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6. 채송화도 봉숭아도 (7/18)
  • 06. 채송화도 봉숭아도

    아아아악! 싫어! 제발, 살려…. 제니스 컴퍼니 본사의 중역 회의실에 앉아 초조하게 가온을 기다리던 브랜든은 어디선가 아득하게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안 그래도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여러모로 뒤숭숭하던 참인데, 다급하고도 절망적인 목소리들이 브랜든의 불안을 더욱 가중시켰다.

    “대체 이게 얼마짜리 건물인데 방음이 이따위….”

    나직하게 투덜거리던 브랜든이 소름 끼치는 사실 하나를 깨닫고는 그대로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리 방음이 형편없다 하더라도 바깥의 소음이 45층까지 올라올 수는 없다. 그렇다면 지금 들려오는 비명들은 이 건물 내부 어딘가에서 생성되고 있다는 뜻이다. 한순간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 사장님, 46층 이상은 관계자 외 출입 금지 지역입니다.

    - 관계자 외라니요? 나는 제니스의 모든 부분에 관계할 수 있는 사람인데?

    - ‘모든’ 부분은 아니죠. 계약서에 분명히 명시가 되어 있는 걸로 압니다만. 대표님 직속 비서실과 보안실은 사장님의 영역 밖입니다. 46층부터는 두 개 부서의 사무실이 있으니 출입을 삼가시기 바랍니다.

    막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돋움한 회사의 총 책임자가 되어 한껏 자신감이 충만하던 브랜든은, 한낱 한 부서의 직원에 불과한 보안실장이 제 앞을 막아서는 걸 용납할 수가 없었다.

    내가 외국인이라고 텃세를 부리는 모양인데. 아무리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부서라지만, 결국 내가 돈을 벌어다주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다는 건 알고 있나? 인상을 구기며 제 기분이 상했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낸 브랜든이 조금 힘을 주어 현호의 어깨를 밀었다.

    - 사무실에는 안 들어갑니다. 잠깐 옥상이나 구경하려는 거예요.

    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고교 시절부터 미식축구로 체력을 다져온 브랜든이 작정하고 밀었는데도 마치 바윗덩어리처럼 버티고 선 현호는 미동도 없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브랜든에게 현호는 끝까지 인자한 미소를 잃지 않았지만, 말투는 꽤나 단호해졌다.

    - 사장실로 돌아가시죠. 46층부터는 계단을 포함한 전 지역이 통제 구역입니다.

    - 이러니까 되게 수상하네. 사무실에 뭐 멸종 위기종이라도 키워요? 사무실에 들어가면 반달가슴곰이라도 돌아다니나?

    - 뭐라고 생각하셔도 상관없습니다만, 출입은 안 됩니다. 협조 바랍니다.

    권위도 통하지 않고 힘으로도 이길 수 없으니 당장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 꾀했던 몇 번의 시도 역시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계단으로 향하는 문을 열기만 하면 어디선가 귀신같이 현호가 나타났고, 엘리베이터의 버튼은 아예 눌리지도 않았다.

    [46층. 출입이 불가합니다. 보안실의 인증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낭랑한 기계음이 의미하는 바를 번역기가 적나라하게 찍어 냈을 땐,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물론 진짜로 희귀 동물 따위를 키우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본인의 힘으로 건사할 수 없는 사업체를 그저 소유하기만 한 나이 어린 대표가 제게 공연한 위세를 부리는 거라고 여겼다. 숱하게 한국에 드나들었지만, 48층에 있다는 대표실에 단 한 번도 초대받지 못했다는 게 바로 그 증거였다.

    그러나 브랜든은 오늘 처음으로 이 건물의 꼭대기에 뭔가 아주 위험한 것이 존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어에 능통한 편은 아니었지만, ‘싫어’라는 단어는 굳이 번역을 거치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뭐야. 비밀 감옥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핏빛 고문이 자행되는 어둡고 음침한 장소를 상상하던 브랜든은 갑자기 회의실의 문이 벌컥 열리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 대표님….”

    “오랜만이군.”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전혀 나이를 먹지 않은 가온을 보며 브랜든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처음 3~4년 정도는 가진 게 돈밖에 없으니 관리를 잘한 덕분이라고 생각했었고, 7년이 지나면서부터는 가끔 의아한 정도였지만, 오늘은 주름살 하나도 늘지 않고 예전과 똑같은 얼굴이 진심으로 무서워졌다. 정체가 뭐야, 진짜? 설마 뱀파이어 같은 건가? 그렇다면 혹시…, 위층에 가둬둔 건 먹이…?

    “크리퍼 브랜든.”

    끔찍한 가정에 몸서리치던 브랜든이 파랗게 변한 입술을 파르르 떨며 간신히 대꾸했다.

    “네. 네, 대표님.”

    “최근에 별로 재미없는 장난을 쳤던데.”

    “네? 그, 그게 무슨….”

    가온의 고갯짓에 그녀의 옆에 떡 버티고 서 있던 현호가 두꺼운 서류 뭉치 하나를 브랜든에게 내밀었다. 떨리는 손으로 첫 장을 열어본 브랜든의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서류에는 자신을 포함한 일부 임원들이 의기투합하여 횡령한 자금이 어떻게 유용되었는지 항목별로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심지어는 남미 지사장이 제 손자의 이름으로 구입한 요트의 사진까지 붙어 있었다.

    “대표님…, 이건….”

    “나를 처음 만났을 때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나?”

    가온의 질문에 잠시 기억을 더듬던 브랜든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브랜든 사장. 앞으로 제니스의 사업부 소관 업무는 브랜든 사장에게 모두 맡기겠습니다. 본인의 의지대로 마음껏 역량을 발휘해 보세요. 성과에 대한 보상은 확실히 할 것이고, 회사의 존폐를 위협하는 정도가 아니라면 손해에 대한 책임은 묻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모든 일은 투명하게 진행되어야 합니다. 그게 내가 아무런 경력이 없는 브랜든 사장에게 2천만 달러라는 연봉을 지급하는 이유입니다.

    처음에는 생전 처음 만져보는 거액에 감동해서 회사의 발전을 위해 전력을 다했다. 하지만 만 5년이 되었을 무렵부터 자신의 능력만큼의 대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기 시작했다. 내가 이렇게 뼈 빠지게 일해서 키운 회사는 결국 남의 것이라는 생각에, 매출액이 가파른 상향 곡선을 그리는 것도 영 재미가 없어졌다. 자신의 아이디어와 사업 수완을 동원해서 다른 사람의 배만 불리고 있다는 게 생각할수록 너무 억울했다.

    공금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당연히 협조자가 필요했고, 그들의 입을 막으려다 보니 횡령액은 점점 불어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온은 교묘하게 조작된 문서의 진위 여부를 알아차리지 못했고, 수치로 나타나는 지표에도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주기적으로 보고가 진행되었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 단 한 번도 의견을 제시하거나 의문을 표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수법은 점점 대담해졌다. 그녀의 눈이 아주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고 있었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전혀 몰랐다.

    “내가 그대에게 요구한 것은 딱 하나였는데, 그 하나가 지켜지지 않았으니 우리의 계약은 무효가 되었군.”

    “대, 대표님. 잘못했습니다.”

    “글쎄. 사과 한마디로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건 본인이 가장 잘 알 테고.”

    꺄아아아악! 저리 가! 이거 놔! 순간 아까부터 들려오던 비명 소리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각각의 목소리도 구분이 가능한 정도였다. 그러나 여느 때처럼 그저 무심하기만 한 가온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게 지금 나만 들리는 거야? 잔뜩 겁을 먹은 채 가온의 안색을 살피던 브랜든은, 어느 순간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는 가온의 리듬에 맞춰 소리의 볼륨이 차츰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완전히 사색이 되었다.

