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2. 안개비 내리는 밤 (3/18)

02. 안개비 내리는 밤

“서 감독. 진짜 안 해줄 거야? 내가 이렇게까지 부탁하는데?”

“….”

“너 대체 언제까지 혼자 방구석에 처박혀서 펭귄 궁둥이나 들여다보고 있을 건데?”

내내 심드렁한 얼굴로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도겸이 못마땅한 기색을 여실히 드러내며 눈꼬리를 갸름하게 접었다. 같은 말을 해도 꼭…. 방송물 먹는 거 티 내나, 워딩이 왜 이렇게 선정적이야?

“누나.”

“뭐.”

“…하아. 아니야.”

삐딱한 시선으로 이서를 노려보던 도겸은 그녀가 뻔뻔하게 받아치자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돌렸다. 아, 피곤해. 간만에 에너지를 과다하게 분출하는 사람과 마주하고 있으려니 며칠 잠잠하던 편두통이 새삼 존재감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내키지 않는 일은 죽어도 하지 않는 도겸에게도 이서의 간청을 냉정하게 거절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드라마 OST는 무리지. 그것도 여주인공이 직접 부르는 메인 테마라니. 한참을 망설이던 도겸이 결국 고개를 가로저었다. 작업 자체의 난이도는 차치하더라도, 좁은 작업실 안에서 낯선 이와 몇 날 며칠 부대낄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신경이 곤두선다.

“누나. 내가 진짜 진지하게 고민해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어. 나 4년 넘게 다큐 쪽 일만 하느라 드라마 거의 안 봤어. 가요는 아예 안 들었고…. 감이 완전히 떨어졌는데 드라마처럼 트렌드에 민감한 장르에 어떻게 손을 대.”

“그래도 넌 마음먹으면 할 수 있잖아. 네 음악은 유행 타는 스타일도 아니고. 요즘도 방송에 간간이 나오더만. 오면서 확인해 보니까 노래 하나는 아직까지도 차트에 있던데? 64위였나….”

순간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던 긴 손가락이 동작을 딱 멈췄다. 결코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이서가 말한 ‘노래 하나’는 깊은 강바닥의 모래처럼 얌전히 가라앉아 있던 도겸의 기억을 마구잡이로 헤집었다. 잔잔하던 강은 순식간에 흙탕물이 되었고, 무방비 상태에서 5년 전으로 내동댕이쳐진 도겸은 그저 속절없이 모래알처럼 부유할 수밖에 없었다.

- 처음부터 다시. 짝사랑하는 여자 목소리가 왜 이렇게 씩씩해? 전쟁 나가? 남자를 아주 때려눕히겠어.

- 하하하. 미안. 그런데 네 얼굴을 보고 있으니까 자꾸 웃음이 나. 어떡하지?

- 그만 웃고 집중해. 벌써 몇 시간째야? 너 계속 정신 못 차리면 진짜 눈물 쏙 빠지게 혼난다.

- 우웅, 작곡가님 너무 무서워요.

이십 대 초반, 가장 풋풋하고 아름다운 시기에 애정과 열정을 함께 갈아 넣어 만들었던 노래는 불의의 사고라는 사연을 덧입고 예상보다 훨씬 더 유명세를 탔다. 굳이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사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피하기 위해, 도겸은 반년 가까이 바깥출입을 하지 못했었다.

잊으려고 애쓰는 것들은 오히려 더 또렷하게 남는다더니. 여전히 숨소리 하나까지 생생한 기억을 가라앉히기 위해 도겸은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세월이 그저 무용하게만 흐른 것은 아니라, 감정은 아직 무뎌지지 않았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그건…. 어쩌다 보니까 우연히 시기를 잘 타서…. 아무튼 나는 못해. 이제는 곡에 가사 붙이는 것도 어색하고, 비전문가 데리고 적당히 타협하기도 싫어. 개인적으로 화제성 때문에 배우한테 노래시키는 거, 나 아주 별로야.”

“이로아 비전문가 아니야. 네가 아무리 가요를 안 들었어도 <세라엘>은 알지? 거기 메인보컬이었어. 노래 잘해. 이쪽 바닥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애라 눈치도 빠르고. 시키는 대로 열심히 잘할 거야.”

“누나….”

“사람 하나 살린다 생각하고 좀 도와줘. 로아한테는 이게 평생의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어. 이번에 확 뜨지 못하면 이제 겨우 스물다섯인 애가 이 바닥에서 영영 사라질 수도 있다고.”

사뭇 진지해진 이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도겸이 조금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 바닥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사람이 한둘인가? 재능이 있다면 빛날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도태되는 게 당연한 거지.

“그걸 왜 나한테…. 고작 내 곡 하나로 배우가 뜨고 말고 할 수도 없을뿐더러, 천하의 강이서PD가 연출하는 드라마에 주인공으로 캐스팅될 정도면 어지간히 자리 잡은 거 아닌가? 뭐가 그렇게 비장해?”

“이번에야 내가 연출하는 드라마고 마침 가수 역할이라 제작사하고 싸워가면서 억지로 밀어 넣었지만…. 나도 남의 돈으로 작업하는 처지에 매번 안고 갈 수도 없고, 다른 데 꽂아 줄 능력은 더더욱 없단 말이야.”

“누나가 왜 그렇게까지 그 친구 뒤를 봐줘야 하는데? 항상 칼같이 오디션 보는 사람이. 무슨 약점이라도 잡혔어?”

도겸의 질문에 미간을 확 구긴 이서가 험한 욕설 몇 마디를 거칠게 내뱉었다. 그러게. 내가 그 더러운 꼴을 몰랐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이렇게 팔자에도 없는 정의의 사도 흉내 따위는 안 내는 건데. 생전 가지도 않던 호텔 라운지에, 하필이면 그날 약속이 잡힐 건 뭐람. 사람 구차해지게.

“내가 어지간하면 사연팔이는 안 하려고 했는데….”

“그럼 하지 마. 흥미 없어.”

이미 알고 있는 구질구질한 개인사만 해도 머릿속이 포화 상태야. 거기다 쓸데없는 가십까지 추가하고 싶진 않다고. 진심으로 질색한 도겸이 팔까지 내저으며 말을 잘랐지만, 인생지사 마이웨이인 이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짧게 할게. 너 지엔터는 알지? 로아가 있던 <세라엘> 멤버 중에 지엔터 대표 딸이 있어. 지해미라고.”

“아, 진짜…. 주변인 정보부터 시작한다고? 짧게 한다며!”

“제법 예쁘장하긴 해. 암튼 걔가 연예인 하고 싶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쳐서 지엔터에서 꽤 신경 써서 꾸린 팀에 꽂아 넣긴 했는데, 포지션이 애매했어. 춤도 노래도 다 그럭저럭이었고, 얼굴로 센터에 세우기에는 로아가 더 예뻤거든. 트레이닝 독하게 시켜서 어떻게 무대에 올리기까지는 했는데 특기로 내세울 게 없으니까 인기는 별로 없었어.”

부잣집 외동딸로 태어나 평생 떠받들리며 살아온 해미는 뭐든 자신보다 잘하는 로아를 처음부터 눈엣가시로 여기며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고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래도 보는 눈은 있어서 그룹의 존속을 위해 로아를 내보낼 수는 없다는 사실 정도는 본인도 알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사석에선 서로 말도 안 섞으면서 그룹 활동을 3년 좀 넘게 했는데, 공주님이 드디어 연예인 놀이에 싫증이 나신 거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들고, 소속사에서 그렇게 작정하고 밀었는데 크게 뜨지도 못했고, 빽으로 들어왔다고 욕도 많이 먹고 그랬으니까. 그래서 아프네, 어쩌네 하면서 병원 들락날락하다가 툭하면 해외로 나가버리고 그랬어.”

하루가 멀다 하고 신인들이 쏟아져 나오는 연예계에서 몇 달씩 노출이 없는 그룹은 당연히 도태되기 마련이다. 회사에서는 오너 딸에게 미운털이 박힌 로아에게 아무런 개인 스케줄을 잡아주지 않았고, 어쩌다 들어오는 일거리조차도 제대로 서포트해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이미 정해진 스케줄조차 알려주지 않아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펑크를 내게 만든 적도 있다고 했다.

“그런 시시콜콜한 뒷얘기를 누나가 어떻게 다 알아? 누나처럼 소문에 둔감한 사람이?”

“자세히 알아보려고 품 많이 들였어. 아역 출신이기도 하고 분위기도 좋아서 눈여겨봤던 마스크였는데, 한동안 통 안 보이길래 이상하게 생각하던 참이었거든. 그런데 제작사랑 미팅하러 갔다가 그 회사 임원들이 로아 얘기하는 걸 우연히 들었지. 쥐뿔도 없는 게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스폰도 거절했다고 비아냥거리더라고.”

“스물다섯짜리를 두고?”

“그때는 스물셋이었어.”

도겸의 수려한 얼굴이 대번에 험하게 일그러졌다. 지난 5년 동안 인간의 추악함에는 어지간히 단련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순간 비위가 확 상할 정도로 극렬한 혐오감이 일었다. 내가 이래서 그 동네에 정을 붙일 수가 없어.

“그날 밤에 잠이 안 왔어. 그것보다 더 지저분한 사연이 넘쳐나는 게 연예계고, 이전에는 어떤 기구한 스토리를 들어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얘는 어떻게든 내가 꼭 한 번은 기회를 주겠다고 다짐했지.”

이서는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아는 기자들을 모조리 동원해서 소문을 긁어모았다. 그렇게 여기저기서 수집한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그림이 되었을 때, 이서의 표정도 딱 지금의 도겸의 얼굴과 같았었다. 어린 여자애 하나를 매장시키기 위해 대형 기획사가 사용한 방법이 얼마나 잔인하고 치졸했는지,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낯이 뜨거워질 지경이었다.

“그래도 당장은 뭐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띄엄띄엄 소식만 들었어. 소속사에서 활동은 막으면서 풀어주지도 않고, 정산 받은 지 얼마 안 돼서 위약금 낼 돈은 없고, 이미 얼굴은 팔렸으니 아무 일이나 할 수도 없고…. 식당 주방에서 모자 눌러 쓰고 설거지하면서 2년을 버티다가 지난달에 겨우 지엔터랑 계약이 끝났어. 때마침 내 스케줄하고도 잘 맞아떨어져서 같이 일해보자고 했지.”

“…그건 잘했네.”

“한 시간을 울더라고.”

“….”

삶의 고단함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이의 사연은 언제 들어도 마음이 좋질 않다. 냉랭하던 도겸의 얼굴이 살짝 누그러지는 걸 기민하게 알아차린 이서가 조금 더 간절한 목소리를 냈다.

“기왕 안 하던 짓 시작한 거, 최대한 잘 되게 해주고 싶어. 이번 기회에 사람들한테 눈도장 확실하게 찍고, 지엔터가 장난칠 수 없는 빵빵한 기획사에서 데려갔으면 좋겠어. 다행히 대본은 기가 막히게 잘 빠졌고, 남주도 연기 잘하는 애가 하기로 했거든. 적어도 중타 이상은 칠 거야. 이제 OST만 잘 나오면 돼.”

