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순정을 노래함
[그룹 세라엘 출신의 배우 이로아 씨가 제니스 컴퍼니를 대표하는 새 얼굴로 발탁되어 연일 화제에 오르고 있습니다. 올가을 제니스 컴퍼니가 야심 차게 출시한 에르사 라인은 신제품이 진열되자마자 매진 사태가 벌어지는 등 소비자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고 있는데요, 업계 관계자들은 맑고 청초한 이미지의 이로아 씨를 전면으로 내세운 전략이 주효했다고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다음 주부터 JTN에서 방영하는 드라마 <순정을 노래함>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된 이로아 씨는 현재 드라마 촬영에 전념하고 있으며, 걸그룹 메인보컬 출신답게 선 공개된 OST를 직접 부르기도 했습니다. 가수 지망생 역할을 맡은 이로아 씨는, 최근 많은 여성들에게 이상형으로 손꼽히는 배우 최선우 씨와 호흡을 맞추게 된 것을….]
[제니스 컴퍼니가 선택한 이슬의 여신. 맑고 투명한 피부를 강조하는 에르사 라인의 제품들이 물량 공급에 차질을 빚을 만큼 불티나게 팔려 나가는 가운데, 제니스 컴퍼니의 홍보실에서는 3개월 단발 모델이었던 이로아와 1년 전속 계약을 체결하고 곧바로 2차 광고 촬영에 들어간다고 발표했다.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제니스 컴퍼니의 대표가 이번 광고에 큰 기대를 걸고 있어, 경기도 모처에 위치한 자신의 별장을 흔쾌히 촬영지로 제공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으며….]
“이게 뭐야? 이슬의 여신? 미친 거 아니야? 걔가 어떻게 제니스 광고를 찍어?”
인상을 사납게 구긴 해미가 있는 대로 성질을 부리며 들고 있던 휴대폰을 집어던졌다. 순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매니저는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을 지으며 힘겹게 한숨을 삼켰다. 사실 그는 로아에 대한 기사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어젯밤부터 이런 사태가 곧 닥칠 거라는 걸 뻔히 예상하고 있었다.
“제니스는 원래 방송에 거의 노출이 없었던 모델을 쓰잖아.”
“누가 그걸 몰라? 오빠 돌대가리야? 이로아가 이런 광고를 찍을 때까지 회사는 뭐 했어? 월급을 이렇게 날로 받아도 되는 거야?”
하아…. 일단 나는 너 쫓아다니면서 그 더러운 성질머리 받아주느라고 바빴고, 다른 사람들도 놀고먹으면서 월급 받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 그리고 막말로 그 월급을 네가 주는 것도 아니잖아? 솔직히 너처럼 취미 생활 하듯 연예계 활동하면 수입이 몇 푼이나 되는 줄 알아? 오히려 비용이 더 들 때도 많다고. 오늘도 속엣말을 꾹 눌러 삼킨 매니저가 해미를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벌써 몇 년째 거의 습관처럼 하는 일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유독 비위가 상했다.
“제니스는 대기업이라 우리 회사 정도의 파워로는 입도 못 대.”
“그러니까 애초에 접촉을 못 하게 했었어야지!”
“로아는 이제 우리 회사 소속도 아닌데 그걸 무슨 수로.”
“그래도 어떻게 이로아가 광고에 나오게 내버려 둬! 내가 이렇게 싫어하는 줄 알면서!”
해미의 발악을 가만히 지켜보던 매니저가 참았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얘도 참 인간이 순수해. 아무리 평생을 공주처럼 떠받들리면서 살았다지만, 그래도 지엔터가 감히 제니스를 상대로 뭔가 수작을 부릴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이 업계에서 영원한 슈퍼 갑은 광고주라는 걸 왜 아직도 모르지?
“제니스의 오너가 로아를 직접 지목했대. 그건 로비 같은 걸로 어떻게 뭉갤 수 있는 사안이 아니야.”
매니저의 말투는 차분했지만, 그의 말대꾸가 영 거슬렸던 해미는 바로 도끼눈을 떴다.
“오빠 오늘 왜 이래? 왜 이렇게 사람 성질을 긁어? 아직도 내 성격을 이렇게 몰라서 어떡해? 짜증나니까 그냥 하는 말이잖아! 누가 설명하라는 거야? 진짜 그만두고 싶어?”
매니저는 제법 예쁘장하던 얼굴이 표독스럽게 변하는 걸 무심히 지켜보며, ‘아, 얘도 이 바닥에서 오래 버티기는 어렵겠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어릴 때야 귀엽고 풋풋한 느낌이라도 있었지만, 나이를 먹으며 서서히 성품이 얼굴에 드러나니 대중이 좋아하는 호감형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노래나 연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걸그룹 출신이라는 이력 하나로 예능판을 기웃거리고 있지만, 소속사의 힘으로 더는 꽂아 넣을 수 없는 사태가 곧 올 것이다.
그때 가서 쓸모를 다한 개처럼 무력하게 실직자가 될 바에야….
“그래, 그만두고 싶다.”
“…뭐?”
내가 지금 뭔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드물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해미를 보고 있으려니, 매니저는 아주 간만에 약간의 희열을 느꼈다. 아직 절반 가까이 남아 있는 전세 자금 대출과 기저귀도 못 뗀 어린 딸의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렸지만, 자신은 인간이기에 최소한의 인격을 갖춘 동료와 일하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 순간 너무나도 간절해졌다.
그래, 사지육신 멀쩡한데 설마 입에 풀칠은 못 할까. 어디 가서 무슨 일을 해도 이것보다는 낫겠지.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해미를 빤히 쳐다보던 매니저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지금 바로 사무실 들어가서 사직서 낼 거야. 더는 너 같은 애랑 일 못 하겠어.”
“…뭐?”
“그래도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 한마디만 하면, 앞으로 누가 오더라도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 말을 할 때는 듣는 사람의 기분도 한 번 정도는 생각을 좀 하고. 이건 정말 너를 위해서 하는 소리야. 요즘 심심치 않게 연예인 폭로 글 올라오는 거 알지?”
너는 그런 글 한 번이라도 올라오면 다시는 방송 못 해, 논란을 커버할 만한 실력이 없어서. 내가 진짜 나쁜 마음을 먹었으면 너는 벌써 이 바닥에서 매장되었을 거야. 차마 마지막 말까지는 덧붙이지 못했지만, 매니저는 그럭저럭 가뿐한 얼굴로 돌아섰다. 이 정도 뱉어낸 것만으로도 십 년 묵은 체증이 한순간에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우와, 나 벌써 수명이 좀 늘어난 것 같네. 이렇게 속이 후련할 줄 알았으면 진작 그만두는 건데. 간만에 제대로 잠이 오겠어. 오늘은 오랜만에 로아한테 연락이나 해봐야겠다. 그동안은 지해미 눈치가 보여서 안부도 제대로 못 물었는데…. 한창 바쁠 테니까 전화는 말고 문자나 하나 보내야지. 로아가 정말 잘됐으면 좋겠다, 이런 싸가지 없는 것들 보란 듯이. 그래, 그렇게 착하고 성실한 애가 잘되어야 세상에 정의가 있는 거지.
“야! 아, 아니, 오빠! 거기 안 서? 이렇게 갑자기 그만두는 게 어딨어?! 내가 뭘 어쨌다고 갑자기 이 난리야? 오늘은 별말 하지도 않았잖아!”
등 뒤에서 날 선 고함이 들려왔지만, 매니저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마음도, 발걸음도, 모두 더할 나위 없이 가벼웠다.
“형, 해수가 진짜로 금메달을 땄네요. 중반까지만 해도 순위권 밖이었는데.”
“집요한 놈.”
말은 불퉁하게 하지만, 지원이 내내 생중계 화면을 틀어놓고 걱정스럽게 힐끔거린 걸 알고 있던 도겸은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하여간 손해 보는 성격이라니까. 사람이 저렇게 까칠한데 대표님한테는 또 그렇게 다정할 수가 없는 것도 진짜 놀랍고.
