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9. 밤의 능소화 (10/18)
  • 09. 밤의 능소화

    지금 당장 좌포청장 들라 하라.

    꼬박 보름 동안 마치 들개처럼 인계를 떠돌다 간신히 명계로 돌아온 모화영은, 염마왕으로부터의 전언을 듣고는 가느다란 입술을 비틀며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한동안 잠잠하시다가 갑자기 왜 이렇게 조급증이 나셨을까. 내가 뭘 하면서 인계를 휘젓고 다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이.

    “연유가 무엇인가.”

    “저희 같은 것들이야 연유를 알 길은 없고…. 아무튼 서두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한참 전부터 기다리셨고, 그 사이에 좌포청장님의 귀환 여부를 두 번이나 확인하셨습니다.”

    “그래? 지금 어디에 계시지?”

    “침전에 계십니까.”

    침전…. 순간 모화영의 그린 듯한 눈썹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마음에 둔 여인에게는 그리 지고지순하게 굴면서, 여전히 내게는 최소한의 예의라는 것도 없구나. 아무리 임금은 무치라지만…. 잠시 입술을 앙다물며 무언가를 진득하게 참아 낸 모화영이 곧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뭐, 그런다고 어쩔 수 있나. 불평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닌 것을.

    “지금 가지. 앞장서게.”

    염마왕의 침전은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리는 험준한 돌산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다. 평소에는 짙은 구름에 가려서 존재 자체가 눈에 잘 띄지도 않거니와, 살기에 가까운 무시무시한 영기가 둘러싸고 있어서 육신의 속박을 벗어난 영혼일지라도 감히 접근조차 할 수 없다. 염마왕의 윤허 없이는 그 누구도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장소다.

    한때 이곳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던 모화영이었지만, 지금은 그녀 역시도 시종의 안내를 받지 않으면 산기슭에 발을 들일 수조차 없다. 얌전히 시종의 뒤를 따라 돌산 정상까지 날아오른 모화영은,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정원 풍경을 보고는 가만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푸른 수국이라…. 마음을 비우고 또 비웠다고 생각했는데, 저 둥글둥글한 꽃을 보고 있으면 속이 뒤틀리는 건 어쩔 수가 없다.

    - 무슨 꽃을 심어주랴.

    - 생전에 사람들이 저를 화왕이라고 불렀습니다.

    - 화왕이라. 그래, 퍽 어울리는구나. 이리 탐스러운 붉은 입술을 가졌으니 적모란이 좋겠군.

    나른한 얼굴로 침상에 누워 여인의 입술을 쓰다듬던 명계의 주인은, 힘도 들이지 않고 염라국 전체를 단숨에 적모란으로 뒤덮었었다. 그 순간의 감격이 아직도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다. 명계의 지배자에게 총애를 받는 기분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짜릿함이었다. 비록 육신을 잃고 다시는 햇빛을 보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지만, 이리 마음이 충만하니 살아 있는 것과 진배없다고 여겼었다.

    - 이전에 아끼셨던 여인은 단아한 자태를 가진 이였나 봅니다.

    - 아…, 들꽃 같은 아이였지. 조용하고 수줍음이 많고.

    명계 전체에 하얀 융단처럼 깔려 있던 손톱만 한 봄맞이꽃을 흔적도 없이 치워버린 하율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생긋 웃었다. 애정을 쏟을 때는 아낌없이, 그러나 다시 거두어 갈 때는 일말의 미련도 남기지 않는 하율이었다.

    - 보기에는 어여뻤으나, 좀 지루했어. 그대는 나를 즐겁게 해주길 바라 마지않아.

    흥미가 떨어지면 끝이구나. 염마왕의 총애를 잃은 여인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어차피 죄인들만 오는 세계이니 주인의 변덕으로 잠시 누렸던 특혜를 빼앗기면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보내지는 게 당연하다. 그러니 생전에 여섯 명을 독살했던 모화영은 하율의 관심이 끊기는 순간 당장 독천옥으로 가야 한다. 독극물이 흐르는 강에 몸을 담그고 형기가 끝날 때까지 온몸이 녹아내리는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뜻이다.

    단단히 각오를 다진 모화영은 하율의 총애를 잃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다행히 하율은 한꺼번에 여러 명의 여인을 취하는 군주는 아니었고, 길어야 20년을 넘기지 못했었다는 과거의 여인들과는 달리 모화영을 제법 오래 곁에 두었다. 호들갑스러운 시종들의 말에 의하면 명계가 생긴 이후로 같은 종류의 꽃이 800년이나 계속해서 피어 있었던 건 처음이라고 했다.

    비록 죽은 자들의 세계이긴 했지만 권력의 맛은 달콤했다. 으리으리한 궁궐에서의 삶은 안락했고, 한 남자에게 소중한 존재로 여겨지는 느낌도 너무 좋았다. 수려한 외모를 가진 하율은 대체로 상냥하기까지 했기에, 한 세계의 최고 권력자인 그에게 매혹당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저 그의 관심을 잃으면 어쩌나 하는 것이 모화영의 유일한 근심거리였다.

    이제 슬슬 안심해도 될까. 이렇게 오래 나만을 사랑했으니 영원할 거라고 믿어도 될까.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모화영이 겨우 한시름 덜었다고 생각했을 무렵이었다. 어디선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족자 하나를 얻어 온 하율은 무려 석 달 동안 침전 문을 걸어 잠그고는 밖으로 나오지도, 다른 이를 안으로 들이지도 않았다. 피가 마르는 나날들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굳게 닫혔던 침전의 문이 열리던 날, 명계에 피어 있던 모든 꽃들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 애석하게도 이제 그대를 곁에 둘 수 없게 되었어. 하지만 내 손을 탄 여인을 독천옥으로 보내는 건 영 내키지가 않아. 그대는 영민하고 기운도 강하니 포청에서 일하는 것이 적성에 맞을 거야. 그리하겠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모화영은 좌포청의 하급 관리가 되었고, 지난 천 년 동안 눈부신 성과를 내며 차곡차곡 본인의 입지를 다졌다. 연모라는 것은 마음대로 끊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율의 얼굴을 볼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쓰리고 아팠지만, 모화영은 총애를 되찾겠다고 무모하게 몸을 던질 만큼 어리석은 이가 아니었다. 그의 심기에 제 운명이 달려있던 때보다는 솔직히 마음이 편하기도 했다.

    어쨌든 하율에게 완전히 내쳐지지 않으려면 그의 수족처럼 기민하게 움직여야 했다. 인계에 가급적 큰 혼란을 야기하라는 주문을 받았기에, 천지 분간 못하는 어린아이를 꼬드기는 치졸한 일도 했고, 치사하게도 구석에 몰린 인간을 재물로 현혹시키기도 했다. 물론 총애를 되찾으려는 기대를 가지고 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렇게 대놓고 다른 여자에 대한 순정을 보여주면 마음이 좀 상하지. 이제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살풍경한 명계와는 달리, 인계의 어느 화려한 정원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아름다운 꽃밭이 기껏 가라앉혔던 모화영의 심사를 꽤나 아프게 건드렸다. 이건 아무 데나 피울 수도 없을 만큼 소중하다 이건가. 고작 꽃일 뿐인데도?

    “부르셨습니까, 마왕님.”

    “좌포청장.”

    속내를 감쪽같이 숨긴 채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던 모화영은 헐렁한 침의 차림으로 독주를 퍼붓고 있던 하율의 서늘한 목소리에 흠칫 놀라며 눈동자를 바쁘게 굴렸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잔뜩 들떴던 것이 불과 반년 전인데. 그새 무슨 일이 생겼나?

    “내가 그대에게 따로 지시한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해서 불렀어.”

    “네. 인도자들을 포섭하여 고륜지옥에서 인계로 통하는 통로를 조금씩 벌리고 있습니다. 계획대로라면 인계의 시간으로 올해 동짓달 보름까지 108개의 틈이 만들어집니다.”

    “동짓달이라…. 그건 너무 먼데.”

    하율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모화영의 눈에는 의문이 가득 담겼다. 천 년 가까이 독수공방하며 기다렸으면서, 고작 30년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왜 이렇게 갑자기 애가 달았지? 시키니까 하기는 했지만, 사실 이번 동짓달도 굉장히 무리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서두르시는 연유가 무엇인지….”

    “연유….”

    하! 모화영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독주를 쭉 들이켠 하율이 눈빛을 형형하게 빛내며 성마른 웃음소리를 냈다.

    - 나…, 차 관장을 되게 좋아하는 것 같아.

    어째서. 천 년을 고고하고 아름답게 고이 잘 보내놓고 왜 이제 와서!

    모처럼 전임 중천주가 만들어 놓은 차원의 문을 열고 인계로 나들이를 나갔던 하율은 생각지도 못했던 가온의 기척을 느끼고는 흐뭇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거 봐. 지구 반대편에서도 이리 우연히 만나는 걸 보면 우리 사이에 운명이라는 게 존재하는 게지. 그러나 기쁨이 극심한 분노로 바뀌기까지는 불과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태양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곳으로 발을 들일 수 없는 명계의 왕은, 수백 년을 기다려 온 여인이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기는 걸 보며 그저 이를 갈 수밖에 없었다. 사후에 명계로 오기만 하면 인계에서 있었던 일들은 모두 너그러이 덮어두리라 다짐을 했었지만, 오매불망 기다리던 여인이 남자의 손길에 몸을 떠는 광경을 직접 목격하는 것은 충격의 강도가 달랐다.

