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4. 두 번째 고백 (5/18)
  • 04. 두 번째 고백

    밤새 시끌벅적하던 술집들도 대부분 문을 닫은 이른 새벽. 비까지 추적추적 내려 한층 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의 후미진 골목에, 반쯤 벗겨진 재킷을 대충 걸친 중년 남자가 위태롭게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초저녁에만 해도 목에 잘 걸려 있던 넥타이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는데, 아마도 3차로 갔던 노래방에서 이마에 질끈 동여맸다가 그대로 풀어 놓고 나온 모양이었다.

    “아이…, 참. 5차는 못 가…, 이 대리. 나 외박하면 마누라한테 죽어. 자꾸…, 발목 잡지 마. 어허. 거, 사람 참…. 잡지 말라니까.”

    그 와중에도 4차까지 갔던 것만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던 남자는 술기운에 몸이 무거워졌는지 걸음도 제대로 떼지 못하며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남자의 상태가 영 좋지 않다는 것을 지나가던 행인 두엇이 멀찍이서 보기는 했지만, 그들은 주정뱅이와 시선이라도 마주칠까 봐 염려가 되었는지 서둘러 다른 골목으로 몸을 피했다.

    “아이고…, 화장실. 맥주를 너무 마셨나. 아니야, 그건 아니지. 보니까 이 대리 그 망할 자식이 폭탄주에 소주를 더 많이 타던데…. 나를 아예 죽이려고 작정을 했나.”

    한참 동안 골목을 뱅뱅 돌던 남자가 반쯤 지어진 음침한 빌딩 앞에 멈춰 섰다. 화장실을 찾아 채 반도 뜨지 못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남자는, 유일하게 입구가 열린 건물 안으로 발을 들였다. 골격만 올린 상태에서 자금 문제로 공사가 중지된 터라 내부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심지어 난간조차 설치되어 있지 않은 빌딩이었지만, 완전히 만취 상태였던 남자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아이 씨…. 이렇게 큰 건물에…, 왜 화장실이 하나도 없어.”

    화장실 표지판을 찾아 비척비척 계단을 오르던 남자는 8층에 다다라서야 겨우 걸음을 멈췄다. 여전히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진 못하고 있었지만, 너무 숨이 차서 도저히 더는 계단을 오를 수가 없었다.

    “허억…, 허억. 뭐 이딴 건물이 다 있어? 안이 왜 이렇게 어두워? 아아…, 정전인가? 그래서 에스컬레이터도 멈췄구나아….”

    허리춤에 손을 얹고 한참 동안 숨을 고르던 남자는, 갑자기 눈앞에 뭔가 어른거리는 것이 나타나자 거칠게 눈을 비볐다. 자세히 살펴보니 울상을 한 어린아이 한 명이 저를 빤히 바라보며 서 있었다. 꽤나 곱상한 얼굴이었지만 남자아이인 듯했고, 덩치는 일곱 살인 제 막내딸과 거의 비슷해 보였다. 아이가 등장한 시간과 장소, 그리고 반쯤 투명한 형체로 미루어 볼 때 누가 봐도 귀신이 분명했지만, 애석하게도 남자는 대부분의 판단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으응? 아니, 웬 꼬맹이가 이런 시간에 밖을 돌아다녀? 아가, 엄마 어딨어?”

    “엄마 없어. 잃어버렸어.”

    “그럼 아저씨랑 같이 가자. 아저씨가 엄마 찾아줄게.”

    “엄마가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말라고 했는데.”

    “아저씨는 나쁜 사람 아니야. 요 앞에 파출소까지만 데려다줄게. 어린애가 혼자 이런 곳에 있으면 위험해. 여기는….”

    미처 말을 맺지 못한 남자가 퍼뜩 정신이 든 얼굴로 천천히 주위를 살폈다. 그러고 보니까…, 여기는 어디지? 그제야 거의 폐가나 다름없는 어수선한 빌딩의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공사 중인 빌딩인가? 가만. 벽이…, 없네? 조명이 전혀 없는 상태였는데도 그럭저럭 시야가 확보되었던 건 밖에서 들어오는 불빛을 막아주는 게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남자는 지금 막 깨달았다. 중간 즈음에 난 바닥의 구멍이 1층까지 뚫려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그나저나 이런 위험한 건물에 왜 애가 혼자…. 다시금 앞을 쳐다보던 남자는 비로소 아이의 형체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괴성을 질렀다. 반쯤 투명한 아이는 놀랍게도 공중에 떠 있는 상태였다.

    “아아아아악! 귀, 귀, 귀신! 가까이 오지 마! 끄아악!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남자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이를 피해 무작정 반대 방향으로 달아났다. 순간 아이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마치 토끼몰이를 당하듯 아이에게 쫓기던 남자가 이 건물에 벽이 없다는 것을 상기한 것은, 안타깝게도 두 발이 모두 공중에 뜬 다음이었다.

    “…!”

    너무 놀란 나머지 남자는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보통의 사람들은 생의 마지막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거나 혹은 과거지사가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는데, 남자는 우습게도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체험할 일이 없었던 과학적인 진리 하나를 깨달았다.

    중력이 이렇게 무서운 힘이었구나. 땅이 저를 끌어당기는 엄청난 힘에 털끝만큼도 저항하지 못한 남자의 마지막 사고였다.

    “쳇, 시시해. 더 오래 도망 다녀야 재밌는데.”

    공중에 둥실둥실 뜬 채로 남자의 최후를 지켜보던 아이가 입술을 비죽거리며 팩 돌아섰다. 그리고는 곧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수완빌딩에서 추락 사고? 또? 이번 달에만 벌써 네 번째 아니야?”

    “그러니까요. 이번에는 만취한 47세 남자예요. 즉사했고요. 회식 마치고 귀가하는 중이었다는데, 술김에 잘못 들어갔다가 변을 당한 것 같아요. 가족이나 직장 동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자살의 징후도 전혀 없었다고 하고, 아직까지는 발견된 유서도 없습니다.”

    “아니, 대체 술을 얼마나 먹었길래…. 그보다 건물주는 뭐 하는 거야? 아무리 돈이 없어도 그렇지. 도심 한복판에 있는 건물을 그렇게 놔두면 어떡해? 하다못해 안전망이라도 설치를 해둬야지. 기어이 사람을 죽게 만드네.”

    “그러게 말입니다. 입구에 출입 금지 안내판 하나만 달랑 세워뒀는데, 그게 또 하필이면 바람에 넘어간 모양이더라고요.”

    “아이고, 사람 목숨이 참…. 지금 숨 쉬고 있다고 다 살아 있는 게 아니라니까. 아무튼 현장에 가보자. 혹시 뭔가 남긴 것이 있을 지도 모르니까.”

    “네, 알겠습니다.”

    씩씩하게 대답하며 경례를 붙인 윤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거뭇하게 올라온 턱수염을 쓰다듬던 진 팀장이 진지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성 형사. 정황상 사고사 같지만,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하는 거 알지? 뭐 하나라도 놓치면 초동 수사가 미흡하니 어쩌니, 적어도 반년은 시달린다.”

    “그럼요. 사고, 자살, 타살, 다 고려하겠습니다.”

    “아아…. 그래도 정말 타살은 아니었으면 좋겠네.”

    진 팀장의 말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윤후는, 남자가 추락한 지점에 도착하자마자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팀장님, 불행히도 이건 타살이네요. 가해자가 촉법소년에 망자라 검찰에 기소할 수는 없겠지만. 죄책감 같은 건 손톱만큼도 없는 것 같고.

    “팀장님, 혹시 모르니까 위층에도 한번 올라가 보겠습니다.”

    “알겠어. 뭐든 훼손시키지 않도록 주의하고. 조금만 이상한 게 있으면 바로 불러.”

    “네.”

