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7. 연 (8/18)

07. 연

짙은 안개 속을 걸어가던 로아가 커다란 연못 앞에 멈춰 섰다. 어지간한 학교 운동장만 한 크기의 연못에는 눈송이처럼 새하얀 연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탐스러운 꽃송이 하나하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말 그대로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우와, 여기가 어디야? 어떻게 이렇게 예쁜 데가 있어? 분위기가 사극 같은 거 찍기 딱 좋겠다. 당장 선녀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아.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던 로아는 연못 건너편에 색이 고운 한복을 입은 소녀가 오도카니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소녀가 입고 있는 건 요즘 사람들이 많이 입는 현대적인 한복이 아니라, 노리개에 머리꽂이, 그리고 배씨댕기까지 격식에 맞게 갖춘 제대로 된 전통 한복이었다.

진짜 사극을 찍고 있는 모양이네? 그럼 여기가 촬영장인가? 그런데 왜 아무도 통제를 안 하지? 어쨌든 괜히 한소리 듣기 전에 얼른 나가야…. 항상 눈치를 보던 습관 때문인지 최대한 몸을 움츠린 채 밖으로 나가는 길을 찾아 헤매던 로아는, 한참을 걸었는데도 연못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조금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멀리서 봤을 때는 이렇게 넓지 않았었던 것 같은데….

“언니.”

“…응?”

누군가 저를 부르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던 로아는 조금 전에 연못 건너편에서 보았던 소녀가 바로 제 뒤에 다가온 것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그러나 곧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던 게 조금 미안해진 로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웃으며 허리를 조금 숙여 소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안녕? 나 불렀니? 여기 무슨 드라마 촬영장이야?”

“언니. 언제 올 거야?”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나 데리러 언제 올 거냐고.”

로아가 제 말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자 짜증이 났는지, 소녀의 눈매가 조금 사나워졌다. 처음 봤을 땐 마냥 인형처럼 귀엽고 예쁘다고 생각했었는데, 얼굴에 표정이 드러나는 순간 왠지 가까이하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확 들었다. 저도 모르게 소녀와 거리를 벌린 로아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나갈 길을 도저히 못 찾겠어. 여전히 안개가 자욱해서 주변은 잘 보이지 않았다.

“미안한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누굴 찾고 있어?”

“언니를 찾고 있었다고. 그런데 이제 찾았으니까 됐어. 빨리 데리러 오기나 해.”

도무지 말이 통하질 않았다. 얘 정신이 조금 이상한 거 아니야? 그러고 보니까 눈빛도 조금 살벌한 것 같고…. 혹시 흉기라도 숨긴 건 아닐까 싶어서 살짝 무서워졌던 로아가 뛰어서라도 여길 벗어나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이었다.

갑자기 어디선가 강한 바람이 휙 불더니 소녀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 흐트러졌다. 대번에 안색이 변한 소녀가 한껏 신경질을 내며 머리카락을 정돈하기 위해 팔을 들어 올렸는데, 소매 틈으로 익숙한 팔찌가 보였다.

“…!”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여태까지 느꼈던 위화감이 한꺼번에 설명되는 순간이었다. 이건 지금 현실이 아니라 내 꿈이야. 그리고…, 엄마가 줬던 팔찌가 나를 찾고 있어! 몸을 덜덜 떨기 시작한 로아를 보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던 소녀가 별안간 입꼬리를 크게 올리며 씩 웃었다. 섬뜩했다.

“헉!”

“로아 씨, 왜 그래요? 어머. 갑자기 왜 이렇게 식은땀을 흘려? 어디 아파요?”

“아…. 아니요.”

온몸에 기운이 쭉 빠진 로아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나 숍에서 머리하고 있었지. 아, 진짜 다행이다. 나 지금 너무 놀라서 수명이 10년은 줄어든 것 같아.

“잠깐 꿈을 꿨나 봐요.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놀라셨죠?”

“아휴, 죄송하긴. 피곤해서 졸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 그런데 잠든 지 5분도 안 된 것 같은데, 그새 악몽을 꿨어요?”

“…네.”

“갑자기 너무 바빠져서 몸이 허해졌나 보다. 오늘도 촬영 있죠? 원래 배우들 드라마 들어갈 땐 보약 같은 거 많이 먹어요. 로아 씨도 이제 몸도 챙기고 그래야지.”

“네. 감사합니다.”

가까스로 웃는 낯을 유지한 로아가 다시 잠들지 않기 위해 손톱으로 손바닥을 아프게 꾹꾹 눌렀다. 하지만 이틀이나 밤샘 촬영을 한 탓인지 졸음은 쉽게 물러가질 않았다.

아, 서 감독님 작업실에 가고 싶어. 항상 거기에 가면 몸도 가뿐해지고 기분도 좋아졌는데. 말투는 무뚝뚝하지만 되게 좋은 분이시고. 도겸을 떠올리자 로아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배시시 미소가 지어졌다. 다음 녹음까지는 2주나 남았네. 언제든 연습하러 오라고 하셨는데, 오늘 가도 될까? 일단 메시지를 보내 볼까?

한참 동안 휴대폰을 만지작거렸지만, 로아는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도겸은 제게 호의적인 사람이 많지 않은 연예계에서 저를 아무런 편견 없이 봐주는 몇 안 되는 귀중한 지인 중 한 명이다. 시도 때도 없이 귀찮게 굴다가 미움을 사고 싶지는 않았다.

조심해야 돼, 항상. 말도 조심, 행동도 조심. 언제 어디서 나를 넘어뜨리려는 사람이 나올지 몰라. 연습생 시절을 포함해서 연예계 생활 7년 동안 뼈저리게 배운 교훈이었다. 몸을 긴장시키니 더 이상은 잠도 오지 않았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너 대표님이라고 부르는 여자 만나더라?”

막 술잔을 기울이던 지원이 동하의 말에 표정을 조금 굳히며 그대로 술잔을 내려놓았다. 일단 대표님이라는 단어도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만나더라는 표현이 더 신경이 쓰였다. 이 녀석이 어디서 뭘 봤길래 만난다고 단언하는 거지?

“어디서 봤어?”

“아파트 로비에서.”

아…, 뉴욕에서 돌아오던 날. 확실히 내가 피곤하긴 했구나. 말소리가 들릴 정도까지 가까이 왔는데도 인기척을 못 느낀 걸 보면. 하긴 대표님하고 있을 때는 내가 다른 데에 신경 쓸 여유가 없긴 하지.

“런던 출장에 동행했던 사람 맞지? 나하고 했던 약속 펑크 내게 만든 사람. 아니야?”

“하.”

살짝 질린 얼굴을 한 지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여간 이 자식은 뭘 들으면 잊는 법이 없어.

“그런데 너 마음 접을 것 같지 않던데?”

“대체 뭘 보고?”

“가방, 엘리베이터, 그리고 너 목소리 까는 거. 너 엄청 폼 잡더라?”

“….”

그건 사실이기에 달리 할 말이 없다. 슬쩍 낯이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지원은 최대한 태연하게 대꾸했다.

“남자들 다 똑같지 않나? 여자를 불알친구 대하듯 할 수는 없잖아.”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대체 어디 대표님이신데 그렇게 깍듯하게 모셔, 천하의 차지원이?”

“제니스 컴퍼니.”

“…뭐?”

“제니스 컴퍼니 오너시라고.”

어지간해서는 당황하는 법이 없는 동하가 당장 주먹이라도 넣을 수 있을 정도로 입을 크게 떡 벌렸다. 지원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동하가 이렇게까지 놀라는 건 처음 봤다.

“야…. 차지원아. 너 몇 달 못 본 사이에 굉장히 스케일이 커졌다?”

