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70/71)

“……칼릭스.”

“당신의 과거와 지금, 그리고 미래까지도 사랑해.”

절절한 고백에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이 사랑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내게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기회를 주겠어?”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심장이 떨릴 만큼 감미로웠다. 애정이 담뿍 담긴 시선에 몸이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아셀라가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칼릭스가 세상 전부를 가진 사람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순간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유려하게 휘어지는 시원한 눈매와 부드럽게 끌어 올려진 입술이 짜 맞춘 것처럼 잘 어울렸다. 진정 행복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 가슴이 쿵쿵거렸다.

‘나 때문이야.’

제 사랑이 그를 이토록 행복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기뻤다.

아셀라가 조용히 칼릭스의 품에 파고들었다. 크고 넉넉해서 저 하나쯤은 완벽하게 안고도 남을 포근한 품이었다. 몸을 데우는 온기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어떻게 이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셀라는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점차 강하게 뛰는 칼릭스의 심장 고동이 들렸다.

“사랑해.”

어딘가에서 꽃내음을 머금은 바람이 불어와 그의 고백을 실어 날랐다. 꿈을 꾸는 것처럼 행복했다.

“사랑해요.”

칼릭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아셀라는 눈을 감았다.

콧대가 스치고 숨결이 섞일 정도로 가까워지는 듯싶더니 이내 부드럽게 입술이 맞닿았다.

그의 팔이 그녀의 몸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세상에 둘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입술을 겹치고 온기를 나누었다.

서로를 향한 사랑만큼이나 달콤한 입맞춤이었다.

도주하는 대공비 146화

에필로그

하르메니아 제국 역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한창 건국제 연회가 진행되던 와중 중무장한 기사들이 난입한 것이다.

연회를 즐기던 황족과 귀족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잠시 뒤 기사들 사이로 황후와 베로니카 황녀가 등장하자, 모두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다래졌다.

“황제께서 승하하셨다.”

베로니카가 전한 말은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이후에 이어진 폭로는 더 놀라운 것이었다.

황제가 흑마법사였고, 그가 마족의 힘을 빌려 행했던 사악한 행각이 알려졌다.

황제의 주술에 걸렸다가 살아남은 다섯 예언 신관이 기꺼이 신전과 자신의 명예를 걸고 증언했다.

무엇보다 아셀라의 마법 영상구에 명백한 증거가 남아 있었다. 그녀는 황녀의 말을 믿지 못하는 귀족들 앞에서 영상구를 작동시켰다.

장면이 끝났을 때쯤엔 연회장에 적막이 흘렀다. 누구 하나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황제가 금지된 술법에 손을 대고 악랄한 짓을 해온 것도, 마족이 황제의 몸을 빼앗아 이 땅에 현신하려 했다는 사실도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의 말문을 잃게 만든 건, 완벽히 이능을 각성해 낸 샤르투스의 딸이었다.

제국의 역사서 첫 번째 장은 항상 까마득한 전설로 시작됐다.

대 하르메니아 제국이 여신의 은총을 받아 건국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의 중심에 초대 샤르투스 후작이 있었다.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그녀의 찬란한 이능은 기록 속에서 생생히 살아 숨 쉬었다. 긴 시간을 넘어 아직도 회자될 만큼.

전설로만 여겼던 위대한 능력을, 영상구를 통해서나마 본 셈이었다.

“전하, 비전하.”

황제의 궁에서 막 수색을 마치고 돌아온 라이젠이 그들 앞에 무언가를 내놓았다. 황제의 인장 반지였다.

반지를 받아 든 아셀라가 베로니카를 향해 몸을 돌렸다.

“황녀, 손을 이리 주세요.”

그러고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베로니카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일련의 동작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누구도 저지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셀라의 담백한 음성이 연회장 홀 에 울려퍼졌다.

“이 일을 밝히고 해결하는 데 가장 공이 큰 황족, 베로니카 황녀를 황제로 추대하고자 합니다.”

장내가 일순 술렁였다. 아셀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황녀께서는 하르메니아 황가의 직계 적통 황족이시며 성년이 지나셨습니다. 이번 일로 자질과 능력 또한 증명해 보이셨지요.”

“…….”

