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3. 목단의 향에 취하다 (4/18)

03. 목단의 향에 취하다

쾅! 법궁 전체를 뒤흔드는 굉음에 놀란 망자들이 한껏 목을 움츠린 채 이리저리 눈치를 살폈다. 안 그래도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무시무시한 지옥의 분위기에 완전히 주눅이 들어 있었는데, 아무런 표정 없이 기계적으로 일을 처리하던 판관들이 화들짝 놀라며 저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하자 공포심은 더욱 커져만 갔다.

“오늘은 또 왜 이렇게 화가 나셨어?”

“글쎄. 아마 도주한 죄인들 때문 아닐까? 최근에 여섯 명이나 인계로 달아났다던데. 완전히 대노하셔서 직접 잡아 오겠다고 하셨다더군. 인계로 통하는 길목에 덫을 놓았다는 말은 들었는데, 생각이 있다면 아직도 그 근처에서 얼쩡거리고 있진 않겠지.”

“쯧쯧. 어리석은 것들 같으니. 잠시 잠깐 마왕님의 눈을 피한다고 해도 어차피 천주님의 손을 끝내 벗어나지는 못할 텐데. 도망치다 잡혀 오면 형벌이 10배로 늘어난다는 걸 모르고 한 짓이겠지.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은 정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인할 수 없는 진리라니까.”

귀를 쫑긋 세우고 판관들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던 망자 한 명이 헉 소리를 삼키며 놀란 숨을 들이켰다. 당연히 환생을 하게 될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가 판정의 저울이 오른쪽이 훅 기우는 바람에 명계로 오게 된 선주는, 속으로 너무나도 억울해하며 조용히 도주로를 눈여겨보고 있는 중이었다. 길고 날카로운 무기를 손에 든 관졸들이 사방을 지키고 있었고, 닿기만 해도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은 사나운 불길이 여기저기에서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이 법궁만 빠져나가면 어떻게든 방법이 생길 것 같았다.

대부분의 망자들은 명계수문을 통과하기 전부터 극심한 불안감에 휩싸여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만, 그녀는 달랐다. 생전에 설계사로 일했던 선주가 염라국에 도착한 순간 제일 먼저 들었던 감상은, 지옥의 규모가 무식하게 크다는 거였다. 아주 복잡한 구조를 가진 독특한 양식의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감시의 눈이 구석구석을 모두 비추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저 중에 어디에라도 일단 숨어들면 아무도 못 찾을 것 같은데…. 그래, 사람이 이렇게 많으니까 나 하나 없어지는 건 티도 나지 않을 거야. 게다가 나 같은 소시민이 잘못을 해봐야 뭘 그렇게 많이 했다고. 나는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경쟁 사회에서 손에 쥔 것 없이 태어나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려면, 다른 사람을 짓밟고 올라가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잖아? 내가 사람을 치기를 했어, 죽이기를 했어? 고작 말 몇 마디뿐이었다고. 물론 아주 가끔은 없는 말을 만들어서 한 적도 있긴 하지만….

하지만…. 도망치다 잡히면 형벌이 10배로 늘어난다는데…. 어쩌지? 나는 별로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냥 마음 편하게 벌을 받는 편이 나을까? 제 앞의 줄이 점점 줄어드는 걸 보며 초조하게 입술을 물어뜯던 선주는 한 망자에 대한 판결을 듣고는 못내 경악하며 도주의 의지를 굳혔다.

“그웬 센티에노. 사기 4건, 무고 2건에 대한 처벌로 60년 형에 처한다. 탄화옥에서 형기 전체를 채우게 될 것이니, 관대한 처분에 감사하며 입술로 지은 죄를 통렬히 반성하도록 하라.”

60년?! 겨우 사기 4건에 무고 2건인데? 자신의 죄를 가늠해보는 선주의 머릿속이 정신없이 바빠졌다. 별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그래서 아예 기억에 담아두지도 않았던 잘못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했다.

저런 기준이라면 나는 지금 대충 생각나는 것만 해도 족히 200년은 받겠는데? 마른 침을 꿀꺽 삼킨 그녀는, 슬금슬금 자리를 벗어나서는 험상궂은 관졸들 중에 그나마 표정이 유한 이를 찾아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저기…, 탄화옥이 뭔가요?”

“날마다 불을 삼키게 하는 지옥이다. 입술과 혀, 그리고 목구멍이 다 타들어 가서 재가 되면 다음 날 또 새로운 불을 받게 되지. 하루에 한 번만 삼키면 되고 다른 노역도 없으니 개중 지내기 수월한 곳이다.”

관졸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하얗게 질린 선주는 충격을 감추지 못한 채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말도 안 돼. 그런 식으로 몇백 년을 썩을 수는 없어. 마구 흔들리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그녀는 나란히 선 두 명의 관졸들이 각기 다른 방향을 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 순간 심장이 사정없이 방망이질 쳤다.

지금이야.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어. 오래 고민할 시간도 없이 빈틈을 향해 무작정 달려가던 선주는, 제 앞을 가로막은 이와 눈이 딱 마주치고는 그대로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이건 또 웬 겁도 없는 쥐새끼이실까.”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로 화려한 미모를 가진 훤칠한 청년이 삐딱하게 고개를 꺾은 채 선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 큰 목소리가 아니었는데도 청년의 입이 열리자마자 웅성거리던 법궁 안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해졌다.

아…, 이 사람이 바로 그 마왕님이구나. 도주한 죄인 때문에 대노했다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선주는 눈앞에 선 남자가 이 구역 제일의 권력자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판관장.”

“네, 마왕님.”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머리가 하얀 판관을 손짓 한 번으로 불러 내린 하율은, 불과 몇 걸음 가지도 못한 채 현행범으로 딱 걸린 선주를 못내 가소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여느 때라면 막 명계에 도착한 어리바리한 망자가 과연 법궁이라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인지 여부를 놓고 시종들과 내기를 걸고는 낄낄거리며 지켜봤을 수도 있지만, 불행히도 오늘은 하율의 기분이 지나치게 더러웠다.

“규정대로 처리해.”

“네, 알겠습니다.”

짧은 명령을 내린 하율이 강렬한 적색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바람처럼 사라지자,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응시하던 선주의 낯빛이 서서히 흑색으로 변했다. 규정대로…? 그럭저럭 영민한 두뇌를 가진 그녀는 하율의 명령이 뜻하는 바를 바로 알아들었다.

- 도망치다 잡혀 오면 형벌이 10배로 늘어난다는 걸 모르고….

순간 손발에 힘이 쭉 빠진 선주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곧이어 사시나무 떨듯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정의 손길을 건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잔뜩 성이 난 채로 법궁을 가로질러 침전에 도착한 하율은 입고 있던 도포를 벗어 거칠게 바닥에 패대기쳤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느긋하게 가온을 만나려고 낯이 뜨거워지는 것도 참고 그런 채신머리없는 짓을 벌인 건데, 오매불망 기다렸던 여인이 달고 온 새파란 애송이의 건방진 눈빛은 안 그래도 편치 않던 심기를 인정사정없이 할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지원의 마음이 가온에게 향하고 있다는 건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자고로 수컷들이란 사람이든 짐승이든 제 영역을 침범 받는 순간 바로 이를 드러내기 마련이고, 제가 그랬던 것처럼 지원 역시 하율을 보자마자 적으로 인식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던 여잔데. 무려 900년이 넘는 시간을 인내하며 기다렸는데, 고작 서른 해도 넘기지 못한 핏덩이가 어디서 감히…. 어금니를 사리문 하율이 불끈 쥔 주먹으로 벽을 내리치자, 명계 전체에 다시 한번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커다란 뇌성이 울렸다.

“마왕님….”

“들어올 것 없다.”

시종의 걱정스러운 부름에 냉랭한 목소리로 답한 하율이 침전의 바닥을 열고는 아득한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각양각색의 지옥을 휙휙 지나치며 한없이 밑으로 떨어지던 하율은, 무려 이각이 지난 후에야 겨우 바닥에 내려설 수 있었다.

무저갱. 불빛은커녕 자그마한 소음 하나도 없는 완벽한 무의 공간에 내려선 하율이 지독한 어둠을 뚫고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걷자 멀리 희미한 광채가 눈에 들어왔는데, 그 순간 머리카락이 다 곤두설 만큼 극심한 흥분 상태였던 하율이 비로소 평정을 되찾았다.

벽과 바닥도 구분할 수 없는 온전한 어둠 한복판에, 새하얀 족자 두 개가 둥실둥실 떠 있었다. 똑같은 크기와 모양의 족자였지만, 둘의 상태는 확연히 달랐다. 튼튼한 끈으로 단단히 묶인 족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율이 나머지 하나에 손을 뻗자, 느슨하게 둘둘 말려있던 족자가 소리도 없이 스르르 풀려나갔다. 족자 안에 그려진 건 놀랍게도 가온의 초상화였다.

조심스럽게 족자를 펼친 하율은 지금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가온의 고운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며 모처럼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얼굴을 처음 봤던 순간은 천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또렷하고 생생하다.

평소처럼 설렁설렁 법궁을 둘러보고 온 하율은 제 책상 위에 앉아서 다리를 까딱거리고 있는 채이를 보고는 혀를 끌끌 찼다. 지엄하신 상천제께서 어찌 저런 경거망동을…. 치맛자락이 말려 올라간 것도 모르고. 참 누가 볼까 무섭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하율은 채이가 던진 족자 하나를 반사적으로 잡아챘다.

- 뭐야?

- 마지막 후보. 이번에는 스물두 살짜리 여자애야.