“아무튼 다음 주에 해수 들어오면 우리도 좀 여유가 생기겠어요. 그 천방지축도 꼴에 상급이라고, 몇 달 자리 비우니까 공백이 크네.”
“그만큼 시끄러워지겠지. 나는 벌써부터 귀가 따갑다.”
“아…, 연해수 진짜 시끄럽긴 하지. 나이를 먹으면 좀 나아질까?”
“틀렸어. 그 새끼는 죽어서 무덤에 묻히는 순간까지도 조잘댈 놈이야. 아니, 망자가 되어서도 저를 보는 사람을 만나면 신나게 떠들겠지. 그 꼴을 안 보려면 내가 먼저 죽어야 되는데.”
“어휴, 나도 그 자식 에스코트는 정말 안 하고 싶다. 상상만 해도 벌써 머리가 아파.”
가정만으로도 이미 피곤해져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도겸이, 회의가 시작된 지 1시간이 지나도록 비어 있는 상석을 흘깃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대표님은 왜 안 나오셔? 회의 같이 하려고 무영당으로 오라고 한 거 아니었어요?”
“맞는데, 좀 더 주무시게 놔두자. 아까 잠깐 들어가서 보니까 내가 들어오는 줄도 모르시더라. 어제 명계에서 너무 고생하셨거든. 통로를 스무 개나 닫으셨어.”
“명계에서 인계로 다이렉트로 연결되는 통로가 스무 개나 있었다니 진짜 무섭네. 그쪽에서 인계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건, 재수 없으면 이쪽에서 거기로 넘어갈 수도 있다는 얘기잖아. 살아 있는 사람이 멀쩡히 걸어가다가 갑자기 지옥에 뚝 떨어지면 그게 웬 날벼락이야?”
“그러니까 말이다. 아무튼 그래서 어제 기운을 엄청 많이 쓰셨어. 돌아올 때는 기어이 무릎이 꺾여서 절반 정도는 업고 올라왔다고.”
“형이 대표님을 업고 올라왔다고? 명계에서 중천까지? 그 나무를 타고?”
명계수문 너머에 있는 커다란 주목을 떠올린 도겸이 경악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지원은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얼굴을 했다. 정말 문자 그대로 나무를 타야 했다면 솔직히 조금 무리가 되었겠지만, 계단을 오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가온이 너무 가벼워서 마음이 안 좋았었다. 내가 더 힘들어도 상관없으니까 무게감이 좀 느껴지면 좋을 텐데. 중천으로 오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럼 누가 업어?”
“형 진짜 대단하다. 나는 명계수문 근처에만 가도 가슴이 답답해지던데. 거길 어떻게 사람을 업고 올라왔어요?”
“그게 뭐 어려워? 군대에서는 40kg짜리 완전 군장하고 11시간 밤샘 구보도 했었는데.”
“그건 20대 초반이었잖아.”
“중반이었어.”
“아, 예. 그러셨군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도겸이 저도 모르게 벽시계를 힐끔 바라보자, 지원의 눈빛이 조금 예리해졌다. 쟤가 오늘 왜 이렇게 시계를 자꾸 쳐다보지? 딱히 초조해 보이는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매사 여유로운 도겸이 이렇게 시간을 신경 쓰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왜, 약속 있어?”
“점심에요. 아직 한참 남았어.”
“여자 만나냐?”
“뭐, 성별은 여자 맞긴 한데…. 그런 의미로 만나는 건 아니고.”
표정이 살짝 어두워진 도겸이 답답한 속을 달래려 숨을 길게 내쉬었다. 요즘 자신과 로아의 전생과 관련된 꿈을 자주 꾸는데, 여느 꿈과는 달리 일어나고 나서도 계속 기억에 생생하게 남는다. 그게 실제로 제게 있었던 일인지, 아니면 이런저런 자료와 상황을 기반으로 만들어낸 상상의 결과인지는 알 수 없지만, 너무 마음에 걸려서 다른 일이 손에 안 잡힐 정도다.
“있잖아, 형. 내가 며칠 전에 이로아 씨 얼굴에 상처 난 걸 확인하는 꿈을 꿨거든?”
“그랬어?”
“응, 그 독한 것이 진짜 작정하고 길게 그었더라고. 정황상 나는 그 사고를 되게 뒤늦게 알게 된 것 같았는데, 아무튼 막상 눈으로 직접 보니까 속이 엄청 상하더라고요.”
“…그렇겠지.”
“얼굴이 하얀 여자가 승복을 입고 코딱지만 한 방에 반듯하게 누워 있는 걸 내려다보는데, 기분이 참….”
말을 맺지 못한 도겸이 시선을 내리깐 채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지금도 썩 좋은 기분은 아니지만, 꿈속에서 그 광경을 처음 봤을 땐 그야말로 가슴이 미어졌었다.
“아무튼 내가 이제 와서 그걸 보상할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이 너무 불편해서 제대로 밥이라도 한번 사야 될 것 같았어. 그게 오늘 점심 약속이에요.”
도겸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지원이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도겸의 말끔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원래도 눈에 띄는 외모이긴 했었지만, 도겸은 현재 전문가들의 집중 관리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피부에서 광이 나는 상태였다.
자식, 잘생겼네. 저 다크서클만 가리면 영화배우 뺨도 치겠어. 과거지사를 모두 배제하고 미학적인 관점에서만 보면 서도겸과 이로아의 투 샷은 아주 조화롭고 아름다운 그림이다. 누군가가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는 장면을 목격한다면, 없는 사연이라도 만들어내고 싶어질 것이다.
물론 그게 실제 사연만큼 드라마틱하진 않겠지만.
“이제야 겨우 빛을 보기 시작한 연예인인데, 괜히 남자 문제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 안 좋은 거 아니야? 그 드라마 다음 주부터 방영한다면서. 더군다나 너랑 같이 광고도 찍었잖아. 어째 기자들이 기사 쓰기 딱 좋은 먹잇감으로 보인다.”
“나는 거의 뒷모습만 나왔는데, 누가 나를 알아본다고. 그리고 친구가 혼자서 하는 레스토랑에 갈 거예요. 점심, 저녁 다 한 테이블씩만 받아요. 다른 사람 마주칠 일이 없어.”
“그 친구는 믿을 만한 사람이고?”
“걔를 못 믿으면 세상에 믿을 사람 한 명도 없어요.”
뭐 그렇다면야. 내가 이렇게까지 참견했는데 말 안 듣고 까불다가 스캔들이라도 나면 그건 다 네 책임이지. 깔끔하게 관심을 거둬들인 지원이 갑자기 표정을 싹 바꾸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눈이 휘둥그레진 도겸의 옆을 휙 지나쳐서 사랑채의 문을 벌컥 열었다.
“대표님, 편히 쉬셨습니까.”
뭐야. 나는 아무 소리도 못 들었는데, 저 형은 대체 대표님이 오시는지 어떻게 알았지?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사랑의 힘인가? 제가 생각하고도 살짝 소름이 끼쳤던 도겸은, 미간을 구긴 채 오톨도톨 닭살이 올라온 팔을 가만히 문질렀다.
“왔으면 깨우지. 정신없이 자느라 시간이 이렇게 된 줄도 몰랐어.”
“잘하셨습니다. 오늘은 원래 아무것도 안 하고 쉬기로 하셨으니까 당연히 숙면이 우선이죠. 에르사 라인의 2차 광고 일정이 빠듯해서 어쩔 수 없이 서 감독을 불렀지만, 솔직히 저는 오늘 이 회의를 해야 하는 것도 영 마음에 안 듭니다.”
“그럴 거 없어. 우리끼리 얘기하는 것 정도는 힘든 일도 아니고.”
“그래도요.”
