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 첫사랑, 그리고 영원의 약속 (13/18)

12. 첫사랑, 그리고 영원의 약속

“물러가, 이 사탄들아! 내 몸에 손대지 마!”

막 중천에 출근한 판정원 채윤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들려오는 고성에 가만히 눈살을 찌푸렸다. 아아, 오늘은 일진이 사나운 날이네. 아침부터 이렇게 시끄러우면 하루 종일 진상들만 오던데…. 젠장.

“안녕하세요, 정 선생님.”

“네, 안녕하세요.”

출입구를 지키고 있는 보안 요원과 가볍게 인사를 나눈 채윤이, 서른 명 가량의 무리를 힐끔 쳐다보더니 짧게 혀를 찼다. 적대감이 가득한 눈빛으로 사탄이니 악마니 찾는 걸 보면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소속이 뻔했다.

“어디 교회에서 사고가 났나 봐요?”

“네. 버스 사고요. 단체로 단풍놀이를 가는 중이었대요.”

“아이고, 저런. 명계행 판정을 받은 사람이 많은가 보죠?”

“서른두 명 중에 세 명 빼고 나머지 전부요.”

“아….”

그렇다면 저렇게 단체로 흥분 상태에 빠질 만하지. 본인들은 죽어서 천국에 갈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을 테니까. 고개를 두어 번 주억거린 채윤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있는 이들과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주의하며 조용히 제자리로 향했다. 이럴 때는 괜히 시선이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걷잡을 수 없는 소동이 될 수 있으니 언행을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상실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평소라면 이쯤에서 약간 태도를 달리했을 직원들도 가급적 친절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망자분, 사후의 행선지는 정확하게 생전의 공과를 기준으로 결정되는 겁니다. 정 원하시면 기록을 보여드릴 수도 있어요. 자꾸 이렇게 판정에 불만을 제기하셔도….”

“이런 사악한 것들! 그 뱀 같은 혓바닥을 놀려서 신실한 주의 종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려 하다니! 천벌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직원들의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어지간하면 망자들의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채윤이 순간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신실한 주의 종 좋아하네. 정말 그렇게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살았으면 환생지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겠지.

“우리 이러지 말고 밖으로 나갑시다. 아까 보니까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문을 열고 들어오던데…. 이대로 지옥으로 끌려갈 수는 없잖아요.”

“맞아요. 그건 말도 안 돼요. 이런 악마들에게 그렇게 쉽게 굴복할 순 없어요.”

상황은 갈수록 점입가경이었다. 단체 행동을 결의한 이들이 큰 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자, 일단 멀찍이 떨어져서 추이를 지켜보던 보안 요원들이 삽시간에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쉽게 상대할 수는 없을 것처럼 보였는지 기세등등하던 망자들이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다.

“뭐, 뭐야! 비켜! 이, 이런다고 누가 겁먹을 줄 알고? 어차피 우린 이미 죽었다며!”

“저 문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출입을 위한 문입니다. 망자는 통과하실 수 없습니다.”

“누구 맘대로!”

잠시 주춤하던 망자들이 막무가내로 덤비기 시작하자, 내내 점잖게 응수하던 보안 요원들의 눈빛이 변했다. 이거 말로 해서는 안 되겠네. 강제로 명계수문 안으로 던져 넣어야겠어. 사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보안 요원들이 서로 눈짓하며 막 집결하려는 찰나였다.

땡. 엘리베이터의 도착을 알리는 경쾌한 소리가 울리더니 평소보다 아주 약간 기분이 나빠 보이는 가온이 가볍게 걸어 나왔다. 딱히 인상을 쓰거나 한 것은 아니었는데, 눈치가 빠른 몇몇 직원들은 왠지 그녀의 심기가 꽤나 불편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대표님, 나오셨습니까.”

“응. 서고에 있다가 막 나가려는 참이었는데 너무 시끄러워서.”

보안팀장의 정중한 인사에 무심하게 대꾸한 가온이 망자들을 빤히 바라보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껏 목소리를 높이던 이들이 입을 꾹 다문 채로 재빠르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비록 육신의 숨이 끊어진 상태이긴 했지만, 사람에게는 생존 본능이라는 게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이 보기에도 가온은 함부로 덤빌 수는 없는 상대였다.

그들의 판단은 정확했다.

“신 팀장.”

“네, 대표님.”

“두 번 설득해서 말을 듣지 않으면 강제 집행해. 규정에 그렇게 되어 있지 않나?”

“네, 그렇습니다.”

“일부의 사정을 봐주느라 다른 수많은 망자들을 불안하게 하면 안 되지. 지금 바로 보내.”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가온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보안 요원들이 신속하게 다가와 명계행 판정을 받은 망자들의 팔을 양옆에서 붙들었다. 그러자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던 망자들이 다시금 격렬하게 반항하기 시작했다.

“이거 놔, 이 악마들아! 나는 절대로 지옥에 가지 않아!”

“우리가 왜 지옥으로 가야 되는지 말해 보라고!”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버튼을 향해 손을 뻗던 가온이, 망자들의 발악에 중천 전체가 들썩이자 길게 숨을 몰아쉬더니 천천히 돌아섰다. 이번에는 누가 봐도 확연히 짜증이 난 얼굴이었다. 씩씩거리는 망자들을 빠르게 휘둘러보던 가온이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희가 믿는 그 신이, 그저 열심히 교회 문지방을 넘나들면서 적당히 물질을 갖다 바치면 천국으로 보내주겠다고 하더냐.”

“뭐, 뭐라고?”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내생의 안녕을 꾀한다면 최소한 이 정도의 기본은 지켜야 한다고 일러주지 않더냐?”

가온의 싸늘한 일갈에 크게 당황하던 이들 중 하나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사색이 되어 더듬더듬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 그게 무슨…. 나, 나는 절대로 그런 짓은….”

“사람의 몸을 직접 칼로 찌르는 것만이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다. 너처럼 급우를 집요하게 괴롭히고 따돌려서 결국 죽음을 선택하게 만드는 것도 일종의 살인이지. 시간이 흐르고 네 기억이 가물거린다고 해서 없었던 일이 될 것 같으냐.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는 아직도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내내 주도적으로 무리를 선동하던 이가 벌게진 얼굴로 입을 다물자, 가온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 옆에 선 이에게 옮겨졌다.

“네가 매일 끼고 살던 경전에 분명히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고 쓰여 있던데….”

가온의 말은 길지 않았지만 반향은 컸다. 잔뜩 겁에 질린 채 남편에게 의지하고 있던 아내가 돌연 도끼눈을 뜨더니 남편의 손을 확 뿌리쳤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여자 화장품 냄새 풍기면서 들어올 때부터 바람피우는 줄 다 알았다고! 그래 놓고, 뭐? 의부증? 집에서 편하게 살림하느라 걱정할 게 없어서 쓸데없는 의심만 한다고?”

“아, 아니…. 여보, 그런 게 아니라….”

도적놈들은 한둘이 아니고. 못마땅하게 혀를 찬 가온이 못내 한심한 눈빛으로 무리를 둘러보자, 행여나 감춰 두었던 치부가 드러날까 두려웠던 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는 가온의 시선을 피했다.

“너희가 정녕 진심으로 신을 경외하고 따랐다면 그 교리 역시 충실히 지켰겠지. 하지만 그러지 않았으니 너희의 신이 너희를 ‘구원’하지 않은 것이다. 알아들었으면 이제 얌전히 가야 할 곳으로 가서 악업을 쌓은 대가를 치르도록 해라. 더 소란을 피운다면 나 또한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겠다.”

반격의 의지를 완전히 상실한 스물아홉 명의 망자가 보안 요원의 손에 이끌려 명계수문으로 향했다. 매서운 눈빛으로 그들의 마지막을 지켜보던 가온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을 때였다. 언제 왔는지 조용히 가온의 뒤에 서 있던 지원이 그녀와 눈을 맞추며 생긋 웃었다. 동시에 가온의 눈이 커다래졌다.

“아, 차 관장! 지금 몇 시야? 늦었어?”

“아닙니다. 아직 시간은 넉넉하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그저 조금 오래 걸리시는 것 같아서 한번 올라와 봤습니다.”

“그래…, 다행이네.”

안도의 한숨을 내쉰 가온이 빠르게 걸음을 옮기자, 자연스럽게 손을 내민 지원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감쌌다. 그리고는 엘리베이터가 올라오길 기다리며 가온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야릇한 분위기를 감지한 몇몇이 뜨악한 얼굴로 두 사람을 지켜봤지만, 지원은 알면서도 가볍게 무시했고 가온은 끝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자리를 정돈하다 그대로 굳어버린 채윤은 두 사람이 탄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자마자 옆자리에 앉은 동료에게 빠르게 속살거렸다.

“지금 봤어요? 차지원 가이드님이 대표님 막 만지는 거?”

“글쎄…. 그걸 만졌다고 표현할 수 있나? 대표님의 최측근들은 원래 하나에서 열까지 다 수발드니까….”

“어휴, 참 답답하네. 수발드는 수준이 아니었다고요. 대표님 머리카락 넘겨주다가 손끝으로 볼을 이렇게 톡톡 두드렸다니까?”

“그래? 나는 그것까지는 못 봐서…. 에이, 설마 가이드가 대표님한테 그랬으려고.”

아니,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니까? 동료의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이 답답해 가슴을 퍽퍽 내리치던 채윤은, 제 앞에 선 망자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내렸다. 어쨌든 이제 근무 시간이 시작됐으니 한가하게 잡담이나 나눌 수는 없다.

“망자분, 어서 오세요. 너무 불안해하지 마시고요. 저울 앞에 반듯하게 서세요. 네, 좋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확실히 뭐가 있어. 얼굴을 만지는 손길부터가 딱 남자가 여자를 대하는 자세였다고. 그러고 보니까 논숨에서도 마지막에 단둘이 남았었다고 했지. 집에 가면 남편한테 더 자세히 물어봐야겠다. 이야, 어쨌든 저 친구 패기 하나는 진짜 대단하네. 기계적으로 매뉴얼을 읊으면서도, 채윤은 속으로 조용히 혀를 내둘렀다.

“진짜…, 문어 한 마리를 통째로 넣네?”

커다란 문어가 담긴 라면 그릇을 받아든 가온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지원이 입꼬리를 크게 올리며 씩 웃었다. 남들에게 나사가 두어 개 정도 풀린 얼굴로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고작 라면 한 그릇에 이렇게 감탄하는 가온이 너무 귀여워서 표정 관리가 안 되었다.

“감상 끝나셨으면 이제 잘라드리겠습니다.”

“내가 잘라서 먹을게.”

“제가 해드리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말리지 마세요. 가위도 나름 연장인데 잘못하면 손 다치십니다.”

잘게 손질된 해물과 라면을 한 입 맛보던 가온이 눈꼬리를 곱게 접었다. 먹음직스럽게 잘 익은 문어는 살이 야들야들해서 입안에서 살살 녹았고, 퍼진 걸 싫어하는 가온의 입맛에 딱 맞게 면발은 꼬들꼬들했다. 차 관장이 추천하는 음식은 어쩌면 이렇게 다 맛있을까. 제 취향에 맞는 식당을 찾기 위해 지원이 참고한 리뷰가 200개도 넘는다는 건, 굳이 가온이 알 필요는 없는 얘기였다.

“대표님, 디저트를 바로 드시겠습니까. 아니면 소화도 시킬 겸 잠깐 걸을까요?”

“음….”

지원의 질문에 살짝 난처한 얼굴을 하던 가온이 조금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미안한데…. 일단 좀 쉬고 싶어.”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대번에 낯빛을 바꾸는 지원을 보며 가온이 크게 손사래를 쳤다.

“아니. 나 이 여행을 되게 기대하고 있었나 봐. 잠을 좀 설쳤어. 그랬더니 머리가 좀 아프네. 미안해, 여기까지 와서.”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대표님 맛있는 거 드시고 편히 쉬시라고 온 여행입니다. 당연히 대표님의 컨디션이 가장 중요합니다. 원래 일정도 여유롭게 정했고, 그마저도 성가시면 아무 데도 안 가고 숙소에만 머물러도 됩니다. 친구한테 경관이 아주 근사한 별장을 빌렸거든요.”

“친구? 아…, BS그룹 전략기획실 상무. 이름이 백동하였나? 같은 건물 아래층에 산다는 친구 맞지? 지난번에 집으로 찾아왔던. 백 회장이 그 친구 어릴 때부터 작정하고 후계자로 키웠다던데.”

가온의 입에서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정보가, 그것도 꽤나 구체적인 형태로 등장하는 바람에 지원은 아주 간만에 몹시 당혹스러웠다.

“그걸 대표님께서 어떻게….”

언제나 평정을 잃지 않던 지원이 자못 놀란 기색을 보이자, 아주 재밌다는 표정을 지은 가온이 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차 관장이 이런 얼굴을 할 때가 다 있네.

“그 친구가 차 관장을 엄청 걱정한 모양이야. 꽤 집요하게 내 뒤를 캤다더라고. 뭘 제대로 알아내지는 못했겠지만…. BS그룹에 정보 수집만 담당하는 팀이 따로 있는 걸로 아는데, 아무래도 신변 관리 부분에서는 내 쪽 사람들이 한 수 위라. 프로필을 받아 보니까 거의 9년 가까이 차 관장하고 쭉 동선이 겹치던데? 군대도 같이 갈 정도였으니 굉장히 친한 친구구나 했지.”

“아, 네. 여태까지 거의 비밀이 없는 사이였는데, 이번에는 제가 속 시원히 털어놓질 않으니 답답했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차 관장이 왜? 그렇게까지 차 관장을 염려하는 친구가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지.”