“좋아, 사정은 알겠어. 사람 하나 살리겠다고 이런 자질구레한 일도 직접 발로 뛰는 연출자의 자세도 대단히 훌륭해. 그런데 그걸 왜 하필 다큐 음악감독한테 맡기냐고. 발표만 하면 바로 차트인 할 수 있는 유명한 작곡가들이 널렸는데.”

“로아가 네가 해줬으면 좋겠대.”

“…뭐?”

“되든 안 되든 일단 원하는 작곡가를 말해보라니까, <고백하는 날> 만드신 분하고 작업해보고 싶대. 일이 잘되려고 그랬는지 마침 내가 아는 분이더라고. 나 이런 말 낯간지러워서 잘 안 하는데, 뭔가 운명 같지 않아?”

왜 하필 또 그 노래…. 이서의 너스레에 뭔가 대꾸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던 도겸이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입을 꾹 다문 도겸이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치열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초조하게 지켜보던 이서는, 그의 입에서 탄식 같은 한숨이 흘러나오자 서서히 입꼬리를 올렸다.

“도겸아….”

“일단 한 번 데려와, 목소리 좀 들어보게. 그전에 대본부터 보내고.”

“진짜 고마워, 서 감독! 당장 내일이라도 데려올게. 비는 시간 알려줘.”

“오후에는 계속 작업실에 있을 거야. 미리 전화만 해.”

“응! 넌 정말 복 받을 거야. 나중에 꼭 천당 가라.”

평소보다 열 배쯤 호들갑스러워진 이서를 보며 도겸이 소리 없이 픽 웃었다. 글쎄, 내가 천계에 가려면 앞으로 여섯 번이나 환생을 해야 하는데, 그 여섯 번을 다 착하게 잘 살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

약속 시간에 늦었다며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는 이서를 웃으며 바라보던 도겸은,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던 그녀가 한순간 몹시 부자연스럽게 제 시선을 피하자 눈을 가늘게 떴다. 뭐지, 이 불길한 느낌은?

“또 뭔데.”

“참, 내가 얘기했지? 극 중에서 로아가 부를 노래는 총 다섯 곡이야. 그럼 내일 보자! 대본은 바로 보낼게.”

“뭐?! 아니, 잠깐만. 아까는 메인테마 한 곡이라고…. 이봐요, 강PD님! 당장 거기 안 서?!”

못내 성의 없는 손길로 전시 도록 시안을 뒤적이던 지원이 10분을 채 넘기지 못하고 다시금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사진첩의 비밀 폴더를 열어 런던에서 찍은 단 한 장의 인물 사진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 대표님. 여기 배경이 제법 그럴싸한데 사진 한 장 찍어드릴까요?

- 아니, 됐어. 내가 여기저기에 흔적을 남기면 지우는 사람들이 번거로워져.

여상한 말투로 딱 잘라 거절한 가온은 잠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 하긴…, 이제 딱히 그럴 필요는 없나.

왠지 듣는 사람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드는 말투였다. 차마 더 말을 붙일 수가 없어서 가온의 눈치만 보던 지원은, 계속 풍경을 찍는 척하다가 그녀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서 간신히 측면 사진 한 장을 건질 수 있었다. 급하게 찍는 바람에 살짝 초점이 흔들렸지만 다시 찍을 엄두는 내지 못했다.

“의외로 깜찍한 걸 좋아하시고…. 이것 봐.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취향이 다 있다니까.”

일주일 동안 마르고 닳도록 들여다본 사진 속의 가온은 아기자기한 물건들이 예쁘게 진열된 기념품 숍 앞에 서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며칠 동안 세심하게 그녀를 보살폈던 지원의 눈에는 기분이 좋은 상태라는 게 확연히 보였다. 매사에 대체로 무심한 가온의 시선을 붙잡았던 건 런던아이와 빨간 이층버스가 그려진 앙증맞은 티포트였다.

- 그게 마음에 드십니까.

- 응, 귀엽네.

- 하나 사 드릴까요?

- …응?

바로 지갑을 꺼내는 지원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눈만 깜빡이던 가온이,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내저었다.

- 아니야. 내가 쓸 일은 없을 것 같아. 누군가가 정성스럽게 만든 물건인데 예쁘게 잘 사용할 사람한테 가야지.

물론 본인이 직접 차를 내려 마실 일은 없겠지만, 마음에 들면 그냥 장식으로 놓고 봐도 될 텐데. 사람이 가끔은 기분을 내느라 쓸모없는 물건을 사기도 하고, 그러다 후회하기도 하고, 뭐 그러면서 사는 거 아닌가. 일말의 아쉬움도 없는 얼굴로 덤덤하게 돌아서던 가온의 모습이 지원의 마음에 오래 남았다.

비행기를 타고 오는 내내, 지원은 잠들어 있을 때도 전혀 흐트러짐이 없는 가온의 단정한 얼굴에 다양한 감정이 담기는 걸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그런 바람은, 과연 내가 이 사람을 욕심내도 되는 건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과 끊임없는 전투를 벌였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안 되는 이유는 수도 없었다. 일단 살아온 세월의 간극이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득했고, 가온의 손에 들린 책임과 사명은 평범한 인간의 상식으로는 감히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위대하고 존엄했다.

하지만 사사로운 감정을 접어야 할 수만 가지의 이유는, 원초적이고도 강렬한 하나의 욕망 앞에서 무력하게 힘을 잃었다. 나도 무작정 들이댈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걸 모르지 않아. 그래도 이미 좋아져 버린 걸 어떡하냐고. 아무리 딴짓을 하려고 노력해도 불쑥불쑥 생각이 나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신경질적인 손길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던 지원은 간단한 일정 몇 개만 적힌 캘린더를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물론 그런다고 없던 스케줄이 갑자기 생길 리는 만무했다.

이제 정말 슬슬 실물이 너무 보고 싶은데…. 가이드 회의는 다음 주 목요일이고, 심리상담은 그다음 주. 하아, 요즘은 왜 말썽부리는 망자 하나가 없지? 당최 본사에 갈 핑계가 없잖아. 수당 계산이 이상한 것 같다고 따지는 건 너무 진상인가? 그래, 아무리 급해도 쪼잔한 이미지가 생기는 건 곤란해. 그냥 심심해서 들렀다고 하면 사람들이 미친놈이라고 생각하겠지.

짜증스럽게 혀를 차며 목덜미를 주무르던 지원은 불현듯 인기척을 느끼고는 문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하이힐 또각거리는 소리가 나는 걸 보니까 김수빈 씨 같은데. 할 말이 있으면 노크를 할 것이지 왜 안 들어오고 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거야? 안 그래도 머릿속이 복잡한데 사람 신경 쓰이게.

“들어오세요.”

“네? 아…, 네.”

지원이 목소리를 높이자 문밖에서 못내 당황스러운 대꾸가 들리더니 곧이어 아주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그리고는 창백한 낯빛을 한 수빈이 쭈뼛거리며 관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심하게 요동치는 수빈의 눈빛을 확인한 지원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스토커 기질이 다분했던 전 애인 퇴치 사건 이후로 반년간 지원과 눈도 마주치지 않던 수빈이었다. 그랬던 그녀가 제 발로 찾아온 걸 보면 어지간한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무슨 일입니까.”

“저기요…, 관장님.”

“얘기하세요.”

“하아…, 그게…. 한 30분 전에 웬 아주머니가 주차장으로 들어오셨는데….”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수빈이 말끝을 흐리자,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지원이 대번에 눈썹을 들어 올리며 빨리 말을 마치라 재촉했다. 안 그래도 겁에 질린 사람에게 너그럽지 못한 처사라는 건 자각하고 있었지만, 태생적으로 보유량이 넉넉하지 않은 인내심을 한군데에 몰빵하고 있는 처지라 여기저기 나눌 여력은 없었다.

“그런데?”

“허공에 대고 계속 말씀을 하세요.”

“혼자서요?”

“네. 막 큰소리를 내기도 하고…. 얼핏 들어 보니까 어딜 가야 한다고 누구를 설득하는 것 같았는데…. 아! 중천으로 가야 한다고 했어요.”

살짝 지루한 표정으로 비스듬히 턱을 괴고 있던 지원이 눈을 조금 크게 뜨며 몸을 바로 세웠다. 중천 얘기를 했다면…, 가이드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는 정신머리 없는 귀신들이 참 많아. 감각이 모두 사라진 망자라도 상급 가이드 근처에 오면 오한이 난다던데. 최소한의 생존 본능도 없는 건가. 아, 이미 죽었으니 그런 게 있을 수가 없나?

“어느 주차장입니까.”

“VIP 주차장이요. 관장님 차 세워두신 곳 근처였어요.”

“알겠습니다. 내가 확인해 볼 테니까 가서 일 보세요.”

눈에 띄게 안심하는 수빈을 내보낸 지원이 일단 주차장이 내려다보이는 쪽 창문의 블라인드를 올렸다. 갤러리 건물 뒤편에 있는 VIP 주차장은 고가의 작품 구입을 위해 미리 약속을 잡고 방문하는 고객에게만 개방하는 곳이라, 지원의 차를 제외하고는 텅 비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드나드는 사람이 거의 없는 주차장에 오늘처럼 인구 밀도가 높은 건 갤러리 개관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람 하나에 망자가 셋…. 아이고, 일반 가이드가 무슨 배짱이실까. 딱 봐도 험하게 세상 뜬 귀신들 같은데 반격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말로 설득이 안 되면 빨리 손을 떼야지.”

초췌한 얼굴로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중년 여성을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차던 지원이 신중한 눈빛으로 망자들의 얼굴을 하나씩 뜯어보았다. 사망한 이후에도 악행을 일삼는 망자 특유의 뒤틀린 인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얼굴이었다. 그나마 그리기는 쉽겠네.

“가이드야 사명감에 불타서 그랬다 치고. 너희는 여기가 어디라고 떼로 몰려오냐, 응? 겁도 없이. 다른 망자들은 내가 갤러리 안에 있을 땐 담벼락 근처에도 못 오던데.”

수첩을 꺼내 빠르게 망자들의 얼굴을 스케치한 지원이 비상계단으로 나가는 문을 열었다. 순간 첨예하게 대치하던 가이드와 망자들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홱 돌렸다. 지원이 지금까지 상대하던 이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걸 본능적으로 감지한 망자들은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도주로를 모색하기 시작했고, 그들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한계에 이를 때까지 기운을 써 가며 아홉 블록을 쫓아온 소화는 허탈함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모처럼 성공 수당이 높은 망자들을 발견했는데…. 이제 거의 다 되었는데…. 하필이면 여기서 상급 가이드를 만날 건 뭐람. 속상한 마음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 안녕하세요.”

“저를 아십니까?”

절로 터져 나오는 한숨을 참지 못한 소화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한민국에 세 명밖에 없는 상급을 못 알아볼 수는 없지. 손 하나 안 대고도 망자를 한순간에 중천으로 보낼 수 있는 능력자라던데. 젊은 사람이 저렇게 비싸 보이는 옷을 입은 걸 보면 부모 복도 많은 것 같고. 세상은 정말 너무 불공평해.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절망감을 유심히 살피던 지원은 꽁지가 빠져라 달아나는 망자들을 향해 무심한 시선을 던졌다. 뭐, 이미 그려둔 그림을 태우기만 하면 되니 이건 급한 일이 아니고. 그래, 이승의 마지막 자유를 마음껏 즐기도록 해. 그리 길지 않을 테니.

