 하는 말이 아니라 저절로 튀어나오는 말이라서요. 본능적인 거라 의지만으로 조절하기는 어렵습니다.”
지원의 진지한 대답에 경악하던 가온은, 그의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가는 걸 발견하고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퍽 소리가 나게 내리쳤다. 하지만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지원은 나직하게 소리를 내어 웃으며 가온을 더 꽉 끌어안았다. 귀여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고스란히 느껴지는 웃음소리였다.
“이러시는데 어떻게 귀엽다는 말을 안 합니까.”
“정말 누가 들을까 무섭다고.”
“그런 걱정을 하시는 것도 너무 귀여우세요. 이렇게 찡그린 눈썹도 귀엽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주먹질하시는 것도 귀엽고….”
“하아….”
아예 작정한 지원이 점점 더 수위를 높이자, 눈을 질끈 감은 가온이 길게 헛바람을 뱉어냈다. 말로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건 진즉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그야말로 어떤 말도 먹히지 않았다. 고사리 같은 손이라니…. 얼굴이 화끈거려서 차마 제 입으로 되풀이할 수도 없는 말이었다.
“잘래. 갑자기 너무 피곤해졌어.”
그나마 지원의 말문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최대한 빨리 잠자리에 드는 것이다. 대거리를 포기한 가온이 그대로 자리에 누워서 눈을 감아버리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짧게 웃던 지원이 그녀의 숙면을 위해 신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가온의 혈압을 체크하고 조명을 낮춘 지원은, 커튼을 치고 문단속을 하고 온도와 습도까지 꼼꼼하게 확인하고 나서야 가온의 옆에 누웠다.
“편안히 주무세요.”
“차 관장도 잘 자.”
“네. 좋은 꿈 꾸시고요.”
아직도 붉은 기가 남아 있는 가온의 볼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빙긋이 미소를 짓던 지원이 은은하게 빛나던 청사초롱의 전원을 껐다. 도란거리던 목소리가 사라진 공간에 아늑하고도 포근한 어둠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시간이 느릿하게 흐르기 시작했고, 하루 종일 바쁘게 떠돌던 구름도 잠시 쉬어 가겠노라 걸음을 멈췄다. 평화로운 밤이었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이실까. 두툼한 서류를 받아 든 동하가 대단히 할 말이 많은 눈빛으로 지원을 응시하다, 우선 서류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결정했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송태윤 의원의 치부를 읽어 내려가던 동하는 어느 순간부터 자꾸만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BS그룹도 정보 수집에 능한 전문 인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이 자료는 아예 차원이 달랐다.
“뭐냐, 이거?”
“보고도 몰라?”
“제니스 컴퍼니는 대체 뭐 하는 회사길래 로사리움 캐슬 사건 관련 자료가 다 있어?”
몇 년 전에 로사리움 캐슬이라는 고급 빌라에서 은퇴한 여배우 일가 다섯 명이 모두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시신에 남은 흔적으로 보면 다섯 명 모두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것이 분명했는데, 아무리 현장을 뒤지고 주변을 탐문해도 가해자에 대한 어떤 증거도 찾을 수가 없어서 결국 미제로 남은 사건이었다.
가족들끼리 돈 문제로 종종 다퉜었다, 면식범인 사이코패스의 소행이다, 은퇴한 여배우가 아주 높으신 분의 정부였다더라…. 오리무중에 빠진 사건을 두고 이런저런 추측이 난무했지만 끝내 범인에 대한 실마리조차 발견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 자료에 의하면 30대 여배우를 정부로 두셨던 높으신 분이 바로 송태윤 의원이었고, 그가 말다툼 끝에 정부를 살해하고는 화근을 제거하기 위해 목격자까지 모조리 처리했다는 거다. 자료에는 증언을 바탕으로 한 살인의 구체적인 증거들이 첨부되어 있었는데, 그 증언이라는 게 문제였다. 목격자가 다 죽었는데 여기에 적힌 목격자 진술은 대체 누가 어떻게 받은 거지?
“이게 말이 되는 소리야? 죽은 사람이 어떻게 증인이 될 수가 있어? 아니, 이런 허무맹랑한 자료로 송태윤을 협박할 수 있을 것 같아?”
“응.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적어도 송태윤은 이게 사실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야, 차지원.”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을 짓는 동하를 빤히 바라보던 지원이 뭔가를 크게 결심한 얼굴로 수첩을 펼쳤다. 그리고는 아주 빠른 속도로 초상화 한 장을 그려서 동화에게 내밀었다.
“이분 너희 작은 어머니 맞지? 네 사촌들 낳으신 분이 아니라, 네 둘째 숙부의 본처. 너 고3 때 정신병원에서 돌아가신.”
초상화가 그려진 수첩을 보자마자 소리 없이 기함한 동하가 마구 흔들리는 눈동자를 들어 지원을 쳐다보았다. 이 자식이 지금…, 뭐라고 그랬어?
“네가…, 이분 얼굴을 어떻게 알아?”
“내가 직접 봤으니까. 뉴욕에서.”
“…뭐?”
“너 학부 신입생 때 서너 번 정도 죽을 뻔했었지. 교통사고도 났었고, 하숙집 가스관 폭발도 있었고, 멀쩡히 걸어가다가 뚜껑 열린 맨홀에 빠지기도 했고. 네 숙모가 너 데려가려고 뉴욕까지 따라왔었는데, 간발의 차이로 내가 막았어. 너희 할아버님께 복수하고 싶었다던데? 너희 할아버지가 네 숙모를 처음부터 이유도 없이 미워해서 아이도 못 낳게 하려고 무슨 약을 먹이셨다며. 너무 억울해서 자식보다 더 아끼는 장손을 데려가고 싶었대.”
동하의 입가에 작게 경련이 일었다. 지원의 입에서 나온 건 사실과는 꽤나 거리가 있는 말들이었지만, 그래서 더 소름이 끼쳤다. 방금 지원이 한 말은, 언젠가 잔뜩 술에 취한 채로 할아버지의 서재에 쳐들어온 숙모가 악에 받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것과 내용이 거의 흡사했다.
- 이런다고 내가 곱게 죽어 줄 것 같아? 아버님, 저는 혼자서는 안 죽어요. 억울해서 그렇게는 못 죽죠.
- 누가 너더러 죽으라던? 아프면 치료를 받아야 할 것 아니냐. 술을 마실 게 아니라 약을 먹어야지.
- 그 약에 나 몰래 뭘 탔을 줄 알고! 이대로 제가 죽으면 그렇게 목숨처럼 아끼시는 장손, 멀쩡히 명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으세요? 흥, 내가 귀신이 되어서라도 데리고 갈 건데?
그 자리에 있었던 누군가가 말을 흘렸을 가능성은 0%에 가깝다. 그렇다면…, 이런 얘기를 정말로 죽은 사람한테 직접 들었다는 거야? 혼란스러워하는 동하를 가만히 응시하던 지원이 침착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물론 그 말을 내가 다 믿는 건 아니야. 망자들은 원래 거짓말도 잘하고, 특히 네 숙모는 정신이 온전한 것 같지는 않았거든. 시선을 3초 이상 한곳에 두질 못했었고, 손을 계속 떨고 있었어. 약물 같은 것에 영향을 받을 수 없는 망자가 그런 행동 양상을 보인다는 건, 생전에 아주 오랫동안 알코올 중독자로 살아왔다는 얘기거든. 습관이라는 게 그래서 무섭지.”
동하의 손에 아슬아슬하게 들려 있던 수첩이 결국 탁자 위로 툭 떨어졌다.
“그 사고들이…, 진짜로 우연이 아니었다고?”
“그래.”
