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Prologue. (1/18)
  • Prologue.

    “안녕하십니까, 관장님.”

    “안녕하세요.”

    안내 데스크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기계적으로 대꾸하던 지원이 불현듯 뒤통수를 잡아채는 이질적인 기운 하나를 감지하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과민 반응이길 바랐건만…. 그림처럼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는 수빈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던 낯선 남자 하나가 지원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피하며 슬금슬금 뒷걸음을 쳤다.

    아침부터 이게 웬…. 하아, 어쩐지 꿈자리가 사납더라니. 귀찮은데 그냥 못 본 척하고 말까. 미간을 좁힌 채 잠시 고민하던 지원은 불안스레 제 눈치를 살피는 수빈을 바라보며 짧은 한숨을 토해냈다. 여태껏 그녀의 얼굴을 눈여겨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화장으로도 가리지 못한 불면의 흔적이 하필이면 오늘따라 선명하게 눈에 띄었다.

    “김수빈 씨.”

    “네, 관장님.”

    “잠깐 내 방에서 좀 봅시다.”

    “네? 아…, 네.”

    화들짝 놀란 수빈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가는 지원의 뒤를 따랐다. 평소에 말 한마디 제대로 섞는 법이 없던 고용주의 돌발 행동에 심장이 철렁했지만, 꼬치꼬치 이유를 따질 처지는 아니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저기압이지? 뭐, 평소에도 사람 좋게 웃고 다니는 인간이 아니긴 하지만….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 헉. 설마 나를 자르려는 건 아니겠지? 아니야, 해고당할 만큼 크게 잘못한 것도 없고, 요즘 세상에 근로자를 이런 식으로 내보낼 순 없어. 그래도 만약에 잘리면…, 실업 급여는 받을 수 있을까?

    “관장님 일찍 나오셨네요. 어? 수빈 씨….”

    살갑게 인사를 건네던 비서 역시 쭈뼛거리며 지원을 따라오는 수빈을 보고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전달 사항은 무조건 비서를 통하는 지원이 직원을 직접 제 방에 불러올리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무슨 일이야, 뭐 잘못했어? 모르겠어요. 비서의 걱정 어린 눈짓에 작게 고개를 흔든 수빈이 더없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관장실 안에 들어섰다.

    “김수빈 씨.”

    “네, 관장님.”

    “일단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털끝만큼이라도 다른 사심이 있어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겠습니다. 김수빈 씨에게 괜한 수작을 거는 게 절대로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 네.”

    수빈은 떨떠름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최대한 공손하게 대답했다. 당장 자르겠다는 얘기는 아닌 것 같아서 다행이긴 한데…. 야, 네가 그렇게 철벽 안 쳐도 그런 착각은 안 하니까 걱정하지 마. 나도 너 별로거든? 첫 출근하던 날 바로 이 방에서 그의 영혼 없는 환영 인사를 받으며 아주 잠깐 설렜던 기억이 못내 수치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물론 차지원이라는 남자는 타인에게 매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 부분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긴 했다. 단정하고 섬세한 얼굴에 훤칠한 키, 심지어 모델처럼 비율도 좋은 그는 트렌디한 갤러리의 주인답게 옷도 잘 입었다.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바뀌는 차량은 수빈이 본 것만 해도 일곱 대였고, 차에 관심이 많은 큐레이터의 말에 따르면 그 차들의 출고 가격을 모두 더하면 정확하게 40억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람. 세상에 저 혼자 잘나서 인사할 때도 사람 얼굴 한 번을 안 쳐다보는 싸가진데. 아주 고고하시기가….

    “혹시 얼마 전에 사귀던 남자가 사망한 일이 있습니까?”

    시선을 내리깐 채 속으로만 조용히 빈정거리던 수빈이, 상상의 범주를 완전히 벗어나는 질문에 기함하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걸…, 관장님이 어떻게….”

    “설명하자면 길고. 단도직입적으로 묻죠. 깊은 사이였습니까? 따라가고 싶을 만큼?”