지원의 이모가 급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 백동하는 취임 일정까지 연기하고는 내내 지원의 곁을 지켰다고 했다. 아무리 오너의 피붙이라도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다 조심해야 할 낙하산이 신고식 자체를 미뤘다는 건, 그만큼 지원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아마도 그는 업무보다 우정을 우선시한 대가로 한동안 여기저기에서 시끄러운 소리를 듣는 걸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그건 그렇지만…. 그 녀석이 자꾸 대표님을 한번 뵙겠다고 해서 요즘 아주 난감합니다.”

“보자고 해. 괜찮아. 내가 평범한 애인 노릇을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대표님은 그런 것까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혹시 동석할 일이 생기더라도 대표님 불편하실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지원의 결연한 다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가온이 피식 소리를 내어 작게 웃었다.

“차 관장은 내가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은가 봐. 나도 그 정도 대처는 할 줄 아니까 너무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울 거 없어. 서울로 돌아가면 자리 한번 마련해.”

“…네.”

어쩔 수 없이 대답은 하면서도, 지원의 얼굴에는 영 내키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게 노심초사할 것 없다니까…. 가온은 천 년 가까이 중천주로 살아오면서 그보다 훨씬 더 불편하고 어려운 상황을 수도 없이 겪어 왔다. 제아무리 날고 기어도 새파랗게 어린애 하나 상대하는 건 사실 일도 아니다.

“그럼 이제 그 근사하다는 풍광을 보러 가볼까?”

그런데 지원이 저를 걱정하는 건 희한하게 기분이 좋다. 누군가 제 심장을 간질이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신경은 좀 쓰이지만 썩 나쁘지가 않다. 사람들이 이래서 연애를 하나…?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얼굴을 조금 붉히던 가온은, 그걸 또 귀신같이 알아차린 지원이 즉시 제 이마에 손을 얹자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슬쩍 들어 올렸다.

이런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하는 거지? 가온은 지원의 손길에 얼굴을 내맡긴 채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라 적당한 표현을 찾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나 지금 좀…, 행복한 것 같아.

“바닷바람을 너무 오래 맞으신 것 같습니다. 얼른 차에 타시죠.”

“…응.”

주차장까지는 고작 서른 걸음 남짓이었지만, 애가 닳은 지원은 그것도 참지 못하고 바로 제 겉옷을 벗어 가온의 어깨에 둘렀다. 순식간에 익숙한 향기에 휩싸인 가온은 습관처럼 내뱉던 괜찮다는 말을 끝내 꺼내지 못하고 그저 나직하게 한숨만 내쉬었다. 가슴에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꽉 차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짐 정리 후 간단하게 샤워를 마친 지원이 소리가 나지 않게 주의하며 조용히 침실 문을 열었다. 예상했던 대로 가온은 젖은 머리를 말리지도 못한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핏기가 하나도 없는 창백한 낯빛을 보고 있으려니 너무 속이 상해서 절로 미간이 일그러졌다.

- 나 이 여행을 되게 기대하고 있었나 봐. 잠을 좀 설쳤어.

가온의 말을 떠올리던 지원이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여행을 기대해서가 아니라 망자를 검으로 벤 것이 마음에 걸려서겠지. 그날 이후로 점점 안색이 나빠진 걸 보면 계속 잠을 못 잔 모양이고. 그래도 나랑 있을 때는 잠을 좀 자는 게 그나마 다행인가.

파주 별장에서 조희란에게 검을 던진 이후로 가온은 줄곧 심란한 얼굴이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이 자책하고 있는 걸 뻔히 안다. 중천주라는 것도 참 할 짓이 못 되는구나. 수많은 생명의 무게를 혼자서 감당한다는 게 얼마나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일일까. 안타깝게도 그 괴로움의 정도를 평범한 인간의 입장에서는 감히 가늠조차 할 수가 없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고작 이 정도지.

못내 착잡한 얼굴로 마른 수건을 챙겨온 지원이 조심스럽게 침대에 앉아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꾹꾹 눌렀다. 열린 창으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것이 살짝 거슬렸지만, 만개한 금목서의 향이 너무 좋아서 일단 그대로 두었다. 여러 대안이 있었지만, 굳이 동하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가며 이 별장을 빌린 것은 오로지 금목서 때문이었다.

- 이게 무슨 향이야?

- 금목서입니다. 따뜻한 곳에서만 자라는 나무라 서울에서는 보기 힘들죠.

- 금목서? 아아…, 계화수. 그래, 계림에서 이 나무를 본 적이 있어. 계화수에 꽃이 피면 이런 향이 나는구나. 정말 좋다. 괜히 만리향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네.

당연히 좋아할 거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가온이 보인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눈을 붙여야 하는데, 좀처럼 정원에서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아 억지로 등을 떠밀어야 했을 정도였다. 향기에 민감한 줄은 알았지만…. 대여섯 종류의 향수를 상황에 맞게 번갈아 쓰던 지원이 최근 한 가지만 고집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유독 그 향기를 좋아하는데 어떻게 다른 걸로 바꾸냐고.

아무튼 잘 자고 있는 걸 보니까 마음이 좋네. 제주도에 오길 잘한 것 같아. 마침 시기도 딱 좋았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지원이 이불을 끌어 올려 가온의 어깨 위로 잘 덮어주었다. 그리고는 아주 정성스러운 손길로 다시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미동도 없이 자고 있던 가온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 건, 젖었던 머리카락이 완전히 보송하게 마른 다음이었다. 기분 좋게 후각을 자극하는 향기에 미소를 지으며 눈꺼풀을 들어 올린 가온은, 주위가 어둑해진 것을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몇 시야?”

“8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8시? 내가 낮잠을 다섯 시간이나 잤다고? 경악한 가온이 망연자실하게 지원을 바라보자,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던 지원이 조금 더 부드럽게 눈꼬리를 접었다. 더없이 만족스러워 보이는 그의 미소에 가온은 더욱 미안해졌다. 한두 시간 쉬었다가 일어나려고 했는데…. 모처럼 마음먹고 온 여행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하루를 버리다니.

“깨우지. 심심했을 텐데.”

“전혀 심심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충실한 시간을 보냈고, 무엇보다 대표님이 한숨 푹 주무셔서 마음이 좋습니다. 이제야 얼굴에 혈색이 좀 도네요. 지난 사흘 동안 한숨도 못 주무셨죠?”

“…한숨도 못 잔 건 아니야.”

“대표님. 이제 저한테는 그런 걸로 거짓말 못 하십니다. 저는 대표님 얼굴만 봐도 어젯밤에 몇 시간을 주무셨는지, 식사는 제대로 하셨는지, 견적이 바로 나옵니다. 제가 그런 쪽에서 헛다리 짚는 거, 한 번도 보신 적 없을 겁니다.”

“….”

딱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가온이 입을 꾹 다물고 있자, 크게 입꼬리를 올린 지원이 다정하게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이제 나오세요. 식사는 정원에서 할 거니까 카디건 꼭 입으시고요. 주무시는 동안 관리인이 바비큐 준비를 해 놓고 갔습니다. 제주도에 오셨으니 흑돼지도 한 번 드셔야죠.”

지원이 숯불 위에서 노릇노릇하게 구워준 삼겹살은, 여태까지 가온이 먹어본 것 중에 가장 맛있는 돼지고기였다. 분위기를 내느라 두어 모금 마신 감귤 막걸리도 그렇게 입에 달 수가 없었다. 살짝 취기가 올라오는 것이 술 때문인지, 아니면 고기 굽는 냄새를 덮을 정도로 진하게 풍겨오는 금목서 향기 때문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기분이…, 이렇게 좋을 수도 있는 거구나. 행복이라는 게 바로 이런 거였어. 아름다운 곳에서 좋아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더 바랄 것이 없네. 평생 처음으로 경험하는 완벽한 즐거움에 들뜨다 못해 살짝 겁이 날 정도였다.

“다 드셨으면 이제 좀 걸을까요?”

제게 손을 내미는 지원을 빤히 쳐다보던 가온이 살포시 그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그러자 가볍게 힘을 주어 가온을 일으킨 지원이 그녀를 바짝 당겨 안으며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는 어색하게 남겨진 한쪽 팔을 어쩌지 못하고 허둥대는 가온의 손을 붙잡아 제 허리에 얹었다.

“…!”

뻣뻣하게 굳은 가온을 모른 체하며 그대로 정원을 반쯤 돌던 지원이 결국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웃었다. 근육이 움직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 손가락이 너무 어여쁘고 가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하하하. 대표님, 너무 귀여우신 거 아닙니까? 진짜 사람 정신을 못 차리게 하시네요.”

“그건 내가 할 말이야. 나 지금 등에 식은땀이 다 났어.”

참았던 숨을 크게 내쉬는 가온을 내려다보며 내내 싱글거리던 지원이 표정을 조금 굳혔다. 아, 나는 이 여자가 난처해하는 게 왜 이렇게 예쁘지? 내 취향이 별난 걸까, 아니면 다른 사람은 못 보는 모습이라 그게 기꺼운 건가. 순간 가온이 더 당황하도록 몰아붙이고 싶은 강렬한 충동이 일었지만, 지원은 머릿속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를 단숨에 끝냈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제 욕심을 차리는 것보다는 가온의 심기를 살피는 게 우선이다.

내가 한 번 봐줬다. 편하게 쉬려고 내려온 건데, 이렇게 긴장하고 있으면 저녁 먹은 게 소화도 안 되겠어. 나직하게 웃음을 흘린 지원이 한 발자국 옆으로 물러나며 가온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는 다시 천천히 걸음을 뗐다.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걷던 지원이 한껏 낮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표님.”

“…응?”

“금목서의 꽃말이 뭔지 아십니까?”

“글쎄.”

“유혹, 당신의 마음을 끌다, 그리고….”

왠지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아 잠깐 뜸을 들이던 지원이 한결 진중해진 눈빛으로 가온의 말간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첫사랑입니다.”

“…!”

순간 가온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런 식의 화법에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그가 지금 단순히 꽃말에 대한 정보를 저에게 제공하고자 말을 꺼낸 게 아니라는 건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내가…, 차 관장의 첫사랑이라고? 설마…. 이렇게 여자의 심리에 능통한 남자한테 그간 깊이 교제했던 애인이 하나도 없었다는 건 말도 안 돼. 차지원은 가온의 눈썹이 살짝 들리는 것만 보고도 어디가 불편한지, 필요한 게 무엇인지 즉각 알아차리는 남자였다. 당연히 상당한 경험을 바탕으로 축적한 스킬이라고 생각했었다.

“지금 그 말…, 나를 두고 하는 말이야?”

가온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입꼬리를 크게 들어 올린 지원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그렇지 않다면 제가 왜 이 좋은 분위기에서 굳이 제 무덤 파는 소리를 하겠습니까.

“네. 대표님이 제 첫사랑이십니다.”

“…정말?”

“정말입니다. 제가 왜 그런 문제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조금만 조사하면 다 나오는 일인데요. 대표님의 신변 관리 담당자들이 아무리 털어도 사진 한 장 나오는 게 없을 겁니다. 심지어 저는 프롬에도 여성 파트너를 동반한 적이 없으니까요.”

“진짜로 여태까지 살면서 좋아했던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고? 사귄 적도 없고?”

“네. 만나서 차 한잔하고, 영화 보고, 밥 먹고…. 그 정도는 몇 번 했었지만, 정식으로 사귄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학부 졸업하고 난 후로는 그 정도도 아예 없었고요.”

그럴 수가 있나? 주위에서 가만히 내버려두질 않았을 것 같은데. 의아한 얼굴로 재차 확인하던 가온이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체 왜?”

“왜냐고요? 굳이 이유를 따진다면…, 대표님을 만나기 전에는 지옥이라도 쫓아가고 싶을 만큼 마음을 흔드는 여자가 없었습니다.”

지옥…. 하, 그래. 진짜로 기어이 지옥까지 따라온 남자였지. 묻는 말에 순순히 대꾸하던 지원은 헛바람을 내뱉는 가온을 바라보며 슬며시 미간을 좁혔다. 안 믿는 건가? 가온의 성격상 처음이라는 단어에 크게 의미를 두거나 대단히 감동을 받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의심을 사는 것만큼은 참을 수가 없다.

“제가 과거가 복잡한 남자처럼 보이십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나는 그냥 차 관장이 여자에 대해서 너무 잘 아니까…. 당연히 경험에서 얻은 지식이라고 생각한 거지.”

“저는 여자에 대해서 잘 아는 게 아니라, 대표님한테 관심이 많은 것뿐입니다. 관심이 있으니까 계속 쳐다보게 되고, 보다 보니 필요로 하시는 걸 알게 되는 거죠. 다른 여자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응…. 미안해.”

눈매를 갸름하게 접었던 지원이 곧 피식 소리를 내며 짧게 웃었다. 어이없는 오해에 살짝 기분이 상할 뻔했지만, 가온의 신속하고도 깔끔한 사과에 금세 마음이 풀렸다. 나는 뭐, 대표님 앞에서는 속도 없고 밸도 없는 놈이니까.

“아무튼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왜 이렇게 서투냐는 말을 듣는 것보다는 낫네요.”

못내 겸연쩍은 표정을 짓고 있던 가온이 지원의 너스레에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지나가는 말처럼 은근하게 물었다.

“금목서는 서울에서는 아예 키울 수 없는 건가?”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곳에서는 살기 어렵다고 했지만, 무영당의 정원은 워낙 볕이 좋아서 괜찮을 것 같기도 합니다. 아니면 화분에 심어서 겨울에는 실내로 들여놓아도 되고요. 묘목을 사서 키우려면 너무 오래 걸릴 테니까 동하한테 한 그루 달라고 할까요?”

“그래도 돼?”

“그럼요. 그 녀석도 제 별장에서 꽃나무 여러 그루 뽑아 갔습니다. 금목서가 이렇게 많은데, 이 중에서 한 그루도 못 주겠다고 하면 연을 끊어야죠. 걱정 마세요. 튼실한 걸로 골라서 내년 가을에는 무영당에서도 만리향을 즐기실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가온이 뭔가를 갖고 싶다고 하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다. 여태까지 손바닥만 한 티포트 하나 외에는 딱히 물건을 욕심내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렇게 물욕이 없는 사람이 모처럼 원하는 건데 어떻게든 안겨 드려야지. 가장 수형이 아름다운 나무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지원이, 속삭이듯 중얼거리는 가온의 목소리에 동작을 딱 멈췄다.