“정말로 숙모가 나를 저승길로 데리고 가겠다고 뉴욕까지 쫓아왔어?”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나한테는 그렇게 얘기했었어. 너한테 물리적인 공격을 가한 건 확실하게 팩트고. 그걸 내 눈으로 봤기 때문에 지금 네가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는 거야.”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쥔 채 한참 동안 앓는 소리를 내던 동하가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몹시 복잡한 눈빛으로 지원을 바라보았다. 물론 지원의 말이 다 믿어지진 않았다. 하지만 제가 아는 지원은 결코 이런 식의 헛소리를 농담이랍시고 지껄이는 성격이 아니었다. 적어도 본인은 이 모든 걸 진실이라고 믿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네가 귀신을 본다고? 대체 언제부터?”
“아마도 태어났을 때부터.”
더구나 지원이 들고 온 자료의 범위는 일개 개인이 취득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엄청난 노동력과 자금력을 들이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자료였고, 심지어는 국가 기관의 대외비 도장이 찍힌 문서도 있었다. 이제는 그동안 적당히 덮어 두었던 제니스 컴퍼니의 정체를 제대로 따져봐야 할 시점이었다.
“그럼…, 너희 대표님은 대체 뭐 하시는 분이냐? 제니스 컴퍼니가 그냥 평범한 화장품 회사야?”
“정말로 듣고 싶어?”
“장난하냐? 이렇게까지 사람을 들쑤셔 놓고? 나 진짜로 뚜껑 열리기 전에 육하원칙, 기승전결, 다 갖춰서 설명해라. 1부터 10까지 하나도 빼놓지 말고.”
크게 한숨을 한 번 내쉰 지원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더없이 심각한 얼굴로 중천의 시스템에 대해 설명을 듣던 동하는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고요한 것 같지만, 아마도 지금 그의 머릿속은 엄청난 속도로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동하가 생각을 정리할 때까지 여유롭게 기다리던 지원은 그가 사납게 눈을 치켜뜨자 내심 조금 움찔했다. 물론 겉으로 티가 날만큼은 아니었다.
“와아. 차지원, 이 음흉한 새끼야. 너 이 자식, 어떻게 나한테 10년 동안이나 이런 걸 비밀로 할 수가 있냐?”
“알아서 좋을 거 없는 얘기잖아. 네가 가온 씨 뒤를 캐지만 않았으면 평생 말 안 했을 거야. 사실은 지금도 네가 알게 된 게 썩 탐탁지는 않아.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이게 되어 있다고. 어차피 알게 될 거라면 차라리 내 입으로 얘기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말을 하긴 했지만.”
“뭐, 다 좋아. 솔직히 아직까지는 반신반의하는 상태이긴 한데…. 어쨌든 네 말을 100% 팩트라고 가정하고. 일단 지금 제일 이해가 안 되는 거. 송태윤을 왜 내버려 두는 건데? 이런 쓰레기는 사회에서 격리해야 하지 않아? 죽은 목격자의 진술 같은 거야 법정에서 증거로 쓸 수 없겠지만, 워낙 다른 물증이 많아서 조금만 손보면 충분히 무기징역도 때릴 수 있겠는데?”
동하의 의문은 사실 중천주의 존재를 아는 세상의 많은 이들이 그간 수없이 던져 왔던 질문과 동일했다. 왜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 자가 인간 사회의 정화를 위해 힘쓰지 않는가. 그 이유는 언제나 간결하고도 명확하다.
“중천주는 망자를 심판하는 자리니까. 인간사에 끼어드는 건 중천주의 권한 밖이지”
“그래서 인간의 일에는 전혀 간섭하지 않는다고? 이렇게까지 명백한 범죄의 증거가 있어도?”
“원칙적으로는. 망자가 인간에게 해를 끼치거나, 아니면 반대로 인간이 명계의 일에 간섭하거나 하는 경우에만 관여하셔.”
망자…, 명계…. 제게는 여전히 낯설기만 한 단어들을 지원이 어찌나 자연스럽게 구사하는지, 동하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여서 조금 오싹한 기분까지 들 정도였다. 게다가 그가 지금 하고 있다는 일은 사람을 더욱 기가 막히게 했다.
1년이 다 되도록 나한테 말 한마디 없이 저승사자 노릇을 하고 있었어? 독한 놈. 입이 가벼운 놈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허탈한 얼굴로 헛웃음을 토해내던 동하는 언젠가 지원이 가온에 대해 아주 추상적이고 불친절하게 설명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 대표님이 아주 중요한 임무를 하나 맡으신 게 있는데…. 우리의 십 년 우정을 걸고, 공익을 위하는 일이라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어.
하, 공익을 위하는 일. 말이 좋다. 무슨 거국적인 첩보 작전 따위에나 투입된 건가 했더니…. 중천주…? 이건 뭐, 너무 거창해서 뭐라고 말을 보태야 할지 모르겠네. 그나마 간첩이 아니었다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어떻게든 납득을 해 보려고 노력하던 동하가 문득 한 가지 의문을 제기했다.
“아니. 그럼 이런 쓸데없는 자료는 대체 왜 만든 건데?”
“이건 나 때문이지. 송태윤이 자꾸만 나를 귀찮게 하니까.”
기업가로서 효용의 문제를 지적하던 동하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얼굴을 하는 지원을 보며 입매를 확 비틀었다.
“중천주는 이런 일에 끼어들지 않으신다며.”
“이건 중천주가 아니라 제니스 컴퍼니의 대표로서 하신 일이지. 나는 재벌 애인 둔 덕을 톡톡히 보는 거고.”
순간 지원의 뻔뻔함에 경악을 금치 못한 동하가 눈을 뾰족하게 뜨며 두툼한 서류 뭉치를 탁자 위에 팡팡 내리쳤다.
“이야, 이 새끼 낯짝 두꺼워진 것 좀 봐? 네가 무슨 양귀비냐? 높으신 분하고 놀더니 경국지색 다 되셨어, 어? 너 이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만 만들 수 있는 자료인지 알아? 그걸 알맹이만 홀랑 받아서 한입에 털어 넣고는 뭐가 어째? 재벌 애인 둔 덕을 봐? 너 고고한 놈이었잖아.”
물론 동하의 비난은 대부분 사실에 근거한 것이긴 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차지원은 정도 이상의 공격을 얌전히 들어 넘길 위인이 아니었다. 어쨌든 본의 아니게 친구를 속인 꼴이 되었기에 가급적 유하게 넘어가려던 지원이 대번에 낯빛을 바꾸고는 목소리를 한껏 높였다.
“너 지금 뭐라고 했냐? 경국지색? 내가 얼굴로 애인을 홀려서 회사를 말아먹든 팔아먹든, 네가 왜 발끈하고 지랄이야? 아아…, 너도 숱하게 다른 사람 뒤를 파다 보니까 남의 일 같지가 않아서? 그 고생이 아주 절절하게 느껴지나 보지?”
“…뭐?”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네 비서가 내 휴대폰 사진첩의 비밀 폴더도 털어갔더라? 아주 MI6 뺨치시던데?”
“…!”
그건 또 어떻게. 지원은 말문이 턱 막혀서 눈만 끔뻑이고 있는 동하를 노려보며 시원하게 비웃음을 날렸다. 세상에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전부가 아니야. 그 위에는 순간이동을 하는 놈도 있다는 걸 알아야지.
“BS그룹이 아무리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기업이라도, 이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제니스 컴퍼니의 발끝도 못 따라가. 정보 수집 쪽으로는 역사가 깊거든. 너는 쥐도 새도 모르게 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네가 제니스를 한 번씩 쑤실 때마다 어떤 정보를 빼 갔는지 거의 실시간으로 대표님한테 보고가 올라가. 물론 네가 건질 수 있었던 자료는 항공기 이용 내역 정도가 고작이었겠지만.”
입을 떡 벌린 채 석상처럼 굳어 있던 동하가 정신을 차리기 위해 손에 조금 힘을 주어 제 뺨을 내리쳤다.
“그걸 알면서도 여태 가만히 있었다고? 대체 무슨 똥배짱이야?”
“가온 씨는 너 같은 좀팽이와는 달리 대인배시니까.”
