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8. 태양의 꽃 (9/18)

08. 태양의 꽃

끼잉…, 끼잉. 덫에 걸린 어린 짐승이 처량하게 신음하며 제 앞발을 덮친 무거운 쇳덩이를 발톱으로 박박 긁었다. 난생처음 겪는 끔찍한 고통과 공포에 부들부들 떨며 몸부림을 치기도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팔뚝만 한 작은 짐승이 멧돼지를 잡기 위해 설치된 육중한 덫을 자력으로 빠져나가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 아기씨, 가온 아기씨! 그쪽으로 가시면 안 돼요! 사방이 덫이라고요!

- 새끼가 우는 소리가 들렸어.

인간의 음성을 감지한 어린 짐승은, 기진맥진한 상태에서도 후들거리는 뒷다리를 곧추세우며 뾰족한 이를 드러냈다. 바스락. 곧이어 덫 주변에 뿌려 놓은 검불을 밟는 소리가 나더니 단정한 이목구비를 가진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가 알고 있던 인간의 외양과는 사뭇 다른 생김새였다.

어미의 뒤에 숨은 채 멀리서 훔쳐봤던 인간들은, 대체로 곰처럼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투박한 사내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제 눈앞에 나타난 이는 매끈하고 고운 얼굴에 덩치도 작았고, 기분을 좋게 만드는 향긋한 풀 내음 같은 것이 났다. 도살한 짐승의 흔적을 묻힌 채 퀴퀴한 땀 냄새를 풍기고 다니는 이들과는 확연히 다른 종류의 무언가인 듯했다.

- 아직 아기구나.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한숨 섞인 낮은 목소리가 어린 짐승의 긴장을 한결 누그러뜨렸다. 저도 모르게 눈가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이, 적어도 제게 해를 끼치는 존재는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 아니, 아기씨! 지금 뭘 하시는 거예요! 그러다 다치셔요!

- 거들지 않을 거면 조용히 하거라. 그 막대는 이리 주고.

- 아기씨!

- 조용히 하라는 데도. 어린 것이 놀라지 않니.

쇠틀에 굵은 막대기를 집어넣고 힘껏 비틀자 딱 붙은 것처럼 맞물려 있던 쇳덩이가 조금씩 틈을 벌렸다. 조심스럽게 어린 짐승의 앞발을 꺼낸 가온은, 기력이 다해 움직이지도 못하는 가여운 생명을 내려다보며 한참을 고민했다.

어미의 기척은 없는 것 같고…. 하긴 이 상태로 데리고 간들 살리지 못할 것을 뻔히 알 테니 쓸데없는 위험을 감수할 리가 없나. 그렇다고 한순간의 동정심으로 산짐승을 사람 사는 곳으로 데려가는 것이 마땅한가. 지금이야 이렇게 작고 약하지만, 곧 맹수가 될 것인데….

그래도 내 눈으로 본 이상, 이대로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지. 고민은 길었지만 결단을 내린 후의 행동은 신속했다.

- 아이고, 아기씨. 어쩌시려고요. 왜 그런 숭한 것을…. 옷 버리십니다.

- 그냥 지나쳤으면 모를까 목숨을 구했으니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니? 피 냄새가 이미 사방에 진동하고 있고 제 발로 달아날 수 있는 상태도 아니니, 이대로 두면 한 식경도 지나지 않아 산짐승의 먹이가 될 것이다.

그 또한 운명이었을지 모르나…. 거침없이 치맛자락을 북 찢어낸 가온이 어린 짐승의 상처를 조심스럽게 감싸고는 그대로 안아 올렸다.

- 세상에, 그 비싼 비단 치마를…. 아이고. 마님께서 기함하셔도 저는 모릅니다.

- 어머니는 잘했다, 하실 것이야.

- 이리 주셔요. 제가 안고 가겠습니다.

- 두어라. 촐랑거리다 떨어뜨릴까 걱정스럽다.

찢어진 치마에 여기저기 핏자국을 달고 나타난 아기씨 때문에 집안에 한바탕 소란이 일었지만, 올해 막 열여덟이 된 어린 주인은 그저 침착하기만 했다.

- 안영댁. 따뜻한 물과 깨끗한 수건, 그리고 우절 가루 낸 것을 가져오게. 육식하는 짐승에게 먹일 먹이도 준비하라 이르고.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어린 짐승은, 커다란 짐승이 될 때까지 4년간 그 집에서 살았다. 새끼가 성체가 된 이후로 가온은 짐승을 몇 번이나 산속에 풀어주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짐승은 기어이 집으로 돌아왔다. 여섯 번의 실랑이 끝에 결국 짐승을 야생으로 돌려보내길 포기한 가온은, 이미 오래전에 지어 놓고도 행여나 족쇄가 될까 싶어 단 한 번도 부르지 않았던 이름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 소랑. 네 이름은 이제부터 소랑이다. 흴 소(素)에 늑대 랑(狼). 달리 근사한 이름을 지을 재주는 없어서.

상천제가 가온을 찾아온 것은 소랑이 이름을 얻고 사흘째가 되던 날 밤이었다. 정확한 정황을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돌아가는 분위기가 왠지 심상치가 않았다. 기민하게 가온의 동향을 살피던 소랑은 막 집을 나서려는 가온의 앞을 가로막고 그녀의 치맛자락을 꽉 밟았다. 지금 헤어지면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 소랑. 나는 가야 해. 가서 세상을 좀 더 평안하게 만드는 일을 하기로 했어.

- 컹! 컹!

- 내가 없어도 다들 잘 돌봐줄 거야.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지내도록 해.

그저 무뚝뚝하기만 하던 가온이 전에 없이 다정한 말투로 달랬지만, 소랑은 요지부동이었다. 제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지는 소랑을 차마 거칠게 뿌리치지 못한 가온이 마냥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였다. 형태를 알 수 없는 기운으로만 존재하던 무언가가 돌연 까만 옷을 입은 여성의 모습으로 변하더니 묘한 표정으로 웃으며 소랑에게 사뿐사뿐 다가왔다.

- 이름이 소랑이라고? 대단히 영특해 보이는 아이구나. 드물게 기운도 훌륭하고…. 어때, 소랑. 가온과 함께 가고 싶니?

- 상천제님.

- 채이라고 불러.

가온에게 생긋 미소를 지어 보인 채이가 다시금 소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이번엔 대단히 진지한 목소리로 엄중하게 물었다.

-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아가야. 네가 지금 가온을 따라나서면 너는 네 일족의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놀라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게 네게 복이 될지, 독이 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지. 그래도 따라오겠니?

- 채이님.

- 님 자는 빼고.

- 채이. 저는 소랑을 데리고 가지 않을 것입니다.

- 잘 생각해야 해, 가온. 천 년은 길어. 그대에게도 마음 붙일 곳이 하나 정도는 필요할 거야.

아주 잠깐 떨리는 눈을 하던 가온은 그래도 끝까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가온의 치맛자락을 물고 늘어진 소랑 역시 쉽게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한참을 옥신각신하는 둘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채이는, 결국 눈을 질끈 감은 가온이 긴 한숨을 내쉬는 것을 보고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 네가 이겼구나, 아가야. 모쪼록 후회가 없길 바란다. 그럼 이제 다 같이 가볼까?

상천제의 말대로 중천주의 곁을 지키는 삶은 경이로웠다. 인간의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고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사고의 범위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수준으로 확장되었다. 단조롭고 한정적인 삶이 가끔은 답답할 때도 있었지만, 소랑은 가온의 옆에 남기로 결정한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정작 가온 본인이 후회로 인해 무수한 번민의 밤을 보낼 때도, 소랑은 그저 그 순간에 그녀의 곁을 지킬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라고 여겼다.

“이제 슬슬 그 자리를 저놈한테 내줘도 될까….”

별채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소랑이, 화사한 장미 꽃다발 하나를 들고 나타난 지원을 보고는 눈꼬리를 갸름하게 접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여우 같은 놈. 가온이 좋아할 만한 걸로 잘도 골라 가지고 왔네.

“데이트하기로 했나 봐?”

“아…, 덕분에.”

산뜻한 미소를 지은 지원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소랑은 왠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말로만 들었던 딸을 시집보내는 기분이 이런 건가? 마냥 뿌듯하기도 하고, 조금 서운하기도 하고…. 왠지 싱숭생숭해진 마음을 애써 한쪽으로 치워두며 소랑은 지원에게 진심을 다해 당부했다.

“잘 보살펴 줘. 천 년을 그저 고단하게만 살았던 사람이야.”

하지만 지원의 반응은 소랑이 예상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꼭 그렇게 하겠노라 다짐하며 저를 안심시켜주기를 기대했던 소랑은, 대번에 표정이 변한 지원이 입꼬리를 비틀며 코웃음을 치자 눈썹을 크게 꿈틀거렸다.

“나도 알아. 그러니까 네 여자를 나한테 맡기는 것처럼 얘기하지 마.”

“뭐야? 가온하고 나는 네가 감히 헤아릴 수도 없는 긴 세월을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왔어. 물론 가온이 내 ‘여자’는 아니지만, 아직은 네 여자도 아니라고.”

“대표님은 누구의 여자도 아니야. 당연히 내 것도 아니고. 확실히 오래 살아서 그런지 사상이 고루하네.”

“뭐가 어째? 이런 핏덩이가!”

