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꽃이 피면 꽃밭에서
“후우….”
미동도 없이 자고 있던 가온이 살짝 버거운 숨을 내뱉자, 순간 가슴이 철렁해진 지원이 바로 체온계를 집어 들었다. 37.2도…. 휴우, 그래도 이 정도면 열은 많이 내렸네. 당장 어떻게 되는 줄 알고 속이 바짝바짝 탔었는데.
가만히 안도의 한숨을 내쉰 지원은 차갑게 적신 물수건으로 가온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그리고는 보송해진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눈에 들어오는 창백한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새삼 속이 뒤집혔다. 퉁퉁 부어 있을 팔은, 쳐다보면 너무 성질이 날 것 같아서 일부러 보지 않았다.
어젯밤 망자를 좌포청장에게 인계할 때까지만 해도 멀쩡해 보이던 가온은, 중천을 나설 무렵부터 조금씩 비틀거리기 시작하더니, 무영당에 도착했을 땐 아예 눈을 뜨지도 못했다. 이미 한계치를 넘긴 가온이 오로지 정신력만으로 버티고 있었다는 걸, 지원은 그제서야 알았다.
- 대표님, 대표님! 제 목소리 들리십니까?
- 아아…, 으음. 들려. 괜찮아.
말로는 괜찮다고 했지만 목소리가 축축 늘어지는 것을 보니 이미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다. 무릎이 꺾여 휘청하는 가온의 허리를 받치던 지원은, 그녀의 등이 식은땀으로 온통 축축해진 걸 알아차리고는 식겁했었다. 반사적으로 이마를 짚어보니 온몸이 이미 불덩이였다.
- 너무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원래 이렇게 광범위한 수색을 하신 다음에는 하루 이틀 고생하십니다.
지원의 표정이 변하는 걸 본 현호가 생각해서 위로의 말을 한마디 건넸지만 역효과였다.
- 원래?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이렇게까지 되실 줄 알았으면 진작 무슨 대책을 마련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니면 저한테 미리 말씀이라도 해주시든가요. 그러면 비라도 안 맞으시게 했을 거 아닙니까.
애먼 사람에게 화풀이하고 있다는 걸 본인도 뻔히 알고 있었고, 나이가 지긋한 보안실장에게 굉장히 무례하게 굴고 있다는 것도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지만, 지원은 도저히 말이 곱게 나오지가 않았다. 온몸의 열이 삽시간에 머리로 확 쏠려서 눈언저리가 뜨끈뜨끈했다.
지원은 어제저녁 내내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4시간이 넘도록 가온을 기다리며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모른다. 지금이라도 나가서 우산을 씌워야 하나, 그러다 괜히 나 때문에 정신이 흐트러져서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이럴 줄 알았으면 상처에 방수 밴드라도 붙였어야 했는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었는데, 기절하듯 잠든 가온을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그 모든 순간들이 다 후회스러웠다.
상처가 아물지도 않은 상태에서 계속 비를 맞았으니 몸이 성할 리 만무했다. 부랴부랴 달려온 주치의가 항생제와 해열제를 신속하게 투여했지만 가온의 열은 쉽게 떨어지질 않았다. 날이 밝도록 가온에게서 눈 한 번 떼지 못한 채 쉴 새 없이 물수건을 갈아주며, 지원은 속에서 치받는 무언가를 억누르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날이 어슴푸레 밝아올 즈음, 뻑뻑한 눈을 힘겹게 들어 올리던 가온은 제 눈앞에 웬 인영이 어른거리는 걸 발견하고는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제가 자고 있는 동안 누군가가 침실에 들어오는 건 아주 드문 일이었다.
“누구?”
“접니다, 대표님.”
“차 관장…?”
“…네.”
“지금…, 몇 시야?”
“6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에 조금 놀란 얼굴을 하던 가온은, 제 머리맡에 아직도 얼음이 둥둥 떠 있는 투명한 대야가 놓여 있는 걸 보고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밤새 지원이 제 잠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걸 생각하면 너무 미안했지만, 한편으로는 가슴 한구석이 조금 간질거리기도 했다. 뭔가 뿌듯하면서도 되게 이상한 기분이었는데, 처음 느끼는 감정이라 뭐라고 명명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어젯밤에는 내가 상태가 별로 안 좋았었지? 차 관장이 많이 놀란 모양이네. 이제 괜찮아졌으니까 너무 마음 쓸 거 없어.”
“….”
가온이 애써 입꼬리를 올렸지만, 지금 지원에게는 마주 웃어줄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었다. 단순하게 많이 놀란 정도가 아니었고, 현재 가온의 상태도 괜찮아 보이지는 않았다. 가만히 눈을 내리깐 채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는 지원을 빤히 바라보던 가온이 살짝 난감한 얼굴로 그를 달래기 시작했다.
“정말로 한숨 잤더니 몸이 훨씬 가뿐해졌어.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나는 원래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고….”
원래…. 밤새 간신히 가라앉혔던 혈압이 다시금 급상승하는 걸 느끼며, 지원은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심호흡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고도 쉽게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밖이 보이지도 않는 창문을 한참 동안 노려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막 잠에서 깬 사람을 다그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가온이 고생하는 걸 다들 당연하게 생각하는 게 너무 부아가 났다. 그게 가온 본인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대표님.”
“응?”
“앞으로 어제와 비슷한 일이 발생하면 이번에는 문밖에서 마냥 기다리기만 하지는 않을 겁니다. 피가 말라서 그렇게는 못 하겠습니다.”
아프더라도, 다치더라도, 내가 보는 앞에서 해. 속이 문드러지는 한이 있어도 차라리 눈으로 봐야겠으니까.
“대표님께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제가 뭐라도 하겠습니다. 조금이라도 힘을 덜 들이실 수 있도록, 잠깐이라도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도록, 어떤 수라도 쓰겠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저한테 따라오지 말라고 하지 마세요.”
“항상 얘기하지만 차 관장이 옆에 있으면 나는 굉장히 든든해. 도움이 안 되어서 그러는 게 아니야. 하지만 기운이 강한 악령을 상대할 땐 차 관장이 논숨에서 다쳤던 게 생각나서 너무 신경이 쓰여. 집중이 잘 안 된다고.”
“그땐 저도 경험이 없어서 그랬던 겁니다. 이제는 제 몸 하나는 알아서 챙길 수 있고요. 그러니까 대표님이 저까지 케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긴. 악령을 패대기치는 걸 보니까 그 몇 달 새에 기운을 운용하는 기술이 많이 는 것 같긴 했어. 당장 보안 요원으로 근무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던 가온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원의 능숙함에 매번 잊어버리지만, 그는 아직 경력이 1년도 안 된 신입 가이드였다.
“글쎄, 그게 의지만 가지고 되는 문제가 아니라니까.”
하지만 제가 듣기에도 이미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그러자 가온의 마음이 흔들리는 걸 기가 막히게 알아차린 지원이 잡고 있던 손을 깍지 끼더니 그녀의 손등에 살포시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한결 나긋해진 목소리를 냈다.
“저는 대표님 혼자 고생하시는 게 정말 너무 싫고, 대표님이 혼자서 험한 것들을 상대하실 때마다 마음이 너무 불안합니다. 그러니까 제발 제 마음 좀 편하게 해주세요.”
“차 관장….”
“절대로 안 다치겠습니다. 무모하게 나서지도 않겠습니다. 대표님 신경 안 쓰이시게 그저 얌전히 옆에만 있겠습니다. 따라가게만 해주세요.”
가온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그녀는 원래 조르는 이에게 약했고, 차지원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남자였다. 지금도 그는 온갖 논리와 억지와 애교와 미인계까지 모조리 동원한 상태였다. 우직한 정공법만 쓰는 이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하아…, 알았어. 대신 지금 했던 말 다 지켜.”
“네, 명심하겠습니다.”
영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가온은 결국 결정을 번복했다. 본인은 끝까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애초에 당할 수가 없는 싸움이었다.
“로아 씨!”
한적한 곳에서 대본을 외우다가 갑자기 누군가에게 팔을 강하게 잡아당겨진 로아는 1초 전까지 제가 서 있던 자리에 커다란 조명이 퍽 소리를 내며 떨어진 걸 보고는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바닥이 움푹 팰 정도로 묵직한 조명이었기에 만약 제 머리 위로 떨어졌다면 그대로 즉사였을 것이다.
“괜찮아? 많이 놀랐죠? 다친 데는 없어요?”
“…네?”
“로아 씨, 이로아 씨. 정신 좀 차려 봐. 내가 누굽니까.”
눈앞에서 손가락을 딱딱 튕기던 이가 손등으로 제 볼을 톡톡 두드리자, 반쯤 넋이 나갔던 로아가 비로소 정신을 조금 차렸다. 그제야 주변의 왁자지껄한 소란스러움이 귀에 들어왔다. 경악에 찬 비명과 로아의 안부를 확인하는 목소리들이 어지럽게 고막을 파고들었지만 의식이 한꺼번에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니었다.
아…, 여기 세트장이었지. 드라마 찍는 중이었고…. 나를 살려준 이 남자는….
“최선우…, 선배님.”
“다행히 정신이 아예 나간 건 아니네. 어디 긁히거나 하진 않았어요?”
“네.”