    아이의 뒤를 따라 천천히 계단을 오르던 윤후는, 진 팀장의 가시거리를 벗어나자마자 안주머니에서 연필 모양의 작은 목검을 조용히 꺼내 들었다. 일반 가이드의 대다수가 상비하는 주목으로 만든 목검이었다. 비록 보기에는 한없이 가늘고 약해 보이지만, 망자를 보기만 할 뿐 제압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가이드에게는 흑화한 영혼의 공격으로부터 제 몸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망자분, 저는 중천 소속 가이드 성윤후입니다. 귀하는 현재 이승에 머물 수 없는 망자의 신분으로, 즉시 중천으로 이동하여 생전의 공과에 대한 판정을 받아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공과는 계속 기록되고 있으며, 가이드의 지시에 따르지 않거나 도주할 경우 향후 행선지 결정에 큰 불이익을 받을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또한 지금 보이는 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향후 강제적인 소환 절차를 진행하는 상급 가이드가 더 이상의 사전 통보 없이….”

    “형,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귀하에게 물리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음을 더불어 알려드립니다.”

    “나는 일곱 살이라 그런 어려운 말 모르는데.”

    더없이 순진무구한 얼굴로 커다란 눈을 깜빡이는 아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끝까지 차분하게 원칙을 고지한 윤후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네가 무슨 일곱 살이야? 너 죽은 지 5년도 넘었잖아.”

    “너무해. 그래도 난 일곱 살인데…. 초등학교도 못 갔는데….”

    대번에 낯빛이 흐려진 아이가 입술까지 떨며 서글프게 울먹였지만, 윤후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가이드 업무를 막 시작했을 무렵에는 망자들의 이런 연기에 넘어간 적도 있었지만, 아무리 어려 보여도 사람을 해친 악령의 말을 믿어서는 안 된다. 윤후가 제 눈물에 전혀 흔들리지 않자, 곧 가증스러운 표정을 걷어치운 아이가 입꼬리를 비틀며 얄밉게 웃었다.

    “어쩌나, 난 열 살도 되기 전에 죽어서 중천에 가더라도 판정 없이 바로 환생하게 될 텐데. 형 말 대로 불이익을 못 받아서 유감이야.”

    “꼬맹아, 어디서 잘못된 지식을 주워들었네? 아무래도 너 속은 것 같다. 너처럼 어린애도 이렇게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데, 너한테는 누구나 진실만 얘기한다는 보장은 없지 않겠어?”

    가끔 제 죽음을 억울해하는 어린아이의 영혼에 접근해서 타락의 길을 걷도록 꼬드기는 악랄한 귀신들이 있다. 열 살이 되기 전에 사망한 영혼은 절대로 벌을 받지 않는다고, 그러니 억울한 마음이 풀릴 때까지 마음껏 장난을 쳐도 좋다고. 그런 수법에 넘어가서 사람을 해치는 일을 일삼다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될 데드라인을 놓치면, 당연히 그 누구도 책임져주지 않는다.

    “10세 미만의 아동은 즉각 환생지문으로 인도되는 게 맞지만, 그건 인계에서 만 10년을 보내기 전에 중천으로 이동하는 경우에만 적용되는 거야. 너는 인계에서 10년 넘게 살았고, 심지어 사람까지 죽였어. 정당방위가 아닌 이상, 살인자는 무조건 명계행이라고.”

    “그래 봤자 난 열두 살인데?”

    아이의 항변에 윤후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었다. 사실 열두 살도 제대로 사리 분별하기에는 어린 나이이고, 부모와 교사의 보살핌을 받으며 정상적으로 열두 살까지 성장하는 것과 일곱 살인 채로 5년을 사는 것은 또 다르다. 하지만 윤후는 숨을 한 번 크게 내쉬고는 냉정한 목소리를 냈다. 인계에 미련이 남은 망자는 말 그대로 눈치가 귀신같아서 조금만 틈을 보이면 어떻게든 들러붙곤 하기 때문에 절대로 방심해서는 안 된다.

    “넌 이미 죽었잖아. 소년법은 인간한테나 적용되는 거야.”

    “거짓말! 나를 보내려고 거짓말하는 거야! 그 아줌마가 분명히 나는 절대로 지옥에 가지 않을 거라고 했어!”

    주먹을 불끈 쥔 채 악을 쓰던 아이가 윤후를 한참이나 노려보더니 홱 몸을 돌려 바람처럼 사라졌다. 어린 것이 안됐지만…. 그러니 더더욱 너는 여기에 있으면 안 돼. 들고 있던 목검을 두어 번 흔들어 중천으로 향하는 문을 닫은 윤후가 바로 휴대폰을 꺼냈다. 상대가 살아 있는 범죄자라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끝까지 쫓겠지만, 이런 종류의 일에는 전문가가 따로 있다.

    “안 대리님, 저 성윤후입니다. XX동 수완빌딩에서 흑화한 망자를 발견했는데, 방금 전 지시에 응하지 않고 도주하였습니다. 외견상 7세 남아로 보이며, 사망 이후 인계에서 5년 이상 거주하였습니다. 수차례 살인까지 저지른 악령으로 조속한 조치가 필요합니다.”

    막 자정이 지난 시각. 시커먼 옷을 입은 지원과 도겸이 폴리스라인까지 덕지덕지 붙어 더욱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수완빌딩 안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조용히 숨어들었다.

    “지금 이 건물 안에 있어요?”

    “있어. 심상치 않은 냄새를 맡았는지 제 딴에는 꽁꽁 숨긴 했지만.”

    이틀 밤을 연이어 현장에 나온 지원은 이미 짜증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일반 가이드가 포기한 에스코트 건이라 즉시 상급들에게 연락이 왔는데, 해수는 이미 합숙에 들어갔고 도겸에게는 어젯밤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일정이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형은 어제 여기에 몇 시간이나 있었는데?”

    “세 시간 반.”

    가이드의 코앞에서도 아주 맹랑하게 굴더라는 어린 망자는, 지원이 나타남과 동시에 자취를 감추고는 밤이 깊도록 코빼기 한 번을 보이지 않았다. 지원이 망자를 에스코트하기 위해서는 일단 얼굴을 봐야 하는데, 눈치가 빠삭한 어린 것이 갖은 회유와 협박에도 끝까지 넘어오지 않는 바람에 뾰족한 수가 없었다.

    내 말을 듣고 있는 건 분명했는데 말이야.

    “그런데 왜 여기를 떠나지 않을까? 이렇게 자꾸 사람들이 저를 잡으러 오는데.”

    “이 동네에 살았었던 모양이지. 애들은 원래 동네를 벗어나면 큰일 나는 줄 아니까.”

    “어쨌든 불쌍하네요.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했는데. 조금만 더 빨리 발견되었으면 만 열 살이 되기 전에 중천으로 갈 수도 있었을 테고.”

    “그러니까 애초에 사람을 죽이지 말았어야지. 일곱 살이라고 쳐도 사람을 재미로 죽이면 안 된다는 건 알아야 되는 나이야. 본인이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뼈저리게 느껴야 하고, 반성은 안 하더라도 후회는 해야 돼.”

    싸늘하게 일갈한 지원이 아이의 기척을 감지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키며 작게 속삭였다.

    “이 바로 위층에 있다.”

    “알았어요. 시작합니다.”

    큼큼 소리를 내어 헛기침을 한 도겸이 나직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꽤나 감미롭게 들리지만, 망자의 귀에는 쇳조각으로 돌판을 긁는 것처럼 들리는 노랫소리라고 했다.

    “…노잣돈이 모자라서 극락세계 못 가시나, 가다가다 배가 고파 허기져서 못 가시나, 멀고 먼 길 가노라니 목이 말라 못 가시나, 북망산천 찾자 하니 길을 잃어 못 가시나….”

    그리고 지원에게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노래다. 도겸의 아름다운 목소리와 세련된 곡조와 청승맞은 가사의 조합은 언제 들어도 이상하다.

    - 꼭…, 그런 가사를 붙여야 되냐?

    - 망자의 귀에 들리기만 하면 어떤 노래든 다 되지만, 진짜로 아무 노래나 부르기 시작하면 나는 일상에서는 노래 못 해요. 이런 가사는 평소에는 부를 일이 없으니까.