“좀팽이…! 너 지금 말 다 했냐?”
“아니, 아직 남았어. 내가 십 년 우정까지 걸었는데도, 너는 나를 안 믿었지. 네가 펜타곤을 뚫었던 해커 그룹까지 고용한 걸 뻔히 아시면서도 가온 씨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그 정도로 나를 걱정하는 친구가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니까 그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라고 하셨다고. 내가 참…, 민망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더라.”
왠지 대단히 억울한 기분이 들었지만, 마냥 떳떳하지 못했던 동하는 그대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지원의 교묘한 화제 전환에 말렸다는 것을 깨달은 건 애석하게도 그와 헤어지고 한참이 지난 후였다. 그 ‘가이드’라는 게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 건지, 위험하진 않은지, 세세하게 캐물었어야 했는데 이야기가 다른 데로 새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하여간 용의주도한 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동하가 짧게 코웃음을 치더니 휴대폰을 들어 단축번호 하나를 길게 눌렀다. 뭐, 어차피 들켰으니 이젠 대놓고 해도 되겠지.
“납니다. 지금 바로 제니스 컴퍼니의 직원 명부를 확인해서, 차지원 관장이 소속되어 있는 부서가 어딘지 확인해 봐요. 아주 자세하게.”
[서 감독, 너 지금 뭐 해? 바빠?]
“왜?”
[안 바쁘면 지금 바로 가평으로 올 수 있어? 아니, 바빠도 좀 와 주라. 건반 세션맨이 촬영 직전에 펑크를 냈는데, 여기 카페 빌린 곳은 내일 새벽까지 정리해야 해서 다른 사람 데려다가 연습시키고 어쩌고 할 시간이 없어. 얼굴은 절대로 안 나오게 찍을 거고 손만 딸게, 응?]
작업실에 죽치고 앉아서 로아의 기사나 검색하고 있던 도겸은, 이서의 다급한 전화에 앞뒤 가릴 것 없이 벌떡 일어나서 차 키부터 챙겼다. 요즘 굉장히 바빠진 로아는 내일 새벽에 드라마 촬영이 끝나면 광고를 찍으러 바로 발리로 날아가야 했기 때문에, 이 기회를 놓치면 앞으로 나흘간은 실물을 볼 수 없다.
“나 지금 꼬락서니가 엉망이야.”
[거지꼴을 하고 있어도 상관없어! 너 있는 쪽은 풀 샷도 안 잡을게. 손만 찍는다니까? 이거 내일 저녁에 방영될 장면이라 오늘 못 찍으면 방송 사고라고. 도겸아, 누나 좀 살려 줘. 응?]
“그래도 드라마는 좀 부담스러운데….”
느긋한 말투와는 달리 도겸의 발은 이미 계단을 빠른 속도로 달려 내려가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서 코트는 입지도 못하고 덜렁덜렁 손에 든 채였다. 아, 오늘 시커먼 패딩 쪼가리나 입고 나오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야, 서도겸! 너 내가 이렇게 부탁하는데!]
“알았어, 알았어. 주소 보내. 지금 갈게.”
비죽이 올라가는 입꼬리를 굳이 감추지 않은 도겸은 서둘러 시동을 걸고는 이서의 메시지가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알고 있던 촬영장의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했다. 예상 소요 시간 57분…. 한 시간만 있으면 로아 씨 얼굴을 볼 수 있다 이거지. 평소에 그다지 표정이 다채롭지 않던 도겸이었지만, 지금은 누가 봐도 기분이 좋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는 얼굴이었다.
“아이고, 서 감독님! 어서 오세요! 밤길 운전하기 어려우셨죠? 보니까 눈도 조금씩 내리던데요.”
“아닙니다. 괜찮았습니다.”
겨우 안면만 익힌 조연출의 극진한 환대를 받으며 복작복작한 카페 안으로 발을 들인 도겸은 선우와 마주 앉아 대본을 맞춰 보고 있는 로아를 발견하고는 히죽거리지 않기 위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아직 목소리도 듣지 못했지만,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이미 너무 좋았다.
“오늘 찍을 곡은 <소원>이에요. 노래 만드신 분이니까 당연히 잘 아시겠지만, 그래도 본 촬영 들어가기 전에 잠깐 손은 푸셔야 되겠죠?”
“네, 한 번만 쳐보겠습니다.”
건반 앞에 앉아서 가볍게 손을 턴 도겸이 슬쩍 로아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저와 시선을 마주치지도 못한 로아가 얼굴에 열이 오르는지 파닥파닥 손부채질을 하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절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계속 이를 사리물고 있었더니 턱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음원을 그대로 틀어놓은 것 같은 전주가 흐르자, 소란스럽던 카페 안이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도겸의 유려한 연주에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지만, 그중 가장 크게 감동을 받은 사람은 단연 로아였다. 그의 연주와 노래가 함께 담긴 파일을 가지고 있지만, 라이브가 주는 울림은 또 달랐다. 멋있어…. 선우와 대사를 연습하고 있는 중이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연주에 집중하던 로아는 제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손길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로아 씨.”
“네, 선배님.”
“내가 참견할 일이 아니긴 한데…. 여자가 남자를 그런 눈으로 쳐다보면 둘이 사귀는 걸 사람들이 아는 건 시간문제일 것 같은데?”
“…네?”
놀란 토끼 눈이 된 로아에게 씩 웃어 보인 선우가 조언 몇 마디를 건네려고 로아 쪽으로 좀 더 몸을 기울였을 때였다. 쾅! 갑자기 건반을 세게 내리친 도겸이 서늘한 얼굴로 저를 노려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선우가 항복을 선언하듯 양손을 슬쩍 들어 올리며 신속하게 몸을 뒤로 물렸다. 다른 사람이라면 하는 짓이 괘씸해서라도 일부러 더 약을 올렸겠지만, 안타깝게도 상대는 미래의 처남이었다.
새끼, 성질은. 누가 강이서 동생 아니랄까 봐. 인마, 나는 이로아한테는 관심 없어. 내가 네 누나랑 만나는 거 너도 뻔히 알잖아. 쯧쯧. 어린 것들. 무슨 중학생도 아니고, 연애하는 걸 이렇게까지 티를 내야 되나. 저를 한심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선우가 제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다 알아들었지만, 도겸의 굳은 표정은 바로 풀리지 않았다.
“서 감독님, 괜찮으세요? 갑자기 왜 그러세요?”
“죄송합니다. 손이 미끄러졌어요. 연습은 이 정도면 됐습니다.”
“그래요? 그럼 바로 촬영 들어가도 괜찮으시겠어요?”
“네.”
“막내야, 가서 감독님 모시고 와라. 준비 다 끝났다고 말씀드려.”
“네!”
다행히 촬영은 순조로웠다. 가수의 꿈을 키우던 여자 주인공이 처음으로 동네 카페에서 작은 무대를 선보이는 장면이었는데, 오디오는 음원으로 대체할 예정이기 때문에 잡음이 들어가는 것도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연주 장면은 NG 없이 마무리되었고, 덕분에 시간에 쫓기던 촬영장에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30분 후에 다음 신 들어가겠습니다. 카메라 세팅 다시 해 주세요.”
“로아 씨, 우린 그럼 밖에서 대본 좀 맞춰 볼까요? 여기 너무 소란스럽고 답답하네. 공기도 건조하고.”
도겸에게 의미심장하게 눈짓하며 로아를 데리고 나간 선우는 카페 테라스에 놓인 벤치에 앉더니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냈다. 그리고는 쭈뼛거리며 따라 나온 도겸에게 와서 앉으라고 고갯짓을 했다.
“아예 자리까지 비워주고 싶지만, 그러면 이런저런 말이 나올 것 같네요. 좀 답답해도 오늘은 이렇게 얘기 나눠요. 이 드라마를 마지막으로 은퇴할 생각이 아니라면 당분간 또 다른 스캔들이 나는 건 조심하는 게 좋아요.”
