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1. 꽃병에 앉은 나비 (2/18)

01. 꽃병에 앉은 나비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이른 새벽. 고즈넉한 한옥이 은밀하게 품고 있는 아담한 연못에 은은하게 빛나는 둥근달이 곱게 담겼다. 덩그마니 내려앉은 그윽한 달빛에 홀려, 구름도 가던 길을 잠시 멈췄다.

두 개의 달이 비추고 있는 고아한 별당의 대청마루에는 탐스러운 하얀 털을 가진 커다란 늑대 한 마리가 마치 조각처럼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가끔 바람이 불어 처마 밑의 풍경이 뎅그렁거리기도 하고, 길을 잘못 든 산새가 잔뜩 겁을 먹고 요란스레 지저귀기도 했지만, 오직 제 발치의 낡은 은경(銀鏡)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늑대는 밤이 새도록 고갯짓 한 번 하는 법이 없었다.

“소랑.”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시리도록 짙푸르던 하늘에 막 붉은 기가 돌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저를 부르는 소리에도 뒤를 돌아보진 않았지만, 늑대는 제게 일용할 양식을 제공하는 이에게 대충 꼬리를 흔들며 아는 척을 했다. 안 그래도 슬슬 안달이 난 희주가 들이닥칠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대표님은?”

“아직.”

여전히 은경에서 눈을 떼지 않은 늑대가 짧게 대답하자, 단정한 생활한복 차림을 한 점잖은 여인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40년도 넘게 충실하게 중천주의 일상을 관리해 온 희주는, 가온이 밥을 굶거나 잠을 못 자는 걸 가장 못 견뎌했다.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시려면 얼른 오셔야 하는데…. 이러다가 한숨도 못 주무시고 비행기 타시겠어.”

“그런 것까지 계산하면서 대충 요령을 피울 수 있으면 주가온이 아니지.”

“물론 그렇긴 하지만…. 이게 벌써 몇 시간째야. 어제 저녁도 못 드셨는데.”

“보름이었으니까. 예나 지금이나 미친 것들은 왜 보름달만 뜨면 더 지랄 발광들인지 몰라, 21세기에 촌스럽게.”

신랄하게 내뱉던 소랑이, 은경의 미세한 떨림을 감지하자마자 벌떡 일어나 재빨리 몸을 뒤로 물렸다. 그와 거의 동시에 손바닥만 한 작은 거울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다소 지친 기색의 가온이 천천히 빛 속을 걸어 나왔다.

“다녀오셨습니까, 대표님.”

공손하게 인사를 건네는 희주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가온은, 못내 미안한 얼굴로 소랑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었다. 중천에 꽤 오래 있었다고 생각은 했어도, 시간이 이렇게까지 된 줄은 몰랐다. 저야 줄곧 일을 하느라 몸은 곤해도 지루할 틈은 없었지만, 밤새 한자리에서 제가 돌아올 길을 지키고 있었을 소랑은 따분함을 견디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네가 있어서 참 좋았지만, 너는 나를 만나 고생이구나. 천성대로 벌판을 뛰어놀다 제때에 숨을 거둘 수 있게 해 주었어야 했는데. 가온의 얼굴에 또다시 후회하는 기색이 떠오르자, 보기 싫다는 듯 홱 고개를 돌린 소랑이 공연히 바닥을 툭툭 치며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중천주와 운명이 엮인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는 건, 이제 입이 아파서 더 말하기도 싫었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얼른 가서 밥이나 먹고 좀 자. 당신 오늘 출장 간다면서.”

“아, 출장…. 권 여사, 그게 오늘이었나?”

“네, 대표님. 오후 2시 비행기입니다. 일단 소랑의 말대로 식사부터 하세요. 많이 시장하시죠?”

“…약간.”

얼씨구. 웬일로 배고프단 소릴 다 하네? 정말 밤새 주전부리 하나도 입에 못 넣고 생으로 쫄쫄 굶었구만. 쯧, 사람이 그 나이를 먹고도 이렇게 요령이 없어서야 원. 하긴…. 애초에 융통성이라고는 코딱지만큼도 없는 인간이라 중천주로 선택된 거겠지만.

심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소랑이 후원 쪽으로 훌쩍 몸을 날렸다. 어쨌든 가온이 무사히 돌아왔으니 나는 밀린 잠이나 좀 잘까. 바람처럼 사라지는 소랑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가온이 본채를 향해 타박타박 걸었다. 당장 잠이 더 급하긴 했지만, 장거리 비행을 앞뒀으니 컨디션을 유지하려면 어느 정도 속을 채워두어야 한다.

본채로 연결된 긴 복도를 묵묵히 걸어가던 가온이, 바람을 타고 온 향긋한 꽃내음에 걸음을 멈추고는 어느덧 놀라울 정도로 화사해진 정원을 가만히 둘러보았다. 계절이 언제 바뀌는지, 세월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거의 인식하지 못하고 살다가, 이렇게 어쩌다 한 번씩 소담하게 핀 꽃나무를 보면 그래도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벌써 복사꽃 필 때가 되었나.”

가온이 아련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얌전히 뒤를 따르던 희주가 아무 말 없이 몇 걸음 더 거리를 벌렸다. 세상을 휘두를 수 있는 권세를 손에 쥐고도 도락과는 담을 쌓은 삶을 살고 있는 가온이 모처럼 즐기는 여유였다. 그러니 절대 방해하지 않아야 했다. 흐드러진 꽃가지 앞에 선 가온의 모습은 더없이 아름답고, 꼭 그만큼 처연했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그러나 꿈결 같았던 찰나의 유희는 눈치 없는 휴대폰 진동에 덧없이 막을 내렸다. 설마 또 중천은 아니겠지. 미련 없이 꽃나무에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금 걷기 시작한 가온을 보며 못내 안타까운 얼굴을 하던 희주가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보안실장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누님.]

서둘러 전화를 받자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음성이 거칠게 귀를 긁었다.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쉬어 버린 동생의 목소리에 희주는 진심으로 당황스러웠다.

“자네 목소리가 왜 이래? 어디 아파?”

[쿨럭. 독감이랍니다.]

뜻밖의 사태에 놀라 가만히 눈을 끔뻑거리던 희주가 서서히 미간을 구겼다. 세상에, 한겨울에 냉수를 뒤집어써도 감기 한 번 안 걸리던 사람이…. 아무리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는 하지만….

“약은 먹었어? 아니, 꽃 피는 춘삼월에 어쩌다 이리 미련하게…. 어쨌든 당분간 대표님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고…, 가만. 그럼 오늘 출장은 어떻게 해? 비서실장은…. 뭐?!”

독감의 근원지는 가온의 출장 일정을 점검하기 위해 비서실과 보안실 임원들이 모두 모였던 회의 자리로 추정된다고 했다. 말인즉슨 가온의 손발처럼 움직이는 최측근 집단이 초토화되었다는 뜻이다. 희주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자, 한참을 앞서가던 가온이 비로소 뒤를 돌아보았다.

“권 실장이야?”

“네, 대표님. 그런데…. 문제가 좀 생긴 것 같습니다.”

바로 손을 내밀어 휴대폰을 건네받은 가온이 일단 묵묵히 보안실장의 말을 경청했다. 머릿속은 꽤나 복잡해졌지만, 여느 때처럼 무덤덤한 얼굴에는 동요하는 기색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았다.

볕이 잘 드는 완만한 산중턱에, 크기도 다르고 종류도 다른 각양각색의 나무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늘어서 있었다. 그 사이로 천천히 걸어 올라가던 두 사람이 제법 튼실한 벚나무 앞에 멈춰 섰다.

“언니, 나 왔어.”

오랜만이지? 그동안 잘 지냈어? 지난겨울에 눈이 많이 왔었다던데, 춥진 않았어? 조곤조곤 말을 건네는 리사를 힐끔 쳐다보던 지원이, 아무 말 없이 들고 있던 백합 꽃다발을 나무 밑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살짝 짜증이 섞인 눈으로 벚나무를 훑어 내렸다. 올해도 어김없이 꽃은 다 지고 아직 떨어지지 못한 꽃받침만 어수선하게 매달려 있었는데, 그 정돈되지 않은 모습이 지원의 심미안을 아주 불편하게 자극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꽃이 좀 더 늦게 피는 나무를 심을걸. 매번 올 때마다 이게 뭐야? 그렇다고 이미 자리를 잡은 나무를 뽑아낼 수도 없고. 꼭 무덤을 파헤치는 것 같잖아. 못마땅하게 혀를 차던 지원이 저를 빤히 바라보는 리사의 시선을 느끼고는 서둘러 미소를 지었다.

“차지원, 엄마한테 인사 안 해?”

“어머니가 여기 계신 것도 아닌데 인사는 무슨 인사야.”

우리 부모님뿐만이 아니라, 이 공원 전체에는 귀신이 하나도 없어요. 내 차가 주차장에 들어오는 순간 이미 다 튀었거든. 그리고 엄마는 이미 오래전에 환생지문을 통과하셨어. 그걸 뻔히 알면서도 내가 굳이 때맞춰 여기에 오는 건 그냥 이모 마음 편하게 해 주려고 그러는 거라고.

“하여간 인정머리 없는 놈.”

그래도 어릴 때에 비하면 많이 나아진 건가. 한참을 올려다보아야 할 만큼 장성한 조카를 밉지 않게 노려보던 리사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조금 심각해졌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지원의 말투가 묘하게 확신에 차 있는 게 마음에 걸렸다.

“지원아, 너 아직도 귀신 같은 거 보니?”

이모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내심 움찔한 지원이 태연한 얼굴로 입꼬리를 올렸다. 귀신을 보는 것 정도가 아니라 아예 때려잡는 걸 업으로 삼았다고 한다면 기절초풍하겠지.

“가끔.”

미안, 이모. 사실은 자주. 예전에는 그냥 보이는 것만 어쩔 수 없이 봤는데, 이제는 찾아다니기까지 하는 처지라.

“지금이라도 굿을 좀 해 볼까?”

“하하하. 됐어.”

바로 손사래를 친 지원이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렸지만, 리사의 표정은 쉽게 밝아지지 않았다. 너는 웃음이 나오는구나. 멀쩡한 제 조카를 정신병원에 집어넣으려고 했던 작자들을 생각하면, 리사는 아직도 자다가 벌떡 일어날 만큼 열불이 난다.

- 이모, 나 미국으로 가면 안 돼요? 이모가 법적으로 후견인만 돼주면, 이모 귀찮게 안 하고 혼자 알아서 살게요. 이거 놓으세요, 삼촌! 내 집에서 나가! 난 미친 게 아니라고! 놔!

16년이 지난 지금도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어린 조카의 비명이 귓가에 생생하다. 공권력이 가정사에 깊이 관여하지 않던 시절이라 경찰은 도움이 되지 못했고, 서울을 떠난 지 오래여서 달리 손을 내밀 곳도 없었다. 정신없이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날아오는 14시간이 영원처럼 길었었다. 다시 울리지 않는 휴대폰을 손에 꼭 쥔 채, 리사는 이미 세상에 없는 언니에게 제발 도와달라며 수만 번도 넘게 애원했었다.

급작스럽게 치러진 언니 부부의 장례식에서 지원을 잘 돌볼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저를 안심시켰던 형부의 가족들은, 불과 한 달도 채 지나기 전에 어린 조카의 재산을 탐내며 본색을 드러냈다. 자수성가해서 엄청난 자산가가 된 형부가 줄기차게 손을 벌리는 동생들을 도와주다 지쳐 결국 완전히 왕래를 끊은 상태였다는 것을, 뉴욕이 본거지인 리사는 알지 못했다.

지원이 아주 어렸을 때 귀신이 보인다는 말을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던 숙부들이 작당하고 지원을 정신병원에 보내기로 합의했다고 했다. 외가 쪽 친척은 미혼인 이모밖에 없으니 후견인 자리를 놓고 다툴 일은 없을 거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휴대폰을 빼앗긴 채 간신히 지하실로 달아나서 문을 걸어 잠그고 있던 지원은, 리사가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스무 시간 가까이 골프채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한때 프로를 꿈꿨을 정도로 골프에 재능이 있던 지원은, 그 이후로 두 번 다시 골프채를 잡지 않았다.

- 아니! 내가 없는 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니까? 쟤가 진짜로 돌아가신 할머니가 보인다고 했었다고! 사람 섬뜩하게 막 죽은 사람 얼굴도 그리고…. 야, 너도 그때 봤지? 미치지 않으면 그런 눈빛이 나올 수가 없어. 그래서 우리는 애를 치료하려고 한 거란 말입니다. 그럼, 아픈 애를 그냥 놔둬요? 애를 건강하게 키우는 게 보호자의 의무인데?