    탁. 가온이 손바닥으로 강하게 책상을 한 번 내리치자, 회의실을 왕왕 울리던 소음이 딱 멈췄다. 갑자기 고요해진 회의실에 브랜든의 거칠어진 숨소리만 가득했다.

    “내 용건은 끝났으니 이만 가 보게. 이제부터 그대들이 착복한 재산에 대해서 환수 절차가 들어갈 거야. 범죄 행위에 대해서는 당연히 법의 심판을 받게 될 거고. 그대는 미국인이니 미국의 법정에 서게 되겠지.”

    순간 가온의 앞에 무릎을 꿇은 브랜든이 머리를 조아리며 애걸복걸하기 시작했다. 횡령한 금액을 모두 합치면 어림잡아도 5억 달러 가까이 된다. 이 정도 금액이면 배임 행위를 아주 엄하게 처벌하는 미국에서는 빼도 박도 못하고 종신형이다.

    “살려주십시오, 대표님. 제가 빼돌린 금액은 다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회사를 위해서 정말 성실하게….”

    “내가 그대를 죽인다고 하지는 않았어. 빼돌린 금액을 돌려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그리 생색낼 것도 아니고. 사실 그동안 그대의 재주가 아까워서 여러 번 눈을 감았는데…. 적당히 배를 불렸으면 더는 욕심내지 말았어야지.”

    서늘하게 일갈한 가온이 그대로 몸을 일으켜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어떻게든 가온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그녀를 쫓아가던 브랜든은 철통같은 현호의 제지를 뚫지 못했다.

    망연자실하여 묵고 있는 호텔로 돌아간 브랜든은 밤새도록 침대 끝에 걸터앉아 고민하다가, 날이 밝을 무렵 터덜터덜 비상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지난 10년간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사며 사치의 극치를 만끽하면서 살았다. 이제 와서 남은 수십 년의 인생을 교도소에서 마감할 수는 없다. 그렇게 사느니 지옥에 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제니스 본사를 바라보며 허공으로 몸을 던진 브랜든은, 얼마 후 그리도 궁금해했던 본사의 최상층을 방문할 수 있었다. 제니스가 감추고 있던 비밀은 브랜든의 빈약한 상상력으로는 짐작도 할 수 없던 종류였다.

    “어리석군. 인계에서 어느 정도라도 죗값을 치르는 편이 그나마 나았을 텐데.”

    완전히 패닉에 빠진 브랜든을 내려다보며 혀를 끌끌 차던 가온이 가볍게 고갯짓을 하자, 건장한 체격을 가진 남자 둘이 다가와 그의 양팔을 붙들었다. 그리고는 시커먼 어둠이 입을 벌리고 있는 음산한 문 너머로 마치 짐짝처럼 집어던졌다.

    지옥행을 택한 것이 굉장한 판단 착오였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명계에 도착한 직후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습관처럼 갤러리 지하에 있는 소장품 보관소에 들어간 지원은, 흡사 노을이 진 하늘과도 같은 고운 빛깔의 화병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이제 와서 가을 전시에 올리지 않겠다고 하면 큐레이터가 입에 거품을 물겠지. 팸플릿이나 도록 같은 것들도 다시 디자인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결국 석 달 내내 아침저녁으로 이걸 보면서 드나들어야 한다는 얘긴데….

    그때 런던 출장을 가지 않았으면 대표님에 대한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그냥 지나갈 수 있었을까? 딱히 접점이 없는 상태로 그저 스치는 인연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과거를 돌이켜보던 지원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평생 안 볼 수는 없는 관계였으니 단지 시기의 문제일 뿐, 아마도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하아…, 안 봐야겠다고 생각하니까 더 미치게 보고 싶은데…. 괴로운 한숨을 길게 내쉬고 있는데 비서의 전화가 걸려왔다.

    [관장님. 친구분 오셨습니다.]

    “그래요? 알겠어요, 지금 올라갑니다.”

    이 자식은 또 사람을 얼마나 피곤하게 하려나. 뻑뻑한 눈두덩을 꾹꾹 누르며 계단을 오른 지원이 관장실 문을 열자, 예상했던 바와 같이 대번에 날 선 목소리가 날아왔다.

    “차지원. 너 얼굴 보기 힘들다?”

    “차지원. 너 얼굴 보기 힘들다?”

    마치 제 집처럼 편안하게 소파에 너부러져 있던 동하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작정하고 단단히 따져 물으려는 의지가 너무나도 눈에 훤히 보여서, 지원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갤러리 안에만 처박혀 있는 놈이 왜 이렇게 공사가 다망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

    “대체 무슨 놈의 사정? 런던까지 와서는 왜 그냥 돌아간 건데? 그것도 달랑 문자 한 통 남기고. 나 그때 너 온다고 해서 콘퍼런스 일정까지 취소하고 대기하고 있었다고. 얼마나 기가 막히고 허망했는지 알아?”

    그 와중에 내가 제 전화를 스팸 취급했다는 걸 알게 되면 입에서 불을 뿜겠지. 이 부분에 있어서는 정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던 지원이 성질을 죽이고 최대한 유순하게 대꾸했다.

    “미안하다고 했잖아. 정말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니까.”

    “그러니까 그 빌어먹을 피치 못할 사정이라는 게 뭐였냐고. 내가 납득할 수 있게 설명을 하라니까?”

    바로 목소리가 높아진 동하가 눈을 부라리며 닦달하자 지원은 앓는 소리를 내며 마른세수를 했다. 평소에는 허허실실 웃으며 사람 좋은 척을 하는 동하였지만, 이렇게 독사처럼 물고 늘어질 땐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게다가 머리가 아주 비상한 녀석이라 대충 둘러대서 이 순간만 모면할 수도 없다. 지금 당장은 그냥 넘어갈지 몰라도, 나중에 언젠가는 반드시 모순점을 발견하고 조목조목 따지면서 사람 피를 말린다.

    어디까지 말을 해야 되나. 한참을 고민하던 지원은 대답을 종용하는 강렬한 눈빛에 결국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동행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 사정으로 급하게 귀국해야 했어. 도저히 혼자 보낼 수가 없어서 같이 들어왔고.”

    “여자?”

    “응.”

    “소개시켜 줄 거야?”

    “…아니.”

    지원의 단호한 대꾸에 동하의 눈이 조금 커졌다. 학부 때 뉴욕에서 처음 만난 이후로 지원이 잠깐이라도 데이트를 했던 여성에 대해서는 모두 알고 있는 동하였다. 정식으로 소개시킬 사이가 되기 전에 헤어지더라도 얼굴은 꼭 봤었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취향 한번 대쪽 같다는 생각을 매번 했었다.

    “왜?”

    “마음 접을 거니까.”

    “그 여자가 너 싫대? 해외여행까지 같이 가 놓고?”

    “그쪽은 출장이었어. 나는 임의 동행.”

    간략하게 마무리한 지원이 더는 대답하지 않겠다는 듯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놀란 눈을 천천히 끔뻑이던 동하도 더는 캐묻지 못했다. 아무리 둘도 없는 친구라도 건드릴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차지원 쪽에서 더 많이 좋아하다가 결국 나가리가 된 모양이군. 깔끔하게 납득한 동하가 호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 건은 내가 그 정도로 넘어가주고. 조만간 술이나 마시자. 나 다음 주 월요일부터 정식으로 출근이야.”

    “생각보다 빠르네. 하반기 시작할 때 맞춰서 들어온다고 하지 않았었어?”

    “그러게. 런던에서 회사 그만두고 두어 달 놀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는데, 기획실 상무 자리가 갑자기 비는 바람에. 전임 상무가 과로로 쓰러져서 사표를 냈다나.”