발끈한 소랑이 빽 소리를 지른 순간, 별채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는 아직 졸음이 다 가시지 않은 얼굴을 한 가온이 하품을 하며 느릿하게 걸어 나왔다. 가온의 얼굴을 보자마자 마치 가면이라도 쓴 듯 그림 같은 미소를 장착하는 지원을 보며, 소랑은 그야말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간 가온의 주변에는 정말 별의별 인간들이 다 있었지만, 그중 겉과 속이 다르기로는 차지원이 최강이다.

“편히 주무셨습니까, 대표님.”

“응. 차 관장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나왔어. 그런데 우리 약속은 10시 아니었어?”

“10시 맞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그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아예 무영당에서 아침을 얻어먹고 대표님과 함께 출발하려고 일찍 왔습니다. 권 여사님도 언제든 오라고 하셨고요.”

“그래. 원래 누구 대접하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야.”

“그렇게 성품이 푸근하신 분이 대표님 가까이에 있어서 제 마음이 좋습니다.”

와우. 저 새끼 혓바닥 터는 것 좀 보게. 진심으로 감탄한 소랑이 고개를 절레절레 혀를 내둘렀다. 손이 있었다면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소랑…. 왜 이 시간에 안 자고 밖에 나와 있어?”

그제야 소랑을 발견한 가온이 의아한 듯 묻자, 가온을 빤히 쳐다보던 소랑이 짧게 혀를 찼다. 새벽에 가온의 처소에 별일이 없는지 둘러보다가 모처럼 잘 자고 있는 게 기특해서 날이 새는 줄도 그녀의 고른 숨소리를 듣고 있었던 거였는데, 지금 그런 말을 하면 아주 높은 확률로 지원에게 변태 취급을 당할 것 같았다.

“그냥 일찍 깼어. 다시 가서 잘 거야.”

“그래. 그럼 푹 쉬어.”

“당신은…, 즐거운 하루 보내.”

“응.”

수줍게 웃는 가온의 얼굴은 퍽 보기가 좋았다. 비록 그 얼굴을 만들어 낸 사람은 마음에 안 들었지만. 지원이 가온에게 꽃다발을 내미는 걸 몹시 떨떠름하게 바라보던 소랑은, 꽃다발을 받아든 가온의 눈꼬리가 확 휘는 것을 보고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 저렇게 웃을 줄도 알았었구나.

“곱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이건 꽃병에 꽂아 두어야 하나?”

“그러면 며칠 더 두고 보실 수 있겠죠. 제가 하겠습니다.”

바로 신발을 벗고 대청마루로 올라선 지원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별채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그간 어떤 남자도 발을 들인 적이 없던 가온만의 공간에 성큼 들어섰다.

“향이 꽤 짙은데, 침실에 두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 좋을 것 같아.”

“이 꽃이 시들기 전에 새 꽃을 사가지고 오겠습니다.”

“매번 그럴 건 없는데….”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말리지 마세요.”

탁 소리가 나게 닫히는 문을 멍하니 보고 있던 소랑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입을 떡 벌렸다. 작정하고 왔구나. 보기보다 훨씬 더 무서운 놈이었어. 소랑은 소름이 돋은 몸을 부르르 떨며 바로 얼마 전에 제 주둥이로 내뱉은 말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나는 조만간 두 사람이 아침에 운휴재에서 함께 나온다, 에 한 표.

내 입이 방정이었지. 이래서 사람이든, 짐승이든, 항상 입조심을 해야 돼.

“차 관장.”

“네, 대표님.”

“앞에 봐. 사고 나겠어. 전에 말했지? 나는 무슨 일이 생겨도 오늘 여기에서는 안 죽어. 하지만 차 관장은 다르지.”

“네. 노력하겠습니다.”

목소리에 웃음기가 가득 묻어나는 지원의 대답은, 여느 때와는 달리 그다지 믿음직스럽지가 않았다. ‘알겠습니다.’가 아니라 ‘노력하겠습니다.’인 것부터가 이미 틀렸다. 어이가 없어서 가만히 헛바람을 토해내던 가온이 안 봐도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저와 눈을 맞춘 지원이 눈꼬리를 크게 휘며 생긋 웃었다.

“또.”

“죄송합니다. 의지를 가지고 하는 행동이 아니라 통제가 안 되네요.”

“하아…. 이럴 거면 서울에 있지, 왜 이렇게 멀리 나왔어?”

“그러니까요. 후회하는 중입니다.”

“차 관장 오늘 좀 이상한 거 알고 있어? 여태 옆자리에 나 태우고 잘 다녔잖아.”

하지만 이 문제에 있어서는 지원도 항변할 말이 있었다. 그러니까 누가 첫 데이트에 반바지에 땋은 머리를 하고 나오랍니까? 눈길이 안 떨어지는 걸 나보고 어떡하라고.

사실 지원은 아침에 가온이 옷을 갈아입고 나오길 기다리고 있을 때까지만 해도 햇볕이 쨍쨍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정장 차림의 가온이 하루 종일 너무 더우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파란 반바지에 헐렁한 흰 셔츠를 입고 한쪽으로 땋아 내린 머리를 동그랗게 돌돌 만 가온이 나타난 순간, 하마터면 들고 있던 차 키를 떨어뜨릴 뻔했다.

권 여사님…, 대단하신데? 원래도 희주는 눈이 까다로운 지원이 인정했을 정도로 아주 세련된 센스를 가지고 있었지만, 오늘 그녀는 그야말로 패션 감각의 정점을 찍었다. 산토리니를 배경으로 한 화보에서 막 튀어나온 것 같은 가온의 뒤에서는 정말로 후광이 비쳤다.

“제가 이상한 게 아니라, 대표님이 오늘 너무 귀여우신 겁니다.”

귀여…! 너무나도 생소하고 낯간지러운 단어를 차마 제 입으로 되풀이하지 못하고 입술만 벙긋거리던 가온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말문이 트였다.

“그런 말…, 천 년을 살면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어.”

“사람들이 다 눈이 삐었군요. 저는 지금 당장 지나가는 사람 100명을 붙잡고 물어봐도 100명 모두에게 같은 대답을 들을 자신이 있습니다.”

“무슨 그런…! 차 관장은 심미안이 너무 이상해.”

“저야말로 그런 말은 평생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제 취향은 항상 우아하고 고급스럽다는 평을 받았거든요.”

태연하게 받아친 지원이 가온의 손등을 의미심장하게 톡톡 두드리자, 비로소 그게 절 두고 하는 말이라는 걸 알아차린 가온이 입술을 앙다문 채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민망해하며 굳어버린 모습조차도 너무 귀여워서 지원은 심장이 막 간질간질했다.

자신이 지금 미친놈처럼 굴고 있다는 사실은, 본인이 제일 잘 알았다. 하지만 자력으로 어떻게 조절이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가온을 불편하게 하면 안 된다고 사력을 다해 마음을 다잡고 있다가, 한 번 고삐가 풀리니 더 이상은 걷잡을 수가 없어졌다.

- 차 관장. 나랑 정식으로 만나보겠어?

가온의 제안은 30년을 살면서 맞닥뜨렸던 그 어떤 감격의 순간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전혀 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공격이 훅 들어온 바람에 아주 잠깐 현실감이 확 떨어졌었지만, 지원은 최선을 다해 정신을 수습했다. 우물쭈물할 때가 아니었다.

- 네.

채 3초가 지나기도 전에 나온 지원의 즉답에 설핏 웃음을 흘리던 가온이, 조금 원망스러운 눈빛을 하며 라면을 가리켰다.

- 이렇게 꺼내기 어려운 말인지 몰랐어. 저걸 먹자고 하면 절로 다 된다고 했는데….

- 누가요?

- 소랑이.

- 하하하.

진짜 그런 의미로 라면을 먹자고 하신 거였구나. 무슨 정신으로 라면을 끓였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가온이 라면 한 개를 다 먹는 동안 그녀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던 지원은, 젓가락 한 번 닿지 못한 퉁퉁 불어터진 라면을 그대로 싱크대에 부어야 했다.

그 순간 이후로 지금까지, 커다란 풍선처럼 부푼 마음이 공중에 붕붕 떠 있는 상태다. 사실 지금도 이게 꿈인가 싶다.

“그래서 지금 우리 어딜 가는 건데?”

“지난번에 못 갔던 도자미술관에 갑니다. 오늘 체험 프로그램이 있는 날이어서요.”

“그럼 도자기를 직접 만드는 거야?”

“네. 빚어 놓고 오면 구워서 택배로 보내줄 겁니다.”

가온이 도예에 흥미를 보이지 않으면 어쩌나 불안했었는데, 다행히 그녀의 반응은 꽤나 긍정적이었다. 사실 취미라는 게 전혀 없는 여자와의 데이트 코스를 짜는 건, 정말이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날씨가 더워졌으니 물놀이를 할까? 아니, 그럼 수영복 차림의 대표님을 다른 사람들이 보게 되겠지. 그건 내 정신 건강에 너무 좋지 않아. 첫 데이트 장소로 풀 빌라를 선택하는 건 너무 노골적이고. 그럼 시원하게 래프팅은 어떨까. 그것도 아니야. 이제 막 산책을 운동이라고 시작한 사람한테 체력 소모가 너무 커. 혹시라도 물에 빠지면 겁을 먹을 테고.