“사람을 스케일 따져가면서 좋아하냐?”

“그래서 네가 진짜 제니스 컴퍼니 대표를 만난다고?”

“백동하.”

동하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한쪽 눈썹을 크게 꿈틀거린 지원이 검지를 입에 대며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줬다. 점잖은 놈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일단 대표가 아니라 대표님. 그리고 만나는 건 아니야. 그냥 내가 좋아하는 거지.”

“그분도 너를 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던데?”

“….”

매끈하던 지원의 이마가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사실 지원도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긴 했다. 꼭 남자 여자가 아니더라도 자신은 가온에게 확실히 남들과는 다른 입장이긴 하다. 그래서 더 마음을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호감과 호의를 구분하지 못하고 괜히 헛된 희망에 들떴다가 한순간에 나락으로 처박히는 일이 없도록.

“게다가 여자가 밥 싸 들고 집까지 찾아왔으면 게임 끝 아니냐?”

동하의 말에 짧은 한숨을 내쉰 지원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날은 특수한 상황이었잖아. 일반론을 적용하긴 어렵지. 게다가 그 밥을 직접 해주신 분은 따로 있고.”

“그래? 그럼 그날 둘이 집에 들어가서 뭐 했는데?”

“밥 먹고, 잠깐 앉아 있다가, 댁까지 모셔다드렸지.”

“그게 끝이야?”

“끝이지 그럼. 뭐가 더 있어?”

아닌데. 둘 사이에 스파크가 팍팍 튀던 걸 내가 분명히 봤는데. 동하의 예리한 눈매가 갸름해졌다.

“평소에는 연락 안 해?”

“너는 대체 뭐가 그렇게 궁금하냐? 만나는 거 아니라고 했잖아. 연락 안 해. 연락할 수도 없어. 휴대폰도 안 들고 다녀서.”

“대박. 21세기 사람이 휴대폰도 없이 산다고?”

“없는 게 아니라 안 들고 다니신다고. 옆에 대신 들고 다니는 사람이 있어. 그 얘기 좀 그만하자, 이제.”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 지원이 미간을 확 찌푸리며 술잔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지원의 휴대폰에서 희한한 벨소리가 울리더니 ‘보안실장’이라는 발신자가 떴다. 동하의 표정이 조금 떨떠름해졌다. 얘 요새 왜 이렇게 직급 있는 사람들하고 놀아? 자기는 예술가라 자유로운 영혼이라더니?

“네, 차지원입니다. 네, 실장님. 아니요. 밖에 나와 있습니다. 이 시간이면…, 본사까지 한 30분은 걸릴 것 같은데요. 무슨 일 있습니까?”

수화기 너머의 상대가 뭐라고 했는지, 지극히 이성적이던 지원이 대번에 표정을 바꿨다.

“대표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그리고는 전화를 끊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간다.”

“대체 무슨 일인데?”

“나중에 전화할게.”

동하의 질문에 제대로 대꾸도 하지 않은 지원이 그대로 나가버렸다. 어이가 없어진 동하는 그 다급한 뒷모습을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 회사는 직원이 한둘도 아닌데 왜 대표님을 차지원한테서 찾아? 그리고 차지원 너는 뭐야? ‘대표님’ 한마디에 저렇게 파랗게 질려서 허둥지둥 달려가면서 곧 죽어도 만나는 건 아니야? 웃기고 있네. 사람을 속이지 귀신을 속이냐? 입꼬리를 비틀며 코웃음을 치던 동하가 휴대폰으로 뭔가를 검색하더니 더욱 기막힌 표정을 지었다.

“이게 뭐야? 제니스 컴퍼니 대표, 성명 주가온. 생년월일 미상, 출생지 미상, 가족관계 미상, 학력 미상…. 허. 무슨 프로필이 이따위야?”

휴대폰 화면을 노려보며 심각하게 고민하던 동하가 바로 제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도 직급이라면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다고. 뻐기듯 중얼거리던 동하가 짜증스럽게 혀를 차며 목덜미를 주물렀다. 아…, 나 진짜 예전에는 이렇게 유치한 인간이 아니었는데…. 김 병장 그 개….

[네, 상무님. 말씀하십시오.]

“사람 하나 프로필 좀 봅시다. 제니스 컴퍼니의 주가온 대표. 개인적으로 알아볼 일이 좀 생겼는데, 인터넷에는 뭐 나오는 게 없어서. 서두를 필요는 없고, 최대한 자세하게 알아본 다음에 갖다 줘요.”

요즘 가온은 하루에 한 번씩 본사 근처에 있는 아담한 카페에 들르는 게 습관이 되었다. 중천에서 골치 아픈 망자들에게 시달리며 기력이 쭉 빠져도, 시원한 커피 한 잔을 마시면 기운이 났다. 기분 탓인지 두통도 좀 줄었다. 제가 커피를 즐겨 마신다는 걸 알게 된 희주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었지만, 생각했던 것만큼 싫은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 이제 운동도 하시고, 잠도 잘 주무시니까…. 그래요, 다른 걸 다 떠나서 대표님한테도 즐기실 만한 게 있어야겠죠. 그래도 너무 많이 드시진 마세요, 네?

희주의 간곡한 당부대로 하루에 반 샷만 내린 커피 한 잔, 그것이 가온이 즐기는 유일한 도락이었다. 얼굴에 전혀 드러나진 않았지만, 카페로 가는 길은 항상 조금은 신이 난다. 오늘도 청량한 종소리를 들으며 기분 좋게 카페에 들어간 가온은 구수한 커피 향과 익숙한 한적함에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이 동네는 건물 임대료가 굉장히 비싸다던데. 올 때마다 손님이 거의 없어 조만간 카페가 망하지는 않을까 하는 것만이 소소한 걱정거리였다.

“어서 오세요. 어? 안녕하세요. 오늘은 많이 늦으셨네요. 오후에 안 오시길래 오늘은 못 오시나 했어요.”

낯선 이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 걸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이런 살가운 인사에도 제법 익숙해졌다.

“일이 늦게 끝나서요.”

“매일 드시던 걸로 드릴까요?”

“네.”

가온은 태어나 처음으로 단골의 위엄이라는 것을 실감하는 중이었다. 매번 복잡한 주문을 되풀이하지 않아도 되었고, 젊은 사장 혼자서 하루 종일 카페를 지키고 있었기에 굳이 모르는 사람과 불편하게 안면을 틀 필요도 없었다.

“손님. 커피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고마워요.”

지원이 골라준 원두는 여전히 가온의 입맛에 딱 맞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 카페에서 파는 다른 종류의 원두도 한 번씩 먹어 보았지만, 이것만큼 맛있는 건 없었다.

“저기요, 손님.”

구석자리에 앉아 조용히 커피만 마시고 가는 가온에게 내내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던 젊은 사장이 웬일로 접시 하나를 들고는 가온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살짝 눈썹을 들어 올려 의문을 표하는 가온에게 멋쩍은 얼굴로 접시를 내밀었다.

“제가 요즘 새로운 베이커리 메뉴를 개발하고 있거든요. 애플파이인데 모양이 이렇게 뭉개져서…. 팔려고 내놓을 수는 없고, 혼자 다 먹기는 많고 해서 맛만 보시라고 가져왔어요. 부담 갖지 말고 드세요.”

“감사합니다.”

사장의 말대로 돈을 받고 팔 수 있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사실 이 카페의 베이커리는 인사치레로라도 썩 훌륭하다고 볼 수는 없는 수준이다. 맛은 모르겠지만 일단 생김새가 사람의 식욕을 돋우질 않는다. 만든 사람이 제 입으로 뭉개졌다고 표현한 애플파이는 이게 파이인지 아직 파이가 되기 전의 반죽인지도 구분이 되지 않는 상태였다. 하지만 약간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용기를 내어 한 입 먹어보니, 의외로 맛은 그럴싸했다.

