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초여름, 수국 길에서
사박사박. 포근한 동굴 속에서 막 잠이 들었던 소랑이 미세한 소음에 반짝 눈을 떴다.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분명했지만, 무영당의 그 누구도 이런 이른 새벽에는 소랑의 영역에 함부로 발을 들이지 않는다. 맹수의 본능을 잃지 않은 소랑이 전투태세를 갖추며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침입자인가? 대체 어떻게 들어왔지? 귀를 쫑긋 세우고 불청객의 정체를 파악하던 소랑이 익숙한 냄새를 감지하고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으며 동굴 밖으로 나왔다.
“가온. 이 시간에 여기서 뭐 해?”
“아, 소랑. 나…, 산책.”
“산책…?”
의외의 대답에 소랑의 눈이 커다래졌다. 가온과 기나긴 세월을 함께 보내는 동안, 그녀가 이렇게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처음 봤다. 가온은 예나 지금이나 항상 바빴고, 자신을 위한 시간을 낼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웬 바람이 불어서 이 새벽에…. 무슨 큰일이라도 생겼나?
“웬일로?”
“운동을 좀 해볼까 해서.”
“왜?”
“낮에 운동을 하면 밤에 잠이 잘 오더라고.”
“지금 잠이 안 와서 이러고 있는 거라고? 밤새 하나도 못 잔 거야? 그건 그렇고 당신이 따로 시간을 내서 운동을 하기도 해?”
“누가 유산소 운동을 권하길래….”
“누가 그런 기특한 짓을 했어?”
“….”
가온이 안 하던 짓을 하는 게 영 수상쩍어서 계속 질문을 던지던 소랑은 그녀가 의외의 질문에 대답을 못하자 눈꼬리를 갸름하게 접었다. 워낙 겉과 속이 다 투명해서 비밀이랄 게 없던 가온이 제게 대답을 못 하는 게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순식간에 체취가 변하는 건 더욱 당황스러웠다.
뭐지…, 이게? 기온이 올라간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땀을 흘리지? 게다가 왜 이런 냄새가 나는 거야? 이건…, 젊은 애들끼리 서로 눈이 맞았을 때나 나는 냄샌데…. 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가만, 어디 아픈 거 아니야?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소랑이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가온을 올려다봤지만, 간신히 치워두었던 기억을 또다시 떠올리게 된 가온은 소랑의 표정이 대단히 심각해졌다는 걸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 손도 잡고 싶고, 품에 안고도 싶고, 입도 맞추고 싶은…. 남자가 여자를 원하는 그런 마음으로 제가 대표님을 좋아합니다.
천 년 가까이 살면서 이렇게 직접적인 고백을 받아본 건 처음이었다. 평범한 인간이던 시절에 혼담이 들어온 적은 몇 번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집안 대 집안으로 진행된 절차였기에 당사자와 직접 마주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때문에 자연스럽고 우아하게 거절하는 방법 같은 건 익히지 못했다. 당연히 안 되는 일이라고 거절을 하긴 한 것 같은데, 순간 너무 당혹스러워서 그랬는지 정확히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 놀라시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이렇게 할 말이 아닌데, 저도 좀 당황해서…. 아무튼 대표님이 하신 말씀은 잘 알아들었습니다. 앞으로 대표님 불편하실 일 없게 하겠습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지원은 정말로 예전과 하나도 다르지 않게 행동했다. 괜히 눈치를 보거나 조심스럽게 굴지도 않았다. 호텔에서도,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지원은 줄곧 침착한 얼굴로 가온의 침식을 살피고 정성스레 컨디션을 챙겼다. 너무 미안해서 앉은 자리가 불편할 정도였다.
그저 단순한 친절과 배려가 아니었구나. 진상을 알고 나니 그간 지원이 제게 보여주었던 태도가 새삼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그게 다 내게 마음이 있어서 그랬던 거라고….
- 어깨는…, 괜찮아?
도대체 어떻게 반응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어서 그저 입을 다물고만 있던 가온이 지원에게 다시금 제대로 말을 건넨 건 인천공항 입국장에서였다.
- 괜찮습니다. 보기에만 심하지 통증도 거의 없고요.
- 운전할 수 있겠어? 일단 내 차로 같이….
- 아닙니다. 대리 불렀습니다.
빠르기도 하지. 그건 또 언제…. 어쨌든 운전을 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라는 얘긴데…. 뭔가 더 물어보려고 입을 여는 찰나, 저를 데리러 온 기사가 황급히 다가와 짐을 받아드는 바람에 기회를 놓쳤다. 지금 바로 병원으로 갈 건지, 집에 가면 돌봐줄 사람은 있는지…. 궁금한 게 많았지만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 고생 많으셨습니다, 대표님.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 그래…, 차 관장도 고생했어.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서는 한숨도 잠을 자지 못했다. 인간이 나를 상대로 어떻게 그런 마음을 가질 수가 있을까. 처음엔 아주 당돌한 눈을 가진 녀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눈빛이 변한 건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해소할 길이 없는 궁금증이 계속 꼬리를 물어 신경을 자극했다. 고민을 해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은 처음부터 접어두는 성격이었지만, 이 문제만큼은 쉽게 접히지가 않았다.
“가온. 당신 어디 아파? 이번 출장이 너무 힘들었어?”
깊은 상념에 빠져 있던 가온이 소랑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야. 힘든 거 없었어.”
너무 편해서 탈이었지, 모든 면에서. 그래, 사람이 어쩜 이렇게 다정하고 배려심이 깊을까 했어. 젊은 사람이 나랑 취향까지도 똑같은 게 너무 신기했고. 그런데 그게 다 나를 상사가 아니라 여인으로 봤기 때문이었다고…. 이걸 참…, 어떻게 해야 하나. 그냥 두면 언젠가는 지나가겠지만, 나중에 보면 결국은 별것도 아닌 일이 되겠지만, 짧은 생을 사는 인간에게 하루는 그냥 버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것인데.
“대표님, 대표님! 어디 계세요?”
“아….”
멀리서 희주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가온이 작게 실소하며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내가 방에 없는 걸 알고 기함했겠구나. 이런 적은 처음이니 많이 놀랐겠어. 말을 하고 나온다는 것이 정신이 없어서 잊었군. 내가 이렇게 한군데에 정신이 팔리면 안 되지. 차 관장은 똑똑한 사람이니 제 감정은 알아서 잘 단속할 테고.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나 여기 있어.”
“여기서 뭘 하고 계셨어요? 집안에 뭔가 사특한 것이라도 들어왔나요?”
“아니야. 그냥 좀 걸었어. 간만에 소랑하고 얘기도 좀 하고.”
그건 아니지. 자는 나를 깨워놓고는 무슨 일인지 제대로 말도 안 하고 혼자서 심각했잖아. 못마땅한 얼굴로 입꼬리를 실룩거리면서도 소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긴. 중천주가 신경 써야 할 것들이 어디 하나둘일까. 좋아, 이번에는 특별히 내가 한 번 넘어가 준다. 그러니까 아프지나 말라고. 혼자인 이에게 그것처럼 청승맞은 일이 없으니.
“소랑. 깨워서 미안해.”
“됐어. 가서 밥이나 먹어.”
지금이 내가 자는 시간이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네. 쯧쯧. 대체 얼마나 속을 썩이는 일이길래. 희주와 함께 본채로 내려가는 가온을 심란하게 바라보던 소랑이 길게 하품을 하며 제 동굴로 다시 들어갔다. 털의 윤기를 잃지 않으려면 숙면은 필수이니 천지가 개벽하지 않는 한 최소한의 수면 시간은 채워야 했다.
삑삑삑삑삑.
가만히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워 있던 지원이, 도어록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에 살벌하게 눈을 치켜떴다. 연해수, 이 자식을 내가 진짜! 비밀번호 바꾼 건 또 어떻게 알았지? 확 자물쇠를 달아버릴까. 아니야, 아예 먼 데로 이사를 가야겠어. 조만간 서울 땅을 뜨고야 만다, 내가!
“형! 형! 다쳤다면서요! 어딨어요, 형? 괜찮아요?”
호들갑스럽게 침실 문을 열어젖힌 해수가 저를 똑바로 노려보는 지원의 시선에 움찔하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우, 우와. 그래도 형 눈빛을 보니까 되게 기운차 보이고 좋네요. 눈빛으로 황소도 때려잡겠어요, 형.”
“황소는 모르겠고, 너 하나 정도는 때려잡을 수 있을 것 같다.”
“아하하….”
어색하게 웃는 해수의 뒤로 몹시 난감한 얼굴을 한 도겸이 슬쩍 얼굴을 내밀었다. 넌 또 뭐야? 애가 아침부터 이렇게 설치는 걸 말리지는 못할망정, 쪼르르 같이 기어들어 와? 어금니를 사리문 지원이 거의 텔레파시에 가까운 의사 전달력을 보이자, 한숨을 푹 내쉰 도겸이 주섬주섬 변명을 늘어놓았다.
“말렸어요, 형. 한두 번도 아니고, 수도 없이 말렸다고. 이 집 현관 들어오는 순간까지 말렸어요. 근데 얘가 어디 내 말을 들어요? 죽어도 제 눈으로 형 얼굴을 봐야겠다는데 어떡해. 밤새 징징거리면서 사람을 들들 볶았다고.”
“그래서 남의 집 비밀번호를 홀랑 불었냐?”