그렇다고 첫날부터 영화 보고 차 마시는 전형적인 데이트를 하고 싶진 않은데. 즐거우면서도 기념에 남을 만한 게 뭐 없을까…. 장고 끝에 결정한 데이트 코스는 일단은 성공적이었다.

도예가의 시범을 유심히 지켜보던 가온은 신중하게 물레를 돌리며 자못 비장한 얼굴로 흙을 빚기 시작했다. 입을 꾹 다문 채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작업에만 열중하던 가온은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 끝에 자그마한 수반 하나를 만들었는데, 삐뚤빼뚤한 완성품을 앞에 놓고 어찌나 뿌듯한 표정을 짓는지 그 사랑스러운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심장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소랑한테 선물하실 건가요?”

“개 밥그릇 같아 보인다는 뜻이야?”

“아…, 아니요. 그럴 리가요. 소랑은 개가 아니지 않습니까.”

잠시 식은땀이 흘렀던 것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반면 가온의 얼굴만 쳐다보느라 도예가의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던 지원은 발로 물레를 몇 번 돌려보더니 순식간에 당장 상품으로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한 머그잔 두 개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아주 가느다란 붓으로 소담한 파란 수국을 각각 한 송이씩 그려 넣었다. 꽃 그림이 얼마나 섬세하고 아름다운지 다른 수강생들이 다 손을 놓고 구경을 했을 정도였다.

체험을 마친 두 사람은 미술관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한 산채비빔밥 전문점에 가기로 했다. 산길이라 바닥이 썩 고르진 않았지만, 우거진 나뭇잎 덕에 시원한 그늘이 드리워져 걷는 내내 기분은 상쾌했다.

“차 관장은 그림을 진짜 잘 그리네.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기도 하는 것 같고.”

“네. 대학에 진학할 때 회화를 전공할까 굉장히 고민했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지 않았어?”

“살아 있는 사람을 그릴 수가 없어서요. 살아 있는 사람을 그렸다가 혹시 죽어 버리면 어떡하나, 겁이 났었죠. 그런데 대부분의 미술 대학에는 모델을 앞에 두고 인물화를 그리는 기초 회화 수업이 있거든요.”

지원의 덤덤한 대꾸에 가온의 낯빛이 조금 흐려졌다. 그걸 기민하게 알아차린 지원은 그녀와 다정하게 눈을 맞추며 제게 아무런 그늘이 남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듯 해사하게 웃었다.

“그림을 그려서 망자를 없앨 수 있다는 건 언제 알았어?”

“일곱 살 때요. 보안실에서 파악한 대로 23년 전 속초에서였죠.”

지원이 아주 어렸을 때는 귀신이 누구에게나 다 보이는 건 줄 알았다. 아이가 혼잣말을 하거나 가끔 엉뚱한 소리를 해도 부모는 지원이 굉장히 영특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고, 따라서 지원도 그게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 엄마, 저기 샹들리에 위에 작은 아기가 매달려 있어.

- 그래? 그건 너무 위험하니까 내려오라고 해.

그게 어른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지어낸 소리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속초에 있는 별장이 완공된 후 처음으로 사람들을 초대했던 날이었다. 거기서 지원이 태어나기 직전에 돌아가셨다는 할머니의 얘기가 나왔다.

- 그러고 보니까 지원이가 어머니를 정말 많이 닮았네. 눈매가 아주 똑같아. 아이고, 어머니가 살아계셨으면 우리 장손, 우리 장손 하면서 엄청 좋아하셨을 텐데. 저걸 못 보고 돌아가셔서….

숙부들이 하는 얘기를 의아하게 듣고 있던 지원이 스케치북을 가지고 와서 할머니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와 가끔 대화를 나눴었기에, 지원은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아이가 하는 양을 마냥 귀엽게 바라보던 어른들은 그림이 완성되자 완전히 경직된 얼굴로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단숨에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던 서늘한 적막감이 아직도 생생하다.

- 지원아, 너 할머니 사진을 어디서 봤어?

- 사진 아닌데. 지금 정원에 계셔. 우리랑 같은 차 타고 오셨잖아.

당시에는 부모가 버티고 있어서 뭐라고 험한 소리를 하지 못했지만, 계속 께름칙한 표정을 짓고 있던 숙부 한 명이 마치 실수인 척 그림을 장작과 함께 벽난로에 집어넣었다. 서글픈 얼굴을 한 할머니가 불길에 휩싸여 사라지는 걸 보며, 지원은 그때 처음으로 제가 가진 능력을 알았다.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한동안 그림을 아예 그리지 않았었고, 뭔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게 보이면 실제인지 아닌지 꼭 확인을 했죠. 학교에서 미술 시간에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부모님이 불려온 것도 여러 번이었고요.”

이제 와서 생각하니 부모님의 입장에서도 참 난처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원의 부모는 전적으로 아들의 편을 들었다. 설명할 수 없는 이유가 있으니 아이를 내버려 두라고 담임에게 당당히 요구했고, 남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게 무섭거나 힘들지 않은지 수시로 묻고 챙겼다.

그랬기에 지원은 크게 엇나가거나 비뚤어지지 않고 자랄 수 있었다. 그러나 부모는 아이가 총명하게 잘 자라는 것에 안도하면서도, 혹시나 지원이 어디가 아픈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치료를 받게 해야 하나 진지하게 의논하는 것도 여러 번 들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지원은 조금은 서운했고, 조금은 미안하기도 했었다.

“미국에 막 도착했을 때 적응하는 게 좀 힘들었는데, 그때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학용품이나 옷가지 같은 것들, 혹시나 훼손이 되어도 크게 문제가 없는 것들을 그렸죠. 한참을 두고 봐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 조금씩 범위를 넓혔습니다. 그러다 제가 없앨 수 있는 범위가 ‘죽은 사람’에 한정되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도 차마 사람을 그릴 수는 없겠더라고요.”

지원의 얘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가온이 가만히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언제나처럼 듣기 좋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입을 열었다.

“차 관장이 처음으로 중천으로 보낸 이를 기억해. 아주 오랜만에 불길에 휩싸여서 중천으로 온 망자였거든. 겁에 질려 있으면서도 꽤나 선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지. 그러고 보니까 눈매가 닮은 듯도 하고…. 누가 보냈냐고 물었는데 끝까지 대답을 하지 않았어. 혹여 손자에게 해가 될까 걱정스러웠던 모양이야.”

“어디로…, 가셨습니까.”

“좋은 곳으로.”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던 지원이 아주 가늘게 떨리는 숨을 천천히 내뱉었다. 그리고는 조금 힘을 주어 가온의 손을 꽉 잡으며 후련한 얼굴로 웃었다.

“다행이네요.”

늦은 점심을 먹고 가볍게 커피 한 잔을 마신 후 카페 앞 벤치에 앉아 아주 잠깐 얘기를 나눴을 뿐인데, 순식간에 해가 기울었다. 왠지 그림자의 방향이 달라진 것 같아 슬쩍 시간을 확인하던 지원은 제 손목시계의 시침이 5에 거의 근접한 것을 보고는 일순 제 눈을 의심했다.

말도 안 돼. 우리가 여기에 2시간도 넘게 앉아 있었다고? 몇 마디 안 하지 않았나? 시간의 흐름은 상대적이라는 말이 이렇게까지 마음에 와 닿은 건 처음이었다.

“대표님. 이제 슬슬 서울로 가야 할 시간입니다. 5시가 다 되었네요.”

“벌써? 시간 빨리 가네.”

“그러게요.”

놀랍게도 시간이 빨리 흐른다는 걸 자각하고 나자, 그때부터는 아예 시침이 분침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울까지 2시간이 넘게 걸렸고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1시간 40분에 걸쳐 코스 요리를 먹었는데, 체감상 30분을 넘긴 것 같지가 않았다. 시간이 뭉텅뭉텅 잘려 나가는 게 무서울 정도였다.

“대표님, 커피…. 하아, 오늘은 더 드시면 안 되죠. 시간도 많이 늦었고.”

“그럼 국화차라도 한잔할까?”

“사약이라도 먹겠습니다.”

다행히 근처에 있는 분위기 좋은 전통찻집을 찾아 들어갔지만, 워낙 손님이 많아 1시간을 앉아 있기가 어려웠다. 막 들어온 외국인 손님이 빈자리가 없어 크게 실망하는 모습을 본 가온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이제 더는 귀가를 미룰 명분이 없었다. 최대한 늦장을 부려봤지만, 하필이면 오늘따라 길도 안 막혔다.

결국 무영당 앞에 도착하고야 만 지원은, 안전벨트를 푼 가온이 문을 열려고 몸을 튼 순간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뭔가 대책을 생각하고 저지른 짓은 아니었다. 언제나 다른 사람보다 배 이상 빠르게 두뇌를 회전시키는 차지원이 생각에 앞서 행동에 나서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지만, 다급한 마음에 몸이 절로 움직였다.

“…?”

가온이 의아한 눈으로 저를 빤히 바라보자, 잠시 멈췄던 지원의 머릿속이 비로소 다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대로 들여보내기에는 정말 너무 아쉬운데. 하지만 딱히 생각나는 핑계는 없고…. 이제 밤도 깊었고 언제까지나 이렇게 손만 붙들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뭐라도 지껄이긴 해야 하는데…. 한참을 고민하던 지원이 가까스로 적절한 용건 하나를 찾아냈다.