“왜 이렇게까지….”
“서도겸 씨가 강 PD님 동생이니까. 나 원래 남자한테 이렇게 친절한 사람 아니에요.”
딱히 너희가 예뻐서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하는 게 아니라고. 아예 몰랐으면 몰라도, 하필이면 내 눈에 훤히 보였으니까 강이서 얼굴을 봐서 도와주는 것뿐이지. 내내 미약한 불쾌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던 도겸이 그제야 조금 겸연쩍은 얼굴을 했다. 이 사람 누나 좋아했었지, 참. 아까는 순간 눈이 돌아서 미처 그 생각이 안 났어.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크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누나하고 뭔가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최소한 행방은 가르쳐드릴 수 있어요.”
“아…, 그건 말만 들어도 벌써부터 고맙네요. 서도겸 씨 누님은 가끔씩 잠수를 타서 사람 속 뒤집는 게 취미인 여자라.”
대단히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도겸에게 악수를 청한 선우가 이어폰을 귀에 꽂고는 가급적 시끄러운 노래를 골라 재생시켰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두 사람의 대화에 신경을 쓰지 않겠다는 듯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벤치에 등을 기댔다. 비로소 로아와 마주 보게 된 도겸은 생글생글 웃고 있는 로아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눈꼬리를 접었다. 옆에 사람을 두고 연애질을 해야 하는 게 조금 낯간지럽긴 했지만, 그런 걸 다 감수할 만큼 좋았다.
“저녁은 먹었어요?”
“네, 삼각김밥이요. 감독님은요?”
“나도 뭐, 대충…. 춥지 않아요? 눈이 그렇게 많이 온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새 좀 쌓였네요. 여기는 확실히 서울보다 북쪽이라 그런가.”
“아까는 공기가 좀 싸늘하다 싶었는데, 지금은 추운 줄 모르겠어요.”
그러게. 신기하게도 바람이 이렇게 부는데 하나도 춥지가 않네. 로아의 발그레한 볼을 빤히 쳐다보던 도겸이 코트를 벗어서 그녀의 어깨에 둘렀다. 그러자 셔츠 바람이 된 도겸을 본 로아가 화들짝 놀라며 그를 만류했다.
“입고 계세요. 저 정말로 하나도 안 추워요. 안에 핫팩도 여러 개 붙였고…. 이러다 감기 걸리면 어쩌시려고….”
“괜찮아요. 감기가 걸리더라도 내가 걸려야지, 드라마 주인공이 코맹맹이 소리를 낼 수는 없잖아.”
“정말 괜찮은데….”
“나를 위해서라도 그냥 이대로 있어요. 지금 또 눈이 오잖아요. 로아 씨가 나랑 밖에서 이러고 있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나 누나한테 맞아 죽어요.”
그건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라고 판단했는지 로아는 도겸을 더 말리지 못했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흩날리는 눈송이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불현듯 눈을 조금 크게 뜬 로아가 화단 구석을 가리켰다.
“저기 좀 보세요, 감독님. 수선화가 피어 있어요.”
“그러네. 저게 원래 겨울에 피는 꽃인가?”
“그건 잘 모르겠지만…. 감독님하고 이렇게 같이 꽃을 보고 있으니까 너무 좋네요. 참 예뻐요.”
“이 정도로 감동받지 말아요. 봄이 되면 제대로 꽃구경시켜 줄 테니까. 여름이 되면 물놀이도 하고, 가을이 되면 단풍놀이도 가고.”
그렇게 조곤조곤 몇 마디를 나눴을 뿐인데, 거짓말처럼 30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막내 PD가 이제 곧 촬영이 시작된다며 배우들을 찾으러 왔을 땐, 두 사람 모두 진심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금세 풀이 죽은 로아가 미적미적 걸음을 떼는 걸 마냥 안쓰럽게 지켜보던 도겸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로아의 얼굴이 눈에 밟혀서 이대로는 도저히 서울로 돌아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로아 씨, 내일 새벽에 공항까지 뭐 타고 갑니까.”
73개의 통로를 소멸시킨 후에도 조사를 게을리하지 않은 각국의 보안실 직원들은 의심스러운 장소 30여 곳을 추가로 발견했다. 그중 24곳에서 통로의 존재를 확인했기에 가온은 모레부터 다시 장거리 출장길에 올라야 했다. 그 모든 출장 일정에 지원이 동행하기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상급 가이드들에게 배분된 업무의 조정이 불가피했다.
그런데 왜 요즘 상급 회의를 계속 무영당에서 하는 거지? 각자 집에서는 본사가 훨씬 더 가까운데. 문득 떠오른 의문에 고개를 갸웃하며 무영당에 도착한 해수는, 사랑채 안에 도겸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는 걸 보고는 몹시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시간 약속에 칼 같은 차지원이 저보다 늦게 오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왜 형 혼자 있어? 지원이 형은?”
“하암…. 대표님 모시러 갔어. 오늘 좀 늦게까지 주무시나 봐.”
실은 두 사람 모두 아직 별채에서 나오지 않은 거였지만, 도겸은 차마 상사의 적나라한 침실 사정을 떠벌릴 수가 없어서 대충 둘러댔다. 그러면서 슬쩍 해수의 표정을 살피니 다행히도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는 눈치였다.
“별일이네? 대표님이 늦잠을 다 주무시고. 요새 컨디션이 별로 안 좋으신가?”
“글쎄. 최근에 좀 무리하시긴 했지.”
“우웅. 마음이 너무 안 좋다. 대표님도 이제 늙으시나 봐.”
“해수야, 너 그런 말….”
가능하면 지원의 앞에서는 하지 말라고 당부하려던 도겸이 한숨을 폭 내쉬고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하지 말란다고 말을 들을 연해수도 아니거니와, 집요하게 이유를 설명하라고 물고 늘어지면 그것도 심히 골치 아픈 일이다.
“그런데 형은 또 왜 이렇게 다 죽어가는 얼굴이야? 하품을 대체 몇 번이나 하는 거야. 밤에 잠 못 잤어?”
“응.”
“왜? 로아 누나 만났어?”
“….”
촬영은 새벽 4시가 넘어서 끝났고, 1분이라도 더 로아와 같이 있고 싶었던 도겸은 그때까지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그녀를 인천공항까지 데려다주었다. 가평에서 공항까지 가는 1시간 반은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새였는데, 공항에서 무영당까지 오는 50분은 그렇게 길고 지루할 수가 없었다. 운전하는 동안 졸지 않으려고 얼마나 허벅지를 꼬집어 댔는지 아직도 얼얼할 정도다.
“우와, 이제 같이 밤도 보내는 사이인가 봐? 히히, 엉큼해.”
“그런 거 아니야, 인마. 엉큼한 건 너지. 어린 것이 대체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눈 곱게 안 떠?”
“부끄러워하기는.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웬 내숭? 아무튼 형은 로아 누나랑 사귀는 거 다 내 덕인 줄이나 알아.”
“그게 왜 네 덕이야? 내가 너보다 훨씬 더 먼저 만났는데?”
“연애가 무슨 선착순도 아니고, 먼저 만난 게 대수야? 내가 형한테 로아 누나 양보한 거야. 다른 사람이었으면 정정당당하게 경쟁했을 텐데, 형이니까 내가 깨끗하게 물러난 거라고.”
아침부터 이게 무슨 개소리야? 완전히 뜨악한 표정을 지은 도겸이 대놓고 헛웃음을 쳤다. 경쟁이라니! 내가 이런 천둥벌거숭이랑 여자를 사이에 두고?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어처구니가 없었다. 심지어 해수는 제법 진심인 것처럼 보여서 더 기가 막혔다.
“해수야, 사실 관계는 확실히 하자. 네가 양보고 뭐고 하기 전에, 우리는 이미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어. 그러니까 너 어디 가서 그런 헛소리하고 돌아다니지 마라, 응?”