“일단 어디 좀 앉읍시다. 얼굴이 허옇게 뜬 것이 이대로 서 있다가는 픽 쓰러질 것 같아. 누가 여기 생수 한 병만 가져다주세요.”
선우의 손에 이끌려 의자에 앉은 로아는 그가 시키는 대로 생수를 한 모금 마셨다.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모두 달려와서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마디씩 했지만, 귀에 잘 들어오진 않았다. 멍한 얼굴로 박살난 조명을 바라보던 로아는,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야 비로소 몸에 오한이 났다. 나 지금…, 이 사람 아니었으면 죽을 뻔했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인사는 됐어요. 무사해서 다행이야. 대사 좀 맞춰보자고 하려던 참이었는데, 갑자기 뒤통수가 쎄하더라고. 나 그런 쪽으로는 촉이 좀 좋은 편이거든. 왠지 로아 씨 머리 위에 있는 조명이 흔들리는 것 같길래 일단 잡아당겼는데, 그게 정말로 뚝 떨어질 줄은 몰랐어요. 아니, 그런데 저게 갑자기 왜 떨어졌지? 저 높이에 있는 걸 누가 건드리지도 않았을 텐데.”
왠지 범인을 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로아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 어쨌든 앞으로 촬영장에서는 절대로 혼자 있지 말아요. 보니까 이로아 씨는 그 정도는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가급적 기운이 강한 사람 옆에서 떠나지 말고.
도겸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건 아니었지만, 실제로 이런 엄청난 사건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도 내 나름대로는 선배님 주변을 얼쩡거린다고 한 거였는데….
“로아 씨! 괜찮아?! 세상에, 얼마나 놀랐어? 청심환이라도 하나 먹을래?”
잠시 외출을 했다가 돌아온 이서는 방금 전에 일어났던 사고 소식을 듣고는 로아만큼이나 사색이 되었다.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는 두 여자를 번갈아 바라보던 선우가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부러 신랄한 목소리를 냈다. 이로아는 잘 모르겠지만, 강이서는 걱정을 해주는 것보다는 약을 올려야 조금 더 빨리 기운을 차린다.
“저 조명 크기를 봐요. 사람이 안 놀라게 생겼나. 대체 세트장 관리를 어떻게 하는 겁니까?”
“최선우 배우님. 내가 지금 로아 씨한테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지만, 감독이 직접 세트장을 짓고 조명을 매단 건 아니거든?”
“아하, 그러니까 이건 내 책임이 아니다? 하지만 촬영장에서 사망 사고라도 나면 구속되는 건 감독 아닌가?”
“너 무슨 그런 재수 없는 소리를 해! 부정 타게!”
발끈해서 소리를 빽 지르는 이서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린 로아는 비로소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오늘이야말로 반드시 도겸에게 연락을 하리라 굳게 결심했다.
민수연(1683.7.25.~1718.7.22.).
여흥 민씨 대사성 민정길의 1남 4녀 중 넷째. 17세에 우의정 조영중의 장손과 약혼하였다가 2년 후 파혼. 출가하여 월황사에서 36세에 지병으로 사망.
가온은 단 넉 줄뿐인 간단한 보고서를 순식간에 읽어 내렸다. 한 사람의 인생을 파악하기에는 너무나도 빈약한 정보였다. 하지만 중천에서 판정을 받은 망자의 부간록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폐기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달리 남아 있는 자료는 거의 없었다.
[…날씨가 추워지고 있으니 절에 있는 수연이에게 두툼한 이불 한 채와 겉옷 두 벌을 지어 보내려고 타면하였고….]
그 외에는 멀리 시집간 수연의 맏언니가 친정으로 보낸 서신에서 잠깐 언급한 것이 다였다. 보안실의 문헌 조사 담당자가 이게 전부라고 내민 이상, 이보다 더 자세히 조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당시는 누군가의 아내나 어머니가 아닌 여성을 기록에 길게 남기는 시대가 아니었고, 더구나 파혼까지 했으니 아마도 집안에서는 딸의 흔적을 감추기에 급급했을 것이다.
얼굴에 난 상처 때문에 파혼을 당했을까? 어렴풋이 남아 있는 기억을 떠올려보던 가온이 가만히 미간을 찌푸렸다. 이목구비가 곱긴 했었으나 여인의 얼굴에 길게 사선으로 그어 내린 흉터가 났으니 명문가에서는 며느리로 맞이하기 꺼려했을 테지. 답답한 한숨을 폭 내쉰 가온이, 이번에는 보고서 옆에 놓인 부간록 한 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표지에는 아직 중천으로 오지 않은 망자의 이름과 생몰년이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조희란. 1692.~1761.
부간록을 펼쳐 들고 첫 장부터 찬찬히 살펴보던 가온이 얼마 지나지 않아 찾고 있던 내용을 발견했다. 지나치게 앞부분이라 살짝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자아가 생기면서부터 제 기분 내키는 대로 몸종들에게 패악을 떨곤 했던 귀한 댁 아기씨는, 고작 열 살의 나이에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진흙탕에 처박는 엄청난 범죄를 저질렀다.
1701년 7월 24일. 오라비 조원도의 약혼녀 민수연을 거짓으로 유인한 후 안면에 고의로 상해를 가함.
그 이후의 삶에는 크게 굴곡이 없었다. 딱히 대단한 선행을 베풀지도 않았고, 눈에 띄는 악행도 저지르지 않았다. 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대번에 칼을 쓰는 표독스러운 어린애였으니 처지가 어려운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만 한 성품은 아니었을 테고, 우의정의 손녀로 호의호식하며 평탄하게 살았으니 원한을 사거나 갚을 일 자체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중범죄를 저지른 것은 만 10세 이전이었기 때문에, 만약 그 상태로 마무리가 되었다면 아슬아슬하게 환생을 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후의 행적을 보면 누가 봐도 명계행 판정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부간록에는 중천에서 판정을 받는 순간까지의 모든 행적이 빠짐없이 적히기 때문에, 조희란이 망자가 된 이후로 저지른 악행은 지금도 기록되고 있다.
“산 자의 몽중에 침투, 상해 시도, 가이드 서도겸의 지시에 불복한 후 도주, 민수연의 환생인 이로아를 살해하려는 목적으로 조명기기 투하….”
이건 대체 언제…, 어제? 가볍게 눈살을 찌푸린 가온이 못마땅한 심기가 여실히 드러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철딱서니가 없어도 사람이 칠순이 될 때까지 살았으면 어느 정도는 성숙해지기 마련이건만, 아직도 이리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다니. 그러니 수백 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열 살배기의 외양을 벗지 못한 거겠지.
부간록을 덮은 가온이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어쨌든 이대로 놔두면 진짜로 사람을 해치게 생겼으니 당장 중천으로 불러들여야겠군. 내가 직접 소환을 하는 게 제일 간단한데…. 몸이 좀 회복되면 조영중의 집터로 가서 불러내 볼까. 막 그렇게 결정을 내리려는 찰나였다.
“당분간 그렇게 몸 축나는 방법을 쓰시는 건 안 됩니다.”
갑자기 머리 위에서 익숙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자 아주 미세하게 미간을 좁힌 지원이 제게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커피를 받아든 가온이 반가움과 의아함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차 관장…, 언제 왔어?”
“대표님이 서고로 들어오시기 직전에요.”
“그런데 왜 이제 말을 걸어?”
“제가 옆에 있으면 집중이 안 되고 계속 떠들게 된다고 하셔서요. 그래서 부간록을 덮으실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아아…, 그래. 언젠가 내가 그 비슷한 말을 했었지. 그때도 이 자리에서 부간록을 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차 관장은 정말 별걸 다 기억하고 있구나. 가볍게 헛웃음을 흘린 가온이 커피 한 모금을 쭉 들이켜다가 문득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그런데…. 차 관장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줄 알고 몸 축나는 방법은 쓰지 말라는 거야?”
가온의 질문에 지원은 별로 대단할 것도 없다는 얼굴을 했다. 보통 다른 이들은 가온의 표정을 읽기가 어렵다고 말하곤 하지만, 지원은 도리어 그게 더 이해가 안 갔다. 아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 다 쓰여 있다니까? 빤히 보이는 걸 어떻게 모르냐고.
“오래된 부간록을 보시다가 표정이 심각해지셨으니까요. 아마 서 감독이 말씀드렸던 망자에 대한 기록을 보고 계셨을 테고, 그자가 이제 아주 위험한 방식으로 사람의 몸에 손을 대기 시작했으니 한시라도 빨리 불러들여야겠다고 생각하셨겠죠. 지난번에 가서 둘러봤을 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었으니, 대표님께서 직접 힘을 쓰시는 게 가장 간단하다고 판단하셨을 테고요.”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가온이 너무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작게 소리를 내어 웃던 지원이, 곧 짐짓 엄한 얼굴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어쨌든 그제 같은 방법을 바로 쓰시는 건 안 됩니다. 몸이 완전히 회복되려면 최소한 석 달 이상의 휴식이 필요하다는 걸 제가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그건 또 어떻게 알았을까. 하…, 권 실장이 아주 제대로 치도곤을 당했겠구나. 설핏 웃음을 흘리던 가온이 지원과 똑바로 눈을 맞추며 알겠다는 듯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말썽을 부리는 망자를 잡아들이는 것도 꽤나 시급한 문제지만, 그보다는 중천주의 자리를 비우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예전에 한계를 모르고 마구 능력을 쓰다 각혈하며 쓰러졌던 기억을 잠시 떠올린 가온은, 지원이 그것만큼은 알게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슬쩍 말을 돌렸다.