“저 이번 주말에 뉴욕에 갑니다, 대표님.”

“뉴욕?”

“네, 이모의 변호사가 다음 주 월요일밖에 시간이 없다고 해서요. 마지막으로 정리할 것도 좀 남았고…. 아무튼 오고 가는 것까지 포함해서 일주일 정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미룰 수 없는 일이기는 했지만, 막 연애를 시작한 남자의 입장에서 일주일의 공백은 너무 길었다. 답지 않게 서운한 티를 감추지 못하고 있는데, 잠깐 뭔가를 생각하던 가온이 뜻밖의 말을 했다.

“나는 다음 주에 LA에 가.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금요일이라고 들었던 것 같아.”

“거긴 무슨 일로….”

“LA에 있는 통로 하나가 곧 닫히게 되었거든.”

미국에는 뉴욕과 LA를 포함한 8개의 도시에 중천 직원들을 위한 출입구가 있고, 그중 LA에 있는 출입구는 한 유서 깊은 호텔의 옥상 정원 구석에 마련되어 있었다. 4대째 가이드를 하고 있는 집안에서 100년 동안 운영하던 호텔이었는데, 애석하게도 그다음 대에는 영력이 있는 아이가 하나도 태어나질 않았다고 했다.

“지금 주인이 올해 우리 나이로 환갑이라 이제 슬슬 딸에게 운영권을 넘기고 싶은 모양이야. 그런데 그 딸은 이쪽 세계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더군. 그래서 중천 직원들이 더는 그 호텔을 이용해서 드나들 수 없게 되었어. 당연히 강요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러면 다른 장소를 찾아야 합니까?”

“장소는 이미 정해졌어. 산타모니카 해변이 보이는 언덕에 작은 채플이 하나 있는데, 경치가 좋아서 여행자들이 많이 들르는 곳이야. 그러니 직원들이 드나드는 것도 수상하게 보이지 않겠지. 그래서 그 건물 지하에 통로를 만들려고 해.”

흐음, 출입구가 바뀌기도 하는구나. 하긴 보통은 건물 내부에 출입구를 만드는데, 요즘 세상에 천 년씩 남아 있는 건물은 거의 없으니까. 혹 남아 있더라도 꼭 중천과 관계된 사람이 그 건물을 소유한다는 보장도 없고. 중천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하나 더 습득한 지원이 불현듯 몹시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많이 힘든 일은 아닙니까? 제가 모시고 갈 수 있으면 좋은데…. 아, 그럼 제가 뉴욕에서 바로 LA로 넘어가겠습니다. 아무리 서둘러도 여기까지 왔다 갔다 할 시간까지는 없을 것 같고요.”

“그럴 거 없어.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이라서 그렇지, 일 자체가 고된 건 아니야. 반나절 정도만 투자하면 충분히 마무리할 수 있고.”

“그래도 대표님 혼자 가시게 하는 건 마음이 안 놓입니다. 게다가 아예 다른 대륙이라면 모를까 같은 미국 땅에 있는데 제가 어떻게 대표님을 만나지 않고 그냥 돌아올 수가 있겠습니까.”

지원의 진지한 눈빛에 가온은 살짝 어이가 없기도 하고, 조금 웃음이 나기도 했다. 일단 출장을 저 혼자 가는 건 아닐뿐더러, 지원이 제 출장에 동행하기 시작한 건 고작 두 달 전이다. 물론 지원이 그 짧은 기간 내에 여태까지 가온이 만났었던 그 누구보다도 빠르고 완벽한 적응력을 보인 건 사실이다.

차 관장이 있으면 나는 편하지. 날마다 얼굴을 보면 당연히 좋을 테고. 그렇지만 가온은 솔직한 속내를 그대로 묻었다. 지원에게도 개인 생활이라는 게 있는데 제 편의만을 위해 그것들을 포기하라고 종용하는 건 이기적인 짓이다.

“차 관장. 뉴욕과 LA면 같은 미국 땅이라기에는 너무 끝에서 끝이잖아?”

“그래 봐야 대여섯 시간이면 갑니다. 직접 운전을 해야 되는 것도 아니고 비행기에 타기만 하면 알아서 데려다줄 테고요.”

“그래도 한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정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닌데, 차 관장이 나 때문에 무리하는 건 보고 싶지 않고….”

가온이 선뜻 승낙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지원은 재빨리 공략의 방향을 바꿨다.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의외로 가온은 억지를 쓰며 밀어붙이는 사람한테 좀 약했다. 아마도 평생 제게 그렇게 막무가내로 구는 이를 거의 본 적이 없어서였을 것이다.

“고작 비행기 몇 시간 더 타는 것보다 대표님을 보고 싶은 마음을 참는 것이 제게는 훨씬 더 무리한 일입니다. 굳이 참아야 할 이유도 없고요. 모처럼의 기회니까 LA에서 일이 끝난 다음에 저랑 며칠 여행이라도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여행…?”

굉장히 생경한 단어를 접한 듯한 가온의 표정에 지원의 얼굴이 슬그머니 굳었다. 그게 이렇게 입에 안 붙는 말인가? 대체 여행을 얼마나 안 다녔길래.

“대표님. 마지막으로 여행을 하신 게 언젭니까.”

지원의 질문에 가온은 잠시 여행의 사전적 의미를 생각해보았다. 유람을 목적으로 객지를 다니는 게 여행이라면….

“오늘.”

“오늘 한 건 여행이 아니라 가벼운 데이트죠. 이건 빼고요.”

“차 관장하고 런던에 출장 갔을 때.”

그건 여행이 아니라 출장 중에 비행기 시간이 떠서 잠깐 외출을 한 거였지. 고작 한나절이었고.

“그것도 여행의 범주에 넣기에는 부족한데…. 그럼 그전에는요?”

“….”

가온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대답을 기다리던 지원은, 입을 꾹 다문 가온이 더 이상은 대답을 하지 못하자 미간을 확 일그러뜨렸다. 그래, 취미 하나도 없는 사람이 무슨 여행을 다녔겠어. 뭐 쉬는 날이 있어야 여행을 가든 말든 할 테고. 말이 나온 김에 쉬는 날 정도는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겠어. 단단히 마음을 먹은 지원이 작정하고 입을 열었다.

“대표님. 물론 대표님의 상황은 대단히 특수한 경우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사람은 가끔씩 휴식도 취하고, 여행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오늘 쉬었잖아.”

“그럼 이달에…, 아니. 올해 들어 총 몇 번이나 쉬셨습니까.”

“올해…? 오늘 하루.”

“작년에는요?”

“딱히 없는 것 같은데.”

가온의 덤덤한 대꾸에 지원은 급격하게 두통이 밀려왔다. 동시에 여태 그녀를 보필했던 모든 수행원들에 대한 짜증과 분노가 용암처럼 들끓기 시작했다. 비싸고 좋은 거 먹이고, 아침저녁으로 혈압이나 체크하면 끝나는 거야? 중천주의 몸은 무쇠로 빚은 줄 알아?

“안 되겠네요. 준법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대한민국이 이런 무법천지가 되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응? 뭘 그렇게 거창하게….”

“대표님. 앞으로 일주일에 하루는 무조건 쉬시는 겁니다. 일단은 대표님도 대한민국의 국민이시고, 현재 근로기준법에 의하면 일주일 만근을 한 근로자에게는 반드시 주 1회의 주휴를 부여하게 되어 있습니다.”

커다란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지원의 청산유수 같은 말을 멍하니 듣고 있던 가온이 조심스럽게 이의를 제기했다.

“저기, 차 관장. 나는 굳이 분류를 하자면 근로자가 아니라 사용자의 입장인데….”

“또한 정해진 근로 일수의 80% 이상을 근무하면 최소한 한 달에 하루의 유급휴가를 받게 되고, 근속 연수가 늘어날수록 유급휴가도 늘어납니다. 대표님은 969년 장기 근속자이시고 항상 근로 일수의 100%를 초과하여 일하고 계시니, 당연히 최소한의 휴가는 사용하실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나는 근로자가 아니라….”

“대표님.”

언제나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던 지원이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지운 채, 더없이 진중한 목소리를 냈다.

“제가 지금 대표님의 정체성이 근로자냐 아니냐를 따지자는 게 아닙니다.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최소한 그 정도는 쉬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좋은 걸 보고, 맛있는 걸 먹고, 때로는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거리기도 하면서요. 격무에 시달리는 사람일수록 특히 더 심신의 긴장을 풀어주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 계속 긴장 상태로 있으면 결국은 어떤 식으로든 부작용이 나타나기 마련이고, 제가 보기엔 대표님의 경우에는 그 부작용이 불면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빈둥거리는 게 필요하다고….”

제 말이 가온에게 어느 정도 먹히고 있다는 걸 귀신같이 알아차린 지원이 순간 조용히 눈을 빛냈다.

“그럼 속는 셈치고 시험 삼아 딱 석 달만 해보시죠. 한 달에 나흘씩 세 번, 총 12일이네요. 그 12일 동안 저랑 여행도 다니시고, 오늘처럼 색다른 체험도 해보시고, 그렇게 중천의 일을 아예 잊을 수 있는 시간을 보내는 겁니다. 그랬는데도 대표님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앞으로는 대표님의 업무 관련해서는 일절 왈가왈부하지 않겠습니다.”