    하루살이만도 못한 애송이가, 감히 중천주를 탐하고 명계의 왕에게 도전장을 내밀다니! 저와 똑바로 눈을 맞추며 적의를 숨기지 않았던 지원의 얼굴을 떠올리니, 당장이라도 뭔가를 때려 부수고픈 폭력적인 분기가 한순간에 치솟았다.

    쾅! 하율이 들고 있던 술잔을 내리치자, 명계를 뒤흔드는 벼락이 내리치더니 흑금강석을 깎아 만든 탁자가 정확하게 반으로 쪼개졌다.

    “마왕님….”

    “동짓달까지 기다릴 수 없어. 돌아오는 보름에 일단 고륜지옥의 죄인들을 풀어놓도록 해. 가급적 중천주의 거처 주변에.”

    “하지만….”

    머뭇거리는 모화영을 내려다보는 하율의 눈빛이 몹시 사납고 싸늘했다.

    “좌포청장, 항명인가?”

    “…아닙니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이제 와서 기분대로 계획을 트는 건 좋지 않은데. 왠지 불길한 생각이 들었지만, 염마왕의 분노 앞에 반기를 들 수는 없었던 모화영은 그저 얌전히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여기가 저희 외가예요, 감독님. 제가 중학생 때까지 살았던 집이고요.”

    페인트가 거의 벗겨진 초록색 대문 앞에 차를 세운 도겸은 놀란 내색을 하지 않기 위해 상당히 애를 썼다. 멀리서 봤을 땐 헛간인가 싶었을 정도로 낡고 초라한 집이었는데, 실제로 사람이 거주한다는 사실에 도겸은 내심 큰 충격을 받았다.

    “할아버지는 지금 밭일을 나가셨을 거예요. 농번기에는 해가 지기 전에 집에 돌아오는 일이 거의 없으세요.”

    “주인이 안 계신 집에 이렇게 들어가도 될까 모르겠네요.”

    도겸이 선뜻 발을 떼지 못하자, 로아가 눈꼬리를 살짝 접으며 수줍게 웃었다.

    “굳이 따지자면 여긴 제 집이에요. 가수 활동하면서 번 돈이 다 여기로 들어갔거든요. 할아버지가 친구 보증을 잘못 서신 바람에….”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려던 도겸이 저도 모르게 기가 막힌 얼굴로 로아를 쳐다보았다. 아직도 보증 때문에 돈을 날리는 사람이 있어? 아니, 어쩌면 이렇게 온갖 종류의 불행이 한 인간의 인생에 몰빵될 수 있는 거지?

    “죄송해요. 마음 불편하시라고 드린 말씀은 아닌데.”

    “하아. 앞으로 그 죄송하다는 말은 정말로 나한테 뭐 잘못했을 때만 합시다. 일단 그 문제의 팔찌나 보죠.”

    삐걱거리는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손으로 툭 건드리면 바로 쓰러질 것 같은 작고 초라한 집 한 채가 있었다. 진흙으로 외벽을 바르고 화장실도 밖에 있는, 그야말로 옛날 집을 이렇게 실물로 본 건 처음이었다. 로아가 제가 쓰던 방에서 팔찌를 챙겨서 나온 순간, 갑자기 어디선가 어린아이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린 도겸은, 로아가 꿈속에서 봤다던 한복 입은 꼬마를 보고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진짜로 오래된 꼬맹이네?

    “정말 너무 보고 싶었어요, 오라버니.”

    “나를…, 알아?”

    “오라버니…. 저 란이에요.”

    예쁘장한 소녀의 영혼이 너무나도 서운한 얼굴을 하며 눈물을 글썽였지만, 전혀 마음의 동요가 없었던 도겸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망자가 하는 말이 다 사실이라는 보장도 없거니와, 행여 과거의 자신과 관계가 있는 인물이라 할지라도 현재의 도겸에게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전생은 내 것이라고 할 수 없지.

    “이로아 씨, 내 옆으로 와요.”

    “수연 언니는 기억하셨으면서. 어떻게 저는 잊으실 수가 있으세요? 저는 오라버니를 만날 날만 기다리면서 그 차가운 땅속에서 수백 년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소녀가 울먹이며 로아를 노려보자, 도겸은 한층 더 긴장하며 로아의 손목을 잡고는 슬쩍 제 뒤로 숨겼다. 그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소녀가 로아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건 일단 확실해 보였다. 굳이 물건을 거처로 삼지 않아도 자력으로 존재할 수 있는 영혼이 왜 굳이 이런 낡은 팔찌에 들러붙었을까. 정말로 뭔가 과거에 연이 닿았었던 인물일까? 잠시 고민하던 도겸이 곧 고개를 저었다. 내막이 조금 궁금해지긴 했지만, 가이드에게는 모든 망자를 발견 즉시 중천으로 보내야 할 의무가 있다.

    “중천 소속 가이드 서도겸입니다. 귀하는 현재 이승에 머물 수 없는 망자의 신분으로, 즉시 중천으로 이동하여 생전의 공과에 대한 판정을 받아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공과는 계속 기록되고 있으며, 가이드의 지시에 따르지 않거나 도주할 경우 향후 행선지 결정에 큰 불이익을 받을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또한 지금부터는 가이드 직권으로 강제적인 소환 절차를….”

    도겸이 빠르고 냉정하게 원칙을 고지하자, 소녀의 커다란 눈망울이 크게 흔들렸다.

    “오라버니. 무섭게 왜 이러세요. 제 말 좀 들어보세요, 네? 제 얼굴을 보시라고요. 이 노리개도 오라버니가 사주신 것인데….”

    “… 진행할 수도 있다는 점을 알려드립니다. 그럼 이제부터 중천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혼자서는 못 가요!”

    눈물의 호소가 먹히지 않자 마음이 다급해진 소녀는 표독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로아에게 달려들었다. 재빨리 그 앞을 막아선 도겸이 힐끔 뒤를 돌아보며 로아의 안색을 살폈다. 가끔 이런 경우에 미친 사람처럼 혼잣말을 하는 가이드에게 오히려 겁을 집어먹고 일을 방해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다행히도 로아는 그럭저럭 침착해 보였다.

    “이로아 씨. 지금 뭐 보이거나 들리는 게 있어요?”

    “아니요. 하지만 뭐가 있긴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지금부터 그걸 없앨 건데, 혹시나 뭐가 달려드는 느낌이 들어도 어디로 도망가거나 하지 말고 내 옆에 딱 붙어 있어요. 그게 더 위험하니까.”

    “네.”

    도겸과 로아의 대화를 유심히 듣고 있던 소녀가 씩씩거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저 여우 같은 게! 어디서 고개를 또 빳빳하게 들고! 이번에도 우리 오라버니를 홀려서 나를 이렇게 홀대하게 만들다니!”

    “시작합니다.”

    도겸이 지체 없이 노래를 시작하자, 분해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소녀가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며 귀를 틀어막았다.

    “아아악! 그만해!”

    “노잣돈이 모자라서 극락세계 못 가시나, 가다가다 배가 고파 허기져서 못 가시나.”

    “싫어! 살려줘!”

    지금 내 눈에는 안 보여도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구나. 도겸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있던 로아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조금 전까지는 은근히 기분 나쁜 시선 정도로만 느껴지던 기운이, 도겸이 노래를 시작함과 동시에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날카롭게 변했다. 기분 탓인지 어린아이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바로 그때였다.

    “응? 웬 차가 남의 집 대문 앞에…. 대문은 또 왜 열려 있어? 아이고, 로아 왔니?”

    순간 극도로 당황한 로아가 도겸의 눈치를 살피며 양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할아버지의 목소리에 도겸이 잠깐 노래를 멈춘 사이, 악의로 가득 찼던 기운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언제나 무표정하던 도겸의 얼굴에 너무나도 선명하게 낭패감이 떠오르는 걸 보니, 아마도 한복을 입고 있던 그 깜찍한 꼬마가 줄행랑을 친 듯했다.

    이걸…, 어째.

    “하아…, 할아버지…. 이 시간에 집에는 어쩐 일로….”

    “로아 맞구나! 요즘 많이 바쁘다면서 어떻게 왔어? 같이 오신 분은 누구고?”

    손녀딸의 얼굴을 보고 주름진 얼굴을 활짝 피던 노인이, 꽃 같은 손녀의 옆에 선 도겸을 조심스러운 시선으로 살폈다.

    아아…, 망할. 골치 아픈 망자를 놓친 것도 짜증나는데, 이거 잘못하면 괜히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도 있겠는데? 지끈거리는 두통이 엄습해 왔지만, 애써 정신을 수습한 도겸이 로아의 조부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저는 이로아 배우님하고 함께 일하고 있는 드라마 스태프입니다. 촬영 중에 잠깐 집에 뭐 가지러 올 게 있다고 하셔서 기사로 왔습니다.”

    “아이고, 그러셨구만. 그러지 말고 안으로 들어와요. 뭐 대접할 건 없지만, 옥수수 쪄 놓은 거라도 들고 가요.”

    “아닙니다. 촬영 시간이 촉박해서요.”