“맛있네요.”

“아, 정말요? 팔아도 되겠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부단한 연습과 노력이 필요할 것 같지만. 잠시 망설이던 가온은 청년 사장의 밝은 미래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플파이 한 개를 다 먹고, 마지막으로 남은 커피 한 모금을 마시려던 가온이 창밖에서 저를 보고 있는 아이를 발견하고는 작게 인상을 썼다. 한눈에 보기에도 아이의 상태는 예사롭지 않았다.

일단 사람은 아니었지만, 생전의 공과가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 걸 보니 망자도 아니었다. 저를 볼 수 있는 사람을 찾아 헤맸었는지, 아이는 가온과 눈을 맞추고는 작은 어깨를 들썩이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하는 모양이 가련하고 안쓰러워 가온의 입에서도 한숨이 흘러나왔다.

서둘러 밖으로 나간 가온은 직접적으로 제 기운을 접하자마자 주춤 뒤로 물러서는 아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는 아이가 지레 겁을 먹고 도주하지 못하도록 뒤를 막은 채 아이의 상태를 유심히 살폈다. 생령이군. 아마도 육체는 혼수상태인 모양이고. 작게 혀를 차며 아이가 입고 있는 환의를 살피던 가온이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가, 이름이 뭐지?”

“엄마가 모르는 사람한테는 이름 알려주지 말라고 했는데….”

“그래. 교육을 잘 받았구나. 그럼 이름을 알려줄 수 없는 꼬마야. 너 지금 동명병원에 있니?”

“네.”

“거기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건 알고 있지?”

영혼이 육체를 너무 오래 떠나 있으면, 그 육신은 머지않아 생명력을 잃는다.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이런 상태의 영혼들은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가온의 짐작대로 아이는 커다란 눈망울을 끔뻑이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이런 곳을 돌아다니고 있어?”

“엄마가 없어서 찾으러 나왔는데…. 골목이 너무 복잡해서 길을 잃었어요.”

“그럼 내가 데려다주마. 함께 가자.”

여전히 경계심이 가득한 얼굴인 아이는 제게 손을 내미는 가온을 빤히 쳐다보다가 한참 만에 겨우 손끝을 살짝 잡았다. 그래도 가온의 기운이 악하지는 않다고 느끼는 모양이었다.

“지금 몇 살이니?”

“처음에 다쳤을 땐 여덟 살이었고, 지금은 아홉 살이에요.”

“고생이 많았구나.”

“엄마가 더 많이 고생했어요.”

“착하네.”

더없이 기특한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던 가온이 본사 쪽을 힐끔 바라보고는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마실이 너무 길어지면 권 실장이 걱정할 텐데. 하지만 아직 살아 있는 아이를 데리고 악령들이 득실거리는 중천 근처로 갈 수는 없다. 더구나 음기가 넘치기 시작한 시간이니 후미진 골목에 아이를 홀로 놔둘 수도 없다. 천행으로 아무 일 없이 여기까지 왔지만, 돌아갈 육신이 남아 있는 어린 영혼은 악령들의 영순위 타깃이다.

사장한테 전화를 빌려서 권 실장을 부를까 생각하던 가온은, 자신이 현호의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오늘 돌아가면 권 실장의 전화번호 정도는 반드시 숙지해야겠군. 하지만 지금 당장 가장 중요한 일은 아이를 최대한 빨리 그 육신으로 돌려보내는 일이다.

가온의 손을 잡고 한참을 걸어 병원 근처에 도착한 아이는, 먼지처럼 병원 주변을 맴돌던 수많은 귀신들이 소리도 없이 사라지는 걸 보고는 놀란 눈을 커다랗게 뜨며 가온을 올려다봤다. 크게 감동받은 얼굴이었다.

“방금 아줌마가 한 거예요?”

“내가 뭘 한 것은 아니지만, 나를 보고 달아난 것은 맞다.”

“우와, 아줌마 되게 멋져요.”

“고맙구나. 이제부터는 혼자 갈 수 있지? 내가 여기서 지키고 있을 테니까 최대한 빨리 육신으로 돌아가렴. 그리고 앞으로는 몸을 너무 자주 비우면 안 된다. 행여 몸에서 절로 빠져나오더라도 절대로 멀리가면 안 돼. 그러다 아예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될 수도 있어.”

“…네.”

조금 풀이 죽었던 아이가 불현듯 뭔가 기대하는 얼굴로 가온의 옷자락을 잡았다.

“저기요. 제가 언제 깨어나는지 알려 주실 수 있어요?”

기대에 찬 눈빛이 안쓰러웠지만, 가온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가온의 능력으로는 알 수 없는 일이고, 설사 안다 해도 알려줄 수 없다.

“미안하지만 나는 무당이 아니야. 사람의 앞날 같은 건 볼 수 없어.”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잔뜩 실망한 기색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아이는 공손한 인사를 빼먹지 않았다. 그렇게 아이와 작별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몹시 다급하고도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민서야!”

가온과 아이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어깨가 축 늘어졌던 아이는 제 엄마를 보고는 반색하며 뛰어갔고, 가온은 어딘지 익숙한 느낌의 낯선 여자를 보고는 가만히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저 상태의 아이가 보이는 걸 보면 중천 직원인가? 딱히 생각나는 이름이 없는데…. 반면 난폭하게 아이의 손목을 잡아채서 제 등 뒤에 숨긴 여자는 가온의 얼굴을 보고는 깜짝 놀라며 신속하게 고개를 숙였다.

“대표님.”

“나를 아나?”

“네. 가이드 임소화입니다.”

“임소화…?”

이름은 귀에 익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여자를 훑어보던 가온은, 불과 몇 달 사이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그녀에게서 간신히 익숙한 얼굴을 찾아냈다.

“아, 임 선생.”

직접 상대할 일은 거의 없었지만, 일반 가이드 중에서는 실적이 많은 편이어서 마주칠 때마다 눈여겨봤었다. 항상 허름한 차림으로 생기가 없는 얼굴을 하고 다니던 소화는, 놀랍게도 아주 고급스러워 보이는 정장을 입고 전문가가 신경 써서 만진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나이에 맞지 않게 푸석하던 얼굴에도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형편이 많이 나아진 모양이군.”

“네…, 덕분에. 뜻하지 않은 행운을 얻게 되어….”

“다행한 일이네. 얼굴이 한결 좋아 보여.”

“…감사합니다.”

하지만 오래 아픈 아이를 둔 엄마의 행색으로 썩 어울리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더구나 영혼을 볼 수 있는 가이드가, 정작 제 아이가 밖을 헤매고 다니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이는 저를 만나기 전에도 한참을 헤맸다고 했다. 소화가 아주 오랜 시간 아이의 옆을 비웠다는 얘기다.

“임 선생 딸이 족히 서너 시간은 육신을 벗어나 돌아다니고 있었어. 그러면 어떻게 될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아이를 잘 지키고 있었어야지.”

“…죄송합니다.”

“나한테 죄송할 일은 아니지만…. 병원비 대느라 굉장히 힘들게 고생했었다는 얘기를 들어서 하는 말이야. 그랬는데 이리 허무하게 아이를 보내면 안 되잖아.”

“…네.”

심하게 나무란 것은 아니었지만, 소화는 가온의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왠지 가슴이 답답해진 가온은 묵직하게 속을 채우고 있던 한숨을 천천히 토해냈다. 같은 말을 해도 기왕이면 조금 더 좋게 말할 것을 그랬나. 하긴. 어미도 사람인데 어쩌다 한 번쯤은 제대로 차려입고 바람도 쐬고 싶겠지.