    따라가다니…. 대체 어딜? 한참 동안 눈만 끔뻑이던 수빈이 뒤늦게 지원의 말을 이해하고는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요! 한동안 많이 슬프고 힘들긴 했지만…. 저도 제 인생이 있고…, 가족도 있는데…. 따라 죽겠다는 생각 같은 건 한 번도….”

    “그래요?”

    무심하게 대꾸한 지원이 A4 용지 한 장을 꺼내더니 뭔가를 빠르게 그리기 시작했다. 얼이 빠진 얼굴로 지원이 하는 양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수빈은, 그가 불과 30초 만에 완성한 그림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볼펜으로 대충 그린 그림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정교하게 묘사된 초상화는, 제 기억 속의 얼굴과 소름이 끼칠 정도로 똑같았다.

    “이 남자가 맞습니까?”

    “네.”

    “요즘 종종 꿈에 나오지 않았습니까?”

    “…네.”

    “어딜 가자고 하지 않던가요?”

    “…!”

    마지막 질문에는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한 수빈이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안 그래도 애써 잊고 살려고 노력했던 애인이 자꾸만 꿈에 등장하는 바람에 요 며칠 잠을 설쳤다. 끔찍했던 사고가 벌어진 지 어느덧 1년이 지나 이제 겨우 그럭저럭 괜찮아진 참이었다. 잠에서 깨고 나면 새삼 밀려오는 그리움에 마음이 많이 힘들었고, 그를 조금씩 잊어간다는 게 미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애틋했던 감정들은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동해로 바다를 보러 가자고 계속 조르더니…. 그게 저승길을 같이 가자는 거였어?! 네가, 네가 어떻게 나한테….

    “다시는 안 나타났으면 좋겠습니까?”

    파랗게 질린 수빈이 덜덜 떨며 고개를 끄덕이자, 지원은 안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제가 그린 그림을 깨끗하게 태워버렸다. 그리고는 완전히 재가 될 때까지 지켜보다 무심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젠 안 나타날 겁니다.”

    “저, 정말요?”

    “아마도. 그리고 내가 원래 이렇게 오지랖을 부리는 사람이 아닌데, 김수빈 씨는 암시에 잘 걸리는 편인 것 같아서 굳이 한마디 덧붙이면…. 기억해둬요. 앞으로도 행여나 죽은 사람이 꿈에 나타나서 버스나 기차에 태우려고 하면, 절대로 순순히 올라타면 안 됩니다.”

    “…왜, 왜요?”

    “그건 상여니까. 본인의.”

    지원의 간단한 대꾸에 수빈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쫙 돋았다. 바로 오늘 새벽에 내내 동해 바다 타령을 하던 그와 기어이 기차역까지 갔었다. 기차에 막 오르려는데 오빠가 충전 케이블을 빌려달라며 저를 깨우는 바람에 잠에서 깼다. 직장인의 귀한 아침잠을 방해한 것도 모자라 몰상식하게 사람을 발로 툭툭 차서 깨웠다며 있는 성질 없는 성질을 다 부리고 출근했는데….

    곧 기절할 것처럼 창백해진 수빈을 보면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지원이 문을 향해 작게 고갯짓을 했다. 용건이 끝났으니 이만 나가보라는 뜻이었다.

    “저기요, 관장님.”

    그새 핸드폰을 꺼내 주가를 확인하던 지원이 힐끔 시선을 들어 올렸다. 성가시다는 기색이 역력한 눈빛에 살짝 주눅이 들었지만, 수빈은 도저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약에…, 만약에요. 제가 그 남자를 따라 죽고 싶었다고 했다면…. 오늘 저를 그냥 내버려 두셨을까요?”

    수빈의 질문에 잠깐 생각에 잠겼던 지원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봐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새로 직원을 채용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제 몫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상대방을 불러 그런 의사를 묻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랬을 겁니다. 내가 김수빈 씨의 인생에 마음대로 간섭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니까.”