“세상에 영원한 게 어딨어? 사랑은 변하는 거야.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별도 하고 이혼도 하고 그러지. 내가 작정하고 덤볐으면 뺏을 수도 있었다고.”
해수의 당당한 주장에 반박의 의지를 상실한 도겸이 한껏 미간을 찌푸리며 성의 없이 손을 내저었다. 안 그래도 잠을 못 자서 머리가 멍한 상태라 해수의 집요함이 너무 버거웠다.
“그래, 양보해 줘서 아주 눈물 나게 고맙다.”
“그럼 나 언제 만나게 해 줄 거야?”
“네가 로아 씨를 왜 만나?”
“뭐야, 로아 누나는 내가 양보했으니까 다른 사람이라도 소개시켜 줘야지. 그러지 말고, 형. 로아 누나한테 나 소개팅 좀 시켜달라고 해줘. 응? 나도 연예인 좀 만나보자, 응?”
“이 자식이 진짜….”
슬슬 진짜로 짜증이 나려는 찰나, 사랑채의 문이 활짝 열렸다. 만약 가온과 지원의 등장이 1분만 더 늦었다면, 도겸은 비폭력주의자라는 정체성을 포기하고 해수의 뒤통수를 있는 힘껏 후려쳤을 것이다.
“대표님! 요즘 엄청 피곤하시다면서요? 세상에, 진짜로 안색이 너무 안 좋으세요.”
강아지처럼 쪼르르 달려간 해수가 너무나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가온의 손을 덥석 잡자, 이번에는 지원의 눈썹이 위로 크게 휘었다. 일촉즉발의 순간, 해수를 두 번째 위기에서 구한 것은 보안실장의 전화였다. 너 조금 있다가 두고 보자. 강렬한 시선으로 해수를 노려본 지원이 일단 전화를 받았다.
“네, 실장님. 네. 옆에 계십니다. 바꿔드리겠습니다. 대표님, 전화 받아보시죠. 보안실장입니다.”
“응. 권 실장, 나야.”
나른한 얼굴로 전화를 받던 가온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끔찍한 비명 소리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얼핏 들어도 한두 명이 내는 소리가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큰일 났습니다, 대표님. 지금 중천에 명계를 탈출한 망자가 나타났는데, 난동을 부리면서 저희 직원들을 마구 공격하고 있습니다! 다친 사람이 벌써 스무 명이 넘습니다!]
“지금 가.”
더 들을 것도 없이 사랑채를 박차고 나가려던 가온이 다급하게 덧붙이는 현호의 말에 우뚝 멈춰 섰다.
[아무래도 아돌프 포카스인 것 같습니다!]
“아돌프…, 포카스?”
가온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아돌프 포카스라면 제 돈벌이를 위해 무려 생목숨 9만 명을 희생시켰던 작자가 아닌가. 고륜지옥에서 수십 년을 굴렀으니 당연히 악에 받쳤을 테고.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던 가온이 크게 한 번 숨을 고르고는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그자가 정말로 아돌프 포카스라면 중천에 있는 보안 요원들로는 상대할 수 없어. 섣불리 공격하지 말고 일단 버티고만 있어. 내가 3분, 아니 2분 안에 가.”
휴대폰을 거의 던지다시피 지원에게 돌려준 가온이 사랑채의 문을 벌컥 열고 달려 나갔다. 그리고는 별채를 향해 전력으로 질주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소랑! 소랑!”
가온과 낡은 은경을 입에 문 소랑이 별채에 도착한 건 거의 동시였다. 마음이 급했던 가온은 소랑이 은경을 바닥에 내려놓자마자 그대로 뛰어들었다. 미처 말릴 새도 없었고, 그럴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가온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는 걸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지원이 살벌하게 표정을 굳히며 사납게 이를 갈았다. 염마왕, 이 개자식을 내가 진짜! 이번에는 또 대체 뭘 풀어 놓은 거야?! 은경 앞에 엎드린 소랑을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지원이 놀란 얼굴로 쫓아온 도겸에게 제 차 키를 휙 던졌다.
“서도겸, 운전해. 나 지금 운전대 잡으면 사고 낼 것 같으니까.”
“네.”
잠이 확 달아난 도겸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길고 고단한 하루가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원주민의 안내에 따라 일곱 시간이 넘게 산을 오르던 브루엘은 아주 작게 틈이 난 동굴 입구 앞에 멈춰 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피사로 교수의 연구팀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이 동굴 내벽에 <코덱스 베루스>의 일부로 추정되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반복되는 단어와 문장 구조를 토대로 그렇게 추측하는 것일 뿐,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언어가 아니라 정확하게 해석할 수는 없었다고 했다.
손전등 하나에 의지해서 햇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동굴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던 브루엘은 드디어 피사로 교수가 말했던 지점에 도착했다. 단단한 벽에 빼곡하게 새겨진 글자를 보고 있으려니, 공포스러울 정도로 몸을 짓누르는 위압감에 탄성이 절로 흘러나왔다.
“주여….”
벽에 새겨진 건 놀랍게도 염마왕이 생전에 쓰던 언어라고 알려져 있는 명계의 공식 문자였다. 그렇다는 건…, 평범한 사람은 절대로 그 뜻을 알 수 없다는 얘기다. 손가락으로 하나씩 짚어가며 더듬더듬 읽어가던 브루엘이 어느 순간부터 손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오, 이런…. 이런…, 안 돼. 전화! 대표님께 빨리 알려드려야 해!”
허겁지겁 동굴을 빠져 나온 브루엘은 통신이 불가능한 상태를 알리는 휴대폰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다 곧 전파가 잡히는 곳을 찾아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엄청난 소동이 벌어지고 있는 중천에 불현듯 미약한 진동이 울리더니 거울처럼 매끈하던 샘의 수면이 크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마치 파도가 치듯 요동치던 물살은 어느 순간 정확하게 반으로 쩍 갈라졌고, 서늘한 표정을 한 가온이 한 손에 환수검을 든 채 그 사이로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소란스럽기 그지없던 중천에 일순 적막이 흘렀다.
가온은 흡사 얼음을 깎아서 만든 것처럼 보이는 날카로운 검을 가볍게 휘두르며 매서운 눈으로 천천히 중천을 둘러보았다. 상처투성이가 된 직원들의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고, 개중에는 꽤 심각해 보이는 부상을 입은 이들도 여럿 있었다. 그리고…, 가온의 예리한 시선이 멈춘 곳에는 보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망자가 한 명 있었다.
“아돌프 포카스.”
생전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른 몰골이었지만, 워낙 치러야 할 죗값이 커서 기억에 아주 또렷하게 남아 있는 얼굴이었다. 중천의 직원들을 향해 막무가내로 폭력을 휘두르던 포카스는, 가온의 나직한 부름에 사시나무 떨듯 몸을 덜덜 떨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손에 쥐고 있는 등편을 내려놓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군데군데 벌겋게 물든 등편을 힐끔 바라보던 가온이 가지런한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고륜지옥에 수감되어 있던 망자가 포청의 관원들이 쓰는 채찍을 들고 중천에 와서 난동을 부린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쉽게 가늠이 되지도 않을 만큼 어마어마하게 긴 형기가 남아 있으니 탈주하여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는다면 또 모를까, 어째서 이런 무모한 짓을 저지른단 말인가. 망자의 입장에서는 인계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 바로 중천인데.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사태에 머릿속이 복잡해졌지만, 가온은 일단 포카스의 주변을 서서히 압박하며 그를 구석으로 몰았다. 어쨌든 더 이상의 피해자가 발생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습하고 무거운 공기에 짓눌려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포카스를 무감하게 내려다보던 가온이 추상같은 명령을 내렸다.
“등편을 내려놓아라. 이미 중천에 발을 들인 이상, 너는 절대로 내 눈앞에서 달아날 수 없다. 순순히 명계로 돌아가겠다면 더는 죄를 묻지 않고 길을 터 주겠다.”