“맞다! 비밀번호! 형, 왜 도겸이 형한테만 알려주고 나한텐 비밀이에요? 너무한 거 아니에요? 나 너무 서운해서 눈물이 다 났어요!”
“너는 이렇게 막 들어오니까! 서도겸은 알아도 함부로 안 들어오니까!”
버럭 소리를 지르던 지원이 순간 열이 확 뻗쳐서 뜨끈해진 눈가를 손으로 짚었다. 나 좀 가만히 내버려두라고, 이 망할 놈들아. 안 그래 보여도 나 지금 되게 상심했다고. 여자 앞에서 폼 잡느라 있는 기운 없는 기운 다 써서 기분이고 체력이고 다 바닥이라고!
- 차 관장, 내 나이가 몇인 줄은 알아?
- 대강은 압니다.
- 대강…. 아니, 그런 문제보다도…. 이걸 대체…,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 나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이라…. 어쨌든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그러니 못 들은 걸로…. 아니…, 이미 들었으니 그럴 수 없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하아.
- 놀라시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이렇게 할 말이 아닌데, 저도 좀 당황해서…. 아무튼 대표님이 하신 말씀은 잘 알아들었습니다. 앞으로 대표님 불편하실 일 없게 하겠습니다.
일단 충격을 받은 가온을 진정시키기 위해 태연하게 굴긴 했지만, 이번에는 확실하게 거절을 당했으니 당연히 속이 쓰렸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지난번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지나가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한 번에 고백이 받아들여지는 장밋빛 미래를 꿈꿨던 건 결코 아니었지만…. 이건 정말 타격이 크네.
“형, 많이 아파요? 어지러워서 그래요? 잠깐만 기다려요. 내가 얼른 죽 끓여 올게요.”
“뭘 끓여? 야, 연해수! 너 주방에 한 발자국이라도 들어가기만 해! 너 이리 안 와?!”
단숨에 벌떡 몸을 일으킨 지원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해수는 한 꾸러미 챙겨 온 짐을 들고 서둘러 주방으로 향했다. 이미 환자에게 일용할 양식을 제공해야 한다는 미션만 머릿속에 가득해서, 다른 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누워요, 형. 진정하고. 그러다 상처라도 벌어지면 큰일이에요.”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너 지난번에 그 소금죽 맛도 안 봤어?!”
“봤어. 봤고, 바로 뱉었어. 일단 해수가 뭐라도 끓여 오면 대충 먹는 시늉만 해요. 엄청 걱정했단 말이에요. 쟤 어차피 선수촌에서 몰래 빠져나온 거라 여기에 오래 못 있어. 가고 나면 먹을 만한 걸로 시켜줄게요.”
“아아….”
눈을 질끈 감은 채 털썩 몸을 누인 지원이 거칠게 마른세수를 하며 긴 탄식을 내뱉었다. 내가 지금 다른 사람 기분이나 맞춰줄 상태가 아니라고. 그러니까 제발 좀 꺼지라고!
“그런데 형. 진짜로 많이 다친 거 아니에요? 입원해야 되는 거 아니야?”
“그 정도는 아니야. 살갗만 조금 벗겨졌어. 병원에 있어 봤자 드레싱 정도밖에 할 것도 없고.”
“그런데 왜 이렇게 맥을 못 춰? 안색이 되게 안 좋은데.”
“마음을 다쳐서 그런다.”
“왜 또? 거기서 대표님하고 무슨 일 있었어요?”
신음과도 같은 긴 한숨을 내쉰 지원이 만사가 성가시다는 듯 대충 손을 내저었다.
“알 거 없어. 길게 설명하기도 싫고.”
“처음부터 힘들 거 알았잖아.”
“서도겸.”
“알았어요. 닥치고 나가 있을게. 일단 쉬어요.”
도겸은 순순히 입을 다물었지만, 그렇다고 집이 다시 고요해진 것은 아니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건지 1시간이 넘도록 줄기차게 주방을 때려 부수는 소리를 내던 해수는, 나중에 먹겠다는 지원을 기어이 일으켜 세워 식탁 앞에 앉히더니 쉴 새 없이 조잘조잘 떠들었다. 귀에서 피가 날 것 같다는 표현이 바로 이런 경우에 쓰는 말이라는 걸 지원은 처음으로 깨달았다.
“얼른 먹어 봐요, 형. 이건 진짜 괜찮을 거예요. 지난번에는 너무 짠 게 문제였으니까, 이번에는 소금을 진짜 조금밖에 안 넣었어요. 혹시라도 상처가 덧나면 안 되니까 염증 치료에 좋다는 양배추랑 양파도 많이 넣었고….”
“먹을 테니까 제발 그 입 좀 다물어라.”
“제가 너무 시끄러웠어요? 미안해요, 형.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그래도 형이 이렇게 무사한 걸 보니까 너무 좋아서…. 형이 악령한테 당했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진짜 너무 놀라서 표적이 아닌 데를 쏠 뻔했다니까요?”
“…!”
심정적으로는 돌덩이보다도 무거운 숟가락을 간신히 들어 올리던 지원과 그런 지원의 모습을 마냥 안쓰럽게 바라보던 도겸이 동시에 기함하며 입을 떡 벌렸다.
“야, 이 미친놈아!”
“쏠 뻔했다고요. 진짜 쏜 건 아니고요.”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훈련할 때 휴대폰 들고 들어가지 말라고 했잖아!”
“안 가지고 들어갔어. 우리 코치님이 알려주신 거야. 코치님 부인이 이번에 논숨에 갔던 가이드거든. 헤헤, 코치님도 총구가 흔들리니까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라.”
할 말이 많은 얼굴로 해수를 노려보던 지원이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지금 입을 열면 제일 먼저 튀어나오는 건 험한 말일 게 분명한데, 사실 욕을 하는 것도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지금은 만사가 귀찮아서 해수에게 그 정도의 성의도 보이고 싶지가 않았다.
해수를 최대한 빨리 집에서 내보내려면 죽을 먹어치우는 게 유일한 방법이다. 재료들이 하나같이 분명하게 자기주장을 내세우고 있는 죽을 가만히 응시하던 지원이 용기를 내어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는 아주 잠깐 멈칫했다가 천천히 저작 운동을 시작했다.
“어때요, 형? 안 짜죠? 맛은 괜찮아요? 먹을 만해요?”
“…그래.”
대관절 1시간 동안 뭘 한 건지 하나도 익지 않은 밥알은 생쌀 그 자체였고, 마치 찌개에 넣는 것처럼 큼직큼직하게 썰린 채소들은 씹을 때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희한한 비린내를 풍겼으며, 진짜 조금 넣었다는 소금은 놀랍게도 한데 뭉쳐있었는지 알갱이가 서걱 소리를 내며 씹혔지만, 씹어서 넘길 때 너무 역하지는 않은 정도니 넓게 보면 ‘먹을 만한’의 범주에 넣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거 봐. 이번에는 내가 자신 있다고 했잖아. 형도 먹어 봐, 얼른.”
도겸은 제 앞에 놓인 대접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일단 냄새부터가 심상치 않았지만, 입맛이 까다로운 지원도 묵묵히 퍼먹고 있으니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머뭇거리며 극소량의 죽을 입에 넣은 도겸이 순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크게 꿈틀거렸다.
“어때? 맛있어?”
“해수야. 너는 요리하는 중간에는 간을 아예 안 보니?”
“응! 레시피대로 하는데, 간을 왜 봐?”
“그럼 너도 한번 먹어보고 얘기할래?”
“나는 선수촌에서 아침 먹고 왔어.”
“그래…. 지금 생각해 보니까 나도 아침을 먹은 거 같다. 어쩐지 배가 하나도 안 고프더라.”
즉각 숟가락을 내려놓은 도겸은 말없이 그릇을 비우고 있는 지원을 보며 조용히 혀를 찼다. 저 형 지금 진짜 안 좋구나. 미슐랭 원스타 정도는 취급도 안 하는 사람이 이런 쓰레기 같은 죽을 꾸역꾸역 먹고 있다니. 충격으로 미각을 상실했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런데 대표님은 요즘 왜 검을 안 쓰실까요? 예전에는 도저히 손 쓸 수 없는 악령은 가차 없이 베기도 하셨다던데.”
느릿하지만 꾸준히 이어지던 숟가락질이 딱 멈췄다. 아…, 뭔지는 모르겠지만 해수 이 자식이 지금 뭔가 위험한 걸 건드리고 있는 것 같은데. 지원의 눈빛이 변했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린 도겸이 식탁 아래로 해수의 발을 툭 걷어찼지만, 해수는 그저 순진한 눈망울을 데굴데굴 굴릴 뿐이었다.
“왜 나를 차? 대표님이 진작 망자를 베셨으면 지원이 형도 이렇게 안 다쳤을 거 아냐. 대표님은 우리를 너무 강하게 키우시는 것 같아. 냉정하게…. 하여간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끝까지 너무 FM이셔.”
이런 배은망덕한 새끼를 봤나. 더없이 복잡한 눈빛을 한 지원이 해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답답한 한숨을 토해내며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래, 네가 뭘 알겠냐마는. 적어도 너만큼은 대표님을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형, 왜 저를 그런 얼굴로 보세요?”
“내 얼굴이 어떤데?”
“목숨 걸고 물에 빠진 사람 살려놨는데 그 사람이 너 때문에 명품 지갑 잃어버렸다고 바락바락 대들어서 이걸 한 대 칠까 말까 고민하는 얼굴이요.”