- 스물두 살? 너무 어리지 않아? 그 나이에 무슨 판단력이라는 게 있겠어? 고작 백 년도 못 사는 인간에게 뭘 크게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중천주 노릇을 하려면 최소한 불혹은 넘어야….

- 일단 봐.

채이의 채근에 내키지 않는 손길로 족자를 풀던 하율이 입매를 딱딱하게 굳혔다. 그리고는 사납게 눈을 치켜뜨며 채이를 노려보았다.

- 어때?

- 저의가 뭐야.

- 염마왕 하율.

줄곧 장난스럽던 채이의 말투가 한순간에 근엄하게 변하자, 천하의 염마왕도 긴장하게 만드는 위압적인 공기가 팽팽하게 주변을 감쌌다.

- 내게 저의 따위는 없어. 나는 언제든 그 어리고 어리석은 아이들 중에서 가장 공정한 이를 골라낼 뿐이야. 후보 셋을 보여주었으니, 이번에는 그대가 선택하도록 해. 그 아이를 중천주로 세우고 싶어?

그날의 선택을 후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단단히 봉인된 족자의 매듭을 손끝으로 살살 쓸어보던 하율이 마치 주문을 외는 것처럼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딱 두 번이면 돼. 그러면 이번에야말로 내 차지가 될 테지.”

비장하게 고개를 주억거린 하율이 다시금 족자를 공중에 띄웠다. 그리고는 왔던 길을 천천히 되돌아갔다. 잠깐의 소란이 모두 지워진 무저갱에, 덩그마니 놓인 족자 두 개만 은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런데요, 관장님. 말이 나와서 말인데…. 기획서를 확인해 보니까 이번 전시에 제 그림 위치가 좀…, 그렇더라고요.”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면서도 지원은 한껏 사교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 얘기를 언제 꺼내나 했다. 언제나 근거를 알 수 없는 자신감에 차 있던 젊은 작가가 뭔가를 잔뜩 벼르고 있는 얼굴로 갤러리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지원은 그의 용건을 빤히 짐작하고 있었다.

어차피 불평하러 왔으면 빨리빨리 그 얘기나 하고 갈 것이지, 쓸데없이 자동차 얘기를 30분이나 할 건 뭐냐. 사실 현재 지원의 마음은 타인에게 넉넉하게 아량을 베풀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지만, 그는 일단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의 불만을 조금 들어주기로 했다. 공권력을 두려워하는 편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문체부 장관 출신의 국회의원 부친을 둔 금수저를 면전에서 홀대하기는 어려웠다.

“음, 우리도 송 작가님 그림이 좋아서 고민을 정말 많이 했습니다만…. 이번 전시에 참가하는 분 중에 김예찬 화백이 계십니다. 송 작가님도 잘 아시죠?”

“…알죠.”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상대가 등장하자, 3수를 하고도 끝내 그의 제자가 되지 못했던 영진은 대번에 기가 죽었다. 그럼. 네가 아무리 안하무인이어도 김예찬 화백 이름 앞에서는 적당히 찌그러져야지. 너한테도 그림을 보는 눈이라는 게 있다면 알겠지만, 그분의 작품은 네 낙서 쪼가리하고는 차원이 달라.

“김 화백님 작품이 이번 전시 메인입니다. 그러니 송 작가님이 이해하셔야 될 것 같은데…. 갤러리 사정 잘 아시잖아요. 신인 작가 그림을 메인에 걸겠다고 거장한테 물러나라고 할 수도 없고요. 김 화백님 이름값이 있는데.”

“그건 저도 알지만…. 그래도 제 자리는 너무 구석이던데요. 아까 보니까 조명도 잘 안 닿고…. 적어도 1전시실 안에는 넣어주실 줄 알았어요. 아빠도 그렇게 얘기했었는데. 관장님이 특별히 신경 써 주실 거라고.”

하아, 아빠…. 지원의 관자놀이 근처에 힘줄이 툭 불거졌다. 넌 아빠한테 꼭 효도해라. 그 대단하신 네 아빠가 워낙 다양한 루트로 나를 괴롭히는 바람에, 네 말도 안 되는 그림이 내 갤러리에 2주 동안이나 걸리게 된 거야. 우리 큐레이터가 네 그림을 보고 유치원에 다니는 조카가 그린 거냐고 물어봤어. 실력이 없는 건 넌데, 왜 내 얼굴이 화끈거려야 되냐고.

- 차라리 그런 거라면 나도 기쁜 마음으로 자랑스럽게 걸어주겠지만…. 난 외동이라 조카 같은 거 없습니다.

- 그래서 진짜 이 그림을 걸라고요? 진심이세요?

- 진심입니다. 그 개발로 그림을 그린 작가가…. 아, 진짜. 나도 작가 소리가 안 나오긴 하는데. 아무튼 그 그림의 주인이 송태윤 의원의 늦둥이 아들이거든.

영진의 그림을 처음 봤을 땐, 차라리 리모델링을 핑계로 갤러리 문을 한동안 닫아버릴까도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에밀 갈레의 화병을 들여오지 않았다면 아마도 행동으로 옮겼을 가능성이 높다.

야, 내가 진짜 수치스러움을 무릅쓰고 걸어주는 거야. 우리 갤러리의 전시 이력에 길이 남을 오점이라고. 너도 이만하면 어지간히 자존심 세웠을 테니 우리 이제 그만 하자, 응? 나 원래 이렇게 누구 비위 맞추는 사람 아니거든? 너 아니어도 지금 골치 아픈 일투성이니까, 진짜로 나 확 돌기 전에 적당히 해라.

조금만 집중이 흐트러지면 신랄한 속내가 그대로 튀어나올 것 같아서, 지원은 때때로 호흡을 고르며 정신을 가다듬어야 했다.

“기획서를 보셨다니 당연히 아시겠지만, 송 작가님 그림은 1전시실에 들어가는 작품들하고는 작풍이 많이 다릅니다. 아무래도 테마가 있는 전시라 전체적인 분위기를 고려해야 하니까….”

“그럼 제 그림을 메인으로 하고 다른 걸 거기에 맞추면 되잖아요. 아직 전시는 한참 남았는데.”

어지간하면 좋은 얼굴로 돌려보내려고 마음을 다잡던 지원이었지만, 이번만큼은 표정이 변하는 걸 어쩌지 못했다. 충분히 알아듣게 얘기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네? 이야, 차지원 성질 많이 죽었다. 그래도 이제 더는 못 참아. 서서히 입매를 굳힌 지원이 막무가내로 떼를 쓰는 영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계속 헛소리를 하면 뒷감당 빡세게 할 각오를 하고 속엣말을 그대로 퍼부을 작정이었다.

이 분수도 모르는 게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남의 갤러리 말아먹을 일 있어? 야, 나도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 있어. 너 말이야, 돈만 주면 원숭이도 입학시켜주는 학교에서 졸업까지 돈 주고 했다는 걸 이 바닥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내가 무슨 망신을 당하려고 네 그림을 메인으로 걸어?

한참 동안 영진을 말없이 바라보던 지원이 한껏 낮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송 작가님.”

“…네.”

“정 자리가 마음에 안 들면, 우리 다음에 할까요?”

“네?”

“가을 전시는 아무래도 좀 차분한 느낌으로 가야 되는데, 송 작가님 그림은 워낙 화려하고 패기가 넘쳐서 솔직히 좀 겉도는 느낌도 있어요. 그래서 아예 산뜻하게 내년 봄 전시에 넣으면 어떨까 하고. 그러면 자리 문제도 좀 더 여유롭게 생각해볼 수 있고.”

갑자기 지원의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고 느낀 영진이 저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피하며 우물쭈물 말끝을 흐렸다.

“아…. 그건 좀.”

그래, 그건 곤란하겠지. 너 내년 초에 어디 지방 미술대에 전임으로 가려고 부랴부랴 이력 만드는 거 내가 다 안다고. 소래 미술관 관장이 오늘 아침에 울면서 전화했어. 너 거기에는 120호짜리 보냈다며. 너는 참 실력도 없는 게 양심도 없다. 소품 전시를 주로 하는 미술관에 120이 웬 말이야.

“고민을 좀 더 해보겠습니까? 아직 기한에는 여유가 있어서 빼려면 뺄 수는 있어요.”

“아, 아니에요.”

“그럼 더 이상은 이견이 없으신 걸로 알겠습니다.”

“…네.”

잔뜩 풀이 죽은 영진을 웃으며 배웅한 지원은, 그의 차가 주차장을 떠나자마자 넥타이를 확 풀어헤치며 된소리와 파열음이 조화롭게 섞인 단어들을 거칠게 내뱉었다.

“고생하셨어요, 관장님.”

위로의 눈빛을 보내는 비서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인 지원은, 그대로 차 키를 집어 들고는 관장실 밖으로 나왔다. 속에서 열불이 나서 도저히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나 퇴근합니다.”

“네, 들어가세요.”

더운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보던 지원은 제일 먼저 눈에 띈 카페에 들어가서 가장 큰 사이즈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그리고는 커피가 나오자마자 뚜껑을 열고는 한입 가득 얼음을 들이켰다. 와드득 소리가 나게 얼음을 깨물던 지원은, 잘게 부서진 얼음 조각들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비로소 막혔던 속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어쨌든 이로써 진상은 대충 처리했고…. 그럼 이제 대표님 문제만 남았나.

- 제가 대표님을 좋아합니다.