“그럼 고생하게. 민서는 얼른 회복해서 건강하게 잘 자라도록 해. 나한테는 아주 나중에 나이를 많이 먹고….”

일상적인 덕담을 건네던 가온이 순간 멈칫했다. 다행히 건강을 회복한다면, 30년 후의 아이는 한창때의 나이다. 그렇게 따지니까 정말 얼마 안 남았구나. 작게 실소한 가온이 덕담의 내용을 일부 수정했다.

“건강하게 잘 자라서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자.”

아이를 꼭 끌어안고 있는 소화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가온이 별자리의 위치를 확인하고는 조금 난감한 얼굴을 했다. 카페에 간다고 중천을 나섰을 때가 저녁 7시쯤이었는데, 벌써 2시간 가까이 지났다. 다시 걸어서 중천으로 돌아가려면 아무리 빠른 걸음으로 걸어도 족히 30분은 더 걸릴 것이다.

하아, 아주 난리가 났겠군. 택시를 타야 할까? 지금 현찰이…, 하나도 없는데. 신용카드로 결제할 수 있을까? 그래, 요즘엔 가능하다고 들었던 기억이 나. 목적지가 제니스 본사라고 얘기하면 알아듣겠지? 아니면 주소를 불러줘야 하나? 가온이 정확한 해답을 알 수 없는 고민을 하며 일단 큰길 쪽으로 타박타박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대표님!”

“차 관장. 차 관장이 여기는 웬일이야?”

길가에 아무렇게나 차를 세운 지원이 운전석 문을 벌컥 열고 나오더니 가온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빠르게 훑어 내렸다. 일단 눈에 띄는 상처 같은 건 없고, 제 발로 걸어 다니는 걸 보면 어딜 크게 다친 것도 아니고…. 완전히 핏기가 가셨던 지원의 얼굴에 간신히 혈색이 돌아왔다.

“왜 병원에서 나오십니까.”

“아…. 길을 잃은 어린 생령 하나를 데려다주느라.”

“생령이요?”

살아 있는 인간의 영혼을 생령이라고 한다. 모든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익히는 것이라 평소에는 크게 인식하지 못하지만, 사실 육체와 영혼을 한데 묶어두는 것은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한 행위다. 따라서 인간이 의식 불명 상태에 빠지거나 하면 육체와 영혼의 연결이 느슨해질 수 있다. 그러면 아주 가끔 몸을 빠져나온 영혼이 육체 밖으로 돌아다니기도 하는데, 대부분은 그 상태에서 망자가 된다. 사람이 정신 줄을 놓치면 죽는다는 건 바로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지원에게 간단하게 생령의 개념에 대해 설명한 가온이 제가 이곳에 와 있는 연유에 대해서도 짧게 덧붙였다.

“잠깐 밖에 나왔다가 그 상태로 혼자서 돌아다니고 있는 어린애를 봤어. 교통사고로 의식 없이 오래 누워 있던 아이였는데…. 이미 몇 시간이 지난 터라 더 지체할 수가 없었지. 그대로 아이가 사망하게 되는 것도 문제지만, 다른 영혼이 그 육신을 차지하게 되면 그건 정말 큰일이거든.”

“…그렇군요. 고생하셨습니다.”

목울대를 크게 움직인 지원이 약간 억눌린 목소리를 냈지만, 가온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저기…, 근데 차 관장. 나 권 실장한테 연락해야 하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말도 없이 왔거든.”

“제가 하겠습니다. 일단 타시죠.”

가온을 조수석에 태운 지원이 운전석으로 돌아가며 바로 보안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그래. 전화번호를 외워두기로 했지. 권 여사, 권 실장, 비서실장. 그리고…, 차 관장 것도 알아두어야 할까? 따지고 보면 요즘 제일 자주 만나는 사람인데.

“실장님, 저 차지원입니다. 동명병원 앞에서 대표님을 만났습니다. 아니요. 생령을 데려다주러 오셨다고…. 네. 네, 무사하십니다. 네, 제가 확인했습니다. 시간이 늦었으니 중천에 별일 없으면 무영당으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잠깐 딴생각을 하고 있던 가온은, 문득 통화 중인 지원의 목소리가 여느 때와 사뭇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이상하네, 항상 다정다감하던 사람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목소리가 딱딱하지? 기분이 별로 안 좋은가? 아, 어딜 급하게 가던 중이었나?

“차 관장. 바쁜 일이 있으면 나는 그냥 본사 근처에 내려줘도 돼.”

줄곧 정면을 응시하던 지원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몹시 복잡한 눈빛으로 가온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보고 있으려니, 가온은 왠지 제가 뭔가 크게 잘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게 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대표님.”

“응?”

“제가 대표님 불편하시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도 했고, 그 약속을 지키려고 부단히 노력도 하고 있지만, 사람을 향한 마음이라는 건 그렇게 쉽게 접히는 게 아닙니다.”

아니, 난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는데. 정말로 바쁘면 집까지 데려다줄 필요는 없다는 뜻으로…. 살짝 당황한 가온이 어떻게 말을 해야 제 마음이 제대로 전달될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카페에 가셨던 대표님이 그대로 사라지셨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제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대표님은 모르십니다.”

보통 가온은 커피를 마시러 가면 길어야 2~30분 안에 돌아왔다. 보안실장의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한 건, 가온이 본사를 나서고 40분이 지나면서부터였다. 그래도 모처럼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가온을 방해할 수가 없어서 일단 1시간이 될 때까지는 꾹 참았다.

1시간이 지나고 나서 조심스럽게 가온이 자주 다니는 카페를 찾아간 보안실장은, 가온이 이미 한참 전에 카페를 나섰고 본사 반대편 방향으로 걸어갔다는 진술을 확보하고는 완전히 사색이 되었다.

보안실에 비상이 걸렸다. 보안실 직원 중 일부는 즉시 주변의 CCTV 영상을 모아 분석을 시작했고, 또 다른 일부는 골목골목을 직접 발로 뛰며 가온을 찾아 나섰다. 나머지는 인근에서 활동하는 가이드들에게 다급한 연락을 취했다. 지원 역시 그 때문에 연락을 받은 가이드 중 한 명이었다.

- 차 관장님 지금 갤러리에 계십니까? 그럼 본사와 가까운 곳에 계시나요? 혹시 오늘 대표님과 연락 주고받으신 적 있으십니까? 대표님이 어디에 계신지는…, 현재 파악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급하게 본사를 향해 차를 몰고 오던 지원은 멀리 어느 한 지점에서 마치 폭발이 일어난 것처럼 망자들이 튕겨 나가는 장면을 목격했다. 저기다! 반색하며 내비게이션을 들여다본 순간, 지원은 온몸의 피가 식는다는 느낌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감쪽같이 사라지셨던 대표님이 2시간 만에 병원에서 발견되셨습니다. 제가 어떤 생각을 했을 것 같으세요?”

“차 관장….”

“물론 그걸 감당하는 건 제 몫입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냥 제 차를 타고 안전하게 귀가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가온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바로 시동을 건 지원이 부드럽게 핸들을 돌려 줄지어 달려오는 차량들 사이로 능숙하게 끼어들었다. 그리고는 곧이어 잔잔한 음악을 틀고 실내의 온도를 세심하게 조절하기도 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지원의 모습은 일견 침착해 보였다. 핸들을 쥔 손을 보지 못했다면, 가온은 끝까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보는 사람이 다 아플 정도로 퍼런 핏줄이 툭툭 불거진 손등은 무영당에 도착할 때까지 매끈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는 내내 가만가만 쓸어주면 좀 나아질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가온은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사박사박. 거의 잠들 뻔했던 소랑이 익숙한 발자국 소리에 눈을 뜨고는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동굴 밖으로 나왔다. 아아…, 한동안 좀 잘 자나 했더니 또 이러네. 어이구, 그 조막만 한 머릿속에 뭐 그리 복잡한 게 많이 들었을까.