“…귀신같은 놈.”
나직하게 중얼거린 지원이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형. 더 안 드세요?”
“많이 먹었어. 이제 좀 쉬어야겠다. 치우는 건 사람 시킬 테니까 그냥 놓고 가. 잘 먹었다.”
침실로 돌아가는 지원의 뒷모습을 아련하게 바라보던 해수가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지원이 형 많이 아픈가 봐. 너무 불쌍하다.”
“그래도 너는 할 만큼 했어. 지원이 형도 고맙게 생각할 거야. 그러니까 우린 이제 그만 가자, 응? 우리가 있으면 지원이 형 쉬지도 못해. 예민한 사람이잖아.”
“응. 전화 한 통만 하고.”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인 해수가 휴대폰을 집어 들더니 단축번호 하나를 길게 눌렀다.
“권 여사님! 저 해수예요. 저 권 여사님이 해주신 꼬리찜 먹고 싶은데, 이번 주말에 저희 상급 회의 무영당에서 해도 돼요? 네. 지원이 형 다친 건 아시죠? 형 몸보신 시켜주고 싶은데 꼬리찜 같은 건 제가 도저히 만들 수 없을 것 같아서요.”
아무리 지원이 그냥 두라고는 했어도 최소한 식탁 정리는 해야겠다 싶어서 그릇들을 싱크대로 옮기던 도겸이 들고 있던 그릇을 내동댕이치고는 기겁하며 달려갔지만, 말리기에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야, 너 이런 건 일단 지원이 형한테 물어나 보고….”
“네, 감사합니다! 그러면 토요일 저녁 시간에 맞춰서 갈게요.”
쾅! 낯빛이 흑색으로 변한 지원이 거의 문을 부술 듯 열어젖혔다. 아…, 난 이제 모르겠다. 지원의 손에 들린 슬리퍼가 마치 총알처럼 일직선으로 날아오자, 크게 한숨을 내쉰 도겸은 그대로 눈을 질끈 감았다.
“감독님, 저녁에 약속 있으세요?”
로아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초조하게 책상을 두드리고 있던 도겸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오늘따라 유독 시간이 빨리 흐른다고 생각을 하긴 했는데, 제가 이렇게까지 티를 내고 있는 줄은 몰랐다.
“네.”
“바쁘시면 가보셔도 돼요. 저는 내일 다시 와도 상관없어요.”
로아를 빤히 쳐다보던 도겸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여성들과 일을 할 때는 가급적 일정한 거리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편이었지만, 괜한 눈치를 보게 만든 게 미안해서 그랬는지 여느 때보다는 목소리가 조금 부드럽게 나왔다.
“아닙니다. 약속에 늦을까 봐 그러는 게 아니고, 가기 싫어서 그러는 거예요.”
“…네?”
“뭐,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 아무튼 여기 사비에 단어 하나를 바꿨으면 좋겠다는 거죠? ‘따뜻한’을 ‘따스한’으로?”
“네, 죄송합니다.”
고개를 푹 숙이는 로아를 보며 도겸이 미간을 조금 구겼다. 얘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걸까. 얼마나 여기저기 눈치를 보면서 제 탓이 아닌 것들을 사과하며 살았길래, 이렇게 매사에 고개부터 떨구는 걸까.
“이로아 씨.”
“네?”
“이걸 왜 ‘따스한’으로 바꾸고 싶어요?”
금세 기가 죽은 로아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도겸은 의식적으로 조금 더 다정한 눈빛을 보였다. 저를 추궁하려는 것 아닌 것 같았는지, 떨리는 숨을 크게 몰아쉰 로아가 띄엄띄엄 말을 꺼냈다.
“일단은…, 고음이라 쌍디귿 발음이 어려웠고…. 가사가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느낌이라 좀 더 발음이 약한 단어를 쓰는 게…, 좋을 것 같았어요.”
“그래요. 그럼 그렇게 불러봅시다. 내가 생각해도 그게 더 잘 어울릴 것 같네.”
“…!”
도겸이 이렇게 쉽게 승낙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로아의 커다란 눈이 더욱 동그래졌다. 도겸은 왠지 착잡해지는 기분을 추스르며 여상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이로아 씨. 이건 내가 만들긴 했지만, 이젠 이로아 씨 노래예요. 앞으로 사람들도 그렇게 기억할 거고. 무엇보다 노래가 이로아 씨의 마음에 드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에요. 다음에 어떤 작곡가를 만나서 작업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으면 어렵더라도 얘기해서 고쳐야 돼요. 안 그러면 평생 후회가 남을 테니까.”
“…네, 감사합니다.”
아이고. 아무리 감정이 풍부한 배우라지만, 고작 이런 말에도 이렇게 눈물바람을 하면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러시나. 무심한 손길로 로아의 앞에 티슈를 내려놓은 도겸이 지나가는 말처럼 보이지 않는 물건의 안부를 물었다.
“팔찌는 뺐네요?”
“네. 안 좋다고 하셔서.”
“그 말이 바로 믿어졌어요?”
“초면에 허튼소리 하실 분은 아닌 것 같아서요.”
도겸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꿋꿋하게 나오는 대답을 경청하며 설핏 미소를 지었다. 성실한 사람이네. 하긴 그러니까 강PD 같이 깐깐한 사람의 눈에 들었겠지.
“어디에 뒀어요?”
“시골집 창고에요. 자취방에 두기에는 께름칙하고…. 그렇다고 팔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어서.”
“잘했어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내가 제대로 한번 볼게요. 하지만 어떻게 처리를 하더라도 그 물건 자체는 오래 가지고 있지 않는 편이 좋아요.”
오래된 물건이라고 해서 모두 귀신이 달라붙는 건 아니지만, 유독 망자들이 좋아하는 물건이 있다. 로아가 끼고 왔던 팔찌가 딱 그랬다. 아마도 전 주인이 애지중지하며 아끼고 오래 곁에 뒀던 물건이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좋은 기운이 서린 물건은 사람뿐 아니라 귀신들도 탐을 낸다. 안타깝게도 그런 경우에는 물건을 파기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일 때가 많다.
“네.”
“당연히 속상하고 아깝겠지만….”
“엄마도 이해하실 거예요. 정말로 저한테 해가 되는 물건이라면요.”
“좋아요. 그건 나중에 다시 얘기하고. 이제 바뀐 가사로 한번 불러봅시다. 녹음실로 들어가요.”
헤드폰을 통해 로아의 노래를 듣고 있던 도겸이 곧 헤드폰을 벗고 스피커의 스위치를 올렸다. 그러자 맑은 샘물처럼 퐁퐁 솟아나는 청량한 목소리가 작업실을 가득 채웠다. 연습을 많이 했네. 숨 쉬는 부분 하나하나도 엄청 고민하면서 정했을 테고. 조금만 더 자신 있게 부르면…, 이건 대박이다!
따스한 햇살이 초록 숲을 반짝이고 있어. 노래가 절정으로 흐를수록 도겸의 입꼬리가 점점 더 위로 크게 호선을 그렸다.
“…그럼 일산에는 내가 갈게. 거기는 시야에 걸리는 게 많아서 형이나 해수보다는 내가 가는 게 효과적일 것 같아. 월요일, 화요일은 일정이 있으니까 수요일쯤에 가 볼게. 해수 너는 주중에 시간 날 때 청주에나 한 번 다녀와. 선수촌에서 별로 멀지 않지?”
“응, 안 멀어. 차로 40분 정도…. 그런데 형, 다음 주 수요일은 보름인데? 형 혼자 가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겠어?”
“내가 같이 갈게.”
무영당 대문 안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지원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거절당한 상대의 집에 들어와 있는 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멘탈이 털리는 일이었지만, 제 마음이 복잡하다고 해서 일에 지장을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예 가이드를 그만둔다면 모를까, 중천에 몸을 담고 있는 이상 무책임한 인간이라는 인상은 주고 싶지 않다. 그건 자존심의 문제였다.
“형은 좀 더 쉬는 게 낫지 않겠어? 현장에서 부상당한 가이드는 완쾌할 때까지 현장에 안 나가는 게 원칙이에요.”
“원칙은 어디까지나 원칙이고. 그림 그리는 손도 아니라 무리하지만 않으면 상관없어. 전치 4주가 나왔는데 완쾌될 때까지 어떻게 기다려? 연해수도 당분간 자유롭게 못 움직이는데, 너 혼자서 한 달을 버틸 수 있겠어?”
“뭐…, 그건 어렵겠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그냥 쫓아가기만 하는 거니까 시간 맞춰서 픽업하러 와. 설마 너는 어떤 양심도 없는 놈처럼 버스를 타자고 하진 않겠지.”
“자기 현장에 부르면서 버스를 타고 가자는 사람이 있어요?”
해수가 대단히 신기한 얘기를 들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자, 기가 막힌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던 지원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그래, 대거리를 말자. 그게 내 정신 건강에 좋아. 이 자식이 기함할 소리 하는 게 어디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리고 속초는 내가 일산 현장 끝나고 바로 갈게.”
“괜찮겠어요? 왔다 갔다 운전하는 것만 해도 힘들 것 같은데.”
“거기는 어차피 내가 가야 돼. 너희는 가도 소용없어. 바다 쪽으로 훌쩍 달아나면 바로 사정거리를 벗어날 테고, 파도가 시끄러워서 노랫소리도 잘 안 들릴 테니까. 그렇다고 이런 자질구레한 현장을 대표님한테 가시라고 할 수는 없잖아. 속초에 별장이 있으니까 컨디션 봐 가면서 쉬엄쉬엄해도 되고.”