“차 관장도 이 부간록을 봤어?”
“아니요. 저는 서 감독한테 전화로 들었습니다. 어제 이로아 씨한테 사고가 있었다고요. 서 감독은 망자의 짓일 거라고 추측만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부간록에 같은 내용이 기록된 걸 보면 정말로 그들이 서 감독의 전생이 연이 맞나 봅니다.”
“그래. 서 감독의 누이가 오라비의 약혼녀를 상대로 칼부림을 했지. 열 살짜리가, 독하게도.”
지원의 표정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얼굴의 흉터를 그 꼬맹이가 만들었어? 독하네, 진짜. 오라비한테 지나치게 집착하는 걸로 보인다고는 했지만…. 아무리 단단히 마음을 먹어도 사람이 타인의 얼굴을 직접 칼로 긋는 것은 어지간한 각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실제로 아주 잔악무도한 살인범이라도 엄청난 원한 관계가 아닌 이상 피해자의 얼굴에 상처를 남기는 일은 거의 없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다루기 어려운 꼬맹이였네. 그렇다면 그 요망한 것을 어떻게 불러내야 할까. 잠깐 고민하던 지원이 한 가지 아이디어를 냈다.
“대표님. 이로아 씨한테 제니스의 광고 모델을 시키는 걸 어떨까요?”
“광고?”
“네. 망자의 정확한 속내까지야 알 수 없지만, 정황상 망자의 악행의 기저는 질투심인 것 같고, 그렇다면 아예 작정하고 그 질투심의 끝을 자극하는 거죠. 몸을 사리고 있다가도 도저히 눈꼴이 시어서 뛰쳐나오지 않을 수 없게끔. 특히 화장품 광고라면 여성의 외모를 최대한 아름답게 표현하니까요. 서 감독도 실루엣은 그럴싸하니까 뒷모습 정도만 나오게 옆에 세우고요.”
“흐음….”
“일단 그렇게 1차를 내보내고, 후속편을 찍겠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하는 겁니다. 시간이나 장소 같은 것들도 구체적으로 흘리고…. 저희가 조용히 대기할 수 있을 만한 장소를 골라서 촬영장으로 제공한 다음에 시간을 좀 끌면서 기다리면 오지 않을까요?”
진중하게 지원의 의견을 경청하던 가온이 몹시 감탄스러운 얼굴을 했다.
“의견 자체도 나쁘진 않지만…, 그보다 차 관장은 어떻게 그런 생각을 이렇게 순식간에 해?”
“아…, 광고에 대한 건 지난번에 이로아 씨의 실물을 보고 한 번 생각을 했던 겁니다. 지금 제니스의 광고 모델은 인기도 많고 얼굴도 예쁘지만, 브랜드 이미지와는 좀 맞지 않는 느낌이었거든요. 다음번에는 저런 신선한 마스크를 가진 친구가 모델을 하면 좋겠다, 그렇게 잠깐 생각했었죠. 꼭 망자를 꼬여내는 의도가 아니더라도요.”
한동안 말없이 고개만 주억거리던 가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바로 서고 밖으로 나가 보안실장을 찾았다.
“부사장한테 이번 주 내로 시간 내서 무영당으로 들어오라고 해.”
“네, 대표님.”
“에르사 라인의 광고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내가 궁금해하더라고 전하고.”
“알겠습니다.”
가온이 지시를 내리는 동안 얌전히 옆에서 기다리던 지원은, 드디어 그녀의 볼일이 모두 끝났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마치 지나가는 말처럼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치밀한 계산 끝에 만들어낸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대표님. 저희 갤러리에서 내일부터 새 전시가 시작됩니다. 전에 소더비 프리뷰에서 보셨던 화병이 전시되었는데, 간단하게 저녁 드시고 잠깐 들러서 보시겠습니까?”
아무도 없는 갤러리에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만 타박타박 들려왔다. 널찍한 로비를 가로질러 눈에 익은 노을빛 화병 앞에 선 가온이 한숨 같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순간 곁눈질로 지켜보던 지원의 입꼬리가 슬쩍 들렸다.
“런던에서 봤을 때보다 더 근사한 것 같아.”
“각도, 조명, 배경, 모두 완벽하게 계산해서 진열한 거니까요.”
“또 보러 와도 될까?”
“얼마든지요. 그리고 이 전시가 끝나면 화병은 무영당에 가져다두겠습니다.”
뜻밖의 발언에 가온의 눈이 동그래졌다. 평소 물건의 시장 가격에 크게 신경을 쓰는 편은 아니었지만, 경매에 나오는 예술품이 상당히 고가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굉장히 비싸게 주고 산 물건 아니야?”
“비싸게 샀으니까 가치를 알아보시는 분께 드려야죠.”
“이런 미술품은 기본이 억 단위라던데.”
“대표님. 제가 대표님만큼 돈이 많지는 않지만, 이 정도 선물은 충분히 합니다. 화병을 본다는 핑계로 저도 무영당에 한 번이라도 더 들르고요.”
지원의 너스레를 가만히 듣고 있던 가온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다지 티가 나는 건 아니었지만, 자세히 보니 귓불이 조금 붉었다.
“그런 핑계 없이도 언제든 올 수 있는 사람이잖아, 차 관장은.”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좋네요.”
왠지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 입을 꾹 다문 채 천천히 갤러리를 돌던 가온이 한 그림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슬며시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림 자체의 퀄리티도 수준 미달이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하고도 좀 안 맞는 느낌이 들었다.
“이 그림은 좀…, 독특하네.”
독특…. 표현 한번 고상하기도 하지. 조심스럽게 입을 연 가온이 최대한 점잖게 에두르자, 진심으로 유쾌해진 지원이 한참을 소리 내어 웃었다. 송영진의 그림을 처음 이 벽에 걸었을 때의 참담함이 말끔히 씻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송영진의 실력을 모르고 그림을 받은 건 아니었지만, 다른 그림들 사이에 있으니 그 하찮은 수준이 더욱 도드라져서 정말 갤러리에 불이라도 질러야 되나 했었다.
“솔직하게 형편없다고 하셔도 됩니다.”
“그래도 돼?”
“그럼요. 저도 이미 알고, 저희 관계자들도 다 알고 있고, 이제 내일부터는 관객들도 다 알게 될 테니까요.”
그런데 대체 이런 그림을 왜 걸었어?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짓는 가온을 바라보며, 지원은 아직 웃음기가 남아 있는 얼굴로 깔끔하게 대꾸했다.
“어쩔 수 없이 현실과 타협했더니 이런 낯 뜨거운 결과물이 나오네요.”
“작가가 누군데?”
“송태윤 의원의 막내아들입니다. 예전에 문체부 장관을 지냈던….”
“송태윤…. 알아.”
가온의 표정이 조금 심각해졌다. 본인을 직접 대면한 적은 없지만, 최근 중천에 온 망자들 중에 송태윤의 지시로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은 이들이 몇 명 있었다. 금배지를 달고도 여전히 뒷골목과 연을 끊지 못한 송태윤은 제 눈에 거슬리는 이들을 상당히 폭력적인 방법으로 끊어내곤 했다.
어차피 자신이 지은 죄는 결국 본인 스스로 갚아야 할 테니 그저 두고 보고만 있었는데…. 이 아름다운 갤러리에 흙탕물을 튀기다니. 언제 한번 기회를 봐서 제대로 경고해야겠군.
가온은 어린애가 발바닥에 물감을 묻히고 캔버스 위를 아무렇게나 돌아다닌 것 같은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다시는 송태윤이 지원의 갤러리에 손을 대지 못하게 만들겠다고 조용히 다짐했다.
“그럼 이것도 석 달 동안 걸려 있는 건가? 이번 전시가 끝날 때까지?”
살짝 질린 얼굴을 한 가온의 질문에 지원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그것만큼은 정말 목에 칼이 들어와도 허용할 수 없는 일이다.
“아닙니다. 그렇게까지 하면 제 신경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아서…. 1, 2전시실은 죽 그대로 운영되지만 여기에 있는 작품들은 2주 단위로 바뀝니다. 무명작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소개하겠다는 취지로 대충 포장했고, 급하게 결정된 이벤트였지만 다행히 작가들이 꽤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죠.”
송영진의 그림을 하루라도 빨리 끌어내리고 싶었던 큐레이터가 며칠 동안 밤잠을 설치며 번민한 끝에 간신히 만들어 낸 기획이었는데, 작품을 완성하고도 마땅히 전시할 곳을 찾지 못했던 대부분의 작가들이 아주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3전시실에 배정된 작가 8명 중 다른 작품을 내지 못한 사람은 송영진뿐이었다.
“그림은 이제 다 보셨으니 제 방에서 차나 한잔하시죠.”
제 성격처럼 깔끔한 방이네. 자택하고 비슷한 분위기야. 약간 더 딱딱한 느낌이긴 하지만…. 향긋한 국화차를 한 모금 마신 가온이 군더더기 없는 무채색 가구들을 천천히 둘러보고 있는데,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던 지원이 화사한 꽃다발을 하나 들고 들어왔다. 흰색, 보라색, 자주색…. 색색의 과꽃이 조화롭게 섞인 소박하면서도 소담한 꽃다발이었다.