    벌써 가는 게야? 다음 주에 한 번 올게요. 왜 이리 말랐어,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는 거니? 그럼요. 할아버지야말로 날씨도 더운데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애틋하게 인사를 나누는 조손을 가만히 지켜보던 도겸은 대문 밖을 나서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할아버지 앞에서는 그럭저럭 표정을 잘 정돈하고 있던 로아가 대번에 울상을 했다.

    “정말 죄송해요, 감독님.”

    “이로아 씨 잘못이 아닌 걸로 사과하지 말라니까. 어쨌든 노래를 중단한 건 나니까요. 미친놈으로 보일 각오를 하고 계속 불렀으면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 나 역시 어쩔 수 없는 사회적인 동물이라.”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전문적이신 것 같았어요.”

    아, 그래. 원칙 같은 것도 주절거리고 했으니 뭐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 실상은 몸으로 때우는 막일에 가깝지만. 그건 그렇고.

    “이로아 씨는 나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아까는 다른 곳으로 피하게 하고 어쩌고 할 상황도 아니어서 그냥 시도했지만…. 원래는 일반인들 앞에서는 보이면 안 되는 장면이었어요. 깊게 엮이면 좋을 거 없으니까 잊어버려요.”

    “…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로아에게서 팔찌를 받아낸 도겸이 평평한 바위 위에 내려놓고는 뾰족한 돌로 내리찍었다. 그리고는 팔찌가 거의 가루가 될 때까지 손을 멈추지 않았다. 이미 소녀의 영혼은 멀리 떠난 상태였지만, 팔찌의 기운 자체가 너무 좋지 않아서 가지고 있으면 계속 잡귀가 들러붙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 이제 완전히 사라졌나요?”

    “아니요. 이로아 씨가 처음에 데리고 왔던 귀신은 팔찌를 떠나서는 자력으로 존재할 수 없었지만, 아까 그 꼬맹이는 사후에 인계에서 적어도 300년은 버틴 것 같고…. 거리의 제한도 없는 걸 보면 딱히 팔찌에 빌붙어 있다기보다는, 팔찌를 알아보고 본인의 의지로 옆에 있는 것 같았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도망을 칠 수도 있는 거죠. 하는 짓이나 하는 말로 짐작건대 아마도 이 팔찌의 원 주인인 것 같네요.”

    “그, 그럼…. 또 나타날까요?”

    살짝 겁을 먹은 로아의 목소리에 도겸은 가슴이 몹시 답답해졌다. 실제든 아니든 조금 전에 봤던 맹랑한 어린 망자는 도겸과 로아와 소녀가 모두 전생에 인연이 있었던 것처럼 말했었다. 로아에게는 처음부터 감정이 안 좋은 것 같았고, 자신에게는 친근하게 다가오다 크게 혼쭐이 날 뻔했으니, 다시 나타나서 해코지를 할 가능성이 적진 않다.

    “아마도. 일단 세트장에서 목격했다는 사람이 많으니 거기로 한번 가봅시다. 하는 짓을 보니까 순진하게 거기에 붙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앞으로 촬영장에서는 절대로 혼자 있지 말아요. 보니까 이로아 씨는 그 정도는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가급적 기운이 강한 사람 옆에서 떠나지 말고.”

    며칠에 걸쳐 세트장을 방문했지만, 소녀의 영혼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공연히 도겸만 이서의 의심을 샀을 뿐이었다.

    - 너 왜 이렇게 여길 들락거려? 네가 이 근처에 올 일이 뭐가 있어서?

    - 지나가는 길에 누나 보러 왔다니까.

    - 얘가 지금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너 혹시….

    눈을 가늘게 뜨는 이서 때문에 더는 세트장에 자연스럽게 방문할 수 없게 된 도겸은 그대로 차를 몰아 갤러리 화담으로 향했다. 이제는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도움이 필요하기도 했고, 이모의 유품을 정리하고 돌아왔다는 지원이 신경 쓰이기도 했다.

    “형, 이번 달 상급 회의는 어디서 할까? 나 좀 심각한 사건이 하나 생겼어. 해수도 한국에 없으니까 우리 둘뿐인데, 내가 형네 집으로 갈까요?”

    “무영당에서 하자.”

    “무영당…?”

    뜻밖의 대답에 어리둥절해진 도겸이 멍하니 되묻자, 지원은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 심각한 사건 생겼다면서. 대표님도 아셔야 하는 거 아니야?”

    “그건 그렇긴 한데…. 형 괜찮겠어요? 대표님하고 좀 편해졌어?”

    도겸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지원이 한쪽 눈썹을 가만히 찡그렸다. 아, 내가 얘한테 말을 해줄 새가 없었구나.

    “편해졌어.”

    “완전히…, 포기했어?”

    “우리 사귀어. 오늘이 23일째야.”

    “아아…, 사귀기로 했…! 뭐?!”

    지원의 폭탄 발언에 화들짝 놀란 도겸이 소리를 빽 지르자, 매끈하던 지원의 미간이 대번에 확 구겨졌다.

    “조용히 해. 여기 내 직장이야.”

    “아니…. 미안해요. 그런데…. 아니, 그게…. 진짜로?”

    “내가 언제 너한테 거짓말하든?”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지만, 말마따나 지원은 허튼소리를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바로 받아들일 수 있는 얘기도 아니었다. 사귄다고? 대표님이랑? 그게…, 되는 일이야?

    “대체 어쩌다….”

    “어쩌다? 어째 뉘앙스가 불손하다?”

    “아니, 너무 신기해서 그래요. 형이 고백했을 때 대표님은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거절하셨다면서. 그게 기껏해야 두 달 전인데…. 벌써 23일이나 됐다면 겨우 한 달 정도 있다가 상황이 완전히 바뀐 거잖아.”

    “남녀 문제는 원래 그런 거야. 별 진전이 없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한순간에 불이 붙고 그러는 거라고.”

    지원의 심상한 대꾸에 도겸은 기가 막힌 얼굴로 헛바람을 토해냈다.

    “허. 무슨 연애 도사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형 제대로 여자 사귀어 본 적도 없잖아요.”

    “너는 모든 지식을 직접 경험으로만 쌓냐? 이런 정보화 시대에?”

    하이고, 다 죽어가더니 살아나셨네. 이죽거리는 마음이 비죽 솟았지만, 도겸은 해수가 아니었기에 생각을 고스란히 꺼내놓는 우는 범하지 않았다.

    “그런데…. 대표님하고 만나면 대체 뭘 해요? 나는 대표님하고 눈도 잘 못 마주치겠던데. 그래도 사귄다고 말할 정도면 최소한의 스킨십은 한다는 얘기잖아. 설마 둘이 손도 잡아요?”

    지원은 그저 피식 웃고 말았지만, 도겸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무영당에서 얻었다. 그것도 굳이 알고 싶지 않았던 방식으로.

    “차 관장. 회의는 6시부터 하자고 하지 않았었나?”

    “서 감독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길이 많이 막히는 모양이네요.”

    “그래? 요즘 얼굴 보기 어렵던데, 많이 바쁜가 보네.”

    “네. 드라마 스케줄을 따라가기가 조금 벅찬 것처럼 보이긴 했습니다. 그래도 성실한 친구니까 양쪽 다 차질 없이 잘 해낼 겁니다.”

    안 그래도 약속 시간에 늦을까 봐 부랴부랴 달려와서 막 대문 안으로 뛰어들던 도겸은, 차마 정원을 가로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섰다. 도란도란 들려오는 음성의 방향으로 미루어 볼 때, 두 사람은 지금 주홍빛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핀 담벼락 앞에 앉아 있는 듯했다. 그림 같은 배경과 선남선녀라…. 상상만으로도 퍽 운치 있는 장면이긴 했다.

    하지만 도겸의 표정은 영 좋지 못했다. 어휴, 지원이 형 목소리 까는 것 좀 봐. 정말로 둘이 연애를 하기는 하는 모양인데…. 우리끼리 모일 때는 1분만 늦어도 있는 성질, 없는 성질 다 부리면서, 대표님 앞에서는 말도 참 조신하게 하시고. 평소에는 입에 칼날을 물고 사는 양반이 ‘성실한 친구’는 또 뭐야? 소름 끼치게. 무슨 도덕 교과서 읽어?

    “대표님. 다음 휴일에는 홋카이도나 블라디보스토크에 가려고 합니다. 요즘 늦더위가 기승이라 그런지 많이 지치신 것 같아서요.”

    “그러게. 올해는 유독 여름이 기네.”

    “몇 달 사이에 얼굴이 핼쑥해지셨습니다. 너무 속이 상하네요.”

    “여름에는 원래 그래. 차 관장은 여름에 나를 본 게 처음이라 몰랐겠지만.”

    “그러니까 한 사흘 정도 좀 시원한 곳에서 쉬었다 오시죠. 가서 꽃구경도 하고, 게도 먹고요.”

    “게…, 좋아해.”

    “압니다.”

    뭐야, 둘이 여행도 다녀? 아니. 진도가 왜 이렇게 빨라? 손이나 제대로 잡는 건가 싶었는데, 괜한 걱정을 했잖아? 아무튼 지원이 형은 진짜 대단한 사람이구나. 무려 천 년 동안이나 비어 있던 중천주의 애인 자리를 차지하다니. 진심으로 감탄한 도겸이 조용히 혀를 내둘렀다.