    멀리 지방에서 무당들이 씻김굿을 할 때 부르는 노래 중 하나에서 가사를 따왔다고 했다. 삐딱하게 팔짱을 낀 채 노래를 들으며, 지원은 망자를 위로하는 내용의 가사가 솔직히 조금 웃긴다고 생각했다. 이건 망자의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사기 아닌가?

    “어두컴컴 야밤중은 등불 켜서 밝혀주고, 논둑 같은 좁은 길은 넓은 길로 닦아주고, 덩굴덩굴 가시덩굴 불을 놓아 헤쳐주고, 가시는 길 깊은 곳은 자갈 깔아 메워주고….”

    이런 노래를 듣고 중천으로 간다고 해서 다 극락왕생하는 건 아닌데 말이지. 특히 저 눈깔 사납게 뜬 어린애는 절대로 좋은 곳으로 갈 수 없을 테고.

    “시끄러워, 시끄러워! 시끄럽다고!”

    “어린 게 성깔머리하고는. 그러니까 좋게 말할 때 말을 들었으면 되잖아. 처음에 경찰 아저씨가 왔을 때 순순히 말을 들었어야지. 너 하나 때문에 지금 몇 명이 고생하고 있는지 알아?”

    못내 분한 얼굴로 씩씩거리는 아이를 쏘아보던 지원이 안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려다 신경질이 잔뜩 묻어나는 손길로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비록 진짜 불로 아이를 태우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더라도 제 키의 절반이나 겨우 넘는 아이가 불길과 공포에 휩싸여 중천에 가도록 하고 싶진 않았다.

    빌어먹을. 하여간 이놈의 쓸데없는 측은지심이 항상 문제야.

    “너, 지금이 정말 곱게 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야. 어른들한테는 이렇게까지 기다려 준 적 한 번도 없어. 선택해. 네 발로 갈 거야?”

    눈치가 빠른 아이는 지원의 말이 단순한 협박이 아니라는 걸 바로 알아들은 듯했다. 한껏 치켜떴던 눈이 대번에 축 처지는 걸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거기 가면…, 나 지옥 간다면서요.”

    “그러게 왜 사람을 죽였어. 나쁜 짓이라는 거 몰랐어?”

    “해도 된다고 했어요. 우아아아앙.”

    “누가.”

    “흑, 이상한 옷 입은 아줌마가! 사극에 나오는 포졸 옷 같은 거!”

    급기야 서럽게 울음을 터뜨린 아이를 망연히 바라보던 지원과 도겸은 난감한 시선을 교환하며 동시에 한숨을 내뱉었다. 두 사람 다 어린애를 달래는 일에는 소질이 없었고, 인정상 우는 아이를 강제로 날려 보낼 수는 없으니, 아이가 진정할 때까지 무려 1시간이 다 되도록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다 울었어?”

    “…네.”

    “그럼 이제 가자. 어쨌든 잘못한 거 있으니까 가서 혼 좀 나고, 다음에 다시 태어나면 그땐 착하게 오래오래 살아.”

    여전히 흐느끼고 있는 아이가 지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쉰 도겸이 재빨리 중천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아이를 조심스럽게 안내하며 마지막 조언을 건넸다.

    “염라국에 가면 까만 옷 입고 무섭게 생긴 아저씨들이 앉아 있을 거야. 그 앞에서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어. 몰라서 그랬다고, 다시는 안 한다고, 한 번만 용서해달라고. 알았어?”

    “네.”

    “그럼…, 잘 가라.”

    간신히 임무를 마친 후 수완빌딩을 나선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골목 끄트머리에 있는 포장마차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안주가 나오기도 전에 각각 소주 한 병을 깨끗하게 비웠다. 속이 시끄러워서 그런지 술은 술술 넘어갔지만, 입맛이 쓴 만큼 술맛도 썼다.

    “드라마 작업은 잘 돼 가?”

    “그럭저럭. 갤러리에는 별일 없어요?”

    “별일 있을 게 뭐 있어. 항상 똑같지.”

    서로 이미 잘 알고 있는 근황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의 빈 술잔을 채워주기만 했다. 오래 곱씹고 싶은 현장은 아니었지만, 잔상이 쉽게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평소보다 훨씬 급하게 술을 마시는데도, 오늘따라 취기조차 바로바로 올라오질 않는다.

    “그래도…, 조금은 봐주면 좋을 텐데.”

    “그러게.”

    그다지 의미 없는 희망 사항을 뱉어내는 것은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했지만, 두 사람은 아이의 행보에 조금이라도 관용이 베풀어지기를 진심으로 소망했다. 아이를 제대로 키우지 못한 어른의 한 사람으로서 적어도 그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았다.

    [현지 시각으로 오늘 오전 11시경,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인 논숨에 강도 7.4의 강진이 발생했습니다. 지진의 진앙은 대규모의 축제가 열리고 있던 해변 마을 라레한이었는데, 하필 축제 프로그램 중 하나였던 수영대회가 진행되던 중이라 대회에 참가했던 800여 명은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바닷물에 휩쓸렸습니다.

    마을의 상황은 더욱 심각합니다. 평소 7천 명 남짓이 살고 있던 작은 시골 마을 라레한에 어제부터 축제로 인해 4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는데, 지진이 발생한 직후 산사태가 일어나 그중 절반을 덮쳤고 토사에 묻힌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가까스로 산사태를 벗어난 이들도 모두 무사한 것은 아닙니다. 무너진 건물과 갈라진 바닥 때문에 현재까지도 부상자가 속출하고 있고, 상당수는 중상자로 분류되어….]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사고 소식이 속보로 전해지자, 중천에 비상이 걸렸다. 인원도 인원이지만, 사고사한 영혼들은 자연사한 경우보다 대체로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중천에 도착하기 때문에 소란을 일으킬 확률이 높다. 따라서 교대 중인 직원 중 일부를 추가로 불러올리는 등 즉시 만반의 준비를 갖췄지만, 한나절이 지나도록 논숨 출신의 망자는 50명도 오지 않았다. 전체 사망자의 0.2%도 안 되는 인원이었다.

    “중천에 도착한 망자 중에 가이드가 있는지 알아봐.”

    가온의 예상은 적중했다. 논숨의 가이드 네 명이 모두 현장에서 즉사하는 바람에 현재 논숨에는 인도자가 한 명도 없는 상황이었다. 전체 사망자 중 가이드 네 명을 포함한 영안이 밝은 이들 몇 명만 중천으로 향하는 문을 자력으로 찾아서 이동할 수 있었고, 나머지는 현재 오갈 데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는 중이라는 거였다. 중천의 개입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권 실장, 전세기 준비하게. 최대한 빨리. 일정을 며칠 비울 수 있는 가이드가 얼마나 있는지도 알아보고.”

    4시간 후, 막 급유를 마친 전세기에 중천주와 비서 한 명, 그리고 부랴부랴 도착한 가이드 열네 명이 탑승했다. 이런 업무에 파견되는 건 처음 있는 일이라 다들 조금씩은 긴장한 상태였다.

    “그런데 말이 통할까요?”

    “일단은 영어권이니까. 그리고 제니스 원칙은 원래 언어별로 숙지하는 게 기본이잖아. 당장은 원칙 고지만 할 줄 알면 되지, 뭐.”

    “아, 처음에 입사할 때 외우고 쓸 일이 없어서 다 잊어버렸는데.”

    “그럼 지금이라도 얼른 외워. 시간은 많아. 라레한까지 들어가려면 앞으로 최소한 열다섯 시간은 가야 해. 뉴질랜드에 도착해서는 다시 경비행기로 갈아타야 하고, 논숨 공항에서 라레한까지는 또 차로 세 시간이래.”

    동료 가이드들의 대화를 귓등으로 들으며 가온의 동태만 살피던 지원은, 이륙한 지 30분이 넘어가자 더 이상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며칠 전의 아련함은 온데간데없이 그저 냉철하기 그지없는 중천주의 눈빛만 장착한 가온은, 뭘 먹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논숨의 지도를 열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어찌나 집중하고 있는지 당장 지도에 구멍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대표님.”

    “응? 아, 차 관장. 차 관장도 가는 거야?”