어젯밤의 그 고백은 지원에게는 거의 재난에 가까운 사고였다. 염마왕의 등장에 위기감을 느낀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승산이 없을 게 뻔한 상태에서 준비되지 않은 고백을 투척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지원은 그 정도로 무모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런데 꽃향기를 맡는 가온의 얼굴을 본 순간, 마치 자백제라도 맞은 것처럼 저절로 입이 열렸다. 웬만해선 당황하는 일이 없는 지원이었지만, 그때만큼은 진심으로 식은땀이 났다.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하지? 기왕 이렇게 된 거 아예 철판을 깔고 덤벼? 그러다 중천에서 영영 쫓겨나면?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아서 바싹 마른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을 때였다.

- 그래. 나도 차 관장 좋아해.

기가 막히게도 가온은 지원의 말이 고백이라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그러나 큰 충격에 휩싸인 지원에게 말간 얼굴로 웃어 보인 가온은, 잠시 후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무심하게 말을 건넸다.

- 이제 슬슬 비가 그치는 것 같은데, 그만 돌아갈까?

장기전을 각오하고 체력을 비축하고 있던 격투기 선수가 1회전 시작과 동시에 허무하게 KO패를 당한 기분이었다. 제대로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게 너무나도 아쉬웠지만, 그보다 더 기가 막혔던 건 단 한 방의 주먹으로 자신을 쓰러뜨린 상대는 제가 왜 나자빠져 있는지 이유조차 알지 못하고 있다는 거였다.

나를 전혀 남자로 안 보고 있었다는 거지. 그러니까 아예 그런 가능성 자체를 떠올리지 않은 거야. 머리를 부여잡으며 소리 없이 괴로워하던 지원은 이 무참한 사태의 전말을 털어놓을 수 있는 단 한 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술 생각이 간절해졌는데, 오늘 같은 날 말려주는 사람 없이 혼자서 술을 마시면 내일 아침에 변사체로 발견될 우려가 있다.

[형. 나 지금 일하는 중인데….]

“서 감독, 술 마시자. 우리 집으로 와.”

[응? 아직 4시도 안 됐는데? 저녁에 봅시다. 일 끝나고 갈게.]

“지금 와. 내가 대낮부터 이런 소릴 하는 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냐?”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부산스레 움직이는 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고스란히 들려왔다. 탁탁 계단을 오르는 걸음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아마도 지원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 도겸이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모양이었다.

[뭐야. 엊그제만 해도 그렇게 신이 났더니, 목소리가 왜 그래요? 갑자기 왜 다 죽어가는 건데? 뭐 사고라도 쳤어요?]

사고…. 쳤지. 그것도 아주 대형으로.

“응.”

[어제 하루 종일 대표님 모시고 다닌 사람이 그새 무슨 사고를…. 아니, 잠깐! 대표님하고 관련된 사고에요?]

“하아…. 그래.”

[뭐? 이 형이 진짜 미쳤나! 설마 고백이라도 한 건 아니죠?]

“너 귀신이다.”

[뭐?!]

수화기 너머의 도겸이 펄쩍 뛰어오르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아, 지원은 그 와중에도 조금 웃었다. 다른 사람한테 고민을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절반은 해결된다는 말은 그저 상담 직종에 종사하는 이들의 밥벌이 수단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처음으로 그 말에 조금은 동의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시당했지. 아주 깨끗하게.”

[아….]

“내가 남자 대 여자로 접근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도 안 하더라. 그저 주인한테 꼬리 흔드는 강아지를 보는 것처럼 나를 아주 귀여워하셨어.”

제 입으로 말하고도 너무 찰떡같은 비유라, 지원은 내심 적지 않은 상처를 받았다. 돌연 입을 꾹 다문 지원에게 어떤 말을 건네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던 건 도겸도 마찬가지였는지, 그 역시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

[으음…, 1시간만 기다려요. 빨리 끝내고 갈게.]

“그래.”

[나 가기 전에 혼자 술 먹고 있지 말고. 알았죠?]

“알았다고.”

고스란히 남아 있는 차가운 커피를 크게 한 모금 들이켜던 지원이 곧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 따뜻하지 않은 건 커피가 아니라고 주장하던 지원이었지만, 얼음이 반쯤 녹아 밍밍해진 커피가 기가 막히게도 꽤 먹을 만했다.

“아, 진짜…. 나 요즘 왜 이러냐. 팔자에도 없이 왜 이렇게 오지랖 부릴 일이 많이 생겨? 아홉수라 그런가.”

전화를 끊고 작업실로 내려가던 도겸이 아직도 건물 앞을 서성이고 있는 젊은 여자를 발견하고는 길게 탄식했다. 냉기가 풀풀 느껴질 정도로 깔끔한 성격이던 지원이 여자한테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것도 못내 충격적이었고, 귀신을 달고 나타난 전직 걸그룹 메인보컬을 떠맡게 된 것도 골치였다.

로아에게 찰싹 달라붙어서 작업실 안으로 들어오던 젊은 여자 귀신은 도겸을 보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달아났는데, 영리하게도 도겸의 사정거리 안으로는 절대 들어오지 않은 채 건물 주변을 맴돌고 있다. 마치 고등학생처럼 보이는 앳된 얼굴이지만, 눈매가 독하고 사나운 걸 보니 여간내기는 아닌 것 같았다. 아예 도망가지 못하는 걸 보면, 뭔가 물건에 의존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미안합니다. 갑자기 급한 전화가 와서.”

“괜찮아요.”

“노래…, 뭐 해 본다고 했죠?”

“요.”

“어려운 노래를 골랐네. 일단 들어봅시다.”

잔뜩 긴장한 얼굴로 여러 번 심호흡을 하던 로아는 전주가 흘러나옴과 동시에 표정이 싹 돌변했다. 반면 지적 사항을 적으려고 필기구를 챙겼던 도겸은, 첫 소절이 끝나기도 전에 가만히 펜을 내려놓았다. 타고나기를 맑고 울림이 좋은 목소리였고, 호흡이나 발성도 제법 훌륭했다. 2년 동안 설거지만 했다더니…. 그러고도 이 정도의 실력을 유지하는 걸 보면, 아마 어떻게든 연습을 하려고 인적이 드문 곳을 꽤나 찾아다녔을 것이다.

로아가 노래를 부르는 4분 동안, 도겸은 끊임없이 혀를 찼다. 여태 묻혀 있었다는 게 너무 아까워. 목소리가 어떻게 이래? 요즘 걸그룹 메인보컬들은 다 이렇게 노래를 잘하나? 이런 친구가 어떻게 안 떴지? 아, 지엔터 대표 딸. 그래, 강PD 심정이 이해가 가네. 내가 다 억울해서 어떻게든 해주게 싶게 만드네.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젓던 도겸이 로아의 손목에 걸린 팔찌에 흘깃 시선을 주었다. 안 그래도 청승맞은 팔자에 굳이 한 숟가락 더 보태는 건 저 물건인 것 같고.

“수고했어요.”

“…감사합니다.”

노래를 마치고 쭈뼛거리며 녹음 부스에서 나온 로아는, 도겸의 눈치를 살피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완전히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노래를 부르기는 했는데, 그의 표정이 영 좋지 않은 것 같아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사실 정말로 도겸에게서 곡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그저 원하는 작곡가를 말해보라기에 반사적으로 도겸이 만든 노래가 튀어나오긴 했지만, 이제는 가요 시장에서 보이지 않는 이름이라 이서가 알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 <고백하는 날>? 서도겸?

묘한 표정을 짓던 이서가 당장 내일 도겸을 만나러 가라고 했을 땐, 꿈을 꾸는 건가 했었다. 강PD님과 함께 일을 하게 된 것만으로도 평생의 운을 다 썼다고 생각했었는데…. 어젯밤에는 도무지 현실감이 느껴지질 않아서 한숨도 잠을 자지 못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잠을 좀 잤어야 했어. 목 상태를 최상으로 만들어서 왔어야 했는데. 이분은 내 노래가 별론가 봐. 잔뜩 기가 죽은 로아가 촉촉하게 땀이 찬 손바닥을 옷자락에 문질렀을 때였다.

“악보 볼 줄 알아요?”

“네. 어릴 때 피아노 쳤었어요.”

“잘됐네요. 나는 작업할 때 가이드 녹음 안 해요. 내 목소리 들어가는 녹음은 절대 안 남기는 주의라. 반주 음원이랑 악보를 같이 줄 테니까 알아서 연습해요. 파일 보내게 전화번호 알려주고. 총 다섯 곡을 해야 된다는데, 그걸 다 한꺼번에 작업할 순 없고. 일단 제작발표회 전에 두 곡만 완성합시다. 연습할 데가 없으면 여기 와서 해요.”

“저한테 곡…, 주시는 거예요?”

고개를 반짝 든 로아가 입술을 달달 떨자 도겸의 표정이 약간 떨떠름하게 변했다. 지금 무슨 생뚱맞은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러기로 했으니까 내 작업실에 들였지.

“나한테 곡 받으려고 여기에 와 있는 거 아니었어요?”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90도가 넘게 허리를 숙이는 로아를 보며 약간 민망한 얼굴을 하던 도겸이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조금 익숙해진 다음에 말을 할까 싶었는데, 아무래도 저 팔찌가 눈에 너무 거슬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미친놈으로 보이더라도 일단 말은 해둬야 할 것 같았다.

“이로아 씨. 그 팔찌, 중요한 물건입니까?”

“네? 아, 네. 돌아가신 엄마한테 받은 마지막 선물이라….”

아이고, 어머니. 대체 어디서 저런 물건을 사다가 딸한테 채우셨습니까. 뭐가 씐 물건인 줄 알고. 저 눈초리 사나운 꼬맹이를 치우면 또 다른 게 달라붙을 텐데.

“그런데 왜 그러시는….”