“오늘은 또 왜.”

“소랑….”

“어제저녁에 사고 친 것 때문에 그래? 아,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놀다가 그런 것도 아니고, 일하다 그런 건데.”

“응.”

가온이 희미하게 미소를 짓자, 소랑은 심기가 더욱 불편해졌다. 가온의 실종 미수 사건을 뒤늦게 전해 들은 희주는 당장 가온의 옷에 위치추적기를 달아야 한다고 한바탕 난리를 쳤다.

- 글쎄 진짜로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라니까. 그냥 단순한 해프닝이었다고.

- 하지만 만에 하나 대표님께 진짜로 무슨 큰일이 생겼을 때, 그걸 몇 시간 동안 아무도 모를 수도 있다는 거잖아요! 앞으로 절대로 그런 일이 없을 거라는 보장은 아무도 못하는 거라고요.

- 이젠 그럴 일 없어. 내가 이제부터는 자네들 전화번호도 다 외울 거고….

아무리 안전도 좋지만, 사람이 최소한 숨은 쉬고 살아야지. 지금도 제 마음대로 하는 게 거의 없는데, 화장실에 볼일 보러 가는 것까지 적나라하게 까발리면서 살라는 거야? 못마땅한 기색을 고스란히 드러내면서도 소랑이 생각대로 쏘아붙이지 못한 건, 그래도 희주가 진심으로 가온을 위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 신경 쓰지 마. 당신 잘못이 아니야.”

“신경 쓰지 않아. 고생한 직원들한테 미안하긴 하지만,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게 내가 하는 일이니까.”

“그런데 왜 잠을 못 자?”

“….”

“그 핏덩이 때문에?”

“…!”

소랑은 눈을 동그랗게 뜨는 가온을 보며 가만히 혀를 찼다. 그러니까 그놈 생각할 때는 냄새가 다르다고, 냄새가! 서로 마주 보고 있을 때는 호르몬이 막 미쳐 날뛴다고, 너희 둘 다! 하지만 차마 대놓고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기에, 소랑은 최대한 점잖게 표현을 에둘렀다.

“마음에 들잖아, 그 핏덩이. 뭐, 그 녀석은 아예 대놓고 노골적이고.”

“차 관장은 내가 왜 좋을까?”

“그놈도 얼굴을 밝히나 보지.”

“그놈도?”

얼굴을 밝히는 다른 사람이 또 있어? 라고 묻는 듯한 순수한 눈빛에, 소랑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당신, 은근히 되게 까다롭고 얼굴 밝혀. 그리고 여태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말했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착각이야. 지금까지 당신한테 관심 보이는 사람 많았어. 지금 당장 생각나는 사람만 해도 두 손으로 다 꼽을 수도 없다고. 물론 나는 손이 없지만….

아무튼 당신이 그걸 유의미하게 인식한 게 이번이 처음일 뿐이야. 심지어 당신은 당신한테 주겠다고 꽃을 꺾어 온 남자한테 이렇게 말한 적도 있어.

- 어울리지 않는 것을 들고 다니는구나. 들꽃은 들에 피어 있을 때 더 아름다운 것을.

물론 꽃 한 송이라도 함부로 꺾지 말라는 의미로 한 말이었겠지. 그치의 외모를 비하하려는 의도도 전혀 없었을 거야. 당신은 얼굴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하지만 못난이들한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것도 사실이야. 참으로 공평하고 일관되게 모두를 돌멩이 취급했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무슨 말을 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뭐, 이런 문제에 말이 필요한가? 당신은 그냥 손이나 한번 슬쩍 잡아. 그러면 그놈이 다 알아서 하겠지.”

“하아…. 그것도 쉽지가 않아. 어제 그러고 싶은 생각이 들었었는데….”

진지한 얼굴로 가온의 말을 경청하며, 소랑은 속으로 수도 없이 혀를 찼다.

젠장, 나는 늑대인데. 심지어 내 반려도 하나 없는데. 인간의 연애 상담이 대체 웬 말인가. 만물의 영장이라고 거들먹거리는 것들이 그쯤은 알아서들 해야 되는 거 아닌가. 너무나도 어이가 없었지만 소랑은 최선을 다해서 가온의 말에 집중했다. 슬슬 졸리기 시작한 터라 하품을 참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얘기 들었어요?”

“무슨 얘기요?”

“이 세트장에서 귀신이 나온대요. 밤에 혼자서 일하던 스태프들은 벌써 몇 명이나 봤대요.”

구석에서 조용히 대본을 보고 있던 로아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흥미로운 화제에 정신이 팔린 조연 배우들은 로아의 떨리는 시선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잘된 거 아닌가? 왜 작품 할 때 귀신 나오면 대박 난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어떻게 생겼나 얼굴이나 한번 봤으면 좋겠네. 여자 귀신이라던데.”

“아, 뭐예요? 귀신이라도 여자면 다 좋다 이건가?”

“아니. 나는 귀신 같은 거 한 번도 본 적이 없거든. 기왕이면 예쁜 여자 귀신이면 좋지 않겠어요?”

“글쎄, 나는 예쁜 여자가 귀신이면 더 무서울 것 같은데.”

배우들이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금세 다른 것으로 넘어갔지만, 잔뜩 겁에 질린 로아는 손이 떨려서 더 이상 대본을 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예쁜 여자 귀신을, 로아는 이미 본 적이 있다. 그리고 누군가의 말대로 그건 정말 무서웠다.

“로아 씨, 얼굴이 왜 이렇게 창백해요? 어디 아파요?”

“아, 아니에요. 그냥 여기 조명이 좀 어두워서 그렇게 보이는 것 같아요.”

“그래요? 저 사람들이 귀신 얘기할 때부터 그랬는데,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니고?”

얼떨결에 선우가 내민 커피 한 잔을 받아 든 로아는, 천연덕스럽게 제 앞에 앉는 말끔한 얼굴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시선을 떨궜다. 연극판에서 오래 있었다는 선우는 작년 하반기에 공전의 히트를 쳤던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의 친구 역할을 했었는데, 드라마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에는 주인공보다 더 인기가 많아져서 선우의 팬이었던 작가가 피눈물을 흘리며 분량을 조절했다는 놀라운 일화의 장본인이다.

드라마 종영 후 각종 예능과 광고를 섭렵하며 단숨에 인기 배우의 반열에 오른 최선우가, 하필이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드라마를 차기작으로 고른 것을 두고 많은 이들이 고개를 갸우뚱했던 것을 로아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이런저런 말들의 대부분은 전 소속사가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도 뻔히 안다.

솔직히 선우의 선택을 의아하게 여기는 것은 로아도 마찬가지였다. 제 입장에서만 생각하면 마스크도 훌륭하고 연기도 잘하면서 이미지까지 좋은 선우를 상대역으로 만난 것은 굉장한 행운이지만, 냉정하게 판단해서 그가 이 드라마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아 보였다. 가수의 꿈을 키우는 소꿉친구를 응원하고 지지하는 건실하고 선량한 남자 친구. 사실 이 정도의 역할은 배우를 꿈꾸는 이들은 누구나 한다.

“선배님은 귀신이 정말로 있다고 생각하세요?”

자신에 대한 정보는 제공하지 않은 채 역으로 질문을 던지는 로아를 보며, 장난스럽지만 예리한 눈빛을 한 선우가 픽 소리를 내며 가볍게 웃었다. 이리저리 치이면서 고슴도치 같아졌다더니 그 표현이 딱 맞네.