“벌써 가을꽃이 나왔습니다, 대표님. 대표님 더 고생하시지 않게 날씨도 얼른 서늘해지면 좋겠네요.”
지원이 내미는 꽃다발을 받아 든 가온이 순간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매해 과꽃을 보면서도 떠올리지 않았던 아주 오래된 기억 하나가, 지원의 말을 들은 순간 물속에서 공기 방울이 솟아오르듯 퐁 소리를 내며 수면 위로 떠올랐다.
- 추모란이 피었으니 이제 우리 가온이 잠도 잘 자고 밥도 잘 먹고 하겠네. 그래서 엄마는 이 꽃이 피는 게 제일 반가워.
쌍계 머리를 한 고운 여인이 아담한 꽃밭 앞에서 저를 보며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 눈앞에 그림처럼 나타났다. 초상화 한 장을 남기지 못한 탓에 기억이 점점 흐릿해지는 걸 마냥 안타까워하고만 있었는데, 가온은 정말 오랜만에 그리운 얼굴 하나를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너무나도 반가웠고, 꼭 그만큼 가슴이 아렸다.
“대표님, 괜찮으십니까?”
뭔가 충격을 받은 듯도 하고 왠지 울음을 참는 것 같기도 한 가온의 표정을 가만히 지켜보던 지원이 못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자, 가온은 어떻게든 웃어 보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잘 되지는 않았다.
“대표님….”
“응…, 괜찮아. 그냥…. 옛날 생각이 좀 나서….”
“이 꽃다발 때문에요? 죄송합니다, 대표님. 제가 괜한 짓을 했나 봅니다.”
“아니야. 아니야, 차 관장. 정말로 그런 게 아니라….”
세차게 고개를 저은 가온이 살짝 떨리는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언제나 무심하던 가온이 이렇게까지 동요하는 건 처음이라 마음이 급격히 불안해졌지만, 가온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은 지원은 그녀가 진정이 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시선을 내리깐 채 속눈썹을 파르르 떨던 가온이 한참이 지난 후에 고개를 들고는 조금 민망한 듯 웃었다.
“당황스럽게 해서 미안해. 나도…, 사람이라.”
“그럼요. 감정을 느끼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니 저한테 미안해하실 일이 아닙니다.”
걱정이 가득 담긴 눈을 하면서도 침착하게 대꾸하는 지원을 보고 있으려니, 가온은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떤 경우에도 이성과 냉정함을 잃지 않아야 하는 중천주로 살아오며 이제는 심장이 완전히 굳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아주 잠깐 눈물이 날 것 같았었지만, 제 어깨를 가만가만 두드리는 다정한 손길이 요동치는 마음을 조금씩 진정시켰다.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내가 어릴 적엔…, 이 꽃을 추모란이라고 불렀었어. 가을에 피는 꽃인데 잎이 모란과 비슷하다 하여 그렇게 불렀던 걸로 기억해.”
“그랬습니까.”
“내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었어. 내가 어릴 땐 지금보다 훨씬 더 여름 나기를 버거워했었는데…. 그래서 매년 이 꽃이 얼른 피기를 고대하셨었지.”
들고 있던 꽃다발에 살포시 얼굴을 묻은 가온이 눈을 꼭 감은 채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운 향기가 났다.
“차 관장 덕분에 아주 오랜만에 어머니 얼굴이 생각났어. 그동안에는 아무리 기억을 해보려고 해도 잘 떠오르지가 않았었거든.”
“제가 공연히 대표님 마음만 상하시게 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
단호한 얼굴을 한 가온이 바로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지만, 지원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그런 지원을 빤히 바라보던 가온이 꽃다발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는 양손으로 그의 볼을 가볍게 감싸며 저와 눈을 맞추게 했다.
“정말로 그렇지 않아. 나는 요즘 차 관장 덕분에 나도 사람이었다는 걸 새삼 깨달으면서 살아. 하루하루가 즐겁고, 내일이 기대되고 그래.”
“저야말로.”
“그래서 너무 고맙고, 받은 만큼 돌려주지 못하는 것 같아서 미안해.”
가온의 말에 목울대를 크게 움직이던 지원이 살짝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제 볼을 어루만지고 있는 손바닥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저는 충분히 돌려받고 있으니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왠지 지원의 목소리가 나른해진 것 같다고 생각하던 가온은 그가 제 손목 안쪽의 여린 살을 강하게 빨아들이자 흠칫 놀라며 몸을 경직시켰다. 그러자 가온의 손목에 입술을 댄 채로 피식 웃음을 흘린 지원이 천천히 몸을 물렸다. 조금만 스킨십의 강도를 높여도 이렇게 어린 토끼처럼 놀라니 뭘 할 수가 없네.
“그래도 굳이 제게 뭘 해주고 싶으시다면, 마음의 준비만 하십시오.”
지원이 정확하게 뭘 요구하는지 100%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가온은 무엇에 대한 준비냐고 되묻지 못했다. 언제나 정중하고 담백한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던 지원이, 지금은 마치 사냥감을 눈앞에 둔 맹수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부드럽게 웃는 낯이었는데도 이상하게 날 선 긴장감이 느껴졌다.
“걱정하지 마세요. 허락하지 않으시면 어떤 짓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원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고 느낀 순간, 갑자기 분위기를 확 깨는 느릿하고도 구슬픈 벨소리가 들려왔다. 짜증스럽게 입매를 비틀며 발신인을 확인한 지원이 미간을 확 구겼다. 보안실장…. 아, 진짜 타이밍하고는.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욕설을 간신히 혀끝에 붙잡아둔 지원이 못마땅한 심기를 굳이 감추지 않은 채 전화를 받았다.
“차지원입니다. 네. 지금 저랑 같이 계십니다. 네? 어디에서 서신이 와요? 명계에서요? 네, 알겠습니다. 바로 보여드리겠습니다.”
보안실장으로부터 이미지 파일 하나를 전송받은 지원이 잠깐 사진을 들여다보다 곧 가온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생전 처음 보는 언어로 쓰여 있는 서신은, 내용은커녕 어느 나라의 말인지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반면 빠르게 서신을 훑어 내린 가온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흐음.”
“뭐라고 쓰여 있는 겁니까?”
“염마왕이 좀 보자는데.”
“아…, 네.”
지원은 불쾌한 내색을 하지 않기 위해서 무진 애를 썼다. 가온이 염마왕과 만나는 것 자체는 너무 마음에 안 들었지만, 어쨌든 명계에서 탈주한 망자가 인계에서 살인까지 저질렀으니 두 세계의 수장이 한 번쯤은 만나서 얘기를 나눌 필요가 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나보고 명계로 오라는데?”
“네에?!”
간신히 평정을 가장하던 지원이 대번에 눈꼬리를 사납게 치켜떴다. 미친 거 아니야? 아무리 중천주라도 엄연히 살아 있는 사람인데 명계로 오라니. 이게 무슨 개 같은 경우야?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가능은 한데…. 이상하네. 보통은 염마왕이 중천으로 왔었는데. 나는 여태까지 명계에 가 본 적이 열 번도 안 되거든.”
“그럼 그냥 중천에서 보자고 하시죠.”
지원이 아주 조심스럽게 반대 의견을 제시했지만, 어느덧 중천주의 얼굴로 되돌아간 가온은 간단하게 고개를 저었다.
“정식으로 초청장이 왔으니 그건 곤란해. 요즘 명계의 상황이 좀 좋지 않은 것 같아서 내 눈으로 한번 확인하고 싶기도 하고. 여태 이렇게까지 관리가 소홀한 적이 없었는데, 아무래도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거든.”
순간 지원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팼다. 아아…, 나 그 새끼 진짜 너무 마음에 안 들어. 대표님한테 집적거리는 것도 꼴 보기 싫은데, 무능하기까지 하다니. 아니, 대체 왜 중천주가 명계의 상황까지 염려하게 만드는 건데?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하자고, 제발. 기본 아니야? 온갖 험악한 욕설을 섞어 속으로 대차게 투덜거리던 지원이 체념의 한숨을 푹 내쉬더니 몹시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럼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뭐?”
“현재 명계의 치안을 믿을 수 없는 상태에서 죄인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대표님 혼자 가시게 둘 수는 없습니다. 이미 보안에 구멍이 뚫려서 탈주범이 인계까지 진출하는 마당에, 명계는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대표님께서 어딜 가시든 제가 따라가겠다고 이미 말씀드렸었고요.”
“차 관장, 거긴….”
“그렇게 하라고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니 저를 두고는 아무 데도 못 가십니다.”
처음 보는 지원의 고집스러운 표정에 크게 당황한 가온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런 억지소리를 들어본 건 난생처음이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형! 형이 나 광고에 출연시키라고 했다면서요?!”
씩씩거리며 지원의 집으로 쳐들어간 도겸은 살기를 풀풀 풍기는 지원의 살벌한 눈빛을 보고는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식탁 앞에 완전히 각을 잡고 앉아 위스키를 물처럼 들이붓고 있던 지원이, 제게 다가오지 못하고 있는 도겸을 흘깃 쳐다보더니 앞에 와서 앉으라고 손짓했다.
