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 붉은 장미 한 송이 (14/18)

13. 붉은 장미 한 송이

소년은 부족 내의 또래 중 가장 힘이 세고 날렵한 아이였다. 사내아이의 골격이 어느 정도 완성되면 바로 사냥에 투입되는 사회였기에 자연스레 포획물 획득에 대한 기여도에 따라 부족 내에서의 위치가 결정되었고, 영민하고 신체적인 조건이 월등했던 소년은 어른들 사이에서 또래보다 훨씬 빠르게 자신의 자리를 확보했다.

더구나 소년은 미모의 모친을 둔 덕에 대단히 빼어난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사냥 기술이 특출한 데다 생김새까지 아름다운 그에게는, 적어도 자신이 속한 부족 내에서는 제 취향에 맞는 여인을 반려로 선택할 수 있는 우선권이 있었다. 때문에 소년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카울라가 언젠가는 제 아내가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이가 차면서 여러 명의 소녀들이 제게 직간접적으로 구혼했지만, 카울라 외의 다른 여인에게 눈을 돌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의 순수한 연심이 박살 난 것은 소년이 처음으로 실전에 나선 또래들을 이끌고 제법 멀리까지 사냥을 다녀온 날이었다. 가정을 이루는 일에 전혀 조급함을 보이지 않던 카울라를 느긋하게 기다리던 소년이, 이제는 슬슬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을 무렵이었다.

- 하이다르, 이상하게 오늘따라 연기가 좀 많이 나는 것 같지 않아?

안 그래도 소년 역시 한참 전부터 뭔가 불길하다고 느끼던 중이었다. 마을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매캐하고 비릿한 냄새가 섞여 있는 것이 아무래도 영 찜찜했다. 생선 몇 마리를 손질하는 정도로는 이렇게 멀리까지 비린내를 풍길 수가 없고, 아직은 불을 피워 저녁 식사를 준비할 시간도 아니었다. 초조한 얼굴로 최대한 걸음을 서두르던 소년은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올라선 순간, 둘러메고 온 사냥감들을 내팽개친 채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경악스럽게도 마을 전체가 불타고 있었다.

- 할머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예요?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조모를 발견한 소년이 다급하게 그녀를 안아 일으키자, 거의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던 노파가 주름진 손으로 손자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몹시 힘겹게 서러움을 토로했다.

- 파와즈…, 파와즈가…. 남자들을 모두…, 죽이고…. 여자들을 끌고….

띄엄띄엄 이어지는 말이었지만 상황을 파악하기에는 충분했다. 간신히 사건의 전말을 전달한 노파는 두어 번 크게 쿨럭이며 각혈하다가 손자의 품 안에서 그대로 숨을 거뒀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사태에 한동안 얼이 빠졌던 소년이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형형하게 눈을 번뜩였고, 그 순간 많은 것들이 변했다.

- 시신을 모두 한군데로 모아. 시체가 썩으면 전염병이 돌 수도 있으니까 최대한 빨리 처리해야 해. 장작을 있는 대로 모두 가져오고.

- 그보다 하이다르! 빨리 파와즈를 뒤쫓아야지! 발자국을 보니까 아직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야. 얼른 쫓아가서….

- 쫓아가서 그다음엔? 우리까지 몰살당하겠다고? 그쪽은 우리보다 싸울 수 있는 인원이 적어도 다섯 배는 더 많은데, 사슴 한 마리 못 잡는 네가 다섯 명을 상대할 수 있겠어? 혼자서는 시신을 옮길 힘도 없을 테니, 너는 잔말 말고 가서 장작이나 모아 와.

싸늘하게 일갈한 소년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허물없는 친구 사이였던 이들에게 거침없이 명령을 내렸다. 족장을 비롯한 어른들이 모두 살해되거나 끌려갔으니, 이제 이 마을의 수장은 당연히 하이마르였다. 서른 명 남짓한 아이들은 모두 소년의 말에 고분고분 고개를 숙였다.

- 일단 마을을 정돈한 후에 복수할 계획을 세우겠다. 내 말에 따르기 싫은 자는 이곳을 떠나도록 해.

생각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초토화된 부족을 이끌게 된 소년은 한순간에 청년이 되었다. 누군가에게 공격을 당하면 죽음을 무릅쓰고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용기라고 여겨지던 시대였지만, 족장이 된 청년은 싸움에 진 개처럼 겁을 먹고 숨었다는 비아냥을 묵묵히 감수하며 반년을 버텼다. 카울라의 안전을 확인할 수 없어 창자가 끊어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지만, 참았다. 그리고는 더없이 신중하고 조용하게 반격을 준비했다.

보복은 당했던 것보다 몇 배나 더 치밀하고 잔혹하게 이루어졌다. 호기롭게 사냥에 나섰던 무리들은 뾰족한 죽창에 몸이 꿰뚫렸고, 마을을 지키던 이들은 산 채로 몸에 불이 붙었다. 그리고 침략을 주도했던 이들은 마을 광장에 묶인 채 죽을 때까지 돌을 맞았다. 파와즈 족 수장의 숨이 완전히 끊어지기까지는 꼬박 닷새가 걸렸다.

- 하이다르, 부탁할게. 어찌 됐건 내 아이의 아버지야. 제발 한 번에 죽여 줘.

- 그럴 순 없어. 원수는 반드시 열 배 이상으로 갚는다는 게 내 신조야. 앞으로는 우리 부족의 좌우명이 될 거고. 그래야 누구도 감히 우리에게 함부로 덤비지 못할 테니까.

동그랗게 배가 나오기 시작한 카울라를 심히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던 하이다르는 그녀의 간청을 단칼에 거절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 혼인을 해 두는 건데. 당시에는 제 속이 너무 상해서, 강제로 적에게 끌려가 임신까지 하게 된 그녀의 심정은 헤아리지 못했다.

- 네 아버지도 네 어머니를 그렇게 끌고 왔었어.

- …뭐라고?

- 초원에서는 다들 그렇게 살았어. 사내들의 힘겨루기에 애꿎은 여자들을 희생시키면서, 여자를 마치 물건처럼 주고받으면서. 나도 저 남자가 치가 떨리게 밉고 싫어. 하지만 나중에 내 아이에게 아비가 돌에 맞아 죽었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아.

목소리 끝이 조금 떨렸지만, 카울라는 끝까지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하이다르는 그런 카울라의 앞에서 참담함 심정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야 했다. 네가 어떻게 내 앞에서 다른 놈의 역성을 들 수가 있어? 게다가…, 나중에? 그러니까 지금 그 아이를 낳아서 장성할 때까지 키우겠다는 얘기네? 나한테…, 기어이 그 꼴을 보라고…. 아아…, 내가 너를 조금만 덜 사랑했더라면 지금 그냥 둘 다 죽여 버렸을 텐데.

- 좋아, 네게 선택지를 줄게. 아이와 아이 아버지 둘 중 하나를 골라. 아이 아버지를 편하게 죽게 해주고 싶다면 네 아이에게 미래는 없어. 하지만 내 처분에 더 이상 토를 달지 않는다면 아이는 살려주지.

입술을 파르르 떨던 카울라가 눈을 질끈 감으며 배를 감싸 안았다. 그 무언의 선택에 쓴웃음을 짓던 하이다르는 작정하고 그녀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스스로가 몹시 치졸하게 굴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지만 제어는 되지 않았다.

- 네가 저자의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선택한 거야. 나중에 네 아이에게 꼭 그 말도 같이 전하도록 해.

파와즈 족을 완전히 멸절하고 돌아온 하이다르는 바로 세 명의 처를 맞이했다. 식량의 대부분을 사냥으로 충당하는 초원에서 여자 혼자 살아가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고, 공격을 당해 남자의 수가 현저히 적어진 부족에서는 그렇게라도 여자들을 부양해야 했다. 하지만 카울라는 제 네 번째 아내가 되라는 하이다르의 제안을 끝끝내 거부했다. 그건 제 아이에게 너무 못할 짓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태생이 그리 건강하지 않던 카울라였지만 그녀는 힘을 다해 아이를 양육했다. 날마다 밤이 새도록 옷가지나 이불 따위를 만들었고, 그걸 소량의 음식과 맞바꾸어 아이에게 먹였다. 보다 못한 하이다르가 남몰래 그녀의 집 앞에 먹을거리를 가져다 두기도 했었지만, 그녀는 그런 그의 도움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강력한 족장이 된 하이다르는 평생을 가족과 부족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서 살았다. 순한 성격의 아내들은 서로 의좋게 잘 지냈고, 아이들은 모두 건강하게 잘 자랐다. 부족은 점차 강성해져서 어느 순간부터는 일대에 더 이상 적이 없었고, 하이다르가 장자에게 부족장 자리를 물려줄 즈음에는 한때 2백 명도 채 되지 않았던 부족원이 만 명 가까이 되도록 늘어났다.

그러나 하이다르의 마음 한구석에 뚫린 구멍 하나는 죽는 날까지 메워지지 못했다. 그때 그자를 편히 죽여주었다면 카울라를 내 여자로 만들 수 있었을 텐데, 하는 후회가 평생 그의 마음을 후벼 팠다. 혼자서 고고하게 나이를 먹어가는 카울라를 먼발치에서 바라볼 때마다 애틋한 마음과 불같은 욕정이 동시에 일어 너무나도 괴로웠다. 급작스럽게 병이 들어 비교적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할 땐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 흐음. 사연이 많은 영혼이네? 쯧쯧, 안타까워라. 이런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었다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없었을 운명인데….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넘어가기에는 다른 이의 목숨을 거둘 때 지나치게 무자비했구나. 아이야, 어쩌겠느냐. 이곳에서 죗값을 치르고 다시 인계로 돌아가겠느냐, 아니면 이곳의 주인이 되어서 영원히 죄인들을 심판하며 살겠느냐. 참고로 한 가지 일러주자면 네가 치러야 할 죗값은 결코 만만하지 않을 것이다.

즉시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섣불리 대답을 하지 못하는 하이다르를 빤히 바라보던 여자가 과장된 한숨을 폭 내쉬었다.

- 이제 인간들이 너무 많아져서 나 혼자 천계와 명계를 모두 감당하기에는 벅차거든. 그대처럼 강인한 이가 명계를 맡아준다면 한결 수월할 것 같은데 말이야. 그대가 이곳에 남기를 선택한다면 세상의 그 어떤 부와 명예와도 비교할 수 없는 권력이 주어질 것이다. 대신 영원히 햇빛을 볼 수는 없지.

- 이곳의 주인이 되면…, 영혼들의 처분을 제가 결정할 수 있습니까?

- 물론. 순리에서 완전히 벗어난 길을 걷는다면 신께서 노하시겠지만, 아무나 쉽게 버틸 수 있는 자리는 아니니 어느 정도의 재량은 당연히 보장받을 수 있지.

- 그럼 하겠습니다.

지옥을 한 바퀴 크게 둘러본 하이다르가 무거운 마음으로 결정을 내렸다. 오직 카울라를 위해서였다. 생전에는 결국 제가 보호하지 못했으니, 만에 하나 그녀가 명계로 떨어진다면 이런 끔찍한 고통에서 건져줄 수 있는 권한을 손에 넣고 싶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는 만 오천 년이 다 되도록 단 한 번도 명계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사무치는 그리움을 제외하면, 명계에서의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작은 부족의 일개 족장이었던 하이다르에게 하나의 차원을 다스린다는 건 사실 꽤나 흥미로운 일이었다. 이집트의 파라오나 로마제국의 황제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의 엄청난 위세를 부릴 수도 있었고, 고운 여인을 취하거나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일도 얼마든지 멋대로 할 수 있었다. 시간은 많았고 사용할 수 있는 능력에는 한계가 없었다.

그러던 그가 한창 예술과 문화가 발달한 당나라 문물에 심취해 있을 때였다. 명계의 모든 절차와 이름을 한자식으로 바꾼 지 5세기 가량 되었을 때, 그는 처음으로 오매불망 그리던 여인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순간 숨이 턱 멎었다.

- 저의가 뭐야.

- 염마왕 하율. 내게 저의 따위는 없어. 나는 언제든 그 어리고 어리석은 아이들 중에서 가장 공정한 이를 골라낼 뿐이야. 후보 셋을 보여주었으니, 이번에는 그대가 선택하도록 해. 그 아이를 중천주로 세우고 싶어?