“글쎄. 나는 내 눈에 안 보이는 건 잘 안 믿는 편이긴 한데. 그렇다고 내 눈에 안 보이는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만큼 어리석은 건 아니라서. 뭐, 실제로 귀신이 나와서 작품이 잘된다면 한 번쯤은 나와 줘도 좋을 것 같고.”

“선배님도 그런 걸 신경 쓰세요?”

“흠…. 그런 거. 당연히 신경 쓰죠. 대중의 인기에 명줄이 달린 연예인인데.”

“그런데 왜 이 드라마에 출연한다고 하셨어요?”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로아의 표정에, 서서히 입꼬리를 올리던 선우가 결국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갑작스러운 웃음소리에 관심이 집중되자,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는지 선우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로아의 대본을 집어 올렸다. 사람들은 ‘주연 배우 두 사람이 대본 연습이라도 하나 보다’ 하는 얼굴로 곧 고개를 돌렸고, 시선이 흩어지는 것도 귀신같이 알아차린 선우는 곧 대본을 내려놓았다.

“음, 이건 비밀인데…. 강 PD님이 내 대학교 3년 선배예요. 그쪽은 연출 전공이고 나는 연기 전공이라 아주 친했던 건 아니지만…. 내가 오래 좋아했거든. 그래서 대본이 들어왔을 때 첫 장도 안 넘긴 상태에서 연출자 이름만 보고 하겠다고 했어요.”

사실 소속사에서는 선우가 이 드라마에 합류하는 것을 진심으로, 그리고 끈질기게 만류했었다. 매력적인 외모를 부각시킬 수 있는 재벌이나 전문직 역할도 아니고, 그렇다고 출중한 연기력을 양껏 발휘할 수 있는 복잡한 캐릭터도 아니었다. 연극에서 사이코패스 역할을 맡았던 선우를 직접 발굴해 온 소속사 사장은, 그가 이런 소소하고 따뜻한 이야기에 흥미를 보였다는 사실을 아직도 의문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차마 대놓고 묻지는 못했지만 그것이 혹시 로아에 대한 관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여전히 의심하고 있다.

“어…, 왜 그런 얘기를 저한테….”

난처한 얼굴로 눈동자를 굴리는 로아를 똑바로 응시하며, 선우는 처음으로 얼굴에서 장난기를 지웠다. 으음, 내가 왜 관계도 없는 너를 붙들고 행여 소문이라도 나면 내게 하등 이득 될 게 없는 말을 굳이 하냐면 말이지.

“일단은 나를 너무 경계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막상 촬영 들어가면 눈빛부터 달라지는 건 아는데, 그래도 가끔은 나를 아주 편하게 대하지는 않는다는 게 보일 때가 있거든. 요즘 대중들은 눈이 날카로워서 그런 게 화면에 드러나면 흥미를 잃어요. 나는 이로아 씨한테 해코지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고, 여자로서 관심을 갖는 것도 아니니까, 지금처럼 매순간 긴장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예요. 앞으로 반년은 동고동락해야 되는데, 좀 편하게 가자고.”

“…죄송합니다.”

대번에 낯빛이 흐려진 로아의 즉각적인 사과에, 선우는 가지런한 눈썹을 찡그리며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별것도 아닌 걸로 사과를 하네. 확실히 내 스타일은 아닌데…. 그 정의로운 여자한테는 자극이었겠구나.

- 아주 힘들게 여기까지 온 애야. 그래도 너는 여러모로 여유가 좀 있으니까 신경 써서 잘 이끌어 줘. 기왕이면 방송 중에 스캔들이 나는 것도 좋고. 로아는 지금 어떤 식으로든 주목받는 게 필요한 상태라.

- 이 악마 같은 여자야. 내 이미지는 신경도 안 쓰냐? 드라마 하나 잘되게 하려고 여덟 살이나 어린 애 건드리는 도둑 취급을 받으라고? 솔직히 나는 이 드라마 크게 잘되지 않아도 별로 상관없거든?

- 아니. 너는 로아한테 잘해줄 거고, 연기도 최선을 다해서 잘할 거야. 내가 연출하는 작품이고 내가 직접 하는 부탁이니까.

뻔뻔할 정도로 당당하던 이서의 얼굴을 떠올리니, 그녀에 대한 애증이 새삼 용암처럼 들끓었다. 신입생 시절에 졸업반인 이서를 처음 만나 무려 13년 동안 사귀었다 헤어졌다를 거듭했다. 대체로 이별을 선언하는 쪽은 그녀의 무심함에 나가떨어지곤 했던 선우였지만, 결국 한밤중에 대문 앞으로 달려가는 것도 선우였다. 그리고 지금은 일단 집으로 찾아가지 않고 버티고 있는 중이다.

그래. 원대로 해준다, 내가. 말 그대로 드라마 한 편 찍어보지, 뭐. 내가 눈에 꿀을 바르고 다른 여자를 쳐다봐도 끝까지 그렇게 눈썹 하나 까딱 안 하는지 어디 한번 두고 보자고. 심각한 얼굴로 조연출에게 뭔가 지시를 내리고 있는 이서를 힐끔 돌아보던 선우가 작정하고 대외용 미소를 지었다. 얼마 전 샴푸 광고 현장에서 여성 스태프들의 비명을 자아냈던 미소였다. 흡사 돌고래 소리가 나는 바람에, 깜짝 놀란 옆방에서 무슨 일인가 확인하러 오기도 했었다.

“그리고 로아 씨 이 근방에 살았었다면서요? 나 보기보다 입맛이 좀 까다로워서. 앞으로 반년 동안 적어도 일주일에 사흘은 여기에서 보내야 하니까, 맛집 정보 좀 줘요. 같이 먹어주면 더 좋고. 이것도 비밀인데, 나 은근히 수줍음이 많아서 식당에서 혼자 밥 먹는 걸 잘 못해요.”

“저도 어릴 때 서울로 가서 잘 모르기는 하지만…. 친구들한테 물어볼게요.”

보통은 이런 종류의 요구를 받으면 본인도 잘 모른다며 빠져나가곤 했었지만, 로아는 용기를 내어 뒷말을 덧붙였다. 이서를 좋아한다는 선우의 고백에 경계가 많이 허물어지기도 했고, 한 드라마의 흥망에 책임이 있는 주연 배우가 상대역과 잘 지내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로아에게 이번 드라마는 인생의 마지막 기회나 다름없다. 잘해보고 싶었다.

“좋아요. 그럼 우리 이제부터 친하게 지내는 거예요? 나 말 놓는다?”

“하하, 네.”

처음으로 제게 수줍은 미소를 보이는 로아를 향해 마냥 무해하게 웃어 보이던 선우가, 밀려오는 허탈함에 입꼬리를 조금 내렸다. 물론 연극제 대상 수상자답게 표정이 변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중천 한구석에 앉아서 물방울처럼 솟아오르는 망자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가온이, 벌써 몇 번째인지 헤아릴 수도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중천에서 딴생각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이상하게 오늘은 집중이 잘되지 않았다.

- 그래서. 그 핏덩이를 어쩌고 싶어?

오늘 새벽, 제 얘기를 한참이나 듣고 있던 소랑은 저와 눈을 맞추며 두 번째로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이번에는 뭘 어쩌고 싶은 건 아니라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굳이 안 될 건 없지 않나 싶기도 했다. 좋은 마음이 드는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건 죄가 아니라는 생각도 불쑥 들었다.