    “그렇게 바쁜 자리야?”

    “뭐, 하기 나름이지.”

    지원의 걱정스러운 질문에 동하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학생 때도 그랬다. 전공이 달라서 인문학 교양 몇 과목 같이 수강한 게 전부였지만, 동하는 공부에 힘을 들이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남들은 굉장히 고통스러워하는 것들은 동하는 언제나 수월하게 해내곤 했었다. 학생들을 쥐어짜기로 유명한 경영대 내에서 여유롭게 취미 활동도 하고 여행도 다니고 그 와중에 쉬지 않고 연애도 하는 학생은 동하가 거의 유일했다.

    “아, 참. 나 엊그제 들어오자마자 홍보팀 경력직 면접 봤거든? 거기서 누굴 봤는지 알아?”

    “누구?”

    “김대원.”

    “김대원이 누구…. 아, 김 병장?”

    지원이 제법 놀란 기색을 보이자, 동하가 아주 유쾌한 얼굴로 크게 웃었다. 내가 진짜 입이 근질근질했는데 이 얼굴을 직접 보고 싶어서 이틀 동안 꾹 참았다고.

    “어. 화장실에서 나랑 딱 마주쳤는데, 처음에는 나도 면접 보러 온 줄 알고 느물느물 웃으면서 말을 걸더니 내가 면접장에 앉아 있는 걸 보고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사색이 되더라.”

    “야, 그거참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다.”

    “그렇지? 나도 진짜 어지간하면 유치하게 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그 새끼는 어지간하지가 않았잖아.”

    뉴욕에서 학부를 마친 지원과 동하는 바로 귀국해서 동반 입대했었다. 일반적인 경우에 비해 조금 늦은 편이었고, 1학년 1학기만 마치고 군대에 왔다던 김대원은 지원과 동하가 막 자대배치를 받았을 때 내무반의 왕고참이었다. 다른 나이 어린 선임들은 아무리 계급이 높아도 두 사람에게 말을 좀 조심했었는데, 김대원은 처음부터 마지막 날까지 사람을 아주 기분 나쁘게 들들 볶았었다. 학벌 지향적인 그는 두 사람이 자신이 동경하던 대학 출신이라는 게 영 비위에 거슬린다는 걸 천박하게도 대놓고 표현했었다.

    “그때 너 BS그룹 아들이라고 말을 할 걸 그랬다. 그랬으면 좀 덜했을 텐데.”

    “그랬다면 내가 우리 회사에 쓰레기 하나 들어오는 걸 못 걸렀겠지.”

    “떨어뜨렸어?”

    “당연하지. 몰랐으면 몰라도 그 미친개 같은 성질을 내가 뻔히 아는데. 내가 떨어뜨렸다는 걸 본인도 알았을 거야. 질문을 아주 더럽게 야박하게 했거든. 몰랐는데 나 생각보다 되게 치사한 인간이더라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러고도 못다 한 말이 남아 당장 모레 저녁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내일은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하느라 지원은 조금 애를 먹었다.

    “이모님은 잘 계시지?”

    “그럼 여전히 기운이 넘치시지. 작품 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계시고.”

    “넌 계속 여기에 살 거야?”

    아픈 곳을 정확하게 찌르는 질문에 지원의 낯빛이 조금 흐려졌다. 이모를 생각하면 미국에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이야 이모가 친구도 많이 만나면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기력이 떨어질 때가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당연히 제가 이모를 보살펴야할 텐데, 나이를 먹고 삶의 터전을 바꾼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평생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살아온 이모를 한국으로 모시고 오는 것보다는, 양쪽 생활에 모두 적응이 가능한 내가 맞추는 게 옳지 않나 하는 생각은 지금도 하고 있다.

    “여기가 내 직장이잖아. 원래 가족들끼리는 너무 자주 보면 안 좋아. 가끔 봐야 애틋하지.”

    그러나 엄마가 직접 터를 가꾸고 설계한 갤러리를 포기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지금은 훌쩍 두고 떠날 수 없는 존재 하나가 그보다 더욱 무겁게 발목을 잡고 있다.

    “너는 본가로 들어갔어?”

    “미쳤냐? 일단 호텔에 있어. 어머니 잔소리 때문에 그 집에서는 못 살아. 동생이라고 하나 있는 것도 사사건건 시비고. 건방지게 제가 내 누나인 줄 알아. 나 초등학교 다닐 때 기저귀 차고 기어 다니던 것이. 하긴 걔가 벌써 스물넷이다.”

    “많이 컸네.”

    “그렇지? 참, 너 만나던 여자랑 잘 안 됐으면 소개팅 안 할래? 안 그래도 내 동생이 너 보러 간다니까 자기 친구 소개시켜주고 싶다고 난리도 아니었어.”

    동하의 조심스러운 제안에 지원은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됐어.”

    “왜, 현재인네처럼 굴까 봐? 그 친구 부모님은 나도 잘 아는데 굉장히 점잖으셔.”

    현재인. 오늘 참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 많네. 거의 뇌리에서 지워졌던 이름이 화제로 등장하자 지원은 피식 바람 소리를 내며 웃었다. 당시에는 한동안 수면에 방해를 받을 정도로 불쾌했었지만, 이제는 딱히 기분에 영향을 줄 만한 기억은 아니다.

    지원과 동하가 석사 과정을 밟고 있을 때, 지원이 좋다며 거의 스토커처럼 굴던 학부 신입생 하나가 있었다. 지원의 시간표를 알아내서 날마다 강의실 앞을 맴돌았고, 지원이 주로 가는 식당도 따라다녔고, 심지어는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볼펜 같은 물건들을 몰래 들고 가기도 했다.

    그러자니 공부에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고등학교까지 공부밖에 모르던 모범생 딸이 대학 첫 학기에 학사경고를 받자 당연히 집안에서는 난리가 났다. 수소문한 끝에 그 원인이 지원이라는 걸 파악한 부모는 다짜고짜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백주대낮 교정 한복판에서 제 딸을 만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물론 얌전히 당하고 있을 차지원은 아니었다.

    - 따님 이름이 뭐라고 하셨죠? 안 그래도 스토커로 신고를 하려던 참인데 이름을 몰라서 못 하고 있었거든요. 한 번만 더 제 물건에 손을 대면 그다음엔 경찰서에서 보게 될 거라고 전하십시오. 저는 직접 상대하고 싶지도 않으니까.

    지원이 여자에 대해 완전히 시들해진 것이 그 무렵이었다. 학부 때는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간간이 데이트도 하고 그랬었지만, 그 사건을 기점으로 아예 딱 끊었다. 이유를 물으니 제가 가진 것에 눈독을 들이는 여자는 경멸스럽고, 저보다 많이 가진 여자의 접근은 경계를 하게 된다고 대답했었다.

    “그런 게 아니라. 나 지금은 다른 사람 못 만나. 그러고 싶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어.”

    그러던 지원이, 십 년을 알아 온 동하가 처음 보는 눈빛을 했다. 얘가 진심으로 여자한테 빠지면 이런 얼굴을 하는구나. 짐짓 당혹스러웠지만, 동하는 최대한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문제야 뭐. 네 마음이 내켜야 하는 거지. 그리고 나 조만간 네 아랫집으로 이사 간다.”

    “진짜?”

    “바로 아랫집은 아니고, 아랫집의 옆집. 간단하게 수리를 해야 해서 3주 후에 들어갈 거야. 그럼 난 이만 간다. 모레 보자.”