“안 믿어도 어쩔 수는 없는데, 그 팔찌가 내 눈에는 영 안 좋아 보입니다. 기운 자체도 나쁜 데다 특히 이로아 씨가 이쪽 일 하는 걸 방해하고 있어요. 어지간한 물건이라면 당장 버리라고 하겠지만, 유품이라니 그럴 수는 없고. 속는 셈 치고 일할 땐 뺍시다. 내 작업실에 올 땐 가급적 안 했으면 좋겠고.”

발갛게 상기되었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걸 도겸은 덤덤하게 바라보았다. 일단 나는 할 수 있는 호의를 다 베풀었어. 미친놈 취급을 받는 건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통창 너머로 청담대교가 한눈에 보이는 펜트하우스 거실의 대리석 바닥 위에 고가의 양주와 아이스버킷 따위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아직 해가 지려면 멀었는데도 바닥에 아무렇게나 너부러진 채 병나발을 불고 있는 집주인은 700ml 양주 한 병을 20분 만에 해치웠다. 저거 면세점에서도 400불 넘게 받던데. 저렇게 깡소주처럼 마시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형. 쪽팔린 건 알겠는데. 안주도 없이 마실 거면, 얼음이라도 넣어 마셔요. 그렇게 객기 부리다 내일 얼마나 후회하려고. 나 시체 치우라고 불렀어?”

“너 염마왕 본 적 있어?”

독한 양주를 물처럼 마시고도 여전히 눈빛이 또렷한 지원의 뜬금없는 질문에 도겸이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있죠. 가끔 중천에 와요. 대표님하고 꽤 친한 것 같던데….”

“그래?”

“근데 형은 언제 만났어요?”

“어제. 그 작자 대표님한테 관심 있던데?”

지원의 날 선 목소리에 도겸이 살짝 질린 얼굴을 했다.

“형. 다른 남자들이 다 형하고 취향이 똑같진 않아요. 염마왕하고 중천주를 남자 여자로 구분하는 것도 난 좀 불경스러운 것 같고…. 그런 걸 다 떠나서도 사실 형 취향은 지나치게 독특한 편이야. 대표님 무섭지도 않아? 그 검에 잘못 베이면 바로 지옥 가요. 영원히 못 나와.”

“보통 염마왕이 추노꾼처럼 직접 망자들을 잡으러 다니나?”

도겸의 말을 듣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지원이 별안간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이 형 지금 제정신이긴 한 거지? 못내 의심스러웠지만, 도겸은 일단 그의 질문에 성실히 대답해주었다.

“그러진…, 않죠. 명계에는 추격조가 따로 있어요.”

“흐음. 그러면 그 음흉한 작자가 대표님을 인적이 없는 산골짜기로 불러내서 대체 뭘 하려고 했을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염마왕께서 태백산에 직접 덫을 놓으셨더라고. 도망간 죄인을 잡는다나. 그런데 상식적으로 도망친 죄인이 제 발로 다시 돌아가서 순순히 덫에 걸릴 리가 없잖아? 거기다 가이드는 접근도 못 하게 만들어 놨으니 결국 중천주가 출동할 수밖에 없지.”

“형 얘기를 듣고 보니까 좀 이상하긴 한데…. 그래도 염마왕과 중천주라니. 미래가 없는 관계 아닌가? 대표님은 나중에 천계로 가실 텐데. 무슨 주말부부도 아니고.”

그런가? 내가 대표님한테 눈이 멀어서 과민반응을 보이는 건가. 아니야, 나를 보는 그 눈빛은 분명히 적의로 가득 찬…. 눈매를 갸름하게 접은 지원이 막 입을 열려는데, 갑자기 도어록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 또 불렀어요?”

“아니.”

“그럼 저건 누구야?”

“이런 씨…. 연해수지, 누구긴 누구야.”

한쪽 볼이 벌겋게 부어오른 해수가 얼룩덜룩한 셔츠를 입고 들어오다 두 사람과 눈이 마주치고는 흠칫 놀라며 그대로 멈춰 섰다. 순간 안 그래도 심기가 불편하던 지원이 입꼬리를 확 비틀었다.

“너 뭐야? 왜 남의 집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와? 주거침입으로 잡혀가고 싶어?”

“어? 형. 집에 계셨네요. 이 시간에는 당연히 없을 줄 알았죠.”

“없을 줄 알았으면 들어오지도 말아야지.”

“그게요, 형. 나 옷에 커피를 쏟아서 형한테 옷 한 벌 빌리려고 들어왔어요. 창피해서 지하철을 못 타겠더라고요. 냄새도 너무 나고.”

“집주인한테 허락도 안 받고? 이 새끼 완전히 범죄자네. 주거침입도 모자라 절도도 하냐?”

지원의 원색적인 비난에 해수는 자못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훔치는 거 아니고 빌리는 건데…. 그리고 비밀번호는 형이 그때 알려줬잖아요.”

“그날 하루 내가 너무 늦을 것 같으니까 들어와 있으라는 거였지, 이렇게 계속 네 집 드나들 듯 제멋대로 오라는 건 아니었다고!”

“에이. 알았어요. 이젠 안 그럴 테니까 오늘은 좀 봐줘요. 나 지금 진짜 기분 별로라고요.”

하! 사납게 코웃음을 치며 들고 있던 술병을 바닥에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은 지원이, 해수의 머리를 향해 있는 힘껏 슬리퍼를 집어 던졌다.

“악! 아파요, 형.”

“야, 내 기분은 지금 날아갈 듯 좋은 줄 알아? 이게 진짜 오늘 죽으려고 날을 잡았지, 아주! 불난 집에 기름을 뿌려?”

“형은 왜 기분이 나쁜데요? 무슨 일 있어요?”

해수의 눈이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반짝이자, 식겁한 도겸이 지원의 팔을 툭 쳤다. 그만 입 다뭅시다, 형님. 괜히 저 입 싼 놈 앞에서 실수하지 말고.

“지원이 형 오늘 주식 크게 손해 봤대. 그건 그렇고 너 볼은 왜 그래?”

“아니, 그게 있잖아요. 형들, 내 말 좀 들어봐요. 나 다음 달에 국대 선발전 있는 거 알죠? 곧 합숙 들어가니까 여자 친구한테 이번 주말에 여행 가자고 했거든요.”

“그런데?”

“그런데 빨간 날이라 못 간다는 거예요. 빨간 날이 뭐냐고 물어봐도 대답도 안 하고. 왜 그런 것도 모르냐고 타박만 하잖아요.”

일단 뭐라고 지껄이나 들어나 보려던 지원과 도겸이 동시에 미간을 구겼다. 하지만 얘기를 하며 점점 흥분하기 시작한 해수는 형들의 표정 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가만히 얘기를 듣다 보니까 생리를 말하는 것 같더라고요. 아니, 왜 생리를 생리라고 못 부르고 빨간 날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무슨 질병도 아니고 비속어도 아닌데?”

지원은 아예 상종을 하지 않겠다는 듯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고, 어지간하면 해수와 말을 길게 섞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도겸이 이번만큼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넌 참 섬세함이라고는 발톱의 때만큼도 없구나?”

“나 발 깨끗해, 형.”

“그러니까 말이야. 섬세함이라는 게 아예 없다고.”

도겸의 말에 아랫입술을 비죽이던 해수가 아무도 손대지 않은 안주 접시를 제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래서 내가 그랬죠. 나 이제 합숙 들어가면 당분간 얼굴 보기 어려운데, 하루만 참았다가 월요일에 하면 안 되냐고. 그랬더니 바로 따귀가 날아오는 거예요. 그리고는 커피도 뿌리고…. 아니, 뜨거운 거 마시고 있었으면 어쩔 뻔했어? 내가 무슨 죽을죄를 진 것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할 일이에요? 싸대기 때렸으면 인간적으로 커피는 안 뿌려야 되는 거 아니냐고요.”

“썩을. 저런 새끼도 연애를 하는데….”

이를 악문 채 씹어 먹듯 중얼거리던 지원이 해수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지나치게 나긋한 목소리에 위험을 감지한 도겸이 재빠르게 몸을 뒤로 물렸지만, 포도를 먹는 데 열중하던 해수는 전혀 위기감을 느끼지 못했다. 우와, 샤인머스캣을 이렇게 쌓아 놓고 먹다니. 역시 지원이 형!

“해수야.”

“네?”

“내가 지금 기분이 몹시 더러운데, 네가 그것도 모르고 계속 앞에서 까불다가 나한테 처맞았어. 그래서 쌍코피가 터졌지. 그러면 코피가 난 거야, 네가 피를 싼 거야?”

“어…. 피가 난 거죠.”

이리저리 눈망울을 굴리던 해수가 순진한 얼굴로 대답하자, 지원의 눈이 살벌하게 번뜩였다.

“그래? 그럼 여자가 생리를 참을 수 있으면, 너도 코피를 참을 수 있겠네?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인지 우리 오늘 한번 실험을 해볼까?”

책상 위에 두루마리를 길게 펼쳐 놓은 가온은 현재 인계 어디에서도 사용되지 않는 문자로 적힌 서신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하율이 인계에 덫을 놓기 전에 미리 보냈다던 서신이었는데, 가온의 손에 들어온 것은 그녀가 이미 현장에 다녀온 후였다.

- 죄송합니다, 대표님. 명계에서 여러 통의 서신이 한꺼번에 왔는데, 대표님께 직접 드리라는 전언이 없었고 딱히 표식도 되어 있지 않아 바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내용은 길지 않았다. 하율의 말대로 도주한 죄인을 추포하기 위해 명계와 인계를 잇는 통로에 결계를 치겠다는 게 다였다. 다시 한번 천천히 서신을 읽어 내려가던 가온의 미간에 미세한 주름이 잡혔다.