“싫어. 다,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아. 너무…, 아프고 힘들어.”
중천주의 지엄한 명령을 듣고도 등편을 쥔 손에 힘을 풀지 않은 포카스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의 투정을 가만히 듣고 있던 가온이 못내 어이가 없는 얼굴로 짧게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아예 내 손에 칼을 맞고 무저갱으로 가겠다고? 그러려고 기껏 명계를 탈출해서 중천으로 왔어? 이런 어리석은 자를 보았나. 지금 당장 육체의 고통을 피하는 것이 능사가 아닌 것을…. 가만히 한숨을 내쉰 가온이 약간 누그러진 목소리를 냈다. 그가 생전에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과연 반성의 여지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만, 그렇다고 한 영혼이 새로운 삶을 살 수도 있는 기회를 함부로 박탈할 수는 없다.
“그리도 무저갱으로 가고 싶으냐.”
“…!”
제 속을 들킨 포카스가 깜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자, 가온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한숨이 한층 더 깊어졌다. 허옇게 뼈가 드러난 그의 발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지극히 한심하기도 하고 조금은 딱하기도 했다.
“무저갱이 어떤 곳인지는 아느냐.”
“….”
“그곳을 그저 고통 없이 안락하게 지낼 수 있는 휴식처로 알고 있다면 잘못 생각한 것이다. 망자가 무저갱에 한번 발을 들이면 다시는 그곳을 빠져나올 수 없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오로지 정신만이 멀쩡한 채로 영원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곳에선 악몽을 꾸는 것도 사치이고, 죽을 수도 없고 미치지도 못해. 과연 그것이 육체의 고통을 견디는 것보다 나을 것 같으냐.”
가온의 말을 듣고 있던 포카스가 몹시 혼란스러운 눈빛을 했다. 염마왕이 말하던 무저갱과 지금 중천주가 설명하는 무저갱은 비슷한 듯하면서도 많은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수십 년간 너무나도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느라 판단력이 거의 마비된 상태였다. 뭐가 어찌 됐든 고륜지옥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어. 오로지 그 한 가지 생각에만 사로잡힌 포카스가 발악을 하며 채찍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대표님!”
“되었으니 물러서게, 권 실장. 어차피 이자는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해.”
내내 안절부절못하며 가온과 포카스의 대치를 지켜보고 있던 현호가 기함하며 달려오다가, 가온의 만류에 할 수 없이 걸음을 물렸다. 포카스가 휘두르는 채찍의 끝부분이 아슬아슬하게 가온의 옆을 스칠 때마다 심장이 덜컹거렸지만, 감히 가온의 명을 거역하고 제멋대로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조용히, 하지만 거세게 포카스를 압박하고 있는 가온을 초조하게 지켜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현호가 아까부터 계속 울리고 있는 휴대폰에 슬쩍 시선을 주었다. 제게 끈질기게 전화를 걸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브루엘이었다. 하아…, 이 전화도 받긴 받아야 하는데…. 가온의 얼굴과 휴대폰을 번갈아 바라보던 현호가 조심스럽게 뒷걸음질을 쳤다. 행여나 제 목소리가 가온에게 방해가 될까 염려스러워서였다.
한 서른 보쯤 거리를 벌린 현호가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수화기 너머의 상대가 다짜고짜 고함을 쳤다.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습니까! 대표님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지금 중천에 계십니다. 갑자기 나타난 망자 하나가 말썽을 부리고 있어서요.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길래….”
[대표님께 절대로 검 쓰시지 말라고 말씀드리세요! 지금 당장!]
“…네? 아니, 갑자기 그게 무슨….”
[빨리요!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대표님께서 한 번만 더 환수검을 쓰시면….]
어리둥절한 얼굴로 브루엘의 말을 듣고 있던 현호가 달칵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저 평범한 문소리였는데 이상하게 왠지 모를 불길함이 느껴졌고, 불행히도 그 예감은 적중했다.
“이런….”
하필이면 포카스의 바로 옆에 있던 출입구가 열리는 바람에 가온의 결계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포카스가 잽싸게 팔을 뻗어 막 출근하던 판정원의 목에 채찍을 감아 그대로 홱 잡아당겼다. 삽시간에 목이 졸린 판정원이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컥컥거리자, 아주 잠깐 고민하던 가온이 칼자루를 고쳐 쥐더니 포카스를 향해 힘껏 검을 던졌다. 그러자 제 가슴을 관통한 환수검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포카스가 그 자리에서 풀썩 쓰러졌다. 이 모든 것이 불과 10초 안에 벌어진 일이었다.
[권 실장님! 권 실장님! 내 말 듣고 있습니까? 대표님한테 말씀드리셨어요?]
다급하게 묻는 브루엘에게 현호가 뭔가 대답을 하려고 막 입을 여는 순간, 갑자기 엄청난 굉음이 들리더니 마치 대규모의 지진이 난 것처럼 중천 전체가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어수선하던 중천이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잔뜩 겁에 질린 망자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고, 중천의 직원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어떻게든 망자들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대표님!”
잠시 비틀거리다가 간신히 균형을 잡고 선 현호가 기둥에 부딪친 가온을 발견하고는 사색이 되었다. 그녀를 향해 달려가려고 걸음을 떼는 찰나, 또다시 벼락이 내리쳤다.
콰과과광!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과 함께 섬광이 번뜩였다. 너무 눈이 부셔서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 뜬 현호는 중천 한구석에 생긴 커다란 구멍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구멍 너머로는 오한이 들 정도로 섬뜩한 어둠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고, 그 앞에 서 있던 이는 가온을 보며 싱긋 웃었다. 그 해사한 미소를 보고 있으려니 이상하게도 소름이 끼쳤다.
“오랜만이야, 가온.”
“하율. 당신이 어쩐 일이야? 우리가 만나기로 한 건 다음 주 아니었나?”
“그랬지. 오늘은 이자를 데리러 왔어. 명계에 속한 자가 당신한테 너무 크게 폐를 끼쳐서 정말 면목이 없어.”
칼에 맞아 쓰러진 망자를 구멍 너머로 휙 집어던진 하율은 가온과 눈을 맞추며 진심으로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송구스러운 얼굴은 오래가지 않았다. 속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기쁨을 도저히 감출 수가 없었던 하율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하자, 어떻게든 태연하게 굴려고 노력하던 가온이 딱딱하게 입매를 굳혔다.
“그리고 한 가지 알려줄 것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알려줄 것? 그게 뭐지?”
“흐음. 일단 미리 말해주지 못한 건 정말 미안해. 진심이야. 그런데 내 입장에서는 당신을 너무 오래 기다려 왔기 때문에 우리의 미래를 방해할 만한 그 어떤 가능성도 남겨두고 싶지가 않았어.”
우리의…, 미래? 나와 당신이 왜 우리지? 가온의 미간이 일그러졌지만, 하율의 얼굴에 가득 담긴 미소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가온이 과거지사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언제나 속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적어도 오늘만큼은 관대할 수 있었다. 하율은 애정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가온을 바라보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가온. 당신도 익히 알고 있다시피 중천주는 모든 망자를 심판할 수 있고, 그중 갱생의 여지가 없는 영혼은 다시는 인간 세상에 나오지 못하도록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어. 그런데 말이야. 중천주가 행여나 그 권력을 남용할 때를 대비해서 신께서 그 횟수에 제한을 두셨어.”
“제한이 있었다고?”
“그래. 천 년 동안 천 명의 영혼만을 영원히 격리시킬 수 있지. 그 횟수를 넘기면 중천주는 사후에 명계로 떨어지게 되어 있어.”
“…뭐?”
냉랭하던 가온의 얼굴에 커다란 충격이 드리우자 하율은 못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아아…, 언제나 무덤덤하던 당신이 이렇게 놀라는 걸 보고 있으려니까 정말 마음이 아프네.