    결재 서류 몇 개에 서명을 마친 지원이 나른하게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11시…. 아침부터 기운을 빼서 그런지 몸이 찌뿌둥한데, 오늘은 이만 퇴근할까. 호텔 사우나에 가서 땀이나 빼야겠다고 결정한 지원이 자리에서 막 일어났을 때였다. 삐 소리가 나더니 인터폰에 불이 들어왔다.

    “네.”

    [관장님, 제니스 컴퍼니의 보안실장이라는 분이 면담을 요청하셨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뜻밖의 용건에 지원의 눈이 조금 커졌다. 제니스 컴퍼니? 거긴 화장품 회사잖아. 그런 대기업에서 나를 왜…. 게다가 보안실장이라니. 마케팅 쪽이나 문화사업부라면 또 몰라도. 왠지 엄청 귀찮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제니스 직원을 문전박대할 수는 없다. 쯧, 오늘 진짜 일진이 왜 이따위지? 짜증스럽게 혀를 차던 지원이 탐탁지 않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곧이어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중후한 인상의 50대 남자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문을 열었다. 부드럽게 웃는 얼굴이었지만 빠르게 상대를 훑어 내리는 시선은 제법 날카로웠다. 자신이 감정을 당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지원은 대번에 기분이 나빠졌다. 당연지사 자리를 권하는 손길은 그리 친절하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관장님. 저는 제니스 컴퍼니의 보안실장 권현호입니다. 약속도 없이 들이닥쳐서 정말 죄송합니다.”

    “차지원입니다. 그런데 제니스의 보안실장님께서 대체 무슨 일로….”

    “네, 피차 한가한 처지는 아니니 거두절미하고 용건을 말씀드리죠. 관장님, 혹시 박재권 씨를 아십니까?”

    박재권? 잠시 기억을 더듬던 지원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아, 이름은 모르실 수도 있겠군요.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드려야겠네요. 그럼 오늘 09시 37분에 관장님이 직접 중천으로 보내신 20대 중반의 남성 망자는 기억하십니까? 생전에 이곳 직원과 연인 사이였다고 하고, 강제 에스코트되기 직전에 관장님과 눈이 마주쳤다던데요.”

    …뭐? 순간 말문이 턱 막힌 지원이 미처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상대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더욱 괴이한 얘기를 줄줄 늘어놓았다. 생소한 단어가 다수 등장했지만, 내용이 대충 이해되는 것이 더 어처구니없었다.

    “찾아보니 비공인 에스코트 사례 중에 관장님의 행적으로 추정되는 사건이 몇 건 더 있더군요. 22년 전 속초를 시작으로 뉴욕과 런던에서 각 1건씩, 그리고 2년 전에도 자택 인근에서 40대 여성 망자를 중천으로 보내신 적이 있죠. 맞습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지원이 눈썹을 살짝 치켜떴다. 일단 내가 귀신을 없앴던 시기와 얼추 들어맞는 것 같긴 한데…. ‘중천’이라는 게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였어? 아니, 아니. 지금 그런 것보다도…. 제니스의 보안실장이 어째서 이런 박수무당 같은 소리를 해? 게다가 자택 인근이라니. 내 자택을 당신들이 어떻게 아는데? 허락도 없이 남의 뒷조사를 해놓고 이 당당함은 뭐지? 불시의 습격에 당황했던 마음이 조금 진정되자, 불쾌감이 마구 치솟았다.

    “그게 무슨 문제가 됩니까?”

    냉랭한 얼굴을 한 지원의 뾰족한 반문에도 보안실장은 처음과 같은 인자한 표정을 그대로 유지했다. 이런 반응에 이골이 난 사람의 노련함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미소였다.

    “물론 모르시는 게 당연하지만…. 현대는 인권이 굉장히 강조되는 시대라, 반드시 즉결 심판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모든 망자에게 원칙을 고지한 후 최대한 비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중천으로 안내하게 되어 있습니다. 절차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으면 아무래도 반발이 일어날 소지가 많아서요.”

    “반발…. 망자가 말입니까?”