한참을 신중하게 고민하던 가온이 결국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지원은 최대한 신이 난 티를 내지 않도록 노력하며, 다시금 온화한 미소와 상냥한 목소리를 장착했다.

“서부 쪽에서 가보고 싶으셨던 곳은 없습니까? LA에서 또 동부로 이동하시는 건 너무 힘드실 테니까요.”

“왜 말이 달라져? 비행기가 대여섯 시간이면 알아서 데려다준다며.”

“그건 제 경우죠. 체력적인 부분에서 대표님과 저를 동일 선상에 놓으시면 안 됩니다. 저는 하루에 90분씩 운동을 하는데, 대표님이 제가 하는 운동의 50%를 따라오실 수 있으면 뉴욕이 아니라 달나라에 가신다고 해도 말리지 않겠습니다.”

지원의 말에 피식 웃음을 흘리던 가온이 돌연 조금 아련한 눈빛을 했다.

“나 가 보고 싶었던 곳이 하나 있긴 있어.”

“거기가 어딥니까? 말씀만 하세요.”

“콜로라도.”

지원의 눈이 조금 커졌다. 가고 싶은 곳을 묻기는 했지만, 이렇게 딱 떨어지는 지명이 바로 등장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콜로라도요?”

“응, 긴 협곡이 있고 지금은 아마 그 일대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것으로 아는데. 거기에 예전에 원주민들이 ‘태양의 쉼터’라고 불렀던 계곡이 하나 있어. 지금은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계곡을 보러 가고 싶어.”

“콜로라도의 국립공원이면 블랙 캐니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흐음…, 블랙 캐니언이라. 협곡의 폭이 좁아서 해가 잘 안 들고 전체적으로 암석의 색깔이 어두운 편이었으니 그런 이름을 붙였을 법하네. 내가 갔을 때는 그 대륙에서 영어를 사용하던 때가 아니어서.”

그럼 콜럼버스가 침략하기 전이니 최소 15세기 이전…. 가온의 얼굴만 보고 있으면 그녀의 나이를 상기시킬 일이 거의 없지만, 가끔 이렇게 세월의 흔적이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다. 살짝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쪽같이 감춘 지원이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가고 싶으면 가셔야죠. LA에서 덴버까지는 비행기를 타면 금방이고…. 덴버에 도착해서 차를 빌리면 됩니다.”

“하지만 정확한 위치는 몰라. 몇 년 전에도 서부 쪽에 갈 일이 있었는데, 사진을 봐도 다 비슷해 보여서 결국 포기했었거든.”

“천천히 찾아다니면 되죠. 잘됐네요, 마침 여행을 하기로 했던 참이니까요. 이틀 정도 둘러보면 충분할 겁니다. 캠핑카를 타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미국은 국립공원이 워낙 넓어서 곳곳에 야영지가 있거든요. 대표님, 캠핑카 한 번도 안 타보셨죠? 아무래도 조금 불편하긴 하겠지만, 하룻밤 정도 보내는 건 경험해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제법 운치가 있어요.”

지원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가온이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작게 웃었다. 내가 차 관장이라면 어떻게든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얘기를 꺼냈나 보구나. 다시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안 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차 관장은 참…, 모든 게 다 간단하네.”

“이런 거야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요.”

가온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조금 짙어졌다. 차 관장을 지금 만나서 정말 다행이야. 아마도 이번에는 여태까지와는 달리 내가 먼저 떠날 수 있을 테니. 이리 다정하고 세심한 이와 같이 지내다가 혼자 남으면 견디기가 쉽지 않을 테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리던 가온은, 자신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지원과 함께할 미래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아직 서로 무언가 약속을 나눈 것도 아닌데. 떠나보낼 이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너무 쉽게 정을 주었나. 불현듯 살짝 걱정스러워졌지만, 한번 주어버린 마음은 이미 제 것이 아니라 다시 찾아올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부스 안에 있는 로아를 빤히 쳐다보던 도겸이 도저히 안 되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젓더니 결국 녹음을 중단시켰다. 쯧, 어떤 녀석은 짝사랑 노래를 군가처럼 박력 터지게 불러서 사람 속을 썩이더니, 이 친구는 첫 데이트를 앞두고는 장송곡을 부르고 있네.

“그만. 좀 쉬었다 합시다. 잠깐 나와요.”

도겸의 냉정한 말투에 잔뜩 기가 죽은 로아가 쭈뼛거리며 녹음실 밖으로 나왔다. 표정을 보아하니 본인이 뭘 잘못하고 있는지 알긴 아는 모양이었다. 그 움츠러든 어깨를 보고 있으려니 도겸은 가슴이 더욱 답답해졌다. 모르는 사람은 가르치면 그만이지만, 아는데도 안 되는 사람을 다그치기는 어렵다. 도겸은 한숨 소리가 로아에게 들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최대한 여상한 목소리로 물었다.

“피곤해요? 촬영 일정이 고됩니까?”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밥 굶고 왔어요? 뭐라도 시켜 먹고 할래요?”

“점심 먹었어요. 죄송합니다.”

“밥 먹은 것까지 죄송할 필요는 없고. 그런데 목소리에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요? 지금보다 한 25만 배는 더 발랄해야 되는데.”

도겸의 과장된 주문에 거의 울상을 하고 있던 로아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가 다시금 표정을 굳혔다. 도입부만 스무 번째 부르고 있는데도 화를 내지 않는 도겸에게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그룹 활동을 하던 시절에는 녹음실에서 한 시간이 넘도록 버벅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죄송해요. 더 집중해서 해보겠습니다.”

“집중이 안 될 만한 일이라도 있나?”

지나가는 말처럼 던진 도겸의 질문에 로아의 눈빛이 마구 흔들렸다. 동시에 도겸의 얼굴도 서서히 일그러졌다. 하긴, 무슨 일이 있으니까 스물다섯짜리가 이렇게 세상 다 산 얼굴을 하고 있겠지. 하아…, 나 정말로 산 사람 문제에는 별로 깊게 관여하고 싶지 않은데.

“이대로는 도저히 진행이 안 될 것 같으니까 일단 얘기라도 해 봐요. 금전 문제, 연애 문제, 뭐 이런 건 내가 들어도 해결해 줄 수 없지만….”

“제 팔찌가 저를 찾고 있는 것 같아요.”

내내 시선을 내리깔고 있던 로아가 비장하게 고개를 든 순간, 마냥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던 도겸의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이건 또 웬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무슨 근거로?”

“자꾸만 똑같은 꿈을 꾸는데…. 한복을 입은 어린 여자애가 저를 언니라고 부르면서 언제 데리러 올 거냐고…. 그 애가 제 팔찌랑 똑같은 걸 차고 있었어요.”

“어린 여자애? 몇 살 정도나 되어 보였습니까.”

“어…. 한 열 살 정도로 보였어요. 그보다 더 어릴 수도 있고요.”

열 살? 의아한 얼굴을 한 도겸이 고개를 삐딱하게 옆으로 꺾었다. 내가 봤던 친구는 최소한 고등학생 이상이었는데. 유행이 좀 지난 복장이긴 했지만, 21세기를 벗어나지는 않는 차림이었고. 게다가 빌붙어 있는 물건과 떨어져서 멀리 다닐 수 있는 힘은 없어 보였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범위는 기껏해야 반경 2~30m나 될까 싶었는데.

“시골집에 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네. 그런데 제가 지금 촬영하고 있는 세트장이 시골집에서 가까워요.”

“얼마나?”

“차로 30분 정도요.”

“30분….”

도보도 아니고 차로 30분이면, 그런 약한 영혼이 혼자서 돌아다닐 수 있는 거리가 아닌데…. 도겸이 계속 고개를 갸웃하자 로아가 황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산을 하나 돌아야 해서 시간은 그 정도 걸리는데, 직선거리로 따지면 멀지 않아요.”

그렇더라도 불가능해. 도겸의 입에서 탄식과도 같은 한숨이 샜다. 여러 가지 정보를 종합해보니 결론은 하나로 나왔다. 아무래도 물건의 주인이 바뀐 모양이네. 외양이 너무 달라진 것도 그렇고. 그렇게 이승에 미련이 많아 보이던 망자가 절로 떨어져 나갔을 리는 없으니, 아마도 새 주인은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뜻인데….

“내가 한번 봐야겠네요. 다음 촬영이 언젭니까?”

“모레 오전부터요. 이번에는 사흘 연속으로 세트장에서 찍어요.”

그나저나 내가 혼자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의 망자일까? 지원이 형도 없고, 해수도 멀리 있고, 심지어 대표님까지도 오늘 출국하셨는데. 평소 도겸은 걱정을 미리 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왠지 이번에는 마음이 심란했다. 한복을 입은 열 살 정도의 어린애…. 전혀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는데도, 이상하게 낯설지 않은 느낌이 들어서 더욱 그랬다.

“우에에엥. 으앙. 으아앙!”

1등석 전체를 쩌렁쩌렁 울리는 우렁찬 울음소리에 현호는 거의 패닉 상태였다. 비행기가 활주로에 들어선 순간부터 울기 시작한 아기는, 이륙한 지 벌써 3시간이 넘었는데도 지치지도 않는지 처음과 거의 동일한 데시벨로 울고 있었다. 슬쩍 옆을 돌아보니 가온은 한참 전부터 미동도 없이 반듯하게 누워 있기만 했다. 눈은 감고 있지만 당연하게도 잠이 든 기색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잠이 들기까지 굉장히 고생하시는 분인데, 이런 난리통 속에서 주무실 수 있을 리가 없지. 어제도 가온이 중천에서 거의 밤을 지새웠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 현호는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안 되겠어. 어떻게든 무슨 수를 내라고 해야지…. 참다못해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옆자리에서 저를 부르는 나직하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권 실장.”