“향기도 정말 근사하지만, 그보다는 꽃말이 마음에 들어서 가까이 두고 보고 싶어.”

지원이 저를 돌아보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귓불이 붉어진 가온은 그와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공연히 먼 하늘만 바라보았다. 그러면서도 꿋꿋하게 제 할 말은 끝까지 했다.

“나한테도 차 관장은 첫사랑이라.”

“…!”

잠깐 멈칫했던 지원이 서서히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안면 근육이 땅기는 느낌이 들 정도였지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입꼬리는 도무지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똑똑.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에 가볍게 웃음을 흘린 지원이, 펼쳐 놓기만 했지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던 책을 미련 없이 덮었다. 폭탄 발언을 던지고 목덜미까지 벌게졌던 가온이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가 버린 지 꼬박 두 시간 만이었다.

낮잠을 그렇게 주무셨으니 당연히 잠이 안 오겠지. 그러다 또 늦잠을 잘까 봐 걱정이 되셨을 테고. 만면에 웃음을 띤 지원은 너무 들뜬 목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연인의 부름에 다정하게 응했다.

“네, 대표님.”

“들어가도 돼?”

“그럼요. 들어오십시오.”

달칵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지만, 문가에 선 가온은 쉽사리 안으로 발을 들이지 못했다. 한밤중에 남자의 방문을 두드리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는 있구나. 격세지감이 드네. 나를 남자 취급도 안 하던 게 불과 반년 전인데. 망설이는 가온을 심원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지원이 성큼성큼 다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가온의 등 뒤로 손을 뻗은 지원이 탁 소리가 나게 문을 닫았고,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고요함 속에서 난처하게 눈동자만 굴리던 가온이 마른침을 한 번 꿀꺽 삼키더니 살짝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무 잠이 안 와서….”

“네. 그러실 것 같았습니다.”

“이러다 새벽에 잠들면 늦잠을 잘 것 같더라고. 오늘도 자느라 아무것도 못 했는데, 내일도 그러면 안 되니까.”

“쉬러 온 거니까 늦게까지 주무셔도 됩니다. 딱히 대단한 일정을 준비한 것도 아니고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입니다.”

“그래도. 그러면 차 관장이 너무 지루하잖아.”

“저는 대표님과 단둘이 여행을 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습니다. 정 아쉬우면 언제든 다시 오면 되죠.”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지만, 아마도 지원은 이번 여행을 위해 가온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것들을 준비했을 것이다. 그간 지원은 어떤 돌발 상황이 발생해도 언제나 여유롭게 대처했었다. 물론 뛰어난 순발력을 타고나기도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모든 우발적인 사태를 해결할 수 없다. 지원이 무엇을 할 때든 적어도 두세 가지의 대안을 항상 준비하고 있다는 걸 가온은 아주 최근에 알았다.

“내일 일정이 어떻게 되는데?”

“대표님이 하고 싶은 걸 고르시면 됩니다. 메밀꽃이나 코스모스를 보러 가도 되고, 경치도 좋고 분위기도 좋은 카페에서 느긋하게 차를 마셔도 좋고, 몸을 좀 움직이고 싶으시면 귤 따기 체험을 해도 되고요. 제가 알아본 곳에서는 청귤청을 만들 수도 있다고 합니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다양한 종류의 일정이 줄줄이 나온다. 그가 제 취향을 꿰고 있는 건 이제는 그리 놀랍지도 않은 일이다. 잠시 고민하던 가온이 후보지에 없던 일정을 하나 골랐다.

“낚시는 어때?”

“낚시요? 해보신 적 있으세요?”

“없어.”

“그럼 너무 본격적인 건 부담스러울 테고…. 대표님은 냄새에 민감하시니 생미끼를 쓰지 않는 루어 낚시가 좋겠습니다. 요트를 타고 바다를 구경하면서 무늬오징어를 잡는 코스가 있는데, 그 정도가 적당히 재미도 있고 괜찮을 것 같습니다.”

물 흐르듯 나오는 설명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말문이 턱 막혀서 한참 동안 입술만 뻐끔거리던 가온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조금 웃었다.

“하…. 미안해, 차 관장. 떠보려던 건 정말 아니었는데, 설마 그런 것도 알아봤을까 싶어서 한번 물어봤어. 낚시는 흥미 없어. 앞으로도 할 일은 없을 거야.”

“네, 알고 있습니다. 그저 만약을 대비한 겁니다.”

“귤 따기 체험이 제일 재밌을 것 같아. 청귤청도 만들고 싶어. 메밀꽃도 보고 싶고.”

“다 하시면 되죠. 시간은 많으니까요.”

꽤 기대되는 얼굴로 눈을 빛내던 가온이 갑자기 낯빛을 흐리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 덩달아 표정이 변한 지원이 비스듬히 고개를 숙여 그녀와 눈을 맞췄다. 염려가 가득 담긴 눈동자를 보고 있으려니, 가온은 어쩐지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대표님.”

“그런데 잠이 안 와. 약을 먹긴 싫은데….”

“저도 그 방법은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말씀을 드리면, 대표님이 드시는 수면제는 비교적 중독성이 강한 편입니다. 당연히 다른 약으로는 효과를 못 보니까 굳이 그 약을 드시는 거겠지만….”

“응, 그래서 안 먹은 지 한참 됐어. 그럼 어떻게 해야 잠이 올까?”

글쎄…. 밤이 늦어서 어딜 돌아다니기도 애매하고, 운동을 시키자니 대표님의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은 게 마음에 걸리고. 잠시 고민하던 지원이 문득 냉장고에 들어 있던 커다란 유리병 하나를 떠올렸다. 아, 이 집 그거 맛있지. 알코올 성분도 거의 날아가고 없을 테니까 괜찮을 것 같은데….

“대표님, 그럼 뱅쇼를 한 잔 드시겠습니까?”

차갑게 보관 중이던 뱅쇼를 따끈하게 데우자, 주방에 달콤하고 향긋한 과일 향이 가득 퍼졌다. 동하의 아버지가 프랑스 유학 시절에 하숙집에서 배워왔다는 레시피는 이 집안의 자랑거리 중 하나다. 입맛이 까다로운 지원도 처음 맛을 봤을 땐 눈이 휘둥그레졌을 정도였다. 가온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이거 뭐야? 왜 이렇게 맛있어?”

“이 집 식구들이 사람을 초대할 땐 항상 내놓는 음료입니다. 한 번 끓인 거라 알코올 성분은 별로 남아 있지 않지만, 그래도 일단은 술이니까 딱 그거 한 잔만 드세요. 이것도 권 여사님께서 아시면 저 크게 한소리 듣습니다.”

“당연히 비밀이지. 권 여사가 알면 나도 혼나.”

배시시 미소를 지은 가온이 양손으로 머그잔을 들고는 따끈따끈한 뱅쇼를 조금씩 들이마셨다. 그 모습이 마치 우유를 홀짝이는 아기 고양이 같아서 지원은 심장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아, 너무 귀여워서 진짜 미치겠다. 술 마시는 성인 여자가 이렇게 귀여울 일이야? 아무리 눈에 힘을 주려고 해도 반달처럼 휘어버린 눈꼬리가 도무지 제자리를 찾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절로 웃음이 났다.

“몸이 되게 따뜻해지네.”

“원래 겨울에 감기를 예방하려고 마시는 음료입니다.”

“술맛은 전혀 안 나는데?”

술은 한 잔도 못 마신다더니 생각보다는 잘 드시네. 아까 저녁 먹으면서 막걸리를 조금 마셨는데도 멀쩡하시고. 뱅쇼를 커다란 머그잔 하나 가득 마시고도 가온의 눈빛은 평소처럼 또랑또랑했다. 그 눈빛에 속아 한 잔을 더 부어 준 것이 화근이었다.

“대표님.”

“응?”

“괜찮으십니까?”

“응, 왜? 나 안 괜찮아 보여?”

“…아닙니다.”

몹시 복잡한 얼굴을 한 지원이, 눈꼬리를 곱게 접은 가온을 빤히 쳐다보다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지원의 눈에도 가온이 크게 취한 걸로 보이지는 않았다. 눈빛은 맑았고, 자세도 언제나처럼 반듯했다. 많은 대화가 오가는 동안 가온은 말 한마디도 더듬지 않았고, 말투 역시 어눌한 데 없이 또렷했다.

문제는 눈웃음이었다. 마냥 무표정하던 얼굴에 흘러넘칠 것처럼 가득 담긴 미소는, 지원의 심장에 말 그대로 직격탄을 날렸다. 처음에는 그 고운 미소가 너무 예뻐서 얼빠진 사람처럼 헤실거리고 있었지만, 가온이 소리를 내어 웃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지원의 표정은 눈에 띄게 굳어 갔다.

주사가 웃는 거라니…. 세상 이렇게 해로울 수가 있나. 그래, 대표님도 사람이니까 술을 마시면 긴장이 풀릴 수도 있지. 안쓰러울 정도로 각을 잡고 있을 때보다 훨씬 보기 좋은 건 사실인데…. 아무튼 이건 내 실수야. 내 발등을 내가 찍었어.

평소보다 아주 약간 높아진 웃음소리가 고막을 간질이면, 지원은 어금니를 사리물며 주먹을 꽉 쥐어야 했다. 오늘따라 유독 도드라져 보이는 애교 살과 촉촉하게 과즙이 묻어날 것 같은 발간 입술을 만지작거리고 싶어서 손가락이 근질근질했다.

하지만 지금 손을 대면 그걸로 끝나지 않는다. 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확 치받는 걸 느낀 지원이 후끈거리는 열기를 달래기 위해 평소에 즐겨 마시지 않던 차가운 맥주 한 캔을 땄다. 단숨에 절반을 들이켰지만, 애석하게도 그다지 도움이 되진 않았다. 내뱉는 숨에 더운 기가 섞이고 있다는 걸 자각한 지원이 조용히 혀를 찼다. 정신 차려, 차지원. 진짜 미친놈처럼 왜 이래, 오늘? 뭘 얼마나 마셨다고 취한 척이야.

“대표님, 사람들 앞에서 술을 드신 적이 있습니까?”

“으음…. 거의 없는 것 같은데. 원래도 술을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닌 데다, 예전에 한 번 크게 고생한 적이 있어서 한 반세기 정도는 입에도 안 댔지.”

“하아…, 반세기요….”

내가 왜 이런 짓을 한 걸까. 한밤중에 단둘이 있는 외딴 별장에서 겁도 없이…. 일단 진심으로 반성한 지원이 방긋거리는 가온과 눈을 맞추며 간절한 목소리로 신신당부했다.

“약속해주십시오, 대표님. 앞으로도 술은 저하고만 드시는 겁니다.”

“하하, 내가 다른 사람하고 술 마실 일이 뭐가 있다고.”

“그러니까요. 약속하세요, 어서요.”

“응, 약속할게.”

머그잔을 꼭 붙든 채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가온을 보고 있으려니 눈앞이 핑 도는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오려는 험한 욕설을 간신히 삼킨 지원은, 가온이 머그잔을 내려놓자마자 서둘러 식탁을 정리했다. 이대로 조금만 더 있으면 제가 진짜 무슨 짓을 할지 장담할 수가 없다.

“대표님. 이제 주무실 수 있겠습니까?”

“아니. 몸이 좀 나른해지긴 했지만, 바로 잠이 올 것 같진 않아.”

하지만 정작 제게 불을 지른 당사자는 아무 위기감 없이 마냥 태평하기만 했다. 그럼 어쩌지? 아예 술을 더 먹여야 하나? 아니야, 그러면 나 오늘 진짜로 사고 친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재빨리 두뇌를 회전시킨 지원이 가까스로 대안을 하나 찾아냈다.

“대표님. 그럼 저랑 영화 한 편 보시겠습니까? 어떤 장르를 좋아하십니까.”

“영화 잘 몰라. 차 관장이 추천해주는 걸로 볼게.”

일단 가온을 침실로 들여보낸 지원이 동하의 컬렉션을 샅샅이 뒤져서 예전에 한 번 관람을 시도했다 포기한 3시간짜리 프랑스 영화 DVD를 찾아냈다. 주인공 두 사람이 장소만 옮겨가며 굉장히 철학적인 주제로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었는데, 얼마나 따분했는지 웬만하면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초반 30분을 넘기지 못했었다.

“차 관장이 좋아하는 영화야?”

“그렇다기보다는…. 예전에 끝까지 보질 못해서 기회가 되면 다시 한번 보려고 했던 영화입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 것은 영화가 시작되고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적당히 술기운이 올랐으니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곧 잠이 들 거라고 생각했지만, 가온은 의외로 두 사람의 대화에 큰 흥미를 보이며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했다. 뭐야, 이거 왜 재밌지? 그땐 내가 너무 어려서 이해를 못 했던 건가? 이렇게 위트가 넘치는 대사였다고?

심히 당혹스러워진 지원이 바싹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훑었다. 언제든 가온이 곯아떨어지면 그대로 잠을 잘 수 있도록 일부러 침대 위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러다가는 꼼짝없이 침대 위에서 3시간을 버티게 생겼다. 제가 보자고 골라온 영화였기 때문에 중간에 도망을 가기도 곤란하다. 한 번 침대를 의식하고 나니 옆에서 가온이 숨만 조금 크게 쉬어도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설상가상으로 무려 30분 동안 입에 침이 마르도록 토론에 열중하던 두 남녀는, 갑자기 서로를 야릇한 시선으로 바라보더니 에로스에 진심인 프랑스인답게 거침없이 침대로 뛰어들었다. 그와 동시에 피식 웃음을 흘리던 가온이 슬쩍 고개를 돌려 매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았다. 억울했다.