사실 가온은 지원과 같이 하고 싶은 게 많았다. 요즘 들어 제 흥미를 당기는 것들은 예외 없이 모두 지원으로 인해 접하게 된 것들이었다. 처음으로 사는 게 조금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재미를 지원과 나누고 싶어졌다.

말로 꺼내지 못했을 뿐, 표정으로 이미 충분히 대답한 가온에게 소랑은 진지한 얼굴로 충고했다. 방법을 알려주지 않으면 얼마나 오래 미련을 떨고 있을지 몰라 심히 답답해서였다.

- 라면을 같이 먹자고 해.

- …라면?

- 먹어본 적 있어?

- 한 번.

하여간 지나치게 과보호라니까. 아직 새벽별이 떠 있는 시간인데도 이미 자리를 걷고 일어나 부지런하게 하루를 시작한 희주의 기척을 느끼며 소랑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애를 이렇게 싸고돌면서 키웠으면 아마도 불량 청소년이 되었을 텐데, 그나마 다 큰 다음에 만났으니 망정이지. 아니, 어떻게 나도 먹어본 라면을 한 번밖에 안 먹어 봤어?

- 아무튼. 요즘 그게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널리 통용되는 작업 멘트야. 유명한 영화에 나왔었거든.

- 작업….

- 당신이 나서서 덥석 손을 잡거나 하지는 못할 거 아냐. 아니면 직접적으로 만나보자고 할 수는 있겠어?

- 아니.

- 그러니까. 그 핏덩이가 싸가지는 없어도 눈치는 제법 있는 것 같으니까 라면을 먹자고 하면 알아들을 거야.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던 가온이 불현듯 드는 의문에 가만히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 그런데 왜 자꾸 차 관장을 싸가지 없다고 해? 굉장히 정중한 사람인데.

- 아이고. 내가 그 자식이 언제까지 이렇게 가증스럽게 구는지 두고 보겠어.

- 그게 무슨 소리야?

- 하아. 당신은 그냥 속 편하게 모르고 살아. 그래. 당신한테만 잘하면 되지, 뭐. 내가 데리고 살 것도 아니고.

뭔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소랑은 잠이 온다며 제 동굴로 들어가 버렸다. 이제 끝물인 수국 길을 혼자서 걸으며, 가온은 라면을 먹자는 게 꽤 그럴듯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굳이 민망한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제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세련된 화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요즘 사람들은 센스가 있어.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으로 감탄하기도 했다. 제게 두 번씩이나 용기를 냈던 지원이니, 세 번째 고백은 제가 하는 게 마땅한 일이다. 게다가 결코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가온은 그의 첫 고백을 무참히 무시한 전적이 있었다. 그 사실을 불과 얼마 전에 깨달은 가온은 본인의 무지함에 말로 다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었다.

그런데 막상 말을 꺼내려고 보니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할지 도통 감이 잡히질 않았다. 라면을…, 대체 어디서 먹어야 하지? 무영당에서? 그럼 그걸 권 여사한테 끓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주방에 들어가서 불을 쓴다고 하면 충격으로 쓰러질 지도 몰라. 하지만 일종의 고백인데 다른 사람한테 시키는 건 너무 성의가 없는 것 아닌가? 그래도 내가 그걸 혼자서 끓일 자신은 없는데.

그럼 차 관장네 집으로 가자고 해? 그러면 라면을 차 관장이 끓이게 되지 않을까? 차 관장도 나한테 뭘 시키는 사람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건 너무 민폐잖아. 하아, 라면 한 그릇 먹는 게 원래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아아….”

긴 한숨을 내쉰 가온이 눈을 질끈 감은 채 괴로워하는 모습을, 멀찍이 선 지원이 몹시 언짢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에 오기 전에는 마음이 이래저래 복잡했었지만, 막상 얼굴을 보니 속없이 반가웠고, 그 반가운 얼굴이 썩 좋아 보이질 않아 속이 상했다.

- 바쁜 일이 있으면 나는 그냥 본사 근처에 내려줘도 돼.

그 말을 듣자마자 당분간은 얼굴을 보지 말아야겠다고 결심을 굳혔다. 다른 사람의 보살핌을 받는 일에 익숙한 가온이 이런 말까지 하는 걸 보면 내심 어지간히 불편했었구나 싶어서, 지원은 그녀에게 많이 미안했고 조금은 서운하기도 했다. 그래도 내 욕심만 차릴 수는 없지. 시간이 지날수록 가온이 점점 더 좋아져서 스스로도 당황스러울 정도였지만, 마음은 강요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지원은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러나 본사에 와서 엘리베이터에 오른 순간, 경망스러운 손가락이 주인의 강한 의지를 간단히 배반하고는 제멋대로 버튼을 눌렀다. 지원은 대책 없이 쭉 뻗은 제 손가락을 망연히 내려다보며, 유곽 앞에서 말의 목을 자른 김유신의 심정이 이런 것인가 했다.

[49층. 올라갑니다.]

당연히 취소도 가능했고, 중간에 내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았다. 원래의 목적지인 47층 버튼을 누를까 말까 족히 수백 번을 고민하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49층에 도착하고 말았다. 여느 때처럼 갖가지 종류의 소란이 넘쳐나는 중천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지원은, 문이 닫히기 직전에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딱히 여기저기 두리번거리진 않았지만, 가온의 위치는 단번에 찾을 수 있었다.

“오늘 중천에 무슨 일 있었습니까?”

“아니요. 평소랑 그다지 다를 바는 없었습니다.”

“대표님은 언제부터 중천에 계셨어요?”

“오늘은 일찍 나오셨어요. 아침 8시쯤?”

안면을 익힌 보안 요원의 친절한 대답에 지원의 심기는 더욱 불편해졌다. 8시면 제 시각에 일어나 제대로 아침을 챙겨 먹고 나올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또 밤을 새웠나. 나 때문에 못 주무신 걸까? 상당히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가정에, 지원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대표님. 식사는 하셨습니까.”

그렇지만 가온이 굶는 건 정말이지 볼 수가 없었기에 지원은 용기를 내어 다가갔다. 혹시나 저를 보고 난처해하면 어쩌나 불안했는데, 다행히 반짝 눈을 뜬 가온은 지원의 얼굴을 보고는 꽤나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순간 막혔던 속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아, 차 관장. 지금 몇 시지?”

“1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점심 못 먹었어. 차 관장은?”

“저도 아직입니다.”

1시 반 심리 상담을 앞두고 11시쯤 이른 점심을 먹었지만 지원은 힘도 들이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이모 장례식을 치르느라 한 번 미뤘다가 일정이 빡빡한 상담사와 시간을 맞추느라 굉장히 고생을 했었지만, 이 시점에 그딴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중천에는 어쩐 일이야? 골치 아픈 망자라도 있었어?”

“아닙니다. 그냥…, 들렀습니다.”

“그래? 그럼 나랑 점심 같이 하겠어?”

“그러겠습니다. 뭐 드시고 싶은 게 있으세요?”

지원의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던 가온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뜻밖의 메뉴를 불렀다.

“…라면.”

라면? 지원의 눈썹이 살짝 위로 들렸다가 곧 제자리를 찾았다. 근처에 라면을 전문으로 하는 깔끔한 식당이 있었던가? 빠르게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가온이 조건 하나를 덧붙였다.

“차 관장네 집에서.”

“….”

이번에는 조금 생각이 많아졌다. 남자의 집에 가서 라면을 먹겠다는 여자의 말은 듣기에 따라서는 충분히 야릇한 뉘앙스를 풍기는 말이다. 하지만 가온의 차분한 표정을 보며 자신의 음탕함을 크게 꾸짖은 지원은 재빨리 평정을 가장하며 덤덤한 목소리를 냈다.

“가시죠. 차는 지하에 있습니다.”