    “네.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물리적인 상해를 입히기도 하고, 도주하기도 하죠. 아시다시피 사회가 대단히 복잡해지는 바람에 작정하고 숨어버리면 찾기가 쉽지 않거든요. 아침에 보셨던 박재권 씨도 흑화한 정황이 포착되어 가이드들이 신경 써서 찾고 있던 망자였습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만, 검거에 도움을 주신 점은 깊이 감사드립니다.”

    “가이드라면….”

    “인계에서 망자를 중천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직군을 이르는 말입니다. 동양 문화권에서는 저승사자라는 명칭을 주로 썼고 서양에서는 그림 리퍼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이제는 보다 용이한 소통을 위해 가이드로 통칭합니다. 글로벌 사회니까요.”

    보안실장의 산뜻한 설명에 머리가 아파진 지원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러니까…. 현대 사회에서는 귀신의 인권까지도 존중하면서 절차에 따라서 처리해야 하는데, 내가 그걸 무시하고 야매로 저승사자 노릇을 했다 이거지. 그게 이렇게 개인의 신상을 탈탈 털고 득달같이 쫓아올 만큼 큰 문제라는 거고.

    “그래서 저를 찾아오신 목적이 정확하게 뭡니까.

    “번거로우시겠지만 잠깐 중천으로 함께 가시죠. 대표님이 보자고 하십니다.”

    “대표님이요?”

    “네, 중천의 주인이시자 제니스 컴퍼니의 대표이시죠.”

    “제가 왜 그쪽 대표님의 지시에 따라야 합니까? 볼일이 있으면 직접 오시면 될 것을.”

    줄곧 웃는 낯이던 보안실장이 지원의 까칠한 대꾸에 처음으로 입꼬리를 조금 내렸다.

    “대표님은 인계의 모든 존재를 심판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진심으로 선의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여기에서 대표님을 맞이하게 되는 것보다는 제 발로 움직이시는 편이 여러모로 나을 겁니다.”

    부드럽게 굴러가던 육중한 세단이 강남 한복판의 거대한 빌딩 앞에 멈췄다. 영 꺼림칙한 얼굴로 차에서 내린 지원은 삐딱하게 고개를 들어 올려 감각적으로 잘 지어진 건물 외관을 훑어보았다. 평소에는 별생각 없이 지나쳤던 곳인데, 코앞에 서니 비로소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운 좋게 친환경 시류를 잘 타서 급성장한 회사인 줄로만 알았는데, 실상은 이런 기막힌 일을 하는 곳이었다니….

    저승사자 운운하는 소리를 들어서인지 막연히 고전적인 분위기일 거라고 예상했지만, 의외로 건물 내부의 시스템은 대단히 현대적이었다. 일차적으로 눈매가 매서운 보안 요원의 감시하에 소지품의 윤곽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검색대를 지나야 했고, 안면 인식을 통해 철저한 신원 확인을 마친 후에야 엘리베이터 앞까지 갈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도 지문을 찍어야 문이 열렸고, 홍채로 다시 한번 본인임을 인증할 때까지 신경을 긁는 경고음이 계속 울렸다.

    [49층. 올라갑니다.]

    청아하게 울려 퍼지는 기계음을 들으며 지원은 반사적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나라님을 뵈러 가는 것도 아니고, 보안이 이렇게까지 철저할 일이야? 이거 잘못하면 여기서 죽어 나가도 아무도 모르겠는데? 여기에 온다고 누구한테 말이라도 하고 올걸 그랬나. 가만. 산 사람이 중천에 갔다가…, 살아서 돌아올 수도 있는 거야?

    때늦은 후회와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기민하게 지원의 안색을 살핀 보안실장이 안심하라는 듯 웃어 보였지만, 협박을 당한 지 채 30분도 지나지 않은 터라 그다지 신용할 수는 없었다.

    “중천이 49층에 있습니까?”

    “아닙니다. 이 건물은 지상 48층짜리입니다. 중천은 인계와는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곳이고, 이건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통로 중 하나죠. 망자들이 이용하는 입구를 함께 쓸 수는 없으니까요. 그쪽은 출구의 기능이 없어서….”