    그런데 나 언제까지 여기에 이러고 서 있어야 돼? 덥기도 하고 이제 슬슬 다리도 아픈데. 그렇다고 눈치 없이 대화 중간에 끼어들 수도 없고. 아, 나는 이 커플의 연애사에 정말 아무런 관심도 없는데, 왜 매번 이렇게 속속들이 알게 되는 거지? 가온과 지원이 두 군데의 여행지 후보를 놓고 진지하게 의논하는 걸 조금 지루한 얼굴로 듣고 있던 도겸이 잠깐 말소리가 끊어진 틈을 놓치지 않고 잽싸게 튀어 나갔다.

    “죄송합니다. 좀 늦었습니…, 다.”

    정말이지 두 사람이 거기에서 입을 맞추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순간 너무 놀라서 석상처럼 굳어버린 도겸은, 재빨리 가온을 가리고 선 지원이 살벌하게 눈을 번뜩이며 입 모양으로만 험악한 욕설을 퍼붓는 걸 고스란히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서 감독. 나 대표님하고 할 얘기가 조금 남았는데, 먼저 사랑채에 들어가 있겠어?”

    그 와중에도 목소리만큼은 나긋나긋한 게 더 무서웠다. 좋다 싫다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저 기라면 기어야 하는 순간이었다.

    “…네.”

    도겸은 너무나도 당황스러운 나머지 오른손과 오른발이 동시에 나갔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더 이상은 아무것도 보고 싶지도 않고 듣고 싶지도 않은데, 귀를 틀어막을 수가 없다는 게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거 좀…, 민망하네.”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서 감독은 이 일에 대해서는 입도 뻥끗하지 않을 거고, 행여나 대표님을 눈곱만큼이라도 불편하게 한다면 오늘 일을 아예 기억에서 지우도록 만들겠습니다.”

    “어떻게?”

    “어떻게든요. 저를 믿으세요.”

    차지원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도겸은 온몸에 오한이 났다. 그저 저 한 사람 입을 다물면 그만이니, 그가 어떤 방법을 사용할지에 대해서는 굳이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대문에서 서른 걸음이면 갈 수 있는 사랑채가, 오늘따라 멀고도 멀었다. 가는 내내 뒤통수가 몹시도 따끔거렸는데, 그게 기분 탓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도겸은 조금 억울해졌다. 물론 누구에게도 하소연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서 감독을 오라버니라고 불렀다고?”

    “네. 배우 이로아 씨한테는 ‘수연 언니’라는 호칭을 썼습니다.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망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굳이 찾아내서 꿈속까지 침입한 것을 보면요.”

    “흐음.”

    “정말로 제 전생과 관련이 있는 망자일까요?”

    “글쎄.”

    잠시 도겸을 빤히 바라보던 가온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가온이 간혹 누군가의 전생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 상대의 전생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과거에 알았던 이를 환생한 이후에 다시 알아보는 것에 불과하니, 굳이 따지자면 그건 기억력의 영역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전에 한 번 봤다고 해서 모두를 다 기억할 수는 없다. 현재 하루에 중천을 거쳐 가는 망자는 15만 명이 넘고, 그중 가온의 기억에 남는 건 아주 강렬한 인상을 남긴 극소수뿐이다.

    더구나 인간이 망자가 되기 전에는 그가 몇 번의 전생을 거쳤는지도 알 수 없다. 지원과 도겸을 처음 봤을 때 이전의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던 것을 보면, 아마도 이들은 조용히 중천에 왔었다가 판정에 고분고분 승복하고 깔끔하게 제 갈 길을 간 평범한 망자였을 것이다. 내가 24시간 중천에 붙어 있는 건 아니니, 내가 없는 사이에 들렀다 간 것일 수도 있고.

    “서 감독의 전생은 내가 알 길이 없고…. 그 이로아라는 배우는 사진이 있나?”

    “네. 아무래도 연예계 생활을 좀 했으니, 사진도 있고 동영상도 있습니다.”

    “그러면 움직이는 걸로 한번 볼까?”

    방송에서는 로아를 클로즈업해서 잡아주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 도겸은 로아의 개인 팬이 찍었던 직캠 영상 하나를 재생시켰다. 화질이 썩 훌륭하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얼굴을 알아볼 만큼은 되었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집중해서 영상을 보던 가온이 어느 순간 눈썹을 크게 치켜떴다. 눈에 띄는 미인이었지만, 아마 그것뿐이었다면 기억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얼굴에 큰 상처가 있었어.”

    “얼굴에요?”

    “눈 바로 밑에서부터 턱까지 길게 칼자국이 났었지. 여인의 얼굴에 그렇게 큰 상처가 나는 일은 거의 없는데 말이야. 아무하고도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는데, 용케 이런 일을 하고 있군.”

    골똘히 생각에 잠긴 가온이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도겸의 설명을 찬찬히 되짚었다. 연못 가득 핀 하얀 연꽃…, 열 살배기 어린 소녀…, 수연…, 란….

    “그 세트장이라는 데를 한번 봐야겠어.”

    촬영감독과 머리를 맞대고 카메라 위치를 조정하고 있던 이서가 조연출의 급작스러운 보고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가 온다고?”

    “제니스 컴퍼니의 대표요.”

    “왜?”

    “그건 저도 모르죠. 어쨌든 세트장을 보여줄 수 있겠냐고 제작사를 통해서 공식적인 요청이 왔는데, 광고주님이시라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꼭 촬영 현장을 보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세트장만 한 바퀴 둘러보고 싶대요.”

    화장품 회사 대표가 드라마 세트장을 왜 봐? 이거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 아니야? 그간의 숱한 경험을 통해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낀 이서가 짧게 혀를 찼다.

    “거기 대표 여자 아니었어? 혹시 최선우 보러 오는 거 아니야?”

    “배우랑 자리 만들라는 얘기는 없었는데…. 그런 종류일까요?”

    대번에 심각해진 조연출을 보며 이서는 못내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제법 고상하게 나오시네? 아예 처음부터 노골적인 요구를 한다면 차라리 거절하기가 쉽지만, 광고주가 촬영장 구경을 하면서 배우랑 차나 한잔하고 싶다고 나오면 매몰차게 자르기 어렵다. 더구나 제니스 컴퍼니는 드라마 앞뒤로 두 타임이나 광고를 넣어 제작비 확보에 가장 크게 이바지한 귀하신 몸이다. 자칫 심기를 거슬러서 광고를 빼겠다고 나오면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지는 건 이쪽이다.

    “젠장. 재벌이면 급에 맞게 자기들끼리 놀 것이지, 왜 이렇게 딴따라들한테 관심을 갖나 몰라. 내가 진짜 더러워서.”

    있는 대로 성질을 낸 이서가 제 머리카락을 마구 쥐어뜯었다. 최선우한테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드라마를 위해서 대기업 대표님하고 차 한 잔만 마셔달라고 하면, 그 불같은 성격에 펄펄 뛰면서 다 뒤집어엎을 텐데. 솔직히 나도 그 꼴은 별로 보고 싶지 않고….

    그러나 이서가 멀쩡한 머리카락을 한 움큼씩 뽑아내며 이틀 밤낮을 고민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제니스 컴퍼니의 대표는 순수하게 세트장 그 자체에만 관심을 보였다. 더구나 그녀의 옆에서 세 발자국 이상 떨어지지 않았던 젊은 수행원은, 어지간한 미모에는 전혀 동요가 없는 스태프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을 정도로 대단한 미남이었다. 이목구비만 놓고 보면 최선우보다 더 훌륭했다. 그럼…, 진짜로 최선우를 보러 온 게 아닌가?

    “연못이 있던 자리가 맞네.”

    “그렇습니까?”

    “응. 얘기만 들었을 때는 긴가민가했었는데, 저 산세를 보니까 확실히 기억이 나. 대강의 시기와 관련자 두 명의 이름을 알고 있으니 이제부터는 문헌을 조사해볼 필요가 있겠군. 대강이라도 정황을 알아야 대처를 하지.”

    “제가 알아볼까요?”

    “차 관장이 뭐 하러 그런 수고를 해? 보안실에 문헌 조사 담당자가 있어. 여행을 갔다 오면 보고서가 올라와 있을 거야.”

    정확하게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자신이 지레짐작했던 내용과는 거리가 있는 듯했다. 산세 어쩌고 하는 걸 보니 그냥 단순히 풍수지리에 관심이 많은 건가? 에이, 모르겠다. 어쨌든 배우들한테 집적거리지만 않으면 되지, 뭐. 아직 의심의 눈초리를 완전히 거두지 못한 이서가 애써 시선을 돌리려는 찰나였다.

    “저 친구가 이로아?”

    “네, 대표님.”

    “흐음. 낯빛이 좋아졌네. 아주 곱고 예뻐.”

    뭐야. 최선우가 아니라, 이로아를 노리는 거야? 그건 더 큰 문제지! 흐뭇한 얼굴을 한 가온이 로아를 바라보는 동안, 마음이 심히 복잡해진 이서는 신경질적으로 어금니를 딱딱 부딪치며 세찬 콧바람을 끊임없이 뿜어냈다.

    “너 얼굴이 아주 좋아 보인다?”

    동하의 말에 어깨를 으쓱한 지원이 멋쩍은 기색 하나 없이 여유롭게 웃었다. 친구의 말투가 전에 없이 뾰족하다는 걸 뻔히 알았지만, 이미 세상을 얻은 남자는 마음에 도량이 넘쳐서 그 정도의 가시는 얼마든지 모르는 척해줄 수 있었다.