    그걸 이제 아셨구나. 탑승하기 직전에 다 같이 인사했었는데. 자신의 미약한 존재감에 새삼 자괴감이 들었지만, 지원은 애써 평정을 가장했다. 사실 이런 일로 일일이 서운함을 느끼면 가온의 옆에 붙어 있을 수도 없다.

    “네. 상급이 최소한 한 명은 가야 할 것 같았는데, 해수는 합숙 중이고 서 감독은 드라마 일정이 촉박하다고 해서요.”

    “그래. 차 관장이 같이 가면 든든하지.”

    “지도를 보시는 겁니까? 섬이 아주 작던데, 망자들이 아직 논숨 안에 다 있을까요?”

    “응. 사망 직후의 망자는 일단 대부분 살던 곳에 머물러 있으니까. 공간의 제약을 완전히 벗어났다는 걸 자각하고 나면 바다를 건너갈 수도 있지만, 아직은 두려움이 남아 있을 때라…. 물론 개중 용감한 몇몇은 이미 고향을 떠났을 수도 있고. 그건 어쩔 수 없지.”

    가온은 지원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지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 모든 상황이 마음에 안 들었던 지원은 혀를 차지 않기 위해 가만히 입술을 감쳐물었다. 분명히 저녁도 못 먹고 비행기에 올랐을 가온이 계속 지도만 들여다보고 있는 것도 못마땅했고, 별도의 침실은커녕 공간을 분리할 수 있는 칸막이 하나가 없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이러면 제대로 잠을 못 잘 게 분명하고, 행여나 잠깐 눈을 붙이더라도 오가는 사람들이 가온의 자는 얼굴을 다 쳐다보게 된다. 이럴 바에는 그냥 일반 여객기를 타는 게 낫지 않나. 뭐, 그러면 이 인원을 데리고 한꺼번에 이동하기는 좀 어려웠겠지만.

    그나저나 벌써 9시가 넘었는데 비서는 식사도 안 챙기고 뭐 하고 있어? 아무리 입사 2년 차라 뭘 몰라도 그렇지, 이런 건 기본 아닌가? 아니, 애초에 비서실장이나 보안실장이 따라왔으면 되잖아. 가이드들이야 생업이 따로 있다지만, 그 사람들은 대표님을 보좌하는 게 본연의 업무 아니야?

    지원의 말마따나 보통 가온의 해외 출장에는 적어도 비서실장이나 보안실장 둘 중 한 명은 반드시 수행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두 사람 모두 동행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출장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펑크가 난 가온의 일정을 모두 커버할 수 있는 사람은 비서실장뿐이고, 가온의 부재가 길어질 경우 중천을 통제할 수 있는 건 보안실장밖에 없다.

    또한 수행 경험이 많은 직원들 중 대다수는 가정이 있기 때문에, 당장 4시간 후에 출발해서 언제 돌아올지 알 수도 없는 출장을 못내 부담스러워했다. 결국 수행 경험은 없지만 미혼인 형우가 낙점되었고, 본인 역시 썩 내키는 마음으로 오른 출장길은 아니었다.

    정황상 어떻게 돌아간 내막인지 대강 짐작은 갔다. 그래도 가온의 옆자리에 떡하니 버티고 앉아서 열심히 제 할 일만 하고 있는 비서를 보고 있으려니 지원은 속에서 열불이 났다. 이어폰을 끼고 뭔가 열심히 메모를 하는 걸 보니, 아마도 보안실장이 전달했을 주의사항을 정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차피 초짜를 보낼 거면 차라리 그냥 나한테 맡길 것이지. 천장을 응시하며 짜증을 꾹꾹 눌러 삼킨 지원이 형우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박 대리님.”

    “네?”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대표님 저녁 드셔야 하지 않을까요?”

    “아, 네!”

    그렇게 비서의 옆구리를 찔러서 간신히 저녁을 먹이고 나서야 지원은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하지만 지원이 요령껏 비서를 몰아내고 제 옆에 앉았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가온은 저녁을 먹자마자 다시 지도를 펼쳤다. 그러자 그 꼴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던 지원이 가온의 손에서 지도를 빼내고는 조명까지 꺼버렸다.

    “차 관장…?”

    “이제 좀 쉬세요, 대표님. 이 비행기만 해도 앞으로 열 시간을 더 타셔야 하고, 도착한 다음부터는 제때 휴식을 취할 수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지금 체력을 비축하셔야죠. 지도는 제가 완벽하게 익힐 테니, 조금이라도 주무세요.”

    “지금 막 밥 먹었잖아. 잠을 어떻게 자.”

    “지금 막 식사하셨으니 구부리고 앉아서 깨알 같은 글씨를 들여다보는 건 더 좋지 않습니다. 바로 잠드는 게 거북하시면 복도를 좀 걸으세요. 장시간 앉아만 계시면 혈액 순환에 문제가 생깁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지원의 폭풍 잔소리를 듣고 있던 가온이 피식 웃음을 흘리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말로는 못 이기겠네.”

    “죄송합니다.”

    “나 위해서 하는 말이니 죄송할 건 없고.”

    지원이 시키는 대로 한참 동안 복도를 왔다 갔다 하던 가온은, 그럭저럭 소화가 되었는지 잠을 좀 자보겠다고 했다. 옆에서 형우가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는 걸 못 본 척한 지원은, 기어이 제 손으로 완전히 뒤로 젖힌 좌석에 가온을 눕히고는 담요까지 덮어주었다.

    “오늘도 안대는 안 하시겠습니까?”

    “응, 그건 답답해서 싫어.”

    잠시 후 가온의 숨소리가 편안해지자, 지원은 서늘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표님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도록 입을 다물라는 의미였지만, 이미 모두들 침묵을 지키고 있었기에 딱히 달라질 건 없었다.

    ‘저 사람 누구에요? 누군데 저렇게 대표님을 아이 다루듯이 해요?’

    ‘작년에 들어온 상급. 무슨 미술관을 한다는데, 엄청 부자래.’

    ‘대표님하고 사귀어요?’

    ‘그게 무슨 미친 소리야? 대표님이 어디 평범하게 연애나 하실 수 있는 분이야? 그리고 비서실 직원들은 원래 다 저렇게 대표님 수발들어.’

    ‘저 사람은 가이드라면서요.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수발드는 게 자연스러울 수가 있어요?’

    최대한 목소리를 죽인 채 조용히 속닥거리던 가이드 두 명이 불현듯 살기에 가까운 기운이 한 방향에서 줄기차게 날아오는 것을 느끼고는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그 날카로운 기세가 지원의 시선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또다시 동시에 목을 움츠렸다.

    비행기 소리 때문에 이 정도는 안 들리지 않나. 두 사람은 솔직히 지원이 너무 유난을 떤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대화의 수단은 필담으로 변경했다. 반평생 육감을 발달시켜 온 가이드의 놀라운 생존 전략이었다.

    현지의 사정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참담하고 열악했다. 공항이 있는 수도는 그저 조금 어수선한 정도였지만, 라레한이 가까워올수록 평범한 사람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을 끔찍한 비명이 여기저기에서 난무했다. 그들의 말을 다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게 다행스러울 정도였다.

    “어휴. 여기가 지옥이네.”

    라레한에 도착한 순간,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온 누군가의 한탄에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아직도 여진이 끊이지 않아 생존자들은 모두 마을을 떠난 상태였고, 마을에 남은 건 시신과 망자들뿐이었다. 이렇게 많은 영혼이 한꺼번에 모여 있는 걸 처음으로 목격한 대부분의 가이드들은 내심 큰 충격에 빠졌다. 그나마 시신은 조용하기라도 했지만, 망자들은 달랐다.

    유형은 다양했다. 제 시신을 발견하고 오열하는 이, 자신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해 당혹스러워 하는 이, 제 죽음에 분노하며 불특정 다수를 향해 저주를 퍼붓는 이, 막연한 두려움에 떨며 정신 착란 증세를 보이는 이….