간신히 잊고 있던 기억이 속을 아프게 찔러대는 그 순간에도 후회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중천에서 온 서신을 받아 든 하율은 오늘 처음으로 염마왕의 자리에 앉은 것을 후회했다.

[중천주의 혼인으로 인해 일정 기간 자리의 공백이 예정된 바….]

탕! 힘이 잔뜩 실린 주먹이 탁자를 거칠게 내리쳤다. 혼인…. 그 애송이와…. 내가 이 꼴을 보려고 햇볕 한 줌 들어오지 않는 지하에서 무려 만 오천 년을 버틴 건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치솟는 분기를 꾹 참아내던 하율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는 사나운 호흡이 담긴 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아, 30년은 어떻게든 참아주려고 했는데. 이건 도저히 안 되겠네.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이를 갈던 하율이 거칠게 옷자락을 휘날리며 침전을 나섰다. 동시에 드넓은 명계 곳곳에 칼날 같은 벼락이 내리치기 시작했다.

“…어디 가?”

“잠깐 물 한 잔만 마시고 오겠습니다. 아직 아침이 되려면 멀었으니까 일어나지 말고 계속 주무세요.”

“…응.”

완전히 잠이 깬 건 아니었는지, 반쯤 떴던 눈을 다시 감은 가온은 곧 고른 숨소리를 냈다. 약간 흘러내린 이불을 끌어 올려 어깨 위로 잘 덮어준 지원이 곤히 잠든 가온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침실을 나섰다. 눈을 붙인 지 서너 시간 정도나 되었을까 싶었는데, 어찌나 달게 잤는지 놀라울 정도로 몸이 가뿐했다.

사실 무영당에서 살기로 결심은 했었지만, 지원은 누군가와 공간을 공유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행여나 불편한 마음이 들까 봐 내심 걱정스러웠었다. 그런데 자다가 문득 눈을 떠서 제 옆에 가온이 자고 있는 걸 확인하면 그렇게 마음이 편해질 수가 없었다. 여기가 바로 내 자리구나. 가득 차오른 충족감 때문에 가슴이 뻐근해질 정도였다.

게다가 원래 잠을 잘 자는 편은 아니었기에 잠자리에 적응하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조금 걸릴 줄 알았는데, 희한하게도 침대에 누워서 뒤척이는 일이 아예 없어졌다. 가온을 품에 안은 채 그녀의 호흡이 느릿해지는 걸 듣고 있으면, 언제 눈을 감았는지도 모르게 잠이 들곤 했다. 별다른 마음의 준비 없이 얼떨결에 눌러앉았지만 이대로 충분히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려했던 불편함은 거의 느낄 수가 없었고,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행복했다.

그래도 오늘은 집에 잠깐 들러야겠지. 이제 입을 옷도 없고. 그러고 보니까 내가 여기에서 꼬박 사흘이나 있었구나.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게 바로 이런 말이었어. 쯧, 이렇게 살다 보면 30년도 눈 깜짝할 사이에 후딱 지나가겠네.

나직하게 혀를 차며 거실을 가로지르던 지원이 코끝을 간질이는 기분 좋은 향취에 걸음을 멈췄다. 가만히 서서 숨을 크게 들이쉬니 향긋한 국화꽃 향기가 몸 안에 가득 퍼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제 오후까지만 해도 손톱만 한 봉오리들이 올망졸망 올라와 있던 소국이 밤새 꽃을 피운 모양이었다.

“호오.”

대청마루로 나가는 문을 연 지원이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일단 진하지만 무겁지 않은 향기가 사방에 가득했고, 노랗게 핀 소담한 국화는 흐릿한 달빛 속에서도 고아한 자태를 양껏 뽐내고 있었다.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는 광경을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던 지원이 짧게 헛웃음을 지었다.

뭐야, 나 이런 고풍스러운 분위기 좋아했었네. 굉장히 모던한 게 취향인 줄 알았었는데…. 이게 또 이렇게 심장을 바로 때리네. 물을 마시러 가는 중이었다는 사실도 잊은 채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던 지원은 불현듯 들려오는 바스락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달밤에 꽃구경이라…. 생각했던 것보다는 낭만이 있네.”

“소랑.”

달빛을 받아 새하얗게 빛나는 늑대까지 등장하자, 안 그래도 꿈결 같던 풍광이 완전히 현실감을 잃었다. 반년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신랄한 늑대와 말을 섞으면서 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었는데. 이야, 털에 윤기 흐르는 거 봐라. 아무튼 생김새는 그럴싸하단 말이야. 한 폭의 환상화를 감상하는 기분으로 소랑을 응시하던 지원이 가급적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어쨌든 이제부터는 한집에 사는 식구이니 굳이 관계를 망칠 필요는 없다.

“국화 향이 좋길래.”

“주 대표는?”

“주무시지.”

“그래…, 요새는 잘 자는 것 같더라.”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소랑이 지원의 단정한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리더니 뭔가 대단히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순간 어떻게든 상냥함을 가장하던 지원도 대번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불과 1분 전의 다짐이 무색했지만, 애초에 지원은 누군가에게 대충 져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왜 사람 얼굴을 보면서 한숨을 쉬어?”

“주 대표 같은 사람이 어쩌다 남자 얼굴에 홀랑 넘어갔나 생각하니까 기가 막혀서.”

“흐음, 칭찬을 굉장히 듣기 거북하게 하는 재주가 있네?”

“딱히 칭찬은 아니었지만, 그렇게라도 정신 승리하든지. 어린 남자가 나이 든 여자를 얼굴로 후리는 게 요즘 세상에서는 큰 자랑거리인 모양이지?”

하! 고개를 뒤로 젖히며 헛바람을 토해낸 지원이 안광을 번뜩이며 소랑을 쏘아보았다. 모르는 사람들의 시선은 웃어넘길 수 있었지만, 소랑의 비난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말이 나온 김에 묻자. 왜 나를 이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내가 그쪽한테 딱히 뭐 크게 잘못한 건 없는 것 같은데.”

“그건 피차일반 아닌가? 나도 살면서 너처럼 나한테 불손하게 구는 인간은 본 적이 없거든? 난 그저 네가 수틀리면 주 대표한테도 그럴까 봐 걱정하는 거라고. 주 대표는 지금 네가 보이는 모습만이 전부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데, 한집에 살면서 본성을 평생 숨길 수 있을 것 같아?”

“걱정 마. 가온 씨한테는 그게 내 본성이야. 나는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충성을 바치고 있는 중이라고. 단지 그 정성을 여러 사람에게 쏟을 수는 없을 뿐이지. 게다가 너는 사람도 아니잖아?”

발끈해서 한마디 쏘아붙이려던 소랑이 짜증스럽게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관두자. 채신없이 반세기도 못 산 핏덩이하고 개싸움을 할 수는 없지. 내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서 어쨌든 가온이 선택한 남자이기도 하니까. 가까스로 마음을 다스린 소랑이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를 냈다.

“아무튼 내 말은…, 주 대표한테 계속 잘하라는 거야. 주 대표를 중천주가 아닌 한 사람의 여자로 대하는 건 네가 처음이라, 주 대표는 그런 쪽으로는 면역이 전혀 없어. 가만히 보면 요즘 주 대표는 하나에서 열까지 다 너한테 의지하는 것 같고…. 그러니까 연약한 장미 한 송이를 자기만 바라보게 길들여 놓고 무참하게 버리는 짓 같은 건 절대로 하지 말라는 뜻이야. 그러면 장미는 죽어.”

너는 내 손에 죽을 테고. 소랑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지원이 어처구니가 없는 얼굴로 작게 웃었다. 아니, 얘는 대체 뭐 하는 늑대가 ‘라면 먹을래요?’도 모자라서 어린 왕자까지 섭렵하셨어?

“그럴 일은 없어.”

“흥, 사람 일은 모르는 거지. 인간은 원체 변덕스러운 존재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다짐은 왜 받는데? 쓸데없는 소리 하는 게 취미야?”

아주 잠깐의 평화 끝에 다시금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우던 지원과 소랑은 문이 달칵 열리는 소리를 듣고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삽시간에 표정을 바꾼 지원은 한달음에 달려가 다정하게 가온의 어깨를 감쌌고, 아예 다른 인격을 장착한 듯 돌변하는 지원의 모습에 기가 막혔던 소랑은 헛헛한 웃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와우. 내가 네 발 다 들었다, 진짜.

“왜 나오셨어요.”

“물만 마시고 온다더니 너무 안 들어와서.”

“그러려고 했는데 국화 향이 너무 좋아서요. 잠깐 감상한다는 게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냥 바로 들어갈 걸…, 괜히 가온 씨의 잠만 깨웠네요.”

“괜찮아. 푹 잤어. 잘 만큼 잤으니까 깬 거야. 그나저나 차 관장은 은근히 이런 수수한 꽃을 좋아하네? 얼마 전에는 구절초도 따 달라고 그러더니. 장미같이 화려한 꽃을 좋아할 것 같았는데.”

가온의 말에 입꼬리를 크게 들어 올리던 지원이 그녀의 입술에 살포시 입을 맞추고는 대단히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장미를 제일 좋아합니다. 어여쁜 장미 한 송이를 정성껏 키우고 있기도 하고…. 그래도 요새는 모든 꽃이 다 예쁘네요. 원래 국화류를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가온 씨 옆에 있으니까 세상이 다 아름답게 보이는 모양입니다.”

“…도 그래.”

“뭐라고요?”

소랑은 뻔히 알아들었으면서도 굳이 되묻는 지원이 참 얄밉다는 생각을 했다. 시치미를 뗄 거면 그 헤실거리는 얼굴이나 어떻게 좀 해라, 새끼야.

“나도…, 그렇다고.”

“하하하.”

그렇지만 발그레한 볼을 한 가온이 가볍게 쥔 주먹으로 지원의 가슴을 콩 때리는 모습은 참으로 보기가 좋았다. 못내 흐뭇한 얼굴로 가온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소랑은, 저를 힐끔 돌아본 지원이 피식 웃음을 흘리는 것도 기꺼운 마음으로 보아 넘겼다. 물론 입매가 살짝 일그러지는 것까지는 끝내 막지 못했다.

난생처음으로 무영당에 발을 들이게 된 소화는 바싹 마른 입술을 감쳐물며 머뭇머뭇 걸음을 뗐다. 천지에 널린 각양각색의 국화가 저마다 진한 향내를 뿜어내고 있었지만, 한가로이 향기나 맡고 있을 정신은 없었다.

- 대표님께서 귀국하는 즉시 무영당으로 들어오라고 하셨습니다. 중천에서 뵙게 되기를 원하는 건 아니시죠?

제가 홍콩에 머무는 동안 저와 서른 보 이상 거리를 벌리지 않던 도겸의 전언에 소화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당장 끌려와도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아이와 여행을 마칠 수 있도록 배려를 받았기에 더욱 할 말이 없었다.

“저기가 사랑채입니다. 들어가 계세요. 대표님이 곧 나오실 겁니다.”

“…네.”

아무도 없는 사랑채에 조심스럽게 들어간 소화는 차마 의자에 앉지도 못한 채 가온을 기다렸다. 중천주를 독대할 일이 거의 없는 일반 가이드들은 가온과 눈을 맞추는 것도 어려워했고, 그건 소화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혹시나 내가 잘못되면 우리 민서는 누가 돌봐줄까. 좌포청장의 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도 마음에 걸렸다. 이미 들킨 것은 제 소관이 아니라 우겨볼 수 있겠지만, 그녀가 지시한 일곱 번 중에 아직 두 번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상태다.

받은 돈은 이미 거의 다 써버렸는데, 그걸 어떻게든 갚아야 할까? 아니지. 그때 좌포청장이 내게 재물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이의 목숨을 준 거라고 했으니, 이번에야말로 민서가 죽게 될지도 몰라. 그러면 나는 정말 살 수가 없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 고개를 푹 떨군 채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대던 소화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럭저럭 침착하게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여느 때처럼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가온과 눈이 마주치자 몸이 마구 떨리기 시작했다.

“임 선생.”

“네…, 대표님.”

“앉지. 얘기가 길 것 같은데.”

“…네.”

소화에게 자리를 권한 가온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감히 제가 먼저 변명을 늘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소화는 그저 그녀가 입을 열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임 선생. 임 선생이 차원의 틈새에 꽂아 넣은 주목이 어디에서 온 건지 알고 있어?”