“네, 대표님.”

“눈치 주지 마. 아이를 일부러 울리는 것도 아닌데, 그리 대놓고 싫은 내색을 하면 앞으로 8시간 동안 얼마나 앉은 자리가 불편하겠어.”

“그래도…. 이대로 가면 한숨도 못 주무실 것 같은데….”

“가서 자면 되지. 아이 가진 부모한테 야박하게 굴지 말게.”

가온은 가서 자면 된다고 했지만, 오전에 도착하고 난 이후로는 죽 일정이 있으니 저녁이 될 때까지는 중간에 잠깐도 쉴 틈이 없다. 전전긍긍하며 다리를 떨던 현호는, 5시간이 넘어가기 시작하자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는 가온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대체 애를 달랠 줄도 모르는 부모가 무슨 배짱으로 이런 장거리 여행을 하는 거지? 아니, 울음소리를 들으니 완전히 갓난아기인데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벌써부터 미국 여행이야? 애는 애대로 고생이고, 다른 사람들한테는 이렇게 민폐인데. 못마땅하게 혀를 차며 뒤쪽 구석 자리로 가던 현호는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장면을 목격하고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배가 고픈 건가?”

“조금 전에 분유 먹였잖아. 기저귀도 깨끗해.”

“어디가 아픈 건 아니겠지?”

“낯설고 힘들어서 그러겠지. 아기들은 기압 차 때문에 귀가 아파서 그럴 수도 있다고 했어. 아휴, 목이 다 쉬었네. 불쌍하기도 하지.”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젊은 부부가, 누가 봐도 동양인인 것이 분명한 아기를 안고 어쩔 줄 몰라 하며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광경이었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현호는 그대로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가지 말라고 했잖아.”

“네. 죄송합니다.”

깨끗하게 마음을 비운 가온과 현호는 11시간 내내 이어진 어린 생명의 설움과 투정을 기꺼이 감내했지만, 들뜬 마음으로 그들을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던 지원은 사정이 달랐다.

“…대표님.”

꼬박 일주일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가온의 목소리 한 번 제대로 듣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텨야 했던 지원은, 오매불망 그리던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는 대번에 표정이 서늘해졌다. 한눈에 봐도 꼬박 이틀은 잠을 못 잔 게 분명했다.

“차 관장. 저녁에 온다더니?”

“한시라도 빨리 뵈려고 조금 서둘렀습니다. 그런데 안색이 너무 안 좋으십니다. 오는 길이 불편하셨습니까?”

어떻게든 가온에게는 좋은 낯을 해 보이려고 이를 악문 지원이,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현호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새파랗게 어린 지원의 눈치를 봐야한다는 사실이 조금 서럽고 억울했지만, 결과적으로 상사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현호는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계속 우는 아기가 있었습니다.”

“…그랬군요.”

쌀쌀맞게 대꾸한 지원이 현호의 손에서 가온의 짐을 거의 낚아채듯 가져갔다. 그리고는 너무 정중해서 기분이 나빠질 것 같은 말투로 작별 인사를 건넸다.

“대표님 모시고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권 실장님. 이제부터는 제가 모실 테니 아무 염려 마시고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많은 관광객들이 북적이는 아름다운 해변에서 조금 떨어진 야트막한 언덕 위에, 하얀 벽돌로 지어진 아담한 채플이 쨍한 아침 햇살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었다. 짙은 청록색 지붕을 올린 산뜻한 건물은, 경건한 예배당이라기보다는 흡사 한적한 시골 별장 같은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정말 그림같이 지어놨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외관에 놀란 지원이 눈썹을 살짝 치켜떴다. 관광객이 많이 드나든다더니, 가온과 지원이 도착했을 때는 아직 오전이었는데도 여기저기에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머나, 대표님!”

육중한 나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커다란 기둥 앞에 아담한 책상을 놓고 앉아 있던 머리가 하얀 노부인이 가온의 얼굴을 보고는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마치 잃어버렸던 손녀라도 찾은 양 눈물까지 글썽이며 가온의 손을 덥석 잡았다.

“다음번에는 중천에서나 뵙게 될 줄 알았습니다.”

“내가 조만간 다시 보러 온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게 말씀하신 게 벌써 13년 전입니다.”

“….”

그 말에 잠시 멈칫하던 가온이 살짝 멋쩍은 얼굴을 하자, 노부인은 도리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마구 손사래를 쳤다.

“아이고, 바쁘신 분께 제가 공연한 소리를 했네요. 늙은이가 생각 없이 하는 푸념이니 마음에 두지 마세요.”

“늙기는 내가 더 늙었지.”

“아휴. 그런 말씀 마셔요. 제가 입이 방정이네요. 그나저나 얼굴은 여전하신데 많이 마르셨습니다. 권희주 고것이 이제 나이를 먹었다고 게으름을 피우는 모양입니다.”

“그렇지 않아. 그 나이가 되어서도 너무 정성을 들여 탈이야. 오는 길에 잠을 좀 못 잤어. 하룻밤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니 마음 쓸 거 없네.”

가온의 손을 꼭 붙잡고 마냥 애틋하게 어루만지던 노부인은 시간이 꽤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가온의 곁에 서 있던 지원을 발견했다.

“그런데 같이 오신 이 훤칠한 청년은….”

“아. 인사해, 차 관장. 여기는 예전에 내 집 살림을 맡아주었던 한송임 여사. 한 여사, 이쪽은 작년에 새로 들어온 상급 가이드 차지원 관장이야.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어.”

두 사람을 간단히 소개하던 가온이 잠깐 머뭇거리더니 놀라운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내 애인.”

대외용 미소를 지으며 노부인에게 공손하게 묵례하던 지원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옆으로 홱 돌렸다. 제 입으로 말은 해놓고도 많이 민망했는지, 꿋꿋하게 정면을 응시하는 가온의 귓불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이런…. 이렇게 예고도 없이 귀엽게 나오는 건 반칙이지. 지원은 웃음을 터뜨리지 않기 위해 통증이 느껴질 만큼 세게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어머, 대표님도 이제 농을 다 치십니다.”

“….”

입을 꾹 다문 가온이 상당히 애매한 표정을 지었지만, 가온을 20년도 넘게 보필했던 노부인은 그녀의 말이 진실일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뭐라고 더 부연 설명을 할까 고민하던 가온이 결국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내하게.”

“네, 대표님.”

책상 서랍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낸 노부인이 기둥 뒤에 숨어 있는 작은 문 하나를 열자, 지하로 내려가는 긴 계단이 나왔다. 건물의 규모에 비해 깊이가 상당했다.

“서너 시간 정도 걸릴 거야. 자네도 잘 알겠지만….”

“네, 대표님. 혹시나 호흡이 불편해지면 바로 건물 밖으로 나갈 것이고, 다른 이들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사특한 것들이 나타나 말을 걸더라도 절대 대꾸하지 않을 거고요.”

“그래.”

말을 잘 듣는 기특한 어린애를 대하듯 노부인을 바라보던 가온이 호흡을 가다듬고는 돌로 만든 단단한 계단에 발을 디뎠고, 지원도 바로 그 뒤를 따랐다. 곧 등 뒤에서 조심스럽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을 걸어 바닥에 내려선 가온은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더니 이만하면 되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여기에 중천으로 갈 수 있는 문을 만들 거야. 혹여 누군가가 지하에 내려온다고 해도,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테고.”

“저 계단이 제니스 본사의 엘리베이터 같은 거군요.”

“맞아.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을 쉽게 설명하자면, 여기에 내 기운을 벽돌처럼 차곡차곡 쌓아서 중천까지 닿는 사다리를 만드는 거라고 생각하면 돼. 어렵지 않은 일이고, 그저 시간만 들이면 되는 일이지. 아마 보고 있으려면 지루할 거야.”

“대표님 얼굴을 보고 있는 건 하루 종일이라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

살짝 눈썹을 찡그린 가온이 그 말에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혹시 차원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다가 길이 생기는 걸 보고 달려드는 영혼이 있을 수도 있어. 그런 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갇혀 있던 것들은 하찮은 잡령들이니 나 혼자서도 충분히 처리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차 관장의 방식으로 처리하는 게 이 건물의 안전을 위해서 나을 것 같아.”

“네. 집중하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각을 잡을 것까지는 없고.”

주의사항을 모두 전달한 가온이 오른팔을 사선으로 뻗자, 어디선가 모여든 물방울들이 서서히 검의 형태를 갖췄다. 검이 완성되자 가온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천천히 검을 휘둘렀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움직임에 따라 들쑥날쑥하게 일렁이던 공기가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밀도를 갖추기 시작하는 게 느껴졌다. 가온의 말대로 크게 힘을 들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반복, 반복, 또 반복이었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세 명의 영혼이 눈치를 보며 고개를 비죽 내밀었지만, 그중 둘은 지원이 바로 중천으로 보냈고, 동작이 빠른 나머지 하나는 잽싸게 달아났다. 그 이후로는 전혀 방해가 없었다.