이렇게 중요한 내용의 서신을 이번에는 왜 이렇게 가벼이 보냈을까. 평소에는 별것 아닌 안부도 가온에게 즉시 전달하라며 넌더리가 날 정도로 급사를 닦달하던 하율이었다. 그랬던 그가 이런 중차대한 사항을 통보하면서도 느긋하게 굴었다는 게 가온은 선뜻 이해가 가질 않았다.

비록 가온과 하율은 둘 다 크게 절차에 얽매이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사실 이번 일처럼 상대의 통치 권역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발생하는 경우에는 형식적으로나마 미리 허락을 구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여태까지 하율은 단 한 번도 그 절차를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처음에 태백에서 하율을 만났을 때는 그러려니 했었지만, 돌아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뭔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일단 도망자를 잡는 데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을 것 같은 방법부터가 그랬고, 그런 자질구레한 일에 염마왕이 직접 나섰다는 것도 어딘지 석연치가 않았다.

염마왕이 요즘 들어 이해할 수 없는 언행을 가끔 하는데…. 진짜로 심심해서 그러나? 명계에 틀어박혀 있는 게 너무 지루하다는 말을 자주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저 기분에 따라 행동하는 이는 아닌데. 항상 빙글빙글 웃는 낯이라 그렇게 계산적으로 보이진 않지만 하율은 착장 하나에도 의미를 두는 남자였다. 아무런 의도 없이 움직일 리가 없다.

“대표님, 기침하셨습니까.”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가온이 문밖에서 희주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미련 없이 두루마리를 둘둘 말았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 어차피 이미 지나간 일이고, 가온은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은 오래 고민하지 않는다.

“일어났어.”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그래.”

희주가 들고 들어온 혈압계를 힐끔 바라보던 가온은 자리에 앉은 채로 얌전히 한쪽 팔을 내주었다. 어차피 임기를 마칠 때까지의 수명을 보장받았는데 이게 무슨 요란인가 하는 생각은 아예 뇌리에서 지운 지 꽤 되었다. 희주가 노심초사하며 끊임없이 잔소리를 하는 걸 듣고 있느니, 그냥 해달라는 대로 해주는 게 편하다. 오랜 경험에서 체득한 진리였다.

“대표님, 식사는 언제 준비할까요?”

“지금 자네랑 같이 본채로 건너가지. 아, 오늘 사업부 쪽 일정이 있었던 것 같은데….”

“네, 오전 10시에 부사장이 들기로 했습니다. 사업보고서는 8시까지 비서실장이 들고 올 겁니다.”

걸음을 서두른 희주가 가온보다 한발 빨리 식당에 들어서며 황급히 눈짓하자, 한참 전부터 준비 완료 상태였던 일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미처 자신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완벽하게 차려진 식탁을 쭉 둘러보던 가온이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밥과 국을 제외하고도 먹음직스러운 반찬이 정갈하게 담긴 접시가 스무 개 가까이 되었다.

아침부터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희주가 그 오랜 시간 가온의 수발을 들고도 그녀의 취향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은, 따지고 보면 본인 탓이다. 이런 상을 차려내려면 새벽부터 얼마나 고생을 해야 하는지 뻔히 알고 있는 가온은 일단 식탁 위에 올라온 반찬은 무조건 한 번씩이라도 다 맛을 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니 특별히 입에 맞는 음식이 있어도 여러 번 손을 대지 못한다.

권 여사도 이제 환갑이 넘었으니 슬슬 은퇴를 준비할 때인가. 다음 사람이 오면 식사는 간단하게 준비하라고 처음부터 단단히 일러두어야겠어. 여느 때처럼 차례대로 하나씩 반찬을 집어 먹던 가온이 마치 보름달처럼 동그랗게 부쳐 낸 장떡을 보고는 잠깐 멈칫했다. 한입에 쏙 넣을 만한 크기의 앙증맞은 장떡 위에는 각각 다섯 알의 잣이 꽃잎 모양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일일이…. 내가 이 한 접시를 다 먹는 것도 아닌데, 적당히 서너 장만 부치고 말 것이지. 새삼 희주의 시간과 노력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가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식사를 이어 나갔다.

- 수원댁. 정성은 고마우나 식사 준비에 이렇게까지 힘을 들일 필요는 없네.

- 네? 천주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혹시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시나요?

-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밥과 국이 있으니 반찬은 두세 가지만 올려도…

- 제 음식이…, 맛이 없으세요?

- …아니야. 다 맛있었어. 나는 그저 수원댁이 너무 고생하는 것 같기에…. 내가 공연한 소리를 했군. 하던 대로 하게.

그날 이후로 희주는 음식에 훨씬 더 정성을 들였다. 수고를 덜어주려다 본의 아니게 역효과를 낸 가온은 식사에 대해서는 일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그때 그냥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 먹었어야 했는데. 그러면 권 여사가 당장은 서운해 하더라도 수십 년 동안 훨씬 고생을 덜 했을 텐데. 하지만 당시에는 가온도 새로 들인 사람에게 여러 말을 하는 게 어려웠었다.

부드럽고 쫀득한 장떡을 먹으며, 가온은 아주 간만에 조금 후회스러웠다. 가온은 원래 아삭아삭한 식감을 좋아하고 특히 부침개 종류는 입천장이 아플 정도로 바삭한 게 취향인데, 처음에 솔직하지 못했던 죄로 무려 40년이 넘도록 집에서는 바삭한 전을 먹지 못하고 있다. 이제 와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희주가 은퇴할 때까지는 그저 주는 대로 먹는 수밖에 없다.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과 동시에 엊그제 먹었던 감자전이 생각났다. 한입 베어 물 때마다 바삭 소리가 나던 감자전의 식감이 떠오르자, 가온은 불현듯 희주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날 식당에서도 그랬었다.

- 권 여사한테 미안하네. 입이 좀 깔깔해서 아침을 제대로 못 먹고 나왔는데, 밖에서 이렇게 맛있게 먹는 걸 보면 속이 상하겠어.

- 식당 음식이 더 맛있게 느껴지는 건 당연합니다. 식당은 손님이 없으면 유지될 수 없으니까 입맛을 사로잡는 감칠맛을 내기 위해 조미료를 사용할 수밖에 없거든요. 아마도 권 여사님은 천연 재료만 쓰실 테니 자극적인 맛이 덜한 거고요.

- 그래서 권 여사가 내가 밖에서 밥 먹는 걸 안 좋아해.

- 네. 그러니까 평소에는 몸에 좋은 집밥 열심히 드시고, 군것질은 저랑 이렇게 가끔씩만 하세요. 이 정도는 언제든 해드리겠습니다.

어린 친구가 참 다정하기도 하지. 가온은 동행하는 내내 보기 좋은 미소를 짓고 있던 지원의 단정한 얼굴을 떠올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이전에는 그의 생김새를 찬찬히 살필 새가 없었는데, 런던 출장을 기점으로 마주 앉아 밥을 먹을 일이 많아서 저절로 눈에 익었다. 지원이 굉장히 아름다운 이목구비를 가졌다는 건, 런던에서 마지막 저녁을 먹으며 처음 알았다.

여인들에게 인기가 많겠구나. 눈에 띄는 근사한 외모에, 성품도 온화하고 세심한 데다, 어린애답지 않게 속이 깊기까지 하니…. 옆에 있으면 왠지 상쾌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그런 친구를 요즘 아이들 말로 훈남이라고 하던가?

“대표님, 비서실장 들었습니다.”

“지금 사랑채에 있나?”

“네.”

들고 있던 따끈한 찻잔을 내려놓은 가온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온은 그저 명목상 대표일 뿐 실제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지만, 한 기업의 최종 결정권자이니만큼 최소한의 흐름 정도는 파악을 하고 있어야 한다.

“브랜든 사장의 귀국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달 말입니다.”

“그래? 그럼 그전에 북유럽 쪽 계약 건 일체를 다시 확인해 봐. 은밀하고 꼼꼼하게. 미주 쪽 임원들의 사유재산 변동 현황도 같이.”

“네. 알겠습니다, 대표님.”

그러다 보니 이렇게 결론만 보고된 서류를 잠깐 보는 것만으로도 수상한 구석이 눈에 띌 때가 있다. 유능하면서도 정직한 이를 찾는 게 이렇게 어려워. 짧게 한숨을 내쉰 가온은 복잡한 전문 용어와 단위가 일정치 않은 숫자가 가득 적힌 보고서를 다시금 천천히 정독했다.

그렇게 고르고 골라서 뽑은 사람인데. 은근슬쩍 장난질을 치는 줄은 알았지만, 그것이 한 대륙 전체 매출액의 단위를 바꿀 정도면 곤란하지.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행여 사업체가 없어지더라도 어떻게든 중천을 꾸려나가겠지만, 나한테는 다음 중천주가 적어도 경제적인 어려움은 겪지 않도록 튼튼한 기반을 마련해줄 의무가 있어. 그저 하늘의 뜻이라며 아무런 대가 없이 사람을 부릴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니.

가온이 심각한 얼굴로 집중하기 시작하기 시작하자, 고요해진 사랑채에는 종이 넘기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기분 좋은 미소를 짓던 미청년에 대한 잔상 따위는 이미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다.

“으으…. 속 쓰려. 어? 여기가…, 어디야?”