혹시라도 권 실장이 보면 바로 권 여사의 귀에 들어갈 테니까 나름대로는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장소를 고르신 거겠지. 스스로를 빠르게 납득시킨 지원이 재빨리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기 위해 가온보다 한발 앞서 걸었다. 그러느라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펴는 가온의 모습은 보지 못했다.

식탁 앞에 얌전히 앉은 가온은 소매를 둘둘 걷어 올린 지원이 주방에서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조용히 낭패감에 빠져 있었다. 소랑…, 라면을 먹자고만 하면 다 된다더니.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봐도, 지금 뭔가가 전달된 느낌이 전혀 없는데? 이대로 두면 차 관장은 정말 순수하게 나한테 라면 한 끼 먹이고 곱게 돌려보낼 것 같다고.

난관을 타개할 만한 방법을 생각해 봤지만, 가온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해결책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쩌나…, 진짜로 가서 손이라도 잡아야 하나. 하지만 커피를 내리고, 곁들일 채소를 준비하고, 동시에 라면 물을 올리는 지원은 굉장히 바빠 보여서 차마 방해할 수가 없었다.

“매운맛과 조금 덜 매운맛이 있는데, 어떤 걸로 드시겠습니까.”

“덜 매운 거.”

“국물에 달걀을 푸는 걸 좋아하십니까?”

“별로 좋아하지 않아.”

이렇게 정말로 식당에 온 것 같은 대화나 나누려던 게 아니었는데. 일단은 라면을 다 먹고 다시 생각해 봐야 할까?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일 보 후퇴를 결정한 가온이 긴장을 조금 풀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을 때였다.

“아.”

평소에 잘 사용하지 않는 그릇을 찾으려는 듯 싱크대 상부장 문을 열던 지원이 탁 소리가 나게 다시 닫으며 약간 당황한 기색으로 슬쩍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지원을 계속 주시하고 있던 가온은 이미 내용물을 확인한 다음이었다.

“….”

어색한 적막 속에 커다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던 가온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지원의 곁으로 다가가 상부장 쪽으로 손을 뻗었다.

“대표님.”

지원이 몹시 난처해하며 저를 불렀지만, 가온은 그대로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빨간 이층버스가 그려진 깜찍한 티포트와, 애초에 세트로 구성된 것으로 보이는 자그마한 찻잔 여섯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가온은 순간 도저히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이걸…, 언제부터 가지고 있었어?”

“…좀 되었습니다.”

지원이 이 도자기 세트를 사야겠다고 결심한 건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였다. 구입하는 과정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조금 복잡했다. 지구 반대편에서 파는 물건도 터치 몇 번이면 간단하게 살 수 있는 시대이지만, 75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기념품 숍의 오너는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에 대해 일말의 두려움도 없는 사람이었다. 주인이 딱 잘라 해외 배송을 거절한 탓에, 지원은 티세트 한 벌을 손에 넣기 위해 런던에 있는 지인을 동원하는 수고를 거쳐야 했다.

“대표님의 눈에 든 물건인데 다른 사람이 예쁘게 잘 사용하면 속이 좀 상할 것 같았습니다.”

“아아….”

살짝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매끈한 도자기의 표면을 손끝으로 살살 어루만지던 가온이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지원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차 관장. 나랑 정식으로 만나보겠어?”

비서가 내민 파일을 받아든 동하는 바로 표지를 넘겨보더니 곧 어이가 없는 얼굴로 시선을 들어 올렸다.

“이게 뭡니까?”

“죄송합니다, 상무님. 가능한 모든 루트를 동원했지만, 더는 나오는 게 없었습니다.”

“그럴 리가 있나. 멀쩡히 대한민국 땅에 살고 있는데, 학연, 지연, 혈연이 아무것도 없을 수가 있다고?”

“네. 열람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는 그렇습니다.”

송구스러운 표정을 짓는 비서를 삐딱하게 바라보던 동하가 딱딱하게 표정을 굳히며 팔짱을 꼈다. 유능한 사람이라더니. 아버지가 사람을 잘못 보셨는데?

“흐음. 나는 열람이 불가능한 범위의 자료라도 어떻게든 뒤져 보라는 거였는데.”

동하의 나른하지만 매서운 질책에 비서는 식은땀이 났다. 사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아니 전 세계 어디라도, 돈으로 살 수 없는 정보는 없다. BS그룹에서 오너 일가를 수행하며 그간 누군가의 신상을 털었던 적은 딱히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중에는 정부가 직접 신원을 감추는 이도 있었고, 공식적인 기록이 말살된 채 서류상으로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사람인 이상 끝까지 뒤지면 어딘가에서는 흔적이 나왔다. 더구나 요즘처럼 기록 매체가 발달한 시대에는 누군가의 정보를 상상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공유한다. 그러나 그쪽 방면으로는 도가 튼 비서가 작정하고 털었는데도 이번처럼 티끌 하나 나오지 않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분명히 주민등록번호가 존재하는데, 그 번호를 가지고 조회할 수 있는 건 항공기 이용 내역이 전부였다.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급기야 제니스 컴퍼니 본사 근처의 CCTV까지 뒤졌지만, 대충 윤곽만 알아볼 수 있을 뿐, 얼굴이 또렷하게 찍힌 화면은 하나도 없었다. 대기업 대표답지 않게 대부분 수행원 하나 없이 혼자 다니는데도, 이상하게 무언가가 늘 그녀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마치 보호막처럼.

“죄송합니다.”

“그래서. 무려 일주일 동안 주민등록번호랑 사진 한 장 빼온 것이 전부라고?”

13자리의 숫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동하가 기가 막힌 헛웃음을 지었다. 생년월일과 출생지가 서울이라는 것 외의 다른 정보는 없었다. 우리보다 네 살 위. 그나마 궁합이라도 좋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되나?

사진이라는 것도 뭐 이따위야? 군색하게 첨부된 단 한 장의 사진은 이국적인 풍경 속에서 뭔가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가온의 모습을 옆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그나마도 초점이 맞지 않아 흐릿했다. 가만, 여기 런던 아니야? 빅 벤 모형이 들어있는 워터볼이 있는데?

“이건 어디서 가져왔습니까?”

“상무님 친구분의 휴대폰 사진첩 비밀 폴더에서….”

“뭐라고요?!”

어디선가 그리운 향기가 뭉근하게 풍겨오는 바람에 선잠에 들었던 도겸이 서서히 눈을 떴다.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던 시야가 차츰 맑아지더니, 곧 익숙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몸이 좀 피곤했나, 웬일로 낮잠을 다 잤네.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대청마루로 나가는 문을 열자, 미처 문밖으로 나가기도 전에 연못을 가득 메운 새하얀 연꽃이 도겸의 눈을 즐겁게 했다. 날이 흐려서 그런지 무더운 한낮에는 몸을 사리던 연꽃이 봉오리를 활짝 벌린 채 강렬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수연이 보면 좋아하겠군. 초봄부터 연꽃이 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나저나 대체 사람을 얼마나 기다리게 만들 작정인가. 벌써 달포 가까이 된 것 같은데, 이제 슬슬 외가에서 돌아올 때도 되지 않았나. 눈에 선한 고운 얼굴 하나를 떠올리며 흐뭇하게 미소를 짓던 도겸이 못가를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을 때였다.

“오라버니!”

쟁쟁하게 울리는 낭랑한 외침에 고개를 돌린 도겸이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는 어린 동생이 제게 달려오는 걸 보고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뛰지 마라, 란아. 넘어진다.”

흑단 같은 머리 위에 홍옥으로 장식한 진달래색 배씨댕기를 곱게 얹은 깜찍한 계집아이가, 마냥 해맑게 웃으며 깔깔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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