    48층짜리 건물의 49층…. 그래, 이젠 뭘 들어도 그다지 놀랍지도 않네. 출구의 기능이 없는 문이라는 건 좀 섬뜩하지만.

    “참고로 중천과 연결된 출입구는 지구상에 총 200여 개가 있습니다. 정식 직원이 되면 어떤 문이든 이용이 가능하지만, 중천에서 인계로 되돌아갈 땐 반드시 들어온 문을 통해서만 나가야 합니다. 출입을 허가받지 않은 자가 함부로 드나들거나 망자가 탈주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규칙이죠.”

    “중천을 통해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는 없다는 얘기군요.”

    “네. 행여 출입구를 혼동하면 다른 지역이 아니라, 다른 차원으로 가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육체가 온전히 보존된다는 보장은 없고요. 자, 이제 내리십시오.”

    살벌한 시스템이네. 지원은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표정 관리는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어지간하면 호들갑을 떨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눈앞에 펼쳐진 경이로운 광경을 보고도 평정을 유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면적부터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사이즈였다. 층고는 육안으로 가늠이 어려울 정도로 높았고, 한쪽 벽의 길이가 족히 수 km는 될 것 같았다. 일반적인 빌딩 한 층에 들어가는 규모가 아니었다. 다른 차원이라는 말이 그제야 실감이 났다.

    “굉장히 넓군요.”

    “그런가요? 예전에는 정말 넓다고 생각했었는데, 요즘은 사망자 수가 너무 많아져서 그렇게 공간이 넉넉한 줄은 모르겠네요. 1시간에 최소 6천 명 이상이 올라오니까요. 제니스의 직원만 해도 2천 명이 넘고요.”

    보안실장의 말대로 거울처럼 반질반질한 바닥 곳곳에서는 다양한 인종의 영혼들이 쉴 새 없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러면 친절한 미소를 지은 안내원들이 신속하게 다가가 망자가 구사하는 언어를 확인한 후, 좌우 벽면을 따라 죽 늘어서 있는 수백 개의 책상 중 하나의 앞으로 데려다주었다. 흡사 관공서의 민원 창구 같은 느낌이었는데, 대부분의 망자들은 각각 안내받은 책상 앞에 질서정연하게 줄을 섰다.

    “저 책상 앞에선 뭘 하는 겁니까?”

    “망자의 향후 행선지를 결정합니다. 책상 위에 저울이 보이시죠? 망자가 그 앞에 서면 생전의 공과에 따라 기울기가 달라지는데, 망자가 보는 방향 기준으로 왼쪽으로 기울면 인계에 환생하게 되고, 오른쪽으로 기울면 명계로 가게 됩니다.”

    “평행을 이루면요?”

    “그런 경우는 거의 없지만, 간혹 완벽하게 수평이 되는 경우에는 중천주이신 대표님이 최종 판단을 내리십니다.”

    “저렇게 어린아이가 지옥에 가기도 합니까?”

    혼자서는 걷지 못하는 갓난아기가 직원의 품에 안겨 어딘가로 향하는 걸 본 지원이 눈살을 찌푸리자, 꽤나 안타까운 눈빛을 한 보안실장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10세 미만의 아동은 판정을 거치지 않고 즉각 환생지문으로 인도됩니다. 어린아이들이 사후에 명계에서 죗값을 치를 정도로 악행을 저지르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혹여 죄를 짓더라도 그 나이까지는 양육자의 책임으로 보는 거죠.”

    “환생지문이요?”

    “저기 왼쪽에 있는 문이 환생지문입니다. 오른쪽은 명계수문이고요.”

    보안실장의 손짓에 따라 시선을 돌리자 멀리 똑같이 생긴 커다란 문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양쪽의 분위기는 확연히 달랐다. 왼쪽 문 너머에는 밝고 따뜻한 빛이 가득했지만, 오른쪽 문 너머는 음산할 정도로 어둑했다. 오른쪽 문 앞에 선 이들은 대부분 겁에 질려 있었고, 울거나 소리를 지르는 이들도 많았다.