    스무 명에 가까운 망자들이 무리를 지어 모여 있다는 말에 단단히 각오를 하고 왔지만, 속초 현장은 생각보다 정리가 수월했다. 여느 현장보다 망자의 수가 많긴 했어도 딱히 단합을 해서 공격을 하거나 하는 건 아니어서, 조금만 유인하면 하나씩 차근차근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은 많이 걸렸다. 마지막 남은 망자를 중천으로 보내고 나니 거의 자정이 다 된 시간이었다.

    이거 눈이 뻑뻑해서 운전은 못 하겠는데? 운전대를 잡고 잠시 고민하던 지원이 별장으로 향했다. 지난겨울에 잠깐 들른 이후로 거의 반년 만에 오는 거였다. 오래 비워두긴 했지만, 성실한 관리인을 둔 덕에 다행히 내부는 쾌적했다.

    간단하게 샤워를 마친 지원이 와인 한 잔을 들고 정원으로 나갔다. 관리인의 부지런한 성격이 정원 곳곳에서도 드러났다. 깔끔하게 정돈된 정원을 천천히 둘러보던 지원은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가꾸던 작은 화단 앞에 걸음을 멈췄다. 만감이 교차했다.

    - 나는 저 꽃 싫어. 이름도 촌스럽고 모양도 안 예뻐.

    - 엄마는 좋은데. 귀엽고 아기자기하잖아. 손톱에 예쁘게 봉숭아물도 들일 수 있고. 지원이도 해볼래?

    - 내가 여자야?

    한창 그런 것에 예민하던 사내아이의 거친 반응에도 엄마는 지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빙긋이 웃기만 했었다. 나중에 이모가 엄마와 봉숭아물을 들이던 날의 추억을 꺼냈을 때, 지원은 비로소 엄마에게 퉁명스럽게 굴었던 어린 날을 조금 후회했다. 그게 뭐라고 그렇게 질색했을까. 손톱에 물 좀 들이는 게 어때서. 

    아쉬운 마음에 화단 앞을 마냥 서성이던 지원이 정원 구석에서 힐끔거리는 시선을 발견하고는 표정을 조금 굳혔다.

    “누구십니까.”

    “너…, 내가 보이니?”

    어둠 속에서 슬그머니 걸어 나온 여자는 놀랍게도 아는 얼굴이었다.

    “…큰 숙모.”

    지원이 자신을 알아보자, 살아온 인생과 본인의 인격을 고스란히 담고 있던 여자의 표독스러운 얼굴이 더욱 사납게 변했다.

    “역시! 귀신을 보는 게 맞았어. 내가 너 정상이 아닌 줄 알았다고! 미친 게 아니라고 그렇게 시치미를 떼더니! 그 잘난 네 이모도 네가 이런 인간인 걸 알아? 세상에, 그래 놓고 우리를 그렇게 벌레 보듯 하다니!”

    악에 받쳐서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면서도, 여자는 감히 지원에게 달려들지는 못했다. 지원은 그저 무심한 얼굴로 여자의 발악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언젠가 우연히 그 끔찍한 면상을 마주치게 되면 속이 뒤집힐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이를 먹고 여유가 생겨서 그런지 오히려 조금 불쌍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욕심을 부리면서 아등바등 추하게 살더니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 주먹만 한 것이 뱃속에 시커멓게 박혀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병사인 모양이고. 생활고에 찌든 주름진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지원은 숙모와 동갑인 이모의 화사한 얼굴을 떠올렸다. 이래서 사람이 나이 마흔이 되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거야.

    “그나저나 숙모가 왜 여기에 있습니까? 이 근처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걸로 아는데.”

    황급히 시선을 피한 여자는 지원의 추궁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속은 훤히 들여다보였다. 이 집이 그렇게 탐이 났어? 죽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제일 먼저 여기로 달려올 만큼?

    지원네 재산에 눈독을 들이는 건 숙모 셋이 모두 마찬가지였지만, 그중 가장 노골적인 건 큰 숙모였다. 지원의 부모가 살아 있었을 적엔 얼마나 입 안의 혀처럼 살갑게 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지원이 아주 어렸을 땐 큰 숙모를 좋아하며 제법 따르기도 했었다.

    - 우리 지원이는 친동생이 없으니까 사촌들하고 친동기간처럼 잘 지내야 해.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도와줘야 하고. 알았지? 나중에 동생들 힘들 때 모른 척하면 안 된다? 응? 숙모가 얘기하면 네, 하고 착하게 대답해야지.

    하지만 숙모는 말과 속내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예민한 지원은 일찌감치 알아차렸다. 어떻게든 콩고물을 얻어먹으려는 심산이 너무 적나라하게 보여서 어린 마음에도 상대하기가 꺼려졌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무렵에는 그놈의 ‘친동기간처럼’이란 말이 너무 듣기 싫어서 지금이라도 엄마가 동생을 하나 낳아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 형님은 정말 좋으시겠어요. 세상에 무슨 복이 이렇게 많아서 이런 호강을 하면서 사세요? 너무 부러워요.

    앞에서는 마냥 순한 얼굴을 했었지만, 뒤에서는 시기와 질투가 가득한 눈빛으로 엄마를 노려보는 걸 한두 번 본 게 아니었다. 그런 숙모가 가장 배 아파했던 게 바로 이 별장이었다. 화단을 가꾸는 엄마를 멀찍이서 지켜보면서 입술을 실룩거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광경을 지원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 재수 없는 년. 별것도 아닌 게 사주에 금테를 두르고 태어났나. 웬 팔자가 이렇게 좋아? 부모도 없는 천애고아가 서방 하나 잘 물어서 대궐 같은 집에, 그림 같은 별장에….

    당신도 우리 엄마처럼 항상 웃는 얼굴로 다른 사람의 행복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사람이었다면 아마 팔자가 지금 같지는 않았을 거라고 말해주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한바탕 쏘아붙일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지원이 결국 짧은 한숨에 오랜 후회를 흘려보냈다.

    그래, 내가 악령하고 똑같이 굴 수는 없지. 하지만 이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어.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안절부절못하는 여자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지원은 단호하게 축객령을 내렸다.

    “내 집에서 나가.”

    “이건 내 집이야! 너만 없어지면 우리가 갖기로 했었다고!”

    “하!”

    사람이 큰맘 먹고 호의를 베풀어도 받는 쪽이 개차반이면 아무 소용이 없구나. 지원의 눈매가 한순간에 살벌해졌다.

    - 그러니까 내가 수면제 먼저 먹이라고 했잖아.

    지하실 문 밖에서 들려오던 독기 어린 목소리를 여전히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래, 생각해 보니까 그런 일도 있었지. 생전에 이미 악귀가 된 것들이었어. 동정의 여지가 없네. 내가 직접 손을 쓰고 싶지는 않지만, 중천의 녹을 먹는 입장에서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겠어. 목소리를 가다듬은 지원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중천 소속 가이드 차지원입니다. 귀하는 현재 이승에 머물 수 없는 망자의 신분으로, 즉시 중천으로 이동하여 생전의 공과에 대한 판정을 받아야 합니다.”

    “뭐야? 갑자기 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중천이 뭔데? 내가 왜 거길 가?”

    “지금 이 순간에도 공과는 계속 기록되고 있으며, 가이드의 지시에 따르지 않거나 도주할 경우 향후 행선지 결정에 큰 불이익을 받을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하긴 숙모는 불이익을 좀 더 받는다고 뭐가 크게 달라질 것 같진 않네요. 어차피 숙모가 지옥에 가는 건 기정사실이니까.”

    “…!”

    “그러니까 어디 도망이라도 쳐봐요. 혹시 또 압니까? 내가 못 잡을지도 모르잖아.”

    지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허둥지둥 달아나는 여자를 보며 지원은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좋아. 그래야지. 그렇게 꽁지가 빠지게 내빼야 내가 강제력을 쓸 수가 있지.”