    “그래? 연애를 시작해서 그런가?”

    “만나는 거 아니라 너 혼자 좋아하는 거라더니?”

    “알고 보니까 아니더라고. 아주 귀여운 고백을 받았지.”

    설마 라면을 먹자고 할 줄은 정말 몰랐었는데.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어린애처럼 자랑하는 지원을 보며 동하가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얘가 원래 이렇게 대책 없는 놈이었나. 아닌데, 똑똑했었는데. 아무리 여자한테 홀랑 넘어갔어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 넋이 빠졌어?

    “차지원. 너, 그 여자에 대해서 얼마나 알아?”

    “그게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야. 태어나고 자란 곳은 어딘지, 학교는 어딜 나왔는지,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이런 최소한의 정보는 파악하고 나서 사귀는 거냐고.”

    “대강은.”

    “대강? 무슨 그런 밑도 끝도 없는 대답이 있어? 야, 나는 내 평생에 그렇게 깨끗한 프로필은 처음 봤어. 북한 공작원도 그것보다는 정보가 많을 거라고.”

    동하의 날 선 목소리에도 지원은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평소에는 지원이 조금만 더 신경을 누그러뜨리면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왔었는데, 막상 이런 속도 없는 미소를 보고 있으려니 동하는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웃어?”

    “울 일은 아니잖아. 걱정할 거 없어. 충분히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

    “그러니까 그 사정이라는 게 대체 뭐냐고. 너 진짜 간첩 만나냐?”

    “이 새끼가 사람을 뭘로 보고. 대표님이 아주 중요한 임무를 하나 맡으신 게 있는데…. 우리의 십 년 우정을 걸고, 공익을 위하는 일이라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어. 미안하지만 더는 말 못 해. 그러니까 묻지 마라.”

    지원은 여전히 웃는 낯이었지만,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이럴 때는 그 어떤 회유와 협박도 소용이 없다. 짜증스럽게 양손을 들어 올린 동하는 일단 한걸음 물러났다. 그렇다고 아예 포기한 건 아니었다.

    “좋아. 그럼 나한테 정식으로 소개라도 시켜. 어떤 사람인지 내 눈으로 직접 보기라도 해야겠어. 이번 주말 어때? 아니, 나는 당장 내일이라도 시간 낼 수 있어.”

    “대기업 상무가 한가하다? 그런데 우리는 내일부터 바빠. 여행 갈 거야.”

    “그 여자랑 둘이? 어디로?”

    “홋카이도. 그런데 너 그 호칭 좀 고쳐라. 우리보다 한참 연상이셔. 말끝마다 그 여자, 그 여자. 듣기 거북해. 정 대표님 소리 안 나오면 형수님이라고 하든지.”

    지원의 까칠한 타박에 참고 참았던 동하가 결국 폭발했다. 이게 진짜 여자한테 눈이 멀어서 뵈는 게 없나. 누가 형이야? 내가 너보다 생일 두 달이나 빠르거든?

    “그게 무슨 개똥같은 소리야? 네 애인이면 나한테는 무조건 제수씨지!”

    “알았어. 너한테 여자 생기면 내가 형수님이라고 할 테니까 넌 그럼 대표님이라고 불러. 깍듯하게 굴지 않으면 소개고 뭐고 없어.”

    이 새끼 완전히 미쳤구만. 기가 막혔던 동하는 할 말을 잃은 채 그저 헛바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뉴스 속보입니다. 방금 전 3시 15분경, 강남구의 한 빌딩 앞을 지나던 젊은 남성이 돌연 흉기를 꺼내 들고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무차별하게 휘두르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가장 먼저 흉기에 찔린 30대 직장인 이 모씨는 현장에서 즉사하였고, 현재까지 여덟 명의 시민들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으며….]

    들뜬 마음으로 막 인천 공항에 도착한 가온과 지원은, TV 화면 속에 등장한 익숙한 빌딩 배경을 보고는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처음 눈길을 끈 것은 제니스 본사 건물이었지만, 눈이 예리한 두 사람은 곧 화면 속에서 대단히 흉악한 무언가를 발견했다. 거의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범인의 뒤에,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흉측한 얼굴이 허연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봤어?”

    “네. 망자가 조종하고 있네요.”

    “돌아가지.”

    도착한 지 5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공항을 나선 두 사람이 급하게 서울로 돌아가는 중에도 속보는 계속해서 쏟아졌다.

    [평일 대낮, 강남 한복판에서 발생한 묻지 마 살인사건 관련입니다. 20여 분 동안 난동을 부리며 총 열네 명의 사상자를 낸 범인이 즉각 출동한 경찰에게 체포되었지만, 안타깝게도 병원으로 급히 이송 중이던 부상자 한 명이 추가로 사망하였습니다. 여전히 생명이 위독한 상태인 중상자들은….]

    [범인의 신원이나 범행 동기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체포 당시 범인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친 것으로 알려져, 사회에 불만을 품고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경찰에 긴급 체포되어 이송 중이던 범인의 신원이 27세 주영석으로 밝혀진 가운데, 급작스러운 흉통을 호소하던 주 씨가 각혈을 하며 의식을 잃어 인근 D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심각한 얼굴로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가온이 짧게 지시했다.

    “동명병원으로.”

    “네, 알겠습니다.”

    “보안실장한테 연락 넣어.”

    “연결되었습니다.”

    “권 실장, 나야. 지금 동명병원으로 가는 중이야. 아마 출입이 통제되었을 테니까 차 관장 차량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조치하고, 서울에 거주하는 가이드들한테 이 시간 이후로 따로 지시가 있을 때까지 에스코트 중지하고 대기하라고 해. 중천에 보안 요원 보강하고.”

    통화를 마친 가온이 불현듯 몹시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아, 거기에 가이드가 한 명 있는데.”

    “동명병원에요?”

    “응. 식물인간이 된 딸을 돌보는…. 이름이…. 아, 그래. 임소화.”

    난데없이 등장한 익숙한 이름에 지원의 눈이 조금 커졌다.

    “임소화 선생님의 딸이 지금 동명병원에 있습니까?”

    “응. 내가 지난번에 데려다준 아이가 바로 그 아이야. 그런데 왜?”

    “이상해서요. 제가 봄에 봤을 때는 시립 세강병원에 입원 중이었습니다. 사실 그때도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굉장히 무리하는 걸로 보였는데…. 어지간한 수입으로는 동명병원의 입원비를 감당할 수 없을 텐데요. 행여 사채 같은 걸 쓴 건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지원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가온이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가온도 그때 소화를 보고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아픈 아이를 돌보는 어미가 너무 차려입었다고 생각했었지.

    “제대로 알아볼 필요가 있겠군.”

    하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건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구름처럼 몰려든 취재진을 피해 장례식장을 통해 간신히 병원 내부로 들어간 가온과 지원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얼굴을 가진 이가 중환자실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걸 보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주영석.”

    “누구세요? 제, 제가 보이세요? 제가 지금 죽었나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망자가 한달음에 달려오자, 가온은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그대의 육신이 악령의 기운을 감당하지 못하고 둘 다 밀어냈어.”

    “아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저기요, 지금 사람들이 떠드는 저 살인사건의 범인이 진짜 저예요?”

    “본인은 아니라고 생각하나?”

    “저, 저는…. 모르겠어요. 전혀 기억이 없어요. 회사에서 외근을 나오다가 바닥에 오만 원짜리 한 장이 떨어져 있길래 주웠는데, 그러고 나서 정신을 차려 보니까 여기에요. 그런데 뉴스에 제 얼굴이 자꾸 나오고….”

    “오만 원?”

    “네. 신기하게도 빳빳한 신권 한 장이 떨어져 있었거든요. 그걸 줍는데 누가 ‘사용료를 치른 거다’그러더라고요. 그리고는 캄캄해졌어요.”

    주영석의 말을 경청하던 가온의 표정이 서늘하게 변했다. 이런 경우가 없는 것을 보았나. 사람의 목숨 값으로 고작 오만 원을 지불하고 이런 흉악한 짓을 저지르다니. 물론 값을 비싸게 치른다 해도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아주 오랜만에 극렬히 분노한 가온이 갈팡질팡하고 있는 생령을 향해 단호하게 명령을 내렸다.

    “지금 즉시 육신의 곁으로 돌아가도록 해라. 또다시 다른 영혼이 스며들면 그때는 영영 몸을 찾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던 가온이 매서운 눈빛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옥상에 있군. 차 관장은 일단 여기에 있어.”

    “혼자 가시려고요?”

    “고작 20분 만에 사람을 열네 명이나 해친 악령이야. 어떻게 나올지 알 수가 없는 데다, 차 관장이 옆에 있으면 내 정신이 흐트러져.”

    길게 한숨을 내쉰 지원은 몹시 암담한 표정을 지었지만, 혼자서 옥상으로 올라가는 가온을 만류하지는 못했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옥상으로 나가는 문을 연 가온은 온몸이 뒤틀린 악령을 보고는 서릿발 같은 목소리를 냈다.

    “망자가 조용히 영면에 들지 않고 인간계에 해악을 끼치는 연유가 무엇이냐.”