“….”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는 소화를 유심히 살펴보던 가온이 나직하게 혀를 찼다. 아는 모양이군. 이거 어지간하면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은데, 이렇게 되면 단단히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겠는데? 참…, 곤란하네.

“그 차원을 연결하는 통로가 명계로 이어져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나?”

“…네.”

그 사실을 알고 일을 받아들인 건 아니었지만, 소화도 명색이 가이드였기에 틈 사이로 보이는 광경이 지옥의 것이라는 건 바로 알 수가 있었다.

“흐음….”

길게 침음하던 가온이 이번에는 한층 더 엄한 목소리로 직접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대에게 주목 가지를 건넨 이가 누구지?”

도저히 더 이상은 얼버무릴 수가 없었기에 소화는 모든 걸 체념한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다.

“좌, 좌포청장입니다.”

좌포청장이라…. 다른 이도 아니고 염마왕의 수족과도 같은 좌포청장이 직접 움직였다 이거지. 그렇다면 이건 정말 염마왕의 농간이 확실하다는 얘긴데…. 어느 정도는 예상을 하고 있었지만, 막상 염마왕의 짓이라는 게 확인되자 가온은 머릿속이 몹시 복잡해졌다.

하율은 대체 어쩌자고 이런 짓을 벌이는 걸까. 일국의 왕도 아니고 무려 한 차원을 다스리는 자가 그저 심심풀이로 이런 무모한 짓을 벌일 리는 없고. 차 관장의 말대로 그가 정말 내게 환심을 사고자 한다면 이런 짓만큼은 절대로 하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텐데.

답답한 마음에 무거운 숨을 토해내던 가온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소화를 보고는 또 한 번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 어리석고 가여운 이는 또 어쩌면 좋단 말인가. 자기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제대로 알기나 할까.

“좌포청장이 그대에게 요구한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거지?”

“제게 줄기가 일곱 개인 나뭇가지를 하나 주었고…, 보름이 될 때마다 가지를 하나씩 꺾어서 영기가 넘치는 곳에 꽂아두라 하였습니다. 염마왕께서 계획하신 일이 있다면서…. 정확한 장소는 매번 보름이 되기 사흘 전에 따로 연통이 왔었고, 총 일곱 번 중 이번이 다섯 번째였습니다.”

이번이 다섯 번째라고? 그렇다면 마지막은 동짓달인데…. 가온의 가지런하던 눈썹이 살짝 휘었다. 하필 1년 중 보름달이 가장 길게 뜨는 날을 디데이로 삼았다는 게 아무래도 예사롭지가 않았다. 만약 누군가가 망자를 이용해서 뭔가 수작을 부리고자 한다면, 운신이 가장 수월한 날이 바로 동짓달 보름이다.

“그래? 그럼 임 선생은 그 대가로 무얼 받았나.”

잔뜩 주눅이 들어 더듬거리면서도 묻는 말에 순순히 대꾸하던 소화가, 이 질문에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리고는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완전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뗐다.

“23억을…, 받았습니다.”

23억…. 그래, 그 복권이 아무래도 수상쩍었지. 가온의 입에서 또다시 한숨이 새자, 내내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던 소화가 돌연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내가 그렇게 잘못한 거야? 나는 그냥 이미 나 있는 구멍에 나뭇가지 하나를 꽂았을 뿐인데. 날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휘감고 있는 당신이 내 심정을 알아? 자식이 죽어가는 걸 뻔히 눈으로 보면서도 돈이 없어서 제대로 된 치료도 받게 하지 못하는 어미의 비참함을 당신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어? 원통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대표님께는 별거 아닌 금액이겠지만…. 제게는 아이의 생명줄과도 같은 돈이었습니다. 그 돈이 아니었다면 제 딸은 지금쯤 죽었을 거예요. 아이를 살릴 수만 있다면 죽어서 받을 벌은 무섭지 않아요. 돈이 없는 어미는 자식이 죽더라도 그냥 두고 보기만 해야 되나요?”

소화의 사나워진 눈빛을 가만히 쳐다보던 가온이 작게 헛웃음을 지었다. 그동안은 소화를 보면서 오래전의 인연을 떠올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항상 시선을 내리깔고 있던 이가 눈꼬리를 치켜뜨니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얼굴 하나와 생김새가 똑같았다.

- 신을 모시지 않으면 급살을 맞는다고 했어요. 저도, 제 자식도…. 그럼 아이를 끌어안고 그냥 죽었어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이렇게 태어난 게 제 잘못이에요?

그때는 가온도 가치관이 완전히 정립되기 전이라 여인의 피맺힌 절규에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었지만, 이제는 다르다. 가온은 억울함을 토로하는 소화를 똑바로 바라보며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제 자식이 중하면 다른 이의 목숨은 희생해도 된다는 건가?”

“…!”

“지난여름에 명계에서 탈주한 망자가 서울 한복판에 나타났던 사건을 기억하겠지. 바로 그날 나와 병원에서 마주쳤으니 잊지 않았을 거야. 그때가 내게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마지막 기회였는데, 그대는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어.”

삽시간에 사색이 된 소화가 손을 덜덜 떨기 시작했지만, 가온의 표정은 더없이 지엄하기만 했다. 물론 아픈 아이를 둔 엄마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을까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개개인의 사정을 들여다보면 딱하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고, 소화의 처지는 그중에서도 특별히 마음이 쓰일 만큼 가여웠다. 그렇지만 형편이 어렵다는 것이 남을 해친 행위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본인이 꽂아 넣은 주목이 명계와의 틈을 벌리는 역할을 한다는 걸 알고 있었을 거야. 탈주범이 일산, 아니면 원주에 있는 통로를 통해 인계로 나왔을 거라는 것도 짐작하고 있었겠지. 그 사건으로 인해 귀신이 들렸던 주영석을 비롯해서 여섯 명이 죽었어. 임 선생은 23억을 받았다고 했나? 주영석이 목숨값으로 받은 건 단돈 5만 원이었어. 그나마도 그는 그 돈을 쓰지도 못하고 죽었지. 그저 그 순간에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말해 보게, 임 선생의 인생이 그자의 죽음보다 더 억울한가?”

중환자실에서 하룻밤을 넘기지 못한 주영석은 돌아가는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중천에 왔었다. 그리고는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환생지문으로 향했다. 남은 평생을 제가 짓지도 않은 죗값을 치르며 사느니, 차라리 다음 생을 기약하는 편이 낫다는 게 그나마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위안이었다.

게다가 피해는 주영석 한 사람에게서 그친 것도 아니다. 그의 가족들은 죽을 때까지 살인자의 가족이라는 누명을 벗을 수 없을 테고, 평생 남의 시선을 피해 죄인처럼 살아야 할 것이다. 졸지에 자식을 잃었지만 그 슬픔을 내색조차 하지 못할 것이고, 순하던 아들이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이유를 끝내 이해할 수 없어 심히 괴로울 것이다.

아마도 온전한 정신으로 살기는 어렵겠지.

“그 모든 것이 오롯이 임 선생의 책임이라고 할 수는 없어. 애초에 통로를 낸 자가 근본적으로 잘못을 저질렀지. 하지만 그대는 그 사건이 벌어진 후에도 세 번이나 더 같은 일을 반복했어. 그게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뻔히 알면서도.”

“대표님….”

“그러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노파심에서 한마디 덧붙이면…. 남은 두 번은 시도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감시가 붙어서 하고 싶어도 할 수도 없을 테고.”

아이에 대한 염려의 말을 건넬까 말까 망설이던 가온이 고민 끝에 입을 다물었다. 지금 어미의 입장에서는 어떤 말을 들어도 위선으로 들리겠지.

“그만 가 보게. 내가 임 선생에게 들어야 할 이야기는 다 들었으니.”

가온의 냉정한 축객령에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소화가 비틀거리며 사랑채를 나섰다. 그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던 가온은, 문이 닫히고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안타까운 한숨을 내쉴 수가 있었다.

어젯밤에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던 지원은, 오늘도 침대에 누운 지 2시간 만에 뻑뻑해진 눈을 비비며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협탁 위에 놓인 탁상시계를 들여다보니 이미 자정을 훌쩍 지나 새벽으로 가는 시각이었다.

“아…, 미치겠네. 오늘은 꼭 자야 되는데.”

무영당에서는 눈을 감기만 하면 잠이 쏟아졌었는데, 집에 돌아오니 별짓을 다 해봐도 도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따뜻하게 데운 우유도 마셔 보고, 미취학 아동이었을 때의 기억을 되살려 양도 세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저 시간이 지날수록 정신이 또렷해지기만 했다.

이럴 수가 있나. 무영당에서는 고작 사흘을 보냈을 뿐이고 이 집에서는 3년을 살았는데, 왜 이렇게 편하지가 않지? 똑같은 침대인데 이건 왜 이렇게 버석거리는 거야? 퀭한 눈으로 앉아 있던 지원이 짜증스럽게 혀를 차며 거실로 나왔다.

당장 날이 밝으면 간단하게 짐을 꾸려서 무영당으로 들어가야겠어. 고용인들의 눈도 신경 쓰이고 가온의 입장도 있으니 제집은 천천히 정리할 생각이었는데, 이러다가는 결혼도 해보기 전에 총각 귀신이 되게 생겼다.

술을 한잔할까, 아니면 약을 먹을까…. 잠시 고민하던 지원이 수면제를 딱 한 알만 먹기로 결정하고는 약상자를 뒤적이고 있을 때였다. 딩동. 난데없는 초인종 소리가 고요하던 집 안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뭐야, 이 새끼는. 지금이 몇 신데.”

홈오토 화면으로 도겸의 얼굴을 확인한 지원이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문을 열자, 못내 미안한 얼굴을 한 도겸이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미안해요, 형. 그냥 가려고 했는데, 밑에서 보니까 거실에 불이 들어오길래 일단 올라왔어요. 아직 안 자는 것 같아서.”

“너는 왜 오밤중에 싸돌아다니는데? 무슨 일 있어?”

“….”

바로 입을 열지 않는 도겸을 못마땅하게 노려보던 지원이 약상자를 다시 서랍 안에 집어넣고는 와인 한 병을 꺼냈다. 아이고, 내 팔자야. 내가 지금 다른 사람 상담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닌데. 지원은 속으로 조용히 투덜대며 와인 한 잔을 가득 따라 도겸에게 내밀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빨리빨리 실토하자. 대체 무슨 일인데?”

“이것 좀 봐요, 형.”

심드렁한 얼굴로 도겸이 내미는 휴대폰 화면을 흘깃 쳐다보던 지원이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도겸이 보여준 것은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연예란이었는데, 눈에 보이는 서너 개의 기사 제목에 모두 이로아와 최선우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이름 사이에 빨간 하트가 그려진 걸 보니 두 사람의 열애설이라도 터진 모양이었다.

“이로아 씨가 너 좋다고 그랬다며. 설마 양다리야?”

“아니에요. 이로아 씨는 그럴 사람도 아니고, 최선우도 따로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그 취향이 난 도저히 이해가 안 가지만.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도겸이 와인 한 잔을 그대로 입에 털어 넣었다. 속이 타는 모양이었다.

“그럼 뭐가 문제야? 같은 드라마 찍는 배우들끼리 스캔들 나는 건 흔한 일 아닌가? 홍보 때문에 아닌 걸 만들어 내기도 한다며.”

“이것도 그런 거예요. 제작사에서 일부러 뿌렸대. 두 사람 다 이런 기사가 나갈 줄 미리 알고 있었고, 내일 아침에 반박 기사도 뜰 거예요.”

“그런데?”

“그런데…, 기분이 나빠.”

도겸의 심각한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지원이 입매를 비틀며 헛바람을 토해냈다. 거 봐라, 이 자식아. 내가 남녀 문제는 심플하다고 했지? 사람 감정은 도저히 숨길 수가 없어요. 너는 이미 한참 전부터 이로아 씨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광고 찍을 때부터 이미 티가 다 났다니까?