매번 느끼는 거지만, 가온을 대하는 지원을 보고 있으면 저 사람이 내가 알던 그 차지원이 맞나 싶다. 저 정도면 상대에 따라 태도를 바꾸는 게 아니라 아예 인격을 갈아 끼우는 거 아닌가? 속으로만 조용히 혀를 차던 도겸이 막 문지방을 넘어서는 지원의 서늘한 눈짓에 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눈치 안 줘도 대표님한테 앉아서 인사하진 않아요, 형. 내가 무슨 연해수도 아니고.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그래, 서 감독. 바쁜데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아, 글쎄 그렇게 안 노려봐도 대표님 마음 불편하시게 안 한다니까. 나도 이 짓을 5년 넘게 했어요. 최소한의 사회생활은 할 줄 안다고.
“아닙니다, 대표님. 지원이 형한테 상의할 일이 하나 있어서 계속 그 얘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시간이 이렇게 된 줄도 몰랐네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가온이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제 손등을 그녀의 이마에 대는 지원을 본 도겸은 저도 모르게 헛바람이 새어 나올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지금 열나는지 확인하는 거야? 지극정성이다, 진짜. 저렇게 모든 관심과 배려를 한 사람한테만 몰빵하니까 다른 사람들에게는 나눠줄 게 없지.
“열이 좀 있으신데요.”
“그렇지 않아. 막 더운 물로 씻고 나와서 그래.”
“그 점을 감안해도 평소보다 좀 높습니다.”
못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지원과, 그런 지원과 눈을 맞추며 살짝 난감하게 웃는 가온을 번갈아 바라보던 도겸이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별것도 아닌 대화인데도 희한하게 두 사람의 키스 장면을 목격했을 때보다 더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서 괜히 제 얼굴이 다 붉어졌다.
회의를 마치고 별채로 돌아온 가온은 지원이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어 놓는 것을 보고는 조금 의아한 얼굴을 했다.
“오늘은 밖에 안 나가?”
그간 지원은 쉬는 날이면 항상 철저한 계획을 세워 일상의 경험이 부족한 가온이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즐거울 수 있도록 노력해 왔다. 물론 오늘도 완벽한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 서울 근교로 나가서 들깨수제비와 묵밥을 먹고, 경관이 좋은 곳에서 루지를 한 후, 근처의 허브농원에서 여유롭게 차를 마신 다음 포푸리 만들기 체험을 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현재 제집 냉장고에는 저녁에 먹을 스테이크용 고기가 잘 숙성되고 있다.
세 개나 되는 일기예보 어플을 통해 날씨가 맑을 것을 확인했지만, 당연히 우천 시를 대비한 비상 대책도 마련되어 있었다. 루지는 클레이 사격이나 미술관 관람으로 대체가 가능하고, 교통 체증으로 인해 이동 시간이 길어질 경우에 차 안에서 먹을 간식거리까지 소분하여 챙겨 두었다.
하지만 가온의 얼굴에 살짝 붉은 기가 돈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 지원은 이 모든 계획을 가차 없이 폐기 처분했다.
“네. 오늘 하루는 집에서 빈둥거리면서 쉬려고 합니다. 나가서 노는 것도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니까요. 가끔은 이렇게 뇌를 쉬게 해주어야죠.”
“지루하지 않겠어?”
“전혀요. 저는 대표님의 얼굴만 보고 있어도 충분히 즐겁습니다.”
“어…?”
그럼…, 나는 뭘 해야 하지? 시원시원하게 대꾸하던 지원이 살짝 당황한 기색을 보이는 가온을 보며 입꼬리를 조금 내렸다. 쯧, 사람이 생전 쉬어 봤어야 말이지. 옆에서 수발드는 사람이 그렇게 많았는데 대체 다들 뭘 한 거야? 구름이 쉬어 가는 집 따위를 만들면 뭐 해? 정작 그 집주인은 쉬는 게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모르는데. 순간 짜증이 확 치밀었지만, 지원은 어떻게든 상냥한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혹시 평소에 읽고 싶으셨던 책은 없습니까?”
“책…? 아, 최근에 목민심서 원문을 구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제대로 읽지 못했어.”
목민심서 원문…. 그러면 한자로 쓰였을 테니 같이 읽지는 못하겠네. 잠깐 멈칫했던 지원이 곧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화사하게 웃었다.
“그러면 오늘 읽으세요. 그러다 따분해지면 산책을 하셔도 좋고, 가만히 앉아서 연못을 구경하셔도 되고요. 날씨가 좋으니까 대청마루에서 낮잠을 좀 주무시는 것도 괜찮겠네요.”
“…낮잠?”
가온이 아주 생소한 단어를 들었다는 듯 반응하자, 여전히 웃는 낯인 지원의 관자놀이 부근에 퍼런 핏줄이 툭 불거졌다. 이게 이렇게까지 입에 안 붙을 일이야?
“아침에도 늦게 일어났는데….”
“오래 주무시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냥 모처럼 마음을 편안하게 내려놓고 한가로이 여유를 즐기시라는 거죠. 대표님, 이 대청마루에 누워서 구름이 흘러가는 걸 보신 적이 있습니까?”
지원의 질문에 신중한 얼굴로 기억을 더듬던 가온이 짧게 고개를 저었다. 이 터에 자리를 잡은 지 200년이 넘었지만, 대청마루에 누워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럼 지금 해 보세요.”
침실로 들어가 두툼한 이불 한 장을 가지고 나온 지원이 길게 반으로 접어 대청마루 위에 깔았다. 그리고는 오도카니 서서 눈만 깜빡이고 있는 가온을 바라보며 종용하듯 이불 끝을 톡톡 두드렸다.
“어서요. 서울 하늘이 이렇게 근사한 날은 별로 없습니다.”
“….”
왠지 어색한 기분이 들어서 선뜻 눕지 못하던 가온이, 지원의 거듭된 권유에 할 수 없이 몸을 뉘었다. 신기하게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괜찮았다. 오전에 해가 길게 들었던 덕분인지 바닥에서는 포근한 온기가 올라오고 있었고, 연못 근처에 소담하게 피기 시작한 구절초의 그윽한 향기가 바람이 불 때마다 조금씩 더 진해졌다.
“아….”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보니,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란 가을 하늘에 말 그대로 그림 같은 구름 한 점이 몽실몽실 떠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순간이었다. 어쩐지 현실감이 들지 않아 지원의 얼굴을 바라보니, 계속 저만을 주시하고 있던 그가 다정하게 눈을 맞추며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한테는 하늘을 보라더니.”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이쪽이 훨씬 더 즐겁습니다.”
“그러지 말고 차 관장도 누워서….”
제 입술을 지그시 누르는 손길에 말을 맺지 못한 가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어지간해서는 제 시선을 피하는 법이 없는 지원이 정면을 응시한 채로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대표님.”
“…응?”
“저는 오늘 정말로 대표님께 휴식을 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쉬고 있잖아.”
“그러니까요. 제가 지금 대표님 옆에 누우면 더는 못 쉬실 테니까요.”
덤덤한 말투였지만, 내포하는 의미는 굉장히 의미심장했다. 현명하게 상황을 파악한 가온이 괜한 객기를 부리지 않고 입을 꾹 다물자, 지원의 입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렇게 하늘도 보시면서 여유롭게 좀 쉬시다가…, 출출해지면 쿠키라도 구워서 먹는 건 어떨까요? 그건 대표님이 직접 불을 쓰시는 게 아니니까 권 여사님도 반대하지 않으실 겁니다. 반죽을 해서 오븐에 넣기만 하면, 굽는 건 오븐이 알아서 할 거고요.”
“쿠키? 그런 것도 만들 줄 알아?”
“그럼요. 굉장히 간단합니다. 재료도 많이 들지 않고요. 제과점에서 파는 것 같은 맛을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막 구워진 따끈하고 바삭바삭한 쿠키를 먹는 재미가 있죠.”
“재밌을 것 같아. 기대돼.”
가온의 대답에 지원이 눈꼬리를 곱게 접으며 씩 웃었다. 당연하죠. 저는 항상 대표님이 좋아하실 만한 것들만 엄선해서 추천하고 있으니까요.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예쁘게 핀 구절초를 골라서 몇 송이만 따주세요.”