“아닙니다, 대표님. 절대로 아닙니다.”

“하하, 뭐가?”

“저는 정말로 뭔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이 영화를 고른 것이…. 하아, 됐습니다. 다 제 불찰이니 그냥 보십시오.”

왠지 변명을 하면 할수록 더 이상해지는 분위기라, 거칠게 마른세수를 한 지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푹신하게 받쳐둔 베개 위로 벌렁 누워버렸다. 아아…, 나도 이제 모르겠다.

“차 관장이 이렇게 당황하는 거 처음 보네.”

“대표님은 아주 즐거우신가 봅니다.”

“응. 차 관장하고 같이 있으면 항상 즐겁지.”

가만히 눈을 감고 가온의 목소리를 듣고 있던 지원이, 웃음기가 배어나던 목소리가 사뭇 진지해진 것을 기민하게 감지하고는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많이 행복하고…, 좋아.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

“뭘 해도 다 좋고, 아무것도 안 해도 그냥 다 좋아. 차 관장만 내 옆에 있으면.”

천장을 올려다보며 목울대를 크게 움직이던 지원이 천천히 옆을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내내 만지고 싶었던 얼굴로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달라붙는 것 같은 보들보들한 입술을 엄지로 살살 매만지던 지원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지금 사력을 다해서 참고 있는데, 그런 말씀을 하시면 어떡합니까.”

“왜 참고 있는데?”

“대표님은 취하셨고, 저는 한참 전부터 제정신이 아니니까요.”

“나 안 취했는데…. 취한 사람처럼 보여?”

단단하게 입매를 굳힌 지원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더니 여전히 생글거리고 있는 가온의 턱을 가볍게 받쳐 들었다. 더없이 다정하고 부드러운 손길이었지만, 가온을 내려다보는 눈빛에는 횡포한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대표님. 지금 도망을 가시려면 취한 척이라도 하셔야 합니다.”

“나…, 안 취했어.”

가온의 허락이 떨어졌다. 그녀의 흔들림 없는 시선을 똑바로 응시하던 지원이 눈썹을 크게 한 번 꿈틀대더니 가온의 허리를 바짝 당겨 안고는 바로 고개를 꺾었다. 그리고는 가볍게 다물린 입술을 벌리고 그대로 진입했다. 정중하고 진득하게 기다리던 평소와는 달리 몹시 거칠고 급한 몸짓이었다.

한참 동안 가온의 따뜻한 숨을 양껏 탐하던 지원이 불현듯 매끈한 이마를 확 좁혔다. 다른 여자의 신음소리가 너무 거슬려. 맞붙은 입술을 떼지 않은 채 자못 신경질적인 손짓으로 침대 위를 더듬던 지원이 간신히 리모컨을 찾아 TV 전원을 꺼버렸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적막감이 다소 부담스러웠던 가온이 슬쩍 몸을 뒤로 물리자, 일단 순순히 놓아준 지원이 나직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대표님 목소리만 듣고 싶어서요.”

“괜찮았었는데…, 갑자기 부끄러워졌어.”

“어떡하죠? 이제부터는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워지실 텐데.”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하던 지원이 곧 못내 미안한 얼굴을 했다. 그녀의 볼이며 어깨를 쓰다듬는 손길에도 지원의 안타까운 심정이 물씬 묻어났다. 아프게 않게 해줄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죄송합니다, 대표님. 제가 너무 서툴더라도 이해해주십시오.”

“서툰지, 능숙한지…. 내 능력으로는 구분할 수 없어.”

“그나마 다행이네요.”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스르륵 옷자락 떨어지는 소리에 달뜬 신음소리가 섞여 들더니, 차분하던 공기가 격하게 들썩이기 시작했다. 방 안에 다 가두지 못한 농염한 열기가 슬금슬금 새어 나가자, 만 리를 간다는 진한 향기도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따사로운 아침 햇살이 얼굴 위로 길게 드리웠다. 눈이 부셔서 설핏 잠이 깬 가온이 미간을 조금 좁히며 돌아누웠다. 낮잠을 그렇게 자고도 또 잠이 오긴 했구나. 여전히 잠에 취한 채로 작게 하품을 하던 가온은 자신이 누군가와 한 이불을 덮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놀란 눈을 번쩍 떴다.

“…!”

맨몸으로 남자의 품 안에서 눈을 뜨는 건 맹세코 평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잠결에도 제가 움직거리는 걸 귀신같이 알아차린 지원이 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자, 크게 당황한 가온은 그대로 뻣뻣하게 굳었다. 당황스러움이 가득한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상황을 파악하던 가온이 어젯밤의 사건을 떠올리고는 삽시간에 얼굴을 붉혔다.

- 저를 보세요. 다른 데 쳐다보지 마시고요.

- 못 보겠어.

- 아니요. 하시게 될 겁니다.

벌게진 얼굴로 어젯밤의 사건을 반추하던 가온이, 뜨끈하게 달아오른 볼을 쓸어내리다가 뭔가 이물감이 느껴지는 것이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걸 발견했다.

“이게…, 뭐야?”

“대표님께 영원히 충성을 맹세하겠다는 저의 다짐입니다.”

처음 들어보는 꽉 잠긴 목소리가 낯설어 황급히 올려다보니, 지원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그 와중에도 섬세하기 그지없는 얼굴선은 진심으로 감탄스러웠다.

“깨어 있었어?”

“방금 깼습니다.”

“이런 건 대체 언제….”

천천히 눈을 뜬 지원이 가온의 손을 잡고는 제가 끼워 놓은 반지 위에 정성껏 입을 맞췄다. 사실 원래는 제대로 된 계획이 있었다. 진부하지만 정석대로 경치가 근사한 레스토랑을 예약해두었고, 시간에 맞춰 특별 주문한 케이크와 꽃다발이 배달될 예정이었다. 이 반지는 바로 오늘 저녁에 그곳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내밀었어야 했다.

하지만 어젯밤, 곤히 잠든 가온을 한참 내려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들끓는 감정이 주체가 안 되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예쁠 수도 있나? 내 눈에 이렇게 예쁘면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마찬가지 아닌가? 다른 놈들이 눈독을 들이지 않도록 당장 뭐라도 해야 했다. 벌거벗은 채로 허겁지겁 반지를 끼운 게 새삼 너무 어이가 없어서, 지원은 가온의 이마에 입을 맞추면서도 허탈한 얼굴로 조금 웃었다.

“쉬고 계십시오. 아침을 준비해서 가져오겠습니다.”

“무슨 중병이 들었다고. 주방에서 그냥 먹으면 되지.”

“누워 계세요. 제 마음 편하려고 그러는 거니까요. 밤새 좀 앓으셨습니다. 열도 좀 났고요.”

“내가?”

“네. 죄송합니다.”

사과를 받을 일인가. 딱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가온이 조금 민망한 얼굴로 지원의 시선을 피했다. 다행히 짧게 웃음을 흘린 지원은 대답을 종용하지 않고 조용히 침실을 나섰고, 가온은 그제야 비로소 이불을 걷고 일어날 수 있었다.

내가 잠옷을 어디에 뒀더라. 아…, 내가 뭘 어쩌진 못했고 차 관장이 바닥으로 던진 것 같았는데. 방 안을 두리번거리던 가온이 탁자 위에 곱게 놓인 제 잠옷과 속옷을 보고는 작게 헛웃음을 지었다. 대체 어떤 얼굴로 이걸 주워서 개고 있었을까. 많은 생각을 오가게 하는 장면이었다.

가온을 침대에 눕히고 잔뜩 열에 들뜬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던 지원은 언제나처럼 노련한 손길로 가온의 잠옷을 단숨에 벗겨 냈다. 잠옷을 집어 던지는 성마른 손짓과는 달리, 미소가 떠나지 않던 얼굴은 제법 여유로워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얄팍한 호기로움은 그리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 괜찮으십니까, 대표님. 너무 아프시면 바로 말씀하세요. 계속하실 수 있겠습니까?

- 괜찮아. 아프지 않아. 대체 몇 번을 물어보는 거야.

- 지금 제가 저를 믿을 수가 없어서 그럽니다. 행여나 제가 너무 거칠게 굴거나 말을 듣지 않거든….

- 알았어. 발로 차든 물어뜯든 한다니까? 내가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1분 전에 한 얘기는 안 잊어버려.

익숙하지 못한 통증에 아주 잠깐 인상을 찌푸렸을 뿐이었다. 그러나 대번에 표정이 변한 지원은 마치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그리고는 가온이 숨만 조금 크게 쉬어도 일일이 신경을 곤두세우며 똑같은 당부를 수도 없이 되풀이했다.

매사에 자신만만하던 차지원이 그토록 불안해하며 안절부절못하는 건 처음이었다. 어차피 비교 대상이 없었기에 지원이 서툴게 군다는 느낌을 받진 않았지만, 그가 여느 때와는 달리 지나칠 정도로 조심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흥분으로 눈언저리가 온통 붉어졌으면서도 순간순간 어찌나 망설이면서 멈칫거리는지 보기에 심히 딱하기까지 했다.

- 차 관장, 그냥 해. 나 안 망가져.

- 하아…. 차라리 제가 아팠으면 좋겠습니다.

- 나 진짜 괜찮다니까. 그러니까 한숨 좀 그만 쉬어. 차 관장 같지 않아서 당황스럽다고.

- 죄송합니다.

- 그 죄송하다는 말도 좀 그만하고. 이런 식으로 사람 진을 다 빼놓을 작정이야?

지원이 고개를 돌리는 가온에게 저와 눈을 맞추라 다그칠 만큼의 여유를 되찾은 건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건 그것대로 민망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사색이 된 지원이 안달복달하는 걸 보는 것보다는 나았다.

남녀가 함께 밤을 보낸다는 게 이런 거였구나. 우여곡절이 가득했던 밤을 떠올리니 가온은 새삼 얼굴이 달아올랐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걸 느낀 가온이 서둘러 잠옷을 챙겨 입고는 욕실로 향했다. 발갛게 된 볼을 지원이 보면 또 한바탕 난리가 날 테니, 빨리 찬물로 세수라도 해서 어떻게든 가라앉혀야 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간신히 얼굴을 정돈한 가온은 밖으로 나갈까 말까를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지원의 당부대로 다시 침대에 누웠다.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몸이 고되긴 했던 모양인지, 이불을 폭 덮고 누워 있다 보니 스르르 눈이 감겼다. 그대로 깜빡 잠이 들었던 가온은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놀라 눈을 반짝 떴다.

“식사하십시오, 대표님. 아침 드시고 다시 주무시라고 간단하게 준비했습니다.”

고소한 버터 향이 나는 먹음직스러운 토스트와 상큼한 주스 한 잔, 그리고 해열제 두 알이 놓인 쟁반을 받아든 가온이 못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약까지 먹으면 정말 무슨 큰일이라도 치른 것 같잖아.”

“큰일 치르신 거 맞습니다. 밤새 앓으셨다니까요.”

“그럼 차 관장은 밤새 잠도 안 자고 나만 들여다보고 있었어?”

“….”

“정말?”

“한숨도 못 잔 건 아닙니다.”

은근슬쩍 제 시선을 피하는 지원을 빤히 쳐다보던 가온이 작게 헛웃음을 짓더니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의아한 얼굴을 하면서도 제 손을 마주 잡는 지원을 끌어당겨 제 옆에 앉혔다.

“빵도 먹고 약도 먹을 테니까, 차 관장도 나랑 같이 아침 먹고 한숨 자.”

“네, 그러겠습니다.”

“오전에 좀 쉬다가 오후에는 귤 따러 가자. 다른 건 몰라도 그건 꼭 해보고 싶었어.”

가온의 요구에 한참을 망설이던 지원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같아선 하루 정도는 아무것도 안 하고 푹 쉬었으면 좋겠지만, 꼭 해보고 싶었다는 걸 못 하게 할 수는 없다.

“…네.”

“그렇게 대역 죄인 같은 얼굴 하지 말고.”

흔치 않은 가온의 농담에 잠시 움찔했던 지원이 곧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최대한 가온의 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신경을 썼지만, 제가 아무리 조심해도 처음 몸을 여는 여인의 부담을 완전히 덜어낼 수는 없었다. 근육통 때문인지 가온은 잠결에 돌아누울 때마다 앓는 소리를 냈었다. 그걸 옆에서 고스란히 듣고만 있어야 하는 건 정말이지 크나큰 고역이었다.

“죄송합니다.”

“차 관장. 그 죄송하다는 소리 한 번만 더 하면 다시는 내 침대에 누울 기회가 없을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침대에 누울 기회를 완전히 박탈당할 수는 없다. 습관적으로 튀어나오려는 사과를 간신히 혀끝에 붙들어 맨 지원은 자신의 이기심을 속으로 맹렬하게 비난했다. 가온이 애써 태연하게 고통을 견디는 건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이 마음이 아팠지만, 이미 사랑하는 여인을 품에 안는 기쁨을 알아버린 뒤라 쉽게 포기는 되지 않았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토스트가 다 식겠습니다. 얼른 드십시오.”

“응, 잘 먹을게.”

사이좋게 토스트 두 조각씩을 나누어 먹은 가온과 지원은 푹신한 베개를 등에 받치고 비스듬히 누웠다. 아직은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지 계속 반지를 만지작거리는 가온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지원이 협탁 서랍을 열고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서 가온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야?”

“열어 보십시오.”

뚜껑을 열자 제가 끼고 있는 것과 비슷한 디자인의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제 것보다는 사이즈가 큰 걸 보니 이건 지원의 몫인 게 분명했다. 남자가 여자에게 같은 디자인의 반지를 내미는 게 뭘 의미하는지는 가온도 잘 알고 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바는 아니었지만, 막상 똑같은 모양의 반지 두 개를 번갈아 보고 있으려니 손가락이 조금 무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은 오늘 밤에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아주 고전적인 절차를 밟아 대표님께 프러포즈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랬어?”