세상 안쓰러운 눈으로 지원을 바라보던 해수가 별장 얘기가 나오는 순간 두 손을 맞잡으며 크게 감격했다.
“별장! 우와, 멋지다. 나 별장 가지고 있는 사람 실제로 처음 봤어요! 형네 별장 바닷가에 있어요? 별장에서 바다도 보여요? 나도 따라가고 싶어요, 형.”
“태극마크 반납하고 올 거면 따라오든가.”
“그러지 말고 우리 세계선수권 끝나면 9월에 다 같이 가는 건 어때요? 가을에 동해 바다 좋잖아! 낭만적이고. 나 16일에 귀국하니까 시차 적응 이틀만 하면 바로 갈 수 있어요. 그럼 우리 9월 18일에 속초 가는 거예요!”
“누구 맘대로!”
적당히 무시하려던 지원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탕 소리가 나게 책상을 내리쳤다. 해수의 입에서 이렇게 구체적인 일정이 나오기 시작하면 부지불식간에 기정사실화될 수 있으니 초장에 싹을 잘라야 했다.
“너는 내 집이 다 네 집처럼 마냥 편안한가 보다? 너 내가 진짜 작정하고 한번 어렵게 굴어 볼까? 그리고 내가 왜 쓸데없이 너랑 바다를 보러 가야 하는데?”
“칫. 어차피 형도 지금 같이 바다 보러 갈 사람 없잖아요.”
앗, 해수야. 너 지금 지원이 형 상처에 소금 뿌리는 거 같은데. 이러다가 진짜로 맞아도 난 책임 못 진다. 네가 아무리 운동선수라도 체급의 차이는 극복할 수 없어. 그리고 지원이 형 고등학교 다닐 때 복싱했었대. 너 이렇게 까불다가 진짜 죽어. 몹시 난감한 얼굴을 한 도겸이 두 사람의 설전을 지켜보며 끼어들 타이밍을 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소리도 없이 사랑채의 문이 열리더니 여느 때처럼 온화한 미소를 지은 희주가 들어왔다.
“회의 끝나셨으면 식사하세요. 대표님도 곧 본채로 건너오실 거예요.”
“대표님도 집에 계세요?”
“그래. 조금 전에 귀가하셨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해맑게 웃으며 좋아하는 해수가, 도겸은 부럽기도 하고 조금 얄밉기도 했다. 지원의 얼굴은 차마 확인할 엄두가 나질 않아 쳐다보지도 못했다. 나는 꼬리찜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데…. 차라리 집에 가서 라면이나 끓여 먹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제 의지와 무관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어쩌지 못한 도겸은 몹시 무거운 발걸음으로 사랑채를 나설 수밖에 없었다.
도겸의 우려대로 저녁 식사 자리는 몹시 어색하고 불편했다. 물론 서먹한 기운이 겉으로 드러나는 건 아니었다. 가온은 원래 표정이 많지 않은 사람이었고, 지원은 도겸이 아는 사람들 중에 가장 표정 관리에 능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눈치는 그저 먹는 것인 줄로만 알고 있는 해수는 물론이고, 가온의 수족과도 같은 희주조차도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어느 정도 사정을 알고 있는 도겸의 눈에는 순간순간 감추지 못한 곤란함 같은 것들이 자꾸만 보였다. 가급적 두 사람에게 눈길을 주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는데도 그랬다. 그럴 때마다 제가 괜히 긴장하며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느라 문제의 꼬리찜은 단맛인지 짠맛인지도 구분이 가질 않았다.
“많이 드세요, 차 관장님. 이번에 정말 고생이 많으셨다면서요.”
“아닙니다. 잘 먹겠습니다.”
“장기 출장에서 대표님이 이렇게 멀쩡하게 돌아오신 건 처음이에요. 항상 얼굴이 반쪽이 되어서 돌아오셨는데…. 이번에는 차 관장님이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쓰셨다고 들었어요. 대표님도 차 관장님 칭찬을 얼마나….”
“권 여사. 몸보신 시키겠다고 불렀으면, 사람 밥 좀 먹게 그냥 둬.”
일순 두 사람의 시선이 아주 잠깐 공중에서 부딪쳤다. 불과 3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사이에 얼마나 많은 말들이 오고 가는지, 보는 사람이 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뭐야, 이번에야말로 정식으로 고백했다가 깨끗하게 차인 줄 알았더니. 두 사람 사이에 뭐가 있긴 있는 모양인데? 지원이 형이야 당연히 하루 이틀 사이에 정리될 감정이 아니었지만, 의외로 대표님도 눈빛이 심상치 않고. 그나저나 대표님이 사람을 저렇게 보기도 하시는구나. 우리를 다 똑같이 돌멩이 정도로 생각하시는 줄 알았는데. 이거 어쩌면….
“어머나, 제가 너무 떠들었네요. 이제 방해하지 않을 테니 편하게 드세요. 밑반찬이랑 같이 조금 싸뒀으니까 댁에 가실 때 들고 가시고요.”
“…감사합니다.”
“혼자 사신다면서요. 반찬거리가 마땅치 않을 땐 언제라도….”
“권 여사.”
“네, 대표님. 입 다물고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공손하게 대꾸한 희주가 주방으로 들어가자 식탁 위에는 일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도겸에게는 이런 불편한 분위기를 타개할 만한 능력이 전혀 없었지만, 다행히 주변의 분위기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해수가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한 덕에 그나마 숨통이 조금 트였다. 개똥도 약에 쓸 때가 있다는 건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이었다.
“아, 저는 정말 권 여사님이 세상에서 음식을 제일 잘하시는 것 같아요. 이건 비밀인데, 우리 엄마가 해주는 밥보다 훨씬 맛있어요. 지원이 형, 어때요? 진짜 맛있죠? 입에서 살살 녹지 않아요?”
“…그래.”
지원의 심드렁한 반응에 해수의 얼굴이 대번에 뾰로통하게 변했다. 이러다 해수가 정말로 지원의 심기를 크게 건드릴까 봐 마음이 확 졸아든 도겸은 필사적으로 해수의 주의를 돌렸다. 정말이지 눈물겨운 노력의 결과였다.
“연해수, 너 솔직하게 말해 봐. 지원이 형 몸보신이 문제가 아니라, 네가 먹고 싶어서 권 여사님한테 조른 거지?”
“무, 무슨 소리야! 나는 꼬리찜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아!”
“입가에 묻은 양념이나 좀 닦고 얘기해라.”
“형 오늘 나한테 왜 이렇게 시비야? 먹을 땐 소도 안 건드리는 거랬어!”
“소가 아니라 개.”
“나도 알아! 노, 농담한 거잖아! 그것도 몰라?”
도겸과 해수의 실랑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가온이 피식 소리를 내어 웃자, 묵묵히 젓가락질만 하고 있던 지원이 반사적으로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가온의 웃는 얼굴을 빠르게 훔쳐보며 작게 미소를 지었는데, 얼마나 흐뭇한 표정이었는지 보는 사람이 다 부끄러워질 지경이었다.
저 형…, 이대로 그냥 포기해도 되는 건가? 얼음장 같던 사람이 여자를 보면서 저렇게 웃는데? 물론 상대가 너무 강적이긴 하지만…. 후식으로 나온 수정과를 마시며 도겸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이 찻잔을 내려놓으면 이제는 일어서야 한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눌러앉을 핑계를 만들고 싶었지만 머릿속이 하얘져서 아무것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구원의 손길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타났다.
“차 관장님, 어쩌죠? 오후에 연한 깻잎 순 따 놓은 걸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얼른 데쳐서 무치기만 하면 되는데, 한 20분만 더 기다리시겠어요?”
“괜찮습니다. 이미 챙겨 주신 것도 많고….”
“제가 뭐 하나라도 더 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대표님을 그렇게 알뜰살뜰하게 챙기셨다는데…. 아! 그러면 대표님하고 후원 산책 좀 하실래요? 요즘 후원에 수국이 아주 좋거든요. 그래서 대표님도 요 며칠 아침저녁으로 안 하던 산책을 다 하시고….”
“권 여사.”
또다시 두 사람의 시선이 짧게 얽혔다가 풀어졌다.
“왜요. 혼자 걸으려면 심심하시잖아요. 요즘 대표님께서 운동을 시작하셔서 제 마음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덕분에 혈압도 많이 올라갔고….”
“하아, 알았으니까 자네는 얼른 가서 그 깻잎 순이나 무쳐.”
그렇게 요행으로 20분을 벌었지만, 네 명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도겸이 어떻게든 해수의 목덜미를 잡아끌고 두 사람과 떨어뜨려 놓으려는 궁리를 하고 있을 때, 저녁 식사 시간 내내 반짝거리던 해수의 휴대폰이 때마침 요란하게 울렸다.
“아, 왜. 나 지금 못 나가. 중요한 자리에 왔어. 그리고 거기 가면 너희들이 나 술 먹이잖아. 나 지금 훈련 중이라 금주하고 있는데…. 뭐? 세은이도 있어? 알았어. 지금 바로 갈게. 여기서…, 넉넉잡고 30분 안에 가. 아, 지금 간다고!”
서둘러 통화를 종료한 해수가 도겸의 팔을 덥석 잡고는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신체 접촉을 질색하는 도겸이 인상을 확 찡그리며 뿌리치려고 했지만, 마음이 조급해진 해수는 막무가내였다.