“선생님. 가이드 맞으시죠?”

“네. 임소화예요.”

“차지원입니다. 임 선생님, 저자들을 어디서부터 쫓아오셨습니까.”

“세강병원에서부터….”

예상을 한참 벗어나는 대답에 지원의 눈이 조금 커졌다. 세강병원에서 여기까지 걸어왔으면…, 최단 거리로 왔어도 1시간 반. 맨발에 슬리퍼 차림인 그녀를 순식간에 훑어본 지원이 속으로 가만히 혀를 찼다.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딸을 돌보는 가이드가 있다더니. 그게 이분이신 모양이군. 어쩐지.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었는데, 병원비에 한 푼이라도 더 보태려고 무리라는 걸 알면서도 쫓아왔구나. 전후 사정을 대강 짐작한 지원은 동정하는 표정을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해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고생이 많으셨네요. 제가 그자들의 얼굴을 그려뒀으니까 이제 임 선생님이 태우기만 하시면 됩니다. 망자들에게 원칙은 고지하셨죠? 라이터를 빌려드릴까요?”

“네? 아니…. 그건 가이드 님이 하신 일인데 어떻게 그런….”

“아니죠. 임 선생님이 열심히 추격하신 덕분에 제 눈에 띈 거니까요. 받으세요. 제 손으로 태우면 제 실적으로 기록에 남을 텐데, 저 남의 수고를 가로채는 그런 양아치 아닙니다.”

“그래도….”

지원의 너스레에 얼굴이 조금 환해지면서도 소화는 선뜻 그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성실한 사람이네. 사망한 지 5년이 넘은 망자 셋을 처리하면 적어도 보름 치 입원비는 해결될 텐데.

“정 마음이 불편하시면 나중에 따님이 쾌차한 다음에 저한테 커피나 한잔 사 주세요.”

“…!”

“저 기억력 좋으니까 떼먹으시면 안 됩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고맙습니다.”

먹먹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대꾸한 소화가 주춤거리며 초상화를 받아들자 지원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나도 다 속셈이 있어서 하는 짓이니까 그렇게 감동하실 필요는 없고.

“한참 걸으셨을 텐데 많이 더우시죠? 잠깐 들어가셔서 시원한 차 한 잔 드시고 가세요.”

극구 사양하는 소화에게 기어이 냉차 한 잔을 대접한 지원은, 그녀가 돌아가자마자 기대에 찬 얼굴로 책상 앞에 앉았다. 작년에 박재권을 중천으로 보냈을 때 본사에서 내 신상을 털고 직접 찾아오기까지 걸린 시간이 1시간 20분 정도였지. 이번에는 얼마나 걸릴까. 팔짱을 낀 채 책상 위에 올려놓은 휴대폰만 뚫어져라 바라보던 지원은, 마침내 고대하던 발신자가 뜨자 입꼬리를 크게 올리며 씩 웃었다.

“네, 차지원입니다.”

[안녕하세요, 차지원 관장님. 제니스 보안실의 안이준 대리입니다. 15분 전에 임소화 가이드 님이 중천으로 세 명의 망자를 에스코트하셨는데, 그 과정에서 관장님의 영력이 간섭한 정황이 발견되어서요.]

“그래요? 조금 전에 가이드 한 분이 망자들을 상대하시는 걸 목격하긴 했지만, 제가 딱히 뭘 거든 건 아닌데…. 제가 본사로 가서 부간록을 확인할까요?”

[그래주실 수 있나요?]

그래주실 수 있다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48층. 올라갑니다.]

쇼핑백 여덟 개를 양손에 나눠 들고 살짝 버겁게 검색대를 통과한 지원은 약간 고전한 끝에 지문 인식에도 성공했다. 원래 손에 뭘 들고 다니는 걸 질색하는 데다 여기저기 퍼주는 걸 즐기는 성격도 아니었기에, 한꺼번에 커피 서른두 잔을 구입한 건 난생처음이었다.

여자한테 커피 한 잔 먹이려고 별짓을 다 한다, 내가 진짜. 헛웃음을 지으며 보안실이 있는 48층에 도착한 지원은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그럭저럭 사교적인 미소를 만들어냈다. 타인의 이목을 크게 신경 쓰는 편은 아니었지만, 직장 상사를 좋아하게 된 이상 평판을 아예 무시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어, 차 관장님. 웬 커피를 이렇게 많이 사 오셨어요?”

“오다가 커피 한잔 마시려고 카페에 들어갔는데 향이 너무 좋더라고요. 혹시 가이드분들도 계시면 모자라지 않을까 싶어서 넉넉하게 사 왔습니다. 따뜻한 것도 있고 시원한 것도 있으니까 취향에 맞게 골라 드세요.”

“우와, 감사합니다. 쿠키도 있네요? 여기 쿠키 되게 비싸던데.”

기왕 돈 쓰는 거 제대로 생색이 나야 되니까. 먹이를 주는 이의 시커먼 속내를 조금도 짐작하지 못한 이준은 주섬주섬 쿠키를 챙기며 살가운 눈웃음을 건넸다. 그동안은 서로 교류를 나눌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마침 출출하던 차에 등장한 간식이 지원에 대한 호감도를 수직 상승시켰다. 되게 까칠한 줄 알았는데 보기보다 좋은 사람이었네. 사실 이준은 지원과 마주칠 때면 그가 착용한 명품 시계며 구두에 내심 기가 죽기도 했었는데, 오늘은 모든 게 그저 멋스럽게만 보였다.

“중천에는 별일 없습니까?”

“네, 모처럼 조용하네요. 그래서 오늘은 대표님도 오전에만 잠깐 중천에 들르셨다가 쭉 서고에 계세요.”

“…그래요?”

지원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는 걸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이준은 미리 꺼내두었던 부간록 세 권을 책상 위에 펼쳤다. 출생일시를 시작으로 중천에서 판정을 받는 순간까지 개인의 모든 행적이 낱낱이 기록되는 부간록은, 단 한 글자도 임의로 지우거나 추가할 수 없는 신성한 자료다. 따라서 열람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이는 극소수에 불과하고, 보안실 밖으로 반출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불가능하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서고의 내부를 힐끔 살핀 지원이 아무도 모르게 한쪽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그러니까 지금 저 안에 있단 말이지. 중천에는 또 무슨 핑계를 만들어서 올라가야 하나 싶었는데, 생각보다 일이 술술 잘 풀리네?

“아까 전화로 말씀드렸던 망자들입니다. 오늘 오후 4시 25분에 임소화 님이 중천으로 보내셨어요. 원래 강제 에스코트 이력은 거의 없으신 분인데…. 사망한 지 5년이나 된 망자를, 그것도 한꺼번에 3명이나 처리하신 게 좀 이상해서 부간록을 확인해보니까 모두 불길에 휩싸여서 중천으로 왔다고 쓰여 있더라고요. 현재 수도권에서 망자를 처리할 때 화력을 쓰시는 분은 관장님뿐이거든요.”

이준의 말을 대충 흘려들으며 서고 쪽만 응시하던 지원이 부간록 마지막 페이지에 그려진 망자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이 건은 그분이 에스코트하신 게 맞습니다. 제가 우연히 현장을 목격하고 초상화를 그리긴 했는데, 제가 직접 망자에게 원칙을 고지한 것도 아니고 해서 바로 그분께 넘겨드렸거든요.”

“그러면 두 분의 공동 작업으로 처리하지 않아도 될까요?”

“그럼요. 저는 한 것도 없습니다. 고작 그 정도로 공동 작업을 했다고 하면, 땀 흘리며 추격하신 분께 너무 죄송하죠.”

“임소화 님 단독으로 처리하면 저희는 편한데…. 관장님이 번거롭게 여기까지 나오셨는데 어쩌죠? 이럴 줄 알았으면 제가 그냥 전화로 좀 더 자세히 설명을 드릴 걸 그랬네요.”

못내 안타까워하는 이준에게 지원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건 안 되지. 내가 일주일 내내 노리고 노려서 만든 기회인데.

“괜찮습니다. 마침 근처에 볼일도 있었고….”

“어? 지원이 형!”

이쯤에서 이준과의 대화를 마무리하고 서고로 가려던 지원은, 멀리서 대단히 해맑고도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미간을 조금 구겼다. 가볍게 무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애석하게도 도저히 못 들은 척을 할 수가 없는 데시벨이었다. 치미는 짜증을 애써 누르며 뒤를 돌아보자 함박웃음을 지은 해수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달려오고 있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아…, 저 자식은 왜 매번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서 훼방이지? 전생에 내가 저놈한테 크게 죄지은 게 있나.

“형, 어쩐 일이세요? 상담은 아직 멀었잖아요. 무슨 큰 사건이라도 터졌어요?”

“아니. 안 대리님이 뭘 좀 확인할 게 있다고 하셔서.”

“그게 뭔데요?”

대체 넌 그게 왜 궁금한데? 내가 네 애인이냐? 왜 이렇게 내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많아? 지원은 미소를 유지하기 위해 어금니를 꽉 물었다. 여느 때라면 사납게 눈을 치켜뜨며 쌀쌀맞게 쏘아붙였겠지만, 지금은 호인 코스프레 중이라 성질대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얘기하자면 길어. 그러는 넌 어쩐 일인데?”

“그냥 심심해서 왔어요.”

“….”

“이 커피 형이 사 오신 거라면서요? 저도 한 잔 마셔도 되죠?”

지원이 들고 있던 커피를 가져가려고 불쑥 손을 내밀던 해수는, 지원에게 찰싹 소리가 나게 손등을 얻어맞고는 못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아, 왜요? 형 지금 저 차별하시는 거예요? 먹는 걸로 사람 차별하는 게 얼마나 치사한 건지 알아요?”

“이건 내 거야. 잔뜩 사 왔으니까 다른 거 마셔.”

“형은 차가운 커피 안 마시잖아요.”

정곡을 찌르는 지적에 지원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하여간 이건 눈치는 더럽게도 없는 게 눈썰미는 좋아가지고. 남의 커피 취향까지 기억할 정도면 분위기 파악도 좀 해라. 내가 왜 마시지도 않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신줏단지 모시듯 들고 있겠냐, 응? 이건 임자가 따로 있다고.

“가끔 마실 때도 있어. 그게 오늘이고.”

“그럼 그건 저 주시고 형이 다른 거 드세요. 왠지 그게 맛있어 보인단 말이에요.”

“기분 탓이야. 다 똑같아.”

“아닌데? 때깔이 다른데요? 그게 더 비싼 거 아니에요?”

허. 짐승인가. 커피 맛도 잘 모르는 게 촉은 또 왜 이렇게 좋아? 아메리카노 줘봤자 어차피 설탕 들이부어서 마실 거면서. 속으로 조용히 혀를 찬 지원이 재빨리 바닐라라테 한 잔을 챙겨서 해수의 입에 반강제로 빨대를 물렸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직원들이 두 사람의 설전을 그저 장난으로만 보는 눈치였지만, 실랑이가 길어지면 돈은 돈대로 쓰고 이미지만 나빠질 우려가 있다.