실핏줄이 다 터져서 눈이 벌겋게 된 지원이 제 얼굴을 보자마자 그대로 풀썩 쓰러지던 끔찍한 광경을, 리사는 아마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다행히 후견인변경소송은 어렵지 않았다. 리사는 당장 대한민국 최고의 로펌에 소송을 맡겼고, 어린 조카의 재산에 눈이 뒤집혔을 정도로 가진 게 별로 없던 지원의 숙부들은 당연히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친가 사람들과는 두 번 다시 상종하지 않겠다는 지원의 의지가 너무나도 확고했다.

- 저한테 가족은 이모뿐입니다. 다른 분들은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앞으로도 그렇게 생각할 일은 절대로 없을 거니까 뻔뻔하게 가족 운운하지 마세요. 이유는…, 당신들도 알잖아.

소송이 끝나자마자 그대로 짐을 꾸린 지원은 리사를 따라 뉴욕으로 갔다. 함께 보냈던 시간이 별로 없어서 처음에는 조금 어색하기도 했지만, 서로를 진정한 가족으로 받아들이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만약에 내가 그때 그 전화를 못 받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벨이 울렸던 건 중요한 회의가 시작되기 5분 전이었다. 회의 중에는 전화가 오는 걸 알아도 무시했을 테니, 아주 조금만 타이밍이 어긋났다면 다시는 지원을 찾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것들이 문짝을 뜯어내고 애를 끌어내기라도 했었다면…. 여전히 등에 식은땀이 나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가정이다.

그래, 그런 걸 생각하면 아무 일 없이 이만큼 큰 것도 감사할 일이긴 한데. 사람 욕심이 참 끝도 없어. 이렇게 멀끔하게 자란 걸 보고 있으니까, 이왕이면 든든하게 옆자리도 채웠으면 좋겠고….

“만나는 여자는 없어? 너는 어떻게 나이 서른에 이런 날 부모님한테 데려올 애인 하나가 없니? 얼굴이 아깝다, 진짜.”

“말했잖아. 마음이 좀 가다가도 내 돈에 침 흘리는 거 눈에 보이면 바로 식는다고.”

“그런 건 어느 정도는 감수해야지. 세상에 돈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딨어? 그게 정 거슬리면 너보다 돈이 많은 여자를 만나든가.”

“아이고, 우리 윤 여사 아직도 이렇게 순진하셔서 어떡해? 대한민국에서 내 나이에 나보다 돈이 많으려면 재벌 따님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그런 집안에서는 나 같은 잔챙이는 취급 안 해요. 온갖 고난과 역경을 헤치고 사랑을 쟁취하는 건 내 스타일도 아니고. 모양 빠지잖아.”

지원이 유들유들 웃으며 능청스럽게 대꾸하고 있는데, 불현듯 템포는 느리지만 묘하게 긴박감이 넘치는 멜로디가 들려왔다. 아, 이건 제니스에서 오는 전환데…. 최대한 자연스럽게 액정을 확인한 지원이 보일 듯 말 듯 미세하게 눈썹을 찡그렸다.

연해수…. 이 자식은 왜 꼭 나 쉴 때만 골라서 전화를 하지? 내가 사무실에 있을 때는 훈련이다 뭐다 들개처럼 싸돌아다니더니. 마냥 귀여움받고 자란 놈이라 그런지 어려운 사람도 없고. 학교 후배들이나 군대 후임들은 나한테 말도 못 붙였었는데, 이건 뭘 몰라서 겁이 없는 건가. 하아, 애초에 들러붙을 여지를 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답지 않게 사내자식 찔찔 짜는 거에 마음이 약해져서는….

-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고작 맥주 한 잔을 마시고는 강아지처럼 동그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길래, 어려서 사고로 잃은 형이라도 있었나 했다. 냉정하기가 칼바람 같은 천하의 차지원도 그런 종류의 아픔에는 모질지 못해서 꼴리는 대로 하라고 했던 게 화근이었다. 알고 보니 평상시에는 감당이 안 될 정도로 텐션이 높다가, 술만 처먹으면 세상 서러움을 다 끌어안은 양 마냥 촉촉해지는 게 해수의 주사였다.

“이모, 잠깐만.”

일단 차분하게 양해를 구한 지원이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느긋하게 걷기 시작했다. 대화의 내용이 들리지 않을 만큼 리사에게서 멀어지는 동안 전화가 한 번 끊겼다가 3초도 지나지 않아 다시 울렸다. 새끼, 재촉하기는. 받는다, 받아. 확실한 용건이 있을 땐 연결이 될 때까지 전화를 하는 놈이니, 아예 전원을 끄지 않는 한은 받을 수밖에 없다.

“왜.”

[형! 지금 바쁘세요?]

“안 바쁘지만, 너한테 낼 시간은 없어. 나 오늘부터 열흘간 휴가야.”

가이드 노릇을 시작한 지 반년 만에 처음으로 낸 휴가였다. 직종의 특성상 따로 정해진 근로 시간은 없었고, 대부분 일반 가이드의 선에서 해결되기 때문에 일이 날마다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지원이나 해수 정도 되는 상급 가이드가 반드시 나서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그건 한두 시간 안에 정리되지 않는다. 망자와 며칠씩 실랑이를 하는 경우도 있었고, 어쩔 땐 상급 가이드 3명이 동시에 달라붙기도 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육체적으로 힘에 부칠 정도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정서적인 피로감이 더 컸다. 악착같이 이승에 남으려고 발버둥치는 망자들은 대체로 사연도 많고 한도 많았다. 자신과 상관없는 이들의 사정에는 일절 관심을 두지 않았던 지원이지만, 이쪽 일을 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개인의 아주 내밀한 부분까지 알게 되고 때로는 관여하게 되는 경우가 잦았다.

타인의 감정에 휘둘리는 경우가 거의 없는 지원이었지만, 암울하고 어두운 사정을 계속 접하는 건 다소 지치는 일이었다. 관리부의 권고대로 이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주기적인 휴식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지원은 즉시 휴가원을 제출했고, 오늘이 바로 그 소중한 휴가의 첫날이었다. 그러니 오늘은 해수가 뭐라고 혓바닥을 털어도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네. 그건 저도 아는데요. 맹세코 작정한 건 진짜 아니고요…. 제가 지금 살짝 곤란한 상황인데, 마침 형이 지척에 계셔서요.]

심드렁한 얼굴로 목덜미를 주무르던 지원이 순간 눈썹을 확 치켜떴다. 이 자식이 지금 무슨 소름 끼치는 소리를 하는 거야?

“지척이라니. 너 나 위치 추적도 하냐?”

[아이고, 아니요. 무슨 그런 징그러운 말씀을…. 오늘 부모님 기일이라면서요, 그럼 지금 용인에 계실 거잖아요. 저도 마침 용인에 있거든요. 그러니까 잠깐 와서 저 좀 도와주세요, 형. 네?]

“싫어.”

[아, 혀엉! 저 지금 열네 시간 동안 추격한 망자를 놓치게 생겼다고요!]

열네 시간…. 해수의 애원에 잠깐 흔들렸던 지원이 곧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저보다 한참 어리지만 경력은 훨씬 긴 해수가 열네 시간이나 쫓고도 잡지 못한 망자라면, 저 역시 고전할 가능성이 크다. 아무리 체력에 자신이 있다 해도 장거리 여행을 앞둔 만큼 밤을 새는 것만은 사양하고 싶었다.

“그건 네 사정이고. 나 내일 비행기 탈 거라 일찍 쉬어야 해. 서도겸 불러.”

[안 그래도 전화했는데 안 받아요. 급해요, 형. 망자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 제가 지금 총을 막 쏘기가 좀 그래서…. 무슨 무기 단속 기간 같은 건가 봐요. 여기저기 플래카드도 붙어 있고, 무장한 경찰들이 산 밑에 쫙 깔렸어요. 이럴 때 총성 울리면 바로 잡혀가는 거 아니에요?]

경찰의 눈에 띄면 확실히 귀찮아지기는 하겠지만…. 곁눈질로 리사의 위치를 확인한 지원이 슬쩍 입을 가리며 목소리를 조금 더 낮췄다. 아직까지는 리사가 이 통화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지만, 혹시라도 대화의 내용을 알게 되는 날엔 등짝 몇 대 맞는 걸로는 끝나지 않는다.

“어차피 비비탄총이니까 상관없잖아. 사람한테 대고 쏘는 것도 아니고.”

[그게….]

말끝을 흐린 해수가 난처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어물거리자, 지원의 매끈한 이마가 확 구겨졌다. 순간 왠지 모를 불길함이 서늘하게 등줄기를 훑었다.

“왜, 뭐! 너 또 무슨 짓 했어! 혹시 실탄 들고 나왔냐?”

[아니요! 그런 건 아니지만…, 탄 무게가 아주 미세하게 총포화약법 위반이라….]

“야, 이 미친 새끼야! 정신 나갔어?”

[딱 0.05g 더 나가요. 0.2g짜리는 너무 가벼워서 바깥에서는 조준이 잘 안 되는데 어떡해요, 그럼.]

“아아….”

거칠게 마른세수를 한 지원이 탄식 같은 한숨을 토해냈다. 물론 0.05g 차이라면 육안으로 구별이 가능한 정도는 아니고, 혹시 적발되더라도 그걸로 징역까지 살게 될 확률은 희박하다. 하지만 해수의 입장은 남들과 다르다. 요즘같이 천지 사방에 눈과 입이 달린 시대에, 국가대표 사격 선수가 다른 것도 아니고 총포화약법을 위반해서 벌금이라도 내게 되면…. 상상만으로도 눈앞이 아찔했다.

문제는, 집요하기가 이단의 포교 활동 뺨치는 연해수는 행여나 망자를 놓칠 상황이 오면 앞뒤 생각하지 않고 총을 쏠 수도 있는 인간이라는 점이다. 이게 진짜 세상의 쓴맛을 아직 못 봤지. 이래서 애들을 오냐오냐 키우면 안 되는 건데. 당최 무서운 게 없어.

차마 이모 앞에서는 입 밖에 낼 수 없는 험악한 욕설을 속으로만 거하게 시전한 지원이 어쩔 수 없이 한발 물러섰다.

“GPS 좌표 찍어 보내, 새끼야.”

[정말요?! 진짜 오시는 거죠? 형, 사랑해요!]

“닥쳐. 끊어.”

어금니를 사리물며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 뜬 지원이, 빠른 걸음으로 리사에게 다가가며 최대한 순한 표정을 만들어냈다. 미안한 마음은 진심이라 그것까지 가장할 필요는 없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모, 어쩌지? 나 급한 일이 생겨서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저녁 같이 못 먹겠다. 대신 내일 아침 일찍 호텔로 갈게.”

“네가 급한 일 생길 게 뭐가 있는데? 갤러리 일이야?”

“아니, 다른 일.”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던 리사가 불현듯 매섭게 눈을 치켜떴다. 가만히 숨만 쉬고 있어도 알아서 증식하는 재산을 가지고 있는 애가 대체 왜 투잡을 뛰어?

“다른 일? 네가 다른 일을 왜 하는데? 너 혹시 노름하니?”

“하, 제가 무슨 노름 같은 걸 합니까.”

“도박 빚 때문에 사채꾼한테 급전 끌어다 쓴 거 아닌 이상, 네가 당장 현찰 필요할 일이 뭐가 있는데?”

“돈 때문에 하는 건 아니고. 뭐, 일종의 재능 기부랄까….”

지원의 불분명한 대답에 눈을 가늘게 뜬 리사가 더욱 수상하다는 눈빛을 했다. 지원은 누군가와 사적으로 끈끈하게 감정을 교류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가급적 남한테 피해가 가는 행동을 하지 않는 만큼, 누가 제게 폐를 끼치는 것도 대단히 싫어했다. 호의 역시 마찬가지여서 쉽게 베풀지 않았고, 받는 것은 더욱 꺼려했다. 그랬던 애가 재능 기부라니. 사자가 채식주의자가 되겠다고 선언하는 것만큼이나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따랑. 의심이 가득 담긴 눈초리를 슬쩍 피하며 메시지를 확인한 지원이 짧게 혀를 찼다. 이 자식 진짜 코앞에 있네. 차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그냥 산을 넘어가는 게 빠르겠는데? 망할, 벨루티 신고 등산이라니. 하여간 이 애물단지 때문에 진짜 별짓을 다 한다, 내가. 4개월이나 기다려서 받은 건데 다 망가지겠네. 아아…. 그 새끼는 이게 얼마짜리 구두인지 알기나 할까.

“이모. 나 진짜 좀 급해서….”

“알았으니까 일단 가고, 나중에 제대로 설명해.”

“정말 미안해, 이모. 차는 이모가 타고 가. 전화할게.”

엉겁결에 지원이 던진 키를 받아든 리사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우거진 풀숲 쪽으로 뛰어드는 지원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야, 차지원! 너 지금 어딜…. 아니, 쟤가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길래 길도 없는 산속으로 펄펄 뛰어가? 고라니야?”