“형! 빨리 나 신촌까지 좀 데려다줘, 응?”
“너 거기 가면 술 먹인다며. 운동선수가 큰 경기 앞두고…. 아…! 그래도 네 나이에 친구들과의 교제는 중요한 거지. 알았어, 데려다줄게. 가자.”
“고마워, 형. 대표님! 지원이 형! 저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이만 가볼게요! 다음에 금메달 따서 올게요. 형, 몸조리 잘해요!”
거의 날아갈 수도 있을 만큼 잔뜩 신이 난 해수는 한바탕 폭풍이 몰아친 것처럼 정신을 쏙 빼놓은 채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오직 적막감만이 남았다. 돌발 상황이 당황스럽기는 두 사람 다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그중 순발력이 좋은 쪽은 단연 지원이었다.
“권 여사님 말씀대로 수국이 정말 좋습니다.”
“아…, 그래.”
갖가지 야생화로 화려하게 꾸며 놓은 넓은 정원과 달리, 비스듬한 둔덕에 아담하게 조성된 후원은 소박한 돌길을 따라 오로지 수국 한 종류만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가지가 굵은 걸 보니 한두 해 자란 게 아닌 듯 보였다. 모든 것에 공평하게 무심한 집주인이 특별히 사랑하는 화초란 뜻이다.
“운동을 시작하셨다니 고무적인 소식이네요.”
“거창하게 운동이랄 건 없고…. 그냥 좀 걸었어. 확실히 잠은 잘 오는 것 같아.”
“다행이네요. 처음에는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익숙해지신 다음에 조금씩 강도를 높이시면 되죠.”
“응.”
서로 조심하고 있는 상태라 화제는 금세 바닥이 났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몇 시간 동안 함께 있어도 대화가 끊이질 않았었는데, 무난한 얘깃거리를 찾으려고 하다 보니 어떤 말도 다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여기가 내가 머무는 별채야.”
몹시 어색하고 불편했지만 희한하게도 빨리 끝나기를 바라지는 않았던 짧은 산책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단아한 별당 앞에 다다르며 결국 마무리가 되었다.
雲休齋(운휴재). 구름이 쉬는 곳이라고…. 이름에 걸맞게 아늑하고 푸근한 느낌의 별당을 찬찬히 둘러보던 지원이, 흘러가는 구름을 담아 놓은 작은 연못에 잠시 눈길을 주었다. 보기는 참 좋다만…. 구름 따위의 휴식 여부야 내 알 바 아니고, 집주인이나 좀 잘 쉬었으면 좋으련만.
“근사하네요.”
“그래?”
“달이 뜨면 풍취가 더 좋겠습니다.”
“응. 보름에는 정말로 볼만 하다는데, 애석하게도 보름달이 뜨는 밤 전후로는 집에 있던 적이 거의 없어서.”
“…그러셨겠네요.”
하긴, 귀신을 다루는 업에 종사하면서 보름에 한가로이 달구경이나 하기는 어렵지. 어쨌든 그럴싸하네. 조용하고, 대표님하고 분위기도 잘 어울리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가온의 거처를 세심하게 둘러보던 지원이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잠시 대청마루에 나란히 앉아 구름이 담긴 연못을 바라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불편하게 하지 않겠다고 이미 약속을 했으니 더는 질척거릴 수가 없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권 여사님이 말씀하신 20분이 다 된 것 같아서…. 편히 쉬십시오.”
“…그래.”
가온의 한숨 섞인 대답에 약간의 아쉬움이 묻어나는 것 같았지만, 눈을 마주치지는 않았다. 정말로 가온이 조금이라도 아쉬워하는 기색을 보인다면,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없이 그대로 대청마루에 드러누울 것 같아서였다.
갈 때는 열댓 걸음이나 될까 싶었던 수국 길은, 돌아오는 길에 보니 의외로 꽤 길었다. 돌길 가장자리를 따라 앙증맞은 청사초롱 모양의 등이 죽 늘어서 있는 것도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아까는 조명 따위가 어두움을 밝히고 있다는 것을 인식조차 못했었다. 그저 여느 때처럼 곱고 단정한 가온의 옆모습만이 기억에 또렷하게 남았다.
내가 확실히 눈이 멀긴 했구나. 작게 실소하던 지원이 제 등 뒤로 무언가가 조용히 다가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가만히 걸음을 멈췄다. 발자국 소리를 듣지 못했으니 사람은 아니겠지만, 특유의 음산한 느낌이 없는 걸 보니 귀신도 아니었다. 정체를 짐작할 수 없는 존재의 등장에 온몸을 근육을 긴장시킨 순간이었다.
“뭐야, 핏덩이잖아?”
핏덩이? 지금 나를 지칭하는 말이야? 약간 발끈한 기분이 들어 뒤를 홱 돌아보던 지원은, 하얀 털을 가진 커다란 늑대 한 마리를 발견하고는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늑대…. 사람의 말을 하는…. 일단 악한 기운은 없어 보이는데. 그래, 확실히 너는 나보다 오래 산 것 같긴 하다만. 그래도 사람이든 짐승이든 초면에는 예의를 지켜야지.
“어쭈. 놀라지도 않네?”
“담은 큰 편이라.”
“하긴. 감히 중천주를 탐내는 사내가 그 정도 배포는 있어야겠지.”
가온이 입에 오르자마자 대번에 눈매가 날카로워지는 지원을 보며 소랑이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패기 하나는 봐 줄 만하지만, 반백 년도 못 산 어린 것이 눈깔 한번 곱기도 하지.
희주가 귀한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준비했다던 꼬리찜은 소랑도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였다. 주방에 마련된 제 자리에서 특별히 제 입맛에 맞춰 조리된 간이 심심한 꼬리찜을 맛있게 먹고 있는데, 강렬한 육향을 뚫고 익숙하면서도 여전히 낯선 체향이 풍겨 왔다. 요즘 가온이 산책을 할 때마다 나던 냄새였다.
별채에 있을 때는 멀쩡하다가 갑자기 왜…. 의아한 얼굴로 천천히 앞뒤를 맞춰 보던 소랑이 불현듯 눈썹을 확 치켜떴다. 변수는 하나뿐이었다. 가만…. 이 사태의 원흉이 지금 식당에 있나?
- 권 여사, 손님이 누구야?
- 응, 상급 가이드들이 회의를 하러 왔어. 서도겸 감독이랑 해수는 본 적 있지? 차지원 관장이라고 요즘 대표님을 아주 살뜰하게 잘 모시는 기특한 젊은이가 하나 있는데, 이번 출장에서 많이 다쳤다길래 기력에 좋은 것 좀 먹이려고 오라고 했어. 딱하게도 조실부모하고 혼자 살거든.
- 남자야?
- 그럼. 아주 건실하고 훤칠한 청년이지. 보고 있으면 마음이 뿌듯해.
식사를 마치고 본채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소랑은 가온과 함께 산책에 나선 낯선 남자를 보고는 기가 막힌 얼굴로 혀를 찼다. 남녀가 눈이 맞았을 때 나는 냄새 비슷하다고 생각을 하긴 했지만, 설마 진짜로 그런 이유로 가온의 체취가 변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천하의 주가온도 여자는 여자였구나.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소랑은 내심 큰 충격을 받았다. 나란히 걷기 시작한 점잖은 얼굴의 두 남녀는 서로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극렬히 일어나는 신체 반응으로 상대에 대한 호감을 넘치게 표현하고 있었다. 호흡, 음성, 맥박, 체온…. 뭐 하나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특히 남자 쪽은 아예 대놓고 노골적이었다. 때때로 가온의 눈치를 살피며 그윽하게 내려다보는 시선이 얼마나 달짝지근한지, 지켜보는 이의 낯이 다 뜨거워질 지경이었다.
- 달이 뜨면 풍취가 더 좋겠습니다.
얼씨구! 달구경을 함께 하고 싶다는 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꾸준하게 사용되는 작업 멘트다. 물론 그런 은근한 유혹을 가온이 알아들을 리 만무했다. 보름달이 뜨는 밤에는 귀신을 때려잡느라 바쁘다는 가온의 태평한 대답을 듣고 있자니, 소랑은 답답해서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인간으로 사는 건 이럴 땐 굉장히 불편하구나. 저렇게 서로에 대한 호감을 사방팔방 뿌려대고 있는데, 십 리 밖에서 봐도 훤히 알겠는데, 말과 표정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끝내 모를 수밖에 없다니.
- 가온. 방금 그 남자가 마음에 들어?
불쑥 나타나서 엉뚱한 질문을 던지는 소랑에게,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가온은 오래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 내가 그러면 안 되지.
긍정이나 다를 바가 없는 대답이라는 것을 본인은 모르는 듯했다. 물론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가온은 인간으로 보냈던 시간의 수백 배에 달하는 세월을 중천주로서 살아왔고,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는 자는 그 자리를 지킬 수 없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는 일에도 경험과 연습이 필요하다. 하지만 가온에게는 그런 것을 쌓을 만한 기회 자체가 없었다.
그래도 이제는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살면서 단 한 번쯤은 남들 다 하는 연애놀음 비슷한 거라도 해볼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게다가 저렇게 멀끔한 녀석이 상대라면 보기에도 더 좋을 테고.
“주 대표가 이렇게 남자 인물을 밝히는 줄은 몰랐네.”