“그걸로 뭘 하게?”
“지난번에 영월에서 만들었던 도자기가 도착했습니다. 대표님이 빚으신 수반은 저한테 선물로 주신다고 했으니, 거기에 띄워 놓으려고 합니다. 집 안에 이곳과 비슷한 향기가 나면 기분이 아주 좋을 것 같아서요.”
순간 가온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 수반을 처음 만들었을 때는 꽤나 뿌듯했었지만, 제가 생각해도 고급스러움의 결정체인 지원의 집에는 그다지 어울릴 것 같지가 않다.
“차 관장 그거 개 밥그릇 같다고 하지 않았어?”
“아니요, 그렇게 표현하신 분은 대표님이시죠. 저는 그 형태가 굉장히 독창적이고 예술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한 번 제게 주신다고 하신 거니까 무르실 수는 없습니다.”
“무르겠다는 게 아니라…. 차 관장네 집 인테리어는 굉장히 우아한데….”
“그러니까 제 안목을 믿으세요.”
깔끔하게 반론을 제지한 지원이 입꼬리를 크게 올리며 대단히 자신감에 찬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저녁에는 스테이크를 구워 드리겠습니다. 솔직히 권 여사님에 비하면 조리 스킬은 좀 부족하지만, 그걸 커버하기 위해서 아주 양질의 고기를 준비했습니다. 이건 정말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누가 그랬더라…. 문명이 만들어 낸 아름다움은 오직 야경 하나밖에 없다고.
창가에 서서 황홀하게 반짝이는 도시의 밤 풍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가온은, 창문에 지원의 모습이 비치자 옅게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수국 그림이 그려진 머그잔 두 개를 들고 나타난 지원이 그중 하나를 가온에게 내밀었는데,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잔을 받아 드니 아주 상큼하면서도 향긋한 냄새가 났다.
“모과차?”
“네. 고기를 드셨으니까 소화를 돕는 과일차가 좋을 것 같아서요. 커피를 드시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기도 했고요.”
“응, 고마워.”
은근하면서도 기분 좋게 후각을 자극하는 모과 특유의 향을 느긋하게 즐기던 가온이 따끈따끈한 차를 천천히 홀짝였다. 그러자 약간 텁텁했던 입안이 금세 개운해졌다. 단맛이 강하지 않으면서도 떫은맛이 전혀 없는, 신기할 정도로 가온의 입맛에 딱 맞는 차였다. 지원이 말 그대로 귀신같이 가온의 취향을 맞추는 건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었지만, 그의 세심함은 여전히 감탄스럽다.
“맛있네. 보통은 너무 달아서 많이 못 마시겠던데.”
“다행이네요.”
“스테이크도 정말 맛있었어. 요리 솜씨 없다더니.”
“좋은 고기를 사서 구우면 그 정도 맛은 누구나 냅니다. 시판 소스를 쓴 거라 딱히 힘들일 것도 없었고요. 어쨌든 맛있게 드셨다니 기쁩니다.”
내내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던 지원이, 가온의 볼과 이마를 슬쩍 만져보더니 한결 더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이제는 열이 안 나네요. 하루 푹 쉬셔서 나아진 모양입니다.”
아침에도 괜찮았었다니까. 급하게 씻고 나오느라 몸에 열기가 남아 있었던 것뿐이라고. 바로 항변하려던 가온이 입을 꾹 다물며 작게 웃더니 그냥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덕분에 하루 잘 쉬었어. 하루 종일 빈둥거리는 거, 처음 해봤지만 참 좋네.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아침에도 늦게 일어났고 낮잠도 잤는데 누우면 또 잠이 올 것 같아.”
“그건 정말 듣던 중 반가운 말씀이네요. 휴식의 효과를 이렇게 몸소 체험하셨으니 앞으로도 최소한 일주일에 하루는 쉬시는 겁니다. 그렇게 하기로 저랑 약속하셨어요.”
“응, 그럴게.”
“가끔씩은 저랑 여행도 다니시고요.”
눈꼬리를 곱게 접은 가온은 이번에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껏 지원과 함께 보낸 시간은 단 한 순간도 지루하거나 불편한 적이 없었다. ‘여행’이라는 말만 들어도 벌써 즐겁다. 누구에게도 내색하진 않았었지만, 명계의 탈주자 때문에 공항에 발을 들이자마자 되돌아와야 했을 땐 대체로 무심하던 가온도 솔직히 조금 짜증이 났었다. 자신이 내심 그 여행을 굉장히 기대하고 있었다는 걸, 가온은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그럼 말이 나온 김에 계획을 세워 볼까요? 다음 주에 광고 촬영이 끝나면 한 사흘 정도 제주도에 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제주도?”
“네. 지금 분위기가 조금 어수선하니까 멀리 가는 건 부담스러우실 것 같고…. 제주도는 이동에 크게 무리가 없으면서도 적당히 이국적인 분위기를 즐길 수도 있으니까 좋을 것 같습니다.”
제주도….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던 가온이 뭔가를 심각하게 고민하자, 지원 역시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살짝 긴장했다. 제주도에도 무슨 문제가 생겼나? 아니면 안 좋은 기억이라도 있는 건가…. 하지만 자못 진지한 눈빛을 한 가온이 입을 연 순간, 지원은 입꼬리가 마구 치솟는 걸 참지 못했다.
“예전에 지나가다가 얼핏 봤는데, 요즘 제주도에는 막 바다에서 잡은 문어를 넣어서 라면을 끓여주는 곳이 있대.”
“하하하하. 네, 일정 중에 꼭 넣겠습니다.”
“내가 뭐 웃기는 얘기를 했어?”
“아니요. 대표님이 너무 귀여우셔서요.”
눈을 동그랗게 뜨던 가온이 인상을 확 구기자, 다시 한번 크게 웃음을 터트린 지원이 그녀의 찌푸려진 이마를 손끝으로 살살 문질렀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진 없지만…. 나를 그렇게 보는 사람은 정말 차 관장밖에 없어.”
“다른 남자 앞에서도 이렇게 귀여우시면 안 되죠. 저만 알고 있겠습니다.”
“하아….”
대거리를 포기한 가온이 고개를 저으며 크게 한숨을 내쉬자, 빙글빙글 웃는 낯으로 가온을 빤히 바라보던 지원이 입꼬리를 조금 내렸다. 아, 진짜 죽겠네. 사람이 어떻게 숨만 쉬어도 이렇게 미치게 예쁠 수가 있지? 살짝 거칠어지려는 호흡을 애써 고른 지원이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갸름한 턱을 받쳐 들었을 때였다.
딩동. 딩동.
이건 또 어떤 새끼야! 어금니를 사리물며 고개를 홱 돌린 지원은, 홈오토 화면에 나타난 얼굴을 확인하고는 입을 꾹 다문 채 험악한 욕설을 삼켰다. 어휴, 저 화상! 저걸 죽일 수도 없고. 내가 이래서 어떻게든 서울을 뜨려는 거야.
“누가 오기로 했어?”
“아닙니다. 대표님하고 함께 있는 날에 다른 약속을 잡을 리가 없죠. 아래층에 친구가 사는데 저랑 아주 막역한 사이라….”
딩동. 딩동. 딩동. 딩동.
연달아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눈썹을 확 치켜뜨던 지원이 간신히 미소를 유지한 채 가온에게 정중하게 양해를 구했다.
“대표님, 죄송합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곧 돌려보내고 오겠습니다.”
“들어오라고 해도 돼. 차 관장 요새 친구 만날 시간도 없었을 텐데…. 나는 권 실장 불러서 가면 되니까.”
“저는 그렇게는 못 합니다, 대표님. 제가 모시고 왔으니 당연히 댁까지 안전하게 모셔다드려야죠. 잠깐이면 됩니다.”