    개중에는 선천적으로 영력이 세서 바로 물질계에 힘을 쓸 수 있는 망자들도 간혹 있었다. 전봇대를 걷어차서 불꽃을 일으키거나 자동차 클랙슨을 마구 눌러 소음을 내는 정도는 장난으로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땅을 흔들거나 해일을 일으키는 등, 지진 당시를 연상시키는 행동을 하면 안 그래도 겁에 질려 있던 아이들이 한꺼번에 울음을 터뜨리며 일대가 온통 난장판이 되곤 했다.

    챙! 일단 차분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가온이 검을 소환했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검광이 번뜩이자 시끌벅적하던 공기가 단숨에 가라앉았다.

    “너희의 대부분이 주어진 명을 채우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허나 이곳은 산 자의 땅. 망자의 자리는 마련되어 있지 않으니, 갚아야 할 죄를 늘리지 말고 속히 중천으로 떠나도록 하라.”

    엄중한 명령을 내린 가온이 크게 검을 휘두르자 청명하던 하늘이 조금씩 일그러지더니 곧 엄청난 크기의 구멍이 생겼다. 중천으로 향하는 문이었다.

    “저기로 가면…, 우린 어떻게 되나요?”

    “생전의 공과를 심판 받은 후, 가야 할 곳으로 가게 된다.”

    “안 갈 수는 없나요?”

    “그럴 수는 없다.”

    가온의 단호한 대답에, 한참을 머뭇거리던 망자들이 하나둘씩 문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슬슬 눈치를 보다 도주하는 망자들도 상당수였다. 스스로의 생각에도 그리 착하게 살았던 것은 아닌 모양인지, 생전의 공과를 심판 받는다는 말에 두려움을 느낀듯했다. 물론 가온은 그들을 그냥 두고 보진 않았다.

    “지금부터 도주하는 자들은 강제로 중천에 보내겠다. 그 과정이 다소 폭력적일 수 있으나, 자초한 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도록 하라.”

    가온이 검을 휘두르며 도망자들의 앞길을 막는 동안, 곳곳으로 흩어진 가이드들은 제각기 문을 열어 나머지 망자들을 차분하게 인도했다. 대부분은 순순히 가이드의 에스코트에 응했지만, 워낙 인원이 많아서 그것도 수월한 일은 아니었다.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망자들을 붙잡고 설득하는 건 더욱이 쉽지 않았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아 때로는 손짓 발짓까지 동원을 해야 했고, 마음이 몹시 불편해지는 걸 감수하고 목검을 휘둘러야 할 때도 있었다.

    처음 이틀은 라레한에 천막으로 임시 숙소를 만들어 쪽잠을 자며 에스코트에 매진했다. 그러다 사흘째 되는 날 아침부터 각국에서 파견한 자원봉사자들이 라레한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신 수습과 마을 재건을 위해서였다. 그들 앞에서 미친 사람처럼 허공에 대고 중얼거릴 수는 없으니, 제니스의 직원들은 라레한과 차로 30분 거리인 타시의 호텔로 숙소를 옮겼다. 그리고는 낮에 휴식을 취한 후 밤에만 현장에 나갔다. 다행히 관광객들은 모두 출국한 이후라 딱히 수상하게 보는 이는 없었다.

    그렇게 닷새가 지나자 현장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될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다들 평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역량을 발휘했지만, 지원의 능력은 그중에서도 단연 발군이었다. 닷새 동안 4천 장이 넘는 초상화를 그려내는 지원을 보며 모두는 혀를 내둘렀다. 단순히 그림만 그린다고 되는 게 아니라 상당한 영력을 들여야 하는 일임에도, 지원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다른 사람들의 열 배 가까운 작업을 해냈다. 그러니 몸이 축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차 관장.”

    “네, 대표님.”

    “얼굴이…, 너무 안 좋은데?”

    “조금 피곤하긴 하지만 괜찮습니다. 저뿐 아니라 다들 고생하고 계시고요.”

    눈에 띄게 안색이 나빠진 지원을 잠시 바라보던 가온이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지원이 무리를 하고 있는 건 누가 봐도 명백한 사실이었기에 당연히 걱정도 되고 마음도 쓰였지만, 아직도 갈 길을 찾지 못한 망자들이 수천 명이나 남아 있으니 살아 있는 직원까지 챙길 여력은 없었다.

    “마지막 망자, 에스코트 완료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가온과 지원을 포함한 제니스의 가이드들은 9일 동안 총 24,000명이 넘는 망자를 중천으로 보냈다. 논숨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사망자와 실종자의 합계는 총 25,000여 명이 될 거라고 했다. 통계에 잡히지 않은 인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해도 어지간히 마무리가 된 상태다.

    물론 상당수는 가온과 지원이 해결했지만, 나머지 가이드들도 하루에 100건 이상을 처리해야 했다. 보통 한국에서는 평균 하루에 2건, 많아야 3건을 처리하던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작업량이었다.

    “아으…. 나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면 한 보름은 누워 있어야 할 것 같아.”

    “나도. 어젯밤에는 머리를 감으려는데 어깨가 움직이질 않더라고. 목검을 너무 휘둘렀나 봐.”

    “그래도 처음에 와서 봤을 때를 생각하면 기적 같지 않아요?”

    가장 나이 어린 가이드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옥이 이런 곳이구나 싶었던 아수라장이 깨끗하게 정리된 것을 보고 떠나게 되어 마음이 정말 뿌듯했다. 알아주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이렇게 많은 사상자를 낸 끔찍한 현장이 비교적 빠르고 차분하게 수습된 것은 제일 먼저 현장에 달려온 가이드들이 인간계에 안 좋은 영향력을 발휘하는 영혼들을 신속하게 에스코트한 덕이기도 했다.

    “어쨌든 고생한 보람이 있어서 좋네. 아이고, 우리 애들은 열흘 동안 엄마 아빠 얼굴도 못 봤어.”

    “왜요? 아, 형수님은 판정원이시죠.”

    “그러니까 말이야. 현장에 돌아다니는 건 무서워서 못 하겠다고 내근을 선택한 건데, 따지고 보면 험한 꼴 볼 일은 판정원이 더 많아. 사실 우리는 악령을 마주쳐도 상급한테 넘기면 그만이잖아.”

    “아, 차지원 관장님은 여기에 며칠 더 계신댔죠?”

    “응. 대표님하고. 아직 도망친 망자들이 좀 남았으니까.”

    “이야,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분 진짜 대단하시던데요?”

    그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일반 가이드가 해결하지 못한 망자를 상급 가이드가 처리한다는 사실은 다들 이론상 알고 있었지만, 진짜로 상급이 일하는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9일 동안 지원은 총 7천 명의 망자를 중천으로 보냈다. 어마어마한 수였다. 최소한의 수면과 식사 및 이동 시간을 모두 제외하면, 거의 1분에 한 장씩 초상화를 그려댔다는 계산이 나온다. 아무 생각 없이 하는 낙서도 그 정도면 팔이 아파서 하지 못할 수준이다. 더구나 지원은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는 한꺼번에 수십 명의 얼굴을 기억해두었다가, 나중에 앉은 자리에서 1시간이 넘도록 초상화만 그리기도 했다. 그럴 때면 다들 잠시 손을 멈추고 구경을 하기도 했다.

    “머리도 엄청 좋은 것 같고…. 제가 여자였으면 반했을 것 같아요.”

    “나는 남잔데도 반하겠더라. 흙먼지를 뒤집어쓰고도 그렇게 잘생긴 사람은 처음 봤어. 바람에 날린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넘기는데 순간 슬로모션으로 보이더라고.”

    “저도 그랬어요! 특히 대표님 뒤에서 달려들던 망자 목덜미 잡아챌 때요. 한 손으로 목을 확 조르는데 그 쳐다보는 눈빛이! 어휴.”

    한 번 물꼬가 트이자 여기저기에서 목격담이 속출했고, 특히 여성 가이드들의 반응이 아주 폭발적이었다.

    “슬쩍 떠보니까 애인 없는 것 같던데. 그렇게 마음에 들면 대시해보지, 왜.”