    검을 소환한 가온이 막 질문을 던진 순간, 악령의 주변에 무시무시한 불길이 치솟았다. 악령이 화면에 얼굴을 비친 건 아주 잠깐이었는데, 그걸 귀신같이 확인한 지원이 지금 어딘가에서 초상화를 그린 것이다. 하지만 금세 사그라진 불길은 망자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했다.

    “…!”

    이럴 수가 있나. 차 관장의 수가 전혀 통하지 않다니. 눈썹을 크게 꿈틀거리며 망자를 살피던 가온이 조용히 경악했다. 눈앞에 있는 악령은 사후에 이미 한 번 심판을 받은 자로, 중천으로 보내야 할 자가 아니었다. 한순간에 악령의 앞으로 다가간 가온이 그의 목에 바짝 검을 겨눴다.

    “어디서 왔느냐.”

    화장실 변기에 재가 된 종이를 흘려보내고 밖으로 나오던 지원이 익숙한 얼굴과 딱 마주쳤다. 이런….

    “임 선생님.”

    “어? 차 관장님.”

    명품으로 차려입은 소화를 빠르게 훑어 내리던 지원의 시선이 구두에서 멈췄다. 아, 그러면 그때 일산에서 봤던 사람도 이분이 맞는 것 같은데. 지원의 눈꼬리가 살짝 가늘어졌다.

    “자주 뵙네요.”

    “그, 그런가요? 저는 봄에 한 번 뵙고 처음인 것 같은데.”

    “왜 두 달 전에 일산에도 가시지 않았습니까. 저는 멀리서 뒷모습만 보고도 한 번에 알아봤는데요.”

    순간 사색이 된 소화가 들고 있던 물병을 툭 떨어뜨렸다. 지원의 갸름하던 눈매가 대번에 날카로워졌다.

    “아….”

    “조심하셔야죠, 비싼 신발인데. 그 가죽은 젖으면 못 쓰게 됩니다.”

    얼른 물병을 주워 소화에게 건넨 지원이 생긋 미소를 지었다.

    “따님은 좀 차도가 있습니까?”

    “아, 네…. 덕분에.”

    “다행이네요.”

    자꾸만 눈을 피하는 소화는 지원과의 만남을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대체 왜? 이분 같은 경우는 나를 만나면 반가워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내가 보름치 병원비를 양보해줬었는데 말이지. 여기 기준으로는 나흘 치나 될까 싶긴 하지만.

    사람의 형편이 갑자기 나아지는 건 드물긴 하지만 아예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다. 복권에 당첨될 수도 있고, 묻어 두었던 주식이 상한가를 칠 수도 있고, 상추나 깻잎을 키우던 텃밭에서 금덩어리를 캘 수도 있다. 하지만 부유해진 것을 남들에게 알리기 꺼려한다는 것은 방법상의 문제가 있었다는 뜻이다. 그게 대체 뭘까. 왜 내 눈치를 볼까.

    “임 선생님, 소식 들으셨어요?”

    “무, 무슨….”

    “오늘 본사 앞에서 벌어졌던 살인사건이 악령의 짓이었습니다. 그래서 대표님께서 혹여 가이드들이 휘말릴까 봐 업무 중지 명령을 내리셨는데, 못 들으셨나 봐요.”

    “병원에 있을 땐 휴대폰을 진동으로 해두고 있어서…. 그럼 저는 이만….”

    소화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던 지원은 황급히 달아나려는 그녀의 앞을 자연스럽게 가로막았다.

    “잠시만요, 임 선생님. 제가 이 병원은 처음이라…. 여기 매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대표님이 지금 악령을 처리하고 계시니 물이라도 한 병 준비해두고 싶은데요.”

    “대, 대표님도 지금 이 병원에 계세요?”

    “네.”

    이미 눈에 띄게 불안해하고 있던 소화가 갑자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안절부절못했다. 바로 그때 나직하면서도 울림이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 관장.”

    반색하며 돌아서던 지원이 가온의 몰골을 확인하고는 대번에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가온의 소매가 마치 사나운 짐승이 물어뜯은 것처럼 너덜너덜해졌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린 피는 빗방울처럼 쉴 새 없이 바닥으로 똑똑 떨어졌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가온이 걸어오며 남긴 흔적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지원의 눈에 화르륵 불이 붙었다.

    “…대표님.”

    “그런 얼굴 할 거 없어. 내가 잠깐 부주의해서…. 큰 상처는 아니야. 그보다 망자를 놓친 것이 더 큰 문제고. 그 흉악한 것이 돌아다니면서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하시고 일단 치료부터 받으십시오.”

    “안 그래도 지금 병원장한테 가는 중이야. 차 관장 걱정할까 봐 이쪽으로 먼저 온 거고. 그런데….”

    팔 한쪽이 거의 넝마가 된 상태에서도 그저 침착한 표정이던 가온이 지원의 뒤쪽에 서 있던 소화를 발견하고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떠는 소화를 보며, 가온의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

    “임 선생. 또 보네?”

    “네. 네, 대표님.”

    “나한테 뭐 할 말이 있나?”

    “네? 아, 아니요…. 그런 거 없습니다.”

    흐음. 몹시 생각이 많은 얼굴로 짧게 침음하던 가온이 이번엔 조금 다르게 물었다.

    “내게는 그리 보이지 않는데…. 혹시 이 사태에 대해 아는 바가 있어?”

    “제, 제가 어떻게 그런 것을….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래?”

    태연하게 대꾸한 가온이 애써 숨을 고르고 있는 지원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나 소화를 향한 의미심장한 시선은 아직 거두지 않은 상태였다.

    “차 관장. 방금 전 차 관장이 취한 조치가 망자에게 전혀 통하지 않았어.”

    “망자가 중천으로 가지 않았다는 말씀이십니까?”

    “애초에 중천으로 보낼 수 없는 상태였지. 이미 중천에서 한 번 판정을 받아 명계로 갔던 망자였거든. 아마도 형기가 한참 남았을 텐데…. 그랬으니 이판사판으로 탈주를 감행한 것이겠지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럴 수가 없는 건데…. 이렇게 눈앞에 나타났으니 문제지.”

    여전히 소화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가온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명계에서 종종 탈주범이 발생한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관리가 소홀한 잡령들의 경우다. 아까 보았던 망자처럼 중죄를 지은 악령은 명계에서도 특별히 신경을 써서 관리하고 있고, 도주하다 붙잡히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형기가 두 배로 늘어나기 때문에 섣불리 탈출을 시도하는 망자는 거의 없다.

    게다가 명계에서 혹독한 벌을 받고 있는 망자들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적용되는 인과응보의 정의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이렇게까지 무모한 짓을 저지르지 않는다. 적어도 가온이 중천주 역할을 하는 동안에는 명계에서 탈주한 망자가 살아 있는 인간을 죽이기까지 한 적은 없었다. 기껏 어렵게 도망쳐 놓고, 은밀한 곳에 죽은 듯이 숨어 있어도 모자랄 판국에 왜 그런 소동을 벌였을까.

    “일단 염마왕하고 얘기를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그전에…, 임 선생.”

    가온의 시선을 피해 불안스레 땅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던 소화가 불현듯 저를 호명하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망자가 명계에서 탈주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소화는 제 심장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묻지. 내게 진정 할 말이 없어?”

    “…네.”

    “어차피 나중에 내가 다 알게 될 텐데? 중천에서 나를 다시 만나도 지금과 똑같이 대답할 수 있나?”

    뱃속까지 들여다보는 것 같은 날카로운 눈빛에 소화의 손끝이 덜덜 떨렸다. 나는 몰라, 내가 한 짓이 아니야. 하지만…, 이 사태에 내 책임이 전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나? 갈팡질팡하는 제 마음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소화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을 때였다.

    “엄마.”

    어린아이의 연약한 부름에 세 명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소화가 목발을 짚고 있는 아이에게 바로 달려갔고, 아이의 상태를 찬찬히 살펴보던 가온이 순간 입을 꾹 다문 채로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생령의 모습으로 만났을 때보다 훨씬 병약해 보이기는 했지만, 아이는 현재 분명하게 살아 있었다. 어쨌든 다행한 일이었다.

    “어? 그때 나 데려다주셨던 아줌마다!”

    “민서…, 오랜만이네.”

    “안녕하세요.”

    “…그래. 이렇게 건강해진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구나.”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줌마 팔에서 피 나요.”

    아이의 천진난만한 눈망울을 빤히 바라보던 가온이 설핏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살짝 긁힌 거야. 그럼 엄마 말씀 잘 듣고 몸조리 잘하렴.”

    차마 아이의 앞에서 그 어미를 추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아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가온은 그대로 돌아섰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가온과 바로 그녀의 뒤를 따르는 지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이던 소화는 끝내 입을 열지 못한 채 고개를 푹 떨궜다.

    - 너는 내게 재물을 받은 것이 아니라 네 아이의 목숨을 받은 것이니, 약속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주었던 것을 즉시 거두어 갈 것이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나중에 어떤 벌을 받더라도…, 지금은 제 아이의 목숨이 더 중해서 어쩔 수가 없어요.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엄마…, 왜 울어? 슬픈 일이라도 생겼어?”

    “엄마 안 울어. 눈에 먼지가 들어갔나 봐. 이렇게 민서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엄마가 왜 울어?”

    소화는 눈꼬리에 커다란 눈물방울을 매단 채로 입꼬리를 크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아직 작고 연약한 아이를 품에 꼭 안았다. 참으로 보드랍고…, 따뜻했다.