아니, 왜 또 저래? 사람 겁나게. 알콩달콩 재밌게 연애 중인 거 아니었어? 대표님 앞에서는 반쯤 녹은 아이스크림처럼 굴더니, 왜 다른 사람들한테는 얼음장인데? 절대 입 밖에 낼 수 없는 불만을 삼키며 시키는 대로 의자를 빼고 앉은 도겸은 당초 자신이 항의의 목적을 가지고 방문했다는 것을 잠시 잊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염마왕이 자꾸 대표님한테 수작을 부려.”
이 형 또 시작이네. 세상 모든 남자가 다 자기 같은 줄 아나. 염마왕이 정말로 대표님한테 흑심이 있었다면 벌써 뭐라도 했겠지. 세월이 무려 천 년인데.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젓던 도겸이 지원의 다음 말을 듣고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염마왕이 대표님한테 명계로 오라는 초청장을 보냈어. 요즘 명계가 어수선해서 자리를 비우기가 어렵대.”
“응? 그게 무슨 개소리야? 그렇다고 살아 있는 사람을 명계로 부르면 어떡해?”
“내 말이 그 말이야. 그런데 더 기가 막히는 건, 대표님은 가시겠대.”
“아….”
저런, 그래서 이렇게 분기탱천하셨구만. 지원의 잔이 비자마자 재빨리 얼음 두 조각을 집어넣은 도겸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살살 달랬다.
“뭐, 드문 일이긴 한데…. 대표님이 명계에 가시는 건 아예 없는 일은 아니에요. 최근에 있었던 일은 아니지만 도저히 통제가 안 되는 망자를 직접 명계로 데리고 가시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고….”
“그래. 다 좋아. 중천주이시니까 천계든 명계든 가실 수 있지. 그런데 문제는 혼자 가시겠다잖아.”
“그럼 누구랑…, 설마 형이 따라가려고?! 말도 안 돼!”
도겸이 소리를 빽 지르자, 발끈한 지원이 대번이 눈을 확 치켜떴다.
“말이 왜 안 돼? 예전에도 상급 가이드가 세 번이나 동행했었는데? 1314년, 1782년, 그리고 1944년에.”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요?”
“중천행적에서 봤어.”
“그거 100권 가까이 되지 않아요? 그걸 다 뒤졌어?”
아무런 대꾸 없이 술을 들이켜는 지원을 보며 도겸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우와, 이 형 진짜 집요하다. 마음만 먹으면 뭐라도 할 인간이네. 역시 절대로 적이 되면 안 돼.
“대표님은 형을 생각해서 그러시는 거겠지. 아무래도 산 사람이 명계에 가는 건 위험한 일이니까. 더구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언제 악령이 튀어나올지도 모르고.”
들고 있던 술잔을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은 지원이 불끈 쥔 주먹으로 쾅 소리가 나게 식탁을 내리쳤다.
“그런 위험한 곳에 대표님 혼자 가시는 건 아무 문제가 없고?”
“대표님은…, 대표님이시잖아.”
“하!”
고개를 뒤로 젖히며 성마른 웃음을 터트린 지원이 곧 살벌하게 표정을 굳혔다.
“대표님은 사람도 아니냐? 대표님도 무리하면 아프고, 다치면 피도 흘리는 평범한 사람이야. 단지 임무 때문에 수명이 길어졌을 뿐이라고. 대체 왜 이놈 저놈 할 것 없이 다 대표님을 무쇠 취급이야? 왜 아무도 안쓰럽게 생각을 안 해? 옆에서 다들 그렇게 치켜세우니까 본인도 자기가 용가리통뼈인 줄 알잖아! 개고생을 하고 있다는 자각도 없이!”
“그게요, 형….”
“하아. 됐어. 나 지금 안 그래도 머릿속이 복잡하니까 닥치고 술이나 마시든가, 아니면 가서 트리트먼트나 해. 너 지금 머리카락 개털이야.”
“트리트먼트…? 아! 내가 그거 때문에 왔지, 참! 아니, 대체 왜 조용히 사는 나를 그런 복잡한 동네에 밀어 넣은 거예요? 나 정말 그런 판에 끼는 거 너무 싫다고! 내가 왜 동네방네 얼굴을 팔아야 되는데?”
그제야 정신을 차린 도겸이 다시금 거세게 항의하자, 막 술잔을 들어 올리던 지원이 어이가 없는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내가 무슨 힘이 있어서 너를 광고에 밀어 넣어? 그것도 제니스 컴퍼니의 신제품 광고에? 나는 그냥 하나의 의견을 제시했을 뿐이야. 결정은 대표님이 하신 거고.”
“그러니까 애초에 왜 내 의사와 무관하게 그런 의견을 제시하냐고!”
“이런 양아치 같은 새끼를 보았나. 제 동생 칼부림 때문에 얼굴에 흠집 난 약혼녀를 버려 놓고, 그 정도도 못해? 너는 양심도 없냐? 이로아 씨 머리 위로 조명기기 떨어졌다며. 그 영악한 꼬맹이가 더 크게 사고 치기 전에 어떻게든 불러내서 없애야 될 거 아냐!”
지원의 공격적인 비난에 입을 떡 벌리던 도겸이 더듬거리며 자기변호를 시도했다. 아직도 전생의 악연에 얽매여 있는 로아의 인생이 안타깝고 불쌍하긴 했지만, 그게 다 제 책임이라는 힐난은 솔직히 좀 억울한 감이 있다.
“버, 버리긴 누가! 나 전생에 대한 기억은 하나도 없어요! 현생을 살기도 바쁜데, 사람이 어떻게 전생까지 신경 쓰면서 살아?”
“뻔뻔한 놈. 네가 기억을 못 하면 없는 일이야? 어쨌든 팩트는 네 동생이 네 약혼녀 얼굴에 칼을 댔고, 그래서 그 약혼녀는 파혼을 당했고, 결국 절에서 혼자 쓸쓸하게 여생을 보내다가 서른여섯 이른 나이에 병이 들어 죽었어. 남자가 여자 인생을 그렇게 만들었으면 최소한의 책임은 져야지. 이게 지금 어디서 큰소리야? 뭘 잘했다고.”
말문이 턱 막힌 도겸이 한참 동안 입술을 뻐끔거리다가 본전도 찾지 못한 채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지원의 말대로 조용히 술을 마시다가 얌전히 집으로 돌아갔다. 혼자 남아서 남은 술을 입 안에 털어 넣던 지원이 자조하며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참 속도 없다, 차지원. 이 와중에 이렇게 보고 싶을 건 또 뭐냐. 그쪽은 내 속이 이렇게 썩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를 텐데.”
끝내 동행을 허락하지 않은 가온을 무영당까지 데려다준 이후로 꼬박 사흘이 흘렀다. 본사의 서고에 가서 이런저런 기록을 뒤지면서도, 지원은 일부러 가온의 동선을 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혼자 보낼 수가 없는데, 얼굴을 보면 마음이 약해져서 하라는 대로 하게 될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한계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아아…, 결국 사흘을 못 넘기네. 더 좋아하는 놈이 약자인 걸 어쩌겠어.”
크게 한숨을 내쉰 지원이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빗어 넘기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지갑을 챙겼다. 술을 마셔서 운전은 할 수 없으니 택시라도 타고 무영당으로 가볼 작정이었다. 가기 전에 권 여사님한테 전화라도 한 통 해볼까? 아직 본사에 계시면 헛걸음이니까….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며 현관문을 열던 지원이 밖으로 나가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대표님….”
“들어가도 돼?”
“그럼요.”
황급히 문을 열고 옆으로 비켜선 지원은 제 집으로 들어가는 가온의 뒤를 따르며 나직하게 혀를 찼다. 망할, 지금 집안에서 술 냄새가 진동할 텐데. 거실 쪽으로 가온을 안내한 지원이 우선 창문부터 열었다. 당장은 손님 대접보다도 환기가 시급했다. 시원한 강바람이 집안을 크게 한 바퀴 휘돌고 나가자, 비로소 지원의 마음에 여유가 조금 생겼다.
“저녁은 드셨습니까?”
“응.”
“그럼 차 한 잔 드리겠습니다. 뭘로 드시겠습니까.”
“차는 됐어. 그보다 차 관장 방금 어디 가려던 중 아니었어?”
“대표님한테요. 너무 보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어서요.”
“….”
지원의 즉답에 가온이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깨를 가볍게 들썩이는 걸 보니 한숨이 나오려는 걸 참는 모양이었다. 가온이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던 지원이 곧 그녀에게 다가가 엄지로 입술을 살살 쓸었다. 서운했던 마음 따위는 어느샌가 눈 녹듯 깨끗하게 사라졌고, 그저 애틋한 마음만 남았다.
“깨물지 마세요. 보는 제가 아픕니다.”
“화가 많이 났나 했어. 오늘 본사에 왔었는데 중천에 안 들르고 그냥 갔다길래….”
“대표님 얼굴을 보면 무슨 말씀을 하셔도 ‘네, 알겠습니다.’ 하게 될 것 같아서요. 그리고 본사에는 어제도 가고 그제도 갔었습니다. 48층에서 한참 동안 천장을 노려보다가 이를 악물고 돌아왔죠.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담담한 말투로 늘어놓는 엄살에 가온이 옅게 미소를 지었다. 사람의 독기를 완전히 빼놓는 무자비한 미소였다. 지원은 그저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틀렸어. 도저히 이길 수가 없어. 허탈한 웃음을 흘린 지원이 막 수건을 던지려던 찰나였다.