“나 오늘은 단 거 별로 안 당기는데.”

적당히 해라, 새끼야. 이거 한 잔 들고 들어오려고 나 오늘 커피숍에서 40만 원 넘게 긁었거든? 입매를 비튼 지원이 불퉁한 얼굴로 입을 내미는 해수를 가만히 노려보고 있는데, 순간 귀를 번쩍 뜨이게 하는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수 씨, 잠깐 나 좀 볼까? 국대 선발전 일정이 정확히 언제야? 아무래도 상담 일자를 조정해야 될 것 같은데.”

“얼른 가 봐, 연해수. 김 팀장님이 찾으시잖아. 어른이 부르셨으니까 대답부터 하고.”

“네, 팀장님! 갑니다! 형, 가지 말고 기다려요. 알았죠? 우리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같이 저녁 먹어요, 네?”

“알았어.”

“도망가면 안 돼요! 그럼 나 진짜 울 거예요!”

“알았다고.”

알았으니까, 지금은 제발 좀 꺼져. 이러다 얼음 다 녹겠다. 지원은 미심쩍은 얼굴로 미적거리는 해수의 등을 가차 없이 떠밀었다. 아마도 보는 눈이 없었다면 풀 스윙으로 후려쳤을 것이다.

“상급 가이드분들은 자주 만나셔서 그런지 굉장히 사이가 좋으시네요.”

“하하. 그래 보이나요?”

적당히 대꾸한 지원은 이준의 손에서 자연스럽게 부간록을 건네받으며 사람 좋게 웃었다.

“저는 동생이 없어서 그런지 도저히 해수를 못 이기겠더라고요. 저렇게 신신당부를 하고 갔으니 꼼짝없이 기다려야겠네요. 안 대리님, 바쁘실 텐데 일 보세요. 이건 제가 서고에 넣어 놓겠습니다. 사망일시 기준으로 정리하면 되죠?”

이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런 의욕이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던 가온이 긴 한숨을 내쉬며 부간록을 덮었다. 마지막 장까지 두 번이나 정독하고도 망자의 행선지를 결정하지 못해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판정의 저울이 어느 한쪽으로 단 1도라도 기울면 누군가의 판단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하지만 간혹 저울이 완벽하게 수평을 이루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망자의 행선지를 결정하는 건 중천주의 몫이다. 공이나 과가 뚜렷하게 존재한다면 결정을 내리기가 그나마 수월하지만, 이렇게 공과 과가 모두 소소한 망자는 어디로 보내야 할지 쉽게 판단이 서질 않는다.

오늘 새벽, 겉으로 드러난 병증 없이 돌연사한 젊은 망자는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한세상 살다가 바로 중천으로 에스코트되었다. 만약 가이드의 안내에 순순히 따르지 않고 한 걸음이라도 도주하려고 시도했었다면 영락없는 명계행이었을 것이다.

살면서 누구에게도 상흔이 남을 만큼 크게 해악을 끼치진 않았으니 바로 환생의 기회를 주어야 할까? 하지만 아무리 소소한 잘못이라도 제대로 죗값을 치르지 못하면, 그 풀지 못한 업은 다음 생을 고단하게 만들 수도 있는데…. 멀리 보면 차라리 명계로 보내 깔끔하게 벌을 받게 하는 편이 나을 것 같기도 하고. 혼이 떠난 육신을 바로 수습해 줄 이도 없는 이 가여운 아이를 어찌해야 좋을까.

중천 한구석에 오도카니 앉아 있던 망자를 떠올리던 가온이 상념을 털어내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물론 사정이 딱한 것은 사실이지만, 중천주의 결정에 사심이 섞일 수는 없다. 아…, 뭐든 시원한 것 좀 마시면 좋겠는데. 권 실장은 잠깐 외출을 한다고 했었나…. 가온이 뜨끈하게 열이 오르는 이마를 짚으며 작게 앓는 소리를 흘렸을 때였다.

“대표님, 머리가 아프십니까.”

불현듯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상대의 얼굴을 미처 확인하기도 전에 익숙한 향기가 훅 다가왔다. 상큼하고 향긋한 과일 향을 은은하면서도 무게감 있는 자작나무 냄새가 받치고 있는 기분 좋은 향이었다. 명색이 화장품 회사의 대표이면서도 인공적인 냄새가 싫어서 향수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 가온이었지만, 런던에서 함께 지내는 내내 지원이 쓰는 향수는 본인과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었다.

“차 관장. 어쩐 일이야?”

“보안실에서 뭘 좀 확인해 달라고 해서 왔습니다. 그런데 대표님 어디 편찮으신 거 아닙니까? 안색이 좋지 않으신데요.”

“아니야. 한참 집중하고 있었더니 좀 더워서 그래.”

가온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플라스틱 컵 하나가 책상 위에 놓였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서비스에 놀란 가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작게 달그락 소리를 내는 얼음 조각을 보고 있으려니, 아직 한 모금도 들이켜지 않았는데도 벌써부터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커피?”

“네.”

저도 모르게 반색하던 가온이 곧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하루에 한 개의 사탕만 허락받은 아이가 두 개째 사탕을 받아 들고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하, 아이라니. 지원이 생각하기에도 심각할 정도로 객관성이 결여된 묘사이긴 했다. 콩깍지가 이렇게 무섭구나. 병증은 자각했지만 애석하게도 치료법은 알지 못했다.

“권 여사가 알면 혼나는데. 어제 잠을 잘 못 자서.”

잠을 또 못 잤어? 그러고 보니까 며칠 새 턱이 뾰족해졌네. 내가 같이 있을 땐 그럭저럭 잘 먹고 잘 잤는데…. 밤낮으로 수발드는 사람들이 옆에서 뭘 하는 거야? 이 정도면 뭔가 획기적인 개선 방안이 필요한 거 아닌가? 확 치받는 짜증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턱을 굳히던 지원은, 커피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가온의 간절한 표정을 보고는 눈꼬리를 접으며 조금 웃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얼굴에 드러나는 걸 다들 대체 왜 모르는 거냐고. 그리고 내 기분은 또 왜 이렇게 미친년 널뛰듯 하는 건데? 나 원래 이렇게 감정 기복이 심한 사람이 아니었거든?

“연하게 내린 거니까 드셔도 됩니다.”

“그래?”

“네. 반 샷만 넣은 거고 가지고 오는 동안 얼음도 많이 녹았습니다. 그래도 정 걱정이 되시면 절반만 드세요. 런던에서는 이것보다 더 진하게 드셨어도 괜찮으셨습니다.”

“그럼…, 그럴까?”

금세 환해진 얼굴로 빨대를 입에 문 가온은 정직하게도 딱 절반만 마실 작정인지 한 모금 마실 때마다 계속 남은 양을 확인했다. 커피가 점점 줄어드는 걸 너무나도 안타까워하는 게 눈에 보여서 지원의 애간장도 함께 녹았다. 불쌍해 죽겠네. 저까짓 커피, 원한다면 백 잔이라도…. 아니, 커피 농장이라도 사 줄 텐데.

“오늘은 오후에 계속 서고에 계셨다면서요.”

“응, 모처럼 중천이 잠잠해서.”

“들어올 때 보니까 표정이 별로 안 좋으시던데…. 뭐 골치 아픈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골치 아픈 일…?”

나직한 목소리로 지원의 말을 되뇌던 가온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한 사람의 일생을 낱낱이 파헤치는 건 항상 부담스럽지만, 일상적인 일이니 새삼 골치가 아프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긴 시간 동안 집중하고 있어서 그런지 눈이 좀 뻑뻑하고 목덜미가 뻐근할 뿐 딱히 불편한 느낌도 없다. 체력적으로 힘에 부치는 건 아예 기본값이 된 지 오래라 이제는 그다지 신경이 쓰이지도 않는다.

“그런 거 없어. 간만에 저울이 평형을 이룬 망자가 와서 생각을 좀 길게 한 것뿐이야.”

“그런 망자가 오면 원래 이렇게 오래 고민하십니까?”

“그래야지. 한 영혼의 미래가 달렸으니까. 절대 돌이킬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나른하던 가온의 목소리에 묵직한 한숨이 섞였다. 사실 가온이 중천주로서의 업무를 수행할 때 가장 버겁게 느끼는 건 바로 이런 부분이다.

아무리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며 신중하게 판단을 내려도, 중천주 역시 완벽한 존재가 아닌 이상 가온의 결정이 언제나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오는 건 아니다. 장고 끝에 환생의 기회를 주었는데 다음 생에선 희대의 살인마가 되어 나타나기도 하고, 지옥의 혹독함을 경험한 후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은 연약한 영혼은 기껏 얻은 새 삶을 일찌감치 스스로 마감하기도 한다.

더구나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의 특성상, 한 사람의 일생은 주변의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살인자는 필연적으로 피해자를 만들고, 자신의 목숨을 끊는 이는 가족 혹은 연인의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힌다. 간혹 아주 예민한 자는 영혼에 새겨진 상처를 새로운 생을 받을 때마다 안고 가기도 한다. 그러니 심판을 내리기에 앞서 돌다리를 열 번 스무 번 두드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깊은 생각에 잠긴 가온을 주시하던 지원의 눈빛이 조금 날카로워졌다. 가온의 무덤덤한 표정은 평소 중천주의 준엄한 얼굴 그대로였지만, 말끝에 묻어난 작은 한숨이 딱 한 번 들었던 약한 소리를 생생하게 떠올리게 했다.

- 차 관장. 나는 신이 아니야. 그저 심판자의 역할을 맡았으니 어떻게든 임기를 무사히 넘기려고 아등바등 발버둥을 치고 있을 뿐이지. 지금은 경험이 쌓이고 눈치가 늘어서 그럭저럭 노련한 척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정말 엉망이었어.

그래, 쉬운 일이 아니겠지. 이렇게 제정신을 붙잡고 있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닐 거야. 사실 사람을 상대하는 건 그 자체로도 피곤한 일이고. 하물며 대표님이 직접 대면하는 이들은 그중에서도 특히 더 사납고 포악한 자들이니까. 세상 그 누구도 대표님보다 그런 자들을 더 많이 상대하는 사람은 없겠지.

그나저나 우리처럼 망자를 대충 상대하는 사람들도 정서적인 피로감 때문에 주기적으로 관리를 받는데, 대표님은 누가 그런 쪽으로 신경을 쓰고 있나? 아니면 그냥 혼자서 꾸역꾸역 견디고 있는 건가?

“대표님. 실례가 안 된다면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응, 물어봐.”

“대표님은 어떻게 중천주가 되셨습니까. 태어날 때부터 중천주로 정해졌던 건가요?”

갑작스럽게 예상치 못했던 질문을 받게 된 가온은 약간 당혹감을 느꼈다. 천 년 가까이 살면서 이런 근원적인 질문을 받아 본 건 처음이었다. 인간들은 그저 중천주를 숭배하거나 경외할 뿐, 중천주의 선정 경위 따위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건 왜?”