    “살짝 따끔하실 겁니다.”

    “응.”

    벌겋게 속살이 드러난 상처 위에 소독약을 들이부어도 가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지만, 한동안 서류 더미에만 파묻혀 있던 조 원장은 절로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참지 못했다. 아이고, 세상에. 어떤 흉악한 것이 이 고운 살결을 이리도 야무지게 할퀴어 놨을까. 그러나 지금 그보다 더 심기가 불편한 사람은, 가온의 등 뒤에서 조 원장이 하는 양을 그저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는 지원이었다.

    아무리 봐도 손이 너무 어줍어. 현장을 떠난 지 한참 되셨나…. 아니, 손끝이 야물지 않은 걸 보니 아예 이쪽 전문가가 아닌 것 같은데. 원장실 내부를 빠르게 둘러보던 지원이 조 원장의 전문의 자격증을 발견하고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마취과…. 애초에 서전도 아니네? 이럴 바엔 현역한테 보이는 게 낫지 않았을까? 뭐…, 저렇게 짐승이 물어뜯어 놓은 것 같은 상처를 아무한테나 보일 수 없긴 하지만….

    “대표님, 어쩌다 망자한테 당하셨습니까?”

    조 원장의 안타까운 목소리에, 가온은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어디에서 왔느냐는 질문에 순순히 대답을 할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다짜고짜 손톱을 세울 줄은 정말 몰랐다.

    “방심했어. 내 실수지. 막 중천에 온 천둥벌거숭이도 아니고, 내가 중천주라는 걸 알고 있는 자가 설마 나한테 그렇게 막무가내로 덤빌까 했거든.”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잡아야지.”

    간단하게 대꾸한 가온은 순간 지원이 크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를 듣고는 힐끔 고개를 돌려 그의 표정을 살폈다. 아까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지원은 제 눈치를 보는 가온을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나직한 한숨을 토해냈다.

    “잠시…, 전화 한 통만 하고 오겠습니다.”

    조 원장은 밖으로 나가는 지원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는 가온을 보고는 눈이 커다래졌다. 이 분위기 뭐야? 그저 능력 있는 상급 가이드라서 데리고 다니시는 줄 알았더니, 그게 다가 아닌 모양인데?

    “요즘 상급들은 다 인물을 보고 뽑나 봅니다.”

    “하하, 그러게. 다들 한 인물 하지.”

    “처음에 서도겸이가 들어왔을 때도 어떻게 저런 인물로 가이드를 하나 싶었었는데, 한술 더 뜨는 친구가 있네요.”

    지원의 미모를 칭찬하는 말에 가온의 눈매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이런 얼굴도…, 할 줄 아셨나. 조 원장은 이제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오래전 어느 날을 떠올리며 새삼 감회에 젖었다. 가온을 처음 봤던 이십 대 청년 시절, 그녀의 고운 얼굴에 마음이 설레서 밤잠을 이루지 못하던 날이 있었다. 하지만 중천주에게 남자로 다가갈 생각 같은 건 감히 해본 적도 없었다.

    확실히 요즘 젊은이들은 패기가 있어.

    “저 친구는 대표님이 다치신 게 영 못마땅한 모양입니다.”

    “아아…. 다정다감한 성품이라.”

    글쎄, 그건 아닌 듯하지만. 우리 대표님, 속이 훤히 보이는 망자를 주로 취급하셔서 그런지 은근히 사람 볼 줄 모르시네. 속으로 가만히 혀를 차던 조 원장은, 냉랭한 얼굴을 한 지원이 다시 들어오자 왠지 모를 긴장감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하고 있는 스스로가 어이가 없고 자존심이 상했지만, 영력에 민감한 전직 가이드는 저보다 확연히 강한 상대 앞에서는 본능적으로 목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본사 건물 옥상에 올라선 가온이 발밑으로 보이는 서울 시내를 천천히 둘러보더니 오른팔을 옆으로 뻗으며 검을 만들어냈다. 동시에 구름 한 점 없이 맑던 하늘이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파르라니 날이 선 검을 휘휘 돌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시커먼 구름이 서울 상공을 완전히 뒤덮었다.

    “명계에서 온 망자는 중천주의 소환에 응하라.”

    콰과과광! 준엄한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하늘을 정확하게 반으로 가르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벼락이 내리치더니 곧 엄청난 양의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말 그대로 물 폭탄처럼 퍼부어지는 굵은 빗줄기에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세차게 바닥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에 귀가 먹먹해질 지경이었다. 일대를 제멋대로 돌아다니던 영혼들은 행여 중천주의 노여움에 몸이 상할까 잔뜩 겁에 질린 채 으슥한 곳으로 숨어들었다.

    “이 쥐새끼가 어디에 숨었을까.”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가온이 검을 휘두르는 속도를 높이자, 묵직한 구름이 차츰 덩치를 키워나갔다. 서울 상공에서 수도권으로, 그러다 중부 지역 전체로…. 그렇게 반나절 동안 조금씩 범위를 넓힌 구름이 결국 한반도의 끝자락에 닿았을 때였다.

    “찾았다.”

    온통 비에 젖은 채로 한계까지 집중력을 올리고 있던 가온이 영기가 느껴지는 곳을 향해 팔을 뻗자 검 끝에서 마구 불꽃이 튀더니 곧 어디선가 신경을 긁어내리는 듯한 비명이 아련하게 들려왔다. 그렇게 또 한 시간 남짓이 흐르자 점점 커지던 비명소리가 어느덧 손에 잡힐 듯 가까워졌다. 그 엄청난 폭우 속에서도 구슬땀을 뻘뻘 흘리며 힘을 쏟아붓던 가온이 어느 순간 눈을 빛내며 검을 고쳐 쥐더니 무시무시한 기세로 허공을 갈랐다.

    “크아아악!”

    억지로 끌려 나와 바닥에 내팽개쳐진 악령이 온몸을 뒤틀며 몸부림을 쳤다. 처음에 봤을 때도 이미 흉악한 인상이었지만, 중천주의 공격을 몸으로 받아내느라 군데군데 살점이 녹아내려 몰골이 더욱 처참해진 상태였다. 고통스럽게 바닥을 나뒹구는 악령을 무감하게 내려다보던 가온이 저벅저벅 다가가 그의 목덜미를 거칠게 잡아챘다. 이미 반항할 기운도, 의지도 없어진 악령이 축 늘어진 채 애처로운 목소리를 냈다.

    “살려…, 줘. 잘못….”

    “늦었다. 선처를 바랐다면 적어도 사람을 해치지는 말았어야지.”

    악령이 뻗는 손을 냉정하게 뿌리친 가온이 그의 머리채를 질질 끌고 옥상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지원이 문 앞에 서 있는 걸 보고는 조금 놀란 눈을 했다.

    “차 관장, 계속 여기에 있었어?”

    “네.”

    짧게 대답한 지원이 혐오감이 가득한 눈빛으로 악령을 노려보더니 한 손으로 그의 목을 꽉 움켜쥐며 가온의 손에서 빼냈다. 가온이 이런 더러운 것을 만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불쾌했다. 끊임없이 신음하던 악령이 컥 숨이 막히는 소리를 내자, 지원의 기운이 더욱 살벌해졌다.

    닥쳐. 너 때문에 대표님은 4시간도 넘게 비를 맞으셨어. 네가 살아 있는 존재였다면, 내가 지금 당장 목을 꺾어서 죽였을 거야. 이미 죽었다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도록 해.

    “이자는 제가 중천에 데려다 놓겠습니다. 방으로 가셔서 옷을 갈아입고 오세요.”

    “괜찮겠어? 난동을 부릴 수도 있어.”

    “못 부리게 하겠습니다.”

    악령을 그대로 바닥에 패대기친 지원이 미리 준비해두었던 은사(銀絲)로 만든 밧줄로 악령을 꽁꽁 묶었다. 약간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던 가온은 지원이 야무지게 매듭까지 짓는 걸 보고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이런 건 어떻게 알고?”

    “보안 요원들에게 배웠습니다. 대표님 곁에 있다 보면 이런 일들이 종종 생길 텐데, 제 기운만으로 악령을 제압하는 건 어려워서요. 주목 막대기를 쓰는 법이나 운장주 같은 것들도 같이 배웠고요.”

    “기특하네.”

    가온의 진심 어린 칭찬에 묘한 표정을 짓던 지원이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고는 가온의 등을 가볍게 떠밀었다.

    “그러니까 얼른 가셔서 그 옷 좀 갈아입으세요. 기왕이면 짧게라도 따뜻한 물로 샤워도 하시고요. 얼른요.”

    중천주의 호출을 받자마자 한달음에 중천으로 달려온 모화영은, 은사로 몸이 칭칭 감긴 악령이 흡사 고깃덩어리처럼 바닥에 너부러져 있는 것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생전에 수많은 사람을 죽인 이들만 가두어 놓은 고륜지옥에서도 형기가 긴 편에 속하는 망자였다. 당연히 기운도 강하고 성질이 포악해서, 이렇게 만 하루도 넘기지 못하고 간단하게 포획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요즘은 검도 잘 쓰지 않는다기에 말년이 되어 게을러진 건가 싶었는데, 의외로 동작이 빠르네? 속으로 조용히 감탄한 모화영이 가온의 앞에 서서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천주님.”