“차 관장. 아직도 나랑 명계에 같이 가고 싶어?”
“…!”
“만에 하나 돌아오지 못할 상황이 생긴다고 해도?”
“네. 대표님이 그곳에 계시면요.”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대꾸에, 가온은 이번에는 절로 터져 나오는 한숨을 참지 못했다.
“물론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당연히 없을 건데…. 그래도 산 사람이 명계에 가는 건 여러모로 좋지 않아.”
“그러니까 대표님을 혼자 보내는 게 불안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건 절대로 말씀드리지 않으려고 했던 건데, 염마왕이 대표님을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뭐?”
그런 가능성에 대해서는 추호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듯한 반응에 지원의 기분이 아주 약간 나아졌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비열한 기쁨이나 만끽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가온의 마음이 약하게나마 흔들리고 있으니, 다시금 굳건해지기 전에 쐐기를 박아야 했다.
“그럴 리가.”
“그건 두고 보면 아실 일이고요. 그리고 그쪽도 제가 눈치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첫 대면에서 서로가 바로 알았죠.”
“설마…. 진짜?”
“네. 아무튼 이런저런 것들을 다 고려하면, 시기며 상황이 너무 공교롭다는 생각이 듭니다. 태백의 그 어이없는 덫부터 시작해서 탈주범이 나오기까지,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명계발 사건이 너무 자주 발생했습니다. 포졸 복장 운운하던 아이의 말도 수상쩍고, 그 외에도 소소하게 마음에 걸리는 것들이 너무 많고요. 물론 억측일 수도 있지만, 하필 이런 때에 대표님을 명계로 불러들이려는 염마왕의 저의가 의심스럽습니다.”
“….”
듣고 보니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방금 지원이 말한 것들 중 일부는 가온 역시 수상하게 여기고 있는 것들이었다. 포졸 복장이라…. 움직임이 영 굼뜨다 싶더니, 포청에 정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포청이 아예 제 기능을 못 하게 되면 그건 정말 재앙인데.
“대표님은 초행길도 아니시니, 당연히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이 극히 일부라도 존재한다면, 절대로 대표님을 혼자 보낼 수는 없습니다.”
잠시 입을 다문 가온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꼭 염마왕의 초대가 아니더라도 뭔가 더 큰 일이 벌어지기 전에 명계의 상태를 한 번쯤은 둘러볼 필요가 있어. 만약 염마왕이 진짜로 내게 딴마음을 품었다면…, 그래서 뭔가 수를 쓰는 거라면…, 차 관장과 함께 가는 게 조금 더 안전하지 않을까? 한참을 고민하던 가온이 천천히 고개를 들자, 내내 그녀의 표정을 주시하고 있던 지원이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알았어. 차 관장이 원하는 대로 해. 대신 이것들은 반드시 기억해야 해.”
이건 대체 언제 끝나는 걸까. 뭘 얼마나 처바르길래 한 시간이 넘도록 남의 얼굴을 두드리고 있는 거야. 아, 얼굴이 너무 답답하고 불편해. 눈도 따갑고…. 이거 나중에 다 지워지기는 하는 건가? 이걸 다 벗겨내려면 비누 말고 뭔가 기능적인 제품을 써야 할 것 같은데, 마트에서 파나? 어차피 옆모습만 살짝 나온다면서 뭘 이렇게까지 공을 들이는 거지? 얼굴에 화장품 좀 찍어 바른다고 호박이 수박 되는 것도 아니…. 헉.
줄곧 시선을 내리깔고 있다가 처음으로 거울을 본 도겸이 경악하며 몸을 움찔했다. 웬 낯선 남자가 거울 속에서 뜨악한 표정으로 저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아무리 살펴봐도 도저히 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자신의 시그니처라고도 할 수 있는 다크서클은 어디로 갔는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서 감독님, 움직이지 마세요. 다시 아래 보시고요.”
시키는 대로 얌전히 눈을 내리뜨며, 도겸은 화장술의 위대함에 대해 진심으로 감탄했다. 우와, 이분들 진짜 엄청나시다. 역시 한 분야의 전문가는 아무나 될 수 없는 거구나. 이래서 연예인들이 민낯 공개를 그토록 두려워하는 거였어. 내 다크서클도 가릴 정도면 어지간한 흉터는….
- 남자가 여자 인생을 그렇게 만들었으면 최소한의 책임은 져야지.
흉터를 떠올리자마자 반사적으로 연상된 신랄한 목소리에 도겸의 어깨가 축 처졌다. 내가 진짜로 내 동생이 얼굴에 상처를 낸 여자를 무참하게 버렸을까? 지금이라면 절대로 그러지 않았을 텐데. 아니, 오히려 더 책임감을 느끼면서 반드시 결혼했을 것 같은데. 하아…, 전생의 나란 놈아. 대체 뭔 짓을 한 거야. 너 때문에 내가 지금 이게 무슨 꼴이야.
“감독님….”
익숙한 목소리에 슬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린 도겸이 로아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고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함을 비롯한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서 마음이 복잡했다. 업계 최고의 전문가들이 달라붙어서 작정하고 꾸며 놓은 로아는 말 그대로 여신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웠지만, 애석하게도 현재 도겸은 여자의 미모가 눈에 들어올 만큼 여유로운 심리 상태가 아니었다.
“이로아 씨.”
“제니스 홍보팀장님 말씀으로는 감독님이 오늘 저랑 같이 광고 찍으신다고…. 설마 했는데 진짜로 여기에 계시네요.”
“아…. 네…,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생전 인터뷰도 안 하시는 분이 어떻게 광고를 다 찍으시지? 로아의 동그란 눈동자에 의문이 한가득 들어 있었지만, 딱히 설명할 길을 찾지 못한 도겸은 그저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명계수문 앞에 선 가온이 한참 동안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대단히 진지한 눈빛으로 지원을 돌아보았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항이 뭐라고?”
유치원생 자녀에게 다짐을 받는 학부형 같은 말투에 속으로 조금 발끈했지만, 지원은 털끝만큼도 내색하지 않은 채 공손하게 대꾸했다.
“한 쌍을 이루는 물건 중 하나를 인계에 남겨둘 것, 명계에서는 아무것도 먹지 않을 것, 명계에 두고 오는 물건이 없어야 할 것,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인계에 어떤 물건을 남겨 놨어?”
안주머니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낸 지원이 가온의 눈앞에서 열어 보였다. 그러자 말간 눈을 하고 있던 가온이 매끈한 검정 공단 위에 놓인 손톱만 한 금 거북이를 보고는 아주 미세하게 표정을 바꿨다. 왠지 그녀가 웃음을 참는 것 같아 지원은 살짝 민망해졌다.
“세트로 구성된 것들 중에 휴대 가능한 크기의 물건이 이것밖에 없었습니다. 가급적 오래 소지하고 있던 물건 중에 고르라고 하셨잖습니까.”
“응, 잘했어.”
“방금 저를 허세로 가득 찬 졸부 보듯이 보셨는데요.”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어.”
“그런데 왜 제 눈을 피하세요?”
“그런 적 없어.”
끝까지 아니라 부정하면서도, 가온은 지원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입술을 앙다문 채 꿋꿋하게 정면을 응시했다. 하지만 평소와는 달리 입꼬리가 살짝 떨리는 걸 완벽하게 감추지는 못했다. 그래, 생전 웃지도 않는 사람이 이렇게라도 한 번 웃었으면 됐다. 쿨하게 마음을 내려놓은 지원이 습관적으로 가온을 살피다 검지에 끼워진 낯선 가락지를 발견했다. 아주 고급스러운 광택이 나는 장밋빛 산호였다.
“대표님은 그 가락지를 가지고 가시는 겁니까?”
“어떻게 알았어?”
“그걸 어떻게 모릅니까. 평소에 한 번도 착용하신 적이 없고 드레스 코드에도 맞지 않은 액세서리를 하고 계시는데요.”
“역시 차 관장은 눈썰미가 좋네. 내가 중천주가 되어서 집을 떠나던 날, 어머니가 주신 물건이야.”
가온의 담담한 설명에 지원이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11세기 고려에서 저 정도 퀄리티의 산호를 구할 수 있었다니. 원래 재력이 있는 집안의 따님이셨네.
“이제 가지. 발이 딱딱한 곳에 닿는 느낌이 들기 전에는 절대로 내 손을 놓으면 안 돼.”
“네.”
가온의 손을 잡은 채 명계수문 안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묵직한 공기가 전신을 버겁게 눌렀다. 중천에서 문 너머로 슬쩍 보기만 했을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엄청난 위압감이었다.
“숨 쉬기 괜찮아?”
“네. 공기가 조금 무겁긴 하지만 불편할 정도는 아닙니다.”
잠시 몸이 공중에 뜨는 느낌이 들더니 곧 안정감이 생겼다. 바로 발밑을 살피던 지원은, 자신들이 지금 밟고 있는 것이 어마어마한 크기의 나무라는 것을 깨닫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붉은색 기둥을 가진 커다란 나무에 겹겹의 덩굴이 얽히고설켜 계단을 만들고 있었고, 군데군데 빨간 항아리 모양의 열매가 등불처럼 아스라이 빛나고 있었다. 사이즈는 압도적이었지만 모양 자체는 익숙했다.