“네. 그랬는데 제가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지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런 식으로 뭔가를 제안하면,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대답을 강요받게 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혼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던 여자라도, 정성스레 꽃다발과 케이크를 준비한 남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는데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대답을 보류하기란 꽤나 난감하고 어려운 일일 것이다. 지원은 가온이 그렇게 어영부영 떠밀려서 저와의 미래를 받아들이게 되는 건 원하지 않았다. 하루라도 빨리 가온의 옆자리를 떳떳하게 차지하고 싶지만, 그보다는 가온이 저와의 결혼을 진심으로 원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욱 크다.

“그러니까 이건 대표님께서 가지고 계시다가 저와 여생을 함께 보내겠다는 결심이 서시면 그때 제게 끼워주십시오.”

“차 관장….”

“그때까지 조신하게 기다리고 있다가, 언제 어디서 말씀하셔도 바로 ‘네, 알겠습니다.’ 하겠습니다.”

두어 시간 휴식을 취하고 귤 농장에 방문한 두 사람은 작은 바구니와 앙증맞은 전지가위 하나씩을 받아들었다. 못내 진지하게 농장주의 설명에 집중하던 가온이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노랗게 익은 귤을 따기 시작하자,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지원이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지원의 눈에는 지금 가온이 얼마나 신이 났는지 훤히 보였다.

조금이라도 더 잘 익은 귤을 고르느라 신중하게 고민하고 있는 가온을 애정이 듬뿍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던 지원은, 웃는 얼굴 그대로 진동이 울리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가 곧 미간을 확 구겼다.

[백동하]

하아, 이 자식이 이 시간에 왜 전화를 걸었을까. 내가 어디서 누구와 있는지 뻔히 아는 놈이. 전화를 받을까 말까 치열하게 고민하던 지원이 할 수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수틀리면 별장으로 쳐들어올 수도 있는 놈이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왜.”

[전화 참 예쁘게 받는다? 내 집에서 먹고 자고 있는 놈이?]

“하아, 참. 별 추잡스러운 소리를 다하고 있네. 너 이 자식, 누가 누구네 집에서 더 많이 먹고 잤는지 각 잡고 한번 따져 볼까? 이번 기회에 숙박비 정산 한번 해? 너 런던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내 아파트에서….”

[아아, 그래. 알았어, 알았어. 농담 한마디를 안 받아주네. 새끼, 왜 이렇게 까칠하게 나와? 어젯밤에 독수공방했냐? 바늘로 허벅지 찌르면서?]

그렇다고 할 수도,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던 지원은 동하의 질문을 간단하게 무시했다.

“용건만 간단히. 왜 전화하셨습니까, 백동하 상무님.”

[저 지금 제주도에 있습니다, 차지원 관장님.]

“뭐?”

갑자기 제주도 호텔에 문제가 생겨서 새벽 비행기를 타고 내려왔다는 동하는 저녁때쯤에 시간이 날 것 같다고 했다. 이번 기회에 지원의 애인과 꼭 인사를 하고 싶지만, 소개를 시키는 게 정 내키지 않으면 그냥 올라가겠다는 거였다. 예상외로 바로 거절하지 않은 지원이 약간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동하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오늘은 안 된다고 안 하네?]

“잠깐만 기다려. 내가 다시 전화할게.”

가차 없이 전화를 끊어버린 지원이 열심히 귤을 고르고 있는 가온에게 다가갔다. 벌써 바구니를 거의 다 채운 가온은 지원이 들고 있는 바구니가 텅 빈 것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태 뭐 했어?”

“친구가 전화를 해서요. BS그룹 백동하 상무 말입니다. 일이 있어서 지금 제주도에 내려와 있답니다.”

“그런데? 나 만나고 싶대?”

“네. 저녁에 시간이 난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오라고 해. 차 관장 친구면 한 번은 봐야지. 내가 보겠다고 했잖아.”

“대표님. 안 내키시면 억지로 만나실 필요는 없습니다.”

노란 귤이 가득 담긴 귤 바구니를 소중하게 안고 있던 가온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지나가던 가족이 자신들을 힐끔거리자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뭔가를 생각하더니 곧 피식 웃었다. 뭔가 요상한 오해를 한 모양이네. 그런데 충분히 그렇게 보일 수는 있겠어.

“보자고 해. 서울에서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여기가 한가하고 좋을 것 같아. 아무래도 보는 눈도 적을 테고…. 그리고 차 관장. 안 그래도 내가 몇 번 생각했던 건데, 앞으로 밖에서 나를 부를 때는 호칭을 좀 달리해야 할 것 같아. 지금도 어린애들 데리고 온 저 젊은 부부가….”

“저를 제비 보듯 쳐다봐서요?”

“차 관장은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어?”

가온의 눈이 커다래지자, 이번엔 지원이 작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아까 입구에서부터 저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사람들입니다. 평일 대낮에 멀쩡한 젊은 남자가 어려 보이는 여자한테 절절매고 있으니 뭐, 놈팡이처럼 보일 수도 있겠죠.”

“나는 누가 차 관장을 그렇게 보는 거 싫은데.”

“저는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사실은 그렇지 않고, 저 사람들은 한 번 보고 말 사람들이니까요. 그래도 대표님이 신경 쓰이신다면 호칭은 바꾸겠습니다.”

시원시원하게 대꾸한 지원이 가온의 어깨를 감싸며 한결 더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동하한테는 저녁에 보자고 하겠습니다. 그럼 이제 청귤청을 만들러 가실까요, 가온 씨?”

끼익. 스테이크를 썰다가 손이 삐끗해서 나이프로 접시를 긁어버린 동하는, 제게 강렬한 비난의 눈초리를 보내는 지원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가온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대기업 대표이니 고압적일 거라 지레짐작했던 것과는 달리, 가온은 상당히 차분하면서도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결코 만만치 않은 성격의 지원이 설설 기는 걸 보면 말 그대로 보통내기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그녀는 고집이나 자기주장이 거의 없는 편이었다.

“가온 씨, 드레싱은 어떤 걸로 하시겠습니까. 유자 소스는 너무 달 것 같은데 발사믹으로 할까요?”

“응. 그걸로 먹을게.”

“주스는 주문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낮에 귤을 많이 드셨으니까요. 저녁이니 카페인 음료도 안 드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냥 생수만 드세요, 가온 씨.”

“알겠어. 그렇게 해.”

문제는 차지원이다. 냉랭하기가 시베리아 벌판 같던 차지원이 누군가를 이렇게 살뜰하게 보살피는 게 너무 어색해서, 동하는 식사를 하는 내내 다리가 많은 벌레가 제 목덜미를 계속 기어 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 두어 번은 진짜로 목에 뭐가 있는지 쓸어 보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나보고도 곧 죽어도 대표님이라고 부르라더니, 저는 왜 가온 씨야? 말끝마다 가온 씨, 가온 씨. 어휴, 아주 귀가 녹아내리겠네. 지원의 입에서 나오는 호칭은 지극히 자연스러웠지만, 정작 당사자인 ‘가온 씨’는 그가 저를 부를 때마다 흠칫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럴 때마다 지원은 눈가에 주름이 잡히도록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는데, 십년지기의 입장에서는 정말 낯설고 꼴 보기 싫은 눈웃음이었다.

급기야 지원은 식사를 하던 도중에 뜬금없이 소리를 내어 웃더니 가온의 손등에 살포시 입을 맞추기도 했다. 딱히 별일은 없었던 것 같았는데, 갑자기 무슨 포인트가 눌린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그 꼴을 보고 경악하다 손을 헛놀렸으니 엄밀히 따지자면 이건 다 지원의 책임이다. 뻔뻔한 놈, 그런 짓을 해놓고 이렇게 적반하장으로 나오다니. 사납게 눈을 부라리는 지원을 힐끔 쳐다보던 동하가 작게 실소하며 한쪽 입꼬리를 비죽이 들어 올렸다.

“나 잠깐 화장실 좀….”

“모시겠습니다.”

지원의 즉각적인 반응에 가온과 동하가 일순 기함했지만, 그래도 동하보다 신속하게 평정을 되찾은 가온은 대단히 단호하면서도 상식적인 대응 능력을 보였다. 역시…. 미친놈을 상대하는 것도 내공이 있어야 해.

“무슨…! 차 관장. 나 좀 부끄러워지려고 하니까 제발 그냥 앉아 있어. 응?”

“…네.”

“쫓아오지 마. 진짜로 화낼 거야.”

“…알겠습니다.”

너무나도 아련한 눈빛으로 가온의 뒤를 좇는 지원을 보며, 더는 참지 못한 동하가 챙 소리가 나게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가온을 끝까지 지켜보던 지원은, 흡사 접시가 깨지는 것 같은 소리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친구에게 시선을 돌렸다. 세상 그렇게 다정할 수가 없던 눈빛이 삽시간에 싸늘해지자 동하는 몹시 어처구니가 없었다.

“너 오늘 테이블 매너가 왜 그 모양이야?”

“테이블 매너? 이런 뻔뻔한 새끼를 봤나. 공공장소에서 밥 먹다 말고 허튼짓하던 놈이 지금 누구한테 매너를 따져? 너 진짜 미친 거 아니냐? 어떻게 화장실을 따라가겠다고 해?”

“대표님 지금 컨디션 별로 안 좋으셔. 가다가 풀썩 쓰러질까 봐 걱정돼 죽겠는데 그럼 어떡하냐?”

“이야. 내가 정말 살다 살다 별 해괴망측한 꼴을 다 본다, 응? 여기서 화장실까지 뭐 얼마나 된다고. 너 오늘 어디 가서 막일하고 왔냐? 하루 종일 귤 조금 딴 게 전부라며.”

“….”

고집스럽게 입을 다문 지원을 기가 막힌 얼굴로 바라보던 동하가 더 이상 언급조차 하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래, 뭐 좋아. 네가 너희 대표님을 업고 다니든, 발바닥을 핥든 그건 내 알 바가 아니고.

“플로레온 신상 웨딩밴드 끼고 계시더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반지 끼울 여자도 없는 놈이?”

지원이 진심으로 놀란 얼굴을 하자, 안 그래도 심기가 불편하던 동하가 눈꼬리를 확 치켜뜨며 버럭 성을 냈다.

“내가 여자가 없지, 눈도 없냐? 그 브랜드가 한국에 처음 들어올 때 우리 호텔 로비에서 론칭 기념 쇼케이스 했었거든?”

“아, 그래?”

지원의 심드렁한 반응에 발끈하던 동하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언론에서 재벌 3세의 경영진 합류에 대해 워낙 시끄럽게 떠들어댄 통에 자칫 제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나저나 차지원 대단하네. 출시된 지 일주일도 안 된 제품을 어떻게 벌써 손에 넣었지?

“그거 지금 주문하면 최소한 석 달은 기다려야 한다던데…. 너는 그걸 어떻게 샀어?”

“거기 수석 디자이너가 이모 친구야.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말하라고 하시길래 부탁 좀 드렸지. 일반적인 루트로 주문을 넣으면 연말에 받기도 어려울 것 같아서. 하이 주얼리 카탈로그를 싹 뒤졌는데, 그것만큼 마음에 드는 게 없었거든.”

하여간 까다로운 놈. 나직하게 혀를 차던 동하가 한결 진지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로 결혼하려고?”

“응, 대표님만 결심하시면. 나는 당장이라도 그러고 싶고.”

“차지원. 내가 진심으로 걱정스러워서 하는 말인데, 결혼을 하려면 최소한 사계절은 겪어보라는 말이 있어. 너 이제 두 달이나 됐냐?”

“그건 서로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한테나 해당되는 말이고.”

“너는 너희 대표님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아는데?”

동하의 질문에 잠시 시선을 내리깔고 대답을 고르던 지원이 아주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빙긋이 웃었다.

“대표님에 대해서는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 알아.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본인보다도 내가 더 잘 알지.”

“장담할 수 있어?”

일일이 경험담을 불러오지 않더라도, 숨기는 게 많은 사람은 뒤가 깨끗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일반론이다. 오랜 친구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지원은, 오늘 처음으로 동하를 향해 애틋한 시선을 보냈다.

“동하야.”

“그렇게 부르지 마. 소름 끼친다.”

“나도 너한테 이런 말 하는 거 낯이 좀 화끈거리는데…. 이것저것 재고 따지지 않아도 그냥 내 인연이라고 알게 되는 사람이 있어. 나도 그런 거 절대 안 믿는 편이었지만 만나니까 바로 알겠더라. 처음 마주친 순간부터 혹시라도 연이 끊길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완전히 진상처럼 들이댔다고, 내가. 그렇게 되더라고.”

평소 이성의 끝이라고 생각했던 지원의 입에서 나오는 운명론은 동하의 말문을 완전히 틀어막았다. 인연이라고…. 하아, 이 새끼 지금 제정신 아니네. 무신론자가 사이비 종교에 빠지면 답도 없다더니. 뭐, 지금은 무슨 소리를 해도 안 들리겠구나.

“그래…, 백년해로해라.”

체념하듯 내뱉은 동하는 갑자기 몸을 일으키는 지원을 빤히 바라보았다. 가온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지원은, 끝내 그 몇 발자국 되지도 않는 거리를 기다리지 못하고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는 비스듬히 고개를 숙여 가온과 시선을 맞추며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힘들지 않으십니까. 힘들 게 뭐 있어, 오늘은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어젯밤에 고생하셨잖아요. 고, 고생이라고 표현하지 마. 네. 죄송합니다. 차 관장 진짜 말 안 듣네. 죄송하다고도 하지 말라니까. 하하, 네.

두 사람이 속삭이는 소리가 제대로 다 들린 건 아니었지만, 표정만 봐도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좋아하고 아끼는지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저렇게 좋을까. 왠지 보면 안 되는 장면을 훔쳐보는 것 같은 기분에 동하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시원한 통창 너머로 펼쳐진 너른 바다에 밤이 조금씩 내려앉고 있었다.