“칭찬은 고맙지만, 대표님께 굉장히 실례가 되는 표현인 것 같은데.”
그래도 기왕이면 싸가지는 좀 있는 놈으로 고르는 게 좋지 않았을까? 어린 것이 한마디를 안 지네? 당최 겸손이라는 것도 찾아볼 수가 없고. 저 잘난 줄 아는 놈은 여자한테 소홀하기 마련인데. 하긴, 저놈 눈빛을 보니까 지금은 간이라도 내줄 것 같긴 하지만….
“우리는 그 정도의 실례는 서로 충분히 용인할 수 있는 사이야.”
“우리….”
“왜. 고까워?”
소랑의 도발에 지원이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난데없이 나타난 상대에게 미처 방어 태세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선제공격을 당했지만, 지원은 누구에게도 호락호락 져주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내가 아무리 여유가 없어도 짐승하고 다투진 않아.”
“어이, 애송이. 인간은 뭐 다른 줄 알아? 너한테서도 지금 어떻게든 암컷을 꼬시려는 수컷의 냄새가 진동해.”
“냄새? 아, 원래 갯과 짐승은 후각이 예민하지.”
무례한 놈. 끝까지 짐승 타령이네? 소랑의 매끈하던 이마가 한순간에 일그러졌다. 중천주의 최측근으로 천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지극히 존중받으며 살아온 소랑이, 난생처음 강력한 천적을 만난 순간이었다.
11, 15, 26, 31, 39, 42. 휴대폰 화면에 나타난 숫자를 몇 번이고 들여다보던 소화는, 그것들과 단 한 개도 일치하지 않는 숫자가 적힌 종잇조각을 확 구기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휴대폰을 옆자리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한참 전부터 화면 상단에 낯익은 번호가 보낸 메시지가 확인을 요구하며 깜빡거렸지만, 뻔히 짐작되는 내용이라 열어보지 않았다. 아마도 밀린 입원비의 조속한 정산을 요청하는 원무과의 독촉일 것이다. 병원이 자선사업을 하는 곳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는 있지만, 하루만 늦어도 득달같이 날아오는 문자에 솔직히 야속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 아휴. 민서 엄마 힘들어서 어떡해? 혼자서 일도 하고 애 간호도 하고. 그런데 무슨 일을 하길래 그렇게 시간이 들쑥날쑥해? 대부분 밤에 나가는 것 같던데.
호의를 가장한 천박한 관심에도 진저리가 났다. 왜, 술집에 나가냐고 대놓고 물어보지 않고. 그냥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을 해버릴까 하는 뾰족한 마음이 들 때도 많지만, 같은 병실을 사용하는 보호자들과의 관계를 소홀히 할 수는 없다. 그나마 자신이 잠깐 자리를 비우는 동안 민서를 한 번이라도 들여다봐 주는 사람은 그들뿐이다.
- 그때그때 일이 들어오는 대로 하는데, 주로 야간에 하는 공사 현장에서 일해요. 시급이 세서요. 낮에 계속 애 옆을 비울 수도 없고요.
- 아이고, 저런. 그 가느다란 몸으로 그런 힘든 일을 어떻게 해? 쯧쯧, 애기 엄마가 너무 고생이네. 이리 와서 과일이라도 한 조각 먹어요, 응? 먹어야 힘이 나지.
그래도 아이의 상태가 조금씩이라도 좋아진다면 뭐든지 다 견딜 수 있다. 상대하기 겁이 나는 험한 악령들도 얼마든지 쫓아갈 수 있고, 치가 떨리게 싫은 사람들 앞에서 가식적인 미소를 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처럼 아이가 갑자기 호흡 곤란이 와서 중환자실로 실려 가기라도 하는 날이면, 정말 아이와 함께 모든 걸 다 끝내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치민다. 중환자실 앞에서 아이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로 마냥 기다리고 있는데, 오늘은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어쩔까, 민서야. 우리 그냥 같이 죽을까? 시설이 더 좋은 병원으로 갈 수 없는 형편이, 순간이지만 아이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던 현실이, 오늘따라 유독 아프고 서러웠다.
“도와줘. 누구라도 제발…. 제발 누가 우리 애 좀 살려줘요. 뭐든지 할 테니까….”
“뭐든지?”
생각나는 모든 초월적인 존재들을 향해 간절하게 소원을 빌던 소화가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 눈을 번쩍 떴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텅 빈 병원 로비에는 자신밖에 없었다. 밖에서 들어오는 문은 이미 잠긴 지 오래고, 병실에 상주하는 보호자들은 매점에 가더라도 이곳을 지나진 않는다.
왠지 섬뜩한 느낌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던 소화가 낯선 복색을 한 젊은 여자를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키가 크고 골격이 탄탄해 보이는 여자가 검은색 무복(武服)을 입고 한 손에는 등편(藤鞭 : 무관이 무장할 때 쓰던 채찍)을 든 채 제 앞에 무심한 얼굴로 서 있었다.
뭐지? 어디서 사극이라도 찍고 있나? 이 근처에 드라마 세트장이 있었나? 배우처럼 보이는 얼굴이긴 한데. 그런데….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지? 여자를 빤히 바라보던 소화가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끼고는 반사적으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영력이 아주 뛰어나지 못한 소화가 살아 있는 인간과 망자를 구분하는 방법 중 하나였는데, 예상했던 대로 여자에게는 그림자가 없었다.
역시. 사람이…, 아니었어. 하지만 감히 내가 상대할 수 있는 망자도 아니야. 상급 가이드가 온다고 해도 바로 중천으로 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강력한 기운이, 여자의 정체를 깨달은 순간 서서히 느껴지기 시작했다. 몸이 오싹해질 정도의 한기가 빠르게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누구…, 세요?”
“나? 좌포청장.”
좌포청장? 귀에 익지 않은 직함에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던 소화가 화들짝 놀라며 바닥에 엎드렸다. 좌포청장이라면 염마왕의 최측근 심복이자 염라국 전체 서열 2위인 막강한 권력자다. 주로 인계를 돌며 명계에서 도주한 죄인들을 잡아들이는 좌포청의 수장으로, 그녀가 휘두르는 채찍에 스치기라도 하면 끔찍한 고통에 정신을 잃지 않는 자가 없다고 했다. 온몸이 덜덜 떨리며 식은땀이 마구 흘렀다.
“귀, 귀하신 분이 어찌 이런 곳에….”
“도망친 죄인을 잡으러 왔다가 한 가련한 영혼의 눈물에 이끌려 왔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애잔한 목소리를 내던 좌포청장이 소화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차마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바들바들 떨고 있던 소화가 이어지는 좌포청장의 말에 눈이 커다래졌다.
“아직 제대로 세상을 살아보지도 못한 아이가 있구나.”
“…!”
“타고난 명이 짧은 건 아닌데….”
“정말인가요? 우리 민서가 살 수 있나요?”
“의술로 명을 늘릴 수도 있는 시대이니 적절한 조치를 받으면 그럴 수 있겠지.”
허름한 병원 내부를 휘둘러보던 좌포청장이 부러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실력이 있는 의사를 만나면 나아지지 않을까 하던 소화의 소망을 정확하게 자극하는 말이었다.
“어찌하겠느냐, 가련한 어미야. 네게 지금 필요한 것은 재물인 듯한데. 염마왕께서 은밀히 계획하신 일에 손을 보탠다면 평생 잡귀를 쫓아서는 결코 만질 수 없는 부를 주겠다.”
“제가…. 뭐, 뭘 하면 되나요?”
홀린 듯 제게 가까이 다가서는 소화를 보며 좌포청장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목소리 역시 한결 나긋해졌다.
“앞으로 일곱 번, 보름이 될 때마다 이 나뭇가지를 하나씩 꺾어서 영기가 넘치는 곳에 은밀히 꽂아두면 된다. 인간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해서.”
소매 안에서 긴 나뭇가지 하나를 꺼낸 좌포청장이 그것을 소화에게 내밀자, 일단 얼떨결에 받아든 소화가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간단한 일이긴 했지만 명계의 물건을 인계에 둔다는 것부터가 영 찜찜했고, 이런 일을 하는 연유를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어서 마음이 불안했다.
“대체 무얼 하시려고….”
“네가 염마왕께서 하시는 일의 의미를 알 필요는 없다. 너는 그저 작은 수고를 하고 커다란 보상을 받으면 그만이니. 네가 내키지 않는다면 다른 이를 알아보겠다.”
“할게요! 하겠습니다.”
좌포청장이 미련 없이 일어서자 다급해진 소화가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러자 크게 입꼬리를 올려 씩 웃던 좌포청장이 가벼운 손놀림으로 구겨진 종잇조각에 불을 붙였다. 화르륵 타오르던 불길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을음 하나 남지 않은 종잇조각이 소화의 앞에 툭 떨어졌다.
“이로써 계약은 성립되었다. 너는 내게 재물을 받은 것이 아니라 네 아이의 목숨을 받은 것이니, 약속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주었던 것을 즉시 거두어 갈 것이다.”
냉정하게 할 말을 마친 좌포청장이 그대로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가질 않았지만, 손에 남은 나뭇가지의 무게감이 방금 전에 일어났던 일이 현실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종잇조각을 펼친 소화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구김 하나까지도 아까와 다를 바가 없는 종이였지만 그곳에 적힌 숫자는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달라졌다.
11…, 15…, 26…, 31…, 39…, 그리고 42! 당장이라도 비명이 나올 것만 같아서 소화는 제 입을 틀어막았다. 이미 아이를 살려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살면서 처음 경험한 희열이었다.