잠시 숨을 고르던 지원이 매끈하던 송아지 가죽에 길게 스크래치가 난 걸 확인하고는 빠드득 소리가 나게 이를 갈았다. 위치는 대충 이쯤이 맞는 것 같은데….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니, 커다란 나무 뒤로 눈에 익은 동그란 머리통이 얼핏 보였다.

“연해수.”

“형! 어떻게 이렇게 빨리…. 아흑.”

반색하며 다가오는 해수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친 지원이 우선 급한 용건부터 물었다.

“족치는 건 나중에 제대로 하자. 망자는.”

“저기 나무 위에요. 얼굴 보여요?”

해수가 가리키는 곳을 날카롭게 응시하던 지원이 짧게 대꾸했다.

“보여.”

사망한 지 족히 10년은 된 것 같은 망자였다. 대단한데? 서울하고 이렇게 가까운데 여태 안 잡히고 잘도 버티고 있었네. 흑화된 정도를 보니 사람도 이미 여럿 해치셨고. 갓 스물이나 넘었을까 싶은 젊은 여자가 무슨 한이 그리 많아서 이렇게 악령이 되면서까지…. 아니야. 한을 품은 여자의 사연 같은 건 정말 격하게 모르고 싶다고, 나는.

예리한 시선으로 망자의 얼굴을 살피던 지원이,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해수가 손을 쓰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여유작작하던 망자는, 한눈에도 기세가 범상치 않은 지원의 등장에 한껏 긴장한 듯했다. 축 처진 어깨를 가볍게 외면한 지원이 안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빠르게 망자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좋은 곳으로 가지 못할 게 분명한 경우라 입맛이 조금 썼지만, 하얀 종이를 빼곡하게 채우는 손놀림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이렇게 와 줘서 진짜 고마워요, 형. 놓칠까 봐 불안해서 그냥 총을 쏠까 말까 엄청 고민했거든요.”

“뭐, 이 미친놈아? 너한테는 진짜 내일이 없냐? 벌금 몇백, 별거 아닌 거 같아? 너 그거 빨간줄 생기는 거야. 전과자 되는 거라고. 재수 없으면 국가대표 탈락할 수도 있어.”

“아, 그런 문제도 있었구나. 그러고 보니까 조금 있으면 올림픽 선발전이네.”

매섭게 쏘아붙이면서도 손을 쉬지 않던 지원이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해수를 쳐다보며 헛바람을 내뱉었다. 인간의 사고가 이렇게까지 단순할 수도 있다니. 새삼 감탄스러웠다.

“하, 그래. 넌 참 세상 근심 걱정 하나 없이 뱃속 편해서 좋겠다. 너희 부모님은 이런 험한 세상에서 어쩜 이렇게 아들을 해맑게 키우셨니, 응?”

“으음, 칭찬이에요?”

“욕이야!”

버럭 소리를 내지른 지원이 순식간에 완성된 초상화를 거칠게 북 뜯어내고는 반으로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산림 안에서 불을 붙일 수는 없으니 일단 산에서 내려가야 했다.

“왜 안 태우세요? 서둘러야 돼요, 형. 사람을 여덟 명이나 죽인 악령이라고요.”

“개 눈에는 똥밖에 안 보인다더니. 네 눈에는 불법 무기 단속 플래카드만 보였냐? 지금 산불 조심 강조 기간이거든? 여기서 내가 라이터 꺼내서 불붙이면 너랑 나랑 사이좋게 쇠고랑 차는 거야. 나는 몰라도 너는 확실히 뉴스에 나온다고.”

“아하.”

“아하? 어휴, 됐다.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냐.”

완전히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지원이, 망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망자분, 제 말 들리시죠?”

여자는 잠시 움찔했지만 애써 못 들은 척 딴청을 부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은 지원은, 기계적인 말투로 제니스 원칙을 고지했다.

“중천 소속 가이드 차지원입니다. 귀하는 현재 이승에 머물 수 없는 망자의 신분으로, 즉시 중천으로 이동하여 생전의 공과에 대한 판정을 받아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공과는 계속 기록되고 있으며, 가이드의 지시에 따르지 않거나 도주할 경우 향후 행선지 결정에 큰 불이익을 받을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또한 지금부터는 가이드 직권으로 강제적인 소환 절차를 진행할 수도 있다는 점을….”

“저기요, 잠시만요! 절대로 도망가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제 얘기 좀 들어주세요. 저도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요.”

돌아가는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여자가 단숨에 날아왔다. 그리고는 지원의 팔을 붙들고 간절하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듣는 사람의 마음도 울컥하게 만드는 처절한 애원에 해수의 낯빛이 조금 흐려졌지만,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지원은 냉정하게 여자의 손을 떼어냈다.

세상에 사연이 없는 사람은 없지. 물질계에 이만큼이나 영향을 끼치는 망자는 특히 더 이승에 남아 있으면 안 되고.

“딱 한 명 남았어요. 한 명만 더 죽이면 복수가 끝나요. 그것만 성공하면 중천이든 지옥이든 어디든 갈게요. 그러니까 며칠만 기다려주세요, 네? 부탁해요, 제발.”

“그런 말씀을 하시니 더 서둘러야겠네요.”

“사람을 개처럼 때려죽였어요! 내 동생을, 착하고 순한 내 동생을! 여섯 명이 둘러싸고 때려죽였다고! 그래놓고 뭐랬는지 알아? 재미로 그랬대. 숨을 못 쉬겠다고 컥컥거리는 게 웃겨서 그랬대! 그 악마 같은 것들이 과실 치사로 고작 2년을 살았어. 그러고 나서는 지금까지 떵떵거리면서 잘 먹고 잘살았다고!”

가슴을 치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여자를 뒤로 한 채, 지원은 빠른 속도로 산을 내려왔다. 바로 화장실에 들어간 지원이 세면대 위에서 초상화에 불을 붙이자, 득달같이 쫓아와 귀가 먹먹할 정도로 악을 쓰며 통곡하던 여자가 순식간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러자 답지 않게 심각한 얼굴로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던 해수가 조금 격양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이드가 할 말은 아니지만, 사실 그런 인간들이라면 죽어도 되는 거 아니에요?”

“너 초등학교 어디 나왔어.”

“그건 갑자기 왜요?”

못내 한심한 눈빛으로 해수를 바라보던 지원이, 엉망이 된 제 구두를 힐끔 확인하고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어린애한테 구두 값 운운하는 건 도저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지만, 오늘 처음 신은 구두를 버린 건 생각할수록 짜증이 났다.

“학교에서 사칙연산 안 배웠어? 한 자릿수 계산이 암산으로 안 돼? 아까 그 여자가 뭐라고 했어. 동생을 죽인 사람이 여섯 명이라고 했지. 그런데 그 여자가 죽인 사람은 여덟이라며. 그러고도 한 명이 더 남았다고 했고. 그러면 무고한 사람이 최소 세 명은 죽었다는 뜻이잖아.”

“아….”

“그리고 그 여자 말이 다 사실이라는 보장 있어? 가이드 노릇해서 돈 버는 놈이 망자한테 이렇게 휘둘리면 돼? 망자가 악령이 되면 설혹 본의가 아니더라도 인간사에 해악을 끼치게 마련이야. 그러니까 어떤 사정이 있더라도 가이드는 그냥 절차대로만 하면 돼. 거기에 네 생각 같은 건 끼워 넣지 말라고, 알았어?”

“우와, 형. 방금 대표님 같으셨어요. 물론 형이 훨씬 더 살벌하긴 하지만…. 대표님하고 자주 만나세요?”

자주 만나기는. 두 달 넘게 코빼기도 못 봤다. 지원이 제니스 컴퍼니의 소속이 되고 나서 가온을 마주친 건 딱 네 번이었는데, 그나마도 겨우 인사만 나눈 게 전부다. 심지어는 꽤 바빠 보이던 가온이 멀리서 제 목례에 눈썹만 까딱하고 가버린 적도 있었다.

- 잠깐만요.

새삼 되짚어 보니 지금까지 가온과 대화다운 대화를 했던 건 처음 만났던 날이 유일하다.

- 강제로 끌려온 것도 당황스러웠는데, 이렇게 그냥 가라고 하시니 더 황당하네요. 저한테 무슨 결격 사유가 있습니까?

그것도 대화라기보다는 내가 막무가내로 따진 거였지. 스스로가 생각해도 지나치게 감정적인 말투였지만, 가온의 표정은 일말의 노여움도 없이 그저 평온하기만 했었다. 그게 왜 그렇게 신경을 건드렸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다.

- 그대의 능력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야. 오히려 너무 넘쳐서 탈이지. 우리한테 꼭 필요한 재능인 것도 사실이고. 그럼에도 내가 그대를 그냥 돌려보내려고 하는 건, 이승에 그대를 강하게 붙잡아 둘 존재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 그게 무슨 뜻입니까?

- 이런 일을 하다 보면 아무래도 이승과 저승과의 경계가 흐려지게 마련이지. 이승에 미련이 없는 자는 결정적인 순간에 생에 대한 집착을 보다 쉽게 놓을 수도 있고. 인간의 생명이란 연약하기 그지없어서, 의지를 잃으면 쉽게 꺼지기도 하거든.

- 사람을 잘못 보셨습니다. 저는 뭐든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고, 이승에 미련도 아주 많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존재는 단연 이모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이모보다 먼저는 못 죽어. 이모한테 내 장례까지 치르게 할 수는 없으니까. 리사에 대한 마음이 제 안의 가장 곱고 깨끗한 조각이라면, 숙부들을 향한 통렬한 저주는 가장 악하고 어두운 부분이었다. 그 구질구질한 인간들한테는 동전 한 닢도 줄 수 없고. 그것들한테 재산을 물려줄 바에는 죽기 전에 다 갈아 마시기라도 한다고, 내가.

-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할 수 없는데요. 아예 귀신이 안 보이도록 해 주신다면 모를까, 보이는데 매번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때마다 이렇게 잡아 오실 겁니까? 그럴 거면 차라리 공식적으로 할 수 있게 해 주시죠. 애초에 그러려고 데려오신 것 같은데.

지원의 맹랑한 요구에 언제부턴가 웃음기를 완전히 잃은 보안실장이 소리 없이 기함했지만, 가온은 그의 말도 나름 일리가 있다고 판단한 듯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가온이 결국 결정을 번복했는데, 당시의 지원은 몰랐지만 흔히 있는 일은 아니었다.

- 갤러리를 운영한다고?

- 네.

- 그럼 그쪽 일도 병행하는 게 조건이야. 갤러리에서 손을 떼거나 하던 일을 소홀히 한다면 중천의 출입도 막겠다. 권 실장, 서 감독 옆에 자리 하나 더 만들게.

물론 그렇게 부득부득 고집을 피운 결과가 마냥 흡족한 건 아니었다. 곱게 돌려보내려는 사람한테 괜한 오기를 부렸나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따져보면 실보다는 득이 컸다. 우선 하루하루 무료함을 견디는 게 꽤나 고역이었는데, 매번 사건들이 어찌나 스펙터클한지 적어도 지루할 틈은 없었다.

무엇보다 저와 같은 능력을 가진 동료가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들과 함께 공인받은 일을 하고 있다는 안정감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살아왔지만, 사실 내가 진짜로 정신병자인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은 지원을 꽤 오래 괴롭혔었다.

“가이드가 대표님하고 만날 일이 뭐가 있어서.”

“하긴. 그건 또 그러네요. 형, 오늘은 차 뭐 가지고 오셨어요? 저 구경 좀 시켜주시면 안 돼요?”

나도 좀 더 어렸을 때 이쪽 세상에 발을 들였다면 이 녀석처럼 해맑게 살 수 있었을까?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해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지원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건 천성이지. 이렇게 멋대로 굴면서 미움받지 않는 것도 재능이고. 사람을 쳐내는 일에는 일가견이 있는 지원이었지만, 희한하게도 강아지처럼 엉겨 붙는 해수에게 마냥 매몰차게 굴기는 어려웠다.

“지금 없어. 다른 사람한테 타고 가라고 했어. 네 차 타고 가자.”

“어? 저 오늘 차 없는데…. 형, 날씨도 좋은데 정류장까지 걸어가실래요? 운동 삼아 40분만 걸으면 되는데.”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해수는 지원의 약해지는 마음을 다시금 강퍅하게 만드는 재주 또한 너무나도 탁월했다.

“뭐야, 이 미친 새끼야? 당장 택시 부르지 못해?!”

이모와의 아침 식사는 예상했던 대로 몹시 불편하고 난처했다. 얼버무리는 게 통할 상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는 매서운 추궁에 지원은 일단 환경 감시 비슷한 일이라고 대꾸했다. 저를 잘 아는 이모에게 그럴듯한 변명이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다짜고짜 산속으로 뛰어든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다른 적당한 핑계가 생각나지 않았다.