“그냥 궁금해서요. 중천주가 되기 전에는 어떤 삶을 사셨는지, 원해서 중천주가 되신 건지, 임기가 있다는 말씀을 하셨었는데 그건 얼마나 남은 건지, 임기가 끝나면 어떻게 되는지, 뭐 그런 것들이요.”

중천주가 되기 전이라. 흐음…. 나도 한때는 평범한 부모 밑에서 사랑받으며 자라는 딸이었지. 아니. 자식을 제때 여의지 않으면 무능한 부모 취급을 받던 시대에, 스무 살이 넘는 딸을 그저 품에 끼고만 있었으니 그리 평범하다고 볼 수는 없나. 아주 오랜만에 부모님의 얼굴을 떠올려보던 가온이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너무 아득한 옛일이라 기억의 윤곽이 흐릿했다.

“차 관장은 호기심이 많은 편인가 보네.”

“꼭 그렇진 않습니다.”

당신이니까 궁금한 거죠. 남자는 원래 여자한테 관심이 생기면 샴푸 향부터 신발 사이즈까지 모조리 다 알고 싶어지는 법이거든. 다른 사람들이야, 뭐. 어떻게 살든 말든 관심 없고.

“어떻게 중천주가 되었냐…. 내가 중천주가 된 건 일단 시기적으로는 전임 중천주의 임기가 끝날 무렵에 내가 태어났기 때문이고. 후임을 물색하던 상천제가 몇 명의 후보를 추렸는데, 염마왕이 그중에서 나를 선택했다고 하더군. 원해서 한 거냐고 묻는다면, 글쎄. 억지로 한 건 아니지만 어떤 일인지 미리 알았더라면 거절했을 거야.”

“후회하십니까?”

“수도 없이 했지. 특히 초반에는.”

지금에 와서는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할 수 있지만, 돌이켜 보면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던 아득하고 지난한 세월이었다. 이제야 끝이 보이네. 정확히 몇 년이나 남았나…. 가만히 햇수를 헤아리던 가온이 문득 시간을 확인하고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고작 커피 몇 모금 마신 게 전부인데, 그새 30분이나 지났어? 차 관장하고 얘기를 하다 보면 희한하게 주저리주저리 말이 길어진단 말이야.

“나머지는 다음에 하지. 내가 내일 외부 일정이 있어서 오늘 중에 꼭 이자의 행로를 결정해야 해.”

“어디 멀리 가십니까?”

“태백. 최근에 태백산 인근에서 수차례 망자 실종 사건이 발생했는데, 망자의 뒤를 쫓던 가이드가 더 이상 접근할 수 없었다는 장소가 있다고 해서.”

간단하게 대화를 마무리한 가온이 덮었던 부간록을 다시 펼치자, 느긋하게 가온의 말을 경청하던 지원은 마음이 급해졌다. 이대로 순순히 물러나면 ‘다음’이라는 기회는 언제 찾아올지 알 수 없다.

오늘도 얼마나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서 여기까지 온 건데. 태백, 태백이라…. 일단 어떻게든 거길 쫓아가야겠어. 빨리 뭔가 그럴듯한 핑계를 만들어야 되는데…. 여기서 태백까지 오가는 루트 안에 들를 만한 미술관이 몇 개나 있지?

가공할 만한 속도로 두뇌를 회전시키며 강원도 지도를 머릿속에 그린 지원이 빠르게 소거법을 진행했다. 정선은 태백에서 가깝긴 한데 동선이 겹치질 않고, 원주는 태백하고 너무 멀어서 가는 길에 같이 가자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춘천이나 강릉 쪽은 아예 방향이 다르고. 그럼 남는 건…, 영월이네.

급조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호흡을 한 번 고른 지원이 최대한 여상한 목소리로 운을 띄웠다.

“대표님, 그럼 제가 모시고 갈까요? 안 그래도 이번 주 중에 영월에 있는 도자미술관에 갈 예정이었습니다. 거기서 지금 제가 꼭 보고 싶었던 기획 전시가 열리고 있거든요.”

“응? 태백은 영월에서 한참 더 가야 하지 않아?”

“그렇게 멀진 않습니다. 혼자서 가려면 너무 지루할 것 같아서 엄두가 안 나던 참이었는데 잘됐네요. 대표님은 볼일 다 보시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1시간 정도만 할애해 주시면 됩니다. 런던에서 보니까 도자기를 좋아하시는 것 같던데…. 규모가 아주 크진 않지만, 아기자기한 도기 작품들을 많이 전시해 놓은 미술관이라 한 번쯤은 볼만 합니다.”

지원의 제안에 솔깃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가온은 선뜻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태백에서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몰라. 미술관은 너무 늦으면 못 가잖아.”

“그러면 태백에서 칼국수나 먹고 오죠, 뭐. 태백에 굉장히 유명한 칼국수 집이 하나 있습니다. 가끔 생각이 나는데, 그거 하나를 먹으러 태백까지 갈 수는 없어서 못 가고 있었거든요.”

“칼국수?”

이번에는 미술관 얘기를 꺼냈을 때보다 훨씬 더 긍정적인 반응이 되돌아왔다. 역시 사람은 입맛을 공략하는 게 제일 빠르다니까. 라면도 좋아하고 파스타도 좋아하니까, 칼국수도 좋아할 줄 알았지.

“네. 워낙 사람이 많아서 혼자 들어가기는 민망하기도 하고요.”

“그동안에는 같이 갈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

“평일 낮에 강원도까지 같이 가줄 백수 친구는 없죠. 거기 감자전도 바삭하고 굉장히 맛있는데, 서울에서는 아무리 맛집을 찾아가도 그 맛이 안 나더라고요.”

가온이 감자전 소리에 움찔하면서도 쉽게 허락을 내리지 않자, 마지막 승부수를 띄우기로 작정한 지원이 부러 표정을 흐렸다.

“혹시 제가 따라가는 게 성가셔서 그러시는 거라면….”

“그건 아니야. 차 관장이 동행하면 나는 편해. 차 관장도 알다시피 나는 생활력이 거의 없는 사람이고…. 차 관장처럼 세심하고 다정한 사람이 옆에 있으면 든든하고 좋지. 바쁜 사람한테 번번이 폐 끼치는 게 미안해서 그래.”

“제가 좋아서 따라가는 거니까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그래도….”

“대표님도 가끔은 맛있는 것도 드시고, 좋은 구경도 하시고 그래야죠. 업무의 효율성을 위해서도 기분 전환은 꼭 필요합니다.”

그, 그런가? 지시를 내리고, 그 지시가 군말 없이 이행되는 상황에만 익숙했던 가온은,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지원의 끈질긴 설득에 결국 어영부영 넘어가고 말았다. 지원과 함께했던 런던 출장이 꽤 좋은 느낌으로 남았던 것도 한몫했다.

“아침 7시쯤 출발하려고 하는데 괜찮겠어?”

“네. 제가 7시 10분 전까지 댁으로 모시러 가겠습니다.”

“차 관장이 직접 운전하게? 내 차로 가면 되는데.”

“아닙니다. 저는 누가 운전해주는 차를 타면 어색하고 불편해서요. 저보다 연배가 높으신 분이 장거리 운전을 하시면 괜히 죄송하기도 하고요. 그냥 제가 운전하는 게 여러모로 마음이 편합니다.”

이게 지금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그 자리에 방해꾼을 끼워 넣겠습니까. 그리고 이래 봬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까지 작업을 걸 만큼 얼굴이 두껍진 않아서요. 가온이 들으면 기함할 생각을 하면서도 지원은 마냥 선한 얼굴로 웃었다. 한 치의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가온에게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지금은 양심을 챙길 때가 아니었다.

“그래, 알았어. 내일 아침에 봐. 오늘은 이만 가고. 나 집중해야 되는데, 차 관장이 옆에 있으니까 자꾸 떠들게 되네.”

“네, 대표님.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시원스럽게 대답한 지원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깔끔하게 자리를 벗어났다. 이야, 나 대단한데? 역시 사람이 급하면 못할 일이 없구나. 마냥 뿌듯한 얼굴로 코너를 돌던 지원은, 소리 없이 경악하고 있는 도겸과 딱 마주치고는 한껏 치솟았던 입꼬리를 서서히 내렸다. 이런…. 얘가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지?

뭐야, 이 미친놈은. 형 지금 대표님한테 수작 부리는 거예요? 감히 중천주한테…, 제정신이야? 아니, 다른 걸 다 떠나서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이렇게 개나 소나 드나드는 곳에서 대놓고 작업을 해? 눈에 뵈는 게 없어? 굳이 육성을 거치진 않았지만 도겸의 기막힌 심정이 그의 뜨악한 눈빛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나와. 얘기 좀 하자.”

“그래요. 합시다, 얘기.”

직원들의 눈을 피해 후미진 곳으로 이동한 지원과 도겸은 잠시 침묵을 지키며 생각을 정리했다. 돌발 상황에 당황한 것은 두 사람 모두 마찬가지였지만, 부서진 멘탈을 수습하는 건 그나마 한 해라도 더 산 지원이 조금 더 빨랐다.

“서고에 뭐 찾아보려고 들어왔던 거 아니야?”

“아…, 나 내일부터 드라마 작업하거든요. 어쩌다 보니까 아는 사람한테 코가 꿰어서. 당분간 본사에 오기 어려울 것 같아서 장기 미제 사례들 한 번 쭉 훑어보려고….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형, 진짜예요?”

“응.”

“진짜로…, 진짜야?”

“그래.”

“허!”

지원이 순순히 수긍하자 순간 할 말을 잊은 도겸이 입을 떡 벌리며 헛바람을 토해냈다. 이 형이 정말 미쳤네. 반쯤 헐벗은 여자가 옆을 지나가도 눈썹 하나 까딱 안 하길래 그런 쪽으로는 아예 관심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생전 여자 얘기 하는 걸 들어본 적도 없고. 그런데 이런 사람이 한 번 눈이 도니까 한 방에 그냥 가는구나. 어떻게 대표님한테 들이댈 수가 있지? 나는 한 테이블에서 밥 먹는 것도 불편하던데.

“어떻게 대표님을 여자로 볼 수가 있어?”

“여잔데 왜 여자로 못 봐?”

“지금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요. 대표님은 평범한 사람도 아니고….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건데?”

“여자한테 반하는 데 이유가 있나.”

지원의 덤덤한 대꾸에 도겸은 또다시 말문이 턱 막혔다. 그래. 그건 원래 사고 같은 거니까 의지로 안 되는 건 나도 아는데…. 노력으로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잘 아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거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참 어려운 길 가십니다.”

“그러게.”

“대표님하고는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요? 거의 마주치는 걸 못 봤는데…. 대체 형같이 쌀쌀맞은 사람이 뭘 어쨌길래 세심하고 다정하다는 거야? 그 나긋한 말투는 또 뭐고? 원래 여자한테 그렇게 말해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서 소름 끼쳤어.”

“다 들었냐?”

“들렸어요. 정말 격하게 안 듣고 싶었는데, 괜히 나가려고 바스락거리다가 산통 깰까 봐 할 수 없이 그냥 있었다고.”