“끝까지 아닌 척하더니…. 너도 이로아 씨 좋아하네. 좋아하니까 질투 같은 것도 하는 거 아냐. 좋으면 만나면 될 것을, 어차피 이렇게 될 거 괜히 아까운 시간만 허비했잖아. 사람이 천년만년 사는 것도 아닌데.”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딩동. 도겸이 막 뭔가를 설명하려는데, 또다시 조심스러운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이건 또 누구야? 백동하인가? 설마 연해수는 아니겠지. 눈매를 갸름하게 접으며 홈오토 화면을 노려보던 지원이 순간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더니 즉각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그리고는 몹시도 다급한 목소리를 내며 도겸의 등을 떠밀었다. 언제나 여유롭고 느긋하던 차지원이 이렇게까지 서두르는 건 굉장히 보기 드문 일이었다.

“너 게스트룸으로 들어가라, 빨리.”

“아, 왜? 누구길래?”

“가온 씨가 왔어.”

잠깐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눈만 끔뻑거리던 도겸은,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식탁을 정리하는 지원을 보며 어처구니가 없는 얼굴을 했다.

“뭐야. 대체 내가 왜 숨어야 되는데?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그냥 자연스럽게 인사하면 되잖아. 형 나랑 바람이라도 피웠어요? 애먼 사람을 왜 숨겨 둔 애인 취급이야?”

“바람…! 이게 미쳤나, 비유를 들어도 무슨 그딴 소름 끼치는 걸! 가온 씨가 이 시간에 네가 여기에 있는 걸 보면 얼마나 민망하고 마음이 불편하겠냐, 어? 여자가 애인 집에 찾아와서 그런 꼴을 당할 이유가 뭐야? 불청객은 넌데!”

마지막으로 와인 잔 두 개를 잽싸게 식기세척기 안으로 집어넣은 지원이 미간을 잔뜩 구긴 채 낮고 빠르게 윽박지르자 도겸의 표정도 서서히 일그러졌다.

“원, 별…. 형이 대표님한테 지극정성인 건 아는데, 너무 심하게 전전긍긍하는 거 아니에요? 대표님은 별로 신경도 안 쓰실걸?”

“네가 가온 씨에 대해서 뭘 알아. 네가 알고 있는 것보다 백배는 더 섬세한 사람이라고! 안 그래도 이 시간에 남의 집에 온 것부터 지금 엄청 미안해하고 있을 텐데, 손톱만큼이라도 더 난처하게 만들기 싫어. 그러니까 잔말 말고 빨리 방으로 들어가. 창밖으로 집어 던지기 전에.”

이야.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이 형님 성격 한번 과격하시네. 눈빛 살벌한 것 좀 봐. 아주 황소도 때려잡으시겠어. 사납게 눈을 부라리는 지원을 보고 있으려니 도겸은 너무 기가 막혀서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 이 형은 정말 대표님 말고 다른 사람은 아예 안중에도 없구나.

“안 들어가냐?”

“들어가요, 들어가.”

“최선을 다해서 조용히 해라.”

“아 글쎄, 알았다고. 어휴. 별꼴이다 진짜.”

물론 아무리 더러워도 끝까지 반항할 수는 없다. 투덜거리면서도 신속하게 게스트룸으로 들어간 도겸은, 그새 다른 사람처럼 돌변한 지원의 상냥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직하게 혀를 찼다.

“어쩐 일이세요, 이 시간에. 왜 여태 안 주무시고.”

사람이 상대에 따라 태도를 바꾸는 건 흔히 있는 일이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사기 아닌가. 이렇게 다양한 인격을 가진 남자를 사귀는 건 좀…, 위험하지 않나?

“미안해. 내가 너무 늦은 시간에 왔지? 예의가 아닌 줄은 아는데….”

“저한테 무슨 예의를 차리십니까. 그런 말씀 마세요. 제집에 오시는 건 언제든 환영이죠. 뭐 마실 거라도 좀 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그보다 차 관장 자고 있었던 거 아니야? 벌써 3시가 다 되어 가는데.”

“아닙니다. 안 그래도 잠이 안 와서 이걸 어떻게 해야 되나 고민하는 중이었습니다. 습관이라는 게 참 무섭네요. 무영당에서 딱 사흘 있었는데, 새삼 혼자서 자려니까 도무지 잠이 오질 않더라고요.”

어후…, 저 목소리 진짜 적응 안 된다. 저 뻔뻔한 멘트는 또 뭐야? 나름 유머라고 하는 말인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도겸은 이어지는 가온의 대꾸에 경악하며 입을 떡 벌렸다.

“나도. 그래서 왔어.”

…What?! 세상에 다른 사람도 아닌 대표님이 어떻게 저런 말씀을…. 우와, 나 지금 머리카락이 다 곤두섰어! 대체 지원이 형은 대표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커피에 약이라도 타는 거 아니야?

“어쩐지…. 안색이 너무 안 좋으시다 했습니다. 어젯밤에는 아예 못 주무셨어요?”

“응. 별짓을 다 해도 잠이 안 오더라고. 그런데 오늘은 꼭 잠을 자야 해서.”

“하아, 그럼 이 밤중에 이렇게 오실 게 아니라 저를 부르셨어야죠. 찾으셨으면 바로 달려갔을 텐데요.”

“어떻게 그래. 차 관장은 자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자는 사람을 깨울 수는 없잖아.”

“저한테는 그러셔도 됩니다. 이렇게 고작 이틀 사이에 반쪽이 되셔서 사람 억장이 무너지게 하시는 것보다는, 차라리 잠깐 잠을 깨우시는 게 훨씬 낫습니다.”

사랑을…, 저렇게까지 절절하게 해야 되나? 완전히 질린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차던 도겸이 가만히 지난 연애사를 되돌아보았다. 다현이가 새벽에 잠이 안 온다고 전화를 걸었으면, 나는 지금 지원이 형이 하는 것처럼 다정하게 받아줬을까? 이제는 더 이상 확인할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아마도 그러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게 화를 내진 않았어도 짜증은 좀 부렸겠지. 그땐 나도 어렸으니까.

그럼 이로아 씨가 전화를 걸면? 그 성격에 분명히 지금 잠도 못 자고 있을 텐데…. 얼마나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연락을 했을지 뻔히 아니까 짜증을 내지는 않았으려나? 깊은 생각에 잠겨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도겸은 충동적으로 메시지 하나를 보내고는 제 자신의 경솔함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잡니까?]

야, 이 미친놈아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완전 찌질한 구 남친처럼! 기함한 도겸이 황급히 메세지를 삭제하려고 했지만, 이미 읽음 표시가 떠버린 후였다. 아아아…. 소리 없이 절규하며 머리카락을 쥐어뜯던 도겸은 바로 들어오는 메시지를 보고는 그대로 굳었다.

[아직 안 자요. 감독님은 왜 이 시간까지 안 주무시고 계세요?]

역시 못 자고 있었구나, 이렇게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걸 보면. 더없이 안타까운 얼굴로 짧게 혀를 찬 도겸이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주의하며 드레스룸 문을 열었다. 이미 침실로 들어갔는지 두 사람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가급적 인기척이 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패닉에 빠져도 차지원의 무서움을 잊을 수는 없었다.

실내복과 목욕 가운 몇 벌만 걸려 있는 휑한 드레스룸 안으로 들어간 도겸은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계속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는지, 로아는 통화 연결음이 채 두 번도 울리기 전에 전화를 받았다.

[네, 감독님.]

“왜 아직 안 자고 있어요? 내일도 하루 종일 촬영 있다면서.”

[그냥요. 잠이 안 와서요. 감독님은요?]

“나도…, 잠이 안 와서.”

별 의미 없는 안부를 주고받던 도겸이 천장을 올려다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지금 이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그래도 남자가 여기까지 와서 비겁하게 발을 빼면 안 되겠지. 꼭두새벽에 상대가 자고 있는지 아닌지 궁금해진 순간, 이미 얘기는 끝난 거니까.

“기사 봤어요. 누나한테 물어보니까 제작사가 만든 작품이라고 하던데.”

[…네.]

“사실이 아니라는 거 아는데…. 그래도 로아 씨가 다른 남자랑 눈을 맞추면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 사진을 보니까 기분이 좀 나쁘더라고.”

[…네?]

조곤조곤하던 로아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살짝 입꼬리를 들어 올린 도겸이 작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어떻게든 이 바닥에 있는 사람들하고는 엮이지 않으려고 했는데…. 나는 결국 연예인을 만날 팔자였나. 앞으로 꽤나 복잡한 길을 걸어야 할 생각을 하면 솔직히 조금 막막하긴 했지만, 그래도 내내 고민하던 문제의 결론을 내리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할 얘기가 많지만 지금은 너무 늦었고…. 내일 잠깐이라도 좀 봅시다. 촬영 몇 시에 끝나요?”

지원은 간만에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들으며 기분 좋게 눈을 떴다. 와, 내리 다섯 시간을 한 번도 안 깨고 잤네. 혼자 있을 땐 별의별 노력을 다 해도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는데, 침대에 누워 가온을 품에 안자마자 거짓말처럼 눈꺼풀이 스르르 내려앉았다. 기절하듯 잠이 든 가온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은 것 같긴 한데, 그 이후로는 기억이 없다.

그나저나 이런 습관이 들어서 어떡하지? 나도 나지만, 이젠 정말 가온 씨를 혼자 둘 수가 없잖아. 아무튼 집은 천천히 정리하더라도 일단 필요한 것만 챙겨서 당장 오늘이라도 무영당으로 들어가야겠어. 고작 다섯 시간 푹 잤다고 얼굴 윤곽이 다 달라지는 것 좀 봐. 이러니 내가 마음이 놓여?

속으로 혀를 끌끌 차던 지원이 헐렁한 파자마를 입은 채 곤히 자고 있는 가온을 지그시 바라보고는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어깨선이 맞지 않아 흘러내린 옷깃 사이로 도드라진 뽀얀 쇄골은 눈앞을 아찔하게 만들었고, 대충 둘둘 걷어 올린 소매는 아이가 어른 옷을 입은 것처럼 마냥 귀여웠다.

미치겠네, 진짜. 이래서 남자들이 애인한테 제 옷을 입히는 건가. 애정이 담뿍 담긴 시선으로 가온의 자는 모습을 감상하던 지원이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는 시간을 확인했다. 아주 잠깐 들여다본 것 같은데 어느새 20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신선놀음이 따로 없네, 진짜.

“가온 씨….”

“으응.”

반사적으로 대답은 하면서도 바로 눈을 뜨지 못하는 가온을 보며 지원의 눈빛이 조금 흐려졌다. 모처럼 잘 자고 있으니 이대로 더 재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오늘은 아침부터 중요한 일정이 있다. 해외에 거주하는 보안실 소속 직원을 모두 불러들였으니, 그 회의를 소집한 이가 지각을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표님. 이제 슬슬 일어나셔야 회의 시간에 맞추실 수 있습니다.”

“아!”

제가 깨운 거긴 했지만, 가온이 대표님이라는 호칭을 듣자마자 벌떡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지원은 몹시 기분이 나빠졌다. 동시에 염마왕을 향한 살의가 용암처럼 끓어올랐다. 그 또라이가 쓸데없는 일을 벌이지만 않았어도 오늘 하루는 그냥 쉬게 둘 수도 있었는데. 아아…, 그 새끼를 깔끔하게 없애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 같아서는 당장 목이라도 따고 싶지만, 이미 명계에 속한 자라 다시 죽일 수도 없고. 영혼은 어떤 수를 써야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을까.

못내 험악한 상상을 하면서도 가온에게는 끝까지 웃는 낯을 유지한 지원이 일단 간단하게 끼니를 챙겼다. 그리고는 어제 입고 온 옷을 다시 입어야 하나 고민하는 가온에게 속옷부터 양말까지 완벽하게 갖춰진 외출복 세트를 내밀었다. 엉겁결에 받아든 가온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런 게 왜 차 관장의 집에 있어?”

“사람은 항상 만약을 대비해야죠. 어떤 상황에서든 가온 씨가 구겨진 옷을 입고 외출하는 건 제가 용납이 안 돼서요. 행여나 누가 알아보고 이러쿵저러쿵 뒷말을 하는 것도 싫고요.”

“내 사이즈는 어떻게 알고?”

가온의 질문에 지원은 도리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매일 보고 만지는데 그걸 어떻게 모릅니까?”