“네가 몸으로 뛰는 봉사활동을 한다고?”

“뭐…. 어쩌다 보니까. 갤러리 일 때문에 좀 복잡하게 얽혀서.”

“단체 이름이 뭔데?”

“이름…. 어…, 제니스 컴퍼니에서 운영하는 단체야. 그래서 제니스 본사 건물에 내 책상도 있어. 물론 자주 가진 않지만.”

“그래?”

리사의 눈에서 의심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제니스라는 이름의 위용은 대단했다. 리사는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서 거론하지 않았고, 두 사람은 그럭저럭 화기애애하게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곧 뉴욕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모와 서둘러 작별하고 도망치듯 호텔을 빠져나오던 지원은, 뜻밖의 전화가 걸려오자 짜증스럽게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 진짜. 나 지금 휴가라니까.

“하아, 차지원입니다.”

[차 관장님…, 쿨럭. 권현호입니다. 휴가 중에 정말 죄송하지만…. 쿨럭쿨럭. 오늘 대표님의 영국 출장에 동행하실 수 있겠습니까?]

처음에는 기침 소리 때문에 용건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전화를 건 보안실장이 그 몇 마디 안 되는 말을 하면서도 얼마나 심하게 기침을 해대는지 이러다 폐가 뽑히는 건 아닐까 우려될 정도였다.

그런데…, 이 양반이 방금 나한테 뭘 하라고 한 거지? 영국 출장? 대표님하고?! 보안실장의 말을 천천히 곱씹던 지원이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오늘이요?”

[쿨럭. 네. 체스터에 일이 좀 생겨서요. 마침 런던에 가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사흘만 시간을 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차 관장님은 그저 만약을 대비해서 대표님 옆에 계시기만 하면 됩니다. 현지에 도착하면 이동을 책임질 직원이 나올 거고, 숙식 관련해서도 따로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그런 게 문제가 아니라…. 그걸 왜 저한테.”

공교롭게도 보안실장을 비롯한 비서진 전부가 지독한 독감에 걸려 앓아누웠다고 했다. 일정을 연기하는 것도 간단한 일은 아니라 할 수 없이 중천주의 업무를 보조할 수 있는 가이드 중에서 급하게 대체자를 찾는 중인데, 그중 영어권 문화에 가장 익숙한 사람이 지원이라는 거였다.

뭐, 사정이 급한 건 알겠지만…. 아무리 사람이 없어도 그렇지, 나를 뭘 믿고 이런 일을 맡겨?

“대표님도 제가 괜찮다고 하시던가요?”

[대표님은 원래 사람이든 물건이든 가리는 게 별로 없으십니다.]

그래? 보기에는 되게 예민한 것 같았는데 의외네. 누굴 보좌하는 건 별로 자신 있는 분야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어차피 가는 길이고 상대가 무던한 성격이라면 단순히 동행하는 것 정도는 못 할 것도 없나? 일정을 빡빡하게 잡은 것도 아니니까 사흘 정도 시간을 내는 건 어렵지 않고….

잠시 고민하던 지원이 보안실장의 요청을 들어주기로 결정했다. 원래 무언가를 할까 말까 고민스러울 땐 대체로 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 편이었고, 주로 중천에서 시간을 보내는 중천주가 외국으로 출장을 가면서까지 하는 일은 어떤 것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모시고 가죠. 몇 시 비행기입니까?”

[아, 정말 감사합니다. 출발은 2시인데 그전에 먼저….]

그러나 지원이 자신의 호기로움을 후회하기까지는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못내 미안한 기색이던 보안실장은 지원의 승낙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마치 기다렸다는 듯 주의 사항을 줄줄 쏟아내기 시작했는데, 내용이 얼마나 다채롭고 디테일한지 다 기억을 할 수가 없어서 중간에 녹음을 해야 할 정도였다.

뭐야, 그냥 옆에 있기만 하면 된다더니. 아침저녁으로 혈압까지 재라고? 허, 수행이 아니라 수발을 들어야 한다는 뜻이었네. 하지만 ‘속았다’라는 생각이 들었을 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제가 알려드릴 것은 이 정도이고, 자세한 설명은 대표님의 생활 전반을 책임지고 있는 권 여사님께 들으십시오.]

여태 들은 것만 해도 상세하기가 보험 약관 수준인데, 더 들을 게 있어? 기가 막혔던 지원이 헛바람을 토해내자, 보안실장은 행여나 그가 결정을 번복할까 염려가 되었는지 서둘러 통화를 종료했다. 어처구니없는 얼굴을 한 지원이 끊어진 전화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는데,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낯선 주소가 담긴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가공할 만한 속도였다.

“이 음흉한 노인네…, 손 빠른 것 좀 봐.”

선뜻 손이 나가진 않았지만 길바닥에서 계속 미적거릴 수는 없는 노릇이라 지원은 일단 시동을 걸었다. 집에 들렀다 가느라 상당 거리를 돌아야 했는데도, 오늘따라 신호까지 일사천리여서 목적지까지는 금방이었다. 한번 결론 내린 일을 가지고 계속 고민하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가는 내내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살면서 한 번도 누굴 돌봐 본 적이 없는데, 이렇게 하나에서 열까지 케어하는 일을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그것도 본인 손으로는 전화 한 통도 안 받는다는 사람을…. 중간에 귀찮아져서 막 짜증나면 어쩌지? 그렇다고 직장 상사를 출장지에 버려두고 도망갈 수도 없고. 망할, 처음에 거절했어야 했는데.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안내를 종료합니다.]

속도 모르는 내비게이션의 발랄한 종료 멘트를 듣고 있자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영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차에서 내려선 지원은 높이가 제 키의 두 배도 넘는 커다란 대문을 살짝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위압적인 문 위에는 엄청난 크기의 현판까지 붙어 있었는데, 대충 봐도 두께가 족히 한 뼘은 될 것 같았다.

無影堂(무영당). 그림자가 없는 집이라…. 이름 한 번 거창하네. 미처 벨을 누르기도 전에 스르르 열리는 대문 앞에서 잠시 멈칫했던 지원은, 투박한 대문 안쪽에 펼쳐진 엄청난 절경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름대로 햇살이 가득한 넓은 정원에는 갖가지 꽃나무가 그야말로 별천지를 이루고 있었는데, 무릉도원이라는 단어를 실물로 구현한다면 딱 이런 모습일 것 같았다.

대체 여기 정원사는 연봉을 얼마나 받을까? 색색의 야생화로 아기자기하게 장식된 꽃길을 따라 걸으며 지원은 몇 번이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앙증맞은 꽃들의 소박한 자태는 얼핏 자연 그대로인 것처럼 보였지만, 이렇게 종류가 다양한 야생화가 동시에 피는 건 사람이 손을 대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어휴. 이거 완전 노가다 빨…. 생육 조건이 다 달라서 물 주는 것도 일일 텐데.”

아는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극악한 꽃길의 끝에는 사극에 나오는 어느 고관대작의 집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으리으리한 대저택이 떡 버티고 있었는데, 그 넓은 집을 얼마나 쓸고 닦는지 기단부터 처마까지 먼지 한 올 앉은 곳이 없었다. 지원은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의 정성과 노고가 안쓰러워 혀를 끌끌 찼다.

이게 말로만 듣던 아흔아홉 칸짜리 저택인가? 돈을 얼마나 처발라서 지은 거야? 기둥은 다 궁궐에서나 쓰던 최고급 적송이고…. 이 정도 굵기의 목재는 모으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이야, 기와 때깔 좀 봐라. 거의 도자기 급이네. 서울 땅에 이런 집을 짓고 사는 사람도 있구나. 그것도 이렇게 땅값 비싼 동네에…. 중천보다 오히려 여기가 더 현실감이 떨어지는데?

“차지원 관장님?”

건물 구석구석을 흥미롭게 살펴보던 지원이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내가 지금 여길 구경하러 온 게 아니지. 재빨리 표정을 정돈하고 고개를 돌리자, 푸근한 인상을 가진 단아한 여인이 온화하게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초면인데도 낯설지 않은 느낌에 지원은 하마터면 소리를 내어 웃을 뻔했다.

저분이 이 집의 실권자라는 권 여사님이시군. 권씨라길래 혹시나 했는데, 눈매가 보안실장이랑 판박이시네. 핏줄이라는 게 이렇게 무서워. 면전에서 사람을 눈으로 발라내는 것도 똑같으시고, 대놓고 탐색하면서도 끝까지 웃는 얼굴인 것도 그렇고.

“처음 뵙겠습니다. 보안실장님 연락 받고 대표님 모시러 왔습니다.”

“어서 오세요. 휴가 중이라고 들었는데 고생이 많으시네요.”

아니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지만, 차마 그렇다고 대답할 수도 없었던 지원은 그저 빙긋이 웃기만 했다. 예의와 가식을 적당히 버무린 것 같은 지원의 미소에 희주의 눈썹이 살짝 들렸다. 고분고분한 녀석은 아니라더니….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다는 언행이 점잖고 눈치도 빨라 보이는군. 패션 센스도 아주 훌륭하고. 적어도 해수 녀석처럼 대표님한테 캐릭터 양말 신길 일은 없겠어. 급하게 구한 대타치고는 쓸 만하네. 그럭저럭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희주가 준비해뒀던 커다란 가방을 내밀었다.

“이 여행 가방은 호텔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정리하시면 됩니다. 이너백은 다 꺼내서 화장대 위에 올려두세요. 화장품은 눈에 안 띄면 굳이 찾지 않으시니 화장품 파우치는 꼭 지퍼를 열어두시고요. 겉옷은 바로 런드리 서비스를 맡기셔야 합니다. 대표님은 보통 옷장을 열어서 가장 먼저 손에 잡히는 옷을 입으시는데, 구겨지거나 심지어는 찢어진 것도 전혀 모르시거든요.”

잠자코 경청하던 지원이 미세하게 얼굴을 굳혔다. 각오했던 것보다 훨씬 더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당부였다. 옷을 손에 잡히는 대로 입어? 볼 때마다 시즌 신상으로 빼입고 있지 않았나? 그리고 화장은 전혀 안 하는 것 같았는데…. 설마 기초 화장품도 제대로 안 바른다는 얘긴가? 아…, 이거 진짜 쉽지 않겠는데? 이건 수발도 아니고 거의 육아 수준이잖아!

“끼니를 챙기는 일에도 별로 열심이 없으신 분이라…. 내버려 두면 허기진 줄도 모르고 넘어가시는 경우가 빈번하니 적어도 하루에 두 끼는 꼭 챙겨주셔야 합니다.”

그거야, 뭐. 나 배고플 때 같이 먹자고 권하면 되겠지만. 이런 집에 사는 사람의 입맛이 서구적일 것 같지는 않고. 런던이면 몰라도 체스터에서 한식만 찾으면 곤란한데….

“못 드시는 음식은 없습니까?”

“네. 대표님은 뭐든 식탁에 올라오는 대로 가리지 않고 드십니다.”

“좋아하시는 음식은….”

“특별히 따로 찾는 건 없으십니다. 그러니 알아서 골고루 챙겨드려야 합니다.”

“아…, 네. 그럼 비행 중엔 보통 뭘 하십니까? 즐겨 보시는 책이나 영화 같은 걸 준비해야 할까요?”

“아마 그냥 쉬실 겁니다. 평소에는 문화생활을 즐길 만한 여유가 별로 없어서 그런 쪽으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으십니다.”

아니. 무슨 수도승의 삶이야? 즐겨 먹는 음식도 없고, 취미도 없어? 자기 생활은 하나도 없이, 하루 종일 진상 귀신 때려잡는 일만 한다고? 사람이 그렇게 살아도 멀쩡할 수가 있나?

괜스레 마음이 안 좋아진 지원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속이 꽉 막히는 기분이었지만, 덕분에 각오를 다지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다. 어차피 일이 이렇게까지 커진 이상 되돌리기는 늦었고…. 좋아, 며칠만 눈 딱 감고 잘해 주자. 군대에서 그 더러운 꼴도 겪었는데 고작 사흘을 못 참겠어? 아무리 손끝으로 사람 부리는 일에 익숙한 인간이라도 설마 김병장 그 개새끼만 할까.

“술은 한 잔도 못 하시니 그것만 조심하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이 파우치는 차 관장님이 항시 휴대하셔야 합니다. 여권과 휴대폰, 그리고 비상약과 간단한 의료용품이 들어있습니다. 이건 휴대용 혈압계인데 하루에 두 번….”

“그건 보안실장님께 들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시자마자, 그리고 주무시기 직전에.”

“네. 사용법은 간단합니다. 설명서를 한 번만 읽어보시면 될 거예요. 그리고 이건….”