“고맙다. 조만간 밥 한 번 살게.”

“밥은 뭐…, 맨날 형이 사잖아.”

피식 웃음을 흘리는 지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도겸은 사람의 첫인상이라는 건 참 믿을 게 못 된다는 생각을 했다. 지원은 아직도 모르고 있지만, 반년 전 그가 망자 한 명을 강제 에스코트했던 날, 중천에는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 으아아악! 살려줘! 살려달라고! 아악, 너무 뜨거워! 이것 좀 꺼줘! 빨리!

- 망자분, 진정하세요. 그 불은 실제가 아니니까 뜨겁지 않아요. 보세요, 제가 만져도 아무렇지도 않죠? 그리고 망자분은 벌써 돌아가셨잖아요. 살려드리지는 못해요.

- 여, 여긴 어디야? 날 어디로 보내려는 거야? 난 아무 데도 안 갈 거야! 가더라도 수빈이, 수빈이랑 같이 갈 거라고! 혼자서는 못 가!

- 망자분. 좀 조용히 하세요. 아무런 설명도 없이 강제로 송환되는 바람에 혼란스러우신 건 충분히 이해하지만, 이미 너무 많은 죄를 지으셨어요. 이제부터 본인의 과오는 모두 본인이 책임지셔야 합니다. 지금도 저울이 조금씩 더 오른쪽으로 기울고 있는 게 보이시죠?

- 저, 저게 뭔데요?

- 판정의 저울입니다. 조금이라도 수평에 가깝게 조절하고 싶다면, 진정하시고 지금부터 저희의 질문에 성실히 응하세요. 아시겠죠?

- …네.

- 망자분 지금 어디서 오셨어요? 망자분을 중천으로 보낸 사람의 인상착의는 기억하십니까? 생각나는 대로 말해보세요.

아침부터 판정원들의 진을 빼게 만드는 사고를 친 건, 무려 22년 동안 제니스가 발견하지 못했던 상급 가이드라고 했다. 얼마 후 고개를 빳빳이 든 채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 들어온 지원은, 중천주와 처음 대면하는 자리에서 가온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녀가 내린 명령을 가볍게 무시하는 기염을 토했다. 언제나 침착한 권 실장이 그렇게까지 새파랗게 질리는 건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할 수 없는데요. 차라리 공식적으로 할 수 있게 해 주시죠. 애초에 그러려고 데려오신 것 같은데.

뻔뻔하고 무례한 놈이군. 거기다 겁대가리도 없고. 저도 언젠가는 중천주 앞에 서게 될 텐데 무섭지도 않나. 내가 저런 인간하고 친해질 일은 절대로 없겠지. 그러나 불과 며칠 후 영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참석한 회식 자리에서, 도겸은 지원을 조금 다시 보게 되었다.

-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 하아, 너 꼴리는 대로 해라.

다들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흡사 야생 동물처럼 본능에 의존해서 움직이는 해수는 아무에게나 엉겨 붙지 않는다. 겉으로는 살갑게 굴면서도 은근히 사람을 가리는 해수가 마치 십 년 만에 만난 형처럼 지원을 대한다는 건, 그가 적어도 지원을 대단히 악하거나 모진 사람은 아니라고 판단했다는 뜻이다.

그날 이후로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지켜본 바에 의하면, 지원은 의외로 성품이 반듯하고 의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위급한 상황에서 연락을 하면, 비록 나중에 욕을 하며 뒤통수를 후려칠지언정 끝까지 거절하는 경우는 없었다.

물론 그는 보이는 것처럼 상당히 까칠한 성격의 소유자이긴 했다. 상대가 몰상식하게 나오는 경우에는 사람이든 귀신이든 가차 없이 응징하는 살벌함도 갖추고 있었다. 범상치 않은 인간이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간이 큰 줄은 정말 몰랐다고.

“앞으로 어쩌려고 그래요?”

“일단은 마음 가는 대로.”

“그 마음 참 대담하네. 대표님 나이가 몇인 줄은 알아요? 11세기에 태어난 사람이야. 고려 시대 사람이라고.”

“그래? 사랑에 나이가 중요한가? 국경도, 성별도 초월하는 시대에. 게다가 요즘은 연하남이 대세잖아.”

“연하남…! 아니, 이게 연상 연하로 논할 수 있는 수준이야? 형처럼 이성적인 사람이 어쩌다 이렇게 정신이 나갔어? 형, 진짜로 어디 아픈 건 아니죠?”

“마음이 아프다, 서 감독. 문 두 개만 열면 볼 수 있는데, 내일 아침까지 기다려야 되는 게 너무 슬퍼.”

능청맞게 대꾸하던 지원이 도겸의 표정이 썩어 들어가는 걸 보며 유쾌하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서도겸, 은근히 놀리는 재미가 있네. 연해수는 무슨 소리를 해도 제가 듣고 싶은 말만 걸러 들어서 대미지가 전혀 없는데.

“아픈 거 맞는데? 아파도 보통 아픈 게 아니네. 형 지금 심각해. 병원 가야 될 정도라고. 형 입에서 어떻게 그런 말이 나와요? 대체 언제부터 이랬어?”

“아마도 처음부터. 너 그때 중천에 있었다며? 나 살면서 날 밀어내는 사람 당기는 건 진짜 한 번도 한 적 없거든? 그런데 그 순간에 당기지 않으면 다시는 못 본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던 거지. 그걸 자각한 건 지난주 런던에서. 뭐라도 해야겠다고 결심한 건 오늘 오후.”

“하아. 난 모르겠다. 왠지 말려야 될 것 같긴 한데, 말린다고 들을 것 같진 않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도겸이 머뭇거리며 손을 뻗더니 어색함에 몸서리를 치며 지원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차마 적극적으로 밀어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어떤 식으로든 크게 상처를 입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소심한 응원이 담긴 손길이었다.

“그런데 그 칼국수 집은 이름이 뭡니까? 대체 얼마나 맛있길래 태백까지 칼국수를 먹으러 가?”

“글쎄, 이제부터 찾아봐야지. 칼국수 식당은 전국 어디에나 있으니까. 비교적 맛집도 많고. 이제 집에 가면 평점이랑 리뷰를 싹 훑어보려고. 가봐서 진짜 괜찮으면 나중에 알려줄게.”

“…뭐라고요?”

“대표님이 면을 좋아하시거든. 국내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면 요리라면 짜장면 아니면 칼국순데, 국물이 있는 걸 더 잘 드시더라고. 그렇다고 강원도까지 가서 라면을 드시게 할 수는 없잖아. 가끔 별미로 먹는 거라면 몰라도, 몸에도 안 좋은 거.”

순간 표정을 확 일그러뜨린 도겸이 비난을 가득 담은 눈초리로 지원을 위아래로 훑었다.

“뭐야, 이 형님 선수가 아니라 사기꾼이었네. 감자전 얘기는 뭐였는데? 진짜로 먹어본 것처럼 얘기했잖아. 바삭하다며?”

“강원도는 사이드로 감자전 내놓는 식당 많아. 그리고 감자전은 원래 대체로 바삭해.”

지원이 그것도 모르냐는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자, 도겸은 기가 찬 얼굴로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내가 사람을 잘못 볼 리가 없어. 처음부터 이렇게 뻔뻔한 인간인 줄 알았다니까?

“그럼 난 간다. 볼일 잘 보고, 드라마도 잘하고.”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니까 형이나 잘해요. 가급적이면 해수한테는 걸리지 말고요.”

“아, 연해수! 그러고 보니까 까맣게 잊고 있었네. 지금쯤 나 찾으러 다니고 있을 텐데. 하아, 오늘은 진짜 귀찮다.”

“조심해요. 그 자식 눈치는 없어도 짐승이라 감은 좋아요. 조금만 이상해도 바로 눈치챈다고. 그리고 알죠? 연해수가 알면 다 아는 거야. 걔는 뇌에 필터가 없어서 비밀 같은 거 없어.”

도겸의 진지한 충고에 작게 실소한 지원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해수에 대한 평가는 지원 역시 그와 동일했다. 수도권에 거주하는 가이드라면 유치원 시절부터 시작된 해수의 길고 장황한 연애사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소문의 출처는 바로 본인의 입이었다.

“지원이 형! 지원이 형! 여기 있어요? 기다린다더니 어딜 간 거야?”

“나 여기 있어. 간다, 가.”

도겸은 제게 가볍게 손을 흔들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지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그가 겪게 될 험난한 여정이 눈앞에 훤히 그려졌지만, 행여나 말이 씨가 될까 싶어 입 밖에 내지는 않고 꾹 눌러 삼켰다.

“대표님. 이쪽으로 오십시오. 거긴 바닥이 미끄럽습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끼가 낀 돌을 밟고 살짝 비틀거리던 가온은, 반사적으로 손을 내민 지원에게 순순히 제 손목을 내주었다. 가온의 가느다란 손목을 잡고 힘을 주어 바위 위로 끌어 올린 지원은, 그녀의 손을 다시 놔주기 위해 엄청난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다.

사람들이 이래서 데이트 코스에 등산을 넣는 거구나. 벌게진 얼굴로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을 서로에게 보여주는 게 과연 그 관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까 싶었는데, 이건 또 나름대로의 엄청난 메리트가 있네. 역시 고전은 좀 진부해도 무시할 수가 없어.

“물 좀 드릴까요?”

“응.”

“힘들지 않으세요?”

“아직까지는 괜찮아.”

그래? 벌써 호흡이 좀 달리는 것 같은데…. 이런 산책 수준의 등산도 버거울 정도라면 명백하게 운동 부족이군. 기초 체력을 좀 키울 필요가 있겠어. 그러면 저혈압이나 수면 장애 같은 문제도 훨씬 좋아질 거고. 부담스럽지 않게 권할 수 있는 운동이 뭐가 있을까. 수영이 진짜 좋은데, 그런 걸 같이 하려면 상당히 친밀해진 다음에나 가능하겠지?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궁리를 하던 지원은, 가온이 물병을 입에서 떼자마자 생 초콜릿 한 개를 까서 내밀었다. 생각 같아서는 다정하게 입 속에 쏙 넣어주고 싶었지만 차마 거기까지 할 수는 없었다.

“이거 맛있다.”

“다행이네요. 달지 않은 초콜릿을 하루에 한두 개 먹는 건 저혈압에 좋다고 합니다.”

“차 관장은 아는 것도 많네.”

“런던에 가기 전까지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오로지 당신을 위해서 필사적으로 공부한 거라고. 물론 수발을 받는 데 익숙한 가온에게는 표현을 에두른 어필이 전혀 먹히지 않았지만, 지원은 여전히 만족스러운 미소를 유지했다. 그래, 이건 나도 크게 기대하면서 던진 말은 아니었어. 나는 지금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당신이랑 단둘이 있는 걸로 충분해. 설사 지금 당장 돌아가야 한다고 해도 앞으로 최소한 3시간은 보장되는 거니까.

“대표님. 이곳에서 망자들이 사라지는 이유에 대해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으십니까?”