울긋불긋 단풍이 들기 시작한 공원에 들어선 지원이 신중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걸었다. 대단히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경이었지만 희한하게도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일대를 통틀어 망자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이 너무 수상쩍어서 자꾸만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벌건 대낮이라도 그렇지, 여기에 이렇게 아무것도 없을 수가 있나. 지난번에는 워낙 악령들이 들끓어서 서도겸이 1시간이 넘도록 노래를 불렀어야 했는데. 이렇게 영기가 넘치는 곳에 왜 귀신이 하나도 없을까. 겁을 먹고 달아났을까? 우리 때문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오래전 일이고…. 아니면 그보다 더 두려운 다른 무언가가 있어서? 딱히 느껴지는 건 없는데….

한참을 걷다가 익숙한 모양의 철제 벤치 앞에 다다른 지원이 심각한 표정으로 눈썹을 크게 꿈틀거렸다. 군데군데 색이 벗겨진 노란 벤치,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쇼핑몰 건물의 회백색 외벽, 다시 봐도 명계에서 봤던 장면과 너무나도 흡사했다.

“흐음, 어디에서 봐야 정확하게 그 각도가 나올까.”

벤치에 시선을 고정한 채 서서히 뒷걸음질 치던 지원이 공원 구석에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 앞에 멈춰 섰다. 그러자 대단히 눈에 익은 광경이 눈앞에 나타났다. 색감만 조금 달라졌을 뿐, 마치 똑같은 그림을 보는 것처럼 장면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물체의 구도가 완벽하게 일치했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야…. 이거 좀 으스스하네.”

절로 밀려오는 긴장감을 달래려 여러 번 심호흡을 하던 지원은, 나무 밑동에 꽂힌 나뭇가지 하나를 발견하고는 가만히 눈살을 찌푸렸다. 얼핏 보면 나무 기둥에서 뻗어 나온 가지로 착각할 수도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색깔과 질감이 아예 달랐다.

“뭐야, 이건 주목인데?”

굉장히 기운이 강한 물건이네. 아, 이것 때문에 귀신들이 접근을 못 했구나. 설마 명계수문 너머에 있는 나무에서 잘라 온 가지는 아니겠지. 그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손을 뻗자, 매끈한 붉은 색의 나뭇가지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뽑혔다. 동시에 작게 바람이 일렁이더니 수풀에 가려졌던 일그러진 공간이 벌겋게 민낯을 드러냈다. 울퉁불퉁하게 벌어진 틈으로 살풍경한 명계의 모습을 목격한 지원이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토해냈다. 평생에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지옥이 거기에 있었다.

“허!”

이건 분명히 대표님이 닫으셨던 통로 아닌가? 이게 어떻게 또 열렸지? 자연적으로 열린 걸까, 아니면 누가 일부러 열었을까. 만약 누군가가 일부러 열었다면 그건 대체 누굴까. 염마왕…, 인가? 그렇다면 그가 이런 짓을 하는 이유가 뭐지? 단순히 대표님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대표님의 성격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면 역효과라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을 텐데….

잠시 생각에 잠겼던 지원이 잡생각을 떨쳐 내기 위해 고개를 세차게 옆으로 저었다. 혼자서는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를 놓고 오래 고민하는 건 효율적이지 못하다. 그보다 중요한 건 한시라도 빨리 이 벌어진 틈을 없애는 것이다. 수풀에 가려져서 쉽게 눈에 띄지는 않지만, 만에 하나 누군가가 지나가다가 이 틈을 밟기라도 하면 비명 한 번 못 지르고 명계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 지원이 단축번호 하나를 길게 눌렀다.

“권 실장님, 차지원입니다. 대표님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대표님은 잠깐 카페에 가셨는데…. 아, 지금 들어오시네요. 바꿔드리겠습니다.]

대표님, 전화 받으십시오. 차지원 관장입니다. 현호의 기척이 조금 멀어진다 싶더니 곧 익숙한 음성이 귓전을 울렸다. 차 관장? 사흘 밤낮을 붙어 있다가 헤어진 게 불과 12시간 전인데, 벌써부터 못 견디게 그리운 목소리였다.

하아…, 다 때려치우고 어디 무인도 같은 데에 틀어박혀서 둘이 살았으면 좋겠네. 제주도에서 보냈던 꿈같은 시간들을 떠올리며 아련한 눈빛을 하던 지원이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 뜨며 표정을 정돈했다. 어쨌든 지금은 업무 중이니 지나치게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는 건 곤란하다.

[응, 차 관장. 나야. 무슨 일이야?]

“네, 대표님. 제가 지금 일산에 나와 있는데, 이곳에 명계로 통하는 통로가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지난번에 대표님께서 명계에서 처리하셨던 통로와 위치가 정확하게 겹칩니다.”

[그래…?]

“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 범상치 않은 기운을 가지고 있는 주목 가지 하나가 꽂혀 있었습니다. 이것 때문인지 이 근처에는 망자들이 아예 얼씬도 못 하고 있고요. 꽂혀 있는 각도와 박힌 정도를 볼 때 우연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

수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지원이 전한 정보가 의미하는 바를 하나씩 따져보는 모양이었다. 그러다 지원의 추측과 비슷한 결론을 내렸는지, 가온의 나른하던 목소리에 대번에 위엄이 실렸다. 듣는 사람을 절로 겸손하게 만드는 묵직한 음성이었다. 사사로이는 제 연인이고 때로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귀여운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가온이지만, 이럴 땐 그녀가 중천주라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위험한 계략을 꾸미는 자가 있군. 내가 지금 가지. 인간들이 접근하지 않도록 차 관장이 잠깐만 지키고 있어.]

“네, 알겠습니다.”

그로부터 30분이 채 지나지 않아 보안 요원들을 대동한 가온이 현장에 도착했다. 공손하게 인사를 건네는 지원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가온은 그가 내민 나뭇가지를 받아들고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이게 어디에 있었다고?”

“이쪽으로 오십시오.”

매서운 눈빛으로 현장을 둘러본 가온이 작게 눈짓하자, 인부 복장을 한 보안 요원들이 매뉴얼대로 신속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공원 입구에는 즉시 공사 중 표지판이 설치되었고, 여유롭게 산책 중이던 시민들은 가스관이 폭발할 위험이 있다는 경고에 서둘러 공원을 빠져나갔다. 가을의 정취를 즐기던 사람들로 가득 찼던 넓은 공원이 순식간에 휑뎅그렁해졌다.

“이게 내가 명계에서 닫았던 통로 중 하나라고? 근거는?”

“제가 분명히 저 벤치를 봤었습니다. 그밖에도 이 주변의 경관이 그곳에서 틈새로 봤던 장면과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흐음….”

“그리고 이 일과 연관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전에 여기에서 임소화 가이드를 본 적이 있습니다. 뒷모습밖에 보질 못해서 긴가민가했었는데, 동명병원에서 만났을 때 본인이 거의 자백이나 다름없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굳이 자신의 행보를 숨기려고 드는 게 아무래도 수상합니다.”

“임소화….”

나직하게 이름 석 자를 중얼거리던 가온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막 건강을 회복한 아이를 위해서라도 뭔가 복잡한 사건에 연루된 게 아니길 바랐는데…. 안 그래도 영 낌새가 좋지 않아 근황을 알아보라 지시를 내렸더니, 복권에 당첨된 소화가 정식으로 사직서를 제출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었다. 당시에는 그 정도만 파악하고 말았는데, 이젠 어쩔 수 없이 그보다 더 세세하게 파고들어야 할 필요가 생겼다.

물론 거액의 당첨금을 손에 쥐게 된 것을 단순히 천운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안타까운 가정이지만, 만약 아이가 변변한 의료기기를 갖추지 못한 시영 병원에 계속 있었다면 아마도 지금처럼 의식을 되찾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가온은 세상사가 매번 약자의 사정을 봐주며 돌아가지는 않는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 타이밍이 너무나도 공교로웠다.

“권 실장.”

“네, 대표님.”

“임소화 선생의 근황을 다시 한번 확인하도록 해. 최근 반년간 만난 사람, 방문한 장소, 그 밖에 아무리 자질구레한 것들이라도 모조리 알아내서 내일 오전까지 가지고 와.”

“네, 알겠습니다.”

짧게 지시를 내린 가온이 주변에 일반인이 한 명도 없는 것을 재차 확인하고는 신속하게 검을 소환했다. 그리고는 흉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통로를 단칼에 베었다. 여전히 보는 사람의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날카로운 솜씨였다. 끼기기기긱. 검광이 번뜩이는 것과 동시에 삐뚤빼뚤하던 차원의 틈이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서서히 닫혔다.

“대표님, 이 통로가 자연적으로 발생했을 확률은 어느 정도나 됩니까.”

“제로.”

지원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가온은 딱 잘라 대답했다.

“차원을 연결하는 통로라는 건 누군가가 작정하고 만들지 않는 이상, 하루 이틀 사이에 뚝딱 생겨나는 게 아니야. 차 관장도 LA에서 봤었지만, 내가 이런 통로 하나를 만들려면 전력을 다했을 경우에 3시간 정도가 걸려. 하지만 자연의 속도는 그보다 십만 배는 느리지.”

가온의 설명에 집중하고 있던 지원이 순간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그렇다면 이런 통로가 하나 생기려면 적어도 30년 이상이 걸린다는 얘긴데….

“게다가 아무데나 생기는 것도 아니야. 기본적으로 영기가 넘치는 곳이어야 하고, 주변에 막힌 데가 없어야 하지. 적당히 조건이 맞아서 틈이 벌어지다가도 이런저런 이유로 소멸되는 게 부지기수고. 그런데 내가 없앤 바로 그 자리에, 고작 두 달이 지나기도 전에 새로운 통로가 생긴다? 그것도 자연적으로? 그건 불가능한 일이지.”

“염마왕의 짓일까요?”

“능력치만 놓고 본다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긴 해. 의도를 따진다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지루한 걸 싫어하고 장난을 즐기는 편이기는 해도, 적어도 흥미 본위로 인계에 해가 될 행동을 하는 자는 아니었거든.”

심각한 얼굴을 한 가온이 한참을 고민했다. 어쨌든 불러서 얘기를 좀 하기는 해야 될 텐데. 하지만 정말로 염마왕이 뭔가를 꾸미고 있다면 내 부름에 쉽게 응하지 않겠지. 뭐라고 이유를 붙여야 자연스럽게 불러낼 수 있을까…. 고민을 거듭하던 가온이 별안간 고개를 번쩍 들며 눈을 반짝였다.

“아! 내가 결혼을 한다고 해야겠어. 내가 중천을 며칠 비우게 될 테니, 그동안 양쪽 세계의 보안을 강화하는 방안을 논의하자고….”

살짝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이던 가온이 금세 지원의 눈치를 살피며 못내 미안한 얼굴을 했다. 이런…. 이렇게 함부로 내뱉을 말이 아니었는데. 지원이 제게 해준 것만큼 분위기를 갖추지는 못해도, 최소한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꺼냈어야 할 말이다.

“미안해, 차 관장. 내가 그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이런 건 절대로 아니야.”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어차피 치러질 결혼식인데, 필요하다면 대의를 위해 핑곗거리로 쓸 수도 있죠. 가온 씨의 결혼식에서 제가 신랑 역할을 할 수만 있다면 다른 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반면 지극히 온화한 미소를 지은 지원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조금 풀이 죽은 가온을 도리어 다정하게 달랬다. 가온 씨? 방금 차 관장이 대표님을 가온 씨라고 불렀어? 설마…. 잘못 들은 거 아니야? 그전에 대표님이 뭘 하신다고? 결혼…?! 경악에 찬 수군거림이 고스란히 들려왔지만, 그림으로 그린 듯한 우아한 미소는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주인공들 스탠바이 하세요. 3분 후에 비 뿌리겠습니다.”

촬영장 구석에 서 있던 도겸은 커다란 살수차가 서서히 진입하는 걸 보고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하필 제 작업실 바로 옆에서 촬영을 하는 바람에 끝나고 같이 맥주나 한잔하자는 이서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는데, 넉넉잡고 10시면 끝난다던 촬영은 11시가 다 되도록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하여간 진부하기도 하지, 이 쌀쌀한 날씨에 굳이 비를 맞을 건 또 뭐야? 어휴, 보는 내가 다 춥네.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던 도겸은, 갑자기 어마어마한 빗줄기가 쏟아져 내리자 기함하며 입을 떡 벌렸다.

아니, 가을비를 이렇게 소나기처럼 퍼부을 일이야? 적당히 분위기만 내도 되지 않아? 평소와는 사뭇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 로아가 태연하게 빗줄기 사이로 걸어 들어가는 걸 보고 있으려니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거리가 좀 있어서 대사가 잘 들리진 않았지만, 아마 심하게 다퉜던 연인이 화해하는 장면인 모양이었다. 뭐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상대 배우의 가슴팍을 퍽퍽 때리던 로아가 그대로 서서 한참을 울더니 결국 남자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는 연인들의 싸움의 끝이 흔히 그렇듯 긴 입맞춤이 이어졌다.

“바스트 샷 가겠습니다.”

보통의 연인들과 다른 점은 길바닥에서 너무 오래 부둥켜안고 있다는 거였다. 드라마라는 게 한 장면을 이렇게 여러 각도에서 찍어서 완성하는 건 줄은 몰랐다. 두 사람이 제발 어디 지붕 달린 곳으로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건 아마도 도겸만의 바람인 듯했다.

배우는 정말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무려 1시간이 넘도록 비를 맞으면서도 빗속의 연인은 끝까지 감정선을 놓지 않았다. 사람을 저런 눈으로 쳐다보는 게 연기로 가능한 건가? 둘이 진짜로 사귀는 거 아니야? 순간순간 의구심이 생겼지만, 컷 소리가 날 때마다 칼같이 시선을 돌리는 걸 보면 꼭 그런 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어! 서 감독, 왔어? 오래 기다렸지?”