희주가 내미는 작은 약통을 빤히 바라보던 지원이 저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구겼다. 라벨에 쓰인 건 지원에게도 익숙한 이름이었다.

“…수면제네요.”

“상시 복용하시는 건 아니고, 정말 몸이 피곤한데 잠이 오지 않으실 때만 한 알씩 드십니다. 한번 불면증이 오면 며칠씩 못 주무시기도 해서…. 그렇게 버티는 것보다는 차라리 약을 드시는 게 낫다고 주치의가 처방했습니다. 잘 가지고 계시다가 대표님이 찾으시면 드리세요.”

며칠씩 잠을 못 잔다고…. 그러고도 잠이 안 와서 이 독한 걸 먹는다고. 어지간한 수면제는 이제 안 듣는다는 얘기네. 그래, 사람이 그렇게 살면 멀쩡할 수가 없지. 이번만큼은 이상하게도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아 잠시 뜸을 들이고 있는데, 등 뒤에서 작고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 관장.”

한숨처럼 가느다란 목소리의 주인은 놀랍게도 가온이었다. 옆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주눅 들게 만들던 매서운 눈초리와 준엄한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이 그저 순하고 조용조용한 모습이었는데, 망자의 목에 살벌하게 칼을 들이대며 불호령을 내리던 이와 동일 인물이라는 게 도통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차림새 역시 칼같이 각이 잡혔던 평소와는 확연히 달랐다. 머리를 풀고 품이 넉넉한 카디건을 걸치고 있는 걸 보니, 딱 이십 대 초반의 대학생처럼 보였다. 원래 이렇게 어려 보이는 얼굴이었나? 길거리에서 만났으면 못 알아보고 지나쳤을 수도 있겠는데?

“안녕하십니까.”

“응.”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 지원은, 나직한 목소리로 대꾸한 가온이 아직 덜 마른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소매가 올라가며 손목이 슬쩍 드러난 순간 지원의 가지런한 눈썹이 작게 꿈틀거렸다. 마른 편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파란 핏줄이 도드라진 하얀 손목은 가늘다 못해 앙상한 지경이었다. 마음먹고 힘을 주면 부러뜨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 검…. 무게가 상당해 보이던데, 저 손목으로 그걸 어떻게 휘두르지? 의외로 통뼈인가?

“휴가였다던데.”

“괜찮습니다. 마침 저도 런던에 일이 있어서 오늘 저녁에 출국할 예정이었습니다.”

“갤러리 일?”

“네. 소더비에 에밀 갈레 화병이 하나 나온다고 해서요. 지금 구상 중인 가을 전시 콘셉트에 어울릴 만한 작품이긴 한데, 한두 푼짜리도 아니니까 구입하기 전에 실물을 봐야죠.”

지원의 대답에 가온이 아주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말을 잘 듣는 기특한 어린아이를 바라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착하네. 속삭이듯 덧붙이는 말에 지원은 일순 몹시 복잡하고도 묘한 양가감정을 느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기억은 하고 있었네? 하지만 내가 꼭 당신이 한 말 때문에 갤러리 일을 더 열심히 하는 건 아니라고. 착하다니, 내가 무슨 미취학 아동이야? 그런데…, 진짜 애새끼처럼 칭찬 한마디 들었다고 속도 없이 좋아하는 나는 또 뭐냐. 나이 서른에.

“중요한 일인 것 같은데. 나 혼자 움직여도 되니까 차 관장은 그 볼일 보러 가도 돼.”

“아닙니다. 경매는 다음 주니까 그전에만 가면 됩니다.”

아니. 만약에 내가 진짜로 내 볼일을 보러 가버리면 당신이 문제가 아니라 이 권씨 남매가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대번에 안색이 변한 희주가 어림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대표님 혼자 다니시는 건 말도 안 됩니다. 더구나 외국에서…. 정말 그러실 거라면 저라도 쫓아가겠습니다.”

“고소공포증 때문에 다락에도 못 올라가는 사람이 비행기를 어찌 타려고?”

“그러니까 왜 이렇게 사람 마음을 졸이세요, 네?”

“휴가 중인 사람 불러낸 게 미안해서 그랬어. 어차피 런던에 도착하면 제이든이 나올 거잖아.”

저기요, 대표님. 그런 말이 통할 것 같으면 애초에 제가 이 자리에 불려올 일이 없지 않았을까요? 두 사람의 설전을 가만히 지켜보던 지원이 아무 말 없이 파우치를 챙겨서 제 가방에 넣었다. 대충 봐도 가온의 주장이 먹힐 분위기는 아니었다.

“대표님, 정말 이러실 거예요? 그때 홍콩에서도….”

“자네는 대체 그 얘기를 언제까지 할 거야?”

“죽을 때까지 할 거고, 인수인계서에도 써 놓을 겁니다. 그러니까 절대로 혼자 다니시지 않겠다고 약속하세요, 어서요.”

“하아, 알았어. 차 관장 옆에 꼭 붙어 다닐게.”

“나중에 다 확인하는 방법이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알았다니까.”

지원이 트렁크에 짐을 싣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잔소리를 늘어놓던 희주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가온이 그녀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이고 나서야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도 얼마나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는지 지원의 마음이 다 불안해질 정도였다.

오가는 것까지 포함해서 고작 닷새짜리 출장인데, 저렇게 유난을 떨 일이야? 이 출장에 내가 모르는 엄청난 위험 요소라도 있나? 큰길로 나가기 직전에 사이드 미러를 힐끔 쳐다보니, 여전히 대문 앞에 선 희주가 하염없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한참 멀어진 터라 실루엣만 보이는 정도였는데도, 그녀의 조바심과 염려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두 사람은 대체 무슨 관계일까? 단순한 고용 관계라고 보기에는 정도 이상으로 애틋하고, 그렇다고 혈연이라기에는 지나치게 깍듯하고. 홍콩에서는 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가만…. 근데 나 지금 이게 웬 쓸데없는 호기심이야? 남의 사생활에. 퍼뜩 정신을 차린 지원이 계속 꼬리를 물던 질문들을 싹둑 잘라냈다. 그리고는 오로지 전방만을 주시한 채 운전에 집중했다. 고요하기만 한 뒷좌석의 상황이 살짝 궁금했지만 굳이 고개를 돌려 확인하진 않았다.

좌석 벨트 사인이 꺼짐과 동시에 승무원을 불러 침구 세팅을 요청한 가온은 매트리스가 깔리자마자 창문 덮개를 모두 내렸다. 잠옷까지 갈아입고 자리에 눕는 걸 보니 작정하고 잠을 자려는 것 같았다.

“대표님, 식사는 안 하십니까?”

“나중에. 좀 자고.”

“런던에 도착하면 저녁입니다. 지금 주무시면 시차 적응이 어려우실 것 같은데요.”

“아는데…, 어제 잠을 못 자서. 일곱 시까지 중천에 있었거든.”

이런 기본적인 것까지 일일이 다 챙겨야 하나 싶어 은근히 짜증이 났던 지원이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오늘 아침 일곱 시요?”

“응.”

가온의 무심한 대꾸에 지원은 잠깐 말문이 막혔다. 그러고 보니 오늘 처음 봤을 때부터 안색이 좋지 않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밝은 곳에서 만난 건 처음이라 상대적으로 피부 톤이 창백하게 보이는 건가 했는데…. 하룻밤을 꼬박 새우고 나서 장거리 출장이라니. 생각보다 훨씬 높은 업무 강도에 놀란 지원은 이불을 끌어 올리는 가온을 더는 말리지 못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바로 부르십시오.”

“응.”

“안대는 안 쓰십니까? 문이라도 닫아 드릴까요?”

“아니. 둘 다 됐어.”

속삭이듯 대꾸한 가온이 스르르 눈을 감았다. 바로 잠이 드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지원은 조명과 신발 같은 걸 꼼꼼하게 정리하고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비로소 마음이 좀 편해지는 걸 보니, 안 그런 것 같아도 내심 긴장했던 모양이었다.

아…, 진짜 파란만장한 하루였다. 아직 그 하루가 다 끝난 것도 아니라는 게 함정이고. 심지어 런던 기준으로 따지면 오늘 하루는 앞으로 열일곱 시간이나 남았네? 의자에 몸을 깊게 묻고 눈을 질끈 감은 채 앓는 소리를 내던 지원이, 문득 허기가 밀려오는 걸 느끼고는 서서히 눈을 떴다.

이모 눈치를 보느라 아침도 부실하게 먹은 데다, 이미 점심때가 지난 지 오래였다. 자는 사람을 놔두고 혼자 끼니를 챙기는 마음이 썩 편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같이 굶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작게 뒤척이는 가온을 힐끔 쳐다보던 지원이 바로 승무원을 호출했다.

“식사하겠습니다. 메인은 스테이크로 주세요, 미디움으로. 샐러드는 카트 끌고 올 것 없이 골고루 적당히 담아주시고요. 드레싱은 필요 없습니다. 빵은 바게트만, 과일은 종류별로 하나씩 다 주세요.”

“네, 손님. 바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옆 좌석에 계신 분은 방해하지 마세요. 필요한 게 생기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식사를 하는 내내 옆자리를 살피던 지원은, 가온이 움찔거릴 때마다 반사적으로 눈매를 찡그렸다. 수면 장애가 있다더니, 밤을 꼬박 새웠다면서도 제대로 숙면을 못 취하네. 차라리 약을 먹고 한숨 푹 자는 게 낫지 않을까? 아니지, 그러면 런던에서 또 잠을 못 자겠지. 그럼 계속 악순환이고. 하아…. 신경 끄자. 어떻게 해줄 수도 없는 거, 계속 쳐다보면 뭐 할 거야.

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린 지원은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며 영화를 한 편 골랐다. 상사를 수행하는 입장에서 술을 마시고 뻗을 수는 없으니 맨정신으로 지루함을 견디려면 뭐라도 해야 했다. 딱히 눈에 들어오는 게 없어서 이전에 봤던 것 중 색감이 훌륭했던 영화를 플레이했는데, 볼 때마다 매번 흥미로웠던 영화가 오늘은 이상하게 재미가 없었다. 화면이 너무 작아서 그런가? 영 감흥이 없네.

수도 없이 하품을 하며 꾸역꾸역 영화 한 편을 다 본 지원은, 전시 도록 시안을 꺼내서 뒤적이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족히 두세 시간은 몰두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희한하게 이것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아,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집중이 안 되지? 나 좀 피곤한가?

어깨를 주무르며 고개를 좌우로 꺾던 지원이 제 쪽으로 돌아누운 가온의 단정한 얼굴을 보고는 그대로 동작을 멈췄다. 이제야 겨우 자는 것처럼 자네. 두 시간도 넘게 계속 뒤척이기만 하더니. 그런데 얼굴 진짜 작다. 옆으로 누웠는데도 얼굴선이 그대로야. 항상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몰랐는데 이목구비가 굉장히 섬세하구나. 한 번쯤 그려보고 싶은 얼굴이네. 내가 사람 얼굴을 그릴 수는 없지만….

왠지 아쉬운 기분에 근질거리는 손을 꾹꾹 주무르고 있는데, 갑자기 불안정한 기류를 만난 기체가 크게 출렁했다. 그러자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자고 있던 가온이 거짓말처럼 반짝 눈을 떴다. 어휴, 하필이면 지금. 한 두어 시간만 더 자게 둘 것이지. 그새 잠기운이 싹 가신 얼굴로 부스스 몸을 일으키는 가온을 보며, 지원은 속으로 조용히 혀를 찼다.

“…지금 몇 시야?”

“한국 시간으로 7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더 안 주무실 거면 식사부터 하시죠. 권 여사님이 하루에 두 끼는 꼭 챙겨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음…. 먹긴 먹어야지.”

“메인은 스테이크하고 농어 구이가 있던데, 뭘로 주문할까요?”

“아무거나.”

둘 다 괜찮다는 건지, 둘 다 별로라는 건지 알 수가 없는 대답이었다. 원래 주는 대로 먹는 사람이라고 하기는 했지. 아무래도 활동량이 적으니까 소화가 잘되는 생선이 더 나을까? 잠시 고민하던 지원은 입안이 깔깔했는지 냉수 한 컵을 다 마시는 가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제3의 선택지를 제시했다.

“대표님. 그럼 라면을 드시겠습니까?”

“…라면?”

“안 좋아하세요? 입맛이 없으시면 좀 칼칼한 걸 드시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글쎄. 먹어본 적이 없어서.”

라면을 먹어본 적이 없어? 한 번도? 현대 문명인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항상 침착해 보이던 지원이 충격을 감추지 못하자, 가온은 살짝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세상사에 어두운 가온이라지만, 그녀도 라면이 굉장히 대중적인 음식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다.

“권 여사가 인스턴트는 못 먹게 해.”