지원이 호언장담한 대로 그가 준비한 옷은 맞춤처럼 제 몸에 꼭 맞았다. 제가 매일 신는 것과 똑같은 양말을 한참이나 내려다보던 가온이 문득 떠오른 옛 기억에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예전에 해수하고 같이 싱가포르에 간 적이 있는데…. 보안실장이 급성 장염으로 응급실에 실려 가는 바람에 다른 보안실 직원이 올 때까지 해수가 나를 이틀 동안 케어했었어.”

“그 녀석이 대표님을요?”

제 몸 하나도 제대로 케어할 수 있는 놈이 아닌데…. 영 못 미더운 표정을 짓는 지원과 눈을 맞춘 가온이 이번에는 조금 더 크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하하. 주는 대로 양말을 신었는데, 나중에 돌아와서 보니까 뭔지 정체를 알 수 없는 파란색 동물 같은 게 그려져 있더라고. 이등신에 동글동글한 거였는데…. 아무튼 권 여사가 그걸 보고 비명을 질렀었지.”

“그 미친 새…! 아니, 그 정신 나간 녀석이 대표님께 도라에몽 양말을 신겼습니까?!”

희한하네. 직원들 교대 시간도 아닌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살아 있는 사람들이 중천에 많이 들어오지? 한창 업무에 집중하고 있던 채윤은 제 근처에 있는 출입구가 또다시 열리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들어오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못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히 중천 직원은 아니야. 진상 망자가 에스코트되었을 때 그를 처리한 가이드가 뒤를 따라오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지금 중천으로 들어온 사람은 딱히 가이드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단정한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에게선 가이드 특유의 야생적인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는데, 가이드 남편을 둔 채윤은 평소 중천 소속의 다른 직원들과 가이드를 귀신같이 구분해내곤 했었다.

더구나 채윤의 자리 바로 옆에 있는 출입구는 1년에 한두 번이나 열릴까 말까 한 문이었다. 인계와 중천을 연결하는 문은 총 200여 개가 있지만, 그중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문은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채윤이 중천에서 근무하는 8년 동안 이 문이 연달아 두 번이나 열리는 건 오늘 처음 봤다.

중천에서 근무하는 직원도 아니고 가이드도 아니면, 저 사람들은 다 뭐지? 지금 한 1~20분 사이에 어림잡아도 300명은 들어온 것 같은데…. 그건 그렇고 저 사람들이 다 어딜 가고 있는 거야? 출입구를 통해 들어온 이들이 구석에 있는 계단을 오르는 걸 유심히 지켜보던 채윤은, 잠깐 한가해진 틈을 타서 옆자리에 앉은 동료에게 말을 건넸다.

“오 선생님. 중천에 무슨 일이 생겼어요?”

“글쎄.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우리 같은 판정원들한테까지 일일이 알려주지는 않으니까.”

“저 계단은 뭐예요? 저는 저기에 계단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아…. 저건 회의실로 가는 계단이야. 정 선생은 저 회의실에 사람이 모이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겠구나. 나도 한 20년 전쯤에 상급 가이드 회의가 열리는 걸 본 게 마지막인 것 같은데? 그때 한참 밀레니엄이 어쩌고 하면서 시끌시끌했었거든. 21세가 되면 인계에 종말이 올 거라고 선동하는 악령들이 워낙 득실거려서 말이야.”

“…그래요?”

상황 파악에는 그다지 도움이 안 되는 설명이었다. 이후로 짬이 날 때마다 주변에 있는 직원들 몇 명에게 더 물어봤지만, 채윤은 끝내 궁금증을 해소하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중천에 방문한 이유를 명확하게 알지 못했던 건 사실 참석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보안실 소속 직원들은 현장에서 직접 망자를 상대하는 직종이 아니었기에, 그들 중 70% 이상은 중천에 방문하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정확하게 이틀 전, 세계 각지에 있는 제니스 컴퍼니 지부의 보안실에 긴급한 문서가 하달되었다. 조만간 본사의 지시 사항을 전달하는 운영 체계가 변경될 예정이니 가급적 전 직원이 참석해서 교육을 받으라는 내용이었다.

- 운영 체계 변경? 그런 거라면 문서나 동영상으로 전달하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아? 그리고 꼭 대면 교육이 필요하더라도 한 명만 대표로 교육을 받고 나머지한테 전달하면 되잖아. 안 그래도 바쁜데 굳이 다 같이 자리를 비워야 해?

즉각 본사 보안실로 문의를 가장한 항의가 빗발쳤지만, 본사의 직원들은 마치 녹음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대표님의 명령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단순 권고가 아닌 중천주의 명령이라면 반드시 따라야만 했기에 직원들은 영 찜찜한 얼굴을 하면서도 중천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뭔가 다른 이유가 있어. 고작 시스템 교육 따위를 위해서 이 많은 인원을 한자리에 모을 리가 없다고. 미심쩍은 기색을 지우지 못한 채 주섬주섬 통역기를 착용한 이들은,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대상자 전원이 참석한 것을 확인한 후 등판한 본사의 보안실장이 꺼낸 첫마디는 말 그대로 폭탄 발언이었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얘기하겠습니다. 현재 염마왕이 인계와 명계를 다이렉트로 잇는 통로를 만들고 있고, 일부 가이드들이 염마왕의 지시에 따라 그 통로가 닫히지 않도록 틈을 벌리고 있습니다.”

잠시 무거운 정적이 흐르던 회의실이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염마왕이 왜 그런 짓을! 염마왕은 자연적으로 생긴 통로도 없애야 되는 입장 아니야? 아니, 그것보다…. 가이드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해? 그 틈으로 사람이 빠지면 어쩌려고?

웅성거림이 어느 정도 가라앉을 때까지 차분하게 기다리던 현호가 직원들에게 사진 몇 장을 보여주었다.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단순히 멀쩡한 바닥에 매끈한 나뭇가지 하나가 꽂혀 있는 사진으로 보이겠지만, 영안이 트인 직원들은 쩍 벌어진 바닥의 틈새로 지옥의 광경을 확인하고는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곧이어 폭풍 같은 질문이 쏟아졌다.

“대체 염마왕이 왜 그런 짓을 하는 겁니까?”

“아직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지금 다각도로 확인하는 중입니다.”

“그러면 지난번에 서울에 나타났던 탈주범도 그 틈으로 빠져나온 건가요?”

“100%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그럴 확률이 상당히 높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 통로의 틈을 벌리고 있는 게 정말로 중천 소속의 가이드가 확실합니까?”

“네, 가이드 한 명이 틈새에 주목을 꽂아 넣는 걸 현장에서 목격했습니다. 조사 결과 좌포청장의 지시를 받았다고 실토했고요.”

좌포청장! 순간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염마왕이 정말로 그런 짓을 하고 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데…. 좌포청장의 단독 범행일 가능성은 없습니까?”

“좌포청장은 염마왕의 수족이나 다름없습니다. 혹여 염마왕이 적극적으로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의 묵인 없이 이런 사태가 벌어질 수는 없습니다.”

상석에 앉아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던 가온이 가볍게 손을 뻗어 제 앞에 놓인 마이크의 전원을 켜자 수백 개의 눈동자가 동시에 한 곳을 응시했다.

“내가 두 달 전에 직접 명계로 내려가서 통로 스무 개를 닫았지. 그런데 2주 전에 닫았던 통로 중 하나가 다시 열려 있는 걸 발견했어. 바로 그 자리에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건 나를 포함해서 총 셋뿐이고.”

그렇다면 상천제, 염마왕, 그리고 중천주 중에 좌포청장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가 범인이라는 얘기다. 필연적으로 도출된 결론에 직원들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염마왕은 명계의 지배자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악으로부터 인간들을 보호해야 하는 입장 아닌가? 인계를 조금이라도 평화롭게 유지하기 위해서 죄인들을 처벌하고 교화시키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거 아니야? 그런데 그런 자가 인계에 악령을 풀어놓는 짓을 하다니.

“그럼…,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저희는 뭘 해야 합니까?”

“금일 부로 모든 가이드를 대상으로 한 전수 조사에 들어가겠습니다. 에스코트가 가능할 정도의 영력이 있는 자라면 판정원이나 보안 요원도 조사 대상에 포함합니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자가 있으면 즉시 본사로 보고하시고, 최근에 재산상의 변동이 극심하거나 갑작스럽게 사의를 밝힌 직원이 있으면 그 행적을 각별히 신경 써서 조사하세요. 의심이 가는 직원이 나오면 우선 동선부터 확실하게 파악하시고요. 통로의 정확한 위치를 찾는 것이 우리의 일차적 목표입니다.”

현호가 지시 사항을 모두 전달하자, 여느 때처럼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던 가온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마이크를 켜지 않았지만, 중천주의 위엄이 넘치는 목소리는 직원들의 뇌리에 단어 하나하나까지 또렷하게 각인되었다.

“이 회의실에서 나온 말들이 외부로 퍼지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할 것이다. 그게 바로 다른 매체를 이용하지 않고 그대들을 굳이 중천으로 부른 이유다. 또한 행여나 염마왕의 수작에 동조하는 자가 나온다면 더 이상 이승에 미련이 없는 것으로 알겠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내게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지엄한 명령에 직원들은 일제히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대표님.”

회의가 끝나고 나서도 세 시간이 넘도록 직원들과 면담하던 가온은 검은색 사제복을 입은 중년 남성이 제 앞에 서자 반가움과 놀라움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어지간하면 사람들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녀가 보이는 격한 반응에, 지원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브루엘! 자네가 어찌 여기에 왔어?”

“저희 지역의 보안실 담당자가 제 동생입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출산을 한지라 운신이 어려워 제가 대신 왔습니다.”

“그래? 축하한다고 전해주게. 아무튼 자네를 보게 되어 반갑군.”

가온의 말에 빙긋이 미소를 짓던 브루엘이 내내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지원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기세를 보니 상급 가이드인 것 같고. 그런데 눈빛이 너무 날카로워. 이런 사나운 자가 대표님의 옆에 있어도 되나.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던 브루엘이 주변을 의식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주위를 물려주시지요, 대표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 아, 일단 서로 인사부터 나누지. 차 관장, 이쪽은 체코의 상급 가이드 르지프 브루엘이야. 지난번 로젠발로프 가 사건 때 악령의 얼굴을 확인했던 유일한 가이드였지. 브루엘, 여긴 내 최측근인 차지원 관장.”

“반갑습니다. 차지원입니다. 체스터에서는 덕분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지원이 시원스레 웃으며 손을 내밀자 잠시 멈칫했던 브루엘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하지만 표정의 변화가 자유자재인 지원과는 달리, 고지식한 성직자인 그는 떨떠름한 기색을 완전히 감추지 못했다.

“르지프 브루엘이오. 대표님께만 드릴 말씀이 있으니 자리를 좀 비켜줬으면 좋겠는데.”

브루엘의 정중한 부탁에 지원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물론 그 부드러운 미소가 수락의 의미를 뜻하는 건 아니었다. 웃기시네, 내가 초면인 당신을 어떻게 믿고.

“그건 곤란합니다, 브루엘. 아시다시피 지금은 거의 전시에 준하는 상황이니, 저는 절대로 대표님의 옆자리를 비울 수가 없습니다.”

“건방지군. 그건 그대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죄송하지만 그건 제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 누구도 제게 대표님의 옆에서 떨어지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뭐가 어째?”

두 사람의 불꽃 튀는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가온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경력이나 중천 내에서의 위치를 고려한다면 브루엘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맞지만, 가온은 이미 지원에게 어딜 가든 동행하겠다는 약속을 해버린 상태다.

“브루엘, 그냥 얘기해. 차 관장은 나를 따라서 지옥에도 가는 사람이라 어쩔 수 없어.”

“…네?”

어딜 가? 이거 미친놈 아닌가? 대번에 의기양양해진 지원을 뜨악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브루엘은 결국 가온과 독대하겠다는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주변을 한 번 더 신중하게 둘러보던 브루엘이 저희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는 자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용건을 꺼냈다.

“대표님, <코덱스 기가스>라는 걸 아십니까?”

“악마의 성경이라고 불리는 책 말인가? 13세기에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만들었고, 총 320페이지 중에 여덟 장이 뜯겨 나갔다던데.”

“네, 바로 그 책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 뜯겨 나간 여덟 장 중 두 장을 제가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 지옥의 왕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지옥의 왕….”

“네. 대체로 비유적인 표현이 쓰였지만, 본문 중 샛별이라고 지칭되는 이의 사명을 보면 현재 염마왕이 수행하고 있는 역할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합니다.”