천근만근인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린 도겸이 또렷하지 않은 시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힘겹게 기억을 되살린 끝에 지원의 집이라는 것까지는 인식했지만, 거실에서 이 방에 들어오기까지의 경위는 조금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양주 석 잔에 나가떨어진 해수를 게스트룸에 던져 놓고 둘이서 밤이 깊도록 들이부었던 것까지는 어렴풋이 생각이 났다.

- 이제부터 어쩔 거예요?

- 어쩌긴 뭘 어째. 달리 방법이 있나. 그냥 진득하게 있는 듯 없는 듯 붙어 있어야지.

- 대체 언제까지?

그 질문에는 끝내 대답하지 않은 지원이 술 한 잔을 그대로 털어 넣던 것이 어제의 마지막 기억이다.

“물….”

숨만 쉬어도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지만, 목이 타들어가는 듯한 갈증을 참을 수가 없었던 도겸은 오만상을 찌푸린 채 방문을 열었다. 아까부터 뭔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문을 열자 식별이 가능한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래도 예의상 먹는 시늉이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이런 뻔뻔한 새끼를 봤나. 예의? 소금죽 끓여다가 남의 입에 처넣는 놈은 예의가 바른 거냐?”

“물론 조금 짜게 되긴 했지만…, 그래도 제가 새벽부터 정성껏 끓인 건데….”

해수의 볼멘소리에 안 그래도 사납던 지원의 눈빛이 더욱 살벌해졌다.

“정성? 네 비천한 요리 실력을 가지고 무식하게 시간만 쏟아부은 게 정성이야? 사람이 먹을 만한 음식을 내놓는 게 정성이지! 조금 짜게 돼? 너 미각을 상실한 거 아니냐? 아니, 그딴 건 내 알 바 아니고. 너 이거 깨끗하게 치워 놓고 가라, 응? 퇴근하고 왔을 때 쌀알 한 톨이라도 바닥에 굴러다니면 내가 너 어떻게 할지 모른다, 알았어?!”

“….”

“대답 안 해?!”

“…네.”

불퉁한 얼굴을 하고 있는 해수에게 매섭게 눈을 부라리던 지원은 냉수 한 컵을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빠른 걸음으로 주방에서 걸어 나왔다. 우와, 저 형 보기보다 말술이네. 나보다 적어도 세 배는 더 마신 것 같은데 어떻게 저렇게 멀쩡하지? 혼자 서 있을 기운도 없어서 벽에 기대고 있던 도겸이 말쑥한 차림의 지원을 보고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독하다, 진짜.

“출근해요?”

“그래.”

“컨디션 괜찮아? 나는 지금 가만히 있어도 눈앞이 빙빙 도는데.”

“안 좋아. 그래도 외부에 공식적인 일정이 있는 게 아닌 이상, 퇴근은 멋대로 해도 출근은 제시간에 하는 게 철칙이야.”

잔뜩 인상을 구긴 채 현관 쪽으로 걸어가던 지원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도겸의 얼굴을 흘깃 살펴보더니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상태 안 좋으면 더 자다 가라. 괜히 서둘러서 나가다가 길바닥에 쓰러지지 말고.”

“네.”

신발장에 붙어 있는 전면 거울 앞에서 매무새를 가다듬은 지원은 표정을 풀지 않은 채 그대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벽을 짚고 천천히 주방으로 들어가던 도겸은 흡사 폭탄이라도 맞은 듯한 정신없는 광경을 목격하고는 흠칫 놀라 멈춰 섰다.

“혀엉.”

한껏 풀이 죽은 얼굴로 입술을 비죽이고 있던 해수가 도겸을 보고 반색하며 달려왔지만, 주방 구석구석을 빠르게 스캔한 도겸은 도저히 해수에게 좋은 얼굴을 해줄 수가 없었다.

“너 남의 집에서 이게 웬 행패야?”

“행패라니! 지원이 형이 평소에는 아침을 안 먹는다길래, 술 마신 다음 날도 빈속으로 가면 안 좋을 거 같아서 일부러 끓인 거라고. 그랬는데 사람 성의도 모르고…. 정말 너무해.”

“죽 한 그릇 끓이는데 냄비를 여섯 개나 썼어?”

“어쩌다 보니까…. 자꾸 눌어붙더라고. 많이 남았는데 형도 좀 먹을래? 솔직히 내가 먹어 봐도 좀 짜긴 해.”

“하아. 한 그릇 줘 봐.”

색깔만 하얄 뿐, 탄내가 풀풀 나는 죽을 조심스럽게 한 숟가락 입에 넣던 도겸은, 미처 맛을 음미하기도 전에 싱크대로 달려가 그대로 뱉어냈다. 어지간하면 해수가 그토록 원하던 먹는 시늉이라도 해주려고 단단히 각오를 다진 상태였지만, 바닷물을 한 열 배쯤 농축시켜 만든 듯한 무시무시한 짠맛을 얄팍한 동료애로 커버할 수는 없었다.

“너 미친 거 아니야? 소금을 얼마나 들이부었길래 이런 맛이 나?”

“레시피 보고 그대로 만들었어! 되게 유명한 블로거가 분명히 소금 세 스푼 넣으라고 했다고!”

죽 한 그릇 끓이는데 소금을 세 스푼이나? 싫어하는 사람 엿 먹일 때 사용하는 레시피 아니야? 못내 미심쩍은 눈빛으로 해수가 내미는 핸드폰 화면을 찬찬히 살펴보던 도겸이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찼다.

“야. 이건 소문자 t잖아. 테이블스푼이 아니라 티스푼이라고. 티스푼 몰라, 티스푼? 차 마실 때 쓰는 거 있잖아, 작은 거.”

“…그래?”

“아니, 그래도 세 스푼 정도로 이런 맛이 날 수는 없는데. 너 한 스푼을 어떻게 펐어?”

도겸의 추궁에 그제야 자신이 뭔가 실수했다고 생각한 해수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소금 한 스푼을 수북하게 펐다. 일반적인 한 스푼의 족히 두 배가 넘는 양이었다.

“어휴, 내가 너 땜에 정말 미치겠다. 꼴에 계량스푼은 또 어디서 찾아서…. 해수야, 요리할 때 쓰는 스푼은 싹 깎아서 하나를 말하는 거야. 이렇게 삽으로 모래 푸는 것처럼 수북하게 담는 게 아니라고. 기술 가정 시간에 안 배웠어? 수업시간에 대체 뭘 했어?”

“운동하는 애들 학교에서 뭐 하는지 몰라? 잤어, 뭐.”

쯧쯧, 이래서 엘리트 체육이 문제야. 어릴 때부터 운동만 시키니까 애들이 이렇게 기본 상식도 없잖아. 아니, 그래도 이 정도면 이건 연해수 개인의 문제라고 봐야지. 이런 놈이랑 한 부류로 싸잡을 순 없어. 한심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도겸의 눈빛에 해수가 발칵 성을 냈다.

“뭐야, 올림픽에서 메달 따는 게 쉬운 일인 줄 알아? 사람이 어떻게 뭐든지 다 잘해? 선택과 집중, 안 들어봤어?”

“주제에 또 어디서 주워들은 건 많아가지고. 그만 까불고 빨리 치우기나 해! 지원이 형 진짜로 열 받기 전에.”

당장이라도 뒤집어지려는 속에 생수를 때려 부으며 간신히 오전 시간을 버틴 지원이 점심시간이 시작됨과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급한 결재는 대충 처리했으니 이제 해장국이나 한 그릇 먹고 들어가서 한숨 자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익숙한 벨소리가 울렸다.

[제니스 보안실]

“아아….”

오늘은 또 뭐야. 나 지금 귀신이나 쫓아다닐 수 있는 상태가 아닌데. 잠시 액정을 빤히 쳐다보던 지원이 살짝 짜증스럽게 혀를 차며 전화를 받았다.

“네, 차지원입니다.”

[차 관장님, 보안실장입니다.]

뜻밖에 현호의 목소리가 들리자, 뭉근한 두통 때문에 계속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지원이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보안실장이 직접 전화를 했다는 건 가온과 관련된 용건일 가능성이 높다.

“네. 말씀하십시오.”

[대표님께서 오늘 오후에 급하게 가평에 가시게 되었는데, 동행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림을 봐야 하는 일이라서요.]

보안실장의 정중한 강요에 지원의 한쪽 입꼬리가 크게 비틀렸다. 명령이나 다름없다는 걸 양쪽 모두 뻔히 알고 있는데 마치 제게 선택권이 있는 것인 양 질문처럼 던지는 현호의 화법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당분간 본사에 발을 끊겠다고 결심한 게 바로 오늘 아침인데 속도 없이 좋아하는 제 마음도 너무 구차했다.

그러나 복잡한 심경과는 달리 답변은 간결했다. 애초에 다른 답이 나올 수가 없다.

“알겠습니다.”

[대표님께서 지금 긴한 보고를 받는 중이시라 보고가 끝나고 식사를 하시면 2시쯤 출발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 그런데 제가 어제 과음을 해서 운전은 어렵습니다. 지금 차도 없고요.”

[아, 그건 염려하지 마십시오. 가는 길이니 중간에 픽업할 수 있도록 임 과장에게 일러두겠습니다. 도착 10분 전에 전화 드리라고 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지원이 천장을 올려다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오만 생각이 들었지만, 오래 고민하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자서 눈 밑이 퀭한 데다, 아직 속에 뭘 채워 넣지 못한 탓에 숨을 쉴 때마다 알코올 기운이 올라온다. 2시까지 최소한의 사람 꼴을 갖추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일단 전투적으로 해장국 한 그릇을 해치운 지원이, 바로 집으로 달려가 뜨거운 물에 입욕제를 잔뜩 풀어 넣고 신속하게 땀을 뺐다. 얼굴에 팩도 하고, 공들여 머리를 말리고, 커프스버튼 하나까지 신중하게 고르느라 정신없이 바빴지만, 덕분에 평소와 그리 다를 바가 없는 여유롭고 우아한 모습으로 가온을 만날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응, 요즘 자주 보네.”