아…. 매 끼니 유기농 재료만 엄선해서 궁중 요리 정찬을 차릴 것 같은 분위기이긴 했지. 바로 고개를 끄덕인 지원이 처음에 골랐던 메뉴를 다시 추천했지만, 놀랍게도 가온은 모험을 택했다.

“그럼 농어로 드시죠.”

“그 라면이라는 거…. 한번 먹어보고 싶은데.”

잠시 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라면 그릇을 받아든 가온은, 처음엔 생각보다 자극적인 냄새에 살짝 당황스러운 기색이었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한 젓가락 맛본 순간 표정이 달라졌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가온을 보며, 지원은 아이에게 첫 이유식을 먹이는 엄마의 심정을 처음으로 이해했다. 제가 권한 음식을 누군가가 맛있게 잘 먹는 것이 세상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입에 맞으세요?”

“이거 엄청 맛있는데?”

“다행이네요. 아무튼 권 여사님께는 비밀입니다.”

“응. 꼭 지킬게.”

젓가락을 든 채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가온이 너무 귀여워서 지원은 저도 모르게 작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리고는 아예 턱을 괴고 가온이 라면을 먹는 모습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제가 내내 실실거리고 있었다는 건 전혀 몰랐다. 가온이 라면 한 그릇을 다 비우는 동안 한 번도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자각하지 못했다.

“90에 60이네요.”

“봐.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진다니까.”

이것도 딱히 괜찮은 건 아닌 것 같은데. 어젯밤 80에 45라는 수치에 놀라 난생처음으로 혈압에 대한 정보를 폭풍 검색했던 지원은, 저혈압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두 개의 숫자가 아무래도 영 못마땅했다. 이래서 아침저녁으로 혈압을 체크하는구나. 어지간히 유난들을 떤다고 생각했었는데, 다 이유가 있었어.

“잠자리는 편안하셨습니까.”

“응, 잘 잤어.”

그래도 확실히 어제보다는 얼굴에 혈색이 도네. 눈 밑이 판다처럼 거뭇했었는데 그것도 그럭저럭 말끔해졌고.

- 굉장히 피곤해 보이시는데, 한숨 더 주무시겠습니까?

- 아니야. 차 관장 말대로 시차에 적응하려면 가서 자야지.

라면 한 그릇을 먹고 나서 런던에 도착할 때까지 줄곧 앉은 채로 버틴 가온은, 옆에 있는 사람이 다 조마조마할 정도로 급격히 초췌해지더니 호텔 로비에 들어설 무렵에는 반송장이 되어 있었다. 혈압을 재면서도 꾸벅꾸벅 조는 것이 그렇게 안돼 보일 수가 없었는데, 숙면의 결과를 이렇게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지원은 한결 마음이 놓였다.

“뭐 더 필요한 건 없으시고요?”

“없어.”

“식사는 30분 후에 올리라고 하겠습니다. 천천히 씻고 나오세요.”

“응.”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가온이 욕실로 들어가자, 지원은 미리 받아두었던 옷가지를 옷장에 정리하고는 바로 프런트에 연락해서 음식 몇 가지를 추가로 주문했다. 저혈압에는 마늘, 완두콩, 당근이 좋다고 했지. 열무나 미역 같은 건 여기에서 먹기는 좀 힘들고. 다크 초콜릿도 혈압을 올려준다는데, 이 근처에 수제 초콜릿 파는 데가 어디에 있었더라?

기억나는 초콜릿 전문점 두어 군데의 주소를 확인하던 지원이 불현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나 지금 뭐 하는 거야? 고작 사흘짜리 임시 비서가 뭘 이렇게 오버해? 명색이 대기업 대표인데, 수족처럼 움직이는 사람들이 어련히 알아서 잘 관리하고 있을까. 마늘 요리 한 끼 먹는다고 저혈압이 싹 낫는 것도 아니고. 감바스랑 알리오 올리오는 둘 중 하나만 시킬 걸 그랬나. 하아, 몰랐는데 나 되게 호들갑스러운 놈이었네.

이미 준비된 식단에 요리를 추가한 탓에 아침 식사치고는 지나치게 거한 한 상이 차려졌지만, 다행히 가온은 제 앞에 놓인 음식을 군말 없이 거의 다 먹었다.

먹기는 잘 먹는데…, 저게 다 어디로 가는 걸까. 그나저나 권 여사님 의외로 눈치가 없으신데? 별로 가리는 것도 없고, 특별히 찾는 것도 없다더니…. 한 끼 먹는 거 보니까 식성이 딱 나오는구만. 단맛보다는 짠맛 취향에, 바삭한 식감을 선호하고, 면 요리를 특히 잘 드시고. 당근 케이크…, 하나 더 시킬까? 아니, 얼굴에 저렇게 티가 나는데 매일 보는 사람이 그걸 왜 모르지?

“대표님, 차는 뭘로 드시겠습니까?”

“커피. 차가운 거 있어?”

아침부터 아이스커피를 찾는 걸 보면 기호도 아주 확실한데 말이야.

“얼음 넣어서 드리겠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직원이 데리러 오기로 한 시간까지는 20여 분이 남았다. 달리 뭘 하기는 애매한 시간이라 두 사람은 찻잔을 들고 테라스로 자리를 옮겼다. 시야가 탁 트여서 템스 강 너머로 보이는 런던 시내 풍경이 퍽 볼만 했다.

“여기는 어떤 현장인데 대표님이 직접 가시는 겁니까?”

“체스터에 로젠발로프라는 오래된 가문이 있어.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가문에서 여아가 태어나면 대부분 열일곱을 넘기지 못한다는 거야. 예전부터 여자가 단명하는 집안이긴 했는데, 20세기가 되면서부터 그 빈도가 더욱 증가했고. 특히 가주의 직계는 전혀 예외가 없었다고 해.”

잔혹한 가정이지만, 만약 일찍 죽는 게 남자였다면 훨씬 더 빨리 무언가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기 전에 보다 손쉽게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근대 이전에는 여성의 위상이 지금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하찮게 취급되었던 게 사실이고, 때문에 이 사건이 중천주의 귀에 들어오기까지는 300년에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

“처음에는 그렇게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 원래 애들이 많이 죽던 시대이기도 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겠지. 석연치 않게 급사하는 경우가 너무 부자연스럽게 많았으니까. 그러다 이번에 가주의 며느리가 어렵게 가진 복중 태아가 여아라는 걸 알게 된 거야. 가문에서 20년 만에 처음으로 태어나는 아기라 한껏 기대하고 있던 집안이 발칵 뒤집혔지. 그게 두 달 전이야.”

“그런 문제를 대표님이 직접 해결하러 오셨다는 건, 여태 그 가문의 딸들을 살해한 게 망자였다는 뜻입니까?”

“아마도. 가주가 어떻게든 원인을 밝혀보려고 백방으로 알아보던 중에 결국 가이드까지 불러들이게 됐는데, 그중 한 명이 완전히 흑화한 악령을 목격했다더군.”

처음에 불려온 가이드는 망자의 존재를 감지하고도 끝내 실체를 확인하지 못했다고 했다. 저택 전체를 짓누르는 어마어마한 살기 때문에 아예 집안에 발을 들이지도 못했다는 거였다. 영국에 있는 상급 가이드 다섯 명이 모두 달려들었지만 악령을 몰아내기는커녕 도리어 공격을 당해 부상까지 입었고, 체코에서 지원을 나온 백전노장이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얼굴을 확인한 것이 전부라고 했다.

“그런데 그 얼굴이 저택에 걸려있는 초상화 중 하나와 찍어낸 듯 똑같았다고 해.”

“저택에 초상화가 있다면 그 가문의 일원이었다는 얘긴데, 조상이 자기 자손을 해치는 경우도 있습니까?”

“흔하진 않지만…, 있지.”

보통의 조상들은 대단히 선량한 성품을 가지지 않았더라도 가능한 한 제 자손들을 돌보거나 지키려고 한다. 따라서 수백 년 동안 오직 제 자손 한정으로 살인을 일삼는 망자는 누군가에게 엄청난 원한을 품었거나, 혹은 통제 불가능한 상태일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이렇게 계속 사람을 해치면서 수백 년을 버틴 악령은 가이드 선에서 해결할 수 없어. 능력이 꼭 세월에 비례하는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 경험치의 차이가 크면 고작 100년도 살지 못한 인간은 상대조차 되지 않거든.”

“그럼 그런 악령은 대표님이 모두 처리하십니까?”

지원의 질문에 가온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일단은 그 수가 워낙 많고, 망자의 짓이라는 게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있으니까. 내가 알게 되는 건 가급적 어떻게든 처리를 해보려고 노력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몸이 하나라.”

“이런 출장을 자주 다니시나 봅니다.”

“아니. 출장을 다니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어. 지금은 대륙 간에 이동이 자유로워서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갈 수 있지만, 처음에 영국에 올 때는 두 달 넘게 걸렸으니까. 그전에는 육로로 이동이 가능한 곳밖에 다닐 수가 없었지. 그것도 자주 다니기는 어려웠고.”

가온을 알게 된 이후로 이렇게 말을 길게 하는 건 처음 봤다. 목소리 참 듣기 좋네. 대화의 내용보다도 곱고 울림이 좋은 음성에 잠시 정신이 팔렸던 지원은, 귀에 걸리는 단어를 듣고도 평소처럼 기민하게 반응하지 못했다. 의문이 든 건 시간이 조금 지난 다음이었다.

“두 달…, 이요? 뭘 타고 오셨는데요?”

“으음. 우선 요코하마에서 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로 갔다가, 거기서 기차를 타고 동부로 이동한 다음에, 뉴욕에서 다시 배를 탔지. 그때는 그게 가장 빠른 수단이었어. 거의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고. 당시에 시베리아 횡단 철도는 한창 건설 중이어서 유럽까지 육로로 이동하려면 무조건 걸어야 했는데, 그렇게까지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었거든.”

경악스러운 여정을 들으며 지원의 눈이 점점 더 커다래졌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건설 중이었다고? 그거 1900년대 초에도 다니지 않았었나? <시베리아의 이발사>의 배경이 몇 년도였지?

“그때가 대체 언젭니까.”

“1896년. 다시 돌아가니까 해가 바뀌었더라고.”

허, 19세기…! 순간 지원은 헛바람을 내뱉지 않기 위해 어금니를 사리물어야 했다. 물론 가온이 액면가보다 훨씬 더 나이가 들었을 거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다. 일단 풍기는 아우라 자체가 이십 대 초반의 여성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무례한 성품으로 보이진 않았는데 직원들을 대할 때 나오는 하대가 너무나 자연스럽기도 했다.

어제 공항으로 마중을 나온 현지 직원과 인사를 나눌 때도, 가온이 묘하게 옛날식 영어를 쓴다는 느낌이 들긴 했었다. 길게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었고 간단한 상황 보고를 들으며 몇 가지 질문을 한 게 전부였는데, 영어권에서 10년 넘게 살았던 지원이 처음 들어보는 단어도 있었다. 그래도 세기를 넘나드는 정도인 줄은 몰랐다.

그럼 대체 나이가 몇 살이야? 사람인 건…, 맞나?

“그때 런던은 참 심각했었는데. 숨을 쉬기가 어려울 정도로 대기 질도 나빴고. 여길 떠나고 나서도 한참 동안 목이 아팠어. 런던 스모그 땐 결국 올 것이 왔구나, 했지.”

“…그랬습니까.”

아련한 눈빛으로 풍경을 바라보던 가온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왠지 지원의 목소리가 확 달라진 듯한 느낌에 그의 표정을 자세히 살펴보려고 한 순간, 방문자의 도착을 알리는 벨이 울렸다.

“대표님, 준비하시죠. 제이든이 온 모양입니다.”

“…그래.”

느닷없이 분위기가 심각해진 것 같아 조금 신경이 쓰였지만, 지원의 기분까지 챙길 여유는 없었다.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난 가온은 헐렁하게 매고 있던 넥타이를 단정하게 조이고, 옷장을 열어 말끔하게 다림질된 재킷을 꺼내 입었다. 이제 중천주로서의 임무를 시작해야 할 시간이었다.

중세의 모습을 간직한 오래된 성벽이 눈에 들어오자 편안한 자세로 휴식을 취하고 있던 가온이 허리를 곧추세우며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일행이 체스터에 입성함과 동시에 맑았던 하늘이 차츰 어둑해지더니, 로젠발로프 성에 도착할 무렵에는 한두 방울씩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시도 때도 없이 비가 오는 영국 날씨에 익숙한 지원이었지만, 이 비는 왠지 예사롭지가 않았다.

느낌이 꼭 겨울비 같지 않아? 날씨가 이렇게 따뜻한데도 굉장히 차갑고…. 기상 현상을 표현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지만 꽤나 위압적이야. 뭔가 의지를 갖고 있는 것처럼. 이 비슷한 감각을 분명히 내가 어디서 느껴본 적이 있는데…. 점점 굵어지는 빗방울이 차창을 두드리는 걸 가만히 지켜보던 지원이 불현듯 뭔가 깨달은 얼굴을 했다.