“혹여 이의가 있다면 이 자리에서 가문의 이름을 걸고 말씀하세요. 기꺼이 경청할 터이니.”

지켜보던 이들은 저마다 마른침을 삼키며 눈알을 굴려댔다.

정글이나 마찬가지인 귀족 사회에선 눈치가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대공비는 초대 샤르투스에 버금가는 강력한 이능을 각성했고, 그녀 뒤엔 막강한 사병을 거느린 대공이 있었다. 이미 황궁은 그들의 손에 완벽하게 점거되었다.

어디 그뿐인가.

“신전에서는 새 황제의 탄생을 기쁜 마음으로 축복할 것입니다.”

성녀를 비롯하여,

“앞으로도 마탑과 제국의 신뢰는 굳건할 것입니다.”

마탑주까지도 그들의 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감히 나서서 반발할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귀족들은 몸을 사려야 할 때임을 직감했다. 베로니카가 천대받던 시절, 자신들이 해왔던 짓을 기억한 탓이었다.

황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피로 얼룩졌던 제국의 황위 계승사를 떠올리며 납작 엎드렸다.

여기서 제 목숨이 소중하지 않은 자는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베로니카 황녀가 하르메니아 제국의 58대 황제가 되었다.

* * *

하룻밤 사이 제위가 바뀌었다.

지켜보던 이들은 처음엔 새 황제가 대공가의 꼭두각시가 되진 않을지 걱정스러워했다.

그러나 베로니카는 군주로서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그러한 우려를 단숨에 불식시켰다.

그녀는 즉위식까지 미뤄가며 일에 매진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서둘렀던 일은 과거의 청산이었다.

전 황제 페르난데의 손에 희생당한 이들을 찾아 보상하고, 억울하게 모함받아 멸문된 가문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다.

선황후 레티샤의 결혼 전 가문인 마르테 공작가를 비롯한 많은 가문이 복권되었다.

샤르투스 후작가도 그중 하나였다.

수많은 고위 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작위 복권식이 열렸다.

아셀라는 발밑에 깔린 붉은 융단을 천천히 지르밟으며 황제 앞에 섰다.

“……이에 하르메니아의 황제, 나 베로니카 라온 하르메니아의 이름으로 샤르투스 가문을 복권한다. 몰수되었던 재산은 즉시 환원될 것이며…….”

‘어머니, 보고 계세요? 가문을 되찾았어요. 두 분께서 그토록 사랑하셨던 샤르투스의 이름을 드디어 되돌려 받았어요.’

아셀라는 뜨거워지는 눈가에 힘을 주었다. 기쁜 날이었다. 오랜 바람이 이루어진 지금, 눈물짓고 싶지 않았다.

“또한 샤르투스의 적장녀이자 후계자인 아셀라 베네비토에게 후작위를 하사하는 바이다.”

메리엘이 록트린 가문으로 입적하여 후계자가 되었기에 작위가 없는 샤르투스의 혈족은 아셀라가 유일했다.

이로써 그녀는 작위를 가진 최초의 대공비가 되었다.

“샤르투스 후작.”

“예, 폐하.”

아셀라가 베로니카에게 예를 갖추었다. 새 황제는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는 진심을 담아 말을 건넸다.

“하르메니아 황가가 그대의 가문과 혈족에게 저지른 죄를 사과하네.”

아셀라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기꺼이 황제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되찾음의 시간이 끝나고, 비로소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다.

* * *

히이힝!

높은 울음소리와 함께 말이 멈추어 섰다. 먼저 말에서 뛰어내린 칼릭스가 아셀라를 조심스럽게 안아 내려주었다.

무사히 땅에 발을 디딘 그녀가 눈앞의 저택을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샤르투스 후작저였다.

필립이 후작 대행으로 있었던 당시 지저분하리만치 덕지덕지 꾸며졌던 건물의 외관은 원래의 정갈한 모습으로 돌아와 중후한 고택의 아름다움을 드러냈다.

칼릭스가 다정한 부름과 함께 손을 내밀었다.