돌아서자마자 표정이 돌변한 지원이 작게 이를 갈며 성큼성큼 현관으로 향했다. 그러는 중에도 누르는 사람의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급한 초인종 소리가 두 번 더 울렸다. 나간다, 나가, 이 성질 급한 새끼야. 사나운 손길로 문을 벌컥 열어젖힌 지원이 그대로 밖으로 나가서 현관문을 쾅 닫았다. 지원이 밀고 나오는 통에 얼떨결에 뒤로 두어 걸음 밀린 동하가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뭐냐? 씻고 있는 것도 아니었으면서 문을 왜 이렇게 늦게 열어? 그리고 네가 왜 나오는 건데? 집으로 들어가자.”
“하아…, 안에 손님 있어.”
“여자?”
“그래. 그러니까 오늘은 조용히 꺼져.”
“왜. 마침 잘됐네. 인사나 하자. 안 그래도 궁금하던 참인데.”
호기심에 눈을 빛내는 동하를 매섭게 쏘아보던 지원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혹시라도 제 말소리가 안으로 들릴까 봐 최대한 목소리를 낮췄다.
“오늘은 안 돼. 미리 상의가 안 됐어. 나중에 정식으로 소개할 테니까 오늘은 그냥 좀 가라, 응?”
“아, 왜! 왜 이렇게 꽁꽁 숨기는 건데? 네가 이러니까 점점 더 수상해지잖아. 내가 좀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너 왜 이렇게 유난을 떨어?”
“보면 닳아. 그래서 내가 보기도 아까워. 아직 내 친구 한번 만나자고 운도 안 띄웠단 말이야. 안에서 기다리는 사람 마음 불편하게 만들지 말고 빨리 꺼지라고, 좀!”
위아래로 눈을 부라리는 지원을 뜨악한 얼굴로 바라보던 동하가 못내 기가 막힌 목소리를 냈다. 이 자식 어디 아픈 거 아니야?
“너 지금 좀 미친놈 같아.”
“나도 아니까 좋은 말로 할 때 꺼지자.”
“너 그 여자한테 무슨 약점 잡혔냐? 천하의 차지원이 왜 이렇게 저자세야? 아니, 아무리 대기업 대표라도 그렇지. 사귀는 사인데 왜 너만 바짝 엎드려서 비위를 맞춰?”
“아아…, 진짜 돌겠네.”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던 지원이 그 와중에도 거슬리는 부분은 잊지 않고 지적했다.
“내가 호칭 신경 쓰라고 했지.”
“하! 이 새끼가 완전히 돌았구만.”
“대표님. 입에 붙을 때까지 연습해라. 그전에는 소개고 뭐고 어림도 없어. 그럼 가라. 나중에 전화할게.”
제 할 말을 모두 마친 지원이 신속하게 비밀번호를 누르더니, 미처 동하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복도에 홀로 남겨진 동하는 코앞에서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며 몇 번이고 헛바람을 토해냈다.
우와, 여자한테 미치면 저렇게 되는 놈이었구나. 친구고 뭐고 눈에 뵈는 게 없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십년지기를 이렇게 동네 똥개 취급하다니. 괘씸한데 확 벨을 다시 눌러? 입매를 비틀던 동하가 눈을 질끈 감은 채 심호흡을 하며 가까스로 마음을 다스렸다.
좋아, 인격이 훌륭한 내가 한 번만 더 참아준다. 굳게 닫힌 현관을 한참 동안 노려보던 동하가 짧게 혀를 차며 돌아섰다. 어쨌든 제정신이 아닌 상태의 차지원을 자극하는 건 그리 현명한 짓이 아니다. 십 년이라는 세월은 결코 거저 흐른 것이 아니었기에, 동하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 앙큼한 게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독살스럽게 눈을 치켜뜬 희란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이리저리 휙휙 날았다. 분명히 이 근처 어디라고 했는데…. TV에서 얼핏 지명을 듣기는 했지만, 예전과는 달리 세상이 너무 복잡해진 탓에 현대 사회에 익숙하지 않은 희란은 쉽게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수도 없이 이정표를 확인하며 인근을 헤매던 희란은, 꼬박 한나절이 지난 후에야 겨우 광고 촬영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청명한 호수와, 색색의 수를 놓은 듯 아름답게 펼쳐진 코스모스 꽃밭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어우러진 근사한 장소였다. 하지만 시기와 질투에 눈이 먼 희란은 풍경 따위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녀의 포악한 시선의 끝에는 오로지 두 사람만 있었다.
“자, 다시 한번 갈게요. 로아 씨, 조금만 더 사랑에 빠진 얼굴로. 좋아요, 표정은 딱 지금처럼. 뒤로 천천히 걸어가 볼게요. 도겸 씨 손은 놓지 말고.”
선녀처럼 곱게 치장한 로아가 더없이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도겸을 바라보자, 희란은 분기를 참지 못하고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저 여우같은 게 내 오라버니를 또 꼬여냈어. 저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 저만 깨끗한 척, 말간 눈을 하고! 흥, 사대부 집 딸이 천박하게 얼굴에 분이나 바르고 사람들 앞에서 웃음을 팔다니. 기생하고 다를 바가 뭐야? 예나 지금이나 오라버니하고는 격이 맞지 않아.
- 언니, 곧 우리 집에 시집올 사람이 옷차림이 그게 뭐예요? 노리개 하나도 없이 초라하게. 언니가 그러고 다니면 오라버니 얼굴이 뭐가 되겠어요?
- 아가씨. 아가씨가 하고 있는 그 비취 노리개 하나 값으로 열 식구가 반년을 먹고 삽니다. 저는 그런 큰돈을 그저 내 몸을 치장하는 장신구에 쓰고 싶지 않고, 도련님도 그런 제가 초라해서 부끄럽다 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건방진! 네가 뭔데 내 오라버니를 나보다 더 잘 안다는 듯이 지껄여? 매일 거지 소굴을 제집처럼 드나든다더니, 제 행색까지 거지꼴이 된 줄도 모르고! 어디 그 잘난 얼굴에 흠집이 나고도 지금처럼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지 보자.
그 자리에서 은장도를 꺼내 든 건 충동적인 행동이었지만, 그 얄미운 얼굴에 손톱자국 하나라도 내야 속이 시원하겠다는 생각은 아주 오래전부터 했었다. 때문에 은장도를 휘두르는 손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 아흑.
- 미, 미안해요, 언니. 나는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벌겋게 속살이 드러난 상처를 보고 그제야 겁을 먹은 희란은 핏물이 뚝뚝 흐르는 은장도를 손에 쥔 채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하필 그 순간에 연못 앞을 지나던 희란의 조부가 파랗게 질린 손녀딸을 발견했다.
- 지금 네 손에 쥔 것이 무엇이냐.
- 하, 할아버님.
- 어린 것이 어찌하여 손에 피를 묻히고 있는 게야!
잔뜩 겁에 질린 희란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흐느끼기만 하자,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한 조영중이 손녀딸이 박차고 나온 방문을 벌컥 열었다. 놀랍게도 방안에는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감싼 수연이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신음하고 있었다. 어지간한 일에는 평정을 잃지 않던 조영중이 순간 경악하며 입을 떡 벌렸다.
왜 이 아이가 원도의 공부방에…. 제가 없을 때는 종들도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게 하는 방인데.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수연과 울면서도 제 눈치를 살피는 희란을 번갈아 바라보던 조영중은, 제 손녀가 일부러 집안에서 가장 인적이 없는 곳으로 수연을 데리고 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더불어 이 기막힌 상해 사건의 범인이 바로 희란이라는 것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손녀이긴 했지만, 그녀가 뭐든 제 마음에 드는 것은 제 손에 쥐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는 걸 조영중은 잘 알고 있었다.
오라비의 사랑을 받는 게 미웠던 게로군. 오라비를 제가 가질 수는 없으니 대신 저 아이라도 망가뜨리고 싶었던 게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제 고작 열 살배기가 어찌 이런 악독한 짓을….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심정으로 길게 탄식하던 조영중이 우선 희란의 손에서 은장도를 뺏어 들었다. 그리고는 지체 없이 연못 한가운데로 휙 던져 넣었다.