“이 비…, 대표님이 내리시는 겁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지?”

“예전에 중천에서 검을 소환하셨을 때하고 기운이 비슷한 거 같아서요.”

순간 매사 무덤덤하던 가온이 크게 놀란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저와 자주 접촉하는 상급 가이드들 중에서도 제 기운을 구분하는 건 극히 일부였다.

“여태껏 한 번에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반쯤은 때려 맞춘 겁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타이밍이 우연이라기에는 너무 공교로워서요.”

“똑똑하네.”

가온의 순수한 감탄에 지원은 입을 꾹 다문 채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불과 하루 만에 또다시 애 취급을 당했지만, 이번에는 차마 불만을 토로할 수도 없었다. 어차피 그녀의 눈에는 저나 보안실장이나 해수나, 다 똑같은 어린애일 뿐이다.

내가 연해수 그 철부지랑 동급이라니.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상급 가이드가 포기했을 정도로 기운이 강한 망자를 다루려면 나도 준비가 필요하거든. 괜히 밖으로 나가서 난동이라도 부리면 곤란하니까 일단 집안에 가두는 작업을 하는 거야.”

“대표님한테도 버거운 상대가 있나요?”

“그럼.”

“놓치신 적도 있습니까?”

모든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하던 가온이 처음으로 뜸을 들였다. 뭔가를 떠올리는 듯 잠시 아득한 얼굴을 하던 가온이 나직한 목소리로 짧게 대꾸했다.

“한 번.”

가온과 지원이 어마어마한 대저택 안에 발을 들이자, 점점 거세지던 빗줄기는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폭우가 되었다. 가온의 지시에 따라 이미 집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텅 빈 저택에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만 스산하게 울렸다.

“차 관장.”

“네, 대표님.”

“숨쉬기 괜찮아?”

“네.”

“어디든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차에서 기다려도 돼.”

“불편하지 않습니다.”

망자를 압박하기 위해서 내부의 공기를 한층 더 무겁게 짓누르던 가온은, 지원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자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이거 물건이네? 아무리 산 사람이라도 영안이 트인 자는 내 기운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는데, 이렇게 멀쩡히 걷고 말도 하다니. 그 강철 같은 권 실장도 완전히 적응하기까지는 10년이 넘게 걸렸는데.

“망자의 기척은 느껴져?”

“네. 위치를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확실히 이 집안에 있긴 있네요.”

베테랑 가이드도 겁을 먹고 물러났다는데 이렇게 살갗을 찌르는 듯한 노골적인 살기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6개월짜리 초짜가 배짱이 두둑하기도 하지. 빙긋이 미소를 짓던 가온이 곧 표정을 정돈하고는 초상화가 죽 걸려있는 긴 복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 발 뒤에서 가온을 따라가던 지원은 비슷비슷한 얼굴들을 빤히 쳐다보며 눈매를 갸름하게 접었다. 아주 잘 그려진 그림들이고, 의상이나 화풍의 변화 같은 것들도 꽤나 흥미롭긴 했다. 그러나 초상화만 한데 모아 놓은 걸 보고 있으려니 어쩐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밤에 지나가려면 오싹하겠는데?

[아치볼트 데이먼 로젠발로프. 1674.10.11. ~ 1739.2.5.]

가온이 복도 중간쯤에 걸린 초상화 앞에 멈춰 서자, 지원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그림을 향했다. 당시 유행하는 옷차림으로 한껏 멋을 부린 젊은 남자가 그려진 그림이었는데, 18세기 영국 귀족의 표본으로 교과서에 실려도 손색이 없을 법한 차림새였다.

가주의 7대조라고 했지. 흐음, 어느 정도 미화됐을 것을 감안하더라도 상당한 미남이군. 딱히 인품이 대단히 훌륭해 보이는 인상은 아니지만, 그래도 살인귀가 될 정도로 악독한 느낌은 없는데…. 하긴 사람 속이 어떤지는 얼굴만 봐서는 모르지.

“어때?”

“재밌네요.”

“이 그림이?”

“네. 귀족들의 초상화라는 게 대부분 비슷하긴 하지만, 이자는 특히 더 보이는 것에 신경을 많이 쓰던 인물인 것 같습니다. 60대 중반에 사망했는데도 후세에 남길 그림으로 30대에 그린 초상화를 선택한 것도 그렇고, 정면을 보지 않고 고개를 살짝 튼 것도 그렇고요. 아마 초상화를 굉장히 많이 그려 보고, 그중 자신의 얼굴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각도를 선택했을 겁니다.”

“…그래?”

지원의 말을 듣고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가온이, 잠시 후 크게 기대하지 않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차 관장이 쓰는 방식으로 한 번 처리해 봐.”

“네.”

항상 가지고 다니는 수첩을 꺼낸 지원이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스케치를 했다. 거의 모사화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얼굴을 똑같이 그렸는데, 말끔하게 태워도 별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일련의 과정을 잠자코 지켜보던 가온이 미약한 불쾌감을 드러내며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일단 직접 봐야겠군.”

준비운동을 하듯 손목을 두어 번 돌린 가온이 오른팔을 옆으로 뻗자, 언젠가 중천에서 보았던 투명한 검이 챙 소리를 내며 나타났다. 동시에 하늘을 조각조각 쪼개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벼락이 사정없이 내리쳤다. 콰과과광! 섬뜩한 섬광이 번쩍이더니 곧 귀가 먹먹해지는 굉음이 들려왔다. 망자라면 누구나 응해야 하는 중천주의 소환 명령이 떨어졌지만, 쥐 죽은 듯 고요한 저택 안 어디에서도 망자의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았다.

“안 나오네?”

겁도 없이. 느릿하게 고개를 꺾은 가온이 무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미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는지 그다지 놀라거나 초조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대표님이 직접 불러내셨는데, 어떻게 이렇게 꼼짝도 않고 버틸 수가 있습니까?”

“오래된 물건은 영혼을 붙잡아 놓는 힘이 있거든.”

“오래된 물건이요?”

“이 집.”

단단한 돌벽을 손바닥으로 가만가만 쓸어 보던 가온이 찬찬히 주위를 휘둘러보며 작게 혀를 찼다.

“집을 너무 잘 지었어. 건물을 아무리 튼튼하게 지어도 보통 세월이 많이 지나면 어딘가는 균열이 가기 마련인데, 이 집은 처음 지어졌을 때의 골격 그대로야. 그러면 건물 자체에 힘이 생기지. 영혼이 붙어서 힘을 키우기도 좋고.”

“그러면 망자를 불러내려면 이 건물을 무너뜨려야 합니까?”

“그게 가장 간단하지만, 그럴 수야 있나.”

잠시 호흡을 고르던 가온이 검을 고쳐 쥐더니 지원에게 뒤로 물러서라며 고갯짓을 했다.

“차 관장. 지금부터는 절대로 내 활동반경 안으로 들어오면 안 돼. 망자가 나타나서 뭐라고 지껄이더라도 대꾸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가급적 출입구 근처에 있다가, 혹시라도 집이 무너지거나 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즉시 나가도록 해. 괜히 나를 구하겠다고 어물거릴 필요는 없어.”

“하지만….”

“그럴 리도 없겠지만, 설사 무너진 건물에 깔리더라도 나는 안 죽어. 적어도 오늘 여기에서는.”

“…네?”

그게 무슨 뜻이지? 죽는 것도 장소가 정해져 있어? 오늘은 안 죽는다는 건, 언젠가 결국 죽기는 죽는다는 거야? 수명이 길기는 해도 영원하지는 않다는 건가? 그럼 중천주 자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무수히 많은 의문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랐지만, 이미 눈빛이 달라진 가온이 살벌하게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기에 더 이상 말을 건넬 수는 없었다.

어둑한 실내에서도 반짝반짝 빛을 내는 아름다운 검이 유려한 선을 그리며 우아하게 움직였다. 그러자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던 공기가 조금씩 들썩이더니, 곧 흉흉한 바람이 마구 휘몰아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먹구름처럼 짙은 안개가 두껍게 바닥에 깔렸고, 요란하게 창문을 두드리던 굵은 빗줄기는 이제는 흡사 자갈이 부딪치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와우. 한쪽 구석으로 물러나 중천주가 작정하고 압박을 가하는 경이로운 광경을 지켜보던 지원은, 별안간 가온의 기운과는 결이 다른 맞바람이 세차게 불어닥치자 조용히 입 모양으로만 감탄사를 내뱉었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확실히 여태까지 내가 상대했던 망자들하고는 차원이 달라. 나 혼자 맞닥뜨렸다면 좀 겁났겠는데? 약간의 두려움과 묘한 흥분이 뒤섞여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차 관장.”

“네.”

“저자의 얼굴을 잘 봐둬.”

가온이 가리키는 복도 끝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새 눈에 익은 젊은 남자가 몹시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서 있었다. 멋들어진 모자를 쓰고 보석이 잔뜩 박힌 칼까지 찬 것이, 정말 초상화에서 막 튀어나온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 놀라운 싱크로율에 혀를 내두르고 있는데, 남자가 마치 셰익스피어 희곡에 등장하는 인물처럼 다소 과장된 억양으로 입을 열었다.

“뉘시오. 왜 허락도 없이 남의 집에 들어와서 이리 소란을 피우시는 게요.”

품위 있는 말투와 꼿꼿한 자세, 누가 봐도 그림으로 그린 듯한 전형적인 귀족의 모습이었다. 완전히 흑화한 영혼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점잖을 수가 있지? 뼛속까지 귀족이라 그런가. 속으로 조용히 감탄하던 지원은, 가온의 냉랭한 대꾸에 새삼 놀랐다. 그래, 원래 이렇게 무서운 사람이었지.

“내가 누군지는 네가 알 것 없고. 남의 집에 들어와서 소란을 피우는 건 내가 아니라 너인 것 같은데.”

“그, 그게 무슨 소리요? 자손들에게 물려주긴 했어도, 여긴 내가 지은 내 집이오! 나는 이 집을 떠날 생각이 추호도 없으니, 공연히 행패 부리지 말고 당장 내 집에서….”

“그만. 나는 너와 이 집에 대한 소유권 논쟁이나 하러 온 것이 아니다.”

준엄한 목소리로 남자의 말을 자른 가온이 한참 동안 그를 날카롭게 응시하더니, 곧 매섭게 추궁하기 시작했다.

“농사를 짓던 자로구나. 로젠발로프 가의 소작농이었나? 불공평한 삶이 너무 억울해서 망자가 되어서라도 귀족 행세를 해보고 싶었어?”

“…뭐, 뭐요?”

“여아에게만 분풀이를 한 이유가 뭘까. 아…, 그 얼굴의 진짜 주인인 아치볼트 로젠발로프가 네 딸을 탐내더냐. 그러고는 제대로 아껴주지 않은 모양이지?”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던 남자가 일순 번뜩이는 살기를 감추지 못했다.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사납게 이를 드러내자, 가온은 검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냥 지금 베어버릴까? 이런 자에게도 갱생의 기회를 주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치열하게 고민하던 가온이 끝내 검을 휘두르지 못하고 답답한 숨을 길게 내쉬었다. 물론 남자는 방금 전 자신이 영원한 형벌을 간신히 모면했다는 걸 전혀 알지 못했다.

“그렇다고 죄 없는 후손에게 앙갚음을 하면 되나.”

“그럼 내 딸은 무슨 죄가 있어서!”

결국 완전히 평정을 잃은 남자가 고함을 지른 순간, 번듯하던 외양이 흐릿해지더니 낡고 남루한 차림의 노인이 언뜻 얼굴을 드러냈다. 화들짝 놀란 남자가 재빨리 외관을 정돈했지만, 가온의 지시에 따라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지원은 그 잠깐의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내 귀한 딸을 데려다 첩으로 삼겠다더니, 며칠 데리고 놀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버렸어! 그 불쌍한 아이는 결국 정혼자한테도 버림을 받고 목을 맸다고. 그런데 그 쳐죽일 놈의 자식들은 이런 호사스러운 집에서 마냥 떵떵거리는 게 말이 돼?”

“귀한 딸…. 가증스럽구나. 당장의 호사에 눈이 어두워 여식을 팔아치운 자가 지금 어디서 감히 딸을 핑곗거리로 입에 올린단 말이냐!”

가온이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호통을 치는 동안, 조심스럽게 수첩을 꺼낸 지원은 서둘러서 남자의 진짜 얼굴을 그렸다. 처음에는 그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해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던 남자가, 지원이 라이터를 꺼낸 순간 고막을 긁는 것 같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죽기 살기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바로 그 앞을 가로막은 가온은 남자가 지원의 털끝 하나 건드리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자가 또 무슨 난동을 부릴지 모르니 잠시 중천에 다녀와야겠어. 명계수문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보고 돌아오겠다. 이건 내가 돌아올 길이니 파손되지 않도록 주의하고.”