“아셀라, 들어갈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을 발견한 기사들이 각 잡힌 인사와 함께 문을 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깍지껴 잡고는 저택의 입구를 지나 안쪽으로 발을 옮겼다. 고른 잔디가 깔린 땅을 밟는 감촉이 좋아, 아셀라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올린 아셀라가 걸음을 멈추었다.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더니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저택 앞에 사람들이 서 있었다.

‘이들은…….’

희미하지만 기억에 남아 있었다. 샤르투스의 옛 가신, 기사, 사용인들이었다. 이들 모두는 필립이 샤르투스를 장악할 때 그에게 대항했다가 쫓겨났었다.

나이 지긋한 사내 하나가 그녀의 앞까지 걸어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셀라는 그의 얼굴을 기억했다. 마지막까지 그녀와 메리엘을 보호하려다 작위를 강등당하고 유배까지 당했었다.

“펜들턴 경.”

턱수염이 덥수룩한 사내가 감격한 듯 눈물을 글썽였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으려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깍듯이 인사했다.

“신, 에드먼드 펜들턴. 후작 각하를 뵈옵니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이들이 함께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추었다.

아셀라가 떨리는 눈동자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다들 여기까지…….”

“각하의 은혜로 가문이 복권되었으니 당연히 돌아와야지요.”

조금은 투박하지만 진심 어린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복권을 축하드립니다, 각하!”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오실 거라 믿었습니다.”

“이능을 각성하셨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이번에 큰 공을 세우셨다고요.”

아셀라는 목이 메었다. 코가 시큰거리며 눈가에 물기가 고여 들었다. 검지 마디로 얼른 눈물을 닦아내려는데 칼릭스의 손이 더 빨랐다.

“내 아내는 마음이 너무 약해서 큰일이야.”

“기뻐서 그런 거예요.”

아셀라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항변했다. 칼릭스가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눈가에 어린 물기를 닦아내며 말했다.

“당신이 온다는 소식에 이들이 저택을 꾸몄다는군.”

“그래요?”

아셀라의 눈이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시선을 돌리자 샤르투스의 가솔들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묘하게 기대감이 어린 눈초리였다. 그녀는 더 의아해지고 말았다.

“안에 들어가 볼 텐가?”

“그럼요.”

그러나 저택의 문이 열리자마자, 아셀라는 멈칫하고 말았다.

내부가 바뀌어 있었다. 그녀가 칼릭스와 결혼하며 샤르투스를 떠나던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이건…….”

아셀라의 얼굴에 그리움이 차올랐다.

“선대 후작 각하께서 계실 때의 기억을 떠올려 꾸며 보았습니다. 최대한 똑같이 복원한다고 했는데…….”

펜들턴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셀라가 찬찬히 안을 훑었다.

천장에 달린 고풍스러운 샹들리에, 대대로 내려와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가구, 정갈하게 놓인 장식품까지.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다.

“혹시 저희가 너무 주제넘었다면…….”

“아니요.”

아셀라가 그들을 돌아보며 생긋 웃었다.

“어렸을 적 생각이 나요. 정말…… 고마워요.”

지켜보던 이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아셀라의 발걸음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후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곳은 칼릭스와 사용인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공간이기도 했다.

문 앞에서 칼릭스가 멈추어 섰다.

“여기서 기다리지.”

“같이 들어가시지 않고요.”

고개를 저은 그가 다정한 미소를 건넸다.

“굳이 빨리 나오지 않아도 좋아. 머무르고 싶은 만큼 실컷 머무르다 나와도 돼.”

아셀라는 눈을 끔벅거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누군가가 재빨리 방문을 열어젖혔다.

마호가니 문이 닫히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아셀라가 방 안에 홀로 남았다.

그녀는 한동안 꿈쩍도 하지 못했다.

“……똑같아.”

과거 어머니의 방을 그대로 재현해놓은 것만 같았다.

그녀는 하나하나 기억을 더듬으며 방을 걷다가, 볕이 잘 드는 창가의 책상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가느다란 손가락 끝이 책상 표면을 조심스레 쓸었다.

‘어머니의 책상.’

필립이 아델의 흔적을 전부 지우고자 저택의 집기며 가구를 전부 내다 버리라 지시했을 때, 가신들이 몰래 빼돌려 보관했던 것이었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 어두운 창고에 놓여 있던 물건이, 긴 세월이 지난 끝에 주인에게로 돌아왔다.