- 너는 어서 가서 손부터 씻거라. 그리고 조용히 행랑아범을 찾아서 여기로 데리고 오너라. 아무한테도 알리지 말고. 알겠느냐?
- 네.
상황 판단은 빨랐고 후속 조치는 그보다 더 신속했다. 조영중은 평소 품행이 단정하고 성품이 바른 예비 손부를 대단히 어여삐 여기고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그녀보다는 손녀딸이 더욱 중했다. 아무리 청렴결백한 관리였어도 그는 조선에서 내로라하는 명문가에서 나고 자라 뼛속까지 사대부인 자였다. 원인이 무엇이든 얼굴에 흉이 진 사람을 제 집안에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런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른 이가 제 손녀딸이라는 게 세간에 알려지는 것도 곤란하다. 그렇게 되면 희란의 인생은 끝이니 그것만큼은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 아가, 수연아. 내 말이 들리느냐.
- 할아버님….
- 정말 미안하구나. 내가 손주를 잘못 키웠다.
얼굴이 타들어 가는 것 같은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던 수연이 고개를 들고 조영중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곧 서러운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저를 몹시 귀애하던 다정한 눈빛이 냉정하게 변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수연은 그가 어떻게든 이 일을 잡음 없이 처리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 제가 이 일을 원도에게 알린다면, 조영중은 저를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앨 것이다.
- 다시는…, 이 집에 발걸음하지 않겠습니다. 도련님께도 죽을 때까지 입을 다물 것입니다.
- 이런. 너의 영민함이 진심으로 아깝고 안타깝구나. 네 아비와 동생의 앞길은 내가 끝까지 책임지겠다고 약속하마.
그렇게 수연은 조용히 약혼자의 곁을 떠났고, 영문도 모른 채 파혼을 당한 원도는 아주 오랫동안 괴로워했다. 처음에는 혹시라도 제가 한 짓이 탄로 날까 봐 두려움에 떨며 오라비와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하던 희란은, 시간이 점차 흐르자 어린 날의 과오를 서서히 기억에서 지워갔다. 확연히 말수가 줄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제게는 다정한 오라비의 애정을 듬뿍 받으며 부족할 것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고, 저를 끔찍이 위하는 남편을 만나 안락한 결혼 생활을 했다.
그런 평온함이 무너진 것은 무려 17년이 흐른 뒤였다.
- 아씨, 친정에서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부제학 나으리께서 지금 바로 들어오라고 하셨답니다.
- 오라버니께서? 어쩐 일로?
잔뜩 부푼 마음으로 친정 나들이를 했던 희란은 원도의 서릿발 같은 눈빛을 보고는 오금이 저려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의 싸늘한 시선이 제게 닿은 순간, 아주 오랫동안 억지로 덮어 두었던 기억이 눈앞에 선연히 펼쳐졌다. 들켰구나. 드디어…, 들키고 말았어. 처음 보는 오라비의 표정이 너무 무서운 나머지 희란은 온몸에 오한이 들었다. 제 몸을 제가 주체할 수 없어 이가 딱딱 부딪치는 소리를 내는 것도 어쩌지 못했다.
- 내가 너를 왜 불러들였는지 아는 모양이구나.
- 오, 오라버니….
- 네가…, 네가 정녕 내 여인의 얼굴에 칼부림을 했더냐.
마음이 다급해진 희란이 엉금엉금 기어가 오라비의 다리를 붙잡고 매달렸다. 그저 어떻게든 원도의 마음을 풀어야 한다는 생각에 종들이 보고 있다는 걸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 용서해주십시오, 오라버니. 그저 시, 실수였습니다. 절대로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 실수? 품 안에 넣어 둔 은장도를 굳이 꺼내서 사람의 얼굴에 대고 휘둘렀으면서도 실수라…. 네가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단 한 번도 사람들 앞에서 언성을 높인 적이 없던 원도가 추상같은 호통을 치자, 손이 떨려 오라비의 옷자락을 놓친 희란이 그대로 엎드려 눈물을 줄줄 쏟았다.
- 잘못했습니다, 오라버니. 정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제발….
- 늦었다. 네가 진정 용서를 구해야 할 이는 이미 세상을 뜨고 없으니 너는 그 일에 대해 평생 누구에게도 용서받지 못한다. 가거라. 가서 다시는 이 집에 발걸음하지 마라. 내 너를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것이니.
- 오라버니.
엎드려 있는 희란을 매몰차게 지나친 원도가 어쩔 줄 몰라 하는 하인들을 향해 지엄한 명령을 내렸다.
- 다들 들어라. 향후 출가외인에게 대문을 열어주는 이는 누가 되었든 내 명령을 어긴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게 될 것이다. 이 조선 땅에서 조원도와 척을 지고도 무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면 멋대로 해도 좋다.
기진하여 몸종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집으로 돌아간 희란은, 이후로 수도 없이 친정집 대문을 두드렸지만 결국 죽을 때까지 오라비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희란이 친정에서 완전히 내쳐진 것을 알게 된 그녀의 남편은, 대놓고 구박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전만큼 희란을 극진하게 아끼지도 않았다. 끝내 아들을 낳지 못했기에 희란은 남편이 첩을 두는 것도 용인해야 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원도의 따뜻한 눈길과 부드러운 음성이 너무나 그리워서 매 순간이 한숨이고 눈물이었다.
그래서 망자가 되고 나서도 이승을 떠나지 못했다. 이대로 이승의 기억을 모두 잃게 될 수는 없었다. 희란은 저를 저승길로 인도하려는 자들을 피해 땅속에 숨어서 수백 년을 버티면서도 꿋꿋하게 오라비의 무덤 곁을 지켰다. 처음에는 사망 당시의 모습인 칠순 노파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어느 정도 힘을 얻고 나서는 외양부터 바꿨다. 철없던 어린 시절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 오라비에게 다시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오라버니께 다정하게 이름 한번 불리기 전에는 아무 데도 갈 수 없어. 그렇게 희란은 원도의 환생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수연의 환생인 로아를 발견했을 때, 희란은 아주 극렬한 증오에 휩싸였다. 제 것이었던 팔찌를 가지고 있는 로아를 당장이라도 찢어 죽이고 싶어서 손이 달달 떨렸다. 나를 이 꼴로 만들고도 너는 또 그 반반한 낯짝을 가지고 태어나다니. 그리고는 이번에도 또 내 것에 손을 대다니. 절대로 가만둘 수 없어.
그럼에도 그녀에게 바로 손을 대지 못한 건 결코 미안함이나 죄책감이 남아서가 아니었다. 그저 전생에서 못다 이룬 연이 있으면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된다는 걸 알게 되었기에, 오라비와 조우할 때까지는 일단 그녀를 살려둘 수밖에 없었던 거였다.
완전히 몸이 달아서 오매불망 오라비를 기다리던 희란은 도겸이 친정집의 헛간만도 못한 낡은 집으로 들어오던 순간의 희열을 잊지 못한다. 그는 감격스러울 정도로 예전과 똑같은 얼굴과 똑같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저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저를 강제로 어딘가로 보내려고까지 했다. 거기가 좋은 곳이 아니라는 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사람은 예전의 오라버니가 아니구나. 몹시 서글펐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그의 애정을 다시는 손에 넣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독기만 남았다. 당장 로아를 죽이지 않으면 도저히 이 수백 년의 한을 풀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짜증스럽게도 웬 기운이 강한 자가 로아의 곁에 있어서 그러한 시도가 번번이 무산되었지만, 이젠 정말 모든 것을 끝낼 때였다.
사무치게 그립던 오라비의 얼굴을 아련하게 바라보던 희란이 마지막 각오를 다지며 우거진 나뭇잎 속으로 몸을 숨겼다. 너 같은 게 내 오라버니께 또다시 꼬리 치는 꼴은 볼 수 없어. 도겸이 로아에게서 떨어지는 순간, 오늘 저와 그녀는 함께 이승을 떠난다.