    아직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와인을 그대로 잔디 위에 부어버린 지원이, 주름살의 위치와 푸석한 머리카락의 질감까지 신경 쓰며 그 어느 때보다도 정성스럽게 초상화를 그렸다. 그리고는 종이를 곱게 접어 주머니에 넣고는 입고 있던 실내복 위에 재킷 하나만 걸친 채 서둘러 운전대를 잡았다.

    얼마나 겁에 질려서 비참하게 세상을 떠나는지 내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봐주겠어.

    “어? 차 관장님. 이 시간에 중천에는 어쩐 일이세요?”

    “아, 네. 개인적으로 아는 망자 한 명을 강제 소환하게 됐는데, 워낙 성격이 포악해서 혹시 난동이라도 부릴까 봐 걱정이 돼서요.”

    입꼬리가 절로 들리는 걸 애써 억누르며 지원은 침착하게 초상화에 불을 붙였다. 한순간에 화르륵 타오르던 종이가 재가 되어 날리는 것과 동시에, 온몸에 불길을 휘감은 여자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서 솟아올랐다.

    “살려줘! 아악! 너무 뜨거워! 누가 이 불 좀 꺼줘요!”

    여자는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다급한 목소리를 냈지만, 중천에서는 흔한 광경이라 그다지 주의를 끌지는 못했다. 몸부림치며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여자에게 다가간 지원이 한껏 목소리를 내리깐 채 싸늘하게 말했다.

    “호들갑 떨지 마세요, 숙모. 하나도 안 뜨거워요. 그리고 이미 죽은 사람은 어떻게 살립니까.”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번쩍 든 여자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당장이라도 지원을 잡아먹을 듯 달려들었다.

    “너…, 네가 감히 나한테!”

    여자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은 지원이 가볍게 손을 들어 보안 요원을 불렀다. 분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보안 요원들의 기에 눌린 여자는 더 이상 반항하지 못했다. 여자가 판정원 앞에 서자마자 저울은 급격하게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판정원의 표정을 보고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은 여자가 지원에게 달려와 그의 팔을 잡고 매달리기 시작했다.

    “지원아. 나 좀 한 번만 봐줘. 우린 가족이잖아.”

    “우리가 왜 가족입니까. 당신들이 나한테 한 짓을 생각해보세요. 뻔뻔하게 어떻게 그런 말이 입에서 나오지?”

    “내가 잘못했어, 지원아. 응? 정말 미안해.”

    “저한테 이러셔도 소용없습니다. 숙모를 봐주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행여나 그런 마음이 든다고 해도 판정을 뒤집을 능력 같은 건 없다고요. 다음 생을 기약하세요.”

    “아악! 난 못 가! 절대 안 가!”

    여자는 어떻게든 그 자리에서 버티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소리도 없이 다가온 보안 요원들이 양쪽에서 그녀의 팔을 잡고는 힘도 들이지 않은 채 번쩍 들어 올렸다. 더없이 냉정한 얼굴로 악인의 말로를 지켜보던 지원이 막 돌아서려는 순간, 불현듯 등 뒤에서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지원아.”

    여기에서 들리면 안 되는 목소리였다. 순식간에 낯빛이 변한 지원이 그대로 굳어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긴가민가하던 목소리에 조금 더 확신이 실렸다.

    “지원아!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도저히 제 눈으로 확인할 엄두가 나질 않았지만, 끝까지 돌아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천천히 몸을 돌린 지원이 견딜 수 없는 참담함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지금 눈앞에 닥친 현실이 도무지 믿어지질 않았다.

    “이모….”

    “나는 죽어서 여기에 온 것 같은데…. 너는 왜 여기에 있어? 설마 너도!”

    “아니야, 이모. 나는 안 죽었어. 나는…, 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지원이 긴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떨궜다.

    “아아….”

    흐느끼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문 지원은 한참 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면 안 돼. 좋은 얼굴로 이모를 보내줘야 해. 하지만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폭포처럼 쏟아지기 시작한 눈물은 좀처럼 멈추질 않았다. 결국 지원은 온통 젖은 얼굴을 들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쩌다…. 왜 이렇게 갑자기…. 여기가 어디라고 와, 겁도 없이!”

    버럭 소리를 지르는 지원과 눈을 맞춘 리사가 눈물이 글썽한 얼굴로 애써 웃어 보였다.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겠어. 아마 교통사고가 난 것 같아. 택시를 타고 집에 가고 있었는데, 잠깐 잠이 들었다가 깨보니까 어떤 사람이 눈앞에 보이는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하더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어? 정말로 신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이모는 나한테 남은 유일한 가족인데…. 아이처럼 몸을 떨며 울고 있는 지원에게 다가간 리사가 그의 등을 다정하게 쓸어내렸다. 미처 준비하지 못한 죽음을 맞이했지만, 지원을 이만큼이나 키워 놓고 갈 수 있다는 게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언니는 어떻게 이 길을 갔어? 나도 이렇게 발이 안 떨어지는데, 그 작았던 아이를 두고 얼마나 울면서 이 길을 갔어? 참고 참았던 눈물이 투두둑 떨어졌다.

    “미안해, 지원아. 너를 이렇게 혼자 두고 가면 안 되는데…. 이모가 정말 너무 미안해.”

    부둥켜안고 통곡을 하는 두 사람의 곁에 차마 아무도 다가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지원이 마음을 추스른 것은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어쨌든 망자가 오래 지체하는 것은 좋지 않으니, 제때에 이모를 보내줘야 했다. 다행히 판정의 저울은 크게 왼쪽으로 기울었다. 당연히 환생을 하게 될 거라고 믿고 있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슴을 졸이던 지원이 비로소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러고 나서 두 사람은 환생지문을 향해 나란히, 그리고 천천히 걸었다. 짧지 않은 거리였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금방이었다. 내내 이모를 속이고 있었다는 게 마음에 걸렸었는데, 이렇게라도 털어놓을 수 있어서 그나마 조금 위안이 되었다.

    “이제 가볼게.”

    “…응.”

    “건강하게 잘 지내.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잠깐 말을 잇지 못하던 리사가 크게 숨을 몰아쉬더니 억지로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이모한테 마지막으로 할 말 없어?”

    “그날…, 나를 데리러 와줘서 정말 고마워.”

    리사의 미소가 환해지는 걸 보고 있으려니 간신히 진정시킨 목소리가 다시금 떨리기 시작했다.

    “이모는…, 마지막으로 나한테….”

    눈물범벅이 되었어도 여전히 예쁘기만 한 조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리사가 부러 과장된 한숨을 내쉬더니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내가 너 이러고 다닐 줄 알았어.”

    “하.”

    그게 나한테 마지막으로 할 말이야?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린 지원이 너무나도 기가 막힌 얼굴로 리사를 쳐다봤지만, 그렇게라도 조카를 웃음 짓게 했다는 것이 대단히 흡족했던 리사는 씩씩하게 돌아서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걷기 시작했다.

    “이모, 사랑해.”

    지원의 마지막 고백에 잠깐 멈칫하며 어깨를 크게 들썩였지만, 그래도 리사는 꿋꿋하게 정면을 향했다. 지원은 제게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다시 뚜벅뚜벅 걷는 리사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는 리사가 환한 빛 속으로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야 손을 들어 제 눈을 가렸다.

    “으흑….”

    “형.”

    어느새 곁에 다가와 있던 도겸이 빨개진 눈을 하고는 지원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자, 태산처럼 굳건해 보이던 어깨가 마구 떨려왔다. 중천에 있는 모든 이들이 조용히 숨을 죽인 채, 소리 없는 오열로 이별의 서러움을 감당하고 있는 지원을 안쓰럽게 지켜보았다. 도저히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해 차마 다가가지 못한 가온도 그중 한 명이었다.