“그동안에는 함부로 권력을 휘두르는 중천주가 한 명도 없었어. 그래서 그 조항은 유명무실해졌지. 심지어 4대 전의 중천주는 천 년 동안 고작 스무 명을 무저갱으로 보냈었거든. 아,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그들보다 무자비하다는 뜻은 절대로 아니야. 인계에 거하는 인간이 너무 많이 늘어났고, 악령들도 그에 비례해서 늘어났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 당신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억울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그런 건 임기를 시작하기 전에 알려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
“흐음. 나는 분명 악령을 무저갱으로 보낼 때는 심사숙고하라고 얘기했던 기억이 나는데. 여러 경전에도 그와 같은 내용이 쓰여 있었고. 뭐, 횟수처럼 사소한 것들까지 일일이 알려줄 수는 없는 거잖아? 그런 건 이미 신께서 태초부터 말씀을 하셨으니 책임을 맡은 자가 알아서 찾아봐야지. 물론 당신이 그걸 쉽게 발견할 수 없도록 내가 조금 방해를 한 건 부인하지 않겠어.”
뻔뻔하게 대꾸하는 하율을 노려보던 가온이 기가 막힌 얼굴로 헛바람을 토해냈다. 이렇게까지 경우가 없는 자였나? 내가 사람을 잘못 봤군. 경전이라면…. 그래, <코덱스 베루스>. 거기에 쓰여 있었구나. 그래서 염마왕이 그걸 다 찾아서 없앤 거였어. 작게 이를 갈던 가온이 천천히 숨을 고르고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신의 말씀은 확인할 수 있는 문서가 존재할 때만 효력이 있는 걸로 아는데. 내가 보지 못하도록 다 없애놓고, 이제 와서 신의 말씀 운운하는 건 부당하지 않아? 이미 존재하지 않는 책의 내용을 무슨 수로 찾으라는 거야?”
“아, 그래서 내가 인계에 딱 하나를 남겨 두었지. 당신이 거하는 곳 정반대쪽에. 당신의 직원 한 명이 오늘 그걸 발견했어. 공교롭게도 당신이 천 명하고도 한 명을 더 무저갱으로 보내기 직전에 말이야.”
그러니까…, 이미 천 명이 넘는 망자를 무저갱으로 보냈기 때문에 내가 사후에 명계로 가야 하는 건 기정사실이다? 알고 했든 모르고 했든 상관없이? 순간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지만, 가온은 어떻게든 냉정함을 유지하기 위해 입술이 아릴 정도로 힘을 주어 꽉 깨물었다. 진정해.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그래, 일단 나는 아직 죽은 것도 아니고.
충격을 받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 와중에도 그럭저럭 차분한 낯빛을 보이고 있는 가온이 너무나도 어여쁘고 애처로워서, 하율은 눈꼬리를 접으며 흐릿하게 웃었다. 아, 나는 정말 이 여자의 이런 성격이 너무 좋아. 아무리 힘들어도 절대로 다른 사람의 눈앞에서는 무너지지 않으려고 버티고 있는 저 꼿꼿함이 나를 정말 환장하게 해.
시선을 내리깐 채 생각에 잠겨 있는 가온을 몹시 애틋하게 바라보던 하율이, 그녀의 뒤에서 웅성거리고 있는 무리를 발견하고는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작게 고갯짓을 했다. 이것들이 지금 어디서 감히 상전의 사생활에 귀를 세우고 있어? 순식간에 가온의 주위로 결계를 둘러친 하율은 크게 당황해하고 있는 중천의 직원들을 향해 입꼬리를 비죽 올려 보였다. 물론 입가에 매달렸던 비웃음은 가온의 시선이 다시금 저를 향하기 직전에 감쪽같이 사라졌다.
“미안해, 가온. 이건 진심이야. 당신을 계속 속여야만 하는 내 마음도 그리 편하지는 않았어.”
“그 사과는 영원히 받아 줄 수 없어. 그 불편함도 내가 알아주리라 기대하지 마.”
“그렇겠지. 그건 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미간을 확 찡그린 가온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하율을 노려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살면서 누군가의 뺨을 후려치고 싶은 마음이 든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나 하나를 손에 넣으려고 이런 엄청난 소동을 벌이다니…. 그 비뚤어진 연심 때문에 의미 없이 사라진 목숨이 대체 몇인가. 하! 힘이 있는 자가 분별을 잃으니 이런 사달이 나는군. 그건 그렇고.
“그런데 왜 나한테 모든 걸 다 털어놓는 거지? 내 성격을 잘 알 텐데. 이런 일…, 내가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걸 당신은 누구보다도 잘 알지 않아?”
“아…, 너무나도 잘 알지.”
아마도 당신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당신은 먹을거리를 제대로 구하지 못해 배를 곯으면서도, 끝내 내가 주는 멧닭 한 마리도 받아먹지 않았던 여자였으니까. 아주 잠깐 씁쓸한 미소를 짓던 하율이 곧 빙긋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가능하면 나도 끝까지 비밀로 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되면 당신한테 빠져나갈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어. 당신을 명계로 데리고 가려면 일단 당신이 그러한 제한이 있었다는 걸 인지하는 게 전제되어야 하니까. 뭐, 나도 그걸 굳이 오늘 털어놓을 생각은 없었지만….”
“대체 이런 비열한 수를 쓰는 것이 당신한테 무슨 유익이 있어? 내 영혼을 명계로 데리고만 가면 그걸로 족해? 내가 당신을 영원히 저어하고 경멸해도 상관없어?”
가온의 날 선 질문에 줄곧 웃는 낯이던 하율이 표정을 조금 바꿨다.
“그럴 리가 있겠어? 나도 당신이 날 보면서 웃어 주면 좋겠고, 나를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 하지만 당신한테 그저 좋은 사람으로 남는 것과 당신에게 미움을 사더라도 당신과 함께 있는 것, 이 둘 중에서 후자를 고를 수밖에 없었던 것뿐이야.”
하율의 이기적인 언사에 격분한 가온이 불끈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이를 악물었다. 내가 살면서 이렇게까지 분노했던 적이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기억이 없었다.
“돌아가. 더는 말도 섞고 싶지 않아.”
“미안하지만 용건이 하나 더 남았어.”
“….”
저를 맹렬한 시선으로 쏘아보는 가온과 똑바로 눈을 맞춘 하율이 여유롭게 웃으며 비장의 카드를 꺼낼 준비를 마쳤다. 이건 정말 뜻하지 않았던 행운이었는데 말이야.
“당신도 알다시피 내가 살아 있는 사람을 강제로 명계로 데리고 갈 수는 없어. 혹여 데리고 간다 하더라도 억지로 붙잡아 놓을 수도 없고. 다만, 본인이 제 발로 명계행을 택하는 경우에는 얘기가 다르지.”
“그게 무슨 뜻이야?”
“나는 그동안 당신을 기다리면서 내가 가진 인내심을 모조리 쏟아부었어. 덕분에 앞으로 30년을 더 참아줄 만한 인내심이 남아 있지 않아. 특히 다른 남자가 당신의 옆자리를 차지하는 꼴은 정말이지 볼 수가 없거든.”
“그래서?”
“그러니까 지금 나와 함께 가자.”
하율의 경악스러운 제안에 순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못하고 커다란 눈만 끔뻑이던 가온이 서서히 표정을 구기더니 어이가 없는 얼굴로 짧게 웃었다.
“내가 순순히 그러겠다고 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인가? 당신 지금 제정신이야?”
“물론. 정신이 이렇게 맑을 수가 없어. 그리고 나는 당신이 나와 함께 얌전히 명계로 갈 거라고 생각해.”
“대체 무슨 근거로?”
“가온. 이게 뭘까?”
환하게 미소를 지은 하율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나긋한 목소리를 내며 등 뒤로 감추고 있던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바닥 위에 올려져 있는 자그마한 물체를 의아하게 바라보던 가온의 눈이 점점 커다래졌다. 하율의 손바닥 위에서 꼬물거리고 있는 손가락만 한 연약한 생명체는 놀랍게도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태아의 생령이었다.