“대표님, 드디어 나타났네요.”
별장 2층 테라스에서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던 지원이, 촬영장 주변을 뱅글뱅글 돌다 수풀 속으로 사라지는 희란을 끝까지 주시하며 말했다.
“아주 고급스러워 보이는 한복을 입고 값비싼 장신구로 몸을 치장한 어린애입니다.”
“서 감독의 설명대로네. 그간 최선우 때문에 하고자 하는 일을 계속 방해받았으니 여기로 올 수밖에 없었겠지. 마지막으로 오라비의 얼굴도 한 번 더 보고 싶었을 테고. 오래 버틸 수 없다는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 테니, 이제 정말 이로아를 길동무 삼을 작정인가 보군.”
“대체 그 뻔뻔함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요? 다른 사람의 신세를 망쳐 놓은 장본인이 왜 자신을 피해자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차 관장. 그런 자들을 이해하려고 하지 마. 세상에는 아무런 이유 없이 그저 악하기만 한 인간들이 있어.”
가온도 처음에는 악인들이 악행을 저지르는 이유를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무진 애를 썼었다. 환경이 좋지 않아서,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 생활이 너무 궁핍해서…. 상황이 인간을 극단적으로 몰았으니 정상을 참작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세상에 사연이 없는 사람은 없고, 열악한 여건 속에서 태어난 이들이 모두 범죄자가 되는 건 아니다. 그러니 본인이 쌓은 악업은 반드시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푹신한 소파에 느긋하게 등을 기대고 있던 가온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테라스로 나오자, 반사적으로 손을 뻗은 지원이 그녀의 허리를 자연스럽게 감쌌다. 그리고 가온이 살포시 제게 몸을 기대게 만들고는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가온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아주 서서히, 그리고 대단히 공들여 만든 습관이었다.
물론 스킨십의 강도가 하루하루 미세하게 달라지고 있다는 걸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가온은, 멀찍이 떨어진 망자의 과거사를 들여다보는 것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아홉 번의 생을 살았고…. 아홉 번 모두 명계행을 피하지 못했어.”
“이번에도 명계로 가게 되겠죠?”
지원의 질문에 가온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전의 일은 어려서 봐준다 치더라도, 사후에 너무 많은 죄를 지었어. 살인미수까지 있으니까. 그나마 정말로 살인을 저지르기 전에 보내는 것이 본인을 위한 일인데, 그걸 알기나 하고 있으려나….”
도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희란을 바라보며 짧게 혀를 찬 가온이 파란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오래 가물었으니…, 이제 슬슬 비가 내릴 때가 되었군.”
로아와 마주 보고 서 있던 도겸은, 그녀의 뒤쪽으로 하늘이 서서히 어두워지는 걸 보고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 이제 시작이구나. 힘들지도 않은지 꼬박 여덟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생글거리던 로아가 도겸의 표정이 변하는 걸 보더니 입꼬리를 조금 내렸다.
“어? 하늘이 갑자기 왜 이래?”
“그러게요. 계속 맑을 거라고 했는데…. 금방 비가 쏟아지겠는데요?”
“아이, 참…. 딱 한 컷만 더 찍으면 되는데…. 이런! 빗방울 떨어진다. 장비 걷어! 아, 우산! 얼른 로아 씨한테 우산부터 씌워! 혹시 감기라도 걸리면 강이서가 진짜로 나 죽일 수도 있다고.”
조용하던 촬영장이 금세 어수선해졌다. 재빨리 주변을 휘둘러보던 도겸이 시끌벅적해진 틈을 타서 로아에게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로아 씨, 내 말 잘 기억하고 있죠?”
“네.”
“이제 제니스 쪽 사람들이 이로아 씨를 별장으로 데리고 갈 거예요. 사정상 나는 밖에서 좀 대기해야 하지만 지금 거기에는 나보다 훨씬 더 유능한 분들이 계시니까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로아가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도겸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사실 도겸은 처음부터 이 작전이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 대표님께서 지난번처럼 무작정 수색하시는 건 절대로 안 됩니다. 조희란이 지금 어디에 숨어 있는 줄 알고요. 근처에서 발견하지 못하면 이번에도 한반도를 다 뒤지실 겁니까? 만약에 바다를 건너갔으면요? 그럼 어디까지 찾으실 겁니까.
- 하지만 형. 그렇다고 일반인을 미끼로 쓰는 건 좀 너무하지 않아요? 잘못하면 이로아 씨가 위험해질 수도 있고….
- 서도겸. 대표님이 한계까지 힘을 쓰신 게 고작 열흘 전이야. 너 이게 무슨 뜻인지 몰라?
대번에 눈을 치켜뜬 지원이 저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바람에 도겸은 일단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요즘 지원은 가온에 대한 일이라면 아예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어지간하면 건드리질 말아야 했다.
- 방법은 둘 중 하나야. 이로아 씨가 우리가 정한 장소로 조희란을 유인하든가, 아니면 앞으로 두 달 반을 기다리든가. 다른 수는 없어.
지원이 내린 결론은 단호하기 그지없었고 회의는 그렇게 끝이 났다. 가온 역시 크게 탐탁한 표정은 아니었지만,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당장 대형 작전을 수행하는 건 무리가 되는 모양이었다. 도겸은 굳이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차라리 시간을 두고 기다리는 쪽이 낫겠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로아의 생각은 달랐다.
- 저를 미끼로 삼아 그 귀신을 불러낼 수 있다면 저는 그렇게 하겠어요.
- 하지만 그건 이로아 씨의 안전을 100% 보장할 수 없습니다.
- 안 그러면 두 달도 넘게 기다려야 한다면서요. 저 며칠 전에 정말로 죽을 뻔했어요, 감독님.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잖아요. 이렇게 하루하루 불안에 떨면서 보내는 것보다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최대한 빨리 일이 해결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로아는 기꺼이 유인책이 되겠노라 자청했고, 최종적으로 가온의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로아에 대한 기사가 온갖 매체를 통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새삼 실감한 대기업의 힘은 그야말로 무서울 정도였다. 그 업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예전 소속사가 꽤나 집요하게 방해를 했지만, 제니스의 위력을 넘어설 순 없었다.
“내가 멀지 않은 곳에 있다가 바로 들어갈 테니까….”
“이로아 배우님! 세상에, 비를 맞으셨네요. 어서 이쪽으로 오세요. 별장 안에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계획대로 제니스의 홍보실 직원들이 부리나케 달려오더니 대단히 호들갑을 떨면서 로아를 별장으로 데리고 갔다. 부산스러운 촬영장 구석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도겸이 긴 한숨을 토해내고는 쉽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힘겹게 옮겼다. 영악한 희란은 제 목소리가 닿는 범위 안으로는 절대 들어오지 않을 테니, 일단은 자리를 피해야 했다.
“그래. 오늘 여기에서 어떻게든 끝장을 보자.”
가온은 망자에게 직접 손을 대지 않고, 지원은 망자의 실제 얼굴을 봐야 처리할 수 있으니, 어차피 희란을 중천으로 보내야 하는 사람은 자신이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운 도겸이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흐릿하게 보이는 별장을 주시하며 비장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결의에 찬 목소리와는 달리, 쉴 새 없이 핸들을 두드리는 손가락은 도겸의 초조한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이로아 씨. 이쪽으로 와서 앉아요.”
쭈뼛거리며 별장 안으로 들어간 로아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흠칫 놀라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자 편안하게 소파에 앉아 있던 가온이 못내 복잡한 표정으로 희미하게 웃었다. 제 몸 하나 지킬 수도 없는 어린 것이 그간 얼마나 무섭고 힘들었을까.
“아, 안녕하세요.”
“겁먹을 거 없어요. 내 옆에 있으면 안전하니까. 서 감독한테 자세하게 들었죠?”
“네…, 대표님.”