“오새꽃에 연꽃 방석 연 잎사귀 배를 띄워 극락세계 사바세계 훨훨 떠나갈 제, 배가 고파 못 가거든 마지 공양 운감하고, 목이 말라 못가거든 약주 일배 운감하고….”
나무가 우거진 공원 벤치에 팔짱을 끼고 앉은 지원은 괴로운 얼굴로 귀를 틀어막은 망자들이 중천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짜증스럽게 지켜보았다. 오늘따라 유독 포악하게 날뛰는 악령들이 많아 도겸은 보통 절반도 다 부르지 않는 13분짜리 노래를 여섯 번이나 되풀이하는 중이었다. 아무것도 안 하겠노라 다짐을 하고 왔지만, 지원 역시 초상화를 열두 장이나 그려야 했다.
사람 속도 모르고 그저 휘영청 밝게 뜬 달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저 발악을 하던 것들이 이제부터 다 중천에 가서 개지랄을 떨겠구나. 구름이 쉬는 집의 주인께서는 오늘도 외박을 하실 테고.
“됐어요, 형?”
“응. 이 근처는 대충 정리가 된 것 같다. 더 느껴지는 건 없네.”
“나 물 좀 줘요.”
벤치에 털썩 주저앉은 도겸이 지원에게 건네받은 500ml 생수 한 병을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는 길게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고생했다.”
“형도요.”
“…그래.”
한참을 그대로 앉아 숨을 고르던 도겸이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리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간만에 너무 오래 노래를 불렀더니 누군가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온몸이 뻐근했다. 옅은 신음을 흘리며 이리저리 고개를 꺾던 도겸이 가만히 달을 보고 있는 지원을 보며 나직하게 혀를 찼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묻지 않아도 뻔했다.
“중천에 가볼래요?”
“아니. 질척거리지 않기로 했어.”
“그래서 포기하려고?”
“고민 중이야. 내 마음이 대표님한테 부담이 된다면 가급적 안 보는 게 맞지 않나 해서. 나하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미안한 표정 짓는 것도 보기 싫고.”
지원의 덤덤한 말투에 왠지 마음이 숙연해진 도겸이 고개를 푹 숙였다. 세상에 참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어. 이 형은 팔자가 어떻게 이럴까. 얼굴이 아깝다, 진짜.
“포기가 되겠어?”
“마음먹으면 포기는 할 수 있지. 좋아하는 걸 의지로 그만둘 수는 없겠지만.”
차분하게 대꾸하던 지원이 멀리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낯익은 실루엣을 보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왠지 자신을 보고 피하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상하게 그 뒷모습이 눈에 밟혔다.
“도겸아. 저분 임 선생님 아니야?”
“누구?”
“임소화 가이드 님. 왜 식물인간 된 딸 돌보신다는….”
“아. 그러고 보니까 느낌이 비슷하긴 하지만…. 그런데 그분이 이런 시간에 여길 왜 와?”
눈꼬리를 갸름하게 접은 채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지원이 그녀의 신발을 확인하고는 바로 관심을 접었다. 병원비에 허덕이는 것처럼 보이던 그녀는 저런 신발을 사 신을 여유가 없을 것이다.
“내가 잘못 봤나보다. 이제 집에 가자, 피곤하다.”
중천에서 꼬박 만 하루를 보낸 가온은, 정오를 훌쩍 넘기고 나서야 겨우 중천을 나설 수 있었다. 지구 반대편에는 아직도 보름달이 떠 있는 곳도 있지만, 그래도 한밤중이 지나면 광기는 그럭저럭 수그러든다. 이번에는 유독 시끄러운 보름이었지만 그래도 월례행사를 무사히 치르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초췌해진 얼굴로 가만히 어깨를 주무르는 가온을 보며 보안실장이 못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대표님. 부사장과 3시에 약속이 되어 있는데, 다음으로 미룰까요?”
아…. 오늘 그 일정 때문에 집에서 다이렉트로 오지 못한 거였지. 천천히 숨을 내쉬던 가온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최근 조사에 의하면 사업부 전체를 관장하는 총괄 사장이 착복한 매출액은 그 규모가 가히 상상 이상이었다.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아니야. 부사장도 바쁜 사람이니, 만나고 들어가지.”
“그래도 오늘은 중천에 너무 오래 계셨는데…. 그럼 시간을 좀 늦추고 잠깐이라도 주무시는 게….”
“잠은 저녁에 자야지. 나가서 커피 한잔 마시고 올 테니까 권 실장은 할 일 해.”
가온의 뜻밖의 말에 현호의 눈이 커다래졌다. 커피를…, 드신다고? 누가 가온에게 커피를 권하면 마치 사약이라도 받은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희주 때문에 가온이 커피를 마시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마시겠다는 커피를 굳이 못 먹게 할 수는 없다.
“그럼 방에서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대표님. 비서실에 커피 머신이 있습니다. 잠깐만 계시면 바로 따뜻하게 한잔 내려 드리겠습니다.”
현호가 다급하게 내놓은 대안을 듣고 가만히 눈살을 찌푸린 가온이 아무 말 없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평소 같았으면 여러 말을 하는 게 성가셔서라도 그냥 그러라고 했겠지만, 잠을 못 자서 신경이 곤두서서인지 오늘은 조금 짜증이 났다. 현호는 가온의 건강 문제에 있어서는 희주의 신념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터라 가온이 차가운 음식을 먹으면 당장이라도 큰일이 나는 줄 알지만, 지금 가온에게는 얼음이 가득 든 시원한 커피 한 모금이 간절했다.
“권 실장.”
“네, 대표님.”
“몸이 찌뿌둥해서 바람을 쐬면서 좀 걸어야겠어. 좀 걷고, 커피 한잔 마시고, 그러고 나서 2시 40분까지 사무실로 들어올 테니까 권 실장은 할 일 해.”
큰 충격을 받은 현호가 한참 동안 뻣뻣하게 굳은 채로 입술을 뻐끔거리다가 간신히 고개를 숙였다. 30년이 넘도록 가온을 보좌하면서 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지시를 두 번이나 듣게 된 건 처음이었다. 이러면 두 번 토를 달 수 없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나서도 현호는 한참 동안 그 앞을 떠나지 못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던 현호였지만, 사라진 웃음기는 좀처럼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제가 가온의 심기를 건드린 건 분명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가온은 제 몸이 힘들거나 기분이 나쁘다고 애먼 직원들에게 화풀이를 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까다로운 요구로 보좌하는 직원을 힘들게 하는 상사도 아니었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을까. 다른 때랑 똑같이 행동한 것 같은데. 초유의 사태에 자못 당황스러웠던 현호는 다시금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때까지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무작정 건물 밖으로 나온 가온은 일단 조금 걸었다. 서울 시내 한복판이라 공기가 딱히 상쾌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모처럼 바깥바람을 쐬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이제 시원한 커피만 마시면 딱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매우 드물게 일상을 벗어난 가온은 곧바로 난관에 부딪쳤다.
우선 주변에 COFFEE라는 글씨가 쓰인 간판이 너무 많았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카페만 해도 총 일곱 개였다. 어디로 들어가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잠시 고민하던 가온은 일단 가장 한적해 보이는 카페로 들어갔다. 나 돈은 있나? 순간 당황스러워서 식은땀이 났지만, 다행히 아침에 옷을 입을 때마다 희주가 안주머니에 비상용으로 신용카드를 챙겨 넣는 것이 가까스로 생각났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부탁합니다.”
“원두는 어떤 걸로 드릴까요?”
그럭저럭 침착하게 주문을 마쳤다고 안도하던 가온이 두 번째로 만난 난관이었다. 가온이 바로 대답을 못하자 친절하게 미소를 지은 직원이 계산대 옆에 있는 안내문을 가리켰다.
“손님, 저희 매장에서는 총 4가지 원두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원두별로 설명이 적혀 있으니까 천천히 읽어 보시고 결정하시면 됩니다.”
직원의 손짓에 따라 고개를 돌리니 가온의 눈에는 마치 외계어처럼 보이는 생소한 단어들이 길고 장황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달리 방법이 없으니 일단 차근차근 읽어 봤다.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농밀한 꽃향기와 풍부한 과일 향, 레드와인의 깊은 산미…. 이건 내 입에는 안 맞을 것 같고. 하와이안 코나. 달콤한 과일 향과 상큼한 신맛? 그런데 풍부한 과일 향하고 달콤한 과일 향은 어떻게 다른 거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울리더니 몸이 기억하고 있는 상쾌한 나무 향이 부드럽게 후각을 자극했다.
안내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몸이 굳었다. 그대로 눈만 깜빡이던 가온은 누군가 제 옆에 와서 서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향수의 주인은 역시나 지원이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반가운 건지 불편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차 관장….”
“원두 고르시는 중이었습니까?”
“응.”
가온의 난감한 눈빛을 가만히 응시하던 지원이 원두의 종류가 적혀 있는 안내판을 힐끔 쳐다보고는 거침없이 주문했다.
“콜롬비아 수프레모, 반 샷만 내려서 아이스로 주세요. 그리고 에티오피아 예가체프는 샷 추가해서 따뜻한 걸로 한 잔.”
“네, 주문 받았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잠시 후 두 사람은 커피를 한 잔씩 받아들고 밖으로 나왔다. 작게 한 모금 맛을 보던 가온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자 지원이 대번에 눈썹을 들어 올렸다.