망자가 연기처럼 사라지자마자 지원에게 낡은 은경 하나를 던지듯 건네준 가온은, 지원이 뭘 물어볼 새도 없이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는 무려 3시간이나 지난 후에 해쓱한 얼굴로 되돌아왔다.

“대표님!”

“아, 차 관장. 내가 중천에 얼마나 있었지?”

“3시간 11분 동안 계셨습니다.”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원의 입에서 즉각 구체적인 시간이 나오자, 그제야 자신이 급한 마음에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사라졌었다는 것을 깨달은 가온이 못내 미안한 얼굴을 했다. 이런, 내내 불안해하면서 시계만 들여다보고 있었겠구나. 워낙 능숙하게 굴어서 초짜라는 걸 자꾸 잊어.

“고생했어.”

“아닙니다. 저야 뒤에서 구경만 했지만, 대표님은 그새 얼굴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그자가 중천에서도 속을 썩이던가요?”

“조금. 그래도 무사히 명계로 보냈어. 우리도 이제 런던으로 돌아가지.”

“네.”

저택 밖으로 나오니 무자비하게 쏟아지던 폭우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이, 별이 총총 빛나는 청명한 하늘이 그들을 반겼다. 사악한 기운이 가신 고성을 크게 휘둘러보던 가온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차에 올랐다. 앞으로는 이 가문의 여아들이 어린 나이에 이유 없이 죽임을 당할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 짓을 다시는 하지 말아야겠지. 피해자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도 있어야 할 거고. 조상의 잘못으로 후손들이 치른 대가가 너무 가혹하긴 했지만, 애초에 악행을 저지른 자가 없었다면 악령에게 빌미를 제공할 일도 없었을 테니.

“대표님, 잠시 제 쪽을 보시겠습니까.”

“응?”

가주에게 당부할 것들을 차근차근 정리하며 푹신한 시트에 몸을 묻던 가온이 지원의 요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위생 장갑을 착용한 지원이 연고를 들고 있었다.

“덧날 것 같은 상처는 아니지만, 다친 곳이 얼굴이라 약을 바르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는 가온이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면봉에 연고를 묻혀 살살 펴 발랐다. 살짝 따끔한 느낌이 났지만 가온은 인상을 쓰지 않기 위해 조금 노력해야 했다. 대단히 심각한 얼굴을 한 지원이 어찌나 조심스럽게 손을 놀리는지, 그 깃털 같은 손길에 담긴 정성이 갸륵해서 도저히 아픈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대표님.”

“응?”

“그자가 진짜 아치볼트 로젠발로프가 아니라는 사실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아주 감쪽같았었는데요. 말투며 걸음걸이까지 어색한 부분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랬지. 나도 한눈에 알아본 건 아니야. 차 관장의 지적이 아니었다면 훨씬 늦게 알아차렸을 거고.”

“저요?”

“응. 초상화에 그려진 게 30대의 얼굴이라고 했었잖아.”

망자는 보통 생전의 모습을 그대로 가져가게 된다. 따라서 겉모습이 사망 당시의 연령대와 크게 달라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악령이 젊은 시절의 초상화와 똑같은 얼굴이라는 게 뭔가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을 했었다. 아치볼트 로젠발로프의 흉내를 내던 망자는 아마도 날마다 초상화를 보면서 제 모습을 가다듬었을 것이다.

“결정적인 건 손이었어. 거칠고 투박한 것이 절대로 귀족의 손이 아니었거든.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카피할 수 있지만, 그것까지 따라할 수는 없었겠지. 그 시대의 귀족들이 얼마나 신경 써서 손을 가꾸는지 몰랐을 테니까. 씁쓸한 일이지만.”

“저는 대표님께서 망자의 뱃속까지 들여다보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럴 리가.”

나직하게 웃음을 흘린 가온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격무 끝에 몸과 마음이 모두 나른해져서인지, 생전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속내가 자신도 모르게 주절주절 흘러나왔다.

“차 관장. 나는 신이 아니야. 그저 심판자의 역할을 맡았으니 어떻게든 임기를 무사히 넘기려고 아등바등 발버둥을 치고 있을 뿐이지. 지금은 경험이 쌓이고 눈치가 늘어서 그럭저럭 노련한 척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정말 엉망이었어. 한 30년 정도는 매일매일 울면서 도망가고 싶었지.”

아무것도 갖춰지지 않은 텅 빈 중천을 처음 봤을 때의 아득함이 여전히 생생하다. 중천주로서 임무를 시작하던 날, 처음으로 제 앞에 섰던 망자의 얼굴을 가온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타인 앞에서 절대로 드러내고 싶지 않았을 추악함이 하나하나 나열되었을 때, 가온은 비로소 제게 주어진 책임이 얼마나 무겁고 무서운 것인지 실감했었다.

- 명계행을 명한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망자에게 최후의 통첩을 내리던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한다.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천 번 만 번을 되새겨도 결론은 같았지만, 어쩌면 구제할 수도 있는 영혼에게 너무 잔인한 처벌을 내린 게 아닐까 하는 후회가 아주 오랫동안 가온을 힘겹게 했었다.

- 가온. 당신은 가급적 망자를 직접 대면하지 않는 방향으로 제도를 갖추는 편이 좋겠어. 이런 식으로 감정을 소모하면 얼마 못 가서 지치고 말 거야. 천 년의 수명을 보장받았다고는 해도 스스로 거두는 목숨까지 되돌려주지는 않아. 중천주가 중간에 임무를 저버리는 것 역시 있어서는 안 될 일이고. 의무 따위의 얘기를 하는 게 아니야. 당신의 영혼을 걱정하는 거지.

채이의 충고를 받아들였던 건 지금 생각해도 정말 잘한 일이다. 그때 체계를 만들지 않았다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하는 일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려운 고비들이 많았지만, 유럽에 페스트가 번졌을 때는 정말 진심으로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었다. 전임 중천주는 전쟁이 났을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했었는데, 세상의 어떤 전쟁도 고작 7년 동안 1억 명의 사망자를 내지는 않는다.

“중천에서나 중천주인 것이지, 인계에서는 나도 한낱 가이드나 다를 바 없어. 그저 공과만 구분할 수 있을 뿐, 망자의 모든 생이 낱낱이 다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나는 그대들보다 오래 살았고, 그 시간만큼 요령이 쌓인 것뿐이야.”

쓸데없는 말을 너무 많이 했다고 생각했는지, 작게 헛웃음을 짓던 가온은 조금 겸연쩍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지원 역시 더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새벽녘에 런던에 도착한 두 사람은 일단 느긋하게 잠을 청했다. 모처럼 아무 생각 없이 한숨 푹 잔 가온이 느지막이 일어났을 때, 이미 단장을 마친 지원은 가온의 향후 일정을 조정하기 위해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고 있었다.

“대표님. 예약되어 있는 항공편은 내일 밤 비행기라, 오늘 귀국하실 거면 보안실장이 바로 전세기를 띄우겠다고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그럴 거 없어. 나 혼자 타고 갈 건데 전세기는 무슨. 낭비야. 예정대로 내일 간다고 해.”

“알겠습니다.”

여러 사람을 번잡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아 런던에서 하루 더 머물기로 했지만, 막상 늦은 점심을 먹고 나니 딱히 더는 할 일이 없었다. 런던에 볼만한 게 뭐가 있었나…. 잠이 더 올 것 같진 않고, 어디든 돌아다니기는 해야 할 것 같은데. 고민하는 가온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지원이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대표님, 달리 하고 싶은 게 없으시면 소더비 프리뷰에 한 번 가보시겠습니까? 경매가 끝나고 개인 소장품이 되면 다시는 실물로 볼 수 없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라 한 번쯤은 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아….”

그거라면 어차피 차 관장이 들러야 할 곳이니 내가 따라가도 크게 방해가 되진 않으려나? 아니지. 휴가 중에 반강제로 끌려 나온 사람한테 이제 상사 뒤치다꺼리는 그만하라고 해야 되지 않을까? 쉽게 마음을 정하지 못하는 가온을 보며 지원은 속으로 조금 웃었다. 눈들이 삐었나. 저렇게 얼굴에 다 드러나는 사람의 속을 대체 왜 아무도 모르는 거야?

“혼자 가기 심심하니 같이 가주시죠. 감상은 여럿이 함께하는 편이 재밌으니까요.”

“그럼…, 그럴까?”

아주 오랜만에 전시회장을 찾았다는 가온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즐거워 보였다. 작품 하나하나를 아주 정성 들여 감상했고, 간혹 아주 마음에 드는 작품을 보게 되었을 때는 옆 사람과 부딪치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완전히 몰입하기도 했다. 그러다 지원이 런던을 방문하려는 당초 목적이었던 유리 화병 앞에 선 순간, 가온은 저도 모르게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굉장히…, 아름답네.”

자주색과 보라색이 조화롭게 섞인 꽃송이 모양의 아름다운 화병을, 가온은 아주 오랫동안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반면 화병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가온만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지원은, 마구 터져 나오려는 욕설을 간신히 눌러 삼키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아이처럼 발갛게 상기된 볼이, 감동에 푹 젖은 눈동자가,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일 났네. 망했어. 미쳤다, 차지원. 사람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여자한테 반했어. 지원이 제 마음을 자각한 순간, 스스로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던 그간의 행태들이 한순간에 아주 명쾌하게 설명되었다. 나 처음부터 이 여자 얼굴을 계속 보려고 그렇게 말도 안 되게 질척거린 거네. 그래, 사실 나도 그게 웬 개수작인가 했어.

이제 어쩌냐. 망연자실한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확인해보니 런던에서 만나기로 했던 친구의 전화였다. 아예 그와의 약속 자체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닫자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

“차 관장. 전화 오는 거 아니야?”

“스팸입니다.”

십년지기의 전화를 간단하게 끊어버린 지원은, 가온에게 다음 작품에 대해 설명하며 한 손으로 빠르게 메시지를 보냈다.

[미안. 급한 일이 생겨서 그냥 돌아간다. 다음에 보자.]

“경매가 언제라고?”

“다음 주 금요일인데, 실물을 봤으니 됐습니다. 경매는 온라인으로 참가해도 되고, 대리인을 보내도 되니까요.”

이튿날 밤, 결국 인천행 비행기에 오른 지원은 컴컴한 밤하늘과 곱게 잠든 가온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소리 없이, 그리고 끊임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위스키 한 잔 부탁합니다. 조니워커, 스트레이트로.”

출장 중엔 술을 마시지 않기로 다짐했었지만, 알코올의 진정 작용이 절실했다. 40도짜리 스카치위스키를 물처럼 들이키자 불을 삼킨 것처럼 짜릿한 기운이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애석하게도 복잡하고 시끄러운 속을 달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앞섬을 풀어헤친 헐렁한 두루마기 차림의 남자가 화려하게 장식된 커다란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 심드렁한 얼굴로 죄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차피 형량을 정하는 건 판관들이니, 그가 직접 나설 필요는 없었다. 그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자리를 지키고 있던 하율이 무료함을 참지 못하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오늘도 따분하기 짝이 없군. 가서 낮잠이나 자야겠어. 막 법궁을 나서려던 하율이 질질 끌려오는 허름한 차림의 망자 한 명을 보고는 약간 흥미로운 얼굴이 되어 걸음을 멈췄다. 어쭈, 18세기에 사망한 거물이 오셨네?

“올리버 메이슨. 인신매매 1건, 살인 34건에 대한 처벌로 350년형에….”

“잠깐.”

잔뜩 겁에 질린 망자를 유심히 살피던 하율이 그의 턱을 받쳐 들더니 붉은 눈동자를 번뜩이며 사납게 이를 갈았다.

하아…. 체스터 출신이야? 안 그래도 바쁜 여자를 그 시골구석까지 가게 만들었어? 너 같은 놈들 때문에 내가 그 여자 얼굴 한 번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잖아, 응? 하율은 오들오들 떠는 망자를 거만하게 내려다보며 청천벽력 같은 판결을 내렸다.

“죄인이 인도자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업무가 과중하신 중천주께 극심한 누를 끼쳤으니, 판관이 선고한 형에서 곱절을 가하여 집행한다.”

아, 주가온 정말 못 말려. 검으로 그냥 베어 버리면 간단한 것을. 쯧쯧, 저런 하찮은 것들을 위해 이렇게까지 열과 성을 다할 필요는 없는데. 하긴 그런 여자라 애초에 마음을 빼앗긴 거겠지만.

나른한 손짓으로 망자의 마지막 기억에 따라온 잔상을 붙잡아 허공에 띄운 하율이 입꼬리를 크게 올리며 흐뭇하게 웃었다. 지루한 일상에 선물처럼 떨어진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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