    중천에서 나온 지원은 최대한 간단하게 짐을 꾸려 바로 공항으로 향했다. 누구를 통해 연락을 받았는지 이미 공항에 나와 있던 동하는 지원의 얼굴을 보자마자 말없이 항공권 한 장을 내밀었다. 동하의 손에 들린 여권을 가만히 바라보던 지원이 꽉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까지 할 거 없어. 너 다음 주부터 출근이라며.”

    “그딴 거 하루 이틀 미룬다고 안 죽어. 그리고 원래 이런 일은 다 상부상조하는 거야. 그러니까 나중에 우리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넌 빼도 박도 못하고 두 번 다 와서 운구해야 돼.”

    뉴욕에 도착했을 땐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지만, 다행히 장례식 당일에는 날이 활짝 개었다. 리사의 미소를 기억하는 많은 이들이 그녀의 마지막 가는 길을 눈물로 배웅했고, 지원은 제가 없는 곳에서도 이모가 외롭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며 허전했던 마음에 큰 위로를 받았다.

    중천에서 한바탕 눈물을 쏟은 뒤로, 지원은 줄곧 의연하게 잘 버텼다. 병원 영안실에서 시신의 신원을 확인할 때도, 공원묘지에서 백합 한 송이를 던질 때도, 제 앨범이 여섯 권이나 꽂혀있던 서재에 들어갔을 때도, 지원은 울지 않았다.

    어차피 유품을 한 번에 다 정리할 수는 없었기에, 지원은 일단 귀국하기로 결정했다. 갤러리도 돌아봐야 했고, 한동안은 낙하산 소리를 듣게 될 친구의 첫 출근이 사적인 볼일로 미뤄지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혼자서 괜찮겠어? 나 너희 집에서 며칠 지낼까?”

    “괜찮아. 혼자 있고 싶다.”

    며칠 새 눈에 띄게 야윈 지원이 못내 걱정스러웠지만, 동하는 더 이상 권하지 않고 지원을 집 앞에 내려주었다. 그래, 혼자서 실컷 울기라도 해라. 이럴 땐 차라리 그게 더 나을 수도 있으니까. 뭐라도 좀 먹는 걸 보면 한결 마음이 놓이겠지만, 어디 남의 말을 듣는 놈이어야 말이지.

    “그럼 쉬어.”

    “이번엔 정말 고마웠다. 가서 출근 준비 잘하고.”

    “그래. 혹시라도 필요한 게 생기면 바로 전화해.”

    “응. 연락할게.”

    동하는 고급스러운 조명이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로비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는 지원을 가만히 응시했다. 적당히 청소만 하고 입주할 걸 그랬나. 어차피 완공된 지 3년도 안 되는 건물인데. 그랬으면 이웃이라는 핑계로 들여다보기도 편했을 것을. 아쉬운 마음에 혀를 끌끌 차던 동하가 불현듯 안주머니가 이상하게 묵직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눈썹을 확 치켜떴다.

    “아, 여권!”

    혹시나 지원이 정신이 없어서 잃어버리기라도 할까 봐 제가 대신 챙기고 있었는데, 집에 들어갈 때 돌려준다는 걸 깜빡했다. 황급히 여권을 꺼내 들고 빠른 걸음으로 지원을 따라 들어간 동하는, 커다란 기둥을 돌아 엘리베이터 쪽으로 다가가다 급하게 멈춰 섰다. 지원이 웬 여자와 마주 보고 서 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반사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선 동하는 이대로 그냥 돌아갈 것인지, 두 사람의 대화를 잠시 엿들을 것인지를 놓고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 결과 매너와 호기심 사이에서 방황하던 양심은 슬며시 호기심의 손을 들어주었다. 기둥 뒤에 몸을 숨긴 제 모습이 제삼자에게 충분히 수상쩍게 보일 거라는 자각은 하고 있었지만, 지원의 까다로운 취향의 집대성인 듯 보이는 여성의 정체가 너무 궁금해서 도저히 그냥 돌아갈 수가 없었다.

    “대표님, 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

    대표님? 지원의 입에서 나온 낯선 극존칭과 정중한 말투에 동하는 왠지 목덜미가 조금 간지러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표님이라면…. 아, 런던에 출장을 가셨었다는 그분이신가? 되게 어려 보이는데?

    “큰일 치르고 왔다면서.”

    “네.”

    그런데도 말을 저렇게 편하게 하는 걸 보면 엄청난 동안이신가?

    “얼굴이…, 많이 상했네.”

    “아닙니다.”

    아니긴. 닷새 만에 얼굴이 반쪽이 됐는데. 그나저나 차지원 저 여자 앞에서 되게 폼 잡는구나. 지금 그럴 정신도 없는 줄 알았더니. 목소리가…, 어휴.

    “권 여사가 이것저것 챙겨줬어.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했을 거라고.”

    대단히 복잡한 얼굴을 한 지원이 일단 그녀에게서 꽤나 묵직해 보이는 가방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무게를 가늠하듯 가방을 살짝 추켜올리더니 대번에 못마땅한 목소리를 냈다. 표정을 보아하니 아마도 여자가 무거운 가방을 들고 온 게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이걸 직접 들고 오셨습니까.”

    “권 실장이 들고 오겠다고 했는데…. 내가 혼자 들어간다고 했어.”

    “안 말리던가요?”

    “응. 요새 권 실장 내 말 잘 들어.”

    별로 웃기는 얘기도 아닌 것 같았지만, 지원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조금 웃었다. 닷새 만에 처음으로 보는 미소에 동하의 눈이 커다래졌다. 우와, 저분 대단하신데? 생김새와 목소리 외의 정보는 전혀 없었지만, 동하는 순식간에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제가 이 시간에 돌아오는 줄은 어떻게 아시고요.”

    “알아보라고 했어. 미안해. 무례한 짓인 줄은 알아.”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마음이 안 좋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왔어. 그냥 그래야 될 것 같아서.”

    일순 굉장히 생각이 많아진 얼굴을 하던 지원이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는 숨을 한 번 크게 몰아쉬더니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순간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지켜보던 사람도 덩달아 숨을 죽이게 만드는 공기가 주변을 가득 메웠다.

    “잠깐 들어가시겠습니까? 오늘은 대표님 불편하시지 않게 할 자신은 없습니다.”

    “차 관장 때문에 불편한 적 한 번도 없었어.”

    때맞춰 경쾌한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지원은 자연스럽게 문을 손으로 막으며 여자를 먼저 안으로 태웠다. 분명 하루 이틀 사이에 만들어진 습관은 아니었다.

    “흐음….”

    들고 있던 지원의 여권을 손바닥에 탁탁 내리치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동하가 약간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모로 기울였다. 차지원이 원래 여자한테 저렇게 깍듯하게 구는 인간이었나? 저렇게까지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일거수일투족을 다 신경 썼었다고? 제대로 여자를 만나는 걸 본 게 너무 오래돼서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건가? 아니면 저 여자가 특별한가?

    혼자 있고 싶다더니, 여자 앞에서는 마음이 홀랑 바뀌네. 아무튼 여자랑 집으로 들어갔으니 방해하면 안 되겠지. 일단 뭐라도 먹을 테니 다행이고. 여권이야 뭐 당분간은 쓸 일도 없을 테니까. 지원의 여권을 다시 안주머니에 집어넣은 동하가 엘리베이터 쪽을 한 번 흘깃 쳐다보고는 그대로 건물 밖으로 빠져나갔다.

    간단하게 손만 씻고 식탁 앞에 앉은 지원은 권 여사가 보냈다는 가방을 열어보고는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소화에 좋은 음식들이 따뜻한 보온 용기에 담겨 가방 한가득 담겨 있었는데, 얼마나 푸짐한지 며칠을 먹어도 남을 만한 엄청난 양이었다.