순간 사색이 된 가온이 저도 모르게 아랫배를 감싸며 애달픈 신음성을 흘렸다. 점점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한 심장이 당장이라도 터져 나올 것처럼 세차게 두근거렸다. 내 아기가…, 분명해. 그런데 왜 내 아기가 하율의 손에…. 아! 아까 기둥에 부딪쳤을 때! 가온의 눈빛이 마구 흔들리는 걸 유심히 지켜보던 하율이 나직하게 혀를 찼다.
“몰랐었나 보지?”
“당장…, 이리 내.”
하율의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지만, 가온은 어떻게든 평정을 유지하려던 노력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떨려 나오는 목소리는 이미 어쩔 도리가 없었고, 후들거리기 시작한 다리는 쓰러지지 않고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긴 세월 동안 별의별 경우를 다 겪어왔지만, 이렇게까지 작은 태아의 생령을 본 건 처음이었다. 불안한 마음에 애간장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저렇게 작은 아기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5분? 10분? 가온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걸 가만히 지켜보던 하율이 조금 냉담한 목소리를 냈다.
“지금 바로 나와 같이 명계로 간다고 하면 돌려줄게. 그러지 않겠다면 아기만 데리고 가고.”
“하율.”
“굳이 명계까지 데리고 갈 것도 없나? 내가 주먹 한 번만 쥐면 간단하게 끝날 텐데.”
“하율…, 제발.”
극심하게 동요하는 가온을 대단히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하율이 바로 표정을 정돈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냉정해야 해. 천재일우의 기회를 잡았으니 괜한 동정심에 마음이 흔들리면 안 되지.
“당신한테 선택권을 줄게, 가온. 당신의 미래와 아이의 생명, 둘 중에 어떤 걸 택하겠어? 당신이 이곳에 남겠다면 아이의 영혼은 이대로 사라지게 될 거야. 하지만 당신이 나와 함께 간다면 아기는 당신에게 돌려줄게. 그리고 혼자 힘으로 살 수 있을 만큼 자라면 반드시 살려서 아이의 아버지에게 보내주겠다고 약속하겠어. 염마왕 하율의 이름으로. 아니, 아예 문서로 남겨주지.”
나…, 어디서 이 비슷한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낯선 익숙함에 가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새하얀 벽에 탁탁 불꽃이 튀며 글씨가 새겨지는 걸 망연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불현듯 전혀 기억에 없던 목소리 하나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 네게 선택지를 줄게. 아이와 아이 아버지 둘 중 하나를 골라. 아이 아버지를 편하게 죽게 해주고 싶다면 네 아이에게 미래는 없어. 하지만 내 처분에 더 이상 토를 달지 않는다면 아이는 살려주지.
순간 아주 선명한 장면 몇 개가 파노라마처럼 삽시간에 눈앞을 스쳐 갔다. 커다래진 눈을 깜빡이지도 못하고 있던 가온의 입에서 낯선 이름 하나가 거짓말처럼 툭 튀어나왔다.
“…하이다르.”
“응, 카울라.”
입꼬리를 크게 올린 하율이 더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부름에 응했다. 처음으로 보는 하율의 소년 같은 미소였다. 마냥 싱그럽고, 또 그만큼 잔혹했다.
“나랑 같이 갈 거지?”
“….”
“자, 이리로 와. 얼른.”
고개를 떨군 채 망설이고 또 망설이던 가온이 할 수 없이 무거운 걸음을 뗐다. 차 관장을 이렇게 두고 갈 수는 없는데…. 내가 이런 식으로 그 남자를 떠나면 안 되는데…. 지원을 생각하면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지만, 당장이라도 하율의 손 위에서 바스러질 것 같은 어린 생명은 도저히 포기가 되질 않았다. 가슴을 가득 메운 절망감 때문에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반면 가온이 걸어오는 모습을 초조하게 지켜보던 하율은, 그녀가 무저갱으로 통하는 통로 안으로 발을 들인 순간 짜릿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드디어…, 내 손에 들어왔어! 가온과 태아의 생령을 단숨에 무저갱으로 날려 보낸 하율이 한껏 고양된 얼굴로 양손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탕! 탕! 탕!
심장이 뜯겨 나가는 것 같은 끔찍한 고통에 헉 소리를 내며 가슴을 감싸 쥔 하율은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화르륵 불꽃을 일으켰다. 정황을 파악할 겨를은 없었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지옥의 불길로 통로의 입구를 봉쇄한 하율이 그대로 연기처럼 자취를 감췄다.
허겁지겁 중천에 도착한 지원은 눈앞을 가로막는 단단한 결계 앞에 서서 눈썹을 치켜올렸다. 뭐야, 이게? 왠지 불길한 느낌에 빠르게 중천을 휘둘러보던 지원은, 얼굴이 흙빛이 된 현호가 제게 달려오는 걸 보고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가온의 모습이 눈에 띄질 않는 것이 아무래도 영 불안했다.
“권 실장님.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대표님은요?”
“큰일 났습니다, 차 관장님! 갑자기 염마왕이 나타나서 대표님을 이 결계 안에 가뒀는데…. 그자가 지금 대표님을….”
탕! 탕! 탕!
갑자기 총성이 울리는 바람에 흠칫 놀란 지원이 재빨리 옆을 돌아보자,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총을 든 해수가 결계를 겨누고 있었다. 바닥에 데굴데굴 굴러다니고 있는 총알은 어이가 없게도 손톱만 한 노란색 스펀지였다.
“너 지금 뭐 하냐?”
“염마왕이 대표님을 결계 안에 가뒀다고 해서요. 그러니까 일단 결계를 없애야 할 텐데, 이건 애들 장난감이라 이 총알로는 타격이 없을 것 같았거든요.”
허,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가볍게 웃음을 흘린 지원이 해수가 내미는 동그란 구슬을 하나 받아들었다. 해수가 스펀지 대신 총알로 사용한 건, 그가 항상 끼고 다니던 팔찌의 구슬이었다. 당연히 싸구려 유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놀랍게도 구슬의 재질은 진한 주황색이 영롱한 카넬리언이었다. 태양의 보석….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샛별이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 비수처럼 일어난 태양의 숨결이 그의 심장을 꿰뚫어 안개처럼 흩어지게 할 것이다….”
“형 갑자기 그게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에요?”
서서히 옅어지는 결계를 응시하며 강렬하게 뇌리에 남은 구절 하나를 중얼거리던 지원이, 시커먼 입구 안에 쓰려져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염마왕을 발견하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해수가…, 염마왕한테 상처를 냈어? 이 장난감 총으로? 굉장히 고통스러워 보이는 표정이던 염마왕은 한순간에 모습을 감췄고,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무시무시한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가온 씨는 어디에 있지? 황급히 돌아가던 지원의 시선이 낯선 문자가 쓰인 벽에 닿았다. 저건 또 뭐야? 눈살을 찌푸리며 가까이 다가가니 언젠가 명계에서 온 문서에 적혀 있던 것과 비슷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권 실장님. 저게 무슨 뜻입니까?”
더듬더듬 읽어 내려가던 현호가 헉 소리를 내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뭔가 엄청난 일이 터졌구나. 파래진 얼굴로 손을 덜덜 떨고 있는 현호를 내려다보는 지원의 눈빛이 살벌하게 빛났다.
[따라서 죽은 자를 인도하는 자가 망자를 어둠의 끝으로 보낼 때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망자의 직전 생은 물론이고 이전의 모든 생의 잘잘못을 낱낱이 가려 도저히 갱생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만 그러한 형벌을 내릴 것이며, 죽은 자를 인도하는 자가 환생의 고리를 영원히 끊어낼 수 있는 목숨의 수는 오직 천 개뿐이다.]
- 7장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