뻔뻔하게 손을 흔드는 이서를 많은 감정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던 도겸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거면 처음부터 촬영이 다 끝난 다음에 불렀으면 되잖아. 무슨 벌세우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이렇게 뻘쭘하게 만들어야겠어? 퍼붓고 싶은 말은 넘치게 많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그들의 수장을 대놓고 비난할 수는 없다.

“뭐…, 좀. 그런데 한잔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은 거 아니야?”

“괜찮아. 내일은 촬영 없으니까. 주연 배우들한테 따로 할 말도 있고.”

“그런데 그 자리에 나를 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도겸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응시하던 이서가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몸을 기울이더니 소곤소곤 귀엣말을 했다.

“너 로아 보러 세트장 들락날락했던 거 아니었어?”

“무슨!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때 잠깐 그 근처에 볼일이 있었고, 이제 다 끝났어.”

“그래? 아니면 아닌 거지 뭘 그렇게 펄쩍 뛰어? 더 수상하게.”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면서도 딱히 믿는 것 같은 눈치는 아니었다. 망할, 오지 말 걸 그랬나. 아무래도 이 괴팍한 성질머리한테 단단히 오해를 산 것 같은데…. 짜증스럽게 혀를 차던 도겸이 문득 찌를 듯한 시선을 느끼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오래 둘러볼 것도 없었다. 저를 당장이라도 죽일 듯한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는 이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세상 애틋하게 로아를 바라보고 있던 최선우였다.

아아…, 이런. 한순간에 그의 분노의 원인을 알아차린 도겸이 바로 이서와의 거리를 조금 벌렸다. 아까 그건 연기가 맞구나. 진짜로 감정이 실리니까 저런 눈빛이 나오네, 심장 떨리게. 지원이 형이랑 둘이 붙으면 아주 볼만 하겠는데? 취향이 독특한 것도 비슷하고. 세상에…, 강이서라니.

도겸은 손짓 발짓에 간간히 욕설까지 섞어 가며 조감독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고 있는 이서를 몹시 복잡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는 지원이 형이 제일 특이한 줄 알았더니, 역시 세상은 넓고 또라이는 많구나. 최선우 요즘 꽤 잘나가는 걸로 아는데, 하필 왜 이런 별스러운 여자한테 꽂혔을까. 인간의 내면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타입인가? 아니지. 외모를 본다면 더 이상하지.

투박한 뿔테 안경을 쓰고 있는 이서의 옆모습을 흘깃 쳐다보던 도겸이 문득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워낙 꾸미는 데에 소질이 없어서 그렇지 본판은 나쁘지 않지만…. 그렇더라도 날마다 이로아를 코앞에서 보면서 어떻게 강이서한테 눈이 돌아갔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둘둘 말아 올린 로아가 옷을 갈아입으러 가는 걸 물끄러미 지켜보던 도겸이 다시금 이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해할 수가 없네.

“뭐냐, 그 불손한 눈깔은?”

“누나 너, 최선우랑 사귀어?”

“…아니.”

그다지 난감해하는 기색은 아니었지만, 대답하는 타이밍이 미묘하게 늦었다. 어라? 사귀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뭐가 있긴 있는데? 이쪽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선우의 시선이 굳이 보지 않아도 느껴질 정도였는데, 오감이 모두 뛰어난 이서가 계속 딴청만 부리고 있다. 조감독에게 굳이 했던 말을 되풀이하는 걸 보니 역시나 일부러 쳐다보지 않는 게 분명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기민하게 파악한 도겸이 눈매를 확 일그러뜨렸다. 이 여자가 진짜!

“누나 오늘 나 왜 불렀어?”

“근처에 왔으니까 얼굴이라도 한번 보려고 불렀지. 너 만나는 것도 이유가 있어야 되냐? 그리고 나는 네가 로아한테 관심이 있는 것 같아서….”

“하!”

끝까지 시치미를 떼신다? 내가 누나를 몰라? 솔직하게 불면 어느 정도 맞춰주려고 했더니…. 깽판 친 건 누나니까 나를 원망하지 말라고. 나 요즘 남의 연애사에 끼어드는 거 아주 진절머리가 나거든? 단단히 작정한 도겸이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이를 갈았다.

“인사해. 로아 씨랑은 서로 잘 알 테고. 여기는 우리 드라마 남자 주인공인 최선우 배우님. 이쪽은 이번에 로아 씨 노래 만든 다큐 음악감독….”

“반갑습니다. 강이서 PD님 이부동생 서도겸입니다.”

“야!”

답지 않게 낯빛이 변하는 이서를 향해 한쪽 입꼬리를 비죽 들어 올린 도겸이 살가운 미소를 지으며 선우에게 악수를 청했다. 소리를 빽 지르는 이서는 적잖이 당황스러워 보였지만, 촬영장에서 호프집으로 이동하는 내내 냉기를 풀풀 날리던 선우는 다행히도 대번에 표정을 풀었다.

동생? 나직하게 되풀이하던 선우가 서서히 입꼬리를 올리자 얼음처럼 굳어 있던 미모가 마치 꽃봉오리가 벌어지듯 화사하게 피어났다. 역시 연예인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진심으로 감탄스러운 순간이었다.

“아, 네. 반가워요. 최선우입니다. PD님한테 동생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우리 PD님…, 굉장히 입이 무거우시네.”

순식간에 말랑말랑해진 목소리를 내며 도겸과 악수를 나눈 선우가 대단히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더니 짧게 헛웃음을 지었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이서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선우와, 그런 선우의 시선을 고집스럽게 피하는 이서에게서 깔끔하게 관심을 거둔 도겸은 바로 로아에게 메뉴판을 내밀었다. 뭐야, 하루 이틀 본 사이가 아니구만. 자, 자. 치정극은 당사자들끼리 알아서 찍으시고.

“이로아 씨 저녁 못 먹었죠? 여기 식사 대용으로 먹을 만한 안주가 꽤 있으니까 골라 봐요.”

“종류가 너무 많은데…. 감독님이 추천해주세요. 너무 기름진 것만 아니면 다 괜찮아요.”

“그럼 오픈 샌드위치 먹어요. 여기 그거 맛있어요. 아보카도 괜찮아요?”

“네, 좋아요.”

흘깃 옆을 돌아보니 이서와 선우는 치열하게 눈싸움을 하느라 안주 따위를 주문할 여력은 없어 보였다. 알아서 적당히 주문을 마친 도겸이 제 앞에 얌전히 앉아 있는 로아의 안색을 유심히 살폈다. 1시간도 넘게 비를 맞아서 그런지 입술이 조금 파래지긴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건강해 보이는 낯빛이었다.

사람들이 북적대는 곳을 불편해하는 도겸이었지만, 사실 오늘 못 이기는 척 이서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 내심 로아의 안부가 궁금해서였다. 이제 OST 녹음도 다 끝나서 따로 볼 일이 없었는데, 왠지 개인적으로 연락을 하는 건 망설여졌다. 아무튼 확실히 표정이 좋아졌어. 다행이야.

“요즘은 별일 없죠?”

“네.”

“꿈도 안 꾸고?”

“….”

묻는 말에 성실하게 대답을 잘하던 로아가, 별안간 애매한 미소를 짓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동시에 도겸의 입매가 조금 굳었다.

“아직도 악몽 꿔요?”

“아니요. 악몽은 아니고….”

“그럼?”

도겸의 재촉에 난처하게 눈동자를 굴리던 로아가 이서와 선우의 눈치를 살폈다. 두 사람이 듣는 곳에서는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뜻이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조금 애가 탔지만, 로아와 둘이 따로 나갈 수는 없으니 꼼짝없이 자리가 파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최선우, 네가 뭔데에…. 나한테 왜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데에….”

“강이서. 정신 차려. 지금 두 발로 못 서면 내 집으로 들고 간다.”

대체 뭐에 자극을 받았는지 갑자기 술을 물처럼 들이붓던 이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그러자 폭음하는 이서를 묵묵히 지켜보며 생수만 들이켜던 선우가 작게 입꼬리를 올려 피식 웃더니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오늘은 이만 헤어져야겠네요. 우린 다음에 제대로 한 번 더 보죠. 강 PD님은 안전하게 모실 테니까 걱정 말고요.”

“걱정 안 합니다.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어린애가 아니니까 더 걱정해야 하지 않나? 동생이라면서. 나를 어떻게 믿고?”

나보고 뭐 어쩌라는 거냐. 그렇게 날 세울 거면 그냥 놓고 가든가. 삐딱해진 심기를 애써 갈무리한 도겸이 최대한 유순한 표정을 지었다. 최선우 못지않게 성질머리 더러운 차지원과 가깝게 지내다 보니, 심기가 불편한 남자를 살살 달래는 방법에는 도가 텄다.

“누나는 아무 데서나 정신 놓고 퍼지는 사람이 아닙니다. 말로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최선우 씨를 믿으니까 마음 놓고 취한 거겠죠. 취한 모습을 보일 수 없는 상대였다면 애초에 이런 자리를 만들지도 않았을 겁니다.”

역시나 그간 갈고 닦은 기술은 대번에 효력을 발휘했다. 더없이 흡족한 미소를 지은 선우가 이서를 데리고 가고 나서야 비로소 로아와 차분하게 얘기를 나눌 시간이 생겼다.

“이로아 씨, 시간이 좀 늦긴 했지만…. 우리 얘기를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피곤하지 않으면 잠깐 작업실에 들렀다 갈래요?”

“그럴게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로아와 함께 작업실로 돌아온 도겸이 찻물을 끓이는 동안, 오랜만에 작업실에 방문한 로아가 아련한 눈빛으로 작업실 곳곳을 둘러보았다. 연기도 물론 재밌지만, 로아의 가장 간절한 꿈은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되는 거였다. 평생을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떠올리자면, 단연 이 작업실에서 노래를 부르던 순간이다. 더구나 이곳에는 항상 도겸이 있었다.

“마셔요. 생강차에요. 몸을 좀 따뜻하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감사합니다.”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 로아가 따뜻한 차를 두어 모금 홀짝이는 걸 가만히 지켜보던 도겸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넸다.

“무슨 꿈을 꿔요? 설마 조희란이 계속 나옵니까?”

그러자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로아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시선을 내리깐 채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곧 결심을 굳힌 얼굴로 도겸과 똑바로 시선을 맞췄다. 그녀의 말간 눈동자를 보고 있으려니 이상하게 숨쉬기가 조금 어려워졌다.

“저는 요즘 날마다 감독님 꿈을 꿔요.”

“…조원도에 대한 꿈을 꾼다는 얘깁니까?”

“아니요. 지금의 감독님이요. 처음 이 작업실에 들어왔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 꾸는 꿈이에요.”

달리 해석할 여지가 거의 없는 말이었다. 순간 돌처럼 굳어버린 도겸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로아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서도겸. 밥 먹자.”

메뉴판을 대충 훑어보던 지원은 제 말에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옆자리를 돌아보았다. 이륙할 때부터 계속 창밖을 응시하던 도겸은 여전히 아무것도 없는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 자식 왜 이래? 항상 빠릿빠릿하던 놈이 대체 뭐 때문에 고장이 난 거야? 조금 걱정스럽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얌전히 봐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지원은 목소리를 조금 높이며 도겸의 팔을 툭 쳤다.

“서도겸!”

“…네? 왜요?”

“밥 먹자고. 뭐 먹을래.”

“아…. 형이랑 똑같은 걸로 시켜줘요.”

가온이 아닌 사람에게 굳이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았던 지원은 두 번 물어볼 것도 없이 낙지덮밥을 골랐다. 일본에 가면 계속 밍밍한 음식을 먹어야 할 테니 도착하기 전에 약간 매콤한 음식을 먹어줄 필요가 있었다. 밥상을 받고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도겸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지원은 어지간하면 묻지 않으려던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너 무슨 일 있냐?”

지원의 질문에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던 도겸이 못내 심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로아 씨가 나를 좋아한대요.”

“그래? 그런데?”

“그런데라니. 이로아 씨는 지금 착각하고 있는 거야. 전생에서 연이 깊었거나, 아니면 이루지 못한 연이었거나 하는 경우에는 다시 만났을 때 절로 애틋한 감정이 생길 수 있어요. 나도 민수연에 대한 꿈을 꾸고 나면 하루 종일 마음이 안 좋아. 하지만 그래도 사람이 현생을 살아야지, 언제까지나 전생에 얽매일 수는 없잖아요. 그건 사랑이 아니라 미련이라고.”

삐딱하게 고개를 꺾고 팔짱을 낀 지원이 도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단히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글쎄…, 나는 기본적으로 그 가정에도 동의할 수 없지만.

“네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대로 말해 주지 그랬어?”

“그렇게 말했어요. 그런데 이로아 씨는 지금의 내가 좋대.”

“그게 그렇게 죽상을 하고 있을 일이냐? 너도 좋으면 만나고, 아니면 거절하면 되잖아.”

지원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도겸이 몹시 괴로운 표정으로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하아…,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복잡할 건 또 뭐 있어? 남녀 문제는 심플하지. 전생이고 현생이고 따지지 말고, 지금 네 마음 가는 대로 해.”

“우와. 심플…. 방금 그 말 반년 전의 형한테 고스란히 들려주고 싶다. 발렌타인 들고 병나발을 부시던 분은 어디 가셨나 봐요?”

“아, 그분은 잠깐 헤매다가 곧 돌아오셨어. 연말에 결혼하실 거야.”

“뭘…, 한다고?”

나 지금 뭔가 엄청난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눈이 커다래진 도겸이 지원의 말을 잠깐 곱씹더니 소스라치게 놀라며 턱을 뚝 떨어뜨렸다.

“결혼을 한다고? 형이랑 대표님이?”