    “네? 에이, 그런 남자는 애인 삼기는 부담스럽죠. 일하는 거 보니까 완벽주의자 같던데. 뭐 하나 잘못하면 되게 경멸하면서 쳐다볼 것 같지 않아요? 은근히 잔소리도 심해 보이고. 대표님한테도 그렇게 꼬장꼬장하게 잔소리를 하는데 애인한테는 오죽하겠어요?”

    “잔소리 그거 병이에요. 예전에 사사건건 잔소리하는 남자를 잠깐 만난 적이 있는데, 감기에 걸리면 손을 제대로 안 씻어서 그런 거다, 배탈이 나면 아무거나 주워 먹어서 그렇다, 조금 피곤하다고 하면 건강관리도 능력이다…. 어디 피곤해서 만나겠어요?”

    “걱정하지 마, 예인 씨. 하고 다니는 거 보니까 차 관장도 눈 높겠더라.”

    “어머, 지금 그게 무슨 뜻일까?”

    논숨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즐기며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가이드들 사이에 끼여 앉은 형우는, 왠지 초라해지는 기분에 1시간이 넘도록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항상 사무실에서 서류만 처리하던 그는 이번 현장에서 처음으로 가이드의 대단함을 실감했다. 악령들과 맞서 싸우는 가이드들은 흡사 히어로물의 주인공들 같았다.

    물론 애초에 타고난 능력치가 다르기 때문에 자신이 제 나름의 몫을 다했다면 이렇게 기가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중천주의 비서로 출장을 온 형우는 논숨에 있는 내내 정작 가온과는 하루에 두 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가온이 뭔가를 필요로 할 때마다 어떻게 알고 나타났는지 지원이 다가와 순식간에 해결한 탓에, 달달 외운 주의사항은 써먹을 기회조차 없었다.

    - 박 대리.

    - 네, 대표님.

    - 박 대리는 이번에 가이드들 귀국할 때 함께 돌아가도록 해. 열흘 동안 수고했어.

    그게 열흘 만에 가온과 가장 길게 나눴던 대화였다. 가온의 입장에서는 옆에 저에 대해 속속들이 아는 지원이 있으니 딱히 불편할 게 없었고, 저를 돌보는 사람이 굳이 둘이나 있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서 내린 지극히 효율적인 결정이었지만, 형우는 상사에게 인정받지 못했다는 생각에 몹시 우울했다. 본인이 생각해도 이번 출장에서 제대로 밥값을 못 한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안타깝게도 자신이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박탈당한 것은, 누군가의 치밀한 공작 때문이었다는 것을 형우는 끝까지 몰랐다. 드디어 방해꾼을 모두 치우고 단둘이 남게 되어 몹시 흡족해진 누군가가 은밀하게 미소를 짓고 있다는 사실도 끝내 알지 못했다.

    가온과 지원은 머물고 있던 타시를 시작으로 나라 곳곳에 숨어 있는 망자를 하나씩 찾아서 처리하기로 했다. 아예 바다를 건너 다른 나라로 도주한 망자는 당장 어쩔 수 없지만, 다행히 국토의 전체 면적이 제주도의 두 배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넉넉잡고 일주일이면 끝에서 끝까지 한 번은 훑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지원의 건강 상태였다.

    “차 관장. 정말 괜찮겠어?”

    “그럼요. 멀쩡합니다.”

    지원의 대답은 시원시원했지만, 아무리 봐도 평소처럼 생기가 도는 낯빛은 아니었다. 가온의 고심이 깊어졌다. 이번 현장은 가온이 금세기 들어 다녔던 그 어떤 재난 현장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이 수월했다. 그건 다 지원이 함께 온 덕분이었다.

    가이드의 업무가 아닌 가온의 일상적인 부분에서도 지원은 비서보다 훨씬 더 많이, 그리고 훨씬 더 빨리 가온의 필요를 완벽하게 채웠다. 지원과 알고 지낸 것이 불과 8개월 정도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여태까지 가온은 제 옆에 누가 있든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혹 자리가 비면 응당 다른 사람이 그 빈자리를 채웠고, 그걸 가온이 직접 챙길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대체 불가능한 인물이 나타나자 얘기가 달라졌다.

    이 시점에서 차 관장이 쓰러지기라도 하면 곤란한데. 현실적으로 내가 누구를 돌보기는 어렵고. 확실히 너무 무리하긴 했지. 중간에 하루 정도는 쉬게 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러고 보니까 살아 있는 인간이 너무 오래 음기에 노출된 것이 좋지 않은 것 같아. 아무래도 오늘 하루는 햇볕을 쬐면서 기력을 보충하는 게 좋겠어. 장고 끝에 결단을 내린 가온이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 관장. 오늘은 여기에서 하루 쉬겠어.”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대표님.”

    “내가 피곤해서 그래. 머리도 좀 아픈 것 같고.”

    순간 안색이 변한 지원이 제 가방에서 체온계를 꺼내더니 바로 가온의 이마에 대고 측정 버튼을 눌렀다. 37.3도. 나직하게 숫자를 읽는 목소리가 급격히 서늘해졌다. 지원을 쉬게 하려고 급조한 핑계를 댔던 가온은 미세하게 정상의 범주를 벗어나는 체온에 진심으로 당황스러웠다.

    “대표님, 언제부터 머리가 아프셨습니까.”

    “어…? 글쎄, 딱히 언제부터였는지는….”

    “다른 곳은 불편한 데가 없으십니까?”

    “다 괜찮아.”

    아…. 속이 안 좋다고 할 걸 그랬나. 이렇게 즉각 수치로 나타나는 도구가 등장할 줄은 몰랐다. 재주도 없는 임기응변은 애초에 시도하는 게 아니었는데…. 지원의 표정이 너무 안 좋아지자 가온은 조금 곤란해졌다. 다정도 병이라더니. 젊은 사람이 이리 마음이 여려서야 원.

    “그게 말이야, 차 관장. 나나 그대나 며칠 무리했으니 하루 정도는 휴식을 취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한 말이야. 정말 어디가 막 아픈 건 아니었어.”

    “…네.”

    “산 사람이 음기를 너무 오래 접하는 건 좋지 않아. 나도 일단은 인간이고, 차 관장한테는 특히 더 안 좋다고. 마침 볕이 좋으니 하루만 쉬자는 거야.”

    “알겠습니다.”

    알겠다고 대답은 하면서도 딱히 수긍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이를 어쩐다. 더는 생각나는 핑곗거리가 없는데. 난감한 얼굴을 하던 가온이 로비 한쪽 구석에 수영장 표지판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 그래. 저걸 하자고 해야겠군.

    “차 관장. 수영할 줄 알아?”

    “네.”

    “지난번에 나한테 유산소 운동을 권했었지? 수영은 얼마나 배워야 혼자서 할 수 있어?”

    “사람마다 다르고 목표하는 수준에 따라서도 다르지만, 대표님 같은 경우에는 그냥 물속을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보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시간을 내서 다른 운동을 하시진 않으니까요.”

    “그럼 오늘은 쉬면서 그걸 한번 해볼까?”

    내내 심각하던 지원의 표정이 조금 풀어지자, 가온은 그제야 크게 안도했다. 금세 눈매가 부드러워진 지원을 따라 자신 역시 빙그레 웃고 있다는 것은 자각하지 못했다.

    호텔 매장에서 급하게 수영복 두 벌을 구입한 지원은, 옷을 갈아입은 가온이 나타나자 눈앞이 어지러워졌다. 함께 수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친밀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었지만, 절대 수영복 차림을 상상했던 것은 아니었다. 가온을 떠올리면 항상 따라오는 이미지는 언제나 색이 짙은 정장 차림이었다. 이런 가벼운 복장을 기대한 적은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었다.

    차마 수영복만 내밀 수는 없어서 비치 카디건 하나를 덧입히긴 했지만, 물속에 들어가니 속옷의 형상을 한 수영복이 그대로 비쳤다. 재난 지역이라 관광객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른 남자가 가온의 이런 모습을 보게 된다면 눈을 파버리고 싶어질 것 같았다. 자신이 이렇게 과격한 인간이라는 걸, 지원은 오늘 처음 알았다.