“주목(朱木)이네요.”
“응. 염라국 입구에 뿌리가 있어. 지금은 이렇게 얌전하지만 명계에 속한 자가 이 길을 거슬러 올라가고자 하면 가지를 뻗어서 채찍처럼 후려치지. 방문자가 금기를 깨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야. 살아 있는 인간에게는 아주 예외적으로 접근을 허용하고 있지만, 행여 인간이 명계에서 물 한 방울이라도 마시게 되면 즉시 명계에 속한 자로 인식하거든.”
가온과 지원이 나무를 빙빙 돌아 걸어 내려가는 중에도 셀 수 없이 많은 망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가온의 말대로 계단을 거슬러 올라오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거 언제까지 내려가야 되는 거야? 슬슬 지루해지려는 찰나, 저 멀리 아련하게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언가가 비바람에 떨어진 낙과처럼 굴러다니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명계수문을 통과한 후 사정없이 바닥으로 내팽개쳐진 망자들이었다. 옛날 관군 복장을 한 이들이 나타나 그들을 거칠게 질질 끌고 가는 것을 보고, 지원은 살아생전 절대로 큰 죄를 지으면 안 되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명계에 떨어지면 이 꼴을 당한다는 걸 알면, 사람들이 살아 있을 때 조금은 더 조심할 텐데요.”
“글쎄…. 죄를 짓지 말라고 무수히 많은 경로를 통해서 일러주지만, 새겨듣지 않는 자들이 태반이니.”
가볍게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주목의 뿌리에 다다랐다. 기괴할 정도로 울퉁불퉁하게 뻗어 나간 굵은 뿌리를 밟고 겨우 땅에 내려서니, 양손을 공손히 모은 남자가 기다리고 있다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천주님.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그래, 오랜만이군.”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내 동행일세.”
“아…, 네.”
마치 가면을 쓴 것처럼 무표정하던 남자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더니 곧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도무지 시대를 짐작할 수 없는 희한한 양식의 건물들이 둘러싸고 있는 넓은 골목을 지나니 중천과 거의 흡사한 구조를 가진 커다란 광장이 나타났다. 하지만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중천의 판정원들은 망자들과 비슷한 눈높이를 유지한 채 사무적이면서도 친절한 태도를 보이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은 상당히 높은 곳에서 고압적으로 망자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가 염라국의 법궁이야. 저기에 앉아 있는 판관들이 죄인들의 형기를 정하지. 가야 할 지옥의 종류도 결정하고.”
“무섭네요. 인상도, 분위기도.”
“그러니까 차 관장은 나중에 절대로 여기에 오지 마.”
법궁을 가로질러 반대편 문으로 나가니 삭막하기 그지없는 풍경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지옥이라는 곳을 상상했을 때 보통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딱 그런 모습이었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메마른 붉은 땅 곳곳에서는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불길이 솟아오르고 있었고, 사방에 난 물줄기를 따라 벌건 쇳물이 흘렀다. 각 지옥의 내부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고, 간혹 나타나는 샘에서는 독한 유황 냄새가 났다.
스스로를 꽤나 대범한 인간이라고 자부하고 있던 지원이었지만, 흔들다리 밑으로 넘실대던 용암이 바로 제 옆을 스쳤을 땐 솔직히 살짝 식은땀이 났다.
“천주님, 그리고 손님. 이 구름 위로 오르시지요.”
지나치게 살풍경한 들판을 간신히 벗어나니 이번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엄청난 높이의 돌산이 나타났다. 산기슭에 계단이 보이기는 했지만, 걸어서 올라가려면 족히 사흘은 걸릴 것 같은 높이였다. 남자의 안내에 따라 구름 위에 오르자 생각했던 것보다는 안정감이 느껴지는 질감을 가진 구름이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돌산 자체의 풍광은 제법 그럴싸했다. 기암괴석 사이사이에 아주 독특하면서도 아름다운 수형을 가진 나무들이 자라고 있어서 굉장히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판타지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이 본다면 너 나 할 것 없이 군침을 흘릴 만한 모양새였다.
“지금 어디로 가는 겁니까?”
“이 산 위에 염마왕의 침전이 있어. 나도 직접 가보는 건 처음이야.”
침전…. 이 음흉한 새끼 봐라? 공적인 일로 사람을 불러 놓고 가장 사적인 공간에 들여? 순간 심기가 뒤틀린 지원이 눈썹을 확 치켜떴지만, 가온은 일단 침착함을 유지했다. 하자는 대로 군말 없이 따르던 가온이 당혹스러움과 함께 미약한 불쾌감을 드러낸 건 산 정상에 내려선 직후였다.
기가 막히게도 넓은 정원에는 탐스러운 파란 수국이 한가득 피어 있었다.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지원의 표정이 다소 불손해졌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가온은 차마 그를 나무랄 수가 없었다. 꽃은커녕 잡초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명계에, 그것도 하필이면 염마왕의 침전 앞에, 제가 가장 아끼는 꽃이 가득 피어 있다는 건 달리 생각할 여지가 많지 않은 일이었다.
“가온!”
반색하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얇은 바지저고리에 헐렁한 두루마기를 대충 걸친 하율이 성큼성큼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의 느슨한 차림에 익숙했던 가온은 그러려니 했지만, 지원의 숨소리는 대번에 거칠어졌다. 바빠서 중천에 방문할 시간도 없다더니. 침의나 다름없는 차림으로 제 처소에서 나온다는 건 대단히 한가하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거 아닌가?
환하게 웃으며 나타난 하율 역시 즉각 표정이 변한 건 마찬가지였다. 가온의 옆에 선 지원의 얼굴을 보자마자 만면에 띠고 있던 미소가 서서히 옅어졌는데, 그러면서도 목소리는 얼마나 나긋나긋한지 듣고 있으려니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동행이 있네?”
“응. 차지원 관장, 기억하지?”
“물론 기억하지요.”
건방지게 당신에게 남자 행세를 하던 인간을 내가 어떻게 잊겠어? 나는 한번 건드려보지도 못한 입술을 신나게 물고 빨고 하던 괘씸한 놈인데…. 언젠가 도둑처럼 숨어서 훔쳐봤던 광경이 떠오르자 속에서 열불이 치솟았지만, 하율은 눈꼬리를 곱게 접으며 생긋 웃었다. 아직 가온의 옆자리 문제를 놓고 화낼 자격을 얻지 못했으니 아무리 분해도 지금은 내색할 수 없다.
“아무튼 여기까지 오느라고 정말 고생 많았어, 가온. 염라국을 둘러보기 전에 잠깐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하겠어?”
“….”
차를 마시자고…? 하율의 저의를 의심하기 시작하니 한마디 한마디가 다 의미심장했다. 입을 꾹 다문 가온이 느물거리는 하율을 말간 눈으로 빤히 쳐다보자, 그는 과장되게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양손을 들어 올렸다. 뭐…. 이런 조잡한 수에 쉽게 넘어갈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역시나 호락호락하진 않네.
“아…. 당신은 여기서 뭘 먹으면 안 되지, 참. 미안, 내가 요즘 정신이 없어서. 사실 방금 전까지도 막일을 하고 있었거든. 어이구, 간만에 힘을 썼더니 어깨가 다 뻐근하네.”
“왜? 명계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
“애석하게도. 그걸 보여주려고 당신 바쁜 줄 알지만 굳이 오라고 했어.”
조금 심각한 얼굴을 한 하율이 정원 구석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던 구름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가온을 향해 아주 정중한 몸짓으로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가온은 하율의 호의를 가볍게 무시하고는 제힘으로 구름에 올라탔다. 곧이어 구름 위에 오른 지원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가온의 허리를 감싸자, 이번만큼은 천하의 염마왕도 표정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나도 차 관장이라고 불러도 되나?”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차 관장은 용기가 아주 대단하네. 살아 있는 인간이 명계에 올 결심을 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인데.”
“딱히 대단한 결심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대표님이 가시는 길이라 따랐을 뿐이죠.”
지원의 담담한 대꾸에 하율이 한쪽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어린 것이 같잖게 굴기는. 내가 숨 한 번만 제대로 쉬어도 금세 사그라질 목숨인데. 지옥의 실체를 보고 나서도 그 반반한 낯짝을 유지하는지 어디 두고 보자고.
조용히 코웃음을 친 하율이 작게 손짓하자, 천천히 지상을 향해 내려가던 구름이 살짝 방향을 틀었다. 중심부에서 점점 멀어지던 구름이 어느 순간 한눈에 끝이 보이지도 않는 드넓은 바늘밭 상공에 정차했는데, 그곳에는 한 뼘도 넘는 길이의 무시무시한 바늘이 빈틈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빼곡하게 박혀 있었다. 죄인들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바닥이 온통 붉었고, 살이 타는 냄새와 피비린내가 섞여 후각을 아주 괴롭게 자극했다. 고막을 찌르는 비명 또한 끊이질 않았다.
“여기가 명계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지옥 중에 하나인 고륜지옥이다. 많은 사람을 죽인 이들이 벌을 받는 곳이지. 지난번에 인계에 나타났던 악령도 이곳에서 탈출한 자였고. 여기에선 형기가 끝날 때까지 저 바늘 위를 맨발로 달리면서 불에 달군 바퀴를 손으로 밀어야 해.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우면 다른 이가 굴리는 바퀴에 깔려서 맨몸으로 바늘밭을 나뒹굴게 되거든.”