“확실한 건 현장을 봐야 알겠지만….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아주 영력이 높은 혼이 이곳에 터를 잡은 경우야. 보통 인간들이 신선이라고 부르는 존재인데…. 영산에 신선이 깃들면 잡다한 영들은 발을 붙일 수가 없지.”

“그 기운이 사람한테까지 미칩니까? 가이드가 아예 접근할 수도 없었다면서요.”

“드물긴 하지만 아주 오래 인계에 머물면서 힘을 키운 영혼은 일정 공간을 완전히 자신의 영역으로 만들기도 해. 그러면 살아 있는 인간도 영향을 받지. 영안이 전혀 열리지 않은 사람은 무시하고 지나갈 수도 있지만, 영력에 민감한 가이드의 눈에는 뭔가 다르다는 게 보였을 테니까 선뜻 발을 들이기 어려웠겠지.”

그래도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해를 끼치지만 않는다면 크게 문제될 건 없다. 신선의 호칭을 얻는 이들은 천계로 가기 직전에 인계에 남기를 택한 영혼이라 악행을 저지르는 일은 거의 없고, 오히려 산의 기운을 흥하게 해서 살아 있는 이들에게 덕이 되는 경우가 많다. 행여 어떠한 계기로 인해 흑화한다면 그때는 정해진 대로 처리하면 그만이다. 그로 인한 피해가 망자들이 튕겨 나가는 정도라면, 결국 어딘가에서는 발견이 될 테니 관리의 범위를 조금 넓히면 된다.

그러나 가이드가 말한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가온은 자신이 세웠던 가설에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곳곳에서 망자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교묘한 술식이 사용된 것이 느껴졌는데, 그렇다면 이 사태는 그저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누군가가 목적을 가지고 고의로 저지른 일이라는 얘기다.

예리한 시선으로 주변을 살피며 걸음을 서두르던 가온이 자그마한 폭포 앞에 멈춰 서더니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신선은 아니군.”

“달리 보이시는 게 있습니까?”

“결계. 아니, 일종의 덫이라고 해야 되나. 누가 여기에 망자를 가두는 덫을 만들어 놨어. 저 폭포를 시작으로 이 일대를 뺑 둘러서.”

가온의 손가락이 그리는 곳을 눈으로 따라가 보니, 비로소 조금씩 뒤틀린 공간이 눈에 띄었다. 싱그러운 초록 숲에 따뜻하고 눈부신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지만, 방금 전과는 달리 음산한 기운이 물씬 느껴졌다.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요?”

“글쎄….”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던 가온이 뭔가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두세 가지의 원인이 떠오르긴 했는데, 그 어느 것도 딱 떨어진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모시던 신을 잃은 무당이 새로운 신을 찾으려고 기세가 좋은 곳을 골라서 영력이 센 영혼을 부르는 경우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는데…. 이건 너무 비효율적으로 보이네. 제물을 바친 흔적도 전혀 없고.”

“제물이요?”

“귀신을 부리려면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하거든. 보통 살아 있는 짐승을 죽여서 그 피를 바치는데, 주로 닭을 잡지.”

“음, 무당도 쉬운 일이 아니네요.”

“…쉽지 않지.”

- 신을 모시지 않으면 급살을 맞는다고 했어요. 저도, 제 자식도…. 그럼 아이를 끌어안고 그냥 죽었어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이렇게 태어난 게 제 잘못이에요?

대꾸할 말을 끝내 찾지 못했던 어느 가여운 여인의 절규가 떠올라 가온은 가슴이 조금 답답해졌다.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다고 생각했기에, 아주 미세하게 숨이 떨리는 걸 옆에 선 이가 낱낱이 지켜보고 있었다는 건 알지 못했다.

“아치볼트 로젠발로프의 흉내를 내던 자처럼 인간을 해치려는 목적을 가진 악령일 수도 있고. 흑화한 영혼을 모아서 세를 불리려는 거지. 사람이든 귀신이든 일단 집단이 되면 강해지니까.”

“그런 거라면 망자의 존재감이 확실하게 느껴지지 않았을까요? 로젠발로프 성에 들어갈 땐 바로 알 수 있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뭔가 악의를 가진 존재가 근처에 있다는 느낌은 없는데요.”

“태양의 기운이 너무 강해서 느껴지지 않는 것일 수도 있어.”

어쩌면 기척을 감출 수 있는 존재일 수도 있고. 그렇다면 좀 위험한데…. 공연히 지원을 불안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가온은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어쨌든 여기에 뭔가가 있는 건 확실하니 제대로 확인을 해야 할 텐데, 그러려면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지원을 돌아보는 가온의 얼굴에 미안한 마음이 가득 담겼다.

“어쩌지? 오늘 그 미술관은 못 가겠는데. 밤에 여길 다시 와야 해.”

“상관없습니다.”

“지금은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내가 제대로 힘을 쓸 수가 없어. 괜히 휘말려서 다치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되니까. 혹여 내가 전력을 다하지 못하면 우리 둘 다 위험해질 수도 있고….”

“네, 저는 정말 괜찮으니까 그런 사소한 일까지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무리만 하지 마세요.”

응? 꼭 보고 싶은 전시라고 하지 않았나? 일말의 아쉬움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을 의아하게 바라보자, 지원은 가온과 부드럽게 눈을 맞추며 환하게 웃었다. 갑자기 그의 기분이 좋아진 이유를 전혀 짐작할 수 없었지만, 보는 사람의 기분까지도 좋아지게 만드는 싱그러운 미소에 가온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그럼 얼른 가서 식사부터 하시죠. 시간이 늦으면 웨이팅을 오래 해야 합니다.”

점심시간이 시작되기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식당에 도착한 두 사람은 다행히 웨이팅 없이 바로 자리를 안내받을 수 있었다. 정갈하게 차려진 밑반찬은 메인 요리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높였고, 별다른 고명 없이 투박하게 끓인 구수한 칼국수는 만족감의 정점을 찍었다.

거의 튀김에 가까운 바삭한 감자전을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가온이 보인 표정을, 지원은 아마도 평생 잊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밤늦게까지 각을 잡고 앉아서 수백 개의 리뷰를 정독한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서울에서 여기까지 올만 하네. 정말 두고두고 생각이 나겠어.”

“입에 맞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차 관장이 권하는 건 뭐든 맛있지. 생각해 보니까 런던에서 그렇게 맛있는 음식만 먹었던 건 이번이 처음이었어. 보통은 정말 별로인 데가 적어도 하나씩은 꼭 끼거든.”

“아…, 네. 미식가에게는 정말 괴로운 도시죠. 석사 마치고 런던에서 1년을 살았었는데, 입에 맞는 식당을 찾느라고 굉장히 고생했었습니다.”

가온이 손바닥만 한 감자전 두 쪽을 야무지게 먹는 모습을 마냥 흐뭇하게 지켜보던 지원은, 오늘따라 기름진 음식이 별로 당기지 않는다는 핑계를 대며 제 몫으로 남은 감자전 접시를 그녀의 앞으로 슬쩍 밀어주었다.

커피도 태백에서 가장 유명한 곳에서 마시게 해주려고 했는데, 가온은 식당에서 바로 보이는 자그마한 카페에 들어가고 싶다고 했다. 최종 후보지 세 군데를 놓고 치열하게 고민했던 2시간이 의미 없이 날아갔지만 지원은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학에 목숨을 거는 터라 평소 인테리어가 촌스러운 카페에는 발도 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기분 같아서는 가온이 원한다면 동네 노인정 역할을 하는 다방에도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커피는 확실히 어제 마신 게 더 맛있네요.”

“이것도 맛있어. 되게 고소해. 아까 차에서 내릴 때부터 이 향이 되게 좋더라고.”

“그러셨습니까.”

“응. 어제 마신 건 향은 정말 좋았는데, 약간 덜 익은 과일 맛이 났거든. 나는 과일은 거의 무를 정도로 잘 익은 걸 좋아하는 편이라. 이건 견과류 맛이 나네. 음, 초콜릿 맛도 살짝 도는 것 같고. 왠지 곡차 느낌도 조금 있는데…, 아무튼 쓰지 않고 부드러워서 좋아. 아주 맛있어.”

기분 좋게 커피를 홀짝이는 가온을 보며, 지원은 큰 충격을 받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날카로운 품평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아니, 권 여사님. 이렇게 미각이 예민한 사람을 두고 무슨 말씀을 하신 겁니까. 특별히 따로 찾는 음식은 없다면서요. 지금 이분 블렌디드 원두의 맛을 각각 구분하고 있는데? 의외로 입맛이 까다롭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고.

“권 여사님은 대표님한테는 음식 취향이라는 게 없다고 알고 계시던데요.”

“하하. 권 여사한테는 말 못 하지. 매끼 영양을 따지면서 얼마나 정성을 들이고 있는데. 거기다 내 입맛까지 보태면 너무 고생이잖아. 내 식탁에 올리는 채소는 권 여사가 텃밭에서 유기농으로 직접 기르는 거라고. 그런 사람한테 어떻게 음식이 짜다 달다 투정을 하겠어. 주는 대로 먹어야지.”

뭐라고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지원은 아무 말 없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안 그래도 지금 물불 못 가리고 있는데 여기서 더 반하게 하시면 어떡합니까. 살짝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당사자에게 할 수 있는 얘기는 아니었다.

이것도 계속 마시다 보니까 나름 괜찮네. 지원이 평소 즐기는 건 약간 산미가 있고 상큼한 과일 맛이 나는 깔끔한 커피였지만, 가온의 말을 생각하며 음미하니 다양한 맛이 섞인 묵직한 느낌의 고소함도 나쁘지 않았다.

내가 어제도 생각한 거지만, 콩깍지는 진짜 무섭다니까. 이것 봐, 사람을 이렇게 취향이고 밸이고 없는 놈으로 만들잖아.

무엇보다 심각한 건 벗어 던지려는 의지가 전혀 없다는 거였다. 복잡한 눈빛으로 가온을 바라보던 지원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즉시 눈꼬리를 접으며 생긋 웃어 보였다. 참 속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만들어내야 할 이유는 찾지 못했다.

해가 지려면 4시간도 넘게 남은 터라, 지원은 카페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호텔로 향했다. 가온은 차에서 대충 눈을 붙여도 상관없고,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영월에 다녀오는 것도 좋다고 했지만, 가온을 잠깐이라도 편히 쉬게 하겠다는 지원의 의지가 너무나도 확고했다.

“제가 마음대로 모시고 온 이상, 대표님께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건 모두 제 책임입니다. 현장에서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으니 쉴 수 있을 때 제대로 쉬십시오.”

“그래, 알겠어. 매번 느끼지만 차 관장은 참 세심하고 다정해.”

아니라고. 내가 아무한테나 이러진 않는다고. 지원의 얼굴이 아주 잠깐 미묘하게 변했다가 곧 원상회복되었다. 다정…. 내가 이모한테도 그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양심상 결코 동의할 수 없는 표현이었지만, 굳이 가온이 알아서 제게 득 될 게 전혀 없었기 때문에 반박은 속으로만 하고 말았다.

지원이 창문을 활짝 열고 환기를 시키는 동안 양치를 마친 가온은 커다란 베개 두 개를 겹쳐놓고 그 위에 비스듬히 누웠다. 그리고는 멍하니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다 문득 어제 들었던 지원의 질문을 떠올렸다.