    명계수문, 지옥으로 향하는 문이라…. 실물로 보니까 이거 진짜 위압감이 장난 아닌데? 살짝 질린 얼굴을 한 지원이 소름이 돋은 팔을 가만히 문지르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웅성웅성 소란이 일더니 천박한 욕설을 포함한 사나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리는 쪽을 쳐다보니 풍채가 좋은 중년 남자 하나가 벌게진 얼굴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런 게 어딨어! 다시 재! 다른 저울로 다시 재라고! 내가 얼마나 착하게 살았는데, 오른쪽으로 이만큼이나 기우는 게 말이 돼?”

    “망자분. 원하시면 다른 저울로 다시 재드릴 테니까 진정하세요. 다른 분들이 불안해하시잖아요.”

    상냥한 얼굴을 한 판정원이 좋은 말로 달래자 기고만장해진 남자가 더욱 거들먹거리며 큰소리를 쳤다.

    “그러니까 애초에 누가 이런 불량품을 갖다 놓으래, 어? 처음부터 잘했으면 될 거 아니야! 왜 바쁜 사람을 번거롭게 만들어!”

    생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적나라하게 짐작이 가는 태도였다. 개 버릇 남 못 준다더니, 살아서 진상은 죽어서도 진상이구나. 다른 망자들의 양해를 얻어 즉시 옆에 있는 책상 앞으로 옮겨진 남자는 잠시 진정하는 듯했다. 그러나 두 번째에도 똑같은 판정이 나오자 곧 저울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며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거 사기꾼들 아냐! 너희가 뭔데 나를 심판해!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아무리 죽었어도 그렇지, 감히 나를 이딴 식으로 대접해? 너 이름이 뭐야?”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시커먼 정장을 입은 건장한 보안 요원들이 몰려와 남자를 에워쌌고, 그의 발광은 더욱 극심해졌다.

    “뭐야! 이것들 순 깡패 집단이잖아! 이러다 사람 치겠다? 책임자 나오라고 해! 나는 여기서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이니까 당장 책임자 나오라고….”

    급기야 바닥에 드러누운 남자가 목에 핏대를 세운 채 빽빽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 불현듯 웅 소리가 나며 중천 전체에 미약한 진동이 울렸다. 파동의 근원지는 중앙에 있는 커다란 샘이었다. 얼음처럼 미동도 없이 매끈하던 수면에 한순간 물결이 크게 일렁이더니, 긴 머리를 가지런히 묶은 단정한 정장 차림의 젊은 여성 한 명이 물살을 가르며 무표정하게 걸어 나왔다.

    “저분이 중천주이신 주가온 대표님이십니다.”

    보안실장의 귀띔이 아니라도 충분히 정체를 짐작할 수 있는 등장이었다. 가온이 나타나자마자 중천에 있는 모든 직원들이 일제히 손을 멈추고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얼핏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이었지만, 그녀의 정체를 모르는 망자들조차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을 정도로 압도적인 존재감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어린데? 대기업 대표라길래 최소한 50대는 되었을 줄 알았는데. 요즘 제니스 컴퍼니가 해외에서도 잘 나간다더니 완전히 명품으로 도배를 하셨고. 가만히 가온의 차림새를 살펴보던 지원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야, Musa by Marini. 뒤축에 주름진 것 좀 봐라. 300만원도 넘는 구두를 고무신처럼 막 신으시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주위를 한 바퀴 크게 휘둘러보던 가온이 난동을 부리던 남자를 발견하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남자를 제지하기 위해 다가왔던 보안 요원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남자가 엉거주춤 일어나 불안스레 눈알을 굴리고 있는데, 남자의 앞에 멈춰 선 가온이 낮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식을 때리는 아비였구나.”

    “뭐, 뭐야. 새, 새파랗게 어린 게 어디서 건방지게 반말지거리를….”

    크게 당황했으면서도 여전히 큰소리를 치는 남자를, 가온은 그저 무감하게 바라보았다. 커다란 눈동자에 설핏 경멸의 눈빛이 스쳐 가는가 싶었지만, 워낙 순식간이라 확실하진 않았다.