정확하게 3시간이 지난 후, 아무것도 없던 지하실 중앙에 건물 입구와 똑같은 모양의 튼튼한 나무문 하나가 생겼다. 그 문을 열고 제대로 중천으로 통하는지 확인한 가온은 몹시 흡족한 얼굴로 계단을 올랐다.

“이번에 가시면 정말 다음에는 중천에서 뵙겠네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다가, 내가 있는 동안에는 중천으로 오지 말게.”

“대표님도 참. 그러면 제가 백 살이 넘습니다.”

“요즘 세상에 드문 일은 아니잖아.”

가온의 말에 사람 좋게 웃고 있던 노부인이 갑자기 표정을 흐리더니, 손수건을 꺼내 주름진 눈가를 꾹꾹 찍어내기 시작했다.

“저야 살 만큼 살아서 아무런 여한이 없지만…. 대표님이 좋은 인연을 만나서 알콩달콩 사시는 모습을 볼 수만 있었다면 정말 이놈의 세상에 한 줌도 미련이 없었을 텐데요.”

“울 거 없어. 아까 말했잖아, 이 훤칠한 청년이 정말로 내 애인이라고.”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로 눈을 끔뻑이던 노부인은, 가온이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붉히자 서서히 입을 벌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발그레해진 가온의 볼에 지원이 살포시 손등을 대보는 광경을 목격하고는 한순간 무릎이 꺾여 크게 휘청했다.

“지, 진짜로요?!”

가이드 일가가 100년 동안 운영해 왔다던 호텔은 긴 역사만큼이나 중후한 외관을 자랑하고 있었다. 가급적이면 신축 호텔을 주로 이용하던 지원이었지만, 이렇게 세월의 흔적이 멋스럽게 배어 있는 호텔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품위가 있었다.

없던 통로를 새로 만드는 건 꽤 수고스러운 작업이었지만, 열려 있는 통로를 닫는 건 순식간이었다. 총지배인의 안내를 받아 옥상 정원에 올라간 가온은 굵직한 나무 기둥 앞에 서더니 단 한 번 크게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투명한 유리문처럼 기둥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출입구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제 완전히 없어진 건가요?”

“아직은. 일단 살아 있는 사람의 눈에는 절대로 보이지 않겠지만. 중천과의 왕래가 끊기면 모여 있던 영기도 흩어질 테니, 점차적으로 사라지겠지.”

“얼마나 걸립니까?”

“글쎄. 그건 예측할 수 없어. 몇 시간 만에 완전히 사라지기도 하고, 후임 중천주가 선임된 이후까지 남아 있을 수도 있고.”

시간이 지날수록 가온의 눈 밑이 점점 거뭇해졌다. 동시에 지원의 속도 까맣게 타들어 갔지만, 모처럼 미국에 방문한 중천주는 할 일이 많았다. 서부 쪽에 거주하는 상급 가이드들을 만나서 최근의 동향을 보고받은 가온은, 그중 가이드들이 해결하지 못하고 있던 사건들을 직접 처리하기도 했다.

“아…. 오늘은 정말 피곤하네.”

밤이 깊어서야 일정을 마친 가온은 겨우 샤워를 하고는 거의 쓰러지다시피 침대에 풀썩 누웠다. 가온의 젖은 머리가 너무나도 마음에 걸렸지만, 지원은 당장이라도 헤어드라이어를 들이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70시간 넘게 깨어 있던 가온은 이미 거의 빈사 상태였고, 그런 그녀를 소음으로 괴롭히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 얼른 주무세요. 아침에는 일어나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일찍 출발해야 하지 않아?”

“어차피 공원 내에서 하루 야영을 할 거니까 서두르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 건 신경 쓰지 마시고 마음 편히 주무세요.”

“….”

어느덧 고른 숨소리를 내기 시작한 가온을 보며 지원은 기가 막혔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그 독한 수면제를 처방받아서 먹는 사람이 두 마디를 못 하고 이렇게 곯아 떨어졌을까. 며칠 못 본 새에 턱이 뾰족해진 가온을 더없이 안쓰럽게 내려다보던 지원이 욕실에서 마른 수건 두 장을 챙겨왔다. 그리고는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가온의 젖은 머리카락을 톡톡 두드리며 천천히 말리기 시작했다.

덴버 공항 주차장에서 난생처음으로 캠핑카에 올라탄 가온은, 여태까지 지원이 봐 왔던 것 중 가장 큰 목소리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스스로도 놀라서 입을 막았을 정도로 격렬한 반응이었다.

“우와.”

“마음에 드십니까?”

“캠핑카라는 건…, 텐트의 기능을 대신하는 거라고만 생각했었어. 천막보다 좀 더 튼튼한 잠자리 정도라고 생각했지, 이렇게 집 한 채가 들어 있을 줄은 몰랐는데?”

“화장실도 있고 샤워실도 있으니 편하게 쓰시면 됩니다. 간식거리도 적당히 채워두라고 했으니 목이 마르거나 출출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시고요.”

먹을거리로 꽉 채워진 작은 냉장고를 본 가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것도 다 할 수 있어?”

“그럼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으로 안 되는 게 어딨습니까.”

다시금 캠핑카의 내부를 둘러보던 가온은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는 바람에 작게 인상을 썼다. 어디가 아픈가 싶어서 잠깐 당황했었지만, 침착하게 상태를 가늠해보니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본능적으로 심박수를 낮추기 위해 깊게 호흡하던 가온은, 비로소 자신이 조금 신이 났다는 걸 알았다. 흥분으로 가슴이 뛴다는 게 바로 이런 거였다.

“구경은 나중에 천천히 하시고 일단 앉으세요.”

가온을 조수석에 앉힌 지원은 안전벨트를 매준 다음 바삭하고 짭짤한 감자칩 한 봉지를 안겼다. 그리고는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내서 텀블러에 담은 후 어젯밤 호텔 근처에서 미리 구입해 둔 블루보틀 볼드 캔을 하나 따서 그대로 쏟아 부었다. 생수를 조금 섞고 살살 흔들어 가온에게 내밀자, 커피 향을 맡은 그녀가 많은 감정이 담긴 눈으로 저를 쳐다보았다.

“바로 내려서 마시는 것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제법 입에 맞으실 겁니다.”

진한 초콜릿 풍미가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가온은, 웃어야 좋을지 울어야 좋을지 알 수 없는 얼굴을 했다. 그런 그녀를 곁눈질로 힐끔 쳐다보던 지원이 조용히 입꼬리를 올리며 선글라스를 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거니슨 국립공원에 입장해서 첫 번째 전망대에 도착한 두 사람은 블랙 캐니언이라는 이름이 붙은 수백 미터 높이의 기암괴석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장엄하다 못해 위압적이기까지 한 풍경 앞에서 한참을 말없이 서 있던 가온이 아련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전임 중천주가 이곳 사람이었어.”

“그랬습니까.”

“내가 처음으로 외국 땅을 밟았던 곳도 여기고. 그때는 지구상에 이런 대륙이 있는 줄도 몰랐었는데, 세상에 이런 별천지가 있나 했지.”

가온을 여기로 데리고 온 것은 상천제였다. 전임 중천주의 임기가 한 달 남짓 남았으니 그가 하는 양을 보고 참고하라는 거였다. 중천으로 향하는 통로는 이곳에 있었지만, 전임 중천주가 실제로 거주하던 곳은 여기에서 조금 떨어진 큰 호숫가 마을이었다. 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그곳 사람들은 자신들의 터전을 가핀카오라고 불렀다.

“딱 떨어지게 해석할 수 있는 말이 없었는데…, 그래도 굳이 비슷한 뉘앙스를 찾자면 ‘낙원의 샘’정도였던 것 같아.”

“굉장히 시적인 작명 센스네요.”

“물론 풍광도 근사했지만, 세상을 참 아름답게 보는 사람들이었지.”

호숫가 들판에 제 키를 훌쩍 넘기는 해바라기가 끝도 없이 피어 있던 광경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장면이다. 그토록 화려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꽃을 처음 본 가온은 당시에 정말 큰 충격을 받았었다.

“낙원의 샘, 태양의 쉼터, 하늘 꽃, 봄의 향기, 천사의 종소리, 아기의 미소…. 원래의 말로 기억하고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고유의 언어는 있었지만 문자가 없는 부족이어서 남기질 못했어. 이제는 부족 자체도 완전히 사라져버렸고. 순하고 선량한 사람들이라 다른 이를 다치게 하질 못해서.”

전임 중천주는 가온에게 이 일대의 많은 곳들을 보여주었지만,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단연 태양의 쉼터다. 그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는 대체로 그곳을 찾는다고 했었다.

- 심판 업무에 너무 지칠 때마다 나는 이곳에 와. 그러면 너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주는 자연의 소리가 있어. 애초에 나는 완벽한 인간일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마음이 조금 편해지지.

협곡 사이를 세차게 흐르던 강이 굽이를 돌며 조금 여유를 부리는 곳이었다. 바닥까지 해가 닿지 않는 좁고 깊은 협곡이었는데, 기가 막힌 각도로 비집고 들어온 햇빛이 강물을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게 했었다.

“한 번쯤은 꼭 다시 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어. 일단은 이 대륙에 발을 들이는 것 자체부터가 쉽지 않았고.”