“입에 안 맞으십니까?”
“맛있어.”
“그런데 왜 한숨을 쉬세요?”
“나는 내 입맛에 맞는 커피 한 잔 못 고르는 사람이라는 게 너무 한심해서.”
옆에서 나란히 걷던 지원이 그 말에 살짝 인상을 쓰더니 가온의 앞에 서서 그녀와 지그시 눈을 맞췄다. 그리고는 대단히 신뢰감이 드는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표님은 훨씬 더 큰일을 하시는 분이니까요. 이런 건 다른 사람한테 시키시면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이 다 다릅니다. 괜한 생각으로 마음을 괴롭히지 마세요. 대표님은 지금도 너무 많은 것들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가온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매번 듣던 말인데도 지원의 입을 통해 들으니 새삼 안도감이 들었다. 이대로 지원과 눈을 맞추고 있다가는 별의별 속말이 다 나올 것 같아서 가온은 황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어떻게 왔어?”
“서류 하나 볼 게 있어서 본사에 갔더니 보안실장이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대표님이 커피를 사러 나가셨다고 하더라고요.”
- 오늘따라 기분이 영 안 좋아 보이셨는데…. 기어이 혼자 나가시겠다고…. 카드는 가지고 나가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쫓아가면 마뜩잖게 생각하실 것 같아서 그냥 보내드리기는 했지만….
- 제가 가 보겠습니다.
언제나 웃는 얼굴이던 보안실장이 울상을 짓고 있는 것도 마음에 걸렸지만, 그보다는 당황하고 있을 가온에 대한 걱정이 더욱 컸다.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고민 중인 상황이라 가급적 가온과 부딪치지 않으려고 했지만, 계산대 앞에서 당황하고 있을 가온을 생각하니 발이 절로 움직였다.
“사람이 북적거리는 곳은 부담스러우셨을 것 같아서 브랜드 커피숍이 아니면서 커피 값이 비싼 카페 위주로 뒤졌습니다. 거기가 두 번째였죠.”
“…!”
미처 대비할 틈도 없이 무언가 묵직한 것으로 제 심장을 쿵 내리친 지원은, 가온을 본사 앞까지 데려다주고는 깔끔하게 인사를 건넨 후 그대로 가버렸다. 그 뒷모습에 달라붙은 제 시선은 마치 점성이라도 생긴 것처럼 쉽게 떨어지질 않았다.
- 앞으로 대표님 불편하실 일 없게 하겠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불편하게 하는 사람은 차 관장이 아니라 나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간신히 시선을 떨군 가온이 답답한 숨을 여러 번 내뱉었다. 하지만 꽉 막힌 속은 좀처럼 시원해지지 않았다.
“왜 또 잠을 안 자고?”
대청마루에 앉아서 조금 일그러진 달을 보고 있던 가온이 친숙한 이의 얼굴을 보고는 설핏 미소를 지었다.
“소랑….”
“무슨 고민 있어?”
“고민? 아니. 고민이라기보다는 그냥 생각.”
“무슨 생각?”
“나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구나. 천 년을 헛살았구나 그런 생각.”
유일하게 제게만 가끔 털어놓는 푸념에 신중하게 귀를 기울이던 소랑이 별것도 아닌 걸로 고민한다는 듯 피식 소리를 내어 웃었다.
“난 또. 그 눈매 사납던 놈 생각인 줄 알았네.”
“눈매 사납던 놈?”
가온의 눈이 동그래졌다. 도저히 짚이는 게 없다는 표정에 소랑은 진심으로 어이가 없었다.
“지난 주말에 저녁 먹으러 왔었잖아. 당신이랑 산책도 하고.”
“차 관장? 차 관장이 왜 눈매가 사나워? 선하고 다정한 사람이야. 인상 한 번 쓰는 걸 본 적이 없다고.”
순간 크게 비뚤어진 소랑의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선하고 다정한 인간이 다 얼어 죽어도 그런 놈한테 쓸 말은 아니거든? 그래. 생전 연애 한번 못 해본 숙맥들이 꼭 이렇게 사기꾼한테 걸리지. 만고의 진리라니까?
“아무튼 그 남자는 당신을 좋아하는 게 확실하고. 당신도 마음 있는 거 아니야? 서로 마음이 맞으면 한번 만나보지 그래?”
“내가 그런 걸 어떻게 해.”
“왜 못 해? 당신도 감정이 있는 사람인데?”
소랑의 반문에 잠시 말문이 막혔던 가온이 곧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나는 안 되지. 나는 누구에게나 공평해야 하는 사람인데.”
“당신은 중천주니까 죽은 사람한테나 공평하면 되지. 왜 그 기준을 인간한테도 적용하려고 해? 중천주는 남자 만나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어?”
“….”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 가온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소랑이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당신 마음은 어떤데? 그 남자를 어쩌고 싶어?”
입구부터 사람의 기를 죽이는 으리으리한 법궁에서 잔뜩 겁을 먹은 채 차례를 기다리던 망자들이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고는 조용히 수군대기 시작했다. 새로 들어온 이들 중에 아이가 한 명 있었다. 열 살 이상이면 중천에서 판정을 받긴 하지만, 미성년자가 명계에 올 정도로 큰 잘못을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런데 망자들 틈바구니에 끼여서 지금 막 법궁에 발을 들인 어린아이는 예닐곱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작은 아이였다.
아니, 어떻게 저런 꼬맹이가 여길 왔지? 열 살 미만의 어린애들은 바로 환생하는 거 아니었어? 이미 중천에서부터 다른 망자들의 시선을 줄기차게 받아왔던 무영은 제게 집중되는 시선에 주눅 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인계에서 들었던 마지막 당부를 차분하게 되새겼다.
- 염라국에 가면 까만 옷 입고 무섭게 생긴 아저씨들이 앉아 있을 거야. 그 앞에서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어. 몰라서 그랬다고, 다시는 안 한다고, 한 번만 용서해달라고. 알았어?
자신을 이렇게 무서운 곳으로 보낸 사람이라 솔직히 그가 조금 원망스럽기는 했지만, 영리한 무영은 그것이 진심으로 저를 위한 충고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드디어 제 차례가 왔다.
“태무영, 살인 1건….”
살인? 저렇게 쪼그만 애가? 아이의 죄목이 나열되자 고요하던 법궁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어떤 경우에도 근엄함을 잃지 않던 판관들이 당황할 정도의 큰 소란이었다.
“정숙하라! 죄인들이 지금 어디서 소란인가!”
수염까지 하얗게 센 꼬장꼬장한 노인이 목소리를 높이자 법궁이 다시 고요해졌다. 그리고 줄곧 기회를 엿보던 무영은 지금이야말로 제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는 최대한 공손하게 보이도록 일단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정말 죄송해요. 저는 엄마를 멀리 떠나야 한다는 게 너무 무서워서 그냥 거기에 있고 싶었을 뿐이에요. 아무도 저를 보지도 못하고 목소리도 못 들어서 몇 년 동안 너무 외로웠는데, 저를 알아보는 사람이 생겨서 장난을 친다는 게 그만…. 죽일 생각은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그만. 죄인은 입을 다물고….”
“그래도 진짜로 잘못했어요. 나중에 다시 태어나면 꼭 착하게 살게요.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네? 제발 부탁드려요.”
말을 하다 보니 눈물도 찔끔 나왔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게 생긴 판관이 무영의 얘기를 듣더니 못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긴장으로 숨을 멈췄던 무영의 마음에 아주 조금씩 안도감이 스며들었다. 여전히 모든 게 무섭기는 했지만, 왠지 제게 유리한 방향으로 상황이 흘러갈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태무영, 살인 1건, 상해 16건에 대한 처벌로….”
막 형을 선고하려던 판관이 잠깐 말을 멈추고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아주 특수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명계에서는 보통 범죄 1건에 10년 형을 선고한다. 물론 죄질에 따라 가게 되는 지옥의 종류는 천차만별이다. 가벼운 노역에 종사할 수도 있고, 날마다 사지가 찢겨 나가는 형벌을 받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살인을 비롯한 중범죄를 저지른 자는 당연히 고통의 정도가 극심한 벌을 받는다.
하지만 일곱 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이에게 170년이나 그 죗값을 치르라고 하는 게 옳은 일일까? 언제나 규정대로 업무를 처리해 온 판관이었지만, 인정상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17년 형에 처한다. 염라궁 청소 노역으로 형기 전체를 채울 것이며, 이는 망자가 판단력을 갖추지 못한 어린 나이에 사망한 것을 감안하여 유례에 없는 관대한 처분을 내린 것이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또한 이는 충분히 반성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특별 조치이므로, 형기를 마치고 환생한 후 또다시 죄를 저지르고 명계에 오게 되면 그땐 형기를 두 배로 집행할 것임을 명심하라.”
“네. 알겠습니다.”
지옥에 대한 무시무시한 소문들을 듣고 잔뜩 겁에 질렸던 무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찰나였다. 어디선가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바람이 불어오더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복색을 한 차가운 인상의 여자가 또각또각 걸어갔다. 판관들이 모두 고개를 숙이는 걸 보니 굉장히 높은 사람인 것 같았다.
어? 나한테 마음껏 놀아보라고 했던 아줌마다! 여자의 얼굴을 알아본 무영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였다. 눈치 하나로 일생일대의 위기를 넘긴 아이답게 대단히 신속하고도 현명한 처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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