    “잔악하게 발길질로 거둔 목숨도 여럿이고.”

    “그, 그게 뭐! 개새끼 몇 마리 때려죽인 걸로 존엄한 인간을 지옥에 보낸단 말이야?!”

    “존엄…. 짐승도 반려를 맞이할 땐 열과 성을 다해 구애하거늘, 비열하게 겁탈하여 처를 맞이하였으니 너는 짐승만도 못한 자다. 심지어 그렇게 억지로 곁에 둔 처에게 신의를 지키지도 않았지. 평생 가슴앓이를 하던 네 처가 결국 속병이 들어 죽었으니, 그 역시 네 죄다.”

    세상에, 주제에 바람까지 피웠어? 어쩜 뻔뻔하기도 하지. 주변에 있던 망자들이 일제히 비난의 시선을 던졌지만, 그럼에도 남자는 쉽게 수긍하지 않았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즈, 증명할 수 있어?”

    “어리석은 아이야, 이쯤에서 조용히 수긍하는 편이 네게 유리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너의 행태는 차곡차곡 과오에 포함되고 있으니. 네가 명계에서 받아야 할 벌이 지금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그나마 죗값을 치를 수 있는 기회조차도 네겐 한 번밖에 남지 않았으니 가벼이 여기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뭐라고?”

    형세가 점점 불리해지고 있다는 걸 인지한 남자가 교활한 눈을 번뜩이더니 가장 가까이에 있는 작은 나무문을 향해 잽싸게 달렸다. 그러나 필사의 도주는 고작 열 걸음도 되기 전에 허무하게 끝났다. 부지불식간에 나타난 투명한 검이 소리도 없이 제 목에 드리워진 것을 보고 완전히 겁에 질린 남자는 비명 한마디 내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굳었다. 톡톡 튀는 물방울들이 보석처럼 반짝이는 아름다운 검이었지만, 스치기만 해도 토막이 날 거란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마지막 기회의 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중천의 질서를 어지럽힌다면 더는 지체하지 않고 베겠다. 내 검에 베여 상흔이 생긴다면 염마왕의 심판 없이 바로 무저갱에 처박히게 될 것이다. 그곳에 한번 발을 들이면 다시는 나올 수 없지, 영원히.”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걸 깨달은 남자의 얼굴에 짙은 절망이 내려앉은 순간, 가온이 서늘한 목소리로 최후통첩을 내렸다.

    “원대로 해주마. 어찌하겠느냐.”

    남자는 결국 고개를 떨궜고, 한달음에 다가온 보안 요원들이 더 이상은 반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남자를 질질 끌고 가더니 오른쪽 문 너머로 거의 던지다시피 집어넣었다. 때늦은 비명이 아스라이 들려왔고, 잠시 멈춘 듯했던 중천의 시간은 다시금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대표님, 말씀드렸던 갤러리 화담의 차지원 관장입니다.”

    보안실장의 소개에 살짝 고개를 돌린 가온이 지원의 눈을 가만히 응시하더니, 불과 3초도 지나기 전에 바로 시선을 거뒀다. 그 일말의 관심도 없는 태도에, 지원은 이상하게 기분이 상했다.

    “권 실장.”

    “네, 대표님.”

    “돌려보내게.”

    제 할 말을 마친 가온이 미련 없이 돌아서자, 잠시 황당한 얼굴을 하던 지원이 입매를 조금 비틀었다. 뭐야. 사람을 강제로 끌고 올 땐 언제고, 인사 한마디를 안 하고 그냥 가시네? 이렇게 쉽게 돌려보낼 거 그 살벌한 협박은 다 뭐였는데?

    “잠깐만요.”

    사람을 불렀으면 직접 얼굴을 보고 말씀하셔야지. 보안실장의 다급한 만류를 뿌리친 지원이 가온의 앞을 막아섰다. 아무런 감정을 담지 않은 말간 눈동자를 보고 있으려니,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이한 호승지심이 끓어올랐다. 그저 투지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복잡한 감정이었지만, 그 순간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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