멀리서 딱 한 번밖에 보지 못했지만, 로아는 가온을 바로 알아보았다. 쉽게 잊을 만한 얼굴이 아니기도 했고, 호위무사처럼 그녀의 옆을 지키는 엄청난 미남도 눈에 익었다. 굉장히 아름다우면서도 어쩐지 무시무시한 느낌이 드는 커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포스가 정말 장난 아니었다.
“살다 보면 본인의 잘못이 아닌 일로 고통을 겪게 되는 경우가 생겨요. 불행한 일이지만 누구한테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니까 그저 견디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고.”
“…네.”
“이로아 씨를 괴롭히던 악령은 우리가 오늘 처리할 거고, 이로아 씨의 일을 방해하던 자들은 내가 치우라고 했으니까 이제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왠지 주눅이 들어서 얌전히 시선을 내리깔고 있던 로아가 순간 고개를 번쩍 들었다. 치워…? 대체 뭐를…? 설마 지엔터를?! 그럴 수만 있다면 정말 감사한 일이지만, 그간 맨몸으로 세상의 모진 풍파를 견뎌왔던 로아의 입장에서는 의아함이 앞섰다.
“어째서 저한테 그런….”
“우리 서 감독이 예전에 못다 한 일을 대신하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말아요.”
“예전…, 이요?”
“굳이 자세히 알 것 없는 얘기니까 그냥 그렇게만 알고 있고…. 아, 이제 왔네. 내 옆으로는 절대로 못 오니까 그냥 그대로 앉아만 있어요. 공기가 조금 불편해지더라도 숨쉬기 버거운 정도가 아니라면 움직이지 말고.”
“네.”
쏴아. 갑자기 한기가 느껴진다 싶더니 빗소리가 더욱 거세졌다. 힐끔 눈동자만 굴려 창문 쪽을 바라보니 아예 밖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여전히 태연하게 차를 마시고는 있지만, 가온의 눈빛이 달라진 걸 보니 뭔가가 안으로 들어온 것이 분명했다. 살갗을 찌르는 듯한 살기에 잔뜩 긴장한 로아가 입술을 꽉 깨물었을 때였다.
번쩍. 무언가 눈앞에서 번뜩인다 싶더니 가온의 손에 커다랗고 투명한 검이 들려 있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날카로운 검을 멍하니 바라보던 로아는 검에 비친 어린아이를 보고는 비명을 지르기 직전에 제 입을 틀어막았다. 꿈속에서 봤던 것과 똑같은 모습의 어린애였다. 내가 본 게…, 진짜로 귀신이었다니. 막연히 기운만 느꼈을 때는 그래도 견딜 만했었는데, 이렇게 눈으로 직접 실체를 확인하고 나니 공포감이 성난 파도처럼 엄습해 왔다.
“조희란. 너는 어차피 명계로 가게 되어 있다. 더 이상 죄를 늘리지 않고 이쯤에서 순순히 중천으로 가는 것이 네게 이로울 것이다.”
귀신이 뭐라고 대꾸하는지 들리지는 않았지만, 악을 쓰며 덤비는 걸 보니 가온의 말을 따를 것 같지는 않았다. 달달 떨면서도 가온의 검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로아가 귀신과 눈이 마주쳤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이었다.
콰광! 불현듯 고막이 터져 나갈 것 같은 굉음이 들려오더니 순식간에 제 앞을 가로막은 가온이 조금 전까지와는 사뭇 다른 목소리를 냈다.
“감히 내 앞에서 인간을 해하려 하다니. 이대로 무저갱에 처박혀서 살지도 죽지도 못한 채로 영원을 보내고 싶으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엄중한 음성에 로아는 본능적으로 시선을 내리깔았지만, 완전히 악에 받친 희란은 더욱 흥분해서 눈을 희게 떴다.
“어차피 나는 지옥으로 간다면서! 혼자서는 못 가! 저 발칙한 계집애를 반드시 데려갈 거라고!”
“그렇게는 못한다는 걸 너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가온의 침착한 대꾸에 황급히 이리저리 둘러보던 희란은 그제야 제가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그저 로아의 뒤를 쫓아오는 것에만 급급해서 갑작스러운 폭우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었는데, 지금 보니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었다.
결계구나. 나를 유인한 거야. 이제는 아예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어마어마한 빗줄기를 바라보며 빠득빠득 이를 갈던 희란이 건물 밖으로 탈주를 시도하다 찢어질 듯한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으아아아악!”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끔찍한 고통에 한참을 몸부림치던 희란이 벌겋게 핏발이 선 눈으로 가온을 노려보았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당신이 뭔데!”
“내 정체가 무엇인지는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내가 진정 작심하고 무언가를 하기 전에 가야 할 곳으로 가거라.”
서늘하게 일갈한 가온이 중천으로 향하는 문을 열자 희란의 얼굴에 절망이 가득 찼다. 정말 이대로 가야 하는 거야? 내가 겨우 이런 꼴을 당하려고 수백 년을 버틴 줄 알아? 어떻게든 달아날 길을 모색하던 희란이 창문에 비친 제 얼굴을 보고는 경악하며 소리를 빽 질렀다.
“아니야! 이건 내가 아니야!”
거의 중년에 가까워진 얼굴에 화들짝 놀란 희란이 제 손을 보고는 더욱 기함했다. 보얗고 매끈하던 손등에 작게 주름이 잡혀 있었다. 그와 동시에 희란은 여태껏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던 남자가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어 제 얼굴을 가린 희란이 초조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쩌지? 이제 어쩌지? 이대로 허무하게 떠날 순 없는데…. 하지만 이 건물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방법을 모색하던 희란이 문이 열리는 소리에 기민하게 반응했다. 그러나 문틈으로 빠져나가려 빠르게 몸을 날리던 희란은 도겸과 눈이 마주치고는 그대로 몸이 굳었다. 그 와중에도 희란은 오라비가 반가웠지만, 제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도겸은 로아의 안전을 살피더니 지체 없이 노래를 시작했다. 걷잡을 수 없는 서러움이 밀려왔다.
오라버니. 아직도 저보다 민수연이 더 소중하신가요? 그래서 이렇게 지키러 오신 건가요? 좋아요, 저 계집애를 길동무 삼는 건 포기하겠어요. 하지만 저를 기어이 보내시겠다면…. 대신 오라버니가 저와 함께 가주세요.
서글프게 울먹이던 희란의 눈빛에 광기가 어리는 걸 목격한 가온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조희란이 타깃을 바꿨군. 서 감독을 데리고 가려는 거야. 가온이 희란의 결심을 깨달은 순간 그녀의 뾰족한 손톱이 도겸의 목을 향했고, 달려가서 저지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오래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휙!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냈다. 내내 눈을 꼭 감은 채 바들바들 떨고 있던 로아가, 갑자기 공기가 가벼워진 느낌에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 구멍이 난 것처럼 퍼붓던 빗줄기도 어느샌가 눈에 띄게 가늘어져 있었다. 뭐지…? 그 귀신은 사라진 건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로아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분위기를 살피고 있는데, 빠른 걸음으로 가온에게 다가간 지원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고개를 숙여 다정하게 그녀와 눈을 맞췄다.
“대표님. 대표님, 괜찮으십니까?”
“그 아이가 서 감독을 해치려고 해서….”
“네. 그럴 것 같았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서 감독을 죽일 수는 없었으니까요.”
“그래도…, 그 아이에게는 아직 두 번의 기회가 남아 있었는데.”
“그런 걸 자업자득이라고 하는 겁니다.”
눈을 질끈 감은 가온이 몹시 심란해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 누군가는 벅찬 희열을 감추지 못하며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이런. 귀한 손님이 오셨네.”
등에 칼을 꽂은 채로 명계로 뚝 떨어진 노파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점점 크게 올리던 하율이, 곧 대단히 유쾌한 얼굴로 한바탕 크게 웃었다. 그리고는 곧 섬뜩하게 눈을 빛내며 아주 만족스럽게 중얼거렸다.
“아주 좋아. 이제…, 한 명 남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