    “아…!”

    혼자서 물속을 이리저리 걸어 다니던 가온이 발이 미끄러졌는지 크게 휘청거렸다. 몇 발자국 사이를 두고 따라가던 지원이 재빨리 다가가 그녀의 허리를 받치며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고마워.”

    “별말씀을요. 그럼 기왕 수영장에 왔으니 기본만이라도 배워보실까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성격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가온은 의외로 물을 무서워했다. 그리고 그건 본인도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특성인 듯했다.

    “절대로 빠지지 않습니다, 대표님. 지금도 발이 바닥에 닿아 있고요. 얼굴만 살짝 담그고 호흡법을 익히는 겁니다. 세수할 때도 이 정도는 합니다.”

    “….”

    “제가 계속 손을 잡고 있을 거고, 혹시 손을 놓치더라도 1초 안에 반드시 잡겠습니다. 저를 못 믿으세요?”

    “차 관장은 믿어.”

    “그런데요?”

    “나를 못 믿겠어.”

    본격적인 수영은 못 해도 만약을 대비해서 물에 뜰 줄은 알아야 하는데. 이대로라면 영영 수영은 못 배우겠는데? 못내 걱정스러운 마음이 드는 한편, 혹시라도 손을 놓칠 새라 제 손을 꼭 잡고 있는 가온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과는 달리 입꼬리는 자꾸만 위로 들렸다.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가온은 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어른이었는데, 이렇게 겁에 질린 모습은 정말이지 너무 귀여웠다.

    내가 졌다. 어떻게 할 수가 없네.

    “대표님.”

    “…응?”

    “알겠습니다. 그냥 하고 싶은 것만 하세요. 대신 물가에 가실 일이 있으면 저를 꼭 부르시고요.”

    “차 관장하고는 같이 할 게 많네. 군것질도 차 관장이랑만 하는데. 나한테 커피 가져다주는 사람도 차 관장뿐이고.”

    여전히 지원의 손을 놓지 않은 가온이 빙긋이 미소를 짓자, 지원의 입에서는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사람의 심장을 들었다 놨다 하는 유해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본인은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조금 얄미웠고, 이 정도의 접촉도 꼴에 스킨십이라고 가슴이 들뜨는 제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내가 진짜, 나이 서른에 여자 손 한 번 잡았다고 이래야 되나.

    “아침 먹은 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배가 고프네.”

    “물놀이가 원래 체력 소모가 많습니다. 베이커리에서 무화과 타르트를 팔던데, 점심 먹기 전에 가볍게 하나 드시겠습니까?”

    “그럴까? 차 관장은 정말 나랑 식성이 비슷해서 좋아.”

    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뒷말은 속으로만 삼킨 지원이 가온의 손을 잡고 수영장 밖으로 끌어 올렸다. 물기가 쭉 빠지며 몸매의 굴곡이 고스란히 드러나자 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광속에 가깝게 반응한 시각이 빠르게 실루엣을 훑어 내린 다음이었다.

    “배고픈데 간식부터 먹고 씻을까?”

    “따뜻한 물로 샤워부터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까 열이 좀 있었으니까요. 혹시 감기라도 걸리시면 큰일입니다.”

    “그래. 알겠어.”

    죄송합니다, 대표님.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당신이 이런 차림으로 사람들 앞에 돌아다니는 게 너무 싫어.

    논숨의 남쪽 끝에서 출발한 두 사람은 계획대로 일주일 만에 북쪽 끝에 다다랐다. 지진이 발생했던 라레한에서 멀어질수록 망자를 발견하는 횟수는 확연히 줄어들었다. 하지만 상대해야 하는 악령의 질은 점점 더 나빠졌다.

    “이쪽 동네에는 상급 가이드가 오랫동안 없었나 봅니다.”

    “뉴질랜드에 있었던 상급은 얼마 전에 노환으로 세상을 떴고, 이제는 호주에 한 명 남았지. 아마도 논숨에는 지난 세기 이후로 상급이 방문한 적이 없었을 거야. 내가 마음먹고 오기에는 너무 멀었고.”

    “대표님이 세상의 모든 악령을 한꺼번에 처리하실 수는 없습니다.”

    “그래. 그건 나도 알아.”

    멀리 머리카락이나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이쪽의 동향을 살피는 악령들을 노려보며 지원이 소리 없이 이를 갈았다. 아마도 중천주와 함께 얼굴을 보는 즉시 중천으로 보내는 악랄한 가이드가 왔다는 소문이 퍼진 모양이었다. 인간 사회에서도 그다지 평판을 신경 쓰는 편은 아니었기에, 귀신들이 저를 어떻게 부르는지 따위는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가온의 얼굴에 씁쓸함이 감도는 것은 참을 수 없이 짜증스러웠다. 세상에는 왜 이렇게 개념이 없는 것들이 많을까. 죽었으면 알아서들 빨리빨리 중천으로 가버리면 여러 사람 고생하지 않고 얼마나 좋아. 여기에서 이렇게 버티는 만큼 형량이 늘어난다고 귀가 닳도록 얘기를 하는데, 대체 왜 들어 처먹지를 않는 거야? 이렇게 정의감과 사명감이 충만한 여자를 왜 이렇게 고달프게 하냐고, 대체 왜!

    유독 악하고 기운이 센 악령이 나타날 때마다 가온이 뭔가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고민에서 끝나지 않고, 자칫 주의를 잃는 경우가 생기는 건 더욱 큰 문제였다. 두어 번 정도는 정말로 큰일이 날 뻔했었다.

    “대표님!”

    “아…! 미안.”

    흑화한 망자와 맞닥뜨리면 가온은 일단 검을 빼들긴 했다. 그러나 가온이 검을 사용해서 하는 일은 주변의 공기를 통제하고 망자의 도주로를 막는 정도였다. 도로 위에서 보행자의 발목을 걸어 넘어뜨리며 깔깔대던 망자를 발견했을 때도, 가온은 그의 턱 끝에 날카로운 검날을 들이밀었다가 결국은 검을 거두어들였다. 구사일생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달아나는 망자를 다시 잡아서 중천으로 보내기 위해, 가온과 지원은 꼬박 하루 밤낮을 더 쫓아야 했다.

    “미안해, 차 관장.”

    “제게 미안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대표님. 직접 베지 않으시는 이유가 당연히 있겠죠.”

    “…응.”

    “제가 이유를 알길 원하시면 듣겠습니다. 아니라면 그냥 그렇구나, 할 거고요. 편하신 쪽으로 하세요.”

    어린애가 어쩌면 이렇게 속이 깊을까. 지원의 말에 희미하게 미소를 짓던 가온이 아주 오래 망설인 끝에 조곤조곤 이야기를 시작했다.

    가온이 중천주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아홉 번의 생을 마감하며 모두 명계행 판정을 받았던 망자가 열 번째로 중천에 왔었다. 도저히 교화가 될 것 같지 않은 영혼이었고, 당연히 지옥으로 떨어졌다. 300년 동안 죗값을 치르고 열한 번째로 생을 받은 그는 이전과 달라진 게 거의 없었다. 오히려 더 잔인하고 악랄한 일을 일삼았고, 사망한 이후에도 굉장히 많은 인간들과 가이드들을 괴롭혔다.

    - 망자 이만석을 발견하는 즉시 내게 보고하라. 이번에야말로 내가 직접 그를 베어 무저갱으로 떨어뜨릴 것이고, 그에게 열두 번째의 생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가온은 그전에도 함부로 망자를 베지는 않았지만, 도저히 교화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는 영혼이 인간계에 막대한 피해를 입힐 때는 다른 많은 인간들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검을 들기를 주저하지 않았었다. 다짐했던 바와 달리 이만석을 직접 베지 못했던 것은 가온이 그를 발견하기 전에 그가 한 상급 가이드의 손에 이끌려 중천으로 왔기 때문이었다. 또다시 명계로 가게 된 그는 500년 형을 받았고, 100년쯤 전에 누구나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열두 번째의 생을 받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변수가 등장했다.