안주머니에서 빳빳한 봉투 하나를 꺼낸 브루엘이 가온에게 공손하게 내밀었다. 봉투 안에는 깨알 같은 글씨가 빼곡히 적힌 종이가 한 장 들어 있었다.

“원본을 들고 다니기는 어려워서 제가 직접 베껴 쓴 필사본입니다. 사이즈가 워낙 커서 복사를 할 수도 없고, 사진은 아무리 찍어도 또렷하게 나오질 않았습니다. 게다가 누군가가 금제를 걸어 둔 모양인지 필사하는 것도 쉽지 않더군요. 아무리 집중하고 써도 자꾸만 오탈자가 나서, 이 한 장을 만드는 데 꼬박 석 달이 걸렸습니다.”

“금제라….”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가온이 못내 진지한 눈빛으로 종이에 적힌 글자를 읽어 내렸다. 옆에 서 있던 지원도 슬쩍 들여다봤지만 애석하게도 그의 능력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문자였다. 라틴어인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 수가 없어서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던 지원은 조용히 한 발자국 옆으로 물러나 신속하게 검색을 시도했다. 금제가 걸린 건 사라진 여덟 장분에 국한된 것인지, 의외로 꽤나 상세한 자료가 줄줄이 나왔다.

코덱스 기가스, 일명 악마의 성경…. 현존하는 중세 서적 중에 가장 방대한 규모이며, 한 수도사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하룻밤 만에 완성시켰다는 전설이 있다…. 필체가 일정해서 그런 전설이 생겼지만 실제로 완성하기까지는 20년 이상이 걸렸을 거라고 추정한다고. 와우, 책 한 권의 무게가 70kg이 넘어? 그 여덟 장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추측만 난무하는 걸 보니 진짜로 원본을 본 사람은 없나 본데…. 이게 바로 그 사라진 여덟 장 중의 일부라 이거지. 필체가 아주 유려하시네. 그림에는 그다지 재능이 없어 보이지만.

어떻게 보면 섬뜩하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우스꽝스럽기도 한 악마 그림을 유심히 살펴보던 지원이 입꼬리를 조금 들어 올리며 피식 웃었다. 길게 자란 손톱에 뾰족한 뿔이라…. 수도사의 상상력이란 참 고지식하고 빈약하구나. 차라리 이렇게라도 구분이 좀 되면 좋을 텐데 말이야. 악령이라는 건 사람하고 똑같이 생겼기 때문에 더 무서운 거라고. 인정하기는 싫지만 염마왕만 해도 상당한 미남이고.

“샛별이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 비수처럼 일어난 태양의 숨결이 그의 심장을 꿰뚫어 안개처럼 흩어지게 할 것이다…. 어둠과 태양이라. 시점이 좀 애매한데? 이걸 예언서라고 봐야 하나?”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예언이라기보다는 경고에 가깝습니다. 통상 일출 직후에 빛을 잃는 샛별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는 건 천지개벽에 준하는 사태가 발생했다는 뜻일 테고요. 일단 저는 지옥의 왕이 본분을 잃는 경우에 아주 강력한 신의 심판이 있을 거라는 의미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안개처럼 흩어진다…? 염마왕이 소멸될 수도 있다는 얘긴가? 하율 이전에 다른 염마왕이 있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만약에 염마왕이 진짜로 소멸된다면 명계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런 일이 벌어지면 인계는 무사할 수 있을까? 대번에 심각해진 가온이 종이에 적힌 내용을 다시 한 번 빠르게 훑어 내렸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얘기하는 지옥의 개념하고는 조금 다르네? 보통 지옥의 왕은 천상에서 내쳐진 타락천사 따위로 묘사되던데, 여기에서는 신의 대리인처럼 설명하고 있군. 사실 이것이 가장 진실에 가깝긴 하지만.”

“네. 바로 그래서 뜯긴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13세기는 크리스트교의 기본 교리와 상충하는 것은 무조건 배척하던 시대니까요.”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가온을 몹시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브루엘이 뭔가를 잠시 고민하더니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어렵게 입을 뗐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은 중간에서 잘렸기 때문에 굳이 베끼지 않았는데…, 이 뒤로 이어지는 내용은 아마도 대표님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나?”

“네. ‘죽은 자를 인도하는 자’까지만 쓰여 있었습니다. 문단의 구조를 분석해보면 염마왕에 대한 내용과 비슷하게 중천주의 임무와 주의할 점 등이 적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흐음.”

주의할 점…. 이거 조금 으스스하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신이 정해둔 금기를 어겼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썩 유쾌하지 않은 한기를 느끼며 희미하게 한숨을 내쉬던 가온은 제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는 따뜻한 손길에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추우신 것 같아서요.”

지원의 덤덤한 목소리에 설핏 미소를 짓던 가온이 좀 더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는 브루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제게 전달된 온기의 정도는 미약했지만, 지원이 제 옆에 버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등줄기를 서늘하게 훑었던 한기가 조금씩 누그러지는 기분이었다.

“아무튼 제가 지금 그 뒷부분을 백방으로 찾고 있습니다. 원래는 유실된 부분을 찾아서 정확한 내용을 확인한 다음에 알려드리려고 했었는데, 돌아가는 상황이 썩 좋지 않은 것 같아서 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 어떤 경고가 쓰여 있을지 알 수 없으니, 항상 몸조심하시고 과격한 행동은 가급적 삼가십시오. 대표님은 워낙 정의로운 분이시라 신의 뜻을 거스르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제가 모시는 신은 굉장히 자비롭고 인자하시지만, 때로는 아주 냉혹한 처분을 내리시기도 하니까요. 부디 마지막까지 무탈하시길. 가온의 삶을 비교적 가까이에서 지켜봤던 이들 중 하나인 브루엘은, 지나칠 만큼 헌신적으로 임무를 수행해 온 그녀가 모든 것을 안온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했다.

“고맙군. 멀리서 일부러 와 준 것도 고맙고, 나를 위해서 마음 써주는 것도 고마워.”

“별말씀을요. 중천주를 상사로 둔 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더불어서 태양의 숨결이 구체적으로 뭘 의미하는지도 찾아보겠습니다. 어쩌면 고대 이집트의 연금술에 대한 기록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쪽 관련 문헌에서 비슷한 표현을 몇 개 본 적이 있거든요.”

“그렇게까지? 일이 너무 커지는 거 아닌가?”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심려 마십시오. 그럼 다시 뵐 때까지 평안하십시오.”

정중하게 허리를 굽힌 브루엘이 회의실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 뒷모습에 잠시 눈길을 주던 가온은 제게 말을 걸어오는 다른 이에게 바로 관심을 돌렸지만, 지원의 날카로운 시선은 브루엘이 완전히 자취를 감출 때까지 그에게서 떨어지질 않았다.

기운이 굉장히 단단하고 선량해 보이기는 했지. 가온 씨한테 충성하면서도 딱히 사심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고. 그래도 지금은 누구도 믿을 수가 없어. 명계가 들썩이자마자 타이밍도 좋게 사라졌던 비밀 경전이 나타나질 않나….

“대표님, 사실 최근 저희 지부에 석연치 않은 이유로 퇴직한 가이드가 두 명 있습니다. 젊은 부부 가이드인데 갑자기 둘 다 건강이 나빠졌다며 따뜻한 캘리포니아에 가서 살겠다고….”

계단을 내려가는 브루엘을 끝까지 주시하던 지원은 독특한 악센트가 있는 영어가 들려오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당장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악마의 성경 사본 같은 것보다는, 이쪽이 훨씬 더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다.

“정확한 병명은?”

“휴직이라면 진단서를 받았겠지만, 사직이었기 때문에 거기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돌아가는 대로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몇 달 전부터 조금씩 수상한 기미가….”

프렌치 억양이 섞인 영어를 쓰시네. 그렇다면 캐나다 쪽인가…. 아이고, 비행기를 또 몇 시간을 타야 되는 거야. 골치가 아파진 지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가슴이 답답해서 절로 한숨이 나올 뻔했지만, 그러면 가온이 너무 신경을 쓸 것 같아서 그것만큼은 꾹 눌러 참았다.

“그러니까 우리는 각 지부의 보안실에서 의심스럽다고 판단한 가이드의 동선을 보내면, 그 동선을 따라 이동하면서 명계하고 연결된 통로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면 된다는 거죠? 어차피 없애는 건 대표님밖에 못 하시니까.”

간만에 무영당 사랑채에 상급 가이드 전원이 모였다. 해수에게 그간의 사정을 간략하게 설명하던 지원은, 해수가 모처럼 똑 부러지게 대꾸하자 빙긋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그런데 범위가 너무 넓으면 혼자 다녀야 될 수도 있어.”

“에이, 그런 건 걱정하지 마세요. 저 혼자서 외국 잘 다녀요. 심지어 대표님 모시고 간 적도 있다고요.”

그렇게 모시고 가서 도라에몽 양말을 신겨드렸잖아, 이 정신 빠진 놈아. 몹시 뻐기고 있는 해수에게 대차게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지원은 일단 한 번은 참았다. 차지원, 릴렉스. 이제 갓 스물 넘은 어린애야. 철딱서니가 없는 건 당연한 거라고. 물론 나는 저놈 나이 때에 저렇진 않았었지만.

“아! 그리고 나 형들한테 선물 사 왔어요. 경기 끝나고 엄청 큰 벼룩시장에 갔었는데, 거기 진짜 좋은 물건이 많더라고요.”

이미 ‘벼룩시장’이라는 단어가 등장할 때부터 긴장하고 있던 도겸은, 잔뜩 신이 난 해수가 바스락거리는 종이 포장지를 벗기자 저도 모르게 지원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해수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내놓은 선물의 정체는 알록달록한 구슬 팔찌 두 개였는데, 구슬의 재질이 플라스틱인지 색을 입힌 유리인지는 육안으로 구별할 수 없었다.

“색깔 엄청 예쁘지, 형. 우리 셋이 세트야.”

“아아…, 그래? 고, 고맙다.”

“앞으로 우리 상급 회의 할 때마다 다 같이 차고 오는 건 어때요?”

완전히 들뜬 해수를 빤히 바라보던 지원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리자, 내심 그가 욕설이라도 퍼부을까 봐 조마조마했던 도겸이 슬그머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해수야, 제발. 지원이 형이 봐줄 때 더 까불지 말고 닥치자, 응? 지원이 형은 네 차보다도 더 비싼 시계 차고 다니는 사람이야.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낚싯줄에 플라스틱 구슬 꿴 팔찌를 차고 다닐 사람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저 반짝반짝 눈을 빛내고만 있던 해수는 도겸의 간절함을 수신하지 못했다.

“지원이 형은 둘 중에 어떤 게 더 예뻐요? 그래도 형이 한 살 더 많으니까 우선 선택권을 줄게요.”

“하아.”

지원의 의미심장한 한숨 소리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은 도겸이 서둘러 해수의 관심을 돌리려고 애썼다. 저 자식, 저러다 기어이 한 대 맞지.

“해수야. 너 이번에 귀국해서 예능도 많이 찍었더라? 재밌었어?”

단순한 해수는 다행히 쉽게 넘어왔지만, 새롭게 등장한 화제는 공교롭게도 이번엔 도겸의 심기를 정통으로 건드렸다.

“응! 나 여자 연예인들도 많이 만났어. 그런데 그중에 이로아라고 있거든? 지금 되게 시청률 높은 드라마 여주인공이라는데, 실물이 엄청 예쁘더라고!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이는 청승맞은 눈망울이 딱 내 취향이었어. 뭐, 일단 번호 따는 데 실패하긴 했지만 세트장이 어딘지 알아냈으니까 맘먹고 한번 들이대 보려고. 나 원래 누나들한테 잘 먹히잖아.”

야, 야, 야! 줄곧 해수를 외면하고 있던 지원이 식겁한 얼굴로 홱 소리가 나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재빨리 도겸의 눈치부터 살폈다. 예상했던 대로 한껏 시선을 내리깐 도겸은 이미 입매를 딱딱하게 굳히고 있었다. 완전히 감정이 상한 듯 보이는 도겸과 물 만난 물고기처럼 팔딱거리고 있는 해수를 번갈아 바라보던 지원은 가지런한 눈썹을 살짝 구기며 나직하게 앓는 소리를 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서도겸이랑 그 얘기를 하다 말았지, 참. 안 그래도 지금 그놈의 스캔들 때문에 속이 뒤틀렸을 텐데…. 어지간하면 남의 일에, 그것도 연애사에는 절대로 끼어들지 않던 지원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참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해수야.”