“그러셨군요. 꼭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길을 따라 천천히 둘러보며 이동하던 중에 날이 어두워졌다. 미리 예약해 놓은 야영지에 자리를 잡은 지원은 가온을 옆에 앉혀 둔 채로 간단한 요리를 시작했다. 능숙하게 조리도구를 사용하는 지원을 보며 가온이 상당히 흥미롭다는 얼굴을 했다.

“요리도 할 줄 알아?”

“이 정도를 요리라고 할 수 있나요.”

대수롭지 않은 대답이었지만, 지원이 내놓은 결과물은 기대 이상이었다. 베이컨과 완두콩, 양파를 넣어 만든 오믈렛은 모양부터 그럴싸했고, 경단처럼 동그랗게 만든 미니 주먹밥은 별로 넣은 게 없는 것 같은데도 희한하게 고소하고 맛있어서 자꾸만 손이 갔다. 거기에 뜨끈한 양송이 수프를 곁들이니 나무랄 데 없는 근사한 한 상이 되었다.

“차 관장 정말 대단하네. 어떻게 이렇게 다 맛있어?”

“캠핑을 할 때 먹는 음식은 원래 다 맛있습니다. 아무래도 기대치가 작아서 그렇겠죠. 그리고 수프 같은 건 완전히 조리된 걸 데우기만 한 거고요. 대기업에서 심혈을 기울여서 대중적인 입맛에 맞춰서 만든 건데 맛이 없으면 그게 더 문제 아니겠습니까?”

야무지게 과일까지 후식으로 내놓은 지원은 정리를 돕겠다는 가온을 극구 만류하며 샤워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마음은 정말 감사하지만, 혼자 하는 게 빠릅니다. 씻고 나오세요.”

지원이 호언장담한 대로 가온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환기까지 모두 마친 주방은 이미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고, 운전석 위에 다락처럼 마련된 안락한 침실에는 폭신한 침구가 깔려 있었다. 조명을 낮추고 천창을 열자 하늘에 가득한 별들이 당장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별빛이 원래 이렇게 밝은 거였나…. 이와 비슷한 하늘을 떠올리려니 너무 먼 과거로 거슬러 가야 했다. 한참 동안 넋을 잃고 별을 바라보던 가온은 샤워를 마친 지원이 제 옆에 눕지 않고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자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왜 눕지 않고? 나도 이런 하늘을 정말 오랜만에 보는데. 차 관장은 그간 별로 볼 기회가 없지 않았어?”

“지금 대표님 곁에 누우면 안 될 것 같아서요.”

덤덤한 말투였지만, 많은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가온의 눈이 동그래지자, 피식 웃음을 흘린 지원이 손끝으로 가온의 눈가를 살살 매만졌다. 이런 종류의 긴장감은 처음이라 가온은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아…, 음….”

“아무 말도 안 하셔도 됩니다. 이유를 물으시니 대답한 것뿐이고, 부담을 드릴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냥 지금처럼 편하게 별을 보시다가 잠이 오면 주무세요.”

“그럼 차 관장은…, 어디에서 자?”

“저는 저 밑에서 자면 됩니다.”

“불편할 것 같은데….”

탁자가 놓인 주방 공간을 힐끔 바라본 가온이 못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자, 지원이 눈꼬리를 곱게 접으며 생긋 웃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원래 밤에는 침대로 개조할 수 있게 설계가 되어 있고요.”

“하지만….”

“대표님. 그냥 못 이기는 척 대표님 옆에 누워버리고 싶게 만들지 마세요. 지금은 대표님과 단둘이 여행을 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지만, 사람 욕심은 끝이 없어서 제가 오늘 밤 어디까지 하고 싶어질지 알 수가 없습니다.”

조용히 당혹스러워하는 가온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인 지원은 그녀의 이마에 살포시 입을 맞추고는 미련 없이 몸을 일으켰다.

“머리도 식힐 겸 한 바퀴만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잘 준비 하고 계세요.”

이미 다 씻고 잠옷도 입고 누웠는데 무슨 잘 준비를 더…. 의문이 가득한 눈을 천천히 깜빡이던 가온은 지원이 제가 마음 편히 화장실을 갈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한 거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저도 모르게 나직한 탄성을 터트렸다.

“아….”

어떻게 저런 사람이 있을까. 지원이 보기 드물게 세심한 남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가 저를 상사가 아닌 여자로 대한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은 순간 마음이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말마따나 옆에 누워서 뭔가 더 욕심을 부렸다면 넘어가 줬겠구나. 답답한 숨을 길게 토해낸 가온은, 다시금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처음의 감격과는 달리 별에 대한 흥미가 조금 시들해졌다. 도대체 얼마나 크게 한 바퀴를 돌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는 지원은, 한참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당연히 잠은 오지 않았다.

1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야 겨우 돌아온 지원은 한 번 더 샤워를 하더니 주방 앞에 잠자리를 만들고 누웠다. 쉽게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고, 서로가 깨어있다는 걸 둘 다 알고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아….”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던 가온은 반사적으로 지원의 눈치를 살폈다. 여느 때라면 대번에 어디가 불편한지 물었을 지원이 조용했다. 동시에 가온은 방금 전 지원이 두 번째 샤워를 할 땐,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밤중의 냉수마찰이 의미하는 바를 곱씹던 가온은 괜히 얼굴이 붉어지는 느낌에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 조금 더웠지만 도저히 얼굴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아침이니까 따뜻한 걸로 드세요.”

“응.”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머그잔을 받아든 가온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삶은 달걀을 으깨서 소스에 버무려 속을 채운 토스트에 치즈를 한 장 올려 만든 간단한 샌드위치와 따뜻한 커피 한 잔이 오늘의 아침이었다.

태연하게 제게 음식을 내미는 지원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폈지만, 가온의 눈썰미로는 불면의 흔적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자신이 먹을 샌드위치를 만드느라 가온의 얼굴을 보는 것 같지도 않던 지원이 약간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는 잘 잤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독심술도 해?”

“대표님은 얼굴에 다 드러나니까요.”

“사람들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던데.”

“그러니까요. 저도 그게 참 신기합니다. 이렇게 훤히 보이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는지.”

가온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지원이 불현듯 목울대를 크게 한 번 움직이더니, 가온의 입가에 묻은 소스를 엄지로 닦아냈다.

“…!”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도 애매하고, 무슨 짓이냐고 타박을 하기도 어색했던 가온은 그저 말없이 남은 샌드위치를 먹는 데만 집중해야 했다.

어제는 천천히 이동하며 경치가 좋은 곳을 발견할 때마다 차를 세우던 지원이, 오늘은 왜인지 어딘가를 향해 쉬지 않고 달렸다. 이유가 조금 궁금하긴 했지만, 지원이 하는 일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가온은 그저 여유로운 마음으로 차창 밖의 경치를 감상했다.

“대표님, 내리십시오. 지금부터는 좀 걸으셔야 합니다.”

전망대 안내판을 힐끔 바라본 가온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원의 뒤를 따라나섰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접근할 수 있었던 다른 전망대와 달리, 이번에는 꽤 험한 길을 한참 걸어야 했다. 어둑하고 좁은 협곡 사이로 꼬불꼬불 난 길을 걷던 가온은 어느 순간부터 슬슬 눈에 익은 지형이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

줄곧 아무 말도 없이 빙그레 웃기만 하던 지원이 계곡에 도착하고 나서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대표님, 여기가 ‘태양의 쉼터’가 맞습니까?”

무언가를 단단히 지키듯 사방을 둘러싼 검은 벽, 그 누구의 휴식도 방해하지 않으려고 소리를 죽인 채 흘러가는 강물, 그것들을 치하하며 포근하게 내리쬐는 햇살, 그리고 막 고개를 들기 시작한 해바라기. 가온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여기를…, 여기를 대체 어떻게 찾았어?”

“너무 감동하시니까 좀 민망하네요. 그렇게 어렵진 않았습니다. 말씀하셨다시피 문자가 없는 부족이어서 그런지 문헌은 남아 있는 게 없었지만. 지도하고 위성사진을 확인해보니까 후보지가 세 군데 정도 나오더군요. 어제 두 군데를 갔었고, 여기가 마지막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급변하는 시대에도 자연은 그저 우직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기억 속의 장소와 한 치도 다를 바가 없는 계곡을 가온은 한참 동안 말없이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저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뒤로 물러서 있던 지원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인생의 가장 강렬했던 추억 중의 하나를 다시 실물로 보게 된 감격보다, 지금 이 남자가 제 눈앞에 있다는 희열이 더욱 컸다.

“차 관장.”

“네, 대표님.”

“나…, 차 관장을 되게 좋아하는 것 같아.”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지원이 서서히 입꼬리를 올리며 시원스레 웃었다. 그리고는 싱그러운 미소가 담긴 얼굴 그대로 고개를 내려 가온의 입술을 가볍게 훔쳤다.

“저만큼은 아닐 겁니다.”

“하.”

나직하게 웃음을 터트린 가온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지원이, 이번에는 한결 진지해진 눈빛을 한 채 가온의 허리를 바짝 당겨 안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꺾었다. 두 번째 입맞춤은 이전보다 훨씬 진하고 애틋했다. 호흡을 위해 내주는 찰나의 시간조차도 아까울 정도였다.

사랑에 빠진 연인을 축복하듯 따사로운 햇살이 점점 강하게 내리쬐기 시작했다. 필연적으로 더욱 짙어진 그림자 속에서 누군가가 꽉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건 누구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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