하율의 잔혹한 설명을 침착하게 듣고 있던 지원이 불현듯 고개를 갸웃했다. 이곳에서 탈출을 했다고? 저렇게 무시무시한 감시자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데? 그러고 보니까 태백에서 염마왕을 처음 만났을 때도, 그는 명계에서 인계로 연결되는 통로가 있다고 했었다. 망자가 명계수문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는 건 불가능하다면서, 그 통로라는 건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두리번거리는 지원을 바라보며 하율이 픽 웃음을 흘렸다.
“저 아래를 자세히 봐. 바닥이 울퉁불퉁해진 게 보이나?”
하율이 가리키는 곳을 유심히 살피니, 평평한 바닥의 일부가 흉하게 일그러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길게 난 흉터를 아주 솜씨가 없는 이가 굵은 실로 성글게 꿰매놓은 듯한 형상이었는데, 틈새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놀랍게도 인계로 짐작되는 광경이 어른거렸다.
이게 그 통로구나. 여길 통해서 망자들이 빠져나가고 있단 말이지. 그걸 뻔히 알면 제대로 메꿔야지, 이렇게 허술하게 대충 막아 놓으면 어떡해? 그나저나 저쪽 세계의 풍경이 왠지 눈에 익은데…. 얼핏 보이는 건물들도 그렇고. 내가 저 희한한 색깔의 벤치를 분명히 어디서 봤단 말이지. 나무가 우거진 공원에 샛노란 색의 철제 벤치…. 아! 저기 일산이다.
인계의 장소를 알아본 지원이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그러고 보니까 거기서 임소화 선생님을 만나기도 했었는데…. 이거 뭔가 점점 더 수상해지는 느낌인데? 가온에게 말을 거는 하율을 흘깃 바라본 지원은, 표정을 정돈하기 위해 호흡을 고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마도 그동안 망자들이 저런 틈을 통해서 인계로 달아났던 것 같아. 일단은 봉합을 해두었지만, 완전히 원상 복구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그런데 문제는 작정하고 찾아보니까 명계에 저런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는 거야.”
“몇 군데나 되는데?”
“내가 조금 전까지 파악한 곳만 총 스무 군데 정도.”
어지간해서는 감정의 기복이 심하지 않은 가온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저런 틈은 가끔 어쩌다 한 개씩이나 생기는 거 아니었나?”
“여태까지는 그랬지. 아마 명계의 수용 인원이 포화 상태라 계속 공간을 확대시켰던 것이 원인인 것 같아. 그러다 보니 차츰 밀도가 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균열이 생긴 거지. 발견되면 닥치는 대로 메꾸고 있지만, 보다시피 내 능력으로는 한 번에 완벽하게 처리할 수가 없어. 일단 저렇게 임시방편으로 막아놓는 게 전부고. 이런 일은 당신 전문이니까 도움이 필요해, 가온.”
뭐야, 명계의 일은 명계에서 알아서 해야지. 대표님은 안 그래도 지금 몸이 서너 개라도 모자란데! 하율의 부탁에 지원이 눈을 사납게 치켜뜨며 이를 갈았지만, 가온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명계에서 탈주한 망자들이 인계를 활개치고 다니면 그건 더 이상 명계만의 문제라고 볼 수 없는 데다, 하율의 말마따나 차원의 문을 닫는 건 염마왕보다는 중천주가 한 수 위다.
“좋아, 일단 저기부터 닫지.”
바로 검을 꺼내 든 가온이 기운을 모아 크게 휘두르자 흉측하게 일그러졌던 땅이 서서히 매끈해졌다. 동시에 끔찍한 비명과 신음이 난무하던 주변이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중천주의 힘을 코앞에서 목격한 망자들은 잔뜩 겁에 질린 채 가온과 최대한 거리를 벌리려고 애썼다.
“하율, 나머지는 어디에 있어?”
“대표님. 음기가 지나치게 강한 곳에서 한꺼번에 너무 많은 힘을 쓰시는 것 같습니다.”
대번에 낯빛이 변한 지원이 간곡히 만류했지만, 가온은 조금 미안한 얼굴을 하면서도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하율과 자주 만나는 건 좋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올 수는 없으니까, 응? 차 관장도 바쁜 사람이고, 나 혼자 오게 두진 않을 거잖아.”
“….”
“차 관장, 난 괜찮아. LA에서도 봤었잖아. 닫는 건 어렵지 않아. 오늘 여기 일 처리하고 돌아가면 내일 하루는 아무것도 안 하고 쉴게. 약속해.”
“하아…. 그 약속 꼭 지키십시오.”
“응.”
두 사람의 대화를 몹시 떨떠름하게 지켜보던 하율은, 곧 웃는 낯을 장착하고는 가온에게 명계 곳곳을 안내했다. 하율이 발견했다는 통로를 가온이 모두 닫기까지는 채 반나절이 걸리지 않았다.
“고생했어, 가온. 명계에서 벌어진 사고인데 중천주에게 이렇게 신세를 져서 정말 면목이 없네.”
“아니야. 인계에 큰일이 생겼을 때 당신의 도움을 받은 적도 많은데, 뭐. 어쨌든 우리는 이만 가볼게.”
“그래, 조심해서 가. 조만간 내가 중천으로 한번 갈게.”
염라국 입구까지 가온과 지원을 배웅한 하율은, 두 사람이 사이좋게 손을 잡고 주목의 계단을 오르는 걸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그리 힘든 일은 아니었다지만 명계에서 힘을 쓴 것이 아무래도 버거웠는지, 미처 중간에 다다르지 못한 지점에서 지원이 가온을 업는 게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 사이에 몇 번 실랑이가 오가는 것 같더니 결국 지원이 이긴 모양이었다.
“흐음. 저 자식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약간 장난스러운 말투로 중얼거리던 하율이 곧 서늘하게 얼굴을 굳혔다.
“그냥 죽여 버릴까. 어차피 환생을 하게 될 테니, 행여나 가온이 저자를 다시 찾더라도 성인이 될 때쯤엔 중천주의 수명도 끝날 텐데.”
이런저런 궁리를 하던 하율이 짜증스럽게 혀를 차며 몸을 홱 돌렸다. 그리고는 가온이 닫았던 통로를 하나씩 다시 찾아서 정확하게 같은 자리에 불꽃을 던졌다.
“정말 미안해, 가온. 나도 웬만하면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어. 당신의 수고를 헛되이 만들게 된 건 진심으로 마음이 아파.”
펑! 펑! 깨끗하게 닫혔던 통로가 다시 열리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당신은 닫는 게 전문이고, 나는 여는 게 전문이라. 그래서 우리는 천생연분이지.”
서서히 벌어진 틈으로 눈에 익은 샛노란 벤치 하나를 발견한 하율이 입꼬리를 크게 올리며 씩 웃었다.
월황사.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작은 사찰에 발을 들인 도겸이, 나이가 지긋한 비구니의 안내를 받아 구석에 있는 허름한 단칸방의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깨끗한 승복을 입은 가녀린 여인이 잠을 자듯 누워 있었다.
“수연아….”
이미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왔지만, 아직 혈색이 남아 있는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덜덜 떨리는 숨을 몰아쉬며 방안으로 천천히 들어간 도겸은 그녀의 반대쪽 얼굴에 길게 난 상처를 발견하고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 낭자, 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하였습니까. 말씀을 해주셔야 다시는 아니할 것 아닙니까. 아니, 내가 다 잘못하였습니다. 뭐든 내가 다 잘못하였으니 집으로 돌아갑시다. 부탁입니다.
- 도련님이 잘못하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제가 부처님께 남은 생을 의탁하고 싶어 절에 찾아온 것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 혼인을 두 달 남겨두고 갑자기 왜 출가를 하시겠다는 겁니까. 다 좋습니다. 다 좋으니까 얼굴을 보고 얘기합시다. 우리의 지난 세월이 얼만데, 사람을 이리 문전박대하십니까.
- 여기는 비구니들만 사는 사찰입니다. 저는 이미 출가한 몸이니 사사로이 이성과 접촉할 수 없습니다. 제가 죽기 전에는 이 마음이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니 돌아가십시오. 저는 죽는 날까지 도련님을 만나지 않을 것입니다.
- 수연아….
도겸의 애절한 부름에도 끝내 응하지 않은 여인은 그 이후로 도겸이 몇 번이나 더 찾아왔지만 끝내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었다.
대체 내가 무엇을 그리 잘못하여 이 순하디 순한 여인의 심기를 상하게 했을까, 아무리 고민하고 또 고민해도 답을 찾을 수가 없더니…. 이리된 연유였구나. 조부의 살아생전에는 감쪽같이 지켜졌던 비밀이, 도겸이 집안의 가장이 되고 나서야 밝혀졌다. 단단히 턱을 굳힌 도겸이 빠드득 소리가 나게 이를 갈았다.
“밖에 누구 있느냐.”
“예, 나으리.”
“지금 당장 집으로 사람을 보내서 장례 치를 준비를 하라 일러라. 이 시신은 내가 직접 가마에 태워 갈 것이다.”
란이 네가 감히 내 여인을…. 내게 그리 총애를 받고도 어찌 이런 끔찍한 짓을…. 무섭게 일그러진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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