“밤마다 헤어지는 게 너무 싫어서. 다들 비슷한 이유로 결혼하는 거 아닌가?”

“뭐야…. 형이 그렇게 멀쩡한 사람처럼 얘기하니까 무섭잖아.”

진심으로 경악한 도겸이 급기야 목소리까지 떨자 짧게 비웃음을 날린 지원이 곧 살벌하게 눈매를 굳혔다.

“네가 무섭거나 말거나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아무튼 나는 지금 어여쁜 약혼녀를 놔두고 해외 출장이나 다녀야 되는 이 사태가 너무 마음에 안 드니까 최대한 빨리빨리 하고 가자, 응? 그렇게 계속 핀트 나간 얼굴 하고 있으면 내가 어떻게든 정신 줄을 붙잡게 해줄 테니까.”

“내가 뭘 어쨌다고…. 나 정신 멀쩡해. 걱정 마요. 이래 뵈도 경력이 5년인데, 형 발목 안 잡아요.”

차라리 나 혼자 올 걸 그랬나. 가온 씨가 너무 걱정을 해서 달고 오긴 했는데, 그다지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고. 영 미덥지 않은 눈빛으로 도겸을 바라보던 지원은 도겸이 다시 숟가락을 드는 걸 보고 나서야 고개를 돌렸다. 딴생각하는 것까지야 내가 어쩔 수 없고, 최소한 제때 밥이라도 먹여 놓으면 당장 병이 나거나 하지는 않겠지.

느긋하게 식사를 마친 지원이 테이블 위에 일본 지도를 펼치고는 빨간 점으로 표시된 소화의 동선을 신중하게 살폈다. 소화는 지난 넉 달 동안 보름을 전후로 아무런 연고가 없는 곳을 주기적으로 방문했다. 일산을 시작으로 강원도, 전라도를 거쳐 지난달에는 교토였다. 소화가 다녀간 곳에는 모두 명계로 통하는 통로가 있었고, 그곳에는 예외 없이 주목 가지가 꽂혀 있었다. 한두 번은 우연일 수도 있지만, 이미 네 번이나 반복되었으니 더 이상은 우연이라고 볼 수 없다.

교토…. 오래된 건물이 많은 도시일수록 성가신 귀신들이 많던데. 그나마 국내에서는 CCTV 화면을 확보할 수가 있어서 어느 정도는 범위를 좁힐 수가 있었지만, 교토에서는 꼼짝없이 소화의 동선을 따라 발로 움직이며 통로를 찾아야만 한다. 짧은 기간 동안 참 열심히도 다녔네. 뭐, 아이가 처음으로 하는 해외여행이니 신이 났을 만도 하지만…. 열 개가 넘는 빨간 점을 보고 있으려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런데 임 선생님은 왜 이런 짓을 하는 걸까요?”

“애 키우는 평범한 가이드가 목숨 내놓고 이런 사고를 치는 건 자기 목숨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걸렸기 때문이겠지.”

“대체 누가 그런 걸 거는데?”

“글쎄…. 정확한 건 이제부터 본인한테 물어봐야지.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를 잡은 다음에.”

“짐작이 가는 사람은 있다는 얘기네?”

지도에서 눈을 뗀 지원이 도겸을 힐끔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확실히 이 녀석은 연해수보다는 눈치가 빨라.

“대표님이 형한테는 그런 말씀도 다 해주시나 봐요. 우리한테는 두 마디 이상을 하신 적이 없는데.”

“나는 너희랑은 입장이 좀 다르지. 같이 보내는 시간이 기니까 저절로 알게 되는 것도 많고.”

“그러고 보니까 형은 진짜 대단하다. 이제 겨우 1년밖에 안 됐는데, 어지간한 중천의 일에는 거의 다 손대고 있잖아.”

“별수 있나. 내가 안 하면 가온 씨가 다 해야 되는데.”

너무나도 낯설고 어색한 호칭이 귀에 걸리자 오만상을 찌푸린 도겸이 제 목덜미를 벅벅 문질렀다.

“대표님을 가, 가온 씨라고 불러요? 어휴, 그 말이 어떻게 그렇게 천연덕스럽게 나와?”

“하하, 내가 다른 사람들한테 호스트처럼 보이는 게 마음에 걸리셨던 모양이야. 바꾸라고 하시니 어쩌겠어. 아무튼 귀엽다니까.”

커헉, 귀엽…. 그래, 역시 최선우보다는 이 형이 더 또라이구나. 이제는 더 이상 경악할 기운도 없었던 도겸은 그저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도를 보면서 한참을 고민하던 지원이 첫 방문지로 선택한 곳은 한적한 곳에 위치한 작은 사찰이었다. 에도 시대에 건축된 고택이었는데, 아름답고 유서 깊은 건물이지만 한국 관광객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 아이를 동반한 여행에서 현지인들도 잘 찾지 않는 사찰을 방문했다는 게 수상쩍어서 첫 번째 타깃으로 골랐는데, 사찰의 입구에 들어서기도 전에 제 예상이 적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거 참, 어떻게 봐도 여기다 싶은 장소네요. 평소 같았으면 악령들이 득실득실했겠어.”

“그러니까. 기운이 이 모양인데 귀신이 하나도 없으니까 왠지 더 으스스하다. 어쨌든 이제부터는 조심해라. 잘못해서 발이라도 헛디디면 한순간에 지옥으로 떨어질 수도 있어.”

“알았어요. 조심합시다.”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사찰이었지만, 통로를 발견하기까지는 꼬박 반나절이 걸렸다. 잡초 한 포기까지 모조리 들춰 보며 샅샅이 뒤진 끝에 결국 우물 속에 숨겨진 입구를 찾아낸 지원이 빠득 소리가 나게 이를 갈았다.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가이드의 눈에도 띄지 않았을 만큼 교묘한 위치였다. 일부러 통로를 찾으러 온 게 아니었다면 지원이나 도겸도 모르고 지나쳤을 정도였다.

“하, 진짜 변태처럼 잘도 숨겨놨네. 사람 빡치게.”

“이게 그 주목이에요? 뭐야, 이건? 나 800년 된 주목도 본 적 있는데, 이건 그 정도 수준이 아닌데? 일개 가이드가 이런 걸 대체 어디서 구했대?”

“명계수문 너머에 있잖아.”

“그 나무에서 꺾어 온 거라고? 진짜로?!”

“일단 나는 그렇게 추측하고 있어.”

그럼 이게 정말로 염마왕의 계략이야? 염마왕이 왜 이런 짓을 해? 몹시 혼란스러워 보이는 도겸을 대충 옆으로 치운 지원이 배경이 잘 드러나도록 우물 사진을 찍어 GPS 좌표와 함께 현호에게 전송했다. 그러자 30초도 지나지 않아 전화가 걸려왔다.

“네, 실장님. 사진 받으셨습니까?”

[네. 사진은 잘 받았습니다. 그런데 차 관장님, 임소화 선생이 방금 출국했습니다. 목적지는 홍콩입니다.]

“홍콩…, 이요?”

이런 썩을. 대체 무슨 짓을 꾸미길래 이렇게 글로벌하게 놀아? 못내 신경질적인 손길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지원이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뭐, 이렇게 뒤를 쫓는 것보다는 현장을 덮치는 게 효과적일 것 같긴 하지만…. 어후 씨…, 내가 진짜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애인 얼굴도 못 보고….

“알겠습니다. 그럼 여기서 바로 홍콩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넉넉잡고 2시간이면 간사이공항에 도착합니다. 네, 공항에 도착하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그러겠습니다.”

“형, 우리 홍콩으로 가요? 지금 바로?”

“그래.”

“어…. 오늘 여기에서 하루 잔다고 그래서 해수가 뭐 사다 달라고 한 게 있는데…. 오사카에서만 파는 도라에몽 잠옷이 있대요.”

“도라에몽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놀러 왔냐?!”

어휴, 내가 이런 정신머리 없는 것들하고 무슨 큰일을 하겠다고. 버럭 성질을 내며 사찰을 빠져나간 지원이 바로 택시를 잡았다. 그리고는 일본에 도착한 지 고작 한나절 만에 다시 홍콩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나마 홍콩에 도착해서는 소화의 뒤를 밟기만 하면 되니 골치가 아플 일은 없었다. 멀끔한 성인 남자 둘이 디즈니랜드를 돌아다니는 건 살짝 곤혹스러웠지만,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통로를 찾아 무작정 헤매는 것보다는 나았다.

하루 종일 디즈니랜드에서 시간을 보낸 소화는 아이를 재워 놓고 나왔는지 자정이 다 된 시각에 호텔을 나섰다. 그리고는 호텔 뒤쪽으로 난 미로 같은 골목을 한참 동안 걸어 작은 저수지 앞에 도착했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가 큰 바위 앞에 멈춰 선 소화가 가방에서 무언가 길쭉한 것을 꺼내서 바위틈에 꽂아 넣은 순간, 지원의 한쪽 입꼬리가 비죽이 올라갔다. 드디어 현행범을 잡았다.

“여기에서 뭐 하십니까, 임 선생님.”

“허억! 차, 차 관장님….”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보던 소화가 지원의 얼굴을 보더니 사색이 되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그녀의 뒤로 매캐한 유황 냄새가 나는 가느다란 연기가 마치 물안개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새벽 비행기를 타고 귀국한 지원은 그대로 본사로 향했다. 어젯밤이 보름이었으니, 아마도 가온은 밤새 중천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지원의 예상대로 중천에서 밤을 꼬박 새운 가온은 정오가 다 되어서야 피죽 한 그릇 못 먹은 얼굴로 비척비척 걸어 나왔다. 하여간 내가 없으면 미음 한 숟가락 입에 넣어주는 인간이 없다니까. 그새 턱이 뾰족해진 걸 보고 있으려니 속이 문드러졌다.

“대표님.”

“아…, 차 관장. 잘 다녀왔어? 얼굴이 안 좋네.”

“대표님만큼은 아닐 겁니다. 바로 무영당으로 가실 거죠?”

“응, 가서 한숨 자야겠어. 같이 갈 거지?”

“그럼요.”

이동하는 차 안에서 간략하게 출장에 대한 보고를 받은 가온이 심각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거의 확신하고 있었던 일이었지만, 막상 가이드의 일탈 행위가 확정되고 나니 입맛이 썼다.

“그래서 임 선생은 모레 귀국한다고?”

“네. 아이가 함께 있어서 즉시 데리고 올 수가 없었습니다. 대신 서 감독이 남은 일정에 모두 동행하기로 했고, 홍콩에 거주하는 가이드 네 명이 24시간 밀착 감시 중입니다. 도망칠 수 없다는 건 본인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잘했어. 한 짓은 괘씸하지만, 아이를 위해서 그 정도 편의는 봐줘야지. 그럼 우린 일단 좀 쉬자고.”

희주가 차려준 점심을 먹고 가온을 따라 별채의 침실로 들어간 지원은, 이전과는 사뭇 달라진 분위기에 순간 멈칫했다. 푹신한 보료와 비단 침구가 놓여 있던 침실에 놀랍게도 킹사이즈 침대가 떡하니 들어와 있었다. 공교롭게도 제집에 있는 것과 같은 브랜드의 침대였다.

이거…, 나를 위해서 들여놓은 가구라고 생각하는 건 억측인가? 들뜬 마음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조금만 긴장을 놓으면 자꾸만 입꼬리가 들렸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던 가온이 욕실 문 앞에서 비틀거리지 않았다면 아마도 내내 히죽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얼른 자요, 가온 씨.”

“응. 차 관장도 많이 피곤했을 텐데, 한숨 자고 얘기해.”

마음이 들떠서 쉽게 잠이 올 것 같지 않았지만, 사랑스러운 연인을 품에 안고 포근한 이불을 덮으니 스르르 눈이 감겼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어 한참을 정신없이 자던 지원은, 제 품 안에 안겨 있던 가온이 바르작거리는 바람에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눈동자만 굴려 창문 쪽을 바라보니 아직 날이 훤했다.

기껏해야 여섯 시나 되었을까 싶은데…. 더 주무시지 않고. 안타까운 마음에 가온의 등을 도닥이려던 지원은 불쑥 제 약지에 반지가 끼워지는 바람에 어정쩡하게 손을 뻗은 채 그대로 굳었다. 눈앞이 어질어질한 상태에서도 제 품을 파고드는 가온을 꼭 안아준 것은 오로지 타고난 반사 신경 덕분이었다.

“차 관장.”

“…네.”

“이제 나한테는 시간이 딱 30년 남았어.”

“….”

뭐라고 대꾸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어서, 지원은 그저 가온을 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기만 했다. 가온 역시 대답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지원의 넓은 가슴에 이마를 묻은 채 계속해서 조곤조곤 속삭였다.

“내 앞에 나타나 줘서 너무 고마워. 무엇보다 아주 적당한 때에 나한테 와 줘서 정말 더욱 고맙고. 딱 지금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난 차 관장하고 같이 살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을 거야.”

“가온 씨.”

“그러니까….”

뭔가 하기 힘든 말을 하려는 듯 크게 숨을 몰아쉬던 가온이 천천히 고개를 들고는 지원과 눈을 맞췄다. 가늘게 떨리는 속눈썹과 발그레해진 볼이 너무 예뻐서 당장이라도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지원은 필사적으로 인내심을 발휘했다. 무서울 정도로 짙어진 눈빛을 한 지원이 목울대를 크게 움직였다.

“여기서…, 나랑…, 30년만 살자.”

바닥을 닥닥 긁어 퍼 올린 인내심은 거기서 끝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약속했던 대답을 내놓은 지원은 그대로 얼굴을 내려 가쁜 숨이 새어 나오는 입술을 완전히 덮었다. 그리고는 환했던 방이 완전히 어둑해진 다음에도 가온을 놓아주지 않았다. 아주 조금 이지러진 달이 수줍게 떠오를 때까지도, 그 달이 다시금 슬그머니 빛을 잃을 때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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