아셀라의 시선이 이번에는 맞은편 창가에 놓인 테이블과 의자로 향했다.

‘그때 그대로네.’

추억을 떠올리며 의자에 앉았다. 어렸을 땐 테이블이 굉장히 넓다고 생각했는데, 다 자란 지금은 아담했다.

종종 집무실에 놀러 올 때면 어머니가 일하는 동안 여기서 조용히 기다렸었다.

방해가 되지 않게 얌전히 달콤한 간식을 먹고 있노라면, 어머니는 일하다가도 다정히 말을 건네주곤 했다.

‘그게 좋아서 바쁘신 줄 알면서도 매일같이 찾아왔었지.’

철없을 때를 떠올리자 웃음이 났다. 피식거리며 창가로 고개를 돌리는데 무언가가 그녀의 눈에 비쳤다.

“세상에, 그네까지 만들어놓았네.”

창문 너머로 아름드리나무에 걸린 자그마한 그네가 보였다.

어쩌다 함께 어머니와 산책할 때면, 어린 그녀는 그네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생선 앞 고양이가 따로 없었는데.’

손을 잡아당기며 조르면 못 이기는 척 그네를 밀어주시곤 했다.

“……어머니.”

아셀라가 가만히 읊조렸다. 그리운 목소리가 환청처럼 섞여들었다.

‘아셀라, 너는 장차 샤르투스를 이끌어갈 아이란다.’

‘네가 자랑스럽구나. 넌 분명 훌륭한 가주가 될 거야.’

이능을 각성하지 못한 그녀가 주눅 들 때면 어머니는 늘 따뜻하게 용기를 북돋아주곤 했다.

아셀라가 추억을 떠올리며 입가에 고운 미소를 머금었다.

“어머니의 말씀이 옳았어요.”

아델의 믿음은 이루어졌다. 그녀의 두 딸은 무사히 살아남았고, 행복을 찾았으며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되었다.

“지켜보고 계신 거죠?”

어쩌면 제 모습을 내려다보며 흐뭇해할는지도 몰랐다.

“감사해요.”

먼 훗날 다시 만나게 될 때까지, 어머니께서 선물해 주신 이 삶을 최선을 다해 살게요.

아셀라의 얼굴에 티 없이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도주하는 대공비 147화

황제의 집무실엔 훈기가 돌았다.

한창 서류를 내려다보던 베로니카가 문득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황위에 오른 뒤, 어머니인 레티샤는 선황후 자리에서 물러나길 원했다. 이례적으로 빠른 승인이 이루어졌다.

그렇게 레티샤는 결혼 전 가문인 마르테 공작가의 작위를 받고 공작이 되었다.

죽은 황제와의 지긋지긋했던 악연의 끝이었다.

‘신전에서는 원칙적으로 혼인 무효까지도 가능하다던데요.’

‘그랬다간 네 정통성이 위협받으니까.’

‘고작 그런 이유로 절 황좌에서 끌어내릴 순 없어요.’

‘알아. 하지만 네게 어떠한 흠도 만들어주고 싶지 않구나.’

마음 같아선 부모님의 재혼까지도 추진하고 싶었으나 이는 던컨이 거절했다.

‘제 존재가 드러나선 안 됩니다. 폐하께 누가 될 뿐입니다.’

‘아버지.’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래서 대신 여행을 다녀오시라 했다. 이십여 년간 황궁에 갇혀 살아야 했던 어머니를 위한 배려였다. 마찬가지로 자유의 몸이 된 던컨이 그녀의 호위를 맡게 되었다.

‘지금쯤이면 여행지에 도착하셨겠군.’

젊은 연인처럼 들떠 있던 부모님을 떠올린 베로니카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그때, 시종이 노크와 함께 누군가의 방문을 알렸다. 대공 부부였다.

“들어오라 하라.”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베로니카는 조용히 웃음을 삼켰다. 자그마한 아내의 손을 꼭 잡고 들어오는 대공의 모습은 생소하면서도 보기 좋았다.

칼릭스가 아셀라와 함께 자리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세 사람 앞에 차가 놓였다.

베로니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래, 무슨 일인가?”

“이틀 후에 수도를 떠날 겁니다.”