    “권 여사님께 너무 큰 신세를 지네요.”

    “맛있게 잘 먹더라고 하면 그걸로 만족할 거야. 차 관장을 엄청 마음에 들어 했거든.”

    “대표님은 식사하셨습니까?”

    “먹었어.”

    “그러면 차라도 한잔 드리겠습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는 지원을 손을 뻗어 제지한 가온이 가방 안에서 텀블러 하나를 꺼내서 지원에게 내밀었다. 그리고는 마치 주문을 외듯 한 단어씩 또박또박 말했다.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샷 추가해서 따뜻한 걸로.”

    “…!”

    “이제야 겨우 차 관장의 취향을 하나 알았네.”

    괜히 울컥한 기분이 들어 입술을 앙다물던 지원이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따뜻한 커피 한 모금을 천천히 마셨다. 입 안 가득 퍼지는 풍부한 꽃향기가 날카로워졌던 신경을 한결 누그러지게 만들었다. 동시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뿌듯함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제 기분과 컨디션이 동시에 바닥을 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지원은 그제야 깨달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대표님.”

    “인사는 나중에 하고 얼른 먹기나 해. 차 관장 지금 얼굴이 사람 꼴이 아니야.”

    “네.”

    단정하게 젓가락을 집어 든 지원이 식사를 시작하자, 가온도 제 몫으로 준비한 커피를 꺼내서 조금씩 홀짝였다. 혼자서 마실 때는 이렇게까지 맛있지 않았던 것 같았는데, 오늘따라 유독 고소한 맛이 났다. 참 신기했다.

    “대표님, 지금 보안실장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까?”

    “그러겠지.”

    “그럼 바로 돌아가실 건가요?”

    “차 관장이 밥을 다 먹으면….”

    가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원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영문을 몰라 눈이 동그래진 가온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피곤해서 그런지 밥이 잘 안 먹히네요. 조금 쉬었다 먹겠습니다. 아직 다 먹은 거 아니니까 가시면 안 됩니다.”

    “차 관장….”

    “보안실장한테는 제가 대표님을 모셔다드리겠다고 연락하겠습니다. 누가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불편해서 체할 것 같아서요.”

    “차 관장 열 시간도 넘게 비행기 타고 왔잖아. 피곤한데 무슨 운전을 또 하겠다고…. 그냥 천천히 먹어.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릴 테니까….”

    가온의 말에 눈을 내리깔며 희미하게 웃던 지원이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점점 웃음기가 사라지는 지원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가온은 왠지 맥박이 빨라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표님.”

    “…응?”

    “저 지금 대표님한테 수작 부리는 중입니다. 1분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서, 하다못해 여기서 무영당까지 가는 동안만이라도 같이 있으려고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겁니다.”

    “…!”

    대체 이럴 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나. 적절한 대응 방법을 찾지 못한 가온이 커다란 눈을 깜빡이는 걸 지긋하게 바라보던 지원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휴대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안실장한테 전화하겠습니다. 대표님 불편하시지 않게 못한다고 미리 말씀드렸으니까, 그런데도 제 집에 들어오셨으니까,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제 말대로 해주셔야 합니다.”

    불면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퀭한 얼굴을 보면서도, 가온은 지원을 말리지 못했다. 딱히 불편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희주가 꼬박 1시간째 주차장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다. 무영당에서 지원의 자택까지는 차로 20분 거리고, 지금은 도로가 혼잡할 때도 아니니 왕복을 하고도 충분히 남을 시간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안 오시지? 밤에 사적인 볼일을 보러 나가신 건 처음인데…. 아니, 여태까지 대표님께 사적인 일이라는 게 있긴 했었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딱히 손꼽을 만한 게 없었다. 그래서 오늘 가온의 행보는 희주에게는 대단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모처럼 오전에 휴식을 취하고 집에서 점심을 먹은 가온은 현호와 잠깐 통화를 하더니 희주에게 놀라운 요구를 했다.

    - 권 여사. 차 관장이 오늘 미국에서 돌아온다는데, 가볍게 먹을 만한 것 좀 챙겨줄 수 있겠어?

    - 그럼요. 며칠 전에 상을 당했다면서요. 쯧쯧. 해수 말로는 하나뿐인 이모라던데, 큰일 치르는 동안 누가 먹을 거나 제대로 챙겨줬는지 모르겠네요. 걱정 마세요, 대표님. 한 상 제대로 차려서 보내겠습니다.

    - 아니. 내가 들고 갈 거니까 너무 거하게 준비하지는 말고.

    - …네?

    처음에는 가온의 말을 잘못 들었나 했다. 가온이 예의 무심한 말투로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나서야 희주는 제 인지능력 및 청력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 내가 차 관장네 집으로 가지고 갈 거라고. 그러니까 가방 하나 정도로 간단하게 챙겨.

    - 왜요?

    어지간해서는 가온이 하는 말에 토를 달지 않는 희주였지만, 이번만큼은 도저히 그 이유를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온은 누군가의 안부를 특별히 신경 쓰는 사람도 아니었고, 그럴 만한 여유도 없었다. 게다가 본인의 소지품도 직접 들고 다닐 일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휴대폰조차 몸에 지니고 다니질 않는다. 언제나 그녀의 옆에는 전화를 대신 걸거나 받아주는 사람이 있다.

    그런 그녀가 음식을 싸 들고 어딜 간다는 발상을 했다는 것 자체가 희주는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이상했다.

    - 중천에서 마지막으로 봤을 때 얼굴이 너무 안 좋아 보였어. 괜찮은지 내 눈으로 확인하려고.

    아니, 그러니까 그걸 왜 대표님이. 일단 시키는 대로 음식을 준비하면서도 희주는 그저 의아하기만 했다. 왜 갑자기 안 하던 일을 하시지? 보안실장의 말에 따르면 요즘 가온은 혼자서 커피를 사러 종종 나가기도 한다고 했다. 희주가 기억하는 한, 가온은 제 손으로 신용카드 한 번을 사용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으셨을까. 아무래도 임기를 마칠 때가 다가오니 마음이 심란하신 걸까? 속을 바짝바짝 태우며 기다리다 가온을 태우고 나갔던 차가 들어오는 걸 보고 반색하던 희주는, 차에서 현호 혼자 내리자 아연실색했다.

    “대표님 모시고 나간 사람이 왜 혼자 들어와? 대표님은?”

    “차지원 관장의 자택에 계십니다.”

    현호의 표정도 무겁긴 마찬가지였다. 사실 요즘 가온의 변화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은 사람은 희주보다는 현호였다. 분명히 가온의 태도가 어딘가 달라졌는데, 자신은 아무리 기억을 곱씹어 봐도 뭘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러다 보니 습관처럼 굳어진 일상적인 수행 업무도 행동에 앞서 한 번 더 곱씹게 되었고, 매사 그렇게 행동하는 건 사람의 정신을 매우 피폐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대표님이 왜 거기에 계셔?”

    “모르겠습니다. 차지원 관장이 제게 전화를 하더니 대표님은 자기가 모셔다드릴 테니 그냥 돌아가라고 하더라고요.”

    “왜?”

    “저도 모른다니까요.”

    무슨 심각한 고민이라도 있으신가? 그래서 자꾸 상급 가이드를 찾으시나? 우리는 의지가 안 되시는 모양이지? 그렇게 오래 모셨는데, 8개월짜리 상급 한 명을 당해낼 수가 없다니. 몹시 상심한 두 남매가 망연한 얼굴로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는데, 불현듯 등 뒤에서 누군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어슬렁어슬렁 나타난 소랑이 자신들을 대단히 한심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툭 내던진 말 역시 신랄하기 그지없었다.