“차 관장.”

“네, 대표님.”

“임기가 얼마나 남았냐고 물었었지.”

가온이 벗어놓은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있던 지원이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잠시 뭔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더니 짧게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듣겠습니다. 지금은 좀 쉬세요.”

“지금 쉬고 있잖아. 내가 어제 차 관장의 말을 듣고 간만에 계산을 해봤는데, 이제 31년 남았더라고.”

“…!”

“임기가 끝나면…. 그간 중천주의 역할을 수행하느라 벌써 끝났어야 할 수명을 억지로 늘리고 있었던 거니까, 임기가 다 되면 바로 판정의 저울 앞에 서겠지.”

31년? 앞으로 31년 후면 내가 환갑. 당장 닥칠 일이 아니라는 건 다행이지만, 그래도 현대인의 평균 수명을 감안하면 그렇게 많이 남은 건 아니네. 아니지, 그건 내 기준이고. 이 사람은 이미 너무 오랜 세월을 살았으니까. 그 세월을 혼자서 견디는 건 결코 수월하지 않았겠지. 잠시라도 보듬어 주는 사람이 있었을까? 울면서 도망가고 싶었을 때 위로해준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나? 너무나도 궁금했지만, 지원은 가온에게 아니라는 대답을 듣게 될까 봐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렇습니까.”

“뭐 또 궁금한 건 없어? 모처럼 시간이 여유로우니 다 말해줄게.”

“그러면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응.”

“처음에 저를 왜 그냥 돌려보내려고 하셨습니까?”

처음에…. 왜 그랬더라. 그러고 보니까 벌써 반년이 지났네. 새삼 시간이 빠르다는 생각을 하며 지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가온은, 눈에 잔뜩 독기를 품은 채 골프채를 생명줄처럼 움켜쥐고 있는 남자아이의 잔상이 떠오르자 표정을 조금 흐렸다.

그래, 그때도 저 모습을 보고는 중천에 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었어.

“차 관장이 어렸을 때 망자를 보는 능력 때문에 크게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지. 아비의 형제들에게.”

“네.”

“스스로도 본인이 미친 게 아니라는 확신을 할 수 없을 때가 많았을 거고.”

“…네.”

“그래서 중천에 드나들게 하면 혹여 현실을 놓지는 않을까 우려가 됐었어. 가이드 중에는 그런 자들이 가끔 있거든. 밖에서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다가 중천에 오면 다들 자신을 인정해주니까, 그대로 머물고 싶어 하는 경우가 있어. 대부분은 가족이 없는 이들이었지.”

가온이 보기엔 지원의 환경이 그들과 아주 흡사했다. 제아무리 중천주라도 사람의 성격까지 볼 수 있는 건 아니라, 이렇게 양쪽 모두 균형을 잘 맞추며 현명하게 처신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건 그때의 가온은 알지 못했다.

“내가 차 관장을 잘 몰랐으니까.”

“그런데도 결국 허락하신 이유는 뭡니까?”

“나한테 대들길래.”

“…네?”

“그 정도 강단이면 다른 이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중심을 잡을 수 있겠구나 싶었고, 그때의 판단은 옳았다고 생각해. 차 관장은 어때? 이 세계에 발을 들인 걸 후회하지 않아?”

지원이 대답을 하려고 막 입을 연 순간, 지원의 휴대폰이 윙윙 진동을 울렸다. 휴대폰을 힐끔 쳐다본 지원이 그대로 탁자 위에 엎어놓자, 가온의 눈매가 조금 날카로워졌다.

“받아.”

“나중에 제가 다시 걸면 됩니다.”

“갤러리?”

“…네.”

“갤러리 일 소홀히 하지 말라고 했잖아. 어서 받아.”

난감한 얼굴을 하던 지원이 결국 휴대폰을 들고 일어서서 창가로 향했고, 그제야 가온의 표정이 다시 순해졌다. 창가에 선 지원이 나직한 목소리로 통화하는 걸 잠시 바라보던 가온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기 시작했다. 제가 전혀 모르는 분야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지원의 목소리가 점차 음률처럼 들려오더니 어느 순간 스르르 눈이 감겼다.

“…그래요. 수고했어요. 일단 잘 보관해 둬요. 아니, 가을 전시가 끝나도 판매는 안 합니다. 내가 따로 쓸 데가 있어서…. 뭐, 그것까진 알 거 없고. 네. 네, 알았어요. 내일 얘기하죠. 이만 끊습니다.”

최대한 서둘러 통화를 종료한 지원은 어느새 잠이 들어버린 가온을 발견하고는 일단 휴대폰을 무음으로 설정했다. 그리고는 그대로 창틀에 걸터앉았다. 가까이 가서 자는 얼굴을 들여다보고 싶기도 했지만, 그랬다가 혹시라도 다른 욕심이 날까 봐 걱정스러워서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 이 방에 들어온 순간에, 이미 맥박은 정상치를 넘겼다.

이젠 단둘이 호텔방에 들어오는 건 못하겠구나. 런던에서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낸 바람에 내가 나를 너무 믿었어. 소리 없이 긴 한숨을 토해낸 지원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꽤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태양은 높디높은 곳에서 마냥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도 결국 시간은 흘러 어느덧 밤이 깊었다. 손전등 하나에 의지한 채 가로등 하나 없는 캄캄한 산을 열심히 오르던 가온과 지원은 오전에 보았던 폭포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챙. 인적이 전혀 없다는 것을 확인한 가온이 오른팔을 뻗자 날카롭게 울리는 금속성의 소리와 함께 반짝이는 물방울이 톡톡 튀는 아름다운 검이 나타났다.

“차 관장.”

“네, 물러서 있겠습니다. 그리고 대표님의 활동반경 안으로도 절대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역시 똑똑해.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지원이 저와 거리를 벌리는 걸 확인한 가온은, 진지한 얼굴로 천천히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순간 시끄럽게 울어대던 새들과 풀벌레들이 일제히 숨을 죽였다. 섬뜩할 정도로 고요해진 산속에 휙휙 사나운 바람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곧 엄청난 돌풍이 일었다.

바로 그때 군데군데 일그러졌던 공간들이 푸르스름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뭔가 엄청난 것이 솟구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놀랍게도 몹시 고전적인 차림을 한 남자가 오만상을 찌푸린 채 공간을 찢으며 나타났다.

저건 뭐지?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데. 못내 당황스러워하던 지원은 가온의 표정을 살피고는 더욱 크게 놀랐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가온의 눈이 거의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는데, 그녀가 이렇게까지 극심한 감정 변화를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하율.”

“말로 해, 가온. 갑자기 이렇게 끌어내면 어떡해.”

“당신이 왜 거기서 나와?”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만든 덫이라는 걸 몰랐어? 최근에 명계에서 인계로 달아난 죄인들이 있어서 잠시 그 통로를 막아두겠다고 중천으로 서신을 보냈는데.”

“못 받았어.”

“저런. 그럼 많이 놀랐겠네. 하하, 이게 웬 거지 같은 악령인가 했겠는데?”

싱글거리며 너스레를 떨던 남자가 허탈한 한숨을 내쉬는 가온에게 다가가더니 그녀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였다. 일단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던 지원은 남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가온과의 거리를 확 좁히자 빠득 소리를 내며 이를 갈았다. 뭐야, 저 새끼는? 어디다 함부로 손을 대?

그제야 인기척을 느낀 남자가 처음으로 가온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가온을 바라볼 때는 봄바람처럼 살랑거리던 미소가 지원에게 닿은 순간 싸늘하게 변했다.

“저건 뭐야?”

“우리 직원.”

“아아…. 직원. 항상 혼자 다니더니, 이제 직원들하고 같이 다니기도 하나 봐?”

“여러모로 능력 있는 친구라. 차 관장. 이쪽은 염마왕이야. 앞으로 가끔 마주칠 일이 있을 테니 얼굴은 익혀두고, 오래 봐서 좋을 것 없는 사이니까 그 이상으로 친분을 유지할 필요는 없어.”

“우와, 너무하네. 중천의 직원이면 나하고도 동료나 마찬가진데. 자, 직원 씨. 우리 앞으로 자주 볼 것 같은데 통성명이나 할까? 나는 염마왕 하율. 그쪽 이름은?”

“차지원입니다.”

마주 보고 선 두 남자는 서로가 연적이라는 사실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가온의 시선을 의식하며 입가에 의례적인 미소를 띠고는 있었지만, 상대를 살피는 눈빛에는 사정없이 불꽃이 튀었다. 그리고 그걸 굳이 감추려는 생각 역시 두 사람 모두 하지 않았다.

“당신이 필요해서 만든 거라니까, 나는 그럼 이만 돌아갈게.”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냥 이렇게 가는 거야?”

“나는 당신 같은 반백수가 아니야. 바쁘다고.”

“알았어, 알았어. 그럼 조심해서 가.”

가온과 함께 산을 내려오며 지원은 뒤통수가 몹시 따갑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왠지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끝까지 뒤를 돌아보진 않았다.

끼이이익! 어둠 속에서 나타난 짐승 한 마리가 무작정 차 앞으로 달려드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급브레이크를 밟은 지원은 다급하게 가온의 안색부터 살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앞이 잘 보이질 않아서 고라니가 튀어나오는 걸 못 봤습니다.”

“괜찮아. 차 관장 잘못도 아니고 많이 놀라지도 않았어.”

두 사람이 산기슭에 도착한 순간 급격히 어두워진 하늘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가는 빗줄기를 마구 흩뿌리기 시작했다. 차라리 폭우가 쏟아졌다면 어느 정도 시야가 확보되었겠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가는 빗방울은 꼬불꼬불한 산길을 온통 부옇게 덮는 안개를 만들어냈다. 불과 10m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였다.

“차 관장. 우리 비가 그칠 때까지 조금 기다려 볼까? 오래 올 것 같지는 않은데. 이대로 그냥 가는 건 위험하겠어.”

“알겠습니다.”

한적한 곳에 차를 세운 지원은 바로 문을 열고 나가는 가온을 빠르게 따라가 그녀의 머리 위에 우산을 씌웠다. 몇 걸음 되지도 않는 그 짧은 사이에 머리카락이 촉촉하게 젖은 걸 보고 있으려니 속이 확 상했다.

“괜찮은데.”

“밤이라 기온이 너무 떨어졌어요. 이럴 때 비를 맞으면 감기 걸리십니다.”

“나 비 좋아해. 보는 것도, 빗속을 걷는 것도.”

“우산 쓰고 걸으세요. 그것도 안 하시겠다면 그냥 출발하겠습니다.”

지원이 고집을 꺾지 않자, 가온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원과 나란히 서서 한참을 걷던 가온이 막 꽃이 피기 시작한 라일락 나무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허리를 조금 숙여 가만히 향기를 맡았다. 안개에 휩싸인 꽃과 여인은 이게 지금 현실인가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순간 맹렬하게 감동을 받은 지원이 저도 모르게 불쑥 입을 열었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이성이 전혀 작용하지 않았던 건, 맹세코 차지원 인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표님.”

“…응?”

“제가 대표님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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