“벌써?”

“공국을 너무 오래 비웠습니다.”

“보름밖에 안 있었으면서 무슨.”

베로니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즉위식도 몇 달 후로 미뤘잖습니까. 내 아내가 아니었다면 굳이 번거롭게 찾아와서 말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칼릭스.”

노골적인 볼멘소리였다. 아셀라가 얼른 그를 말리며 팔을 쿡 찔렀다. 칼릭스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그 틈을 타서 그녀가 얼른 베로니카에게 설명했다.

“실은 조만간 칼릭스와 여행을 가기로 했거든요.”

“여행?”

“예전부터 약속했던 건데,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여러 사정 때문에 미뤄왔어요. 한여름이 오기 전에 잠깐이라도 다녀오면 좋을 것 같아서요.”

그럼 그렇지, 베로니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둘이 여행을 가려고 했으면서 시치미를 뚝 뗀 거였다.

칼릭스가 슬그머니 황제의 시선을 피했다.

“……어디까지나 사생활입니다.”

“아, 물론 그러시겠지.”

심드렁하게 답한 베로니카가 이내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시선이 밖을 향했다. 늦봄의 향취가 물씬 느껴지는 정원은 각양각색의 꽃이 만개해 있었다.

“좋은 시기이긴 하네. 가만히 있어도 절로 마음이 들뜰 정도로.”

베로니카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쉬운걸. 제대로 보답도 해주지 못하고 떠나보내게 되어서 미안하기도 하고.”

그러자 부부가 시선을 주고받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듯한 모양새에 베로니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긴 한데, 말씀드려도 될까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해줘야지.”

“그게 뭐냐면…….”

아셀라의 이야기를 경청한 끝에, 황제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조사해 보고 그대의 말대로 결격사유가 있다면 조치하지.”

“감사합니다, 폐하.”

아셀라가 기쁘게 외쳤다. 서로를 마주 보며 웃는 부부를 향해, 베로니카가 덕담을 건넸다.

“즐거운 여행 되길 바라네.”

* * *

아직 앳된 티가 나는 기사들이 대공성 뒤뜰 공터에 옹기종기 모였다. 그들은 누군가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듣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어떻게 하긴! 내가 검을 이렇게 탁 뽑아서!”

“우오오오!”

지크가 허리춤에 찬 검을 꺼내며 한껏 무게를 잡았다. 잘 벼려진 검신을 햇빛에 비추며 강렬한 눈빛을 보내자, 그를 둘러싼 수습 기사들의 함성이 더 높아졌다.

“황제의 얼굴 앞에 정확히 겨누며 이렇게 말했지. 네 죄를…… 아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지크가 펄쩍 뛰었다. 머리가 댕댕 울렸다. 눈이 번쩍이다 못해 눈물이 쏙 나올 정도였다.

얼얼한 뒤통수를 부여잡으며 홱 몸을 돌리자 그의 친우가 한심한 눈빛을 보내며 들고 있던 삽을 바닥에 푹 내리꽂았다.

“라, 라이젠?”

라이젠은 지크에게 눈길을 주는 대신, 수습 기사들을 향해 입꼬리를 한껏 끌어 올려 미소를 지었다.

눈은 웃음기 하나 없이 서슬이 퍼런데 입술만 휘어지자, 일견 괴기스럽기까지 한 얼굴이 되었다.

기사들이 꼴깍 침을 삼켰다.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한가하게 잡담할 시간이 있는 걸 보니 훈련 강도가 영 시원찮았던 모양이야.”

“히익! 아닙니다!”

뼈있는 말에 담긴 의미는 섬뜩했다. 다들 후다닥 짐을 챙겨 도망치듯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지크가 당황하여 외쳤다.

“아니, 잠깐만, 나 아직 이야기 다 안 끝났…… 악! 그만 좀 때려! 내가 동네북이냐?”

“헛소리 작작하고, 그럴 시간 있으면 땅이나 파라.”

지크가 머리 위로 날아오는 삽을 재빨리 낚아챘다.

“땅을 왜 파?”

“저걸 묻을 거다.”

라이젠이 턱짓했다. 한쪽에 놓인 커다란 상자를 보고 지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과거 황제가 만들어 칼릭스에게 보냈던 일 년 치의 가루약이었다.