    “왜 이렇게 눈치들이 없어?”

    “그게 무슨 소리야?”

    “둘이 서로 좋아하잖아.”

    “둘이 누군데?”

    “나 원 참. 이런 답답한 인사들을 봤나. 주 대표랑 차 관장, 그 둘이 서로 좋아해. 그걸 왜 모르지? 나는 한눈에 알겠던데.”

    “…뭐?”

    멍하니 반문하던 희주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꽥 질렀다.

    “뭐어?!”

    그나마 그 정도는 나름 인간적인 반응이었다. 거의 넋이 나간 현호는 석상처럼 굳은 채 한참 전부터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아, 깜짝이야.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여자가 먹을 거 싸 들고 남자 집에 간다고 나선 순간 얘기는 이미 끝난 거지. 가만히 들어보니까 매번 출장도 같이 다니고, 수행하던 다른 비서도 돌려보내고, 그랬다더만. 그게 다 둘이 같이 있으려고 그런 거잖아.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던데?”

    최근 가온의 행적을 되짚어보던 희주와 현호가 동시에 입을 떡 벌렸다. 물론 그렇고 그렇게 보자면 그렇고 그렇게 보일 소지도 없지 않은 건 사실이긴 한데….

    “대표님은…, 대표님이신데…, 어떻게 대표님한테…, 그럴 수가 있어?”

    “왜 못해? 남녀가 눈이 맞으면 원래 무슨 짓이든 하는 거지.”

    “무, 무, 무, 무슨 짓이라니! 대표님을 두고 어떻게 그런 불경한 생각을 해?!”

    당황해서 말을 더듬던 희주가 돌연 도끼눈을 뜨며 버럭 소리를 지르자 고개를 삐딱하게 꺾은 소랑이 대차게 코웃음을 쳤다. 불경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서로 마음이 있는 남녀가 눈에서 불꽃이 튀면 그다음엔 불장난을 하는 게 뻔한 수순 아닌가?

    “우리 내기할까? 나는 조만간 두 사람이 아침에 운휴재에서 함께 나온다, 에 한 표. 자, 그럼 반대쪽에 거실 분?”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밤에 보는 한강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색색의 조명과 자동차의 빨간 불빛들을 홀린 듯이 바라보던 가온이, 소음이 나지 않게 주의하며 옆자리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아까부터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지원은,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 제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여기에 있겠다고 약속하신 겁니다.

    가온의 만류에도 기어이 식사를 중단한 지원은, 한눈에 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한 소파에 가온을 앉히고는 자신도 그 옆자리에 앉았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유유히 흐르는 강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1시간 가까이 앉아 있었는데 지루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차 관장.”

    “….”

    왠지 기온이 떨어진 것 같은 기분에 지원을 불러 보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조금 더 기다려보던 가온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곤히 자는 줄로만 알았던 지원이 바로 손을 뻗어 가온의 손목을 잡았다. 잠을 자고 있던 사람의 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반응 속도였다.

    “어딜 가십니까.”

    “차 관장이 잠이 든 것 같아서. 이불이라도 덮어줄까 했지.”

    “그럴 리가요. 대표님이 옆에 계신데 제가 어떻게 잠을 잡니까.”

    “피곤할 거 아냐.”

    “괜찮습니다.”

    “안 갈 테니까 한숨 자는 게 어때? 차 관장 지금 얼굴색이 정말 너무 안 좋아.”

    가온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설핏 미소를 짓던 지원이 곧이어 씁쓸한 얼굴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싱숭생숭해질 정도로 많은 것들이 담긴 한숨이었다.

    “왜 그래?”

    “제가 너무 쓰레기 같아서요.”

    “그게 무슨 소리야?”

    가온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은 지원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가온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시죠, 대표님. 밤이 너무 늦었으니 이만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밥 다 먹을 때까지 있으라며.”

    “그러고 싶었는데, 지금 대표님이 여기에 계신 게 너무 좋아서 안 되겠습니다.”

    “그러면 안 돼?”

    “이모를 잃은 슬픔을 미끼 삼아 대표님을 붙잡아 두는 것까지는 제가 너무 급해서 하긴 했는데…. 그래도 사람이 이 상황에서 기분이 좋으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생각이 많은 얼굴로 지원이 내민 손을 빤히 쳐다보던 가온이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는 힘을 주어 저를 일으키려는 지원을 그대로 잡아당겼다. 조금 놀란 눈을 하던 지원은 일단 가온이 하는 대로 순순히 끌려와서는 그녀의 옆에 다시 앉았다.

    “대표님.”

    “산 사람은 살아야지.”

    “네, 압니다.”

    “떠난 사람은 차 관장이 기왕이면 조금이라도 더 기쁘고 즐겁게 살기를 바랄 텐데.”

    “….”

    그러겠지. 다시금 이모의 마지막을 떠올린 지원이 마구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정돈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여러 번 거칠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스리려고 애쓰는 지원을 몹시 안타깝게 바라보던 가온은, 그 와중에도 저와 눈을 맞춘 지원이 어떻게든 웃으려고 노력하자 그의 등을 가만가만 쓸어내렸다.

    정면을 응시한 채 얌전히 그 손길을 받고 있던 지원이 어느 순간 뭔가를 꾹 참는 얼굴로 천장을 올려다보더니, 약간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 정말 가시죠. 쓰레기도 모자라 짐승까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처음에는 지원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몰라 어리둥절하던 가온은, 곧 자신의 격려가 지원에게는 자극이 되었음을 깨닫고 이번에는 군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영당으로 가는 길은 참으로 짧았다. 사실 가온에게 말은 안 했지만, 지원은 지금 거의 40시간 가까이 깨어 있는 거였다. 그런데도 하나도 피곤하지가 않았다. 가온에게 부담이 되지만 않는다면 이대로 밤이 새도록 운전을 해도 좋을 것만 같았다.

    “그럼 편히 주무십시오, 대표님.”

    “차 관장도 얼른 가서 푹 쉬어.”

    “네.”

    일단 인사는 나눴지만, 두 사람 모두 대문 앞에 가만히 선 채 누구도 먼저 돌아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들어가세요. 밤바람이 찹니다.”

    “나는 집에 다 왔잖아. 멀리 가야 되는 사람이 먼저 가.”

    “멀지 않아요. 20분이면 갑니다.”

    “그래도.”

    두 사람이 좀처럼 끝나지 않을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걸, 어둠 속에서 초롱초롱 빛나는 여섯 개의 눈이 지켜보고 있었다.

    “거 봐. 내가 뭐랬어? 둘이 좋아한다고 했지? 저 닭살 돋는 짓거리들을 보라고. 이야, 멘트 한번 전형적이네. 창의력이라는 게 없어. 주 대표야 연식이 오래돼서 그렇다지만, 저건 젊은 놈이 왜 이렇게 구식이야?”

    “어머나, 세상에. 나는 우리 대표님이 평생을 그저 중천에서 일만 하실 줄 알았는데.”

    “그래서 불만이야?”

    옷고름에 눈물을 찍어내던 희주가 이죽거리는 소랑의 말에 발끈하며 매섭게 노려보았다.

    “불만이라니! 좋아서 하는 말이야, 좋아서!”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이러다 밖에 다 들리겠어. 우리 지금 굉장히 변태 같은 거 알고 있어? 들키면 완전히 개망신이라고.”

    갯과 짐승 운운하던 지원의 말을 떠올리며 소랑은 황급히 희주의 입을 단속했다. 올망졸망 쪼그리고 앉아서 개구멍을 통해 밖을 내다보는 건,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차지원에게만큼은 절대 보일 수 없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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