“네.”

“그런데 차 관장. 컨디션이 별로 안 좋은가?”

순간 지원의 그린 듯한 미소가 살짝 굳었다가 곧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아닙니다.”

그래? 오늘따라 조금 초췌해 보이는 것 같은데. 잠시 의아한 얼굴을 하던 가온은 지원의 부정에 바로 그에게서 눈길을 거뒀다. 그리고는 지원에게 자신이 보고 있던 작은 책자 하나를 보여주며 물었다.

“운월 민노학이라고 알아?”

“네. 조선 후기에 활동하던 화가입니다. 풍경화 중에서도 산수화를 주로 그렸고, 특히 금강산도라는 제목의 그림을 여러 장 그렸습니다.”

“실물을 본 적 있어?”

“네. 시립미술관 소장품이어서요. 오늘 가는 곳이 운월과 관련이 있는 곳입니까?”

“응. 모창건설 대표가 아주 유명한 동양화 수집가인데, 별장에 운월의 금강산도를 두 점 가지고 있다더군.”

순간 지원의 눈썹이 위로 크게 들렸다. 그걸 어떻게 구했지? 개인이, 그것도 두 점이나.

“진품을요?”

“나는 모르지. 나한테는 진위 여부가 중요한 건 아니고. 아무튼 모 회장의 집안에 최근에 중환자가 자꾸 생겨서 여기저기 알아보니 그 두 점 중 하나가 귀신에 씌었다고 했다더군.”

반듯하게 닦인 산길을 올라 절로 열리는 육중한 대문을 지나니 아주 잘 정돈된 넓은 정원이 한눈에 펼쳐졌다. 그리고 그 정원의 끝에는 단순한 별장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규모가 큰 대저택이 위풍당당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최고급 자재를 써서 고상하게 잘 지은 집이었지만, 귀신이 붙었다는 말이 사실인지 애석하게도 겉에서만 봐도 기운이 썩 좋은 집은 아니었다. 가온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저택을 크게 휘둘러보고는 대번에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있긴 하네.”

“로젠발로프 성에 있던 망자와 비슷한 종류일까요?”

“그자와는 결이 좀 다르긴 한데…. 아무튼 그 그림부터 봐야겠어.”

저택 안으로 발을 들이니 풍채가 좋은 백발노인이 휠체어에 앉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가온을 보자마자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천주님. 이렇게 앉아서 맞이하는 걸 용서하십시오. 다리가 말썽이라 마중을 나가지 못했습니다.”

“되었네. 아무튼 오랜만이군, 모 회장.”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어도 주름살 하나 늘지 않은 가온을 보며, 모 회장은 손에 꼭 쥐고 있던 손수건으로 조용히 식은땀을 훔쳤다.

가온과의 첫 만남은 모창건설이 처음으로 맡았던 대규모 아파트 신축 현장에서 이루어졌다.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작은 회사를 막 중견 기업으로 키우기 시작한 패기 있는 20대 청년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자잘한 사고에 공사가 계속 지연되자 잔뜩 몸이 단 상태였다.

부지를 매입할 때부터 이상하게 일이 꼬인다 싶긴 했었다. 바닥을 고르는 것도 쉽지 않더니, 건물이 막 올라가기 시작할 무렵 지반의 일부가 무너져서 인부 한 명이 크게 다쳤다. 자칫 일이 커져서 정부의 눈 밖에 나면 공사 중간에 밀려날 수도 있는 시대였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했다.

- 조용하던 땅에 시끄러운 소리가 끊이질 않으니 지신께서 노하신 것입니다. 달래려면 제물이 필요합니다.

수소문 끝에 불러온 무당은 현장을 슥 둘러보자마자 대뜸 천만 원을 불렀다.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공사이긴 했지만, 당시로서는 선뜻 손이 나가지 않는 거금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을 수는 없었기에, 결국 지신의 심기를 달래는 제사를 지내기로 했다.

벌건 대낮에 서울 한복판에서 굿판을 벌일 수는 없으니 시간은 한밤중으로 정했다. 달도 없는 깊은 밤. 무당과 그녀의 제자, 그리고 모 회장 이렇게 세 명만이 조용히 울타리를 치우고 현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때 가온을 처음 보았다.

- 아이고, 천주님.

세련된 양장 차림의 젊은 여성이 현장에 발을 들인 순간, 콧대가 하늘을 찌르던 늙은 무당이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그대로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치렁치렁한 치맛자락에 먼지 한 톨 묻는 것도 예민하게 굴던 그녀가 먼지가 풀풀 날리던 흙바닥에 엎드려 이마를 조아리는 모습은 모 회장을 큰 충격에 빠뜨렸다.

- 어, 어떻게 이런 사특한 땅에 귀한 발걸음을 하셨습니까. 이런 잡다한 일들은 저희 같은 것들이 할 것인데….

- 그리 아등바등 노잣돈 챙겨 봐야 한 푼도 들고 갈 수 없네.

- …네?

- 내가 누군지도 알아보는 사람이 이승에서 다 못 씻을 업을 쌓고 있기에 하는 말이야. 곳간에 쌓아둔 것으로 목숨 값도 치를 수 있을 것 같나?

그 당시 모 회장은 가온의 아리송한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지만, 대번에 낯빛이 흑색이 된 무당은 머리를 들지도 못한 채 손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그런 무당에게서 무심한 시선을 거둔 가온이 고개를 돌려 모 회장을 빤히 바라보았다. 가온의 정체를 알지 못했던 모 회장은 갓 스물이나 되었을까 싶은 여성과의 기싸움에서 밀리는 게 몹시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나 결국 시선을 내리깔 수밖에 없었다.

- 저 나무를 베지 않으면 절대로 그보다 높은 건물은 올릴 수 없을 것이다.

-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가온의 손짓에 따라 시선을 돌리던 모 회장이 부지 중앙에 떡 버티고 있는 거송을 보고는 어이가 없는 얼굴을 했다. 500년이 넘도록 이 근방을 지켰다는 소나무였고 수형이 너무나도 훌륭해서 어떻게든 살려두고 싶은 나무였다. 또한 끝까지 땅을 팔지 않겠다고 버티던 어르신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도 저 나무를 잘 지키겠다고 굳게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나무를 건드리지 않고 공사를 진행하는 건 굉장히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무를 치우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옮겼다가 다시 심는 방법을 잠깐 생각해 보기는 했었지만, 잔뿌리가 잘리면 바로 죽을 수도 있다는 말에 더 이상 거론조차 하지 않았었다. 솔직히 그 순간에는 초면인 가온의 말이 선뜻 믿어지지도 않았다.

-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두고 보면 알 테고.

- 그럴 리가 없습니다. 복을 주는 나무라고 했다고요. 아주 상서로운 영혼이 깃들었다고….

- 그저 그리 믿고 싶었던 거겠지. 산 사람에게 복이 되는 귀신은 없다. 행여 잠깐 이롭더라도 그건 다 제 필요에 의한 행동의 부수적인 결과인 것이지, 인간에게 유익을 주려는 의지를 가지고 하는 행동이 아니야. 그럴 수 있는 힘도 없고.

- 하지만…. 마을의 수호신이었다던데….

- 기운이 세니 다른 잡귀가 접근하는 걸 막아주긴 했겠지. 그간 제삿밥 얻어먹는 재미에 딱히 패악을 부리지 않은 것일 뿐이고. 하지만 저보다 더 높은 것이 제 기운을 누르는 걸 가만히 지켜보지는 않을 것이다.

모 회장의 말을 딱 자른 가온이 냉정한 최후통첩을 내리고는 그대로 돌아섰다.

- 어찌 됐건 저 나무를 포함한 이 땅은 그대의 사유재산이니 없애는 걸 원치 않으면 그냥 가겠다.

모 회장이 결단을 내린 것은 정확하게 보름이 지난 후였다. 가온의 말이 쉽게 믿어지지도 않았고, 나무도 너무 아까워서 도저히 베고 싶지가 않았지만, 고작 2주 사이에 여섯 명이나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굿값 천만 원을 고스란히 토해낸 무당은 모 회장의 간절한 부탁에도 절대 현장에 발을 들이지 않았고, 무조건 천주님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 비켜서게. 혹시 무슨 소리가 들려도 절대로 대꾸하지 말고.

성인 남자가 양팔로도 감싸지 못할 정도로 기둥의 굵기가 어마어마했던 소나무는, 가온이 물로 만든 검을 한 번 휘두르자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며 반으로 잘렸다. 가온의 지시대로 토막을 내어 깨끗하게 불사른 이후로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던 사고가 거짓말처럼 딱 끊겼다.

가온이 제니스 컴퍼니의 전신인 중건상회의 주인이라는 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 끝에 간신히 알아낼 수 있었다. 당연히 모 회장의 입장에서는 큰 도움을 받았으니 입을 싹 씻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모 회장이 정성껏 보낸 선물들은 번번이 되돌아왔고, 급기야 마지막으로 보냈던 현찰을 담은 상자가 돌아온 건 은근한 경고 멘트와 함께였다.

- 악행을 일삼는 영혼을 마땅히 가야 할 곳으로 보냈을 뿐, 그대에게 도움이 되고자 한 것이 아니다. 일개 인간이 함부로 값을 치를 수 있는 일이 아니거니와, 그조차도 생전에는 할 수 없다.