“저건 주군의 약이잖아?”

“이젠 필요 없으니까.”

“굳이 힘들게 묻어야 해? 그냥 태우면 될걸.”

“전하께서 묻으라고 명하셨다.”

라이젠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거짓말을 했다. 칼릭스의 명령은 정확히 ‘버려라’였지만, 굳이 그걸 지크에게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은제 케이스는 녹여서 은괴로 만들겠다 하셨으니 일일이 가루만 꺼내서 묻고, 케이스는 깨끗하게 씻어 말려두도록.”

지크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저 많은 걸 나 혼자 다 하란 말이야? 어느 세월에!”

“불만이면 전하께 가서 직접 말해.”

“으윽…….”

지크가 신음성을 흘렸다. 꼼짝없이 오늘 삽질을 해야 할 모양이었다.

“그러는 너는 뭐 하는데!”

“알다시피 일이 많아서.”

“웃기지 마. 요즘 한가했잖아!”

“필립 부자가 죽었어. 비전하께서 모르시게 처리해야지.”

마족이 소멸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둘의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졌다. 그러다 결국, 지난밤 숨을 거두었다.

지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런데 아침부터 두 분 전하께서 안 보이시던데, 어디 가셨어?”

라이젠은 잠깐 침묵했다.

지크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이젠은 재빨리 평소처럼 표정을 갈무리하고는 냉정하게 경고했다.

“늦장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아, 알겠어, 알겠다고!”

입이 잔뜩 튀어나온 지크가 삽을 잽싸게 땅으로 밀어 넣었다.

한편 그 시각, 아셀라와 칼릭스는 대공비의 묘지를 찾았다.

두 사람은 힐데의 무덤 앞에 섰다. 따뜻하게 내리쬐는 봄날의 햇살이 묘비를 비추었다.

칼릭스가 품에 안고 있던 상자의 덮개를 열자 아셀라가 조심스럽게 성배를 꺼내어 그에게 내밀었다.

“당신이 해요.”

“……내가?”

“아들이잖아요.”

칼릭스는 주저한 끝에 그녀에게서 성배를 받아 들었다. 그러곤 안에 담긴 심장을 잠시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칼릭스.’

아셀라는 남편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의 적안이 복잡한 심경을 담고 일렁이는 게 보였다.

칼릭스가 천천히 몸을 바닥으로 낮추었다.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는 평평한 직사각형의 석관에 조심스럽게 성배를 내려놓았다.

읊조리는 목소리가 주변을 나직이 울렸다.

“……편히 잠드십시오.”

짧은 말속에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아셀라는 목구멍이 따끔따끔해지는 걸 느끼며 가져온 리시안서스 꽃다발을 성배 옆에 나란히 놓았다.

그러곤 두 손을 모아 쥔 채 그들의 명복을 바라는 기도를 올렸다.

그때였다. 갑자기 목 아래쪽에서 이유 모를 반짝임이 느껴졌다.

‘선대공비 전하의 목걸이야!’

아셀라가 급히 목걸이를 바깥으로 꺼냈다.

중앙의 보석에서 빛이 나고 있었다. 성스러운 느낌의 하얀 기류가 보석 안에서 일렁이더니 급기야 바깥으로 연기처럼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달가닥거리는 소리에 시선을 돌리자 성배가 파르르 진동하는 게 보였다. 마치 보석의 기운에 반응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칼릭스, 목걸이 좀 풀어주실래요?”

그가 두말없이 여밈을 풀어주었다. 목걸이를 손에 쥔 아셀라가 한번 크게 심호흡했다.

그러고는 마치 정해져 있던 일을 행하는 사람처럼, 목걸이를 성배 안으로 떨어뜨렸다.

통, 무언가가 부딪히는 경쾌한 소리가 났다. 동시에 빛이 산란하듯 아름다운 기류가 성배를 완전히 뒤덮었다.

“아…….”

아셀라가 나직한 탄성을 터뜨렸다. 성배가 미세한 빛 조각으로 부서지고 있었다. 인간의 눈으로 겨우 식별할 수 있을 작은 조각이었다. 이를 기류가 남김없이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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