    “자그마한 여자아이로 태어났지. 어릴 때부터 표독스럽고 언행이 거칠어 주변의 많은 이들을 힘들게 했어. 그 아이가 여덟 살 즈음에 지나가다가 한 번 보았는데, 새끼를 품고 있는 고양이에게 돌을 던지고 있더군. 틀림없이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확신했었지.”

    하지만 아이의 부친은 그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사랑으로 감싸고, 보듬고, 아끼면서 눈물로 기른 보답이 사춘기를 지나며 서서히 나타났다.

    “23년 전에 그 아이가 열두 번째로 중천에 왔을 때, 처음으로 판정의 저울이 왼쪽으로 기울었어. 내가 마지막 한 번을 참지 못하고 일찌감치 베어 버렸다면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겠지. 다행히 아이는 정말 극적으로 열세 번째 삶을 받았어.”

    어딘가 알 수 없는 먼 곳을 바라보던 그녀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자칫 그 순간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아직도 온몸에 오한이 난다.

    “그 아이가 해수야.”

    …뭐라고? 시선을 내리깐 채 묵묵히 듣고 있던 지원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뭔가 대꾸를 하고 싶었지만, 쉽게 말이 되어 나오질 않았다.

    “이번에도 여덟 살에 처음 보았는데, 세상에 아이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어.”

    - 대표님, 제가 열다섯 살이 되면 꼭 대표님을 도와드리러 갈게요!

    제 눈에 귀신이 보인다며, 그걸 새총으로 잡을 수 있다며, 자랑스럽게 재잘대던 어린 해수의 해맑은 미소를 가온은 영원히 잊지 못한다.

    “해수가 태어난 이후로 나는 검으로 망자를 베지 않아. 사실 이것도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면서도 결심이 흔들릴 때가 많지만….”

    “그전에 대표님께서 베셨던 망자들은 몇 번의 기회가 더 있었다고 하더라도 교화되지 않았을 겁니다.”

    “….”

    “해수니까 그럴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전에도 대표님께서는 당연히 하셔야 할 일을 하신 것뿐이고, 이젠 그 새로운 신념을 지키시면 됩니다. 그건 당연히 존중받아야 할 일이죠.”

    지원의 단호한 목소리에 원망과 서러움이 가득하던 목소리 하나가 섞여 들었다.

    - 대표님의 신념이 저희의 목숨보다 더 중요합니까?

    아주 오랜 시간 꿈자리를 괴롭히던 악몽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순간이었다. 미소를 지으려고 조금 노력했지만 잘되지 않아, 가온은 그냥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별말씀을요.”

    논숨에서 만난 마지막 악령은 정말 두 사람의 진을 완전히 빼놓았다. 바닷가 마을에 거주하며 심심하면 풍랑을 일으키는 통에, 수십 년째 해마다 꼭 한두 명은 파도에 휩쓸려 목숨을 잃는다고 했다.

    그 역시 지원에 대한 소문을 들었는지 줄곧 해를 등진 채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었고, 가온의 영향력 안에 들어오지 않으려고 먼 바다 위를 둥실둥실 떠다녔다. 그러면서도 약을 올리려는 심산인지 아예 안 보이는 곳으로 도망을 가지도 않았다. 두 사람이 지칠 만하면 바로 코앞까지 날아와 한바탕 소란을 일으켰고, 가온이 검을 휘두르면 바로 바다 위로 꽁무니를 뺐다.

    꼬박 한나절을 씨름한 끝에 결국 해가 져버렸고, 오래된 가로등 몇 개가 흐릿한 빛을 내는 게 전부인 시골 마을에서 망자의 얼굴을 확인할 길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놓친다면 너무 분해서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던 지원은 필사적인 궁리 끝에 기어이 방법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대표님.”

    “응?”

    “비도 내리실 수 있으니, 번개도 만드실 수 있습니까?”

    “가능은 한데….”

    “이대로 저자에게 계속 농락당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그렇다 치더라도, 대표님께 수작을 부린 것만큼은 절대로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저자가 최대한 가까이 왔을 때 번개를 한 번 내리치시면 제가 어떻게든 얼굴을 확인하고 초상화를 그리겠습니다.”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천하의 중천주를 가지고 논다는 희열에 취해 망자가 긴장을 놓은 순간, 하늘을 반으로 쪼개는 듯한 어마어마한 번개가 내리쳤다. 일대를 대낮처럼 밝힌 엄청난 빛이 번뜩이며 망자의 얼굴을 또렷이 비췄고,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던 지원은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이것들이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지원이 재빨리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하자 사납게 이를 드러낸 악령은 당장이라도 지원을 찢어발길 기세로 달려들었다. 그자가 지원의 어깨를 뜯어내다시피 할퀴었을 때, 가온은 아주 오랜만에 극렬히 분노했다.

    “차 관장!”

    “베지 마세요! 다했습니다!”

    공격형 자세로 검을 고쳐 쥔 가온을 만류하면서도 신속하게 초상화를 완성한 지원이 그대로 불을 붙였다. 그러자 당장이라도 고막이 터질 것처럼 요란하던 비명소리가 곧이어 서서히 멀어졌다.

    “차 관장, 어깨가….”

    “아….”

    안도의 한숨을 내쉰 지원이 제 어깨를 힐끔 내려다보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가온에게 웃어 보였다. 살짝 따끔하긴 했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고, 그 난리통에서도 가온에게 눈에 띄는 상처가 생기지 않았다는 게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어쨌든 대표님도 무사하시고, 망자도 처리할 수 있어서 다행이네요.”

    “다행이라니! 차 관장 지금 피가 얼마나 나는지 알아?”

    “괜찮습니다. 별로 아프지도 않고….”

    “어디 봐.”

    미간을 확 찌푸린 가온이 거침없이 손을 뻗어 지원이 입고 있는 셔츠의 단추 하나를 풀었다. 처음에는 가온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몰라 가만히 지켜보던 지원이, 곧 딱딱하게 표정을 굳히며 그녀의 손목을 꽉 붙들었다.

    “대표님.”

    “얼마나 다쳤는지 좀 보자고.”

    “이러지 마십시오, 대표님. 제가 대표님 좋아한다고 했던 거 잊으셨습니까?”

    “…뭐?”

    “물론 대표님은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으셨지만. 제가 대표님을 좋아한다고 한 건 중천의 주인을 경외하는 것도, 직장 상사를 존경하는 것도 아닙니다.”

    잠시 멍해졌던 가온의 얼굴에 서서히 경악의 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이런 쪽으로는 경험이 일천한 가온이라지만, 최소한의 분위기 파악도 못 할 정도로 무지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가온은 지금 지원과 나누고 있는 이 대화 자체가 도무지 현실감이 느껴지질 않았다.

    차 관장이…, 나를? 대체 왜? 이게 정말 내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가…, 맞아?

    “손도 잡고 싶고, 품에 안고도 싶고, 입도 맞추고 싶은…. 남자가 여자를 원하는 그런 마음으로 제가 대표님을 좋아합니다.”

    긴가민가하던 마음에 쐐기를 박는 발언에 큰 충격을 받은 가온이 지원의 셔츠 자락을 움켜쥐고 있던 손을 툭 떨어뜨렸다.

    “정말로 많이 다친 건 아닙니다. 돌아가자마자 바로 치료받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차 관장….”

    “그리고…. 남자의 옷을 벗길 땐 조금 신중하셔야 합니다. 대표님의 순수한 의도와는 달리 남자는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으니까요.”

    진심으로 진지하게 당부하던 지원이 가온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는 걸 보고는 옅게 쓴웃음을 지었다. 하. 내가 진짜 이 여자를 좋아하긴 하는구나. 드디어 고백이라는 걸 제대로 인식시켰다는 만족감보다 너무 충격을 받았으면 어쩌나 걱정스러운 마음이 먼저 드는 걸 보면.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한 가온이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지원 역시 가만히 입을 다문 채 그녀가 다시 눈을 뜰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다행히 바닥까지 긁어모은 인내심은 아직 여유분이 남아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