    “불렀으니 왔을 테지.”

    생각보다 날카로운 반응에 모화영의 그린 듯한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어쭈, 화도 낼 줄 알아?

    “그런데 무슨 일로….”

    “요즘 포청은 일을 아예 안 하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저런 악령이 인계를 떠돌지?”

    가온의 턱짓에 고개를 돌리자, 완전히 운신의 자유를 잃은 악령이 저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절로 비소가 지어졌다. 저게 어디서 눈치도 없이. 몸이 망가진 상태에서 은사에 묶이기까지 했으니 심히 고통스러울 건 알겠다만, 지금 여기서 내게 아는 척을 하면 안 되지. 악령의 구조 요청을 가뿐하게 무시한 모화영이 퍽 송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천주님께 폐를 끼치게 되어 정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나한테 폐를 끼쳤다고 나무라는 게 아니야. 우포청장은 대체 무얼 하고 있길래 문 하나 제대로 단속을 못 하고 있는 것이며, 좌포청장은 명계에서 탈주한 이가 무려 7시간이나 인계에서 활개치고 다녔는데도 왜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는가, 그 연유를 묻는 것이다.”

    난감한 얼굴을 한 모화영이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고지식하기 이를 데가 없는 우포청장은 염마왕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 뻔했기에 수를 써서 재워두었고, 애초에 악령을 풀어준 이가 자신이었기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명계에 머물러 있던 거지만, 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는 없으니 그저 의미 없는 사과만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천주님.”

    “죄송하다…. 그걸로 끝인가? 내가 방금 설명을 요구한 것 같은데.”

    어린 것이 빡빡하기는. 마왕님의 취향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어. 이렇게 귀염성이라고는 털끝만큼도 뵈지 않는 뻣뻣한 여인한테 왜 그렇게까지 목을 매는 걸까. 나긋나긋하게 남자의 품에 안길 것 같지도 않고, 교태로운 말 한마디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싶은데. 짜증이 확 치밀었지만, 모화영은 끝까지 웃는 낯을 고수했다.

    “우포청장은 하필 오늘 몸이 좋지 않아 쉬고 있는 중이었고, 저는 마왕님의 급한 심부름을 수행하던 중이었습니다. 어쨌든 천주님께 누를 끼친 점, 진심으로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포청장 둘이 자리를 비우면, 포청에 일을 하는 이가 아무도 없나?”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더욱 주의하겠습니다.”

    모화영의 고분고분한 대꾸를 듣고 있던 가온이 가만히 눈살을 찌푸렸다. 이상하게 찜찜하고 불쾌한 기분이 드는데, 정확히 뭐 때문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제 직속 직원도 아닌 좌포청장을 계속 닦달하는 건 여러모로 모양새가 좋지 않다. 결국 가온은 그녀를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일단 알겠으니 저자를 데리고 명계로 돌아가게.”

    “네, 천주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향후 죄인들 관리에 각별히 신경 쓰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단단히 주의하겠습니다.”

    “그리고 염마왕께 내가 조만간 한번 보자고 했다고 전하게.”

    내내 머리를 조아리며 순순히 대답하던 모화영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곧 생긋 웃었다.

    “그리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갑니다, 천주님. 평안하십시오.”

    웃는 낯으로 돌아선 모화영이 악령에게 다가가며 표정을 살벌하게 바꿨다. 이런 무지렁이를 보았나. 기껏 고륜지옥을 벗어날 기회를 주었는데도, 이리 허무하게 날려 버리다니. 공연히 책을 잡힌 데다, 경계심만 높인 꼴이 되지 않았나.

    “좌포청장님! 제가….”

    “죄인을 입을 다물라. 아가리를 찢어 놓기 전에.”

    마지막 말은 악령의 귀에만 들리도록 나직하게 속삭인 모화영이 그의 목덜미를 움켜쥐고는 재빨리 명계수문으로 향했다. 행여 그가 쓸데없는 말을 지껄일까 봐 불안해서 한시도 발을 쉴 수가 없었다.

    - 죄송합니다, 마왕님. 제가 이번에 대상자를 잘못 선택한 것 같습니다. 수천 명을 잔혹하게 학살한 자라 그래도 꽤 강단이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맥없이 잡힐 줄은 몰랐습니다.

    - 자주 시도할 수 없는 일인데, 귀한 기회를 한 번 날렸군. 실망스러워. 하아…, 중천주께서는 뭐라 하시던가.

    - 천주님께 아주 호되게 꾸지람을 듣고 돌아왔습니다. 포청에서는 대체 무얼 하고 있었느냐고 크게 나무라셨습니다.

    - 그 입장에서는 그렇게 나올 만하지. 달리 전하라는 말은 없었나?

    - …없었습니다.

    몹시 심기가 불편해진 하율은 모화영과의 대화를 곱씹으며 고륜지옥 안으로 발을 들였다. 생전에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한 죄인들이 수감되는 고륜지옥은, 발목에 납덩어리를 매단 채 하루 종일 뜨겁게 달궈진 커다란 바퀴를 굴리며 맨발로 쉬지 않고 바늘밭을 달려야 하는 지옥이다. 끔찍한 비명소리와 처절한 울음소리가 한시도 끊이질 않는 곳이기도 하다.

    천천히 걸으며 현재 고륜지옥 내에서 가장 형기가 긴 죄인을 찾아낸 하율이 잠시 바퀴를 멈춰 세우고는 그를 밖으로 불러냈다. 고륜지옥에 들어오고 나서 65년 만에 처음으로 얻는 휴식에 죄인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했다.

    “내가 누군지 아는가.”

    “네, 마왕님.”

    “그대는 형기를 얼마나 받았나.”

    “…90만 년입니다.”

    평범한 이들이 살고 있는 평화로운 마을에 폭탄을 투하하여 수만 명을 사망하게 한 이였다. 전쟁 중도 아니었고, 달리 원한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무기의 성능을 시험할 곳이 필요했기에, 정부에 적당한 배상금을 쥐여 주면 뒷말이 나오지 않을 만한 부패한 빈국을 고른 거였다.

    폭발 당시에 6만 명이 사망했고, 후유증으로 3만 명이 더 죽었다. 그럼에도 호의호식하며 사는 동안에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었다. 후회는 명계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90만 년이라는 쉽게 가늠도 되지 않는 형기를 받았을 때는 사실 그다지 실감이 나질 않았었다. 그러다 끝도 없이 펼쳐진 바늘밭을 처음 봤을 때야 비로소 그게 얼마나 큰 죄였는지를 알았다.

    세상에 이보다 더 큰 고통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벌겋게 달궈진 바퀴를 미느라 손바닥이 다 짓물렀고, 바늘에 찢긴 발은 뼈가 허옇게 드러날 정도로 너덜거렸다. 하지만 몸을 추스를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너무 고통스럽다고 소리를 내어 울부짖으면, ‘네가 죽인 이들은 제 몸이 녹아내리는 걸 보면서 이보다 더 고통스럽게 죽어갔다’라는 싸늘한 일갈만 돌아올 뿐이었다.

    “이곳에서 나가고 싶나?”

    “…!”

    그저 암담하기만 한 상황 속에서 간신히 한줄기 빛을 발견한 망자가 용솟음치는 희열을 주체하지 못하고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 그럴 수가…, 있습니까?”

    “내가 원한다면 가능하지. 조건을 한번 들어보겠어?”

    “뭐든지 하겠습니다!”

    “간단해. 인계로 나가서 말썽을 부리다가 중천주의 환수검에 베이면 된다. 물론 중천주께서는 굉장히 공의롭고 너그러운 분이시라 너 같은 버러지들에게도 쉽게 칼을 대지 않으시거든? 그러니 아주 체계적이고 그럴싸한 작전이 필요해.”

    중천주의 검에 베여야 한다고? 희망으로 부풀었던 망자의 가슴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죽기 전에는 몰랐었지만, 중천주의 검에 베인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이제는 안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 환생의 기회가 몇 번이 남았든, 무조건 명계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무저갱에 영원히 갇히게 된다.

    대번에 기가 꺾인 망자를 오만하게 내려다보던 하율이 한층 달콤해진 목소리로 유혹했다.

    “물론 그리되면 무저갱에서 영원히 나가지는 못해. 하지만 그곳에는 이런 고통이 없지.”

    하율은 무저갱에서는 고통뿐만이 아니라 다른 대부분의 감각도 다 사라진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볼 수도,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곳에서 그저 공포감만 남은 채 영원을 살아야 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대의 처도 이곳에 있지?”

    마침 제 옆을 지나가는 아내를 바라보며 망자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렀다. 아내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 폭탄 개발에 참여했던 아내는 9천 년의 형을 받았다. 그보다 100배의 벌을 받은 이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차이였다. 애초에 그 폭탄이 없었다면 내가 그런 짓을 할 수도 없었을 텐데. 너무 억울하고 분했다.

    “그대가 임무에 성공하면 아내와 함께 무저갱으로 갈 수 있게 해주지. 혼자서는 너무 외로울 테니.”

    물론 함께 간다고 해서 외로움을 덜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아내의 얼굴을 볼 수도 없고, 아내와 대화를 나눌 수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하율의 속내를 읽어낼 길이 없었던 망자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각오를 다졌다. 그런 그와 다정하게 눈을 맞춘 하율의 얼굴에 몹시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화사하게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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