“네?”

“여자가 연락처를 안 주는 건 네가 마음에 안 든다는 뜻이야. 그러니까 괜히 주접떨다가 망신당하지 말고 깔끔하게 포기해. 마음 없는 사람한테 집적거리다가는 신고 당할 수도 있어. 국가대표가 쪽팔리게 그런 일로 매스컴 타면 되겠냐?”

지원의 신랄한 경고에 눈을 동그랗게 뜨던 해수가 곧 눈꼬리를 곱게 접으며 배시시 웃었다. 이십 대 청년의 미소가 어찌나 청량하고 천진난만한지,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이 연해수 때문에 만들어진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에이, 제가 그렇게 스토커처럼 굴지는 않죠. 걱정 마세요, 형.”

너를 걱정하는 게 아니야, 이 눈치 없는 놈아! 짜증스럽게 혀를 찬 지원이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안 그러면 설득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손부터 나갈 것 같았다. 어후, 내가 원래 이렇게 폭력적인 인간이 아니었는데.

“세트장까지 쫓아간다면서. 스토커가 뭐 별건 줄 알아? 싫다는 사람 쫓아다니면 그게 스토커야. 이런 문제는 무조건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해야지.”

“로아 누나가 저 싫다고 하진 않았어요. 번호를 주는 건 좀 곤란하다고만 했는데…. 소속사에서 관리하니까 그렇게 대답한 거 아닐까요?”

“아니. 그냥 너한테는 쥐뿔도 관심이 없다는 거지. 이로아 씨는 아직 관리해 줄 소속사도 없고. 그리고 너 연예인한테 들이대면서 기사 한 줄도 검색 안 해봤어? 그쪽은 지금 너 아니라도 신경 쓸 일 많아. 단순하게 효용성 문제만 따진다고 해도 이런 복잡한 시기에 들이대는 건 역효과라고.”

간만에 진지한 표정으로 지원의 말을 경청하던 해수가 별안간 뭔가를 크게 깨달은 얼굴로 짝 소리가 나게 손뼉을 쳤다.

“형은 그런 걸 다 어떻게 알아요? 형도 로아 누나 좋아해요? 가만, 그 반지! 못 보던 건데…? 형 여자 생겼어요? 헉! 혹시 형이 그 누나 만나요?”

“…아니야, 인마.”

“그러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봐요, 형. 형이 로아 누나랑 사귄다면 제가 깨끗하게 포기할게요. 뭐, 아무리 기를 써도 형을 이길 수는 없을 테니까. 형은 좀 무섭기도 하고…. 아무튼 진짜 사귀는 거면 빨리 말해 줘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저 보기보다 입 무겁다니까요?”

입 무거운 거 좋아하네. 너의 그 가벼운 주둥아리를 믿느니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지원은, 히죽거리는 얼굴로 제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해수를 보며 불과 2분 전에 했던 생각을 번복했다. 사람은 때에 따라서는 충분히 웃는 낯짝에도 침을 뱉을 수 있다. 아, 이 새끼 웃는 게 왜 이렇게 꼴 보기 싫지?

“에이, 뭐예요. 형 보기보다 되게 음흉하네요? 얼굴은 밝힐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뭐가 어째, 이 자식아?”

“아, 이렇게 반지까지 끼고 다니면서 계속 시치미 뗄 거예요? 딱 봐도 그냥 커플링이 아닌데, 뭐. 비밀은 꼭 지킨다니까요? 말해 줘요, 빨리.”

어린애처럼 막무가내로 조르던 해수는 급기야 지원의 팔을 붙잡고 흔들기 시작했고, 머리끝까지 짜증이 차오른 지원은 결국 짤막하지만 강렬한 욕설을 내뱉으며 해수의 손을 쌀쌀맞게 털어냈다.

대단히 복잡한 시선으로 두 사람의 실랑이를 지켜보던 도겸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다 만에 하나 지원이 형이랑 이로아 씨가 만난다는 소문이라도 퍼져나가면 그땐 정말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되겠지. 막 뜨기 시작한 신인한테 이중 스캔들이 나면 광고 같은 것도 죄다 끊길 테고. 영 미덥지는 않지만, 그래도 차라리 해수한테 솔직하게 털어놓고 단단히 입조심을 시키는 게 낫겠어.

“해수야.”

“응?”

“지원이 형이 아니라 나야.”

“뭐가?”

“이로아 씨 만나는 사람. 나라고.”

담담하게 털어놓는 도겸을 잠깐 의아하게 바라보던 해수가 곧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피식 웃었다.

“형. 형이 로아 누나 나오는 드라마 OST 작업한 건 나도 아는데, 그런 걸로 여자를 만난다고 표현하면 안 되지. 같이 일하고 몇 번 밥 같이 먹고 그랬다고 다 사귀는 건가? 그러면 나는 사귀는 여자가 백 명은 될 것 같은데? 그리고 형은 연예인 절대로 안 만나잖아.”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그러니까 너 이거 진짜 아무한테도 얘기하면 안 돼. 상대 배우랑 스캔들 난 지 이제 겨우 이틀밖에 안 됐는데, 금세 또 다른 남자랑 얽히면 이로아 씨 이미지가 뭐가 되겠어? 내가 진짜 부탁한다, 해수야.”

도겸의 간곡한 당부에 어리둥절해진 해수가 서서히 경악하며 입을 떡 벌렸다. 이거 진짜로…, 진짜인가 본데?

“형이라고? 지원이 형이 아니고?”

“그래.”

“정말? 언제부터 사귀었는데?”

살짝 대답이 궁했던 도겸은 해수의 질문에 바로 입을 열지 못했다. 엄밀히 따지면 아직 사귀는 건 아니고 오늘밤에 만나서 일단 고백부터 해야 되지만…. 하지만 견제의 끈을 완전히 놓을 수는 없는 상황이다. 이미 해수는 로아에 대한 호감을 드러낸 상태이기 때문에 아주 조금이라도 비집고 들어올 틈을 보여주고 싶지가 않았다.

신중하게 고민하던 도겸이 약간의 편법을 동원했다.

“1695년.”

“뭐어?! 1695년이면…, 조선 시대잖아! 뭐야, 그럼 전생에서부터 알던 사이라고?”

“응. 이로아 씨가 전생에 내 약혼녀였거든. 피치 못할 사정으로 결혼은 못 했고. 열아홉에 헤어져서 죽을 때까지 못 만났어. 겨우…, 시신 수습만 했지.”

“우우…. 정말? 너무 슬프다. 어쩐지 눈망울만 봐도 뭔가 사연이 있게 생겼더라니. 이번에는 둘이 꼭 결혼하면 좋겠다. 형, 내가 진짜로 입에 지퍼 채우고 있을게. 나만 믿어.”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인 해수가 제 가슴을 팡팡 내리치며 다짐했지만, 도겸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아…, 전혀 믿음직스럽지가 않은데…. 해수는 기본적으로 의리는 있는 편이고 가능하면 약속도 잘 지키려고 노력은 한다. 그러나 저도 모르게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폭탄발언이 항상 문제다. 아아, 진짜 너무 불안하네.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는 해수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 슬쩍 시선을 돌리니, 이번에는 지원의 입꼬리에 걸린 명백한 비웃음이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너 진짜 급하긴 급했구나. 이런 낯 뜨거운 수까지 쓰는 걸 보면. 조금 분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양심상 반박은 할 수 없는 노릇이라, 도겸은 지원의 조롱을 그저 묵묵히 견딜 수밖에 없었다.

작업실 책상 앞에 앉은 도겸은 한 시간이 넘도록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가는 것만 카운트하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로아를 주시하고 있는 상태라 남의 이목을 끌지 않고 만나려면 작업실만 한 곳이 없었지만, 조금 더 근사한 곳에서 고백을 하지 못하는 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최선우랑 스캔들만 안 났어도 하다못해 어디 야경이라도 보러 가는 건데. 둘이 보통 사이는 아닌 것 같던데, 누나는 그런 기사를 봐도 아무렇지도 않나. 하긴. 강이서는 드라마만 잘 된다면 악마한테 영혼이라도 팔 수 있는 인간이니까 오히려 적극 권장했을지도 모르지. 아무리 생각해도 최선우는 취향 참 특이해. 남자를 안 믿는 여자라 애초에 접근하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대체 그 고슴도치 같은 여자의 뭐에 꽂혔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던 도겸은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촬영을 마치고 미처 화장을 지울 여유도 없었는지 평소보다 이목구비가 조금 더 또렷해진 로아가 비죽 고개를 들이밀다가 도겸과 눈이 마주치자 수줍게 웃었다.

오늘따라 되게 예쁘네. 굳이 취향을 따지자면 도겸은 화장기가 없는 얼굴을 더 좋아했지만, 전문가가 공들여 꾸며 놓은 얼굴은 또 그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여자들이 이래서 화장을 하는구나. 풀 메이크업 한 로아의 모습을 처음 보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잠시 망각한 도겸은 속으로 조용히 감탄했다. 로아의 얼굴이 달라진 게 아니라 그녀를 바라보는 제 눈이 변한 거라는 사실까지는 자각하지 못했다.

“감독님….”

“어서 와요. 고생이 많았죠? 촬영장으로 데리러 가고 싶었는데, 지금은 안 그러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네. 괜히 신경 쓰시게 해서 죄송해요.”

“로아 씨의 잘못이 아닌 일로 사과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도겸의 부드러운 타박에 잠깐 애매한 표정을 짓던 로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웃었다. 연예계에 발을 들이고 난 뒤로는 항상 제게 고압적인 자세를 취하는 이들만 만났었는데, 이런 말을 해준 사람은 도겸이 처음이었다.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도겸을 좋아하는 마음의 시작은 아마도 그때였을 것이다.

- 앞으로 그 죄송하다는 말은 정말로 나한테 뭐 잘못했을 때만 합시다.

그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제게는 어찌나 다정하게 들렸는지, 악령이 나타나자마자 제 손목을 잡아 등 뒤로 숨기는 모습이 얼마나 든든했는지 모른다. 조희란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순간에도 도겸의 곁에만 있으면 무서울 게 없었다. 그런 마음이 조금씩 커지다 보니 난생처음으로 사람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소심하기만 한 제 안의 어디에서 고백할 용기가 나왔는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 로아 씨가 다른 남자랑 눈을 맞추면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 사진을 보니까 기분이 좀 나쁘더라고.

왠지 너무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서 아무한테도 말을 할 수는 없지만, 자동 녹음된 통화 내용을 밤새 몇 번이나 들었는지 셀 수도 없다. 도겸이 의도한 건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그날 그는 처음으로 제 이름에서 성을 빼고 불렀다. 그것만으로 이미 너무 좋아서 덜컥 무서운 기분이 들 정도였다.

나한테 할 얘기라는 게 뭘까. 나를 받아주시려나? 설마…, 부담스러우니까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는 건 아니겠지? 아니야, 미리부터 괜히 겁먹지 말자. 그런 얘기를 할 분위기는 아니었어. 굳이 나를 여기까지 불러서 그런 말을 하실 분도 아니고. 우와, 나 지금 심장이 터질 것 같아.

불현듯 긴장감이 확 올라온 로아는 호흡을 고르며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손끝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로아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도겸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노래 한 곡을 틀었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어느 정도 긴장을 하고 있는 건 사실 도겸도 마찬가지였다.

“이 노래…, 뭔지 알죠?”

첫 음만 들어도 알 수 있는 감미로운 노래가 흘러나오자 로아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고백하는 날>이네요.”

바로 이 노래 덕분에 도겸과의 연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 들었을 때부터 마음에 쏙 드는 노래였기에, 로아는 어디서든 노래를 부를 기회만 생기면 이 노래를 부르곤 했었다. 처음으로 가수가 아닌 작곡가의 이름을 확인해봤던 노래이기도 했다. 그땐 감독님과 내가 실제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사람 일은 정말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어.