계속 접근하면 죽이겠다는 건가? 겁을 먹은 모 회장은 결국 보답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중건상회가 ㈜중건이 되고 다시 제니스 컴퍼니가 되는 동안 줄곧 정체를 감추고 있던 가온은, 무서운 속도로 성장한 제니스 컴퍼니가 대한민국 20대 기업 안에 이름을 올리고 나서야 대외 활동을 시작했다. 그동안 멀리서 죽 그녀의 근황을 살피기는 했지만, 이렇게 다시 만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말이 많은 그림을 들였다면서?”

“그러게나 말입니다. 일단 한번 보시지요. 그런데 데리고 오신 청년은….”

“우리 직원. 갤러리 화담의 관장이야.”

“차지원입니다.”

지원이 정중한 묵례를 건네자 수심이 가득하던 모 회장의 얼굴에 잠깐 화색이 돌았다.

“아, 화담. 얘기 들었어요. 젊은 사람이 아주 감각이 좋다고. 이번에 김예찬이도 한 점 내줬다던데. 몸이 멀쩡하면 꼭 가서 보고 싶었어요. 아주 기대되는 전시라고 하더군.”

“감사합니다.”

짧게 대답한 지원이 입술 안쪽을 꽉 깨물었다. 새삼 그 아름다운 전시에 먹물을 뿌린 송영진에 대한 증오가 새록새록 솟았지만, 내색할 수 없다는 게 너무나도 원통했다.

“이쪽입니다.”

모 회장이 안내하는 방으로 들어서자 절로 입이 떡 벌어졌다. 커다란 방 안에는 고려시대 불화부터 시작해서 각종 진귀한 그림들이 수십 점이나 걸려 있었는데, 어느 미술관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온도와 습도가 완벽하게 조절되고 있었다. 방의 주인이 얼마나 그림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커다래진 눈으로 그림을 하나씩 살펴보는 지원과 달리, 가온은 방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한군데에 시선을 고정했다. 정면에 나란히 걸린 두 점의 그림은 크기부터 생김새까지 모든 면이 흡사했는데, 장총을 든 호랑이 사냥꾼 한 명이 당장이라도 신선이 나올 것처럼 산세가 유려한 깊은 산속을 누비고 다니는 그림이었다.

“저 그림이군.”

“네, 천주님. 왼쪽 그림은 제가 30년 넘게 가지고 있었고, 오른쪽 그림은 4년 전쯤에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집안에 자꾸 병환이 돌더니, 제 다리도 결국 이 지경이 되었고…. 사람을 불러 물어보니 저 중 하나에 귀신이 들었다고 하더군요.”

“그래. 내 눈에도 그리 뵈는군.”

“다들 그림 가까이에 가지도 못했습니다. 아예 이 방에 들어오지도 못한 자들이 태반이었고요. 그래서 이런 일로 천주님께 폐를 끼치는 게 너무나 송구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이 연락을 드렸습니다.”

“잘했네. 이런 일을 하려고 인계에 적을 두고 있는 것이니 응당 해야지.”

가온의 무심한 대꾸에 눈에 띄게 안도하는 기색을 보인 모 회장이 조금 시간을 두고는 대단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정확히 어떤 그림입니까?”

“왼쪽 그림이군.”

“여태 이런 일이 없었는데, 왜 갑자기….”

“오른쪽 그림을 들인 것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게지.”

“어떻게…, 귀신만 없앨 수 있겠습니까?”

내내 공손하던 모 회장의 눈이 순간 탐욕으로 번뜩였다. 저런. 한 발자국 떨어져서 두 사람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지원이 낮게 혀를 찼다. 집안에 병환이 도는 걸 막는 것보다 그림이 더 중했던 모양이군. 아마도 다른 무당들은 당장 그림을 불태워야 한다고 했겠지. 그게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니까. 어떻게든 그림을 살려보고 싶어서 기어이 대표님을 여기까지 부른 거야.

“모 회장이 원하는 방식으로는 어려울 것 같은데. 알다시피 나는 수기를 쓰는 사람이라, 그림이 젖게 될 거야. 동양화는 특히 습기에 약한 걸로 아는데.”

믿었던 가온조차도 고개를 젓자, 기대에 가득 찼던 주름진 눈가에 감추지 못한 실망이 가득 번졌다. 안쓰럽기까지 한 노인의 욕심을 슬그머니 외면하던 지원이 불현듯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가만, 이게 뭐야?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던 지원이 눈썹을 확 찡그렸다.

“회장님. 이 오른쪽 그림은 위작입니다.”

“뭐, 뭐라고? 분명히 감정서도 받았는데?”

“그 감정서를 누가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조금만 그림을 볼 줄 아는 사람이면 다들 바로 알 겁니다. 그림을 너무 아끼셨네요. 외부에 한두 번만 내보이셨으면 금세 알게 되셨을 텐데요.”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아니, 전문 감정사도 아니면서 이렇게 보기만 해도 위작인 걸 안다고?”

“이런 건 감정을 하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여기 사냥꾼의 총이 보이십니까? 왼쪽 그림의 사냥꾼이 들고 있는 건 17세기부터 조선에서 호랑이 사냥꾼들이 사용하기 시작한 화승총이죠. 하지만 오른쪽 그림의 사냥꾼은 레버액션 소총을 들고 있습니다. 제 눈에는 윈체스터 1894 모델로 보이고, 처음 개발되었을 때가 19세기 말이니…. 아마도 운월 선생은 이렇게 생긴 총을 생전에 단 한 번도 보신 적이 없을 겁니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진실을 전달하던 지원이 눈꼬리를 살짝 갸름하게 접었다. 이 그림을 진품으로 알고 샀다면 못해도 수십억을 지불했을 텐데, 모 회장은 꽤나 당황한 것 같긴 했지만 그리 큰 충격을 받은 기색은 아니었다. 지원의 입에서 아주 작게 헛바람이 했다.

알고도 사셨든가…, 아니면 직접 만드셨군.

지원의 시선을 피하는 모 회장과 달리 주의 깊게 설명을 듣고 있던 가온은 크게 동의하는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위작이 도는 것이 운월의 입장에서는 영 불쾌했던 모양이야.”

“이, 이 그림에 씐 귀신이 민노학이란 말씀이십니까?”

“얼굴을 보이지 않고 돌아서 있으니 확실하진 않지만, 차 관장의 말을 부정하진 않는 걸 보면 아마도.”

“그럼 위작을 없애면 괜찮아질까요?”

“그러기엔 이미 늦었네. 운월이 이미 악령이 되었으니. 한 번 흑화한 영혼은 그 존재만으로도 인계에 해를 끼치지. 본인이 의도하든, 그렇지 아니하든.”

모 회장의 눈빛이 마구 흔들리는 걸 가만히 지켜보던 가온이 가볍게 헛웃음을 지었다. 이 지경이 되어서도 그림이 아까운 게지. 인간이란 고희를 넘기고도 여전히 이렇게 어리고 어리석구나.

“이번에도 결정을 하려면 보름 정도는 필요한가?”

“그, 그것이…. 천주님, 현재 시가로 100억도 넘는 그림입니다. 아니, 물론 그런 것보다도 제가 오래 아끼던 그림이고….”

“행여 그 돈이 아깝다고 시장에 내놓을 생각은 말게. 자네가 그림의 상태를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으니. 사족을 덧붙이면 자네 자신을 위해서도 이로운 선택이 아니야. 타인에게 악행을 저지르면 언젠가는 꼭 그만큼의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게.”

“…네.”

공손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모 회장은 지금 당장 그림을 처리해달라는 말은 끝내 하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문 모 회장을 뒤로 한 채, 가온과 지원은 조용히 저택을 빠져나왔다.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는 고가의 자연석으로 꾸며 놓은 화단이 양옆으로 죽 이어져 있었고, 그곳에는 꽃잎이 아주 풍성한 백모란이 은은한 향기를 풍기며 아름답고 소담하게 피어 있었다.

“모란의 향이 이렇게 좋은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 이건 유독 향이 좋네.”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꽃이라 부자들이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가볍게 비아냥거리는 지원의 말에 가온이 빙긋이 웃었다. 글쎄, 별로 가진 것이 없던 댕기머리 소녀의 눈에도 참으로 고왔던 것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은데.

“꽃은 그저 꽃일 뿐이지. 인간들이 무어라 이름을 붙이든.”

왠지 아련해진 목소리에 지원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가온의 말간 눈에 실린 감정이 그리움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 지원은 조금 화가 났다. 대체 왜 내 눈에는 이렇게 선명하게 보이는 거냐고. 차라리 안 보이면 모를까 훤히 보이는 걸 못 본 척할 수도 없잖아. 알면서도 결코 좁힐 수 없는 세월의 간극에 지원은 새삼 부아가 치밀었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는 감정이 오늘따라 그저 답답하기만 했다.

[오늘 새벽 5시경, 가평군 XX면에 위치한 모창건설 모현석 회장의 별장에서 큰 화재가 나 3시간 만인 오전 8시 12분에 진압이 완료되었습니다. 다행히 인근 산으로 불길이 번지지는 않았지만, 건물 한 채가 전소되었고 별장에서 요양 중이던 모 회장이 연기에 질식해 숨졌습니다. 이 화재로 인해 모 회장이 소장 중이던 회화 작품 수십 점이 안타깝게도 모두 재로 변했는데요, 그중에는 문화재급의 그림도 여러 점 있어 일각에서는 소실된 재산 가치가 수천억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모 회장이 4년 전에 구입한 운월 민노학의 금강산도는 도록조차 남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미술계의 탄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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