아련한 표정을 짓는 로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겸이 1절이 끝나기도 전에 노래를 중단시켰다. 이제부터 꽤나 무거운 이야기를 할 예정이라 마음이 상당히 불편했지만, 로아와 정식으로 만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니 언제까지나 피하기만 할 수는 없다. 아주 오랫동안 그저 묻어두기만 했던 것들을 모두 꺼내서 정리해야 할 시점이었다.

“로아 씨는 연예인이고, 나도 이 바닥에서 완전히 외부인이라고 보기는 어려워서…. 내가 지금부터 로아 씨한테는 좀 거북할 수도 있는 얘기를 할 겁니다. 나중에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듣게 되느니 차라리 내가 하는 게 나을 것 같았어요. 나를 계속 만나다 보면 어디선가는 듣게 될 얘기거든요.”

“무슨….”

“뭐, 별로 재미는 없는 연애담 비슷한 건데. 그래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그럭저럭 알려진 스토리라.”

긴장으로 눈이 동그래진 로아를 안심시키기 위해 작게 웃어 보인 도겸이 최대한 담백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하며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고백하는 날>을 불렀던 우다현하고는 소꿉친구였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한동네에 살았었고,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같이 다녔어요. 유치원 학예발표회를 할 때부터 다현이가노래에 재능이 있다는 걸 알았죠. 중학교 때 처음으로 그 애를 위해서 노래를 만들었었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사귀기 시작했어요.”

둘 다 만만치 않은 성격이라 많이 다투기도 했지만, 노래 이야기를 하다 보면 은근슬쩍 마음이 풀어지곤 했다. 도겸은 다현의 목소리를 가장 빛낼 수 있는 노래를 만드는 작곡가였고, 다현은 도겸의 의도를 200% 소화하는 재능 있는 가수였다. 둘은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이자, 누구보다도 서로를 잘 이해하는 동료였다. 그때는 평생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정규 1집을 2년 동안 만들었어요. 최종적으로 앨범에 여덟 곡을 수록했는데, 녹음실에서 한 번이라도 불러본 곡을 모두 합치면 아마 100곡이 넘을 거예요.”

열정이 충만하던 시기라 매일같이 밤을 새우면서도 힘든 줄도 몰랐다. 노래 하나가 예쁘게 완성될 때마다 얼마나 뿌듯하고 행복했었는지 말로 다할 수가 없다. 그렇게 공들여서 만든 앨범이 발매되기 전날, 모처럼 친구들을 만난다고 신이 나서 외출했던 다현과 자정이 넘도록 연락이 되질 않았다.

“교통사고가 나서 응급실로 실려 갔다는 전화를 받고 정신없이 달려가다가, 8차선 도로 한복판에 서 있는 다현이를 봤습니다. 그 순간 바로 알았죠. 아, 다현이는 죽었구나.”

차를 대충 갓길에 처박아두고 다가가니, 불안스레 눈동자를 굴리고 있던 다현이 다급하게 그에게 달려왔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도겸의 손을 잡을 수는 없었다. 평소 귀신을 볼 수 있다는 도겸의 말을 그저 농담으로만 여겼던 다현은, 제 영혼이 육신을 벗어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 말을 믿게 되었다.

- 도겸아, 나 정말로 죽었어?

- …그래.

- 그럼 나 이제 여기에 못 있어? 노래도…, 못 해?

차마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던 도겸이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꽉 깨물자 다현은 그제야 서러운 울음을 터트렸다. 더 이상은 안아줄 수도 없고 다독일 수도 없는 연인의 옆에서 묵묵히 하룻밤을 보낸 도겸은, 막 동이 트기 시작할 무렵 노래를 시작했다.

“도저히 뭐라고 위로할 말을 찾을 수가 없어서 노래라도 불러주려고 한 거였는데, 몇 소절 부르기도 전에 다현이의 몸이 조금씩 흐려졌습니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내가 처음으로 중천으로 보낸 망자가 되었죠.”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로아를 가만히 바라보던 도겸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촉촉하게 젖은 볼을 닦아주고 싶어서 손이 움찔거렸지만, 그건 옛사랑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꾹 참았다. 미안해, 다현아. 이게 내가 너한테 지키는 마지막 의리야.

“사고 소식이 기사화되고 나서 앨범이 미친 듯이 팔려 나가더군요. 다현이가 살아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잘되지는 않았을 텐데…. 아무튼 어딜 가도 <고백하는 날>이 들려와서 반년 동안 집 밖에 나가질 못했습니다. 한동안 폐인처럼 지내다가 어떻게 겨우겨우 정신을 차리긴 했는데, 가사가 들어가는 노래는 도저히 쓸 수가 없었어요. 내가 무의식중에 흥얼거리게 될까 봐, 그러다 또 누군가를 보내게 될까 봐.”

“그런데…, 저 때문에….”

“로아 씨 때문이 아니라, 로아 씨 덕분이죠. 이제는 그런 일을 할 때 쓰는 노래는 아예 따로 있고…. 강이서 PD 말마따나 평생 펭귄 엉덩이나 들여다보고 있을 뻔했는데, 로아 씨가 사람 하나 구제한 겁니다.”

한껏 낯빛이 흐려졌던 로아가 구슬 같은 눈물을 눈꼬리에 방울방울 매단 채 바람 소리를 내며 짧게 웃었다. 그렇게라도 웃는 걸 보니 도겸은 마음이 한결 좋았다.

“뭐….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얘깁니다. 혹시 나중에 다른 루트를 통해서 듣게 되더라도 공연히 마음 상하지 말라고.”

“…네.”

“이렇게 울릴 생각은 아니었는데.”

“죄송해요.”

“또 죄송.”

“아….”

난감해하는 로아를 빤히 쳐다보던 도겸이 슬며시 로아에게서 시선을 돌리고는 다시 노래 한 곡을 틀었다. 어? 이거 뭐지? 내 노래랑 비슷한데…. 익숙한 구성이지만 묘하게 낯선 느낌이 드는 노래를 가만히 듣고 있던 로아가 첫 소절을 듣자마자 눈을 커다랗게 떴다.

“감독님….”

“쉬잇. 다 듣고 얘기합시다. 나 이거 너무 낯간지러워서 두 번은 못 하니까.”

고요해진 작업실 안에 로아가 마지막으로 작업했던 <소원>이라는 곡이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원곡보다 반 옥타브 정도 낮아진 멜로디에 가사를 얹은 건 놀랍게도 도겸의 목소리였다.

[네 발걸음을 환히 비추는 햇살이 되고 싶어. 찬 빗방울이 네 어깨를 적실 땐 우산이 되어 줄게. 가파른 길을 오를 땐 손을 내밀어 줄 거야. 언제나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자.]

노래는 순식간에 끝이 났지만 아무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어느새 눈물이 쏙 들어간 로아는 더없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가사를 곱씹었다. 그러니까…, 이걸 내 고백에 대한 답가라고 봐도 되는 건가? 지나치게 낙관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쉽지 않았다.

“감독님. 한 번 더 듣고 싶어요.”

“파일로 줄 테니까 혼자 있을 때 들어요. 나는 여기까지가 한계라…. 행여나 섬뜩한 기분이 들 때는 크게 틀어놓으면 도움이 좀 될 겁니다.”

“이 노래…, 저한테 파일로 주실 거예요?”

목소리 들어가는 녹음은 절대로 안 남긴다고 하셨었는데…. 우와, 정말 답가가 맞나 봐! 순간 완전히 감격한 로아가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자, 못내 멋쩍은 얼굴을 한 도겸이 괜히 딴청을 부리며 목덜미를 주물렀다. 얼굴이 조금 화끈거린다 싶더니 손이 닿는 곳마다 뜨끈뜨끈했다.

커다란 꽃다발을 안길 수도 없고, 눈에 띄는 액세서리를 채울 수도 없어서 급하게 준비한 건데, 생각했던 것보다 로아가 더 좋아하는 것 같아서 몹시 뿌듯했다. 왠지 조금 부끄럽기도 했지만, 아주 오랜만에 느껴 보는 설렘이 보다 압도적이었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괜찮은 기분이었다.

“여깁니다, 대표님.”

성벽 옆으로 난 산책로를 따라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한참 동안 걸어 올라가니, 돌담 모서리에 삐뚤빼뚤하게 벌어진 틈이 하나 있었다. 그 틈을 벌리고 있는 주목을 확 잡아 뽑은 지원이 가차 없이 두 동강을 내자, 주위를 한 번 쓱 둘러본 가온은 신속하게 검을 휘둘러 통로를 소멸시켰다. 날씨가 워낙 추워서 고생스럽긴 했지만 그 덕에 관광객의 수가 확 줄어든 건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만약 관광객이 북적이는 계절이었다면 여러모로 골치가 아팠을 것이다.

“여기가 몇 번째지?”

“정확하게 70번째입니다. 내일 이쪽에서 한 군데 더 둘러보고 그다음에 밴쿠버로 넘어가서 두 군데 더 처리하면, 저희가 찾아낸 통로는 다 마무리하는 겁니다.”

“그러면 총 일흔세 개…. 한 달 동안 모두들 애를 많이 썼네.”

익히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제니스 컴퍼니의 보안실 직원들은 정보 수집에 있어서 대단히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지난번 회의가 끝나자마자 조사를 시작한 직원들은 불과 이틀 만에 전체 가이드에 대한 조사를 마쳤고, 각지의 상급 가이드들은 그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끈질기게 발품을 팔아 수십 개의 통로를 찾아냈다.

그렇게 가이드들이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면, 최종적으로 가온이 대륙별로 이동하며 차근차근 통로를 소멸시켰다.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같은 자리에 또다시 통로가 생성되었다는 보고는 없다.

“11월의 퀘벡은 올 데가 못 되네요.”

“그래도 사람이 없는 편이 낫지. 지금 여기에 관광객이 득실거린다고 생각해 봐. 한밤중에 보안 요원들 잔뜩 거느리고 움직이려면 그게 더 성가셔.”

“저는 차라리 그게 낫습니다. 가온 씨가 이렇게 젖은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걸 보는 것보다는요.”

축축하게 젖은 제 바짓단을 한 번 내려다보고,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지원의 얼굴을 힐끔 올려다보던 가온이 조금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부츠를 신으라는 지원의 권유를 거절하고 부득부득 운동화를 신고 나온 터라 더욱 할 말이 없었다. 사실 조금 전부터 다리에서 한기가 올라와 몸이 으슬으슬 추워지기 시작한 참이었는데, 지금 그런 말까지는 차마 할 수가 없다.

“미안해. 고집부려서.”

“…아닙니다.”

“앞으로는 차 관장이 하라는 대로만 할게.”

입매를 딱딱하게 굳히고 있던 지원이, 제 눈치를 살피는 가온을 보고는 어쩔 수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꼭 이렇게 결정적인 순간에 귀엽게 굴면서 사람 마음을 녹이신다니까. 더 화도 못 내게.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고…. 그저 제가 언제나 가온 씨의 안전과 안락함을 최우선으로 두고 있다는 것만 알아주세요.”

“그건 이미 너무 잘 알지.”

“그럼 됐습니다. 이제 얼른 호텔로 돌아가시죠. 지금 입술이 파래지셨는데,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면 곧 괜찮아지실 겁니다.”

이런…. 내가 말하지 않아도 차 관장은 이미 다 알고 있구나. 그럼 나 지금 꽤 허기진 것도 알고 있으려나?

“목욕을 마치고 나오시자마자 퀘벡에서 가장 맛있는 폭립을 드실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차 관장 진짜로 독심술 하는 거 아니야?”

“그런 재주는 없다니까요.”

손을 꼭 잡은 두 사람이 서로 눈을 맞추며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눈꼬리를 사납게 치켜뜬 하율은 몹시 떨떠름한 얼굴로 매끈한 상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과 10분 전까지만 해도 눈 덮인 도시와 연결되어 있던 통로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이야, 주가온. 능력 있네?”

“송구합니다, 마왕님. 제가 대업을 수행할 인간들을 너무 안일하게 골랐나 봅니다.”

“좌포청장의 탓이 아니야. 중천주가 너무 유능해서 그런 거지.”

은근히 기분이 나빠 보이기도 하고, 묘하게 자랑스러운 것 같기도 한 하율을 흘깃 바라보던 모화영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돈에 눈이 어두워서 제 상사를 팔아먹은 것들이 무능하기까지 하다니. 기가 막혔지만 당장은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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